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삼국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지금부터 약 1천 8백 년 전의 고전이지만, 삼국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등장인물은 현재도 중국 대륙 곳곳에 그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중국 대륙으로 가서 거기의 잡다한 서민이나 인사 등과 만나 특별히 친하게 지내다 보면, 삼국지 안에 나오는 인물 중의 한 사람과 분명히 닮아 있다. 혹은 공통된 것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현대의 중국 대륙에는 삼국 시대의 치란흥망(治亂興亡)이 그대로 있고, 문화나 모습은 변해 있지만 작중의 인물 또한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지에는 시(詩)가 있다.
단순히 방대한 치란흥망을 기술한 전기군담(戰記軍談)의 종류가 아닌 곳에는 동양인의 피를 크게 달래 주는 일종의 조화와 음악과 색채가 있다.
삼국지에서 시를 제외해 버리면 세계적이라는 큰 구상의 가치도 상당히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는 굳이 간략하게 하거나 일부만 추려서 번역해 버리면 소중한 시의 맛도 잃어버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데 실패해 버릴 우려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간역(簡譯)이나 초략(抄略)을 굳이 하지 않고 장편 집필에 적당한 신문 소설에서 이것을 시도했다. 그리고 유현덕이라든지 조조라든지 관우, 장비 그외 주요 인물 등에는 나 자신의 해석이나 창의도 덧붙였다. 여기저기 원본에 없는 어구, 대화 등은 내 나름의 묘사이다.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에서 이야기의 재료를 취해 왔지만 물론 정사(正史)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 속의 인물을 교묘하게 자유자재로 활약시켜 후한의 제12대 영제의 시대(서기 168년경)부터 무제가 오를 멸망시키기까지의 대략 102년 동안 오랜 기간에 걸친 치란이 씌어 있다. 구상의 웅대함과 무대가 되는 지역의 넓이는 세계의 고전 소설 중에서도 비할 데 없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등장인물도 자세히 세어 본다면 몇천 몇만 명에 달할 것이다. 게다가 중국 특유의 화려하고 씩씩한 가락, 애환이 서려 있는 절절한 감정, 비장한 탄식의 어구, 크고 그윽한 정취,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르는 열정으로 상술되어 있으므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백년 동안 지상(地上)에 명멸하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인간과 문화의 흥망을 한 권의 책에 떠올리게 하고 깊은 생각의 감개에 빠지게 하는 등의 매력이 있다.
어찌 보면 삼국지는 하나의 민속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지 안에서 보이는 인간의 애욕, 도덕, 종교, 그 생활, 또한 주제인 전쟁 행위의 군웅할거(群雄割據) 상태 등은 마치 무늬가 그려진 민속화의 두루마리이기도 해서 그 생생한 모습은 천지간을 무대로 장대한 음악을 수반하여 연기된 인류의 대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지명과 원본의 책 지명이 당연히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알고 있는 지방은 주(註)를 더해 두었다. 모르는 옛 이름도 꽤 있다. 또 등장인물의 작위, 관직 등은 거의 한자로 짐작할 수밖에 없어서 그대로 썼다. 너무 현대어로 바꾸면 한자가 가지는 특유의 색채나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원본에는 「통속 삼국지」 「삼국지연의」 그외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나는 그 어느 직역에도 따르지 않고 수시로 장점을 택해 나름의 흐름에 맞추어 썼다. 이것을 쓰면서 생각나는 것은 소년 무렵 구보 덴즈이(久保天隨) 씨의 연의 삼국지를 열독하면서 밤늦도록 등잔 밑에 매달리고 있어서 아버지께 그만 자라고 꾸중들은 일이다. 본래 삼국지의 진미를 헤아리면서 원서를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늘날의 독자에게 그 난삽(難澁)은 견딜 수 없는 것이고, 또 일반이 요구하는 목적도 뜻도 많이 다르므로, 굳이 출판사의 희망대로 재개정해서 출판하기로 했다.
저 자
요시카와 에이지. 일본의 대중 소설가. 1892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1903년 1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업이 기울어 소학교를 중퇴하고 항구의 선구공, 공장의 공원 등 일을 했다.
독학으로 문학 공부를 계속해 1914년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주최하는 문예 모집에 일등으로 당선하였다. 1921년 코단샤에서 발행하는 문학 잡지에 소설 3편으로 데뷔했고 도쿄 매일 신문사에 입사, 1926년 “나루토 비첩”을 통해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1935년부터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재하였다. 1938년 중일전쟁 중 마이니치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종군하며 「삼국지」집필을 시작했다. 1962년 사망 후 그의 이름을 딴 요시카와 에이지 상이 제정되었다.
1화 황건적
1
후한(後漢)의 건녕(建寧) 원년 무렵.
지금으로부터 약 1,780년 전의 일이다.
한 사람의 나그네가 있었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칼을 찼을 뿐 옷차림은 매우 초라해 보였다. 눈썹은 수려하고 입술은 다홍색, 특히 총명한 눈동자 하며 오동통한 볼을 지니고 언제나 미소를 머금어 전체적으로 천한 모습이라곤 없었다.
나이는 스물넷, 다섯.
풀밭에 우두커니 앉아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유유히 오래도록 물은 흘러간다
산들바람이 상쾌하게 귀밑털을 어루만진다.
시원한 가을, 8월이다.
그리고 그곳은 황하(黃河)의 두둑황토층이 낮게 끊긴 기슭이다.
“어이.”
누군가가 강에서 불렀다.
“저 거기 있는 젊은이, 뭘 보고 있는 거요? 거기는 나룻배가 닿는 곳이 아닌데.”
작은 어선에서 어부가 소리치는 것이었다.
청년은 미소를 띠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어선은 하류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청년은 그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무릎을 안은 채 멀리 바라보는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이, 어이, 나그네!”
이번에는 뒤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불렀다. 근처 마을의 백성일 것이다. 한 사람은 닭의 다리를 거꾸로 잡고 있으며 한 사람은 농기구를 메고 있었다.
“그런 데서 아침부터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요. 요새는 황건적이라든가 못된 무리들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관리 녀석들이 괴이하게 여길 거요.”
“예, 잘 알겠습니다.”
청년은 돌아다보며 공손히 머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그래도 여전히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천만 년을 이렇게 흐르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황하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이 황하의 물은 이처럼 누럴까?’
물가의 물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물 그 자체가 누런 게 아니라 숫돌을 가루로 빻은 듯 누런 모래알들이 물에 섞여서 출렁거리고 있기 때문에 탁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아······ 이 흙도.”
청년은 대지의 흙을 한 줌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을아득한 서북쪽 하늘로 돌렸다.
중국의 대지를 만든 것도, 황하의 물을 누렇게 만든 것도 모두 이 모래알들이다. 그리고 이 모래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에서 바람에 날아온 것이다. 아직 인류의 생활이 시작되지 않은 몇만 년 전 아득히 먼 옛날부터끊임없이 바람에 날아와서 쌓이고 쌓인 대지, 이 넓은 황토와 황하의 물 흐름이었다.
“내 조상도 이 황하를 따라 내려와서······.”
그는 자신의 몸에서 지금 맥박치고 있는 피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먼 근원까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중국을 개척한 한(漢)민족도 그 모래가 날아온 아시아의 산악을 넘어왔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에 의지해 살면서 차츰 늘어나 묘족(苗族)이라는 미개인을 몰아낸 후, 농업을 발전시키고 산업을 일으켜 여기에서 몇천 년의 문화를 꽃피워 왔던 것이다.
“조상님, 지켜봐 주십시오. 아니, 이 유비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유비는 반드시 한민족을 다시 일으키겠습니다. 한민족의 피와 평화를 지키겠습니다.”
하늘을 향해 맹세하듯 젊은 유비(劉備)는 하늘을 향해 절하고 있었다.
그때 바로 뒤에 누군가 우뚝 서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수상한 놈이다. 이놈, 너는 황건적 패거리지?”
2
유비는 깜짝 놀라 누구지 하고 뒤돌아보았다.
꾸짖은 사람은 벌써 그의 옷깃을 사정없이 붙잡았다.
“어디서 왔어?”
“······?”
살펴보니 관리의 수하인 모양으로 가슴에 고을의 관리 표시를 달고 있다. 요즈음은 뒤숭숭한 세상이어서 지방의 관리 수하까지 평상시에도 모두 무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철궁(鐵弓)을 가졌고, 한 사람은 반월창(半月槍)을 안고 있었다.
“저는 탁현(涿縣) 사람입니다.”
유비 청년이 대답했다.
“탁현이 어디야?”
수하가 다그치며 물었다.
“예, 탁현의 누상촌(樓桑村) 태생이며, 지금도 어머님과 함께 누상촌에 살고 있습니다.”
“직업은?”
“돗자리를 짜거나 발을 엮어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 행상인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리의 수하는 갑자기 무슨 더러운 물건을 버리듯 옷깃을 놓고 유비의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칼에는 황금 고리에 진주 구슬이 달려 있는데, 돗자리 장사에겐 과분한 칼이군. 어디에서 훔쳤어?”
“이것만은 아버지의 유물로 지니고 있습니다. 훔친 물건이 아닙니다.”
솔직하면서도 늠름한 대답이다. 관리의 수하는 유비 청년의 눈을 보더니 금방 외면했다.
“그런데 이런 데에 반나절이나 앉아서 도대체 무얼 보고 있지? 수상쩍게 봐도 할 수 없지. 공교롭게도 간밤에 이 근처 마을에 황건적 떼거리가 들이닥쳐 마구 약탈해 도망갔거든. 보아하니 얌전한 것 같고 도둑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일단 의심은 하고 봐야지.”
“옳은 말씀입니다. ······ 실은 제가 기다리고 있는 건 오늘 이 강을 내려온다는 낙양선(洛陽船)입니다.”
“그러면 누구 친척이라도 그 배에 타고 오나?”
“아뇨, 차〔茶〕를 좀 구하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를?”
관리의 수하는 눈을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아직 차의 맛을 몰랐다. 차라는 것은 다 죽어 가는 병자에게 주거나 여간한 귀인이 아니면 마실 수 없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비싸기도 하거니와 귀중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하지? 혹시 집에 병자라도 있나?”
“병자는 아니지만 본래 제 어머님이 매우 좋아하시는 것이 차입니다. 가난해서 좀처럼 사 드릴 수 없지만, 한두 해 벌어 모은 돈이 약간 있어서 이번 여행길의 선물로 사다 드리려고 합니다.”
“흠. ······ 그건 기특한 일이군. 내게도 아들이 있지만. 애비에게 차를 대접하기는커녕늘 그 모양이지.”
두 관리 수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더니 이젠 유비에 대한 의심도 풀린 모양으로 무슨 말인가 쑤군거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다.
노을 진 저녁 하늘에 물든 붉은 황하의 흐름을 대하고 앉아 유비는 또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 배의 깃발이 보인다. 낙양선이 틀림없다.”
그는 비로소 풀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얹고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3
천천히 강을 내려오는 배의 그림자는 석양을 받아 검게 서서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보통 여객선이나 화물선과는 달리 낙양선은 한눈에 알 수 있다. 무수한 붉은 용설기(龍舌旗)가 돛에 나부끼고 선루(船樓)는 오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봐요!”
유비가 손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배는 혼자인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천천히 키를 돌리고 찰랑찰랑 돛을 내리며 황하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거기서 훨씬 하류의 기슭에 도착했다.
백 호 남짓한 어촌이다.
오늘 낙양선을 기다리던 사람은 유비 한 사람뿐이 아니다.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뭉쳐 있었다. 나귀를 끄는 거간꾼의 무리, 계거(鷄車)라고 부르는 손수레에 고장의 실과 솜을 실은 백성들, 짐승 고기와 과일을 바구니에 넣고 기다리는 장사치들이미 거기는 낙양선을 맞이하여 장이 설 판이었다.
어쨌든 황하의 상류인 낙양(洛陽) 도읍에는 지금 후한의 제12대 제왕인 영제(靈帝)가 거주하는 성이 있으며, 진귀한 산물과 문화의 정수는 거의 낙양에서 만들어져 거기에서부터 온 중국으로 퍼져 나간다.
몇 달에 한 번씩 문명의 제품들을 실은 낙양선이 이 지방에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강변의 작은 도시 마을 부락 등, 장이 서는 곳마다 배를 대고 교역을 했다.
여기서도.
날이 저물자 매우 왁자지껄하게 바쁜 거래가 시작되었다.
유비는 소란스러운 고함소리와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 섞여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는 자신이 구하려고 하는 차가 거간꾼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단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면 막대한 값으로 껑충 뛰어 가난한 주머닛돈으로는 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장의 거래는 끝났다. 거간꾼도 백성들도 장사치도 삼삼오오 땅거미 속으로 흩어져 간다.
유비는 배의 상인인 듯한 남자를 발견하고 서둘러 곁으로 다가섰다.
“차를 좀 파십시오. 차를 원하는데요.”
“예, 차라고?”
낙양 상인은 거만하게 그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나눠 줄 만한 싸구려 차는 없소. 한 잎에 몇 냥 하는 고급품밖에 배엔 없소.”
“괜찮습니다.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차를 마셔 본 적이나 있소? 시골 사람들이 괴상한 잎을 끓여 마시고 있는데, 그건 차가 아니오.”
“예, 그 진품 차를 조금만 나눠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간곡했다.
차가 얼마나 귀중하고 비싼지, 또한 시골에는 아직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씨앗은 먼 열대의 이국(異國)에서 조금 들어와서, 주(周)나라 시대에는 겨우 궁중에서만 은밀히 애용되었고, 한나라 시대가 되어서도 후궁의 다원(茶園)에서 약간 따는 것과 민간에서 몇몇 귀인의 소유지에서 드물게 재배되는 정도라는 이야기도 알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하루에 백 가지 풀을 맛보면서 인간에게 먹을 만한 식물들을 알려 준 신농씨(神農氏)가 자주 독초에 중독되었지만, 차를 얻고 나서는 그것을 씹으면 당장 독기가 풀렸으므로 그 후부터 비밀리에 애용되었다고도 한다.
좌우간 유비의 신분으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표정과 진실하게 애원하는 태도를 보더니 낙양 상인도 사뭇 마음이 달라진 모양이다.
“그러면 조금 나눠 주겠는데. 그전에, 실례지만 값은 가지고 있소?”
4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품속의 가죽 주머니를 꺼내 은과 사금을 섞어서 상인의 두 손바닥에 아낌없이 모두 주었다.
“음······.”
낙양 상인은 손바닥 위의 무게를 어림했다.
“있긴 하군. 허나 은이 대부분이야. 이거 갖고는 좋은 차를 얼마 줄 수 없겠는데.”
“조금이라도 주십시오.”
“그렇게 필요한가?”
“어머니께서 눈을 가늘게 하면서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요”
“자네의 직업은?”
“돗자리나 발을 짜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례지만 이만한 은을 모으려면 고생깨나 했겠군.”
“2년 걸렸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꾹 참고서요.”
“사정을 듣고 보니 거절할 수 없겠네. 그렇지만 정말로 이 정도의 은과 바꾸면 내가 밑지는데. 뭐 또 다른 건 없나?”
“이것을 더 드리지요.”
유비는 칼끝에 달려 있는 진주 구슬을 풀어 주었다. 낙양 상인은 진주 따위는 관심없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좋아. 당신의 효심을 봐서 차를 팔도록 하지.”
상인은 얼마 후 선실 속에서 작은 주석 단지 하나를 가져와서 유비에게 내주었다.
황하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남쪽에선 고양이 눈 같은 큰 별이 빛나고 있었다. 유심히 보면 그 별빛은 무지갯빛 무리가 희미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세상이 드디어 흐트러질 불길한 징조다.
요즘 세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별이다.
“고맙습니다.”
유비 청년은 작은 주석 단지를 두 손에 들고 곧 강변을 떠나는 배의 그림자를 향해 인사했다. 이미 눈앞에는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러나 여기서 탁현 누상촌까지는 백 리도 더 되었다. 며칠 밤을 주막에서 묵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밤은 자고.”
저쪽을 보니 어촌의 불빛이 두셋 껌벅이고 있다. 그는 마을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눈을 붙였다.
그리고 한밤중.
여인숙 주인이 허둥지둥 깨우러 왔다. 눈을 떠 보니 바깥은 시뻘겋다. 찌는 듯한 뜨거움 속에서 어디선지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난다.
“아, 불이 났습니까?”
“황건적이 쳐들어 왔습니다, 손님. 낙양선과 거래한 거간들이 오늘 밤 여기 묵는 걸 노리고서”
“뭐. ······ 도적?”
“손님도 거래한 사람이죠. 놈들이 제일 먼저 노리는 것은 오늘 밤 묵은 거간들입니다. 다음은 우리들 차례지만. 어서 빨리 뒷문으로 도망치십시오.”
유비는 얼른 칼을 찼다.
뒷문으로 가 보니 이미 근처는 거의 다 타 버렸다. 가축들이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고, 아녀자들은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대낮처럼 대지는 밝다.
자세히 보니 마귀 같은 사람의 그림자들이 창과 쇠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며 도망치는 나그네와 마을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여기저기에서 죽이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낮이라면 눈에도 보일 것이다. 악귀들은 모두 머리를 뒤로 땋아 늘어뜨리고 누런 두건을 감고 있었다. 황건적이란 이름은 거기에서 붙여진 것이다. 본래 중국의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색깔이어야 할 황토의 국색(國色)이 지금은 선량한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악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5
“아, 처참하구나”
유비는 중얼거렸다.
“여기에 마침 내가 묵게 된 것은 하늘을 대신하여 이 가엾은 사람들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 이놈 마귀 짐승들아.”
유비는 칼에 손을 대면서 집의 문을 걷어차 뛰어들려고 했지만, 아니 잠깐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머니가 계시다. 나에게는 나만 믿으며 사는 한 사람, 어머니가 계시다.
황건의 난적들은 이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뚜기처럼 천하 각처에서 떼지어 들끓고 있다.
칼 하나의 용기로 백 명의 도적을 무찌르기는 어렵다. 설사 백 명의 도적을 죽였다고 한들 천하가 구원되지 않는다.
어머니를 슬프게 하면서 도적 백 명의 목숨을 내 목숨과 바꾼다고 한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그렇다. ······ 나는 오늘 황하 기슭에서 하늘에 맹세하지 않았던가.”
유비는 눈을 꾹 감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달리고 달려 겨우 마을에서 떨어진 산길까지 왔다.
“이만하면 됐겠지.”
땀을 닦고 뒤를 돌아다보니 활활 타고 있는 어촌은 광야의 모닥불이라기보다는 작은 불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흰 무지개와 같은 성운을 드리운 우주와 비교해 보면, 이 세상의 산악의 크기도, 황하의 길이도, 중국 대륙의 어마어마한 넓이도 초라한 작은 존재밖에는 안 된다.
하물며 인간의 작음일개 나 따위는하고 유비는 나라는 것의 무력함을 탄식했다.
“아니야, 아니야! 인간이 있은 연후의 우주다. 인간이 없는 우주는 단순한 공허가 아닌가. 인간은 우주보다 위대하다.”
유비는 정신없이 하늘을 향해 고함쳤다. 그러자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연하지요. 당연하지요.
누군가 말한 것 같아서 흘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무의 그림자에 오랜 공자묘(孔子廟) 하나가 있었다.
유비는 가까이 다가가서 묘에 엎드려 절했다.
“그래, 공자님, 지금부터 700년 전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고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계시다.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신 분이다. 그 공자는 문(文)으로써 세상에 우뚝 섰지만 나는 무(武)로써 사람들을 구해 보리라. 지금과 같이 황마귀축(黃魔鬼畜)들이 함부로 날뛰고 있는 암흑의 세상에서는 문(文)을 펼치기 전에 무(武)로써 지상에 평화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
다감한 유비 청년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공자묘를 향해 맹세하듯이 저도 모르게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러자 묘 안에서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있었다.
“와하하하.”
“아하하하.”
깜작 놀라 유비가 일어나려고 하니 묘지 문을 박차고 별안간 표범같이 뛰어나온 남자가 유비의 목덜미를 꽉 움켜잡았다.
“이봐, 기다려.”
동시에 묘지 안에서 다른 큰 남자가 공자의 목상(木像)을 유비의 눈앞에서 걷어차면서 욕을 했다.
“바보 놈아, 이런 물건이 네놈에겐 고마우냐. 어디가 위대하냐?”
공자의 목상은 목이 부러져 몸과 목이 따로따로 나뒹굴었다.
6
유비는 두려웠다. 영락없이 나쁜 놈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두 명의 큰 남자를 보니, 머리는 땋아 누런 헝겊으로 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철갑을 대고 다리에 짐승 가죽신을 신고 허리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물을 것도 없이 황건적 패거리다. 게다가 우두머리 놈은 상판대기와 옷차림만으로도 대뜸 알 수 있었다.
“대방, 이놈을 어떻게 할까요?”
유비의 목덜미를 잡은 놈이 다른 한 놈에게 묻자, 공자의 목상을 걷어찬 남자가 말했다.
“놔 줘도 좋아. 도망가면 당장 모가지를 잘라 버리지.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감히 도망치지 못해.”
그러고는 묘 앞에 있는 옥석 위에 유유히 앉았다.
대방(大方), 중방(中方), 소방(小方)이라는 것은 방사(方師, 술사, 기도사)의 칭호이며 그 위계도 나타내고 있었다. 황건적 패거리 사이에서는 부장(部長)을 가리켜 모두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총대장인 장각(張角)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장각과 그의 두 동생에게 대해서만 특별한 존칭이 있었다.
대현양사(大賢良師) 장각(張角).
천공장군(天公將軍) 장량(張梁).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보(張寶).
그 밑에는 대방, 중방이라고 불리는 부장이 조직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유비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장각의 부하인 마원의(馬元義)라는 황건적 두목이었다.
“여봐, 감홍(甘洪)!” 하고 마원의는 부하 감홍이 아직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그놈을 이 앞으로 끌고 와라. 그래, 내 앞으로.”
유비는 옷자락을 잡힌 채 마원의의 발 앞으로 끌려갔다.
“야, 이놈.”
마원의는 유비를 흘겨보았다.
“너는 지금 공자묘를 향해 대단한 맹세를 했는데, 도대체 이놈은 성한 놈이냐, 머리가 돈 놈이냐?”
“예.”
“예라니 무슨 소리야. 황마귀축을 없애겠느니 어쩌고 그 아가리로 함부로 지껄이고 있었는데, 황마란 누구이며 귀축은 또 무엇을 두고 한 말이냐?”
“별 뜻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소리를 혼자서 지껄이는 놈이 어디 있느냐?”
“너무 산길이 외로워서 무서움을 잊기 위해 되는 대로 소리 지르며 걸어 왔으니까요.”
“그게 정말이냐?”
“예.”
“그래서 어디까지 가느냐. 이 한밤중에?”
“탁현까지 갑니다.”
“그러면 아직도 갈 길이 멀군. 우리도 날이 밝으면 북쪽 고을까지 가는데 너 때문에 잠이 깨고 말았다. 다시 잠들기는 틀렸고. 마침 짐이 있어 고생하고 있는 판이니 내 짐을 메고 뒤따라 와. 이봐, 감홍!”
“예이.”
“짐을 이놈에게 주고 자네는 내 반월창(半月槍)을 들어라.”
“벌써 떠나시렵니까?”
“고개를 내려가면 날이 새겠지. 그동안에 그것들도 오늘 밤의 일을 끝마치고 뒤따라올걸세.”
“그러면 걸어가면서 지나간 표적을 남겨 두며 가시죠.”
감홍은 묘의 벽에 무언가를 써 놓더니 반 리쯤 걷다가 또 길옆의 나뭇가지에 누런 헝겊을 매어 놓고 간다
대방 마원의는 유유히 나귀를 타고 앞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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