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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1권 (1)

2017.07.12 조회 1,630 추천 15


 * 서장
 
 
 
 눈을 떠 보니 벽장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안개가 낀 듯이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덜컹!
 어째서인지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벽장이었다. 슬쩍 몸을 움직여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열리지는 않았다. 단지 문이 아주 조금 움직이며 그 사이로 틈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그 틈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마치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화르륵!
 그리고 그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천지를 모두 태울 듯한 화마火魔.
 집채만 한 돌이 녹아내려 가고 천년만년 그 자리 그대로 있을 것 같았던 가옥이 무너져 내린다. 여기저기서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고 검은 안개가 불길을 따라 승천하는 용처럼 요동친다.
 그것은 인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지옥이라는 말 외에는 도저히 표현할 바가 없는, 그리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광경이었다.
 -십만대산으로 가거라! 빨리!
 그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몽롱했던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제야 화마의 음영에 가려진 거무스름한 인영人影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겹게, 너무나도 힘겹게 화마의 중앙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 기형적으로 틀어진 한쪽 팔, 깊게 베여 장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복부, 전신에 박혀 있는 수많은 병장기들까지. 사내는 언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중상들을 입고 있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저 대라신선이 나타난들 소생시킬 수 없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사내는 그럼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도, 움직일 때마다 몸에 박힌 병장기가 하나둘씩 살을 비집고 떨어져 내려도, 마치 죽을 수는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부님!’
 그리고 그 모습에 드디어 뿌옇게 가려져 있던 기억들이 돌아온다.
 집으로 쳐들어온 일단의 괴인들, 그리고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이곳에 숨기며 괴인들에게로 달려가던 사부님.
 저곳에서 죽어 가는 사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부님이었다. 아버지와 같았던, 아니,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사부님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사······!”
 다급한 마음에 사부님을 부르려 했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을 주는, 사부님이란 세 글자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드디어!”
 벽장의 그 미세한 틈으로 보이는 세상에 사부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
 마치 검과도 같은 얄팍한 장도長刀를 쥔 사내. 한쪽 눈에서부터 턱까지 길게 내려온 검상이 화마의 음영에 일그러지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무극문無極門의 맥脈이 끊어졌도다.”
 부들부들!
 사내를 보자 서서히 공포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자였다.
 이 지옥을 만들어 낸 자. 사방에 불을 붙이고, 수십 명의 괴인들과 대치하던 사부님의 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사내가 바로 저자였다.
 사내가 서서히 사부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사부, 읍······!”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사부님이란 세 글자는 갑작스럽게 튀어 올라 입을 막은 오른손에 의해 막혔다.
 왼손을 움직여 오른손을 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오른손은 마치 입에 붙어 있기라도 한 듯이 떼어지지 않았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그렇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이다.”
 서서히 한 자루의 장도가 치켜올라 간다.
 사내의 모습에 사부님의 모습이 가려진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공포에 굳어 버린 오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흘러내린 눈물에 촉촉이 젖어 갔다.
 시이잉!
 서서히 내리쳐지는 장도.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이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 속에 박혔다.
 촤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이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것이 ‘그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무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세.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수많은 봉우리들.
 십만 개의 봉우리를 지녔다 불리는 대산大山.
 대산의 봉우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오악에 비견되는 높이는 없지만, 수많은 소산들이 모이고 모여 장관을 이룬다. 거기다 그 수많은 봉우리들의 사이로 수려하게 흐르는 운무雲霧는, 마치 녹색 비단에 수놓인 자수처럼 아름답고도 신비하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출렁이는 산세와 그 산의 사이사이로 흐르는 은은한 안개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십만대산.
 천마신교天魔神敎. 만사萬邪와 만마萬魔의 이상향이 숨겨져 있는 곳. 수많은 전설들과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신비의 땅.
 이곳은 십만대산이었다.
 
 “선택에 후회는 없느냐.”
 “예.”
 “네 한마디에 움직일 상단이 수십이요 네 명령에 목숨을 불사르고 검을 뽑을 무인들이 기백이니라. 네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저 남경의 황제도 부럽지 않을 정도의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데도 정녕 후회가 없다 하느냐.”
 “······예.”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암동의 중앙에서 십 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한 소년과 중년의 사내가 함께 있었다.
 중년인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의 모습은 확실하게 추레하다 말할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다 해져서 넝마와도 같았고, 길게 내려와 얼굴의 반은 가리는 머리카락은 정리되지 않아 흐트러져 있었다. 피부는 하얗지만 여기저기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고, 그 하얀 피부마저도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써 누렇게 보였다.
 거기다 근골은 최악. 소년은 너무나도 왜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모습의 소년. 하지만 그런 소년의 눈빛만은 그 무엇보다도 특별했다. 예기銳氣라고 말할 정도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눈빛에서는 헌앙하다기보단 굳은 심지와 폭발적인 살기가 느껴졌다.
 “좋은 눈빛이다.”
 중년인은 진심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은 무인들의 눈빛. 네 사부는 네가 평범한 삶을 살게 하고 싶어 했다. 그 평범한 삶이란 이 강호와는 얽히지 않는 삶이야.”
 사내는 숨을 깊게 내쉬며 마지막 한마디를 이었다.
 “마지막이니라.”
 “······.”
 “정말 후회가 없는 것이냐.”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지막이란 말은 그리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
 아직까지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마음을 정하는 그 모습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를 연상케 했다.
 사내는 입을 굳게 다물고는 지그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정말 고작 열다섯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눈동자란 말인가.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장난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오직 단호함과 굳은 결심만이 보이는 올곧은 눈빛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나이에 벌써부터 저런 눈빛을 지녔다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실로 슬프고 안쓰러운 일이거늘 아직 저 소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내 안쓰러움을 떨쳐 버렸다.
 소년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였다.
 그 결정을 타인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
 “하면 오너라. 네 인생은 아마 많은 부분에서 구속될 것이고 네 몸과 행동조차 여러 부분에서 자유를 빼앗길 것이다. 언제나 시퍼렇게 날이 선 병기들이 네 목을 노릴 것이고 한 모금만 들이켜도 절명할 극독들이 펼쳐진 길을 너는 걸을 것이다. 너의 앞에 펼쳐진 것은 혈로血路. 결코 지워지지 않을 피비린내가 널 따라다닐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네게 몇 가지 사항을 전할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며 결코 발설해서도 아니 될 것이야.”
 끄덕!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첫째, 네게는 십오 년의 기한이 주어졌다.”
 “······.”
 “네 사부 무곡武曲 연운검淵雲劍. 그는 본 좌와 하나의 언약을 맺었다.”
 본 좌.
 이 넓은 중원에 자신을 본 좌라 칭하는 자는 그리 흔치 않다. 하물며 정마대전으로 인해 정사正邪를 포함한 새외의 수많은 고인高人들이 죽은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본 좌라 일컫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만약 있다면 하나뿐.
 중원무림의 영원한 공적. 천마신교주天魔神敎主, 남악마제南惡魔帝!
 “대大천마신교! 본 교는 십오 년 후, 봉문을 해제한다.”
 천마신교. 그 전율스러운 이름.
 중원뿐만 아니라 새외무림의 그 어떤 자들조차 천마신교의 이름에 흔들리는 마음을 결코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새외의 세력과 중원무림의 정사파의 연합으로도 어떻게 저지할 수 없었던, 이십이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그들. 그리고 무를 연마하는 모든 자들의 영원한 공포로 자리매김한 천마신교.
 분명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천마신교다. 한데 바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수십 년 전, 네 사부는 고작 열 명의 인원으로 총단을 지키는 본 교의 최상위 고수 서른 명을 몰살시키고 총단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급히 달려온 본 좌마저 패퇴시켰지. 그때 그는 본 좌의 목에 검을 겨누며 거래를 내걸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천마신교의 총단을 지키는 고수 서른 명이라면 중원에 이름 자자한 대문파 열 개는 하루 만에 초토화시킬 정도의 병력이다. 그런데 그들을 몰살시키고 동시에 절대자로 불리는 남악마제마저도 패퇴시켰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 이야기를 너무나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정도는 아무런 것도 아니란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몇 가지 조항을 거래로 내걸었다. 그중 첫째가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를 보호해 달라는 것과 그 제자가 본 교에 입교한 시점부터 십오 년간 봉문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의 검을 직접 꺾을 것을 내걸었고, 난 그 대가를 듣자마자 거래를 받아들였다.”
 남악마제의 입장에선 크게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까. 고작 검을 꺾을 뿐인 대가로 강호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고 십오 년의 세월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한 사내가 검을 꺾는 것으로 중원은 살아남은 것이다.
 “결코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다. 네 사부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자였다.”
 “······!”
 마치 생각을 읽는 듯, 남악마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거래 이후 몇 년인가 지난 후, 나는 그에게서 꺾여 버린 무극문의 신검神劍과 비급을 받아 냈다.”
 “신검······?”
 “그는 거래대로 자신의 검을 직접 꺾었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가 꺾은 신검이란 무극문의 단 두 개뿐인 신물이자 결코 부서질 일 없던 협俠의 마지막 방벽. 그것을 난 받아 낸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남악마제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널 받아들이는 조건. 지금 이 순간 성사되었다. 네가 본 교에 들어온 이 시점을 기준으로 본 교는 십오 년의 시간 동안 중원과 관련된 모든 일을 중지할 것이다.”
 “······.”
 “십오 년. 네겐 십오 년의 세월이 약조되었다.”
 남악마제는 단호한 어투로 말하였다.
 십오 년.
 결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거래 조항의 둘째, 너는 오늘을 기점으로 네가 필요로 하는 시간 동안 무공을 익히게 될 것이다.”
 “무공.”
 소년의 눈에 이채가 피어올랐다.
 “네 사부 무곡 연운검의 무공, 무극천검무無極天劍武. 너는 그것을 익히게 될 것이다.”
 꿀꺽!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교의 고수 서른 명을 죽이고 당대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남악마제를 패퇴시켰다는 무공.
 그것을 익힌다는 것이다.
 “거기에, 셋째.”
 “······?”
 남악마제의 눈빛에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넌 본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마교십가魔敎十家의, 이제는 무너진 염마炎魔의 후손으로서의 신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네 사부의 뜻.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본 교의 내부에서 지내는 도중에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본 좌는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가지, 널 본 좌가 데려왔다는 소문만을 흘릴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널 보호할 어떠한 것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소년의 단호한 표정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거는 조건은 네 의향에 따라 가부를 결정할 수 있다.”
 남악마제는 그렇게 한마디를 건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넷째, 넌 마령곡魔谷으로 갈 수 있다. 그곳은 지옥이며 인간을 짐승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 곳.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런 당연한 것들에도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지옥이다. 하지만 그곳에 마라염마신공魔羅炎魔神功이 있다. 마령곡은 초대 염마가 만든 곳이다. 네가 사부의 유지를 따라 염마의 후예로서의 신분을 얻을 것이라면 그 무공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네가 정파인으로 오해받아 척살당하기 싫다면 필수불가결하게 마라염마신공이 필요할 것이다.”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들어 보인다.
 깊은 눈동자.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사부님이 거신 조항 중 하나인 것입니까?”
 “그렇다.”
 “만약······ 만약 그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면 강해질 수 있습니까?”
 바라는 바는 오직 강함뿐이라는 것일까.
 남악마제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당연하다. 네가 마령곡에서 살아남는다면, 넌 분명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넌 마라염마신공을 얻어야 하는 몸. 넌 마령곡에서 마라염마신공을 얻기 위해 그 안에서도 가장 격렬한 죽음의 위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단연코 말하지. 그 길에서조차 살아남는다면 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 상관없습니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전 사부님의 유지를 그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이었다.
 “정확히 한 달 뒤에 마령곡의 문이 열린다. 그 한 달간, 이곳에서 넌 무극천검무의 모든 것을 익히고 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
 하늘을 날아오는 한 권의 서책.
 그것은 마치 신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서책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펄럭이며 소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십전총해十全總解. 네 사부가 네게 건네라 한 비서秘書다. 이 또한 하루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한 달 안에 모두 익혀야 할 것이다. 마령곡 안에서 이것들을 익힐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남악마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조항이 끝난 것일까. 남악마제는 그저 조용히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짧은 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은은하게 흐르는 고요함.
 그리고 그 고요함을 남악마제가 시작했듯, 끝 또한 남악마제가 고했다.
 “이제부터 넌 사람이 아니다.”
 웅웅!
 운을 떼는 한마디. 그 한마디에 공기가 떨리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은 착각일까.
 “넌 무인이란 이름의 괴물이 될 것이다.”
 그 한마디의 말은 마치 선언과도 같았다.
 괴물이 될 것이란 말. 어딘가 꺼려지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마음에 든다는 듯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환영한다. 무武의 세계에 온 것을 말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자리를 잡고 있는 컴컴한 동굴.
 마치 어둠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런 세계에서 소년, 무현은 눈을 떴다.
 바스락!
 무현은 손에서 느껴지는 두 권의 비급을 만지작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기꺼운 것인지 슬며시 미소까지 지었다.
 화악!
 무현은 몸을 움직여 화섭자로 벽면에 파여 있는 홈에 불을 붙였다. 수련실의 벽면에 파여 있는 조그마한 길을 따라 연쇄적으로 불이 붙어 가며 사방을 밝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반구형의 수련실. 무현은 벽면을 타고 나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화염을 바라보다 시선을 서책으로 돌렸다.
 “이것이, 사부님의 무공.”
 낡디낡은 서책.
 하지만 그 위에 적힌 글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 무극천검무武極天劍武
 
 
 
 휘갈긴 듯, 그리 명필이라 부를 수 없는 글씨체임에도 그 다섯 글자에는 폭풍우와도 같은 호쾌한 힘이 묻어나 있었다.
 “꼭 강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다.
 그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무현은 또다시 서책을 품에 안았다.
 
 
 
 “지존이시여.”
 한 노인이 어둠을 비집고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굵직한 주름들. 그리고 그 주름들 속에서 형형한 안광을 빛내고 있는 두 눈동자까지.
 툭투둑!
 허리가 크게 굽은 꼽추에 한쪽 발은 땅에 질질 끄는 자였다. 분명히 그 눈빛만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웠지만, 그 육체의 장애는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노인의 정체를 아는 자가 있다면 노인이 가진 장애를 ‘고작’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장애를 가진 노인. 하지만 그 머리에 담긴 것은 귀계鬼計요 그 핏줄에 흐르는 것은 온도는 없는 청혈靑血이니. 그는 천마신교 역사상 최고의 모사인 청혈환마靑血幻魔 자추주였다.
 “말하라.”
 “저 아이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삭초제근. 과거 무림에 나타난 무극천검문의 문주들은 단 한 번도 최강이라 불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무곡은 중원에서는 숨겨졌다고 하지만, 그 삼극三極 중 하나였습니다.”
 환마가 고개를 숙이며 충심 가득한 어조로 한마디를 올렸다.
 하지만 남악마제는 그 말을 들으며 웃을 뿐이었다. 마치 가소로운 듯이, 그렇게 비웃을 뿐이었다.
 “그대는 아직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가.”
 실소를 흘리며 서서히 환마에게 다가가는 남악마제. 그의 형형한 눈빛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 속에서 빛났다.
 “머나먼 시대로부터의 맹약과 당대 무곡과의 거래. 삼극천마경三極天魔經을 익힌 이상 그 금약禁約을 어길 수는 없다. 그리고 저 아이는 이미 무극천검무의 축기를 해내고 있다. 이미 천왕의 싹을 가진 아이를 내가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지존이시여······.”
 고개를 숙이는 환마.
 그를 바라보는 남악마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후후, 그대는 실로 말을 잘하는군.”
 “예······?”
 “사실대로 말하라. 그대는 저 아이가 교의 위험이라도 될 것 같아 말하는 것이겠지. 내 단연코 말하지. 그댄 결코 저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야. 만약 건드린다면 교의 이 할을 장악한 세력 중 하나가 사라질 것이니.”
 남악마제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환마를 응시했다.
 단지 쳐다보는 것으로 전신의 털들이 쭈뼛쭈뼛 서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세를 터트린 것도, 살기를 흘린 것도 아니다.
 단지 저 눈빛.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품은 듯한 그 깊디깊은 두 눈동자에 천마신교 무공 서열 최상위권에 드는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어떤가, 환마.”
 “······불경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불경한 마음이라.”
 휘어진 허리가 또다시 휘어진다. 나름 허리를 숙인 것인지, 환마의 휘어진 등이 더욱 깊게 휘어졌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군. 저 아이는 놀라운 재목이야.”
 “······!”
 그 남악마제가 인정했다. 천하제일, 천마환생이라 불리는 그 남악마제가.
 놀라움은 극으로 치닫는다. 고작 저 정도의 소년. 자신의 눈에는 오히려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악이라 보일 정도의 신체를 지닌 소년이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에, 놀라운 점이 있다면 그 흔들리지 않는 눈빛뿐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그런데 그런 아이를 놀라운 재목이라고 칭했다.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남악마제는 본 것일까?
 ‘알 수 없다. 하면 지존을 위해서라도, 신교를 위해서라도 인원을 붙여야 하는 것인가.’
 환마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생각,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대는 또다시 본 좌의 명을 무시하려 하는군.”
 “······!”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생각을 깨우는 잔잔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또다시 공포가 몰려온다.
 마치 해일처럼, 마치 폭풍처럼, 마치 벽력과도 같이 전신을 적시는 공포가 그곳에 있었다.
 “환마.”
 “하명······하시옵······.”
 말조차 이어지지 않는다. 힘들게 연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천마시조, 천운천께서 만드신 삼극천마경은 천하제일이다.”
 “천하제일······! 천마신공!”
 “하지만.”
 “······?”
 무현이 들어가 있는 수련실, 염마동炎魔洞이라 적힌 그 수련실의 철문을 바라보던 남악마제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외로움의 무공이기도 하지.”
 천하제일의 무공, 천마신공.
 그리고 그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익혀 천마환생이라 불리는 사내가 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눈빛으로 철문 뒤에 있을 소년을 생각했다.
 “천하에 천마신공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무극천검무. 그리고 그 천마신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오직 무극천검무뿐이다.”
 “······!”
 “저 아이를 마령곡으로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 죽는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만약 그곳에서 성장한다면 희재, 그 아이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유일인이 될 것이야.”
 “지, 지존!”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남악마제를 바라보며 환마는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화희재火渽. 천마신교의 대공자.
 아직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절정의 초입에 이른 가공할 무재를 지닌 그와 비교를 할 정도라니.
 “후후후, 실로 재밌어!”
 남악마제.
 만마의 주인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일순, 섬뜩한 살소가 내걸렸다.
 무극천검무
 끼기기긱!
 철문을 열고 나온 무현. 차가운 표정의 무현이 철문의 건너편을 바라보며 아주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이 문의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네 사부 무곡 연운검의 무공, 무극천검무. 너는 그것을 익히게 될 것이다.
 
 끼이익!
 철문을 닫으며 철문의 위에 걸려 있는 염마동이라 적힌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기이하게도 그 세 글자는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고 있었다.
 
 -십전총해. 네 사부가 네게 건네라 한 비서다. 이 또한 하루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한 달 안에 모두 익혀야 할 것이다.
 
 남악마제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한마디 한마디를 뇌리에 각인시키고, 무현은 철문을 한번 쓰다듬으며 몸을 돌렸다.
 무현은 몸을 돌리자마자 혀를 찼다.
 염마동은 지하에 있었다. 이곳에 도착할 때도 놀랐던 것 중 하나다. 어떻게 된 구조인지, 마치 동굴처럼 기다란 통로를 족히 반 시진은 걸어야 염마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돌아가야 하는 이 길도 마찬가지였다.
 ‘······.’
 문뜩 눈앞에 펼쳐진 어둠은 마치 자신의 미래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의 죽음, 염마로서의 신분, 마교에의 입교. 수많은 일들이 모두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만 돌아갔다.
 터벅!
 하지만 그건 그저 감성에 찌든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 또한 하고 있는 무현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어둠 속, 한 줌의 빛도 없는 이곳에서는 그 어떠한 물체의 모습도 알아볼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이 기다란 통로를 웅웅 울리는 발소리뿐이었다.
 터벅!
 양손에 들려 있는 두 권의 비서의 촉감을 느끼며, 또다시 한 발자국 무현은 앞으로 나아갔다.
 
 끼이이익!
 귀곡성과도 같은 문의 울림에 무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밖으로 나왔다.
 “이곳이 염마궁.”
 문을 열고 나선 무현을 반긴 것은 또다시 끝 모를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기다란 통로였다.
 하지만 분명히 공기가 변한 것이 느껴졌다. 지하의 공기와 환기가 되는 신선한 공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그러나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이곳에 있었다.
 ‘달빛이라면.’
 무현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곧장 복도의 모든 창을 열기 시작했다.
 저 높은 하늘, 만월의 시릴 정도로 차가운 빛이 염마궁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냈다.
 달그락!
 창을 열고 앞으로 나서며, 무현은 드디어 첫 번째 방을 발견했다.
 ‘들어가 보자.’
 끼이익!
 또다시 귀곡성과도 같은 울림. 거대한 나무 문이 먼지를 우수수 떨어뜨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무현의 눈에 비친 것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기들이었다.
 ‘무기고······.’
 화악 하고 번져 가는 피비린내 같은 쇠 냄새가 무현의 코를 괴롭혔다.
 철그럭!
 그그극!
 무현은 바로 옆에 있던 검을 들어 뽑아 보았다.
 녹이 슬어서인지 검이 깔끔하게 뽑히지 않고 귀 따가운 소리를 내며 뽑혔다. 최악에 가까운 상태다.
 이리저리 녹슬고, 저 옆쪽에 있는 창 같은 경우엔 나무 부분이 썩어 분리되어 있다.
 “······.”
 수많은 무기들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녹이 슬어 부서져 가고 있었다.
 ‘이곳은 무덤이다.’
 이곳은 무기들의 무덤이었다. 주인을 잃은, 주인을 애타게 찾는 무덤이었다.
 그리고 무현에게는 마치 들리는 듯했다. 자신들의 주인을 잃게 만든, 죽게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가.
 “이것들, 다 손질해 놓고 가야겠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딱히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 무기들에 자신이 투영되어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무기들을 보았을까. 무현은 손에 쥔 녹슨 철검을 쓰다듬다 몸을 돌렸다.
 쾅!
 다시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무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며 거대한 크기의 염마궁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텅 빈 방도 있었으며, 끝을 모를 정도로 수많은 서책들이 가득 차 있는 방도 있었다. 접객당부터 시비들이 기거하는 곳까지 많은 것을 보고 난 후, 무현은 전각의 꼭대기로 향했다.
 전각의 넓이도 넓이였지만 높이도 높이였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만 반 각이었다.
 철그럭!
 꼭대기의 문은 철로 되어 있었다. 낡을 대로 낡은 염마궁의 모든 것들이었다. 문을 움직일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녹들에 무현이 눈가를 찌푸리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쾅! 그그극!
 그리고 문을 발로 차 버린 무현.
 문이 비명을 지르며 결국에는 열렸고, 무현은 또다시 공기가 변하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
 화아아아!
 그곳에는 한 줄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은은한 청색의 비단에 아름다운 보석을 달아 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한 줄기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은하수銀河水라는 말이 있던가. 실로 그 말이 아깝지 않았다.
 달빛도 그랬다. 만월의 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달은 아름답게 빛나며 무현을 비춰 주었다.
 “이곳이.”
 서서히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 무현.
 얇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맑은 달빛이 새어 나왔다.
 꾸욱!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
 마치 달을 잡겠다는 듯이, 그리고 잡혔다는 듯이, 무현의 주먹에 달이 숨어들었다.
 “시작점.”
 휘이이이!
 한마디의 말.
 그 말과 함께 또다시 대산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무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염마동.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은 짧은 시간으로 족하다. 한 달이란 시간은 짧고, 해야 하는 일은 최대한 해야 했다.
 무현은 곧장 서책과 다 낡아 버린 검을 챙겨 들고 또다시 그 긴 어둠의 길을 걸어 염마동에 도달했다.
 과거, 염마궁은 부흥했다고 한다. 정마대전의 전까지만 해도 염마의 이름은 마교십가 중 최강이자 천마신교의 부교주인 검마劍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정마대전 도중, 마교십가 중 두 가문의 합공을 받아 염마궁주가 죽은 이후 그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염마궁은 멸문했다.
 그리고 염마궁의 상황은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뿌드득!
 주먹을 부러질 듯 움켜쥔 무현.
 오 년 전의 일이 눈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오 년 전, 사부님은 살해당했다.’
 오 년 전 사부님과 자신의 보금자리로 쳐들어온 일단의 괴인들.
 그들은 무극천검무의 맥을 끊으려고 했다. 단지 무공만이 아닌, 관련된 모든 것을 끊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극천검무의 화신化身이라 할 수 있는 사부님, 무곡 연운검을 살해했다.
 무현은 그때의 광경을 서서히 떠올렸다.
 마치 화인火印이 된 듯이 사라지지 않는 그 저주받은 기억을 떠올렸다.
 힘이 없어서 벽장의 틈으로 사부님의 죽음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했던 자신, 그리고 사부님이란 그 세 글자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벽장 속에서 떨 수밖에 없던 자신의 무력함을.
 사부의 전신을 관통한 수많은 병장기들과 검게 타 버린 사부님의 피부가, 꽤나 어릴 적 보았던 것임에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무극천검문이 멸문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멸문을 위해 사부님을 죽였고 무극천검문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하지만 여기 이곳에서 무현은 살아 있다. 손에 든 무극천검무의 비급과, 성장을 위해 끝까지 써먹을 마교라는 패를 지닌 채.
 저 마교십가의 두 가문은 염마궁을 멸문시켰다고 생각해 왔겠지만 지금 이 순간 무현이 염마궁의 궁주가 된 것처럼, 무극천검무의 그 질긴 맥은 무현으로서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십만대산으로 가거라! 빨리!
 
 사부님의 다급했던 전음이 귓전을 울렸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사부님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쾅!
 어린아이의 손답지 않게 굳은살이 가득한 주먹이 염마동의 벽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 찾아갈 것이다. 중원으로.’
 무현은 고개를 돌려 염마동의 벽면으로 향했다.
 화륵!
 화섭자를 켜며 염마동의 벽면에 있는, 쥐 한 마리 정도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법한 조그마한 통로에 넣었다. 그러자 불이 연쇄적으로 붙으며 반구형 모양의 염마동을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가며 염마동 전체를 비췄다.
 실로 비효율적이었다. 덕분에 염마동 내부가 붉은색 빛으로 가득 찼지만 그 정도의 빛은 필요도 없는 데다가 온도까지 높아져 있었다. 거기다 이 불꽃 때문인지 몰라도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기까지 했다.
 무현은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가 저 꼭대기의 구멍에 모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서책을 서서히 펼쳤다.
 무극천검무.
 그 호쾌한 글씨체는 어디로 가지 않는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듯이 분노로 가득하던 무현의 눈빛이 그 다섯 글자에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사락!
 무현은 염마동의 중앙으로 향해 비급의 첫 장을 열었다.
 무극천검무의 비급은 일반적인 글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순히 비급이기 때문에 빙빙 돌려 말하거나 암호로 되어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애초에 체계가 다른 이형의 글자를 사용한다.
 오직 무극천검무를 익힌 자만이 읽을 수 있는 글.
 만약 이 글이 아니었다면 남악마제에 의해 비급은 유실되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사부님의 안배였던 것일까.
 무현은 떠오르는 잡념들을 몰아내고 이를 악물고는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치 주술적인 체계가 잡혀 있는 듯했다. 읽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뜻을 이해하고 습득한다.
 “으음.”
 무현은 이를 악물고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을 바라보았다.
 무극천검문의 문자.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듯한 기분.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드디어 끝났다.”
 서장이 끝났다. 전대 문주의 이름, 문파의 역사 등 지금의 무현에게 필요 없는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이제 진정한 무공서의 시작.
 무극천검무.
 그 고절한 무리를 담은 신공절학.
 무현은 그 첫 장을 열었다.
 
 무극천검무는 그 자체로 무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용하는 병장기에 관계없이 펼칠 수 있는 구 초식의 연환 무공으로 시작하여 내공심법, 보법 그리고 술법術法까지, 수많은 비기秘技의 총합체가 바로 무극천검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무현의 머릿속에 주입되기 시작한 것은 무극천검무의 심공이었다.
 무극천검무에 존재하는 세 가지 심공.
 첫째로 무극경武極經.
 무극천검무의 근간이다. 육신에 강함을, 하단전에는 충만한 내력을 주는 무극천검무의 기본공이며 동시에 가장 익히기 힘든 심공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정심하고 강력했다.
 저 중원의 역사 깊은 구파의 심공에도 충분히 비교할 정도로 깊이 있는 심공이었다.
 “사부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익혀 왔던 심공이다. 잔병치레를 없애 준다고, 몸이 건강해진다고 매일 새벽마다 사부님이 지도해 줬다.
 세 가지 심법 중 그 두 번째는 건곤결乾坤訣, 심공이 아닌 심결이었다.
 내상의 치료, 내기의 조화, 감정의 조절 등등 수많은 공능을 지닌 심결이다.
 마음을 담는, 육신을 관장하는 중단전을 키우는 심결.
 하지만 무현은 건곤결의 구결을 모두 깨치지 못했다. 무현이 지금까지 비급에서부터 얻은 내용엔 건곤결의 전반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 또한 얻지 못했다.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단은 무극경이, 중단은 건곤결이 자리를 잡고 있건만 상단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니 말이다.
 거기다 단순히 추측이 아닌, 실제로 무현은 상단전을 관장하는 심공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아직 윤곽조차 잡지 못했다.
 무극천검무의 문자에는 주술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 건곤결도 초반부까지밖에 없는 것을 보면 경지가 일천하여 그런 이유에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무현이었다.
 다음으로 무현의 뇌리에 주입되기 시작한 것은 무공이었다.
 구련검九聯劍.
 초라한 무공명이었다.
 하지만 그 초식의 힘만은 놀라웠다. 지금의 무현의 내력으로는 전반 삼 초식을 연환으로 펼쳐 내면 실신을 할 정도였다.
 슈아아아!
 구련검의 초식을 얻은 그 순간, 뇌리로 들어오는 정보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아직 받을 때가 아니라는 것일까. 분명 모든 글자를 읽고 머리에 새겨 넣었건만 더 이상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해.’
 무극경과 구련검.
 절세의 보검과 그 보검을 움직일 힘을 얻은 무현이었다.
 ‘물론······ 아직 숨겨야 할 패지만 말이야.’
 분명 절세의 보검과 강력한 힘을 얻은 무현.
 하지만 무현은 그 절세의 보검과 그 보검을 움직일 힘은 죽어도 숨겨야만 했다.
 이 천마신교에서도, 저 중원에서도.
 무현이 목표로 하는 단 하나,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전까지는.
 ‘사부님을 죽인 자들.’
 으득 하고 무현의 이빨이 부러질 듯한 소음을 흘렸다.
 무현은 무극천검무의 절예를 사용해선 안 된다.
 그들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이 천마신교 또한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렇기에 숨겨야 한다.
 무극문의 맥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무현으로서는 사부님을 죽인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결코 죽을 수 없다.
 그렇기에 힘을 키운다.
 적어도 중원보다는 안전한 이 천마신교에서, 이 비정한 적지敵地에서!
 ‘기다려라.’
 전 중원을 향해 내뱉는 한마디.
 사부님을 죽인 자들, 음모에 빠트린 자들.
 아직 무극문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무극문의 검을 치켜세울 그날을, 무현은 기다렸다.
 
 십전총해.
 언제,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무수한 소문만이 존재할 뿐 정확한 정보는 없다. 다만 원나라 말기에 천무대제天武大帝라 불렸던 절세의 무인이 자신의 심득을 풀어 놓은 무공서라는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이야기.
 십전총해가 정말 천무대제의 손을 거쳤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지만, 무현은 이것을 익히며 이것이 무공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의서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공보다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욱 깊숙이 파고든 것이었다.
 십전총해에는 뼈의 종류와 개수, 관절의 개수와 부위, 근육의 종류와 취약점, 신경과 장기의 상호작용 같은 부분이 대거 서술되어 있었다. 딱히 특정한 의술 지식이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단지 그 육체에 대한 깊은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의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십전十全(완벽한)이라는 단어가 붙을 리가 없다. 십전총해는 단지 의술적인 부분이 아닌 기공氣功적인 방식으로 사람에 접근했다. 내가기공과 무공적 방식을 포함한 인체의 구조를 파고든 십전총해.
 도가, 불가佛家, 의가醫家에 관계없이 수많은 지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은 무극천검무가 다루고 있는 이론과 일맥상통했다. 무극천검무를 익히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사실, 정마대전 이전에 십전총해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잡서雜書로 분류될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정마대전 당시, 전설의 명의인 편작扁鵲의 의서를 익혔다는 신의神醫 주한이 언급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십전총해는 저 멀리 서역西域에서 흘러들어 온 수많은 의술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실제로 인체를 해부해 보지 않은 이상 서술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 인체에 칼을 댄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십전총해가 그만큼 정교하고 당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사실로 보였다.
 ‘이건 단번에 익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무공서와 의서에는 서술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그 방대한 양도 양이거니와 그 적힌 내용의 깊이가 평생을 걸려 익혀도 익힐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깊었다.
 하지만.
 익히지 못한다고 외우지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현은 십전총해의 한 장 한 장을 넘겨 가며 머리에 각인시켰다.
 
 
 
 쿵쿵쿵!
 원래라면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무현에겐 너무나도 잘 들린다.
 반쯤 눈을 뜨고 있던 무현이 눈을 완벽하게 뜨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쿵쿵쿵!
 크게 울리는 발걸음의 소리에, 무현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가 무극문의 후예라는 것을 숨겨야 한다.”
 무현은 천하에 단 하나 남은 무극문의 후예.
 알려지면 안 된다. 이 천마신교에선 무극문의 후예란 곧 적이다.
 “무극문의 후예라는 것을 숨기고, 그 마령곡이란 곳에서 강함을 얻을 때까지 버틴다.”
 
 -정확히 한 달 뒤 사람이 찾아갈 것이다. 그를 따라가라.
 
 염마동을 한번 둘러본 무현이 염마동의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약속된 날이 지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할 때가 찾아왔다.
 
 
 
 * 마령곡
 
 
 
 
 정마대전 당시, 천마신교가 정파와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원나라 말, 반원反元의 기치를 높이며 정파의 은거 고수들이 전쟁을 위해 사라진 것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바로 천마신교엔 마령곡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하급 무사나 일반적인 무인을 일류까지, 혹은 그보다 더 높은 경지까지도 끌어 올리는 곳, 마령곡.
 정마대전 중에 결국 경지에 이른 고수의 숫자는 천마신교와 중원의 무림 모두 비등했다. 그럼에도 천마신교가 중원의 반을 피로 물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고수의 숫자가 아닌, 그 바로 밑에 이르는 경지의 무인들이 많았던 탓이다.
 하급 무사란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일류에서 절정까지로 이루어진 천마신교의 정예들.
 그들은 모두 마령곡에서 태어났다.
 그것이 사고를 하는 인간이든, 혹은 사고란 없이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짐승이건 간에.
 그들은 마령곡에서 ‘태어’났다.
 
 마령곡의 입구엔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마령곡의 입구는 마치 맹수의 아가리처럼 커다랬고, 그 안에서 삐죽삐죽 자라고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그 맹수의 이빨처럼 보였다.
 그런 마령곡의 입구에 모인 수많은 종류의 수많은 사람들.
 남녀노소男女少, 성별부터 나이까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마령곡 입구의 큰 공터에 모여 있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숫자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모두 웅성거리며 불만을 토하거나 공포에 떨고 있으니 꽤나 큰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 순간, 그 괴수의 아가리에서부터 흑색 장포를 걸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이곳은 마령곡이다.”
 웅성웅성!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내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마치 유부에서 끌어 올린 듯이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척척척!
 입구에 나타난 것은 그 사내 하나만이 아니었다. 암굴의 깊은 곳에서부터 어둠을 휘장처럼 두른 채 나타나는 흑의인들.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날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착지해 갔다.
 그것으로 한순간에 인원이 나뉘었다. 가로세로 일정한 단위마다 착지해 가는 흑의인들. 그것만으로도 웅성거림은 약속한 듯이 사라졌고 주변에는 끝 모를 정적만이 맴돌기 시작했다.
 ‘놀랍다.’
 놀라운 모습. 흑의인들이 풍겨 내는 기이한 기운이 마령곡 앞에 모인 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대들은 살아남는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장 뒤편의 구석에 있던 무현이 흠칫 놀랐다.
 저 앞에서 고압적인 어투로 말을 하고 있는 사내. 주변에 자리를 잡은 흑의인들도 놀라운 힘을 품고 있었지만 저 사내는 더더욱 놀라웠다.
 마치 한 자루 명검을 보는 듯이 날카로운 기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꽤나 떨어진 거리임에도 사내의 주변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파. 무현으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을 느낀 순간, 무현은 또다시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기이한 기운들을, 이렇듯 하나둘씩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무현은 모르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쌓아 올린 무극경의 내력. 제대로 된 비급을 얻고, 제대로 된 이론을 얻음으로써 이제 무현은 기감을 느낄 정도가 된 것이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무극경의 조화야. 이 흑의인들이나 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두려울 정도로 놀랍다······!’
 모두가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무현은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 앞에 있는 사내에게 가려져 있지만 흑의인들의 기파 또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작 몇 명 되지도 않는 숫자로 수백의 인원을 압도하는 그들. 애초에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현은 그들 모두가 자신이 어떻게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이 기감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무현에게조차 느껴질 정도로, 섬뜩한 기운을 전신에 치렁치렁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흑의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엔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무현이었다.
 ‘하급 무사들. 삼류도 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
 무현의 눈빛에 한심한 듯한 기운이 엿보였다.
 곳곳에 사람들이 보인다. 뒷골목 왈패들이나 될 법한 자들.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익혔어도 같잖은 것들을 익힌 자들이다.
 ‘납치인가, 아니면 팔려 온 것인가.’
 갑작스레 떠오른 그것.
 동요하지 않는 자들은 어느 정도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동요하는 자들은 무공은커녕 웬만한 근육조차 없는 자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은 납치였다.
 그 순간 가장 앞에서 무언가가 불쑥하고 튀어 올랐다.
 “저, 저! 이곳에선 무얼 배우는 것입니까?”
 가장 앞줄에 있던 소년이었다.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지만 그 소년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미친 것인가!’
 무현은 그 소년을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 소년을 향해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천혈이라. 천혈문天血門인가?”
 “그, 그렇습니다.”
 가슴팍에 새겨진 천혈이란 두 글자를 본 것이다.
 사내는 흥미롭다는 듯 소년을 아래에서 위로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천혈문. 신교삼십대문파 중 하나인가. 그곳의 문주도 이곳 마령곡 출신이었지, 아마.”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자네, 이름은?”
 말을 끊긴 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소문······이라고 합니다.”
 “소문이라고? 신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이름이군그래.”
 “예?”
 “네놈은 지금부터 마령곡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천혈문주에게 들은 말이 있는가?”
 “이, 있습니다. 마령곡에선 이름도 신분도 무력도 필요 없······.”
 “그래? 잘 알고 있군.”
 촤악!
 사내의 한마디가 울려 퍼지고, 한 줄기의 섬광이 긴 선을 이루며 그어진다.
 눈부실 정도로 깔끔한 발검이었다.
 취이이이이!
 피 분수가 뿌려졌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비릿한 혈향.
 가슴이 길게 베인 소년은 그대로 즉사했다.
 “허허헉!”
 주변에 있던 자들 모두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인지 입을 막으며 눈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마령곡에선 이름이 없다. 질문도 없다.”
 무현은 순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부들부들 떨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고작 한 번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죽을 이유였단 말인가?
 “그리고 마령곡은 자랑스러운 신교의 전사를 만들기 위한 곳. 공포 또한 없다. 동시에······.”
 이번엔 주변에 있던 흑의인들의 검이 뽑히고······.
 푸욱!
 소년의 주변에서 입을 막고는 부들부들 떨던 자들에게로 창검이 박혀 들어갔다.
 “······공포에 떠는 자들. 신교엔 필요 없다.”
 “끄아아악!”
 푹! 푸우우욱!
 그렇게 살육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심장이 꿰뚫려 죽고 머리가 터져서 죽는데도 아무 반응 하지 않을 자가 있을 수 있을까.
 공포는 공포를 몰고 왔고, 그 공포를 쫓아 흑의인들의 살수가 펼쳐진다.
 ‘뭐지, 이건?’
 어이없는 상황. 고작 질문 한 번에 수십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무현은 공포에 떨지 않았다.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이런 것인가, 마령곡이? 이런 곳인가, 마교가?’
 반항을 할 수조차 없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 중에서 저 흑의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력을 지닌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럽다. 미쳤어, 이곳은.’
 그렇다. 미친 곳이다.
 벌써 수십을 넘어가는 수많은 숫자의 인명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저 흑의인들은 멈추질 않는다.
 무심하던 무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주변을 둘러보며 의미 모를 분노를 느끼는 그 순간, 뒷짐을 지고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시선이 서서히 무현에게로 향했다.
 무심코 무현도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호오.”
 그 순간 허공에서 부딪친 두 시선.
 사내는 흥미로운 듯한 눈빛으로 무현을 훑어보고 있었다.
 ‘위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듯했다.
 사내의 눈가에 머무는 흥미로움. 그 흥미로움 가득한 눈빛에 등골을 타고 한기가 맴돌 정도였다.
 무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서서히 시선을 사내에게서 옮겼다.
 하지만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한마디였음에도 주변을 웅웅 울리는 듯했다.
 그 한마디의 명령에 흑의인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각자의 병장기를 갈무리했다.
 “흥미롭다.”
 또다시 내뱉어진 한마디에 소란스럽던 주변에 정적이 맴돌았다.
 ‘벌써!’
 사내의 시선을 절실히 느끼며 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 들어선 안 된다.’
 누군가에게든 자기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게 해선 안 된다. 누군가의 눈에 들거나 흥미를 받는다면 무현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일에 휘말린다.
 이곳, 천마신교라는 적지에서 무현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결국 무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일이 닥치면 무현은 무극문의 절예를 풀어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극천검무의 절학들은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구련검과 무극경, 천마신교의 교주인 남악마제를 패퇴시켰던 그 무공의 특성이 무현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무현은 숨겨져야 한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눈에 띄었다.
 위험하다.
 터벅!
 그 큰 공터에 어떻게 그런 큰 소리가 울리는지 알 수 없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지막하게 울리는 그 발소리는 섬뜩할 정도의 정적을 가져왔다.
 터벅!
 조용하게 울리는 발소리.
 코앞까지 도달한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 기운은 무엇인가. 흐음······ 뭔가가 있는데 말이야. 마공? 아니, 정공? 아니다. 거기다 사공도 아니야. 외공은 더더욱 아니군. 무엇인가, 그 기운은.”
 섬칫!
 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사내, 무극경의 내력을 눈치채려 하고 있다.
 “네놈, 이름은?”
 대답할까, 말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바라본 것일까? 단지 자신의 표정의 일그러짐을 눈치챈 것뿐일까? 단지 또 다른 살육을 진행하고자 함일까?
 그도 아니면······ 무극문의 후예란 것을?
 “마교십가. 염마궁의 후예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들썩하고 어깨가 움직였다.
 예상했던 것이 아니다. 무극문의 후예란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시 묻지. 네놈, 이름은?”
 안도감은 깊은 곳으로 몰아냈다.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무현은 숨을 나지막이 내뱉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졌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위하여.
 “······무현.”
 “무현? 특이한 이름이군그래.”
 “무현.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사내의 말을 끊는 무현의 눈동자엔 공포가 없었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드는 것일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무현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은 물과 그릇의 특징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답해 보라. 물의 특징은 무엇이냐.”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무현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흐르는 것입니다.”
 사내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릇은 무엇이냐.”
 또다시 묻는 사내였다.
 무현은 또다시 대답했다.
 “물을 담는 것입니다.”
 무현의 대답에 사내가 한 발자국 또다시 다가왔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
 사내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묻는다. 너는 물이냐, 그릇이냐.”
 “······.”
 “아니, 물이 될 것이냐, 그릇이 될 것이냐.”
 무현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또르르 굴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질문의 요지는 파악했다. 하지만 대답했을 때 사내의 행동이 예상이 가지 않았다.
 짧은 고민.
 무현은 결국 하나를 골랐다.
 “물이 될 것입니다.”
 “물이라. 이유는 무엇이냐.”
 무현의 대답에 사내의 입가가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가는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고······ 또 편안한 길이니까요. 물은 흐르고 흐릅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비켜 가지요. 저는 물이 될 것입니다.”
 “호오, 비켜 간다라. 그렇군.”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면 또한 묻는다. 넌 이 지옥에서 살고자 하느냐, 아니면 강해지고자 하느냐.”
 난해한 질문이었다.
 강해지고자 한다는 다짐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을 뱉는 순간 일을 그르친다.
 무현은 주먹을 한번 꼭 쥐고는 대답했다.
 “살고자 합니다.”
 “그렇군. 영리하군. 네놈은 말이야. 큭큭.”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정답이었나.’
 사내의 미소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한동안 무현을 바라보던 사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몸을 획 돌렸다.
 “이곳에 모인 네놈들은, 지금 이 대답처럼 살기만을 위해 노력한다. 강해진다? 살아남는다면 강해져 있을 것이다. 죽기 싫다면 강해져야 할 것이고 죽는다면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될 것이다.”
 사내는 몸을 돌려 마령곡의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찰박! 찰박!
 죽은 자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곳. 사람의 장기와 피육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길을 걸어 나갔다.
 “이곳은 마령곡. 이 흑의인들은 마령인魔靈人이며 나는 마령인들의 수장, 마령곡주다.”
 사내, 마령곡주의 말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반응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죽은 자가 벌써 수십. 이미 이야기를 듣고 말고 할 것 없이 몰아치는 공포와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죽이고 주변의 분위기에 동화될 뿐이었다.
 “지금부터 네놈들은 어떠한 특권, 혹은 특별한 대우도 바랄 수 없다. 만약 그런다면 죽을 것이다. 이곳에서 네놈들은 짐승이다. 어떤 문파의 후계자든 신교의 권력자의 후계자든, 하물며 이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열 개의 기둥, 저 마교십가의 후예라 해도! 그것에 예외는 없다.”
 마령곡주의 시선이 무현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무현에게로 몰리지 않는 시선들.
 사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우리 마령인들은 네놈들을 가축을 다루는 듯이 움직일 것이다. 네놈들이 쓸모없어진다면 우린 가차 없이 죽일 것이며 필요하고 목적에 부합하다면 살릴 것이다. 이곳! 바로 이 마령곡에서! 우리는 네놈들을 사육하는 주인이 될 것이며 네놈들은 사육당하는 가축이 된다.”
 가축이 된다는 말.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입곡자들이었다.
 고작 그리 큰일도 아닌 사소한 질문 한번에 수십이 죽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후후후! 걱정 마라. 어차피 우리가 네놈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고작 몇 개월뿐이다. 그 이후엔······ 그래, 곧 알게 될 것이야.”
 그 섬뜩한 웃음이 어찌 그렇게 불길한 것일까. 입곡자들은 마령곡주를 보며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네놈들의 혼을 태우고 백을 부숴라. 우리는 네놈들을 죽이려 들 것이고 지금부터 마령곡도 네놈들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살고자 하라. 혼백을 태워 버려도 재만은 남도록 끝까지 살아남아라.”
 마령곡주가 서서히 앞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며 말을 잇는 마령곡주였다.
 “어차피 죽어도, 살아도. 그대들은 천마신교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령곡주와 수십의 마령인들이 마령곡의 입구에 서서 입곡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오 년 뒤, 마령곡은 또다시 열린다.”
 오 년.
 희망도 절망도 아닌 세월이 언급된다.
 “오 년을, 살아남아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마령곡의 입구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사라진 뒤, 마령곡의 입구에 모인 자들의 귓전엔 ‘살아남아라.’라는 말만이 맴돌았다.
 
 
 
 빛이란 하나도 없는 마령곡의 입구로 들어가는 마령곡주의 뒤로 한 사내가 따라붙었다.
 “곡주님.”
 마령인이었다. 치렁치렁 내려온 검은색 천을 이리저리 흩날리며 마령곡주에게로 다가왔다.
 “무엇인가, 십오령.”
 대답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마령곡주는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물은 무엇이고, 그릇은 무엇입니까.”
 터벅터벅!
 마령곡주와 마령인의 음성을 가리며 발걸음 소리가 길게 늘어져 통로의 안을 울렸다.
 “아까 내가 했던 질문이군그래.”
 “그렇습니다.”
 마령곡주가 코웃음을 한번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놈이 자네 조였던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아까 전의 질문은 무엇을 물은 것입니까?”
 “이미 자네는 알고 있을 텐데.”
 그 말 한마디에 마령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대답에 이렇게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령곡주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물은 무엇이냐. 그것은 저 아이가 말한 그대로의 의미다. 그리고 그릇은 그것을 담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그 크기와 내구성만 따라 주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릇이다.”
 “그것은 무력武力이든 지력知力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 봐라,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있는 마령곡주를 보며 마령인은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마령곡주는 원래 말이 없다. 그가 저렇게 말이 많은 것,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그리고 살짝 들떠 있는 것은 분명 아까 전 대화를 나누었던 소년과의 일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또다시 궁금했다.
 “한데 그놈은 물을 골랐습니다. 장애물이 나오면 넘어서지 않고 피해 간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물며 강해짐이 아닌, 살기 위한다고 했으니······.”
 말을 끊지 않고 길게 이어 내는 마령인을 보며 마령곡주가 큭큭 웃었다.
 “십오령, 자네는 보지 못한 것이야.”
 “······?”
 마령곡주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획 돌렸다.
 그의 눈이 통로의 어둠 속에서도 기이한 열기를 품고 시퍼런 안광을 쏟아 냈다.
 “그놈은 영리했다. 자기 자신을 숨겼어.”
 “······!”
 “눈빛엔 분노를 품고 손으론 주먹을 쥐더군.”
 “그 말씀은······!”
 “그놈은 그릇이야. 고작 물 따위를 담는 사기그릇이 아니다. 은그릇? 금그릇? 아니지, 아니야. 그 전에, 무력과 지력, 고작 두 개만 담는 그릇일까? 그것도 아니야.”
 마령곡주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려 어둠 속을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아직 모르겠지만 그 안에 담은 게 만약 불꽃이라면······ 우리 마령인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 입곡
 
 
 
 마령곡에 들어가는 인원은 대략 칠백 남짓. 각각 백 명씩 나뉘기 시작했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백 명의 인원.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 끝없는 정적이 이어지고, 갑작스럽게 앞에서부터 걸음이 멈췄다.
 “네놈들은 칠반이다.”
 무현의 조를 끌고 온 것은 허리춤에 십오령이란 명패를 달고 있는 마령인이었다. 그는 몸을 돌리고 백 명의 인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깨닫고 바라보니 지금 이곳은 아까 보았던 마령곡으로 들어가는 기다란 길이 아니었다. 커다란 공동. 그 안에 백 명의 인원이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정해 주는 대로 이동해 벽면에 뚫려 있는 방의 안에 들어가서 옷을 입도록.”
 흑의인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의 살육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이들. 그들에 대한 공포심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너와 너 그리고 너의 옆으로 열 명, 일문으로 가라.”
 철컥!
 문은 하나에서 열 개까지 존재했다.
 둔탁한 소음을 들으며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선 무현과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수북이 쌓여 있는 투박한 가죽옷들과 한 명의 사람이었다.
 ‘노예다.’
 이리저리 해어진 넝마를 걸치고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칼로 얼굴의 태반을 가리고 있는 사내였다.
 비쩍 마른 몸매. 같은 나이 또래보다 훨씬 더 작은 체구의 무현이었지만 사내는 너무나도 말라 무현보다 훨씬 더 작아 보였다.
 “으으······ 어으······.”
 말조차 못하는 것일까. 노예가 어눌한 목소리로 손짓을 하며 옷 한 벌을 질질 끌고 서서히 다가왔다.
 단지 무현만이 아니었다. 무현과 같이 방에 들어온 모두에게 한 명씩 노예들이 따라붙었다.
 “이걸 입으라는?”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무현.
 ‘이빨이 없다?’
 이빨이 모조리 뽑혀 있었다. 그렇기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악랄하다.’
 무현은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서서히 다가오는 사내에게 직접 다가가 그대로 옷을 잡았다.
 “윽!”
 하지만 순간적으로 몸이 기우뚱하고 치우쳤다.
 옷의 무게. 도저히 무현이 한 손으로 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어 우어워······.”
 무현은 옷을 두 손으로 쥐어 간신히 들었다.
 “이어······ 우에······.”
 노예가 다가와 무현이 든 옷을 몸에 걸쳐 주었다. 무현이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었던 옷을 한번에 들어서 무현의 몸에 걸치는 노예였다.
 팔 부분과 옷 부분을 각각 따로 걸치는 옷이었다. 옷 부분은 어깨까지만 가죽이 내려져 있었고 팔 부분을 그 옷 부분의 어깨를 가리고 있는 부분에 끼워 각 관절 부분에 달려 있는 자물쇠로 잠그는 것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벗지 못하게 하기 위한 구조였다.
 무게의 이유는 가죽의 옷 위에 덧대어진 철괴들이었다. 가죽의 위에 철괴를 덧대고 그 위에 다시 가죽을 덧댄 듯했다.
 “큭!”
 옷이 몸에 걸쳐지기가 무섭게 무거운 중력이 느껴졌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힘들어지는 무게였다.
 무현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려 사방을 훑었다. 그러다 곧 한 장소에 시선이 머물고, 무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스무 관.’
 친절하다면 친절하다랄까. 문의 옆에는 노골적으로 스무 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한데.’
 스무 관(1관: 3.75kg)이면 무현의 몸무게의 두 배에 가깝다. 결국 자기 몸무게의 세 배나 되는 것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으윽.”
 단지 상체에만 입는 게 아니었는지, 저 구석의 옷 무더기에서 노예 사내가 하체에 입는 것으로 보이는 가죽옷을 더 가져오고 있었다.
 
 가진 바 덩치에 따라 혹은 키에 따라 입는 옷의 무게가 달라졌다.
 마령인의 가장 앞에 있는 산적처럼 생긴 사내는 무현보다 훨씬 더 두꺼워 보이는 옷을 입었다. 거기다 옷의 전체에 확연하게 튀어나와 있는 철괴의 모양은 언뜻 보아도 무현이 입은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워 보였다.
 “단지 무게만을 위해 만들어 낸 철괴다. 크기에 비해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백 명의 인원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땅을 기듯이 간신히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런 주변의 모습을 바라보던 무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십전총해에서 보았다. 분명 지금은 버틸 만하겠지만 서서히 힘들어질 거다. 이 옷은 결국 한시도 빠짐없이 근육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무현은 지금 갓 성장하는 시기다. 열다섯 살. 가장 클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근력을 한계까지 사용하게 되면 성장이 멈추고 근육만 늘어난다.
 ‘이렇게 생겨나는 근육은 비효율적이다.’
 지금 무현에겐 무공을 펼치기 위한 근육만이 필요하다.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쓸데없는 잔근육이 붙는다. 무공을 사용할 때에는 불필요한 근육도 붙는다. 그렇게 되면 비효율적인 균형이 이루어진다.
 십전총해에서 얻은 지식들을 떠올리며 무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확실하다. 이곳은 고수를 만들기 위한 곳이 아니다. 단순히 정예병을 만들기 위한 곳. 절정을 바라는 곳이 아닌, 그저 짧은 기간 안에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병력만을 만들기 위한 곳이야.’
 이곳은 그저 쓸 만한 정예병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이것에서도 드러나는 마령곡의 실체.
 과거 정마대전 당시 무림은 압도적으로 많았던 마교의 일류와 절정 고수들의 층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
 무현의 눈가에 이채가 머물렀다.
 이것으로 진정한 마령곡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인원이 공동에 모이고, 공동의 벽면에 뚫려 있던 방의 문이 서서히 움직였다. 어떠한 기관이라도 있는 것인지, 딱히 사람이 움직이게 한 것으론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극거리는 돌 끄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리고 마령인이 입곡자들을 한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지금 네놈들이 입고 있는 그 옷에 익숙해지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익숙해진다라는 그 말. 몇 명인가의 사람들이 그 의미심장한 말에 의문을 품었다.
 “우리 마령인들은 그저 네놈들이 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곳으로 밀어 넣는다. 먼저 좌측을 봐라.”
 말을 끝내고 손을 좌측으로 향하게 한 마령인.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의 시선이 마령인의 손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 명의 인원은 모두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등골을 달리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곳엔 시체들이 있었다.
 목내이가 되어 썩어 문드러져 있는 시체들, 뼈가 분질러져 난잡하게 쌓여 있는 시체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며 쌓여 있는 시체들은 스산한 기운을 울컥울컥 쏟아 내고 있었다.
 “그 옷에 익숙해지려 하지 않았던 놈들의 말로다.”
 섬뜩한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긴장한 칠반을 바라보던 마령인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사지死地. 신교의 그 누구도 감히 쉬이 볼 수 없는 마령곡이다. 네놈들은 현세의 지옥에 온 것이다. 살려고 발버둥 쳐라.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네놈들이 마령곡에서 나오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조성되던 공포 분위기가 마령인의 교묘한 몇 마디의 말에 호승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강해진다면, 네놈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싸늘했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 순간. 그 절묘한 화술로 인해 끓어오르고 있는 분위기 가운데서도 무현의 차분한 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저 교묘한 화술로 백 명의 인원을 움직이게 하는 마령인의 언행에 놀랄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무서운 곳인가.’
 처음 인원을 줄인 것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과 마령인에 대한 공포를 주기 위해, 중간에 노예를 보여 준 것은 신교라는 조직에 대한 공포를 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 시체들을 보여 준 것은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또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 주기 위해서.
 몇 가지 가설이 무현의 머리에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부터 네놈들에겐 호號가 붙을 것이다. 지금 네놈들이 입은 옷엔 그 호가 적혀 있다. 모두 합쳐 구십육호까지 존재할 것이지.”
 꽤나 많은 숫자였다. 공통점 하나 없는 제각각의 사람들이 아흔여섯 명.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숫자다.
 “저번 분기의, 아니 마령곡이 만들어진 이후 모든 분기에 살아남은 인원은 삼 할 이하다. 마령곡이 만들어진 초기엔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단 이야기도 존재한다.”
 “무, 무슨!”
 또다시 소요가 일어났다.
 이곳에 모인 인원이 아흔여섯 명. 삼 할이면 서른 명 가까이다. 그 정도의 인원만이 살아남는다는 소리는 나머지 예순 명 넘는 인원이 죽는다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한 시진. 네놈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자진하고 싶은 자들은 마음껏 하도록. 오히려 지금 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마령인은 그 말을 끝으로 마치 어둠과 동화되는 듯이 허공에 흩어지며 모습을 감췄다.
 
 
 
 끼이익!
 한 사내가 말라서 쩍쩍 갈라진 나무 쪽문을 열었다.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에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린 사내는 혀를 한번 차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불쾌하다.”
 그저 문을 여는 소리 하나마저도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문을 열자 길게 이어진 통로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잠시 멈칫한 사내였지만, 이내 혀를 한번 차며 동굴 같은 그 길을 걸어 나갔다.
 터어엉!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꽤나 길게 이어진 통로의 속, 사내는 계속해서 얼굴을 찡그린 채 발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내의 앞에 또다시 문이 나타났다.
 아까 사내가 열었던 문이 아무런 특징 없는 밋밋한 것이었다면, 지금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문은 기이했다.
 수많은 신불악귀神佛惡鬼 이매망량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철문. 섬뜩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된 그 기이한 마귀들의 모습은 언제라도 문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쳤다.
 끼이익!
 또다시 문소리가 울렸다. 통로를 지나고 또 하나의 문을 연 사내.
 화악!
 문을 열자마자 한 줄기 돌풍이 사내의 전신을 세차게 쳐 냈다.
 끼야아아아악!
 불어오는 바람은 단순한 돌풍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귀곡성.
 문의 건너편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마기魔氣와 귀기鬼氣였다. 그것은 문의 건너편에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휘이이이잉!
 문 너머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기운 속, 사내의 시선이 서서히 정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문의 건너편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 마치 무저갱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륵!
 갑자기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내가 들어오자마자 타오른 호롱불이었다.
 그리고 그 호롱불의 빛에 사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암로를 지나 이 암동까지 도달한 사내.
 그는 마령곡주였다.
 화르륵!
 공동의 곳곳에 켜지기 시작하는 불꽃. 하나둘씩 켜져 가는 불꽃에 공동의 내부가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령곡주는 볼 수 있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카아아아.”
 그곳엔 수십수백의 인영이 있었다.
 하나같이 일어서서 고개와 어깨를 아래위로 흔드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무언가’가 있었다.
 실로 괴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전신에 걸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옷만 없는 게 아니고 머리카락을 포함한 모든 털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기름을 칠한 것처럼 반질반질한 육체는 기이하게도 자주색을 띠고 있었고 검은자가 없이 흰자만 있는 눈동자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캬아아아.”
 울음소리인지 숨소리인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괴음을 내며 그 ‘무언가’는 마치 맥동을 하듯 어깨를 들썩였다.
 마령곡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공동의 가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며 불편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자死者, 쉰 명이 조금 덜 됩니다. 곧 시체가 도착할 것입니다.”
 마령곡주의 말은 주변에 가득 퍼져 나갔다.
 놀라운 내력이다.
 공동의 넓이가 넓이이거늘 나지막하게 한마디 내뱉은 것이 공동을 울릴 정도였다.
 “안색이 나쁜데, 곡주. 괜찮나? 킬킬킬!”
 공동을 울리고 있는 마령곡주의 목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 그 사이를 비집고 한 줄기 불길한 음색이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그런 거지, 킬킬킬! 그런데 말이야, 쉰 명이라니, 너무 적지 않나?”
 마치 청동을 벅벅 비비는 것 같은 불쾌한 목소리. 마령곡주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첫 대면 때는 언제나 무식한 놈들이 따르지. 그 무식한 놈들이 시작이든 무엇이 시작이든, 살육을 행하고 공포를 조성하는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인원이 좀 적지 않나?”
 “적고 말고는 순전히 때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껏 적어도 일흔 명은 되었을 텐데 말이야. 보통은 백 명은 되었고. 킬킬킬! 변화가 많았나 보군, 곡주.”
 흔들리는 호롱불의 음영 속, 마령곡주의 정면에 있던 사내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호롱불의 음영 속에서는 그곳에 존재함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것 같은, 희뿌연 안개와도 같은 사내가 턱을 괴고 있었다.
 이 사내, 이 공동 안의 불길한 기운의 주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잿빛의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분명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이곳에선 벌어질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염마라, 염마. 그 망할 놈의 후예가 나타났다 하던데 말이야.”
 “······.”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야? 고작 쉰 명 남짓 죽인 것을 보면.”
 마령곡주의 눈가가 한번 꿈틀거렸다.
 “지존께서 데리고 오셨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교 내에 돌고 있어서 말이야. 거의 확실한 듯해, 킬킬킬!”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몰라? 마령곡은 염마궁의 잔재. 그쪽 정보는 민감할 텐데?”
 대답하지 않는 마령곡주를 바라보던 사내가 피식하고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핏빛의 입술에 새하얀 치아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뭐, 그건 그렇고 말이야, 근데 곡주, 웃기지 않나? 교가 만들어지고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십가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던 염마궁이야. 그 오랜 세월 동안 교주의 오른팔을 자처했던 가문이란 말이지. 한데 정마대전 당시, 충분히 도울 수 있었음에도 지존께선 마치 팽을 시키듯 무너져 가는 염마궁에 일말의 지원조차 하지 않으셨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 후예를, 하물며 내가 있는 이 마령곡에? 킬킬킬! 지존께서? 그 지존께서 이 마령곡에? 킬킬킬!”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마령곡주는 그저 입을 꾹 닫고 사내의 말을 들었다.
 “무엇이 되었든, 지존의 개입은 확실한 것인데 말이야. 한데 어째서일까. 정말이지 궁금하단 말이야. 이제 구가九家로까지 불리는 이 십가에 망령을 들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제가 생각할 범위 내의 일이 아닙니다.”
 “지존이 하신 일이니까? 킬킬킬! 사실 나는 곡주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염마의 후예란 놈이 꽤 마음에 들었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가면을 쓴 듯이 무심하지!”
 도발을 넘어 조롱하는 듯한 어조였다.
 “곡주, 염마궁의 몰락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당사자이니 말이야. 염마궁의 당주까지 되었던 자였으니 말이야! 킬킬킬!”
 무표정했던 마령곡주의 얼굴이 결국에 일그러졌다.
 마령곡주는 이를 으득 씹으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런 곡주에게 묻지. 곡주는 어떻게 생각해? 염마궁이 이 귀마鬼魔와 빙검마왕氷劍魔王의 손에 의해 신교에서 소멸된 지 고작 이십 년 남짓!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나? 킬킬킬!”
 귀마!
 그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사이한 수법과 정도에서 벗어난 여러 외도外道의 학문들을 보유하고 있는, 천마신교에서도 그 기이함과 사이함이 극에 다다른 자. 그리고 동시에 정마대전에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살육을 저지른 광인狂人이었다.
 “나조차 이렇게 흥분되는데 말이야! 빙검이 그 아이를 봤다면 어떨까! 그 표정 한번 가관일 것인데 말이야, 킬킬킬!”
 귀마가 언급한 다른 한 명.
 빙마궁, 빙검마왕.
 본래의 출생은 새외의 세력 중 하나인 북해빙궁으로, 그곳에서 버려진 후 마교로 흘러들어 와 빙공氷功을 극한으로 익혀 마교십가의 일인이 된 사내.
 정마대전 당시에 개인의 원한으로 북해빙궁과 홀로 대적하여 궁주의 목을 베어 냈던 천마신교의 열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바로 빙검마왕이었다.
 “······.”
 마치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듯이 들떠 있는 귀마였지만, 그를 상대하는 마령곡주는 두 마교십가 가주들의 별호에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느꼈다.
 마령곡.
 귀마의 말대로 염마궁의 잔재다. 초대 염마가 만든 이후 대대로 염마궁에서 그곳을 관리했다.
 그것뿐인가, 염마의 후계자와 염마궁의 마인들 또한 마령곡에서 뽑혔다. 대대로 염마궁의 가주는 마령곡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마라염마신공을 얻어 낸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염마궁의 마인들은 마령곡에서 선발된 정예들이다.
 마령곡은 염마궁 그 자체다.
 염마궁은 마령곡 그 자체다.
 아니, 자체였다.
 ‘나는 기억한다.’
 귀마와 빙검마왕. 그들이 모략으로써 주군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것을.
 그리고 빙검마왕과 합공하여 염마를 죽인 죄를 물어 귀마에게 이 마령곡에서 죽은 자를 이용해 이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혈귀血鬼라는 괴물들을 만들라고 벌을 내린 지존을.
 그리고 또한 기억한다.
 자신에게 염마궁, 그리고 신교의 속가제일무공이자 염마궁의 비고에 숨겨져 있던 구화마공九禍魔功과 염마궁 가주의 성명병기인 적마갑赤魔匣을 던져 주며 귀마에게 검을 겨누지 말라고 했던 지존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알고 있다.
 지존은 단지 정마대전 때 큰 힘을 발휘한 혈귀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염마궁을 팽한 것이라고. 그리고 동시에 그 혈귀의 원재료가 되는 ‘인간’을 키우기 위해 자신을 마령곡주로서 살려 두려 한 것이고.
 “난 너무나도 그 아이를 보고 싶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재목일까.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재武才이기에 지존께서 데려다 놓은 것일까? 지존은 그 아이가 마라염마신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 걸까?”
 우웅!
 귀마의 안개와도 같은 신형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점점 사람의 모습을 찾아 갔다.
 기괴하고, 흉측했다.
 봉두난발의 머리에 초점이 흐린 눈동자, 넝마라고 부름이 옳을 잿빛의 겉옷은, 표현하자면 마치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귀신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령곡주, 일그러지던 표정에 결국 파탄이 찾아오고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리고 말았다.
 “불경한 생각은 접어 주시기 바랍니다.”
 “뭐라······?”
 “지존의 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마령곡의 규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곡에 입곡한 자는 교주님이 아니라면 결코 건드릴 수 없음입니다.”
 “호오, 언제부터 마령곡이 그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나? 킬킬킬!”
 실로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였다.
 도발에 도발, 조롱에 조롱.
 결국 참지 못한 마령곡주의 이마에 핏줄이 툭 하고 튀어나오고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우리 마령인들이, 이 마령곡의 주인들이 당신께 존대를 하며 존칭을 붙이는 이유는 오직! 지존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령곡주의 말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귀마의 얼굴이었다.
 연신 얼굴에 기이한 웃음만을 짓고 있던 귀마의 표정에 노기가 뜨기 시작했다.
 “이 귀마가 고작 그 이지도 없고 혼도 없는 악귀들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도구란 말인가!”
 “그것이 약조였습니다, 당신과 지존의!”
 존칭이 사라졌다.
 당신이라.
 귀마의 노기가 격분으로 변해 갔다.
 “킬킬킬! 약조라, 약조! 좋아, 좋은 용기야. 하지만 곡주.”
 “······.”
 “가끔은 용기가 치기와 만용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알길 바라.”
 화악!
 끼야아악!
 폭사되는 살기에 날카로운 귀곡성이 울리기 시작하고 귀마의 귀기와 마기에 상응해 전신이 곤두설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흡!”
 철그럭!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잡은 마령곡주가 튕겨지듯 뒤로 크게 물러섰다.
 귀마에게서 느껴지는 놀라운 살기.
 단지 그 기세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고 만 것이다.
 “킬킬킬! 쉰 명이면 반년은 걸리는 것 알지? 고작 반년이야, 고작!”
 “······?”
 “그러니까 마령곡주······ 고작 반년의 시간이니까 곡에서 입곡자들 훈련이나 시켜. 이곳에 와서 죽음을 자처하지 말고! 킬킬킬!”
 귀마가 한 발자국 다가온다.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옮겼을 뿐이다. 무언가를 하려 하는 움직임이 아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그저 발걸음 한번 옮겼을 뿐이다.
 하지만 마령곡주는 무언가를 느꼈다.
 서서히 번져 가는 잿빛의 안개.
 무언가가 날아온다!
 까아아앙!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둘린 검. 마령곡주는 무언가를 검으로 가격하고는 그 반발력으로 땅을 긁으며 크게 밀려났다.
 “호오, 막다니. 역시 교의 원로원급 고수야, 킬킬킬! 그럼 더 막아 봐!”
 “······!”
 슈아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또다시 무언가가 온다!
 ‘하나가 아니다!’
 깡! 까가가각!
 둘을 넘어 셋, 아니 그 수를 셀 수 없는 숫자의 살기. 하나씩만 날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팔방을 점하며 공격해 왔다.
 까가가가강!
 하지만 쳐 내기 시작한다.
 하나건 둘이건. 혹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숫자이건 간에 차례차례로 튕겨 냈다.
 슈아아악!
 끊이지 않는 공세에 막아 내지 못한 공격이 좌측에서 튀어 오른다.
 쳐 내는 것은 사실 고작 몇 개에 불과했다.
 일말의 틈도 없이 날아드는 살기.
 튕겨 내지 못한 것들은 끊임없이 마령곡주를 스치고 지나갔다.
 슈악!
 하늘에 나풀나풀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옷자락 그리고 핏방울.
 조금이라도 더 늦게 피했으면 머리가 터져 버리고 살이 뚫려 버렸을 공격들이었다.
 그러한 공세를 계속해서 쳐 내고 간발의 차이로 피하는 상황. 하지만 마령곡주의 움직임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검을 놀리며 튕겨 오르는 무형의 기운을 향해 검을 움직일 뿐이었다.
 “놀라워, 킬킬킬!”
 “······.”
 “당황도 하지 않아, 킬킬킬!”
 이 강자존의 천마신교에서 곡주의 자리까지 올랐다. 도검에 베인 것이 수십이요 죽을지도 모르는 공격을 피한 것은 수백이다. 그렇기에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운다!
 퍼어어어어엉!
 기해를 박차고 중단전으로 올라오는 구화마기가 사지와 백해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눈앞이 맑게 개고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 순간, 마령곡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우우우우우웅!
 기운을 끌어 올린 그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것이 온다!
 “크윽!”
 차자자자장!
 검을 미친 듯이 놀렸다.
 무엇이 날아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검을 놀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고 마령곡주의 허리가 꺾이며 뒤로 날아갔다.
 우웅! 타닥!
 허공으로 날아가던 마령곡주의 인영이 공중제비를 돌더니 가볍게 착지했다. 마치 난도질을 당한 듯이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지만 마령곡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검을 들었다.
 “킬킬킬! 놀랍구나, 놀라워. 저거 봐 봐. 네놈도 살아 있을 때에 이런 놈을 봤어? 못 봤잖아! 놀라운 놈이야! 고작 속가 무공 가지고, 킬킬킬!”
 격분하던 귀마의 표정이 스르르 풀린다.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잿빛 안개와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끝이오?”
 호기로운 한마디였다.
 가슴팍을 몇 번 두드려 지혈을 한 마령곡주는 기수식을 취하며 고작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있는 귀마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귀마에게선 적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반대로 놀란 마령곡주. 미간을 찌푸리며 귀마를 바라보았다.
 “쯧쯔! 보지 못했나? 아래 좀 봐 봐, 킬킬킬!”
 귀마의 말대로 서서히 고개를 아래로 내린 마령곡주는 그제야 이 공동의 입구, 철문의 문지방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그럭!
 고작 문지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귀마와 마령곡주가 대치를 이루었다. 마령곡주의 불타는 듯한 눈빛을 바라보던 귀마는 특유의 불길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끝이야. 아쉽지만 그 문지방을 넘으면 지존과의 약조를 어기게 되거든, 킬킬킬! 아아, 그리고 말이야, 염마의 후예와 접촉을 하든 말든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안 그런가? 들어 보니 환마 그놈도 움직이는 것 같던데 말이야, 킬킬킬! 염마가 죽은 이후 마령곡은 이 정도로 휘둘리는 존재가 된 것이지, 킬킬킬······!”
 끼이이이익!
 서서히 닫혀 가는 철문. 길게 늘어지는 귀마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그 순간, 마령곡주의 검에 서린 붉은빛 아지랑이가 실선이 되어 쏘아진다!
 까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철문을 강하게 쳐 내는 일 검.
 만약 철문이 없었다면 귀마에게 직격했을 일 검이었다.
 “건드리지 마시오, 이 마령곡을.”
 한마디 말을 씹어 내듯 내뱉은 마령곡주.
 끼이익!
 아주 미세한 틈 사이로 또다시 귀마의 새하얀 치아가 번쩍하고 요사스러운 빛을 뿌렸다.
 “킬킬킬!”
 끼이익!
 쇠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와 철문의 소리.
 두 소리가 어우러지며 기나긴 암도를 울렸다.
 
 
 
 자진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의 눈빛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확연하게 보였다. 마령인이 바람을 불어넣었기 때문일까, 칠반에 모여 있는 남녀노소 백 명에 가까운 인원 모두가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을 발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한 시진이 지나자 공동에 찾아온 것은 마령인과 수많은 무기들이었다.
 검, 도, 창 구분 없이 기형 병기를 포함한 수많은 무기들이 송아지가 끄는 수레에 담겨 공동의 중앙에 놓였다.
 “이건 네놈들의 생명줄이다.”
 마령인이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느릿느릿 움직인 칠반의 인원이 서서히 수레로 다가와 수북이 쌓인 무기들을 하나씩 챙겨 가기 시작했다.
 ‘검.’
 무현은 그 수레의 안, 깊숙한 곳에 보이는 한 자루의 검으로 손을 뻗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검은 아니었다. 검면이 평평한 검. 언뜻 보면 북방의 전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군검에 가까웠다.
 쿵!
 다른 검에 비해 월등한 무게를 자랑하는 그 검을 내려놓자 땅이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정도라면.’
 빠른 움직임은 불가능하겠지만 일격에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다. 거기다 일반적인 검에 비해 내구도도 높을 것이다.
 ‘무엇보다 무게가 무거우니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무현은 흡족한 듯이 한번 미소를 지은 후에 그 검을 들고 구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레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무기가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것은 어김없이 마령인이었다.
 “모두 각자의 무기를 고른 모양이군. 좋다, 그럼 이제부터 진정한 마령곡의 시작이다. 전원, 중앙으로 모이도록!”
 마령인의 말과 함께 몸에 두른 철괴의 무게 때문에 누워 있던 칠반의 인원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령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느려. 언제나 명령은 빠르게 이행한다.”
 푸욱!
 중앙에 있던 중년인이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에 왜소했던 그. 철괴의 무게에 못 이겨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있던 그의 복부에 마령인의 칼이 파고들었다.
 촤악!
 그리고 그 검을 옆으로 크게 뿌려 치며 배를 횡으로 갈라 버린 마령인. 검에 묻은 피가 그대로 옆으로 뿌려졌다.
 아니, 마령인이 뿌렸다.
 “느리다고 했다.”
 부웅! 솨아악!
 마령인이 중년인의 복부에서부터 솟구친 피를, 아직 다 일어서지 않은 자들에게로 날려 보냈다.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간 핏방울은 엉거주춤하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내들을 향해 쏘아졌고, 그 핏방울은 사내들의 전신에 뿌려졌다.
 푸부부북!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액체가 묻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비수라도 맞은 듯한 소음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느긋한 것인가. 고작 한 시진의 자유 시간에 많이 해이해졌군.”
 그 피를 맞은 자들, 전신에 조그마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즉사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전신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죽었다.
 검을 단 두 번 휘둘렀을 뿐, 하지만 셋이 죽었다.
 “느리다.”
 나지막한 한마디다.
 그 말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써 칠반에 다가왔다.
 모두가 벌떡 일어섰고, 전신에 걸쳐진 옷의 무게조차 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중년인의 앞에 열 줄로 모였다.
 “달려라.”
 “······?”
 열 줄로 나란히 자리를 잡은 인원을 향해 마령인이 내뱉은 한마디.
 “뒤쪽으로 처지는 자들은 한 명씩 죽게 될 것이다.”
 설명은 없었다. 달리란 명령, 가장 앞줄에 있는 자들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그 뒤를 따르는 자들 모두가 달리기 시작했다.
 푸욱!
 뒤편에서 울리는 섬뜩한 파육음. 뒤돌아보는 자는 없었다.
 푹! 푸우욱!
 “끄아아악!”
 죽음은 피하지 않는다. 달리기를 계속할수록 파육음은 이어졌다.
 ‘후욱!’
 무현은 가장 마지막, 구십육호였다. 하지만 지금은 중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달리자마자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무현은 무리를 해서 속도를 높여 중앙을 유지했다.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처지지도 않았다.
 “흐으윽! 끄으윽!”
 다섯 바퀴쯤 됐을 무렵, 달리고 있던 한 소녀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당연, 그 주변에 있던 자들도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푹! 푸부부북!
 “끄아악! 사, 살려······!”
 “예외는 없다.”
 퍽!
 이번에도 뒤돌아보는 자는 없었다. 뒤편에서 들리는 섬뜩한 파육음은 다리를 멈추기는커녕 공포로 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그렇게 열 바퀴를 넘었을 즈음이었다. 뒤로 처지는 자 없이 모두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렸으니 열 바퀴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달린 것이고, 어찌 보면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칠반의 인원이 생각하는 것. 마령인의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느려지면, 죽는다.”
 뻐어어엉!
 이번엔 검이 아니었다. 마령인이 인원의 중앙에 달려들었다. 주먹과 발이 날아들었고 도저히 피육으로 낸다고는 할 수 없는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이 허공으로 비상했다.
 “흐윽! 흐아악!”
 비명인지 울음인지 그도 아니면 악에 받친 외침일지. 살아 있는 칠반은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열다섯 바퀴가 되었을 무렵, 마령인은 그제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사자는 열하나. 고작 달리기 한 번에 열하나가 죽었다.
 “허억! 허억! 끄으윽!”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근육에 일어난 경련과 호흡이 불안정해 일어난 강렬한 고통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땅에 쓰러져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일어나라. 운기토납을 실시한다. 구결은 지금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칠반을 바라보면서도 마령인은 가차 없었다. 일어나란 명령과 함께 또다시 검을 드는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하나 둘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분명 숨이 끊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다.
 “신교의 심법은 역천逆天의 심법. 흔히들 마공은 속성의 심법이라 한다. 허나 그것은 틀린 말. 역천이란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면 그 순리를 먼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듣거나 말거나 이어지는 이야기.
 무현은 그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무극경의 내력을 전신에 휘둘렀다. 순식간에 기혈을 타고 흐르는 무극경의 기운. 고통스러웠던 근육에 약간이지만 편안함을 가져다주었고 들쑥날쑥한 숨도 다소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크윽!”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느낌에 비해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마치 쩍쩍 갈라질 정도로 마른 땅에 물 한 바가지 뿌렸을 뿐이랄까. 전신을 치닫는 치명적일 정도의 고통은 무현의 일천한 무극경의 내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부터 구결을 낭독한다. 암기하라.”
 무현이 그 정도인데 다른 자들은 어떠할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력을 익힌 자들은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부지기수다. 모두 마령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중음생陽中蔭生, 음중양생蔭中陽生, 천지조화교원天地造化郊原, 흡기삼혈吸氣三血, 축기단전畜氣丹田, 삼단일통三丹一統, 진원백회眞元百會.”
 마령인의 구결 낭독이 시작되었다. 조금이나마 내력이 있는 자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려 최대한 구결을 암기했다.
 “다시 한 번이다. 양중음생······.”
 “······!”
 무현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 갔다.
 무극경의 내력엔 따로 구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단어 하나를 읽는 것으로 내력을 쌓기 때문이다. 그러니 딱히 내공 구결에 대해 무엇이 대단하고 무엇이 허접스러운지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은 없다.
 하지만 십전총해에서 알게 된 지식은 있다.
 지금 들려주는 구결. 어딜 어떻게 보나 마공이 아니다. 애초에 음과 양을 논하고 삼단을 논하는 것부터가 도가道家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직 쓰러져 있는 놈들이 있군. 분명 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말이야.”
 퍼억!
 우드득!
 이번엔 죽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섬뜩한 골절음이 울렸다.
 가볍게 걷어찼는데 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였다. 죽진 않았지만,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은 결국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웠으면 운기하라. 익히면 몸이 편안해질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암기한 자들은 결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현도 마찬가지. 실제로 운기를 시작하자 구결에 따라 기운이 움직였다.
 ‘삼킨다!’
 하지만 이내 치고 올라온 무극경의 내력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이질의 내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놀라워.’
 다른 성질의 내력을 집어삼키는 무극경은 놀라운 힘이었다.
 “한 번 더······.”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운기를 끝내고 정신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향하게 한 무현이 처음으로 보고 들은 것은, 상체만 일으킨 채로 반쯤 실신해 있던 자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구결을 암기하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역천기공逆天氣功. 마공魔功의 구결을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마魔에 입문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구결은 순서대로 역태극逆太極, 천지역변天地逆變, 역천흡기逆天吸氣······.”
 “······!”
 또다시 놀라는 무현. 분명 아까와 비슷한 구결이었지만 의미가 극변했다.
 ‘역천기공이라 했는가!’
 처음 느낌은 악랄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경악스러웠다.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음과 양, 그것의 위치를 바꿔 내력을 쌓는다. 음양의 조화가 있을 때 빛이라 표현할 수 있는 정공의 내력이 쌓인다면 역천기공은 그 반대, 어둠이라 표현할 수 있는 마공의 내력이 쌓인다.
 ‘그······조차도 집어삼키는 것인가!’
 시험 삼아 실행한 역천기공. 그리고 그것조차 집어삼키는 무극경.
 울컥!
 하지만 그 순간 살심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눈을 들어 마령인을 바라본 무현. 전신을 가득 채우는 살기에 눈이 붉게 충혈되고 입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좋다! 그것이야말로 마공!”
 살기를 뿜어내는 무현. 하지만 그런 무현을 바라보는 마령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탄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마공은 감정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살심, 분노, 증오, 절망, 집념. 수많은 감정들은 마공에 커다란 힘을 실어 줄 것이다! 다시 운기하라!”
 무현이 잠시 눈을 뜨고 주변을 훑었다.
 비단 무현만이 아니었다. 반 이상의 인원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바꾸며 운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현은 심호흡을 하고 감정을 가다듬었다.
 단전 속, 서서히 나타나는 검은 기운이 있었다.
 마기.
 감정을 움직인 그 기운은 마기였다.
 ‘이게 마기.’
 이것은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하는 기운이었다.
 강렬하고 격했다. 마치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전신을 녹일 듯한 기운이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무극경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하지만 무극경은 그것을 잡아먹고 있었다.
 지금 익히는 정공과 마공이 한 줄기 강이라면, 무극경은 바다와도 같았다.
 “일어나라!”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운기 삼매경에 빠졌던 무현은 마령인의 외침에 어쩔 수 없이 격렬한 근육통을 감내하고 일어섰다.
 “호오, 네놈들은 이미 내가수련을 한 자들인가 보군.”
 마령인의 의미심장한 말에 일어서 있던 무현은 그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일어난 사람은 고작 열 명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아직도 가부좌인 상태. 마령인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열이라. 많은 수야.”
 “······.”
 무현을 포함하여 자리에서 일어선 열 명의 인원은 서로를 한번씩 바라보았다.
 뜨끈한 기류가 흘렀다.
 중년인 둘, 나이와 성별을 알 수 없는 자가 둘, 청년이 셋, 무현과 동년배로 보이는 소녀가 두 명 있었다.
 “보통 한 반에 다섯 이상은 없는데 말이야.”
 마령인이 열 명의 면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일어나 있는 열 명은 그런 마령인의 눈빛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는 구성이군, 하하하!”
 열 명의 모습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마령인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운기를 하라. 본래 익히고 있던 심법은 철저히 배제하도록. 걱정 마라. 어차피 네놈들이 익힌 것이 마공인 이상 부딪치지는 않을 것이니.”
 마령인의 명령에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열 명. 무현은 다시금 자리에 앉기 시작하는 아홉 명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도 운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난 지금, 칠반의 입곡자들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졌다.
 수련이 힘든 것은 당연했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허기였다.
 마령곡의 내부에선 하루에 단 한 번의 식사만이 있었다. 죽을 정도로 힘든 수련을 끝내고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양도 많지 않은 식사가 단 한 번만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입곡자들은 언제나 허기에 허덕였다.
 지금도 곧 음식이 올 시간이었다.
 가장 배고픈 시간.
 칠반의 입곡자들 모두가 배를 붙잡고 흐릿하게 풀어진 눈빛으로 칠반 공동의 입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끼기기긱!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부터 마령인이 나타났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맴돌았다.
 “식사 시간이다.”
 마령인이 수레를 하나 끌고 왔다.
 하루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 빈곤한 식사 시간.
 고깃덩어리 하나, 물 한 바가지, 다 썩은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 거무튀튀한 죽 한 바가지와 벽곡단 두 알.
 빈곤한 식사였다. 아니, 이걸 식사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죽을 만큼 힘들고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데도 이런 식단이라니. 모두 화색이 돌았다가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모두 배급받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빈곤한 식사라지만 하루에 한 번 나오는 저것조차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현도 마찬가지였다.
 오도독!
 거무튀튀한 죽을 씹고 있었지만 들리는 것은 돌이 씹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현은 상관하지 않고 죽을 계속해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지난 사흘간 무현은 단 한 번도 허기를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정도의 식사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그나마도 힘이 나지 않는다.
 다 썩어 문드러진 음식이라도, 설사 독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무현은 먹을 수밖에 없었다.
 먹지 않으면, 결국 죽음밖에 없으니까.
 으득!
 죽을 다 먹은 무현은 벽곡단 하나를 씹으며 나머지 하나는 품에 넣었다.
 이것도 첫날 깨닫게 된 것이었다.
 첫 번째 날, 두 번째 달리기 수련에서 무현은 마령인의 검에 죽을 뻔했다. 아니, 실제로 등가죽을 살짝 베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하루에 고작 두 개만 지급되는 벽곡단을 허기에 못 이겨 한번에 모두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단지 무현만이 아니라, 몇 명인가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달리기 수련 때, 무현은 심각할 정도의 허기에 달리기가 느려졌고 검을 들고 달려드는 마령인을 보자 간신히 앞으로 치고 나와 거죽만 베이는 것으로 살 수 있었다.
 물론 무현과 똑같은 일을 한 사람들 중에 무현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
 그 달리기 이후 무현은 반쯤 기절했다. 살기는 했지만 독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심각한 허기와 피로에 기절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무현은 벽곡단을 하나씩은 남겨 두고, 꼭 두 번째 달리기 수련 직전에만 섭취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허기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고파.”
 생각으로 내뱉던 말이 입으로 나왔다.
 무현은 배를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결코 고작이 아니다. 역겨울 정도로 맛이 이상한 죽과, 노린내 때문에 토가 나올 정도의 고기. 거기다 양까지 적은 그것들을 먹고 하루 종일 배를 굶주린다는 것은, 가히 고문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크윽!’
 쾅!
 무현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혼미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나약해지면 안 된다.’
 순간적으로 나약해진 정신이었다.
 하지만 무현은 의지로 밀어냈다.
 톡톡!
 그 순간, 무언가가 무현을 건드렸다.
 “······?”
 “끌끌끌.”
 노인이었다.
 무현의 바로 앞 번호, 구십오호였다.
 “배고프더냐.”
 노인은 고기를 꼭꼭 씹어 먹으며 무현에게 물었다.
 무현은 순간 당황했다.
 이 마령곡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애초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힘을 아끼고 살기 위해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인은 지금 말을 걸며 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부드러운 미소까지 얼굴에 띠고 있으니 이 마령곡이란 장소와의 괴리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까는 배고프다고 중얼거리더니. 배고프지 않은 것이야?”
 노인의 말은 부드럽기만 했다.
 그 부드러움에 무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쯧쯔, 그렇겠지. 너같이 어린놈은 한창 먹을 땐데 말이야.”
 혀를 차면서도 계속해서 입에 음식을 밀어 넣는 노인이었다. 느릿느릿, 하지만 분명하게 음식을 섭취했다.
 “왜 말을······.”
 무현은 자신에게 말을 건 노인에게 놀라움까지 품고 있었다.
 말을 건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연 무현이었지만, 노인의 인자한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 말은 쏙 들어가고 입은 꾹 닫혔다.
 “싱거운 놈. 끌끌!”
 그런 무현의 모습이 귀엽기라도 했던 것일까. 노인은 한번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건 까닭이 궁금하더냐?”
 “······.”
 “끌끌! 별다른 이유 없다. 너처럼 어린 아이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안쓰러웠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무현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넌 어째서 이런 지옥에 들어온 것이냐?”
 노인이 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현은 그 질문에 입을 꾹 닫았다.
 마령곡에 들어온 이유.
 오직 하나다.
 강해지기 위해서.
 하지만 무현은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뭐, 대답하기 싫은 일도 있기 마련이겠지. 그래그래.”
 노인은 그런 무현을 바라보며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자했다.
 마치 사부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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