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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권 (1화)

2017.07.03 조회 3,292 추천 37


 이계의 대한제국 1권 (1화)
 1장 핵폭발
 
 
 서기 2016년 9월.
 
 대한민국 청해 함대 해군 제독 김충렬 준장.
 그는 독도함의 작전실에서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을 이끌고 남해안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자 중국은 있지도 않은 정권 대리 양도 서류를 내밀며 북한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였고, 한국은 말도 안 된다며 맞서는 상황이었다.
 이미 상하이 앞바다에는 중국의 해군 병력이 집중하여 한반도에 대한 무력 압박을 시작했다.
 김충렬 준장은 1급 보안으로 전달받은 내용을 확인하고서는 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제독님, 무슨 일입니까?”
 작전참모 박태성 대령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던 김충렬 준장이, 그 냉정함을 잃고 쓰고 있던 모자를 움켜쥐고는 바닥에 내팽개치자, 그 모자를 다시 주워 먼지를 털어 내며 물어 왔다.
 “짱깨 놈들이 떴어.”
 순식간에 함교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결국 본격적으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겨······ 결국!”
 박태성 대령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상해 주둔 함대가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이다. 위에서는 우리들만으로 막아 내라는군. 으드득.”
 분노에 이를 가는 그였지만 상해 주둔 함대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박태성 대령은 그 충격이 더욱 컸다.
 “항공모함 한 척에, 순양함 두 척. 이지스 구축함 두 척에 핵 잠수함 한 척, 그리고 프리깃함 다섯 척을 상대하란 말입니까?”
 “까라면 까야지 어쩌라고! 데프콘 1 발령이야. 포메이션 E로 준비하고 대공방어에 좀 더 신경 쓰라고 해. 김유신함은 어디 있나?”
 “작전 중입니다. 현재 위치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 놈들이 기어 나왔다면, 어뢰 한두 발 정도는 지금쯤 먹이고 있을 겁니다.”
 사실상 한국 해군 전력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전력이 상해 주둔 함대와 맞서기 위해 출동한 상태였다.
 
 * * *
 
 한국형 중잠수함으로 4천 톤 급의 김유신함은 이틀 전부터 작전 중이었다.
 “함장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무음 매복 중인 김유신함은 서해 밑바닥에서 중국의 상해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벌써 24시간째 무음 잠항 대기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려.”
 “그 말씀하신 게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 번째입니다만.”
 “김상 대위. 어뢰발사관에 집어넣고 청상어랑 함께 사출되고 싶지 않거든, 그만 좀 하지?”
 “옵니다! 짱깨들 졸 시끄러운데요?”
 그 순간 소나관이 낮게 말했다.
 “거봐 오잖아. 박 중사, 얼마나 되나?”
 “대함대입니다. 한두 놈이 아닙니다.”
 “좋아. 그럼 거물 딱 두 놈만 잡자고. 어뢰발사관 1번부터 4번까지 주수하고, 열어 둔 채로 대기해. 1, 3번은 고래, 2, 4번은 거북이 사냥에 쓸 거니까. 탐지음 잘 체크해.”
 “알겠습니다. 1, 3번 항공모함, 2, 4번 대기.”
 긴장감이 흘렀다. 그것도 이제껏 없던 긴장감이.
 “2번, 4번 밸러스트 물 빼. 천천히. 살짝만 뜨라고.”
 “2번, 4번 배수.”
 함장의 지시에 김상 부함장이 복창했다.
 그리고 소나관 박 중사가 연이어 외쳤다.
 “청상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좋아! 1번, 3번 발사!”
 “1번, 3번 발사!”
 화기 관제관 임상일 소위가 복창을 했고, 물 빠지는 소리와 함께 어뢰가 발사되었다.
 “액티브소나!”
 “액티브소나 쏩니다!”
 ― 때애앵∼
 “거리 800, 4시 방향 거북이 발견!”
 “진 급 핵잠이야! 그놈 못 없애면 죽는다! 2번, 4번 발사!”
 “2번, 4번 발사!”
 “업 트림 20! 꽁지 불난 듯이 튀어! 잡히면 뼛가루도 안 남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 보니 저놈들도 매복하고 있었어!”
 “업 트림 20! 엔진 전속력!”
 “1번, 3번 폭발음 확인! 명중입니다!”
 “오케이! 임 소위, 살아 돌아가면 내 한턱 쏘지!”
 “감사합니다, 함장님.”
 “폭발음 확인! 적 잠수함 명중입니다!”
 “좋았어! 니들 돌아가면 포상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모두가 작게나마 환호를 올렸다.
 “어뢰 둘, 거리 600! 접근 중! 폭발 직전에 쏜 듯합니다!”
 “뭐? 미친! 데코이 발사! 3―0―3으로 선회해!”
 “데코이 발사! 3―0―3으로 급선회!”
 “거리 400!”
 “엔진 꺼! 밸러스트 탱크 물 처넣어!”
 “엔진 정지! 밸러스트 주수!”
 “거리 200!”
 “기도들 하라고! 살아남기만을!”
 “거리 100!”
 ― 쿠웅!
 “1기 폭발 확인!”
 “나머지 한 기는?”
 “거리 50! 옵니다!”
 “젠장!”
 절체절명의 순간! 눈을 질끈 감는 이도 있었고, 주먹을 꽉 쥐는 이도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은 머리 위로 무언가 지나가는 듯한 스크루 음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위로 스치면서 지나갔습니다! 역시 함장님! 오히려 위로 올라갔다면 직격당했을 겁니다!”
 “좋았어! 짱깨 떨거지들 뭐하고 있나?”
 “미친 듯이 소나 쏴 댑니다. 지들끼리 엉켜서 난리도 아닙니다.”
 “조용해질 때까지 무음 대기. 그리고 독도함에 보고해. 거북이 한 놈이랑 고래 한 마리 잡았다고.”
 
 * * *
 
 “김유신함으로부터 보고입니다. 고래 한 마리, 거북이 한 마리 잡아내는 데 성공했답니다.”
 작전참모 박태성 대령의 보고에 김충렬 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북이는 그렇다 치고, 거기 아직도 포경 안 한 해군 있나?”
 “시정하겠습니다. 적 잠수함 한 척 격침, 그리고 고래는 항공모함을 뜻합니다.”
 “뭐? 항공모함?”
 “예. 금일 0605시 상해 주둔 함대 항공모함 해성이 어뢰 공격을 받아 우로 20도 기운 형태로 홍콩 해군기지로 향하는 것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거의 반포기 상태의 작전실에 승전보가 들리자 실내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최 소령이 애썼군. 포메이션 D로 바꾸고, 대함전 준비에 들어간다.”
 개전 초 중국이 자신만만하게 선보인 항공모함은 그렇게 등장과 동시에 전선에서 물러났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은 결국 핵을 쓰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은 한국의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17시 25분
 
 “율곡 이이함으로부터 타전! 적 핵 잠 발견! 한 급입니다! 거리 3천!”
 작전참모 박 대령이 외쳤다.
 “경운기 주제에 기세 좋게 등장하는군! 추적한다!”
 상당히 고무된 상황이었고, 적은 사정거리 바깥이었다. 발견한 이상, 추적하여 격침시키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어뢰 1기 접근! 거리 2천5백!”
 그러나 적은 그런 것엔 상관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어뢰를 쏘았다.
 “멍청한! 사정거리에 턱없이 멀어!”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갑자기 든 김충렬 준장이었다.
 터무니없이 먼 거리에서 단 한 발의 어뢰를 발사한 적의 행동이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어뢰를 쏘아 맞히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낭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순식간에 떠올랐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저건! 핵 어뢰야! 전 함대 반전! 당장 이 구역을 이탈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독도함과 세종대왕함, 그리고 율곡 이이함은 제주도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중국의 핵 공격을 받게 되었다.
 20킬로톤의 핵 어뢰가 바다 밑에서 폭발하였고, 수중 제트 현상이 독도함과 세종대왕함, 그리고 율곡 이이함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독도함과 세종대왕함은 파편 한 조각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고, 해군 전력의 핵심을 잃은 대한민국은 열강들의 힘 싸움에서 점점 그 능력을 잃어 갔다.
 
 
 
 2장 이계 상륙작전
 
 
 “제독님! 정신 차리십시오! 제독님!”
 작전참모 박태성 대령의 외침이 아련히 들려왔다.
 “으으음······. 작전참모, 상황은?”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충렬 준장은 비틀거리면서도 상황 파악을 우선시하였다.
 “무사합니다. 세종대왕함도 율곡 이이함도 건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죽다가 살아났다는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크으윽! 아직도 어지럽군. 각 부서 피해 상황은 어떤가?”
 “현재 파악 중입니다만 전자 계통 장비들이 먹통입니다. 율곡 이이함과 세종대왕함은 육안으로 확인이 되어 수기로 연락을 주고받는 실정입니다.”
 “EMP에 당했군. 그런데 언제 이렇게 날이 개었나?”
 분명 폭풍우 속에서 핵 어뢰의 공격을 받았었다. 해저에서 핵 어뢰는 폭발하였고, 함 전체가 붕 뜨는 느낌이 드는 가운데 정신을 잃었지만, 그리 긴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사이엔가 날씨는 완전히 개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각 반에서 보고가 올라오고 있으니 잠시만 쉬십시오. 머리를 다치셨습니다. 의무병이 곧 올 테니 이대로 앉아 계십시오.”
 그제야 뜨끈한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낀 김충렬 준장은 심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크윽! 서둘러 피해 상황 보고해. 짱깨 자식들, 아무렇지 않게 핵을 쏘다니······. 단단히 미쳤어.”
 함교가 어수선했다.
 철모를 쓰고 있던 승조원들은 철모를 쓰고 있었지만, 워낙에 큰 충격이었기에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김충렬 준장의 눈에 들어왔다.
 군의관과 의무병 몇 명이 작전실로 서둘러 들어왔고, 그들은 김충렬 준장에게 다가왔다.
 “제독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으니 다른 중상자들을 먼저 살펴보게. 고작 머리 살짝 깨진 정도로는 안 죽어.”
 “하지만······.”
 “명령이야. 이 시간에도 어디서 죽기 직전의 중상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필. 승.”
 군의관과 의무병 들이 다른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하자, 김충렬 준장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련히 그를 황급하게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의지와는 반대로 눈꺼풀이 급격히 무거워지며 정신을 잃었다.
 
 * * *
 
 김충렬 준장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사랑스런 아내와 자신을 따라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해군 장교가 된 첫째가 보였다. 벌써 대위가 되어 김유신함에 타고 있었다.
 군인 집안의 독특한 특성 때문일까. 둘째인 딸자식도 군인이 되겠다고 하였을 때, 그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중위인 그의 딸은 대구의 K2에서 KF―35의 파일럿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진해 군함식 때 온 가족이 모여 즐겁게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아내는 훌륭하게 자란 자식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 한편의 서글픔이 느껴졌다.
 “상아, 이 어미는 며느리가 보고 싶구나.”
 “하하하. 어머니도 참. 또 그 말씀이십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제 조국과 결혼했다고.”
 웃으며 대답하는 아들의 대답에 김충렬 준장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낌과 동시에 부모로서의 안타까운 마음이 양립하는 것을 느꼈다.
 잠수함 승조원에 지원한 아들은 잠수함의 특성상 뭍에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의 아내는 군인이 아니었기에 부모로서의 안타까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령이는 시집 안 가니?”
 “제가 어머니, 아버지 두고 어딜 가요? 그리고 아버지같이 강한 남자 아니면 시집갈 생각 없어요.”
 어릴 적부터 자기보다 한두 살 많고 덩치도 큰 애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골목대장을 하던 령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식탁이 점점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점점. 웃음소리도 아련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 * *
 
 “허어억!”
 잠에서 깬 김충렬 준장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족들 꿈을 꾼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뭔가 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여보, 상아, 령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른 그는 잠깐이나마 감상적이 되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을 조국 한반도가 떠올랐다.
 주요 도시란 도시에는 핵이 떨어져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문득 대구에 있을 딸자식이 떠올랐다.
 “제독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작전참모가 그의 침대 주변에 둘러진 커튼을 걷으며 모습을 보였다.
 “작전참모인가?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나?”
 “10분 남짓입니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신 것은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군의관이 알려 줬습니다. 역시 청해 함대의 불사신다우십니다.”
 “농담 말게.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되었나?”
 “예. 우선 각 부서에 대한 피해 보고입니다. 해병대 중상자 셋, 경상자 마흔일곱. 조타실 경상자 하나. 함교 피해는 조타수가 우측 손목 골절이 전부이고, 대부분 가벼운 긁힌 상처 수준입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기적이로군. 그만한 충격에 사망자가 없다니.”
 “제독님이 철모를 안 쓰셔서 크게 다치신 겁니다. 다음부터는 꼭 철모를 착용해 주십시오.”
 “그러지.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은 어떤가?”
 “예. 현재 두 함 모두 별다른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두 함 모두 전기 계통 장비들이 먹통이 되어 버리는 통에 통신 장비와 레이더 수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서둘러 정비하라고 하고, 달리 장비 손실은 없나?”
 “특별히 큰 피해는 없습니다만, K―511A1 한 대가 고정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반파되었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군. 서둘러 상황 정비하고, 수리가 어느 정도 끝날 때까지 현 지점에서 대기한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짱깨 놈들한테 들킬 수 있어. 각 함에 그리 전달하게.”
 “예, 알겠습니다. 필. 승.”
 “필승.”
 작전참모가 나가고 불과 5분 남짓 지났을까.
 갑자기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방금 나간 작전참모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제독님! 아군기입니다! KF―35입니다!”
 “뭣? 아군기라고?”
 레이더와 통신 장비가 모두 망가져 버린 탓에 비행기가 접근해 오는 것도 몰랐다. 그나마 소리가 들리고 육안으로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저공비행으로 독도함 위를 지나간 비행기는 틀림없이 쥐색의 대한민국 공군기였다.
 작전참모의 부축으로 관제실로 비틀거리며 돌아온 김충렬 준장은 선회하여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보았다. 선회하는 순간에 비행기의 상부가 그대로 비쳤고 날개에 찍혀 있는 문장은 틀림없이 공군의 KF―35였다.
 하지만 약간 이상함을 느낀 김충렬 준장은 갑자기 아군기가 나타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그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벗어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작전참모. 전투기가 단독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나?”
 그 순간 작전참모의 뇌리에도 저 아군 전투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전투기는 편대를 형성해서 다닙니다. 최소한 두 대는 붙어 다니면서 행동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우리가 핵 공격을 받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약 40분 경과하고 있습니다.”
 “F―35 랜딩 기어가 내려가 있습니다!”
 쌍안경을 들고 상황을 살피던 한 장교가 외쳤다.
 그리고 선회하는 모습을 떠올린 김충렬 준장은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군함식 때 자신의 딸이 손바닥만 한 비행기 모형을 들고 보여 주던 장면이었다.
 
 “F―35는 말이죠. 마하 2를 넘는 최고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82노트의 저속으로 비행하면서 받음각 40 정도로 하면, 독도함이 23노트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을 때 아슬아슬하게나마 착륙이 가능해요.”
 
 “작전참모. 당장 갑판 비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판을 비우라니요?”
 “잔소리 말고 당장 헬기들 다 띄워서 치워 놔! 어서! 어프로치 해 온다! 착륙한단 말이다!”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이건 수송함이지, 항공모함이 아닙니다!”
 “안 되면 되게 해! 그리고 지금 당장 전속 전진해! 최고 속도로. 풍향은 어디야?”
 “12시 방향입니다.”
 “좋아, 그럼 돌릴 필요도 없겠군. 어서 서둘러! 당장!”
 ― 왜앵! 왜앵!
 급작스런 명령에 핵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시금 긴장감을 되찾았다.
 “파리 여덟 마리! 어서 뛰어! 당장 갑판에 붙어 있는 파리들 타고 날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출동이라뇨?”
 “긴급 상황이다! 잔말 말고 당장 튀어 가서 일단 띄워!”
 영문을 모른 채 헬기 조종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헬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EMP 맞아서 못 띄울 텐데요!”
 한 조종사가 외쳤다.
 “이 짬밥은 X구멍으로 처먹은 자식아! 독도함이라는 두꺼운 철판이 때려 막은 상태에서 못 띄워? 과정 생략하고 8번부터 순서대로 이륙해!”
 UH 헬기와 AH 헬기 들이 차례대로 갑판에서 뜨기 시작했다.
 해저에서 폭발한 핵폭탄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한 EMP는 도체를 통하여 이동하면서 각종 전자 장비들을 무력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지만, 독도함의 구조적 특성상 헬기들은 EMP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선 독도함이라는 거대한 철판이 일차적인 방호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갑판에 돌출되어 있는 와이어 고정 블록은 비전도체로 싸여져 있었다. 게다가 각 헬기들은 고무바퀴가 달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EMP의 영향에서는 완전할 정도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F―35 어프로치 해 옵니다!”
 작전참모가 외쳤다.
 천천히, 아니 천천히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초속 42미터의 속도를 내고 있는 F―35였다.
 간신히 갑판을 어느 정도 비워 활주로마냥 만들어 놨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저기, 관제관님. F―35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지 않던가요?”
 한 부사관이 화기 관제관에게 물었고, 화기 관제관은 그런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러고도 군인이냐? 우리나라에 도입된 건 F―35 중에서도 A타입이라고.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건 B타입. 대당 가격이 천만 달러씩이나 차이가 나니까 B타입은 비싸서 없어! 그리고 랜딩 기어 잘 보라고. 앞바퀴 부분이 작지? C타입은 A타입과 같이 수직 이착륙은 불가능하지만 캐터펄트를 견디기 위해서 랜딩 기어가 커. 즉, 항공모함용이란 말이지. 저건 우리나라 공군에서 운용하는 A타입이라서 갑판이 짧은 이곳엔 착륙 못 할 텐데, 저 파일럿 누군지 모르지만 단단히 미쳤군. 미쳤어.”
 그 순간에도 갑판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비상시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도 훈련해 본 적이 있었고, 미약하나마 장비도 갖추고 있었다.
 K―511A1 두 대가 갑판의 후미 양쪽 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대의 차량 사이에 와이어가 걸쳐지고 단단히 고정시키게 되었다.
 두 차량은 시동이 걸린 상태였으며, 운전병들은 긴장감 속에 클러치를 밟은 채 엔진 알피엠을 높이고 있었다.
 깃발이 흔들리고 두 대의 차량이 서로 등을 맞댄 채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F―35의 거대한 몸체가 그사이를 지나갔고, 뒷바퀴가 와이어에 걸렸다.
 마치 한 마리의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K―511A1 2.5톤 트럭 두 대는 순식간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서로가 반대 방향을 향해 질주하는 것과는 반대로 거리를 좁히면서 끌려가고 있었지만 충돌하지는 않았다.
 전투기에는 지상 착륙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여 훅이 달려 있었고, 만약 훅을 사용했다면 두 대의 트럭은 끌려가다가 충돌했을 것이다.
 조종사는 그것을 감안하여 훅을 내리지 않았고, 뒷바퀴의 폭만큼 여유가 생겨 두 대가 서로 맞부딪히지 않았던 것이다.
 끌려가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두 대에 타고 있던 운전병들은 실린더가 터질 정도로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해서 F―35가 바다에 떨어지면 자신들도 바다에 같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판에 길쭉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12개의 타이어가 갑판을 가로지르며 연기를 내뿜은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에 착륙에 성공한 F―35는 엔진을 정지시켰다.
 일반적인 항공모함의 경우 케이블은 3개 내지는 4개 정도를 두고 있으며, 조종사는 케이블을 거는 순간 엔진을 최대출력으로 올린다. 만약 케이블이 걸리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 다시 이륙하기 위함인 것이다.
 하지만 독도함은 항공모함이 아니다. 당연히 갑판에 고정되어 있는 착륙 보조용 케이블 장치가 없었고, 차량으로 임시 대처를 했던 것이다.
 단 한 줄의 케이블.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
 그렇게 독도함은 최초로 전투기가 착륙에 성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F―35가 착륙에 성공하자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다.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이 짧은 수송함 갑판 위에 전투기를 착륙시킨 파일럿의 솜씨는 신의 경지라 불릴 만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이륙해 있던 헬기들도 차례차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착륙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율곡 이이함과 세종대왕함에서도 함성이 울려 퍼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충렬 준장은 이 무모한 파일럿에게 욕을 퍼부어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었다.
 갑판으로 내려간 김충렬 준장은 함교 앞 갑판으로 천천히 이동 중인 F―35를 바라보았다.
 조종석 아래쪽에 대한민국이라는 글씨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2.5톤 트럭들을 고정하는 와이어가 F―35를 고정하기 시작했고, 2.5톤 트럭들은 자리를 옮겨 함미 부분으로 이동했다.
 캐노피가 열리고 조종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시커먼 바이크 헬멧마냥 머리 전체를 감싸고 있는 헬멧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전투기에서 내린 조종사는 씰을 풀어 헬멧을 벗었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얼굴을 드러냈다.
 “필! 승! K2 소속 청수리 편대 김령 중위. 독도함에 착함하였습니다.”
 
 * * *
 
 독도함 전체에 무모한 F―35 파일럿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상해 함대 격파가 힘들 경우 제주도 방어를 위해 독도함에 타고 있던 해병대 700명에게도 그 소문이 전달되었다.
 “김 해병님. F―35 파일럿이 여자랍니다.”
 “야!”
 “네?”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우리 머리 위에서 치킨 레이스한 미친놈이 여자라고?”
 “예, 그렇습니다. 굉장한 미인이라는 소문입니다.”
 그때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해병. 내가 듣기로는 근육이 엔간한 해병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우락부락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박 해뱀도 어디서 루머를 들으셨나 보네요. 파일럿이 입고 있는 슈츠 때문에 근육은 확인 못 한다구요.”
 “뭐? 일병 짬밥 끄트머리가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앙?”
 박 상병과 이 일병이 투닥이고 있는데, 김 병장이 툭 끼어들었다.
 “상병 짬밥 찌끄러기가 어디서 언성을 높여? 부사관 신청했다고 이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 그리고 후임 교육 안 시켜? 꺾이지도 않은 놈이 해뱀이 뭐야? 그리고 누가 말꼬리에 요를 붙여랬어. 엉? 사회인이야? 군대가 싫어? 전역하고 싶어? 페트병 종아리 끼고 두 돈 반에서 뛰어내려. 십자인대 끊어 먹고 전역시켜 줄 테니. 후임 교육 똑바로 해 짜샤. 네가 후임 교육 제대로 안 하니까 일병 끄트머리가 기어오르지. 이등병 쓰레기들이 뭘 보고 배우냐? 엉? 어쭈 대답 안 해? 귓구녕에 당근 쑤셔 넣었어? 건빵 10개 1분 내로 먹게 해 줘? 내가 물로 보여? 앙?”
 쏟아지는 갈굼 속에서 박 상병은 아차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역을 한 달 남겨 두고 하루하루를 지내던 김 병장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끌려와 전역은 물 건너간 상황이었으니, 그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할 것이다. 걸리기만 걸려 봐라 하며 벼르고 벼르던 김 병장이었고, 때마침 개념을 밥 말아먹은 이 일병이 기름을 퍼부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30분 뒤에 이 일병은 박 상병에게 불려 갔다.
 내리 갈굼!
 30분 동안 같이 갈굼받았지만 박 상병은 이 일병을 끌고 가 또다시 30분 동안 갈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대란 참 미묘하고 복잡한 곳이었고, 사병들 사이에서의 갈굼은 어쩔 수 없었다. 악순환이라고 하지만,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고개를 드는 갈굼의 연속이다. 개념 없는 이등병들이 마음의 편지라는 것을 써서 자신들의 부당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다시 일병을 거쳐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면서 자신들이 쓴 마음의 편지가 고참의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 자체를 없애 버렸음에 한탄한다.
 그리고 사라진 갈굼이 다시 시작되고, 이등병들은 다시 마음의 편지를 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더욱이 지금은 전시. 전시에는 이등병들의 불평불만은 하극상으로 치부되었고, 전역을 앞두고 있던 병장들은 그들의 짜증을 갈굼이라는 형태로 승화시켜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 * *
 
 작전실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김충렬 준장을 비롯하여 참모진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F―35 파일럿인 김령 중위가 마주 서 있었다.
 “김령 중위. 어째서 독도함에 착함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게.”
 박 대령이 매우 심각한 어조로 상황 설명을 요구하였다.
 “예. 저희 K2 소속 청수리 편대는 금일 17시 10분, 청해 함대 공중 지원 임무를 명받았습니다. 17시 20분, 부산항에 중국군의 핵미사일이 떨어졌고, 같은 시각 광주에도 핵미사일 공격을 받아 노이즈가 심해져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저희는 초기 임무대로 청해 함대가 위치한 제주도 남서쪽 해상 20킬로미터 지점을 기준으로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17시25분, 청해 함대가 있는 해역에서 번쩍이는 섬광 현상을 발견, 즉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접근을 시도. 그리고 바다가 거대하게 구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핵 어뢰 공격으로 판단, 긴급 상승을 시도하였습니다. 상승하던 도중, 상공에서도 섬광 현상이 보였고 순식간에 덮쳐 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 상승 중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뚫고 지나갔지만, 같은 편대 소속 허상일 소령은 회피 기동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빛을 뚫고 2만 피트 상공에 도달하였고, 주변을 살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에 적 함대가 존재하지 않음을 판단하고, 17시40분, K2에 귀환을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핵 공격의 영향인지 전파가 잡히지 않아 육안으로 지상을 확인하기 위해 저고도 비행을 실시. 17시50분, 해상을 계속 비행하였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단독 판단으로 제주도로 착륙을 시도하기 위해 선회를 실시하였습니다. 18시 00분. 제주도 또한 발견되지 않았으며, 근처를 선회하던 중 연료가 거의 바닥이 난 상황에서 독도함에 연락을 시도하였습니다. 선회를 하며 계속 콘택트를 시도. 독도함으로부터는 무응답이었고, 무리인 줄 알면서도 착륙을 시도하였습니다.”
 “잠깐. 통신 불능 상태인 독도함인데, 그런 무리한 착함을 시도한 이유는 뭐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주변에 육지가 없으며, 전투기의 연료는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어딘가 착륙하지 못한다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회를 하는 도중 랜딩 기어를 내려 착륙하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뭐든지 독단이군. 중위, 자네의 행동은 군법회의감이야!”
 작전참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분명히! 제 독단이긴 합니다만,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독도함이 제가 착륙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김령 중위의 눈은 똑바로 청해 함대 제독 김충렬 준장을 향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는 눈빛으로 대화가 오고 갔다. 김령 중위는 감사의 눈빛을, 김충렬 준장은 무사한 딸의 모습에 기뻐하는 눈빛이었다.
 그때 전술참모 최인혁 대령이 나섰다.
 “확실히 중위의 행동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만, 김 중위의 보고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전술참모 최 대령에게로 향했다.
 “첫째, 우리 청해 함대는 제주도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중위의 보고에는 제주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아무리 통신이 두절되었다고는 하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방향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귀환하려던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북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육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제주도는 물론이고 본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증언은 이상했다.
 “그리고 현재 자각하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날씨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핵 어뢰의 공격을 받기 직전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바다였습니다. 한데 핵 공격을 받고 난 직후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는 점입니다. 김 중위, 자네가 귀환을 하던 중의 날씨가 어떠했나?”
 “화, 확실히 17시 25분 이후에 고도 2만 피트 도달 후에는 위에서 내려다봐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육안으로 바다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육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김령 중위는 약간 당황해하면서 대답했다.
 “본 함을 비롯하여 청해 함대 이외의 배는 발견되었나?”
 “전투기 레이더에는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EMP 때문에 레이더가 오작동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작전참모 박 대령이 딴죽을 걸었다.
 “전투기 같은 정밀기계 덩어리가 EMP의 영향으로 오작동을 일으켰다면, 그건 추락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어떻게 레이더만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지요? 김 중위는 핵 공격을 감지하고 수직 상승하여 EMP의 범위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잠깐 한숨을 돌린 최 대령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모두가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손목시계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손목시계는 17시 25분을 기준으로 멈추어 있었다.
 김 중위 또한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어 보았고 대답했다.
 “18시 30분을 막 넘긴 시간입니다.”
 “맞습니다. EMP 때문에 우리 모두 시계조차도 멈춰 버린 상황에서, 김 중위의 손목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즉, 김 중위는 EMP의 충격파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고, 현재 시간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작전참모 박 대령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지금 바깥을 보십시오. 분명 저녁 무렵임에 틀림없을 시간인데, 이제 갓 정오를 넘긴 듯이 환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랬다. 모두가 망각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환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이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환했다.
 “김 중위의 증언과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핵 공격 직후 우리는 어딘가로 날려져 이동했다고 판단해도 무관합니다. 태양의 기울기로 미루어 짐작컨데, 대서양까지 날려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입니까! 대서양이라니요! 핵 공격 맞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갔단 말입니까?”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그러했고, 현재 상황을 납득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김 중위의 증언에 거짓이 없음은 그가 타고 있던 전투기가 설명해 줍니다. F―35의 작전 반경은 1,100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연료가 바닥난 상황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폭발의 영향으로 김 중위도 우리와 같이 날려져 온 것이겠지요. 대서양까지 날려져 온다는 것은 저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지금 이 날씨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과는 전혀 맞지 않는 하늘을 보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령 북극이나 남극에서나 보는 백야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기온은 여름 날씨입니다. 완벽하게. 백야 현상이 일어나는 곳은 극지방에 가까운 곳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무얼 보고 무얼 믿어야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완전히 미아가 되어 버렸고, 대한민국의 서해안과 남해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바다에 있다는 것은 현실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최 대령도 흥분을 하였는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복잡한 상황이 되자, 김충렬 준장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러모로 의문투성이인 현 상황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통신 장비를 수리하는 일이 급선무야. 이 함장, 수리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같이 참석해 있던 이석후 중령이 김충렬 준장의 질문에 답했다.
 “통신병들이 수리 중이며, 30분 내로는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과의 연락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2차적으로 함 내의 모든 전자 장비들의 점검에 들어갑니다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통신 장비 수리를 서두르게. 그리고 김 중위는 내 방으로 따라오도록 하고, 이만 해산하지. 아직 상황이 명확하지 않으니, 데프콘 1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김충렬 준장은 자리를 비웠고, 김령 중위도 김충렬 준장의 뒤를 따랐다.
 
 사령관 개인실. 개인실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방들에 비해 약간 클 뿐 별다른 특색은 없는 장소에서, 김충렬 준장은 김령 중위를 마주 보고는 눈물을 쏟았다.
 “령아! 살아 있어 줘서 이 아비는 기쁘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던 그였고, 그것은 그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이라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딸을 앞에 두고도 개인적인 감정을 보여 줄 수 없었고, 그것은 그의 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야말로 핵 공격 속에서 무사하셨군요!”
 부녀는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지에서, 가족들은 조국을 위해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 걱정이 안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이 녀석, 전투기를 독도함에 착륙시킬 생각을 하다니. 누굴 닮은 게냐?”
 “아버지 닮아서 그렇죠. 그리고 아버지라면 반드시 착륙할 수 있도록 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요.”
 “녀석도 참. 그놈의 무대포 정신은 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갈 게다.”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착륙 가능하다고.”
 “이 녀석이! 그래 이놈아, 내 그걸 기억하고 있었고, 왜인지 모르게 저 전투기에 타고 있을 게 너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마는, 진짜로 네가 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도 안 다치고 무사히 착륙했잖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하여튼 사고 치는 것 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쯧쯧.”
 “헤헷.”
 “그런데 정말로 제주도가 안 보이더냐?”
 “예. 정말이에요. 그리고 방향감각이 어쩌니 하지만, 전투기에는 나침반도 있어서 방향을 틀릴 일은 절대로 없어요. 육지가 보일 만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섬 하나 안 보였다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적 함대는?”
 “확실히 핵 공격 직전에는 상해 함대를 레이더로 포착했는데, 핵 공격 직후에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F―35의 수색 범위를 생각하면 이 주변은 완전히 망망대해이고, 배 한 척 없는 상황이에요.”
 “도저히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저도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진 것이고, 어디인지 모르지만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김충렬 준장이 자신의 딸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통신 장비가 어느 정도 수리가 되었다. 더불어 세종대왕함에서는 대공 레이더를 중점적으로, 율곡 이이함은 수중 탐지 소나를 중점적으로 수리했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작전실에 모인 김충렬 준장과 각 참모들, 그리고 배석한 김령 중위는 작전참모 박태성 대령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현재 무선통신 장비가 일부 복구되어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과의 교신이 가능해졌습니다. 세종대왕함은 대공, 대함 레이더를 중점적으로 수리하였으며, 반경 200해리 이내에는 항공기와 함정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율곡 이이함은 소나를 중점적으로 복구하였고, 3해리 이내에서 잠수함 한 척을 발견하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본 함대를 기준으로 5시 방향, 수심 20미터 지점에 있으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호라니? 무슨 소리인가?”
 “잠수함 측에서도 핵 공격의 영향인지 모든 전자 장비들이 망가져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황인 듯합니다. 함 내에서 벽을 두들겨 모스부호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내용으로는 ‘기능 정지. 구조 요망’입니다.”
 “적아 식별은 불가능한가?”
 “아직까지 식별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액티브소나를 수리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접근했다가 적 잠수함일 경우라면 낭패입니다.”
 “자네 바본가? 아니면 바보인 척하는 건가?”
 “네?”
 “헬기 띄워! 수심 20미터면 상공에서 잠수함 크기 정도는 식별할 것 아닌가?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해병대 잠수부원 몇 명도 데리고 가!”
 “아, 네. 알겠습니다.”
 통신 장비가 회복된 이상 최소한이나마 작전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반경 200해리 이내에 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당장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태세를 데프콘 2로 한 단계 낮추고, 사병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전투식량 배분하게. 참모들도 전투식량으로 식사하면서 작전실에서 대기하도록.”
 
 * * *
 
 구조 요청을 한 잠수함은 다름 아닌 김유신함이었다.
 해병대들과 기술자들이 대거 투입되어 김유신함을 구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독도함이 있었기에 김유신함은 구조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슬슬 수평선 너머로 기울어 가려는 무렵, 독도함 함교에서는 각 함의 함장들과 사령부 참모들, 그리고 사령관인 김충렬 준장이 모였다.
 전기 계통의 장비들에 대한 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기 때문에 모인 것이다.
 그 첫째로는 방수되는 무전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
 둘째로는 세종대왕함이나 율곡 이이함의 경우 탄도미사일 요격을 위하여 무궁화 위성과 연결이 가능한 시스템이지만, 위성이 안 잡힌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달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아니 상식을 떠나 지구상의 인간이라면 갓난아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아는 사실인 하나뿐인 달이 두 개씩이나 떠 있다는 것이다.
 지휘관들만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병들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보니 현실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더욱이 핵 공격을 맞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달이 두 개가 되었다는 상황에 다다르면, 누구라도 생각한다. ‘이곳은 저승이 아닐까?’라고.
 하지만 자신들은 분명히 살아 있었고, 군인으로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설령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해병과 해병대는 그리 허약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지휘관급 긴급회의가 실시된 지 30분 만에 결론이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데프콘 태세도 3단계로 낮추어 버렸다.
 낯선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전에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못한 장병들에게 적당한 휴식도 취해 줘야만 하는 것이다. 더욱이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레이더와 소나를 통하여 위험은 사전에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동쪽 방향은 일찌감치 F―35가 갔다 온 방향이었고, 수백 킬로미터를 지나는 동안 육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확실했고,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 두 척 모두 서쪽 7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육지를 포착하였기에 함대는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함이 선두, 율곡 이이함이 후미, 독도함이 한가운데 위치에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함대의 측면에는 긴급 수리를 마친 김유신함이 따라붙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자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은 더욱 그 빛을 밝히고 있었다.
 새하얀 달과 핏빛의 붉은 달.
 그리고 모두가 식사를 하면서 긴장을 늦추는 시점에서, 다시금 함대 전체를 소란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독님! 문어 모양의 거대 생명체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박태성 참모가 헐레벌떡 뛰어와 식사중인 김충렬 준장의 시간을 방해했다.
 “무슨 헛소리야! 크라켄이라도 나타났단 말이야?”
 “세종대왕함의 전문에는 백 미터가량의 생명체입니다!”
 사실 그다지 크게 소란 피울 상황은 아니었다. 최초 발견 당시 길이만 100미터에 육박하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저 지나가던 고래 정도로만 추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쳐 가는 것 같았으나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함대를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접근해 온 것이다. 그리고 약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해 오면서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기에 육안으로 그 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종대왕함에 전하도록. 함포사격을 허가한다고.”
 김충렬 준장의 허가가 떨어졌고, 잠시 뒤 세종대왕함의 127밀리 주포가 불을 뿜었다.
 목표는 1.5킬로미터 전방에 모습을 드러낸 채 다가오고 있는 거대 문어였다.
 너무 가까이 접근을 허용하면 주포를 쓸 수 없게 된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만 있다면 공격은 쉬우나 접근하여 바다 밑에서 급작스런 공격을 받는다면 상당히 까다롭게 되기 때문에 선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종대왕함은 단 한 발의 주포를 쏘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탑건함다운 솜씨였다. 원 샷. 원 힛. 원 킬.
 철갑고폭탄을 쏜 것은 정답이었다.
 포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타깃의 장갑을 뚫기 위한 목적인 철갑탄, 두꺼운 탄환을 재차 폭발시키는 유탄, 그리고 그 복합형인 철갑고폭탄이 있다.
 세부적으로 나누자면 철갑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일부는 순수하게 구멍을 뚫기 위한 목적으로 발사 직후 포탄이 갈라지면서 내부에 숨겨져 있는 화살과 비슷한 관통자가 날아가기도 한다.
 철갑고폭탄의 경우는 어느 정도 두께의 장갑을 뚫고 지나가서 폭발하는 형태이다. 일반적인 유탄이 충격을 받자마자 폭발하는 것과는 형태가 다른 것이다.
 그런 철갑고폭탄이 구멍을 내며 거대 문어의 몸속에 들어갔고, 미처 관통을 하기 전에 내부에서 폭발하여 거대 문어의 생을 마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세종대왕함의 함포사격으로 크라켄은 일격에 몸통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크라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운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망망대해를 주름잡던 크라켄.
 일부러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드러내어 강자의 여유를 보이던 크라켄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인간들은 좋은 사냥감일 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상대가 너무 나빴다. 아니 나쁘다고 표현할 수준을 넘어선 최악의 상대였다.
 언제나처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어 공포에 떨면서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접근해 오던 크라켄. 평소 사냥하던 배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배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에 약간 놀랍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은 자만이었고, 자만은 크라켄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대로 청해 함대의 승조원들과 해병대 인원 도합 약 1,600여 명에게는 한참을 배불리 먹을 식량과 간식을 제공해 주는 일이었다.
 
 * * *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의 모든 기능들이 회복되었지만 크라켄의 출현 덕분에 태세는 3단계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식량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켄은 127밀리 주포에 박살이 나 버린 몸통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독도함의 갑판 위로 끌어올려 놓았다.
 상당한 분량이 몇 차례 끼니를 대신하여 소모되었고, 나머지 부분들은 해병대 700여 명이 달려들어 각자 소유하고 있던 대거로 포를 떠 말리게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맑은 날씨에,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양의 문어포를 확보할 수 있었고, 모든 장병들의 간식 대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안타까운 건 소주가 없다는 정도?
 그렇게 며칠을 지내면서 독도함의 레이더에도 육지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섬부터 시작해서, 해안선이 포착되기 시작하였고, 점점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육지임이 확인되었기에 청해 함대에는 다시금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야간을 틈타 해안선 가까이 접근한 청해 함대는, 우선적으로 해병대 일부를 IBS 고무보트에 태워 상륙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정확하게 어떤 곳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발을 디딜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탐색조를 편성한 것이다.
 육지가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는 위치에서 관측한 결과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성한 숲뿐이었다. 차라리 항구라도 존재했다면 거주인의 존재 유무 확인이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스무 명의 해병대가 두 대의 IBS 고무보트에 나눠 타고 탐색을 실시하였다.
 정확히 24시간 후, 보고를 통해 숲 속 곳곳에 민가로 추정되는 마을이 몇 군데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각 마을들은 목재 건물로 세워져 있었고, 원주민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생김새를 추측컨데 서양인들로 생각되어졌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진 건 매일같이 밤하늘에 빛나는 두 개의 달로 확인되었다. 이제 와서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반가워해야 할 입장이었다.
 수색조의 보고에서는 문명 수준이 상당히 뒤떨어져 보인다고 했다. 마을에는 금속으로 된 제품이 없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합성섬유가 아닌 천연섬유였고, 매우 단순한 염색이 되어 있다고 했다.
 해안선 근처에는 다행히도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기에, 지휘부는 상륙작전 명령을 내렸다.
 UH 헬기가 상공을 가로지르고, 해병대의 상징인 상륙 돌격 장갑차가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개에는 155밀리 야포와 K―711 트럭이 탑재되어 수면 위를 살짝 뜬 상태로 해안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이 바다를 경계하고, AH 헬기가 공중을 감시하였고, UH 헬기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면서 지상을 경계했다.
 해병대 700명이 상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UH 헬기와 AH 헬기 들이 쉴 새 없이 하늘 위에서 경계를 서는 가운데, 상륙 돌격 장갑차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면서 평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고, 해병대 700명이 뛰어들자 무성하던 숲의 일부는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평지가 되어 버렸다.
 1차 작전으로 헬기들이 공중에서 지상과 공중에 대한 경계 임무를, 상륙군은 주둔지 확보 임무가 우선적으로 내려졌고, 숲의 한 부분이 순식간에 휩쓸리며 공터가 되어 버리는 것으로 1차 상륙작전이 마무리되어졌다.
 뒤이어 2차 작전으로, 가장 가까운 고지를 확보하여 보다 효과적인 주변 경계와 외부에 대한 공격의 방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상륙작전 개시 두 시간 만에 사령부 텐트까지 완전히 세워졌다.
 상륙군 해병대 700명. 그리고 각 함에서 차출된 해군 300명.
 도합 일천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군이 이계의 땅에 그 첫발을 내디뎠다.
 
 
 
 3장 여기는 부산(釜山)
 
 
 상륙을 마친 뒤,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주변은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고, 딱히 위험 요소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숲의 무성함에 비하여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곳이었다.
 해안가는 자연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개발이 가능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좋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니 살려고 한 흔적조차 없다는 점이 이상할 정도였다.
 오히려 살기 힘든 숲 속 깊숙한 곳에 마을이 존재한다고 하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지휘관들이나 하는 것이다. 일반 사병들이나 일선에서 지휘하는 사관 및 부사관 들에게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반 사병 두 명이 숲 속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박 해뱀. 헥, 헥. 좀 천천히 가지 말입니다. 헥, 헥.”
 “자식이 빠져 가지고. 해병대가 고작 그 정도로 죽는소리하냐? 포인트 베타로 신속히 이동하여 통신 장비 구축하라는 소리 못 들었어?”
 “박 해뱀. 근데, 헥! 왜, 헥! 제가, 헥, 헥. 이걸 메고, 헥! 가야 하죠?”
 “P―999K 가지고 그러냐? 자식이. 나도 군장 차고 있잖아? 안 보여? 부피만 따지면 너보다 훨씬 크다고. 완전군장 무게나 무전기 무게나 별반 차이도 없는데 왜 그래?”
 “박 해뱀. 페트병.”
 “시꺼 이 자식아! 자꾸 고참한테 말대꾸할래? 앙? 그리고 통신병은 네놈이지 나냐? 확보된 고지에 통신 장비 설치하는 임무가 네 주된 일인데, 이 몸이 몸소 따라가 주는구먼. 우는소리 할래?”
 “김 해병님한테 시달리기 싫어서 가는 거 아닙니까?”
 “무······ 무슨! 아, 다 왔네. 이 해병, 무전기 내려놓고 지통실 연락해.”
 “헥, 헥. 무슨 산 하나 오르는 데, 10분도 안 걸려서 오르냐구요. 헥.”
 “귀신 잡는 해병대다 이놈아! 자꾸 말대꾸할려? 그리고 길은 내가 만들었지 네놈이 만들었냐? 길 만들면서 가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그야 박 해뱀 제초 작업 솜씨는 부대 내에서도 손꼽히잖습니까. 헥, 헥. 후임들 사이에서는 박 해뱀님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두 번 다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고 유명한데 말입니다.”
 “그거 어디서 들었냐? 어떤 의미로는 상당히 나쁘게 말하는 것 같다만?”
 “좋은 뜻이지 나쁜 뜻은 하나도 없슴다. 확실함다. 그 능력이 워낙에 좋아서 포인트 베타까지 길 만드는 작업에 박 해뱀이 추천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말입니다. 확실히 박 해뱀 군장 찬 상태로 길 만들면서 가는 속도 장난 아니었슴다. 무전기 메고 있다고 해도 따라가기도 벅차던데 말입니다.”
 “짜아식이. 어디서 그런 뒷구녕 핥는 소리 배웠냐? 비데가 따로 없네. 암만 그래도 네놈만큼은 싫지가 않구만. 그건 그렇고 진지 구축에 투입된 애들은 다 어디 갔지?”
 고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헬기 레펠로 먼저 투입되어 있을 1소대 인원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땅 파고 숨어 있는데 말입니다?”
 “응? 어디? 보여?”
 “그냥은 안 보이지 말입니다. 저쪽에 셋, 저쪽에 둘, 그리고 저쪽에 셋. 에······ 그러니까······. 아, 나머지 둘은 저기 사각 지역인데 말입니다?”
 “오오, 역시 이글아이 이 해병. 근데 쟤들 왜 땅 파고 그 밑에 들어가 있는 거냐? 진지 구축까지 해 놓고 말이지.”
 “그럼 가까이 있는 쪽에 물어보겠슴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부산.”
 갑자기 메고 있던 K―1 돌격소총을 겨누며 암구호를 외치는 이 일병.
 그런 이 일병의 모습에 박 상병은 그저 대충 이 일병의 총구가 향한 쪽으로 총을 겨누기만 했다.
 “······.”
 “거기 진지 한가운데 나뭇잎으로 덮어서 숨은 세 사람. 천천히 위장 풀고 나온다. 부산!”
 재차 재촉을 하자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낙엽들이 덮여만 있을 뿐인 바닥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최 해병님, 그러니까 짱 박혀 봤자 들킨다고 했잖습니까. 이글아이 이 해병이지 말입니다. 특전사도 아니고 이게 뭔 헛짓입니까. 아, 갈매기. 쏘지 마, 이 해병. 1소대 전 해병이야. 근데 보통은 진지에 접근하는 자를 향해서 경계 근무를 서는 사람이 암구호를 대는 것 아니냐?”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복귀해 인마. 통신선 두 다발 들고 왔으니까 선은 네가 깔아. 근데 왜 다들 매복하고 있었냐?”
 전 일병과 이 일병은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야 최 해병님이······.”
 땅속에서 기어 나온 최 병장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 일병의 말을 가로막았다.
 “야, 2소대.”
 “해병. 이. 익. 한.”
 “해병. 박두식.”
 “니들이 이글아이 이 해병과 FD 박 해병이냐?”
 “해병 박두식. 이익한 해병은 맞습니다만, FD는 뭡니까?”
 “네놈 별명도 모르냐? 포레스트 디스트로이어 박두식 아냐?”
 “아, 맞습니다.”
 “NGO에서 네놈 잡아 족치려고 벼르고 있으니 조심해.”
 상당히 호전적인 눈빛이 최 병장의 눈에서 나오고 있었다.
 “NGO는 또 뭡니까?”
 “박 해뱀. 원래 NGO는 국제 비정부 기구의 약자로 환경, 인권 등 관련 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하는 기관입니다만, 1소대 별명도 NGO임다.”
 이 일병은 언제나 그렇듯이 박 상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줄 아는 존재였고, 이번에도 명확하게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박 상병은 상황을 그다지 따지질 않았다. 어차피 무슨 일이 발생하면 도망가면 장땡이고, 여차하면 자신의 소대원들이 버텨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소대는 1소대보다 평균 계급이 높았다. 1소대를 골탕 먹여 줬다는 소식이 병장들 귀에 들어가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아, 그 노 갓 원. 뭐 하나 가진 거 없는 1소대?”
 별로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박 상병은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내리깔아 버리는 문제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온리의 1소대다. 자연과 동화되어 적을 기습하고 타격을 입히는 것이 1소대다, 이놈아! 자연 파괴의 주범인 네놈을 우리 1소대에서 가만둘 것 같아?”
 “에······ 그러니까 땅 파고 그 밑에 들어가 있던 것도 자연과 동화되기 위한 훈련 중의 하나였습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네놈을 엿 먹이기 위한 매복이기도 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제 후임인 이글아이 이 해병이 있는데 엘프라 할지라도 이 해병한테는 들킬 겁니다.”
 자신만만한 모습. 박 상병은 상대의 계급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숲 속. 숲 속에서 자신이 도망치고자 마음먹으면 따라잡을 존재는 부대 내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 상병은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였지만, 이 일병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꾸고 있었고, 라이벌 1소대에 통쾌한 일격을 날려 주는 박 상병의 모습이 그저 거대해 보일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네놈들 2소대는 반드시 박살 내 주마.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서 철저히 뭉개 주마!”
 그리고 진지 구축 임무로 먼저 와 있던 1소대는 박 상병이 만들어 놓은 길을 넓히면서 줄지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소대가 사라지자 박 상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우리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저리도 원망을 사고 있냐?”
 “모르십니까, 박 해뱀? 1소대에서 자연식으로 키운다고 전복이랑 해삼 종자 뿌려 놨던 거, 좀 컸다 싶을 때 우리 2소대가 잠수 훈련한다고 들어가서 싹 다 건져 올려 먹었잖습니까.”
 “아, 그 김 해병 생일 파티 때 안줏거리 건져 올린 거? 1소대 거였냐?”
 “그뿐입니까? 박 해뱀 순찰 돌 때마다 부대 내에 존재하는 계절 열매들 싹쓸이하잖습니까?”
 “그야 야간 순찰의 묘미 아니겠냐. 인스턴트 식이나 군용 건빵 같은 거 먹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놈이랑 같이 다니면 잘 찾아내니까, 너도 같이 먹었잖냐.”
 “예. 알고 보니 1소대가 곳곳에 숨겨 놓은 텃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박 해뱀과 제가 야간 순찰을 돌고 나면, 다음날 1소대는 발칵 뒤집혀지던데 말입니다.”
 “부대 내에 텃밭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 있냐? 내 기억으로는 없는데.”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몰래 키우던 것이고, 소대 내에서는 난리가 나도 다른 곳에는 안 알려진 것이죠.”
 “근데 너는 어떻게 그리 잘 아냐?”
 “제 동기가 몇 명인데 말입니다.”
 “응?”
 “제 동기가 우리 중대에만 10명이 넘습니다. 각 소대별로 한두 명씩은 다 있슴다. 동기들이 이야기해 주는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오호. 은근히 정보 수집 능력도 상당하군. 하하하. 그건 그렇고 빨리 지통실 연락하고 한 대 때우자고. 길 뚫느라 중노동 좀 했으니까.”
 “알겠슴다. 통신 보안. 갈매기 하나. 갈매기 하나······.”
 한 대 때우자는 말에는 재깍 말을 잘 듣는 이 일병이었다. 연초가 없다면 이들의 행복은 아마 멀리멀리 날아가고 없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 산 밑에서 볼 땐 완전 솥뚜껑처럼 생겼던데.”
 ― 치치직. 여긴 둥지. 갈매기 하나 뭔가?
 단방향 통신 방식으로 인해 말을 할 때마다 전기적 접촉에 의한 잡음이 치직거리면서 들려왔다.
 “포인트 베타 초소에 도착하였기에 보고합니다.”
 ― 치직. 출발 10분 만에 도착했단 말인가? 자네 누군가?
 “갈매기 하나. 해병대대 2대대 1중대 2소대 통신병 일병. 이. 익. 한. 해병입니다.”
 ― 치지직. 청해 함대 사령관 김충렬 준장일세. 같이 근무 서는 사병은 누군가?
 놀랍게도 무전 저편에서는 하늘과도 같은 함대사령관이 무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느긋하게 한 대 때울 준비를 하던 박 상병은 화들짝 놀라며 무전기를 빼앗아 들었다.
 “필! 승! 상병. 박. 두. 식.”
 그리고 잠시 동안 응답이 없다가 다시 무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치직. 오호. 자네들이 그 유명하다는 2대대 명콤비인가? 2대대장 설명으로는 10분 만에 도착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 역시 귀신 잡는 해병대야. 잠깐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측량할 애들 올려 보낼 테니 측량이 끝나는 대로 같이 복귀하도록 하게. 이상.
 “필. 승. 알겠습니다.”
 무전을 마친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한테 칭찬받은 거지?”
 “확실함다, 박 해뱀. 잘하면 포상 휴가 떨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 그렇겠지?”
 “일단 부대 복귀해야지 휴가를 받지 말입니다.”
 “그래. 부대 복귀하면······ 응?”
 “왜 그러십니까, 박 해뱀?”
 “야 임마! 여기 지구가 아니라고! 달 두 개 떠 있는 거 봤잖아! 부대 복귀는 어떻게 하란 거냐? 그리고 짱깨 놈들이랑 전쟁은 어쩌고? 아악! 내 휴가아∼!”
 “휴우. 박 해뱀. 그게 문제가 아니지 말입니다.”
 “포상 휴가아∼∼∼∼∼.”
 군인이 되면 다들 멍청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비록 SKY 출신의 수재 혹은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군대에 들어가면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바보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짬밥이 높으면 높을수록 바보 수치는 높아진다고 한다.
 박 상병은 당장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걱정보다 포상 휴가를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일병은 그런 박 상병의 모습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상륙부대는 진지 구축과 더불어 전략적 요충지 확보가 최우선시되었다. 물론 막아서는 적이 없었기에 작전은 개시 두 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뒤이어 주변 탐색과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이어졌고, 지형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측량 기술이 있는 병력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또한 이곳 원주민들과의 접촉도 필요했다. 당분간은 어떻게든 버텨 낼지 모르겠지만, 보급이 없는 이상에는 물자의 현지 조달이 필수 불가결이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휘부로서는 당연한 바람이었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시작하여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부대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기존과는 다르다는 판단이 내려졌기에, 적과 조우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편성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인원의 부족과 보급이 없다는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효과적인 전투를 위한 인원이 움직이는 데는 그만큼의 물자가 필요한 것이지만, 주된 임무가 수색과 접촉으로 바뀐 이상에는 대단위의 인원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첩보에 따르면 이곳 주민들의 문명 수준은 수세기 이상 뒤떨어진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에 과도한 화력의 집중은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경계 근무는 기존 방식인 2인 1조, 수색 임무는 측량을 위한 구성원까지 합하여 4인 1조로 변경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견고한 진지 구축에 투입되었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하였다.
 기름 한 방울 보급받을 수 없는 이상, 장비들의 쓸데없는 운용은 비상시에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대부분 인력으로 해결되고 있었다. 이건 해병대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원주민들과의 접촉에는 언어능력이 뛰어난 사병들이 차출되었다.
 전 세계 각국의 언어에 능통한 사병들이 하나둘 모였고, 중복되는 능력은 능력의 고하에 따라서 정리되었다.
 그렇게 한쪽에서 사병들이 모여서 때아닌 언어능력 테스트를 받고 있는 시점에서, 근무 교대를 하고 돌아온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지통실에서 나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사령관님이 안 계시네. 포상 휴가는 물 건너간 건가.”
 “박 해뱀.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말입니다.”
 “근데 저기 모여서 뭐한다냐?”
 “원주민들과 접촉을 위한 언어능력 테스트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헤에?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한다던?”
 “외형은 백인종이랑 닮은 듯하니 가급적 유럽권 언어가 능한 사람들 위주로 뽑는다는데 말입니다.”
 “불어니 독어니 그런 거 말이냐? 구텐 모르겐 봉쥬르?”
 “쓸데없지 말입니다. 저런 거 해 봤자 무의미한데 말입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막사로 돌아서서 가려던 찰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쓸데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지구가 아닌 곳에서 지구에서 쓰는 언어가 통할 거란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것이지 말입니다. 근데 박 해뱀, 언제 목소리가 그렇게 굵어지셨슴까?”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본 이 일병의 시선에는 순식간에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 있는 박 상병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시선이 옮겨진 그곳에는 부대 생활 중 한 번 보기 힘들다던 별을 어깨에 달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뒤에는 흔히들 말똥이라고 불리는 계급장이 두세 개씩은 붙은 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야······야······. 피피피······ 필! 승!”
 “응? 허억?! 필! 승!”
 청해 함대 사령관 김충렬 준장과 참모들이 식사를 마치고 줄지어 지통실로 돌아오던 중에, 마침 복귀한 박 상병 일행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리고 김 준장은 이 일병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음, 필승. 그런데 쓸데없다니 자네 의견을 꼭 듣고 싶어지는군.”
 “아, 옛! 그러니까 저기, 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지구가 아닌 곳에서 지구에서 사······ 사용되는 언어로 접촉을 시도해 봤자 토······ 통할 리 없다는 것이 제, 제 생각입니다!”
 이 일병은 하늘 같은 사령관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고, 박 상병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일리 있군. 그건 사령부에서도 의견이 나왔네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지. 그런데 자네는 뭔가 수가 있나?”
 “따······ 딱히 수랄 것도 없지만, 방······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병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하였고, 당연히 박 상병은 뜨끔한 모습으로 이 일병을 노려보았다.
 ‘야 인마! 뭔 헛소리야! 또 네놈 판타지 공상을 제독님 앞에서 늘어놓을 셈이냐!’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은 채 눈짓만 보내고 있는 박 상병이었다.
 하나 의외로 김충렬 준장은 흥미롭다는 듯한 눈치였다.
 “호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볼까?”
 “예, 옛!”
 그렇게 복귀 신고를 마치고 돌아가던 두 사람은 다시 지통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충렬 준장이 자리에 앉고, 나머지 참모들이 모두 착석을 완료하자, 김충렬 준장은 온화한 모습으로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 보게. 내 꼭 자네 의견이 듣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사소한 실수는 신경 쓰지 말고.”
 “옛. 그, 그럼 설명 드리겠습니다. 선발조의 정보에 따르면 각 마을의 문명 수준은 현저히 낮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나무 방책이 세워져 있었고, 마을 바깥으로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필시 무언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하지만 그 규모나 정도를 생각해 볼 때, 외부의 적은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기 어렵고, 이곳 어딘가에 살고 있을 몬스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몬스터라니?”
 “에······ 그러니까······ 숲 속에 사는 맹수 같은 부류입니다.”
 “음······. 계속해 보게.”
 “원주민들과의 우호적인 접촉을 시도하기에 앞서 우리 청해 함대가 가진 힘으로 맹수들을 내쫓고 보호해 주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면, 그들은 우리를 우호적으로 맞이해 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과연······. 일리 있는 말이군. 그나저나 선발대 소식을 일반병인 자네가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옛. 제 동기들만 해도 이곳에는 백 명 가까이 있습니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여기저기서 조금씩 이야기를 전해 들어 조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정보가 틀리군. 자네 말로는 나무 방책이 있고 주민들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보고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작전참모 박태성 대령이 말을 이었다.
 “극히 사소한 내용이었기에 제독님께 보고 드릴 때는 누락된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과연. 그럼 접촉은 잠시 늦추도록 하고, 우선은 현지에 서식하는 맹수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겠군. 자칫 우리 사병들이 다칠 수도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어. 일단 수색조를 편성해서 살피는 것이 좋겠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박 상병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저희가 갔다 오겠습니다.”
 박 상병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저기서 무섭게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 대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나게 깨질 것 같자 그냥 벗어나는 것보다는 임무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군 생활 동안 썩혀 둔 두뇌 회전을 200퍼센트 가동하여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응? 방금 근무 서고 온 참에 쉬지도 못하였을 텐데, 괜찮겠나?”
 “이 해병의 별명은 이글아이입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어떻게 숨어 있어도 귀신같이 찾아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리고 이 해병이 갖춘 이곳 세계와 유사한 판타지 세상에 대한 지식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박 상병의 모습에 매료된 이 일병도 가세했다.
 “저 또한 박 해병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박 해병님은 부대 내에서도 유명한 포레스트 디······ 숲 속을 평지 다니듯이 헤집고 다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근접전 능력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납니다.”
 이렇게 두 사병이 나서자 김충렬 준장은 부하들의 유능함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하하하. 한 중령 자네는 유능한 부하들을 두고 있군? 역시 해병대야. 일단 식사부터 하고 한 시간 뒤에 출발하도록.”
 방금 전까지 주제넘게 나선 자신의 부하 사병들을 어떻게 훈련을 빙자한 고문을 시켜 줄까 고민하던 한 중령은, 사령관의 칭찬을 받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힘주었던 시선을 풀었다. 일개 사병이 제멋대로 주제넘는 행동을 하여 매우 언짢았지만, 오히려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게 되자 화풀이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예. 필. 승!”
 그리고 그 애증의 대상인 부하들은 거수경례를 하고선 지통실 바깥으로 나갔다.
 
 박 상병과 이 일병이 지통실을 나가자 김충렬 준장은 2대대장인 한지욱 중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중령, 자네 부대 소속 아닌가?”
 “맞습니다.”
 “수색 임무는 특수 수색 대대가 하는 게 적합한 게 아닐까 싶은데, 왜 안 말렸나?”
 “저 두 사람 원래 1사단 특수 수색 대대 출신입니다.”
 “응?”
 “수색 대대에서 사고를 쳐서 영창에 갔다 온 다음에, 진급이 누락되어서 저희 대대로 흘러왔습니다.”
 “사고라니? 어떤 사고를 쳤단 말인가?”
 “확실하게 덜미를 잡힌 것으로, 훈련 중에 일어난 사건이고, 추측되고 있는 건수만도 몇 건이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떠맡게 된 계기는 작전지역에 설치된 훈련용 지뢰 서른 개를 몽땅 캐내어 엉뚱한 곳에 매설한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방어군 진영에서 설치한 훈련용 지뢰를 찾아내어 방어군 이동 지역에 매설함으로써 총알 한 발 안 쓰고 방어군 1개 소대를 싹쓸이해 버렸습니다. 본디 내려진 명령은 방어군 순찰 지역의 수색과 병력 상황 보고가 임무였으나, 이를 어기고 적 진영 깊숙이 침투하여 1개 소대를 전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에 따라 명령 위반으로 둘 다 영창에 보내졌고, 부대에서 쫓겨나 결국 제가 맡게 된 것입니다.”
 “능력 있군. 그런데 어찌 그리 잘 아나?”
 한 중령은 순간 표정을 굳히며 이를 살짝 갈았다.
 “당시 방어군 진영이 저희 대대였습니다. 1중대 1소대가 순찰 임무에 투입되었고, 전멸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후우, 날카로우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그 정도로 끝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왕 말씀드리는 것 다 풀어놓겠습니다. 그 직후 병력을 투입시켜 수색 작업에 돌입하였으나, 그 두 녀석이 수색망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대단하군. 같은 해병대에서 그만한 능력이 있다니. 그리고?”
 “지통실 텐트를 대검으로 찢어 버리고 진입하여······ 한 놈이 제 목에 대검을 겨누고, 다른 한 놈이 총을 겨눠 사실상 지통실 전체가 점령당해 버렸습니다.”
 “응? 아, 그 사건. 그 거물들. 하하하하하. 그랬군, 그랬어. 하하하하.”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방어군이든 점령군이든 정상적인 훈련을 위해 분주했는데, 그 두 놈 덕분에 점령군 쪽에서도 다른 사병들은 총 한 발 못 쏴 보고 끝나 버렸고, 방어군도 어이없게 지통실이 점령당해 버리는 통에 훈련다운 훈련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직후 수색 대대장과 면담해서 명령 위반으로 영창에 집어넣은 다음, 제가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목에 그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한 중령은 슬쩍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크크크큭. 그런데 수색 대대장도 그런 거물들을 어찌 그리 흔쾌히 자네한테 넘겨줬나?”
 “마지못해 넘겨주는 듯하는 모습이었습니다만, 알고 보니 그 두 녀석은 수색 대대에서도 전무후무하다는 괴짜들이었습니다. 각종 수색 임무와 저격 임무에서 전과는 확실히 세웠는데, 명령은 제대로 듣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훈련장 과녁을 저격하랬더니 과녁 모가지를 따오질 않나, 부대 내 시가전 훈련 중에 방어군 소속이면서 근무지를 이탈하여 점령군 소속 중대를 반쯤 털어놓고 복귀하질 않나, 대민 활동 갔다가 마을에 종종 내려오는 멧돼지를 잡아 오질 않나. 취사병이 힘들다고 밤사이 취사실에서 양파 한 포대를 몽땅 까놓질 않나. 산불 진화 작전에 투입시켰더니 노루 새끼를 끌어안고 내려오는 등 화려합니다.”
 “하하하하. 화려하네, 화려해. 확실히 화려해. 그리고 자네가 인도받고 나서도 여전했을 것 같은데?”
 “1소대에서 제 생일 선물로 준비 중이던 해삼과 전복을 그 두 녀석이 몽땅 건져 올려 2소대 생일 파티에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부대 곳곳에 1소대에서 키우던 더덕, 산딸기, 송이버섯 등 그 두 놈이 오고 난 다음부턴 항상 있던 행사치레 같았던 1소대 자연식이 갑자기 중단되었고, 그 두 놈 소행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하하하. 갈수록 흥미로운 녀석들이군.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 없겠나?”
 그러자 한 중령은 어느새 부관에 의해 준비된 자신의 앞에 놓인 파일을 펼쳐 김 준장 앞에 놓았다.
 “박두식 상병. 한국체대 출신. 어릴 적부터 스포츠에 능해 어지간한 스포츠는 거의 만능으로 통달해 있으며, 태권도 3단, 검도 3단, 유도 2단, 특공무술 2단으로 각종 무술에 통달. 수색 대대 당시 별명은 귀신 우는 해병. 귀신도 울면서 잡힐 솜씨의 해병이라는 약자라는 별명입니다. 특히 산악전 능력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숲 속에 들어가면 1개 대대 병력 전원을 투입시켜도 모를 정도로 도망치는 솜씨가 일품. 나무 타는 솜씨는 원숭이도 못 따라간다고 하여 일부에서는 손오공이라는 별명도 붙여진 상태입니다. 2대대 전입 후 여전히 그 괴짜 성격이 문제가 되어 벌로 제초 작업 명령을 내렸더니 야삽 한 자루로 이틀 만에 각개전투 훈련장까지 모조리 파 뒤집어엎어 버리고, 춘계 진지 공사 당시 부대 주변에 무성히 자란 나무들을 정리하는 데 투입시키자 박도 한 자루로 울타리 주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내어 포레스트 디스트로이어라는 별명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익한 일병. 경북대 경영학부 출신. 태권도 2단. 양쪽 눈이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2.0을 기록. 야간에도 그 시력이 짐승과도 같은 수준이어서 야간 훈련에서도 적외선 스코프를 착용한 기록이 없음. 수색 대대 당시 그의 저격 능력을 시험하고자 천오백 미터 바깥에 과녁을 세워 놓고 스코프 없이 저격 성공 기록. 그 직후 호크아이라는 별명을 획득. 그 외에 사물을 보고 인위적인 흔적을 발견하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 수색대 내에서도 호평을 받음. 체력은 일반 수색 대원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편.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부대 내 구식 흑백 PDA를 반입하여 수천여 권의 책을 밤중에 몰래 읽다가 관물 검사에서 발각된 적 있음. 자대 배치 직후부터 박두식 상병과 짝을 이루었으며, 두뇌 회전이 빨라 육체적인 것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뛰어난 존재였지만, 지나치게 살갑게 구는 성격상의 문제로 간혹 트러블을 발생시킴. 2대대 전입 후 그의 시력은 부대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눈매가 너무 이글거린다 하여 한 선임에 의하여 이글아이로 별명이 붙여짐. 현재 2소대에 두 명을 배치시켜 1소대와 경쟁이 되도록 하여 서로 발전하게끔 도모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임무 성과에서도 차이가 생겨, 두 사람의 전입 전에는 1소대와 2소대의 대결에서 1소대가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전입 후에는 1소대가 단 한 번도 2소대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신상 명세와 입대 후 화려한 활동을 보여 준 두 사람의 전과를 보고 들으면서 김충렬 준장은 매우 흥미 깊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 *
 
 수색 임무를 부여받고 숲을 가로지르는 박 상병과 이 일병은 방금 전 근무 서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충렬 준장의 지시로 개인화기부터 시작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장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이 떨어졌고, 두 사람은 입이 귀에 걸린 듯이 기뻐하며 각자에게 알맞은 장비들을 갖추었다.
 이 일병은 MSG―90 저격 소총에서 과감하게 스코프를 떼어 낸 주화기. 그리고 K―5 보조화기에 캐멀 백, 대검, 야삽 등과 함께 두 사람의 이틀치 식량을 챙겼고, 박 상병은 기본 장비는 이 일병과 공통으로 하고, 식량을 챙기지 않는 대신 적외선 스코프, 쌍안경 등 각종 부수적인 장비들과 주화기로 K―7 기관단총, 그리고 왼손에는 박도가 들려졌다.
 ‘작전시간은 이틀. 현지 원주민들을 위협하는 맹수에 대한 조사와 포획, 그 외 모든 작전행동은 자유. 필요하다면 원주민들과의 접촉도 허가.’라는 파격적인 명령이 내려졌다.
 참모들이 기겁하면서 말렸지만 김 준장은 단호하게 이 둘에게 임무를 맡겼고, 개인화기 및 장비는 자율 지참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각자 챙길 것들을 챙겨 들고 필요한 것은 곧장 요구하여 받아 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별나게도 양쪽 상의 두둑하게 초코바를 한가득 꽂아 넣고 있었다.
 투입 전 보고를 위해 선 두 사람을 살펴본 김 준장은 그들의 상의 주머니 한쪽에 삐져나온 초코바 껍질을 보고서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별걱정 안 할 테니 잘 갔다 와. 복귀 시간과 몬스터 확보, 이 두 가지만 잘 지키고, 그 외에 시간엔 무얼 하든 자유니까 외박 나간 셈치고 다녀와.”
 이 일병은 박 상병의 뒤를 따르면서 자신들을 배웅해 주던 사령관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색 대대 당시와 같은 임무를 받고 나선 길이었지만 그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은 들떠 있었다.
 500밀리 수통 대신 캐멀 백, 원하는 종류의 화기와 원하는 만큼의 탄의 지급.
 그동안 정해진 화기와 정해진 임무만을 수행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라서일까. 박도를 휘두르면서 길을 만들며 앞장서고 있는 박 상병도 여느 때보다 힘차 보였다.
 지도상에 표시된 마을 중 가장 가까운 마을이 자신들의 걸음으로 약 한 시간 반 거리에 있었다. 이런 숲 속에서 일반인이라면 거의 반나절은 넘게 걸릴 거리이지만 이들은 거침없었고 신속했다.
 박 상병은 사령관의 마지막 말인 ‘외박 간 셈치고 다녀와’라는 내용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정확히 48시간의 시간이 주어졌고, 임무라고는 ‘이곳에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몬스터 한 마리의 모가지를 따갈 것.’이라는 극히 단순하고도 간단한 내용―으로 약간은 곡해되어 인식되고 있었다― 외에는 자유 시간! 자유 시간! 자유 시간!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겠다(?) 후다닥 가서 후다닥 해치우고 신나게 놀다가 복귀할 생각에 가득한 박 상병이었다.
 그리고 이 일병은 필시 조우하게 될 몬스터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경이로운 속도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을 근처까지 도착한 이들은 조용히 주변 지역 정찰에 들어갔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바싹 엎드린 채 쌍안경으로 마을의 모습을 살피는 박 상병이었고, 쌍안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주변을 살피며 지형을 파악하는 이 일병이었다.
 “박 해뱀. 여기 거의 중세나 다름없지 말입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입구 근처에 선 사람들 보이시지 말입니다. 칼 차고 있지 말입니다.”
 “응? 어, 진짜네. 칼 차고 있네.”
 “총 든 놈 하나도 없지 말입니다. 기껏해야 칼 차고 창 들고, 그마저도 칼 찬 사람은 두 사람뿐이고 창 든 사람도 세 사람이 전부지 말입니다. 경계 근무는 열 명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확실히 부실하긴 부실하네. 게다가 왜 저리 말랐냐? 못 먹고 사나?”
 “당연히 못 먹고살지 말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마을에 저런 나무 방책 세워 놓고, 힘쓸 만한 젊은이가 무려 열 명씩이나 경계를 서고 있으니, 농사도 제대로 못 짓지 말입니다.”
 “하긴 일리는 있다.”
 “가구 숫자는 고작 40여 개 정도인 걸로 보니, 한 가구당 힘쓸 장정 하나 내지는 둘씩 있다고 가정해도, 많아 봐야 60명 정도가 한계지 말입니다. 마을 규모로 봐서는 전체 인구가 200명에서 400명 사이로 보이지 말입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냐? 그새 세어 보기라도 했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오지 말입니다. 한 가구당 가족 구성원의 숫자가 평균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리고 궁핍한 생활을 하는 이런 곳에서 먹여 살릴 애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반대로 척박한 땅이다 보니 노인들의 구성 비율도 그다지 많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아, 그래. 네놈 그분 참 굵으시다.”
 “박 해뱀이 제 그분 보셨슴까? 어? 저기 오크들 지나가는데 말임다?”
 “응? 오크라고?”
 “11시 방향 숲 속에 한 덩어리 이동하는데 말입니다. 하나, 둘, 셋······. 아! 인질도 있는데 말임다.”
 “뭐야 그럼 벌써 한탕했단 말이야? 근데 정말 네 말대로 돼지머리에 사람 몸뚱이, 무기는 투박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투박하구먼. 저게 오크라 이거지?”
 “이럴 게 아니라 따라가지 말입니다. 잘하면 임무 완수는 쉽게 풀리겠는데 말입니다.”
 “그래그래. 범 잡으려면 범굴로 들어가랬다. 저놈들 소굴에 직접 쳐들어가서 놈들의 대가리를 따 주겠어.”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조심스럽게 마을 건너 숲 속을 가로지르는 오크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이 일병은 은근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뭐 모가지를 따든 멱을 따든 상관없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동 중인 숫자만 봐도 열댓이 넘는데, 본거지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있을지 알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함부로 뛰어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지 말입니다.”
 “마, 총도 없는 놈들 아니냐? 어차피 주변엔 숲이 널려 있을 거고. 해병대 1개 대대가 우르르 몰려와도 숲 속이면 도망칠 자신 있는 나라고. 게다가 저따위 원시적인 무기만 가지고 있는 놈들이라면 1개 중대가 덤벼도 다 때려눕힐 자신 있다 이거야. 게다가 저놈들 체계적인 무술 같은 거 배우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가급적 높은 곳에서 이동하던 둘은 이윽고 오크들의 본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 그럴 법하긴 한데 말입니다. 아, 다 왔지 말입니다. 히야∼ 오크들 득시글득시글한데 말입니다.”
 “우엑! 도대체 몇 마리냐, 이거?”
 “얼추 6백 정도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비전투 인원 분류해 봤자 백도 채 안되는데 말입니다.”
 “뭐 저따위야? 대부분이 전투 요원이라고? 야, 탄약 얼마나 있냐?”
 “주화기 탄창 다섯 개, 부화기 탄창 두 개씩이 전부지 말입니다. 수백 마리를 원 샷 원 킬 가능하겠습니까? 지원 요청하러 갔다 옵니까?”
 “그러다가 저 인질들 다 죽고 말겠다. 뭔가 수가 없겠냐?”
 “박 해뱀. 어차피 저놈들 지능 낮지 말입니다. 함정 파 놓고 조금씩 유인하면 시간은 걸려도 가능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흠,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말입니다. 박 해뱀 칼 솜씨면 금방임다. 그리고 가능하면 총은 안 쓰는 게 좋겠는데 말입니다.”
 “왜? 있는 화력 위험 감수해 가면서 아낄 건 뭐냐?”
 “휴우, 박 해뱀. 잊었슴까? 지구 아니지 말입니다. 보급 없지 말입니다. 쓸데없이 총알 마구 써 대다간 나중에 정작 필요할 때 못 쓰지 말입니다.”
 “아아, 그래 알았다 이놈아. 어차피 나도 이런 데서 별로 총 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일단 부비 트랩 설치부터 하자고. 엄청나게 원시적일 것 같긴 하다만.”
 그렇게 두 사람은 분주하게 오크 마을 주변 숲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서 슬슬 어두워질 무렵, 오크 마을 여기저기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무로 대충 얽어 놓은 듯한 구조에, 곳곳에 널려 있는 건초 더미로 인하여 불길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물론 오크들은 우왕좌왕하며 불길을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지만 좀처럼 불길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일정 거리를 두고 계속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진화 작업을 하려던 오크들을 에워싸는 형식이 되었고, 오크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길에 휩싸였다.
 마치 노리고 불을 지른 듯했고, 불이 나더라도 완전히 둘러쌀 만큼 불이 나지는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불길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오크들은 불길에 둘러싸여 버렸고, 불길 바깥에는 소수의 오크만이 남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얼굴을 온통 검게 칠한 이상한 복장의 인간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미처 대응도 하기 전에 오크 둘이 그의 손에 들려진 박도에 의해 목이 잘려졌다.
 “취익! 인간이다! 저놈이 불을 질렀다!”
 “잡아라! 취익!”
 불길 속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오크들을 남겨 두고 안전한 곳에 있던 오크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위장 크림으로 시커먼 얼굴을 한 박 상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소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십은 넘는 숫자였다.
 박 상병은 오크들이 우르르 달려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을 바깥으로 쌩하니 도망치기 시작했고, 분노에 가득 찬 오크들은 놓칠세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쪽 구석의 건초 더미가 꿈틀거리더니 이 일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돼지 바비큐를 해 보자고∼ 우히힛!”
 이 일병과 박 상병은 그동안 오크 마을 주변에 부비 트랩을 설치한 뒤, 은밀하게 마을 안으로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길이 쉽게 번지도록 건초를 준비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방향을 적절히 조절하여 땅을 파 두거나 나무들을 잘라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갑자기 발생한 불은 이 일병이 가지고 있던 고체 연료가 원인이었다.
 취사용 군용 고체 연료를 쪼개어 불을 붙여 건초 더미 깊숙이 집어넣자, 화력 좋은 고체 연료가 순식간에 불을 키웠던 것이다.
 그렇게 불을 질러 대부분의 오크들을 유인하고 주변에도 불을 놓아 대부분의 오크들을 불 속에 가두어 둔 다음, 나머지 오크들은 박 상병이 나타나 유인하여 마을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은 다행히도 불길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구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병은 그들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마을 바깥으로 나간 오크들에게 풀어 준 사람들이 발각되어 버리거나, 박 상병과 함께 만든 부비 트랩에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갇혀 있던 사람들도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이 온통 시커먼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모습을 보이자 마치 지옥의 악마와도 같았기에 차마 살려 달라는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이 일병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불길 속에 땔감을 던져 넣었다.
 워낙에 거센 불길이어서 안쪽 상황조차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불붙은 나무들을 집어 들어 깊숙이 던져 넣었다.
 몇 바퀴 돌면서 그렇게 불붙은 나무들을 안으로 계속 집어넣자 안쪽에서는 오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오크들도 보이지 않는 불길 너머에서 불붙은 통나무가 날아들자 그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불길이 가운데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탈 것이 없는 바깥보단 탈 것이 있는 안쪽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오크들도 가능한 한 불길이 자신들에게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거센 불길 속에서 그 노력은 허사였다.
 불길 주변을 다섯 바퀴째 돌 무렵, 박 상병이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헥, 헥. 박 해뱀. 통돼지 바비큐 만드는 것도 힘든데 말입니다. 이거 장난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잘하고 있네. 사람들은?”
 “아직 저기 구석에 갇혀 있는 채로 냅 뒀지 말입니다. 괜히 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 더 힘들지 말입니다. 근데 유인해 간 오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보같이 부비 트랩에 너무 잘 걸리더라고. 차라리 멧돼지 잡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더라니까. 줄줄이 따라오다가 줄줄이 걸려서 한 놈도 안 남기고 다 해치웠지.”
 “헥, 헥. 박 해뱀도 돼지 구이 같이 하시지 말입니다. 아직 범위가 넓어서 불길이 약해지면 안에 있는 놈들이 빠져나오게 될 텐데, 그럼 곤란하지 말입니다.”
 “오냐, 이놈아. 나무 해 올 테니 마을 사람들을 풀어 줘라. 부비 트랩 남은 것도 없고, 불길 안에 있는 놈들 만 해치우면 안전하니까.”
 박 상병은 신속하게 움직여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이 일병은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내고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풀어 준 다음에는 그저 말없이 박 상병이 구해 놓은 땔감들을 열심히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마을 사람들은 시커먼 얼굴을 한 두 명의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구해지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박 상병 일행을 돕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불구덩이 속에 갇혀 있는 오크들을 모조리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일념은 이들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밤새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불을 지르고 또 질렀고, 어스름이 밝아 올 무렵에는 불길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오크의 비명 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가 그치고 불길도 캠프파이어 수준까지 작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을 괴롭혀 오던 오크 마을 하나가 이 정체 모를 두 명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나고, 오크들 또한 싹쓸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할 무렵,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열심히 세수를 하고 있었다.
 “비누 없냐? 위장 크림 더럽게 안 지네.”
 “가지고 있을 리 없지 말입니다. 아, 박 해뱀. 아직 귀밑에 남았슴다.”
 한참 동안 세수를 하고 겨우 위장 크림을 지운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위장 크림을 지우기 전의 자신들과 똑같이 검댕으로 온통 새까만 모습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
 한 사람이 나서서 뭐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네가 이 분야 전문이잖아? 어떻게 좀 해 봐라.”
 “저도 이곳 사람들의 말은 모르지 말입니다. 혹시나 반지 같은 거나 목걸이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건 또 뭔 소리냐?”
 “아티팩트라고, 언어를 알아듣게 해 주는 그런 마법 도구 같은 거 말입니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구하기는 힘들 텐데 말입니다.”
 “그딴 게 어디 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놈아.”
 “판타지 세계에서 없을 리 없지 말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뭐라고 말이라도 건네 보려던 사람들은 이 두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저기······. 제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로 어떻게······ 응?”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고, 약간은 난처한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우리말 할 줄 아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제 스승님이 남겨 주신 마법 물품 덕분에 대화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아하하.”
 그 청년은 자신의 귀걸이를 보여 주었고, 이 일병은 환성을 질렀다.
 “역시! 통역 마법이 들어 있는 아이템이 있었어! 거 보시라니까 말입니다. 박 해뱀, 걱정할 것 없지 말입니다.”
 반면 박 상병은 갑자기 한국어를 유창하게 쏟아 내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몹시 의심스러워졌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용사님들. 저는 수습 마법사 제라드라고 합니다.”
 
 수습 마법사 제라드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이 일병의 몫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병의 판타지 지식은 실로 방대했고, 제라드 또한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크게 장벽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에 살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 일병이었기에 그럴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오크들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서른다섯 명에 달했다.
 제라드의 설명으로는 이들 모두 근처에 사는 사람들로, 일곱 개 마을에 해당하는 마을 주민들이라고 했다.
 각각의 마을은 대략 350명 남짓의 인구를 이루고 있으며, 화전을 일구면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간의 거리는 걸어서 네 시간 남짓이 걸리며, 왕래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크들이 언제 어느 때에 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을끼리 자주 왕래할 만한 형편이 못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라드 님은 지도 같은 거 없습니까? 사실 저희가 이곳 지리가 어두워서 잘 모르는 형편이라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지역은 지도가 없답니다.”
 “지도가 없단 말입니까? 무슨 잃어버린 땅이라도 됩니까?”
 “하하하. 용사님은 참 알다가도 모를 분이군요. 모른다고 하시면서도 비슷할 정도로 잘 맞추시는 것을 보니. 이곳은 ‘잊혀진 땅’입니다.”
 “음······. 잊혀진 땅이라······. 대륙 지도라도 있습니까?”
 “물론 대륙 지도라면 가지고 있지요. 판테아 대륙 전도입니다.”
 제라드는 한 장의 천 조각을 꺼내어 펼쳤고, 한쪽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곳이 바로 잊혀진 땅입니다. 그중에서도 동남쪽 드래곤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입니다.”
 해안선만이 대충 그려져 있을 뿐이며 아무것도 없는 모양새였다.
 박 상병은 해안선의 모양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
 “잊혀진 땅의 동쪽 귀퉁이를 따라서 세로로 길게 이어진 산맥입니다. 이름조차 없는 산맥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드래곤이 산다고 하여 드래곤 산맥이라고 부릅니다.”
 박 상병이 의문을 표하자 이 일병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지도에 표시조차 안되어 있는 이곳에 마을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여긴 어느 나라 땅입니까?”
 “본디 잊혀진 땅 자체는 어떤 나라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땅을 경계 짓는 두 개의 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하면 몇몇 부족국가가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어진 대륙에는 많은 국가들이 있지요. 그리고 이곳 마을 주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설명을 더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음. 사실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이 땅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사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립된 채 살고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을 여기저기 만들어 살고 있었습니다만, 하나의 국가로 발전하지를 못했답니다. 그 이유인즉 지형이 험하고 몬스터가 많아 마을 간의 왕래가 힘들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며, 대륙과의 연결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는 크라켄이 이 땅의 삼면을 둘러싼 바다를 종횡무진하기 때문에 뱃길도 없는 형편이고, 육지로는 몬스터들에 의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이지요. 더욱이 이 땅과 인접한 곳에는 부족국가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침략할 만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경계가 되는 두 개의 강 주변에는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으며, 이 땅 곳곳에도 여러 몬스터들이 살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이 땅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외지에서 바다를 건너 도망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도망친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부류에 속하지요.”
 긴 설명을 들은 이 일병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 상병은 어차피 가방끈 길고 머리 좋은 이 일병이 주로 보고할 것이니, 그저 옆에서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라드 님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저같이 잘난 것 하나 없는 수습 마법사가 내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고작 1서클 마법 몇 개밖에 쓸 줄 모르는데 말이지요.”
 “1서클이라면 매직 애로우나 매직 미사일 그런 겁니까?”
 “하하하. 라이트 마법과 파이어 애로우 두 가지밖에 못 쓰는 형편없는 수습이지요. 그마저도 지팡이가 없으면 쓰지도 못한답니다.”
 “그래도 마법사지 않습니까. 제 두 눈으로 마법사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이 일병은 진심으로 제라드를 칭찬하고 있었고, 처음과는 달리 사소한 이야기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박 상병은 그런 이 일병의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까진 급할 것이 없으므로 좀 더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거참. 자꾸 띄워 주시는군요. 그러는 용사님들이야말로 저를 포함하여 오크들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구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야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오크들을 두 분이 몰살시키시다니.”
 “제라드 님과 잡혀 있던 분들 덕분입니다. 두 사람이서 오크들을 몽땅 통돼지구이로 만들 수는 없지 말입니다.”
 “하하하. 겸손하시기까지. 그런데 두 분은 복장도 특이하고 외모도 남다른 듯하신데,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민감한 질문이 나오자 이 일병은 박 상병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박 상병은 그저 네놈 알아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그건 좀 대답하기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이고, 여기서 남동쪽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 해안가에 현재 진지를 구축해 두고 있습니다.”
 “남동쪽이라······. 에엑? 거긴 크라켄의 둥지가 있는 곳인데? 정말입니까?”
 제라드는 매우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해 주자 사람들 또한 몹시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라켄의 둥지라······. 역시 그래서 그 일대가 그리도 조용한 겁니까? 크라켄이라면 진작에 박살 내 버렸지 말입니다. 아, 이거 크라켄 고기 조각 말린 건데 드시겠습니까?”
 오히려 태연하게 말린 크라켄 고기를 꺼내 내미는 이 일병이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크라켄을 해치웠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어······ 어찌 그런······. 드래곤들조차도 상대하기 꺼려하는 크라켄을······.”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듯하고,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제라드라는 사람도 빨리 제정신을 되찾기 힘들어 보이자, 박 상병이 이 일병의 어깨를 툭 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병 또한 박 상병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 일단 사람들을 마을에 돌려보내도록 하지 말입니다. 아, 그냥 돌아가도 안전하겠습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이 주변 마을 일곱 개는 오크들의 습격만 아니면 그다지 문제가 없던 마을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장악하던 오크들이 사라졌으니 얼마 있지 않아 드래곤 산맥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내려오겠지만, 당분간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소수로 흩어지는 것보단 한 마을로 이동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쪽에 마을이 있던데, 그곳으로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용사님 의견이 그러하시다면 일단 남쪽 마을에 모두 함께 가는 것으로 하지요.”
 그렇게 재만 남은 오크 마을을 뒤로한 채 주민들과 박 상병 일행은 최초 접촉 예정지였던 마을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룻밤을 꼬박 새며 분주히 움직인 탓에 피곤할 만도 하련만, 박 상병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성취감에, 이 일병은 마법사를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살아 돌아간다는 생각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걸음을 옮겼다.
 
 박 상병 일행이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에 나타나자 마을 전체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복장에 이상한 장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박 상병 일행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주민들도, 외부에서 흘러온 주민들도 하나같이 낯설어 했다.
 하지만 그런 낯선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정감 어린 얼굴로 마을에 들어서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둘에게 다가온 사람들은 그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뭐라고 하지만 박 상병 일행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자신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고, 마주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보였다.
 이 일병이 제라드와 대화를 하는 중에 박 상병은 마을 어린이들을 하나둘씩 손짓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상의 주머니에 한가득 챙겨 온 초코바를 꺼내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먼저 먹는 시범을 보이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자 아이들도 저마다 포장을 뜯어 입안에 넣었다.
 견과류 특유의 씹히는 맛과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혀를 자극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그래, 이놈들아. 받았으면 엄마한테 가야지. 하하하.”
 순식간에 초코바는 바닥나 버렸고, 아이들은 더 달라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박 상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도 한가득 챙겨 왔잖아. 애들 주게 내놔.”
 “박 해뱀, 빠르기도 하십니다. 그럼 저는 제라드 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이곳 정보나 더 수집하겠슴다.”
 이 일병은 자신이 챙겨 온 초코바와 식량 들을 몽땅 박 상병에게 넘기고선 제라드와 함께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박 상병은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시금 초코바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어른들도 초코바를 받아 가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도 보였다.
 역시나 순식간에 초코바는 바닥이 나 버렸고,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초코바를 맛볼 수 있었고, 그 달콤한 맛에 이끌린 아이들은 박 상병 주변을 떠나질 않았다.
 결국 박 상병은 전투식량을 뜯어 부식으로 들어 있는 새알 초콜릿까지 탈탈 털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더 이상 나누어 줄 것이 없자 슬슬 자리를 피했다.
 마을을 둘러보니 몇 가구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그 집들이 여러모로 보수가 많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흙을 대충 쌓아 올려 만든 집이 눈에 띄었다. 한쪽 벽이 허물어져 실내가 훤히 보이는 집에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박 상병은 인도적 민간 지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실천하는 것 또한 누가 시키질 않아도 알아서 먼저 찾아가는 타입의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에······. 저기, 벽 허물어진 거 고쳐 드리려는데, 괜찮겠습니까?”
 말이 안 통해 손짓 발짓으로 허문 벽을 가리키며 쌓아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가 도와주러 온 것임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박 상병은 곧장 허물어진 벽으로 다가서서 주변의 돌과 흙으로 다시금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초코바를 얻어먹은 아이들도 우르르 달려들어 박 상병을 돕기 시작했다.
 돌을 대고 진흙으로 틈새를 막아 세우는 식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 시작하자 금세 벽 하나가 세워졌다.
 그런 식으로 박 상병은 집집마다 돌면서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도왔지만 도움을 받은 집의 어른들 또한 자발적으로 나서며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발전해 버렸다.
 식사 시간이 되자 집집마다 연기를 피어올리며 음식을 짓기 시작했고, 오전 동안 박 상병과 함께 보수공사를 여러 주민들이 서로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식사 대접을 하려는 이들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밝게 웃는 모습의 이들을 보면서 대민 지원의 보람을 느끼는 박 상병이었다.
 그런 박 상병의 시선에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해져 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박 상병이 기억하기에는 집 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이들만 둘 있던 집에 있던 여자아이였다. 지붕의 절반이 날아가고 없는 집이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 상병은 무언가를 짐작하며 그 여자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러니? 뭐 때문에 그렇게 침울해져 있니?”
 이제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일까. 누더기 같은 옷에, 씻지 못해 새카만 얼굴. 푸석한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아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해하고 있었다.
 식사 대접을 하려던 주민들도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그저 안쓰러운 눈빛만을 보내고 있었다.
 박 상병은 자신의 짐작이 맞을 것으로 생각하고서는 침울해져 있는 아이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그 아이의 집으로 향했다. 주민들도 그런 박 상병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직접 수리를 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박 상병이었다. 황량한 집안. 식기는 그나마 약간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다.
 그곳에는 여자아이의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박 상병은 캐멀 백에서 물을 부어 식기에 담았고, 이것저것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전투식량 세 팩을 꺼냈다.
 물이 끓자 박 상병은 전투식량에 끓은 물을 부어 두고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었다.
 “전투식량 2호. 야채 비빔밥이다. 매운 맛은 없으니까 쉽게 먹겠지?”
 아이들은 박 상병이 무얼 말하는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런 모습에 씨익 웃어 준 박 상병은 약 10여 분이 지나자 아이들에게 다 불린 전투식량을 내밀었다.
 “먹어. 군용 전식이 배고플 땐 죽여주니까.”
 박 상병이 먼저 먹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한입 맛을 본 아이들은 이 이상한 음식이 너무도 맛있었던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으며 박 상병보다 더 빨리 한 팩을 뚝딱 해치워 버렸다.
 그때 이 일병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박 해뱀. 벌써 식사하셨슴까? 촌장님이 식사 대접한다고 찾는데 말입니다.”
 “없는 마을에 얻어먹어서 어쩌려고? 너도 전식이나 까먹어 인마.”
 너무나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 일병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박 상병을 바라보았다.
 “박 해뱀. 먹는 걸로 애들 꼬십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박 해뱀 취향이 로리인 줄은 미처 몰랐지 말입니다.”
 순간 박 상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놈이! 당장 튀어나온다. 실시!”
 “농담임다, 박 해뱀.”
 “지금 니 눈엔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냐?”
 붉으락푸르락하는 박 상병의 모습에 장난이 아님을 직감한 이 일병은 순식간에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군기가 너무 빠져 있어서 문제라고 생각했다. 차렷! 열중쉬어! 차렷!”
 박 상병의 구령에 맞춰 이 일병은 착착 움직이기 시작했고, 꼬마들과 마을 주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외쳐 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동작 봐라! 그러고도 해병대냐!”
 이 일병은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일부 사람들은 박 상병의 모습에 약간의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피티 8번 구령에 맞추어 10회 실시한다. 몇 회?”
 “10회!”
 “목소리가 작다. 20회 실시한다. 몇 회?”
 “20회!”
 “그래도 작다. 40회 실시한다. 몇 회!?”
 “40회!”
 “15회 시∼작!”
 ― 삑 삑 삑. 삑 삐빅 삐빅!
 “하나!”
 어느새 꺼내 든 호각 소리에 맞추어 이 일병은 바닥에 누워 양팔을 벌리고 다리를 좌우로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고개 또한 약간 들려진 채 다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한참을 그렇게 얼차려를 굴린 박 상병과 그동안 빠질 만큼 빠진 군기를 다시금 되찾음과 동시에 흙투성이가 된 이 일병이 마주 섰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군기 빠진 모습을 자꾸 보이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너 바보냐? 여긴 바깥이다. 안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농담 따먹나?”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마주 선 상태에서도 박 상병은 한동안 이 일병의 군기를 잡기 위해서 이것저것 태클을 걸었다.
 대답하는 이 일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온 마을을 울릴 만큼 퍼졌고, 너무도 무서운 모습에 사람들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할 뿐 차마 다가서지는 못했다.
 “두 번 다시 선임한테 그런 망발을 내뱉다가는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 주겠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박 상병은 종종 주변 사람들로부터 로리콘이라는 소리를 들어왔었고, 그 단어만큼은 금기어였다. 사회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의 경우라면 금기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부대 내에서는 아이들을 만날 일도 없을 뿐더러, 박 상병의 금기어를 단짝인 이 일병이라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와 완전히 달라진 박 상병의 모습에 평상시 가깝게 지냈던 이 일병은 그 변화를 쉽게 눈치채고서는 박 상병의 얼차려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투식량을 받아 든 이 일병은 평상시 부대 내에서 식사하듯이 수직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문 박 상병과 이 일병은 다음날 오전부터 부대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자 개인장비들을 점검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마을 바깥으로 나섰다.
 전투식량은 남은 것 모두 부모 잃은 남매에게 줬다. 그리고 제라드를 통해 가급적 빨리 먹도록 알려 주었다.
 아이들은 연신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쳐 대며 허리를 숙였고, 박 상병은 그저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그리고 복귀하는 길에는 제라드가 따라가기로 했다. 제라드가 동행해 준다면 구두 보고를 하는 것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병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제라드는 완전히 이 일병에게 바싹 붙어 다녔고, 이 일병에게 얼차려 준 박 상병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일병의 이야기로는 제라드는 이 근방의 마을들에서 상당히 인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쓸 줄 아는 마법은 거의 없지만, 마법적 지식은 상당하며, 무엇보다 여러 가지 약초에 관한 지식이 많아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약을 만들어 주고 식사를 제공받는 식의 생활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싸구려 스태프는 오크들에게 습격당할 당시에 부러지면서 잃어버린 상태였고, 지금은 아무런 마법도 못 쓰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는 귀걸이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곳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 상병 일행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귀중한 현지인이었다.
 그리고 그 제라드는 마을을 나선 지 불과 10분 만에 이 일병과 박 상병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용사님들. 천천히 좀 갑시다. 헤고, 헤고. 뭔 숲 속을 엘프 다니듯 다니십니까. 히유우.”
 그랬다. 체력 약한(?) 제라드는 이 둘을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 힘에 부쳤던 것이다.
 결국 상당히 느린(?) 속도로 박 상병은 천천히 길을 뚫으며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 일병도 느긋하게 뒤따랐다.
 약 두 시간을 걸었지만 아직 부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지점이자, 박 상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이러다가 정말 정시 땡할 때 복귀하는 거 아냐?”
 “그래서 아침 일찍 서두르자고 했지 말입니다. 그래도 이 속도면 제시간에 복귀는 가능하지 말입니다.”
 “무슨······ 헉, 헉. 체력들이······. 헉, 헉. 몬스터 수준······. 헉, 헉. 입니까.”
 제라드는 녹초가 되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박 상병은 그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5분간 휴식. 사주경계 잘하고, 일단 여기서 쉬도록 한다.”
 제라드는 동물의 위장으로 만든 물통을 꺼내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이 일병도 박 상병과 함께 담배를 꺼내 물고서는 주변을 스윽 훑어보면서 말했다.
 “제라드 님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희들은 평소 절반 속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 한 시간 정도만 이동하면 저희 부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으니 참아 주시겠습니까?”
 “헉, 헉. 저······ 절반이라고요? 그럼 평소엔 얼마나 빨리 다닌다는 겁니까?”
 “뭐, 박 해뱀 혼자서 움직였다면 마을에서 부대까지 한 시간이면 주파 가능할 겁니다. 어쩌면 더 빨리 도착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하하.”
 제라드는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체력을 가진 두 사람이 은근히 무서워졌다.
 너무나 짧은 휴식이 끝나고 두 사람이 다시 일어나자, 제라드는 죽을 맛이었다.
 자신은 기껏해야 간단한 건량과 물통 하나, 몇몇 소지품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무거울 것 없는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뭔지 모를 이상한 쇳덩이부터 시작해서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평지 다니듯이, 아니 평지라도 저 정도로 빠르지는 않을 터인데 두 사람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숲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라드는 거의 뛰다시피 하니,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제라드는 산악전에 능하다는 레인저라 할지라도 이 정도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크와 싸울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박 상병 일행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부터 바닷바람 특유의 짠 냄새가 슬슬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고, 거의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저 앞 숲 속에서 두 명의 인영이 천천히 접근해 왔고, 그 모습이 박 상병 일행과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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