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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지만 괜찮아 1-1권

2017.07.10 조회 6,313 추천 52


 # 1
 
 “키에에엑······.”
 
 쿠웅.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몬스터 트롤이 구슬픈 비명을 마지막으로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자, 이제 우리 차례다. 서둘러 움직여!”
 “넵!”
 
 마지막 일격을 날린 헌터가 자리를 피하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일꾼들이 몬스터의 사체를 분리하기 위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거대한 사체가 조각조각 분리되어 냉동 처리가 된 상자들에 조심스럽게 담겼다.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담아. 실수로 흘리기라도 하는 녀석은 오늘 일당 없는 줄 알라고!”
 
 현장을 지휘하는 조장의 쓴 소리에 조심스럽게 핏물을 빼내고 있던 이들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일당 없다는 협박은 왜 한데?”
 “그러게 말이다.”
 “저거 협박 아니다.”
 
 툭 던진 내 말에 투덜거리던 녀석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헉! 진짜요?”
 “그래, 저번에 같이 나왔던 초보 일꾼들 둘이 혈액 팩 나르다가 놓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업계에서도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일감 구하느라 뭐 빠지게 돌아다닌다더라.”
 “헐, 대박. 그깟 핏물이 얼마나 한다고?”
 “그 핏물 가격이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더 나간다더라.”
 “그, 그렇군요.”
 
 던전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고참 격인 내가 던진 말이었기에 막 던전에 출입하기 시작한 신출내기들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새끼들 쫄기는······.’
 
 그런 녀석들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능숙한 손길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애초에 피 한 방울이라도 더 건지려고 그 육중한 몸을 넓은 비닐 위로 옮겼던 거라 작업하기는 수월했다.
 마지막 혈액 팩을 상자에 넣는 걸로 작업이 마무리됐다.
 
 “작업 끝! 모두 수고들 많았다.”
 “오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으헤~ 끝났다.”
 
 각자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는 이들의 얼굴이 제법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던전행은 사망자도 없었고, 수익도 제법 얻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마지막에 사냥에 성공한 트롤의 사체가 한몫했다.
 몬스터들 중에서도 특별히 포션 제조의 주재료로 사용되는 트롤이었기에 각자 배당대로 나눈다 해도 제법 괜찮은 액수가 통장으로 들어올 터였다.
 그래서인지 열흘이 넘도록 던전을 돌아다니느라 초췌하기 그지없었던 이들의 얼굴이 확 핀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몬스터의 사체와 부산물들은 모두 헌터 협회에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고생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하도록 하죠.”
 “네,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돌아가는 헌터의 등 뒤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뒤덮인 중년 사내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중급 헌터들 중에서도 제법 매너 좋기로 소문난 강철검 김찬혁은 일꾼들 중에서도 선호도가 매우 높은 고객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들고는 몸을 돌이켜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일꾼들을 향해 외쳤다.
 
 “뭘 그렇게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어? 가서 삼겹살에 쇠주나 한잔하자! 오늘은 내가 쏜다!”
 “오오오!!”
 
 그의 외침에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던전 안에서야 냉정하고 까칠한 조장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건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거라는 걸 모르는 일꾼들은 없었다.
 실제로 던전 내부에서 사냥 중에 헌터가 몸을 내빼기만 해도 일꾼들은 그 자리에서 죽은 목숨이었다.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은 하고 들어오는 편이었지만,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번처럼 헌터 혼자서 단일팀을 꾸려서 던전을 도는 경우는 배당금이 높은 대신에 그만큼 위험도가 높은 편이었다.
 강철검 김찬혁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기에 던전 안에서는 일꾼들 모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무사히 사냥을 마치고 나왔으니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시내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고깃집.
 연탄불 위에서 익어 가는 삼겹살의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아 글쎄, 이 새끼가 고블린이 코앞까지 칼 들고 달려드니까 오줌을 지리더라니까. 크하하하하.”
 “푸하하하.”
 “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 새끼 발뺌하는 거 보게나? 너 중간에 살짝 빠져서 바로 바지 갈아입고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헛! 그, 그걸 어떻게.”
 “네놈이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여봐라 저놈을 삼겹살로 매우 쳐라!”
 “매우 치랍신다~!”
 “예잉~”
 
 술이 거하게 들어가서 얼굴이 불콰해진 사내 둘이서 얼굴이 벌게진 사내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버둥거리는 그의 입안으로 주먹만 한 쌈을 만들어 우겨넣었다.
 
 “우웁! 웁! 웁!”
 “크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버둥거리는 사내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배를 잡고 웃는 일꾼들 사이로 지나가는 알바생들이 입을 가린 채 피식거렸다.
 나는 그들이 벌이는 촌극을 감상하며 제법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기름기 가득한 삼겹살의 풍미가 절정에 오른 순간 한잔 가득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 좋구나.”
 
 정말이지 이 맛에 사는 것 같았다. 이제야 내가 살아서 무사히 귀환했다는 사실이 믿겨졌다. 동기 녀석이 그런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거 같냐?”
 “뭐? 헌터 각성 검사?”
 “그래. 이번이 마지막 기회잖아. 다행히 제법 오랫동안 던전 내부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그러게 말이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헌터들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를 벗어날 텐데 말이지. 크~ 멋지지 않냐?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랑 맞짱 뜨는 모습.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새끼~ 폼 잡기는.”
 
 나는 강철검 김찬혁이 던전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을 흉내 내며 폼 잡고 있는 동기의 모습에 핀잔을 던졌다.
 그 어설픈 모습에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다보니 술잔에 비친 내 얼굴에 녀석과 같은 종류의 열망이 가득했다.
 
 ‘말해 뭐하냐. 결국 나도 같은 마음인걸.’
 
 헌터들을 도와 던전 내부를 드나들며 각종 허드렛일을 한 지도 어느덧 7년.
 던전 내부에 가득한 마나와 접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마나가 자연스럽게 몸에 축적되면서 헌터로서의 각성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게 되어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대부분 6-7년 정도를 각성할 수 있는 최종 한계로 보고 있었다.
 그 이상 넘어가면 각성하는 경우가 매우 희박했다. 개중에는 일꾼으로 던전을 드나든 지 10년 만에 각성한 사람도 있다고는 하는데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내가 그런 행운을 거머쥘 것 같진 않았다.
 작년에 검사했을 때도 실패했었기에, 매년마다 한 번씩 있는 헌터 각성 검사 중에서도 코앞까지 다가온 이번 검사가 어쩌면 내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젠 숫제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젓가락을 들고 몬스터 역할을 맡은 일꾼과 드잡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술잔을 털어 넣었다.
 
 “크~ 어째 오늘은 술이 더 쓰네.”
 
 ***
 
 과거 용산역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헌터 연합 본부.
 거대하기 그지없는 건물의 입구에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 뒤로 쉬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세 드넓은 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헐~ 일찍 왔는데도 사람 더럽게 많네?”
 “어젯밤부터 텐트 치고 기다린 사람들도 있단다.”
 “일찍 한다고 합격하는 것도 아닐 텐데.”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게 없을 테니까.”
 “하긴, 그러네.”
 
 함께 테스트 하러 온 동기 녀석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군데군데 낯이 익은 일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안 될 줄 알면서도 매년 테스트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테니 딱히 동정하는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그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일지라도 손에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우리 차례가 되었다.
 헌터 협회 건물 내부로 들어가 준비한 서류를 내고 접수를 마쳤다. 헌터 테스트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일종의 마력 구동 회로도 같은 곳에 올라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실제로도 일 인당 걸리는 시간은 채 3분을 넘기지 않았다.
 테스트가 진행되는 협회 내의 장소만 해도 눈에 보이는 것만 수백 개가 넘었다. 그러니 수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몰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세 우리 차례가 왔지, 그게 아니었다면 3박 4일은 꼬박 걸려도 모자랐을 터였다.
 
 “오세천 씨?”
 “네? 아. 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둥그렇게 표시된 자리에 가서 섰다.
 여기에 와서 서는 것도 벌써 일곱 번째.
 희미해도 좋으니 마력 구동 회로가 작동해서 빛을 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비, 빛난 건가?’
 “흐음······.”
 
 마력 회로에서는 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빛이 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스스로도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찰나지간 빛을 내다 사라진 마력 회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결과가 출력되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직원의 모습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의 입을 주시했다.
 
 “됐습니다. 다음 사람이요.”
 “에?”
 
 그의 말에 나는 멍한 얼굴로 바보같이 반문했다. 그런 내게 직원이 귀찮다는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오세천 씨는 보류 대상이라 정밀 판독이 필요합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저희 직원이 판정 결과 나오는 대로 알려드릴 겁니다.”
 “아······ 네.”
 
 왠지 모르게 허탈해진 나는 캔 커피 하나를 뽑아들고는 대기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나처럼 보류 판정을 받은 이들이 모여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류 판정 받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대부분 대기실 주변을 서성였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는 누군지도 모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연신 기도하기에 바빴다.
 대부분 나이들이 제법 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체로 나처럼 일꾼으로 일하며 던전을 들락날락거리던 사람들일 터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기실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우~”
 
 답답한 마음에 크게 숨을 쉬어 보지만 가슴에 무언가 묵직하게 얹힌 것 같은 느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여어~ 결과가 어땠기에 여기 앉아 있는 거야?”
 
 처음과 다름없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동기 녀석의 외침에 모두의 얼굴이 입구로 향했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내 곁에 앉은 녀석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분위기 왜 이러냐?”
 “몰라서 묻냐? 너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봐라.”
 “쩝, 그런가?”
 “너 결과는?”
 “똑같지 뭐.”
 “그래도 너는 몇 번 더 기회가 있으니······.”
 “그래서 그런가? 아주 절망적이거나 하진 않다야.”
 “그러냐?”
 “그래, 근데 어째 너는 똥줄이 바짝 타는 얼굴이다? 얼굴도 하얗게 질려가지고는.”
 “새끼, 지 일 아니라고 막 지껄여대네.”
 
 동기 녀석인 최요석은 던전에 들어가서 잡일들을 담당하는 일꾼 양성소, 소위 깡통 훈련원이라고 불리는데 같이 들어가서 수료는 했지만, 실제로 던전에서 일꾼으로 일한 건 나보다 3년이 늦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결과가 안 좋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밝았다. 나도 3년 전에는 저렇게 담담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여느 사람들 얼굴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나 보다 싶은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났다.
 그래도 친구라고 결과 나올 때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마음을 듬뿍 담아 녀석의 뒤통수를 갈겨주었다.
 
 따악.
 
 “아욱! 아 왜?!”
 “그냥 뒤통수가 얄밉게 생겨서.”
 “그, 그게 말이 되냐 지금?”
 “안 되면 말고.”
 “아씨~ 이게 진짜.”
 “왜? 꼽냐? 꼬우면 던전에 일찍 발을 디디던가?”
 “으윽.”
 
 분명 일꾼 양성소에서는 동기였지만, 던전에 발을 디딘 걸로 치면 내가 엄연히 녀석보다 3년이나 선배였다.
 일꾼 세계에서 3년이면 제대로 얼굴도 못 쳐다볼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3년간 죽지 않고 살아서 던전을 돌아다녔다는 건 그만큼의 경험과 능력이 몸 안에 쌓여 있다는 걸 뜻했으니까.
 실제로 던전 내부에서는 어지간한 초보 헌터들보다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일꾼들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제법 알아주는 헌터들도 베테랑 일꾼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는 걸 선호했다.
 물론 어설픈 헌터라도 일꾼일 때랑은 대우가 차원이 달랐기에 선택하라면 백이면 백 전부다 헌터가 되는 걸 택하겠지만······.
 그렇게 녀석과 아옹다옹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 보니 어느덧 하나둘씩 결과를 통보 받은 이들이 울고 웃으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희비가 엇갈리는 수많은 이들을 보며 나는 웃으며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오세천 씨?”
 “네, 여기요.”
 
 대기하던 이들의 수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때 즈음 나를 찾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과가 생각보다 미묘해서 판독하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지 간에 결과부터 알고 싶으실 테니 공식 결과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꿀꺽.
 
 그의 말에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댔다.
 
 “축하합니다. 정식으로 헌터 각성이 확인되셨습니다.”
 “에?”
 “우하하하, 세천아 축하한다. 너 헌터로 각성됐단다야! 이 새끼야. 하하하하.”
 “아하하······.”
 
 믿기 힘든 직원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마음껏 기뻐하고 있는 동기 녀석과 달리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가끔 드라마에서 보면 자기 볼을 꼬집어보곤 하던데, 이제야 왜 그러는 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야, 요석아.”
 “응? 왜?”
 “나 볼 좀 꼬집어 봐라.”
 “에? 이 새끼 보소. 평소랑 달리 엄청 어리바리하게 구네? 그래 이 형님이 아주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하게 깨닫게 해주마.”
 “에? 으아아아악!! 놔! 이거 안 놔 이 새끼야?”
 “푸하하하, 꼬집어 달라며? 오늘 내가 아주 볼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말테다. 푸헬헬헬헬.”
 “으아아악! 놓으라고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나는 한참 동안을 대기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 동기 녀석 말처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겨버렸다.
 
 ***
 
 헌터로의 각성.
 정식으로 협회의 인준을 받은 이들은 약 한 달 동안 헌터 협회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마력 증폭 마법진 위에 올라 이제 막 개화한 헌터로서의 능력을 자극해 헌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게 된다.
 각종 이론부터 능력의 구체적인 사용 방법까지 교육 과정은 제법 치밀했고, 또 매우 효율적이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구나.’
 
 줄기차게 이어지던 강의를 듣던 나는 모르던 사실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다.
 협회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거의 마칠 때 즈음 온전한 헌터로서의 능력이 개화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각기 특성에 맞는 능력들을 갖추게 된다니 그때야말로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었다.
 이 과정을 가리켜 통칭 전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전직을 통해 각자의 특성에 맞게 발전해나간다고 했으니 어떤 특징이 발현되는지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보통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헌터로 각성됐다고 인준 받는 협회에서의 테스트를 각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각성은 그 의미 자체가 달랐다.
 제법 흥미진진했던 강의 시간이 끝나고 정식 대련 시간이 찾아왔다. 구석에서 몸을 풀며 준비하고 있던 나는 우르르 몰려 있는 한 떼의 무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디가나 찾아보기 쉬운 전형적인 타입의 소인배와 그런 그의 곁에서 아부하느라 바쁜 인간 군상들.
 
 ‘대성기업 후계자라고 했던가?’
 
 가운데 서서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며 너스레를 떠는 사내는 다름 아닌 대성기업의 막내인 박찬영이었다.
 기업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던전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는 말답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제법 대단했다. 그 말은 곧 그만큼 많은 양의 마나를 몸에 축적했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런 그의 곁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잘 보여서 떨어지는 콩고물 하나라도 얻어 보려는 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콩고물이겠지만 받아먹는 입장에서는 목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행운일 테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은 이들을 관리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길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큭, 마치 너는 왜 안 오고 버티고 있느냐고 묻는 거 같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제외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의 곁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곁에 가서 몸을 의탁하고 평생 동안 주는 밥이나 먹어 가며 개처럼 사는 게 편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최고의 헌터가 되고 말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이때의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할지라도 일단 한번 도전은 해봐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준비 시간이 지난 뒤 일 대 일로 짝을 지어 펼쳐지는 대련 순서가 다가왔다.
 훈련생인 헌터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중앙에서 호명된 이들이 나와 각자의 능력을 가지고 맞붙는 나름의 자존심이 걸린, 훈련생 서열전 같은 느낌을 주는 대련이었다.
 이미 지난 일곱 번의 대련을 통해 암묵적인 서열이 정해진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서열 7위. 일꾼으로 7년 동안 던전을 누볐던 경험은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장 밑에서 시작했지만 그 덕분에 차근차근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완전하진 않았지만 헌터로 각성한 이후 꾸준히 발달한 신체 능력까지 더해지자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금은 과거에 비해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아까 폼 잡고 있었던 대성그룹 후계자의 순위는 나와 비슷한 6위.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유독 다른 이들에 비해 나를 많이 의식하는 편이었다.
 1위에서 5위까지는 이미 각 대형 길드의 후원을 받고 있는 유망주들이었기에 그에게 숙이고 들어올 필요를 못 느끼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다 보니 정작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이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박찬영, 오세천 두 사람 중앙으로!”
 “오오~”
 
 훈련관의 부름에 주변에 둘러앉은 훈련생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제법 격투 센스가 좋은 편인 박찬영은 길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상위 멤버들과 겨뤄도 그리 많이 밀리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와 밑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가며 순위를 올린 나와의 대련이 성사되자 그간 둘 중 누가 더 강한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이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몸을 풀며 중앙으로 다가오는 박찬영의 눈을 바라본 나는 피식 웃었다. 여유로운 몸짓과 달리 그의 눈은 잔뜩 긴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전직 전이었기에 대련은 전형적인 맨손 격투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련이지만 실전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던전 안에서는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과 직결되는 법이니까. 자, 준비 됐으면 시작!”
 “하압!”
 
 훈련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찬영이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그 의외의 모습에 구경하고 있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채 그의 근육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옆으로 피하며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터억!
 
 “쳇!”
 
 그 짧은 순간 다리를 들어 공격을 흘려보내려던 그가 미처 다 피하지 못해 발끝에 공격이 걸렸고 그로 인해 중심을 잃으며 잠시 휘청거렸다.
 기분이 나쁘다는 듯 혀를 차는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돌아간 나는 그대로 허리를 잡고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오오!”
 
 실로 깔끔한 테이크 다운.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타격기는 제법 훌륭한 편이었지만 그라운드 경험은 거의 없어 보였기에 시도한 공격이었는데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이익~ 이 새끼가 추잡하게!”
 
 일어나려고 용을 쓰며 얼굴이 벌게진 채로 소리 지르는 그를 향해 나는 그의 팔을 잡아 꺾는 걸로 응수했다.
 
 우두둑.
 
 마나로 인해 강화되고 세포 단위에서부터 변화를 일으킨 근육과 관절이 각도의 한계 이상으로 비틀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인대가 끊어지고 근육이 비틀렸을 상황이었건만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제법 버텨내고 있었다.
 
 ‘던전에서 살다시피 했다더니. 체내 마나 축적량이 보통이 아니네.’
 
 이대로 계속 비틀면 이길 게 분명하지만 왠지 이대로는 상대가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풀자 그가 이때다 싶어서 재빨리 몸을 돌려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돌아가 한 팔을 길게 뻗어 목을 감싸 안았다. 잘 들어가기만 하면 제 아무리 힘센 거한이라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목조르기에 그가 다급하게 내 팔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렸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을 만큼 완벽하게 밀착된 팔뚝으로 그의 목에서 펄떡대고 있는 혈관의 고동이 느껴졌다.
 발악에 가깝게 버둥대던 그의 몸짓이 서서히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손이 축 늘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까지 돌아간 채 실신해버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훈련관이 나서서 제지하기 직전 나는 팔을 풀어버렸다.
 
 “······!!”
 
 전혀 의외의 결과에 훈련장 내부가 정적에 휩싸였다. 늘 상대를 화려한 타격기로 압도하던 박찬영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결말.
 입가로 흘러나온 침과 반쯤 돌아가버린 눈. 그리고 괴로움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까지.
 그간 늘 여유로운 얼굴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이의 모습치고는 꽤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실신한 그의 상태를 살피던 훈련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을 불렀다.
 
 “그냥 기절한 것뿐이니까 가서 눕히도록, 곧 깨어날 테니.”
 
 그가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훈련관이 내게 다가왔다.
 
 “딱 죽기 직전까지만 목을 졸랐던데······ 격투기 경험이 있었나?”
 “없습니다.”
 “흐음, 그래? 아무튼 수고했다.”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간 그가 다음 대련자를 호명했다.
 잠시 동안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맹렬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두 훈련생으로 인해 금방 후끈 달아올랐다.
 자고로 구경 중에 제일 재미있는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라지 않은가?
 자리로 돌아와 긴장했던 근육을 이완시키며 편안하게 구경하고 있던 내게 공식 서열 4위인 사내가 다가와 앉았다.
 
 “제법이더군. 일꾼으로 7년 동안 활동했다고 했었나?”
 “그래.”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그런 내 모습에 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나중에 생각 있으면 피닉스 길드로 찾아와라. 너 정도면 금방 성장할 수 있을 테니.”
 “생각해보지.”
 “훗, 그래.”
 
 반골 기질을 타고나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나는 자신이 지닌 배경의 힘을 등에 업고 으스대는 부류는 질색이었다.
 솔직히 훈련관만 없었으면 목을 조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을지도 몰랐다.
 일꾼으로 일할 당시 갑질하던 헌터들의 모습에 자주 욱하던 나를 다독이던 조장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든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서 관철하려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힘이든 지간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곱지 않은 시선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오래 살려면 열심히 힘을 길러야겠어.’
 
 기절한 박찬영의 측근을 자처하는 이들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걸 가리켜 제대로 찍혔다고 해야 하려나?
 나는 조금 전 제안했던 피닉스 길드 소속 훈련생의 제안을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사건 이후로 박찬영은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패거리들이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내왔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나로서는 김빠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내 서열은 6위까지 올라갔다. 사실 그 이후로도 각 길드에서 밀어주는 다섯 명과도 겨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이번 훈련 기간 안에 좁혀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기술의 숙련도와 마나의 밀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실전을 통해 익힌 내 거친 움직임이 통하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수료할 시기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건 곧 전직의 시간이 가까웠다는 걸 의미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드넓은 훈련장 중앙에 그 과정을 보조해줄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마법진에 올라서면 각성 결과에 따라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각종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축하드립니다. 전사 계열로 각성하셨습니다.”
 “오오!!”
 
 마법진 위에선 채로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몸을 돌아보던 박찬영이 환호하고 있는 추종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현재 가장 각광받고 있는 클래스인 전사 계열은 입맛에 따라 공격과 방어의 비중을 달리 할 수도 있었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모두가 선호하는 계열이기도 했다.
 각자의 순서에 따라 마법진에 올라가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는 헌터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순서에 따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살짝 어루만지며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추, 축하드립니다. 힐러로 각성하셨습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축하 인사를 건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와 나 사이에 나타난 투명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이아 시스템에 접속하신 걸 환영합니다.]
 [힐러(Healer)로 전직하셨습니다.]
 
 [오세천 Lv.1]
 [클래스 : 힐러(Healer)]
 [근력 – 2 체력 - 2 지력 - 3 마력 - 3]
 [스킬 – ???]
 
 교육 받을 때 말로만 들었던 가이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된 기쁨도 잠시, 귀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웅성웅성
 
 격투 계열이라던가 마법 계열로의 각성을 내심 희망하고 있던 내게 들려온 힐러라는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일반적으로 헌터들 중에서 힐러로 각성하는 이들의 비율은 채 1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그만큼 희귀하고 찾아보기 힘든 계열이었기에 원래대로라면 남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헌터들의 던전 러쉬가 시작됐던 초기만 해도 각종 상처들을 치료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던 힐러들은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탁월한 치료 능력을 자랑하는 그들의 능력은 곧 던전에서의 사냥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던전에서의 사냥 시간이 늘어난다는 건 헌터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만큼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였고, 각종 업체들에게는 여러 부산물을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힐러로 자각한 헌터들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다른 헌터들에 비해 압도적인 지위를 자랑하며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이들의 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데에는 모 제약 회사에서 근무하던 이름 모를 연구원의 활약(?)이 있었다.
 몬스터의 피를 활용하던 연구를 하던 그가 회복 포션이라 불리는 포션 제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졸다가 실수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는 해도 그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는 곧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의 몸값을 올려가던 힐러들에게는 악몽이 되어 돌아왔다.
 포션은 대부분의 몬스터의 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상급의 포션은 트롤의 피가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보급형 일반 포션도 어지간한 상처쯤은 한두 시간 안에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었기에 헌터가 아닌 일꾼들도 한두 개쯤은 비상용으로 들고 다녔다.
 게다가 최상급 포션은 잘린 팔 다리도 이어 붙인다고 하니 점차 힐러보다는 포션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약 업체에서 보급형 포션의 생산에 성공한 뒤부터는 비용 부담까지 사라져버린 터라 아예 힐러들은 나설 자리를 찾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힐러라니······.
 주변을 돌아보자 사람들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여러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안타까움, 연민 등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박찬영이 패거리들을 거느린 채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제대로 좆댔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입맛이 썼다.
 
 ***
 
 [그동안 헌터 교육을 무사히 잘 마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쪼록 이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그럼 이만.]
 
 헌터 협회장의 인사말을 끝으로 지루했던 교육이 끝났다. 교육장을 벗어난 나는 내 손에 들린 헌터 자격증을 이리 저리 돌려보았다.
 
 ‘이게 헌터 자격증이구나.’
 
 그냥 은행에 맡기기만 해도 최소 10억 이상이 대출된다고 알려진 게 바로 이 헌터 자격증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각종 길드에서 나온 인사 관계자들이 각종 부스를 마련해 놓고 헌터들을 자신들의 길드로 영입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방송에 자주 이름을 비추던 명실 공히 국내 최고의 길드인 화랑 길드와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 백호 길드, 그리고 피닉스 길드가 가장 눈에 띄었다.
 역시나 최강의 길드들답게 가장 크고 화려한 부스를 가운데 차려놓고 목이 터져라 소리쳐대는 타 길드와 달리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제 발로 찾아오는 헌터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길드라······.’
 
 훈련소에 있을 당시 찾아올 것을 권유하던 피닉스 길드 소속의 헌터의 말이 생각났다.
 
 ‘신세 한 번 처량 맞네.’
 
 그때야 나름 가망성 있는 유망주였을지 몰라도, 힐러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나를 반기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 자립하지 못한 군소 길드 등에서나 포션 값을 아끼기 위한 용도 정도로 힐러들을 영입하는 정도였으니까.
 그 역할을 포션이 대체한 이상,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힐러는 그저 헌터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천덕꾸러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길드 가입을 종용하던 각 길드의 영입 담당자들의 눈빛이 내가 힐러로서 각성한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차갑게 변했다.
 이보다 더 현실을 자각시켜주는 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들 가운데 가득했다.
 쓰게 웃으며 시끌벅적한 광장을 벗어난 내 눈에 양손을 크게 흔들고 있는 동기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여~ 드디어 헌터님 등장이시오~!!”
 “푸하하하하.”
 “이젠 제법 폼이 나는데?”
 “그러게요 일꾼 특유의 꾀죄죄한 모습이 다 사라졌네요?”
 “뭐? 우리가 뭐가 꾀죄죄한데?”
 “아,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 새끼가.”
 “이크~!”
 
 티격태격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향해 다가가자 그들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오랜 시간 동안 던전을 들락거리며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아왔던 일꾼들이었다.
 이들을 만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내 긴장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기분.
 나는 헌터가 된 이후 처음으로 예전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
 
 “엑? 힐러라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동기 녀석이 내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따악!
 
 “아욱!”
 “앞에 봐라 새꺄. 죽으려면 혼자 곱게 가라고.”
 “우씨~”
 “우씨?”
 “아, 아닙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조장이 그의 뒤통수를 휘갈기고는 한마디 건넸다.
 
 “힐러라고 해서 아주 길이 없는 건 아니라더라. 벌써부터 낙심하긴 이르다.”
 “네. 그렇죠.”
 
 그의 무뚝뚝한 말에서 투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그의 말처럼 힐러라고 해서 아예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그 성장 속도가 형편없이 느리기도 하고, 찾는 곳이 없어서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나는 피식 웃으며 창문을 살짝 열었다.
 
 ‘언제부터 헌터였다고······ 아서라 배부른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일꾼이었던 얼마 전에 비하면 나는 쉽게 잡기 힘든 기회를 잡은 행운아임에 분명했다.
 막말로 이 차에 타고 있는 이들 모두 헌터가 되는 것이 인생 제일의 목표인 자들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나를 격려한 조장은 그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다시는 헌터가 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고.
 그들과 함께 익숙한 고깃집에서 밤늦게까지 축하를 빙자한 술판을 벌인 뒤 집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구나.’
 
 그렇게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몸에 가해진 부담도 전혀 없었다.
 힐러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헌터들이 가지는 탁월한 신체 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힐러들의 성장 기반이 몬스터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성장하는 그것들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게 문제일 뿐.
 물론, 조장이 말했던 것처럼 힐의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 힐 하나만으로 기적의 치료사라는 명칭을 얻어낸 상위 랭크의 헌터가 있었다. 비록 화랑 길드라는 절대적인 배경의 도움을 통해 성장하긴 했지만······.
 던전 보스를 상대하는 거대 공격대에 합류했던 그가 발하는 광역 힐 한 번에 백여 명에 이르는 헌터들이 단번에 모든 상태 이상과 상처가 치료되는 광경은 여전히 헌터 관련 사이트에서 조회수 상위권을 달리고 있을 만큼 유명했다.
 
 ‘앞으로 어떻게 한다?’
 
 나에게는 그처럼 강력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처음부터 포기 하고 낙심하는 건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힐러로 각성한 이들의 하소연이 대부분이고 정보라고 나와 있는 건 그들이 보통 가는 뻔한 길들 뿐. 그 외에는 참고할 만한 방법들이 없었다.
 
 ‘아우~ 모르겠다. 일단 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습관처럼 짐을 챙기다 말고 쓰게 웃었다.
 
 ‘습관이 무섭긴 무섭네.’
 
 일꾼으로 던전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비들의 숫자는 꽤나 많았다.
 냉병기가 아닌 현대식 무기 같은 경우는 국가가 관리하는 창고에서 가져가면 되지만 그 밖의 개인 장비 같은 경우는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꾼들의 관점에서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는 헌터 협회에서 기본적으로 지급하는 강화 슈트를 착용한 뒤 집을 나섰다. 언제나 양손에 묵직한 짐 가방을 들고 던전으로 향하던 때에 비하면 지나치게 간출한 차림이었다.
 던전으로 가기 전에 먼저 들릴 곳이 있었다. 내게 맞는 스킬을 구입하기 위해 헌터 지원 센터로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나를 안내했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스킬을 좀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전직하신 클래스가 어떻게 되시는지?”
 “힐러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보여준 그의 굳은 얼굴에 새삼 착찹한 기분이 몰려왔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그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힐러들을 위한 스킬을 취급하는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사람들이 찾질 않았는지 다른 곳에 비해 지저분한 매장 내부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담당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엎어진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큼큼······ 원래 이렇진 않은데······.”
 
 헛기침을 하며 점원을 깨우자 화들짝 놀라 일어선 그가 입가로 길게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내며 멍한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어, 어서 오십시오. 특별히 찾으시는 스킬이?”
 “기본 스킬들을 전부 구매하려고 합니다.”
 “아? 그래요? 이번에 힐러로 전직하셨나보네요? 요즘 그런 사람 찾기 힘들던데.”
 
 그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 서 있던 안내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 그와 달리 이곳을 담당하는 직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가 찾는 스킬이 담긴 보석들을 가져왔다.
 
 “어디 보자······ 제일 기본인 힐(Heal)하고, 헤이스트(Haste)랑, 디스펠(Dispel)도 있고······ 멀티 힐(Multi-Heal)도 필요하세요?”
 “네, 전부 주세요.”
 “화끈하시네요. 헤헷.”
 
 간만의 고객이었는지 한껏 기분 좋아진 얼굴을 한 채 매장을 한 바퀴 더 돌아온 그가 보석들을 내 앞에 진열했다.
 
 “전부 해서 1억 5천만원입니다.”
 “······카드 되죠?”
 “물론이죠.”
 
 내가 내민 헌터증을 받아 든 그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결제를 진행했다. 아! 물론 헌터증은 기본적으로 신용카드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헌터라는 직업은 그 어떤 직종들 보다 고소득을 올리는 유망 직종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마법사 클래스에 속해 있는 힐러였기에, 모든 마법사 클래스들이 가지는 헤이스트와 디스펠 마법을 포함한 힐러 전용 스킬까지. 전부 4가지 스킬을 구매하는 데만도 1억 5천이라는 엄청난 돈이 사라졌다. 물론 이 돈은 헌터라는 직업의 특성상 금세 메워졌다.
 그가 건넨 보석을 들고 살피던 나는 이를 강하게 거머쥐었다. 그러자 단단해 보이던 보석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깨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것을 신호로 헌터 네트워크라 불리는 속칭 가이아 시스템의 알림음이 머릿속에서 울러 퍼졌다.
 
 [가이아 시스템에 접속하신 걸 환영합니다.]
 
 [첫 스킬을 등록하신 기념으로 스텟 1을 선물로 드립니다.]
 
 [오세천 Lv.1]
 [클래스 : 힐러(Healer)]
 [근력 – 2 체력 - 2 지력 - 3 마력 - 3]
 [스킬 – 힐(Heal) Lv.1, 멀티 힐(Multi-Heal) Lv.1 헤이스트(Haste) Lv.1, 디스펠(Dispel) Lv.1]
 
 그 누구도 그 기원을 알 수도 없고 그 운영에 대해 파악할 수조차 없는 가이아 시스템은 던전이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처음 헌터로 각성한 최초의 각성자 칼 만하임의 말에 따르면 가이아 시스템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하는데, 그가 접속한 당시나 지금이나 가이아 시스템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한다.
 마치 초월적인 존재인 무언가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가이아 시스템.
 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수많은 헌터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화해 왔다고······ 들 말하던데, 솔직히 그들도 정확히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치 현대의 누군가가 작정하고 개입한 것처럼 게임의 그것을 쏙 빼닮은 가이아 시스템. 그것이 게임의 시스템과 다른 점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스킬을 배운 즉시 이 모든 것들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몸을 감싸고 돌던 황금빛 알갱이들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힐의 부가 효과로 인해 몸에 가벼운 활력이 맴돌았다.
 
 ‘꽤 기분이 좋구나.’
 
 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점원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몸을 돌렸다.
 
 “혹시, 무기는 필요 없으세요?”
 
 그의 말은 돌아 나가려던 나의 발걸음을 다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은 얄미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실 오리하르콘 소재로 만들어진 무기 치고는 엄청 헐값인거죠. 미스릴 코팅까지 되어 있어서 마력 전도율도 엄청 높고요. 다만 힐러 전용이라는 제약 때문에 외면 받고 있는 것뿐이지······.”
 
 나는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가 조금 전 꺼내온 힐러 전용 스태프를 살펴보았다. 그의 말처럼 통째로 오리하르콘으로 주조된 그것은 미스릴 코팅 때문인지 은은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위에는 마법사 전용 스태프답게 마력을 증폭하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그 끝은 마치 창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스태프라기보다는 단창과 흡사했다. 점원이 건네는 감정 스크롤을 통해 물품 감정을 하자 곧바로 눈앞에 아이템에 대한 내용들이 떠올랐다.
 
 [카르할의 홀(Scepter of Karhal)]
 [등급 : 유니크(Unique)]
 [내구도 : 무한] [마법 공격력 : 7+9]
 [힐러(Healer) 전용]
 
 [대신관인 카르할이 애용했던 스태프]
 
 [드워프 장인들 중 하나인 벨하우엔이 카르할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만들었다. 한 번 모양을 갖추면 영원히 그 형태를 유지하는 특징을 가진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미스릴을 입힘으로서 마력 전도율을 100%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부가 효과 : 마력 증폭 9%, 내구도 무한]
 
 ‘제법 괜찮은데?’
 
 이렇게 좋은 물품인데도 불구하고 팔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등급 바로 밑에 삽입되어 있는 문구 ‘힐러 전용’ 때문이었다. 힐러가 아닌 이들에게는 그저 단단한 몽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물건.
 게다가 딸린 부가 효과들 중 힐러에게 유용한 게 마력 증폭 하나밖에 없으니 힐러들 입장에서도 선 듯 구입하기가 꺼려지는 물건이었다.
 
 ‘9억이라······.’
 
 지금 내 수준에서는 비싸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 물건이었다. 고민은 길었지만 이미 마음은 사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안녕히 가십시요! 언제든지 또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국 헌터 자격증을 발급 받자마자 최대한도로 대출을 받고 말았다. 한 번에 10억이 넘는 금액을 팔아치운 탓인지 점원이 문 앞까지 마중 나와 90도 각도로 몸을 숙여가며 소리쳤다. 피식 웃은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계산을 마치고 스킬을 몸에 익히고 난 뒤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차를 몰고 던전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여~ 우리 헌터님 오셨네.”
 너스레를 떨며 나를 반긴 동기 녀석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온 걸 보니까 진짜 실감이 나는구나야. 이게 대륙의 실수라고 불린다는 그 강화 슈트인가 보구나?”
 
 헌터 협회에서 기본적으로 지급하는 슈트는 어지간한 상위권에 올라 특별한 아이템을 손에 넣은 헌터가 아닌 이상은 꽤나 오랫동안 애용하는 방어구였다.
 이 슈트는 동기 녀석의 말처럼 대륙의 실수라고 불릴 만큼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 본토에 본부를 둔 사오미라는 군수 복합 업체에서 만들어낸 이 방어구는 헌터가 지닌 고유의 마나와 공명을 이루며 그 주인과 함께 무한히 성장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기본 방어력조차 30이라는 제법 준수한 수치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이야 처음 입었으니 검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이 슈트는 각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색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신기하다는 듯 바싹 달라붙어 슈트를 더듬거리는 동기 녀석의 얼굴을 밀어내며 조장을 향해 다가갔다.
 
 “어서 와라. 근데 정말 괜찮겠냐? 우리랑 같이 활동하는 것 말이다.”
 “이제 와서 왜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헌터가 됐다고 바로 입 싹 닫고 다른 데로 갈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럼 섭섭하죠.”
 “훗, 그럼 됐고.”
 “아무렴요.”
 “아무리 자주 들락거리던 던전이라고 해도 일꾼일 때와 헌터일 때는 마주하는 광경 자체가 달라진다. 그러니 긴장놓지 말도록 해.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음. 그래.”
 
 그의 말처럼 내 첫 던전행은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이건 일꾼일 때부터 수없이 다짐했던 일이기도 했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 혼자 잘되고 저들을 나 몰라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특별한 후원 기업이 없어서 그렇지 조장이 이끄는 이들은 제법 노련한 팀이었다. 그건 내가 함께 해봤기에 충분히 신뢰할 만한 사실이었다.
 노련한 일꾼들답게 지난밤 늦게까지 가진 술자리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짐을 챙기고 있는 사이에 던전 출입 관리소로 다가간 나는 헌터증을 내밀었다.
 
 “오세천 씨?”
 “네, 맞습니다.”
 “이번이 헌터로서는 첫 던전행이시네요?”
 “네.”
 “행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일꾼으로서 드나들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당당하게 헌터로서 던전 내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미 안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헌터증을 살핀 그가 이를 돌려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환대에 맞춰 마주 웃은 나는 뒤따르는 일꾼들과 함께 던전 내부로 들어갔다.
 평소 일꾼으로서 던전을 수도 없이 들락날락거렸던 세천을 알아본 던전 관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료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뭐해? 멍하니 서 가지고.”
 “방금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요?”
 “응? 뭐가? 일꾼이 헌터로 돌아온 거 처음 보냐? 뭐~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있는 일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던전 입구 색이 조금 변한 것 같았는데······.”
 “너 어제 먹은 술이 아직 덜 깬 거 아니냐? 정신 차려. 던전 입구 색이 변한다는 게 말이 되냐?”
 “하긴, 그렇죠?”
 “새끼~ 가자. 내가 커피 쏜다.”
 “헤헤헤헤, 저는 달달한 마끼아또 먹겠습니다.”
 “새끼~ 꼭 먹어도 비싼 것만 처먹어요.”
 
 앞서가는 선임의 뒤를 따르던 사내가 헤실거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색이 변한 것 같았는데······ 진짜 술이 덜 깼나.’
 “안 오냐?”
 “네? 네! 갑니다, 가요.”
 
 상념을 날려버린 그가 선임의 뒤를 따라 근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
 
 멀리서 차량에 앉은 채 망원 렌즈를 통해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사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들어갔습니다.”
 “구성은?”
 “헌터 하나에 일꾼 다섯으로 구성된 기본 구성입니다.”
 “그래? 알았다. 흔적이 남지 않게 잘 마무리하도록.”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그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그들이 방금 들어간 던전이 A급 던전이었다는 걸 알아챌 사람은 적어도 이 주변에 없으니까요.”
 “그래.”
 
 전화기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차 밖으로 걸쭉한 가래를 뱉었다.
 
 “어린 새끼가······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시파.”
 
 잠시 투덜거리던 그가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개구리가 동굴로 들어갔다. 티 안 나게 확실히 처리해. 그래. 수고해라.”
 
 그가 전화를 끊고 난 뒤, 던전의 입구에서 작은 일렁임이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고위급 헌터들 중에서도 마법에 능한 이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공간전이 마법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 짧은 순간, C급 던전으로 연결되던 통로가 잠시 A급 던전으로 이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던전 안으로 입장한 일행은 오세천과 일꾼 다섯이 전부였다.
 던전 출입 관리소의 기록상에는 [헌터 오세천 이하 일꾼 다섯 C급 던전 진입]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
 
 후욱~!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끈적끈적한 마나의 기운.
 이것이야말로 이곳이 바깥 세상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던전임을 알게 해주는 명확한 증거였다.
 
 “후아~ 매번 경험하는 거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통로를 빠져나온 동기 녀석이 깊은 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저들은 못 느끼는 건가?’
 
 헌터로서의 내 위치와 저들과의 간극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바깥 세상에 비해 몇 배는 더 짙은 마나의 향기가 폐부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비로소 잠자고 있던 몸이 깨어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짙은 마나는 헌터인 내게는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는 생명의 근원이었지만 일반인에게는 그저 숨쉬기 힘들게 만드는 악조건일 뿐이었다.
 마나를 통해 보다 큰 능력을 발현해내느냐 아니면 그 힘에 눌려 불편해지느냐 이것이 바로 일반인들과 헌터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였다.
 그들이 불편해하는 만큼 나는 충만한 마나가 전해주는 생명력을 느끼며 가슴을 활짝 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어,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투웅.
 
 가볍게 땅을 박차자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헌터 각성 이후 일반인에 비해 수 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은 바로 이곳 던전 내부에서 발현된다.
 
 ‘생각보다 짜릿한데?’
 
 이론으로 충분히 숙지했던 사항이었지만, 헌터가 된 이후 처음 맛보는 짜릿한 경험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크르르르······.”
 
 그렇게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움직이던 나는 귀를 간질이는 적의 어린 소리에 멈춰 섰다.
 
 ‘블랙 티거.’
 
 황소만 한 덩치를 자랑하는 검은 털로 온몸을 감싼 맹수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곳 던전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 몬스터이자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바로 저 녀석이었다.
 특별히 강력한 개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던전의 난이도가 C급으로 책정된 데에는 저 녀석의 공이 컸다.
 어지간한 C급 던전에는 보통 B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들이 간간히 존재하는 거에 비하면 특별한 위험은 없는 곳이었지만, 저 녀석을 상대로는 작은 방심도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었다.
 
 ‘어찌한다?’
 
 나는 등에 사선으로 매어놓은 스태프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가져가며 고민했다.
 느껴지는 감각은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하지만 저 녀석을 상대하는 와중에 다른 녀석이 난입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직 모험은 이르다.’
 
 나는 계속 주변을 서성거리며 나를 견제하고 있는 녀석을 쏘아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녀석도 내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는지 달려들거나 하진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는 왔던 길로 돌아가자 어느덧 제법 봐줄 만한 베이스 기지를 구축한 조장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와 헌터로서 처음 던전을 돌아본 소감이 어때?”
 “확실히 다르네요.”
 “크하하하······ 엄청나게 호들갑 떨어대는 헌터들은 내가 많이 봤는데 너는 어째 반응이 그러냐?”
 “그래야 하나요?”
 “네가 그러면 또 그것대로 볼만하겠지.”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사냥은 10분 후에 출발할 수 있겠다.”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조장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난 뒤에 말을 이었다.
 
 “세천아.”
 “네.”
 “네 녀석과 함께 던전에 올 수 있어서 기쁘다.”
 “저도요.”
 “그래, 그럼 준비되면 말해라.”
 “네.”
 
 나는 뒤돌아서 걸어가는 조장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나와 함께 던전에 오기 위해 제법 괜찮은 일감을 포기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어떻게 보답할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의 호의에 답하는 가장 좋은 길은 내가 성장하는 것이었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저들을 데리고 더 나은 곳에서 사냥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만큼 저들이 얻게 되는 이익은 증대될 테니까.
 
 “좋았어! 한번 해보자고!”
 
 나는 마나로 가득 차 티 없이 맑고 푸르른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래, 힐러면 어떠냐.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
 
 “우측 엄호해.”
 “네!”
 “클레이모어 격발!”
 “격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수많은 베어링 구슬이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블랙 티거를 향해 날아갔다.
 
 “크허허헝!!”
 
 강력하기 그지없는 녀석의 가죽은 이 모든 공격들을 대부분 막아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운동 에너지만큼은 피해낼 수 없었다.
 그들이 벌어준 기회를 틈타 괴로움에 울부짖는 녀석의 등 위로 올라탄 나는 곧바로 스태프를 곧추 세워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제법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스태프의 끝이 마치 단창처럼 수직으로 파고들었다. 어째 스태프 본연의 기능보다 다른 기능으로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았기에 조금 입맛이 썼다.
 
 푸욱!
 
 현재 내가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태반을 스태프 하나에 담았다. 마력 전도율이 좋은 덕분에 최대한 얇고 날카롭게 벼려진 마력의 도움으로 제법 긴 자루 부분이 깊숙하게 목덜미로 틀어박혔다.
 
 가각.
 
 스태프 끝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두터운 목뼈가 진로를 방해했다. 그 즉시 스태프에 체중을 실은 나는 마치 깡통 뚜껑을 따듯이 녀석의 목을 타고 한 바퀴 길게 돌았다.
 
 “크허헝!!”
 
 몸집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양의 핏물을 뿜어낸 녀석이 그 이후 계속된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녀석의 목 줄기를 깊게 베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들썩거리던 뱃가죽이 잠잠해졌다.
 
 “사냥 종료! 모두 조정간 안전으로!”
 
 조장의 외침에 일꾼들이 각자 들고 있던 무기를 거두고는 블랙 티거를 향해 다가왔다.
 
 “휘유~ 엄청 크네요? 원래 이 녀석이 이렇게 컸었나요?”
 “흐음······ 가끔 변종들도 있으니까.”
 “그러기엔 지금까지 마주친 애들이 너무 큰데요?”
 “······.”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체 작업에 투입된 최요석의 말이 이상하게 거슬리는 조장이었다. 그의 말처럼 지금까지 만난 블랙 티거들의 몸체가 지나치게 컸다.
 저 정도 크기의 녀석을 보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아주 가끔 마주칠 정도였지 이렇게 매번 만나는 녀석마다 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오랜 던전 생활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감이 뭔가 잘못됐다고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냐?’
 
 마력의 흐름으로 인해 시시각각 변하는 던전 내부의 하늘이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
 
 “피, 피해!”
 “으윽! 젠장! 대체 저 많은 녀석들이 어디서 몰려오는 거야?!”
 “클레이 모어 격발해!”
 “저, 전부요?”
 “지금 그거 따질 때냐? 가진 모든 화력 다 퍼부어! 뒤지고 싶지 않으면!”
 
 베이스캠프까지 몰린 일행들은 캠프 방어를 위해 원형으로 빼곡하게 매설해 놓은 폭탄들을 쉴 새 없이 격발시켰다.
 그 엄청난 폭발로 인해 미친 듯이 달려들던 블랙 티거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으, 으아아아! 오, 오지 마!”
 
 그 혼란의 와중에 연기를 뚫고 난입한 블랙 티거 한 녀석이 일행들 중 가장 어린 녀석의 다리를 물고 몸을 흔들었다.
 
 “쳇!”
 
 나는 그 즉시 전면에 수류탄 두 개를 까서 던진 뒤 뒤로 몸을 날렸다.
 
 “힐! 힐! 힐!”
 
 연거푸 세 번의 힐을 시전하자 묵직하게 가득 들어차 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너덜거리던 그의 발이 급격하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힐을 시전하며 동시에 몸을 날린 나는 힐이 시전되면서 동시에 발현되는 눈부신 빛에 노출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블랙 티거의 옆구리에 스태프를 찔러 넣었다.
 
 우드득.
 
 녀석의 질긴 근육과 힘줄이 스태프가 파고드는 힘에 저항했다. 우격다짐으로 이를 쑤셔 넣은 나는 녀석이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틈을 타 쓰러져 있는 막내를 구해냈다.
 
 “으으으윽!! 내, 내 다리!”
 “힐!”
 
 다시 한 번 힐을 시전하며 녀석의 품을 뒤져 하급 포션을 찾아냈다. 곧바로 이를 녀석의 상처에 붓고 나머지를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고통으로 인해 녀석은 곧바로 혼절하고 말았다.
 비록 하급 포션에 불과하지만 내 힐과 중첩돼서 그런지 녀석의 고통스러워하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으아아아아! 이 새끼들이 어딜 자꾸!”
 “전부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뭉친다! 어서!”
 “어? 저, 저건 또 뭐야?”
 “헉!!”
 
 상처투성이인 일행들을 향해 멀티 힐을 시전한 나는 놀라 외치는 동기 녀석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몬스터가 거대한 나무를 부러뜨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우거?”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녀석의 모습은 몬스터 도감에 등재된 동영상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게 왜 여기에?’
 
 오우거는 기본적인 등급 자체가 A급으로 분류되는 상위 포식자였다. 그렇기에 녀석을 만나려면 적어도 B급 이상의 던전으로 가야했다.
 C급 던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몬스터는 B급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녀석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신경질적으로 분질러버린 녀석이 주변에서 날뛰는 블랙 티거들을 붙잡아 순식간에 찢어발겼다. 그러고는 양손에 들린 녀석들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댔다.
 이제 보니 블랙 티거들이 단체로 미쳐 날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위 포식자인 오우거 녀석의 등장 때문에 놈들도 자신들의 군락지에서 도망치듯이 우리가 자리를 잡은 베이스캠프로 몰려든 것이었다.
 수가 제법 많긴 했지만 블랙 티거뿐이라면 미리 매설해 놓은 폭약과 무기들이 충분했기에 힘겹더라도 물리칠 순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오우거라면?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몰살이었다.
 우리가 지닌 모든 화력을 한곳에 퍼부어도 녀석은 하품이나 하며 우리를 하나하나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적어도 내가 본 영상에 나온 녀석은 대전차 미사일도 거뜬히 버텨낼 정도로 터프했다.
 나는 멀티 힐의 여운이 아직 맴돌고 있는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잿빛 절망의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던전을 빠져나가려면 적어도 하루 정도는 더 지나야 했다. 던전에 입장하면 최소한 삼일은 그 안에서 버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빠져나갈 수 있는 포탈이 열렸다.
 고민은 짧았다.
 사태를 파악하고, 그 가운데 일행들의 생존이 가능한 가장 높은 확률을 지닌 선택지를 골랐다.
 
 “헤이스트(Haste).”
 
 내 몸에 가속 마법을 건 나는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뒤로 한 채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단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할 경우 뒤늦게 찾아오는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더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바로 헤이스트였다.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앞뒤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순식간에 오우거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놈은 주변에서 날뛰는 블랙 티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찢어 발겨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 식사에 여념이 없는 녀석의 사각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날려 녀석의 오금을 길게 베어냈다.
 
 가가각!
 
 남은 마력을 모조리 스태프에 실어 휘둘렀음에도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 봐도 질긴 가죽에 막혀 제대로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식사를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분개한 녀석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포효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아!!”
 
 덜덜덜덜.
 
 바닥에 내려선 나는 녀석의 포효에 실린 상위 포식자 특유의 피어(Fear)에 짓눌려 덜덜 떨어댔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날뛰던 블랙 티거 무리들과 저만치 떨어져 있던 일행들까지 포함해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마치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듯 땅에 고개를 처박은 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누, 눌리면 안 돼!’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내 몸에 힐을 시전한 나는 힐이 반복될수록 조금씩 몸의 움직임이 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 조금만 더.’
 
 마력이 거의 바닥을 칠 정도로 힐을 남발하고 나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 상태 이상에 저항했습니다.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인간을 비롯한 몬스터들까지 모두가 바닥에 몸을 조아린 채 닥쳐올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
 유일하게 그 공포에서 벗어난 나는 홀로 오롯이 선 채로 존재감을 만방에 과시하고 있는 녀석에게 달려갔다.
 
 ‘주의를 끌어야 저들이 살 수 있어.’
 
 녀석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매달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래서 스태프를 거꾸로 든 채 녀석의 두터운 발가락을 내리찍었다.
 
 텅!
 
 무슨 두껍게 쌓인 가죽 더미를 쑤신 것 같은 반발력이 느껴졌다. 그 작은 충격에 녀석은 늘어지게 하품하는 걸로 화답했다.
 “쳇!”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될 때까지 반복했다.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딱 거기까지가 적정 수준이었다. 그 반복되는 자극이 신경을 건드렸는지 드디어 녀석의 고개가 밑으로 향했다.
 
 “크륵?”
 
 그동안 서서히 차오른 마력은 딱 힐을 한 번 할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힐!”
 
 밑을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 바로 앞. 그 빈 공간에 힐을 시전 했다. 과도하게 밀집된 마력으로 인해 뒤틀리던 공간이 한껏 응축됐다가 밝은 빛과 함께 팽창했다.
 
 “크아!!”
 
 눈 바로 앞에서 터져 나온 눈부신 빛에 녀석이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됐어!’
 
 나로서도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지만, 생각보다 잘 통했다. 녀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녀석이 나타났던 숲을 향해 내달렸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상대를 절대로 그냥 놓아 보내는 법이 없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던 어느 헌터의 공략글처럼 녀석은 시력이 회복되자마자 나를 뒤쫓았다. 순식간에 내 위치를 찾아내는 걸 보면 후각이 개보다 더 발달했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믿을 만하네?’
 
 헌터 협회에서 관리하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알아낸 정보들의 대부분이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사이트의 이곳저곳 뒤적거리길 잘했다는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둔해 보이던 녀석이 어느새 지척까지 바짝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크오오오오!”
 “이크!”
 
 빽빽하게 자리한 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내달리는 나와 달리 녀석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숴가며 달려왔다.
 어지간한 어른 허리만 한 굵기의 나무들이 마치 수수깡처럼 우수수 부러져 나갔다.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녀석의 힘에 가늘게 몸이 떨려왔다.
 
 ‘사, 살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헌터가 돼서 처음 진입한 던전에서 죽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것도 7년이나 일꾼으로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겨우 얻어낸 찬스인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모로 쓰러지는 나무를 피하며 이를 악다문 나는 생각할 에너지까지 아껴가며 녀석을 피해 죽도록 달렸다.
 
 ***
 
 “힐!”
 
 이제는 하도 시전해서 눈을 감고도 그 마력의 유동을 세세하게 느낄 정도였다.
 손바닥에 몰려든 마력이 부러진 갈비뼈 주변으로 스며들었다.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퍼부은 힐 덕분에 부러진 갈비뼈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다.
 ‘가만, 이럴 때 쓰는 속담이 아니던가?’
 
 아무튼 덕분에 숨 쉬는 게 조금은 편해졌다.
 
 일행을 살리기 위해 오우거를 뒤에 달고 도주를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지독한 녀석은 포기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우거는 그 무식한 생김새와 달리 매우 집요하고 끈질긴 사냥꾼이었다.
 일부러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도주했던 나는 일행들이 처음 들어와서 마련했던 베이스캠프가 비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바닥에 박혀 있던 철판에 못으로 긁어 남긴 글로 봐서는 어렵긴 했지만 모두 무사히 던전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 같았다.
 던전은 한 번 들어온 이상 출구가 열리길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탈출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니면 던전의 보스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를 잡고 던전 자체를 클리어 하던가.
 오우거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에 두 번째 방법으로 탈출할 수는 없을 테니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출구를 찾아야만 나갈 수 있었다.
 그보다 먼저 저 지긋지긋한 사냥꾼으로부터 벗어나야 출구를 찾든지 말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연찮게 발견한 이 동굴은 다행히 강줄기를 따라 뻗어나간 여러 지류들 중 하나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장난 아니게 성능이 좋은 코를 가진 녀석도 쉽게 나를 찾아내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몬스터들이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앉은 채 쥐 죽은 듯이 처박혀 있는 걸 보면 이 근처에서 나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득.
 
 나는 동굴에 서식하는 박쥐를 닮은 이름 모를 몬스터를 생으로 뜯으며 다음 행보를 고민했다. 역한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훅 하고 밀려들어 왔지만 그건 가벼운 힐 한 번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었다.
 도망 다니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힐 마법에는 다양한 부속 효과가 내재되어 있었다.
 일단 상한 물이나 음식 같은 걸 정화해주기도 했고, 먹을 걸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거나 하는 고통에도 상당히 효과가 좋았다.
 사실 던전 내부에서 자라는 과일이나 몬스터들은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마력을 머금고 있어서 그리 추천할 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들어올 때 한 달치 식량을 가지고 들어온 거였는데······ 다시 돌아가서 살펴본 베이스캠프는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였고, 박스에 가득했던 음식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무심코 베어 물었던 이름 모를 과일 때문에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을 때라던지, 아니면 먹을 물이 없어서 딱 봐도 깨끗해 보이지 않는 물을 마셨어야 했을 때라던지. 이렇듯 곤란했던 상황마다 힐 마법이 제 몫을 톡톡히 해주었다.
 지금처럼 불을 피우지 못해 생으로 몬스터를 씹어 먹어야 할 경우도 미리 힐을 시전한 다음에 먹으면 아무런 탈 없이 소화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우리가 들어온 던전은 C급이었다. C급 던전에 오우거가 출연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통 C급 던전의 보스가 B급 몬스터 정도라는 걸 감안해보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잘못된 건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일행들이 던전을 빠져나갔으니 지금 사태에 대해 신고를 했을 테고, 아무리 내가 이제 막 헌터로서 자각한 초보 헌터라고는 해도 진상 조사를 위해 팀을 파견할 게 분명했다.
 아무렴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녀석을 유인해서 던전 중심부로 뛰어들었을까. 그나마 경우의 수 중에서 이게 가장 생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내 생각보다 저 녀석이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찌됐든, 나는 구조팀이 도달할 때까지만 잘 버티면 살아나갈 수 있었다.
 
 ‘좋았어! 살 수 있어 오세천! 아자아자!’
 
 나는 녀석에게 들리기라도 할까봐 말없이 두 팔을 높이 뻗어가며 속으로 외쳤다.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격려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나는 지쳐 있었다.
 
 ‘근데 구출대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찾아낼 수 있으려나?’
 
 그렇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구심에 살짝 마음이 기울 때 즈음 이제는 하도 들어서 익숙한 울림이 들려왔다.
 
 “크르······.”
 ‘스벌, 빨리도 왔네.’
 
 녀석의 낮은 목 울림과 동시에 역겨운 노린내가 동굴 안으로 훅 밀려들어 왔다. 어느덧 이 근처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나는 반쯤 뜯어먹다 남은 걸 마저 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추격전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미리 힐을 시전해서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장 기본적인 스킬인 힐은 그 다양한 효과에 비해 비교적 적은 마나를 소모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즉에 탈진해서 녀석의 뱃속으로 사라졌을 테니 새삼스럽게 전직 한번 제대로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나는 녀석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간 틈을 타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아!!”
 
 뒤늦게 내 기척을 알아차린 녀석이 분하다는 듯 한 차례 울부짖은 뒤 맹렬하게 나를 쫓아왔다.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니 얼마 전에 당했던 갈비뼈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바닥나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힐을 시전한 덕분에 악화되는 건 막았지만, 뼈가 완벽하게 붙은 건 아니었는지 움직이는 게 조금은 불편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 본격적으로 녀석의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건 달리기 시작한 지 3분 정도 지난 시점부터였다.
 나는 3분이 지나기 전에 미리 탐색해둔 길을 따라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거의 90도 각도로 꺾이는 길을 따라 덩치가 큰 녀석이 지나가기에는 불편한 깊은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랜 추격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열세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울창한 원시림의 역할이 컸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상위 포식자인 녀석의 체취 때문에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아예 나보다 먼저 꼬리를 말고 자취를 감춰버려서 다른 위험 요소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이 드넓은 던전 안에 마치 녀석과 단둘이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크오오오오!”
 
 - 상태 이상에 저항했습니다.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녀석의 울음소리에 실린 공포의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뒷머리가 쭈뼛 서는 낯선 경험과 동시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저 알림음이 반복될 때마다 녀석의 외침(fear)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처음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게 이를 견뎌낼 수 있었다. 상위 포식자의 존재감을 그대로 담아낸 외침에 적응해낸 것이었다.
 이제 막 전직한 C급의 헌터가 A급 몬스터의 피어를 견뎌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그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가가각!
 
 “히익!”
 
 녀석이 뽑아 던진 이름 모를 나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갔을지 모를 아찔한 순간이었다. 살짝 풀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한 달에 걸친 추격전을 통해 자신감을 가졌던 게 언제였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나는 죽을힘을 다해 갈지자로 내달렸다.
 
 “헉헉헉헉!!”
 
 이 빽빽하게 우거진 수림은 녀석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쉽게 헤쳐 나가기 힘든 곳이었다. 계속해서 누적된 상처와 피로들이 무거운 짐이 되어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거친 숨에서 단내가 피어올랐다.
 거듭된 추격전으로 인해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위기인 걸 알면서도 딱히 뭔가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나는 이를 악다문 채 앞만 보며 달렸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제대로 걷기도 힘들만큼 빽빽한 나무들을 헤치며 달리던 내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공터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 뭐지?’
 
 머릿속에서 연신 위험하다는 경종이 울려댔다. 그 경고성은 뒤에서 바짝 따라오고 있는 오우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위기감. 굳이 표현하자면 예리하게 날선 검이 목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본능 적으로 몸을 낮추며 바닥을 굴렀다.
 
 쉬이익!
 
 내 머리 위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지체했다면 내가 당했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일격.
 
 ‘비, 비늘?’
 
 자세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언뜻 뱀의 그것을 닮은 비늘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노렸던 무언가는 재차 공격하기 위해 방향을 틀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젠장 몸이!!’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온몸을 옭아매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가 보다 싶은 마음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죽음의 예감에 절망한 내게 녀석의 2차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이 임했다. 그런 녀석의 몸뚱이를 뒤늦게 나타난 오우거가 후려갈긴 것이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튕겨져 나간 녀석이 공터 중앙에서 몸을 돌리며 둥글게 똬리를 틀었다. 허둥지둥 뒤로 물러선 나는 그제야 나는 나를 공격했던 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독각삼두사(獨角三頭蛇)!’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세 개나 달린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공격한 오우거를 경계했다. 유니콘의 그것을 꼭 빼닮은 뿔이 달린 가운데 머리를 중심으로 세 개의 머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 정보를 빨아들였다. 딱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릴 정도로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싶었다.
 녀석을 후려갈긴 오우거는 순식간에 자세를 다잡았다, 그렇게 나와 오우거 사이에 이어지던 추격전은 순식간에 최고 포식자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두 녀석 간의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두 녀석 모두 A등급에 랭크되어 있는 상위 포식자들.
 누가 더 강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놈들이 마주친 것이었다.
 실제로는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고 살기에 어지간하면 마주칠 일이 없는 놈들이었지만, 나를 쫓아온 사방을 헤치고 다닌 오우거 녀석이 독각삼두사의 영역을 침범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공터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삼두사의 뒤쪽으로 각종 나무와 풀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둥지인가 보네?’
 
 엄청난 사이즈를 자랑하는 둥지였다. 아무래도 와서는 안 되는 곳을 침범한 것 같았다.
 그렇게 갑자기 만들어진 A급 몬스터들의 대치 국면 상황 속에서 나는 운 좋게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았다.
 한 달이 넘도록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오던 오우거 녀석조차 지척에 있는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녀석은 강적과 마주하고 난 후부터 줄곧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딱 보아하니 둥지를 등지고 있는 독각삼두사가 자리를 피할 리 만무했으니, 갑자기 난입한 오우거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보였다.
 그러나 오우거 녀석은 타고난 전사. 자신보다 남이 우위에 서는 걸 용납하지 않는 상위 포식자였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녀석은 몸을 낮게 숙이며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명백한 적의.
 그 나직한 울음소리에서 상대를 죽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상대도 이를 느꼈는지 줄곧 혀를 날름거리며 견제하기만 하던 독각삼두사의 눈빛이 요사스럽게 빛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나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근처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당장 이곳을 떠나 도망가는 게 맞았지만, 왠지 모르게 두 녀석의 싸움을 지켜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예감? 본능? 직감?
 딱히 이거다, 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올라간 나는 제법 전망이 좋은 위치에 앉아 녀석들의 싸움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쇄도한 녀석들은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들의 그것처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오우거의 괴력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녀석이 휘두른 주먹 한 방 한 방에 그 거대한 독각삼두사의 몸이 한참을 날아갔다. 그에 반해 독각삼두사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맷집을 자랑했다.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녀석의 비늘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였다.
 처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위 존재들의 전투에 놀란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싸움을 지켜보았다.
 
 ‘대, 대박······ 저런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거야?’
 
 그렇게 혀를 내두르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둘 중 누구라도 승리할 경우 내 목숨까지 위험할 거라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게 아니라 아예 이긴 고래에게 잡아먹히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도망가?’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내 몸을 옭아맸다. 마치 도망칠 생각하지 말라는 듯 그 안에 섬뜩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커억! 크허······! 헉헉헉헉! 헉헉······.”
 
 그 존재감에 짓눌려 잠시 동안 숨을 쉴 수 없었던 나는 숨통이 트이자마자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들자 독각삼두사의 세 머리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세로로 쪼개진 샛노란 눈에서 섬뜩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공간을 격하고 전해져 오는 그 살기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두 줄기로 쪼개진 혓바닥이 들락거리며 나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탐색하는 것 같았다.
 두 녀석들 중 누가 더 여유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머리로 오우거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나머지 하나의 머리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었던 건가.’
 
 설혹 지금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못 가서 녀석에게 따라잡힐 거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아무리 멀리 달아난다고 한들 그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 절대적인 무력감이라니······.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잠깐 경험한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을 꺾어버린 독각삼두사는 명백히 오우거보다 뛰어난 존재였다.
 
 ‘어쩐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
 
 이대로 곱게 죽어줄 수는 없었다. 발버둥 쳐왔던 지난 시간들이, 그 고생들이 허무하게 스러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그 순간 오우거가 휘두른 오른팔이 독각삼두사의 왼쪽 머리를 후려갈겼다.
 
 퍼어억!
 
 “키에에엑!”
 
 그 거대한 머리가 반대 방향으로 단숨에 튕겨져 나갈 만큼 강렬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옭아매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어, 어라?”
 
 그 순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던 손과 발의 감각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나는 본능적으로 스태프를 뻗어 힐을 시전했다. 목표는 오우거의 빈틈을 향해 쇄도하던 독각삼두사의 오른쪽 머리였다.
 
 “힐! 힐!! 멀티 힐!!”
 
 세상천지에 힐 마법을 라이트 마법처럼 사용하는 황당한 헌터는 나 말고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게 대수랴. 살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세 번 연속 터져 나온 밝은 빛에 독각삼두사의 오른쪽 머리가 잠시 비틀거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의외의 현상에 멈칫거린 건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사냥꾼인 오우거는 그 찰나의 순간에 드러난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아아아!”
 
 몸을 크게 돌려 왼팔로 목을 조르듯이 그 머리를 감싸 안은 녀석이 그대로 몸을 띄웠다. 그 거대한 체구를 지닌 녀석이 10여 미터는 족히 뛰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녀석에게 머리를 붙잡힌 독각삼두사가 위로 딸려 올라갔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독각삼두사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고 용을 썼다. 그러나 마치 거대한 프레스처럼 그 머리를 비틀어 옆구리 사이에 낀 오우거가 그 반동을 이용해 한 바퀴 크게 휘돌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우웅!!
 
 내가 있는 곳까지 그 여파가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진동이 사방을 휩쓸었다.
 
 “끝, 끝난 건가?”
 “쿠오오오오!”
 
 마치 내 물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먼지로 시야가 제한된 곳에서 오우거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앞이 조금 보인다 싶은 순간 뿔을 앞세운 독각삼두사의 가운데 머리가 바람을 가르며 창처럼 날아들었다. 그리고 승리의 여운을 담아 포효하던 오우거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오우거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재빠르게 몸을 빼낸 독각삼두사가 저만치 물러난 채 경계 태세를 갖췄다.
 위기를 느낀 독각삼두사가가 본격적으로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독각삼두사의 오른쪽 머리가 혀를 빼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곧이어 녀석의 주변으로 짙은 녹색의 운무가 깔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한 방씩 주고받은 셈.
 누가 더 손해를 봤는지는 겉으로 드러난 걸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한쪽으로 승기가 확 기울지만 않는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다.
 지금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조잡한 방해 공작을 통해 변수를 만들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저 정도로 팽팽한 공방의 순간순간 만들어내는 변수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한 번씩 강력한 한 방을 허용한 두 녀석들의 기세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롭게 변했다. 주변의 대기가 그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따가울 정도였다.
 미리 힐을 시전할 준비를 마친 나는 두 강력한 존재를 바라보며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
 
 전투가 벌어진 지 반나절쯤 지났을까? 그 여파는 자못 심각했다.
 독각삼두사의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는 혀를 빼문 채로 축 늘어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눈 하나가 터져나갔는지 머리 전체가 피에 물든 채로 반쯤 으스러져 있었다.
 결국 성한 채로 남아 있는 건 뿔이 달린 가운데 머리 하나뿐. 상대의 머리 두 개를 작살낸 오우거는 그 대가로 오른쪽 팔 하나가 어깨 부분에서부터 뜯겨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 부분도 뼈가 드러날 만큼 커다랗게 파여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처는 뿔에 꿰뚫린 옆구리의 상처였다. 그리고 중독의 여파인지 두터운 가죽이 군데군데 녹아내려 있었고, 몸동작도 처음에 비해 많이 둔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비슷한 것처럼 보였지만, 승패는 독각삼두사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몸을 갉아먹는 독의 역할이 컸다. 확실히 지킬 것이 있는 자가 좀 더 악착같은 면이 있었다.
 그건 독각삼두사가 일부러 머리 하나를 내주고 상대가 그 머리를 찢어발기는 사이에 오른쪽 팔 하나를 먹어 치운 것만 봐도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애초부터 오우거보다는 독각삼두사가 조금 더 강하기도 했다.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을까?
 오우거가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발을 질질 끌며 머리 하나 남은 독각삼두사를 향해 돌진했다.
 “크오오오!!”
 “키에에엑!!”
 
 그 마지막 공격에 독각삼두사도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화답했다. 명백한 기세 싸움! 조금이라도 밀리는 자가 먼저 죽게 되어 있었다.
 
 쿠우웅!
 
 동시에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 두 녀석이 가늘게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싸움의 마지막 순간은 말 그대로 처절했다.
 거대한 독각삼두사의 몸에 칭칭 감긴 채로 하체부터 반쯤 먹혀 들어간 오우거가 최후의 힘을 짜내 녀석의 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녀석의 눈에 찔러 넣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한참 동안 그대로 얼어붙은 채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 즈음 돼서야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아직도 손이 가늘게 떨릴 정도로 그들의 싸우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저런 녀석을 상대로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그간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었는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위에서 볼 때는 죽은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두 녀석 다 힘겹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반신이 독각삼두사의 입속에 들어간 상태로 누워 있는 오우거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지만 일견 애처로워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스태프를 거꾸로 들어올렸다.
 
 “······잘 가라.”
 
 푸욱.
 
 그 질기던 가죽이 생명력이 다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뚫렸다.
 
 푸확!
 
 스태프를 뽑아내자 녀석의 목덜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알림음이 들려왔다.
 
 - 상위 개체를 사냥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상당한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오우거의 가죽을 얻었습니다.
 - 오우거 건틀렛을 얻었습니다.
 - 중급 마정석을 얻었습니다.
 - 상급 마정석을 얻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녀석을 죽이자 단숨에 레벨이 열두 계단이나 올라갔다. 상위 개체라더니 얻는 경험치가 꽤나 많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마정석이라니?
 어지간한 파티에서 조차 한 달 내내 던전에서 살아도 하급 마정석 하나 얻기 힘든 게 현실인데, 하급도 아니고 중급 마정석이란다. 게다가 그것뿐만 아니라 상급 마정석까지 얻다니······.
 그 갑작스러운 행운에 전율이 일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짜릿한 감각이 역행하는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 죽어가는 행운 덩어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흐흐흐흐흐······.”
 
 내 입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묘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헤실거리며 오우거의 하반신을 입에 문 채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독각삼두사를 향해 다가갔다.
 딱 봐도 지금 내 수준으로는 상처 하나 내지 못할 정도로 튼튼하게 생긴 비늘들이 빼곡하게 녀석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어찌한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아~”
 
 나는 추가로 얻게 될 경험치와 아이템들을 상상하며 스태프를 녀석의 상처에 쑤셔 넣었다.
 
 “끼이이이······.”
 
 괴로움 가득한 녀석의 신음 소리에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그건 그 이후 들려온 알림음에 금세 자취를 감췄다.
 
 - 상위 개체를 사냥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상당한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독각삼두사의 비늘을 얻었습니다.
 - 독각삼두사의 독니를 얻었습니다.
 - 독각삼두사의 뿔을 얻었습니다.
 - 중급 마정석을 얻었습니다.
 - 중급 마정석을 얻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역시나 조금 전과 같이 레벨이 열 단계나 뛰어올랐다. 위로 올라갈수록 필요한 경험치가 늘어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 녀석이 조금 전의 오우거보다 더 많은 경험치를 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상급 마정석은 얻을 수 없었지만, 다양한 아이템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마당 쓸다 돈도 줍고, 님도 보고 뽕도 따······ 이건 아닌가? 아무튼 일석이조라는 말로도 부족한 초특급 행운이었다.
 
 “대애~박! 대박! 완전! 장난 아니야!!”
 
 너무나 엄청난 행운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한동안 미친놈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기쁨을 만끽했다.
 7년간 일꾼으로 개고생하며 헌터가 됐건만, 하필이면 힐러로 전직해서 마음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났던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의 엄청난 행운을 독식한 헌터는 없을 터였다. 제 아무리 상위급 랭커라고 해도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사냥을 다닐 수는 없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 상황이 내게 두 번 다시없을 행운으로 돌아온 격이었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구나.”
 
 마음을 좀 가라앉힌 나는 인벤토리에 열어 새롭게 얻은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오우거의 가죽]
 [등급 : 레어(Rare)]
 
 [강력한 전사이자 타고난 포식자인 오우거의 가죽.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닿는다면 꽤나 훌륭한 장비가 탄생할 듯.]
 
 “이건 재료 아이템이라는 소리고. 그 다음은 건틀렛인가?”
 
 [오우거의 건틀렛(Gauntlet of Ogre)]
 [등급 : 레어(Rare)] [방어구]
 [내구도 : 110/110] [방어력 : 15]
 
 [오우거의 괴력을 담은 건틀렛]
 
 [힘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우거의 괴력을 일부 담아낸 건틀렛. 착용자에게 그 흉포한 힘의 여운을 일부나마 만끽하게 해준다. 다만 전날 술을 많이 마셨던 드워프 장인, 프랭크 튜렉의 부주의로 인해 그 힘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말았다.]
 
 [부가 효과 : 근력+10]
 
 “헐! 근력이 10이나 증가하네?”
 
 투박하게 생긴 디자인이나 그 외 별다른 부가 효과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좋은 아이템이었다.
 힐러로 전직한 이후 상대적으로 다른 계열의 헌터들에 비해 근력 스텟이 부족한 내게 있어서 근력이 10이나 증가한다는 건 앞으로 아쉽게나마 그들과 엇비슷하게 싸워나갈 수 있다는 걸 뜻했다.
 근력이 증가하면 그에 걸맞게 몸도 튼튼해지고 그 결과 전체적인 방어력도 올라간다고 했으니 여러모로 생존에 유리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어디보자 그 다음엔 독각삼두사가 남긴 건가?”
 
 [독각삼두사의 비늘]
 [등급 : 레어(Rare)]
 
 [그 어떤 강렬한 공격도 견뎌내는 독각삼두사의 뛰어난 방어력의 근원. 그 단단함으로 인해 쉽게 다른 모양을 만들기는 힘들다. 뛰어난 장인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이것도 재료고······ 어디보자 다음은.”
 
 [독각삼두사의 독니(Dagger of Naga)]
 [등급 : 유니크(Unique)] [근접무기]
 [내구도 : 150/150] [공격력 : 11+7]
 
 [독각삼두사의 독기를 머금은 단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잔뜩 독기를 머금은 독각삼두사의 독의 정수가 담긴 단검. 세심한 세공으로 인해 아름다움을 표면에 간직했지만, 그 안에는 치명적인 독을 머금고 있다. 손을 베이지 않도록 주의할 것.]
 
 [부가 효과 : 중독(초당 생명력의 0.7%), 회복 방해.]
 
 자세한 설명을 살펴본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오우거의 건틀릿보다 한 단계 더 좋은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아까 그건 방어구였지만 이건 무기였다.
 계속해서 스태프를 단창처럼 휘두르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무기의 존재는 늘 고민하던 문제였다. 이 단검은 그런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좋은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중독이라는 탁월한 부과 효과 덕분에 공격력에 +7이라는 보정 효과까지 덤으로 부여되어 있었다. 중독에다가 회복 방해까지.
 일단 이건 상대에게 살짝 스치기만 해도 효과 만점인 부가 효과였다. 그 다음부터는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시간만 끌면 되는 사기적인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이제 하나 남았구나.”
 
 [독각삼두사의 뿔(Horn of Naga)]
 [등급 : 유니크(Unique)]
 
 [독의 제왕이라 불리는 독각삼두사의 정수]
 
 [매순간 새로운 독을 만들어내는 독각삼두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화의 근원. 소지하고 있기만 해도 각종 독에 면역이 되며,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반경 10m를 정화한다.]
 
 [부과 효과 : 면역, 정화(적용 범위 반경 10m) 매 1시간 마다 재사용 가능]
 
 “헐······.”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줄 알았건만 마지막 아이템을 확인하고 난 뒤에는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혹여나 단검을 쓰다가 내가 중독되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이 말 그대로 기우였음을 알게 해주는 독각삼두사의 뿔이었다. 마치 하나의 단짝 아이템처럼 존재하는 단검과 뿔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독각삼두사의 등장으로 인해 이곳 던전이 C급이 아닌 적어도 A급에 준하는 장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제 막 헌터로서 입문한 풋내기인 내게 있어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감과 동시에 이 정도면 할 만하다는 자신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나는 속에서 꿈틀거리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토해내듯 크게 외쳤다.
 
 “기필코 살아서 나간다!”
 
 그래야 무슨 꼼수를 부린 건진 몰라도 나를 여기에 처박아놓은 녀석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장비를 챙긴 뒤 조심스럽게 둥지로 접근 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 확인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이~ 끼이~ 끼이~”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1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독각삼두사의 새끼 세 마리가 서로 얽히고설킨 채로 뒹굴고 있었다. 제 어미가 죽은 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몸을 꼬아가며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뱀도 새끼는 나름······ 귀엽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들었던 단검은 다시금 옆구리에 찼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저런 어린 녀석까지 죽이고 싶진 않았다.
 
 “잘 살아남아라. 그래도 나름 A급 몬스터인데 새끼라고 해서 허무하게 죽진 않겠지.”
 
 뭐~ 설혹 다른 녀석에게 잡아먹힌다고 해도 내가 그것까지 책임져줄 이유는 없으니까.
 미련 없이 몸을 돌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쳐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제까지 머물렀던 동굴. 그곳을 목표로.
 
 ***
 
 콰앙!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있을 겁니까? 한 달이 지났잖아! 당신들 구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엉?!”
 
 헌터 협회 내에 위치한 비상대책본부 사무실.
 
 보통 조용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고성이 울려 퍼졌다. 면도조차 하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데다가 잠을 못 잤는지 그늘진 얼굴빛의 사내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가 앵무새처럼 계속해서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직원을 향해 붉게 충혈된 눈을 들이대며 항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정체는 한 달 전 오세천과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일꾼들의 조장 권민철이었다. 오세천의 친우인 최요석은 현재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곳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꾼들도 대부분 오랜 시간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입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최요석은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생사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그리고 항의하고 있는 권민철의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에 하고 있는 깁스와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침을 튀겨가며 소리치는 그를 향해 담당 직원이 안경테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번 사건은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곧 결과가 나올 테니 병원에 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의 무미건조한 말에 조장 권민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우리 세천이가! 지금 그 안에 혼자 남았단 말입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대체 구조대 파견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질질 끄는 겁니까? 네? 제 아무리 신출내기 헌터라고는 해도 엄연히 헌터 협회에 소속된 헌터입니다. 저렇게 죽게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울분 가득한 그의 말에 줄곧 무심하게만 대꾸하던 직원이 안경을 벗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거참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라고 구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겠어요?”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권민철은 직감적으로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반쯤은 직원이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기도 했고. 깊은 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힌 권민철이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정확히 언제쯤이면 그 결과라는 걸 알 수 있겠습니까?”
 
 <『힐러지만 괜찮아』 1-2권에 계속>

댓글(4)

소설가인생    
오우거가 뱀 목아지 조르면서 뛰었는데 10미터나 뛰었다면 주인공이랑 한 추격전은 그냥 장난으로 설렁설렁 따라다닌건지 아님 그냥 소설 방향을 잘못잡은건지 모르긋네
2017.10.05 19:08
니기리    
집중이 안됌요 잼도 없고요 볼수록 짜증만 나네요
2019.01.03 21:34
zdsaafa    
오- 드디어 검 안 쓰고, 스태프 겸 창 쓰는 주인공 나왔네.
2019.03.27 12:00
타이밍    
각성을 하면, 우선 자기능력을 파악하고,적응과 훈련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음 던전을 가던 괴물과 싸우던 해야 하는게 아닌가.. 각성했다하면 무턱대고 던전으로 들어가니..목숨이 몇게라도돼나 작가들은 먼생각으로 글을 쓰는지..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한삼하게 생각하는지.. 작가들은 알기나 할까.
2021.12.2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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