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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1-1권

2017.07.17 조회 4,310 추천 36


 # 1장. 새로운 기회
 
 강단에 선 강사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자신이 가진 재능을 빨리 발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에 선수들이 집중했다.
 “강사인 저는 남들 앞에서 조리 있게 말하는 재능을 가진 거고 프로게이머인 여러분은 타고난 승부욕과 기발한 게임 센스가 그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듣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강의가 시작되고 한산해진 주차장으로 향해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뿌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삼켰다가 한숨과 함께 뱉어낸다.
 “후우우···. 씨바.”
 노력이란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일 뿐이다.
 어떤 분야건 재능 없는 놈은 도태된다.
 오로지 노력만으로 정상을 차지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런 사례를 본 기억도 없다.
 노력도 일단 재능이 있어야 빛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강사의 재능론에 일단은 동의한다.
 하지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재능도 있는 법이지.”
 환경이나 상황이 꿈틀거리는 그 재능을 짓밟는 경우도 숱하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남들 앞에서 조리 있게 말을 잘 하는 재능?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으면 어떻게 꽃 피울 건데?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노력이라는 수단을 맹신하지 않는다.
 필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재능과 상황이 함께 허락한 축복받은 사람만이 노력도 할 수 있는 거다.
 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불공평하다.
 
 ***
 
 ‘손목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완전히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프로게이머 생활은 힘들 것 같습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의사의 목소리.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악몽에 시달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차 안이었다.
 협회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인데 하필 퇴근시간에 맞물려 강변북로가 꽉 막혀 있었다.
 내가 뒤척이자 옆 자리에 앉은 우리 구단 에이스 강용식이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코치님, 어디 불편하세요? 주무시는 동안 계속 끙끙 앓으시던데···.”
 “어? 아니야. 괜찮아. 오랜만에 악몽을 꿨네···.”
 “물 드릴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식이가 가방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주었다.
 몇 모금 시원한 물로 속을 달래고 나니 좀 상쾌했다.
 거지같은 돌팔이 의사 놈의 목소리···.
 최근 들어 그 목소리를 듣는 악몽을 자주 꾼다.
 언제부터였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달 전 우리 구단이 딱 열 번째 우승을 확정 지은 다음부터인 것 같다.
 최고의 유망주였지만 선수가 되지 못한 나.
 타고난 게임 센스 덕분에 코치 노릇을 하면서 먹고 살아가고는 있으나 이건 내 꿈이 아니었다.
 코치가 아니라 선수가 되고 싶었다.
 구단을 우승시키면 상실감이 조금은 사라질까 싶었지만 첫 번째 우승을 하고 났을 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우리’가 우승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우승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한 번으로는 안 되는가 싶어 죽을 만큼 노력해 열 번의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덧난 건가보다.
 그때 내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선수 유니폼을 입고 트로피를 들 수 있었더라면···.
 그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나는 선수를 꿈꾸고 있었다.
 이루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 간절한 지도 모르겠다.
 “후우···.”
 잡념을 털어버리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오늘의 궁상은 여기까지만.
 한 번씩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면 그 날 밤 꿈자리가 사나워진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애써 잡념을 억누르면서 운전석에 앉은 2군 코치에게 물었다.
 “강 코치, 여기가 어디쯤이야?”
 “저 앞에 다리가 서강대교에요.”
 애매하다.
 일산까지 가야 하는데 자유로에 접어들기 전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을 아직 못 지났다.
 오늘 선수단 인성교육 끝나고 회식을 하기로 했으니 감독님이 지금 식당 섭외중일 텐데···.
 시간을 보니 제 시간에 도착하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박인식 감독은 시간 약속에 굉장히 깐깐한 인간이다.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해두지 않으면 아마 회식자리 내내 핀잔을 줄 게 분명하다.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 박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박 감독이 최근에 꽂힌 컬러링으로 설정해 두었는데 끝날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단 부재중 통화라도 두 번 이상은 찍어 둬야 잔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차는 여전히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중.
 가까스로 서강대교 밑에 진입했다.
 그런데.
 콰아아아아앙-!
 별안간 터진 굉음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으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지고 단잠에 빠져있던 선수들도 전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뭐지?
 몸은 공중에 떠 있었지만 두 눈에는 또렷하게 주변 상황이 보였다.
 버스였다.
 웬 관광버스 한 대가 서강대교 다리 위에서 추락하며 우리 선수단 승합차 보닛 앞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우리 차가 튕겨져 나갔다.
 그 반동에 의해 차가 붕 뜬 것이다.
 이대로라면?
 콰아아앙!
 예상대로 붕 떠오른 승합차는 추락하며 뒤에 따라오던 차를 들이받아 다시 2차 충격을 가했다.
 각종 비명과 유리 깨지는 소리, 차벽과 의자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선수들을 살폈다.
 운전석을 제외하고 단 한 개의 에어백도 터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충돌 각! 개 같은 국산차!
 선수들 이름을 불러보니 미약한 대답이 들려온다.
 다들 안전벨트를 한 덕분에 다치기는 했지만 크게 잘못된 녀석은 없는 것 같았다. 운전석에 앉아 있었던 강 코치만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다.
 천만다행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10톤이 넘는 관광버스가 추락했는데 보닛 앞을 살짝 덮친 수준이 아니었다면 모두 즉사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안도하려는데···.
 압축당한 보닛 위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보닛 안에는 자동차 엔진이 들어있다.
 불이 붙거나 폭발하면 끝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하명진이! 정신 차리고 애들 챙겨서 내려! 빨리!”
 팀 주장에게 소리치자 끙끙 앓으면서도 더듬거리며 승합차 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참사에 주변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 전화를 넣고 선수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나는 곧바로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선수들은 시민들이 구해주고 있으니 정신을 잃은 강 코치를 탈출시켜야했다.
 탁! 탁!
 안전벨트가 충격에 휘었는지 풀리지 않았다.
 “코치님! 어서 내리세요! 보닛에 불붙었어요!”
 한창 안전벨트와 씨름중인데 선수들이 밖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깔끔하게 깨져서 날아간 전면유리를 보니 정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도망쳐?
 내가 내리면 강 코치는 손 도 못 써보고 죽는데?
 고민 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안전벨트를 푸는 것을 포기했다.
 도망이 목적이 아니었다.
 강 코치를 안전벨트 사이로 끌어내기 위해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끌어안았다.
 “으아아아!”
 안간힘을 짜내어 당기니 몸이 슥 딸려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리가 문제였다.
 살짝 안으로 밀려들어온 엔진룸 때문에 운전대 아래로 강 코치의 다리가 끼어 있었다.
 “도와주세요! 빨리 당겨주세요!”
 내가 소리를 지르니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저씨 두 명이 다급하게 승합차로 올라와 강 코치를 끌어 내렸다.
 세 명이 함께 당기니 끼어있던 다리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됐어!
 아저씨들이 강 코치를 부축해 승합차를 빠져나갔다.
 “코치님! 빨리 나오세요! 코치님!”
 선수들이 다급하게 나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강 코치에게 집중한 사이 보닛에서 치솟은 불길이 화염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제야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확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어디에선가 겪었던 것 같은 익숙한 상황이다.
 그래···.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어서 가만 두면 죽을 사람을 구하려다가 내 손목을 다쳤지.
 떠올리기 싫은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보닛 안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퍼어어엉!
 
 ***
 
 이게 죽기 전에 본다는 그 주마등인가?
 지금 내 눈에는 손목과 꿈을 함께 잃었던 그때의 사고 현장이 보인다.
 정말 그 당시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생생하게 상황이 다가왔다.
 보이고, 들리고 숨도 쉬어지며 살갗에 닿는 바람까지 느껴진다. 심지어 메케한 매연과 오일 냄새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8차선 교차로.
 좌회전 진입 중 급발진으로 인해 전봇대를 들이받은 택시 한 대가 서 있다.
 엔진룸은 완전히 파열되었고 연료와 각종 오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충돌에 의한 충격에 택시 기사와 손님이 모두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다가 내 바로 앞에서 벌어진 사고였으니까.
 지금도 나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장면을 왜 다시 보여주는 걸까?
 죽을 때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 걸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왜 스쳐지나가지를 않아?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택시를 향해 발을 뗐다.
 눈앞에서 누군가 죽는데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은 움직였다. 택시 안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
 주마등인 줄 알았더니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진다.
 세 걸음 정도 달려 나가니 택시 뒷문 앞이었다.
 그런데 차마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멈칫.
 가만히 멈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반대편 교차로 좌회전 신호가 황색 신호로 바뀌었다.
 옆 차선의 앞머리에는 커다란 덤프트럭이 서 있는데 그 바람에 좌회전 차선의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과거에···.
 뭣도 모르고 시민을 구하겠다는 마음에 택시 뒷문을 열었다가 황색 신호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좌회전 진입을 한 승용차에 치였다.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무리한 진입을 위해 액셀을 밟은 승용차에 의해 2차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그때 택시 안에 넣은 손을 크게 다쳤다.
 그땐···. 그랬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또렷하게 그때가 떠올랐다.
 천국행과 지옥행을 판단하는 신이 나를 시험하는가보다.
 다시 이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나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 택시 문을 열 수 있을까?
 프로게이머의 꿈을 아직 잃기 전이었다.
 자리를 피하면 손목이 멀쩡하게 남겠지.
 그 누구도 내 행동을 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하지 않고 평생 죄책감을 안은 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또 다시 꿈을 잃을 거냐고?
 엿이나 먹어라. 나는 원래 욕심이 많은 놈이다.
 그러니까 손목이 박살 나고도 꿈을 놓지 못했지.
 나는 망설임 없이 횡단보도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타앙!
 쓰레기통이 가득 담긴 쓰레기를 뿌리며 도로 위를 굴렀다.
 마침 좌회전으로 진입하던 차량이 바닥에 흩뿌려진 쓰레기와 쓰레기통을 발견하고 속도를 줄였다.
 2차 사고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해버린 것이다.
 나는 재빨리 택시 뒷문을 열고 승객을 먼저 끌어냈다.
 그때 뒤쪽에서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뭣들 해? 빨리 저 사람 도와!”
 “기사님부터 구해!”
 2차사고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행인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돕기 시작했다. 과거에 나는 무식하게 달려들었지만 저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미 진입 중인 좌회전 차량을 보고 멈췄던 것 같다.
 그땐 그랬지만 오늘은 다르다.
 가까스로 승객을 끌어내고 행인들이 기사를 구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보닛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바닥에 뿌려진 오일에 옮겨 붙으며 화염으로 변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에 두 명의 목숨을 구해낸 것이다.
 기절한 승객을 보도블록 위에 눕히고 도로변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저 멀리에서부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자동차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구했다···. 저 두 명의 목숨도, 내 손목도···.
 비록 주마등 안에서 치러진 시험일 뿐이라도 뿌듯했다.
 과거에는 지켜내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지켰으니까.
 
 ***
 
 이상한 일이다.
 나흘이나 별일 없이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처음 사고현장에서 벗어난 뒤에도 계속 내 몸이 내 것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집으로 향했다.
 올바른 선택에 대한 대가로 신이 내게 잠깐 시간을 주는 거라면 당연히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이 나흘이나 계속되었다.
 아무런 이질감도 없었고 이상한 것은 내 자신뿐이었다.
 “얘가 정말 왜 이래? 여보, 진욱이 얘 좀 봐요. 정말! 요새 이렇게 세상 다 끝난 사람처럼 멍하게 있는 것 좀 보라니까요? 정말 걱정 돼 죽겠네.”
 어머니의 이런 걱정에 울컥한 일도 몇 번.
 오랜만에 진욱이라고 불린 덕분에 흐뭇했던 것도 몇 번이나 있었다.
 10년이 넘게 나는 그냥 김 코치, 혹은 코치님이었으니까.
 방에 있다가 가족과 식사하고 함께 거실에서 티비를 보다가 잠들고···. 다시 일어나 반복되는 일상.
 특별한 일도 없지만 그저 행복했다.
 과거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사소한 부분조차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하게 다가왔다.
 “아···. 좋다.”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나를 부른다.
 “진욱이 이리와 앉아 봐라.”
 “네, 아버지.”
 “숙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니에요.”
 숙소라···. 이 말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아마 이 시기 즈음이면 고등학교 자퇴서를 내고 게임단 연습생 생활 중이었을 시기였다.
 요 며칠은 휴가 기간일 테고.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휴가가 끝나면 신이 베푸는 호의도 함께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1시간 뒤에 숙소로 돌아가야 하지만 어차피 잠깐 머무른 곳이니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 보니 그저 푹 쉴 생각에 또 행복했다.
 진짜 마지막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그간 부모님께 하지 못했던 말이라도 꼭 해보고 싶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녀석이···?”
 “어머니, 사랑해요.”
 “너 정말···.”
 어머니는 잔뜩 걱정스럽다는 얼굴이고 아버지는 당황하는 듯 보였다. 아마 두 분은 평생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하시겠지.
 모르시는 편이 더 나을 테고···.
 그 후로 어색한 분위기로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의미 없이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휴가가 끝나기 10분 전.
 “저 먼저 들어가 쉴게요.”
 “숙소로 가야 하지 않니?”
 “그냥···. 조금만 쉬다가 가려고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씩 웃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초연하게 받아들이려 나흘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두 분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시간은 신께 감사라도 전하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의자에 깊숙하게 파묻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더 보고 싶은 것도 없었고 남은 미련도 없었다.
 아니, 사실 욕심 많은 내가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미련이 없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고 해야 맞는 일이겠지.
 시간을 보니 어느새 흘렀는지 1분 전.
 신에게 기도를 했다.
 
 신이시여. 듣고 있나요?
 제게도 이런 날이 온다면 막연히 두렵고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베풀어주신 호의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박하신 것 아니에요?
 사람을 몇이나 구했고 다시 저를 시험하셨을 때 저는 또 다시 용기를 냈는데···.
 나흘은 정말 짧은 것 같아요.
 이것도 욕심이겠죠?
 저를 욕심 많은 인간으로 만든 것도 당신이실 테니 이해해 주세요.
 시간을 보니 이제 몇 초 남지 않았네요.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 나의 마지막 순간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려 눈을 감았다.
 그런데···.
 
 깨똑! 깨똑!
 
 분위기를 흐리는 소리에 주머니 안에서 진동하는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이미 시간은 다 흘렀고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의문스러운 상황에 수신된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우리 게임단의 수석코치 표영호 코치의 메시지였다.
 
 [너 이 새끼 지각이냐? 당장 복귀 안 해?]
 
 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과 표 코치가 화났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어···? 씨바···. 망했다!”
 
 ***
 
 나는 대충 장비 가방만 챙겨서 집을 뛰쳐나왔다.
 “저 다녀올게요!”
 이 한 마디만 남기고 다급하게 나서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며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일단 나의 시간은 예상과 다르게 끝나지 않았다.
 휴가가 끝남과 동시에 나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사후세계로 가게 될 거란 예상이 틀린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아니, 천만에 하나라도···.
 내가 과거로 돌아오게 된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음으로 표 코치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인생인데 그 미친개에게 찍혀서 시작부터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마침 숙소 앞 정류장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왔고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달렸기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지, 두 번째 삶을 얻었다는 기쁨에 흥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심장이 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에 없던 희열과 환희로 가득 찬 나는 버스 창가를 스치고 지나는 모든 모습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기도했다.
 
 신이시여. 듣고 있나요?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께 투정을 부렸던 것은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죠?
 역시 신께서는 듣던 대로 자비롭고 인자하십니다.
 제가 구한 목숨들의 대가로 얻은 것이 잠깐의 시간이 아니라면···.
 이 두 번째 삶과 스스로 구해낼 수 있었던 제 손목까지 선물해주신 거라면 말이죠.
 저···. 정말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의도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루고 싶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그 ‘꿈’도 함께 선물해주신 것과 다르지 않거든요.
 지켜봐 주세요.
 제가 꿈에 그리던 그런 선수가 되어 살다가 이 삶이 다시 끝나는 날 찾아뵙고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나는 이 불가사의한 상황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기적이라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을 규정하는 말이니까.
 그토록 기적을 그리고 찾아왔으니까.
 비현실적인 이 상황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나 권진욱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
 
 숙소에 들어서는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우리 선수단의 미친개 표영호 코치였다.
 “1군 형들은 우리 팀 챔스 승격전 이겨서 상위리그에 올리겠다고 뭐 빠지게 연습 중인데 연습생 주제에···. 그것도 막내 새끼가 복귀에 한 시간이나 늦어?”
 원래 입이 걸기로 유명한 코치라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왔음에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특히나 표영호 코치에게는 안 좋은 감정이 많이 있었다.
 전통 강호였던 우리 ‘피닉스 스톰’ 구단이 2부 리그로 강등 당하게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표 코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악질적인 방법으로 팀을 좀먹었다.
 ‘네가 승부조작 부스러기 좀 받아 처먹겠다고 밴픽을 개같이 안 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직 이 시절의 나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다 밝혀진 일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단 이 상황을 넘기는 것뿐···.
 “죄송합니다. 코치님.”
 “죄송하다고 끝날 일 같지? 너는 내일부터 스크림 엔트리에서 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표 코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등을 훽 돌려 사라졌다.
 스크림이란 다른 구단 선수단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연습 게임을 일컫는 말이다.
 리그를 위해 꼭 필요한 훈련 과정인데 그 명단에서 빼버리겠다는 것은 코치의 권력을 이용한 압박이었다.
 어차피 엔트리 최종결정자는 감독이다.
 감독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내게 다른 적절한 벌로 잡일 따위를 시킨 뒤 엔트리에는 복귀 시킬 것이 빤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고서 대체할 선수도 없으니까.
 나는 표 코치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미래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그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똑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비수를 꽂을 것이다.
 부정적인 태도와 생각은 여기까지만.
 오늘은 나의 두 번째 삶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된 즐거운 날이다.
 다른 걱정은 일단 차치하고 한 시라도 빨리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해보고 싶었다.
 손목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딱 한 게임이라도 몰두해보고 싶다.
 그런 기대감을 안고 서둘러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PC방을 보듯 연습실 벽을 따라 주르륵 놓인 컴퓨터가 총 12대.
 오른쪽 다섯 자리는 1군 선수단의 자리였고 왼쪽 다섯 자리가 2군 및 연습생의 자리였다.
 남은 두 자리는 예비 PC와 코치석이었다.
 이미 1군 선수단은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연습에 한창이었고 2군과 연습생들도 각자 솔로 플레이를 하며 손을 풀고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가운데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의 등장과 동시에 게임이 끝난 정글러 안상규가 헤드폰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진욱. 늦었네? 미친개한테 안 깨졌냐?”
 “······.”
 이건 또 나름대로 색다른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0년 전의 두 번째 삶으로 돌아와 상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팀 내에서 유일하게 같은 연습생 신분인 상규는 나의 게이머 인생에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손목을 잃고 좌절했을 때 이 친구는 탄탄대로를 달리며 세계 최고의 정글라이너로 성장했으니까.
 색다른 감동에 말을 잇지 못하자 상규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존나 깨졌구나···? 그러려니 해. 아마 일찍 왔었어도 지랄했을 걸? 알잖아.”
 “그래···. 그렇지.”
 “게임이나 하자. 혼자 하려니까 영 수준이 안 맞는다. 듀오게임 하자.”
 진짜로 이 친구와 다시 게임을 할 수 있구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래, 게임이나 하자!”
 나는 당장 컴퓨터를 켜고 게임에 접속했다.
 리그 오브 챔피언(League of champion).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일명 ‘로크’로 통칭되는 이 AOS 장르의 게임이 우리의 주 무대였다.
 게임에 접속하자 가장 먼저 나의 닉네임이 보였다.
 Venom.
 치명적인 독액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놈이라는 어감이 마음에 들어 만든 닉네임이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인터페이스들이었다.
 10여년. 정확하게는 이 시점부터 12년 후의 시점까지 발전된 게임을 보고 돌아왔으니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기술은 발전하고 그 기술의 도움으로 게임 텍스쳐는 더 부드러워지고 이미지와 일러스트는 선명하고 화려해진다.
 그러나 이런 촌스러움 역시 내가 다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추억의 일부였다.
 “진욱. 초대한다?”
 “그래.”
 상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초대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내가 수락 버튼을 누르자 상규의 게임 닉네임 ‘Mr.Q’가 파티 목록에 들어왔다.
 베놈과 미스터 큐.
 두 사람의 게임 매칭이 시작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게임이 잡혔다.
 
 밴픽이 시작되었다.
 우리 팀이 3개. 적 팀이 3개. 도합 6개의 챔피언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과정이었다.
 대부분 현 시대에서 사기급로 평가되는 챔피언을 밴한다.
 양 팀의 선택으로 여섯 개의 챔피언이 사용 금지되고 이어지는 순서는 플레이 챔피언 픽.
 내가 플레이할 챔피언을 고르는 과정이다.
 코치로 활동하며 수천, 수만 번을 진행한 밴픽이다. 하지만 지금의 과정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선수들이 유리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밴픽이 아니라 내가 게임을 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과정이니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챔피언 목록을 둘러보다가 ‘제이드’를 고르고 픽을 완료했다.
 무려 125개의 챔피언 중 단연 눈에 띄는 녀석으로 가장 애용했던 챔피언이었다.
 제이드는 닌자 컨셉의 그림자 분신을 쓰는 암살자 챔피언인데 조작 난이도가 높아 수많은 초보 게이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상규가 나의 픽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손도 안 풀고 바로 제이드? 벌써 똥냄새가 풀풀 나는데?”
 “괜찮아. 내가 싸면 정글러가 치워주겠지.”
 “어휴···. 민폐 덩어리.”
 “잘 부탁한다.”
 그렇게 두 번째 삶에서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챔피언의 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성우의 목소리.
 나는 곧바로 초반 아이템을 구매하고 미드라인으로 달렸다.
 로크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AOS 게임이었다.
 협곡 형태의 맵에 상단, 중단, 하단의 세 갈래 라인이 있는데 각각 탑, 미드, 봇으로 불리며 5명의 플레이어 중 탑에 1명, 미드에 1명, 봇에 2명이 투입된다.
 이들은 각 라인으로 밀려오는 전투병을 사냥하며 적 팀의 라이너와 맞상대한다. 그 과정에서 킬을 기록하거나 킬을 내주며 게임의 유불리가 판가름된다.
 이 라이너들 외에 나머지 한 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데 그게 상규가 담당하는 정글지역이었다.
 세 라인 사이사이에 정글이라고 불리는 중립지역이 있었다.
 이 정글 안에는 ‘정글 몬스터’가 서식하고 녀석들을 사냥하면 마찬가지로 경험치와 돈을 얻을 수 있었다.
 정글러는 세 갈래 라인 중 어느 곳에라도 기습적으로 가담해 적의 라이너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속되는 아이템 구매와 레벨 업, 전투 결과에 따라 적의 넥서스를 파괴하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반 라인 주도권과 CS수급이겠지.
 코치였던 당시 팀의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주장했던 일이었다.
 게임의 승리는 기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내가 직접 그 말을 실천할 차례.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적 미드라이너를 견제하며 전투병을 착실하게 때려잡기 시작했다.
 
 ***
 
 승리!
 게임의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제이드 – 17킬 1데스 11어시스트]
 
 나는 17번 적 팀 챔피언을 죽였고 고작 1번 죽었으며 11번 적 팀 챔피언을 죽이는 것에 기여했다.
 게임 자체를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하며 캐리해버렸다.
 승리에 대한 기여도를 따지면 7할 이상이 내 손에서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는 한 판이었다.
 상규가 혀를 내두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와···. 말 그대로 하드캐리네. 너 휴가기간 동안 어디 수련이라도 갔다 왔냐? 갑자기 이렇게 잘해도 돼?”
 “에이, 정글러 갱킹이 날카롭게 들어와서 초반부터 잘 풀린 덕분에 얻어 걸린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번 게임은 정글러인 상규의 활약이 두드러진 판은 아니었다. 적절한 라인 합류와 백업플레이 정도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게 전부인 그런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런 게임이 만들어진 이유가 뭘까?
 고민하고 있는데 상규가 어깨를 툭 쳤다.
 “야, 미드라인 갱킹 한 번도 안 갔거든? 암튼 버스 고맙다. 너도 갑작스럽게 잘되는 판이 나오기는 하는구나. 어디서 재능재능 열매라도 먹고 온 거? 키킥.”
 상규의 말처럼 나는 나름의 재능은 있었을지 몰라도 게임 자체를 캐리할 만큼 엄청난 선수는 아니었다. 갑자기 잘한다고 느낄 만큼 실력이 급성장한 것이다.
 딱히 게임하는 내내 손목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 외에 느껴지는 어떤 이점도 없었다.
 그저 기본을 지키는 것에 충실했다.
 어두운 맵을 적절한 와딩으로 밝혔고 킬에 욕심을 내는 무리한 플레이를 자제했다.
 항상 미니맵을 주시하며 주변 아군의 상황을 파악했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라인을 버리고 합류했다.
 적이 방심하는 타이밍을 노려 로밍을 주도했고 적극적으로 아군이 위험한 포지션에 있을 때에는 경고 핑을 찍어주면서 팀을 이끌었다.
 고작 그것만 지켰을 뿐인데 돌아온 결과는 대박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잠깐 바람 쐬러 나간 상규와의 파티를 해제하고 솔로 플레이 게임을 돌렸다.
 왠지 지금의 감각을 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오로지 모니터에만 집중하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했다.
 몰입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세 번의 게임을 끝냈다.
 
 [피츠 – 11킬 2데스 8어시스트]
 [빅토리언 – 9킬 0데스 3어시스트]
 [라이진 – 15킬 1데스 10어시스트]
 
 캐리에 캐리를 거듭하는 캐리 대행진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세 게임이나 더 압도적인 실력으로 게임을 승리로 이끈 다음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게임적인 시각과 지식이 현 세대 게이머들에 비해 한 차원 앞서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려 10년을 최정상에서 군림한 프로게임단의 코치로 수많은 경험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안고 과거로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베놈 권진욱이 아니었다.
 백전노장의 경험을 안고 재능에 멀쩡한 손목까지 함께 지닌 완전체의 베놈 권진욱이 탄생한 것이다.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 내 코치의 경험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같은 게임 리플레이를 수백 번씩 돌려보고 같은 잔소리를 수천 번씩 반복했던 나의 경험이 결국에는 이렇게 빛을 발해서 나를 한 단계 발전시켰구나.
 이 같은 사실을 깨닫자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다.
 힌트를 조금 얻은 다음에서야 사색에서 빠져나왔더니 뜻밖의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야, 막내 신들린 것 같은데?”
 “우리 미드라이너는 저런 로밍 언제쯤 해보려나 몰라.”
 “이 새끼야. 라인은 지구 끝까지 쳐 밀고 따이면서 무슨 로밍 탓을 해? 탑신병자새끼···.”
 게임을 마친 내 뒤편에 1군 팀원들이 줄줄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잔뜩 게임에 몰입해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 내 게임을 다들 서서 지켜본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옆에서 또 한 무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라이진 판은 진짜 대박인데?”
 “그러게···. 스킬 콤보 넣는 게 무슨 철권 하는 줄···.”
 “저런 콤보가 있었구나···.”
 저편에서는 2군 팀원들이 관전모드로 게임을 관전하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모든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실 웃는 것 외에 할 말이 없었다.
 이 사태를 설명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분위기를 수습해줄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연습실 안에 울렸다.
 “뭣들 하냐! 연습 안 하냐!”
 표 코치였다.
 잔뜩 성난 얼굴로 두런두런 모여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이런 미친 새끼들! 다음 시즌도 챌린저스 리그에서 썩을래? 승격전이 코앞인데 놀고 있어? 어!”
 챌린저스 리그···.
 로크 리그의 2부 리그였다.
 표 코치의 호통에 선수들이 후다닥 흩어져 자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표 코치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퉁퉁한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미.
 인자한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보자 반사적으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피닉스 스톰의 감독 차태형 감독이었다.
 “표 코치, 그만 해.”
 미친개 표 코치를 뒤로 물린 차 감독이 연습실로 들어서서 선수들에게 말했다.
 “다들 힘들지? 조금 쉬었다가 할까?”
 
 그 한마디로 갑작스러운 치킨파티가 시작되었다.
 후다닥 치킨 8마리와 각종 음료수들을 차려놓고 둘러 모든 팀원들과 감독, 코치가 둘러앉았다.
 탄산음료들을 잔에 채운 다음 표 코치가 말했다.
 “이번 승격전 격려 차 감독님이 쏘는 거니까 다들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반드시 승격하자. 알았지?”
 “예.”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안에서 회식을 하는데 차 감독이 넌지시 1군 선수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아까 모여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아···. 진욱이가 갑자기 신들린 듯이 게임을 하더라고요. 너무 잘해서 다들 관전 좀 했습니다.”
 팀의 주장이자 1군 선수단의 서포터를 담당하는 김영빈이 대답하자 차 감독과 표 코치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날아와 꽂혔다.
 하아···. 치킨 먹다가 체하겠네.
 그저 실실 웃고 있으니 표 코치가 그럴 리 없다는 듯한 투로 물었다.
 “뭘 얼마나 잘했기에 다들 몰려가서 관전을 해?”
 “이거 보세요.”
 이번에는 1군 선수단의 탑 라이너이자 팀의 맏형 남진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전적 검색 사이트에서 베놈 닉네임을 검색해 표 코치에게 건넸다.
 제이드로 플레이한 게임부터 라이진을 플레이한 게임까지 무려 4연승을 달리고 킬, 데스, 어시스트를 뜻하는 KDA 수치 그래프가 천장을 뚫을 듯 치솟은 걸 보고 표 코치와 차 감독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펴졌다.
 차 감독이 내게 물었다.
 “진욱이 네가 플레이한 게임이라고?”
 “넵, 감독님···. 뭐 팀원들이 다 지켜봤다고 하니까요.”
 이번 휴가는 고작 닷새였다.
 그 닷새 사이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벙 찐 차 감독을 보며 남진호가 1군의 미드라이너인 변우민을 자극하는 발언을 뱉었다.
 “감독님 우민이보다 진욱이가 훨씬 나은 것 같던데요? 아까 게임만 놓고 보면 말이죠···. 팀이 말려도 로밍으로 다 풀어주고 다니던데 빨리 계약하시죠?”
 그 발언에 완전히 자극을 받은 듯 변우민이 뜯고 있던 닭다리를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아놔···.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그래, 내가 보여줄게.”
 “아서라···. 깨지고 개쪽당하지 말고 치킨이나 마저 먹어.”
 살살 약올리는 스킬은 이미 만렙을 찍은 듯한 남진호의 도발에 변우민이 넘어가고 말았다.
 “야! 권진욱이. 너 따라와. 나랑 한 판 붙자.”
 아니, 왜 불똥이 나한테 튀는 거야?
 어안이 벙벙한 나를 두고 변우민은 이미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아 키보드와 마우스 위치를 세팅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우민의 돌발행동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맏형 남진호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막내, 뭐 해? 상대도 하기 싫다는 거야?”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런 게 아니면 뭐? 휴식 시간에 미드빵 한 번 쯤은 괜찮잖아? 감독님, 안 그렇습니까? 진 사람이 이거 다 치우기. 그 정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죠?”
 남진호가 노리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약아빠진 자식···. 청소하기 싫어서 미드라이너 성질을 건드린 거였어.
 미드빵이란 중단 라인에서 1:1 진검승부를 겨루는 방식을 말한다. 팀의 에이스인 변우민과 1:1로 겨뤄보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 말빨이 어찌나 교묘한지 제법 자연스럽게 바람을 잡은 바람에 차 감독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뭐···. 나쁘지 않지.”
 “헉···! 감독님.”
 내가 지레 겁먹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차 감독이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선수단 전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제대로 한 게임 해보지 그래? 둘은 연습생이라도 명색이 한 식구인 프로들인데 미드빵이 가당키나 해? 1군 대 2군. 깔끔하게 한 게임으로 내기나 하지 그래?”
 차 감독이 갑자기 판을 키웠다.
 뜬금없는 제안에 2군 선수들의 얼굴이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신문지마냥 구겨졌다.
 1군과 2군을 괜히 나누겠나?
 맞붙으면 무조건 1군이 이긴다.
 지면 괜히 청소만 해야 하는 셈이다.
 그 기색을 읽은 차 감독이 결정타를 날렸다.
 “연대책임 몰라? 1군, 2군 너희 모두 한 팀이면 소속감과 전우애가 있어야지. 끈끈한 팀웍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그래도···.”
 2군 동료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져 회피하려는데 갑자기 나서는 녀석이 있었다.
 “재밌겠네! 진짜 저희가 이기면 1군 형들이 치우는 거 맞죠? 감독님?”
 안상규 이 자식아!
 재능으로 똘똘 뭉친 상규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일어나 본인 자리에 앉아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고 게임을 준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1군 선수들도 어이없어 하면서 상규의 도발에 슬슬 자기 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상규가 우리 청소 시킨데! 다들 잘 하자.”
 “일단 이겨놓고 내가 상규 저 새끼 따라다니면서 청소감독 한다. 각자 자기 포지션 마킹하기.”
 “콜!”
 이제는 대놓고 1군 대 2군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다.
 2군 선수들도 한숨을 푹푹 쉬며 모두 자리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풀고 있는데 뒤에서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차 감독이 표 코치에게 물었다.
 “표 코치는 어디 코치할래?”
 “저희는 그냥 관전 아니에요?”
 “그런 게 어딨어. 연대책임이라니까?”
 “헐···. 그럼 제가 2군 코치해서 지면 저도 청소 합니까?”
 차 감독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각자 포지션 마킹해서 청소감독도 해야지. 선택권은 자네에게 줄게. 골라.”
 “저는 그럼···. 원래 하던 대로 1군 선수들을···.”
 표 코치는 차 감독의 눈치를 살살 보며 슬그머니 1군 선수단 뒤로 가서 자리했다.
 저 새끼는 어딜 가서도 뭔가 제대로 해먹기는 글렀다.
 어쨌거나 그런고로 2군을 차 감독이 직접 담당했다.
 차 감독이 2군 선수들을 한데 모아 말했다.
 “1군이나 2군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야. 게임은 누가 이길지 모르는 거니까 게임인 거고···. 특히나 로크는 에이스 한 명이 승리로 이끌기도 하는 법이다. 쫄지 마.”
 차 감독이 말이 옳았다.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팀이 절대 못 이길 것 같은 상대에게 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판이 바로 이 바닥이다.
 그 날의 컨디션과 탄탄한 기본기. 전략, 전술···. 그리고 운이 따르는 팀은 이기기 마련이었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를 알아들은 듯 희망을 꿈꾸는 팀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뱉어냈다.
 
 “에라, 모르겠다. 까짓 거 해보자. 나는 탱커 챔피언 잡고 고기방패 할 테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 다른 건 몰라도 진호 형한테 절대 안 죽는다. 약속할게.”
 2군의 맏형이자 든든한 탑 라이너 도경민.
 
 “저도 오늘 진욱이한테 자극 제대로 받았거든요? 봉인해제 합니다. 최대한 라인 밀지 말고 각만 만들어주세요. 갱킹으로 게임 터뜨려드릴게요.”
 2군의 재능 넘치는 정글러 안상규.
 
 “아까 상규가 말한 거 듣고 보니까 좀 재미는 있겠다. 이기면 형들 청소 시키는 거잖아? 어차피 져도 본전이야. 포지션 뒤에 잡고 핵딜 넣어줄게. 한 번 해보자.”
 2군의 안정적인 원딜러 박명건.
 
 “어차피 봇 듀오는 우리가 예전부터 더 잘했어요. 바텀 라인전은 터뜨릴 테니까 윗동네만 잘하면 돼요.”
 2군의 서포터이자 막내 트리오의 한 축 정남규.
 
 희망의 빛을 살짝 본 덕분에 바닥을 쳤던 팀원들의 자신감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
 나도 모두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오늘 컨디션 좋아요. 이기러 가시죠.”
 2군의 세계 최고를 예약해둔 미드라이너 권진욱···.
 그래, 바로 나.
 2군 전원이 자리에 앉아 장비 세팅을 마치고 보이스 채팅에 접속했다. 선수들은 게임 중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마이크로 소통한다.
 음질과 통신에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감독님에게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1군 선수들의 준비만 끝나면 바로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 준비를 기다리며 계속 손가락을 풀고 있는데 상규가 보이스로 말했다.
 “오늘 진욱이 컨디션도 좋고 게임 내용도 좋은데 오더도 맡겨보죠? 이러나저러나 우민이형이랑 진욱이 기량 살펴보려고 감독님이 만든 게임이잖아요?”
 팀원들이 상규의 의견에 동조했다.
 “좋아. 어차피 팀원들 끼고 정식 게임하는 미드빵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이번 게임 오더는 진욱이가 하는 걸로.”
 “그럼 나는 맵 리딩 브리핑만 할 테니까 크고 작은 오더는 맡긴다. 할 수 있지?”
 탑 도경민과 원딜 박명건이 차례로 말했다.
 오더라···. 바라는 바였다.
 사실 2군의 정식 오더 담당은 상규였다.
 정글러의 특성 상 온 맵을 휘젓고 다니기에 오더하기 가장 적절한 포지션이었다. 그런 상규가 오더를 제안한 거라 팀원들이 반박할 일은 없었다.
 나도 상규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틀린 오더라도 다들 반드시 따라주세요.”
 모두 암묵적 동의를 했다.
 오더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오더를 따라서 진 게임보다 오더를 따르지 않아서 진 게임에서 많은 문제가 터진다.
 기본적인 개념은 정립된 이들이라 이 역시 이견은 없었다.
 곧이어 1군 선수단의 게임 준비도 끝나고···.
 정식으로 1군과 2군의 대항전이 시작되었다.
 
 ***
 
 밴픽이 시작되었다.
 아직 연습생인 내가 감독에게 보여주는 두 번째 인생의 첫 게임이었다.
 결코 허투루 임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게임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1군과 2군의 상관관계는 이미 염두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르넥톤 잘라주세요.”
 밴픽에서의 첫 번째 오더였다. 첫 번째 밴 카드를 쥔 박명건이 르넥톤 챔피언을 금지시켰다.
 르넥톤은 성장도에 따라 강력한 탱킹과 딜링을 모두 할 수 있는 전천후 챔피언이었다.
 냉정하게 봤을 때 지금 우리 팀이 1군에 비해 가장 열세인 구간이 바로 탑 라인이었다.
 남진호가 잘 다루는 챔피언을 잘라서 도경민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번 밴픽의 가장 요점은 르넥톤을 자르는 것.
 이외에 밴과 픽까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최종적으로 양 팀의 챔피언 구성이 완료되었다.
 
 1군의 구성은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탑 파이어 럼블
 정글 수도승
 미드 환술사
 원딜 페인
 서포터 소르카
 
 서포터 소르카 챔피언을 제외하고 모두 개인기량으로 상대를 압살할 수 있는 성능의 챔피언이었다.
 조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공격일변도로 일관하다 소르카의 힐링으로 버텨내는 형태인데 안정성은 매우 부족했다.
 그만큼 공격력이 어마어마했지만 당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합이 결정되고 나니 자신감이 조금 더 커졌다.
 
 2군의 구성은 균형적이었다.
 탑 닥터문도
 정글 카젝스
 미드 아자르
 원딜 루시앙
 서포터 트레쉬
 
 안정적인 탑의 탱킹력과 물리공격력, 마법공격력의 밸런스가 갖춰진 정글, 미드, 원딜 캐리라인에 서포터 트레쉬의 뛰어난 유틸성까지 밴픽은 완벽히 승리했다.
 물론, 1군 선수들이 우리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정한 픽이라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게 아마 그들의 결정적인 패배의 요인이 될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우리 진영은 맵의 상단에 위치한 레드 진영.
 나는 시작과 동시에 아군의 레드 버프가 위치한 상단 정글로 핑을 찍었다.
 “남규야. 트레쉬 1렙 스킬 Q찍고 달리자.”
 “인베 갈 거야?”
 “아니. 방어만. 와딩하러 수도승 무조건 들어온다. 깔끔하게 퍼블먹고 시작합시다.”
 팀원들은 묵묵히 내 오더를 따라 행동해주었다.
 레드 버프 부쉬에 숨어 기다리고 있으니 여지없이 적 팀의 정글러 수도승이 슬그머니 모습을 비췄다.
 안정적인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까지 잘 기다리다 적절한 타이밍이 되었다는 판단에 정남규의 트레쉬가 사슬을 던졌다.
 
 카앙!
 “나이스!”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트레쉬가 수도승을 사슬로 묶었다.
 이 때를 노린 나머지 멤버들이 일제히 수도승에게 달려들어 데미지를 박아 넣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퍼스트 블러드!]
 
 순식간에 기습을 당한 수도승은 반격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데스를 기록했다.
 킬은 아쉽지만 서포터 트레쉬가 기록했다.
 하필 사슬이 풀리는 타이밍까지 팀원들이 딜을 넣어둔 걸 평타 한 방으로 먹어버렸다.
 내가 먹거나 원딜이 먹었다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일단 선취점을 기록한 것이 중요했다.
 “진욱아. 블루 사이드 들어가서 와딩하고 나오자.”
 상규의 제안이었다.
 정글러 입장에서 적의 정글이 밝혀져 있으면 적 정글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동선을 수정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적 정글러의 동선파악은 나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였다.
 거부할 리가 없었다.
 “오케이. 트레쉬 와드는 늑대캠프에, 내가 블루 버프 캠프에 와드 박을게요. 닥터문도는 보조 맞추다가 탑으로 올라가면서 적 삼거리에 와딩해요.”
 나의 오더에 따라 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블루 사이드 정글에 들어가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인원이 와드를 박았다.
 그리고 환하게 밝혀진 적 정글의 시야를 보며 만족스럽게 돌아가려는데···.
 “야! 부쉬 봐! 부쉬!”
 원딜러 박명건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적 팀 챔피언들이 들이닥쳤다.
 반대편 정글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수도승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타이밍 상 포기할 거라 생각했는데 선취점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자극받은 것인지 1군 선수들의 챔피언이 호전적으로 움직였다.
 상규가 다급하게 외쳤다.
 “뺄 거야? 싸울 거야? 빨리!”
 적극적으로 스킬을 던지며 달려드는 적 챔피언들을 보며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 팀이 다 죽어도 내가 어시스트 한 개만 더 기록하면 이 게임은 이긴다. 초반의 유리함을 눈덩이처럼 굴려 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치솟아 올랐다.
 “싸워!”
 나의 신호를 시작으로 아직 양 팀의 전투병이 나오기도 전에 블루 사이드에서 막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1군 선수들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전면전을 벌였다.
 서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스킬을 선택했고 각종 스킬과 평타 공격이 난무했다.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선수들은 계속 커뮤니케이션을 나눴다.
 “환술사 점멸 빠졌어!”
 “나 스펠 다 빠졌어. 뺀다.”
 “페인 아직 스킬 안 찍은 것 같아요. 벽꿍각 내주면 안 돼요.”
 “야야, 소르카 힐 때문에 유지력 딸려. 빼야 하는데···?”
 그 말이 터짐과 동시에 비보가 전해졌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가장 먼저 다운당한 것은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다가 뒤늦게 합류한 수도승에게 음파 스킬을 맞은 트레쉬.
 서포터 정남규였다.
 킬은 수도승이 올렸다.
 곧이어.
 
 [적 더블킬!]
 
 탑으로 올라가다 한 박자 늦게 합류하던 닥터문도 탑 라이너 도경민이 환술사의 속박 스킬에 맞고 다운 당해버렸다.
 순식간에 전장으로 돌아와 두 개의 킬을 수도승이 휩쓸었다.
 싸우라는 오더 탓이었나?
 생각보다 1레벨 교전에서 맥을 못 추는 모습이었다.
 1군 팀은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로 물에 오른 컨트롤을 보여주었고 챔피언 구성도 비교적 화력이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소르카의 힐링 스킬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더 죽으면 터져요! 빠져요. 빠져.”
 나의 외침에 생존한 상규와 박명건이 후퇴했다.
 1군 선수들은 아예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듯 집요한 추격을 이었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물가까지 추격이 붙은 상황.
 바로 그때.
 
 펑!
 
 번쩍이는 이펙트와 동시에 메뚜기를 닮은 챔피언 카젝스가 돌진했다.
 상규는 카젝스를 조작해 적군을 향해 앞 점멸을 타고 곧바로 뛰어올랐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나이스!”
 “완전 멋있어!”
 팀원들이 환호했다.
 앞 점멸과 아껴둔 스킬 포인트를 도약 스킬에 투자하여 2단 점프로 적의 후방을 쫓는 소르카를 노린 것이다.
 소르카는 이미 교전 중 자신의 체력을 소비해 아군들의 체력을 채워주는 스킬을 난사한 바람에 소위 말하는 딸피 상태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피라는 뜻이다.
 상규의 카젝스는 후방의 소르카를 다운시키고 유유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적 팀의 허점이 드러났다.
 소르카를 향해 돌진하는 카젝스를 잡기 위해 추격조가 둘씩 찢어진 것이다.
 우리 팀 원딜러 루시앙은 순간적인 폭딜이 가능한 챔피언.
 “명건이 형. 럼블 쩜사!”
 상규의 슈퍼 플레이가 만들어낸 빈틈을 포착한 나의 판단력이 어우러져 빛을 발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굿굿! 좋았어!”
 “이제 빠지자. 이득이야.”
 그렇게 치열했던 1레벨 인베이드 상황이 종결되었다.
 총 스코어는 3:2.
 나는 총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킬은 카젝스, 루시앙, 트레쉬가 나눠가졌다.
 적 팀의 더블킬은 수도승이 독식한 상태였다.
 선수들은 전부 본진으로 귀환해 체력을 정비하고 각 킬과 어이스트 수당으로 받은 골드를 소모해 아이템을 구비한 채 라인으로 복귀했다.
 격렬했던 인베이드 상황 때문에 라인전이 모두 늦은 타이밍에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군이 이득을 본 상태로 진행된 라인전이라 어느 한 라인 무너지는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10여 분이 지나는 동안 서로 조심하는 안정적인 라인전이 계속되었다.
 나는 계속 아군을 다독였다.
 “다들 지금처럼 현상유지만 해도 이득이에요. 조합 시너지는 우리가 더 좋으니까 저쪽 무리하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어차피 공격적인 픽이라 저쪽에서 무리할 수밖에 없어요.”
 나의 주문에 따라 아군은 모두 안정적인 플레이를 기반으로 라인전을 펼치고 있었다.
 “스펠 체크요.”
 “탑 스펠 온.”
 “정글 온.”
 “봇듀 온.”
 역시 기본기는 충실한 이들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이 맞상대하는 포지션의 적이 어떤 스펠을 들고 있는지, 쿨타임은 어떤지 정확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이 전투를 벌였을 때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에 소홀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라인전.
 이런 지지부진한 상황에 변수를 가져온 것은 역시나 2킬을 먹고 급성장한 수도승이었다.
 “탑에 수도승!”
 “경민이 형, 선궁 쓰고 뒤로 빼요! 저 달리고 있어요.”
 적 팀의 정글 라이너 수도승이 기습적으로 탑 라인을 찔렀다. 수도승과 파이어 럼블은 강력한 CC기를 들고 닥터문도를 위협하며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도경민은 상규의 외침에 망설이지 않고 궁극기를 사용했다.
 닥터문도의 궁극기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체력을 채우며 이동속도가 빨라지는 것으로 적을 추격하거나 반대로 도망칠 때, 비슷한 상대와 맞상대할 때 유용한 스킬이었다.
 빠른 이동속도를 자랑하며 자신의 타워 방향으로 달리는 닥터문도 앞에 수도승이 나타났다.
 수도승은 닥터문도의 코앞에 와드를 박고 방호 스킬을 사용해 근접하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점멸을 사용했다.
 파앙!
 이쿠!
 이동기로 진입해서 점멸로 퇴로를 차단해 궁극기를 사용하는 수도승!
 그 화려한 움직임에 닥터문도가 오히려 파이어 럼블을 향해 차이고 말았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파이어 럼블의 스킬 연계가 이어졌다.
 화르르르륵!
 화염방사기로 불을 뿜으며 닥터문도의 퇴로에 궁극기를 사용했다.
 이제 닥터문도는 꼼짝없이 죽어야만 하는 상황.
 
 [아군이 당했습니다.]
 
 이번 킬도 수도승이 날름 먹어버렸다.
 벌써 3킬을 달성한 수도승.
 그 아이템이 갖춰질수록 아군이 느끼는 부담감이 커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더 잘하네···.
 챌린저스 리그를 경험했다고는 하나 명색이 프로구단의 1군 선수들이었다.
 수도승과 파이어 럼블의 연계공격은 강력했다.
 한 발 늦은 상규가 라인을 커버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수도승 너프해야 돼. 진짜···.”
 “아니에요. 솔킬도 아닌데요.”
 “언제까지 버티기만 할 거야? 이러다가 오브젝트 주도권 다 뺏기겠어.”
 “조금만 더 버티면 돼요. 조금만···.”
 수도승의 활약으로 첫 드래곤을 내주었지만 팀원들은 묵묵히 내 오더를 따라 주었다.
 미안하지만 모두 2분만 더 참아줘.
 내가 노리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무난하게 이어진 라인전 덕분에 귀환하자마자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크래셔의 이빨.
 공격속도, 주문력이 상승하고 쿨타임 감소 옵션이 달린 데다가 평타에 추가 마법 데미지까지 실어주는 아자르 챔피언의 코어 아이템이었다.
 이 아이템이 구비되는 순간 아자르는 다른 존재가 된다.
 마지막 한 라인.
 모래병사를 두 마리 소환해서 몰려오는 전투병을 향해 돌진시켰다. 병사의 창질 한 번에 세 마리의 전투병이 데미지를 입었다.
 쿡! 쿡! 쿡!
 완벽한 완급조절로 한 마리의 전투병도 놓치지 않고 먹어버린 다음 나는 미련 없이 본진으로 귀환했다.
 크래셔의 이빨 완제품을 일시불로 구매했다.
 왠지 아이템을 장착하고 나니 내 손가락도 버프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자신감 버프라는 건가?
 나는 주저 없이 마우스를 바텀 지역으로 돌리며 말했다.
 “상규야 블루 먹고 봇 찌르자.”
 “오···. 드디어 움직이나? 콜!”
 게임을 뒤집어버릴 역전의 용사 아자르와 카젝스가 바텀 라인으로 기세등등하게 내려갔다.
 
 ***
 
 게임이 끝나고 가장 먼저 날뛴 것은 역시나 1군의 미드라이너 변우민이었다.
 “아오! 이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여기저기 안 터지는 곳이 없네 진짜!”
 “야! 네가 환술사로 아자르 하나 못 묶어둬서 꼬인 거잖아? 미친 듯이 로밍 다니는데 너는 미드 포탑도 못 밀고 뭐했는데? 와 정치 오지네 진짜···.”
 “환술사 평타로 무슨 포탑을 밀어!”
 “그럼 같이 로밍을 다니던지!”
 남진호와 변우민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언성이 높아지자 표 코치가 제지했다.
 “이 새끼들 그만두지 못해!”
 표 코치의 호통에 두 사람이 움찔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 놈들이 진짜···! 너희 승강전 목전에 둔 놈들이 2군한테 지고 거기다 지들끼리 싸우기까지 해? 제 정신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표 코치가 시선을 내게 돌렸다.
 뭐야? 갑자기 왜 나를 째려보고 지랄이야?
 괜히 팀 불화의 원인이 내가 된 것 같잖아!
 내가 움찔하니 표 코치가 말했다.
 “권진욱. 너 오늘 왜 늦었어?”
 “네···? 그게···.”
 나는 순간적으로 표 코치의 질문의도를 파악하느라 빛의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지각을 탓으로 청소를 떠넘기려는 속셈일까?
 졸렬해도 그 정도까지 졸렬한 인간은 아닐 터다. 차 감독까지 함께했던 내기였으니까.
 아니면 차 감독 눈에 들 것을 대비해서 네거티브 공격을 하는 건가?
 벌써 나를 견제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의문점은 표 코치의 눈빛에서 다소 답변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갑자기 실력이 늘었느냐고 에둘러 묻는 것이었다.
 분위기상 집에서 늦게 나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피곤해질 느낌이었다. 낯간지럽긴 하지만 이미지 메이킹이라도 잘 해둬야 차 감독 눈에 들 수 있었다.
 아직 빛의 속도로 돌고 있는 뇌를 혹사시켜 가장 상황에 들어맞는 변명을 만들어냈다.
 “리그 경기들을 다 돌려보고 공부하느라 새벽에 늦게 자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리그 경기들을 다 돌려봤다고?”
 나는 침묵으로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미심쩍어하는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그 무엇을 물어 시험하려 해도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코치생활을 하던 때 복합적인 공부를 위해 모든 경기를 다 돌려 봤었으니까.
 이미 리그의 역사는 내 머릿속에 다 들어와 있었다.
 반응은 차 감독에게서 나왔다.
 “지난 경기들을 복기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다는 말인가?”
 “설마 했는데 영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표 코치가 영 미덥지 못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
 “경기를 봤어도 너보다 내가 더 많이 봤을 텐데 그 논리로 따지면 내가 너희보다 게임을 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못난 양반아···.
 자네가 본 게임의 양을 다 합쳐서 10을 곱하면 아마 내가 전생에 본 게임의 숫자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네만···.
 이번에도 나는 말을 꾹 삼키고 나름 합리적으로 이해갈 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저는 간절히 얻고자 하는 것을 정하고 게임을 봤거든요.”
 뜬구름 잡는 듯한 나의 대답에 반응한 것은 이번에도 차 감독이었다.
 “자세하게 얘기해봐.”
 “처음에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다들 비슷한 챔피언으로 같은 라인을 가잖아요? 탑, 미드, 정글, 봇듀까지 정형화된 게임을 하는데 이기는 팀은 계속 이겨요.”
 “그래서?”
 “이기는 팀이 이기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습니다. 단순히 커뮤니케이션이나 개인 기량의 문제가 아닌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한 단계 고차원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표 코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니 계속해서 돌려보니까 조금씩 다른 게 눈에 보였습니다.”
 “내게 말해주겠나?”
 “기본기와 사소한 집요함이라고 할까요?”
 “기본기는 뭔지 알겠는데···. 사소한 집요함은 또 뭔가?”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차 감독의 눈빛에서 잠시 잊고 있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손목을 잃고 좌절에 빠졌던 당시···.
 나를 코치의 길로 이끌어준 것이 바로 차 감독이었다.
 직접 등용하는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아니었으나 게임 센스만 있다면 프로게이머가 아니라도 게임계에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그 조언이 나를 코치로 만들었지.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수많은 기억의 파편 속에 묻혀있던 그 일이 떠오르고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그를 대했다.
 “강팀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가령 와드를 박는 위치의 섬세함이나 정글러가 정글을 도는 루트, 타이밍에서도 사소한 차이가 있고 팀원들이 핑으로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허어···.”
 너무 사소해서 단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일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차 감독에게 내 경험을 전달해 그의 눈을 띄워주고 싶었다.
 인간적으로 많이 감사했고 응원했던 감독이니까.
 나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차 감독은 진지한 태도로 내 말에 집중했다.
 
 
 # 2장. 내 손으로 닦아서
 
 간결하고 직관성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컨셉에 알맞은 최적의 챔피언과 아이템 구성.
 팀 파이트 시 우선 순위를 정하는 약속.
 게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이 사소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면 티끌 같은 영향력이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게임을, 그리고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설명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이 한 명의 스타플레이어보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성능 좋은 챔피언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숙련도와 선수 개인의 기량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 감독과 표 코치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디까지나 로크는 팀 게임입니다. 다른 스포츠와 같습니다. 메시나 호날두가 있는 팀이 모든 경기를 다 이기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을 보유한 팀의 승리가 더 많은 이유와도 연관이 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아리송한 이야기지만 차 감독은 의미를 알아들은 것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스타플레이어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팀이 갖추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로군.”
 “예, 메시나 호날두의 팀이 사소한 부분까지 얼마나 프로답게 대처하고 대비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이미 갖춰졌기에 스타플레이어가 탄생하기도 하고 영입의사를 비쳤을 때 스타가 손을 잡아주기도 합니다.”
 차 감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디테일은 몰라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터다.
 간단한 예만 들어봐도 대부분 스포츠의 프로구단은 각종 전력분석관들을 고용해 상대 팀의 전술뿐 아니라 선수 개개인의 버릇과 장단점까지 파악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하는 큰 줄기의 플랜을 짠다.
 우리의 경우 그런 역할을 코치, 감독이 해야 하는 거고.
 결국,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로크라는 게임과 리그, 경기에 대한 더 심도 깊은 전문성을 갖추라는 이야기였다.
 차 감독이 모두 이해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는 것보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여 전문성을 갖추고 더 강해지고자 하는 게 진정 강팀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올바른 태도지···. 내가 배우는군.”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우리가 갑자기 2부 리그로 강등당하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데에는 나의 안일함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갑자기 강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표 코치가 움찔했다.
 당연히 선수들도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팀을 바라보며 차 감독이 씩 웃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잖아? 그렇지? 다들 우울해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이번 승강전만 이기고 다시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맞습니다. 감독님.”
 내가 맞장구를 쳐주니 다시 희망의 빛이 분위기 속에 자리를 잡고 은근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팀원들의 얼굴에도 온기가 돌았다.
 차 감독이 씩 웃으며 표 코치의 어개를 툭 쳤다.
 “뭣 하나? 진 팀에서 청소해야지.”
 그 말에 표 코치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청소를 시작했고 1군 선수들도 웃으며 오랜만에 청소에 동참했다.
 2군 선수들은 안절부절 하면서도 차 감독의 곁에 서서 간만의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분위기였다.
 우승을 꿈꿀 수 있는 위치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감정.
 어쩌면 나는 우리 팀의 가장 결정적이고 절실한 타이밍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모른다.
 피닉스 스톰의 터닝 포인트가 나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다.
 신이 굳이 이 시점의 이곳으로 나를 보냈다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는 그 이유가 이 팀의 성공적이고 획기적인 상승가도를 이끌어 가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까.
 단 한 사람.
 아직도 움찔거리며 차 감독의 눈치를 보고 있는 표 코치를 제외하고 말이다.
 
 ***
 
 딱 이틀이면 충분했다.
 표 코치를 지켜보며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이틀간 아주 평범하게 흘러간 시간 안에 가장 거슬리는 존재가 바로 표 코치였다.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들을 내팽개치고 저 자신의 유흥에 흠뻑 취한 모습이 가만히 지켜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연습 시간에 자기 책상에 앉아 해외축구 경기를 틀어놓고 시청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코치로서의 직무수행에 열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특히나 전생에 열혈코치로 명성이 드높았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제 이곳이 나의 터전이 아닌가?
 우리 팀은 다음 주에 운명을 결정지을 승강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중요한 경기를 목전에 두고 표 코치를 가만히 뒀다가 또 어쩐 재를 뿌릴지 몰랐다.
 어떻게든 팀을 더 좀먹어 괴멸까지 몰아넣기 전에 표 코치의 정체를 만 천하에 까발릴 생각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가 드러나면 피곤할 수 있으니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게끔 만드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런데 하필 그 고민에 빠져 있다가 표 코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인마! 뭘 그렇게 쳐다봐? 연습 안 해? 연습생이 연습 안하면 뭘까? 그냥 식충이야 이 자식아!”
 하아···. 하필 이 타이밍에 쳐다보고 난리야. 계속 축구경기나 마저 즐길 것이지.
 재수 없게 걸려서 나한테만 참 코치의 모습을 보인다.
 저것도 참 마음에 안 들어.
 이러나저러나 큰 소리가 나오니 팀원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 좀 정리하느라···.”
 “이 새끼야! 생각 말고 연습을 하라고!”
 “연습 중에 깨달은 생각입니다.”
 “아주 꼬박꼬박 말대답이지? 그래, 그 잘난 생각 한 번 들어보자. 별거 아니면 일주일 동안 화장실 청소는 네 담당이 될 거야. 무슨 생각 했는지 한 번 읊어봐.”
 뭐 어쩌겠나.
 팀을 이끌어야 할 코치가 저 모양이면 아쉬운 대로 내가 힌트라도 던져줘야지.
 전생에서 비롯된 직업병이라고 치자.
 나는 다시 한 번 팀에 도움도 되고 상황도 벗어날 수 있는 화두를 던졌다.
 “아무래도 이번 승강전 밴 카드 세 장은 전부 탑 라인 챔피언으로 고정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야! 막내야.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발언에 발끈하고 나선 것은 팀의 맏형이자 1군의 탑 라이너 남진호였다.
 “탑만 세 장 다 저격 밴 하겠다고? 내가 고작 BJ한테 질 것 같아? 조금 서운하네.”
 승강전 상대는 인터넷 방송으로 게임 콘텐츠를 방송하는 방송 BJ 연합 팀이었다. 아직 정식 프로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지만 실력은 상당한 이들이었다.
 일단 2부 리그에서 프로 무대 진출 직전까지 올라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진호는 아마추어 상대로 자신의 열세를 말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완전히 반대에요.”
 “뭐라고?”
 “반대에요. 정반대! 지금 탑에 우선순위로 꼽히는 챔피언을 전부 금지시키면 그때부터 완전히 챔피언 폭의 싸움이잖아요. 누가 얼마나 더 많은 탑 챔피언을 다룰 수 있느냐···.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진호 형이 유리해요.”
 남진호는 물론이고 1군 팀원들이 전부 아! 하는 표정으로 진의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말대로 탑 라인의 주도권을 우리 팀이 가져올 수 있으면 게임을 이끌어 가는데 어마어마한 이점이 생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든든한 탑 라이너의 탱킹 능력은 팀 전체를 떠받드는 대들보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막 온라인 팀 게임을 마친 듯 1군 선수들은 전부 대기 중인 상태였다. 마침 땔감이 생긴 것 마냥 나를 중심으로 두고 1군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1군 팀의 주장 서포터 김영빈이 내게 말했다.
 “우리랑 전략 회의 좀 하자. 막내.”
 “제가요? 그래도 되나요?”
 “이미 네 의견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부터 그러고 싶었던 거 아니야?”
 “아 그거야 코치님이 물어보셔서···.”
 내가 표 코치를 스윽 바라보니 김영빈이 먼저 나섰다.
 “코치님, 저희 휴게실 가서 회의 좀 하겠습니다.”
 “인마, 전략회의를 코치 빼고 하려고?”
 “뭐 언제는 함께하셨나요? 새삼스럽게···.”
 “말을 해도!”
 오호···? 이건 또 생각지 못했던 전개였다.
 전생의 나는 이미 이 시점에 손목을 다쳐 병원신세였다.
 팀에 합류한지 오래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라 1군 선수들과 표 코치의 관계를 깊게 들여다본 기억이 없다.
 김영빈은 표 코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주장의 리더십을 발휘해 팀원들을 이끌고 휴게실로 향했다.
 나도 벙 찐 얼굴로 투덜거리고 있는 표 코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리의 뒤를 따랐다.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변우민이 불만을 터뜨렸다.
 “씨발, 우리도 멀쩡한 코치 좀 데려다 놓으면 안 되나?”
 “들려. 조심해.”
 “들으라지···.”
 역시 강등을 당한 것에 가장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은 선수들이었던 것 같다.
 하긴 코치의 헛짓거리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불만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들 경력에 강등의 경험이 새겨진 것은 사실이니까 좋게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멀뚱멀뚱 서 있으니 김영빈이 자리를 권했다.
 “막내야 앉아.”
 “넵.”
 자리에 앉으니 1군에서 막내 역할이자 정글 포지션을 담당하는 민찬영이 음료수를 뽑아 돌렸다. 그렇게 민찬영까지 자리하니 본격적으로 내게 질문이 쏟아졌다.
 주로 질문은 주장인 김영빈이 던졌다.
 “탑에 카드 세 개 다 쓰면 탑은 유리해지겠는데 다른 포지션은 어떨 거 같아?”
 “일단 바텀은 조합이 많아서 뭘 줘도 괜찮아요. 최악의 경우에도 반반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드, 정글은?”
 “솔직히요···?”
 나는 웬만하면 냉철하게 평가하고 지적하고 보완해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또 막상 상황이 닥치니 망설여진다.
 연습생 신분으로 어디까지 관여해야 할지 딱히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머뭇거리니 김영빈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내가 도움을 청한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우리는 연습만 하느라 그런 분석을 할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네가 경기를 돌려보며 분석을 했다며.”
 “네, 분석은 확실하게 했습니다.”
 “감독님이 연대책임 얘기 했던 거 기억나? 어차피 너도 우리 팀이야.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피하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나는 가장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의견을 피력했다.
 “솔직하게 미드, 정글 둘 다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 미드, 정글 호흡이 정말 잘 맞더라고요. 챔피언의 문제가 아니라 호흡의 문제가 있어요.”
 예상대로 다혈질의 변우민이 표정을 구겼다.
 안 그래도 얼마 전 1,2군 대결에서 패배하며 자존심을 구겼는데 신랄하게 비판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그래도 필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걸 모두가 인정해준 덕에 말을 자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내가 생각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전생에서 코치로 팀의 우승을 열 번이나 이끌어냈던 나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제시한 방법은 딱히 어렵거나 획기적인 건 아니었다.
 가장 유리한 탑 라인을 몰아주며 키워서 탑 주도하에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방식이었다.
 나름대로 말하자면 정공법이랄까?
 그러나 내 감각은 그게 현재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승산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내 신념 중 하나다.
 모든 것은 기본기에서 비롯된다.
 정공법은 가장 기본에 충실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은 정확했다고 말하듯 1군 선수들에게 극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나이스! 진호형 완전 물올랐어. 계속 탑 찔러.”
 “나 지금 3:1로도 너희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맵리딩만 잘 해줘. 무조건 다음 싸움에서 격차 벌린다. 알았지?”
 “야! 미드 CS 원딜이 먹어. 이번 게임은 탑, 원딜 연계로 가야 된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1군 선수단 스크림 중 나누는 목소리에 흥이 가득했다.
 내가 전해준 솔루션은 정확하게 먹혀들었고 1군 스크림 성적은 연일 고공행진이었다.
 스크림일 뿐이라며 다른 구단에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연승이 의미하는 바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변화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연히 차 감독이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승강전 이제 5일밖에 안 남았다. 지금 분위기 잘 유지해가면 다시 챔피언스로 올라간다. 알지?”
 “예, 감독님.”
 “다른 구단 연습환경이나 연봉대우를 비교해보면 너희에게 항상 미안하다. 그래도 이번에 다시 챔피언스 리그로 올라가면 내가 프런트와 잘 협상 해볼게. 그러니 너희는 힘내서 본분에 충실하게만 해주면 된다.”
 차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본분을 열심히 하는 중이라 그의 말에는 신뢰가 갔다.
 나는 마침 차 감독이 잔뜩 흥에 취한 지금이 기회라며 주장 김영빈에게 신호를 보냈다.
 김영빈이 신호를 받고 차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뭔데? 말해봐.”
 “5일 남은 시점인데 나름대로 저희 팀 전략이 있으니 이제 슬슬 숨기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타 구단과 스크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야?”
 김영빈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 지금까지 저희 밴픽 전략은 숨겼고 운영 스타일도 눈치 채지 못하게 게임해왔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습하려면 다른 구단과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그럼 연습은?”
 “저번 청소내기 때 보셨겠지만 2군 동생들 실력이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팀 내 스크림으로 충분히 시뮬레이션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표 코치와 사전에 얘기하지 않은 부분이고 나와 1군 선수단만 은밀하게 나눴던 계획이었다.
 그래서인지 차 감독과 표 코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김영빈이 쐐기를 꽂았다.
 “승강전 이겨서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비장하던지 내가 감독이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나 차 감독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보자.”
 “감사합니다. 감독님.”
 지금부터 닷새간 벌어질 1,2군 스크림이 확정되고 가장 쾌재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1군 선수들에게 말한 것처럼 전략 노출을 방지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내가 노리는 다른 수도 있었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표 코치의 수작에 빌미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구단에 밴픽 정보를 팔거나 흘릴 수도 없을 테고 그런 짓을 만에 하나 벌여도 바로 덜미를 잡힐 것이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
 내가 벼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표 코치는 반드시 어떻게든 움직일 것이다.
 
 ***
 
 바로 다음날 차 감독이 다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기사 떠서 다들 알고 있겠지? 협회에서 다음 시즌 운영계획서를 각 구단으로 보내왔다.”
 그 말처럼 모두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일 우리가 승강전에 이겨서 승격에 성공하면 두 개의 팀을 운영할 수 있다. 1,2군 개념을 떠나 두 개의 팀으로 모두 리그 경기를 뛰는 거야.”
 이건 2군 선수들에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상규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 이유도 간단했다.
 “승강전 이기자마자 프런트 임원들과 만나 협상하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파격적인 연봉 상승은 없다.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이미 내려온 상태고 팀원 영입이나 방출도 없다. 이 구성 그대로 갈 거야.”
 이 말은 연습생 신분인 나와 상규도 정식으로 계약하고 데뷔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상규가 벌떡 일어나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죽기 살기로 1군 형들 연습을 돕겠습니다!”
 팀원들이 상규를 흐뭇하게 바라보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팀의 스폰서인 피닉스가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정식 계약을 따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갑자기 찾아온 기회이니 잡아야만했다.
 나는 더 열심히 1군을 코치할 테고 연습도 도울 것이다.
 모든 것이 잘 풀려가고 거슬리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저 빌어먹을 표 코치만 정리하면 되는데 아직 움직이지를 않는다.
 표 코치가 이미 그 바닥에서 손을 뗐다면···?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결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승부조작에 민감한 E-스포츠 판이라 더욱 염려되었다.
 전 세계적인 E-스포츠 열풍을 일으켰던 스타리그가 망해가던 과정에 가속을 붙인 결정적인 사건이 승부조작 스캔들이었으니 두고 볼 계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승강전을 이틀 앞두고 드디어 내 눈에 뭔가 걸려들었다.
 
 ***
 
 승강전을 이틀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매진하는 상황이었다.
 거의 잠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하드코어한 시뮬레이션이 지속되는 바람에 선수들도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당연히 코치로서 직분을 다 하지는 않아도 감독 눈치를 보며 자리만은 지켜야 하는 표영호가 내게 덜미를 잡힌 것도 이런 피로누적의 결과였다.
 표 코치가 선수들보다 먼저 나가떨어져 의자에 등을 파묻고 코를 골며 자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간은 새벽 2시.
 일반적인 전화라면 걸려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표 코치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벨소리도 듣지 못하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잔뜩 예민한 시기와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가 거슬렸는지 한창 날카로워진 변우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나 가서 소리 좀 꺼라.”
 “네.”
 막내이다 보니 내가 움직였다.
 표 코치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휴대폰 음량 버튼을 누르려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전화가 끊겼다.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표시와 함께 액정이 꺼지기에 다시 자리에 두려는데···.
 곧바로 문자 한 통이 수신되었다.
 
 [표 코치님 오랜만입니다. 강 사장인데 이 번호로 연락 한번 주세요. 큰 건 하나 같이 하시죠.]
 
 상대방은 저장되어 있지 않은 새 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것 같은데 이 대책 없는 인간은 이런 은밀한 대화를 자기 휴대폰으로 받으면서 잠금도 걸어놓지 않았다.
 멍청한 건지 무식한 건지 몰라도 둘 다였으면 좋겠네.
 어쨌거나 나는 표시된 내용을 보고 본능적으로 상대가 승부조작을 연결하는 브로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누가 봐도 수상한 내용의 문자이긴 했지만···.
 “진욱아. 빨리 와. 큐 잡혔어.”
 “어? 어···. 금방 갈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상규가 나를 부른다.
 어떻게 대처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눈 딱 감고 한 번만 모험을 하기로 했다.
 패턴이나 지문으로 잠기지 않은 표 코치의 휴대폰을 열어 강 사장이라는 브로커에게 수신된 문자를 삭제했다.
 물론, 삭제하는 과정에서 강 사장의 번호는 외워두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새 문자를 지워버리고 휴대폰을 제 자리에 돌려놓은 다음 내 자리로 돌아왔다.
 “상규야 미드 챔피언 조합 봐서 아무거나 픽 좀 해주라. 화장실이 급해서 금방 다녀올게.”
 “그래. 공격적인 걸로 잡는다? 어차피 내가 정글 가서 미드 봐줄 거니까.”
 “오케이.”
 나는 상규에게 픽을 부탁하고 내 휴대폰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에 혹여 누가 있을까 살펴본 다음 문 까지 걸어 잠그고 강 사장의 번호를 입력해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찜찜해서 다른 폰을 마련했습니다. 이 번호로 연락주시죠. 지금 연습실이라 통화는 좀 곤란하고 급한 일이면 문자로 주세요.]
 
 과연 이 방법이 먹혀들까?
 나름대로 개연성 있는 말을 꾸며낸 거라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10초 만에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강 사장이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우리 표 코치님 완전 프로 다 되셨네.]
 [별말씀을.]
 [거두절미하고 곧 승강전 경기 있죠? 그거 그림 좀 나올 것 같은데···. 아마추어 BJ팀과 왕년의 강팀이 상위리그 진출권을 놓고 싸우잖아요?]
 
 나도 모르게 내 한쪽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그렇지.
 누가 봐도 우리가 이겨야 하는 경기인데 승강전이라는 중요한 무대로 화제성도 집중되어 있으니 역 배당 터뜨리기 좋은 게임이었다.
 역 배당이란 승산이 적은 팀이 이겨 높은 배당률을 먹는 걸 뜻한다.
 승부조작 브로커들은 주로 이런 경기를 골라 설계한다.
 나는 한동안 표 코치 행세를 하며 계속해서 강 사장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용이 한 페이지를 넘어갈 때마다 차곡차곡 화면을 캡처해서 사진 파일로 정리했다.
 아무래도 내가 표 코치 본인이 아니라 디테일한 거래 수단이나 강 사장의 신상 정보를 캐낼 수는 없었지만 승부조작 브로커라는 확실한 증거와 방법은 잡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짧은 대화내용들과 강 사장의 휴대폰 번호, 그리고 내가 표 코치라고 믿는 상대의 방심 이 세 가지면 끝낼 수 있다.
 나는 대충 강 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다음 모은 사진들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한 사람에게 전송했다.
 
 [권재훈 검사님께 제보 드립니다. E스포츠 로크 리그의 승부조작 정황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브로커의 제의를 받은 코치인 척 연기하며 대화를 했고 한 브로커가···.]
 
 새벽이라 지금 당장 확인은 못 하겠지만 제보를 받은 권 검사가 아침에 일어나 내용을 확인한다면 이틀 남은 승강전이 다가오기도 전에 상황은 끝날 것이었다.
 현 시점에서 미래가 될 나의 전생에서 인연이 닿은 검사로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다 못해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검사 임용 1년 차부터 미친 듯이 사건을 물어뜯고 늘어지며 조직 상관인 검사들부터 정치인에 대권주자까지 건드린 인물로 특수부 또라이 검사로 통하는 사람.
 검은 돈을 쫓다가 불법 도박 사이트 여러 개를 운영하는 물주와 브로커들을 소탕하면서 이 바닥까지 수사하면서 안면을 트고 인연을 쌓았었다.
 그 일로 표 코치가 저지른 행각이 밝혀졌던 것이고.
 이 시기 즈음부터 수사가 시작되었을 테니 이 제보를 흘려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담당 부서에서 홈페이지에 공개한 제보용 번호로 연락했으니 나의 수상함도 감출 수 있으며 일처리는 확실한 양반이니 내 신분이 드러날 걱정도 없었고···.
 실수한 게 있나 다시 확인하며 수신인도 정확하게 권재훈 검사로 지목했다.
 이제 그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잡아 반드시 팀을 챔피언스 리그로 승격시키고 선수로 데뷔하고야 말 것이다.
 
 ***
 
 역시나 예상대로 이미 검은 돈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었던 것 같았다. 권재훈 검사의 조치는 내가 제보한 이후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보 다음날 저녁 권 검사의 담당 수사관인 오 계장이라는 자가 연습실로 찾아왔다.
 “표영호 씨가 어느 분이십니까?”
 “접니다만···?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수사 차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선수분들 연습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잠깐 조용한 곳으로 자리 좀 옮기실까요?”
 “아···. 예···.”
 오 계장은 별일 아니라는 투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의 신분증을 본 표영호는 그 뒤를 따랐고.
 응, 그래···.
 표영호 저 자식은 무식하고 멍청한 게 맞다.
 검찰수사관이 수사 차 나왔다고 따라오라는데 뭔지도 모르고 순순히 따라간다.
 나를 제외한 선수들은 별일 아닌 것 같아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그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게다가 승강전이 당장 내일이었으니까 딴청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
 내게는 권재훈 검사로부터 사건 종결 이후, 혹은 수사 중 필요하면 따로 연락하겠다는 말과 신변보호는 걱정 말라는 말을 담은 메시지 한 통이 수신되었다.
 
 표 코치가 오 계장을 따라 연습실을 떠나고 딱 두 시간이 지나서 차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표 코치가 개인적인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내일 승강전 부스에 함께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표 코치는 여지없이 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는 것 같다.
 차 감독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굳이 모든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말이다.
 다른 팀이었다면 펄쩍 뛸 일이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사실 표 코치가 부스 안에 있으나마나 큰 상관이 없었으니.
 다만 공식적인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대회 규정상 경기장 선수 부스에 선수들과 한 명의 코칭스태프가 함께 해야 한다.
 물론, 차 감독이 들어가도 상관은 없지만 피닉스 스톰의 감독은 전통적으로 게임에 관여하지 않고 선수관리와 환경, 처우 관리 및 스폰서 프런트와의 교섭, 의전이 주 업무였다.
 몇몇 팀의 경우 코치 없이 감독이 모든 것을 총괄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팀마다 다른 실정이었다.
 대부분 프런트에서 보내주는 매니저가 있는 경우도 있고.
 분위기를 살피며 차 감독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부스에는 내가 들어가야겠지? 미안하다. 그간 너희 게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어야 도움이 될 텐데···. 이번 승강전은 오롯이 너희 힘으로 해야겠구나.”
 “아닙니다. 감독님···.”
 괜스레 축 처진 분위기.
 그 안에서 내가 벌떡 일어났다.
 “가,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해봐.”
 “어차피 저는 지금 연습생 신분이고 계약관계는 아니니 경기 출전은 못하지만 임시코치 자격으로 부스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으음···?”
 리그 규정, 경기 규정, 팀 운영 규정, 협회 규정, 계약 규정···.
 이 바닥에 정해진 수많은 규정은 이미 코치 생활을 할 때 군대에서 외운 강령들만큼 빠삭하게 외우고 있다.
 지금 우리 팀이 처한 상황에 가장 유리한 방법을 제시했다.
 차 감독도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관련 규정이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퉁겼다.
 “그렇지···. 임시코치야 계약도 일단은 필요 없고 자격은 코치니까 부스에 참여하는 건 가능하지.”
 그 말에 1군 선수단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직접 게임을 하는 것과 누군가 객관적으로 게임 전체를 바라보며 조언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무리 연습생인 나일지라도 게임에 몰두해서 매몰된 그들이 캐치하지 못한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표 코치 같은 인간이라도 필요했던 거고.
 주장 김영빈이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진욱이가 들어 와주면 좋겠습니다. 요 며칠 저희 연습도 많이 도와줬고 게임 보는 눈은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선수들이 너, 나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뜻을 표했다.
 흐뭇했다.
 요 며칠 내 실력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홀로 게임을 해도 잘 풀렸고 팀원들과 연습할 때에도 충분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1, 2군 간 스크림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고 선수들도 점점 나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더해 1군 선수들과는 전략적인 이야기나 게임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나름대로 신뢰도 쌓여가고 있었다.
 차 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열망을 읽어냈다.
 “좋아. 너희 게임이니 너희가 가장 잘 알겠지. 바로 사무실로 가서 협회에 임시코치 등록절차 밟을 테니까 내일 경기장에 진욱이도 함께 간다.”
 “감사합니다!”
 차 감독이 좋은 감독의 자질을 가졌다는 게 여기에서 증명된다고 생각했다.
 격식, 관행, 주변시선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선수들의 입장에서 가장 나은 방향만을 고려하는 열린 마인드가 참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보다 기쁠 수가 있을까?
 나는 확신했다.
 지금 1군 선수들과의 신뢰를 기반으로 경기장에서 터져 나올 변수들을 내가 조율할 수 있다면 이번에 우리 팀은 반드시 챔피언스 리그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드디어 정식 선수로 데뷔하는 것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을 내가 직접 닦고, 밟고···. 결국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임시코치 합류가 결정되고 선수들을 더욱 의욕에 불타 연습에 매진했다.
 “경기 전날은 컨디션 조절 해두는 편이 훨씬 좋아요.”
 “그래, 오늘은 새벽 연습 금지. 다들 12시까지만 집중하고 내일 오전까지 푹 쉬자.”
 나와 주장 김영빈의 주도하에 우리의 경기 준비는 착실하게 완성되고 있었다.
 
 ***
 
 표 코치의 부재로 스폰서인 피닉스의 도움을 받아 운전해줄 사람을 수배했다.
 하루 경기장과 연습실을 왕복하는 운전기사 치고 많은 돈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경기였기에 회사에서 흔쾌히 금액을 지불해 주었다.
 연말이라 팀 운영비도 바닥인 상태에서 천만다행인 상황이었다.
 피닉스는 헤드셋, 마우스, 키보드, 패드, 의자 등 게이머를 위한 주변기기를 판매하는 회사로 대표가 E스포츠팬이기에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게임단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그런 스폰서 회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적당히 갖고 있어 전의를 더욱 불태울 수 있었다.
 “기사까지 보내주셨는데 꼭 이겨서 챔피언스 가자!”
 “오늘 한 번 제대로 불사르자.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어쩌다 탑인 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들 각자 역할을 다 못하면 내 역할도 의미가 없어져. 서로 열등감 갖지 말고 하나가 되는 거야. 알지?”
 경기장까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선수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긴장을 풀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차 감독도, 임시코치가 된 나도 그런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 가만히 지켜보면서 차는 계속 강변북로를 달렸다.
 다운된 분위기의 팀에 코칭스태프가 나서 사기를 올려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이미 스스로 잘 분위기를 다잡고 있는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도 능력이다.
 과한 것은 늘 문제가 된다.
 사기가 충만한 선수들에게 조언을 하는 건 부담감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나야 임시코치라 말을 아낀다고 해도 차 감독 역시 그런 부분은 감각적으로 아는 듯 했다.
 갈수록 마음에 드는 팀이다.
 어쨌거나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드디어 경기장에 도착했다.
 상암동 A스타디움.
 게임전문 채널의 최강자로 개국부터 줄곧 E스포츠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올게임넷(AGN)에서 그간 벌어들인 수익을 다시 선수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취지로 최고의 경기환경을 위해 세운 E스포츠 전용 경기장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위용이 선수들은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챌린저스에서 보낸 한 시즌 동안 이 경기장 근처에도 와보지 못했을 터다.
 2부 리그 경기는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는 되지만 경기 자체는 연습실에서 치러진다.
 협회의 심판들이 각 구단의 연습실로 감독을 나가고 경기는 온라인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경기장을 이용하는 것도 나름의 영광스러운 일이랄까.
 다행히 오늘 경기는 승강전이라는 중요한 타이틀이 걸린 데다가 시즌 마지막 경기이기에 경기장에서 치러지며 정식 채널에서 방송도 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경기장에서 다시 낯선 카메라와 관객,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수나 긴장하는 이가 나타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선수들을 수도 없이 봐왔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1군 형들···.
 아니, 선수들이여.
 미안하지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임시코치로 합류하겠다고 한 건 아니라네.
 나는 이번 생에 반드시 최고의 선수로 거듭날 생각이고 그 시작이 자네들 손에 달렸다네.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잠깐이지만 전생의 열혈코치가 되고자 하네···.
 
 경기장 주차장에 우리 선수단의 차가 들어서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각종 게임 커뮤니티와 언론 게임 뉴스 담당 기자들이었다.
 과거의 강호 피닉스 스톰이 2부 리그를 겪고 다시 1부로 승격할 수도 있는 날이니 기삿거리가 쏟아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에게 부담감이 가중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쏠리는 것을 즐기는 이도 있고 부담스러워 하는 이도 있는 법이니까.
 최선의 선택은 일단 막무가내 인터뷰를 차단하고 짧게 공식적인 자리를 갖는 것이다.
 나는 선수들의 바로 뒤를 따라 내렸다.
 내리는 과정에서 코치에게 지급되는 명찰을 목에 걸고 선수들 앞으로 나서 기자들을 제지했다.
 “들어가겠습니다. 경기 전 인터뷰는 예정에 없었습니다. 필요하시면 저와 협의 후에 공식적으로 하시죠.”
 내가 나서니 차 감독도 멀뚱히 볼 수는 없었는지 선수들을 옆으로 돌려 일단 경기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E스포츠 경기장을 찾는 기자들은 연예부 기자들처럼 드세거나 집요하지 않다.
 “코치님이세요?”
 “임시코치로 오늘 선수들 관리합니다. 권진욱입니다.”
 “인터뷰 시간 빼주실 수 있나요?”
 “일단 선수들 메이크업이랑 장비 세팅 끝내고 잠깐 마련해볼게요. 선수단 전체 15분. 괜찮으시죠?”
 기자들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저들끼리 스케줄 표에 시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겠지.
 코치 명찰을 달고는 있는데 저들이 아는 표 코치도 아니거니와 나는 지금 19살 고등학생의 외모니까.
 그래도 더 요구하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나는 기자들을 물린 다음에서야 경기장으로 선수들을 뒤따라 들어갔다.
 대기실에 진입한 선수들이 짐을 풀고 앉아서 메이크업 팀을 기다렸다.
 나는 차 감독에게 가서 기자들과 조율한 사실을 전했다.
 “기자들에게 메이크업하고 장비 세팅 끝내고 선수단 전체 15분만 시간 내주기로 했습니다. 그편이 아마 선수들도 부담을 덜 느낄 거예요. 개별 인터뷰보다 팀원이 다 함께 있는 자리라면 부담이 줄어들 테니까요.”
 “으음, 잘했네. 허허허···. 어디에서 코치 알바 같은 것도 시켜주나? 잘하네.”
 “경기 관전 오면서 몇 번 봤어요.”
 대충 둘러댔지만 딱히 차 감독은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케이. 급한 첫 번째 과제는 끝냈으니 이제 다음 과제를 해야지.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전설적인 코치 권진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프로게이머』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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