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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검형 1

2017.07.19 조회 1,133 추천 10


 무상검형 1권
 
 
 서장 미안하다, 연자여······
 
 
 창궁무애검법을 펼치기 위해선 창궁무애검이 필요하고 사일검법을 펼치기 위해선 사일검이 필요하다.
 그 어떤 고절한 절정 검법이라 할지언정 창안할 때 쥐고 있던 검의 특색에선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 검을 쥔 자가 고수이고 검을 수족처럼 다스릴수록 검의 특색에 맞춰서 만들어지게 된다.
 그것이 검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다.
 때문에 신검십이세와 무상검형은,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연자여, 나와 인연이 닿았다면 어서 빨리 검을 꺾고 길바닥에나 나앉아라.
 이룰 수 없는 검법을 남겨 미안하다, 연자여······.
 
 “······이런 염병할 놈이. 이런 건 맨 앞장에 넣었어야지.”
 
 
 1장 거지 유운룡
 
 
 “으와아······.”
 “응? 왜 그러니, 혜아야?”
 할아버지의 물음에 손녀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담벼락을 가리켰다.
 “거지 오빠가 앉아 있어요.”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손녀는 쭈그려 앉아 있는 거지에게로 쪼르르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거지 오빠. 오빠는 왜 여기 앉아 있어요? 집에 안 들어가세요?”
 “······.”
 “우웅. 집이 없어요?”
 “······아가씨는 천자문 열심히 외워. 오빠처럼 되지 말고.”
 꼬르륵.
 때마침 거지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처절하게 해진 옷에 객잔 담장에 쭈그려 앉은 모양새에 배곯은 소리까지 나니 불쌍해 보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투정을 부렸다.
 “할아버지, 저 거지 오빠에게 비취교라도 사 줘요.”
 “허허허······.”
 할아버지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시장 바닥에 거지가 한둘인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돕다 보면 끝이 없다.
 일반 교자도 아니고 부추로 색을 내고 해물을 채운 비취교는 특히 더 그렇다.
 사천 같은 내륙 지방에서 비취교는 이미 교자를 초월한 음식이다. 수라상에도 오르는 음식이다.
 ‘그래도 불쌍한 이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돈 몇 푼 쓰는 게 낫겠지.’
 어릴 적에 해 보는 한두 번의 적선은, 분명히 인성 교육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려무나. 은전을 좀 줄 테니 객잔에 가서 사다 주렴. 잔돈은 꼭 받아 오고.”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은전 몇 개를 꺼내 손녀에게 쥐어 주었다.
 손녀는 해맑게 웃었다.
 “헤헤,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금방 사 올게요!”
 손녀가 객잔 입구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짧은 다리였지만 나름대로 경공을 놀리는 게 봐 줄 만은 했다.
 잠시 후, 객잔을 나온 손녀는 거지에게로 다가가 비취교 두 개를 내밀었다. 다른 손에는 잔돈을 꼬옥 쥐고 있었다.
 “거지 오빠, 이거 먹어요. 혜아가 좋아하는 거예요.”
 “······.”
 거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을 내밀어 비취교를 받들듯이 받았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굶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크지도 않은 비취교 두 개를 한 번에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꼴깍.
 쳐다보고 있던 손녀의 목에서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좋아하는 거라 말했으니 거지 오빠가 하나는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거지의 입에는 아직 씹다 만 비취교가 들어 있었다.
 “맛있어요?”
 “응.”
 “네.”
 “음.”
 “······.”
 잠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거지는 비취교를 삼키고 싶었다. 먹기 전이었으면 모르되 입안에서는 이미 달달한 기름기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먹고 죽자.’
 큰맘 먹고 단번에 삼켰다.
 꿀꺽.
 동시에 손녀의 목에서도 침이 넘어갔다.
 꼴깍.
 “······잘 먹었어, 착한 아가씨.”
 “네에······.”
 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꾸나. 그 청년이 곤란해하겠구나.”
 “으응, 알았어요. 그럼 거지 오빠, 힘내세요.”
 손녀는 거지에게 다소곳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할아버지에게로 가 찰싹 붙었다.
 “헤헤.”
 “녀석. 어서 가도록 하자.”
 “네!”
 할아버지와 손녀는 거지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조손이 몇 발자국 가지 않았을 때 거지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방금 전의 경공은 세 걸음 더 일찍 속도를 줄이려고 해 봐. 그럼 깔끔하게 멈출 수 있을 거야.”
 손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충분한 속도가 나올 때까지 가속한 다음에 멈추려고 해서 한 박자 늦었었지. 혜아의 공부가 부족한 걸 보니 조만간 담벼락에 가서 나앉겠구나, 허허.”
 손녀가 볼을 부풀렸다.
 “거지 오빠가 혜아보다 잘 알 리가 없어요.”
 “분하면 노력하려무나.”
 “피이.”
 손녀는 짐짓 화가 난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보며 미소를 짓다가, 뒤를 슬쩍 돌아봤다.
 “무공을 배웠나?”
 “소싯적에요. 적선받을 정도에서 멈췄지만요.”
 “······욕심이 과하면 다치는 법이네.”
 “네?”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거지를 향해 할아버지가 은전 한 개를 날렸다.
 “혜아의 조언에 대한 값은 거기까질세.”
 그러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거지를 한 번 쏘아보고는 손녀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거지는 고개 바로 옆 돌 벽에 박힌 은전을 바라보다가 툭 뽑았다.
 은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사천성 성도에는 사람이 많이 다닌다.
 사천 특유의 강렬한 맛을 찾는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아미파와 청성파, 점창파, 당가까지 위치한 만큼 무인들도 많이 오가는 지역이다.
 구역에 따라서는 민간인보다 무림인 구경이 더 쉽기도 하다.
 거지 청년 유운룡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감안했다.
 “슬슬 올 때 됐구만. 예정에 없던 비싼 교자를 먹었더니 배만 더 고파졌어, 쩝. 빨리 와라, 이놈들아.”
 유운룡은 담벼락을 돌아 객잔 뒤뜰로 들어갔다.
 이 시간쯤 되면 특별히 찾아와서 적선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현 무림 최대의 후기지수 양성 교육소, 정무학관의 수련생들이다. 굳이 불특정 다수에게 힘들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방금 전만 해도 이마에 은자 하나 박을 뻔했다.
 삼 년 동안 쌓은 내공 있긴 하지만 그거 믿고 객기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안전한 게 제일이다.
 “하여튼 노인이랑 애들만큼 위험한 게 따로 없는 동네라니깐.”
 배를 어루만지며 앉아 있자 잠시 후에 일단의 무리들이 객잔 뒤뜰에 나타났다.
 “형! 저희 왔어요!”
 “오오, 왔구나.”
 우르르 몰려온 무리는 유운룡보다 다소 어려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유운룡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가서 칭찬 좀 받고 왔어?”
 그 한마디에 청년들이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조별 대련에서 일등 찍었어요!”
 “전 사일검법의 성취가 팔성으로 올라서 문파 사람들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영웅 됐어요, 어제.”
 “형이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검격이 한층 더 예리해지더라고요. 서 소저의 눈빛이 달라지네요, 하핫.”
 “자식들.”
 유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 치 적선.”
 그 말에 청년들이 허리춤에서 주머니 몇 개를 풀러 건넸다.
 사일검법의 성취가 올랐다고 한 청년은 아예 큰 보따리 하나를 내놨다.
 “몸보신 좀 하시라고 교관 식당 털어 왔어요. 들키면 저 죽는 거 알죠?”
 “교, 교관 식당이라니······.”
 유운룡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너 이 자식, 형을 위하는 씀씀이가 참으로 크구나. 오늘은 뭘 봐 줄까? 검강이라도 다듬어 줄까?”
 청년이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검강이라뇨. 그건 아직 멀었죠. 내공이 받쳐 줘야 되는 건데 아직 일 갑자는 어림도 없어요.”
 “십오 년이면 충분한데 무슨 소리야?”
 “예?”
 청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절세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검기만 해도 이십 년 내공은 필요한 게 상식이다.
 하물며 검강은 말할 것도 없다.
 “에이, 설마요. 말도 안 되죠. 그럼 저희들 전부 다 가능하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신진십룡(新進十龍)은 저희가 다 채우게요? 농담 마세요. 이건 그냥 그동안 도움받은 게 고마워서 챙겨 온 거예요.”
 청년이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치자 유운룡은 피식 웃었다.
 “됐음 말고. 어쨌든 이건 잘 먹으마. 안 그래도 아까 입에 기름칠당해서 무지 배고팠던 참이야.”
 유운룡은 주머니 속에 든 음식들을 하나씩 확인한 다음 큰 보따리를 풀었다.
 찐 돼지갈비와 갖은 산나물, 신선한 향채, 닭튀김 등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크, 맛있겠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고기냐. 우적우적.”
 입에 기름이 묻는 것도 상관 않고 허겁지겁 뜯어먹었다.
 바로 앞에서 청년들이 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음식물을 입에 가득 채운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꿀꺽, 하나씩 펼쳐 봐.”
 “네!”
 그때부터 진풍경이 펼쳐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 빠르게 정렬한 청년들이 일제히 발검을 했다.
 그리고 제각각 배운 검법들을 하나씩 꺼냈다.
 사일검법부터 해서 창궁무애검법, 표풍검법, 적운수라검법, 유운검법 등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무공들이 일사불란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유운룡에게 검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니다.
 지적받으려는 것이다.
 유운룡은 검들이 그리는 궤적을 하나씩 눈여겨보며 식은 음식을 입에 우겨 넣었다.
 “맛있다, 맛있어. 같은 요리라고 해도 재료가 다르고 씹는 맛이 다르네, 꿀꺽.”
 보따리의 음식을 삼분지 일쯤 먹었을 때 청년들의 검이 하나씩 멈췄다.
 완전히 다 멈춘 것은 절반을 먹어 치웠을 때였다.
 유운룡은 더러운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 사이에 많이들 좋아졌네. 사일이는 어깨 튕기는 걸 좀 더 부드러우면서 탄력적으로 해 봐. 어깨 근육도 기르고. 창궁이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하늘처럼 휘두르면 되겠다. 음······ 비 갠 뒤 포근한 구름들이 노니는 하늘처럼 휘두르면 될 거야. 표풍이는······.”
 유운룡의 설명이 끝나자 사일이라 불렸던 청년, 종남파의 일대제자인 주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 제 이름은 주진혁이라니까요. 이제 이름 좀 외워 줄 때 되지 않았어요?”
 “에이, 무리야. 형이 네 이름을 그리 쉽게 외울 정도면 길거리에 나앉았겠냐? 그냥 받아들여.”
 “에휴. 그럼 저 말고 사일검법 쓰는 다른 사람이 오면요?”
 유운룡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사일!”
 “또 오면 삼사일이고?”
 “잘 아네.”
 “정말 못 말리신다니까.”
 주진혁의 뒤에서 다른 청년이 입을 열었다.
 “비 갠 뒤 포근한 구름들이 노니는 하늘처럼 휘두르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도 진혁이처럼 풀어서 좀 얘기해 줘요, 형. 꼭 나만 갖고 그런다니까.”
 남궁세가의 남궁창이다.
 유운룡은 남궁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말로 도와줄 수 있는 건 그게 한계야. 실수하는 부분도 없고 검식도 완벽해졌거든. 내가 아무리 거지라도 적선받기 위해서 멀쩡한 걸 고치라는 소린 안 해, 이놈아.”
 남궁창이 입술을 조금 비죽였다.
 “숙부가 매번 틀렸다면서 지적한단 말이에요. 검식에 문제가 있대요.”
 “그래? 내가 볼 땐 제대로 펼치고 있는데?”
 “에이, 그래도 형보단 우리 숙부가 더 정확히 알고 있죠. 형은 그냥 눈썰미로 어색한 부분 잡아 주고 그러는 거잖아요. 뭐, 하늘이 내린 눈썰미긴 해도요.”
 유운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눈썰미뿐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숙부란 사람이 계속 지적한다는 거지? 혹시 너를 싫어해서 제대로 하는데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남궁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와, 그게 사실이라면 더 끔찍하네요······ 일단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고쳐 봐야죠. 오늘도 교정 안 하면 내일 진짜 개털릴 것 같아요. 뭔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남궁창은 절박했다.
 숙부와는 원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었는데, 요 며칠 친구들을 따라 밖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 틀어지게 됐다.
 가문의 검법에만 전념해도 부족한 판에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사소한 실수에도 혼쭐을 내고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공개 망신을 주기 일쑤였다.
 특히 어제는 검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각오하라고 단단히 엄포까지 놓은 상태라 동네 거지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잡으러 왔다.
 하지만 유운룡은 절박하지 않았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요즘엔 적선도 쏠쏠했다. 점심시간까지만 참으면 이후엔 먹을거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속으로는 자기가 고쳐 주는 게 틀렸을까 봐 조마조마하긴 하지만, 큰일 나기 전까진 시침 뗄 생각이다.
 아직까진 별 문제도 없었다.
 “뭐, 시도해 볼 만한 게 있긴 하다만······ 사일이가 갖다 준 게 더 많았잖냐. 너부터 챙겨 주기엔 눈치가 보이네?”
 유운룡은 남궁창이 준 주머니를 슬쩍 열어서 곁눈질로 살펴봤다.
 교자가 다섯 개에 파를 넣어 잘 지진 전병이 하나 있다.
 맛있어 보였다.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배가 불렀다.
 주진혁이 싸 온 양이 많아서 내일까지 버틸 수도 있으니 굳이 추가 작업을 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주진혁이 삐쳐서 내일부터 적선을 안 해 주면 그것도 큰일이다. 통이 크다는 걸 이제야 알았는데 우려먹지 못하게 되면 배가 아프다.
 유운룡이 안 내켜 하는 걸 보고 남궁창이 사정했다.
 “아, 형······ 제가 내일은 그냥 객잔 들어가서 특선 요리 시켜 드릴게요. 그래도 안 돼요?”
 “뭐, 뭣이? 특선 요리?”
 “네.”
 유운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은 반찬 받아먹는 것과 아예 새 요리를 시켜 먹는 건 기분부터가 다른 일이다.
 현재는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 구미가 당겼다.
 동시에 눈치도 보였다.
 “그, 근데 오늘은 사일이가 먼저 가져왔잖아. 얘부터 챙겨 줘야지. 형이 못 배워서 그렇지 의리도 없는 놈은 아니라······.”
 유운룡의 태도가 누그러들자 주진혁이 나서서 남궁창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전 괜찮아요. 어제 일이 고마워서 싸 온 거니까 그걸론 창이 녀석 챙겨 주시면 되죠. 그럼 내일은 객잔 가서 특선 요리도 드실 텐데 형도 좋지 않아요?”
 “그, 그래도 되냐?”
 “그럼요. 창이 좀 도와주세요, 형.”
 남궁창은 포권까지 해 가며 유운룡에게 부탁했다.
 “야, 이런 거 가지고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알았으니까 허리 펴고 손 풀어. 간만에 포식했는데 너 땜에 형 체하겠다.”
 “하핫, 고마워요, 형.”
 “고맙긴, 뭘. 흐흐, 그럼 객잔 가서 숫돌 하나만 빌려 와 봐.”
 주진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객잔에 가 숫돌을 빌려 왔다. 주방에 널린 게 숫돌이라 어렵지 않게 빌렸다.
 “여기요.”
 유운룡은 숫돌을 받아 바닥에 놓고는 남궁창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 줘 봐.”
 “······날 갈게요?”
 “어.”
 “날은 학관에서 다 갈아 주는데요?”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 곳인데 날이라고 제대로 갈겠어?”
 남궁창은 울상을 지었다.
 “아, 그래도 형······ 진짜 갈 줄 아는 거 맞죠? 대충 생색내려고 하는 거 아니죠? 날 제대로 가는 건 안 배우면 못 하는 건데······.”
 “괜찮아, 괜찮아. 여태껏 형 말 듣고 실력 안 는 사람 있어? 한 번만 더 믿어 봐. 그리고 내일 객잔 가서 특선 요리 쏘고 극락 가는 거야.”
 유운룡이 재촉하자 남궁창은 결국 검을 내주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허, 인석이.”
 유운룡은 검을 받자마자 철퍼덕 주저앉았다.
 “먹은 거 다 꺼질 텐데, 쳇. 사일이가 돼지갈비도 싸다 줬는데, 쳇.”
 슥삭슥삭.
 유운룡은 투덜거리면서도 날을 갈기 시작했다.
 세 번 갈더니 한숨을 푸욱 쉬었다.
 “끙, 몇 년 만에 하려니 죽겠네. 허리가 굳었어.”
 남궁창이 기겁을 했다.
 “몇 년 만이라뇨? 형 잘못되면······.”
 “못 믿겠으면 그냥 가든가. 나야 편하고 좋지.”
 “아우······.”
 주진혁이 남궁창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믿어 보자. 지금까지 거지 형 말 믿어서 잘못된 거 없었잖아. 이번에도 잘되겠지.”
 “사일이가 뭘 좀 안다니까, 으흐흐.”
 “하핫. 그럼 요깃거리 하시라고 뭐라도 사 올게요. 잠시만요.”
 유운룡은 주진혁이 객잔으로 가는 것을 보다가 남궁창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대충 내일 오전까지 갈아야 하는데 어쩔래? 구경할래, 내일 올래?”
 “그, 그렇게 오래 걸려요? 내일 첫 수업 때 검사받아야 하는데요?”
 기겁을 한 남궁창이 눈을 크게 떴다.
 유운룡은 혀를 한 번 차고는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던졌다.
 “정석대로 갈면 열흘은 갈아야 해. 그것도 하루 종일. 인립(刃立)이 어디 쉬운 건 줄 아냐?”
 “인립이요? 그게 뭔데요?”
 “있다, 그런 게. 어쨌든 알아서 해. 어떻게든 아침때까지는 맞출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그럼 전요? 날만 갈면 끝이에요? 자세 잡아 주셔야죠.”
 유운룡은 검을 갈면서 대답했다.
 “인립이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니라.”
 말로는 그래도 확신은 못 한다.
 하지만 최소한 날 좀 간다고 부작용이 생길 리는 없다. 안 되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색내고 발 뺄 생각으로 한 소리다.
 남궁창이 의심했다.
 “인립이라 함은 날을 세운다는 건데······ 날 가는 일을 고상하게 표현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형 진짜 제대로 된 거 맞죠? 저 엿 먹이려는 거 아니죠?”
 “어허, 특선 요리 쏘고 극락 가면 된다니까 그러네. 못 믿겠으면 그냥 가든가. 에헤이, 부정 탄다.”
 남궁창은 결국 있는 대로 울상을 짓고는 몸을 돌렸다.
 “알았어요. 진짜 잘해 주셔야 해요, 형. 내일 아침 식사 시간 때 올 테니까 딴 데 가지 마시구요.”
 그때 주진혁이 양손에 뭔가를 들고 뒤뜰로 들어섰다.
 막 찐 교자 열다섯 개가 들려 있었다. 뜨끈뜨끈한 게 김도 모락모락 났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형. 저녁엔 못 나오니까 좀 많이 챙겼어요.”
 유운룡이 벌떡 일어나서 주진혁의 손을 맞잡았다.
 교자가 뜨거웠다.
 자연스럽게 손을 뗀 유운룡은 아까 본 포권을 따라 했다.
 “이 우형이 사 아우 덕에 호강을 누린다. 정말 고맙다, 크흑.”
 “주 아우겠죠.”
 “그래, 사 아우. 너밖에 없다, 인마!”
 주진혁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평생 사일이라고 부를 기세시네. 어쨌든 저흰 먼저 갈게요. 잘 부탁드려요, 형. 제가 많이 의지하는 거 알죠?”
 “아무렴! 너희들의 학점은 이 형님께서 책임져 주마, 으하하하.”
 주진혁은 울상을 짓고 있는 남궁창과 손을 흔드는 친구들을 데리고 학관으로 돌아갔다.
 유운룡은 죽치고 앉아서 날을 갈기 시작했다.
 슥삭슥삭.
 
 
 2장 인립(刃立)
 
 
 정무학관은 기본적으로 외출 금지지만, 아침과 점심 식사는 밖에서 해결할 수도 있다.
 저녁을 나가서 먹으려면 담당 교관의 허가증 혹은 동행이 필요하다.
 자유로이 나갈 수 있는 건 아침과 점심때뿐이다.
 주진혁은 눈을 뜨자마자 간단하게 씻고 정무학관을 나섰다.
 “날은 다 갈았으려나? 거지 형의 비법이 먹혀야 할 텐데 말야.”
 딱히 비법이라고까지 말한 적은 없지만 주진혁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사실 일개 거지에 불과한 유운룡이지만,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말을 섞게 된 이후로는 일개 거지가 아니게 되었다.
 유운룡은 눈썰미가 뛰어났다.
 많이 뛰어났다.
 처음 보는 검법이더라도 검의 궤적과 기세를 통해 무엇을 위한 초식인지, 창안자가 생각한 원형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아가 시연자의 신체 균형과 힘의 분배까지 감안하여 원형에서 어느 정도나 부합되고 있는지도 알아볼 정도였다.
 “눈썰미만 놓고 보면 천재야, 천재. 환경만 좋았으면 신진십룡이 아니라 십이사신(十二死神)에 들어갈지도 몰랐을 거야. 많이 아쉬워. 아, 불쌍한 우리 거지 형.”
 그리고 유운룡의 재능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궁합이 잘 맞는 검법의 경우는, 원형을 벗어나 독자적인 검형을 이룩했더라도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남궁창의 창궁무애검법이 그 경우였다.
 검법을 대성하기 전에 빠지는 오류나 습관은 대체로 쉽게 가는 길이거나, 겉보기에만 강렬해서 원형의 정수가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남궁창의 창궁무애검법은, 단순히 쉽게 가는 길인 경우가 아니라 자기 성격에 맞춰서 재해석해 낸 또 하나의 창궁무애검법이다.
 유운룡은 그런 남궁창의 창궁무애검법을 알아보고 완벽하다고 말한 것이다.
 “정무학관의 교관 중에서도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설마 동네 거지 형이 알아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하핫.”
 정무학관(正武學館)이 어떤 곳인가.
 마교와 사파, 새외의 침략을 막아 내고 완벽한 정파 무림을 일군 무림맹의 후기지수 양성 교육소다.
 각 문파 최고의 기재들과 교관이 모여 있다.
 천하십대고수에 들어가는 무림 사신성(四神星) 전원이 특별 교관으로 있으며 다음 무림을 이끌 후기지수로 인정받은 신진십룡도 대부분 정무학관을 졸업했다.
 그런 용담호혈에서도 짚어 주지 못한 부분을 동네 거지가 채워 주는 거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배우시면 대성하실 텐데, 왜 그리 마다하시는지 모르겠단 말야. 내공도 약간 있는 거 보면 소싯적엔 제대로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끈기가 없으신 건가?”
 유운룡의 재능을 알아보고 문파에 들기를 권유한 게 한두 차례가 아니다.
 자신이 직접 추천장을 써 주면 종남파에 가서 어느 정도 대우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유운룡은 혀까지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겐 재능이 아니라 가망 자체가 없다고 했다.
 “하아, 무림에 투신하면 분명 크게 되실 텐데······.”
 주진혁은 짙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 앞 담벼락까지 가니 벽 너머에서 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조심스럽게 옅게 가는 듯한 소리다.
 주진혁은 소리를 내지 않고 담을 넘었다.
 우물가에는 날 가는 유운룡과 남궁창이 있었다.
 때마침 작업이 끝났는지 유운룡이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설마 밤새 날 가신 거예요, 형?”
 “사일이 왔어? 어제 네가 싸 준 것도 다 못 먹고 날만 갈았다. 아주 그냥 죽겠어.”
 유운룡은 두레박의 물을 검신에 한 번 뿌리고는 남궁창에게 건넸다.
 “일단 한숨 자야겠으니까 검사받고 점심때 와. 특선 요리 쏴야 하니까 돈 두둑이 챙겨 오고.”
 “아휴······ 알았어요. 그냥 평소처럼 펼치면 되는 거죠?”
 유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대로만 해. 손끝에서 느낌이 살살 오긴 할 건데 당황하지만 않으면 될 거야.”
 할 말 다 했다는 태도로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유운룡은 한마디만 덧붙였다.
 “펼치기 전까지 날 모양은 확인하지 마라. 속성으로 갈아서 일회용짜리니까.”
 유운룡은 허리를 두들기면서 담 밑으로 갔다. 풀썩 자빠지면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금세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우리도 들어가자, 창아. 지금 가면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겠다.”
 “아우······.”
 “기운 내. 잘될 거야.”
 주진혁은 여전히 울상인 남궁창을 다독이면서 정무학관으로 돌아갔다.
 
 ***
 
 운명의 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일다경간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첫 수업이 시작됐다.
 각 문파의 정통 검법을 배우는 수업인 검법 총람이다.
 교관 남궁수혁은 연무장에 집결한 수련생들을 본 후 남궁창을 호명했다.
 “남궁창. 앞으로 나와서 창궁무애검법을 시연해 봐라.”
 “······네.”
 남궁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뱉고 앞으로 나갔다.
 뒤에서 주진혁이 응원했다.
 “긴장하지 말고 편히 해.”
 남궁창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남궁수혁의 옆으로 간 남궁창은 숙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 게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작정하고 개처럼 털어 버릴 생각이구나, 아후······ 잘돼야 할 텐데. 거지 형, 믿어도 되는 거죠? 형 믿으면 극락 가는 거 맞죠?’
 속으로 동네 거지 유운룡을 애타게 불러 본 남궁창은 이내 기세를 다듬었다.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단숨에 뽑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번쩍이는 검광만이 허공을 수놓았다.
 “무음발검!”
 “하루 사이에 수준이 달라졌어.”
 “이, 이게 남궁 소협의 진면목인가요? 멋있어라.”
 수련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 나왔다.
 남궁수혁의 눈썹에도 힘이 들어갔다.
 “제법 노력한 모양이군. 창궁무애검법을 얼마나 수련했는지도 보여 주도록.”
 “······알겠습니다.”
 그러나 대답하는 남궁창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뭐지? 검이 평소보다 가벼워진 느낌이야. 내가 뽑은 게 아니라 마치 검이 스스로 튀어나온 것 같았어.’
 검광도 평소보다 훨씬 맑게 빛났다.
 매일같이 휘두르던 평범한 철검임은 분명한데, 뭔가가 달랐다.
 의아해하는 남궁창의 눈에 잘 갈린 검날이 들어왔다.
 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거, 검날이······.’
 날이 엉망진창으로 세워져 있었다.
 여성의 매끈한 나신처럼 요요한 자태를 보이던 날이, 모래에 대고 문지른 것처럼 뒤죽박죽으로 갈려 있었다.
 수직으로 갈렸다가 수평으로 갈리고, 이내 대각으로 갈리다가 곡선으로 갈렸다.
 날카롭게 갈아도 부족할 판에 엉뚱한 방향으로, 그것도 양면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려 있었다.
 ‘망했다. 거지 형, 이게 대체 무슨······.’
 “기수식 안 취하고 뭐 하나! 발검 연습하느라 기수식도 잊어버린 게냐! 아니면 반항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추상같은 불호령에 퍼뜩 정신 차린 남궁창은 반사적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검날에 대한 걱정은 어느새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잔소리가 날아올까 무서워 빠르게 제일식을 펼쳤다.
 제이식을 펼쳤다.
 제삼식을 펼쳤다.
 제사식 다음에 제오식이 따라오고 뒤질세라 제육식이, 제칠식이 빈자리를 메웠다.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올곧은 제팔식은 하늘을 가르고 제구식은 하늘에 녹아들었다.
 제십식부터는 더 이상 틀에 얽힌 검법이 아니었다.
 남궁수혁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관전하던 수련생들의 입들이 벌려졌다.
 주진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연하고 있는 남궁창은 검이,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베고, 하늘을 그리고 있었다.
 창궁무애검법이 아니라 창궁무애한 검이 하늘을 펼치고 있었다.
 “맙소사······.”
 “저게 바로······ 남궁세가의 전통······.”
 “진정한 창궁무애검법······.”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정작 당사자인 남궁창은 경악을 하고 있었다.
 ‘찌를 때는 미끈하고 가를 때는 유연하게, 회수할 땐 저항 없이 움직인다. 힘을 조금만 덜 주면 검이 날아갈 것 같고 더 주면 하늘을 쪼갤 것 같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남궁창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르고 있지 않았다.
 검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시보다 더욱 완벽한 창궁무애검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문에서 배운 창궁무애검법도 아니고 자기 몸에 맞춘 창궁무애검법도 아니고, 좀 더 하늘을 닮은 창궁무애검법이다.
 이런 게 바로 창궁무애검법이라는 게 손끝에서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벅차오르며, 눈물이 왈칵 흘렀다.
 시연이 끝났다.
 모든 검식을 펼치고 기수식으로 돌아온 남궁창을 향해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멋있다, 남궁창! 네가 우리 중 최고다!”
 “다음 신진십룡이 바로 너다! 십이사신까지 달려라!”
 “멋있어요, 남궁 소협! 꺄아악!”
 “오늘부터 우리 오빠 하세요!”
 “어머, 이년들이?”
 
 환호 속에서 주진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남궁창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갈린 검날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안력을 돋워서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설마 각 초식의 움직임에서 핵을 이루는 부분에 맞춰 날을 갈았을 줄이야.’
 제일식에 맞춰 갈린 날이 바람의 결을 갈랐고 제이식부터는 계속해서 결 사이에서 흘렀다.
 날 양쪽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바람이 날을 잡아 세웠기에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고, 완벽한 검로로 흐르게끔 자동적으로 교정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운룡이 말한 인립(刃立)의 정체였다.
 ‘정말 엄청난 비법이야. 아니, 이건 비전이야! 하루 동안 갈았을 뿐인데 이 정도라면, 정석대로 열흘을 갈게 되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이게 되는 거지?’
 심장이 떨렸다.
 
 놀란 건 주진혁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시연했던 남궁창은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시연이 끝나고 냉철히 분석해 본 결과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정통에서 조금 느리게 펼치던 부분은 갈린 날이 바람을 가르면서 빨라졌어. 반대로 빠르게 펼치던 부분은 날과의 공기 마찰이 심해지면서 느려졌고. 지극히 미세하긴 했지만, 그 위화감에 몸이 반응하면서 정통 검식을 따라가게 된 거야. 인립의 정체가 이런 것이었다니······.’
 거기에 인립으로 인한 검속의 변화 때문에, 예전엔 몰랐었던 정통과 자기류의 차이점까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엄청난 빚을 졌구나. 이건 단지 특선 요리 한 번 쏘고 끝낼 게 아니야. 고마워요, 거지 형. 형 믿고 극락 갈게요!’
 남궁창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유난히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이 뻥 뚫린 것이 꼭 자기 마음 같았다.
 ‘좀만 기다리세요, 거지 형. 제가 특선 요리 제대로 쏠게요. 같이 먹고 극락 가는 거예요.’
 
 ***
 
 오전 수업이 모두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첫 수업을 같이 들었던 수련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입관 이후로 단 한 번도 접근한 적 없던, 여수련생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오빠! 미미 왔어요!”
 “남궁 소협, 아직 식전이시면 저와 함께 들지 않으시겠어요?”
 처음 누려 보는 인기에 침이 흐를 것 같았다.
 남궁창은 필사적으로 억누르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밖에 나가 봐야 하는데, 하하.”
 옆에서 주진혁이 거들었다.
 “창아, 어서 가자. 이러다가 늦으면 삐치실 거야.”
 삐친다는 말에 여수련생들이 오해했다.
 “어머, 삐치다니요? 설마······ 연인?”
 “아니, 우리 오빠가 멋져 보인 건 오늘이 처음인데 어떤 것이······ 앗, 공개적으로 멋있어 보인 게 처음이란 소리예요. 전 진작 알고 있었어요.”
 남궁창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발로는 뒷걸음질을 했다.
 “하하, 가, 감사하네요. 저도 몰랐던 매력을 알아줬다니.”
 뒷걸음을 치며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는데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박사박.
 잘 빠진 몸매의 미녀가 서늘한 시선으로 남궁창을 바라봤다.
 남궁창과 미녀의 눈이 마주쳤다.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처, 천향화(天香花) 제갈선혜? 수업도 항상 빼먹는 여자가 왜 여길······.’
 제갈세가의 장녀로 심계가 하늘에 닿았다고 할 정도의 기재다.
 기재 넘치는 정무학관에서도 노는 물이 다르다. 독보적이다. 무림맹의 차기 군사로 내정돼 있을 정도다.
 평소엔 수련생을 상대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갑자기 나타났다.
 제갈선혜의 입술이 열렸다.
 “나도 같이 갈래.”
 뜬금없는 소리에 남궁창은 눈만 깜빡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건 잠시 뒤였다.
 “어······ 설마?”
 제갈선혜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와 남궁창과 주진혁 사이에 섰다.
 “가자.”
 “······.”
 “······저기, 제갈 소저?”
 제갈선혜는 고개를 돌려 주진혁을 바라봤다.
 “왜?”
 “왜 같이 가려는 건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갈선혜는 표정 변화 없이 무심히 대답했다.
 “나는 안 돼? 함께 식사가 하고 싶을 뿐인 건데.”
 “굳이 안 될 이유야 없지만······ 너무 난데없는 일이라, 하핫.”
 주진혁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난처하기만 했다.
 유운룡에 대한 건 남궁창을 비롯해 친한 수련생 몇 명에게밖에 말해 주지 않았다.
 딴 곳도 아니고 정무학관의 수련생이, 구파일방의 기재들이 학관 밖에서 거지에게 배우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파장이 크다.
 그래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곤란하게 됐다.
 갑자기 늘어난 무공 덕에 뭔가 눈치를 챈 느낌이다.
 ‘어쩌지? 관주님이랑 사이가 안 좋으니 그쪽에 말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랑 친한 것도 아닌데······ 믿을 수 있을까?’
 제갈선혜는 주진혁을 보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뉘였다가, 남궁창을 돌아봤다.
 주진혁이 아니라 남궁창을 공략했다.
 “가자.”
 “······.”
 
 늘 뭉치던 2명 외에 1명이 추가됐다.
 주진혁과 남궁창, 그리고 사이에 낀 제갈선혜다.
 평소에는 식당에서 먹고 남은 걸 싸 갔기에 유운룡이 머무는 담벼락 앞에 도착한 사람은 셋이 다였다.
 오늘은 점심을 함께 먹으려고 온 것이기에 먼저 오게 됐다.
 담 앞에 도착한 제갈선혜는 시선을 내려 아래쪽을 응시했다.
 담벼락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한참 동안 쳐다봤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은 느긋하고 숨이 차분해. 경지에 이른 고수구나.”
 “······!”
 “······!”
 그 말에 남궁창과 주진혁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둘 다 수련이 얕지 않기에 숨소리는 들렸지만, 심장 박동까지는 무리다. 아무리 가깝다 한들 벽으로 막혀 있는데 쉽사리 들릴 리가 없다.
 일개 수련생의 실력으로는 힘들다.
 하물며 제갈세가는 지략에선 첫째가지만 무공에서는 아니다.
 무림맹 차기 군사라는 직함으로만 여겨졌던 제갈선혜의 무공이 그 정도나 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무공도 숨기고 있었던 거라니······ 아니, 그보다 거지 형이 고수였다고? 어떻게 된 거지?’
 ‘제갈 소저는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은데 무공까지 세구나. 나도 명문세가의 차남인데······.’
 놀라 있는 둘을 놔두고 제갈선혜가 담벼락을 돌아 뒤뜰로 들어갔다.
 누워 자고 있는 유운룡이 보였다.
 눈만 깜빡이며 다시 한참을 바라봤다.
 “자고 있었네.”
 뒤따라 들어온 남궁창과 주진혁의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무슨 소린지 몰라 물어봤다.
 “자고 있었다뇨?”
 제갈선혜가 선선히 대답했다.
 “잠든 사람인 줄 몰랐어. 숨이 너무 일정해서 고수인 줄 알았는데, 자고 있을 뿐이었네. 숨소리에 속았어.”
 주진혁은 말문을 잃었다.
 제갈선혜가 숨기던 무공 실력과 유운룡의 숨겨진 무공 수준을 다시 하향 평가했다.
 ‘그럼 그렇지. 거지 형이 고수일 리가 없는데, 하핫.’
 단단히 믿고 자괴감까지 가졌던 남궁창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 난 또. 진짠 줄 알고 엄청 놀랐잖아요, 제갈 소저. 기껏 데리고 와 줬는데 이러기예요? 무공도 높음서 어따 쓴대.”
 “어, 왔냐······?”
 세 사람의 대화 소리에 유운룡이 깨어났다.
 잠시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후암, 아직 덜 잔 거 같은데 일찍 왔네.”
 주진혁이 멋쩍게 웃었다.
 “무슨 소리세요, 형. 해가 중천이에요. 점심시간 다 됐어요.”
 “오, 그럼 특선 요리 먹어야지. 창궁이 얼굴이 밝은 걸 보니까 잘된 모양이지?”
 남궁창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 진짜 개종하라면 개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 형만 믿고 극락 갈게요.”
 “자식, 형이 뭐랬냐. 한 번만 더 믿어 보랬잖아. 넌 그냥 날 믿고, 특선 요리 쏘고 극락 가면 되는 거.”
 “은전 왕창 가져왔으니까 먹고 싶은 거 전부 다 고르시······.”
 남궁창의 말을 끊고 제갈선혜가 끼어들었다.
 “거지야, 안녕.”
 유운룡의 고개가 그녀를 향했다.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아, 이쪽은 제갈세가의 제갈선혜 소저인데요, 같이 가자고 해서······.”
 머쓱하게 설명하던 주진혁이 입을 다물었다.
 유운룡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넉살을 잃지 않고 식은 교자에도 감사할 줄 알던 유운룡이 아니었다.
 동공이 커지고 입가의 근육이 늘어지는 게 화가 잔뜩······ 난 게 아니라 멍해지고 있었다.
 침이 흘렀다.
 흐르는 침을 주진혁과 남궁창, 제갈선혜가 봤다.
 제갈선혜가 물었다.
 “배고프니?”
 “어, 아니. 츠릅.”
 유운룡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소매로 침을 닦았다.
 “하도 예뻐서 잠시 혼이 나갔던 모양이다. 심심하면 오빠랑 동정호 달려 볼래?”
 제갈선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심심하면.”
 한 박자 쉬고 용건을 꺼냈다.
 “보고 싶어서 왔어.”
 유운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 오늘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구배지례 올려야겠다.”
 “······어째서?”
 “남자 보는 눈 길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거 아냐.”
 제갈선혜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다가 닫혔다.
 손이 허리춤으로 올라갔다. 손끝이 검 손잡이에 닿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주진혁이 기겁을 해서 말렸다.
 “제갈 소저, 저 형이 원래 넉살이 좋으셔요.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는데, 하하······ 손은 그만 내리시고요······.”
 제갈선혜가 유운룡을 잠시 응시하다, 결국 손을 내렸다.
 유운룡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녀석, 앙탈은.”
 제갈선혜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눈가가 휘더니 피식 웃었다.
 “말하는 게 꼭 선수 같네.”
 미소를 지으니 하얀 이가 드러났다.
 꽃바람이 불었다.
 아찔한 변화에 주진혁과 남궁창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음에 또 올게.”
 제갈선혜는 환한 미소를 날리고 사뿐사뿐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세 남자가 바라봤다.
 침이 흘렀다.
 “야······ 제갈 소저가 저렇게 예뻤었냐? 미소 죽인다.”
 “장난 아닌데······? 평소엔 안 웃어서 몰랐는데 진짜 파급력 있다. 학관에서도 웃으면 뒤집히고도 남을 거야.”
 유운룡이 침을 닦고 물었다.
 “근데 쟨 왜 왔던 거야?”
 “······.”
 “······글쎄요?”
 
 이튿날.
 제갈선혜가 다시 찾아왔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찾아와서 혼자였다.
 “거지야, 안녕.”
 “······.”
 제갈선혜는 떨떠름해하는 유운룡을 보며 예쁘게 웃었다.
 “애들 무공 가르쳐 준 거, 거지 너지?”
 “어, 뭐······ 가르쳐 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했는데?”
 유운룡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어색한 동작만 얘기해 줬지. 애들이 기본이 돼 있잖아. 조금만 짚어 줘도 알아서 잘 고치더라고.”
 “그것뿐만이 아니던데?”
 유운룡은 입을 다물고 제갈선혜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예쁘게 웃고 있었지만 얼굴은 이렇게 묻고 있다.
 ‘다 알고 있으니까 불어.’
 벅벅.
 유운룡은 머리를 긁고 입맛을 다셨다.
 “이거······ 적선 밑천인데, 쩝.”
 “적선······.”
 제갈선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받고 있어?”
 “점심 남은 거. 가끔은 객잔에서 요리.”
 “돈은 안 받고?”
 유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내 실력으로 무슨 돈이냐. 식은 음식이면 충분하지. 어제는 어떤 노인네가 은전 하나 주긴 했는데, 준 게 아니라 버린 거 같아. 아니면 내 이마에 박아 버리려고 했든지.”
 “······그렇단 말이지?”
 “그렇지.”
 제갈선혜는 활짝 웃고 검을 뽑았다.
 찬란한 검신에 햇빛이 부서졌다.
 “객잔에서 점심 살게. 내 검법 좀 봐 줘.”
 유운룡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또 뭘 얼마나 뜯어내려고 점심을 사? 애들도 남은 반찬 두세 개 남겨 오는 거구만.”
 제갈선혜의 눈이 빛났다.
 “비싼 거 먹으면 좋은 거 가르쳐 주나 봐.”
 “아, 됐어, 됐어. 어차피 좀만 기다리면 애들 오는데 뭐 하러 힘을 빼. 일 없다.”
 “그러지 말고.”
 “그래도 안 돼. 애들이 많아져서 하루치 먹을 거 채울 수 있으니 추가 적선 안 받아도 돼.”
 “정말 안 돼?”
 “안 돼.”
 “나 싫어?”
 “······.”
 그 말에 유운룡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만 뻥끗거렸다.
 제갈선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가르쳐 주고 나서 같이 동정호 가자.”
 “으음······.”
 “도시락 싸 줄게.”
 “으으음······.”
 제갈선혜가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오빠.”
 먹혔다.
 “뭐 배우고 싶어, 누이!”
 
 
 3장 천향화 제갈선혜
 
 
 제갈세가에는 좋은 정통 검법이 내려오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중원 무림 전 세력을 통틀어 가장 많은 서책을 보유하고 있는 게 제갈세가다.
 무공서만 골라내도 전각 하나 세울 수 있다. 넘치는 게 검법이고 널린 게 절정 검법이다.
 그리고 천룡무상검법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단, 아직은 완벽하지 않았다.
 “남궁창을 보니까 검이 스스로 길을 밟고 가더라. 자기 의지가 아니라, 검의 의지를 따랐지. 그게 궁금했어. 누가 검에다 장난을 쳐 놨을까 하고.”
 그래서 어제 주진혁과 남궁창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때 한 가지를 더 확인했기에, 두 사람이 없을 때 혼자 찾아왔다.
 ‘자고 있음에도 운기조식을 할 때처럼 집중되고 깊은 호흡이었으니까. 축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돌이 널린 땅바닥에서 와공(臥功)이 유지되는 걸 보면 평범한 거지가 아냐. 오래도록 수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문제는 무공도 아니고 운기조식을 그렇게 수련했단 점이다.
 세상에 아무리 기인이사가 많다고 해도 숨쉬기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고 내공을 갑자 단위로 쌓은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이십 년이 채 안 된다.
 자면서도 운기조식이 가능할 정도의 수련을 쌓았는데 정작 내공은 안 쌓고 있으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무슨 배경이 있는 걸까? 하나씩 풀어 놔 보렴.’
 그래서 남녀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경계심이 최대한 허물어지는 걸 노렸다.
 우선은 검법에 대한 실력을 알아볼 요량으로 자신의 애검을 뽑았다.
 “먼저 검로를 보여 줄게. 보고 어떤지 말해 줘.”
 “그 정도야 간단하지.”
 제갈선혜는 천룡무상검법의 초식을 하나씩 펼쳤다. 처음 보는 유운룡을 감안해 평소 속도의 절반이었다.
 유려한 춤사위가 허공에 수를 놓고 있는데 유운룡이 갑자기 혀를 찼다.
 “창궁이 처음 왔을 때보다도 답답하네.”
 제갈선혜의 검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학관에 창궁이란 수련생은 없지만 점심시간마다 빠져나가는 수련생 중에 남궁창이 있다. 그가 익힌 검법이 ‘창궁’무애검법이다.
 이 자리에 나오게 된 이유도 남궁창의 성장에 있지만, 본신 실력으로 비교하면 한참 아래인 상대다.
 기분이 슬쩍 상하려는데 유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내게 맞추지 말고 네게 맞춰서 펼쳐야 할 것 아냐. 그래야 막힌 부분을 보지.”
 “······알았어.”
 제갈선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번 천룡무상검법을 펼쳤다.
 이번엔 평소 속도 그대로다.
 못 알아보고 천천히 펼치란 소리를 하면 핀잔을 줄 생각이었다.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검을 보며 유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느려. 더 빨리.”
 “이게 본래 속도야. 더 빠르면 흐트러져.”
 “용이 답답해하잖아. 느린 거야.”
 “······응?”
 “누이 검은 지금 하늘을 나는 용을 흉내 내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 용이 하늘을 누비듯이 휘둘러야 잠든 용이 깨어나지.”
 “하늘을 나는 용? 용이 하늘을 누비듯이······? 하늘을 나는 용······.”
 제갈선혜는 유운룡의 말을 입안에서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뭔가 알 것 같았다.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기세가 달라졌다?”
 천룡무상검법은 비급만을 구해 익힌 검법이다.
 남이 펼치는 걸 본 적도 없고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으니 내기의 운용이나 기세에서 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리 제갈세가에서 총력을 동원해 복구했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찢겨 나간 부분이 있어 해석이 불완전한 초식도 있다.
 ‘완전히 허튼 소리는 아니야. 해 볼 가치는 있어.’
 제갈선혜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린 다음 천룡무상검법을 다시 한 번 집중해서 펼치기 시작했다.
 검로 자체는 같았다.
 하지만 힘의 배분과 속도를 달리해 유려함을 많이 없앴다.
 날카로우며 사나운 기세가 실렸다.
 하지만 곧 난관이 찾아왔다.
 세가에서 복원시키긴 했으나 중간의 한 장이 찢어져 정확한 동작을 알 수 없던 부분.
 제구초에서 검끝이 방향을 잃었다.
 유운룡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검법인데······.”
 입안에서 맴돈 소리라 제갈선혜는 듣지 못했다.
 마지막 초식까지 펼친 제갈선혜가 유운룡을 돌아봤다.
 “어땠어?”
 “속도는 그대로 유지해. 대신 초식마다 방향이 꺾이기 직전엔 이 할 더 빠르게, 꺾은 직후엔 빨라져서 번 시간만큼 쉬어. 섬전이 튕기듯이. 그럼 되겠네.”
 제갈선혜의 고운 눈썹이 안으로 모였다.
 “섬전이 튕기듯이······?”
 “지금은 물 흐르듯 노닐고 있잖아. 허공에서 헤엄 치냐? 그게 아니라 사냥감을 잡아채고 내던지고 물어뜯는 걸 표현해야지.”
 “······.”
 제갈선혜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세가에서 몇 대를 걸쳐 연구하고 보완한 검법이다. 그걸 깡그리 잘못됐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천룡무상검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황궁의 인물뿐이다.
 거지라 해서 장담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인데, 너무 당당하니 마음이 언짢아졌다.
 제갈선혜의 표정을 본 유운룡이 혀를 찼다.
 “못 믿고 있구만.”
 “거지 말이 그럴듯하긴 해도, 장담할 순 없는 거니까. 창안자가 아닌데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유운룡이 부정했다.
 “꼭 없진 않을걸?”
 “······무슨 소리야?”
 “예를 들자면 네가 지금 들고 있는 그 검, 그게 발검술에 적합할까?”
 “발검에?”
 제갈선혜는 자신의 애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의 수련생이 지급되는 철검을 소지하는 것에 비해 그녀는 세가에서 가져온 검을 차고 다닌다.
 용설검(龍雪劍)이다.
 만년한철로 제련한 명검으로 가볍고 단단해 여자가 쓰기에 부담이 없는 검이다. 수백 년을 이어 온 명검을 힘들게 구했다.
 하지만 검신의 길이가 일반 검보다 조금 짧다.
 발검에 적합한 검은 아니다.
 “아니······ 겠지.”
 “그치? 근데 가볍기까지 하니 중검식을 펼치는 것도 무리고, 가볍긴 하되 짧다 보니 환검에도 별로야. 날이 짧은 만큼 시선이 분산되는 게 적거든. 그럼 어떤 검식에 어울릴까?”
 제갈선혜는 유운룡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쾌검이나 유검에 어울리겠지. ······기본적으로 쓰임에 맞게 형태와 제련법이 달라지는 게 검이니까, 검법 또한 그러하다는 소리네.”
 “바로 그거지.”
 제갈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창안자가 선택했던 검이 뭔지 안다고 해도 검로나 기세를 알 수는 없어. 검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검이 만드는 게 아니니까.”
 정론이었다.
 그러나 유운룡도 고개를 저었다.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을 한평생 동안 쓴 고수가 있다고 치자. 그 검을 휘두르다가 깨달음을 얻었어. 그럴듯한 검법이 하나 나올 거 같아. 그럼 그 검법이 연검이나 쌍검에 맞는 걸까?”
 “······아니.”
 유운룡이 씩 웃었다.
 “자면서도 휘두를 정도로 익숙한 검이니, 당연히 그 검에 최적화된 움직임으로 초식을 다듬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말이야.”
 사기꾼의 비급에 적힌 말이었지만 참 그럴듯했다. 그래서 유운룡도 속아 넘어가 청춘을 날렸다.
 배운 게 사기라고 유운룡도 사기를 쳤다.
 제갈선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설검은 확실히 무게가 가벼운 만큼 더 빠르게 휘두를 수 있고 단단한 만큼 충돌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용설검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삼재검법을 펼친다 해도 훨씬 위력적으로 펼칠 것이다. 용설검의 특성을 살려서 더 나은 방법으로 휘두를 것이다.
 지금까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식이었지만 유운룡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듯했다.
 “그럼 지금 거지가 하는 말은, 창안자가 어떤 검법을 창안할 때 쥐고 있던 검만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 검법을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인 거네?”
 유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만 처음부터 잘못 만든 검법이라면 단점 같은 건 보완해 버릴 수밖에 없기도 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단점이나 실수한 것까지 짐작하는 건 무리거든.”
 제갈선혜의 눈동자에 불신이 가득 찼다.
 “······직접 할 수 있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게 아니라?”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
 제갈선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유운룡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 거지가 지금 자기도 검만 쥐어 보면 그 특성에 맞는 검법을 알아낼 수 있다는 거야? 자기가 무슨 검법 제조기라도 돼? 그럼 천룡무상검법의 느낌을 유추하는 건 검법을 하도 많이 만들어 봐서 그런 거고? 대낮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완전히 허풍만이었던 건 아니다.
 요 며칠 몇몇 수련생의 검법이 날카로워진 것이나, 남궁창의 창궁무애검법 시연을 보면 신빙성도 있다. 그런 걸 아무나 할 수 있진 않다.
 천룡무상검법에 대해 한 말도 꼭 틀렸다고 장담하진 못한다. 분명 통하는 데가 있고 그럴듯하다.
 ‘······그래, 확신할 수 없으면 증명해 보라고 하면 될 일이지. 그래서 일부러 아무도 없을 때 오기도 한 거니까.’
 제갈선혜는 용설검을 유운룡 쪽으로 뻗었다.
 “들어 봐.”
 유운룡이 인상을 썼다.
 “왜?”
 “검을 들면 검법을 알 수 있다며. 용설검으로는 어떤 검법이 나올지 한번 보여 줘 봐.”
 “어허, 안타깝게도 이 오빠는 신검 아니면 못 쥐는 사람이시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어린 누이가 의심이 참 많네? 그러다 극락 못 가지.”
 “하······.”
 제갈선혜가 여전히 어이없어하고 있자 유운룡은 혀를 차면서 손짓을 했다.
 “어디 그럼 검 줘 봐라. 어떤 부작용인지 보여 줄 테니까.”
 “남자들은 꼭 허풍부터 치고 시작하더라.”
 제갈선혜가 코웃음을 치며 검을 건넸다.
 “어허, 믿음이 부족하느니.”
 유운룡이 손가락 두 개로 용설검을 받았다.
 천천히 손잡이를 말아 쥐고 슬쩍 들어 올렸다.
 “이제 곧 팔이 떨리고 손아귀가 풀리는 현상이······.”
 유운룡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
 멀쩡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유운룡이 뒤통수를 긁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이야, 이거 신검이잖아? 와하하.”
 “······흥.”
 “어쨌든 진짜 반갑다, 신검아. 이게 대체 몇 년 만에 쥐어 보는 신검인지 모르겠네, 흐흐.”
 유운룡은 용설검의 무게를 이리저리 가늠해 보고 슬쩍슬쩍 휘두르며 손맛을 느꼈다.
 손에 착착 감기는 죽여주는 느낌에 침이 고였다.
 “이 정도로 절묘한 무게 중심과 완벽한 균형이면 누이가 처음 보여 준 검법보단 훨씬 낫겠는데. 좋아, 어디 한번······.”
 제갈선혜의 배알이 상했다.
 “아, 그러셔요, 걸존(乞尊) 오라버님? 아까부터 입만 사······.”
 유운룡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팔놀림으로 용설검을 올려쳤다.
 허공을 가르고 제갈선혜의 말도 잘랐다.
 검과 함께 풍압이 치솟으면서 말소리도 따라 올라갔다.
 “······!”
 “단단함은 빠름을 누르고 가벼움은 무거움을 흘리니 방어 검식으로는 딱이야. 아니, 반격 쪽에 더 걸맞겠구만, 흐흐.”
 그때부터 한바탕 춤사위가 펼쳐졌다.
 유운룡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쓸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걷는 게 아니라 뒷발을 끌듯이, 혹은 밀듯이 움직여 물처럼 흘렀다.
 허리와 어깨로는 끊임없이 회전했다.
 용설검은 하늘을 누비며 바람을 휘게 하고 잘라 내며 풍맥을 끊었다.
 칼질이 이는 곳마다 바람이 멎었다.
 눈바람이 몰아치며 공간을 얼리는 듯했다.
 “검 이름이 용설검이랬지?”
 제갈선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으, 으응.”
 “그럼 용설검법 제일초는 설풍(雪風)이라고 명명했겠네.”
 유운룡이 용설검을 좌우로 흩뿌리며 튕기듯이 나아갔다.
 바람이 검끝에 잘렸다가 검신에 밀려 전방으로 쏟아졌다. 바람의 칼날이 공간을 쓸듯이 밀려 나갔다.
 “제이초는 상우방풍(上雨旁風) 정도로 지었겠고.”
 몸의 나아감이 멈춤과 동시에 내려치고 올려치고 좌우를 후렸다.
 위아래 칼질에 베인 바람에 좌우로 흩뿌려졌다.
 “제삼초는 동빙한설(凍氷寒雪), 제사초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이었을 테고······.”
 원을 그리는 칼질에 바람이 일어나 벽을 세우고, 그 벽을 가르니 사방으로 바람이 터졌다.
 내공을 쓰지 않고 검막을 세우고 검기 같은 풍인을 날리는 것에 제갈선혜의 눈이 사슴처럼 커졌다.
 그리고 유운룡은 움직임을 멈췄다.
 “제오초는 풍설조화(風雪造化) 정도로 부르면 딱이긴 한데······ 큰일 나 버렸네?”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으로 객잔 담벼락을 가리켰다.
 “금 가 버렸어. 어, 어쩌지? 잡혀가는 거 아냐?”
 “······.”
 “내가 왜 생각도 없이 어쩌자고 이런 짓을······ 크흑.”
 제갈선혜가 입을 열었다.
 “지금 돌 벽에 금 가서 멈춘 거?”
 “그럼 계속하리? 한두 초식 남은 것도 아니고 물어 줄 돈도 없는데?”
 “······.”
 제갈선혜가 허리춤 주머니에서 누런 조각 하나를 꺼냈다.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금자 하나가 퍽 소리를 내며 돌 벽에 박혔다.
 “이제 계속해도 돼.”
 “······.”
 “객잔 주인도 더 망가트려 주길 원할 거야. 눈치 볼 거 없어. 힘내.”
 “누이, 돈 좀 많은가 봐?”
 제갈선혜가 눈썹을 찡그렸다.
 “돈······ 많지······ 많은 편이긴 하지······.”
 머릿속에서 이제야 사태가 이해됐다.
 ‘돈을 노린 거였구나. 자신의 무공을 사 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린 거야. 용설검법은 분명 급조된 초식이 아니라 완성된 형태, 그것도 용설검의 특성에 잘 부합돼.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허튼소리가 아니었어. 그렇다면 몸값은 대체 어느 정도를······.’
 지금 본 것을 토대로 감안해 보니 견적이 안 나왔다.
 검 한 번 들어 보고 이 정도의 검법을 즉석에서 만들 수 있으면 검에 대한 이해가 장난이 아니란 소리다.
 검을 쓰는 이 중에서 셋째 안에 들어가는 천하십대고수 검왕도 이렇게는 못 한다.
 승패 여부를 떠나 이런 짓은 할 수 없다.
 ‘근데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거지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무림맹에 가서 칼춤 한 번 추면 인생 펴고도 남을 실력인데······.’
 그 순간 유운룡이 빈손이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검을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검이 없었다.
 그리고 검수가 검을 안 들면, 당연히 실력을 보여 줄 수도 없다.
 “······.”
 뭔가 복잡해졌다.
 “저기, 거지 오라버니?”
 “왜?”
 “오라버니 검은 어쨌어?”
 “버렸지.”
 “······아니, 왜?”
 유운룡이 인상을 팍 썼다.
 “염병할 놈의 사기꾼, 씹어 먹을 놈의 검법 때문에! 신검 아니면 들 수도 없는 체질이 된 데다가, 죽어라 익히던 건 뒤늦게 알고 보니 완성시킬 수 없던 검법이라더라?”
 “······.”
 “신검이 어디 흔하냐? 길바닥에 널린 거야? 길 가다 만날 수 있······ 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건 우연이지. 가보로 내려오는 신검 있대서 가 보면 다 짝퉁이더만. 암시장 가서 땅 문서 털어 산 것들도 다 허섭스레기였고. 그래서 전 재산 탈탈 털렸지, 흐흐. 내가 누울 곳은 이제 길바닥뿐이야.”
 “······진짜?”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하는데? 오빠가 천자문을 못 떼서 그렇지 병신은 아니에요, 어린 누이. 신검밖에 못 드는 체질 아니었으면 코앞에 있는 정무학관 가서 교편 휘두르며 큰소리쳤다, 헹.”
 “으음.”
 제갈선혜는 유운룡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직도 복잡했다.
 ‘지금 이건 정무학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돌려 말한 건가? 아니, 아닌가? ······정말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유운룡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
 하루하루 살아 있을 뿐이지 뭔가를 꾸미거나 꾀하진 않는다.
 “어쨌든, 뭐······ 일할 수 있으면 일을 하겠단 거지?”
 “그야 당연하지. 세상에 거지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개방도가 있지만 제갈선혜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상큼하게 웃었다.
 “나 좀 이따 다시 올게. 용설검 좀 가지고 놀고 있어.”
 “······어엉?”
 
 ***
 
 탕!
 정무학관주 능조현은 제갈선혜가 기세 좋게 내리찍은 교탁 위를 바라보았다.
 손바닥 밑에 종이가 한 장 있었다.
 “그게 뭔가?”
 제갈선혜는 기세는 싣되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특별 교관 추천장입니다.”
 앞으로는 기세 싸움이다. 아쉬운 티를 내는 사람이 손해 보게 된다.
 “모집 시기는 이미 지났지. 가지고 돌아가.”
 “정시 모집이 끝났기에 특별 교관으로 추천하는 겁니다.”
 “자네가 아무리 제갈세가의 장녀라 해도 이건 아니야. 모자란 수업 일수부터 채우고 건의해.”
 “교관의 능력은 천향화의 이름으로 보증하겠습니다.”
 능조현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그 말은,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자네 직위를 반납하겠다는 건가?”
 “수결이라도 찍어 드리지요.”
 “그건 좀 흥미가 동하는군.”
 능조현은 제갈선혜가 가져온 추천장을 그제야 읽어 보았다.
 읽으려고 했다.
 
 이름 :
 출신 :
 나이 :
 직업 :
 특기 : 비밀
 대우 : 특상
 
 읽을 내용이 없었다.
 “자네 지금 장난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럼 나랑 놀아 주러 왔나? 내가 심심해 보여서? 이건 뭐 제대로 기입된 게 하나도 없잖아!”
 “받아들이겠다는 동의만 해 주시면 됩니다. 사람은 알아서 데려올 테니까요.”
 능조현이 제갈선혜를 무섭게 노려봤다.
 “······뭘 노리는 거냐.”
 “아무것도요.”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평소와 달리 의지가 깃들어 있는 제갈선혜의 눈빛에 능조현이 눈썹이 꿈틀했다.
 ‘수업도 안 듣고 회의도 안 들어오던 망아지가 별일이군. 아무런 활동도 안 하다가 갑자기 특별 교관 추천이라······ 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테지. 노림수가 무어냐, 제갈세가.’
 능조현과 제갈세가는 사이가 좋지 않다.
 무림맹에서도 늘 충돌하고 서로의 세력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수작을 부리고 나온다면 막고 볼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제갈선혜가 전면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어떻게 나오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넘어가 주는 것도 좋겠지.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니까.’
 능조현은 눈썹에서 힘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뭐, 딴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이렇게까지 강경히 나오니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신 앞으로의 회의에는 꼭 참석하고, 최소 청강 인원 여덟 명을 채우지 못했을 때 자격을 박탈하는 건 동일하게 적용하겠다. 이의 있나?”
 “알겠습니다.”
 제갈선혜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관주실을 나가려는 제갈선혜에게 능조현이 말을 던졌다.
 “아, 뭐 하나 물어도 되나?”
 “말씀하시지요.”
 “그 교관, 남자인가?”
 제갈선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능조현은 웃었다.
 “돌아가 봐.”
 제갈선혜는 속으로만 웃었다.
 ‘실컷 오해하셔, 무림맹의 개. 트집 잡으려고 지켜보기만 하는 동안, 거지 오라비는 네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해질 테니까.’
 
 제갈선혜가 사라지고 잠시 후, 뒤뜰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저희 왔어요.”
 “우리 형~”
 “오, 동생들 왔어? 그래, 오늘은 뭐 가져왔어? 흐흐.”
 안 그래도 힘쓰느라 배고파진 유운룡이 반색했다.
 예정에도 없이 칼춤 췄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주진혁이 주머니를 끌러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힘이요? 객잔에서 나무라도 패셨어요? 저희 늘 이 시간에 오는 거 아시면서.”
 “추가 작업 좀 했지. 오, 냄새 좋다, 이거.”
 남궁창도 반찬 담아 온 주머니를 끌러 건네줬다.
 그러다 못 보던 물건을 발견했다.
 “그 검은 웬 거예요, 형? 누가 검 갈아 달라고······ 한 사람은 우리 중에 없었는데?”
 유운룡이 용설검을 어루만지며 침을 흘렸다.
 “걔 거야. 어제 왔다 그냥 갔던 애.”
 주진혁이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작게 소곤거렸다.
 “제갈 소저가 맡긴 거예요? 학관에서 지급하는 철검도 아니고 본인 거 같은데요?”
 “용설검이라더라. 거, 얼굴은 예쁜 게 뭐 그리 의심이 많은지 내가 뭔 말만 하면 대놓고 못 믿겠단 표정을 짓더라고. 그래서 간만에 세립(勢立) 좀 펼쳐 봤는데, 갑자기 좀 이따 다시 온다면서 검이나 가지고 놀고 있으라네?”
 주진혁이 남궁창과 눈을 마주쳤다.
 인립은 눈으로 직접 봤지만 세립은 처음 들었다.
 하지만 인립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안다. 비슷한 종류인 듯한 세립이라고 시시할 리는 없다.
 궁금증이 생겼다.
 “세립이 뭐예요, 형?”
 “인립의 다음 단계.”
 “······.”
 “어허, 인석들 표정 좀 보게?”
 “궁금해하는 거죠, 하핫.”
 유운룡이 혀를 찼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간단한 거야. 그냥 검이 가야 할 바른 방향으로 휘두르기만 하는 거거든.”
 보통은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문파를 세운다.
 “······저, 그게 그리 간단한 건 아니지 않아요?”
 이번엔 인상을 썼다.
 “세립 자체는 간단해. 간단하지 않은 건 세립을 할 만한 신검을 쥐어 보는 거지. 내가 그래서 나앉은 건데, 아오······ 날려 버린 내 유년기만 생각하면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길바닥에 나앉은 거야?”
 “그렇다니까! 어디 신검 열두 자루 찾는 게 쉽······.”
 유운룡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언제 돌아왔는지 제갈선혜가 서 있었다.
 “하하, 용설 누이 왔어?”
 “응, 왔네. 별로 보고 싶어 하진 않는 것 같지만. ······근데 용설 누이는 누구래.”
 유운룡이 씩 웃으며 용설검을 건네줬다.
 “너.”
 “내 이름은, 선혜. 제갈선혜. 용설이는 얘고 내가 아냐.”
 제갈선혜는 용설검을 받으면서 유운룡을 비스듬하게 올려다봤다.
 “용설검은 마저 가지고 놀았어?”
 용설검법 다 만들었냐는 소리다.
 유운룡이 대답을 안 했다.
 “······.”
 “······안 했구나?”
 퍽.
 유운룡의 안면으로 제법 커다란 보따리 하나가 작렬했다.
 목이 뒤로 꺾인 유운룡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바닥에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타격감으로 느끼건대 천 재질, 아마도 의복이 들어 있으리라 생각됐다.
 문제는, 옷 보따리에 실린 내공이었다.
 “너 지금 사람 하나 잡을 뻔한 거 알아? 목이 부러질 뻔했는데?”
 “엄살은. 갖기 싫으면 돌려줘.”
 “하하, 그건 보고 나서 얘기해야지.”
 유운룡이 언제 정색했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거지 생활 3년 동안 품위보다 먼저 사라진 게 자존심이다.
 여벌의 옷이 없다 보니 옷을 빨려면 몸을 직접 물에 담가야 했다. 근데 근처 개울이나 강에 다녀오는 동안에는 적선을 할 수가 없어서 씻으러 가는 걸 포기했었다.
 거기에 단순한 음식이나 돈과는 달리, 옷은 주고받는 의미가 남다르다.
 ‘내 남자 옷은 내가 지어서 입히겠다는 건가? 처음엔 새침한 척하더니만, 사실 관심 없는 척 내조하는 성격이었군. 신선해, 신선, 흐흐흐.’
 입이 째진 유운룡이 보따리 안에 담긴 옷을 꺼내 허공에 펼쳤다.
 바람에 미끄러진 옷이 나풀거렸다.
 손에서 녹아내릴 듯한 감촉의 비단옷이다.
 척 봐도 금전을 녹여 만들었을 것 같은 멋진 옷에 유운룡의 입이 쩍 벌어지고 침이 흘렀다.
 같이 보고 있던 정무학관 수련생들의 입도 같이 벌려졌다.
 확실히 의미가 남다른 옷이었다.
 “맙소사, 교관복이라니.”
 “그것도 일반 교관복도 아니고 특별 교관복······.”
 일행 중에서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는 주진혁이 제갈선혜를 쳐다봤다.
 “제갈 소저, 설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결과인 건······.”
 “맞아.”
 “······.”
 제갈선혜는 이어 주진혁에게 작은 돈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찰그랑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가서 씻겨 와.”
 주진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기, 제갈 소저? 제가 그래도 종남파 일대제자인데······.”
 제갈선혜가 주진혁의 손에서 돈주머니를 채갔다.
 그리고 남궁창에게 던졌다.
 “······.”
 
 유운룡과 남궁창을 객잔으로 보낸 제갈선혜는 남아 있는 수련생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하지만 각 파에서 주력으로 내세우는 후기지수들은 아니다.
 ‘건질 만한 건 종남파의 주진혁과 남궁세가의 남궁창뿐이네. 나머지는 지레 겁먹고 아는 척 안 하겠어.’
 제갈선혜는 천천히 운을 뗐다.
 “내일부터는 정식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거야.”
 곧바로 감탄성이 울렸다.
 “오오.”
 “거지 형님 출세했네!”
 “그럼 우리가 발굴했으니 학점에 이득이라도······.”
 제갈선혜는 학관에서는 좀처럼 짓지 않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관주의 판단이 아니라 천향화의 이름으로 초빙했거든.”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혹시······.”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거지. 관주가 참 싫어할 거야.”
 정무학관에는 하나의 파벌만 있다.
 정무학관주 능조현이 주축이 되는 파벌이다.
 그의 말에 따르고 파벌에 동참하면 학관에서 밀어 준다. 무림맹에 들어가서 좋은 자리 차지하기가 쉬워진다.
 그럼 자연스럽게 문파도 부흥하게 된다. 무림맹에서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예산도 늘어난다.
 정무학관의 모든 수련생이 바라는 달콤한 미래다.
 때문에 그런 권력을 지닌 능조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미래를 위해 정무학관에 입관했으면서도 정무학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사람밖에 없다.
 이를테면, 입관 전부터 무림맹 차기 군사를 맡고 있던 제갈세가의 장녀 천향화 제갈선혜가 있다.
 그녀는 일신의 지략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아 정무학관 설립 이래로 수련생 신분과 명예 교관직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구파일방의 대제자니 오대세가의 장남이니 하는 직함은 비교도 안 된다.
 물려받은 게 아니라 오롯이 홀로 만들어 낸 영광의 자리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 정도가 아닌 나머지 수련생들은 능조현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다는 소리기도 하다.
 “사문도 알 수 없고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람인 데다가, 내가 추천하기까지 했지. 그런 거지랑 친하게 지내면 아무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도 맹에서의 요직은 무리일 거야.”
 “······독점하실 생각이군요, 제갈 소저.”
 주진혁의 말에 제갈선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독점이라니?”
 “특별 교관을 초빙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처음에는 모두의 관심사가 되겠지만, 결국 천향화가 초빙했다는 게 알려지면 감히 수강하러 갈 수련생은 한 명도 안 남을 겁니다. 머리 좋은 제갈 소저가 그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고 말하실 겁니까?”
 제갈선혜는 주진혁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무림맹의 개가 될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만, 너까지 그러니 좀 슬퍼지네. 권력을 좇아 검을 꺾을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명예 교관직이지만 강의도 안 하고 수련생이지만 수업도 안 듣는 제갈선혜는 학관 여기저기를 늘 쏘다녔다.
 그러면서 수련생들과 교관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누가 누구랑 친하고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권력을 위해 움직이고 누가 무인의 기개를 가지고 있는지를 지켜봤다.
 정림(政林)으로 변질돼 가는 무림에 다시 한 번 뜨거운 협의를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주진혁이다.
 남궁창은 단순하고 맹한 맛에 낀 덤이다.
 생각이 일직선이면 머리 굴릴 시간에 검을 휘두른다. 무인에 걸맞은 성격이지, 정치판에 끼어들 성격은 못 된다.
 ‘하긴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으니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설득해 보기로 할까나······.’
 제갈선혜는 다른 수련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제안을 던졌다.
 “그럼 문파의 영광을 위해 무림맹에 투신할 사람은 이만 가도록 해. 입 다물고 있으면, 지금까지 학관 밖에서 배운 건 불문에 붙여 줄 테니까. 그럼 지금까지처럼 지내는 데는 문제없을 거야.”
 “······.”
 “······.”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거지인 건 비밀이야. 만약 발설하면, 연무장에서 내가 친히 팔짱을 껴 주겠어.”
 제갈선혜한테 팔짱 끼이면 능조현이 웃는다.
 악마처럼 웃으며 제적 명부에 이름을 올릴지도 모른다.
 다들 고개만 끄덕였다.
 “······.”
 끄덕끄덕.
 
 그사이 유운룡은 삼 년 만에 느껴 보는 뜨뜻한 욕탕 속에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안 씻고 있어도 그렇게 예쁜 애가 옷까지 지어다 바치는데, 이제 옷 빼입고 나가면 다들 까무러치겠군, 흐흐.”
 “형, 그 옷 그냥 보급품인데요?”
 “뭣이?”
 
 
 4장 정무학관 입성
 
 
 유운룡은 밤이 깊도록 교관복을 입고 춤을 췄다.
 벽에 붙은 전신 동경을 보면서 백 바퀴를 넘게 빙글빙글 돌았다.
 “역시 난 비싼 옷이 잘 어울려. 직접 지은 게 아니라는 게 아쉽지만 급하게 마련한 거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함께 생활하면서 좀 기다려 보면······ 으흐흐.”
 그렇게 자화자찬과 함께 달이 하얗게 뜰 때까지 자신의 맵시를 감상하던 유운룡은 문득 고개를 꺾었다.
 “근데 뭘 가르치라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걸 듣지 못했다.
 하다 만 세립에 좀 이따 다시 온다더니, 교관복 가져다준 게 전부다.
 일자리가 마련됐다는 건 알겠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못 들었다.
 “특별 교관이라니 뭔가를 가르치긴 해야 한다는 건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설마 세립이 아무 검에나 가능한 건 줄 알고 교관시켜 준 건가? 애들한테 세립이나 해 주라고?”
 세립은 일반 철검으로는 끌어내는 게 불가능하다.
 신검밖에 못 쥐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신검만 가능한 게 세립이다. 그나마도 독자적인 특유성이 있는 신검이라야 한다.
 아무 특징도 없는 검을 신검 반열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련해 봐야 삼재검법만 나온다. 끽해야 팔방풍우다.
 백번 양보하면 신검이 되다 만 명검도 가능할 순 있다. 물론 그럴 경우엔 반쪽짜리 검법이다.
 머리를 쥐어 싸맸다.
 가르치길 바란 걸 가르칠 수가 없다.
 “근무 직업 삼십팔 종, 최장 근무 기간 오 개월이란 경력에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어. 뭔가 수를 내야 해.”
 유운룡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신검십이세다.
 하지만 그건 미완인 데다 완성시킬 수도 없는 짝퉁 검법이다.
 먼저 ‘신검 열두 자루’에서 세립을 끌어내야 했다.
 수련할 때 썼던 무상검에서 첫 번째 세를 끌어냈지만, 두 번째 세는 우연히 용설검을 쥐게 될 때까지 아무 기약이 없었다. 소문난 명검만 사고팔다 재산만 다 날렸다. 상황이 그러하니 세 번째 신검은 쥘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다.
 무상검형은 신검십이세를 완성시킨 다음에야 수련할 수 있어서 구상 단계에서 집어치웠다.
 고로 그의 청소년기를 몽땅 날려 버린 신검십이세는 어디 써먹을 데가 없다.
 “으, 아니, 이럴 순 없어. 꼭 신검십이세가 아니더라도 강기도 못 뽑는 애들 정도는 가르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동네 신동 소리 듣던 몸인데 그 정도도 못 할까?”
 신검십이세의 수련 목적은 검을 쥐고 휘둘러보는 것만으로 그 검의 정수를 끌어내는 데 있다.
 검법에 대한 각종 이론과 검에 대한 지식, 인체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필수였다.
 나아가 유운룡이 익힌 비급은 심득을 남기는 과정에서 집필된 게 아니라 도전하는 과정에서 적은 일종의 수련기였기에, 처음부터 때려치우는 순간까지의 과정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덕분에 유운룡은 검증되지 않은 잡다한 것까지도 굉장히 많이 수련해야 했다.
 체득한 수련 방식과 무공에 대한 지식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다양한 근무지에서의 근무 경험도 있다. 돈 주고도 못 사지만 돈 주고도 사지 않는 귀중한 경험이다.
 “애들 동작 잡아 주는 정도로도 먹을 거 줬으니까, 좀 더 성의 있게 알려 주고 밤에 몰래 날도 갈아 놓고 하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래, 내 팔자에 무슨 평생직장이냐. 오 개월만 버틸 생각으로 해 보면······.”
 털퍼덕.
 기운 빠진 몸으로 침대에 쓰러진 유운룡은 베개보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내가 진짜 이번에도 오 개월 넘기지 못하면 앞으로는 절대 다시 취직 안 한다. 일 시켜 줘도 안 할 거야, 아으.”
 
 날이 밝았다.
 유운룡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채 정무학관의 정문으로 향했다. 잠을 설쳤다.
 그 모습을 문지기, 정문 수호 무사가 봤다.
 “저 앞에서 오는 사람, 특별 교관복을 입었네? 새로 부임하기로 했단 소린 들었는데······.”
 몸에 두르고 있는 특별 교관복에 비해, 속에 있는 꼬락서니가 엉망이다.
 “쯧, 좋아서 술이라도 퍼먹고 기절했나 보이. 내공은 어따 쓰려고 모았대.”
 “상태 안 좋은 거 같으니까 눈 마주치지 말고 들여보내자고. 저치도 아마 교관복 입고 술 푼 거 깨닫고 긴장했을 거야.”
 “뭐, 첫날 만에 잘리고 싶었을 수도 있지.”
 걸어오던 유운룡이 마지막 말을 들었다.
 저도 모르게 발이 멈칫했다.
 ‘······잘린다고?’
 유운룡이 발을 멈추자 정문 수호 무사도 움찔했다. 서로 전음을 날렸다.
 - 저 거리에서 들었나? 그래도 특별 교관이라고 귀 한번 밝네, 거참. 잔소리하기 전에 들여보내자고.
 - 그러세.
 “지금 뭐······.”
 끼이익!
 유운룡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정문 수호 무사는 문에 매미처럼 붙어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
 “······.”
 “······.”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어서 빨리 들어가라는 태도다.
 유운룡은 그냥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잘릴 거 같다니. 삼 개월이라도 버티면 다행이겠어.’
 유운룡이 적선 생활을 하면서 가장 절실히 깨달은 건 남의 돈을 받아먹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그리고 돈을 많이 주는 직업은 적선 이상으로 어렵다.
 문전박대를 당하면 차라리 모르겠는데, 아예 상대도 안 하고 보자마자 잘릴 것 같다는 소리에 기가 와락 죽었다.
 ‘으, 그래도 마지막 구명줄인데. 안에 들어가면 용설이도 있는데. 직접 오라고 했으니까 챙겨 주긴 하겠지?’
 유운룡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제갈선혜를 떠올렸다.
 ‘너만 믿는다, 용설아. 부른 대로 왔으니까 잘 챙겨 줘야 한다. 안 하면 검날을 콱 문대 버리는 수가 있어.’
 정문을 넘어가자 드넓은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겨루거나 체력 단련을 하는 수련생들이 제법 있었다. 남자 수련생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여수련생도 씨가 마른 건 아니었다. 드문드문 있었다.
 유운룡은 사일이와 창궁이를 비롯해 아는 얼굴이 있는지 슥 둘러봤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단련하던 수련생 몇 명이 유운룡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
 “특별······ 교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오늘 교관님 새로 오신단 소리 있었냐?”
 “없었어.”
 “무기도 안 차고 있는데 전공과목이 뭐지? 관주님이 특별히 초빙하신 분인가?”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관 측으로부터 어떠한 통지도 내려오지 않은 상태라 유운룡이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제갈선혜는 정문에만 슬쩍 알려 주고 수련생들에게는 공지하지 않았다.
 유운룡은 잠시 수련생들과 눈을 마주치다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 역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뭐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용설이도 보따리만 던져 주고 딱히 어떻게 하라고 한 건 없었네.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유운룡은 멋쩍게 웃으며 사일이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대사를 날렸다.
 “거기 너, 손잡이부터 잘못 쥐고 있다.”
 “······.”
 연무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사일이 때와는 달랐다.
 종남파의 의젓한 일대제자인 주진혁은 유운룡의 말을 들었을 때 눈을 깜빡거리다가 멋쩍게 웃었었다. 그러고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고 점잖게 되물었었다.
 그걸 기대했다.
 그 반대가 됐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던 남자 수련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아, 새끼 거, 표정 한번 살벌하네. 아직 아침도 못 먹었는데 겁주고 있어.’
 여기서 밀리면 그대로 끝이다. 남의 집에 뻔뻔하게 들어갔을 땐 비굴해지는 순간 두들겨 맞고 쫓겨난다. 받을 수 있는 적선도 못 받는다.
 그래서 창궁이한테 써먹었던 대사도 날렸다.
 “베기도 취약해. 곡선을 그릴 때는 마음이 넉넉해야 부드럽게 그어져.”
 “······그렇습니까?”
 남자 수련생은 입가를 말아 올리더니 검을 들어 유운룡을 겨눴다.
 “실력이 좋으신가 봅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시죠.”
 가르쳐 주려고 왔다. 있는 밑천 탈탈 털어서 아낌없이 싹 다 뿌릴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일대일 승부를 바라진 않았다.
 그가 원한 건 교탁에 서서 교편 쥐고 편하게 입만 놀리는 거였다.
 “너만 특별 대우해 주면 다른 애들이 샘 내잖냐. 지금은 일단 꾹 참고, 나중에 애들이랑 같이 배우러 와. 어때?”
 “정규 과목이 편성돼 있는 일반 교관과 달리 특별 교관은 각자 자신 있는 과목을 항시 개설해 두는 게 원칙이지요. 그런데 일개 수련생과의 비무를 겁나서 뺐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무도 수강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럼 결국 집에 가시게 됩니다만?”
 “······뭣이.”
 “정무학관 삼 년 차 수련생 매화검 추화성, 새로 오신 특별 교관님께 비무를 신청합니다.”
 그 즉시 난리가 났다.
 딴 사람도 아니고 매화검이다. 화산파의 대제자가 직접 나섰다.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모인 정무학관에서 별호를 지닌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으며, 실력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간단히 말하면 남들 다 인정하는 고수다.
 불이 붙었다.
 “대박이다! 매화검이 나섰어!”
 “빨리 애들 불러와!”
 “야, 빨리 판 안 차리고 뭐 하냐? 난 매화검에 은전 열.”
 “매화검의 실력을 알아보고 일부러 도발했네요. 그 안목을 믿고 교관님께 은전 이십.”
 “비무 전승 매화검에 은전 이십오!”
 “에이, 그래도 끗발이 있는데. 교관님께 은전 열! ······매화검엔 은전 열다섯.”
 “푸흐흐흐, 역시 꾼이야, 넌.”
 “분산 투자는 기본이지.”
 유운룡은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싸고 원을 그린 수련생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익숙한 태도다. 늘 있는 일이라는 소리다.
 ‘수련생 수가 부족하면 폐강된다 이거지? 여기서 애들이 배우고 싶어 할 만한 걸 보여 줘서 흥미를 잡아야 한다는 거네. 무를 수도 없고 어쩌냐, 이걸.’
 “자신 있는 무기를 말씀해 주시면 애들이 가져올 겁니다. 십팔반병기부터 신병이기, 어느 정도 본 딴 독문병기까지 웬만한 건 다 있으니 염려 마시기를.”
 유운룡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었다.
 “신검도 있냐?”
 “······.”
 순간 주변에서 엄청난 웃음이 폭발했다.
 “푸하하하, 신검이래, 신검!”
 “겁먹으신 거 아냐? 비무에서 신검 찾는 사람 처음 봤다, 으하하!”
 “자기 집 병기고에 신검 좀 걸려 있는 사람 손?”
 “우리 집엔 신궁밖에 없어, 크큭.”
 “끄응.”
 한순간에 비웃음거리가 된 유운룡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신검이라도 있어야 적당히 어울려 주지. 용설이도 안 보이는데 어쩐다?’
 신검십이세는 미완이더라도 신검이 있다면 검 자체는 휘두를 수 있다. 그러면 상대가 누구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비무가 가능하다.
 본신 실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검의 완성도만큼 검법을 끌어내는 것이니까.
 혹여 고금천추천하제일신검 같은 전설급의 검을 쥐면 당대의 천하제일인과도 어울릴 수 있는 게 유운룡이다.
 “신검 안 주면, 맨손으로 하지, 뭐.”
 추화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패배했을 때를 위한 대비입니까?”
 “내 독문병기가 신검이야. 내 검법도 신검이 아니면 못 쓰고.”
 “······진지하게 임해 주십시오.”
 “나 지금 진지하거든?”
 “······.”
 추화성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 준비되신 겁니까?”
 “어, 뭐. 일단은.”
 “가르침을 청하는 후배 된 도리로 선공하겠습니다.”
 “오오, 시작한다.”
 “힘내라, 매화검! 교관님께 수련생 수준을 알려 드려!”
 모두가 추화성만을 응원하자 유운룡은 조금 샘이 났다.
 “나 응원하는 사람 없어? 나중에 학점 잘 줄게.”
 “풉. 저 은전 열 냥 걸었으니까 분발해 주세요.”
 “스무 냥 걸었답니다, 교관님. 멋진 모습 보여 주시면 수강하러 갈게요.”
 “오, 그렇단 말이지. 적어도 두 명은 내 편이군, 핫핫.”
 먼저 열 냥 걸었다고 말했던 수련생이 씩 웃었다.
 “근데 전 매화검한테도 열다섯 냥 걸었으니까 지셔도 됩니다. 뭐, 지시는 쪽이 더 좋을지도.”
 “······넌 꼭 잊지 않으마. 스무 냥 건 처자는 잘한 거야. 앞으론 이 오빠만 믿어라.”
 여수련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소매로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힘내세요.”
 “오냐.”
 시시덕거리고 수다를 떠는 유운룡의 모습에 추화성이 검을 곧게 들었다.
 “선공해도 되겠습니까?”
 유운룡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순간 주변의 수련생들이 숨을 죽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신속한 태도로 비무 공간을 넓혔다.
 동시에 추화성이 힘차게 발을 디디며 검을 내리그었다.
 아니, 내리그으려 했다.
 유운룡이 이미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추화성은 검을 들어 올린 채로 가만히 서 있다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피한 건데?”
 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공격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다섯 걸음이나 뒤로 빠졌다는 게 문제다.
 “피, 피했대, 으하하하! 완전 뻔뻔하신데?”
 “그래도 보법 자체는 괜찮지 않았어?”
 “야, 보법은 무슨. 그냥 뒷걸음질이잖아.”
 “상대가 매화검인데 공격을 하지도 못했잖아. 허를 찔렀다면 찌른 거지.”
 “그건 꿈보다 해몽이지, 인마. 저건 그냥 튄 거.”
 
 수련생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지붕 위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용무늬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었다.
 “허,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걸 넘어 공격 시도 자체를 무산시키는 천고의 보법······ 저걸 이제야 다시 보게 되었구나. 대체 몇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건지.”
 
 추화성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유운룡과의 거리를 보고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금 저 거리는, 방금 펼치려던 낙화유수(洛花流水)의 제일식을 상대가 피했을 때 쫓아가는 제이식의 최종 간격이었다.
 첫 번째 공격만 피한 게 아니라 두 번째 공격까지 미리 피해 버린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머릿속에서 이글거리던 열기가 식고 경시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하다. 보법 전문 교관일 수도 있겠어. 거기에 초식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추화성은 주변에서 떠들고 있는 수련생들의 비웃음을 의식적으로 차단했다.
 깨닫기 전에는 몰랐으되 지금은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공격하기 전에 피한다는 발상이야 사실 쉽지만 공격자가 허수아비도 아닌데 그리 쉽게 해낼 수 있겠는가.
 추화성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땅을 박찼다.
 ‘이 교관, 생각보다 괜찮군.’
 탓!
 ‘그렇다면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서 공격하면 어떻게 대응할 텐가!’
 추화성은 언제라도 올려칠 수 있도록 검을 늘어트린 채 유운룡을 향해 질주했다.
 유운룡도 그걸 깨달았다.
 ‘판단 빠르고 적응력 좋고. 성격만 아니면 가르칠 만하겠는데, 신검이 없으니 대충 할 수가 없네, 쩝.’
 왼손을 검지와 중지만 펴서 수도를 만들고 오른쪽 허리춤에 갖다 댔다.
 일견 보기에 좌수 발도를 흉내 낸 자세.
 생소한 자세에 구경하는 수련생들이 환호했다.
 “발검이다, 발검! 좌수 발검!”
 “발도지, 인마. 수도가 검이냐?”
 “아, 미안.”
 추화성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유운룡의 자세에 오른발로 땅을 디디며 몸을 좌측으로 비틀었다.
 오른손이 딸려 가며 검이 정면 지면에 반원을 그리며 좌측으로 넘어갔다. 발검세가 만들어졌다.
 거기서 몸을 우측으로 급격히 비틀었다.
 감겼던 손이 풀리며 원심력에 회전력이 더해져 맹렬한 속도로 발검이 펼쳐졌다.
 유운룡도 반 박자 늦게 좌수로 발도했다.
 좌에서 우로 베는 추화성과 우에서 좌로 베는 유운룡, 서로 마주 보고 있었기에 검과 손이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허공에서 맨손과 검날이 닿았다.
 추화성에 손에서 검이 빠져나갔다. 검이 하늘을 날았다.
 검집이 없었다 하나 전신 체중에 원심력과 회전력이 더해진 발검을 두 손가락이 잡아챘다.
 앞선 검을 뒤에서 민 게 아니었다.
 느린 속도로 출발해 더 빠른 속도로 검날을 잡아 빼낸 것이다.
 “······!”
 당사자는 물론이고 구경하는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유운룡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손잡이부터 잘못 쥐고 있다고 했지?”
 “······.”
 유운룡은 두 손가락으로 잡아채서 들고 있는 검을 천천히 추화성에게로 향했다.
 “뭐, 네 탓은 아냐. 잘못 가르친 사람 탓이지.”
 말하면서도 내심 찔렸다.
 공수탈백인 같은 수법은 비무에 적합하지 않다.
 전장에서 무기를 잃어버려 목숨 걸고 펼칠 때가 아니면 하수를 상대할 때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수법이다. 한마디로 ‘넌 이미 죽어 있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수법인 거다.
 적당히 실력을 보여 주며 호기심을 끌어내야 하는데 완전히 무산됐다.
 추화성은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자신의 검을 천천히 받아서 쥐었다.
 “생사결이었다면 검기가 서렸을 터, 비무용 수법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만.”
 “······어, 꼭 그렇진 않은데?”
 유운룡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씩 웃었다.
 ‘생각보다 성격 괜찮은 놈이잖아? 보통은 길길이 날뛰다가 싸대기부터 날렸는데 말이지.’
 신검이 아닌 이상 쥐지도 못하니 검법을 펼칠 수가 없고 맨손으로 하자니 자신이 위험해서라도 대충할 수가 없다.
 예전에 초식 연습용 허수아비가 되어 주는 단기 근무를 뛰었을 때 자칫 손목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공수탈백인을 펼쳤다가, 신검십이세의 부작용으로 손을 떨다 검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결과 무인을 모욕했다며 싸대기를 맞고 잘려 버렸다.
 그때의 근무 기간은 고작 닷새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놀라고 경악하긴 했으되 무인에 대한 모욕이랍시고 날뛰는 수련생은 한 명도 없다.
 비무 당사자조차 덤덤하게 평을 내릴 뿐이다.
 ‘좋구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여기야!’
 난생 처음으로 오래 근무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유운룡은 팔짱을 끼며 선언했다.
 “검기 써서 다시 한 번 해 봐.”
 수련생들의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오오, 위엄 있는걸?”
 “멋있으세요.”
 추화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양 않겠습니다. 수투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난 신검만 쥔다.”
 웃음바다가 터졌다.
 “아, 교관님 정말 배포 대단하시다. 혹시 무림 초출 이후로 계속 빈손으로 다니신 거 아니세요?”
 “검강도 맨손으로 가를 기세야. 완전 멋져.”
 “검기도 맨손으로 받으시면 수업 들으러 갑니다. 그리고 교관님께 은전 다섯 추가.”
 “아, 나도! 검기라고 했으니까 매화검에 은전 다섯 추가. 아까랑은 별도로 벌이는 판이지?”
 “첫 판은 교관님 승이지. 이번 건 검기 대 맨손이고. 시작하기 전에 빨리들 걸어라, 시간 없다.”
 “쳇. 매화검에 다시 은전 열.”
 “교관님께 은전 열다섯.”
 “난 매화검 은전 이십.”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교관한테 금전 열.”
 “······!”
 “······!”
 어마어마한 판돈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천향화 제갈선혜였다.
 “용설아!”
 유운룡이 어미 찾은 강아지처럼 해맑게 불렀다.
 “너 어떻게 오빠 불러 놓고 마중도 안 나올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제갈선혜가 일부러 애교를 조금 떨었다.
 “알아서 잘 놀고 있는데 뭘, 우리 오라버니.”
 제갈선혜의 발언에 남자 수련생들이 뒤집어졌다.
 “오, 오라버니? 우리 오라버니?”
 “천향화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니? 제갈세가에서 파견 나온 거야? 하지만 제갈세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은 적 없는데······.”
 “용설이는 애칭인 건가? 그럼 서, 설마 약혼자······.”
 제갈선혜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 수련생을 돌아봤다. 남자 수련생이 입을 닥쳤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 수련생은 단 한 명, 매화검 추화성뿐이다.
 “천향화. 네가 초빙한 거였나?”
 “응.”
 “간만에 한 수가 있는 교관이 부임했다 했더니, 의미가 없군.”
 추화성 역시 잘 알고 있다.
 정무학관 내에서 천향화 제갈선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이라면 상관없지만 천향화만큼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졸업 후에 무림맹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가 없고 무림에서의 운신 폭이 좁아진다.
 화산파의 대제자란 신분인 그는 특히 더 그렇다.
 정치적으로 자살하고 싶을 때가 아니면 함께해선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천향화 제갈선혜다.
 “······마음에 들던 참인데 흥이 깨지는군요, 교관님. 괜찮으시다면 이쯤에서 접을까 합니다.”
 “잉?”
 유운룡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눈 가득 궁금증을 띄워 추화성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데?”
 “친한 사이가 아니십니까?”
 마지막 구명줄을 몰라본 유운룡은 정치적 동반 자살을 택했다.
 “각별하다면 각별한 사이가 될 예정이다만 아직은 딱히 입질이 없는 사이? 용설 누이가 생각보다 앙탈이······ 하하.”
 말하다 말고 머쓱하게 웃었다.
 어제는 그러다가 내공 실린 옷 보따리에 안면을 직격당했다. 어제보다 훨씬 많은 애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망신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는 교관의 위엄이 떨어진다, 교관의 위엄이.
 “그러시군요. 한 수 가르침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닿기를.”
 추화성은 정중히 포권하고는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부분의 수련생들도 제갈선혜와 추화성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추화성을 따라갔다. 아쉬움이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는 수련생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잘 잃고 갑니다~”
 유운룡에게 은전 열 냥, 추화성에게 은전 열다섯 냥을 걸었던 그 수련생이었다.
 유운룡도 마주 흔들어 줬다.
 “저놈 저거 크게 될 놈이야.”
 아직 유운룡 쪽에서 머뭇거리던 수련생들도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에고,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 또 봬요.”
 “나중에 무림에서 보면 아는 척해 주세요.”
 “저희 집안에 힘이 없어서······ 죄송해요!”
 모두가 떠났다. 제갈선혜와 유운룡만이 남았다.
 유운룡은 갑작스레 휑해진 연무장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한 여수련생을 발견했다. 미련이 남는지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수련생도 유운룡을 봤다. 눈이 동그래지다가 이내 초승달처럼 휘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유운룡에게 다가오더니 점잖게 인사를 했다.
 “덕분에 돈도 땄는데 역시 그냥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수업 기대할게요, 특별 교관님.”
 멀리서 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방금 전 손 흔들며 가던 수련생 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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