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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파이터 1

2017.07.24 조회 601 추천 3


 그랜드 파이터 1권
 
 
 Prologue
 
 
 온통 새빨간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풍경과 감도는 피비린내는 그것들이 물감이 아님을 여실히 알려 주었다.
 검게 말라붙은 혈흔으로 가득한 이곳.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지옥도와 같은 이곳에 품에 한 소녀를 안고 있는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소년의 양볼에는 피눈물이라도 흐른 것 같은 혈흔이 자리했다. 소년의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검을 세운 이들을 담고 있었다.
 “도대체 왜, 빼앗아 가는 거야?”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가 연약해 보이지만 그것에 담겨진 중후한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소년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은 뼈 속까지 스며드는 살가운 살기를 느꼈다. 그들은 어떻게 어린 소년이 이런 무지막지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모자란 거야?”
 소년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그들에게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얼마나 더 나에게서 소중한 이들을 앗아가야 하는 거지?”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배후에서는 푸른 마나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불타오르듯 치솟는 마나가 내뿜어내는 위압감은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설사 대륙 최고라 하는 7서클의 대마도사라 할지라도 저렇게 엄청난 마나를 내뿜지 못한다.
 힘든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으며 무지막지한 마나를 내뿜어내는 소년을 바라보는 그들의 두려움은 한층 가중되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소년은 그들을 향해 검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너희들은 죽어······.”
 
 
 1장 엘프의 손에 자란 소년
 
 
 칼리아나 대륙에 존재하는 마의 숲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로 손꼽히는 곳은 당연 에르메이너 숲이다. 그 넓이는 자그마한 왕국의 영토와도 비견될 정도로 넓었으며, 각종 몬스터들과 독충들이 들끓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숲은 동서남북으로 나뉘며 각 영역에는 강한 힘과 뛰어난 지능을 가진 우두머리가 존재했다. 북쪽 지역의 지배자는 몬스터의 제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미노타우르스로 반인반우(半人半牛)의 커다란 덩치를 가진 대형 몬스터였다.
 힘은 오우거 뺨을 후려갈기다 못해 발로 무참히 짓밟을 정도로 강하며 성질은 고블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더럽기로 정평이 나 있기도 했다.
 몬스터들의 세상인 에르메이너 숲에서 무서울 것이 하나 없었던 미노타우르스는 요즘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밤낮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정신 나간 인간 때문이다. 벌써 몇 달째인지 모른다.
 쿠어어어!
 불면으로 인해 두 눈이 붉게 충혈된 미노타우르스는 분노가 가득 찬 포효를 지른 뒤, 코앞에서 알짱거리는 인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덤벼!”
 그 날카로운 눈초리에도 위축되지 않은 인간 소년은 손을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외모는 많이 쳐주어봤자 14, 15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병장기를 쥔 것도 아니다. 다만 반들반들한 건틀릿 한 쌍이 소년의 두 주먹을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 소년은 몸집도 작아 미노타우르스의 딱 한 입 간식거리로 적당해 보일 정도였다.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미노타우르스에게 무슨 배짱으로 덤비는지 그 누가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소년의 도발에 미노타우르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지 커다란 몽둥이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부웅! 부웅!
 몽둥이가 휘둘릴 때마다 끔찍한 파공성이 울렸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죽는 것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시체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인정사정없이 휘둘리는 몽둥이는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는 소년을 스치지도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피를 말리는 긴장감의 사투가 이어졌다.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 스태미나를 보유한 미노타우르스조차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밝혔다. 그에 대항하는 소년 또한 그에 못지않게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쿠워쿠워.
 “허억! 허억!”
 숨을 쉬며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고는 하지만 한 몬스터와 인간의 매서운 눈초리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미노타우르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소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눈초리를 올리며 노려보았다.
 서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한 휴식시간을 가지려는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눈싸움을 이어 갔다.
 쿠어어어!
 이대로 눈앞의 소년에게 주도권을 내주었다가는 평온한 잠자리는 꿈도 못 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이 든 미노타우르스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잠시간의 고통, 그 후의 행복.
 그것이 미노타우르스가 바라는 이상이었다. 미노타우르스가 괴성을 지르며 몽둥이를 들어 올리자 소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줄행랑을 치는 소년의 뒤를 미노타우르스는 급히 뒤쫓았지만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린 탓에 발걸음은 느리기 그지없었다.
 소년은 자신을 따라오던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일 보자!”
 숲의 제왕인 미노타우르스에게 소년은 저주와도 같은 말을 던지고 무심하게 사라졌다.
 쿠어어어어!
 구슬픈 북쪽 숲 주인의 포효소리가 숲을 울린다.
 
 ***
 
 “레이엔!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따끔한 호통소리가 한적하고 조용한 엘프 마을을 소란스럽게 했지만 늘 있는 일상처럼 엘프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꾸짖음을 당하고 있는 인간 소년의 이름은 레이엔이다.
 엘프 마을의 촌장인 시룬이 6년 전 에르메이너 숲 초입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레이엔을 발견했다.
 인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시룬은 모른 척 지나칠까 했지만 어린 소년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누구나 발을 들이기 꺼려하는 마의 숲에 쓰러져 있는 모습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 당시 레이엔에게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고민 끝에 시룬은 레이엔을 마을로 데려와 보살펴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레이엔을 데려온 시룬은 걱정했다. 어찌나 심한 상처를 입었던지, 혹 죽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죽음을 맞이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처를 레이엔은 믿을 수 없는 경이적인 회복력으로 차츰 상태가 진전되었다.
 어느 정도 레이엔이 회복되자 시룬은 그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레이엔이 마을에 들어설 그때 당시만 해도 인간이 마을의 일원이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엘프들도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씩씩하고 구김살 없는 레이엔은 어느새 엘프 마을에 녹아들어 당당한 마을의 주민으로 인정받았다.
 “그, 그것이 스승님······.”
 눈치를 보던 레이엔이 어물쩍거리며 변명하려 하자 그의 스승이자 보호자인 주르엔이 크게 호통을 쳤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변명은 죄악이라는 것을 평소 입에 달고 살던 주르엔은 사전에 레이엔의 변명을 차단했다.
 “왜 그렇게 북쪽 주인을 못살게 구는 것이냐? 자칫 잘못하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주르엔의 성난 일갈에 레이엔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엘프 마을의 일원이 된 후 레이엔은 이곳의 제일 강자인 주르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에게 배움을 청했다.
 여느 엘프처럼 인간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주르엔은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스토커처럼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배움을 청하는 레이엔의 굳은 심지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결국 받아주었다.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고달픈 수련을 받은 레이엔은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북쪽 숲의 주인인 미노타우르스였다.
 미노타우르스는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몬스터이다.
 물론 처음 덤볐을 때는 정말 죽을 만큼 많이 맞았다. 엘프들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 모른다. 상처가 아문 레이엔은 복수를 한답시고 다시 도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반죽음 상태가 되어서 마을에 실려 왔지만 레이엔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러져도 붙이고, 찢어져도 붙이고 그렇게 다시 찾아가기를 수십여 번. 이제는 미노타우르스의 움직임을 보고 공격을 모두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지만 아직 빈틈을 찌르는 반격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배운 시간을 생각해 본다면 뛰어난 성취라 할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숲을 주름잡는 몬스터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피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레이엔은 남들과는 달랐다.
 신체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종의 제약에 의해 본연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레이엔의 자질은 뛰어난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남과 다른 비상한 머리로 습득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몸으로 익히는 것은 남들보다 더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미노타우르스와 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순전한 노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는 것이 레이엔의 신념이자 믿음이었다. 그런 굳은 일념이 레이엔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스승님, 오늘 배울 것은 뭔가요?”
 눈치가 없는 것인지 레이엔은 혼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맛살을 구긴 주르엔은 레이엔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고자 마음먹었다.
 “말을 듣지 않는 녀석에게 가르쳐줄 것은 없다!”
 스승이 일언지하에 단호히 거절하자 레이엔은 그런 그를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살짝 몸을 돌린 뒤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높고 푸르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눈동자에 맺힌다.
 “아! 오늘따라 날씨가 좋구나.”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레이엔을 보며 주르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날, 폭포 옆의 큰 바위 밑에 숨겨진 술을 사모님께 가져다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순간 주르엔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바라보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이엔이 보였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레이엔의 미소를 보니 절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레이엔이 말한 그곳은 아내 몰래 숨겨둔 엘프주가 고이 잠들어 있는 장소이다.
 만약 들킨다면 일주일, 아니, 길면 한 달 내내 바가지 긁힐 각오를 해야 하기에 주르엔의 등에는 식은땀 한줄기가 정처 없이 흘러내렸다.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느냐, 한 발짝 물러서 레이엔과 타협의 갈림길에 선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흠흠, 어디까지 배웠느냐?”
 
 ***
 
 화창한 날씨가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하지만 레이엔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날의 과오로 인해 주르엔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말이란 무기와도 같은 것이다. 적당히 써야 할 곳과 침묵을 지키는 곳을 적절히 구분한다면 득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독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주르엔의 물음에도 레이엔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이렇게 좋은 날씨에 스승에게 잔소리나 듣고 있는 젊은 청춘의 레이엔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냐?”
 다소 언짢은 주르엔의 물음에 레이엔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힘차게 답했다.
 “네! 제대로 듣고 있습니다.”
 “그렇군. 이제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할 것이야.”
 “······.”
 벌써 1시간이 넘도록 정신 수양의 가르침을 빙자한 잔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그런 잔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레이엔을 괴리감에 빠지게 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어디 아픈 것이냐?”
 걱정스러운 주르엔의 물음에 레이엔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저기 그것이······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속이 좋지 않습니다.”
 다급함이 서린 눈빛으로 레이엔은 주르엔의 눈을 직시했다. 자고로 생리 현상은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주르엔은 레이엔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럼, 잠시 쉬었다 할 테니 처리하고 오너라.”
 주르엔의 말에 레이엔은 속으로 환호를 질렀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꾀병을 낸 것을 들켰다가는 가만히 있을 주르엔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엔은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느릿느릿하기 그지없는 레이엔이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달리는 모습을 본 주르엔은 왠지 모르게 의심이 갔지만 제자를 믿기로 하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레이엔은 그런 스승의 믿음을 저버렸다.
 뒤가 급하다는 핑계로 스승인 주르엔을 피해 나온 레이엔은 마을 근처의 한 절벽가로 향했다.
 그 절벽은 인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조그마한 구멍이 무수히 많이 뚫려 있었다. 레이엔은 뻗은 자신의 주먹과 절벽을 번갈아 보았다. 한참이나 절벽을 바라보던 레이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뚫린 구멍은 레이엔이 주먹을 단련하기 위해 절벽치기를 한 흔적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노력이었고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다.
 레이엔은 건틀릿을 끼며 다시 절벽치기를 하려는 듯 주먹을 들어올렸다. 머리 아픈 수업을 듣는 것보다 주먹을 단련하는 것이 백배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압!”
 강하고 빠른 레이엔의 주먹이 절벽을 향해 내질러졌다.
 “여기가 화장실이더냐?”
 빠르게 주먹을 뻗던 레이엔의 몸이 딱딱한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스승의 말이 레이엔의 귓전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주르엔에게 딱 걸린 레이엔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레이엔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벌이라도 내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인간들이 마을에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어서 나가 있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인간들이 마의 숲인 에르메이너에 위험을 무릅쓰고 발을 디디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시급을 요하는 사건이었으므로 레이엔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들이 나타난 곳은 어딥니까?”
 “자세히는 모르겠다. 도망쳤던 일을 없던 걸로 해 줄 테니 빨리 움직이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죄를 덮어둔다는 말에 쾌재를 부를 레이엔이지만 어린 엘프들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이었기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땅을 박차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노예 상인인 시피르는 파산 직전에 처해 있었다.
 파산이라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것은 그 뿐만 아니라 노예 상인들 전부가 그러했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에서 노예 거래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제국의 뜻은 곧 대륙의 뜻, 대부분의 왕국 왕실에서는 노예 금지령을 받아 들여 자국에 더 이상 노예 거래를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노예를 거래함으로써 수익을 올리는 노예 상인들의 밥줄이 끊긴 것은 당연지사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구원의 동아줄은 존재했다.
 바로 어둠의 거래였다.
 어둠의 거래의 주 품목은 바로 엘프 노예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높은 인기를 과시했다.
 엘프 노예의 거래는 항시 분주히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엘프 노예의 주 소비층은 바로 지배층인 귀족이다. 돈이 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엘프 노예의 거래를 묵과해 줌으로써 더욱 성행하는 꼴이 되었다.
 시대에 도태되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다.
 기존의 노예 시장의 판도가 거의 엘프 노예의 거래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결국 노예 상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엘프를 납치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 상인인 시피르 또한 엘프를 납치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없다.
 결국 그도 다른 노예 상인들처럼 엘프를 납치하기로 굳은 결심을 내렸다.
 엘프들은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숲에 주로 터를 잡는다. 엘프들이 거주하는 많고 많은 곳 중 그가 택한 곳은 대륙에 마의 숲으로 소문이 자자해 그 누구도 들어서기를 꺼려하는 에르메이너 숲이었다.
 마의 숲이라 소문이 나 있어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기에 그 어떤 곳보다 많은 엘프가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성공의 확률도 높다.
 에르메이너 숲에 발을 디디기 위해서 실력 있는 용병이 필요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A급의 용병을 고용하려 했지만 목적지가 마의 숲에서 엘프 납치였다.
 사망의 위험이 높고 장기간 되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 실력 있는 용병들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꺼리며 거절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시피르는 어쩔 수 없이 여태껏 모아두었던 재산을 탈탈 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집까지 팔아 고액의 위험수당까지 지불하고서야 A급 용병 3명과 C급 용병 10명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겨우 고용할 수 있었다.
 그가 고용한 용병단의 이름은 데블스.
 용병계에서 데블스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용병들 중 가장 잔인하고 추악하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그 실력 하나만큼은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시피르가 데블스 용병단과 숲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3주째.
 별다른 수확을 거두어 들이지 못한 채 여러 몬스터, 독충들과 싸움으로 모두들 지쳐갔다.
 “잠깐!”
 데블스 용병단의 단장인 A급 용병, 미첼의 신호에 그들은 숨을 죽였다.
 멀리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한 미첼은 기척을 지우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혹여나 맹수나 몬스터일 수도 있었으므로 검병을 움켜쥐며 언제라도 대비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찾았다!’
 미첼은 소리 없는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엘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엘프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쪼그려 앉아 약초를 캐고 있었다.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오감을 지닌 엘프인 만큼 미첼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행들에게 되돌아갔다.
 일행들에게 돌아온 미첼은 엘프 소녀를 발견한 것을 알리고 작전을 지시했다.
 미첼은 A급의 3서클 용병 마법사인 노튼과 함께 약초를 캐고 있는 엘프 소녀에게 다가갔으며 다른 용병들은 엘프 소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변을 둘러싸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미첼이 눈짓하자 노튼은 미리 메모라이즈 해 두었던 3서클의 속박 마법인 홀드의 주문을 나지막이 외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속삭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 소녀는 그것을 들었는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지면을 박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프 소녀가 줄행랑을 치자 미첼은 황급히 나서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출현에 잠시 놀란 그녀는 흠칫 놀라며 멈칫거렸다. 그 잠시간의 시간 덕분에 주문 영창을 끝낸 노튼의 마법이 펼쳐졌다.
 “마나의 힘이여, 적을 묶어 주소서! 홀드!”
 노튼의 주문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엘프 소녀는 무형의 기운에 전신이 속박당했기에 아무리 움직여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미첼은 마법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엘프 소녀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추욱-!
 강한 그의 수도에 정신을 잃은 엘프 소녀의 동체가 맥없이 축 늘어졌다.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노튼은 기절한 엘프 소녀에게 강력한 수면마법을 걸어 두었다.
 “성공입니다!”
 미첼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용병들의 함성이 메아리처럼 되돌아 왔다. 의뢰주인 시피르는 미첼이 사로잡은 엘프 소녀를 찬찬히 살폈다. 겉보기는 13세에서 15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엘프 소녀다.
 쭉쭉 빵빵한 미녀 엘프는 아니었지만 특별난 취향의 변태귀족들이 비싼 돈을 내고 사줄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천상의 미모를 지닌 엘프인 만큼 엘프 소녀 또한 고혹적인 미모를 지녔기에 한순간 흑심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싼 값을 받기 위해서는 때가 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되돌아가도록 합시다.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엘프 여성은 나이를 막론하고 고가에 거래가 된다. 어린 엘프 소녀 하나로도 충분한 돈벌이가 가능했으므로 시피르는 숲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괜히 마의 숲이라 불리지 않듯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지옥 같은 마의 숲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용병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그득했다.
 일행들을 이끌며 온 길을 되돌아가던 미첼은 왠지 모를 위압감이 들었다. 오랜 시간 전투로 단련된 감각이 위험을 알렸다.
 “모두 정지!”
 미첼은 손을 뻗어 일행들의 전진을 저지했다.
 챙!
 그의 제지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용병들은 무기를 뽑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는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저벅저벅.
 맹수나 몬스터 따위의 것이 아닌 발소리가 생생하게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저쪽이다!”
 일행 중 몇 없는 A급 용병 하울의 외침에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곧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그들의 동공에 서서히 맺혔다. 잠시 후 용병들의 두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커졌다.
 “어, 어떻게!”
 “어린 소년이 아닌가?”
 그들을 잔뜩 긴장케 만들었던 것은 성인이 채 되지 못한 소년이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미첼의 외침에 그들은 한순간 놓았던 긴장감을 다시금 붙잡았다.
 어린 소년이 마의 숲에 있다는 것 자체가 미심쩍기 그지없는 일이다. 상대의 모습을 훔칠 수 있는 도플 갱어라는 상급 몬스터일 수도 있다.
 꿀꺽.
 주변이 고요한 탓인지 그들의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들렸다.
 
 ***
 
 이곳저곳 숲을 쥐 잡듯이 뒤지고 다니던 레이엔은 한 엘프 소녀가 우악스러운 인간들의 손에 붙잡힌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릴 적 모종의 사건으로 가족을 잃었던 자신에게 따스한 보살핌을 준 엘프들이다.
 그렇기에 레이엔에게 있어 엘프들은 가족과도 다름이 없었다.
 가족이 불한당에게 잡혀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주먹을 움켜쥔 레이엔은 천천히 시피르 일행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놓고 사라지세요.”
 제아무리 화가 난다 하더라도 서로 상처 입히는 것이 마음에 걸린 레이엔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사람 좋은 듯 말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레이엔이 무슨 말을 하든 귀에 와 닿지 않았다.
 모두 잔뜩 긴장을 집어 삼킨 채 움츠러들었지만 데블스 용병단의 단장인 미첼은 침착하게 레이엔의 마나를 체크했다.
 레이엔의 마나를 체크한 미첼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엔에게서 느껴진 마나는 몬스터의 것도 아닌 마치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요.”
 그냥 엘프 소녀를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질 것을 종용하는 레이엔이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납치한 엘프를 두고 갈 그들이 아니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그들은 레이엔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살의가 가득 찬 눈을 번뜩이며 다가오자 아무도 다치는 이 없이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던 레이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다가서던 그들은 레이엔이 공격권 내로 들어오자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하압!”
 가장 뛰어난 실력으로 선두에 서 있던 미첼이 큰 기합성을 지르며 레이엔을 공격했다.
 그의 공격을 시발로 다른 용병들이 뒤를 따라 일제히 레이엔에게 덤벼들었다. 미첼의 주 무기는 반곡선의 형태를 지닌 경량의 사브르로 가볍고 특이한 형태를 하여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미첼은 자신의 주특기인 변화무쌍한 검을 휘두르며 레이엔의 급소를 노렸다. 미리 검로를 읽기라도 한 듯 레이엔은 여유롭게 미첼의 검을 피해 내었다. 미첼은 쉴 틈 없이 레이엔에게 맹공을 퍼부었지만 베기는커녕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뒤이어진 용병들의 합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느려.’
 엘프 전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주르엔과의 대련과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로 단련된 레이엔에게 있어 그들의 공격은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했다.
 혼신이 담긴 공격을 퍼붓던 그들은 지쳐갔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검 끝이 무뎌진 것을 안 레이엔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아저씨들, 이제 그만 항복하지 않을래요?”
 부드러운 말투로 레이엔은 권유했지만 그들에게는 조롱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으득.
 어금니를 악문 미첼은 엘프 소녀를 사로잡고 있는 동료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었다. 대장인 미첼의 눈빛을 읽은 그는 엘프 소녀의 목으로 날카로운 검을 들이밀었다.
 “이놈!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이년의 목숨은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엘프 소녀의 목을 칼로 살짝 그었다. 엘프 소녀의 목에는 긁힌 것처럼 가는 혈선이 그어지며 조금이지만 피가 흘렀다.
 그는 검에 묻어나온 엘프 소녀의 피를 혀로 날름 핥으며 레이엔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정말 목을 벨 요량으로 살기가 가득 깃든 눈동자를 하고서 말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 레이엔의 눈동자가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레이엔의 입에서 내뱉어진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짙은 살기가 배어나온 음성은 그들을 삽시간에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거친 삭풍을 만난 것과 같은 공포심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자신들이 봐왔던 산전수전을 다 겪은 S급의 용병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를 자연스럽게 내뿜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벌어진 것, 후회해 보았자 소용없다. 더욱이 자신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인질도 있지 않은가.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레이엔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상대가 엘프 소녀의 목숨을 앗아갈 것만 같았기에 레이엔은 하는 수 없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으윽!’
 마나를 끌어올리던 레이엔은 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내음을 맡았다.
 레이엔은 어렸을 적 누군가 자신의 신체에 걸어둔 마나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마나를 운용하지 못한다. 억지로 마나를 끌어올리려 한다면 마나가 역류하여 신체에 상당한 타격을 주는 것이다.
 비릿한 내음을 애써 삼킨 레이엔은 계속해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지금 이 방법 말고는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하여 엘프 소녀를 구해 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나를 끌어올리는 레이엔이 잠시 빈틈을 보이자 미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단번에 레이엔에게 돌진한 미첼은 목을 취할 요량으로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화악-!
 그 순간 레이엔을 기점으로 강대한 마나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검을 휘두르던 미첼은 자신을 엄습한 마나의 파동을 믿지 못하겠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비단 미첼뿐만 아니었다.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한 몇몇 용병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멈추지 않은 미첼의 검을 가볍게 피해 낸 레이엔은 강하게 일권을 내찌르며 미첼의 안면을 노렸다.
 그 주먹은 빠르기도 하지만 무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콰직!
 전광석화와도 같은 레이엔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미첼은 그대로 안면을 내주고 말았다.
 뼈 부러지는 둔탁한 타격음이 모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소리에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 안면 함몰의 부상이 예상된다.
 단 한 방에 침묵한 미첼은 바닥에 쓰러져 간질병 걸린 환자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어, 어떻게!”
 “미, 믿을 수 없어!”
 노련한 A급 용병으로 일행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미첼이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것은 레이엔이 자신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실력자라는 반증이었다.
 헛숨을 들이켜며 대경하던 그들은 어느새 레이엔의 모습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레이엔을 찾아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의 저편에서 적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 같은 공포감이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엘프 소녀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던 용병은 레이엔이 자신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자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엘프 소녀의 목을 노렸다.
 “죽어라!”
 엘프 소녀의 목을 노리며 찔러지던 검은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가까스로 다가선 레이엔이 자신의 팔로 그의 검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엘프 소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
 뚝뚝뚝.
 레이엔의 팔을 관통한 검 끝으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겠다!”
 강하고 빠른 레이엔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크헉!”
 강력한 레이엔의 주먹을 받은 그는 거친 신음을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레이엔은 자신의 팔을 관통하고 있는 검을 잡아 뽑았다.
 푸슛!
 생살이 찢기는 고통에도 레이엔은 어금니를 악물며 참아내었다. 옷을 찢어 상처 부위를 감은 레이엔은 쓰러진 그를 향해 검을 던졌다.
 레이엔이 던진 검은 정확히 그의 가슴에 박혀 목숨을 앗아갔다. 쓰러진 엘프 소녀를 안아든 레이엔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강한 열기를 느끼고서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쾅!
 레이엔이 서 있던 자리에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파이어 볼이 날아와 직격했다.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파이어 볼이 바로 뒤에 위치해 있던 거목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상당히 위험했을 상황이다.
 “제길!”
 마법사 노튼은 자신이 공들여 메모라이즈 한 파이어 볼을 간단히 피해 낸 레이엔에게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파이어 볼이 실패했다고 하여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던 노튼은 재빨리 빙계 공격 마법인 아이스 애로우의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차디찬 한기여, 적을 꿰뚫는 화살로 변하라! 아이스 애로우!”
 아이스 애로우는 3서클의 마법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마법으로서 높은 살상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수많은 얼음의 화살이 노튼의 머리 위로 생성되며 레이엔을 향해 시위를 겨누었다.
 푸슛.
 수많은 아이스 애로우가 레이엔을 노리며 쏘아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아이스 애로우를 피하려 했지만 엘프 소녀를 안고 있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레이엔은 더욱더 많은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려 그 힘을 빌려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아이스 애로우를 피하기는 했지만 과도한 마나의 사용으로 인하여 레이엔은 속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크윽, 하필이면 이럴 때에.’
 제약으로 인하여 마나의 사용에 제한을 당한 레이엔이었기에 억지로 마나를 끌어올려 사용하는 것은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쿨럭.
 가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레이엔은 결국 붉은 선혈을 토했다. 제약에도 불구하고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한 대한 대가로 깊은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가물거리며 다리에 힘이 빠진 레이엔은 무릎을 꿇었다.
 “크크크크.”
 요리조리 잘도 자신의 마법을 피하던 레이엔의 민첩한 동작에 긴장하던 노튼은 갑자기 선혈을 토하며 쓰러진 레이엔을 보고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고맙기 그지없군.”
 정신을 잃은 듯 맥없이 고개가 꺾인 레이엔은 그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아 혹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죽어라!”
 자신의 일행을 죽이고, 상처를 입힌 레이엔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던 노튼은 목숨을 빼앗을 요량으로 강력한 공격마법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미동조차 하지 않던 레이엔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혈을 토하며 기절한 레이엔이 일어나자 마법의 주문을 외던 노튼은 적잖이 놀랐다.
 “분명 정신을 잃었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엔은 내렸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눈꺼풀 아래 가려져 있던 레이엔의 눈동자는 마치 아름다운 루비와도 같은 붉디붉은 적색이었다.
 화악-!
 일순간 거대한 마나의 힘이 전 숲을 들썩이게 했다.
 앞서 있었던 마나의 파동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힘이었다. 레이엔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힘만으로도 마법사인 노튼은 자신의 마나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크헉!”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의 역류란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큼 위험한 것이다.
 붉은 레이엔의 적안이 노튼을 향했다.
 “죽어······.”
 낮지만 생생한 레이엔의 차가운 목소리가 노튼을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끄아아악!”
 죽음의 공포를 느낀 노튼은 맹수에게 쫓기는 동물처럼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법사이며 마나의 역류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노튼의 발걸음은 레이엔으로부터 도망치기는 역부족이었다. 한참을 도망치던 노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와 싸늘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 살려 주······.”
 목숨을 구걸하려던 노튼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구멍이 휑하니 뚫린 노튼의 동체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피가 대지를 적셨다. 한동안 쓰러진 노튼의 모습을 담고 있던 레이엔의 붉은 눈동자가 점점 그 빛을 잃어 갔다.
 눈꺼풀이 감기는 와중에도 레이엔은 멀리서 쓰러져 있는 엘프 소녀를 눈동자에 담았다. 상처 없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레이엔은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2장 첫걸음
 
 
 이튿날 아침, 엘프 마을의 촌장 시룬은 불구경이라도 하러 가는 듯 발걸음이 분주했다. 시룬은 황급히 레이엔의 침실을 찾았다. 문을 박차며 들어선 그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정겹게 메아리치는 잠꼬대였다.
 “음냐······.”
 레이엔은 달콤한 꿈을 꾸는 듯 흡족한 미소마저 머금으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마나의 폭주가 일어났다고 하여 걱정이 되어 급히 찾아왔던 시룬은 입맛까지 다시며 편히 잠을 자고 있는 레이엔을 보고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놈이!”
 퍼억!
 그의 분노의 발길질이 곤히 자고 있는 레이엔의 볼기짝을 강타했다.
 “웬 놈이냐! 습격이냐!”
 얼얼한 고통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엔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자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난 시룬의 모습이 비쳤다.
 “헛! 촌장님 아니십니까? 누추한 이곳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이놈이!”
 퍼억!
 머리에 주먹만 한 혹을 단 레이엔은 시룬의 서재에 불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시룬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레이엔을 보며 시룬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시룬은 혹 마나의 폭주로 인하여 레이엔의 신체 어딘가에 손상이 가지 않았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의 물음에 레이엔은 머리에 불룩 솟아난 혹을 가리켰다.
 “어찌나 큰지 등반해도 되겠습니다. 지금 이곳이 아파 죽겠습니다.”
 퍽!
 결국 레이엔은 혹 위에 혹을 달고서야 조용해졌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헛소리했다간 혹들에게 동료를 늘려 주는 참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잠자코 경청하기로 했다.
 “어제의 일, 어떻게 된 것이냐?”
 인간들의 접근으로부터 마을의 주민을 지키려던 엘프 전사들은 강력한 마나의 힘을 느끼고서 너 나 할 것 없이 힘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엘프 전사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자신들의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학살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에 다다르는 인간들이 모두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정신을 잃은 레이엔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 어제의 일을 회상한 시룬은 레이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어오는 시룬의 질문에 레이엔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레이엔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억지로 마나를 사용한 대가로 선혈을 토하고 난 후 정신을 잃은 뒤로는 그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은 레이엔의 모습에 시룬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신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나체로서 네 몸에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마나가 잠들어 있다.”
 “알고 있습니다.”
 레이엔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보통 평범한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러움에 넘쳐 시기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가족과 소중한 이들을 잃어야만 했던 레이엔은 그런 자신이 한편으로는 미웠다.
 “하지만 마나 제약의 마법으로 인해 미량의 마나를 제외하고는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겠지?”
 시룬의 물음에 레이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레이엔을 보는 시룬은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숲을 떠돌던 레이엔을 데려왔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강해지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레이엔에게는 마나의 제약이라는 족쇄가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시룬은 그 족쇄를 풀어 주기 위하여 레이엔을 지금 세상에 내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시룬은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 해 두었던 책과 지도를 꺼내 들고서는 레이엔에게 건네주었다.
 “마나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억지로 사용하려 든다면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너는 가진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아가거라.”
 “그 말씀은?”
 시룬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세상으로 나가거라! 그리고 힘을 얻어 네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라!”
 “초, 촌장님!”
 레이엔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헤어짐의 슬픈 신파극을 보는 듯하다.
 한껏 멋을 잡은 시룬은 감격에 겨워하는 레이엔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그것은 상상으로 그쳐야 했다. 활짝 벌려진 레이엔의 두 손이 그의 안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이냐?”
 시룬의 물음에 레이엔은 당연한 것을 묻는 것처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설마 무일푼으로 내쫓는 것은 아니겠죠? 두둑이 챙겨 주세요.”
 쾅!
 무언가 강한 충격음이 서재를 뒤흔들었다. 아마 앞서 염려 했던 참사일 것이다.
 떠나는 레이엔에게 짐을 챙겨 준 주르엔은 시룬의 서재로 들어섰다.
 “촌장님, 지금 보내도 될까요? 너무 이른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나는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마을의 골칫덩어리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레이엔의 품은 뜻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시룬은 석양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 항상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 뒤에 누구보다 가슴 아픈 슬픔을 가지고 있어. 아마 평소 보여 주는 밝은 모습은 슬픈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함이겠지. 그리고 그런 슬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강한 힘을 가지려고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아이다.”
 시룬은 주르엔을 직시했다.
 맑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아이가 바로 레이엔이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주르엔의 물음에 시룬은 고개를 양 갈래로 흔들었다. 같이 지내온 시간이 있는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연히 걱정되지.”
 주르엔은 겉으로는 항상 쌀쌀한 척하지만 레이엔을 이토록 생각해 주는 시룬에게 존경을 담은 눈빛을 찬란히 보내었다.
 “이제부턴 세상이 참 걱정이다. 저 지독한 놈을 어찌 감당할지······.”
 “······.”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적이 평온한 숲 속의 시냇물처럼 고요히 흘렀다.
 
 ***
 
 그 어떤 생명체라도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친다는 그곳!
 바로 마의 숲인 에르메이너 숲이다.
 전 대륙에 자자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그곳을 홀로 거니는 인간이 있었다. 바로 엘프 마을에서 출가 아닌 출가를 하게 된 레이엔이었다. 마을을 나선 레이엔은 큰돈이 되는 포션과 각종 엘프주를 아공간 마법주머니에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포션은 몰래 숨겨둔 것이고, 엘프주 또한 시룬과 주르엔이 애지중지 여기던 것을 몰래 빼왔다. 만약 시룬과 주르엔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지 않아도 레이엔은 알 수 있었다.
 두 품목 모두 상당량이었고 시룬에게서 떠나는 노자도 한몫 크게 챙겼기에 발걸음은 식후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벼웠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레이엔은 지도와 함께 받아온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힘없는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별 필요도 없는 책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준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걸어가는 틈틈이 책을 훑어보았다.
 거지에게 구걸하는 방법, 사기꾼에게 사기 치는 법······ 등등.
 가족이란 품 아래 보호받던 어렸을 적 배운 예절, 예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새로 접하는 지식들이 재밌었기에 레이엔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책읽기에 열중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반나절 정도 걷자 숲의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숲을 나선 레이엔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했다.
 “용병 길드는 큰 영지에 있으니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나?”
 막 숲에서 나와 신분을 증명해 줄 무언가가 없었으므로 큰 영지로 나가 용병 길드에 들르는 것은 필수 선택사항이었다. 신분이 불투명하면 국경을 지날 수 없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용병 자격을 얻는 것이다.
 홀몸으로 국가 간의 자유로운 왕래를 위해서는 B급 이상의 용병패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용병 자격을 따야 했기에 레이엔은 용병 길드가 있는 가장 가까운 영지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영지까지 밤낮없이 걸으면 사흘 거리밖에 안 되니깐.”
 대수롭지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흘 밤낮 정도 생각했던 거리는 이틀하고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레이엔은 오랜만에 찾은 번화한 영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각종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용병 길드가 어디쯤에 있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용병 길드를 찾았다.
 길을 거니는 레이엔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한 복장과 수려한 용모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선남선녀들만 모여 있는 엘프들 사이에서 자랐기에 자신은 그저 평범하다못해 추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으니······.”
 한참을 헤매인 레이엔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길치는 아니지만 초행인지라 한참을 둘러보아도 용병 길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행인은 이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혼자 힘으론 도저히 용병 길드의 건물을 찾을 수 없었던 레이엔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저기, 용병 길드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잠시 레이엔의 아래위를 훑어본 행인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알려 주었다.
 “이 길로 쭉 가다보면 붉은 벽돌의 큰 건물이 있슈. 확 눈에 띄니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유.”
 “감사합니다.”
 친절한 행인의 안내에 레이엔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의 말대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붉은 벽돌로 지은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입구에 커다랗게 용병 길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잘못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용병 길드의 앞에 선 레이엔은 손님을 반기기라도 하듯 활짝 열려진 용병 길드의 정문을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우람한 덩치와 한주먹 했을 법한 자들이 레이엔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들은 이미 용병이거나 용병이 되기 위하여 찾아온 이들일 것이다.
 그들을 잠시 살펴본 레이엔은 접수처로 다가가 안내를 맡고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네었다.
 “저기······ 용병이 되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서류를 작성해 주세요. 시험비는 1골드입니다.”
 무미건조한 사무용 어투로 말한 여성은 레이엔에게 조그만 종이쪼가리를 건네며 시험비를 요구했다. 대륙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쿠퍼와 실버, 골드로 나뉘었다. 100쿠퍼가 1실버이고 100실버가 1골드이다.
 10골드가 4인 평민가족의 1달 생활비였으니 1골드는 시험비치고는 꽤나 비싼 편이었다. 시룬에게 갈취(?)한 돈과 보석이 꽤나 있었지만 1골드라는 거금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용병패를 얻지 못하면 목적지에 갈 수 없었기에 레이엔은 어쩔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1골드를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레이엔이 건네는 1골드를 잽싸게 받아 챙긴 여성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주었다.
 “이 서류를 작성하시고 시간이 되면 정해진 번호를 부릅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시험장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받은 서류를 훑어보았지만 별달리 기입할 것은 없었기에 레이엔은 빠르게 작성한 뒤 자신의 번호가 불리기만을 기다렸다.
 “68번 들어오십시오.”
 지루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차례가 오자 레이엔은 시험관을 따라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험관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레이엔의 눈동자에 꽤나 넓은 연무장이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서류를 주시고 가운데 서 주시길 바랍니다.”
 시험관의 말을 따라 서류를 건넨 뒤 연무장의 한가운데 섰다.
 레이엔이 작성한 서류를 받고서 잠시 훑어보던 시험관은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명: 레이엔.
 출신 국가: 크루웰 왕국.
 주 무기: 주먹.
 취미 : 주먹질.
 특기 : 주먹질.
 앞으로의 포부: 잘 먹고 잘 살자.
 “······.”
 뭐라 할 말을 잃은 시험관은 멍하니 레이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짓도 한 게 없는 레이엔은 시험관이 넋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용병 시험을 치르기 위한 대기자가 많아 시간을 끌 수 없었던 시험관은 놓았던 정신을 수습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그, 그럼 대련 준비를 해 주십시오.”
 용병 시험은 신청한 급수의 용병과 대련하여 실력을 알아보는 방식이다. 레이엔이 신청한 용병 급수는 B급으로 일반적으로 여행에 필요한 통행증을 대신 할 수 있는 용병 자격이었다.
 레이엔의 용병 시험을 거들기 위하여 커다란 덩치를 가진 슬러임이라는 용병이 어슬렁거리며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B급 중에서도 상급에 랭크되는 슬러임은 무시무시한 도끼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베테랑 용병이었다.
 슬러임이 도끼를 치켜세우며 자세를 잡자 주먹을 사용하는 레이엔은 자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건틀릿을 착용했다. 용병의 자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감독관인 S급 용병 다비드는 레이엔의 건틀릿을 보고 감탄성을 흘렸다.
 시험관으로부터 레이엔이 작성한 서류를 받아 들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던 다비드였다. 이런 황당한 서류를 낸 웬 미친놈인가 싶었더니 꽤나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자세 또한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기본은 알고 있군.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다비드의 호령이 떨어지자 시험관은 양측을 번갈아 보았다. 모두 준비가 다 된 듯 시작의 구호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슬러임은 발을 ‘쿵쿵’ 굴리며 돌진했다.
 “죽어라!”
 그는 살의 섞인 외침과 함께 커다란 양손으로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용병 시험은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닌 대련을 통해 실력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 것인지 슬러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수를 펼쳤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선남형의 얼굴을 가진 레이엔은 누가 보아도 인기남의 전형이다.
 여자들은 우람한 덩치에 털북숭이 거기다 사납게 생기기까지 한 슬러임을 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30대가 되도록 가족을 제외하고는 여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슬러임에게 있어 잘생긴 것들은 모두 적이었다.
 특히 레이엔 같은 녀석이라면 더욱더.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슬러임이 살의 섞인 공격을 감행하는 이유였다.
 부웅.
 무엇이든 도막내 버릴 듯 날이 잘 선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끔찍한 소릴 울렸다. 듣기만 하여도 소름 돋는 파공성에도 레이엔은 침착했다. 한 대만 맞아도 피떡이 되어 버릴 몽둥이질을 사흘이 멀다 하고 봐왔으니 이 정도쯤은 간의 크기 변형을 좌우하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슬러임의 도끼가 내리쳐지자 레이엔은 살짝 몸을 비틀며 피해 내었다.
 도끼는 무거움 속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대단할지 몰라도 그만큼 공격방향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강맹하게 내리쳐지던 슬러임의 도끼는 몸을 비틀어 피하는 레이엔을 쫓을 수 없었다.
 쿵!
 목표를 잃은 도끼가 연무장 바닥에 무심히 처박혔다. 단단한 연무장 바닥이 갈라지며 뿌연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어지럽혔다.
 “크윽!”
 슬러임은 바닥에 박힌 자신의 도끼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무식하게 힘으로 내리친 도끼는 단단히 박혔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끼를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슬러임에게 레이엔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갔다.
 “내가 도와줄까?”
 다정스럽게 말을 건네지만 레이엔의 행동은 언행일치가 되지 않았다. 강한 힘이 실린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쾅! 쾅! 쩌어억!
 둔탁한 타격음이 연무장을 울렸다.
 강한 주먹을 이기지 못한 도끼는 약하디약한 도자기처럼 가는 소리를 내며 깨졌다.
 “······.”
 슬러임은 자신의 자랑거리이자 함께 고군분투해 온 도끼가 맥없이 부서지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을 잃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 레이엔을 제외하고 시험장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모두 입 크기가 한 치수 늘어날 정도로 턱을 내린 채로 말이다.
 “시험 끝 아닌가요?”
 레이엔은 감독관 다비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 거물이다!’
 다비드는 벌떡 기립하며 레이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그는 분명히 보았다.
 미약하지만 건틀릿 끝에 서린 마나를!
 더욱이 레이엔은 아직 약관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이다. 그것이 다비드를 더욱 경악케 했다. 어린 나이로 날카로운 검 등의 병기로 아주 미량의 마나만 뿜어낼 수 있어도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둔탁한 해머나 건틀릿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날카로운 날을 가진 병장기보다 배는 어렵다. 건틀릿으로 마나까지 사용할 수 있는 실력, 거기다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
 모든 것을 종합해 본 결과 레이엔은 능히 A급 용병 자격을 따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다비드는 레이엔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이, 이보게.”
 다비드가 말을 건네자 레이엔은 아연한 기색을 표하며 물었다.
 “합격한 것 아닌가요? 왜 그러시죠?”
 “하, 합격이네. 헌데 자네 실력이라면 A급 아니 S급 용병 자격도 딸 수 있을 것이네. 어떤가? 다시 도전해 보겠는가?”
 긴장이라도 한 듯 다비드는 말을 더듬으며 레이엔에게 재차 시험을 치를 것을 권했다.
 용병 길드의 각 지부에서는 실력 있는 용병들을 배출하면 그만큼 명성이 올라간다. 명성치만큼 매년 분배되는 지원금의 액수가 결정되므로 각 지부에서는 명성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A급 또는 S급의 용병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인재였다.
 실력이 있는 무인들은 기사가 되거나 돈 많은 귀족의 호위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용병이 되기를 꺼려 하기 때문이다. 고급 용병을 배출하여 명성치를 올리기 위한 그의 제의에 레이엔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비추며 딱 잘라 거절했다.
 “아뇨.”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포기하지 않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시험 보는 것이 어떠한가? 내 융숭한 대접을 하겠네.”
 용병패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탓에 귀가 고달픈 다비드의 설득과 권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레이엔은 단단한 바위처럼 요지부동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A급이나 S급의 용병패를 가진다면 어디를 가나 괜찮은 대접을 받을 것이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얼굴과 실력이 알려진다는 단점이 있다.
 어린 나이로 B급의 용병 자격증을 딴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만약 A급이나 S급의 용병 자격증을 딴다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일 것이다.
 실력은 감출 수 있다 하여도 얼굴은 그렇지 않다.
 저 높은 곳에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킨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얻고 난 뒤라도 늦지 않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병패가 완성되어 손에 쥐어지자 아쉬움으로 가득 찬 다비드를 뒤로하고서 레이엔은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럼 전 이만.”
 용병 길드를 나선 레이엔은 은으로 도금된 용병패를 만지작거리며 거리를 거닐었다.
 “그럼 용병패를 얻었으니 가볼까?”
 시룬에게 받은 지도에 표기된 곳은 가란트라 왕국의 한 영지인 파휄이다. 지금 있는 곳은 대륙 남부에 위치한 크루웰 왕국으로 내륙에 위치한 가란트라 왕국까지 꽤 거리가 있다.
 마차를 이용하지 아니하고 발품을 판다면 몇 개월 이상 걸리는 먼 거리이다.
 레이엔은 마차를 이용하기보다는 걷는 것도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힘차게 걸음을 내딛던 레이엔은 한순간 딱딱한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런데 가란트라 왕국까지 어떻게 가야 하지?”
 파휄 산맥을 세세히 나타낸 지도만 있을 뿐, 각 국가 간의 왕래를 위한 대륙지도가 수중에 부재중이다.
 지도 없이 국경을 넘어 가란트라 왕국까지 간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결국 영지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륙 지도를 주지 않은 시룬의 뒷담화를 까면서.
 
 ***
 
 레이엔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며 정보의 산지인 여관으로 향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만큼 여관은 이런저런 소문들을 접하기 가장 좋다. 영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여관에 들어선 레이엔은 식당의 한구석에 자리한 뒤 물 한 잔으로 몇 시간 동안이나 죽치고 앉아 있었다.
 시간은 금이다.
 앉아 있는 동안 여관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많고 많은 이야기가 흘러들어 왔지만 달리 쓸 만한 것은 없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오랫동안 정보를 모으던 레이엔은 용병들에게서 타는 갈증을 해소해 줄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란이란 이름을 가진 상단이 사흘 후 가란트라 왕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호시탐탐 물건을 노리는 도적떼와 산적 그리고 몬스터의 존재 때문에 먼 상행을 떠나는 상단에게 용병이란 불가결한 존재다.
 상행에 참가한다면 여비를 절약할 수 있고, 일석이조로 돈 또한 벌 수 있기 때문에 레이엔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레이엔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자 용병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몰렸다.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용병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합석하게 된 레이엔은 몇 마디 나누지 않고도 그들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읽은 책에 나와 있는 기본적인 것들로 칭찬 몇 마디를 한 것이 다였지만 거친 일을 하는 용병들이라 그런지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레이엔! 한잔 받으라구!”
 어느새 친숙하게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되어 버린 이들은 아마조네스라는 4인조 여성 용병단이었다.
 호남형인 레이엔은 여성들에게는 큰 인기가 있지만 남성들에게는 언제나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만약 까칠한 남자 용병들이었다면 이처럼 쉬운 접근이 불가능했으리라.
 “우리 용병단에 남자가 낀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받아주도록 하지! 호호호!”
 “대신 한잔 받아!”
 아마조네스 용병단의 단원 중 한 명인 체린이 레이엔에게 술을 권했다. 평소 공짜는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닌 레이엔은 주는 족족 받아 마셨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꼬박꼬박 술을 받아 마시는 그를 보며 그녀들은 싱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음흉하기 그지없어 마치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색마를 보는 듯했지만 말이다. 비워진 술통은 동이째로 쌓여 가도 레이엔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저게 인간이야?’
 ‘물로 마셔도 힘들겠다.’
 오기가 생겼는지 그녀들은 여관 술을 거덜 낼 작정이라도 한 듯 계속해서 술을 주문했다. 처음엔 매상을 올려 주는 물주를 발견하고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여관 주인도 점점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레이엔은 어렸을 적부터 독하디독한 엘프주를 물 퍼마시듯 마셨기에 웬만한 술로는 취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비록 제약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다 해도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마나가 취기를 몰아낸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결론을 종합해 보면 도출되는 것은 단 하나.
 레이엔은 전대미문, 동서고금을 통틀어 몇 백 년 만에 등장할까 하는 술고래라는 것이다.
 지금 마시는 술도 술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레이엔에게는 밋밋했다. 결국 곁에서 술잔을 거들기만 하던 그녀들이 먼저 고주망태가 되어 뻗어 버렸다.
 그녀들이 뻗어 잠을 자든, 여관 식당 바닥에 토사물을 배출하여 부침개를 부치든 레이엔은 크게 상관치 않았다. 홀짝홀짝 잘도 술을 마시던 레이엔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진 것은 술통이 바닥났을 때였다.
 “쩝. 과음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 이 정도만 마실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거기다 과음하면 몸에 좋지 않단다.
 영지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여관에서 일주일 동안 넉넉하게 판매할 술을 혼자 다 마셔버린 자가 할 소린가.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진정한 술고래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밤이란 어두운 흑막이 걷히고 아침이 찾아왔다.
 아침을 맞이한 그녀들은 깨어질 것 같은 두통과 바늘로 후벼 파는 것 같은 속쓰림을 동반한 숙취로 고생해야만 했다. 그런 고달픔을 알고 있는 것인지 레이엔은 손수 그녀들의 방까지 해장을 위한 얼큰한 고깃국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계산서는 그녀들 앞으로 달아 놓았다.
 레이엔의 친절한 배려에 그녀들은 선망의 눈길을 보내었다.
 이익이 없는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 레이엔이 그녀들에게 친절한 이유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일들이 많은 용병들은 대부분 세상 물정에 밝다.
 그녀들 또한 그런 용병답게 족족 가슴이 뻥 뚫릴 만한 속 시원한 답을 내놓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레이엔은 이들이 나쁜 짓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의 그녀들은 조금 위험할지 몰라도.
 어느새 시간이 흘러 고요한 밤이 찾아오자 그녀들은 어제 하지 못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인지 다시 술을 권했다. 한 번 졌다고 포기한다면 아마조네스의 이름 다섯 자가 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제와 같았다.
 어젯밤을 떠올리는 명장면이 재연출되었다.
 “에휴······.”
 레이엔은 널브러진 그녀들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미란 상단이 가란트라 왕국으로 향하는 날, 아마조네스 여성 4인방은 저마다 피곤에 지친 듯 핼쑥한 얼굴과 눈 밑에 검은 다크 서클을 무장하고서 나타났다.
 몇 번이고 계속된 레이엔 공략의 실패로 정신적, 육체적, 금전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삼중고에 시달린 그녀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미란 상단의 상단주는 빠진 것이 없나 단단히 확인한 후 고용한 용병들을 확인했다.
 용병들을 확인하던 상단주는 계약된 인원보다 한 명이 더 늘어 있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가 인원은 곧 돈으로 직결되는데다 실력이 없는 용병이라면 짐만 될 뿐이다. 상단주는 아직 어려 보이고 그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레이엔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엔의 B급 용병패와 단단한 바위를 주먹으로 간단히 깨부수는 실력을 확인한 상단주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고용한 용병들이 대부분 D급 또는 C급 용병인 것을 감안할 때 없어서 못 구하던 B급의 용병은 상당한 전력의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함을 확인한 상단주가 크게 외쳤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3장 사고뭉치
 
 
 미란 상단은 규모가 작은 소(小)상단으로 값비싼 물건보다 가격이 싼 물건을 대량 구매하여 조금씩 이윤을 불려 파는 박리다매를 노리며 거래를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물건들을 주로 거래하여 상행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한 위험한 산길을 거슬러가며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없었다. 위험한 길을 가지 않으니 용병들은 상단을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기에 그리 힘이 들지는 않았다.
 “하아암!”
 아마조네스 용병단의 대장인 하이안이 따분한 듯 크게 하품을 했다. 주변의 시선이 일순간 몰렸지만 그녀는 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크게 하품을 했다.
 “아우! 심심해!”
 “그러게!”
 “어디 지나가는 트롤 없나?”
 그녀의 곁에서 걷던 아마조네스의 단원인 체린과 미나 그리고 친친 또한 따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조네스는 미란 상단에서 혹시 모를 일들을 대비해 큰 마음먹고 고용한 핵심 전력이었다. 대장인 하이안은 A급 용병이었으며 나머지 3명 또한 B급의 베테랑 용병이다.
 여성답지 않게 호전적이며 투박한 성격으로 아마조네스는 용병계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물론 실력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뛰어났다.
 그녀들은 번듯한 전투 없이 걷기만 하는지루한 상행에 육체적으로 지쳤다기보다는 심적으로 지쳐갔다.
 너무 심심했기 때문에.
 여자 셋이 모이면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거친 용병 일을 하고 있지만 그녀들은 여자다.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그녀들은 입을 열었다. 이런저런 수다를 하며 한참을 떠들던 그녀들의 시선이 바로 뒤에 뒤따르는 레이엔에게로 향했다.
 “저놈 참 특이한 녀석이란 말이야······.”
 “맞아요, 언니.”
 그가 B급 용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들은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레이엔은 어린아이의 티조차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거기다 순박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형이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계에서 짬밥 좀 먹었다는 이들도 겨우 딸 수 있는 B급 용병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하다.
 용병 길드가 아무에게나 B급 용병패를 내줄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고 단단한 바위를 일격에 부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레이엔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위를 부수는 것과 전투 시의 능력은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 싸워 보면 알겠지.’
 그녀들은 거친 일을 하는 용병답게 귀찮고 머리 쓰는 일을 싫어했다. 상행 중 필연적으로 있을 전투에서 레이엔의 실력을 견식하면 되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지루하고 평범한 상행 중에 가장 위험한 곳은 커렌 산맥을 경계로 나누어진 크루웰 왕국과 가란트라 왕국의 국경이었다.
 커렌 산맥은 대륙에서 가장 큰 산맥 중 하나로 에르메이너 숲만큼은 아니라도 각종 몬스터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국경의 경계인 탓에 침략에 대한 방비인지 커렌 산맥에는 제대로 정비된 도로가 없었으며 몬스터 토벌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정비된 도로가 없었기에 미란 상단은 어쩔 수 없이 거친 산길을 걸어야만 했다.
 상단주나 용병들은 혹여나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을까 졸인 가슴을 부여잡으며 걱정하였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한 달이란 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못해 본 아마조네스 전원이 전투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고 싶어 손이 벌벌 떨리는가 하면, 눈앞에 오우거나 트롤이 재롱을 피우는 등 심각한 환각 증세까지 보였다.
 그녀들의 곁에서 레이엔은 자폐증이라도 걸린 아이처럼 혼자서 무언가 구시렁거렸다.
 “트롤 나와라. 트롤 나와라.”
 다른 용병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만한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읊조렸다.
 트롤은 전투력이 상당한 몬스터로서 거목도 단번에 부러뜨리는 힘과 지치지 않는 재생력은 용병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다. 하지만 트롤의 피는 포션을 만드는 주재료로 큰돈이 된다. 그렇기에 트롤은 실력 있는 병들의 목표가 되는 몬스터이기도 했다.
 레이엔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롤은 몬스터가 아닌 돈이었다.
 한 마리만 잡아도 상당한 양의 피를 뽑아내어 한 밑천 단단히 잡을 수 있다.
 에르메이너 숲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숲을 주름잡던 트롤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레이엔의 손에 의해 미라가 되었거나 죽음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를 트롤에게 있어 살아 있는 재해라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동물들이나 몬스터들은 재해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레이엔의 손에 걸려 미라가 될 운명을 직감한 것인지 트롤은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가끔 오크나 고블린들이 등장해 전투에 굶주린 아마조네스들의 목을 적셔줄 오아시스 역할을 할 뿐이었다.
 “에휴.”
 “심심해!”
 한탄 섞인 그녀들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은 무언가 짜릿한 감각을 원했다.
 오크나 고블린 따위의 감질맛은 필요 없었다.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흉폭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고 싶었다.
 “누가 트롤 나오지 말라고 저주라도 하나?”
 “그러게 말이야.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나오던 것이 트롤이었는데······.”
 쿠어어어!
 그때였다.
 흉폭한 기운이 적잖게 느껴지는 괴성으로 인해 갑작스레 숲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오크나 고블린 따위가 아닌 최소 트롤 이상의 대형 몬스터의 흉성이다.
 “으악!”
 “대, 대형 몬스터의 포효다!”
 대형 몬스터의 것으로 짐작되는 포효소리에 용병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무기를 고쳐 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들의 현재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오예!”
 “앗싸!”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아마조네스들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감탄성을 내질렀다.
 쿵. 쿵.
 몬스터의 발소리가 지척에서 울릴수록 그녀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전방의 나무들이 잇달아 쓰러지며 모두를 긴장케 만들었던 장본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머리가 2개나 달린 거대한 오우거였기 때문이다.
 “허억! 트윈 헤드 오우거!”
 “우, 우린 죽었다!”
 용병들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말 그대로 머리가 2개 달렸으며 일반 오우거보다 큰 신장과 배 이상 강한 힘을 자랑하는 최상급 몬스터 중 하나였다.
 “어떻게 트윈 헤드 오우거가!”
 “이거 좀 어렵겠는데······.”
 트윈 헤드 오우거는 몇 백 마리의 오우거 중 1마리 꼴로 나타나는 강력한 몬스터다. 제아무리 아마조네스들이라 하더라도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최강 몬스터로 군림하는 미노타우르스와 1대1로 맞붙어도 10분이나 버틴다고 하니, 그 무서움은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흐음.”
 잔뜩 긴장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레이엔은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서 트윈 헤드 오우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레이엔은 머리가 두 개 달린 기형 오우거가 왜 무서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쟤가 그렇게 무서운 앤가요?”
 그 물음에 하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크게 외쳤다.
 “당연하지! 마의 숲이라 불리는 에르메이너 숲에는 많이 존재한다 해도 커렌 산맥에서는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드물어. 거기다 일반 오우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렇군요. 쟤가 무서운 애였군요.”
 아마조네스들은 자신의 애병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포상금은 좋지만 죽는 사람은 나오지 말아야 할 텐데······.”
 혼잣말 하듯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레이엔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포상금이라니요?”
 “숲의 파괴자인 트윈 헤드 오우거는 그 어떤 국가를 막론하고 막대한 포상금이 걸려 있어.”
 순간 레이엔의 눈이 반짝였다.
 “얼마나?”
 친친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5골드요?”
 레이엔은 5골드 정도라면 나서서 잡아볼 만했다.
 갈등이 된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가는 다른 이들이 피해를 입을 것도 같았기에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손이 갔다.
 “장난하지 마!”
 친친은 레이엔에게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공포의 대명사인 트윈 헤드 오우거의 포상금이 고작 푼돈 5골드라니.
 트윈 헤드 오우거를 목전에 둔 긴급한 상황에서의 레이엔의 대답은 친친에게 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그마치 500골드야!”
 레이엔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트롤 한 마리 잡으면 대충 벌 수 있는 돈이 50골드 정도임을 감안해 볼 때, 트윈 헤드 오우거 1마리는 트롤 10마리의 가격이라는 말이다.
 레이엔은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이 재빨리 건틀릿을 꼈다.
 “바로 잡도록 하죠.”
 다들 트윈 헤드 오우거의 눈치를 보며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레이엔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500골드야.”
 트윈 헤드 오우거는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S급 용병이나, A급 용병 셋 이상은 있어야 승리를 점칠 수 있다. 그런 무시무시한 트윈 헤드 오우거를 상대로 단신으로 나서는 레이엔을 보며 그녀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레이엔! 빨리 돌아와서 대열에 합류해!”
 다른 이들은 오금이 저려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아마조네스들은 레이엔을 돕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한순간의 자만이 죽음으로 곧 직결될 수도 있다.
 그녀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 꽤나 정이 들었기에 트윈 헤드 오우거에게 처참한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요.”
 당장 도망쳐도 모자랄 판국에 레이엔은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트윈 헤드 오우거의 지척까지 다가간 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그렇게 돈이 된다며?”
 레이엔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아련한 과거의 추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한참 미노타우르스에게 얻어터질 당시, 잠시 외출한 북쪽 주인을 대신해 꿩 대신 닭이라고 때마침 지나가던 트윈 헤드 오우거에게 싸움을 걸었었다.
 그 당시 트윈 헤드 오우거와의 2시간의 대혈투 끝에 만신창이로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때보다 많이 강해졌으니 압승은 아니라도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던 것이다.
 쿠어어어!
 반면 오우거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보통의 인간들은 자신의 포효만 들어도 제자리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린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인간은 자신을 보고 도망치기는커녕 기분 나쁜 미소까지 짓는다. 이 일대의 지배자인 자신 앞에서 말이다.
 그로 인해 상당히 기분이 걸쩍지근했다.
 쿠어!
 성난 트윈 헤드 오우거의 집채만 한 주먹이 휘둘러졌다. 상당한 힘과 속력을 지닌 주먹이라 피하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상단원들과 용병들은 필연적으로 그 주먹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레이엔의 모습이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상상으로 그쳐야 했다.
 쾅!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이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끄어어어!
 그 무시무시하던 트윈 헤드 오우거가 오른팔이 완전히 짓뭉개진 채로 울부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몰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마조네스들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로 멍하니 레이엔을 바라보았다.
 레이엔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강하게 일격을 날린 것뿐인데 오우거의 한쪽 팔을 종이상자처럼 가볍게 짓뭉개버리다니.
 그때보다 강해진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얘들이 약한가?”
 에르메이너 숲의 몬스터들은 다른 곳보다 훨씬 강하다. 보통은 오우거와 트롤이 맞붙는다면 오우거가 압승을 하지만, 에르메이너 숲의 트롤과 일반 오우거가 붙는다면 양패구상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쿠어어어!
 자존심이 있었던 트윈 헤드 오우거는 아직 멀쩡한 왼 주먹을 냅다 휘둘렀다. 충분히 강한 힘과 스피드를 가진 주먹이었다. 하지만 미노타우르스의 몽둥이질에 비한다면 너무 느려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레이엔은 가볍게 주먹을 피한 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머리는 두 개라도 심장은 하나지?”
 트윈 헤드 오우거의 가슴께에 다다른 레이엔은 심장을 노리며 주먹을 뻗었다.
 퍽!
 민첩한 레이엔의 주먹에 트윈 헤드 오우거는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가슴을 내준 트윈 헤드 오우거의 커다란 동체가 힘을 잃은 듯 기울었다. 레이엔은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단련되어 있었다.
  같은 힘으로 훨씬 더 능률적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 보다 손쉽게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콰당!
 커다란 동체가 쓰러지며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당당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낱 고깃덩어리만 존재할 뿐이다. 레이엔은 시체가 되어 버린 트윈 헤드 오우거의 한쪽 발목에 로프를 휘감았다. 로프 끝을 붙잡고 시체를 질질 끌어가며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아마조네스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뒷걸음질 쳤다. 당장이라도 오우거가 일어나 주먹을 휘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지금 목전에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린 소년이 그것도 공포의 대명사인 트윈 헤드 오우거를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싸늘한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헛소리라며 뺨 맞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레이엔은 오도카니 서 있는 일행들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남는 수레 하나만 빌려 주세요.”
 
 ***
 
 레이엔이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은 후 가끔 나타나던 오크나 고블린마저 자취를 감추어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상단의 상행은 순조로웠다.
 숲의 제왕이라 불리던 트윈 헤드 오우거가 죽은 채로 질질 끌려가는 상황에 나타날 간이 배 밖으로 외출한 몬스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자 아마조네스들은 다시 지독한 금단증상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넘어 가란트라 왕국으로 들어선 그들의 상행은 이미 끝에 다다라 있었다.
 국경의 영지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레이엔의 휘파람 소리도 점점 커져 갔다. 500골드가 수중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니 절로 기뻤기 때문이다.
 상단이 가란트라 왕국의 국경 영지인 추즈미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레이엔은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시체가 실린 수레를 이끌고 영주성으로 향했다.
 혼란을 고려해 커다란 천으로 가렸기에 달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
 한 30분쯤 달렸을까.
 “크다!”
 추즈미스 영주성 앞에 서자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직접 조우하니 그 웅장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보통 국경에 위치한 영지는 이국의 침략을 막는 최전방이다. 그렇기에 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영주성을 짓는 것을 국가에서 허락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크다!”
 일반적인 상식이란 것이 통용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정도 크기로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할까라는 의문이 다분히 들었다. 레이엔은 수레를 끌며 영주성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추즈미스 영지의 영주인 지크 백작은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크게 놀랐다.
 어린 소년이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아왔다니.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그렇기에 그의 호통은 당연한 것이다.
 역정 섞인 지크 백작의 호통에 소식을 전했던 병사는 바닥에 부복했다.
 “거, 거짓이 아니옵니다. 어린 소년이 정말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아왔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경천동지할 일이다.
 “거짓이라면 네 목을 치겠다!”
 벌벌 떠는 병사를 향한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지크 백작은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지크 백작은 소란의 장본인인 소년이 있는 외성으로 향했다. 무엇인가 생각이 있는 듯 그는 삼남인 후레시크와 함께했다.
 외성에 도착한 그들은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흉폭하기로 소문난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린 소년이 잡았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지크 백작은 아마 다른 강자들의 손에 잡힌 것이라 여겼다.
 어린 소년의 손에 잡힐 만큼 트윈 헤드 오우거는 만만한 몬스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상금을 받기 위해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시체 위에 걸터앉아 있던 레이엔은 꽤나 고급스러운 복장의 지크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곧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레이엔은 기분 좋게 지크 백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포상금은 언제 줄 거죠?”
 지크 백작이 아무 말 없이 침묵을 고수하자 레이엔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툭.
 지크 백작이 조그마한 주머니를 던졌다. 레이엔은 반사적으로 떨어진 주머니를 주워들었다. 묵직했지만 포상금치고는 뭔가 모지란 감이 없잖아 있었기에 재빨리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어 보니 반짝이는 금화가 20개 남짓 들어 있었던 것이다.
 “먹고 꺼져라!”
 지크 백작은 한겨울의 냉풍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항상 사람 좋은 듯 웃고 다니던 레이엔은 평소답지 않은 굳은 얼굴로 지크 백작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하기로는 포상금은 분명 500골드였다.
 주머니 속의 금액은 20골드가 약간 넘는 금액이다. 20골드도 꽤나 거금이기는 하지만 포상금인 500골드의 1할조차 되지 않는 액수이다.
 “분명 포상금은 500골드로 기억하는데······.”
 레이엔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자 지크 백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이 네가 잡은 것이라면 말이지. 하지만 네가 그것을 잡았다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
 비열해 보이는 미소로 자신을 일관 바라보는 지크 백작의 행동에 레이엔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상대가 귀족이라 일단은 참기로 했다.
 “내가 잡았습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지만 레이엔의 외침은 지크 백작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지크 백작을 대신해 그의 아들인 후레시크가 나섰다.
 “그 트윈 헤드 오우거의 오른팔의 상처는 내 검에 의한 상처다. 나에게서 도망쳤지만 결국 과다 출혈로 죽었나 보군.”
 말도 안 된다. 척 보아도 팔이 짓뭉개진 상처지 어딜 봐서 이 상처가 검에 의한 상처인가.
 “어디서 거짓부렁을!”
 참다못한 레이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이엔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후레시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서 거짓을 술술 내뱉었다.
 “분명한 사실이다. 네가 한 일은 죽은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 왔을 뿐이다. 20골드는 그에 대한 대가다.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먹고 꺼져라!”
 지크 백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암. 그 트윈 헤드 오우거는 나의 아들이 잡은 것이다.”
 그들은 부자(父子) 사기꾼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이 척척 들어맞았다. 도를 넘어선 황당함에 숨이 막히는지 레이엔은 가슴을 쳤다.
 “이런 사기꾼 새끼들을 보았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욕설에 지크 백작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지만 옅은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라 그것을 본 자는 없었다.
 “네 녀석이 감히 귀족을 모독하는 것이냐? 여봐라! 저 녀석을 매우 쳐라!”
 지크 백작의 명령에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섰다.
 스렁.
 기사들은 허리춤에 차여진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다. 연무장을 가득 채우려는 듯 화려한 은빛을 내뿜는 검은 모두 레이엔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
 
 이것은 아니다.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섣불리 레이엔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검을 수련해 온 감각이‘저 녀석은 위험한 놈이다. 다가가면 안 된다.’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는 기사들이 못마땅하였는지 지크 백작은 성난 일갈을 내질렀다.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고작 어린 애새끼에 겁을 먹은 것이냐!”
 머뭇거리는 기사들의 행동에 화가 난 후레시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고도 네놈들이 기사냐?”
 지크 백작과 후레시크를 등지고 있는 기사들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성질 더럽기로 악명이 자자한 지크 백작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없다. 기사라는 신분을 가진 자로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인 레이엔에게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받아라!”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는 점과 기사의 명예 때문에 한꺼번에 덤벼들지는 않았다.
 먼저 첫발을 내디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가볍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검이다. 레이엔은 기사가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가 살의가 없는 이상 굳이 상처를 입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캉!
 레이엔은 건틀릿을 낀 손바닥을 들어 검을 막았다. 공격이 막히자 기사는 방어를 위해 검을 거두어 들이려 하였지만 검끝이 잡힌 탓에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의 검끝을 잡은 레이엔은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면 확실한 실력의 차이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압!”
 레이엔은 단련된 주먹을 검신을 향해 내리쳤다.
 쨍그랑!
 “이, 이럴 수가!”
 조금 전까지 잘 빠진 검신을 자랑하던 기사의 검이 동강이 난 채 부러져 버렸다.
 기사의 검이 단 일 격에 맥없이 부러지자 지크 백작은 크게 놀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기사들 또한 불신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기사의 검을 단번에 부러뜨리다니!”
 기사의 검은 수많은 제련을 거쳐 탄생한다. 들인 공이 있는 만큼 웬만한 망치로 두들겨서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 기사의 검을 손쉽게 동강내 버리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상처럼 굳어 버린 기사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후레시크가 검을 뽑으며 나섰다.
 “네 녀석의 오만함을 나의 검으로 꺾어 주마!”
 “장하다, 아들아! 혼쭐을 내주어라!”
 혼란스러운 장내를 수습하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그를 보며 지크 백작은 박수를 쳤다.
 검을 뽑은 후레시크는 레이엔을 향해 겨누었다.
 화르륵!
 푸른 마나가 그의 검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검을 깨달은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그것은 바로 소드 오러였다.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소드 오러가 후레시크의 검에 넘실거렸다. 당당한 소드 오러를 바라보는 지크 백작은 자신의 아들이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레시크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라는 믿기지 않는 경지를 이룬 수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나서자 기사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쯧쯧쯧.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기사들은 저마다 혀를 찼다. 아비를 닮아 성격이 시궁창보다 더 더러운 그다.
 “차라리 우리들에게 몇 대 맞는 것이 나았을 것을······.”
 기사들은 레이엔이 강해 보았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후레시크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만큼 소드 익스퍼트란 이름이 갖는 의미는 컸다.
 “소드 오러인가?”
 레이엔 또한 후레시크의 검에 서린 오러를 알아보았다.
 그리 낯설지는 않다.
 대련 시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이유로 주르엔이 가끔 소드 오러를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단단한 거목마저 밑둥째 베어 버리는 소드 오러이다. 그 위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레이엔은 방어를 위해 자세를 굳혔다.
 굳은 레이엔의 모습에 후레시크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후레시크는 여유라도 부리듯 양팔을 활짝 벌리며 도발했다.
 “먼저 선공을 양보하마.”
 상대의 도발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지만 먼저 공격하라고 빈틈을 만들어 주는데 그것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마다하지 않으마.”
 빛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빠르다.
 레이엔이 후레시크의 품을 파고든 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뭐, 뭐냐!”
 당황한 후레시크는 자신의 말을 번복이라도 하듯 검을 휘둘렀다. 접근만으로 적잖이 당황하는 그의 꼴은 실전 경험이 극히 적다는 반증이다.
 “선공을 양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차디찬 만년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한 레이엔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레이엔은 검을 휘두르는 후레시크의 손목을 강하게 쳐 낸 뒤 오른팔을 젖혔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퍼억!
 단단한 건틀릿의 끝이 그의 왼 턱에 작렬했다.
 “커헉!”
 고개가 힘차게 돌아간 후레시크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선혈을 토했다. 그가 토한 각혈과 완전히 부러진 이들이 허공에 수놓듯 흩뿌려졌다. 얼핏 보이는 후레시크의 입 안에는 성한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틀니와 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철푸덕!
 멀리 날아간 후레시크의 동체가 맥없이 쓰러졌다.
 한 방이다.
 단 한 방에 후레시크는 침묵했다.
 다행히 목숨은 잃지 않은 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후레시크는 어디 내놓아도 그리 뒤떨어지는 실력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딜 가도 동년배의 호적수를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였다. 그리고 레이엔은 모종의 제약으로 인하여 가진 힘을 십분 발휘할 수 없다.
 무인들 간의 승부에서 방심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이 후레시크를 패배로 이끌었다.
 만약 후레시크가 방심하는 마음을 지우고 제대로 승부에 임했다면 호각세로 겨루거나 우위를 점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순간 화를 참지 못한 레이엔은 지크 백작의 아들인 후레시크를 흠칫 두들겨 패버렸다.
 당연 그의 진노를 산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물론 내성에 상주하고 있던 기사들마저 새까맣게 몰려나왔다.
 레이엔은 현 상황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많은 수의 기사를 한 번에 상대하기란 무리다. 냉철히 주변상황을 정리한 뒤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튄다.
 레이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재빠른 생쥐처럼 기사들의 틈을 뚫고 도망치는 레이엔을 보며 지크 백작이 크게 소리쳤다.
 “저, 저놈이 감히!”
 혈압이 치솟았는지 그는 뒷목을 붙잡았다.
 “크, 크윽! 쫓아라! 그리고 저놈을 죽여라!”
 레이엔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미노타우르스를 비롯한 여러 몬스터들과의 쫓고 쫓기는 접전에 의한 경험으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도망 실력이다.
 주공의 명에 기사들이 급히 레이엔의 뒤를 쫓아 힘껏 달렸지만 거리가 좁아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졌다.
 도주를 막기 위해 성문이 닫혔지만 레이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레이엔은 곡예를 하는 원숭이처럼 성벽을 박차며 손쉽게 넘어 버렸던 것이다.
 “이 빚은 다음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 가마!”
 성벽을 넘어가던 레이엔이 지크 백작에게 남긴 한마디였다.
 추즈미스 영주성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운 레이엔은 일행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지크 백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미란 상단과 아마조네스에게까지 그 죄를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받지 못한 삯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영지에 수배령이 내려 경계가 삼엄했지만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추즈미스 영지를 떠났다.
 그리고 곧장 파휄로 향했다.
 
 
 4장 독은 독으로 제압하라
 
 
 파휄은 커렌 산맥의 줄기를 끼고 있다.
 산지가 많았기에 곡창지대가 적으며 왕래가 불편하여 그리 발달되지 못한 낙후된 영지였다. 그런 파휄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파휄에 도착한 레이엔은 깊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산길을 걷는 도중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산중에 과연 누가 살고 있을까, 혹 시룬이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설마.’
 그런 의심을 꾹꾹 눌러가며 목적지를 찾아갔다.
 휘잉!
 처량한 바람만이 감돈다.
 도착한 레이엔은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중에 휑한 공터만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확인해 봤지만 지도에 표기된 곳은 분명 이곳이 맞았다. 멍하니 서 있던 레이엔은 문득 느껴진 살기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하다.
 레이엔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해 냈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날 정도였다.
 “누구냐!”
 고개를 돌리자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엘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활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좋은 뜻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레이엔이 화살을 피하자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이익!”
 여러 발의 화살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화살에는 강맹한 마나가 실려 있었기에 스치면 중상, 맞았다간 그대로 황천행일 것이다.
 “그만! 그만!”
 아무리 열심히 외쳐도 상대가 그만할 리 없다.
 ‘크윽! 뭔 놈의 화살이!’
 피하기는 하지만 화살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살 떨리는 공포가 느껴졌다. 레이엔은 오랜 수련을 통해 피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아슬아슬하게나마 화살을 모두 피해 내었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레이엔을 보며 활 공격만으로는 무리가 있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조그만 단도를 꺼내 들고 돌진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은밀하고 민첩하여 고도의 훈련을 받은 어새신을 연상케 했다.
 캉!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낸 레이엔은 반사적으로 발을 차올렸다.
 오랜 기간 갈고 닦은 동작을 머리보다는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갑작스런 레이엔의 발차기 공격에 뒤로 물러서며 피했지만 발끝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운 볼에 가는 혈선이 생겨나자 그녀는 소매로 피를 훔치며 레이엔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다.
 레이엔은 먼저 공격을 하기 전에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저기 뭔가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나요?”
 “닥쳐라! 넌 누구냐?”
 “······.”
 레이엔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짜고짜 공격을 하더니 이제는 누구냐고 묻는다.
 “저기······.”
 “닥쳐라!”
 “······.”
 이제는 말도 못 꺼내게 한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엘프의 향기가 나는 인간! 너는 누구냐!”
 레이엔은 어깨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렸다.
 ‘무슨 냄새 나나?’
 힘껏 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아보아도 그리 특별난 향은 나지 않았다. 딴청을 부리는 레이엔을 향해 그녀는 성난 일갈을 내질렀다.
 “인간! 어서 말하지 못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레이엔은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말해 보았자 그녀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죽고 싶은 것이냐?”
 역시나 레이엔의 생각은 적중했다.
 마나가 실린 화살, 날카로운 단도 공격. 이미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겪었다. 횟수가 한 번쯤 늘어난다 하여도 별 감응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레이엔을 향해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만!”
 그녀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졌다. 레이엔과 그녀의 고개가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눈에는 곧 푸른 장발을 길게 기른 엘프가 들어왔다. 겉모습은 젊어 보였으나 그에게서는 무시하지 못할 연륜의 깊이가 느껴졌다.
 “아버님, 이 녀석은······.”
 그녀는 그를 보더니 못된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카미안, 조용히 하거라!”
 그의 따끔한 호통에 카미안의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가 그 아이냐?”
 고귀한 기품과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레이엔은 시룬이 말하던 그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이엔은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엔이라 합니다. 에르메이너 숲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나는 카미엘이라 한다. 따라오너라.”
 
 ***
 
 에르메이너 숲의 엘프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시룬은 다소 근엄한 표정으로 주르엔과 독대하고 있었다. 향이 으뜸인 허브차를 음미하며 그들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지?”
 “그렇겠군요. 촌장님, 레이엔에게 소개해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주르엔의 물음에 시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소 음흉해 보이는 미소였기에 불안감이 절로 든다.
 “알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레이엔이 비록 인간이라고는 하나, 같은 마을의 주민이자 저의 제자입니다.”
 “그럼 알려 주도록 하지. 바로 카미엘이다!”
 카미엘이란 이름 석 자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주르엔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서, 설마! 파휄 산자락의 그 카미엘 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카미엘이 그 녀석 말고 다른 놈이 있느냐? 아마 맞을 것이다.”
 쾅!
 주르엔이 흥분이라도 한 듯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자 시룬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촌장님! 레이엔을 죽이려 하십니까?”
 “설마. 그렇겠느냐?”
 “헌데 어찌 카미엘 님을!”
 시룬은 혀를 차며 검지를 살짝 흔들었다.
 “쯧쯧쯧. 그러니 네가 무르다는 것이다. 자고로 독은 독으로 제압해야 하는 법이야!”
 “······.”
 주르엔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창가로 다가갔다. 레이엔이 있을 법한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디 살아남아라.”
 
 ***
 
 “시룬이 네게 준 지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란다. 한 5년 전쯤 이곳으로 이사를 해서 그러니 녀석의 실수를 이해해 주렴.”
 천 년 정도 묵은(?) 엘프인 시룬에게 녀석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레이엔은 카미엘 또한 같은 연배쯤으로 생각했다.
 “예, 아무리 시룬 촌장님이시라도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레이엔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만약 이 장면을 시룬이 목격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다분히 의문이 든다.
 “네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는구나. 아니냐?”
 카미엘은 레이엔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내대장부로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뜻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기백이 느껴졌다.
 “무엇이냐?”
 레이엔은 힘껏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강한 힘을 주십시오.”
 “강한 힘이라······.”
 카미엘은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밝히는 레이엔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강한 힘을 원하느냐?”
 “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죽을지도 모른다. 괜찮겠느냐?”
 “죽을 만큼 힘든 수련은 괜찮습니다만······ 죽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렇군. 너의 뜻을 잘 알았다.”
 카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엔은 그가 거절하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내일부터 시작할 테니 오늘은 여행의 여독을 풀거라.”
 다행히 거절은 아니자 레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방에는 한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엘프만 오도카니 남게 되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차만 홀짝이는 의미 없는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카미안은 레이엔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누구냐? 넌!”
 다짜고짜 화를 내며 외치는 그녀를 보며 레이엔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레이엔이 방 한편에 마련된 침대 위로 몸을 던지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꺼졌다. 푹신한 침대는 피곤에 지쳐 있는 레이엔에게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앗! 거기는 내 침대다! 인간, 어서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카미안이 정색을 하며 외치자 레이엔은 시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첫 인상이 최악 중의 최악이었기에 상대하기조차 싫어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이엔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팔베개를 하며 잠을 청하려다 문득 느껴진 살기에 재빨리 몸을 피했다.
 푸욱!
 레이엔은 날카로운 단도가 침대 깊숙이 박히자 화들짝 놀랐다.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단도가 박히는 것은 침대가 아닌 자신의 가슴이었을 것이다.
 “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레이엔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말 한순간에 죽음의 강을 건널 뻔했기에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지금 죽는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카미안은 레이엔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인간!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응.”
 절대 그녀와 엮이기 싫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나가달라면 나가주지.”
 레이엔이 방을 나가려 하자 카미안은 안절부절못하고 붙잡았다.
 “인간, 거기 서라! 네가 지금 나가면 곤란하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지?”
 막 방문 고리를 잡았던 레이엔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카미안은 레이엔이 방문을 열자 황급히 외쳤다.
 “아, 아버님께 혼난다! 나가면 고, 공격하겠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날 죽이려 들 것 아니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업어 치나 메치나 같은 격이다.
 “아, 아니다. 엘프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
 카미안이 약속하자 레이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만약 약속 안 지키면 귀신이 돼서라도 쫓아다닐 거니 각오해!”
 “약속은······ 지킨다.”
 레이엔은 카미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는 하지만 한 때 목숨을 위협했던 그녀의 곁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배짱이었다.
 편히 자고 있는 레이엔을 보며 카미안의 손이 몇 번이고 단도 자루가 있는 허리춤을 향했다. 약속한 것이 있어서 도저히 뽑지 못했던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며 외쳤다.
 “인간! 언젠가 이 빚은 꼭 갚아주마!”
 
 ***
 
 “크헉!”
 아침을 알리는 레이엔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 소리에 잠이 깬 것인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카미안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적(?)과의 동침이라고 한다.
 “하암······ 인간, 왜 그러냐?”
 “왜, 왜 네가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여기? 당연히 내 침대니깐.”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다.
 따지자면 놀라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은 레이엔이 아닌 카미안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흐음······.”
 엘프 같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선 레이엔은 거실에서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는 카미엘과 눈이 마주쳤다.
 “밤새 평안 하셨습니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레이엔에게서 방금 전 카미안과의 동침으로 인해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엔의 인사에 카미엘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너도 푹 쉬었느냐? 아침 식사 후 시작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예.”
 아침 식사 후 찾은 곳은 바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과연 어떤 수련을 할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은 레이엔은 카미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카미안, 레이엔에게 건네주거라.”
 그의 뒤에 서 있던 카미안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커다란 바구니를 레이엔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무엇인지?”
 건네받은 바구니에는 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전은 빨래다. 1시간 안에 끝내도록 하거라.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으니 가사 분담을 제대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말을 마친 카미엘은 레이엔에게 나무로 만들어진 빨래 방망이를 쥐어 주었다.
 “어설프게 할 생각 말고 때를 잘 빼도록.”
 “······.”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레이엔은 빨래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가사 분담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유구한 수련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며, 아무런 불평 불만 없이 열심히 빨래 방망이를 놀렸다.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빨래 한바구니 정도야 한 시간이면 넉넉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아무리 빨고 빨아도 바구니 속의 빨래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기에 바구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빨래 바구니를 살펴보던 레이엔은 바구니 속으로 손을 넣어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공간 마법 바구니!”
 숨겨진 바구니의 정체였다.
 열심히 빨래를 했지만 1시간 동안 10분의 1조차 해내지 못했다. 엘프 부녀밖에 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빨래가 나올 수 있는지 그것은 불가사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팔이 무거워졌다.
 아픈 팔을 쉬게 하기 위해 레이엔은 양손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지만 축적된 피로로 인해 세탁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레이엔이 이를 악물고 빨래를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 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빨래만 했기에 피로가 급격히 몰려들었다. 양팔은 근육통으로 인해 쑤시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카미엘은 해질 무렵쯤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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