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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 (1화)

2017.06.30 조회 596 추천 3


 카오스 오션 1권 (1화)
 작가서문
 
 
 역사를 바꾸는 대체역사소설이 무척이나 재미있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신화를 좋아했던 저에게 많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저는 신화도 역사의 한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북유럽 신화들도 지금은 하나둘 진짜 역사라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고, 중국의 고대 신화들도 대부분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역사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저로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아쉬운 점이 많았었는데 시대 상황과 가정을 합쳐 모티브를 잡으면 재미있겠더군요.
 이 세상이 차원이 겹쳐져 신화들이 공존하는 혼돈의 대지라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신들의 무궁한 모험담은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인데 그들의 모험이 진짜 사실이었다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재미있겠지요?
 요즘 아이들이 ‘신과 함께’라는 만화책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신화의 세계에 전부터 관심이 많은 것을 보니 저를 닮은 것 같습니다. 큰아이가 저의 첫 번째 독자인지라 이야기를 만들어 보여 주고 싶기도 합니다.
 
 주인공도 신화의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살아온 삶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화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구요.
 주인공은 격변했던 대한민국의 현대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했던 일들로 인해 인과가 얽혀 있는 신화의 주인공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신화와 신화의 만남이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허구지요.
 하지만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허구가 되지 않도록 써 볼 참입니다. 제가 바랐던 좋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아서 말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롤로그
 
 
 한 번의 죽음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웃기게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이지 전혀 별개의 세상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 생각했던 나는 변했다. 새로운 세상이 나의 쓸모없고 하찮기만 했던 자만심을 저 멀리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새로운 세상이었지만 운이 나쁜 편은 아닌 것 같다.
 죽음 이후 얻게 된, 누군가 남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지식이 나를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특별한 선물을 받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새로운 세상에 그럭저럭 맞추어 나갈 자신이 생겼다.
 그렇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두려움과 흥분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두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가볼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파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장. 탈출!
 
 
 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호로병 같은 계곡 속에 수용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다.
 깊은 계곡 안인데다가 잔월마저 구름에 가려져 있어 수용소는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바람을 따라 구름이 흘러가고 차가운 달빛이 비쳤다.
 구름이 흘러가며 새어 나오는 달빛을 따라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내부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수용소 외곽에는 날카로운 철가시가 달린 철조망이 삼중으로 겹겹이 쳐져 있었고, 목조로 만들어진 막사들이 절벽 앞에 세워져 있었다.
 감시하는 이들이 있을 법도 하건만 어쩐 일인지 수용소 안은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다.
 연병장이 드러났다.
 정적의 원인은 그곳에 있었다.
 흙바닥 위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가 죽은 자들이었다.
 하나같이 가슴이 뻥 뚫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가슴으로 쏟아낸 피로 인해 대지가 축축하게 적셔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피 냄새도 진동했고, 사지가 제멋대로 꺾여 있는 것이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적어도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토록 기괴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것일까?
 생존자가 전무한 수용소 안은 싸늘한 적막감만이 맴돌고 있어 누구도 이 참상에 대해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탁! 타타탁!
 작은 소음이 수용소의 적막감을 깨뜨렸다.
 사사삭!
 삼중으로 된 철조망 일부가 갈라지며 수용소 안으로 조용히 누군가 들어섰다.
 파파팟!
 전신을 검을 옷으로 가리고 복면을 한 인영은 죽어 있는 이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막사 뒤편으로 향했다.
 막사 뒤에도 시신들이 즐비했다.
 앞쪽에 있는 이들과는 달리 모두 머리가 부서진 채 죽어 있었다.
 처음 수용소 안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복면인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손을 쓴 자가 둘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침투하기 전에 알아낸 정보와 다른 상황이라 당혹스러웠다.
 ‘일단은 아이부터 구해야 한다.’
 파팟!
 결단은 빨랐다.
 복면인은 어느새 목적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향한 수용소 뒤편에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저곳이군.’
 절벽에는 아래쪽에는 시커먼 입구를 드러낸 동굴이 있었다.
 ‘으음, 이곳에서 뭔가를 캤었나 보군.’
 광산에서나 사용할 만한 장비들이 입구에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이들이 안에서 광석을 캐내는 노역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수용소에 갇힌 이들을 다 죽인 것을 보면 찾고 있는 것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동굴 안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수용된 이들을 모두 죽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캐내려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자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다른 것이기에 복면인은 애써 궁금증을 접었다.
 사사사삭!
 발걸음을 가볍게 한 복면인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자 수용소는 다시 적막감에 싸였다.
 타타탁!
 10여 분이 흐른 뒤 복면인은 커다란 포대를 앞으로 매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매고 있는 포대 안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피피피피핏!
 동굴을 나선 복면인을 향해 날선 파공음이 울렸다.
 “헛!”
 팟!
 갑자기 나타난 엄밀한 공세에 헛바람을 삼킨 복면인의 신형이 꺼지듯 동굴 앞에서 사라졌다.
 티티티틱!
 슈아앙!
 날카로운 기세가 절벽을 비롯해 대지에 박혀 든 것과 동시에 묵직한 파공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파공음은 대기를 부수며 동굴 입구를 향해 몰아쳤다.
 콰콰콰쾅!
 포위하듯 반원을 그리며 날아든 파공음에 동굴 입구가 폭발과 함께 산산이 부셔져 나갔다.
 “컥!”
 답답한 신음과 함께 사라졌던 복면인이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타타타탁!
 상처를 입은 듯 잠시 비틀거리던 복면인은 빠르게 신형을 바로 세운 후 들어왔던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복면인의 등 쪽에 너덜거리는 상처가 보였다. 품에 품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아선 탓에 난 상처였다.
 슈슈슈슈슝!
 다시금 날선 파공음은 복면인을 쫓고 있었다.
 복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암기가 날아오는 뒤를 향해 손을 뿌렸다.
 퍼퍼퍼퍼펑!
 폭발과 함께 반짝이는 은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파팟!
 자신의 방어가 성공했음을 의심치 않는 복면인은 수용소 밖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부아아아앙!
 묵직한 파공음이 다시금 들려왔다.
 처음에는 창졸지간에 기습을 당해 공격을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파공음이 들리자마자 복면인은 지체 없이 손바닥을 뻗어 땅을 가리켰다.
 수인을 짚듯 그의 손가락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콰지지직!
 우르르르르!
 포를 뜨듯 땅거죽이 벗겨지며 치솟아 올랐다.
 뒤에 몰려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복면인은 두께가 1미터가 넘어 보이는 땅거죽은 들어 올린 것이다.
 퍼퍼퍼퍼펑!
 폭발과 함께 흙먼지가 비산했다.
 다시 구름에 가려지는 달빛으로 인해 어두워지는 계곡 안이 흙먼지로 인해 칠흑같이 변했다.
 복면인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찾아라!”
 폭발이 있은 직후,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날카로운 소리가 계곡 안을 울렸다.
 파파팟!
 복면인의 종적을 쫓기 위해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사나이가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으음, 대단한 놈이다.”
 그의 입에서 침입자에 대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침투가 아예 불가능하도록 수용소 바깥쪽에는 많은 병력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절벽 위쪽에도 많은 인원이 수용소를 감시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결계 안에서 아이를 빼내기 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습에 가까운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낸 후 도주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와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능력을 사용했다.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지?’
 팔방에서 날아드는 암기를 보지 않고 박살내 버렸다.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몇 톤에 달하는 흙더미를 들어 올려 자신의 공격도 막았다.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처리한 것을 볼 때 염동력을 사용하는 S급 능력자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상처를 입은 채로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포위망을 간단히 뚫어 버렸다.
 “어떤 수법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능력자가 분명하다. 잘못하면 놓칠지 모르니 따라가 봐야겠군.’
 사나이는 수하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팟!
 구덩이를 잠시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나이는 곧바로 신형을 움직였다.
 콰쾅!
 사나이가 뒤따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렬한 폭발음이 울렸다.
 ‘이런!’
 사나이가 속도를 높였다.
 이상한 것을 발견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관목 숲 사이에 걸레처럼 널려 있는 핏빛 물체들이 보였다.
 “이럴 수가!”
 전신이 갈가리 찢겨 있었지만 자신의 수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전수한 힘의 잔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모두 일 수에 당했다.”
 적은 수하들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몰살시켰다.
 자신의 힘을 일부 나누어 주었다고는 하지만 사나이로서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놈이 쓴 수법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대기를 압축했다가 폭파시킨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대기를 압축시켜야 이런 파괴력이 나타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가를 압축시켰다가 폭파시킨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강철에 비견될 정도로 단단한 육체를 가진 수하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렇게 산산조작이 났다면 분명 다른 힘이 작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도대체 어떤 놈인지 모르겠군.”
 사나이의 얼굴이 심하게 굳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난 뒤부터 미지의 적이 가지는 공포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나이였다.
 
 ***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불볕더위가 찾아왔다.
 정오가 아직 지나지 않았음에도 신작로는 열기로 달아올라 꿈틀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일찍부터 찾아든 더위로 인해 오후가 다가오자 만물이 지쳐 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농가가 있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수도권 인근의 한 야산 근처도 더위로 인해 대지가 몸살을 앓았다.
 더운 열기로 인해 당연히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변의 풍경은 한산했다.
 부우우웅!
 주변의 즐비한 논밭을 따라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동차가 신작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차체는 물론이고, 창문까지 검은색으로 짙게 선팅이 되어 있는 자동차가 조금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끼이익!
 승용차 열기로 휩싸인 신작로를 뚫으며 농가가 보이는 도로 옆에 멈췄다.
 탁!
 진한 검은색의 문이 열리며 역시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사나이가 차에서 내렸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사나이는 검정색 양복에 검정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척이나 검은색을 좋은 하는 모양이었다.
 탁!
 “으음, 좀 덥군.”
 사나이는 차문을 닫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선글라스 안으로 비쳐 들었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오후가 되지 않았음에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조금 구겨졌군.”
 중요한 곳을 방문하는 듯 사나이는 아래위 정장을 다시 점검하고 넥타이까지 고쳐 맸다.
 사나이는 도로 옆에 나 있는 작은 소로로 눈길을 돌렸다.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소로의 끝에는 세 채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곳인가?”
 농가를 바라보는 사나이의 눈가가 마음의 동요를 말해주는 듯 작게 떨리고 있었다.
 “흔들리지 말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후우∼”
 소리가 들리도록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사나이는 작은 소로를 따라 올라갔다.
 세 채의 농가 중 가장 큰 집의 문 앞에 섰다.
 언제 만들어진지 모를 정도로 빛 바랜 나무 대문이 사나이를 맞았다.
 탕! 탕!
 “선생님!”
 사나이는 문을 두드린 후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집안으로 알렸다.
 “누구신가?”
 약간 시간이 지난 후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렸다.
 “접니다. 선생님.”
 사나이의 대답에 잠겨 있는 대문이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아니, 자네가?”
 “언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나이를 확인한 노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어쩐 일인가?”
 “지난 몇 달 간 일본에 있다가 어제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허어, 그래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구먼.”
 그간의 격조가 어떤 이유였는지 확인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떠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아닐세. 바쁘게 일하는 사람인데. 이 늙은이까지 신경 쓰이게 하면 쓰나.”
 “아닙니다. 제 불찰이 큽니다.”
 “허허,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밖에 세워놨구먼.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노인은 사나이의 손을 잡아끌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손님이 오셨으니 냉차 좀 내와요. 자! 자네는 나와 함께 방으로 가세.”
 부엌을 향해 손님이 왔음을 알린 노인은 사나이를 사랑채로 이끌었다.
 “예, 선생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건넌방의 문이 살며시 열렸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누구지? 할아버지께 저런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장혁은 의문 어린 눈빛으로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소란이 일며 나타난 손님은 장혁에게 작은 파란이 일게 만들었다.
 잠깐 스쳐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못 본 것이겠지.’
 고개를 흔들며 장혁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차를 사랑채로 가져가기 위해서다.
 “할머니!”
 부엌문을 열고 장혁이 할머니를 불렀다.
 “금방 만드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혁아!”
 “예, 할머니.”
 혁은 부엌문에 기대어 냉차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방금 들어온 그 손님은 분명 뭔가가 있어.’
 냉차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장혁의 생각은 사랑채로 들어간 낯선 손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이다.
 뭔지 모르지만 오늘 찾아온 손님은 아주 위험해 보였다.
 
 사나이는 사랑채로 들어선 후 안을 둘러보았다.
 본래는 네다섯은 너끈히 지낼 수 있는 사랑채지만 고서적이 벽을 따라 가득 쌓여 있어 겨우 사람 하나 누울 만한 공간만 남은 터라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여전하시구나.’
 방금까지 보고 있었는지 작은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고서로 보기 드문 진귀한 서적임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책상을 치운 후 자리에 앉았다.
 “자, 앉게.”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아닙니다.”
 노인의 만류에도 사나이는 절을 올렸다. 노인 또한 과한 예라 생각했는지 반절을 했다.
 “편히 앉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전 이게 편합니다.”
 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며 노인이 편하게 있을 것을 권유했지만 사나이는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듯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하하! 사람도. 그래, 자네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일본에 다녀왔었군. 그래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사나이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터라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 노인이 연유를 물었다.
 “전자산업을 한 번 시작해 볼까 해서 일본에 가서 현지 시장조사를 좀 하고 왔습니다.”
 “하하! 그쪽으로 진출할 예정이라면 확실히 전망이 밝기는 하지. 자네 사업 수완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쪽 분야까지 진출할 줄은 정말 몰랐네.”
 노인이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 쪽은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보고 있는데 잘하면 성과를 조금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기업들이 속속 진출할 것이 예상되니 고전은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하고 있는 사업은 조금씩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사람, 엄살은. 자네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을 믿으시게. 쓸데없는 걱정으로 사업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말이야.”
 “예, 선생님.”
 노인의 격려에 사나이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할아버지, 냉차 가져왔습니다.”
 문밖에서 조금은 앳된 장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차가 만들어지자 가지고 온 것이다.
 “어서,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온 장혁은 유리컵에 담긴 오미자냉차 두 잔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못 보던 아이로군. 누구지?’
 사나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노인의 신상이나 가족 사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자신의 정보에는 없었던 이가 장혁이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후, 자네는 한 번도 못 봤을 걸세. 얼마 전에 막내 손자로 들인 아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사나이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어쩔 수 없으셨겠지······.’
 노인에게 자식은 많았지만 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자식들 중 둘이나 단명을 했고, 남아 있는 자식들도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대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가서 할머니를 도와주거라. 점심 식사는 손님 것도 차리라 말씀드리도록 하고.”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당부를 들은 장혁은 곧바로 방을 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그래, 자네가 볼일도 없이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일로 왔는가?”
 장혁이 나가자 노인은 사나이가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으음.’
 사나이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 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에 다른 음색이다.
 흔들리지 않는 굳은 눈동자에 어린 눈빛이 자신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으음, 이미 알고 계셨던가?’
 온화함이 아니라 결연하기 만한 눈빛을 보면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사나이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가감 없이 꺼내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고 했는가?”
 노인이 경직된 어조로 되물었다.
 “예, 선생님. 아드님께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관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않도록 협조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으음······.”
 정중하지만 단호한 부탁에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그것을 얻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거늘. 이미 알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저 사람이 직접 온 것을 보니 태륜이라는 곳에 대해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거대한 권력의 비리를 파헤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낸 터라 누구도 모르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태륜이라는 집단이 가진 힘이 가공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제대로 틀어졌다는 생각에 노인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오늘 가족들이 전부 모인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허허, 천려일실이라 했던가. 한순간의 실수가 가문을 멸문으로 이끄는구나.’
 태륜은 결코 자비로운 집단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면 다음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사나이가 찾아온 것을 보면 태륜이 손을 쓰기로 작심을 한 것이니 앞으로 전개될 수순은 뻔한 것이었다.
 태륜에서는 자신의 가문을 지우기로 한 이상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혼자 온 것을 보면 기회는 지금 뿐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문이 이어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력이 전부 동원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노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노인은 먼저 시간을 벌기로 했다.
 “미안한 이야기네만, 생각해 볼 시간을 좀 주도록 하게.”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오늘 중으로 결정을 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반응을 예상을 하고 있었던지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는 말에 노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늘 중으로 말인가?”
 “저도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합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사나이를 보며 노인은 정말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으음, 알았네. 마침 아이들이 다 모이기로 했으니 결정이 나는 대로 가부를 말해주겠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 일로 찾아뵙게 돼서.”
 사안의 흉험함과는 달리 사나이는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숙였다.
 “아니네. 자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네. 천천히 점심을 들고 난 뒤에 결정을 듣고 가도록 하게.”
 “예, 선생님.”
 ‘다행히 불행한 사태는 피할 수 있겠구나.’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날 것 같아 굳어 있던 사나이의 얼굴이 약간은 풀어졌다.
 “난 아이들을 부를 테니 자네는 여기서 차를 들고 있게나.”
 “그러십시오.”
 사나이의 대답을 들은 노인이 밖으로 나섰다.
 노인이 나가자 사나이는 말없이 차가운 결로가 위태롭게 서린 컵을 집어 들었다.
 ‘차군.’
 꿀꺽!
 차가운 냉차가 사나이의 목젖을 적셨다.
 
 사랑채를 나선 노인은 부엌 쪽으로 가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임자!”
 머리에 은비녀로 쪽을 진 노파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오늘 점심을 넉넉히 준비를 했으면 해서.”
 “점심을 넉넉하게요?”
 “조금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찾아오신 손님도 있고, 막내 손주 녀석도 많이 먹을 테니 조금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아이들 모두에게 조금 빨리 오도록 전화도 좀 넣고.”
 “아, 알았어요.”
 어찌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간단한 말임에도 노인의 아내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대답을 했다.
 “손님 때문에 이만 사랑채로 들어가야 하니 준비가 되면 기별을 넣어줘.”
 “알았어요.”
 당부를 끝낸 노인은 뒤돌아 사랑채로 향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름진 아내의 눈가가 가파르게 떨리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랑채로 다시 돌아온 노인은 자리에 앉은 후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점심이 좀 늦을 걸세.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방 안에서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점심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여가 지나자 바깥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자식들이 집에 도착했기에 벌어진 소란이었다.
 “선생님, 이제 다들 왔나 보군요.”
 “점심이 준비되면 부를 것이니 그냥 앉아 있게.”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노인이 만류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그물 안에 든 고기였기에 사나이는 노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노인의 말대로 잠시 후 장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오냐!”
 대답을 한 노인이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마루에 점심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이만 나가세.”
 “예, 선생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마루에 먹음직스러운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집안의 온 식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앉게.”
 마루에 오른 노인이 자리를 권했다.
 “고맙습니다.”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번질거리는 마루에 사나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들, 먹자.”
 자리에 앉은 노인이 수저를 들며 말하자 집안 식구들이 일제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낯선 손님의 방문 때문인지 몰라도 노인과 식구들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난 뒤, 노인의 손짓에 상이 옆으로 치워졌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의논할 것이 있어서다.”
 가문의 법도상 식구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들 궁금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현수야!”
 잠시 가족들을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아버님.”
 “네가 가지고 있느냐?”
 “예.”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이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듯 현수라 불린 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가지고 오너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자인 현수는 바깥으로 나가 얼마 전 자신에게 제보와 더불어 봉투에 담겨 배달되어 왔던 장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사나이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로부터 장부를 받아 든 노인은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
 “으음, 현수야.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구나.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안에 담긴 내용이 범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현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여기 있네.”
 노인은 검은색 장부를 사나이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들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 준다니 고맙네. 그렇지만 자네의 마음만 받아야 할 것 같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인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묻고 있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닐 것이야.”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의 소지가 될 장부가 무사히 회수되었다.
 보고만 잘한다면 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나이는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본가의 식솔들도 이렇게 다 모였고, 이제 원하던 것도 얻었으니 그만 나오시게.”
 노인은 사나이를 바라보며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무슨······.”
 알 수 없는 노인의 말에 반문하려던 사나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왜, 왜 이러지? 선, 선생님······.’
 어두워지며 사나이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크크크, 역시! 남가의 가주라 다르군. 내가 있음을 알아차리다니 말이야.”
 정신을 잃어버린 사나이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륜에서 왔는가?”
 사나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크크! 역시, 알고 있었군.”
 “타인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 티가 나더군.”
 “역시, 아직은 완벽해지지 않은 거로군.”
 사나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완벽하게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남가의 가주가 하는 평가라면 신뢰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이 녀석의 의식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주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아이들이 이곳에 당도하지는 않았지만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도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쓸데없는 일일 뿐이었을 테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단번에 끝내주면 고맙겠네.”
 “크하하하하! 죽을 자리를 알았다는 건가? 역시 남가의 가주로군.”
 웃음과 함께 싸늘한 살기가 집안에 번졌다.
 “자네 같은 사람이 온 이상 본가의 명운이 이제 끝이 났으니 더 이상의 수치는 주지 말게.”
 노인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는 듯 힘없이 말했다.
 ‘속셈이 뭐지?’
 상당한 피해를 각오했기에 타인의 의식 속에 숨어서 왔다.
 아주 힘든 전투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정말, 반항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남가의 가주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에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지 않았나? 반항은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이지. 본가를 이 정도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힘을 가졌다면 그만한 긍지도 있을 터. 깨끗이 끝내주게.”
 “후후후. 태륜에 들기 위해 맡은 일이기는 하지만 남가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반항하지 않겠다니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군. 좋아! 번거롭게 만들지 않겠다니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이 단번에 끝내주지.”
 나쁘지 않는 일이다.
 반항한다면 자신도 꽤나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태륜으로 들어가도 경쟁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피해를 입으면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사나이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르르······.
 마루를 딛고 일어서자 아무것도 없는 사나이의 오른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듯 뭔가가 빠져나왔다.
 예리하기 그지없는 검은빛의 검이 장심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살을 뚫고 검이 튀어나와 고통스러울 만도 하건만 사나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혹시나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흑기검(黑氣劍)이 세상에 현신한 이상, 기회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숨겨진 한 수는 생각도 말라며 사나이는 흑검(黑劍)을 휘둘렀다.
 번쩍!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섬광이 마루 안에 가득했다.
 노인과 그의 자손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차디찬 섬광이었다.
 
 
 
 2장. 죽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식사를 마치고 난 후부터 오늘 온 손님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대화도 무척이나 이상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뭔가 벌어질 것 같구나.’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기분 나쁜 기운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럴 수가!’
 불길하다는 예상은 적중했다.
 할아버지가 정체를 아는 것 같은 말을 흘리자 손님의 기운이 갑자기 변해 버렸으니 말이다.
 흘러나오는 기운이 너무 차다.
 뼛골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다.
 기운이 완전히 변해 버렸고 얼굴도 다른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운과는 달리 온화했던 모습이 이제는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풍기는 기운과 한없이 맞아떨어지는 얼굴이다.
 더 이상 할아버지가 반가이 맞아주던 손님이 아니다.
 장혁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에 다른 기운이다. 도대체 저자는 뭐지?’
 그리 선해 보이던 눈매를 가진 자가 악마의 모습을 가진 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터라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두려운 생각에 장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힘을 끌어올렸다.
 ‘히,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기운이 솟지를 않았다.
 주변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저자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는 기운 때문이다.’
 사나이에게서 점성이 강한 액체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점점 더 확산되어 가며 의지를 감식해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친친 감겨 오며 싸울 의지마저 빼앗아 가고 있었다.
 사나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상대에게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절망의 탄식과 같았다.
 ‘정말 무서운 기운이다.’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릴 만큼 진한 사기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압박을 할 정도라면 내가 가진 힘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장혁은 눈앞의 사나이에게 자신의 힘 정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는 주변을 살폈다.
 구원의 눈빛으로 삼촌들을 봤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삼촌들도 당했구나.’
 모두가 두려운 눈빛으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와 사나이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처럼 삼촌들도 사나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속박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저건 뭐지? 검이 손바닥에서 빠져나오다니!’
 알 수 없는 대화도 잠시, 장혁은 놀라운 광경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사나이의 손에서 강한 사기가 물씬 흘러나오며 검은 물체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 무섭다. 어떻게 저런 기운이······.’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검에서 풍기는 기운은 사나이가 쏟아 내던 사기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한 존재였다니.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구나.’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한 후부터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에게 수학하며 자신이 넘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여겼는데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죽음 앞에 선 가련한 존재일 뿐이었다.
 번쩍!
 악마의 손길 같은 은빛 섬광이 나타났다.
 ‘커헉!’
 가슴이 반으로 쪼개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크으으윽······.’
 미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애써 잡으며 혁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이, 이제는 죽는 건가?’
 혼란스러움도 잠시, 생명이 흩어지는 듯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죽음이 찾아올 줄 몰랐던 장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려 했다.
 ‘크으으윽!’
 장혁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심장 어림에서 시작된 통증은 갈수록 심해져 갔다.
 마지막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육체는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이,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툭!
 가늘게 이어지던 의지가 끊어지며 의식이 사라졌다.
 힘차게 박동하며 온몸으로 피를 보내야 할 심장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둠보다 깊은 영원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호오!”
 눈을 부릅뜬 채 제일 마지막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장혁을 바라보는 사나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크크크크, 어린놈이 제법이군. 심장을 가르고 심맥까지 산산이 조각났는데도 불구하고 버티다니 말이야.”
 나름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던 노인은 물론이고, 그의 자식들까지 한순간 죽음에 이르렀다.
 그런 자신의 힘을 버텨 낸 존재이기에 사나이가 노인의 막내 손자인 장혁에게 흥미를 느꼈다.
 “알려지면 골치가 아파지니 증거부터 없애야겠지.”
 그가 느끼는 흥미로움도 잠시였다. 지금은 이들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 감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억지로 버텨 내던 장혁의 죽음을 확인한 사나이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마루를 내려와 집 바깥으로 나갔다.
 스르르!
 사나이가 집을 나선 후 알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됐다. 놀랍게도 죽어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희미한 푸른 기운이 빠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희미한 기운들은 아지랑이처럼 움직이더니 서서히 장혁의 몸으로 이동했다.
 사나이의 존재만큼이나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죽음을 맞은 이들의 심장에 고여 있던 기운들이 육신을 이탈해 장혁에게 모이고 있었다.
 아지랑이들은 알고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갈라진 혁의 가슴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열한 가닥의 기운이 스며들고 난 잠시 뒤, 장혁의 몸에 하얀 빛이 점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혼이 빠져나오는 듯 죽어 있는 몸 위로 안개 같은 흰 기운이 서렸다.
 부르르르!
 잠시 뒤, 장혁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진동하듯 떨리던 혁의 몸에 서린 하얀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더니 이내 침묵에 휩싸였다.
 끼이익!
 기이한 현상이 사라지자마자 바깥으로 나갔던 사나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의 작지 않은 통 하나가 들려 있었다.
 통을 내려놓은 그는 엎어진 시신들을 반듯하게 눕히고는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했다.
 “이상은 없군.”
 목표한 대상들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찰칵!!
 사나이는 셔터를 눌러 태륜에 들어가기 위한 임무를 완수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남겼다.
 “후후, 저걸 붓고 불만 붙이면 되는 건가? 그나저나 까다로운 놈들이군, 반드시 이 액체를 뿌린 후 불을 붙여야 한다니 말이야.”
 태륜에서는 죽인 후에 반드시 통 안에 든 액체를 시신들의 몸 위에 뿌리고 불을 붙여 소각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다른 방법으로 화재로 위장해도 되지만 특별이 인화 물질까지 준비해 준 것을 보면 그렇게 지시를 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후후후, 이게 무엇이든 증거만 완벽히 없어진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사나이는 자신이 들고 온 통을 집어 들었다.
 지시받은 대로 통의 뚜껑을 열어 망설임 없이 시신들 위에 액체를 뿌렸다.
 주르르륵!
 삼분의 이쯤 액체를 뿌린 사나이는 도화선을 만들려는 듯 통 안에 든 액체를 조금씩 흘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문을 나선 후 작은 소로까지 나오자 더 이상 액체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휘익!
 사나이는 빈 통을 집 안으로 던졌다.
 치익!
 땅 위로 도화선을 만든 사나이는 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땅을 따라 흘러내린 액체 위로 던졌다.
 화르르르!
 도화선에 불이 닿자 화염이 솟구쳤다.
 보통 불은 아닌 듯 푸른색으로 치솟은 화염이 도화선을 따라 빠르게 집 안으로 번져 나갔다.
 화르르르!
 잠시 뒤, 불이 붙은 듯 집 안에서 뭉클거리며 연기와 함께 화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이걸로 임무 완수군.”
 부여된 임무를 깨끗하게 끝낸 사나이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검은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농가를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차에 올라타더니 곧장 자리를 떠났다.
 화르르르!
 사나이가 탄 차가 떠나고 난 뒤 화염이 농가를 완전히 휘감기 시작했다.
 티티틱!
 화르르르르!
 치솟아 올라 튄 불티가 옆에 있던 건물에도 옮겨졌고, 이내 거대한 화염으로 불타올랐다.
 
 ***
 
 사물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어둠은 사람을 미지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이 어둠이 가진 본래의 속성이다.
 인간은 어두운 곳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진다.
 특히나 홀로 있을 때 찾아온 어둠은 많은 두려움을 인간에게 선사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공간이 보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되어 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지의 공간은 한자리에서 버텨 온 것이 분명하다.
 미지의 공간이 있는 곳은 참으로 특이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
 감옥으로 보이는 곳의 중심에 따로 떨어져 일정 구역 허공에 턱 하니 자리했으니 말이다.
 미지의 공간을 가두고 있는 감옥도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굵은 쇠창살이 한쪽에 나 있는 창문을 가로막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문이 없는 기이한 감옥,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둠!
 어느 사이인가 감옥 안이 밝아졌다.
 먹구름이 걷힌 듯 감옥의 천장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강렬한 햇살을 감옥 안을 비추고 있다.
 햇살이 비추고 있지만, 감옥 안은 밝지가 않았다.
 놀랍게도 감옥 안에 존재하는 미지의 공간이 어둠은 빛을 튕겨 내고 있기 때문이다.
 햇살 아래 드러났음에도 여전하다.
 감옥 내부의 일정한 공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햇살을 튕겨 내는 어둠!
 정말이지 기이하고도 스산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감옥 안의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별개의 개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주변이 온통 암흑이라면 그저 어둠의 한 자락일 뿐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보통의 어둠과는 달랐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빛이 미지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칠흑같이 검은 상자 하나가 허공에 둥실 떠 있는 형태다.
 구조상 사람을 가두기 위해 만든 감옥 안이다.
 감옥의 정중앙을 차지한 채 허공에 떠 있는 어둠은 차라리 암흑에 가까웠다.
 정육면체의 암흑은 무척이나 기이했다.
 일상적인 어둠이 주는 공포보다 더욱 가슴을 옥죄는 뭔가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인지 능력을 벗어나 존재하는 미지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현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천장에 주먹만 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사이로 내려오고 있는 빛도 이상해졌다.
 창살을 타고 내린 햇살이 살아 있었다.
 암흑의 공간에 막히자 마치 물살이 바위를 피하듯 옆으로 흘러서는 이내 벽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빛은 마치 꿈틀대며 벽면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오고 나서도 계속 이동을 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햇살은 멈추지 않고 자신이 갈 곳을 찾아 바닥을 따라 물결처럼 서서히 움직이더니 감옥의 중심에 모여들었다.
 빛의 입자들 하나하나가 시야로 느껴질 만큼 아주 뚜렷한 움직임이다.
 알 수 없는 정육면체의 어둠을 사방에서 햇살이 감쌌다.
 그리고 다시 감옥의 외벽도 감쌌다.
 햇살 아래 확연히 드러난 감옥 안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특이했다.
 빛을 경계로 암흑의 공간과 나누어져 있는 것도 그렇지만 사방이 온통 검은색의 돌로 되어 있었다.
 거기다 세월의 때가 묻은 듯 바닥은 물론 벽 전체가 기괴한 얼룩과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얼룩과 이끼들이 사이로 이상한 것이 보였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문양들과 글자로 보이는 것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벽을 파고들어 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먼지와 이끼들이 쌓여 분간하기 어려웠다.
 세월의 흔적 밑에 아로새겨져 있는 문양들도 알 수 없는 신비를 풍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보고 있던 모습이 희미해진다.
 그리고 곧바로 꺼지듯 사라졌다.
 
 ***
 
 쿵! 쿵!
 쿵! 쿵! 쿵!
 감옥이 사라지고 난 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시, 심장이 움직이고 있다. 설마!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난 건가? 그런데 어째서 눈이 떠지지 않는 거지?’
 ―깨어났냐?
 혼란스러워하는 장혁의 뇌리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녀석, 목소리하고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조용조용 이야기해라. 정신 사납다.
 난데없는 핀잔에 장혁은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목소리에 담긴 범상치 않은 기운 때문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이명처럼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 소리에 기가 죽은 혁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
 ―예.
 ―크크크크, 나도 모른다. 내가 누군지 말이야.
 그냥 되는 대로 답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혹시! 귀신입니까?
 ―떽!! 귀신이라니!!
 나무라는 소리가 혁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 그럼?
 ―내가 누구인지는 당장은 알 거 없고, 지금은 급한 상황이니까 빨리 선택을 해라.
 ―그, 급한 상황이라니요?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장혁이 되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염화의 불꽃이 타오르게 될 테니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염화의 불꽃이요?
 갑자기 불꽃 타령이라니, 여전히 알 수가 없는 소리였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영혼까지 불살라 소멸시키는 놈이지. 염화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영영 기회를 놓친다. 그러니 어서 선택해라. 죽고 싶으냐? 아니면 살고 싶으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혁으로 하여금 급하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부터 알아보자.’
 강요한다고 해서 무작정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진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장혁으로서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부터 아는 것이 중요했다.
 ―제, 제가 죽은 건가요?
 ―녀석, 의심은!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겠다. 넌 지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다. 한마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빨리 선택을 해라. 이대로 염화인이 네 영혼에 옮겨 붙으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실이라면 나로서는 선택의 여기가 없다.’
 거짓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다급해 보였다.
 기억하고 있는 대로라면 강렬한 기운이 심장을 쪼갰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살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혁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살고 싶어요.
 ―좋아, 당연히 그렇게 선택을 해야지. 하지만 조금 문제가 있다.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육체는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꺼번에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이 야속할 정도로 황당한 말이었다.
 ―유, 육체를 포기해야 하다니요? 설마 육체가 없어지고 유령이나 귀신이 된다는 건가요?
 ―아니다.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 지금 네 육체는 완벽하게 죽은 상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네 영혼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뿐이다.
 ―그, 그건 산 것이 아니잖아요?
 육체가 없는 영혼의 삶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크크크, 녀석! 영혼만 건재하다면 그까짓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염화의 불꽃인 염화인이 영혼까지 소멸시킨다는 것이 더 문제다. 영혼이 소멸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방법이 있단 말인가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일단 믿을 수 있을 것 같기에 장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법이 있으니까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지금처럼 내 말에 일말의 의심을 가진다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일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 그렇군요.
 ―이제 수긍하는 모양이구나. 그럼 하나만 묻겠다. 너는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솔직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믿어 보도록 하지요.
 어차피 자신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아니기에 장혁은 목소리의 말을 믿기로 했다.
 ―후후후, 좋다, 조금이나마 네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승낙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동요하지 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최악의 선택이 될지도 모르지만 믿기로 했다.
 적어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정신이 아득해지고 난 뒤에 어둠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죽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고맙습니다.
 ―자칫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다. 믿음이 흩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으니 끝까지 날 믿어야 한다. 알았느냐?
 ―아,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겠다. 내가 주는 힘을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장혁은 자신에게 종류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설명처럼 이내 아득해지며 점차 정신을 잃어 갔다.
 ―후후후, 시간을 거슬러 너에게로 오면서도 불안했는데 이렇듯 내 뜻이 완전히 이어졌구나. 이제 너의 의식 속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기억된 곳으로 보내 주마. 그곳에서 너는 새로운 육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족들의 희생 덕분으로 이렇게 너를 살릴 수는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온전히 전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안타깝기 만하구나. 그래도 인연이 있다면 그 또한 풀어 낼 수 있을 터. 완전히 각성을 끝낼 수만 있다면 내가 전한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혁이 정신을 잃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독백을 흘렸다.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처음 말과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분명했다.
 ―뜻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하도록 해라. 너를 통해 나 또한 부활할 테니 말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것을 혁에게 전하며 천천히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
 
 고속도로 변 갓길에 주차시켜 놓은 차의 창문이 스르르 열렸다. 창문을 열고 검은색의 망원경이 나타났다.
 멀리 화염이 치솟아 오르자 농가를 살피던 사나이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빠져나간 흔적은?
 “열두 개의 생체 반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제법이군. 그자는 어떻게 됐나?
 “임무를 완수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문제는 없었나?
 “현재 상황으로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잠시 더 지켜본 뒤 현장에서 철수해라. 증거를 없애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고.
 “염려 마십시오.”
 자신의 대답과 함께 무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사나이는 커다란 무전기를 껐다.
 사나이는 다시 망원경을 눈에 대며 불타오르는 농가를 빠짐없이 살피기 시작했다.
 ‘전파 간섭이 일어났던 것이 조금 문제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작전이 끝났음을 보고하기는 했지만 조금 꺼려지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거 대상들이 숨을 거두고 난 뒤에 나타난 알 수 없는 현상이 조금은 신경 쓰였다.
 작전이 끝났을 때 암살자를 상징하는 녹색의 점 하나만 남고 모니터에 나타났던 반응이 일제히 사라졌다.
 각오하고 수립한 작전임에도 피해는 전무해 안도하는 순간 섬광이 일어나며 모니터의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신호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았다.
 ‘너무 쉽게 끝나서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 가지고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게 끝난 작전이었다.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사나이는 일말의 의구심도 버렸다.
 화르르르르!
 ‘저 정도 불기운이면 웬만한 증거들은 모두 소각되고 없겠군. 주변에서 신고했을 테니 소방차들이 오면 떠나자.’
 화염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 불이라면 누군가 신고를 소방차들이 몰려올 터였다.
 웨에에엥!
 아니나 다를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빨리도 출동하는군. 멀지 않은 곳에 소방교육대가 있어서 그런가?’
 벌써 화재 신고가 들어간 것인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방차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화르르르!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불길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청염의 불꽃, 염화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나이는 걱정거리를 던 표정으로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끝났군. 염화인이 타오른 이상 아무리 출중한 능력자라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여러 가지 금제주술에 염화(炎火)의 인(燐)까지 담긴 불이 바로 염화인이다.
 최상급 능력자라 할지라도 심장이 갈라지고 거기에다가 염화인까지 덮어썼다면 영원한 소멸밖에는 없었다. 완벽한 소멸에 이르는 것이다.
 ‘괜히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떠나야겠다. 나머지도 서둘러 정리를 해야 할 테니까.’
 어정쩡하게 남아 있다가 자칫 자신을 노출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예상보다 빠른 소방서의 움직임이 시작된 이상 최대한 빨리 증거들을 없애야 했기에 사나이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우웅!
 현장을 지켜보던 사나이는 빠르게 갓길을 벗어나 서울 쪽으로 차를 몰았다.
 
 ***
 
 멀리 보이는 산 쪽에서 급격하게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면 불이 난 것이 분명했다.
 삐요! 삐요!
 요란한 소리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응급차를 비롯한 여러 대의 소방차들이 부리나케 달리고 있는 것만 봐도 화재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끼이익!
 산의 줄기를 따라 흐르는 하천 옆에 난 도로 위를 줄지어 달리고 있던 소방차들이 연이어 멈추어 섰다.
 “서둘러라!!”
 소방대장의 거친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소방관들이 급하게 내리며 빠르게 화재 진압 준비에 들어갔다.
 “으음, 저 정도면 틀린 것 같군.”
 지휘 차량에서 내린 소방대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화재 현장을 바라보았다.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언덕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세 채의 가옥이 완전히 화마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푸른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 화재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다.
 건물 대부분이 불길이 휩싸여 있어 1,000도가 넘는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안에 있었다면 대부분 죽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소방대장의 안색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런!”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인력으로 장비를 이동시킬 수밖에 없어서인지 소방관들은 애를 먹고 있었다.
 소리치고 독려했지만 불이 난 집까지는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작은 소로뿐이라 소방차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하고 있는 거야! 호스를 연결시켜서 끌고 가라. 어서!”
 “빨리! 빨리!”
 소방대장의 외침에 소방관들이 호스와 노즐을 연결시키고는 서둘러 산자락까지 소방 호스를 끌기 시작했다.
 슈아아아!
 경사가 있는 소로를 따라 소방 장비들이 하나둘 올라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얼마 있지 않아 마귀처럼 넘실대는 불꽃을 향해 하얀 물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치이이익!
 상극인 물줄기가 불길에 닿자 빠르게 수증기를 피어올라 주변을 물들였다.
 그러나 화재가 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화마가 절정의 춤사위를 보이고 있었다.
 소방차에 연결된 호스에서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는 데도 불길은 쉽게 잡히지가 않았다.
 와르르르!
 거센 불길로 인해 구조가 취약해진 탓인지 쏟아지는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지붕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제기랄!! 어서 불길을 잡아라! 인명 구조는 틀린 것 같으니 불길이 산으로 번지는 것부터 막아라, 어서!”
 집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틀린 일이라 소방대장은 얼굴을 구기며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붕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더니 열기로 취약해진 기둥에 금이 가고 집들이 연이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집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불길이 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아무리 여름철이라고는 하지만 보름이 넘게 비가 내리지 않아 대지가 말라 있었다.
 불길이 옮겨 붙기라도 하면 자칫 큰 산불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거기! 빨리 빨리 움직여!”
 “불이 그쪽으로 번진다, 호스를 틀어!!”
 소방대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소방관들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다급했다.
 얼마 안 있어 노즐에서 뿜어지는 물줄기 중 두 개가 산 쪽으로 향했다.
 쏴아아아!
 불타오르는 농가 뒤편으로 거센 물줄기가 뿜어졌다.
 소방관들의 노력 덕분인지 산 쪽으로 향하던 불길이 천천히 잡혀 갔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
 조금만 늦었어도 산으로 옮겨 붙었을 것이기에 소방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3장. 부활을 위한 시작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안에 두 개의 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는 광채를 더해 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희미한 광채는 마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는 촛불처럼 점점 색깔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우윳빛으로 일렁이며 광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찬란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한 빛은 장혁의 영혼이었고, 꺼져 가는 희미한 빛은 또 다른 영혼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죽음이 다가올 무렵 장혁을 이끌었던 목소리가 꺼져 가는 광채 속에서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목소리는 천지 안에 존재하는 시간의 축을 건드려 적들로부터 몸을 피했던 혁(?)이었다.
 ―후후후, 희박한 확률이었는데 내가 남긴 영혼의 조각을 이렇게나마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천운이다.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기꺼움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안배가 마침내 결실을 거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존재이자 또 다른 존재인 저 아이에게 대부분 건네고 나니 이제 빈껍데기로군. 그렇지만 여한은 없다.
 열한 사람에게 남아 있는 영혼의 힘과 자신이 봉인해 놓았던 힘을 장혁에게 옮겼다.
 죽어 버린 육체를 되살리는 것보다 정신체로 만드는 것이 났기에 그리했다.
 정신체로 만든 직후 곧장 자리를 옮겼다.
 장혁이 의식하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남아 있던 힘을 이용해 공간을 초월해 움직일 수 있었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 마지막 염원을 전할 수 있었다.
 혁이 행한 두 가지 모두 둘 다 엄청난 힘을 소비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켜 줄 마지막 힘마저도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가지고 있는 것을 거의 다 쏟아부었던 탓에 이제는 서서히 소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쉽구나!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만 마치면 모든 안배가 끝나기에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후회는 없었다.
 또 다른 자신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누군가 건드려 놓은 혼돈의 장이 시간의 축을 간섭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이렇게 마주하느라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남아 있는 힘으로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시간의 축을 건드려 적들의 손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본래의 시간대가 아니라 미래로 떨어져 버렸던 혁은 천신만고 끝에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가지고 있던 권능 또한 대부분 상실했고, 스스로를 지탱하던 존재의 의미 또한 대부분을 잃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속절없이 소멸을 맞이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안배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축에 뛰어들기 전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었기 때문이다.
 혁은 조율해 놓은 혼돈의 힘이 누군가에 의해 비틀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존재 일부를 세상에 뿌린 일이 잘한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그렇게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에게 존재의 힘이 이어졌고, 마침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척 당황했었지······.
 혁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왔을 당시를 생각하며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억났다.
 존재 일부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피를 이은 후손들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부분의 권능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한낱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힘이었기 때문이다.
 혁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피의 유전으로 인해 존재의 일부를 이은 후손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봉인시킨 후 스스로는 마침 자라나고 있던 태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켰다.
 태아 상태의 장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육체의 구성과 대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었기에 선택이 가능한 일이었다.
 소멸을 맞이해야 했을 일이었기에 자신의 의념을 장혁이 이어 나가게 만들었지만 그의 선택은 다른 사태를 불러왔다.
 자신의 육체 구성과 틀린 부분이 문제였던 것이다.
 ―후후후,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하고 저 녀석에게 완전히 동화될 뻔했지. 만약 이번에 저 녀석이 죽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완전히 흡수되어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고 내 존재는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계(死界)의 문이 열리고, 그 충격으로 간신히 깨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의식으로 자신이 후손들에게 봉인시켜 놓은 힘들을 회수했다.
 그 힘을 이용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 중에 남아 있는 것들을 장혁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저 녀석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란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원을 지탱하고 있는 힘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천운이 닿아야 하겠지만 장혁이 완전한 각성을 이루는 날 자신이란 존재의 의미를 부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존재하기 시작한 혁은 무한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적들에게 사로잡힌 후 많은 힘을 잃었다.
 마지막 남은 시간의 축을 건드린 탓에 그나마 남아 있던 권능도 잃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권능을 얻게 해주었던 몇 가지만은 후손들에게 나누어 봉인시킨 탓에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이 남긴 파편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가 장혁이고, 권능을 얻을 수 있게 만들었던 것들이라면 충분히 미래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힘!
 그것을 이용해 각성을 한 후 자신이 남긴 것을 깨닫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간의 축을 건너 미래로 떨어지며 만난 영혼의 파편으로부터 얻은 지식들이 있었다.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지식들이라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편안하게 자신의 소멸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런 곳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아이도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구나. 이제 남아 있는 힘이 얼마 되지 않으니 서둘러야겠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혁과 자신이 있는 곳은 죽음을 예비해 마련한 장소 같았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곳이니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다.
 이제 장혁을 소생시켜야 할 시간이었다.
 ―아이야, 이제부터 너와 나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다. 내가 살아온 의미는 이제 사라지겠지만, 이로서 너의 삶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아마 이것도 내게 정해진 운명이겠지. 내게 남은 것이 얼마 없지만 나를 태어나게 만든 근원만 지킬 수 있어 너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래도 그것이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의 시간대에서 얻은 것들도 너에게 넘겨주도록 하마. 그런 저급한 지식이 너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몰라도 그 시대보다 과거이니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으로 너에게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주마. 이로써 난 완전히 사라지고, 넌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될 것이다. 사실 나의 존재는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나 또한 자유롭게 살았으니 여한은 없으니 말이다. 너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기 바란다.
 혁은 유언을 하듯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장혁에게 자신의 마지막 힘을 전하기 시작했다.
 장혁에게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스르르르······.
 희미하게 꺼져 가는 광채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이제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 장혁의 정신체로 다가갔다.
 촛불처럼 일렁이며 희미해져 가던 혁의 정신체가 스며들며 장혁의 정신체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번쩍!
 완전히 스며들자 엄청난 광휘가 치솟으며 미지의 공간을 밝혔다. 혁이 가진 마지막 힘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툭!
 온통 빛으로 물든 공간이 세로로 일그러지며 무엇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혁의 의지에 따라 불타 버렸던 장혁의 육체 중 일부가 공간을 넘어 도착한 것이다.
 대부분 불타 재로 변해 거무튀튀한 장혁의 육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재가 되어 버린 육체가 빛에 의해 이내 환하게 물들어 갔다.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재가 된 육체가 검은 기류로 변해 버리더니 공간을 뒤덮은 빛 속으로 서서히 섞여 들어갔다.
 잠시 후, 광휘의 빛이 꺼지듯 사라지고 깊은 어둠이 공간에 찾아왔다.
 쿵! 쿵! 쿵!
 심혼을 뒤흔드는 맥동음이 어둠으로 물든 공간 속에서 천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혁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어둠을 품은 공간이 마치 태아를 잉태한 자궁처럼 새로운 생명체를 품은 것이다.
 서서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둠이 잉태한 생명체는 깊고 깊은 심연 속에서 비상을 시작할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시간의 흐름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 3시간 만에 집들이 전소되면서 화재는 간신히 진화가 됐다.
 “산으로 옮겨 붙으려던 불은 겨우 겨우 진압했군. 하지만 안에 갇힌 사람들은······.”
 화재가 진압된 현장에는 타고 부서진 앙상한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안에 있었다면 엄청난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방대장의 목소리가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열기가 가신 다음에 화인을 조사해라. 사망자가 있을 것 같으니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조사도 중요했지만 잿더미 속에 있을 시신도 문제였기에 조사반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무래도 방화인 것 같으니까 경찰들에게 연락을 취해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흙길 가운데 길게 불타 오른 흔적이 있어 방화로 보이는 터라 경찰에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대장님.”
 “난 서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할 테니, 뭔가 발견되면 곧바로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소방대장이 지시를 남기고 지휘 차량을 타고 현장을 떠났다.
 조사반원들이 주변을 뒤지며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말씀대로 방화가 분명한 것 같다.”
 불 냄새 사이로 휘발유 냄새 같은 것이 확연히 남아 있었다.
 “휘발유 같은 걸로 도화선을 만들고 불을 붙인 것 같으니 확실히 방화인 것 같군요.”
 “멀지 않은 곳에 방화에 사용된 도구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을 확실히 살펴봐라.”
 반장의 명령에 조사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 위에 남은 흔적 이외에는 화재 현장 주변에서 방화에 쓰였을지도 모르는 증거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 조심해서 조사 시작해라. 대장님 말씀대로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주의하도록 하고.”
 조사반장이 지시를 내렸다.
 조사반원들은 화재 현장에서 시신의 수습을 위주로 조사를 진행하며, 혹시라도 몰라 증거물을 수집하는데도 애를 썼다.
 조사가 진행되며 타다 남은 것들이 천천히 치워지고 불에 타 재로 변해 버린 시신들이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타다 만 그릇들과 함께 시신들이 발견된 것을 봐서는 점심 식사 도중에 참변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점심을 먹다가 일가족이 전부 화마에 당한 모양이군.”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재로 변한 시신들을 보며 조사반원 하나가 혀를 찼다.
 “경찰에서 조사를 진행하겠지만 심상치 않은 것 같군.”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시신들을 한 번 보게.”
 “그, 그렇군요.”
 지금까지 발견된 시신은 모두 여덟 구로 하나같이 이상했다.
 발견된 시신들이 하나같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자네도 느꼈군. 아무리 방화라고 해도 밥을 먹다가 불이 난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쓰러져 있을 수가 없어. 이미 죽어 있던 것이 아닌 이상 말이야. 아무래도 일반적인 방화는 아닌 것 같다.”
 “반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불이 나면 대부분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대부분 가스에 질식해 죽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통스러운 탓에 주변이 어지럽혀 있거나, 웅크리고 죽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발견한 시신들이 그렇지 않았다.
 전부 반듯하게 누워 있다는 것은 화재가 나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는 증거였다.
 ‘일가족을 전부 몰살시키고 불을 질렀다면······.’
 오랜 세월 소방관으로 근무하면서 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조사반장을 비롯해 반원들은 이번 화재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신이 발견된 지점에는 사람이 발버둥 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저지른 방화 사건이 분명했다.
 “조심해서 움직여라! 사건이 심상치 않으니 남아 있는 증거물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증거가 훼손되는 것을 염려한 반장의 지시에 일제히 대답한 조사반원들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반장님, 무슨 일입니까?”
 소방관들의 심상치 않은 행동 변화에 파출소에서 나와 현장을 통제하던 경찰이 물었다.
 “시신들의 상태를 보면 화재가 나기 전에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예?”
 “살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본서로 연락하겠습니다.”
 화재 현장에 온 경찰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곧장 경찰차로 무전을 쳤다.
 그리고 감식반이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조사반장에게 전했다.
 감식반이 도착하기 전까지 소방관들은 조심스럽게 화재 현장을 조사했다.
 추가 조사에서 또다시 네 구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총 열두 명의 주검이 화재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추가로 발견된 네 구의 시신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발버둥 친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이미 살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엽기적인 강력 사건이 발생한 탓에 형사들과 감식반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화재 전에 이미 살해를 당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사반장의 인사를 받으며 이경식 경위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살아 있을 때 화재가 났다면 발버둥 친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텐데 전혀 없었습니다.”
 “유독가스로 인해 질식사한 경우라면 고통 때문에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겠죠.”
 “무엇보다 발견된 시신들이 누가 정리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전부 그런 상태로 발견됐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의식을 잃었거나, 이미 죽어 있었거나, 둘 중 하나니 문제가 심각하군요. 둘 다 타살이니 말입니다.”
 일가족 열두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정말이지 엽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폴리스라인부터 치고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증거를 철저히 수집해라.”
 “예, 반장님.”
 감식반장인 이경식 경위의 지시에 옆에서 듣고 있던 반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신중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신원은 파악됐습니까?”
 지시를 내린 이경식이 죽은 사람들의 신원에 대해 물었다.
 “예, 이곳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온 한 학자 집안이라고 합니다. 내외와 손자, 그리고 근처에 살고 있던 자식들까지 합치면 죽은 사람들의 숫자와 같습니다.”
 불에 전부 타 버려 확실한 신원을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화재를 보러 온 인근 주민들을 통해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었기에 이야기해 주었다.
 ‘한집에 살던 것도 아니고, 근처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이곳에서 모두 죽었다면······ 으음, 심상치 않은데?’
 이경식은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음모의 냄새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발화 지점을 보면 살해된 후 불을 질러 증거를 은폐하려 했다는 정황이 확연합니다.”
 “그래요?”
 “예, 발화 지점은 대문과 멀지 않은 곳인데······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직접 가서 한 번 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조사반장이 경식을 이끌었다.
 불이 나기 시작한 집 입구로 오자 땅 위에 표시된 부분이 보였다.
 타 버린 자국들과 액체가 떨어지며 난 파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액체로 된 인화 물질을 집 안에서부터 대문 밖까지 흘리며 나온 후 불을 붙인 것이 분명했다.
 “범인이 액체성 인화 물질을 안쪽에서부터 흘리며 나왔군요.”
 “한 번 잘 살펴보십시오.”
 이경식이 허리를 굽혀 흔적을 살폈다.
 ‘제기랄!! 이건 전문가의 솜씨다. 그것도 현장 보존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놈이다.’
 석회 가루로 인화된 흔적을 둘러싸듯 표시해 놓았다. 화재조사반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겠지만 그것이 증거를 훼손했다.
 석회가 바람에 날려 인화 흔적을 덮고 있었고, 화학반응을 일으킨 듯 색깔이 변해 있었다.
 석회 가루와 반응하는 인화 물질을 범행에 사용해 증거를 자연적으로 없어지도록 한 것이다.
 범인은 증거 보존을 위해 석회 가루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인화 물질을 분석해 내는데 어려움이 클 것 같았다.
 ‘그래도 약간은 흔적이 남아 있으니 찾을 수 있을 거다.’
 조사반원들이 매뉴얼에 맞게 현장을 보존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아마추어의 솜씨였다.
 덕분에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곳이 얼마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집 주변에서 더 이상 다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집 안에서는······.”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자세하게 이어지는 조사반장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식의 신경은 딴 곳으로 가 있었다.
 정보기관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고사로 위장하는 방법과 유사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손을 쓸 수 있는 전문가라면 일반적인 방화범과는 다르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경식은 다시 한 번 흔적을 살폈다.
 ‘으음, 역시나 전문가의 솜씨다. 정보기관과 연계된 사건이 분명하다.’
 정보기관이 개입한 것 때문인지 증거가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다수의 증거물들이 수집되었지만 훼손이 많이 된 탓에 명확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은 증거가 문제가 아니다. 섣불리 조사했다가는 자칫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분명히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할 테니까.’
 일가족으로 보이는 열두 명이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라면 방송국은 물론이고, 신문에 대서특필될 일이다.
 그렇지만 어떻게든지 사건을 덮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면 그 중심에 자신이 있어서는 곤란했기에 고심이 깊어졌다.
 ‘일단 명확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훼손된 증거들은 보여 줘야 하고,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증거는 감춰야 한다. 그나저나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무도 사건을 덮을 수 없게끔 일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를 찾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야 했다.
 정보기관에 손을 쓴 것이라면 발화 지점뿐만 아니라 다른 증거도 훼손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건이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많았다.
 자칫 초동수사의 실패로 인해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언론의 질책이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시신이 발견된 곳부터 봤으면 합니다.”
 “예? 아, 따라오십시오.”
 설명을 이어 가던 조사반장은 굳어 있는 경식의 표정에 말문을 닫고 현장으로 안내를 했다.
 “여깁니다.”
 불탄 것을 제외하고는 시신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마치 염을 해놓은 것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조사반장의 말대로 살해된 후 화재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죽인 뒤에 불을 질렀군. 이 정도 화재면 다른 증거를 찾기란 어려울 것 같구나.’
 모든 것이 완전히 불타 있었다. 금속류를 제외하고는 증거를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조사를 시작해라.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니까,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
 이경식은 감식반원들을 향해 철저한 현장 조사를 지시했다.
 감식반원들도 경식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사건의 심각함 때문인지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반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화재 현장 사진을 찍으셨을 테니 사진을 인화하시면 필름과 함께 경찰청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감식반원들의 시선들과 서늘한 경식의 축객령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조사반장은 말을 더듬으며 자리를 피했다.
 조사반장이 떠나자 감식반원 하나가 경식에게 다가왔다.
 “반장님, 자다가 질식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움직인 흔적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소방관들 말대로 죽은 다음에 불이 난 것이 분명합니다. 정황을 보면 열두 사람 모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기는 한데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별수 있나, 어떻게든 찾아봐야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은 곳을 찾아서 샘플을 채취하도록 하고, 잿더미 속까지 철저히 뒤지는 수밖에······.”
 진화를 위해 쏟아부은 물들로 현장이 질퍽거려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운 여름 날씨로 인해 비 오듯 땀을 쏟으면서도 감식반원들의 조사가 이어졌다.
 조사하면 할수록 타살이란 정황이 뚜렷했지만 명확한 증거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반장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반드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장민철이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경식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장 증거가 없다면 시신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지.”
 “반장님, 국과수에서 부검을 하기 전까지 우리가 시신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문제가 될 소지가······.”
 “걱정 마라. 내가 다 책임을 질 테니까.”
 민철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경식은 불에 타 버려 분간이 어려운 시신에게로 다가가 갔다.
 경식은 시신을 뒤덮은 화재의 잔해를 조금씩 치운 후 이리저리 살피더니 가슴뼈 부분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훑어 나갔다.
 뭔가 걸리는 느낌에 마음이 무거웠던 경식은 부검을 하기 전에 함부로 시신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있었다.
 “반장님!”
 증거를 훼손하는 탓에 옆에 있던 민철이 기겁을 하며 불렀다.
 “조금 기다려 봐라.”
 흥분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제지한 경식은 다른 손으로는 가슴 근처를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옷뿐만 아니라 재가 된 피부도 쓸려 나갔다.
 “으음!”
 까맣게 탓 갈비뼈가 드러나자 경식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예상한 대로 타 버린 살갗이 쓸려 내려가며 뭔가에 예리하게 베인 흔적은 갈비뼈에 남아 있었다.
 “이 흔적을 보니 타살이 맞는 것 같군.”
 “뭐가 있는 겁니까?”
 경식이 단정하듯 말하자 옆에 있던 민철이 상처 부위를 살피며 물었다.
 ‘배우려는 자세가 아주 열심이군.’
 막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수습으로 온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지만 열의가 있어 보이는 막내의 모습이 자못 믿음직스러웠다.
 “여기를 자세히 봐라.”
 경식은 타 버린 살들이 벗겨져 내려간 갈비뼈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검게 변한 뼈 가운데에서 반듯한 실금이 보였다.
 “여기에 나 있는 실금은 아주 예리한 것으로 잘린 흔적이다.”
 “예리한 것에 잘린 흔적이라고요?”
 “이런 종류의 상처를 남긴 날붙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에 잘린 흔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게 칼 같은 것에 잘린 흔적이라는 겁니까?”
 막내의 반문에 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기로 인해 골수가 끓어올라 여기 잘린 틈으로 빠져나와 이런 금이 보이는 것이지. 아주 예리한 무기로 뼈를 자르고 정확히 심장을 갈랐을 거다. 으음, 이 정도면 정말 보통 솜씨가 아니다. 틀림없이 이번 사건은 전문가의 소행이 분명하다.”
 “전문가가 일가족을 전부 죽인 것이라면, 사건이 정말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 왠지 냄새가 나는 사건이다.”
 아무리 전문적으로 칼을 다루는 자의 솜씨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솜씨를 보일 수 없었기에 음모의 냄새가 짙게 났다.
 ‘사실 전문 킬러도 이 정도까지는 하지 못한다. 추측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고도로 무예를 익힌 자의 솜씨야.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
 경식의 눈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세검을 이용해 뼈와 심장을 단번에 가른 것을 보면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무예를 익힌 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무예가 아니라 암중으로 전해지는 비기를 익힌 자의 솜씨였다.
 ‘내가 알기로 국내에는 이 정도의 솜씨를 가진 자가 없다. 그럼 외국인이라는 말인데······ 우선은 어떤 종류의 무예가 이런 흔적을 남기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무리 봐도 우리 민족의 무예는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하려면 다른 시신들도 살펴봐야 한다.’
 경식이 아는 한 이런 정도 상처를 남길 만한 세검을 사용하는 유파는 한국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쪽이 유력하기는 하지만, 중국 쪽도 용의선상에서 뺄 수는 없기에 경식은 다른 시신들도 전부 확인하기로 했다.
 “막내야, 아무래도 다른 시신들도 확인해 봐야겠다.”
 “그러시죠.”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 위법이기는 하지만 경식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민철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시신을 향해 걸어가는 경식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가며 천천히 다른 시신들의 상태도 확인해 나갔다.
 처음 확인한 시신처럼 하나같이 세검에 의해 갈비뼈와 심장이 한꺼번에 잘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내야, 모두가 한 사람의 소행이 분명하다.”
 “한 사람이요?”
 “그래! 모두가 같은 무기고, 솜씨도 같다.”
 “정말 대단한 놈이로군요.”
 “그런 것 같다. 반항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 사람들을 죽인 것을 보니 정말 보통 놈이 아니다.”
 “어떤 새끼인지 얼굴이 보고 싶군요. 사람들을 이렇게 무참하게 죽이다니 말입니다.”
 경찰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철은 투철한 사명감만큼이나 열이 받는 듯 분통을 터트렸다.
 우르릉!
 민철의 분노에 공감이라도 하는 것인지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먼 데서 들려왔지만 비가 오려는 듯 하늘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
 “젠장! 비가 올 모양이다. 증거물이 훼손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겠다.”
 천둥소리에 하늘을 쳐다본 경식이 낭패한 표정으로 민철을 재촉했다.
 “큰일이군요. 어이, 거기! 비가 올 것 같으니 여기 시신들을 빨리 옮기도록 해라. 어서!”
 민철이 지시를 내리기가 무섭게 현장 근처에 대기 중인 경찰들은 빠르게 시신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해가 많은 탓인지 구급차들도 여러 대가 와 있는 중이고, 감식반 차량도 3대나 와 있어 서둘러 옮기기만 한다면 손상될 염려는 없어 보였다.
 “서둘러라! 어서!”
 조금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시커멓게 몰려오는 먹구름들이 속력을 더하자 주변이 더욱 어두워졌고 재촉하는 경식의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번쩍!
 우르르릉!
 증거와 시신들을 반도 채 옮기기도 전에 하늘을 가르는 빛줄기와 함께 천둥소리가 울렸다.
 “이런! 급하다.”
 “어서, 옮겨라. 어서!”
 경식이 다시 한 번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재촉하지 않더라도 감식반원들도 상황이 급함을 인식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시신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현장 주변이 일순간에 환하게 물들었다.
 번쩍!
 콰콰쾅!
 멀리서 몰려오던 번개가 갑자기 현장에 떨어지면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현장을 휩쓸었다.
 놀랍게도 번개는 불타 버려 거의 형체를 알 수 없는 가장 왜소해 보이는 시신 중 하나에 직격했다.
 “으아악!”
 “아아아아악!”
 시신을 옮기려고 주변에 있던 감식반원 두 명이 번개에 감전당해 튕겨지듯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김 경사! 윤 경장!”
 경식이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달려갔다.
 “괜찮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반원들에게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크으으!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 저도 괜찮습니다.”
 약간 떨어져 있었고, 다행히 번개가 시신에 맞으며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상당해 보였다.
 “번개에 직접 맞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이, 거기 네 사람! 여기 이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응급 차량에 태워서 병원으로 보내. 어서!”
 감식반원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경식은 혹시나 몰라 몰려오는 경찰들에게 쓰러진 부하들을 옮기게 했다.
 응급차에서 내려진 들것이 날라져 오고 충격이 큰 듯 아직도 신음을 흘리는 감식반원들이 실려 가는 것을 본 경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기랄!”
 불에 타서 상당 부분 훼손되었던 시신이 번개를 직접 많은 탓인지 산산이 부서진 것이 보였다.
 ‘완전히 박살이 났군. 이렇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벼락까지 맞다니!’
 타인의 손에 살해당한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까지 편하지 않은 고인의 처지가 경식은 안타까웠다.
 “거기 두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시신이지만 고이 모셔라. 나머지는 빨리 증거들을 옮기도록 하고! 어서!!”
 경식은 다른 감식반원들을 불러 대부분 훼손된 시신과 증거물들을 수습하도록 했다.
 번개가 떨어진 탓인지 다들 머뭇거렸지만 사명감 때문인지 이내 움직이며 증거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가 내리기 전에 움직일 수 있는 증거물들은 전부 옮길 수 있었다.
 “어서 현장을 덮고, 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해라.”
 이제 현장만 잘 보존하면 끝이었기에 경식은 경찰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후우!”
 짙은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경식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보통 놈이 저지른 것이 아니다. 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의 냄새가 나. 그나저나 이렇게 완벽하게 처리할 정도라면 놈에 대한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보기관까지 가세했다면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놈인지 반드시 잡아야 하는데 말이야.’
 시신들 대부분이 불에 완전히 타 버렸다.
 화재 신고를 받고 진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까지 타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완전히 타 버린 것을 보면 휘발성과 연소성이 강한 물질이외에도 특수한 물질이 증거물을 없애기 위해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전문가의 솜씨가 분명한 이상 범인을 잡는 것이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시신들과 훼손되기는 했지만 화인을 밝혀줄 샘플이 있으니 사건을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에 불타 버린 시신들을 옮길 수 있었다.
 곧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졌으니 뭔가 단서가 나오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막내야!”
 “예, 반장님!”
 “넌 나와 같이 국과수에 좀 가자.”
 “국과수에요?”
 이제 청으로 돌아가 공문만 보내면 되는 일인데 경식이 직접 가겠다고 하자 민철이 의아한 듯 물었다.
 “범인이 아무래도 전문가 같으니 내가 가서 설명을 좀 해줘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차를 대도록 하지요.”
 한번 이야기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기에 민철은 두말없이 대답했다.
 조금 떨어진 쪽에 주차했던 민철은 차를 가져다가 화재 현장 근처 도로 옆으로 댔다.
 “나머지는 현장 보존을 철저히 해라.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덮은 후, 고랑을 파서 물길을 내도록 해라.”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장님!”
 경식의 지시에 나머지 감식반원들이 현장을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
 우선 전경들이 가져온 비닐하우스용 비닐을 이용해 현장을 꼼꼼히 덮어 나갔다.
 두 겹 세 겹 비닐로 완전히 덮은 후 주변에 배수로를 파서 비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현장 보존을 끝냈다.
 현장 보존이 끝나자 전경들은 사방에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아직 현장 수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출입자를 통제하기 위해 출입 금지라는 잉크 인쇄가 선명한 테이프를 막대에 걸쳐 빙 둘러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막내야, 가자!”
 “예, 반장님.”
 경식은 현장 정리가 끝나는 것을 확인한 경식은 민철과 함께 차를 타고 곧장 국립과학수사연수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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