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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이다 1

2017.06.26 조회 1,907 추천 17


 내가 법이다 1권
 
 
 Prologue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안타를 치고 일루를 향해 달리던 강태산姜泰山이 아무 이유 없이 나자빠진 것은 St.Helena Elementary School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태산은 그 때가 처음이라고 기억하지만, 당시만 해도 태산과 그의 부모님은 ‘아이들이 놀다 보면 그럴수도 있지.’라며 별 일 아닌 일로 치부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즈음부터다.
 처음에는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먼저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팔에 이어서 온 몸에 기운이 없어졌다. 한창 성장기인 강태산이었고, 워낙 잔병 없이 건강하게 자라온 태산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넘어지면서 무릎에 많은 상처가 생겼지만, 밖에서 뛰어놀 나이인지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결국 그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엄마······ 나 학교 갈 수가 없을 거 같애.”
 아침에 눈을 뜨고도 일어날 기운이 없는 태산은 드러누운 채로 엄마에게 말하는 날이!
 그 때가 되어서야 태산의 엄마, 아빠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병명은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으로,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하는 병이다. 근육의 힘이 약해지고, 위축되며 결국 호흡부전으로 발병 후 5년 이내 사망하는 불치병이다.
 태산의 상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부모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기로 했다. 태산의 아버지는 한국인 최초로 나스닥NASDAQ에 상장된 바이오벤처 기업의 창업자였고, 그런 태산의 부모에게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태산의 부모는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미국은 무론 국내외의 모든 전문의에게 진단받는 것은 기본이요, 온갖 대체요법과 검증되지 않은 한국, 중국은 물론 인디언들의 민간요법까지 다 동원했다.
 하지만 잠깐 차도가 있을지언정, 한 번 발병한 루게릭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결국 태산의 부모는 종교의 힘을 빌릴 생각까지 했고, 그 와중에 사이비 종교집단에게 사기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 충격으로 서울에 있던 태산의 할아버지도 운명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 해가 또 흘렀고, 이제 태산은 혼자 힘으로는 머리도 못 가눌 지경이 되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포기를 할 즈음, 서울 세검정의 연암軟岩이라는 호를 쓰는 한의사가 말했다.
 “더 이상은 약으로 될 일이 아니외다.”
 기치료라는 믿을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깊은 산중에는 선무도禪武道나 불무도佛武道 같은 전통무예가 전해져 오지요.”
 그 때 태산의 부모는 꽤 오래 전 LA 어느 파티에서 만난 점성술사-한국식으로 하면 점쟁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세와 부모지연을 끊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태산의 부모는 목도 못 가누는 아이를 들춰 업고 연암이 소개해 준 절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지리산에 있다는 그 절을 찾아가면서, 태산의 부모는 세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에도 지리산 칠선계곡 같은 구중심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두 번째로는 찾아가는 절이 해인사도 아니고, 해인사의 말사末寺인 벽송사碧松寺도 아니라 다시 벽송사에 딸린 조그만, 전기도 안 들어오는 암자라는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곳이 주지승도 아닌 장발의 거사居士와 거사를 돕는 동자승 하나만 있는 암자라는 사실이다.
 승련암乘蓮庵의 주지라고 할 수 있는 길인吉寅거사는 환자를 앞에 두고 사주만 꼽아보고는 진맥도 안 하고 등을 돌리며 말했다.
 “사자즉생이요, 생자즉사라. 나무관세음보살~!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을 작정으로 달려들면 살 길이 보이는 법이지. 두고 가시게. 그리고 한 달 후에 오시게.”
 데리고 가려면 데리고 가고, 맡겨놓고 가려면 가라는 식이다.
 그 말만 믿고 태산의 부모는 속절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그냥 물도 아니라 소용돌이치는 소沼에 빠진 심정인지라 지푸라기라도 움켜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암자에 드러누운 태산이 ‘엄마,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메아리쳤지만, 부부는 두 눈 질끈 감고 발길을 돌렸다.
 
 한 달 후, 다시 지리산을 찾아온 태산의 부모를 소년은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했다. 그의 웃는 낯을 본 태산의 부모는 결국 눈물을 흘렸고······.
 다시 반 년 후, 지리산의 깊은 산골에 눈이 쌓일 때에는 태산은 암자 주변을 제 힘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승련암에는 길인거사와 태산 밖에 없었다. 동자승은 어디 갔냐는 질문에 길인거사는 날이 차고 길이 험해 겨울을 나는 동안만이라도 민지敏智-동자승-를 벽송사에 내려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가 태산의 나이,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었다.
 동자승인 민지마저도 피한避寒시켰는데, 그 어린 나이의 태산을 산 속에서 한겨울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태산의 부모는 날이 풀리면 다시 태산을 맡기겠다며 그를 데리고 내려갔지만, 불과 삼 주를 못 넘기고 암자를 찾았다. 멀쩡하게 제 발로 내려갔던 놈이 업혀서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길인거사는 말리지도 않았고.
 “나무관세음보살. 그러게 내가 말씀 드리지 않으셨소? 사사로운 연에 매달리다가 명을 끊는다고!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이제는 아예 길인거사는 산 밑에서 그들을 맞았다. 길이 험하니, 태산의 부모는 예서 돌아가라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태산의 부모는 아들을 도회지로 데려갈 엄두를 못 냈다.
 그나마, 몇 달에 한 번 번갈아 귀국을 하면서 태산을 만나러 갈 때마다 더욱 건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자 보람이 되어주었다.
 
 다시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Chapter01 100% 코튼 미제 팬티
 
 
 1
 
 
 “산아.”
 “예, 큰스님.”
 불붙은 지방紙榜이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강태산은 대답했다.
 “짐을 꾸려라.”
 “예?”
 “오늘 선대인先大人의 친구 분이 너를 데리러 올 게야. 그러니, 그 분 따라 하산해라.”
 “갑자기 하산이라니요, 큰스님.”
 “이제는 네가 더 이상 여기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그 말이다. 산을 올라왔으면 내려가야 할 줄도 알아야지! 맺은 것이 있으면 풀기도 해야 하고. 불가와의 인연도 여니까지니. 아쉬워 말거라. 인연이란 다아 그런 것이니라.”
 “······.”
 “왜? 너와 나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하느냐? 혹시 아냐, 언젠가 네 놈이 아파서 다시 나를 찾을 날도 있을지? 그럼 그 때 또 보면 되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알겠습니다, 큰스님.”
 “태산아아!”
 “예, 큰스님.”
 “너무 그렇게 기쁜 표정 짓지 말고!”
 “······.”
 
 ***
 
 “좀, 천천히! 천천히 가십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심대현沈臺鉉 변호사는 길안내를 맡고 있는 삭발승 민지의 승복을 붙잡았다.
 “그러게 그런 차림으로 지리산을 밟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산유곡인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제대로 등산복으로 갖춰 입었을 것이다.
 “그러게요. 내가 미쳤나 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변호사가 매우 중요한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등산복에 등산화 차림이라면 웃기는 일 아닌가!
 한숨을 내쉬면서 심 변호사는 자기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양복바지 가랑이는 흙 천지에, 윤이 반짝 거리던 정장화도 코가 까져서 허옇다. 들고 있는 서류가방도 도금된 쇠장식이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가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는 곳이 몇 년에 한 번, 그것도 한시적으로, 여기에 산림청 소속의 가이드 동반을 조건으로 개방하는 지리산 칠선계곡이었으니······.
 “아무렴요. 미치신 게 분명하지요.”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저 동자승이 딱 그 꼴이다. 말로는 다 왔어요, 다 왔어요 한 지가 벌써 두 시간이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심 변호사는 아직도 끝이 안 보이는 녹음을 바라보며 와이셔츠의 목 단추를 풀었다. 덕분에 갑갑한 목에 숨통을 터진 것 같았다.
 “이제 다 와 갑니다. 시주님.”
 또 그 소리다. 앞서 가던 삭발승 민지가 보자기로 싼 목함을 가슴에 품은 채로 웃는데, 그 표정이 지리산을 얕보지 말라고 비웃는 것 같다.
 이제 열일곱 정도 되었을까?
 ‘저게 무슨 동자승이야!’
 -태산이는 승련암의 길인거사를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야. 길안내는 벽송사의 민지라는 동자승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고.
 친구인 데이비드 강, 한국이름으로 강단익姜端益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던 게 벌써 오육 년 전이니, 그 때는 열두, 세 살? 당시에는 동자승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새 세월이 그리 흘렀나?’
 심대현 변호사는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흘러간 세월을 찾아보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단익의 아들, 태산이 지리산에 들어간 지 벌써 십 년이다.
 한 번 숨을 돌린 심 변호사는 손짓으로 이제 다시 가자고 신호를 했다.
 강단익이 말하던 암자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문제의 암자에 도착한 심 변호사는 그야말로 ‘깜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우선, 발로 한 번 걷어차면 무너질 것 같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초막이 승련암이라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처사處士라고 들었던 길인거사가 지금은 정식으로 삭발을 하고 불가에 의탁했기 때문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거구의 청년 때문도 아니다. 한 마디로 거구다! 십 년이라는 세월은 비쩍 마른 몸을 하고 힘없이 엄마 등에 업힌 채로 목도 못 가누던 불쌍한 아이를 지금은 햇빛을 가릴 정도로 거구를 가진 은발의 청년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놀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으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심 변호사가 도착할 때에는 이미 승련암에 데이비드 강, 한국식으로 강단익 부부의 영정-비록 십여 년 전에 사진이지만-과 제단이 차려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말없이 그의 눈앞의 거구의 청년이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인다.
 얼결에 심 변호사도 고개를 숙여 상주喪主에게 인사를 했다.
 ‘이걸 어떻게 안 거야?’
 심 변호사가 미국의 로펌으로부터 데이비드 강 부부의 사고소식을 들은 게 바로 어제다. 그리고 공항에서 유골함을 받은 것도 오늘 새벽이고!
 어제 미리 벽송사를 통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화로는 태산의 안부만 확인했을 뿐이다. 기왕이면 고객일 뿐만 아니라 어릴 적 친구의 유일한 상속자인 강태산을 직접 만나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다.
 그러니까 태산은 자기 부모의 유고有故를 몰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심 변호사는 강태산이라고 짐작되는 거구의 은발 청년을 다시 한 번 훑어보게 되었다.
 개량한복이기는 하지만, 하얀 저고리, 하얀 바지에 머리는 베갓을 쓰고 있고, 새끼줄로 띠도 둘렀다.
 ‘상복喪服!’
 역시 상복이 맞았다.
 “태산아, 선대인先大人의 친구분이시면 네 아버지나 마찬가지이니, 네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길인거사의 말에 너무도 무거워서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던 태산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태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심 변호사님.”
 심 변호사는 우선 이 아이가 정말 강태산이 맞나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머리에 쓴 관이 아니라도, 태산의 키는 더욱 커 보였다. 족히 190은 넘어 보인다. 게다가 쩍 벌어져서는 병풍을 두른 것처럼 느껴지는 넓은 가슴팍이 이 아이가 과연 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레슬링이나 유도나 그런 격투기 선수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게다가 볕에 그을려서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하지만, 머리는 20대의 청년이 당연히 가져야할 흑발이 아니라 회백색의 은발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언제 잘랐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말꼬리처럼 뒤에서 하나로 묶어버렸다.
 강단익의 말로는 분명히 루게릭병에 걸려서 오늘내일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못 데리고 가고 산에 두고 왔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놈은?’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훅 막힌다.
 평생을 실험실과 사업에만 처박혀 있느라 창백하기만 했던 강단익과는 접점이 없어 보이는 강골强骨이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살짝 찢어진 가는 눈에 굵은 눈썹, 각진 턱, 오똑한 콧날에 끝은 뭉툭하다 싶을 정도로 두터운 코까지. 몸뚱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태산의 얼굴은 그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캠퍼스 앞 주점을 기웃거리던 젊은 시절의 강단익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이, 이 녀석! 아저씨라고 불러라.”
 눈앞의 청년이 강태산이라는 확신이 들자, 심 변호사는 그를 끌어안았다. 상체가 어찌나 두꺼운지, 겨우 손과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이내 심 변호사는 손을 뻗어 단정하게 빗어서 꽁지를 묶은 태산의 머리를 뒤집으며 격정에 소리쳤다. 이 녀석, 그 잘 난 놈의 아들이 맞다.
 “인사는 먼저 아버지, 어머니께 올린 후 드리겠습니다.”
 태산의 말에 그제야 심 변호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가 왜 양복차림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도 말이다.
 “어떻게 알았어?”
 “······.”
 태산은 대답 대신에 눈짓으로 길인대사를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심 변호사는 눈인사만 하고 사라진 길인대사를 찾았다. 하지만 벌써 암자로 들어갔는지 안 보인다.
 동자승 민지가 어정쩡한 포즈로 품에 안고 있던 유골함을 태산에게 내밀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두 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읊는 불호 속에서 심 변호사는 많은 것이 느껴졌다.
 ‘단익아, 네 아들 다 컸구나!’
 
 ***
 
 어차피 미국에서 화장까지 다 끝을 내고 태평양을 건너온 유골이다. 그러니 승련암에서 치러지는 마지막 장례는 간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산이 제 부모의 유골함을 앞에 두고 천팔 배를 올리겠다는 것을 보고는 심 변호사는 아무 말 못하고 몸을 돌려서 암자를 벗어났다. 그의 등 뒤로 길인스님의 염불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벌써 네 시간 째, 조금 있으면 다섯 시간 째다.
 태산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땀에 절은 태산의 등판을 보고, 심 변호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죽어도 내 새끼들이 저렇게 염불해 줄까?
 ‘아, 우리는 천주교지!’
 자켓 주머니를 뒤지던 심대현은 담배 찾기를 포기했다. 오는 길에 어디다 흘린 게 분명하다. 이럴 때, 회색빛의 연기를 폐부 깊숙이 끌어들였다가 내뱉는 순간에 회한도 같이 토해낼 수 있을 텐데······ 유난히 오늘따라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 새끼, 자식새끼 하나는 근사하게 잘 났어!”
 지 애비 닮아서 잘난 얼굴이다. 산중에서 지낸 덕분에 검게 그을렸지만 타고난 귀티는 어디 감출 수가 없는 법이다.
 자식 놈은 지리산의 깊숙한 산골에, 부모는 바다 건너 미국 동부에!
 가족이라지만 과연 일 년에 한 번이나 만났을까? 아니, 자식 정이 애틋한 강씨 부부였으니, 같이 못 오더라도 부부가 번갈아 가면서 한국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 년에 두세 번은 이곳에 왔겠지.
 하지만 열한 살에 부모 품에서 떨어진 아이가 그것을 어찌 알까? 자식 놈을 살리기 위해 핏덩이를 품에서 떼어놓아야 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말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꼬박 십 년이다. 십 년을 그들은 그렇게 생이별을 하고 지냈었다.
 ‘그리고 지금은······.’
 승련암 안쪽을 힐끔거리던 심 변호사는 괜히 불거지는 눈시울을 하늘을 쳐다보며 말렸다. 그 생이별이 이제는 진짜 이별이 되었다.
 그래도 아나 보다. 백팔 배가 아니라 천팔 배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자주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애타는 부모 마음은 아는 게지!
 드디어 끝이 났나? 목탁 소리가 짧게 이어지면서 염불 소리가 잦아진다.
 잠시 후, 유골함을 품에 안고 강태산이 나왔다. 순간 심 변호사는 이름처럼 태산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들었다. 단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가득 찼다.
 담배 대신 몽블랑 볼펜을 손에 들고 있던 심 변호사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상주에게 인사를 할 차례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온 몸이 땀에 절었다. 입고 있는 개량한복을 벗어서 짜면 육수가 줄줄 흐를 것만 같다.
 “할 만 한가?”
 순간 심 변호사의 입에서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부모의 유골함을 앞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한 자식에게 할 만 하냐니! 이건 상주를 보고 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래도 태산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인다. 오른쪽 입술 끝이 실룩이는 것이 감정을 삼키는 중일까?
 무언의 대답에 심 변호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리 마땅한 말을 찾아볼 생각인데······.
 그런데 태산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어딜 가려고?”
 “천왕봉이요.”
 짧은 태산의 대답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길인 대사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일전에 오셨을 때, 선대부인께서는 다음에는 꼭 셋이 천왕봉에 오르자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는지, 태산은 다시는 이렇게 셋이 모일 수 없으니 지금 올라야겠다고 하는군요.”
 “뭐?”
 지금 이 시간에 천왕봉을 오른다고? 심 변호사는 황급히 까르띠에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다섯 시. 정말 지금 천왕봉을 갔다 온다고?
 태산의 그 마음과 뜻은 알겠지만, 심 변호사는 지금 시간이 급했다.
 “시주께서는 예서 기다리시지요. 오히려 방해만 될 터이니.”
 “예? 아, 예!”
 심 변호사는 얼결에 대답을 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이 몇 시인데, 천왕봉을 갔다 온다는 것인가? 길도 없는데, 등산로를 따라 가도 족히 7, 8km는 될 텐데······. 산길을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면,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족히 대여섯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봐, 태산! 지금 출발해서 언제 오려고?”
 다시 내려오면 한밤중일 텐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심 변호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태산은 휙휙 날아갈 듯이 산길을 오르는 것이, 벌써 안 보인다.
 ‘뭐야?’
 꼭 전설이나 소설 속에나 나오는 축지법, 경신술 같은 것인가? 산에서 살아서 그런가, 몸놀림이 심 변호사가 그동안 알고 있던 그 병든 아이 같지가 않다.
 “허허, 참······.”
 분명히 루게릭병이라고 했는데, 맞아?
 오진 아니었을까?
 한 번 발병하면 길어야 5 년 내 사망하는 병이 루게릭병이 아닌가! 그런데 태산은 벌써 스물한 살, 처음 발병한 지 십일 년이다.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심 변호사는 그냥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능선 사이로 조금 비치는 하늘이 하늘천天이 왜 검을현玄인지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했다. 산은 금방 어두워진다더니, 정말 곧 밤이 될 것 같다.
 ‘이제 겨우 다섯 시인데······.’
 꼭두새벽부터 준비를 했건만 결국 이렇다.
 이러다가는 내일 내려가야 할 판이다. 오늘 중으로 서울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애초에 그른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심 변호사는 애꿎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전파가 터지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안테나 표시는 검은 색으로 반전되어 있었다. 전화도 안 터지니, 산 밑에 추성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심&장 로펌의 최 기사한테 내일 내려간다고 전화할 수도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시간도 안 간다.
 강단익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분명히 벽송사와 이어지는 암자라 했고, 벽송사에서 칠선계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고도 했다. 벽송사까지는 차가 올라가고 바로 그 옆에 추성 주차장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당일 일정으로, 기타 여러 가지 일정은 모두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를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혹시 여기 사람이라면 무슨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해서 동자승이었던 민지랑 이제는 진짜 탁발승이 된 길인스님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곡차나 한 잔 하시면서 기다리시지요. 태산이 서두른다 했으니, 족히 한 시간이면 다녀오리리다. 그럼 태산을 쫓아 하산하면, 될 테니까요.”
 “아아~!”
 그제야 심 변호사는 안심을 했다.
 한 시간이란다. 그 시간이면 절대로 정상은커녕 천왕봉까지도 못 간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물며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데······.
 천왕봉에 간다는 것이 산 정상까지 오른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곳에 유골을 뿌리고 온다는 소리인가? 그럼 말이 된다.
 ‘뭐, 대충 시늉이라도 하고 오겠지.’
 가만? 그렇게 대충 하는 녀석이 천팔 배를 올렸어? 무언가 안 맞는다. 혹시 정말 한 시간 안에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온단 말인가?
 “저어 태산이 정말 천왕봉을 정상까지 갔다올 생각일까요?”
 심 변호사의 질문에 길인 대사가 답을 한다.
 “다녀올 것이외다.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죽을힘을 다 해서 해 내는 놈이니 말이오.”
 “하지만 어떻게 한 시간에······.”
 말을 하던 심 변호사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십 리를 한 달음에 달려가는 놈인데, 무엇이 걱정이겠소. 허허허. 나무관세음보살~!”
 심 변호사의 걱정을 이해 한다는 듯, 길인 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암자로 들어갔다.
 “걱정 마시고, 곡차나 한 잔 하시구려.”
 그래도 심 변호사는 걱정이 되어 자꾸만 태산이 올라간 쪽으로 눈길이 갔다. 혹시나 그 거구가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결국 태산을 찾기를 포기한 심 변호사는 길인 스님의 뒤를 따라 암자 안으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그럼 여섯 시에 온다는 말인데, 그 때 내려갈 수는 있는 거지?’
 
 
 2
 
 
 “······.”
 “응?”
 심 변호사는 화들짝 놀라 깼다. 깨어보니, 곰 같은 체구에 태산이 그의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니 버석버석한 느낌이 꽤나 피로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기지개를 하며 심 변호사는 암자를 나섰다.
 얼마나 되었을까? 밖은 완전히 깜깜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여섯시를 조금 넘었을 뿐인데······. 말대로였다. 태산은 딱 한 시간 만에 산에 갔다 돌아왔다. 오를 때에는 유골함을 안고 있었지만, 지금은 빈 손이다.
 ‘결국 그 친구도 원은 풀었겠군.’
 심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지금 내려갈 수는 있을까?
 심 변호사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도 네 시간이 걸렸었다. 지금은 여섯 시. 하산하면 밤 열 시다.
 가만, 아직 유언장 낭독과 유산 공개도 안 했는데?
 도대체 나는 여기 와서 무엇을 한 것인가, 생각하니 심 변호사는 눈앞이 깜깜했다. 유골함을 들고 온 게 다다.
 “변호사 시주님께서 밤길이 위험하면 내일 내려갈까요?”
 태산이 아니라 민지가 하는 말이다. 청년승도 이 밤중에 벽송사까지 내려가야 하니, 자기가 귀찮은가 보다.
 “내일 가기는 뭘 내일 가? 인연이 여기까지인 줄 알면, 끊을 줄도 알아야지!”
 갑자기 암자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길인 스님의 한 마디에 심 변호사는 화들짝 놀랐다.
 처음에는 길인 스님의 호통에 놀랐고, 다음에는 그 내용에 놀랐다. 연이 여기까지인 줄 알면 끊을 줄도 알라고? 그럼 뭐야? 이른바 ‘하산하거라.’는 말 아닌가!
 “예에. 갑니다, 가요. 가라면 누가 못 갈 줄 아십니까? 누가 이런 코딱지만 한 암자에 정이라도 붙인 줄 아십니까? 아 예에. 잘 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십 년 보시에 아익, 후 큰스님 감사합니다 하고 공양미 삼백석이라도 지고 올 줄 아십니까?”
 순간 심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 태산이 자기도 미련 없다는 투로 손을 탁탁 털면서 소리치며 대꾸한다. 태산이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벙어리인줄 알았는데, 아니로군.”
 심 변호사의 농에 태산은 다시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덕분에 심 변호사만 어색해졌다.
 뒤에 심 변호사가 따라오건 말건, 태산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진짜 하산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태산의 등에는 조그만 배낭 하나가 달랑 매달려 있었다. 초등학생들이나 매고 다닐 것 같은 조그만 배낭이다. 유행에 뒤떨어진 하드 케이스 배낭이다. 요즘 애들은 들지도 않는! 설마 혹시 십 년 전에 지리산에 들어올 때 지고온 가방이 아닐까?
 심 변호사는 당황한 얼굴로 태산을 바라보았다.
 “태산아. 그런데 간다고? 어딜?”
 태산이 히죽 웃었다. 눈 위는 가만있는데, 광대뼈 아래만 씰룩거렸다. 그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서울?”
 “뭐?”
 “가요, 심 변호사님.”
 “이 녀석! 아저씨라니까······.”
 “······.”
 태산이 대신에 민지승이 대답한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변호사님 걸음으로는 지금 가도 벽송사에 도착할 때는 한밤중일 테니까요.”
 “아아, 그래요.”
 얼결에 심 변호사는 태산의 뒤를 쫓았다. 오늘 하산할 수 있다니, 우선 기뻐하고 볼 일이다. 벌써 심 변호사의 서류가방은 태산의 수중에 들려 있었다.
 “이 놈아. 내려가려거든, 네가 입던 옷가지도 다 가져가야지!”
 “버려요!”
 “멀쩡한 것을 왜 버려?”
 “그럼 큰스님이 쓰거나!”
 “이 놈아. 애비 팬티 줄여서 아들 놈 입힌다는 소리는 있어도 제자 놈이 입던 팬티를 사부가 입는다는 소리 있더냐?”
 저 멀리서 들리는 길인 스님의 작별인사가 진짜로 태산이 하산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그럼 불쏘시개로 쓰거나. 그거 100% 코튼이니까 잘 탈 겁니다. 미제라구요.”
 태산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가 사다 준 미제 팬티······.”
 
 ***
 
 심 변호사는 정신이 없었다.
 태산이 자기가 디딘 곳만 발 디디라고 했고, 아닌 곳에 발을 디뎠다가 구두 뒷굽이 박혀서 빠져버렸다. 바로 뒤따라오던 민지가 아니면 어디 나자빠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젠장! 이게 얼마짜리 구두인데······.’
 바닥까지 가죽으로 댔고, 그 가죽이 상할까봐, 다시 고무창을 붙인 최고급 수제 구두다. 이거 살 돈으로 발리Bally화를 두 켤레는 사고도 남을 것이다.
 수중에 랜턴이 들려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태산이나 민지승이나 조명도 없이 잘도 간다. 땅을 헛딛는 일도 없고, 나뭇가지에 걸리는 일도 없다. 마치 눈에 조명이라도 단 것 같다.
 “밤길은 저 보다, 태산 형이 더 잘 봐요. 내공이 더 높거든요. 그래서 태산이 형이 같이 가면, 저도 걱정을 안 하지요.”
 뒤따르는 민지가 심 변호사의 의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도 눈으로 보면서도 못 믿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산 속을 헤매기를 얼마나 했을까?
 ‘길을 잃은 것은 아니겠지?’
 신 변호사는 땅만 바라보며 쫓아가고 있지만, 숨이 턱에 받쳤다. 그에 반하여 고무신을 신은 태산의 걸음은 마치 산책을 나온 선비 모양 유유자적이다. 어째 산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심 변호사 한 사람 뿐인가 보다.
 “윽!”
 정신없이 땅만 쳐다보고 가다가 갑자기 태산이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의 부축을 받고서야 바로 설 수가 있었다.
 그제야 심 변호사는 태산의 고무신에는 굽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나저나 요즘 세상에 누가 고무신을 신어?’
 그것도 하얀 고무신 말이다. 그런데 이게 또 개량한복과는 잘 어울린다.
 ‘그런데······.’
 그냥 저 고무신을 신고 천왕봉을 오르내린단 말이야?
 그런 잡생각을 지우고, 심 변호사는 현실의 자신에 대해 고민했다.
 “왜?”
 혹시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숲에서 밤을 지새우게 생겼다. 십 년 이상을 지리산에서 보낸 두 사람을 앞뒤에 두고 산 속에서 길을 잃다니! 무슨 이런 날이 다 있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쉿!”
 “뭔데?”
 “······.”
 태산의 숨 죽이는 소리에 심 변호사도 덩달아 귀를 기울였다.
 어흐으응. 어흐응.
 멀리서 포효하는 소리가 들린다.
 히죽.
 태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환한 웃음이다. 그의 고른 치열이 달빛을 받으면서 어둠 속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이 났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 나, 가!”
 어흐으응.
 태산의 말에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포효 소리가 울린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뭐냐?”
 심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포효할 줄 아는 짐승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데.
 “산군山君입니다.”
 역시 태산이 아니라 민지의 대답이다.
 “산군?”
 심 변호사는 민지의 산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정말 뜻을 몰라서 더듬은 게 아니다.
 “설마······.”
 한반도에서 호랑이야 이미 멸종한 것 아닌가? 혹시 만주 호랑이가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고 휴전선을 뚫고 지리산으로 왔다고?
 “아님 말구요.”
 별 것 아닌 표정으로 태산이 몸을 돌렸다. 작별 인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간다는 식이다.
 민지가 대신 심 변호사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산군은요. 어느 정도 도력이 되야만 만날 수 있대요. 저도 아직 못 봤지만, 재작년인가, 태산이도 심곡수도深谷修道를 하다가 만났대요.”
 ‘태산이도’라고? 그럼 본 사람이 또 있다는 소리 아니야!
 “에에이, 그럴 리가.”
 “아, 진짜라니까요. 태산이나 길인스님 말고도 수도하는 분들 중에 산군을 본 사람 꽤 여럿 있어요.”
 민지는 심 변호사가 믿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들기며 연신 변론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산군을 만났었다는 태산은 태연하기만 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산군과 몸의 대화를 나눈 사람은 태산이 유일하지만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민지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지 불호를 외운다.
 “몸의 대화라니? 설마 둘이 티격태격하고 싸우기라도 한단 말인가?”
 민지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기에, 심 변호사는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아님 말면 되는 거지, 그게 뭐 중요합니까?”
 퉁명스런 태산의 말에 심 변호사는 괜스레 속이 뒤틀렸다. 이놈이 어른 말을 무시하네그려!
 “아마, 산군도 태산 시주가 하산하는 것을 아나 봅니다. 그러니까, 배웅 하는 거죠.”
 “저게 배웅이라고?”
 “예에. 그럼 뭐겠어요?”
 심 변호사는 도대체 이 두 청년의 말이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아서 속이 불편했다. 남한에는 멸종한 것으로 알고 있는 호랑이가 있다는 둥, 배웅을 한다는 둥······.
 그렇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흐으응. 허으으응.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포효 소리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이 돋는 것이 등골이 싸늘하다. 설마 아니겠거니 생각하면서 심 변호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흐아아으아앙!
 “허어······.”
 심 변호사는 거품을 물고 자빠졌다.
 
 ***
 
 “됐어! 나중에 또 보면 되잖아. 그 때까지 큰스님······.”
 두런두런, 태산이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소리에 심 변호사는 정신을 차렸다.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아, 민지 스님! 아무래도 헛것을 본 것 같다. 그래도 겁이 난 심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순간, 솥뚜껑만한 크기에 흑백이 완연한 털이 숭숭하고 부리부리한 두 눈은 주먹만 한 범의 얼굴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는 입을 떠억 벌리고는, 역한 냄새를 뿜으면서 그의 얼굴을 맛을 보는 것처럼 스으윽 핥았다.
 “그만 해, 산군! 먹는 거 아냐!”
 “꼬르르륵!”
 
 ***
 
 “뭐? 어······.”
 심변호사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깨어보니, 자기가 태산의 등에 업혀 있었다.
 “다 왔다구요. 저기 추성 주차장입니다.”
 민지승의 말에 심 변호사는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다.
 조그만 백열등이 탁한 조명이 이곳이 주차장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텅 빈 주차장에는 검은 어쿠우스 리무진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 로펌의 전용차량이다.
 어느새 벽송사, 추성 주차장이었다.
 “정말 왔구나, 왔어!”
 심 변호사는 격정에 소리쳤다.
 “저는 그럼 여기에서 헤어지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태산 시주. 그동안 즐거웠어요.”
 벽송사로 가려면 여기에서 갈라져야 한다. 얼결에 심 변호사도 합장을 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제야 심 변호사는 아직도 그가 태산의 등에 업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내려왔다.
 “······.”
 태산은 대답을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꼭 다시 들리세요. 나무관세음보살~!”
 그런데 가만? 태산 시주, 그동안 즐거웠다고? 정말로 강태산이 하산하는 것인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태산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우리 노 선사 좀 부탁드립니다.”
 “왜요? 태산 시주가 또 찾아온다고 해도 돌 던지며 쫓으실 것만 같아요? 하하. 능히 그러실 분이시지요. 하지만 아파서 병 고치겠다고 오겠다는 사람은 안 말리실 겝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정말로 태산이 하산을 하나 보다.
 심 변호사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아, 이제부터는 변호사님이 앞장서시죠, 여기에서부터는 태산 시주도 길을 모르니까.”
 “아!”
 심 변호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태산아. 네가 정말 하산하는 거냐?”
 “예.”
 “왜?”
 “큰스님이 연이 여기까지라 하십니다.”
 “그럼 하산이구나.”
 잠시 생각을 하던 심 변호사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하산은 알겠는데······. 그러니까 앞으로 계획은 있고?”
 “이제부터.”
 심 변호사의 질문에 태산은 태연 했다.
 “세우겠다고?”
 오히려 조급한 사람은 태산이 아니라 심 변호사였다.
 “그럼 네가 이제 어디를 간다는 거야? 갈 데는 있어?”
 태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찾더니 말한다.
 “서울!”
 심 변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방배동에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재워야할 것 같았다.
 
 
 Chapter02 딸기 향이 나는 방
 
 
 1
 
 
 어흐으응.
 “배웅하고 왔느냐?”
 어흥. 어흐으응.
 “그래. 그 놈 보내고 나니까 심심할 만도 하겠지. 그래도 나름 너랑 놀아주던 녀석이었으니. 허저언 하기는 내 속도 마찬가지다, 이 놈아. 아니, 너보다 더 하지 않겠느냐? 나는 살 맞대고 한 방에서 자고 먹고 했는데······.”
 어흐으응.
 멀리서 산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길인스님은 암자 문을 닫았다.
 “나무관세음보살······.”
 
 ***
 
 고객과 대표 변호사를 태운 심&장 로펌의 에쿠우프 리무진은 곧장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큼. 큼······.”
 운전석의 최 기사가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코를 풀었다, 다시 킁킁거리기를 반복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강태산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는 금방 좁은 차 안에 가득했다. 근본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대현 변호사 역시 인상이 구겨졌지만, 바로 옆에 클라이언트를 앉혀놓고, 너한테 냄새 난다고 면박 줄 수도 없는 일이기에, 억지로 인상을 폈다.
 우선 심 변호사는 강단익씨 부부의 유언부터 집행했다.
 먼저 사망 경위-교통사고다!-부터 시작해서, 유언장은 언제 누구 입회하에 작성되었고, 미국의 로펌과 연계하여 재산을 정리하는 중인데, 우선 간략히 정리하자면 애초에 태산에게 증여된 지분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게 되는 지분까지 합치면 태산이 바이오벤처 팔크Palk의 최대주주로 등극하게 생겼다. 하지만, 태산이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에는 무슨 조건이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고, 이 때 상속세가 어찌 되며 등등에 대해 간략하게 브리핑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쉽게 말해서, 팔크에 대한 경영권 행사에는 아직 제약이 따르지만, 미국의 부동산을 포함해서 동산 자산까지는 즉시 명의이전이 가능하지. 이건 아무래도 태산이, 너의 건강을 염려한 부모님들의 안전장치인 셈이라고 보는데······.”
 평생을 지리산 속에 처박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태산에게 팔크의 경영이나 운영 등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보지도 못할 미국 땅이 아닌가? 그곳에 뭐가 있다고 말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그래서 태산이 일정한 자격-정규대학을 졸업하고 MBA등의 경영수업과정-을 획득하지 못하면 지분은 갖고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되 경영에는 간섭을 못 하게 했다. 루게릭병에 걸린 태산으로서는 경영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팔크의 경영진들이 태산을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태산이 경영에 참여는 못하더라도 대주주로서의 권리 행사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경영진을 물갈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바로 유일한 상속자 강태산이다. 그렇게 소유와 경영을 분리함으로써, 태산이 죽을 때까지, 또는 회사가 망할 때까지 태산에게 안정적인 수입원을 제공하는 셈이다.
 쉽게 말해서,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을 안 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환산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팔크의 지분을 제외하고 미국에 집이나 자동차 등, 지금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유체자산은 모두 백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단다.”
 한 마디로 강태산이 부자라는 소리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심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태산이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런데 쉽게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태산과 같이 있었으면서도 태산이 입을 열었을 때 몇 마디 이상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원, 이렇게 입이 무거워서야!’
 심 변호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역시 한참 만에야······.
 “차 좀 세워주세요.”
 태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다다.
 심 변호사의 신호에 최 기사는 불법인 줄 알면서도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문이 열리고, 태산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칠선계곡을 내려오면서 들었던 산군의 포효소리처럼 태산이 고함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아아아아······.”
 심 변호사는 조용히 차 창문을 올렸다.
 “아으으으, 으아아아아!”
 이 시간만큼은 태산이 혼자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저 놈을 어찌할꼬?’
 메아리처럼 울리는 태산의 포효를 들으면서 심 변호사는 조용히 사색에 빠졌다.
 
 한참만에 돌아온 태산이 다시 차에 오르고, 리무진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심 변호사는 태산이 입을 옷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하얀 개량한복. 하지만 떼를 타고 빛이 바래서 누렇게 보일 지경이다.
 “어떻게 알았냐, 내가 그으으······.”
 심 변호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 상복이 맞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저를 찾아오셨어요.”
 누가? 누구긴! 말은 안 해도 죽은 두 사람이라는 뜻이다. 되지도 않는 소리에 심 변호사는 펄쩍 뛰었다.
 “어떻게?”
 “영접靈接을 한 거죠.”
 “영접이라······. 쉽게 말해서 혼령을 만났다, 이 말이냐?”
 “······.”
 “언제?”
 “일주일 전.”
 심 변호사는 날짜를 꼽아 보았다. 일주일 전이면 정말 데이비드 강 부부가 사고가 난 날이다.
 “말씀드리니 큰스님께서 준비하라 하시더라구요.”
 심 변호사는 앞서 가는 태산의 넓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승은 미래를 안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뭐, 요즘 세상에도 과학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까. 심 변호사는 그냥 믿고 넘어가기로 했다.
 “루게릭은 불치병이라던데······.”
 심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명히 강단익은 말했다.
 루게릭이라고.
 근데 지리산 절에서는 괜찮다고. 하지만 산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 발병해서 원위치! 다른 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고. 태산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도 그곳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게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태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
 심 변호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질문을 하려 해도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루게릭은 치료했나, 지리산의 암자에서는 그 치료법이 있는 것인가, 치료가 안 되었는데 하산하는 것은 위험한 것 아니냐, 그러다 재발하면 어쩌지 등등, 심 변호사의 질문은 셀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발병 후 5 년 내 사망이라는데, 어떻게 10 년째 살아있는 지 가장 먼저 이것부터 묻고 싶었다.
 “좀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 어떻게 아직까지 네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세요? 외상을 제외하면, 모두 심신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태산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무슨 명심보감이라도 읽는 것처럼 시조적인 운율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뭔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심 변호사는 태산의 말허리를 자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열린 입인가?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도로 입이 닫히면 언제 열릴지 모르는 일이다. 또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의 질문도 풀릴 수 있을 테니까.
 안 풀리면 그 때 물어보면 된다. 차례대로 말이다.
 심 변호사는 유능한 변호사이니까, 고객이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작게는 몸살, 감기와 편두통부터 크게는 간경화와 종양까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심신의 부조화에서 시작해서 우리를 둘러싼 대자연과의 소통 부재로 이어진 결과가 그것들, 바로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루게릭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루게릭이라, 불치병이니라. 하나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더 이상 발병하지는 않게 할 수 있다아, 이것입니다. 지금의 제 상태가 딱 그 상태입니다. 치료를 한 것이 아니라, 발병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셈이라 할 것입니다.”
 심 변호사는 눈이 번쩍 뜨였다.
 루게릭은 확실히 불치병이다. 유전자의 변이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불치다.
 그 병이 세상에 알려진 지 반 세기가 넘었지만, 아직까지 치료약은커녕 증상을 완화시킬 방법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 와중에 여기, 루게릭에 걸려서 십일 년째 건강하게 살아있는 청년이 있다.
 방법도 획기적이다.
 ‘그런 수가 있었군!’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는 긴 이름의 에이즈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완치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불치는 아니다. 태산의 설명과 비슷한 방식으로 더 이상 합병증으로 발병하지 않도록 꾸준한 관리로 증세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치매도 그렇게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 이것으로 대박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누가 변호사가 아니랄까봐, 심 변호사는 벌써부터 그 머리를 돌렸다.
 “뭐로?”
 묻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목이 말랐다.
 “······?”
 지금까지 남의 이야기를 읊었던 태산이 제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아, 무엇으로 루게릭병을 더 이상 심해지지 않도록 조절을 했냐는 것이지.”
 “선법禪法. 그리고 내기內氣로!”
 순간 심 변호사는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을 뚝 흘렸다.
 내기라고? 내공? 이건 무슨 김봉창씨 옆구리 긁는 소리인가? 사법고시 준비를 할 때 무협소설을 잔뜩 읽기는 했지만, 정말 그게 있다고? 가능하다고?
 심 변호사는 그냥 멍하니, 입만 벌린 채 강태산을 바라보았다. 검게 그을린 젊은 청년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인다. 거짓이 없는 웃음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 말이 더 신뢰가 안 간다. 농담 같다.
 “에, 에이. 농담은······.”
 속을 뻔 했다는 생각에 심 변호사는 자신도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를 패스하고 부부장검사로 퇴직한 후 동기와 로펌을 차려서 승승장구해 온 그가 이런 거짓말을 믿다니! 아무래도 쓰러지면서 범을 봤다고 착각을 했는데, 그게 계속인가 보다.
 이 녀석의 이것도 재주다. 까딱 했으면 정말 믿을 뻔 했으니까 말이다. 산전수전에 고공전투까지 다 겪은 천하의 심 변호사가 속아 넘어갈 뻔 했다.
 “잡소리는 그만 하고!”
 심 변호사는 오늘 너무 기운을 써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
 심 변호사는 대답을 듣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질문의 대답은 의외로 쉽게 튀어나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맘대로!”
 “뭐?”
 대답을 듣기는 들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심 변호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그 보다는 너무도 심플하면서도 쇼킹한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마음······ 가는 대로!”
 “크흠······.”
 심 변호사는 법을 수호하고 따르는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로서, 무엇보다 강태산의 후견인으로서 조언을 해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는 대로라!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지.”
 아마도 태산이 산에서만 십 년을 살다 보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 나이에 가 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고, 하고 싶은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런 한창 왕성한 시기의 십 년을 지리산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또 얼마나 답답할까?
 “하지만 태산아.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법이 있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따라야 하는 에티켓과 예의범절, 도덕이라는 게 있단다.”
 그게 사회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 오, 오~!”
 태산이 검지를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종심從心이라. 마음 가는 대로 행함에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아버지랑 약속한 것도 있구요.”
 순간적으로 심 변호사는 할 말을 잃었다.
 “종심이라, 허허, 종심이란 말인가?”
 참으로 건방진 소리라고 심 변호사는 생각했다.
 공자도 나이 칠십에 이르러 종심이라 했거늘, 태산은 이제 스무 살-아니 스물하나인가?-에 종심 운운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차라리 무시를 하는 게 낫다. 못 들은 척, 못 본 척······.
 심 변호사는 시트에 몸을 묻고, 피로한 눈을 감았다.
 
 ***
 
 심 변호사가 서초동 자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새벽 세 시. 집사람에게 미리 전화로 자초지종 이야기를 해 놓았지만, 방을 비워줘야 하는 막내 딸아이가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하룻밤 여관 가서 자라고 하면 되잖아!”
 문을 여는 순간, 자기 방에서 쫓겨나는 지아芝娥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 나왔다.
 “이 지지배는~! 하룻밤만 언니랑 자라는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이어서 딸아이를 혼내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렸고.
 “나 왔소~!”
 심 변호사는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아빠 오셨다.”
 아내가 딸 자매를 다독이는 소리가 나오고······.
 “누가 언니랑 자는 게 싫대? 생전 본 적 없는 남자애가 내 침대를 쓴다는 게 싫은 거지.”
 이어서 짝 하고 등 두들기는 소리. 다시 아내와 함께 두 아이가 나온다. 한 눈에 보기에도 짧게 커트하고 파마한 머리가 언니이고, 긴 생머리를 머리 뒤로 묶어 올린 쪽이 동생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세 모녀는 일순 멈칫거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단체로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출현과 동시에 풍기는 퀴퀴한 냄새 때문이다. 그리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어두운 그림자. 바로 거구의 태산 때문이다.
 심 변호사의 아내, 올 해 마흔여섯인 이선정李善貞이 억지로 반가운 얼굴을 하고 태산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네가 태산이니? 벌써 그렇게 컸구나. 하긴 그게 십 년 만이니······.”
 그 때까지 투정을 부리던 지아도 막상 사건 당사자인 강태산을 눈앞에 두니까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어쩌면 태산의 거구에 주눅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주둥이가 한 자는 튀어 나왔지만 말이다.
 “십사 년 만입니다.”
 태산의 말에 이선정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태산이랑 지아가 같이 클래지 유치원에 있었구나. 그 때 봤나 보다. 그러니까 가을 체육대회 때 본 게 마지막인가?”
 이선정의 말에 둘째 딸인 지아가 멈칫거렸다.
 클래지 유치원 가을 체육대회······
 그 때 일들이 주마등처럼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때 달리기 경주에서 지아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탕 소리에 출발은 못하고 오줌을 쌌던 일말이다.
 “하핫. 이 녀석, 별 것을 다 기억하는군. 제 아빨 닮아서 기억력도 좋은가 보네.”
 아내나 딸아이의 지금 심정을 모르는 심 변호사는 혼자 너털웃음을 웃었고, 이 친구 아들이 장하지 않냐는 식으로 가족들을 둘러본다.
 덕분에 나머지 네 사람이 뻘쭘한 표정으로 서로만 바라보다가······.
 “네가 태산이구나. 정말 옛 기억만으로는 못 알아보겠다.”
 그나마 큰딸인 지원芝媛이 좀 낫다. 늦은 시간임에도 웃으면서 살갑게 맞아주니 말이다.
 “······.”
 태산은 습관적으로 합장을 하고,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심 변호사는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었네, 혼자 어떻게 살아가네, 병은 어쩌네 하고 따지지를 않으니 말이다.
 “자, 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모두 내일 보자꾸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선정을 아이들을 등을 떠밀어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 왜애. 그나저나 저 땀 냄새, 내 이불이랑 침대 시트에 배면 어떻게 할 거야?”
 둘째는 큰 애 방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짜증을 부렸고, 두 딸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낸 이선정은 다음으로 강태산에게 지아가 쓰던 방을 안내해 주었다. 화장실과 갈아입을 속옷까지······.
 “우선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사 왔는데, 맞을지 모르겠구나. 뭐 필요한 것은 없니?”
 지아의 방을 둘러보던 태산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딸기······.”
 “응? 딸기? 지금 이 시간에 말이니?”
 태산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요. 방에서 딸기 향이······.”
 “아아, 그러니?”
 더 이상 이선정 여사는 태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집안에 남의 식구를 들이는 일은 누가 뭐라 하건 피곤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여사님은 여전히 젊고 예쁘시네요. 우리 엄마만큼.”
 순간 이선정은 멈칫거렸다.
 재작년엔가 데이비드 강 부부가 귀국했을 때 잠깐 만나서 저녁식사를 같이 나눴던 일이 생각났다. 동갑내기에 데이비드 강이 미국 유학 시절에 연구실 동기였다고······. 이선정은 태산의 엄마를 우아하고 부드럽던 여자로 기억했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어서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던 여자였다. 이선정이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여사가 뭐니! 아줌마라고 불러라.”
 방을 나서던 이선정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은 가장 먼저 목욕부터 하거라. 산에만 있었다더니 날이 더워 그런 건지, 땀 냄새가 좀 심하구나!”
 이선정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
 
 “언니 기억할까?”
 오랜만에 지원과 나란히 누운 지아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자리만 뒤척였다.
 “뭘?”
 “쟤 말이야.”
 “누구? 강태산? 너 아니? 태산이 너보다 한 살 많은 거.”
 “한 살 많건 적건······. 그런데 언니는 쟤 기억 나?”
 “기억나지. 나야 그 때가 열 살이었으니까.”
 정말 그 나이의 지원이 태산을 기억 못할 리는 없고.
 “그럼 쟤도 그 때 일을 기억할까?”
 “그 때 일? 무슨 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지원의 말에 지아는 안심이 되었다. 피붙이인 언니도 기억 못하는 일을 태산이 기억할 리가 없을 것이다.
 “난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고, 그 때 누군가가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싸는 바람에 창피해서 더 이상 유치원을 못 다닌다고 울어대서 엄마가 결국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시켰던 것은 기억해!”
 “아이 씨. 언니이!”
 지원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고, 참다못한 지아가 베개를 가지고 지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2
 
 
 이선정이 나가고 방에 혼자 남은 강태산은 옷소매를 코에 들이대고 킁킁 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코에는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이제는 완전히 땀 냄새가 몸에 뱄기 때문일까? 겨드랑이도 맡아 보았다. 그제야 강태산은 코를 비틀며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냄새 난다. 뭐랄까, 이런 퀴퀴한 냄새를 사람들은 총각냄새, 또는 홀아비 냄새라고 하던가? 자기 몸에 밴 냄새는 자기가 모른다고, 태산은 아예 악취에 무감각해진 셈이다.
 ‘시커먼 남자 둘이 세 평도 안 되는 암자에서 살 붙이고 사는데, 냄새가 안 밸 리가 없지.’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태산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불을 덮지않고 등 밑에 깐 채로다. 그리고는 탁탁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두들기며 탄력을 몸으로 느껴본다. 얼마 만에 침대에 누워보는 것일까?
 침대에 누워서 태산은 혼자 웃었다.
 ‘딸기 팬티······.’
 피식.
 그 때 일이 기억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유치원마다 혹시 일어날 불상사를 염려해서 갈아입힐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때 태산은 볼 수 있었다. 초록색 트레이닝팬츠 속!
 ‘딸기 팬티였어.’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째 침대에서 딸기향이 날 것만 같은 상상 속에 태산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 침대에서 몸을 뒤척여야만 했고, 결국 포기한 태산은 동공動功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
 
 침대에서 이렇게, 저렇게 여러 차례 몸을 뒤척이던 강태산은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운기행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기를 수차례 소주천 시키다 보면, 그 상태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수면에 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안 되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의 방?
 다 아니다.
 정작 태산이 잡념을 버리고 운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환경 때문이다. 낯선 환경이라서가 아니라 이곳의 탁한 공기에 옅은 기운이 원인이다.
 운기행공으로 쌓을 수 있는 진기와 공력이 승련암에서 100이라면, 여기에서는 10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운기가 안 된다고 마음이 복잡해지지······.’
 투덜거린 태산은 운기행공도 포기했다.
 그래도 잠이 안 오니, 어떻게 한다?
 어쩔 수 없다. 나가서 뛰고 오는 수밖에는! 이럴 때 쓰라고 동공動功이라는 게 있다.
 강태산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
 
 “도둑이야~!”
 “도둑 아니구요······. 아주머니, 우선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으세요. 제가 오늘 1403호에 심 변호사님 댁에서 하루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잠깐 나왔다가 문 여는 방법을 몰라서요.”
 비명 소리, 바로 이어서 들리는 낯선 남자 목소리에 아파트 경비는 화들짝 놀랐다.
 뛰쳐나간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아파트의 계단 통로 4층 벽에 달라붙은 허어연 옷차림의 괴청년과 발코니에 나왔다가 머리 위에서 움직이는 발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른 3층 학생이다.
 학생의 날카로운 비명에 벌써 여기저기 창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 간첩신고는 113! 화재는 119. 강도나 도둑은 114?”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경비 최씨는 전화기만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띵동!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에 이선정은 선잠을 깼다.
 강태산 문제 때문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또 무슨 일인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심 변호사는 당일치기로 지리산까지 갔다 오느라 피곤한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런 남편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조용 움직였다.
 “네~!”
 “밤늦게 죄송합니다, 서초 경찰서의 임 경사입니다.”
 “경찰이요? 경찰이 이 시간에 왠일이시죠?”
 “사모님. 혹시 강태산이라는 청년 아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이선정은 당황했다.
 “태산이요? 오늘 하루 우리 집에서 묵고 있는데요, 왜요?”
 “그럼 지금 태산 학생이 집에 있습니까?”
 “잠시만요······.”
 이선정 여사는 우선 태산의 유무부터 확인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없다!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는데······.
 화가 났다.
 이 동네에서 이십 년 째 살면서 이런 소란을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것이 화가 나서 이선정은 남편, 심 변호사를 향새 소리를 질렀다.
 “여보!”
 푸닥. 우당탕······.
 심 변호사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안방을 울렸다.
 
 ***
 
 “예, 죄송합니다. 제 일행입니다. 아니, 가족은 아니구요. 태산아, 말이라도 하고 나가지!”
 모든 일은 잠옷 차림의 심 변호사가 출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거, 주의 좀 주십시오.”
 “예. 다 제 불찰입니다.”
 이웃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은 출동했지만, 심대현 ‘변호사’의 손님이라는 말에 연행하기 보다는 현장 확인을 먼저 한 것이다.
 역시 변호사의 파워는 셌다.
 손님이 신세 지고 있는 주인을 깨우기 싫어서 창을 넘으려 했다는데, 뭐라고 하나! 듣고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어떻게 4층 창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어?”
 출동한 경찰이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다.
 “열려 있었으니까요.”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말 계단 복도에 4층 창이 열려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4층까지 올라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건 그렇고 나이가 몇인데, 아직 주민번호도 못 외워?”
 또 다른 경찰의 질문에 심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 이게 얼마나 급한 일인지 온 몸으로 체감하는 중이다.
 “······.”
 태산이 아무리 말을 해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직접 태산을 데려온 심 변호사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뭐라 할까.
 “자자, 우선 신원이 확인되었으니까, 자세한 일들은 내일 하기로 합시다. 수고 하셨습니다.”
 급한 대로 심 변호사는 출동한 경찰들과 악수를 했다. 물론 악수하는 손 밑에 오만 원 권 두 장을 접어서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리고 심 변호사는 태산의 등을 두들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인터폰을 누르지······.”
 “그런데 아저씨. 오천 원짜리에요.”
 순간 당황한 심 변호사와 똥 씹은 표정의 경찰의 눈이 마주쳤다.
 
 “뭔 일이래요?”
 심 변호사가 침대에 눕자마자 이선정은 물었다.
 “잠이 안 와서 운동 좀 하고 왔대.”
 심 변호사는 태산이 3층 담을 넘다가 걸렸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등 돌리고 돌아누웠다.
 “사람들 잠 깨우기 싫어서 머뭇거리다가 경비가 이상하게 봤나봐.”
 “그럼 경찰은 왜 왔어요?”
 “누가 신고했으니까 왔겠지.”
 “그래도 이야기를 하고 나가지······.”
 이선정이 투덜거리자, 심 변호사는 말을 끊었다.
 “아, 사람 참! 자는 사람들 신경 쓰이게 그러고 싶을까? 자기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 그 모양이에요?”
 “그만 하구려. 십 년 만에 서울 왔는데, 뭘 알겠소?”
 돌아누운 심 변호사는 경찰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4층이었다고?”
 “어쨌거나 오늘만이에요!”
 “아, 알았다니까······.”
 진짜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
 
 이선정이 문을 두들기려는데, 조용히 문이 미끄러지며 열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안 닫고 잤나 보다.
 이선정이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 그녀는 멈칫거렸다.
 침대에서 잘 줄 알았던 강태산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실내에 가득한 퀴퀴한 냄새······. 역시 지아가 지랄을 할 만 하다. 하지만 정작 이선정 여사가 멈칫거린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거구의 태산이 웃통을 벗어버리고 큰 대자로 벌려서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선정 여사께서는 침을 꼴깍 삼키고야 만 것이다.
 ‘내가 큰 딸보다 어린 애를 보고 무슨 생각이야!’
 괜히 혼자 얼굴이 붉어진 이선정 여사는 난처해지기 전에 문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게 다 고기는 끊고 자연식만 먹은 결과겠지.’
 역시 선식仙食이라는 게 좋기는 한가 보다.
 “태산아 일어났니?”
 그리고 오늘 처음 온 것처럼 밖에서 소리쳤다.
 “······.”
 태산은 벌떡 일어났다. 한 차례 진기를 배제하고 오로지 근육의 힘만을 이용하여 신법을 펼치고 난 이후라 육신은 적당히 긴장이 풀렸고, 그 덕분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태산아~!”
 “네!”
 태산은 대답했다.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했다.
 문 밖에서 이선정이 말했다.
 “일어났으면 우선 씻어야지, 태산아아.”
 다정하게 말했지만, 말을 안 들으면 아침을 안 줄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다.
 “네에.”
 ‘여하튼 도시 사람들이란······.’
 
 ***
 
 “으하아아암.”
 지아는 기지개를 하다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팔을 내렸다. 말은 안 해도 가족이 아닌 사람이 있는데, 배꼽도 다 내놓고 뭐 하는 짓이냐고 눈짓으로 핀잔을 주고 있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지원은 지도교수가 시킨 일이 있다면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후였다.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지원이 단발 커트에 파마를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연구 때문에 머리에 신경쓰기 귀찮다나 뭐라나?
 집에서는 잔소리만 늘어놓는 심 변호사는 일어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엄마, 그 애는?”
 지아가 긴 머리를 풀고 툭툭 털면서 물었다.
 “그 애가 뭐니!”
 이선정은 책망을 하면서도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태산이 지금 화장실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화장실을 쓰려면 안방에 연결된 곳을 쓰던가 조금 더 기다리던가······.
 바로 그 때였다.
 “으아아아······.”
 화장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모녀의 시선이 일제히 그 쪽으로 돌아갔다.
 우당탕 쿵쾅.
 굉음을 내며 시커먼 남정네가 화장실에서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남자의 벗은 몸을 본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머리에는 허옇게 거품을 뒤집어써서 얼굴도 안 보이고 수건으로 주요 부위만 가린 채 곧장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당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욕실로 고개를 돌려 보니, 샤워기에 물은 틀어져 있고, 거센 수압에 샤워기 헤드가 혼자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욕실 사방으로 물을 쏘아대고 있었다.
 게다가 샤워 부스 안에 가득한 하얀 수증기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케 하고 있었다.
 “풋!”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다 큰 어른이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으니까!
 
 ***
 
 태산이 테이블에 앉자, 이선정은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컵에 커피를 따라 주었다.
 “크흠.”
 심 변호사는 태산이 무안해 할지 모르니까 아무 말 말라고 기침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막무가내인 막내딸 지아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 뜨거운 물, 찬 물 트는 거 몰랐어?”
 “수도꼭지가 한 개는 처음이라······.”
 “없지는 않았을 거 아닌, 가?”
 지아가 자기 시리얼에 우유를 부으면서 소환된 참고인을 취조하는 검사의 표정으로 물었다.
 “아!”
 잠시 옛 기억을 더듬던 태산이 대답했다.
 “있었네.”
 그리고는 옛날 일이 생각나는 듯 피식 웃는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나는 탕에서 달아나는 중이었고. 게다가 샴푸는 왜 이렇게 거품이 잘 납니까? 눈이 매워서 앞이 보이지가 않으니······.”
 시커먼 총각이 우당탕 거리면서 욕실에서 뛰어나가는 모습이 다시 한 번 연상되자, 지아는 풋, 입가로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우유가 입술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얘는 칠칠맞게······.”
 띵깡.
 마침 토스트기에서 빵이 다 구워졌다는 소리가 울렸다.
 이선정은 먼저 심 변호사에게 빵을 한 장 내 주고, 다른 한 장은 태산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순간 강태산이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 조각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아, 암자에서는 아침에 밥을 먹었겠구나. 여보, 좀 신경 좀 쓰지.”
 “그러게요. 내 정신 좀 봐. 밥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심씨 부부의 말에 태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요. 십 년 만이라······!”
 순간 실내에 정막이 흘렀다.
 십 년이란다.
 “뭐가?”
 참지 못한 지아가 묻는다.
 “······!”
 태산은 대답 대신 낯선 얼굴로 빵을 들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십 년동안 식빵을 구경을 못 했다는 소리다. 춘향가의 한 구절을 읊는 듯한 태산의 말에 심 변호사의 가족들은 모두 침묵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몰리자, 태산이 웃었다. 그러니까, 오른쪽 입술 끝이 조금 더 올라가서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보인다. 어색하다!
 “십 년 전 12월, 열한 살 때 크리스마스였어요. 칠선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두 번째로 가기 전이었죠. 그 때 엄마, 아버지랑 같이 둘러앉아서 빵이랑 고기랑 칠면조랑, 크리스마스 트리에······.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던 게.”
 그것으로 보충설명이 끝났다고 생각한 태산은 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테이블 위에 나이프, 스푼 등을 둘러보더니, 용케도 그 중에서 빵칼을 골라 집었다.
 “이렇게 하는 겁니까?”
 어색한 동작으로 빵칼에 “It's no butter.”를 퍼서 따듯한 빵에 고르게 펴 바른다.
 “어수룩하죠?”
 태산의 질문에 이선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잘 하는구나.”
 시리얼을 퍼 먹다가 굳어버린 지아와 태산의 시선이 잠깐 엉켰다.
 순간 지아는 잽싸게 태산에게 마말레이드를 내밀었다.
 “이것도 발라 봐.”
 태산이 웃어 보였지만, 지아는 그의 눈빛 속에서 아픔과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고, 어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들 이렇게 조용하지? 누구, 커피 더 마실 사람?”
 “그런데요······.”
 태산이 빵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지아는 왜 젓가락을 머리에 꽂고 있죠?”
 “푸훕!”
 순간 지아는 입에 물고 있던 우유와 시리얼을 태산의 얼굴에 뿜고야 말았다.
 
 ***
 
 식사가 끝나자, 심 변호사가 말했다.
 “지아는 오늘 학교에 수업 없는 날이니까 안 가지?”
 “나, 오늘 동아리에 일 있어요!”
 지아가 황급히 설레발을 쳤지만, 이미 심 변호사는 결정을 내린 후였다.
 “동아리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아빠 심부름 좀 해야겠다. 태산이는 나 좀 잠깐 볼까?”
 “아빠, 나 인건비 비싼 거 알지?”
 심 변호사는 손사래를 쳤고, 그렇게 남자들만 빠지자, 지아는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엄마, 쟤 어디 있다 온 거야? 정말 데이비드 강 아저씨 아들 맞아? 아저씨는 미국에서 사고로 죽었다며?”
 “루게릭병이란다.”
 “응?”
 병명을 듣자, 지아는 화들짝 놀랐다.
 이선정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강태산에 대한 일들을 이야기 했다.
 강태산이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부모를 따라 도미했던 일, 3학년 때 루게릭이 발견되었고, 미국에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못 찾으니까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던 일, 결국 지리산의 암자에 산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태산은 그곳에서 십 년을 보냈는데, 지난달에 태산의 부모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모두 운명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가 끝이 나자, 지아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럼 불치병을 가진 환자에 고아네?”
 그 말에 이선정은 태산의 절박한 신세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렇구나!”
 “게다가 십 년동안 식빵도 못 먹어본······.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암자라도 기도드리러 오는 신도가 빵이라도 가져올 수 있는 거 아냐?”
 “식이요법이나 뭐 그런 것 때문이겠지. 발병 후 오 년 만에 사망하는 병인데, 아직 태산이는 십 년이 지나도 건강하게 살아 있잖니!”
 “하긴······.”
 그 말에 지아도 수긍을 했다.
 “교육도 올 스톱? 그럼 초등학교 3학년 중퇴?”
 “산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제 어쩐대?”
 “글쎄······. 그건 모르겠구나. 당장은 갈 데가 없으니까 아빠가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계속 우리가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엄마. 잠깐이라도 우리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얘는!”
 이선정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엄마, 생각해 봐. 십 년 동안 한 번도 태산을 내려온 적이 없다고 그랬어. 걔가 버스 노선을 알아, 방송 편성을 알아? 신문은커녕 뉴스도 못 봤을 거 아냐? 거기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었다며?”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하지만 안 돼.”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이선정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지아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엄마아. 애가 불쌍하잖아!”
 “그래도 안 돼!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딴 사람이랑 같이 어울려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아니? 너도 한 번 생각해 봐라. 평화롭던 우리 집에 낯선 남자가 같이 살게 되었다고 말이야. 지금처럼 속옷 바람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니, 우리끼리만 나가서 외식할 수가 있겠니?”
 “엄마아······.”
 “너어, 생각해 보니까 태산이 나이도 너보다 한 살 많고, 키도 크고, 건강하고, 저 정도면 남자다우니까 그렇지?”
 “엄마는~!”
 그 소리를 끝으로 지아는 제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꺄아악. 이게 뭐야!”
 지아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황급히 쫓아간 이선정 여사는 하얀 색이 완전히 빛이 바래서 누렇게 된 트렁크도 아니라 그냥 사각인 면 팬티를 볼펜으로 찍어서 들고 나오는 제 딸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선정은 어제는 워낙 늦은 시간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확실히 오늘은 태산을 내보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
 
 무엇부터 해야할까?
 태산을 앞에 두고 심 변호사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태산아, 국적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 국적은 취득하지 못했겠지. 그럼 교육이랑 병역도 문제인데······. 아, 그 전에 먼저 주민등록부터 회복해야 하는군. 주민번호 기억하나? 주소는······.”
 모든 것이 골치 아팠다. 태산이 십 년 동안 지리산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태산의 부모야 당연히 주소가 미국으로 되어 있었을 테고······. 아닌가?
 심 변호사는 유산 목록을 뒤졌다.
 “집이 있군. 그것도 서울에!”
 태산이 열 살 때 그가 루게릭 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Chapter03 절세영약의 부작용
 
 
 1
 
 
 “어제의 해가 지면 오늘의 해가 뜨니······.”
 천왕봉 정상에서 조금 아래, 너럭바위에 걸터앉은 길인스님은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일출을 감상했다.
 천왕봉 정상에 가려져서, 그보다 조금 아래에 이런 명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매일 강태산이 올라서 일출을 감상하던 그 자리다. 등산로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덕분에 한적하니,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
 “이제라도 네 꿈을 펼칠 수 있으니, 그 아니 좋을까!”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친구들이나 둘러보고 와야겠구먼.”
 길인 스님도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새 굳어버린 관절이 삐걱거린다.
 “에구구. 그래서 나이 들면 좌공보다는 동공을 해야 한다니까!”
 
 ***
 
 결국 강태산의 신변 정리를 도와주는 봉사 명령이 심지아에게 떨어졌다.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병역과 교육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주민등록 확인이다. 주민등록을 회복해야 병역도 처리할 수 있고, 교육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속 등을 비롯한 재산상의 문제도······.
 “마지막으로 태산이 부모 주소가 그곳으로 되어 있으니까, 태산의 주소도 그리 되어 있을 거다. 먼저 강남 구청에서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좋겠어. 구청에서 로펌으로 전화하면, 로펌에서 여권 사본, 국내외 병원 진단서 사본, 출입국 증명서 등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보내줄 테니까. 백화점이 열시 반에 오픈하니까, 시간에 맞춰서 태산이 옷부터 사고 머리도 자르고.”
 지아는 심 변호사가 내미는 카드를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낚아챘다.
 이건 정말 신 나는 일이다.
 비록 자기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좀 아쉽지만, 어쨌거나 무엇을 사고, 돈을 쓴다는 사실 만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그만이다.
 “나 인건비 비싼 거 아빠도 알지?”
 심 변호사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협상이다.
 “또 삼초백bag이냐?”
 “어우, 아빠는! 삼초백이 뭐에요, 루이비통Louisvuitton. 그리고 기왕이면 카드 쓰는 김에 인심 좀 팍팍 써서 샤넬Chanel이나 에르메스Hermes로······.”
 “코치Coach 이상은 안 돼!”
 “아잉, 아빠아.”
 지아는 한 번 떼를 썼지만,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과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심 변호사의 지론이고, 학생 신분으로 몇 십만 원짜리 가방도 사치라는 게 심 변호사의 판단이다. 더 떼를 쓰다가는 이제 잔소리가 이어질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굴지의 대기업과 조인 된 아맥스AmEx, 그것도 블루도, 골드도 아니고 플래티넘이다.
 “기왕이면 다이아몬드나 블랙으로 주시지······.”
 “그럼 이걸로 할까? 어차피 한도는 똑같은······.”
 심 변호사는 백화점 카드를 꺼내서 흔들자.
 “꼭 하고 싶습니다, 충. 성!”
 지아는 소리 높여 거수경례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심 변호사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고, 지아도 혀를 날름거리며 거실에서 나왔다.
 
 ***
 
 “물론 내가 모든 것을 다 바꿔줄 테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랑 붙어서 다닐 필요는 없어. 아니? 어쩔 때는 너랑 같이 있으면 숨 막힌다는 거. 차라리 나랑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가도록 해. 미리 이야기하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이 동네에서만 이십 년 가까이 살아서, 조금만 나가도 아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해. 괜히 붙어 있다가 너랑 나랑 친구사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알았어?”
 태산을 데리고 집을 나서던 지아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다.
 쫓아오고 있는 줄 알았던 강태산이 아파트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뭔데?”
 뭔가 가 보니, 새끼 고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지아는 태산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새끼 고양이네. 그런데 어미는 어디 갔을까?”
 태산이 주위를 둘러본다. 덩달아 지아도 시야를 넓혀 고양이를 찾았지만, 눈 앞의 새끼 외에는 다른 고양이는 안 보였다.
 “왜? 어미 찾아주려고? 없으면 데려다 키우고 싶어서?”
 “아니!”
 태산이 펄쩍 뛰었다.
 “분명히 어미가 근처에 있을 거야. 사람들이 자신이 영장류라고 착각을 하는데, 모든 동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이 있다고. 그것을 인간이 부족한 제 머리를 가지고 멋대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를 재단하는 거지.”
 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산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길어봐야 한두 마디가 전부였는데, 갑자기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처럼 태산이 말을 이어간다.
 “뭔 소리인지······.”
 지아는 태산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어차피 주인 찾아줄 것도 아닌데, 시간 없는데, 그냥 가지? 우선 강남구청에 들려서 신원조회 확인한 후에 백화점 들여서 온 사고 그러려면 시간도 빠듯하거든?”
 지아는 투덜거렸지만, 태산은 지아 말을 듣지도 않았다.
 완전히 까맣고 코 끝이랑 네 발 끝만 하얀 새끼고양이에 넋이 빠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러다가 결국 결심이 섰는지,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어 보려고 손을 뻗었다.
 “나비양, 냐아옹, 냐아옹~!”
 캬우웅.
 새끼 고양이가 새끼답지 않게 소리를 지른다. 그것도 모자르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발톱을 세워서 앞발까지 휘두르는데······.
 태산이 커다란 덩치에 안 어울리게 움찔거리며 손을 뺐다.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양이가 튀어 나갔다.
 잽싸게 내달린다.
 화단의 블록을 따라 뛰다가 점프, 뛰어내리면서 소리 없이 착지, 이어서 인도를 가로질러 뛰쳐나간다.
 “안 돼!”
 인도를 가로지르면? 당연히 도로다.
 태산이 소리를 질렀지만, 벌써 새끼고양이는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태산은 고양이를 쫓아 도로로 뛰어들었고······.
 빠아아.
 갑자기 튀어 나온 노란 승합차가 달려오고······.
 뿌와아아아앙.
 반대쪽에서는 트럭이 클랙슨klaxon을 울린다.
 “······!”
 부우우우. 쿵. 끼이이익.
 “꺄아아악!”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지아는 눈을 가렸다.
 
 새끼고양이가 도로로 뛰어드는 것을 태산은 보았다.
 그것과 동시에 유치원 가는 꼬마 아이들을 잔뜩 실은 승합차가 속도를 죽이지 않고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안 돼!”
 이대로라면, 새끼고양이가 피하지 못할 것 같다.
 소리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태산은 도로로 뛰어들었다.
 허리를 숙이며, 두 다리에 힘을 주어서 몸을 앞으로 날린다. 동시에 손으로 땅을 짚어서 무게 중심을 잔뜩 낮춘다.
 가까스로 나머지 한 손으로 새끼고양이를 낚아챘다.
 하지만 벌써 승합차는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피해야 한다.
 태산은 고양이를 낚아채면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몸을 굴렸다.
 빠아아.
 충분하다.
 승합차가 길게 클랙슨을 울리며 동시에 태산의 등 뒤를 스쳐지나갔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번에는 또 반대 차선에서 대형 덤프 트럭이 속도를 죽이지 않고 달려든다.
 뿌와아아아앙.
 큰 일이다.
 멈추지 말고 계속 굴렀으면 되는데, 승합차를 피했다고 멈춘 게 실수다.
 이제 와서 몸을 굴린다고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
 태산은 멈춘 상태에서 더욱 몸을 낮추었다.
 메뚜기 자세!
 사지四肢를 모두 쓸 수 있다면 완벽하겠지만, 지금은 새끼고양이를 끼고 있어서 삼지 밖에 안 된다. 그래도 할 수 있다.
 태산은 먼저 허리를 곧게 펴고, 몸통이 지면에 닿을 때까지 몸을 낮추면서 한 팔과 두 다리의 근육을 수축시켰다가, 내공을 뿜으면서 급속도로 팽창시킨다. 그 힘으로 메뚜기 모양 힘껏 지표면을 밀었다.
 점프!
 그것과 동시에 폈던 허리를 한 번 활처럼 휘었다가 튕긴다. 동체가 겹판스프링이 튀는 것처럼 한 번 더 솟구쳤다. 간발의 차이로 트럭을 뛰어넘었다.
 부우우우······.
 태산의 배 밑으로 트럭이 지나간다.
 하지만 힘은 거기까지, 다시 추락!
 태산은 황급히 몸을 뒤집었다.
 지면과 나란히 수평이었던 상태에서 빨래를 짜듯이 허리를 틀어서 상체를 뒤집었다. 꼬인 고무줄 풀리듯, 그 힘을 바탕으로 돌려차기 모양으로 뒤틀린 허리를 편다. 자동으로 다리가 돌아간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굽힌 무릎은 위로 올라가고, 중심을 잡기 위해 쭉 뻗은 다리로 트럭의 지붕을 가볍게 걷어찼다.
 투훙.
 그것을 도움닫기 삼아 다시 한 번 이단 돌려차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태산의 두 다리가 가로질렀다.
 그 퉁겨 오르는 힘을 따라 한 번 더 하늘로 솟구친 태산은 드디어 매달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끼이이익.
 트럭이 멎었다.
 “꺄아아악!”
 한 손에는 새끼고양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가로등에 매달려 있던 태산은 이제 도로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땅 위로 내려왔다.
 
 창백한 얼굴로 지아는 손가락 사이를 벌리고 앞을 보았다.
 눈 앞을 지나가서 멈춘 트럭.
 노란 승합차는 벌써 사라져서 안 보인다.
 그럼 태산은?
 어딘가 있을 줄 알았던 태산의 모습이 안 보인다.
 두리번 거리며 태산을 찾는 찰라······.
 고양이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태산의 동작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뭐, 뭐야?”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변한 지아가 놀라서 소리친다. 갑자기 태산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
 캬우웅.
 “아, 아야아~!”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할퀸 고양이는 올가미가 벌어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태산의 품에서 달아났다.
 “어떻게 한 거야?”
 “······?”
 태산이 오히려 되묻는 것처럼 눈만 멀뚱거렸고······.
 “하, 학생······. 괜찮아?”
 덤프트럭 기사가 놀란 얼굴을 진정시키며 묻는다.
 “안 다쳤어?”
 대답 대신에 태산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가렸다.
 “다쳤어? 어, 어디? 병원 안 가도 돼?”
 뭔 소리냐고 태산이 다시 트럭 기사를 바라본다.
 “그래. 병원!”
 “사람들이 욕 해요.”
 한참만에야 태산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병원에 가면 사람들이 욕한다는 말이 전부다.
 “다쳤다며?”
 “어디 다친 거야? 어디 봐!”
 지아도 걱정스럽게 다가온다.
 “······.”
 대답 대신에 태산이 손을 내민다.
 손등에 네 줄기, 발톱에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어?”
 “뭐야? 고양이야?”
 트럭 기사는 다시 한 번 태산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로 고양이한테 긁힌 손등의 상처 외에는 멀쩡했다.
 트럭 기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산은 고양이가 발톱으로 긁은 손등을 입으로 호호 불어댔다. 지아는 덩치에 안 맞게 그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지아는 웃음을 터드렸고······.
 “엑스레이 안 찍어봐도 돼?”
 아직도 안심이 안 되는지, 트럭 기사가 묻는다.
 “이런 건 엑스레이에도 안 나와요.”
 지아가 태산의 네 줄의 손톱 자국을 들여다 보았다. 트럭 기사도 안심이 되는지 큰 숨을 몰아쉬었다.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이다.
 빵빵빵빵······.
 길을 막고 선 트럭 때문에 뒤에서 클랙슨을 울리며 난리다.
 “학생, 진짜 안 다친 거지, 멀쩡한 거지? 나중에 딴 말 없기다!”
 “······.”
 태산은 달아나다시피 차에 오르는 트럭 기사에게 손짓으로 배웅을 했다.
 그제야 진정을 한 지아가 다시 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
 “어떻게 차를 피했어?”
 “봤잖아?”
 “못 봤어. 네가 위에서 뛰어내린 것 밖에.”
 “그게 다야.”
 “어떻게?”
 “말해도 넌 몰라. 나비양, 나비야앙.”
 태산은 박수를 치며 고양이를 찾았지만, 벌써 달아난 고양이는 어디에도 안 보였다.
 “아아아아······.”
 지아가 커다란 태산의 귀밑머리를 잡고 끌었다.
 “빨리 사실대로 말 안 해? 더 이상 사람 놀래지 말고, 어서 말 해!”
 결국 지아는 태산에게서 자세한 설명은 들을 수 없었고, 대신에 선도의 도인법이 어떠한데 운기가 어떻고, 탄기가 뭐네, 그러기 위해 우선 몸이 유연해야 하는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
 
 손쉽게 주민증 문제를 해결한 지아는 태산을 끌고 주민센터를 나왔다.
 “얼추 백화점 오픈 시간이랑 맞을 거 같아.”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 지아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했다. 골치 아플지도 모르는 주민증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지아도 몰랐기 때문이다.
 의외로 증명사진 촬영에 이어서 주민등록 확인과 주민증 신청은 빠르게 이어졌다.
 어차피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이 있었고, 해마다 강단익씨 부부는 강태산의 건강상의 이유로 몇 년 째 주민증 발급을 미루어 왔었기 때문에 구청에서도 골치 아픈 민원이 해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변호사의 신원 보장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고.
 “그 전에.”
 태산의 말에 한창 신이 나 있던 지아가 멈칫거렸다.
 “할아버지 집!”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어딘지 알아?”
 “대충은······.”
 태산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딘지는 알겠어.”
 태산이 길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태산이 서울에서 산 세월이 7년이다.
 
 ***
 
 주소만으로 집을 찾느라 처음에는 좀 헤맸지만, 태산은 곧 그 위치를 기억해 냈다. 물론 그 와중에 스마트폰의 맵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맞아, 여기야!”
 태산이 잠겨 있는 문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철문은 칠이 벗겨진 상태로 잔뜩 녹이 슬어 있지만, 여전히 주인 이외의 인물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을 밀자, 대문 틈으로 잡초가 무성한 마당이 보였다. 그 안쪽으로 ㄱ자 모양의 건물과 정면으로 마루가 보였다.
 “저기에서 할아버지는 딱지를 접어 주셨어. 그리고 발을 대고 딱지 넘기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지.”
 안마당의 손질되지 않은 감나무의 가지가 담장 너머로 뻗어 나와 있었고.
 “할아버지는 모든 감을 따지 않고 몇 개는 남겨 두셨어. 까치밥이라고. 겨울에는 껍질을 깐 땡감을 주렁주렁 엮어서 곶감을 만들어주시기도 했었어.”
 태산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침 허연 모시 한복을 입은 노인이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복덕방 김씨 할아버지.”
 “어어, 그래.”
 대답하던 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태산을 바라보았다.
 얼결에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태산이 누구인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태산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전에 없이 얼굴이 환했다. 뭐랄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찾아서 행복하다는 것일까? 뭐 그런 느낌이다.
 “갈까?”
 여전히 그가 입고 있는 누렇게 변한 개량한복과 반백의 은발은 젊은 얼굴의 태산과는 언밸런스한 모습이었다.
 
 
 2
 
 
 지아는 먼저 태산을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휘황찬란한 조명에 온갖 색색의 다양한 디자인을 한 옷들을 걸친 마네킹이 일 잘하는 매장 점원처럼 태산을 유혹한다.
 “옷이 날개야. 그런 유행이 뭔지도 모르고, 언제 빨았는지도 모르는 옷은 당장에 벗어버려!”
 이선정 여사의 말씀대로 먼저 캘빈클라인에서 속옷부터 골라준 후, 세븐진에서 청바지와 엠포리오 알마니에서는 셔츠를 골랐다.
 조명과 상품과 누구든지 친절하게 인사하고 서비스 하는 점원에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인파에 태산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지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것이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태산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지아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갈아입혀 놓고 보니,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썩 마음에 들었다.
 모두 그녀가 남친이 있을 때 해 보고 싶은 일이다. 한 가지 아쉽다면, 그 상대가 남친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는 전혀 거리가 먼 거구의 태산이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신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쇼핑이고, 그것은 현대 사회의 모든 도시여자가 다 즐거워하는 일이다. 이제 셔츠와 바지에 맞는 벨트를 살 차례다. 지아는 이미 태산에게 안겨줄 벨트로 아메리칸이글을 생각하고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태산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헤벌쭉 해가지고. 옷이 날개라더니, 자기가 이렇게 달라질 줄은 정말 몰랐다.
 태산은 지금 막 입은 옷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역시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저어, 이 옷은 어떻게 할까요?”
 알마니익스체인지A|X 매장의 종업원이 태산이 입었던 빛바랜 개량한복을 쇼핑백에 담아 보이며 물었다.
 “버려 주세요. 지금 저 옷을 입고 갈 테니까!”
 “안 돼!”
 순간 태산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 그것을 버린단다. 마치 지금까지의 그의 지난 과거가 인 한 마디에 모두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왜 버려!”
 순간 태산이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백화점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태산이 말했다.
 “다 담아 주세요. 제가 가져갈 겁니다.”
 놀란 지아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백화점, 여기는 공공장소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자가 자기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입혀주고, 봐 주고, 골라주고, 여기까지 자기가 데려온 남자한테!
 획!
 화가 난, 그보다는 당황한 지아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태산과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봐, 이봐.”
 태산이 지아를 쫓았다.
 “손님, 계산하셔야지요. 손니임.”
 그리고 다시 태산의 뒤를 백화점 점원이 쫓았다.
 
 “이봐.”
 태산이 앞서가는 자이의 팔뚝을 잡았다.
 “놔!”
 지아는 소리쳤고,
 “손님!”
 때마침 백화점 안전요원이 태산을 잡았다. 팔뚝이다.
 휘릭.
 쿠당!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안전요원은 태산에게 허리 벨트가 잡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 다리가 허공에 뜨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잡아!”
 누가 외치는 소리지? 다른 동료 목소리다.
 다른 안전요원이 태산의 허리춤을 잡았다. 태산이 그의 목 뒤에 옷섶을 잡고 잡아당기자, 그 안전요원의 신형이 앞으로 쑤욱 미끄러졌다.
 정면으로 또 한 사람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하늘을 보고 드러누웠던 요원은 이제야 끝이 났다고 안심했다.
 정면에 안전요원, 그는 58단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재이 대리였기 때문이다. 유도 4단에 합기도, 태권도 합쳐서 8단이다. 거기에 성이 오씨라 별명이 오팔단이다.
 순간 거구의 괴한은 오팔단에게 옷 뒷깃이 잡혔다. 그것으로 끝이다. 유도 4단의 오팔단이라면, 놈을 간단히 제압할 것이다. 그런데······.
 “억! 억! 억!”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놈의 목 뒷깃을 잡았던 오팔단이 팔을 축 늘어뜨리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놈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봐~!”
 놈이 외치는 소리가 더 소란스럽다.
 ‘큰일 났네······.’
 입사한 지 만 2년의 베테랑 안전요원은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도 무너진 것이지만, 이 모습을 고객과 후배 직원까지 모두가 봤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팔이 왜 이런 거야! 이러다가 병신이 되는 것 아냐?’
 어느새 베테랑 안전요원의 걱정은 남의 다리 모양 꿈쩍을 않는 자신의 양팔에 머물러 있었다.
 
 ***
 
 연락을 받은 심 변호사가 당장에 경찰서로 달려왔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옷을 입은 채로 계산을 안 하고 백화점을 나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서 안에는 지아와 태산이 함께 들어와 있었다. 명목은 절도죄다.
 “게다가 카드도 또한 본인 카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찰서로 연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의 말에 심 변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화점 점원도 같이 있었다. 화가 난 지아는 결재를 하려 하지 않았고, 태산은 지불능력이 없었기에 신고 된 셈이다. 문제는 카드가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발급되지도 않는 아멕스 플래티넘이라는 것이다.
 “왜 그랬니?”
 “얘가 나한테 소리 지르잖아!”
 심 변호사의 말에 지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고, 심 변호사는 다시 태산을 바라보았다.
 오늘 벌써 두 번째다. 태산 때문에 경찰을 만난 것이!
 “태산이는 왜 그랬니?”
 태산이 대신에 경찰이 대답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심변호사가 쳐다보자 경찰은 뒷말을 이었다.
 “달아나는 용의자를 제압하려던 백화점 안전요원이 오히려 용의자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지금 현재 병원으로 이송되어 있는데, 골절이 의심된다고 합니다.”
 순간 태산이 항변이라도 하듯이 소리쳤다.
 “골절 아닙니다. 견정혈肩井穴에 침지針指, 일푼 세치! 유술柔術을 쓰는 그가 저를 먼저 메치려고 했기 때문에 중심축 팔을 잠깐 혈을 막아놓았을 뿐입니다.”
 그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강태산이 얼굴을 들었다. 얼굴은 당당했다. 더 이상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엄先嚴의 죽마고우이셨던 심 변호사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런 친절은 오히려 제게 불편할 따름입니다. 하산한 이상, 저도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할 터, 언제까지 이렇게 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끄는 대로 끌려갈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이즈음 해서, 공과 사를 구별했으면 합니다.”
 태산이 몸을 일으키고 정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심 변호사는 태산의 위아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벌써 백화점에서 구입했던 옷을 벗어서 쇼핑백에 담았고, 지금은 예의 그 꾀죄죄한 개량한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지리산에서부터 신고 있던 그 고무신이다.
 아무래도 태산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원인이 있어 보였다.
 “왜 소리를 질렀니, 태산아.”
 “탈상脫喪 후 상주喪主가 상복을 태우는 것은 권리요, 의무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아는 태산이 입고 있는 개량한복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고, 여기까지 쫓아온 백화점 점원은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지아도, 백화점 점원도 저 빛바랜 개량한복이 상복인 줄 알았다면 그런 실수를 안 했을 것이다.
 심 변호사의 입에서 길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실수구나. 처음에 태산이 아직 상복을 벗지 않았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경찰도 더 이상 아무 말 안 했다.
 심 변호사는 백화점 점원에게 직접 현찰로 알마니 셔츠 값을 지불했고, 지아에게는 카드를 압수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일을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이 내 실수다. 미안하구나, 태산아.”
 “바쁘시다는 것 압니다. 더 이상 시간을 뺏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다, 태산아. 이건 네가 내게 신세를 지는 게 아니고, 고객으로 너를 제대로 대우를 못한 우리 로펌의 실수다.”
 “고객과 변호사의 관계라면, 어제 하룻밤 재워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태산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병역은 어떻게 할래?”
 그 말에 태산은 입을 열지 못했다.
 “세상을 살려면 교육과정 이수부터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 로펌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할 텐데? 아직 우리가 만나고 함께 풀어야 할 일이 많단다, 태산아.”
 심 변호사의 말에 강태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많은 것 같았다.
 
 ***
 
 강태산의 패션 체인지는 계속 되었다.
 재판이 있어서 결국 심 변호사는 다시 법원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래서 지아에게 심심당부를 하고 떠났다.
 카드는 지아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강태산에게 맡겼다. 이번처럼 지아가 자기가 카드를 갖고 있다는 권력을 이용하여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말이다.
 “미안해······.”
 지아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백화점에서는 태산이 소리를 치는 바람에 자신이 무안당했다는 생각에, 아니 그 보다는 태산이 갑자기 소리쳐서 무서워서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왔지만, 결국은 자기 잘못이다.
 “알면 되었어. 그리고!”
 태산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대신에······.”
 소리치던 태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 옷 좀 골라줘!”
 
 ***
 
 쇼핑은 계속되었다. 물론 다른 백화점에서다.
 그런 창피-라고 쓰고 쪽이라고 읽는다.-를 당하고 다시 그 백화점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서울에는 백화점도 많고 로데오거리도 많았다.
 이어서 태산은 지갑과 양복, 정장화 등을 더 구입했고, 그렇게 쇼핑 봉투를 양 팔에 가득 집어든 후, 지아는 태산을 자기가 자주 가던 헤어샵으로 안내했다.
 그것만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바꾸는 셈이다.
 “지아씨 남자친구?”
 단골 샵의 헤어디자이너인 유미 언니가 태산을 자리에 안내하면서 묻는다.
 “아아니요!”
 “아닙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둘이 동시에 소리치는 것이 이상하다.
 더욱 이상한 눈으로 태산과 지아를 번갈아 바라본 유미 언니는 곧 쟈니킴이라는 남자 헤어디자이너에게 태산을 인계하고 자리를 옮겼다.
 지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저런 거구에 촌놈이 내 남자친구라는 거야!
 지아는 태산을 그냥 두고 한 쪽 구석의 소파에 앉아서 패션 잡지나 뒤적이기 시작했다.
 쟈니킴이 태산의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빗질을 하면서 물었다.
 “학생은 머리 염색한 거야? 즈엉말 곱게 들었네.”
 “제 머리입니다.”
 또 화제가 끊어졌다. 수염까지 밀어서 말끔한 얼굴의 태산은 아무리 나이 많게 봐도 이십대 초반인데, 머리만 반백의 은발이다.
 “그럼······ 유전인가? 요즘은, 유전 때문에 머리가 빨리 샌다고도 하더라구.”
 유미 언니라는 헤어 디자이너는 아무래도 강태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부작용입니다.”
 “부작용? 무슨······.”
 쟈니킴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진다.
 “약을 잘못 먹었습니다.”
 그 때까지 태산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잡지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지아도 얼굴을 바짝 들었다. 약을 잘못 먹어서라······. 루게릭이니까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슬램덩크의 강백호?”
 지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백호는 빨강머리였지!
 지아의 말에 유미 언니도 박수를 치며 공감한다.
 “으아, 맞다. 나도 들은 적 있어. 너어무 독한 약을 먹으면 독성이 머리로 뻗는다고. 그래서 그렇구나~!”
 “아니요. 큰스님 몰래 백사白蛇 까치살모사를 잡았는데, 들킬까봐 굽지 않고 날로 먹었거든요. 그랬더니, 독이 머리로 뻗쳤어요. 까치살모사는 까만 놈이 정상인데, 가끔 독이 온 몸에 뻗쳐서 백사가 나와요. 고 놈이 아주 영물이죠, 맛도 좋고!”
 태산은 생각만으로도 침이 도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로부터 한참을 쟈니킴과 지아는 움직이지 못했다.
 
 대충 머리 손질도 끝이 났다. 커트가 끝나자, 태산의 머리를 감고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며 마지막 손질을 한다.
 “그래도 머릿결이 좋으아~! 남자가 이렇게 머릿결이 좋기 힘든데.”
 “아, 빗질을 자주 해서.”
 지아는 아무래도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태산이 사내답지 않게 미주알고주알 떠들 것 같고, 그러다가 괜히 헛소리를 할 것 같아서다.
 “큰 병을 앓았어요. 거의 불치병으로 알려진······. 그래서 며칠 전까지 지리산에서 요양을 했지요.”
 “아아~!”
 쟈니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까치살모사니, 백사니 하는 말이 이해가 가나 보다. 서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좔 생각했으오. 머릿결을 관리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빗질이 최고야아. 그럼, 항상 빗을 갖고 다니겠네에?”
 “네.”
 태산의 말에 쟈니킴이 피식 웃었다.
 알마니 셔츠에 세븐진 청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빗을 꽂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빗인데?”
 머뭇거리던 태산이 셔츠 주머니에서 빗을 꺼냈다.
 참빗이었다.
 
 ***
 
 강태산의 쇼핑의 대미는 저녁 때 합류한 심 변호사가 만들었다.
 “우선 급한 대로 한 달 임대를 조건으로 오피스텔을 구했다. 사람을 시켜서 청소도 해 놓았고.”
 양손에 이불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심 변호사가 방문을 열었다.
 “우와~!”
 태산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온 지아가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이게 내가 꿈꾸던 공간이야. 나만의 공간!”
 큰 규모는 아니지만, 복층으로 된 구조로 생활공간과 수면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전기밥통과 전기포트, 전자레인지 등 기본적으로 주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침대와 소파도 옵션이지만,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의류와 식료품만 갖추면 된다.
 거기에 오늘 종일 한 게 옷 사는 것이었으니······.
 “꿈 깨! 너는 시집갈 때까지 밖에서 잘 생각, 꿈에도 하지 마.”
 “피이······.”
 “자, 이제 또 부족한 게 뭐 있을까?”
 “우선 옷은 내가 정리해 줄게.”
 뭐가 그리도 신이 난 것인지 지아가 냉큼 안으로 들어와 서랍과 옷장 문을 열고 쇼핑백들을 정리한다.
 “이거 끝나면 당장 마트 가자. 마트~!”
 지아는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흥이 나 있었다. 그것도 이미테이션이 아니라 진짜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아, 아쉽네. 남자만 아니라면 만날 여기 와서 놀 텐데.”
 “떽! 다 큰 계집애가 어딜 드나든다는 거야?”
 “아빠는~! 내가 남자만 아니라면이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또, 나보고 도와주라며? 지리나 문화도 모르니까 도와주라고 말씀하신 지 아직 잉크도 안 말랐네요.”
 두 부녀는 가족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가지면서, 태산이 오피스텔을 둘러볼 수 있도록 시간을 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선 태산이 조용히 오피스텔 실내만 둘러보자, 심 변호사는 가슴이 조마조마해 졌다.
 혹시 태산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싶어서다.
 “무작정 우리 집에서 지내도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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