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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화)

2017.07.03 조회 894 추천 0


 제국의 매 1권 (1화)
 제1장 검은 사신(死神)
 
 
 눈부셨다.
 가을이란 정취에 어울리는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너무도 눈부셨다.
 ‘젠장!’
 나도 모르게 가벼운 욕지거리가 나왔다. 평소의 냉철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비라도 구슬프게 내리면 좋으련만······.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마치 지금 우리의 처지를 비웃고 있는 듯했다.
 난 말의 고삐를 부드럽게 잡아채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찢기고 해진 붉은 군복, 부러진 깃발과 창검, 거기에 눈에 초점이 없는 무표정의 부상병들과 간간이 터져 나오는 그들의 신음성까지······ 당연히 대오 또한 갖춰지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은 전형적인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남쪽, 전투가 있었던 곳에서는 아직도 회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연기 주변으로는 먹이를 노리는 까마귀들과 독수리들이 시커멓게 떼를 이루어 창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3개 군단, 6만 명을 헤아리던 정병(精兵)이 하루아침에 사천여 명의 패잔병으로 몰락하다니······. 정말 완패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올 때는 당당히 행군했던 대로(大路)였다. 보무도 당당했으며, 모두가 아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처럼 쓸쓸히 귀환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이곳은 제국 남부의 아조루스(Azorus) 지방.
 자칭 ‘공화(共和:Respublica)’를 주장하는 반군이 무단으로 점거한 지역으로, 최근 제국과 반군 사이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 공화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혹은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제국이 어째서 이렇게 한순간에 몰락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일단 중요한 점은 현재 제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이와 맞물려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의 상황이라는 것이니까.
 내 이름은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Cassius Nexx Angelus).
 지난여름부터 이 아조루스의 전투에 투입된 흑사자대(黑死者隊)의 대장이다.
 그리고 또한 한때는 자타 공인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역도로 몰려 몰락한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이기도 하다.
 만약 십오 년 전 가문이 화를 당할 당시 내 나이가 고작 10살이 아니었다면, 만약 우리 가문을 불쌍히 여긴 일부 귀족들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제국의 초대 황제 베리타시우스 1세(Veritasius Ⅰ)가 하사한 ‘황금 도끼’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황금 도끼.
 그것은 실제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순금으로 이루어진 작은 장식품이다.
 600여 년 전, 제국을 건설한 영웅 황제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내 가문을 위해 ‘황금 도끼’라는 하사품을 주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나 베리타시우스 황제는 안겔루스 가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 황금 도끼를 수여한다. 훗날 안겔루스 가문의 사람이 대역무도한 죄를 지을지라도······ 설혹 구족을 멸해야만 하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이 황금 도끼가 있는 한, 안겔루스 가문의 계승자는 그 죄를 용서받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 황제가 우리 가문에게 한 약속이었고, 그 약속에 따라 살아남은 것이 바로 나였다.
 물론 간신히 나 하나의 목숨만 부지했을 뿐, 찬란하게 빛나던 가문의 영광은 모두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것은, 내가 지휘하고 있는 흑사자대 또한 나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었다.
 본래 내가 속한 흑사자대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신체가 건강한 자들을 고르고 골라 만든 대장군 직속의 특수 기병대였다.
 부대의 정원은 정확히 이천 명. 누군가가 죽으면 다시 사형수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늘 이천 명의 정원을 유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릴 가리켜 죽지 않는 검은 사신(死神), 즉 흑사자라 불렀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과 몰락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한 귀족 출신의 대장. 이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조합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우리 흑사자대는 그 설립 목적으로 인해, 그리고 사형수와 몰락 귀족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인해, 전장에서 언제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였고, 또 설혹 대단한 활약을 세워도 그 공은 모두 정규군에게 돌아갔다. 어차피 우리는 소모품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을 만난 게 행운인지 악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그의 무능 덕분에 우리 흑사자대가 무사할 수 있었다.
 무능한 최고 지휘관은 적의 양동작전에 속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우리를 엉뚱한 위치에 배치했고, 우리가 뒤늦게 전투에 참전할 무렵에는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되나?
 “Dum vita est, spes est(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난 다시금 쓰게 웃으며 습관적으로 고대어(古代語)를 되뇌었다.
 지난 전투, 정확히 24시간 전에 벌어졌던 전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중무장 보병으로 중앙을 굳게 지키며, 좌우에 배치한 빠른 기병으로 크게 우회해 아군을 포위하는 일련의 과정.
 게다가 일부러 포위망에 작은 틈을 만들어, 도망치는 아군을 서로 밟고 밟히게 만드는 주도면밀함까지.
 비록 숫자는 아군의 절반가량에 불과했지만, 적은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적장의 이름이 아키에스(Acies)라고 했던가? 제법이군. 그런 훌륭한 전법을 구사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에 비하면 목소리만 큰 아군의 지휘관은 그저 욕심만 앞서는 무능한 머저리에 불과하구나. 후후후!’
 난 내심으로 쓰게 웃었다.
 아, 그렇다고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무능한 아군의 지휘관, 페디토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썩은 귀족 나부랭이에게는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천하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제국인데······ 오죽 인재가 없었으면 페디토르 같은 무능한 인간이 지휘관이 되었겠는가.
 새삼 제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니, 분노는 고사하고 그저 쓰디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나와 같은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걸치고, 뒤에 검은 망토를 두른 기병 하나가 부상병들을 헤치며 급히 말을 몰아 내게로 다가왔다.
 흑사자대 소속의 병사, 내가 주변으로 정찰을 보낸 병사들 중의 하나였다.
 “무슨 일인가?”
 난 상념을 떨치고 차갑고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의 감상은 저 멀리 마음 깊숙한 곳에 던져 버린 채.
 병사는 날쌘 몸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리곤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대장님의 말씀대로 주변을 정찰했습니다만,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속상관인 나 이외에는 주변의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
 “흐음······.”
 난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상했다. 전투가 끝난 지도 어느덧 하루가 지났는데, 적의 추격 부대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렇다고 적장이 이대로 아군을 무사히 놓아줄 만큼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닐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벌써 추격대가 나타났어도 몇 번은 나타났을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적의 추격대는 보이지 않는 걸까?’
 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군을 그냥 놓아주는 걸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단 하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매복(埋伏)!
 적은 어딘가 다른 샛길로 우회해, 퇴로를 막고 아군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 외에는 지금껏 적의 추격대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그리고 문득 떠오른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귀찮게 됐다. 벌써 하루나 행군한 마당에 여기서 다른 길로 퇴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고, 그렇다고 빤히 적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따라 퇴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훗! 제법이군!”
 나는 나도 모르게 문득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재미있었다. 이처럼 속임수를 잘 쓰는 적장이라니······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한판 제대로 붙어 보고 싶은 호승심과 함께, 불현듯 적장이 상당히 재미있는 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장은 아직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나 카시우스의 존재!
 전투에 참가조차 하지 못한 나와 흑사자대의 존재였다.
 
 * * *
 
 저 멀리 대륙의 동부에 있는 이민족. 한(漢)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제국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이민족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1)
 
 세 사람이 합심하면 거리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거짓말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그것이 곧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이용한 책략도 바로 이것, ‘삼인성호’였다.
 사실 적의 추격대는 없었다. 아니, 그들을 따르는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대여섯 명의 부하들을 시켜 적의 추격대가 발견된 것처럼 거듭 거짓 정보를 흘린 것만으로도, 거짓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이내 진실이 되었다.
 곧이어 진실은 다시 공포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모든 장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카시우스는 몇 사람의 말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었다.
 
 * * *
 
 페디토르 나투라 비르고스(Peditor Natura Virgos).
 올해 나이 52세. 이번 원정의 총지휘권을 지닌 제국의 대장으로서,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집정관[Consul] 나시카(Nasica) 솔 비르고스의 먼 친척이다. 작은 키와 반쯤 벗겨진 머리, 임산부마냥 불룩한 배와는 달리 대단한 정력가로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내세울 만한 건 대단한 정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군사에 대한 능력이 형편없으면서도 단지 명문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6만의 대군을 이끄는 장군이 된 자.
 제국 말기의 무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바로 이 페디토르란 사내였다.
 카시우스가 행렬의 선두에 있던 페디토르에게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음을 보고하러 갔을 때, 그도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 그게 사실인가? 벌써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나?”
 그가 비단 손수건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더듬더듬 카시우스에게 되물었다.
 물론 이미 보고를 받은 그가 정말로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음을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상대가 자신의 물음에 제발 부정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의 이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시우스의 대답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며, 당황한 상관과 달리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장군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소식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의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몇 명의 정찰병들을 시켜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흘린 것은 그였다.
 그런데 막상 상관이 적의 출현을 묻자,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적의 추격대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재차 채근하듯 묻는 페디토르.
 그러나 카시우스 또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적이 아무래도 아군의 예상 퇴로 어딘가에 매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패잔병이라도 숫자가 사천 명이나 됩니다. 또한 저와 흑사자대는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은 위험하게 손실을 각오하고 뒤에서 공격을 하는 대신, 아군의 길목을 막아 기습을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판단한 적의 움직임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진실이 언제나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페디토르는 원래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를 업신여기는 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는 일개 소모품에 불과했고, 지금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비록 카시우스는 사실을 보고했지만, 페디토르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디토르는 카시우스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놈은 절대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적의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이거늘.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매복이 있다는 핑계로 자신이 선두에서 도망치고, 날 후미에 두어 적의 추격대를 막는 방패로 사용하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는 확신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저 간악한 카시우스 녀석은 혼자만 살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카시우스가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소장과 흑사자대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제가 적의 매복을 유인하겠으니, 페디토르 님은 그사이 다른 길로 우회해 퇴각하십시오.”
 카시우스의 이 말 또한 페디토르의 입장에선 현재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대에 대한 의심 사로잡힌 페디토르에게 있어, 지금 이 말은 그 의심을 완전한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였다.
 페디토로가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는 가운데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잠시 후, 마침내 페디토르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매복이 있다는 자네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선두에 서겠다. 자네와 흑사자대, 그리고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후방에서 따라오도록!”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시우스가 확인하듯 조심스레 되물었지만, 그의 결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되물음은 더욱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네. 이건 여황 폐하로부터 군단의 총지휘를 위임받은 ‘쿰 임페리오(Cum Imperio:독자적인 최고 통수권을 지닌 사람)’로서 하는 명령이다!”
 그는 더욱 단호한 표정과 어투로 카시우스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가 실제로 선두에서 매복한 부대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적의 추격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한 그는 매복을 핑계로 먼저 도망가고, 카시우스와 그 병사들을 방패로 삼겠다는 속셈이었다.
 결국 카시우스는 상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상관의 지금 이 말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바였지만, 그는 못 이기는 척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
 “Etiam, mei dominus(에티암, 메이 도미누스)!”
 그는 오른 주먹으로 심장을 치며, 지금은 군대의 복명 등을 비롯해 일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고대어로 힘차게 복명했다.
 페디토르는 알지 못했다, 이때 카시우스의 입가에 걸려 있는 희미한 미소가 의미하는 것을.
 잠시 후, 페디토르와 상위 귀족으로 이루어진 그의 측근들이 먼저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해서.
 그러나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카시우스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매복이 무서운 것은 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한번 모습을 드러낸 이상 매복은 그저 대열이 흐트러진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지. 그리고 명색이 아군의 총대장을 미끼로 던진다면, 적도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사방은 고요했다.
 간간이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릴 뿐, 폭 삼십여 미터의 숲길은 그저 고즈넉할 따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고요한 정도가 아니었다.
 높고 푸른 하늘과 귓가를 스치는 맑고 차가운 바람은 평화로운 분위기마저 연출했고, 그 가운데 숲길을 가득 메운 늦가을의 붉은 단풍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한가로운 가을 숲길의 전형적인 모습.
 단, 이 길을 걷고 있는 일단의 무리에게는 한가로이 이런 경관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페디토르.
 그는 초조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안 그래도 살이 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목은 거북이처럼 더욱 움츠러들었고, 털이 무성한 두툼한 손발은 찬바람을 맞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
 “젠장!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그는 수레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나 크게 병사들에게 고함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가 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언제 뒤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의 추격대 때문이었다.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카시우스에게 뒤를 맡기고 도망친 지도 어느덧 3시간째.
 하지만 그와 그의 측근 장교들은 카시우스가 남은 평원으로부터 불과 15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를 이동한 상태였다.
 사실 마음이 급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굳이 그가 거칠게 걸음을 재촉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지난 3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러나 급한 것은 마음뿐, 부상병이 태반인 그들은 이제야 겨우 평원을 벗어나 잎이 넓은 아름드리나무가 무성한 숲길의 초입에 들어선 상태였다.
 ‘아무리 끈질기게 버텨도 그 사형수 놈들은 두어 시간이 한계일 터. 어쩌면 적의 추격대는 벌써 놈들을 제압하고 다시 추격을 재개했을지도 모른다. 젠장! 놈들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겨우 이런 데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니······!’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재차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기와 갑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초라한 행색,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몰라 벌벌 떨어야만 하는 불안감, 그리고 패잔병의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까지······ 그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중에서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상이 심한 병사들, 평민 주제에 자신 같은 귀족의 걸음을 방해하는 부상병들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결국 곁에 있던 부관 한 명을 손짓으로 불러 명령했다, 뱀처럼 싸늘한 표정과 어투로.
 “더 이상 행군을 지체할 수 없다. 지금부터 행군을 지체시키는 병사들은 모두 다리의 힘줄을 베어 버려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귀가 먹었나? 행군에 방해되는 놈들은 모조리 다리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다!”
 그가 짜증 가득한 어투로 재차 호통을 쳤다.
 “아!”
 그 말을 들은 부관, 그리고 곁에 있던 대여섯 명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고 해도 그렇지, 멀쩡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아군 병사들의 힘줄을 자르라니······ 이건 상상조차 못한 해괴한 명령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호통이 너무도 컸던 탓에 다른 병사들도 모두 어느새 행군을 멈추고 하나같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하지만 페디토르는 그런 부하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길이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 부상병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길을 막으란 말이다!”
 놀라거나 미안해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무슨 대단한 생각이라도 한 듯한 자랑스러운 표정과 어투.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어차피 천민과 평민은 귀족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하찮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귀족에게 있어 이런 결정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 중에서도 비교적 지위가 낮은 자들이나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장교들, 그들에게 있어 그의 명령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우물쭈물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령을 재촉하는 호통이 몇 번 이어진 후, 결국 보다 못한 페디토르가 직접 나섰다.
 “흥! 못난 놈들!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한 죄는 돌아가서 내가 직접 따지겠다!”
 그는 곁에 있던 호위병의 장검을 빼앗듯이 뽑아 들었다.
 그리곤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려, 때마침 근처에 있던 부상이 심한 어느 병사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설마 반항할 수조차 없는 부하들에게 진짜로 검을 휘두르려는 걸까? 목숨을 내걸고 페디토르의 행동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나?
 좌중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페, 페디토르 님······.”
 부상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지만,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더욱 악마 같은 표정을 짓고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 이대로 부상병을 죽이려는 걸까?
 그런데 바로 그때, 모두의 긴장이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한 줄기 검은 빛살이 페디토르를 향해 날아온 것은.
 그것은 누가 의식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날아와 검을 쥔 그의 오른 팔뚝에 정확히 박혔다.
 “으악!”
 페디토르가 외마디 비명을 길게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팔뚝에서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뭐, 뭐지?”
 좌중은 크게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랍게도 검은 빛줄기는 1미터가량의 기다란 화살이었는데, 어찌나 강한 힘으로 쏘았는지 그의 두툼한 팔뚝을 완전히 관통한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곧이어 몇 번의 귀를 찌르는 호각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화살들이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거의 동시에,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매복해 있던 적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성난 늑대 무리였다.
 “와―아!”
 크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적의 모습이 흡사 연약한 양 떼를 노리고 달려드는 성난 늑대 무리와도 같았다.
 “으아악!”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누가 명령할 것도 없이 제국의 병사들도 급히 칼을 뽑아 들며 반격했지만, 어디서 화살을 날리는지도 정확히 파악도 안 되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급히 주변의 나무 근처로 몸을 숨기거나, 혹은 벌써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 삼아 화살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숨어 봐야 곧이어 들이닥친 적의 병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카시우스가 예측한 적의 진짜 추격대.
 이제껏 숲 속에 매복해 있던 그들이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 * *
 
 셉티무스(Septimus).
 그는 대대로 양을 치던 노예 집안의 자식이었다. 7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숫자 7(Ⅶ. Septem)에서 따와 이름이 셉티무스였으며, 당연히 귀족들이 갖는 가문명이나 성씨 따위는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이제 한창 가정을 이루고 생산 활동에 종사해야 할 33살의 나이였지만, 그는 지금껏 평범함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물론 노예도 같은 노예끼리 결혼을 하고, 평민이나 귀족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약 175cm가량의 적당한 키와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호남형의 인물이었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들과 같은 정상적인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날 우발적으로 주인집의 아들을 죽인 후, 그의 인생은 평범함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당시 14살이던 주인집의 아들이 평소 그에게 잦은 구타를 가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구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어를 하던 중 우발적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노예라는 사실이었고, 그가 죽인 자가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재판 따위는 없었다. 귀족이 노예를 죽이면 가벼운 벌금형에서 끝나지만, 노예가 귀족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였다.
 그래도 그는 억울했다. 한창의 나이에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고, 또 무서웠다. 그래서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특수부대를 창설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원했다.
 그는 고민은커녕 특수부대가 자신을 위해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며 감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심지어는 이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때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군관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열악한 보급은 물론, 열에 일고여덟은 죽어 나가는 고된 훈련, 게다가 어렵게 훈련의 고비를 넘긴 다음 투입된 잔인한 살육의 현장들까지······ 그는 몇 번이고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의 죽음이나 탈영이 남은 가족들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그 지긋지긋한 연좌제만 없었더라면, 그도 아마 다른 동료들처럼 나약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딱 한 가지 행운은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 검은색 갑주로 중무장을 한 채 말 위에 앉아 저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는 카시우스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을 만난 것도 벌써 3년인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처음 카시우스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정식으로 창설되었을 당시, 흑사자대는 사형수와 무기수들로 구성된 군대답게 장교들에게는 반드시 피해야 할 부대로 악명을 떨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에게 있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안락함만을 추구하던 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그저 만만한 샌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따라서 항명과 반항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장교를 구타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부대가 창설되고 5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그들을 지나쳐 갔던 장교들이 삼십여 명을 헤아렸겠는가.
 그러던 중 3년 전, 31번째의 대장으로 부임한 자가 바로 카시우스였다.
 여황의 기사,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
 한때는 제국 최고의 명문가였으나, 15년 전 개혁을 부르짖던 중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멸문의 화를 당한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
 반역도의 자식이라는 신분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를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특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적들마저 인정한 여황 폐하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은 일명 ‘여황의 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도 불과하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애송이임에도 불과하고, 그가 그동안 전장에서 세운 화려한 공적이었다.
 십인대장으로 처음 참전한 전투에서 적의 백인대를 전멸시킨 것부터 시작해, 삼십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수백 명의 적을 베었다는 소문은 이미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물론 소문이라는 게 그렇듯 그중 상당 부분은 각색되고 과장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불사신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대단한 공적을 세운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단한 소문과 달리, 카시우스의 첫인상은 조금 의외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외라고하기보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무슨 사내놈이 계집애보다 더 예쁘장한 거야?’
 카시우스를 처음 봤을 때, 그를 포함한 흑사자대원들의 첫 느낌은 대부분 이러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여자보다도 더 투명해 보이는 하얀 피부, 약간은 고집이 있어 보이는 붉은 입술과 그 위로 시원하게 뻗은 콧날, 짙고 매혹적인 눈썹,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헝클어진 긴 붉은색 머리칼까지······ 굳이 185cm에 이르는 훤칠한 키와 이와 대비되는 호리호리한 체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는 같은 남자가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외모보다 더 의외인 것은 부임한 직후 그가 보여 준 언행이었다.
 “인간쓰레기들!”
 그가 모든 병사들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우!”
 당연히 병사들은 길게 야유를 보냈다.
 발을 쿵쿵 구르며 거친 욕설을 퍼붓기도 했고, 일부 성질이 급한 녀석들은 당장에라도 연단에 쳐들어갈 기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좌중을 둘러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귀하고 잘나신 귀족들에게 있어, 우리는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대들에게 묻겠다! 세상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믿는가? 참된 것은 언젠가 승리하고, 거짓된 것은 언젠가 패배한다고 생각하나? 강자는 약자를 보살피며, 약자는 그 보호 아래서 꿈을 키운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부대장의 취임 인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병졸들의 야유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쓰레기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 있어, 이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있어, 우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쓰레기들이여······! 난 그대들에게 가족과 이웃을 위해,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싸우라는 허울뿐인 말 따위는 않겠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다른 이들처럼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 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에서 강자가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대장으로서의 다짐이나 각오, 혹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언급 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비상식적이면서도 짧은 연설이 끝났을 때, 셉티무스를 비롯한 이천여 명의 병졸들은 야유 대신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카시우스! 카시우스! 카시우스!
 
 그날, 카시우스의 이름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어쩌면 흑사자대의 모든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족입네 자부하는 가식 덩어리가 아니라, 귀족 자신들만의 권익을 위해 병졸들을 희생시키는 탐욕 덩어리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그들을 이해해 줄 진정한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카시우스는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늘 몸소 선두에 섰고, 그날 자신의 말이 허울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때였다.
 “셉티무스······ 셉티무스! 왜 대답이 없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 건가?”
 그의 상념을 깨며 카시우스의 낮지만 또렷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은 불렀던 듯 약간은 책망이 담긴 어투.
 “아!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셉티무스는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랬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 적이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전장의 한복판.
 언제까지 한가로이 생각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전투에 있어 절대라는 말은 없다. 언제, 어디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다시 카시우스가 차가운 어투로 덧붙였다.
 그런데 이어서 셉티무스가 뭐라 대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앞에서 정찰병 하나가 급히 말을 몰아 달려왔다.
 그리곤 잠시 후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린 뒤, 카시우스의 정면에서 왼쪽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약 3km 전방의 숲 속에 위치한 넓은 공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양측의 숫자는 대략 이천에서 삼천가량!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전투가 한창인 것 같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
 카시우스를 비롯한 이천 명의 흑사자대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남은 오백여 명의 정규 병사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소식이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적은 인적이 드문 숲에 매복하여 퇴각하는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뒤에 있던 셉티무스가 카시우스에게 다가와 명령을 재촉했다. 당장에라도 전투를 벌이고 싶은 듯 손이 근질근질하다는 어투.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 또한 무언의 살기를 번뜩이며 어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재촉했다.
 기다리다 지친 것은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좋다! 지금부터 우리는 인간이 아닌, 지옥에서 나타난 저승사자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도록 한다!”
 그는 선언을 하듯 큰 소리로 외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붉은색의 가면을 천천히 얼굴로 가져갔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눈만 뚫려 있는 섬뜩한 붉은색의 가면을.
 그것은 얇은 강철로 만들어 표정이 전혀 없었으며, 그야말로 사신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렸다.
 이어서 그의 뒤에 있던 다른 흑사자대원들 또한 자신들의 대장과 같은 모양인 검은색 죽음의 가면을 천천히 얼굴에 가져갔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듯이.
 
 ―Mo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들이 외치는 고대어의 함성이 지옥의 선율처럼 무겁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신, 피에 굶주린 사신들이었다.
 
 * * *
 
 로메루스(Lomelus).
 그는 ‘공화국’ 소속 제1기병대장이다. 5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0cm가 넘는 큰 키와 당당한 체구를 자랑했고, 특히 한껏 멋을 내 좌우로 짧게 기른 탐스러운 콧수염은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그만의 자랑거리였다.
 게다가 외모만큼이나 거친 힘 또한 유명해서, 파괴력 넘치는 마창술(馬槍術)은 같은 기병대 내에서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니, 단순히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승리가 가져다주는 특유의 성취감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겼다! 이것으로 이번 전투는 아군의 완승이다!’
 몇 명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인 채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옥(地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악귀가 지배한다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악귀들뿐, 제정신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처절한 비명과 거친 욕지거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는 기괴한 장단처럼 한데 어울려 귓가를 파고들었으며, 그 와중에 뿜어지는 시뻘건 선혈은 하늘마저 붉게 물들였다.
 아비규환의 전형!
 물론 전황은 기습을 가한 푸른색 갑옷의 공화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붉은색 갑옷의 제국군은 힘겹게 저항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과연 레오 님이시다! 비록 질투에 눈먼 총지휘관에 의해 후방으로 쫓겨났지만, 적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했다!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적의 이동 경로를 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매복을 지시했던 상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재차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레오의 말을 듣지 않고 정석대로 추격대를 파견했더라면, 아무리 삼천에 이르는 정예 부대라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한 패잔병들의 저항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피해를 입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적의 지휘관을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기를 각오한 적의 반격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이 곤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격을 하는 대신 적의 이동 경로에 미리 매복을 함으로써 그들은 큰 피해 없이 적을 완벽히 포위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적의 말살’이라는 전쟁 본연의 목적을.
 ‘어떻게 보면 레오 님도 정말 안타깝구나! 이런 대단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속이 좁은 상관을 만나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니······! 이대로라면 이번에도 역시 재주는 레오 님이 부리고 공은 모두 아키에스가 가로채겠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는 문득 자신의 상관이 불쌍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략 삼십여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공화 측 병사들의 일방적인 학살이 점차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Momento mori! Momento mori!
 
 터질 듯한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문득 어디선가 중저음의 음산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마치 지옥 저편에서 등장하는 저승사자들의 음성처럼.
 “뭐, 뭐야?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감히 누구 앞에서 장난질이냐?”
 “적인가? 어서 전열을 가다듬어라!”
 당황한 그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전투를 멈춘 뒤,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그들 외에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비록 피로 얼룩지긴 했지만 숲은 여전히 고요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시리도록 파랬다.
 그렇지만 그 음산한 외침은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환청처럼 좌중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 음산한 외침이 거짓말처럼 뚝 그치더니, 이천여 기(騎)에 이르는 중무장한 검은색의 기병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아무런 함성이나 소리도 없이, 그저 지옥에서 나타난 검은 저승사자들처럼.
 물론 그들은 실제 저승사자들이 아닌, 카시우스와 그가 이끄는 흑사자대의 병사들이었다.
 형식적인 권고나 투항의 말 따위는 일절 없었다.
 아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함성이나 격려 또한 없었다.
 그들은 그저 살기를 번뜩이고 말을 재촉하며, 1.5미터가 넘는 기다란 마상용 창을 휘둘러 그대로 단숨에 전장을 돌파할 뿐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유지하라!”
 당황한 로메루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한번 불이 붙은 흑사자대의 기습을 멈추기엔 어림없었다.
 오히려 포위했던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진 통에, 카시우스의 예견대로 매복 부대는 흑사자대의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막상 부딪쳐 본 다음에야 로메루스는 어째서 자신이 흑사자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겪어 본 흑사자대는 귀신이 아니라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들은 말이 울음을 토해 낼 수 없도록 말의 입을 천으로 막았고, 말발굽은 헝겊과 천으로 감싸 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게다가 갑옷은 쇳소리가 요란한 철 갑옷이 아니라 특수 가공을 한 부드러운 가죽 갑옷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런 기습에 능숙한 듯 동작 하나하나가 신속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젠장!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지? 아무리 공터라 해도 이런 난전(亂戰)에서는 기마술에 제약이 있는 게 당연한 법인데······ 대체 저놈들은 어떤 훈련을 받았기에 이런 곳에서도 저렇게 완벽한 기마술을 펼친단 말인가?”
 로메루스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은 나무가 무성한 숲이었기에 기병의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이런 숲에서는 기병 대신 몸을 숨기고 화살을 날리는 궁병(弓兵)을 적극 활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다만 그가 생각지 못한 점이 있다면 지금 그가 상대하는 부대가 단순한 기병대가 아니라는, 전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전투에만 투입되는 일종의 특수부대였다는 점이다.
 산악이나 늪지 같은 더 험한 지형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던 흑사자대에게 있어, 이 정도의 숲길은 제약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기척을 지우고 기습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흑사자대가 더 대단한 것은 공포라는 인간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이었다.
 공격하기 전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고대어를 음산하게 외치고 적을 압박한 것, 기척과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유령처럼 움직인 것, 그리고 사신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의 가면을 쓴 것은 모두 적을 공포로 밀어 넣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때문에 로메루스와 그 병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기가 꺾였고, 막상 전투를 벌이자 제 실력을 반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로메루스도 만만한 장수는 아니었다.
 “적의 기세에 당황하지 마라! 아직 수적으로는 아군이 월등히 유리하다! 일단 대열을 정비하고 방어에 주력하라!”
 그는 적의 숫자가 고작 이천 명가량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주위의 부관들을 시켜 병사들에게 우선 방어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호위병들과 함께 곁에 있던 말에 올라, 1.2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들고 몸소 전투를 준비했다.
 비록 지금까지는 전황이 유리해 가운데서 가만히 구경만 했지만, 그 또한 지휘관이기 이전에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전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참전하는 것을 사실 카시우스가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윽고 로메루스가 말에 오르고 막 몸소 전투에 참가하려던 순간이었다.
 ‘저놈이 대장인가? 실전 경험이 상당히 풍부한 녀석 같군!’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황을 살피던 카시우스는 대번 로메루스가 적의 지휘관임을 직감했다.
 로메루스가 눈에 띄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주변의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푸른색의 갑옷을 걸친 상태였고, 그나마 일반 병사들과 다른 점이라면 갑옷의 우측 가슴에 공화의 상징인 하얀 사자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몸에 배인 일종의 본능 덕분에, 또한 로메루스가 일반 병사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위엄을 뽐낸 덕분에, 자연스럽게 상대가 대장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카시우스는 생각했다.
 
 ―금적선금왕(擒賊先擒王).2)
 
 동부 이민족들 사이에 내려오는 말로, 싸움에서는 우두머리를 먼저 잡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카시우스가 난전(亂戰)을 벌일 때 항상 강조하던 것이기도 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적의 대장임을 파악함과 동시에, 카시우스는 나지막한 기합을 내뱉으며 말의 허리를 박차고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상대까지의 거리는 이제 약 삼십여 미터.
 그러나 그는 주변에 세 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린 채, 마상용 장창으로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며 질풍처럼 돌진했다.
 카시우스가 연설 하나만으로 흑사자대의 대장으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흑사자대는 상관을 암살하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몇 번이나 그의 암살을 시도했다.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린 것만 해도 세 차례였고, 심지어는 계급장 떼고 일대일 대결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도전을 압도적인 무위(武威)로 물리쳤기 때문에 비로소 그들의 대장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검은 가면을 쓴 상태에서 붉은 가면은 대번 눈에 띄었다. 아니, 단순히 눈에 띄는 정도를 벗어나,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베어 버리는 통에 다른 저승사자들보다 더한 공포로 장내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로메루스 또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용사답게 본능적으로 붉은 가면이 적의 대장임을 감지했다.
 “네 이놈! 네가 대장이냐? 전투 중 표적이 될 것을 빤히 알면서도 혼자만 붉은 가면을 쓰다니······.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가 보구나!”
 분노를 참지 못해 안면 근육을 부르르 떠는 로메루스.
 곧이어 그도 말 허리를 박차고 카시우스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30m······ 20m······ 10m······.
 점점 거리가 좁혀 올수록 둘의 기세는 더욱 사납고 날카로워졌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급하게 뛰었으며, 흥분한 말의 거친 울음소리, 상대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 허공을 가르는 장창의 묵직한 파공음까지 서로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네 이놈! 그 건방진 목을 내놓아라!”
 로메루스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며 장창으로 상대의 가슴을 곧게 찔러 갔다, 마치 상대의 가슴을 그대로 부숴 버릴 것 같은 맹렬한 기세로.
 하지만 카시우스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과연 덩치에 맞게 힘 하나는 대단한 것 같군! 그러나 반드시 정면에서 힘으로 겨루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면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오른손의 창끝을 슬며시 아래로 내렸다. 언뜻 보면 상대의 배를 겨냥하듯이.
 그리곤 상대의 창이 막 가슴에 닿으려는 찰나, 그는 돌연 손목을 꺾어 상대의 창대를 비스듬히 쳐올렸다.
 챙!
 쇠로 만든 창과 창이 서로 부딪치자, 가벼운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청을 찢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충격을 받은 서로의 말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크게 날뛰며 요란하게 울음을 토해 냈다.
 ‘헉! 겉보기엔 호리호리한데 팔 힘이 대단하군!’
 로메루스는 은은히 손아귀가 저려 오는 걸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둘의 대결은 시시하게도 이 한 번의 부딪침이 끝이었다.
 중심을 잃은 로메루스의 말이 크게 휘청거린 순간, 카시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느새 왼손으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그대로 상대의 왼쪽 목덜미에 단검을 꽂았다. 눈 깜빡할 사이, 전광석화와 같은 손놀림으로.
 “으악!”
 로메루스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목과 왼쪽 어깨의 중간 부근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이 로메루스의 마지막이었다.
 “악! 대장님을 구해라!”
 뒤따르던 호위병들이 급히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다음부터는 군대와 군대 간의 격렬한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虐殺)!
 그것은 우두머리를 잃고 당황하는 자들에게 행해진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흑사자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적의 진영을 갈기갈기 찢은 뒤, 뒤이어 숲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백의 보병이 전장에 투입됐다.
 그리곤 그물로 물고기를 몰 듯이 포위망을 좁히며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적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물론 그 오백의 병사는 본의 아니게 카시우스와 함께 남게 된 자들, 신분과 지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방패막이가 됐던 그들이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피와 살이 튀기며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지만, 전장에 있는 것들은 오직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들뿐.
 악귀들이 손에 사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
 공화의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엔 외마디 비명을 길게 지르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불과 삼십여 분 남짓이 지난 후.
 처음의 기세등등했던 공화의 병사들 중에서 제대로 말 위에 앉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목숨만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고, 장내에는 오직 피비린내만 진동했다.
 완승(完勝)!
 카시우스와 그 휘하의 장졸들은 사망자가 단 하나도 없이, 부상자만 오십여 명에 불과한 완승이었다.
 
 * * *
 
 까악― 까악!
 가을 특유의 맑고 높은 하늘이 무색하게, 때 아닌 까마귀 떼가 하늘을 배회하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사방에는 온통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인마의 시신들로 가득했고, 그들이 흘린 검붉은 선혈은 작은 강을 이루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득한 피비린내는 악취가 되어 코를 찔렀으며,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신음 소리는 문득 귀기(鬼氣)마저 느껴지게 만들었다.
 도저히 인세(人世)의 풍경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곳.
 물론 이 상황을 연출한 지옥의 사자는 카시우스가 이끄는 흑사자대, 그리고 패잔병들로 구성된 오백 명의 보병대였다.
 카시우스는 천천히 말을 몰아 이 지옥을 가로질러 갔다.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약간은 도도해 보이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처참하군!’
 겉으론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지옥을 한두 번 겪어 온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흡이 가빠지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괴감이나 죄책감, 혹은 후회 따위의 사치스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전장은 죽지 않으면 죽는 산지옥이고, 만약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널브러진 시신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장!
 그곳에서 부끄러운 것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시우스가 생각하는 전장이란 곳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 동안, 주변에서는 병사들의 까마귀질이 한창이었다.
 까마귀질!
 실제로 까마귀 떼가 시체들을 파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모든 전투행위가 끝난 후, 살아남은 승자들이 벌이는 일종의 마무리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적들을 확실히 죽이고, 적의 군수품과 귀중품을 수거하는 일종의 노략질······.
 그 일련의 행동들이 마치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 떼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 바로 까마귀질이었다.
 이번 전투의 승자들이 벌이는 행위는 까마귀질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처참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난밤의 참혹한 패배를 딛고, 퇴각하는 도중에 맞이한 적의 추격대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들의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카시우스가 적의 또 다른 적의 추격대를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휘하 장졸들에게 지나친 까마귀질의 자제를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행위는 아마 해가 질 때까지도 계속됐을 것이다.
 그렇게 대략 오 분쯤 둘러봤을 무렵이다.
 “대장님!”
 저 멀리 좌측에서 셉티무스와 몇 명의 병사들이 급히 그를 향해 달려왔다. 심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을 들것에 싣고 종종걸음으로.
 ‘누구지?’
 카시우스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셉티무스가 겨우 부상병 하나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것이 뭔가 이상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잠시 후 셉티무스와 병사들이 가까이 왔을 때,
 “아!”
 들것에 실린 자의 신원을 확인한 카시우스도 가볍게 놀라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콜록!”
 그자는 부상이 심한 듯 연신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듣기에도 거북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얼굴을 포함한 온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갑주도 피에 젖어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왼쪽 목과 어깨 사이에는 단검이 꽂혀 있어 검붉은 선혈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위엄이 넘쳤을 멋진 콧수염도 선혈로 붉게 변해 있었으며, 가슴팍에 수놓아진 공화군의 흰 독수리 문양 또한 본래의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장대한 기골이 인상적인 공화군의 대장.
 그자는 바로 카시우스의 단검 아래 쓰러졌던 적장, 로메루스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두 번째로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이었다.
 화살이 박힌 오른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전투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부상에 불과했다.
 화려한 갑옷은 로메루스와 마찬가지로 선혈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본인의 피보다는 그를 지키던 호위병들의 피가 더 많았다.
 즉, 로메루스처럼 부상이 심해서가 아니라, 단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다.
 큰 소리만 칠 줄 알지 전장에서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귀족. 물론 그자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쳤던 페디토르였다.
 카시우스는 고삐를 셉티무스에게 맡긴 뒤,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손을 내저어 다가오는 호위들을 곁으로 물리고, 친히 들것 옆으로 가 그 둘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같은 일군의 대장인데······ 정말 웃기는군.’
 카시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정말 부상이 심해 의식을 잃은 자와 반대로 단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만으로 의식을 잃은 자.
 그것은 마치 공화군과 제국군의 현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로메루스와 페디토르 중 먼저 의식을 차린 것은 페디토르였다.
 그는 실눈을 뜨고 억지로 들것에서 상체를 일으키더니, 곧이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말을 쏟아 냈다.
 “아악! 뭐가 이렇게 아픈 거야? 여긴 어딘가? 서, 설마 여기가 지옥은 아니겠지? 또 적은 어떻게 됐나? 뭘 그리 보고만 있는 건가? 내가 죽어 가는 게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일단 어서 의사를 불러라!”
 부상이 깊지 않은 사람답게 우렁차고 오만한 말투. 아니, 오만하다 못해 아예 철이 없는 어린애 같은 말투였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은 입은 다치지 않은 건가?’
 ‘이런 경박한 놈이 대장이란 말인가? 젠장!’
 ‘명색이 대장이라는 녀석이 군대를 걱정하기는커녕 자신의 몸부터 챙기다니······.’
 비록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시우스는 페디토르의 투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끄럽군.”
 그는 상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약간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어 병사들로 하여금 강제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네 이놈······ 웁! 웁!”
 졸지에 건장한 병사들에게 입이 막힌 페디토르가 심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카시우스는 끝내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약간은 흥미로운 눈으로 여전히 로메루스의 상처만을 찬찬히 살폈다.
 ‘어째서 적장을 죽이지 않는 걸까?’
 당연히 주변의 장졸들은 모두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동안이나 그저 상대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로메루스 또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카시우스를 알아보았다.
 “그대가 대장인가?”
 한참 후, 그가 억지로 쥐어짜듯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가까이 있어야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 내가 대장인 카시우스다.”
 카시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페디토르를 상대할 때와 달리 진지한 어투로.
 “카시우스······ 카시우스라······. 멋진 이름이군.”
 “······.”
 “내······ 이름은 로메루스. 제, 제국의 폭정에 하, 항거하는 대공화의 기병대장이다.”
 로메루스는 더듬거리면서도 최대한 힘을 짜내 말을 이었다, 비록 패장이긴 했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약간의 뜸을 들인 뒤, 로메루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 전투, 그대가 승리했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라. 만약 처음부터 레, 레오 님이 지휘를 했더라면, 어제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승리하는 건 우리였을 테니까. 내, 내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 하나, 레오 님께서 원대한 포, 포부를 펼치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마치 레오라는 자를 신처럼 떠받들며 존경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
 이 말과 함께 로메루스는 다시 피가 섞인 기침을 한참이나 토해 냈다.
 주변의 모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레오? 그게 누구지?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저토록 대단하게 존경을 받는 걸까?’
 ‘적장의 이름은 아키에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곁에 있던 셉티무스와 다른 장졸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했다. 로메루스쯤 되는 기병대장이 칭찬할 자라면, 그것도 지금처럼 죽음을 앞둔 상황에까지 칭송해 마지않을 자라면, 그자는 필시 범상치 않은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데 그런 대단한 인재가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자였으니······ 좌중은 모두 의문을 갖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레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카시우스가 보인 반응이었다.
 ‘레오! 아니,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Leonis Vita Audacius)! 설마 그가 지금 공화에 몸을 담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쇠망치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의 침착함이나 차가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
 카시우스는 아직도 그 이름을 잊지 못했다. 아니,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전쟁과 전투, 전략과 전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자! 어째서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를 일깨워 주고, 전쟁과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의 악순환을 타파할 것을 역설한 자! 친구이자 형제요, 때론 스승과도 같았던 그자!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라는 이름을 카시우스는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장이 말한 레오가 그가 알고 있는 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레오라는 이름은 대륙에서 그다지 드문 이름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전투에서 적이 보여 준 완벽한 포위전법, 그것은 분명 언젠가 레오가 그에게 가르쳐 준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카시우스 님! 카시우스 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누군가가 몇 차례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카시우스.
 옆을 보니 셉티무스를 비롯한 장졸들, 그리고 로메루스 또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약간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우스 님, 이자를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의 우측 뒤편에 시립해 있던 셉티무스가 재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시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그저 로메루스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
 로메루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삶에 대한 집착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던 듯 의연한 태도로.
 이윽고 카시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처우를 원하는가?”
 “쿨럭! 그······ 말은 날 사,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로메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는 목을 쳐서 수급을 챙기거나, 혹은 포로로 잡고 심문을 통해 적의 정황을 알아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살려 줄 수도 있지.”
 카시우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의도일까? 표정부터가 차갑고 냉정한 녀석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로메루스는 짧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짧게 숨을 몰아쉰 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쿨럭! 나, 난 무인이다. 신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며······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무인! 따라서 내 꿈은 언제나 전장에서 죽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 부디······ 무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도록 해 다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의 어투는 처음과 달리 끝으로 갈수록 더욱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마치 마지막 모든 것을 짜내기라도 하는 듯이.
 로메루스는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사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고, 포로로 잡아가 자신의 전공을 위한 노리개로 쓸 거라 생각했다.
 전장에서 사로잡힌 포로는 그것이 당연한 신세였으며, 자신 또한 그런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달랐다.
 “그 말······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옆구리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듯 천천히 검끝으로 상대의 목을 겨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고······ 고맙다. 다만 그대 같은 장수를 진작 만나지 못한 게 아쉽고, 그대와 레오 님의 결전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만약 내 예감이 맞는다면 그대는 언제고 우리 레오 님과 전장에서 칼을 맞대게 될 것이다.”
 로메루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로메루스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들것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잠시 후 심장을 관통한 상대의 검을 바라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명은 없었다. 한탄도 없었고, 후회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오로지 편하고 홀가분하기만 했다.
 카시우스는 잠시 감상에 젖은 눈으로 상대의 시신을 바라봤다, 피가 흥건히 흐르는 가운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적장의 시신을.
 “적이지만 의연한 자였다. 조촐하게나마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고 예를 갖추도록······.”
 그는 한참 후에야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고 돌아섰다.
 페디토르의 처분은 그다음이었다.
 페디토르는 눈앞에서 로메루스가 죽는 모습을 보고 황망한 표정만 짓고 있다가, 카시우스가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본 다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발버둥을 쳤다.
 그래 봐야 여전히 건장한 병사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 말 없이 페디토르를 노려보길 한참.
 이윽고 카시우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곁에 있던 셉티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겠다. 평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 뭐라고 했는가? 내가 우리 흑사자대에 필요 없는 존재를 어떤 유형이라고 정의했는가?”
 “네! 이기주의자! 자신만 알고 동료를 배신하는 이기주의자를 가장 경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셉티무스는 차렷 자세로 크게 대답했다. 내심으로는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크고 힘차게 대답했다.
 카시우스의 싸늘한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면 내가 그런 인간쓰레기들을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죽음! 동료를 배신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예외는 있는가?”
 “예외는 없습니다! 설사 그것이 대장님이라 해도 동료를 버리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입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면서도 씩씩하게 대답하는 셉티무스.
 카시우스는 셉티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나직하면서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아는군. 그런데 언제부터 내 말이 이렇게 우습게 됐는가?”
 약간은 짜증이 섞인 책망하는 어투.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셉티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지만, 카시우스의 굳어진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동료를 배신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라고. 그런데 지금 버젓이 내 눈앞에서 숨 쉬고 있는 저 돼지 녀석은 뭔가? 너희는 언제나 내 명령만을 듣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대체 언제부터 내 명령이 이렇게 우스워진 건가?”
 그는 여전히 페디토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셉티무스를 꾸짖었다.
 “아!”
 그제야 셉티무스는 상관의 의도를 깨닫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리둥절해 있던 페디토르도 그 의도를 깨닫곤 안색이 사색이 되어 더욱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카시우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 카시우스, 그리고 우리 흑사자대는 자신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비겁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피아를 막론하고 결코 예외가 없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맡겨 놓았던 말에 올랐다. 그래도 자신의 상관이었던 페디토르에게는 끝끝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히려 그는 페디토르를 바라보는 것조차 역겹다는 듯, 그리고 자신의 검에 그런 놈의 피를 묻히는 것 또한 아깝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보고서는 셉티무스, 네게 일임하겠다. 돼지 녀석뿐만 아니라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놈들은 모두 적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Etiam, mei dominus!”
 셉티무스가 절도있는 몸짓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이, 이봐······! 아니, 카시우스 님!”
 곧이어 페디토르와 그를 따르던 상급 장교들의 절규가 길게 울려 퍼졌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그들의 비명은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검은 사신!
 그 별명처럼 방금 전까지 카시우스가 서 있던 곳에는 오직 싸늘한 죽음만이 존재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카시우스가 아무런 대가가 없이 적장을 쉽게 죽인 것은 평소의 행동으로 봤을 때 너무도 의외였다.
 모순에 찬 이중적 행동이었으며,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겪어 본 자들의 평가는 달랐다.
 셉티무스를 비롯해 그와 직접 전장을 누볐던 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카시우스의 매력은 비정하지만 비열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에겐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한없이 차갑고 비정했다.
 그러나 한 번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겐 신분과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예의를 지켰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원칙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우수한 인재가 넘쳐 났던 것이며, 그가 약간은 독선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낭만주의자!
 그것이 바로 카시우스라는 남자였다.
 
 
 
 제2장 귀로(歸路)
 
 
 카시우스가 로메루스의 매복 부대를 전멸시키고 정확히 20시간 뒤, 공화군의 이차 추격 부대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
 비록 첫 등장이라 할 수 있는 아조루스 전투에서는 일개 하급 참모로 출전하여 본연의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차 추격 작전에서는 마침내 사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장교가 되어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 * *
 
 퇴각 사흘째 되던 날의 정오 무렵.
 카시우스가 처음 보고를 받은 것은 붉게 물든 산기슭을 가로질러, 아군의 제7요새를 향해 한창 북상하던 중이었다.
 그가 막 점심 식사를 겸한 약간의 휴식 시간을 명령하려는 찰나, 사방으로 보냈던 척후병 중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척후병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후방 5km 부근에 적의 추격대가 출현했습니다. 숫자는 최소 삼천 이상. 이동 속도가 일반적인 부대보다 빠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기병과 경무장 보병들로 구성된 것 같습니다.”
 굳이 내용을 볼 것도 없이, 그저 표정과 말투만 보더라도 상당히 긴박한 보고였다.
 그리고 그가 뭐라 대답을 하기 전,
 “헉! 벌써? 이건 너무 빠르군!”
 언제나처럼 그의 곁을 따르던 셉티무스가 먼저 깜짝 놀라며 카시우스를 바라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장교들도 하나같이 크게 헛바람을 들이켜거나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전혀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적의 이차 추격대가 닥칠 것이라 예상은 당연히 했던 바다.
 그래도 막상 그 예상이 현실로 되자, 당황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예외였다. 상기된 셉티무스와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듯 냉정할 따름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장교들의 입을 다물도록 한 뒤, 나직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대응이 신속하면서도 끈질긴 적이군. 하긴, 나라도 더욱 강력한 추격대를 보내 적의 패잔병을 공격했겠지.”
 그의 어투는 오히려 적의 대응에 감탄이라도 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척후병에게 담담히 물었다.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는? 현 속도를 봤을 때, 적이 아군을 따라잡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척후병의 반응이었다.
 “저, 그게······.”
 그는 황당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어째서 그렇게 뜸을 들이는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는 카시우스.
 분명 척후병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정찰 임무를 수행했던 베테랑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 말끝을 흐린다는 모습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곧이어 셉티무스가 재차 재촉을 해서야, 척후병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적의 이동 경로는 아군의 것과 동일합니다만······ 적의 이동 속도가 조금 이상합니다. 아군이 속도를 높이면 같이 속도를 높이고, 반대로 아군이 휴식을 취하면 같이 휴식을 취하며, 계속해서 아군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척후병이 보고를 하면서도 계속 머뭇거렸는지.
 “······?”
 셉티무스와 장교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동 경로가 아군의 것과 동일하다면 적도 척후병들을 파견해 아군의 위치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아군을 따라잡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건 무슨 뜻일까요?”
 잠시 후, 셉티무스가 조심스럽게 카시우스에게 물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고 자부하는 셉티무스였지만, 이런 황당한 추격전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적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건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뭐지? 지난번엔 추격 부대가 없어서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추격 부대가 있어서 문제인가? 아무래도 역시 적의 대장은 상당히 재미있는 자인 것 같군.’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적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할 터. 이것은 어쩌면 카시우스에 대한 도전, 로메루스의 매복을 간파하고 그들을 섬멸한 카시우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일지도 몰랐다.
 아직 적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위험했다.
 때문에 결국 카시우스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일단 계획대로 후퇴를 진행하는 한편, 가장 가까운 제7요새로 급히 병사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라! 단, 언제든지 적과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며, 또한 이제부터는 셉티무스가 직접 백인대를 지휘하여 척후 활동을 강화하도록!”
 언제나처럼 그의 결정에 반론은 없었다.
 
 ―Etiam, mei dominus!
 
 곧이어 셉티무스와 휘하 장병들이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복명했다.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이런 장난 같은 기묘한 움직임을 보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레오니스······ 설마 그가 추격 부대를 지휘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이제부터 펼쳐질 본격적인 후퇴 작전이 그다지 순조롭지는 않을 것임을.
 
 * * *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적의 기묘한 움직임은 계속됐다. 그들이 움직이면 적도 움직이고, 그들이 휴식을 취하면 적도 휴식을 취했으며, 날이 저물어 그들이 숙영을 하면 적도 숙영을 했다. 마치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혹은 그들과 싸울 의도가 전혀 없다는 듯이.
 그사이 적과의 조우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셉티무스가 지휘하는 흑사자대의 척후병들은 적의 척후병들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조우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카시우스가 적의 의도를 파악할 때까지는 전투를 피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게다가 적 또한 아직은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던 까닭에, 척후병들은 상대를 보면 암묵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과연 적의 의도는 무엇인가? 전투를 하자는 건가, 아니면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건가?
 
 시간이 흐를수록 적의 의도는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정면 대결을 벌일 수도 없었다.
 적은 로메루스의 매복 부대가 전멸한 현장을 조사함으로써 그들의 병력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무엇이 장기인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반면 카시우스는 적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어떤 의도인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전투를 벌이는 건 위험했다.
 ‘카드 게임을 예로 들었을 때, 현재 우리는 갖고 있는 카드를 모두 보인 상태다. 반면 우리는 적이 수중에 카드를 몇 장이나 들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지. 이런 상황에서 싸우면 그 결과는 오직 패배뿐. 전투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나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전투를 망설인 이유였다.
 
 ―싸워서 이기지 않고, 이겨서 싸운다.
 
 언뜻 말장난 같지만, 사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전략과 전술3)을 정확히 대변한 것이었다.
 그는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불리한 상황이라도 그는 그 불리함 속에서 반드시 아군의 유리한 점을 찾았고, 그 이점을 활용하여 이기는 전투만을 수행했다.
 사실 그도 적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만약 적장이라면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일단 끈질긴 압박으로 아군의 평정심을 무너뜨린다. 적의 일차 매복 부대에게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쫓기는 입장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그리고 적은 아군의 평정심과 인내가 한계가 다다랐을 즈음,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지형을 골라 일거에 승부를 건다.’
 그도 이러한 적의 의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적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문득 고양이게 쫓기는 쥐가 생각났다.
 고양이가 나타나면 쥐는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쥐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놓아준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쥐는 결국엔 막다른 길목에 몰리고, 곧 고양이의 노리개가 되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다.
 ‘지금 우리가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가 된 건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그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은 단순히 적이 아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다가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의 직접적인 공격은 그가 예상한 여러 가능성 중 그나마 제일 나은 것이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사실 따로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레오니스.
 이어진 전황은 그가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했던 대로 전개됐다.
 
 * * *
 
 그것은 괴로움과의 싸움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듭되는 적의 집요한 견제,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 그리고 이로 인해 조금씩 나타나는 사상자들과 낙오자들까지······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더욱 괴로운 것은 신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였다.
 
 ―초조하다! 이기든 지든 차라리 한바탕 전투라도 벌였으면 좋겠다! 과연 적은 언제, 어디서 전면전을 감행할 것인가?
 
 셉티무스를 포함한 모든 흑사자대원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즉, 카시우스가 우려했던 대로 적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형의 압박을 가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던 시간이 흘러 닷새가 지났다.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의 초조함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정찰을 보냈던 척후병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돌아왔다.
 “보고드립니다! 저 멀리에서 일단의 부대가 나타났습니다. 숫자는 대략 오천가량.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붉은 매 한 마리와 일곱 개의 작은 별이 수놓아진 깃발을 힘차게 휘날리고 있습니다!”
 “붉은 매와 일곱 개의 별?”
 그 순간, 주변의 모두는 크게 웅성거렸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한 놀라움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자는 옆 사람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자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크게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자도 있었다.
 쉽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잠시 후, 환한 웃음을 머금은 정찰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7요새 수비군이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러 왔습니다!”
 병사들의 환호에 방점을 찍는 보고.
 그러나 그때, 카시우스의 안색은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비록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에게 내색을 하진 못했지만, 그는 원군이 나타난 것에 웃으며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설마 아니길 바랐던 최악의 상황, 그것이 결국 현실로 되었다.
 
 * * *
 
 수십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의 막사.
 십여 개의 커다란 횃불이 춤을 추듯 일렁이며 사방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그리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아늑한 느낌마저 주는 가운데, 막사를 빙 둘러 호위하듯 스물네 명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뒷짐을 진 채 석상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정면에는 제국의 상징인 흰 바탕에 붉은 매 문양의 깃발이 가로로 넓게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시 그들이 제7요새의 소속임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작은 별이 수놓아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중앙에는 원형의 커다란 회의용 탁자와 십여 개의 간이 의자가 있었으며, 다시 탁자 위에는 인근의 지형이 입체적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커다란 지형도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제국의 야전용 막사의 전형적인 모습.
 이러한 막사의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제국의 붉은 군복을 입은 십여 명의 장교들이 야전용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같은 제국의 장교들이었지만 그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우선 정면의 깃발을 중심으로 좌측에 앉은 장교들은 비교적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힘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반면 우측에 앉은 장교들은 옷차림이 남루하고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여기서 우측의 장교들은 카시우스와 패잔병들의 장교들, 그리고 좌측의 장교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제7요새의 지휘관과 그 휘하의 장교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네!”
 좌측의 가장 상석에 앉은 장교, 구원 부대의 지휘관이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신의 곁에 앉은 카시우스를 바라보며.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당분간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군.”
 카시우스 또한 모처럼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갑게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비록 상대가 자신보다 계급이 위였지만, 또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실로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했다.
 지금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상대의 이름은 소브리우스 오디 레피두스(Sobrius Odi Lepidus).
 그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제7요새의 책임자였다.
 단순히 같은 군에 소속된 사이는 아니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사관학교의 동기였고, 또한 학도 시절 카시우스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소브리우스는 귀족 출신으로 군에 입대한 청년 장교의 전형인 자였다.
 신분은 귀족이지만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돈이나 권력이 없는 중산층의 하위 귀족.
 그런 이름뿐인 귀족에게 있어 유일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장 확실한 출세의 수단은 사관학교를 거쳐 군의 장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착실하게 출세의 길을 걸었다. 모나지 않은 둥근 성격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어 남들보다 빠르게 승진했고, 또한 임관한 지 불과 칠 년 만에 군의 주요 요직을 거친 끝에 최전방 요새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전형인 것은 비단 그가 거친 요직이나 현재 그의 지위만이 아니었다. 주름이 날카롭게 잡힌 단정한 붉은 군복, 중간 키의 적당한 체형과 단정히 빗어 넘긴 짧은 금발, 그리고 깔끔하게 면도한 각진 턱과 적당히 고집 있어 보이는 푸른 눈동자까지······ 단정한 그의 옷차림과 외모 또한 모두 교본에나 나올 법한 제국군 장교의 전형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도 여전하군. 게다가 벌써 요새의 수비대장이 되다니······ 우리 동기들 중에서는 자네가 제일 빠르군.”
 카시우스는 상대를 향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평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농담까지 건넸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상대.
 만약 여유가 있다면 몇 시간이고 옛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풀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그들의 인사는 한가롭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소한 인사 몇 마디가 더 오간 후, 카시우스와 소브리우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먼저 셉티무스가 카시우스를 대신하여 그동안의 후퇴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기습을 통해 로메루스가 이끄는 적의 매복 부대를 물리치고, 그 이후로 거듭된 적의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아군의 지원군과 조우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단, 그 과정에서 카시우스가 자신의 상관인 페디토르를 미끼로 썼던 사실, 혹은 카시우스가 적장을 포로로 잡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사실 등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로 각색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의 설명이 있은 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끝에 소브리우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사히 귀환한 게 정말 다행이군. 물론 페디토르 님이 불의의 사고로 전사하신 게 조금 아쉽기는 하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네나 자네의 부하들은 전투의 패배에 따른 문책을 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고······ 일단 무사히 돌아온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하지.”
 그는 카시우스와 그의 장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그와 달리 어둡고 무거운 기색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닐세.”
 다시 평소의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돌아왔지만, 그의 말은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간 이후의 문책을 걱정하는 건가? 물론 돌아가면 각종 청문회와 처벌 위원회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그러나 대장군님께서 자네와 흑사자대를 높이 평가하고 계시고, 나 또한 자네들을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겠다니, 고맙군.”
 “물론 자네들이 돌아가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하네. 그러나 그 처벌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소브리우스가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카시우스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네. 내 말은 아직 우리의 후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적의 이차 추격대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제7요새의 정예 병사 오천이 자네들과 함께하는 이상, 적도 더 이상 자네들을 공격하지 못할 텐데······?”
 여전히 카시우스가 말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소브리우스.
 이에 카시우스는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나직이 대답했다.
 “돌아간 이후의 문책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적이 이제부터 아군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도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면 대체 뭐가 중요하고, 뭐가 걱정이라는 건가?”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카시우스는 주위의 장교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이 공격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적이 공격을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왜 적의 추격대는 거듭된 기습으로 아군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넣고 대규모의 진짜 공격을 가하지 않았을까? 왜 적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을까? 왜 적은 우리가 자네들 지원군과 합류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약간은 우문(愚問)에 가까운 이상한 질문. 그러나 이어서 일순 정적이 흐를 뿐,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소브리우스가 약간은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글쎄? 어쩌면 적은 자네들이 지원군과 합류하는 시점을 잘못 계산했거나, 혹은 자네들의 저항이 너무도 완강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게 아닐까?”
 “그건 말이 되지 않네. 일단 적은 이곳의 지리에 밝아 치고 빠지는 전법을 능숙히 구사하는 자들이네. 그런 자들이 우리가 합류할 시점을 잘못 계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그리고 저항이 완강하다고 하여 패잔병들을 그대로 놓아준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고.”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뭔가? 적에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인가?”
 카시우스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재차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잠시 후에야 여전히 무거운 어투로 대답했다.
 “처음 적의 이차 추격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후, 난 적의 행동을 두 가지 경우로 상정했었네. 적이 기습으로 기회를 보다가 일거에 아군을 공격하거나, 혹은 아군을 공격하는 척 시간을 끌고 다른 것을 노리는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구원군과 합류함으로써 적의 의도는 명확해졌네. 역시나 적의 노림수는 두 번째 경우, 즉 도망치는 패잔병을 미끼로 하여 다른 것을 노렸던 것이네. 어쩌면 적의 목적은 처음부터 패잔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패잔병들을 이용하여 아군의 지원부대를 밖으로 끌어내는 게 아니었을까?”
 “지원부대를 밖으로 끌어낸다? 그렇다면 적의 다른 목표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그때였다. 소브리우스를 비롯한 모두의 궁금증에 절정에 달했던 순간, 카시우스가 다시 막 말을 이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막사 밖에서 돌연 요란하고 다급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막사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젊은 병사 하나가 예를 갖추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무슨 일인가?”
 일순 모두의 시선이 병사에게 집중됐다.
 사실 이 자리는 일반적인 회의가 아니었다. 비록 전체 병력은 일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상급 장교들만이 참석한 중요한 회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를 갖추지도 않고 불쑥 병사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좌중은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병사는 대답 대신 한참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소브리우스가 몇 번이나 말을 재촉한 다음에야, 겨우 왼쪽 무릎을 꿇는 예를 갖추고 대답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긴박한 목소리로.
 “헉······ 헉······ 보, 보고드립니다. 방금······ 제7요새가 적에게 함락됐습니다. 적의 숫자는 불명(不明)······ 살아서 간신히 요새를 빠져나온 자들은 고작 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뭐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소브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쾅! 하고 거칠게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오랜 분쟁 속에서도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요새가, 게다가 오천 명의 병사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단단한 요새가, 자신이 요새를 비운 지 불과 나흘 만에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열 배가 넘는 병력이 덤벼들어도 함락되지 않던 최고의 요새가 함락됐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적의 병력은 대체 얼마란 뜻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요새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적은 대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요새에 접근했단 말인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병사를 향해 고함치는 소브리우스.
 그는 너무도 당혹스러운 탓에 어떻게 화를 내야 되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긴, 그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경험 많은 장교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지만 이어진 병사의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그게······ 적이 어떻게 요새를 공격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분명 경계를 단단히 하고 요새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요새는 적의 병사들로 가득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요새를 빼앗겼다고? 적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단 말이냐, 아니면 땅에서 불쑥 솟았단 말이냐?”
 소브리우스가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지만, 병사는 그저 말끝을 흐리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잠시 후, 분위기를 진정시킨 것은 카시우스였다.
 “세상에······ 특히 전장에 있어 절대라는 말은 없다. 언제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등장하는 곳,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전장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하듯이 비교적 담담한 어투로 나직이 말했다. 이런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그런데 신기한 것은 카시우스가 말한 다음이었다.
 약간은 차가운 듯한 그의 말이 거칠어진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던 것이다, 마치 타오르던 불길에 갑자기 차가운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이.
 오히려 좌중은 방금 전의 격앙된 감정마저 까맣게 잊고,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카시우스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병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도 뭔가 알아낸 것은 없나? 작은 것이라도 상관없네. 기억에 남는 뭔가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 내게 말해 주게.”
 카시우스와 다른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탓일까?
 “저······.”
 병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크게 숨을 몰아쉬어 마음을 진정시키곤 대답했다.
 “워낙 경황 중이어서 정확한 것인지는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새를 빠져나오는 도중 적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자의 이름을 얼핏 들었습니다.”
 “적장의 이름? 적장은 누구였나? 혹시 이번 아조루스 전투의 공화 측 사령관, 아키에스였나?”
 “그건 아닙니다. 적들의 유명한 장군 정도는 저도 몇 번 이름을 들어 본 바가 있습니다만······ 이번 요새에서 들은 이름은 저도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
 “그자의 이름은 레오니스! 젊은 나이에 직급 또한 낮은 것 같았지만······ 병사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카시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3장 제7요새 공략전(I)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
 그는 처음부터 패잔병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단 제국 전체의 거국적인 입장에서 보면 수천 명의 패잔병은 그다지 중요한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거듭된 내란으로 군사력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각지에서 제국을 우습게 보고 반란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상비군만 해도 50만 명에 이르는 대륙의 주인인 제국이었다.
 따라서 겨우 수천 명의 패잔병들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작은 흠집에 불과했다.
 게다가 상대 또한 패잔병이긴 해도 전력을 상실한 일반적인 패잔병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패잔병들.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해 울분에 쌓인 특수부대였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억지로 패잔병의 추격전을 벌였다면 그들 또한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나와 흑사자대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오히려 추격을 벌인 그들이 패배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니스의 입장에선 아무리 상대가 대단한 자들이라고 해도 일껏 얻은 승리를 이대로 허망하게 보내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원래 전투란 승리가 전부가 아니라, 승리한 이후의 마무리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레오니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저 패잔병들을 미끼로 이용하자. 미끼를 이용해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요새를 탈취하자.
 
 지형과 지리에 밝은 이점,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 압박하는 전법으로 패잔병을 괴롭힌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심리적으로 쫓기는 패잔병들은 당연히 가장 가까운 요새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요새를 지키는 병력은 자연스럽게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레오니스가 어떤 길로 우회하여 요새에 접근했는지, 그리고 어떤 마법으로 불과 나흘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요새를 탈취했는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한다.
 기변(奇變)의 천재라 불리는 레오니스라면 분명 일반적인 상식을 비웃는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을 테니까.
 다만 쫓기는 입장에서는 그의 전법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는 수만 명으로도 함락시키기 힘든 요새를 불과 수천 명의 병사들로 탈취했고, 요새 내에 있던 각종 군수물자 또한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이는 단순히 요새 하나가 아니라 장차 제국을 압박할 수 있는 교두보를 얻은 것이며, 레오니스 개인적으로도 공화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돌 하나로 네 마리의 새를 잡은 셈.
 단,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만 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공화’의 최대 장점이자, 동시에 최대 약점.
 절대적 하나보다 평등한 다수에 의해 대의(大義)가 결정되는 공화의 특징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4)
 요새를 장악한 직후, 그는 시기하는 반대파의 모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의회에 소환되었고, 이것은 나에게 요새를 탈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7요새 탈환전.
 이것은 오래도록 지속될 그와 나의 질긴 운명을 알리는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 * *
 
 그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에게는 이대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아조루스에서 패배한 것으로도 부족해, 제7요새마저도 적의 손에 빼앗기도록 했다.
 
 이것은 보나마나 최소 사형감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조루스의 패배는 카시우스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적처럼 제국은 누군가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고, 현재로써 그 대상은 카시우스와 흑사자대밖에 없었다.
 소브리우스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군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고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을 터.
 따라서 군대만이 유일한 출세 수단인 하급 귀족 출신에게는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7요새를 재탈환하자고.
 모든 지휘권은 카시우스가 갖기로 했다. 비록 직급과 직위는 소브리우스가 위였지만, 나이나 병사들 사이에서의 명성도 그가 조금 더 위였지만, 그는 모든 지휘권을 카시우스에게 넘겼다.
 그가 카시우스를 믿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관학교 역사상 손꼽히는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이자, 동기생 중에서 가장 월등한 실력을 자랑한 천재.
 
 이것이 바로 그가 아는 카시우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무모했다. 언뜻 보기엔 그저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견고한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그 열 배 되는 병력이 필요하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변변한 공성무기 하나 없는 그들이 견고하기로 유명한 제7요새의 재탈환에 도전하는 것은 그저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시우스!
 장차 군사(軍史)상 수많은 전설을 만들게 되는 그에게 있어, 제7요새 탈환전은 그저 불가능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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