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너의 SNS가 보여 [E]

너의 SNS가 보여 1권 (상)

2017.07.25 조회 1,300 추천 6


 프롤로그
 
 
 
 
 
 내 이름은 이어진.
 올해 막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다.
 외모 평범, 성적 평범, 운동 평범, 취미 딱히 없음, 장래희망 회사원, 혹은 공무원.
 친구들은 나를 가리켜 곤약 같은 놈이라고 한다.
 오뎅탕에 들어있는 곤약.
 망할 놈들 곤약이 얼마나 맛있는데.
 
 부모님 없이 할머니랑 산다는 것만 빼면 난 어디 내놔도 딱히 꿀릴 것 없고 딱히 나댈 것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다.
 아니.
 그랬었다.
 
 * * *
 
 “······.”
 
 지금 내 눈앞에는 한 할머니가 길바닥 좌판 위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다.
 
 “할머니, 뭐 파세요?”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좌판 위에 물건도 뭐 없는데 집에 안 가고 계신 것은 아마 팔 물건이 조금이지만 남았기 때문이겠지?
 우리 할머니도 시장에서 조개를 까서 파는 일을 하기에 잘 안다.
 
 “이번 신작이여. 딱 하나 남았으······.”
 
 할머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찬 보자기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엉겁결에 받아 본 그것은 DVD.
 그것도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DVD였다.
 
 내가 받은 걸 본 할머니가 갑자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국산 몰카.”
 “······?”
 “노모여, 노모.”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노모는 할머니가 누군가의 노모겠죠.
 
 “주세요.”
 
 착한 나는 할머니를 얼른 퇴근시켜 드리기 위해 돈을 꺼내 건넸다. 왠지 우리 할머니 같아서 이 추위에 떨고 계시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단지 그뿐이다. 진짜, 진짜로.
 할머니는 물건이 다 팔리자 좌판을 접고 보따리를 쌌다.
 그 모습을 본 나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 걸었다.
 
 바로 그때,
 
 빵- 빵빠앙-
 끼이이익. 쾅-!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달려온 트럭 한 대가 난데없이 방금까지 할머니가 좌판을 깔았던 자리로 돌진해 온 것이다.
 
 그 소리에 놀란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어이구, 학상 덕분에 내가 살았구먼!”
 “···그러게요. 깜짝 놀랐네요.”
 “이거 생명의 은인에게 뭘 줘야 쓰겄나······.”
 
 할머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내가 산 DVD를 보았다.
 
 “응 그려. 내가 가져 봤자 쓸모도 없응께, 내 학상 줄게.”
 “네?”
 “그런 거(?) 너무 좋아하지 말어. 뼈 삭어. 흘흘흘.”
 
 말을 마친 할머니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매만졌다.
 화들짝 놀라 뿌리치려 했지만, 할머니의 손에는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주름으로 우둘투둘한 손가락이 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두 받어.”
 
 할머니는 어리둥절해 있는 내 손에 DVD사용 설명서를 쥐어주었다.
 
 “그럼, 잘 살어.”
 
 할머니는 나를 보며 몇 번 싱글싱글 웃고는 손을 흔들며 길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뭐야 저 할머니?”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여러모로 피곤한 날이다.
 
 
 
 
 
 제1장 일진의 카톡
 
 
 
 
 
 집에 돌아오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내 코를 간질였다.
 작지만 따뜻한 마이 스윗 홈.
 밥상을 나르던 할머니가 날 반겨 준다.
 
 “어구, 내 강아지 왔는감?”
 “다녀왔어요.”
 “어여 씻구 밥 묵어.”
 
 할머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몰카란 말이지?”
 
 나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몰래카메라.
 이런 걸 찍는 놈들은 참 나쁜 놈들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왜 보고 싶을까?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DVD를 컴퓨터에 넣었다.
 
 한데?
 
 <방귀대장 뿡빵이! 요술방귀 뿡빵!>
 
 웬 미친 주황색 인형탈을 쓴 남자가 나와서 요상한 댄스를 춘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할망구에게 속았다는 것을.
 
 “젠장! 우리 할머니 같아서 샀더니만!”
 
 지금 와서 부들거려봤자 돈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 할머니 세금도 안 내고 장사하는 것일 텐데, 심지어 파는 것도 몰카라니.
 
 “속아서 산 내가 븅신이지. 아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의자에 앉았다.
 
 부시럭!
 
 그때,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하고 꺼내 보니 아까 몰카 팔던 할머니가 줬던 쪽지. DVD사용 설명서다.
 
 “뭐야. 요즘 세상에 누가 설명서 읽어.”
 
 나는 쪽지를 구겨 버리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응? 뭔가 이상한데······.”
 
 설명서 치고는 필요 이상으로 짧고 간결했다.
 문득 호기심이 들어 쪽지를 살펴보았다.
 
 
 1. 대상의 얼굴과 이름을 알면 대상의 모든 SNS를 흔적 없이 몰래 볼 수 있다.
 2. 익명의 SNS 내용을 보면 작성자의 얼굴과 이름, 당시 글이 작성되던 순간을 볼 수 있다.
 3. 횟수의 제한은 없으며 2번 조항은 게시글 작성 전 7시간까지만 유효하다.
 4. 사용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알몸인 상태로 눈을 감고 눈알을 위 아래로 10번 굴린다.
 (2)-원하는 대상의 얼굴, 이름이나 SNS 게시글을 떠올린다.
 (3)-즐감.
 
 “이게 뭐야,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나는 쪽지를 구긴 뒤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남의 SNS를 몰래 볼 수 있다고? 누굴 관음증 환자로 아는 건지··· 옷은 또 왜 벗으라는 건데?
 
 “아, 짜증나. 괜히 돈만 낭비했네. 그 돈이면 피시방이 몇 시간인데.”
 
 투덜거리며 방을 나오자 밥상 앞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김춘례.
 나는 밥상 앞에 앉아 살며시 눈을 감아 보았다.
 
 ‘역시나 될 리가 없지.’
 
 눈을 감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밥상머리 앞에 앉아서 존다고 할머니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얼른 밥 먹고 슬슬 잘 준비나 해야지라고 생각하던 순간.
 
 -띠링!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아.”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건 분명 우리 반 일진인 권재웅이 보낸 것이 분명하다.
 요즘 그 녀석, 괴롭히던 빵셔틀 녀석이 전학간 뒤부터는 타깃을 나로 변경한 듯싶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내가 자기 앞자리라는 이유. 그게 다다.
 우리 반은 나태한 담임 때문에 자리가 한번 정해지면 1년 내내 바뀌지 않는다.
 하필이면 그 무시무시한 녀석의 앞자리에 앉게 되다니.
 심지어 바로 옆 분단에는 내가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고 있는 장효진이 앉아 있다.
 권재웅 놈은 하필 효진이 앞에서 매번 내게 망신을 주었다. 빵을 사 오라거나 체육 시간에 대놓고 내 체육복을 뺏어 입는다거나.
 
 나는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기가 무서워 폰을 뒤집어 버렸다.
 
 * * *
 
 “아 어떡하지······.”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에 들어와 누우니 내일이 걱정된다.
 권재웅.
 그 빌어먹을 놈은 분명 내일 망신을 주려 할 것이다.
 결국 난 새벽 두 시가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석할까?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지진이 나거나 홍수가 나도 학교에는 가야만 하는 줄로 아시는 분이다. 결석을 하게 되면 분명 노발대발 하실 게다.
 가뜩이나 나물이나 조개 팔아서 번 돈으로 비싼 사립학교까지 보내 주셨는데······.
 
 그럼 조퇴?
 그런 경우 일단 학교에는 가야 한다.
 분명 권재웅 패거리가 꾀병 부리지 말라며 난리를 칠 텐데.
 
 그럼 왕따 괴롭힘 상담?
 나른한 표정의 담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줄 것 같지가 않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괴롭힘 당하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싫지만 옆 분단 장효진이 보는 앞에서 괴롭힘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다.
 난 머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별 수 없다. 일단 학교에 가긴 가야 한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 혹시 모르지. 기적이 일어날지도.
 눈을 감고 눈알을 아무리 굴려 봐도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한 기분에 난닝구와 팬티마저 벗어 버렸지만 여전히 몸이 무언가에 매인 듯 답답하다.
 그렇게 잠을 청하려는 순간.
 
 “헉!?”
 
 나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박차야만 했다.
 방금 뭐지?
 분명 뭔가 보였다.
 눈꺼풀과 망막 사이. 어둠과 습기만이 가득한 그 얇은 틈에 순간적으로 환한 빛이 보였다.
 눈부실 정도로 크고 넓은 빛이.
 나는 허둥지둥 다시 눈을 감았다.
 어? 이번에는 안 보인다. 아까 그 빛이 사라졌다.
 
 “뭐였지? 분명 무슨 말풍선? 대화창 같은 게 보였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아까 그 DVD생각이 난다.
 뭐랬더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까 잠들기 전 했던 대로, 눈알을 빠르게 위 아래로 굴렸다.
 이윽고, 오래된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어둠만이 가득한 내 시야에 여러 개의 말풍선이 뜨기 시작했다.
 제일 첫 화면에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뽀샵으로 가득한 증명사진 따위가 아니라 게츰스레한 눈과 여드름, 모공 구멍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면 사진.
 바로 권재웅이었다.
 사진 옆에는 큼지막한 글씨가 세 개.
 
 권.재.웅.
 
 놈의 이름이 떠 있다.
 
 “뭐야? 이거 진짜야?”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권재웅의 사진과 이름 옆에는 수십 개의 항목이 보였다.
 
 
 [권재웅]
 
 카카오톡 -9
 라인 -0
 문자 -0
 페이스북 -2
 트위터 -0
 인스타그램 -0
 메일 -9999+
 
 .
 .
 .
 
 그 외에도 수많은 SNS 항목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 옆에 붙은 숫자는 0이었다.
 
 “설마··· 내가 이것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일단 권재웅 녀석의 카카오톡을 눌러 보았다.
 
 
 
 [권재웅 카카오톡, 2017년 ㅇ월 ㅇ일]
 
 - 이재민: 야 내일 코 있냐? -오전 02:18 (안 읽음) +5
 
 - 장은지: 오빠 오늘 재밌었어여 ㅋㅋㅋ담에 또 바이크 태워주세요 -오전 01:49 (안 읽음) +2
 
 - 김유이: 야 저번에 니가 말했던 영화 개봉했더라?ㅋㅋㄱ개보고싶음 -오전 01:38 (안 읽음) +1
 
 - 조덕배: 오야, 니도 잘 드가라. 담부터 햄들 봣을때 인사 않하구 그러지마라ㅋ -오전 01:35 (안 읽음) +1
 
 - 강희찬: 행님~잘 들어가셧슴까ㅎㅎ뚤리는 술집 알려 주셔서 감사함다 -오전 01:23 (읽음)
 
 - (알수없음): 오빠··· 혹시 나 차단했어? -오전 01:11(읽음)
 
 - (알수없음): 개새끼야 오늘 니 애 지웠다 -오전 01:00 (읽음)
 
 
 “진짜 되네······.”
 
 나는 조금 손이 떨렸지만 이내 심호흡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곤 녀석의 카톡 방 하나를 눌렀다.
 첫 번째로 누른 방은 이재민의 방이었다. 권재웅과 함께 날 괴롭히는 녀석들 중 하나다.
 
 - 이재민: 야 내일 코 있냐? -오전 02:18 (안 읽음) +5
 
 ‘코’는 니코틴의 코. 녀석들 사이에서 담배를 뜻하는 비밀용어다.
 놀라운 건, 내가 이재민의 메시지를 읽어도 ‘안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 이재민: 야 내일 코 있냐? -오전 02:18 (읽음)
 
 이재민의 카톡에 +표시가 사라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 권재웅: 내일 이어진 새끼 털면 됨ㅎ -오전 02:19 (안 읽음)
 
 권재웅이 답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아득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다. 누가 머리채를 잡고 위로 확 끌어당겨 가죽을 벗겨 가는 것처럼 쭈뼛했다.
 
 “어쩌지··· 어쩌지······.”
 
 나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내 눈에 새로운 카톡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 (알수없음): 개새끼야 오늘 니 애 지웠다 -오전 01:00 (읽음)
 
 
 (알 수 없음)으로 뜨는 카톡 이름.
 이건 상대방이 SNS계정을 삭제했을 때나 이렇게 뜬다.
 나는 그 방을 꾹 눌러 보았다.
 
 
 - (알수없음): 오빠 나 처음이었어ㅠ진짜 아파 -2017년 ㅇ월 ㅇ일 오후 09:17 (읽음)
 
 - (알수없음): 자? 왜 연락이 않되ㅠ? -2017년 ㅇ월 ㅇ일 오후 07:12 (읽음)
 
 - (알수없음): 오빠...나 두줄떴어...불안하고 미치겟어 전화좀 줘 내번호 01099026589야. -2017년 ㅇ월 ㅇ일 오후 11:56 (읽음)
 
 - (알수없음): 내일 친구랑 병원가려고...전화되? 와줄 수 있어? -2017년 ㅇ월 ㅇ일 오후 06:45 (읽음)
 
 - (알수없음): 개새끼야 오늘 니 애 지웠다 -2017년 ㅇ월 ㅇ일 오후 09:17 (읽음)
 
 
 카톡 대화 목록을 쭉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허··· 이 자식 완전 쓰레기네.”
 
 나는 (알 수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다시 한 번 눌렀다.
 그러자 또다시 어두운 공간에 밝은 창이 떴고, 방금 전과는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 언뜻 보기에는 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 수수하다.
 
 방수진.
 
 사진과 이름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저 먼 곳에 있을, 얼굴도 이름도 모를 여자의 비참한 사생활을 엿보게 되다니.
 나는 방수진의 사진 옆에 무언가 떠 있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동영상 실행 버튼처럼 보였다.
 거침없이 누르자 방수진이 보낸 마지막 카톡이 갑자기 확 커지며 영상이 재현되었다.
 얼굴을 하얗게 칠한 여자가 검은 마스카라가 번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은 환자복. 화장 때문에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방수진이 분명하다.
 
 [개새끼! 진짜 나쁜 개새끼!]
 
 그녀는 연신 욕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통화를 시도하는 듯했지만 되지 않는다. 아마 권재웅에게 거는 것이겠지. 진작에 차단당했을 테고.
 
 [수진아··· 그 새끼. 잡자. 잡아서 고소하자.]
 
 방수진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 몇몇이 옆에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수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울기만 할 뿐이다.
 
 [나 그 새끼 이름도 모르고 번호도, 사는 곳도 몰라··· SNS 아이디만 아는 거라······. 진짜 노상에서 술 먹다가 잠깐 만난 사이였는데······.]
 
 동영상을 좀 더 뒤로 감자 방수진이 수술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다리를 벌린 채 눈을 꽉 감고 있는 그녀.
 나는 씁슬한 얼굴로 동영상을 종료했다.
 
 그때!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방수진이야 환자복을 입고 있다지만 그 옆에 있는 여자애들은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었다.
 그것은 내가 다니는 인천고등학교의 옆 학교인 옥린여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수진은 아마 옥린여고에 다니는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재빨리 방수진의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SNS에서는 그녀의 신상을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아주 많았다.
 그녀의 집 주소, 부모님의 전화번호, 직장 번호. 모든 것들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권재웅의 부모님 전화번호를 수집했다.
 
 이제 쇼타임이다.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보여 주마 좆만아.
 
 권재웅.
 
 얼굴 잘났고 집 잘살고 덩치 좋고 공부 잘한다. 적당히 쇼맨십도 있고 선생님들과 여자애들에게 능글맞은 유머를 던질 줄도 아는 놈이다.
 근데 왜 그렇게 같은 수컷들, 그 중에서도 나 같이 약한 녀석들에겐 이렇게도 가차 없는 것일까······.
 1교시 시작을 앞두고,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실 뒤편 에어컨 쪽에서 종이컵으로 컵차기를 하고 있던 그놈이 나를 보고 손을 번쩍 든다.
 
 “오! 어진이! 왜 이제 와!?”
 
 누가 보면 무척이나 친한 친구 사이인 줄 알겠다.
 하지만 나보다 머리가 한 개 반은 더 큰 저 녀석은 친구라기 보단 상위 포식자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구, 오늘은 지갑 좀 채워 왔어? 나 배고픈데.”
 
 권재웅은 마치 아기 다루듯 내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돈을 못 가져왔다고 말하면 분명 맞겠지.
 하지만 괜찮다. 난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학교 끝나기 전까진 구할 수 있을 거야. 미안해.”
 “뭐? 아 그럼 점심시간엔 어쩌고!”
 “그, 그 전까지 구해 볼게. 친구한테 빌리기로 했어.”
 “친구? 니 친구 없잖아.”
 
 권재웅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 주먹 말고 팩트도 쓸 줄 안다.
 머리 좋은 양아치다. 나쁜 새끼.
 그때.
 
 딩동댕동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따 얘기하자.”
 
 권재웅이 내 엉덩이를 한 번 주물럭거리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뭐 바로 뒷자리지만.
 빌어먹을 자식.
 나는 자리에 앉아 권태로운 표정의 담임이 교단 앞에 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응?”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권재웅의 당황한 목소리.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나 수진이 오빠다. 네가 화랑로 110번지 사는 권재웅 맞지? 왔는데 자리에 없어 메모 남긴다. 일단 데려온 친구들 아침 좀 멕이고 오전 중에 다시 교실로 올 테니 기다려라. PS-수진이 니 애 지웠다.>
 
 
 나는 아침 일찍 와서 방수진의 오빠인 척 메모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가 다른 밑작업을 하고 왔다.
 
 “뭐, 뭐야 이거······.”
 
 권재웅이 손을 떠는 것이 느껴진다.
 손목만 매너모드인가? 평소에는 매너도 없는 자식이.
 앞자리인데 어떻게 느껴지냐고?
 다 느껴진다. 아무튼 느껴져.
 
 권재웅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담임은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리고는 다시 시선을 칠판으로 돌려 버렸다.
 예스, 저 인간은 칠판성애자라서 한번 칠판을 보면 애들 쪽으로는 시선을 절대 안 돌린다.
 
 달달달달······.
 
 내 의자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다리를 떨고 있긴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다리 떠는 소리가 더 크다.
 권재웅 자식. 지금 표정을 보고 싶지만 얼굴을 돌릴 수가 없다. 아, 이런 건 사진으로 남겨 놔야 하는데.
 
 이윽고, 1교시가 끝났다. 담임은 인사도 생략시킨 채 후딱 나가 버렸다.
 
 “아, X발. 뭐지?”
 
 권재웅이 머리를 쥐어뜯는 소리.
 
 “뭔 일인데?”
 
 옆에서 이재민이 권재웅의 어깨를 짚는다.
 
 “저번에 그때, 노상 까다가 만난 애들 기억 나냐?”
 “어, 옥린여고 애들?”
 “나 X됐어. 걔네 오빠가 사람들 불러서 나 찾아온대.”
 
 그러자 이재민의 표정이 험상궂어진다.
 
 “야 X발, 쫄지 마! 니가 뭘 잘못했는데? 남자랑 여자가 그럼 뭐 할라고 술 먹어?”
 
 그냥 먹기도 한단다, 재민아.
 그리고 오빠 입장은 그게 아니지.
 뭐, 걱정 마, 어제 네 여동생 SNS도 잠깐 찾아봤는데 걔도 딱 너 같은 마인드더라. 곧 알게 될 거야.
 나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계속 앞만 보았다.
 그런데?
 
 “야, 애들 다 모아. 역관광 시켜 버리게.”
 
 이재민이 자기 인맥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어라? 일이 조금 커지는 것 같은데?
 이재민은 자기 핸드폰을 꺼내 여기저기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건 권재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녀석들이 핸드폰으로 뭘 보내고 있나 보고 싶어졌다.
 재빨리 남자화장실로 대변기 칸으로 뛰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재빨리 안구 운동을 시작했다.
 
 보인다. 녀석들의 카톡 내용이 전부 보이기 시작했다!
 
 
 -2017년 ㅇ월 ㅇ일. 권재웅 카카오톡
 
 - 조덕배: 형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오전 10:18 (안 읽음) +2
 
 - 정래원: 형님, 후배들 좀 불러주십시오, 저 위험합니다 -오전 10:18 (안 읽음) +2
 
 - 김태촌: 행님, 저 큰일 났습니다. -오전 10:18 (안 읽음) +1
 
 - 강희찬: 찬아 애들 좀 모아줄 수 있냐? 형 좆됫다 -오전 10:18 (읽음)
 
 - 최 웅: 웅아, 잘 치는 애들 몇 명만 같이 와주라.. -오전 10:18 (읽음)
 
 .
 .
 
 
 - 2017년 ㅇ월 ㅇ일, 이재민 카카오톡
 
 - 조덕배: 햄!, 재웅이 큰일낫슴다ㅠㅠ -오전 10:18 (안 읽음) +2
 
 - 곽춘삼: 춘삼아, 후배들 좀 모아바라ㅋ -오전 10:18 (안 읽음) +2
 
 - 김일남: 일남이 잘지내나ㅋ 니 운동하는 동생들 좀 있제? -오전 10:18 (안 읽음) +1
 
 - 나태릉: 태릉이 올만ㅋ니 재웅이알지? 금마지금좆됨각ㅋㅋㅋ -오전 10:18 (읽음)
 
 .
 .
 
 
 “어이구 카톡방이 다 남자천지네. 갑자기.”
 
 나는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권재웅과 이재민 중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름이 하나 있다.
 
 조덕배.
 
 그 녀석의 카톡방을 눌러보았다.
 떡하니 뜨는 사각턱의 정면 사진.
 아이고, 눈 한번 부리부리하다. 어제 먹은 돈부리 그릇도 저거보단 작았던 것 같은데.
 
 조.덕.배
 
 놈의 이름도 떴다. 마침 녀석이 권재웅한테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2017년 ㅇ월 ㅇ일, 조덕배 카카오톡
 
 -조덕배: 재웅이 먼일이고? -오전 10:21
 
 -권재웅: 행님..저 저번에 노상 까다가 옆에 여고 다니는 애랑 함 했는데...그 여자 오빠가 저 죽인다고 찾아온답니다... -오전 10:21
 
 -조덕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빙신새끼ㅋ -오전 10:21
 
 -권재웅: ㅠㅠ... -오전 10:21
 
 -조덕배: 같이가주까? -오전 10:21
 
 -권재웅: 감사함다 행님 ㅠㅠ행님뿐임다. -오전 10:21
 
 -조덕배: 마, 의리가 잇지ㅎ내가 애들좀 모아가께ㅎ
 
 
 “의리 대단하네.”
 
 나는 눈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이재민의 카톡에도 계속 메시지가 떴다.
 
 
 -조덕배: 재웅이한테 들었다 지금 체육관 나와따ㅎ -오전 10:18 -오전 10:21
 
 -곽춘삼: 애들 싹뎃고 가겟슴다 행님 -오전 10:21
 
 -김일남: 형님 콜인데 달려가야죠ㅋㅋ -오전 10:22
 
 -나태릉: ㅋㅋ나도 체육관 아는형님들 다 불러서 갈게 -오전 10:22
 
 
 어째 판이 좀 커지는 느낌이지만 뭐······.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눈을 뜨고 다시 옷을 입었다.
 메모 남길 때 혹시 지문조차 남지 않도록 장갑을 꼈으니 하등 걱정할 게 없다. 이제 그저 즐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 * *
 
 시간은 흘러 점심시간.
 간만에 쾌적한 기분으로 밥을 먹었다.
 급식이 이렇게 맛있었나.
 뒤를 슬쩍 보니 권재웅와 이재민이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보고 있다.
 교실 문 밖에 처음 보는 형들이 어슬렁거린다. 하나같이 덩치가 좋고 인상이 무서운 사람들이다.
 눈 마주치지 말아야지.
 
 “마, 안 오잖아.”
 
 조덕배, 내가 아는 얼굴이다. 그놈이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교실 안으로 들어와 권재웅의 뒤통수를 탁 쳤다.
 권재웅은 어색하게 웃으며 책상 밑에서 내가 쓴 메모를 꺼내 보였다.
 
 “분명 이 메모를 남겨 두고 갔는데······.”
 “흠, 뭐 좀 늦게 올 수도 있겠지. 일단 닌 수업 받고 있어라. 우리들이 교문 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누구 오면 잡아 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진짜 감사합니다.”
 
 조덕배와 리틀 깍두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더니 교실 밖으로 나갔다.
 창문을 돌아보니 놈들은 교문 쪽에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아니 대체 얼마나 모인 거야? 삼십 명은 되겠다.
 재웅이 많이 무서웠구나······.
 저렇게나 모으다니.
 나는 조용히 민원 24시에 문자를 보냈다.
 
 -인천고등학교 앞에 사는 시민입니다. 교문 앞에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네요. 정말 세상 불편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권재웅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내가 지우개를 주우러 슬쩍슬쩍 뒤돌았을 때도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꼴이라니.
 
 6교시 쉬는 시간.
 이재민이 멀리서 경찰견 짖는 소리를 들은 탈옥수 같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권재웅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방수진 오빠 왜 안와······.”
 
 당연히 안 오지 인마. 걔 외동딸이야.
 
 7교시가 끝났을 때.
 권재웅은 형들에게 불려 나갔다.
 형님들··· 경찰 아저씨에게 한동안 시달리느라 아주 예민보스가 되어 있었을 텐데, 어쩌나.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나는 야자를 빼고 학교를 나와 우체국으로 갔다.
 
 “이거 당일특급으로 보내 주세요.”
 
 세 개의 우편봉투를 내밀었다.
 각각 방수진의 집, 아버지 직장 주소, 어머니 직장 주소였다.
 
 우편봉투 안에는 방수진이 권재웅과 만나서 관계를 한 날짜, 그때 나눈 대화, 불법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 등이 모두 들어 있고 권재웅의 생활기록부와 집주소 등등 역시 적혀 있다.
 
 “아버지가 경찰에 어머니가 산부인과 의사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양쪽 다 전문적으로 충격이 크시겠네.”
 
 나는 우편물을 접수하며 잠시 저 멀리에 있을 방수진 양에게 묵념을 했다. 미안하다. 그래도 부모님은 아셔야지.
 
 물론 증거는 없다. 모든 것은 내가 눈을 감고 본, 하지만 눈감아 줄 수 없는 것들.
 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부모님이 결정하시겠지.
 
 권재웅을 확실하게 보내 버리고 나서야 숨통이 좀 트인다. 이제 할머니가 힘들게 번 돈 안 갖다 바쳐도 되겠구나. 속이 다 후련하다.
 
 바로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인데?
 
 “여보세요?”
 “할미다. 오늘 집에 언제 들어 오냐?”
 
 할머니의 전화다. 핸드폰이 없는 할머니가 어떻게 전화를 하셨지? 나는 지금 들어간다고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어, 어진이냐? 아휴 어머니 줘 봐요. 핸드폰 다루지도 못하면서. 어 그래. 어진이냐?”
 
 걸걸한 남자 목소리. 표정이 절로 찌푸려진다. 큰아빠였다. 어쩐지··· 왠지 받기 싫은 번호이긴 했다.
 
 “너 지금 어디야?”
 “우체국이요.”
 “너 이노무 섀끼! 야자하고 있을 시간 아니야?”
 “잠깐 뺐어요. 우편 보내야 해서.”
 “어린 노무 섀끼가 학교 빼 먹고 그럼 돼 안 돼? 마! 이 큰아빠가 어릴 때는···!”
 
 눈을 감고 마음과 반대편 귀를 활짝 열었다.
 상선약수라 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막힌 것에서 뚫린 것으로 향한다.
 그때, 큰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내 가슴을 쿡 찔렀다.
 
 “아 어머니가 얘를 싸고 도니까 어진이 이 자식이 지금 이렇게 티미하게 큰 거 아뇨! 저기 우리 첫째를 보쇼! 이번에 한국대 딱 합격하고! 얼마나 사람 구실 잘 합니까!?”
 
 아마 사촌 형이 같이 와 있는 모양이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 이현근.
 수능 끝나고 한창 발표 날 때인데. 아마 한국대에 붙었나 보다. 하긴 예전부터 공부는 잘한다고 소문났으니.
 
 “이놈 섀끼 어디 새지 말고 냉큼 집으로 들어와!”
 
 큰아버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마 가면 또 사촌 형 자랑에 비교질, 왕년 시절의 영웅담과 훈계가 새벽까지 이어지겠지.
 벌써부터 가슴이 고구마 안 씹고 삼킨 듯 답답했지만 별 수 없다. 할머니가 있는 이상 집에는 꼭 들어가야 하니까.
 
 
 
 
 제2장 사촌형의 은밀한 커뮤니티
 
 
 
 
 
 “마! 너 여기 함 앉아 바라.”
 
 집에 들어오자마자 무거운 집안 분위기가 날 짓누른다. 큰아버지는 대뜸 호통을 치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너 이노무 섀끼! 아프신 할머니가 뼈 빠지게 번 돈으루 학교 댕기는 놈이 땡땡이나 치고 있어!?”
 
 당신이 할머니 돈 가져다가 돼지국밥마냥 말아먹은 사업이 벌써 4개째인 건 생각 안 하나?
 꼰대들은 기억에다가도 포토샵을 하는가 보다.
 잡티제거나, 잡티제거나, 잡티제거 같은 것.
 사촌 형은 저 뒤에 앉아 반쯤 누운 채 핸드폰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쿡쿡거리다가도 가끔은 분노한 얼굴로 열심히 자판을 누른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너 이 녀석아! 철 좀 들어라! 이 큰아버지가 너만 할 때는 전쟁 때라서 먹을 것도 없었고! 공비들 등쌀에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응!?”
 
 님 68년생이잖아요. 머리 훌러덩이라고 해서 다 전쟁 경험 세대는 아닐 텐데······.
 하지만 일단 대화를 끝내려면 비는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나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의 훈계는 계속되었다.
 
 “아, 어머니가 애를 품에 안고 오냐오냐만 하시니까 이놈이 이렇게 군기가 빠졌잖습니까!”
 “그만해라 애비야······.”
 “뭘 그만해요! 이놈 새끼 이거 해병대 보내야 됩니다 해병대!”
 
 군 면제인 큰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나온 해병대에 뭔가 열등감이라도 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큰아버지는 아버지 욕까지 하기 시작했다.
 
 “니 애비가 자식 농사 망친 걸 생각하면 저 먼 타지에서 잠이나 오겠냐? 응?”
 “······.”
 “하긴, 뭐 지 놈 새끼도 지 새끼 욕할 입장은 아니지. 신용불량자에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놈이. 킁!”
 
 아버지를 욕하는 말에 내 이마에도 핏줄이 섰다.
 내가 뭐라 항변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내 말을 막았다.
 
 “에구. 우리 현근이, 학교는 언제부터 다니누?”
 
 할머니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멀리서 핸드폰만 보던 사촌 형이 그제야 시선을 이리로 돌린다.
 이현근. 올해 스무 살.
 사촌 형은 어릴 때부터 우등생으로 손꼽혔다. 그럭저럭 잘생겼고 키도 큰데다가 공부까지 잘해 큰아버지는 언제나 사촌 형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았었다.
 
 “어진아 네 사촌 형 반만 닮아 봐라! 너랑 달리 특목고 진학해 가지고 계속 반장도 하고 응? 지금은 떡하니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합격했잖냐!”
 “어휴, 아빠는. 그만 해. 쟤 기죽어.”
 
 이현근은 손사래를 치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내 꽉 쥐여진 주먹을 보자 이현근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근데, 너 모의고사 성적은 좀 잘 나오니?”
 “응? 아, 그냥저냥······.”
 “몇 등급인데. 형이 상담해 줄게.”
 
 한 살 차이, 그것도 말이 사촌 형이지 빠른 년생이라 동갑이나 다름없다. 이현근 2월생, 난 3월생. 한 살 차이가 아니라 한 달 차이다.
 나는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그럭저럭 나와.”
 “그게 어느 정돈데. 그럭저럭이면 1등급 하위권? 아니면 2등급 상위?”
 “뭐 그냥······.”
 “아 답답해! 아빠!”
 
 이현근은 도움을 요청하듯 큰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똑바로 말해! 사내새끼가 자기 성적도 똑바로 말 못하냐!”
 
 나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연말에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지만 불안한 표정의 할머니를 보면 차마 대들 수가 없었다.
 
 “4등급···대요.”
 
 그러자 큰아버지와 사촌 형의 얼굴에 비웃음이 그려진다.
 이현근은 다시 발랑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미안, 그걸론 상담할 필요도 없겠다. 인서울은 절대 무리네, 일단.”
 
 빠직!
 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그러자 이현근이 덧붙인다.
 
 “그러게 나처럼 특목고 가지 왜 일반고 갔어. 그런덴 야자도 제대로 안 시켜 주잖아.”
 “···시켜 주거든? 내가 뺀 거야.”
 “그런데서 시키는 야자는 가축 가둬 두는 것밖에 더 돼? 진짜 학습이 안 되잖아. 똥통고는.”
 “······.”
 “아, 근데 너 이과야? 문과야?”
 “···문과.”
 “노답이네. 걍 살던 대로 살어.”
 
 이현근은 나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렸다.
 내가 또 폭발할 것 같았는지, 할머니가 또다시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우리 현근이··· 할미가 용돈 줘야지.”
 
 그러자 지켜보던 큰아빠가 조금 당황한 기색이다.
 
 “아휴 어머니! 뭘 애한테 용돈을 줘! 내가 다 줬어!”
 “아녀··· 이제 대학생인디 돈 들어갈 데 많잖여.”
 
 할머니는 밸트색을 뒤적이더니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볼펜으로 막 뭔가 쓰여 있는 낡은 지폐였다.
 
 “현근아. 어따.”
 
 할머니는 작고 왜소한 손을 뻗어 만 원짜리를 건넸다.
 저 돈을 벌기 위해 할머니는 아픈 몸으로 새벽같이 시장에 나가 수많은 바지락을 깠을 것이다.
 
 목도리가 없어 검정 비닐봉지를 목에 두른 채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눈길도 주지 않는 손님들에게 친한 척 말을 걸어 보면서.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 계셨을 것이다.
 
 사촌 형은 할머니의 그 손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큰아버지가 약간 당황했다.
 
 “이 녀석. 현근아! 어른이 주시는데 사양할 것 없어!”
 
 그러자 사촌 형은 주머니에서 자기 지갑을 꺼냈다.
 유명한 브랜드의 마크가 새겨져 있는 지갑이다. 나도 아는 브랜드다. 저게 아마 50만원인가 하지?
 
 “이 지갑에 그 지폐 넣으면 조개 비린내 배.”
 
 그 말에 큰아빠는 쩝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해는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내 이성은 뚝 하고 끊어졌다.
 할머니가 머쓱하게 돈을 거두는 것을 본 나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아빠가 깜짝 놀라 나를 본다.
 하지만 내겐 판타지 소설에서처럼 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의 돈이나 성적은 없다.
 그 점이 못 견디게 분했다.
 
 쾅!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저놈 저거 저거 어른 앞에서 싸가지없게······.”
 “할머니. 브라질리언 왁싱이라도 좀 해. 그럼 냄새 덜 나.”
 
 큰아버지와 사촌 형이 중얼거리는 소리만이 귀에 아득해진다.
 아, 암 걸릴 것 같다.
 
 * * *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아 걸고 옷을 훌떡훌떡 벗었다.
 너무 화나서 찬물로 머리라도 식힐 거냐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초능력을 얻기 전이라면 그게 베스트였을지도.
 
 나는 눈을 감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저 싸가지 없는 사촌 형을 엿 먹일 방법이 부디 그의 SNS에는 있길. 제발!
 이현근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자 검은 시야에 밝은 스크린이 떴다.
 
 대문짝만 한 사진. 옆에 뜬 이름도 분명 이현근이 맞다.
 
 [이현근]
 
 카카오톡 -359
 라인 -0
 문자 -1
 페이스북 -7
 트위터 -0
 인스타그램 -0
 메일 -0
 
 .
 .
 
 
 깔끔한 성격답게 메일 등도 잘 정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뭐가 이렇게 알림이 많아. 내 폰이랑은 완전 천지차이구만.
 
 [이현근 카카오톡. 2017년 0월 0일.]
 
 - 한국대학교 17학번 창조경제학과 신입생 단톡(17명): 안녕하세요 추합했습니다! 간절히 원해서 우주가 도와줬나봐요ㅠㅠ -오후 09:18 (안 읽음) +125
 
 - 우리동네 쎈놈들(8명): 야야, 올해가기전에 한번 봐야죠~~(안 읽음)+258
 
 - 서태희: 현근이 한번 봐야지~누나가 밥사줄게 초밥 콜?-오후 08:49 (안 읽음) +6
 
 - 진인혜: 오빠 영화보여주세요! -오후 07:38 (안 읽음) +4
 
 - 김상찬: 야 오늘 감주 헌팅ㄱㄱ? -오후 07:35 (안 읽음) +17
 
 - 강호찬: 형 오늘 놀러오세요 물 죽입니다!~ -오후 03:23 (안읽음) +3
 
 - 서혜화: 현근이~~잘지내?ㅋㅋㅋ 우리 언제보냐~! -오후 02:51 (안읽음) +5
 .
 .
 
 
 엄청난 인기다.
 뭐 이리 가식에 속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이놈 싸가지는 나로호 타고 탈출하다가 저기 버뮤다쯤에 불시착했다는 걸 이 사람들이 좀 알아야 할 텐데.
 
 카톡을 좀 뒤져봤지만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 카톡이 먼저 올 뿐 이현근이 답장한 적은 거의 없는 것이다. 17학번 단톡에서도 형식적인 자기소개 말고는 없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이번엔 페이스북이다.
 
 
 <이현근> 2016년 12월 0일
 
 “이번에 한국대학교 창조경제학과 수석 합격! 외국으로 나가보는 것도 좋지만ㅠ 집안 사정도 생각해야지...4년 장학금으로 국내에 만족하는 수밖에.” -이현근 님은 지금 완전 우울해요.
 
 좋아요 789개 / 댓글 81개
 
 
 <이현근> 2016년 10월 0일
 
 이현근 님이 <착취기업> 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노오오오력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
 
 좋아요 89개 / 댓글 0개
 .
 .
 .
 
 
 “음··· 진짜 뭐 없네.”
 
 문자 등을 아무리 뒤져도 역시 뭐 별다른 건 없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은 아예 하지도 않는 모양인지 숫자가 0이다.
 
 그 외 대부분의 항목들이 전부 0이거나 아주 적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사촌 형은 아무래도 SNS를 별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사촌 형은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SNS를 하지 않으면 뭘 한단 말인가? 게임?
 그렇다기엔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에 게임 초대 메시지나 관련 게시글을 남긴 흔적이 전혀 없다. 요즘 아기자기하고 라이트한 게임만 해도 주변 친구에게 하트나 클로버 등등을 보내지 않으면 못 하는 시대인데.
 
 그렇다고 셀카를 찍는다? 사진을 보며 논다? 그런 걸 보통 각 잡고 누워 몇 시간이고 하지는 않는다.
 
 “분명 뭔가를 하는 모양이었는데······.”
 
 끈기 있게 SNS 항목들을 살피던 나는 이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응? 이게 뭐지?”
 
 기나긴 SNS 항목의 끝부분에 뭔가 다른 게 또 있다.
 
 -오늘의 개그 -15
 -웃픈대학 -0
 -디씨아웃사이드 -23
 -트위타 -20
 -뽐뿌르 -2
 -디젤마니아 -3
 -도딱스 -15
 -일간비스트 –8,517
 -충고나라 -6
 -우리웹 -3
 .
 .
 
 
 하진 않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다. 옆에 숫자들도 좀 있는 걸로 봐서는 사촌 형이 글을 남긴 모양.
 
 “의외인데? 커뮤니티를 하는구나.”
 
 나는 신기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 아래로 이어지는 항목들을 보았다.
 그러던 와중, 스크롤을 내리던 내 손이 멎었다.
 
 “어? 이게 뭐야?”
 
 
 -일간비스트 –8,517
 
 
 내 눈을 의심했다. 뭐냐 저 엄청난 수는?
 
 나는 당장 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현근, 내 사촌 형이 커뮤니티에 남긴 글들이 쫙 뜨기 시작했다.
 
 * * *
 
 일간비스트는 현재 인터넷 커뮤니티들 사이에서 반인륜적 행위로 악명 높은 곳이다.
 게시글의 끝을 어지간하면 ‘누’로 통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곳에 접속 기록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게시글 수가 팔천 오백 개라고? 거의 커뮤니티에 상주하면서 글 싸는 수준인데?
 나는 재빨리 사촌 형이 남겼던 글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느금마 머하시누>의 게시글 목록입니다
 
 -우리 매미 병걸려서 혼자선 움직이지도 못함 엌ㅋㅋ
 
 -우리 할배 옛날에 사고나서 식물인간 됐다. 비료랑 물 줘서 키우면 되냐?ㅋㅋㅋ
 
 -이번에 신입생모임 가서 젤 이쁜년 있음 몰래 사진찍어온다ㅋㅋ기대하지마라 어차피 김치녀~~
 .
 .
 
 
 이 외에도 비슷한 글들이 너무나 많아서 검색도 힘들다. 전부 범죄, 반인륜적, 음란성 게시글 및 댓글뿐이다.
 
 “와··· 진짜 미쳤네.”
 
 저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저 멀쩡한 얼굴 뒤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어떻게나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지?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그때,
 
 내 눈에 새로 올라오는 글들이 보였다.
 사촌 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커뮤니티질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ㅋㅋㅋ간만에 할머니집 왔는데 애비새끼 방구석여포질 ㅁㅌㅊ?ㅋㅋㅋ
 
 
 그와 동시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전부 큰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이었다. 눈은 스티커로 가려져 있었지만 옷이나 앉아 있는 장소, 체형 등은 확실했다. 방금 찍은 것들이다.
 
 
 -울 묵은지 할매미 손에서 비린내 ^오^ 대학 붙으면 이런 ㅈ같은 생활도 빠이빠이야누. 애비새끼도 빨리 뒤1져서 보험금이나 뱉어냈으면..아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가족이란 새끼들이ㅋㅋㅋㅋ
 
 
 나는 조용히 옷을 입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밖을 보니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또 내 얘기다.
 할머니가 교육을 잘못 시켜서 내가 이렇게 됐다느니, 우리 아버지가 자식농사를 대실패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옆을 지나가 핸드폰을 하고 있는 사촌 형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형 머하누?”
 
 그러자 사촌 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뭐야? 핸드폰 보잖아.”
 
 나는 다시 말했다.
 
 “재밌누? 뭐 보누?”
 
 그러자 사촌 형은 잠시 당황하는 듯싶었다. 그러더니 하! 소리를 내며 코웃음을 쳤다.
 
 “너 ‘일비’하냐?”
 “들켰누?”
 “그딴 거 하지 마라. 그런 거 쓰레기들이나 하는 사이트야.”
 
 사촌 형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전과 달리 여유로운 미소는 간 곳이 없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형는 핸드폰 화면도 꺼 버렸다.
 
 “아, 이제 슬슬 집 가야겠다.”
 
 가긴 어딜 가.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어딜 도망가려고 ‘느금마 머하시누’씨.”
 
 나는 내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사촌 형의 몸이 딱 멎었다.
 이현근. 사촌 형. 라고 하지만 나보다 생일이 겨우 한 달 빠른 친척.
 그는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
 “남의 집 사진 인터넷에 다 올려 놓고 어딜 가누?”
 
 나는 내 핸드폰으로 일간비스트에 접속한 뒤 작성자 ‘느금마 머하시누’를 검색해 보여 주었다.
 그러자 사촌 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야? 그거 나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자기 아빠 사진이랑 할머니 사진도 올려 놨으면서.”
 
 나는 핸드폰 스크롤을 팍팍 내리며 지난 게시글들을 쭉 돌아보았다. 페이지가 수십 개가 넘는다.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드니 사촌 형 이현근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이쿠, 눈 주위가 왜 저렇게 붉어. 피눈물이 이런 원리로 나오는 거였나?
 
 “너···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게 중요하누?”
 
 내가 빈정거리며 묻자 사촌 형은 빽 소리를 질렀다.
 
 “원하는 게 뭐야!”
 “사과해.”
 “···뭘?”
 “할머니한테 냄새난다고, 브라질리언 왁싱 하라고 지껄인 것들 다.”
 
 그러자 사촌 형은 코웃음을 쳤다. 눈에 주먹만 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제에 허세는.
 
 “싫으면 큰아빠 보여 주고.”
 “하! 보여 줘 봐! 새끼가, 너는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무사하지 못할 건 또 뭐람?
 나는 가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촌 형은 내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 몰랐던지 잡을 생각도 못한 채 앉은 자리에서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나는 다이렉트로 큰아버지에게 갔다.
 
 “자식농사 실패하신 것 축하드려요.”
 “뭐?”
 
 큰아버지 뭔 헛소리냐는 듯 나를 돌아본다.
 나는 큰아버지가 폰을 집어던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은 채 사촌 형의 게시물과 댓글들을 보여 주었다.
 
 “여기 보시면 ‘느금마 머하시누’라는 아이디 보이시죠? 이게 이현근 형인데요. 지금껏 어떤 글을 올렸고 방금은 또 어떤 글을 올렸느냐 하면······.”
 
 나는 빠르고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팍팍팍 팩트를 나열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큰아버지 핸드폰으로도 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밀었다.
 
 “큰아버지 사진들 엄청 많네요. 큰어머니 사진도 있어요. 옷 갈아입고 계신 것도 그냥 막 찍어 올리네요. 할아버지 사진도 있어요. 침대에 누워계시는데···식물인간은 비료를 먹어야 한다면서 할아버지 몸에 흙을 뿌리네요.”
 “······.”
 길거리나 학교에서 찍은 여자들 몰카도 있네요.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이거 다 고소 가능한 거 아시죠? 댓글들은 또 어떻구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모르는 용어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큰아버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 듯하다.
 
 “아, 아빠! 쟤 말 믿지 마! 내가 설명할게!”
 
 엄청나게 당황한 사촌 형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하지만, 평소에 사촌 형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던 큰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간 곳 없었다.
 
 “현근이 잠깐 거기 있어 봐라.”
 “아! 아빠! 아니라니···”
 “거기 있으라고!!”
 
 갑자기 버럭 소리치는 큰아버지의 말에 집 안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권재웅을 처리할 때도 그랬지만 시간과 침묵은 나의 편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벽에 기대고 있었다.
 
 사촌 형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고개를 떨구고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다.
 그때.
 한참 동안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던 큰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짝!
 
 사촌 형의 뺨을 풀스윙으로 후려갈겼다.
 
 “헉!”
 
 내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가 알기론 사촌 형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대도 맞은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이런 미친 새끼가!? 내가 너 이러라고! 이러라고!”
 
 큰아버지는 사촌 형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그 두툼한 손바닥으로 머리통이고 뺨이고를 닥치는 대로 강타하기 시작했다.
 
 뻑! 뻑! 짜악!
 
 사촌 형의 핸드폰은 큰아버지의 발길질에 진작 부서졌다.
 
 “아이고, 아범아! 그러지 마라!”
 
 할머니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야 겨우 큰아버지의 폭력은 끝이 났다.
 큰아버지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을 씨근거리다가 이내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큰아버지가 들고 온 것은 부엌가위였다.
 
 턱!
 
 큰아버지는 그 가위로 사촌 형의 명품 지갑을 잘라 버리기 시작했다.
 
 안에 든 지폐도, 카드도 모두 뿌득뿌득 소리와 함께 절단났다. 아마 부자지간의 인연도 절단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너 앞으로 나가서 살아.”
 “···아빠!”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호적에서 팔 테니 알아서 해라.”
 
 그 말을 하는 큰아버지는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표정. 그 탁하게 죽은 눈동자.
 큰아버지는 이내 홱 돌아서서 집을 나가 버렸다.
 
 사촌 형은 멍하니 그런 큰아버지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눈앞엔 조각난 돈과 카드, 지갑의 파편들만이 쓸쓸히 남았다.
 부르릉!
 밖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차 발진하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사촌 형은 멍한 표정으로 바닥의 지갑과 문을 번갈아 바라본다.
 
 나는 그 옆으로 가서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호적에서 브라질리언 왁싱당한 기분이 어떻누?”
 
 그러자 사촌 형은 벌떡 일어나서 나를 죽일 듯 쏘아본다. 이미 눈물은 줄줄 흐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대학 입학금 아직 안 냈지?”
 “······.”
 “알바라도 해. 그 잘난 한국대 들어가셔야지. 거기 입학금이 얼마더라? 400이었나 500이었나?”
 “개새끼야! 이 엠X인생 새끼!”
 
 사촌 형은 바락바락 소리 질렀지만 나는 귓등으로 그 소리들을 멋지게 흘려 버렸다. 깨끗하고 좋은 말만 듣자 내 귀야.
 사촌 형은 이내 온 힘을 다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러모로 즐거운 명절이다.
 내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띠링!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알림음이 울렸다. 오로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지?
 
 
 
 
 제3장 그녀의 랜덤채팅
 
 
 
 
 
 6화 그녀의 랜덤채팅 (1)
 
 
 
 
 
 “이게 레벨 업이 가능한 거였어?”
 
 나는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눈을 감으니, 역시나 어두운 공간에 환한 창이 뜬다.
 
 
 <SNS 탐지 스킬이 레벨 2로 올랐습니다. 다음 능력이 개방됩니다!>
 
 <대화 엿보기 가능☞검색어 입력 가능☞?☞?☞?>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검은 화면의 하단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의 대화를 엿볼 때마다 녹색 게이지가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구나. 능력을 쓰면 쓸수록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오르는 거구나.”
 
 이제 나는 2레벨이 되었다.
 보아하니 3, 4, 5,도 있는 모양이다.
 만렙이 5인건가? 그 뒤에 더 있나?
 
 레벨 업에는 응당 보수가 주어지기 마련. 나는 능력이 어떻게 변했나 한번 살펴보았다.
 
 “음··· 딱히 뭐 없는데?”
 
 몇 분간 화면을 뒤졌지만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검색어 입력? 대체 뭐 하는 기능일까?
 
 혹시나 해서 방문 밖을 보니 여전히 우리 할머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도 없는 할머니가 SNS를 할 리가 없으니까.
 SNS를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기능 같은 건 없는 거구나··· 레벨 업을 했다고 해서 잠시 욕심이 과했다.
 
 그때.
 
 “어? 이건······.”
 
 나는 딱 하나, 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화면 우측상단에 돋보기 표시가 생겨났다. 전에 없었던 것이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아아!”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사촌 형의 커뮤니티 게시글을 뒤지다가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뻘글이 너무 많아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낼 수가 없었으니까.
 레벨 업도 할 겸 시험 삼아 검색어 기능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근데 누구를 찾아보지?”
 
 보아하니 한번 검색했던 상대는 아무리 뒤져도 경험치가 오르지 않는 것 같다. 새로운 상대를 물색해야 했다.
 
 그때.
 
 “아!”
 
 권재웅과 사촌 형을 처리하느라 잊고 있었다.
 
 내가 짝사랑하던 아이 장효진!
 나는 재빨리 장효진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렸다.
 
 
 -띠링!
 
 
 전에 없던 알림음이 추가되었다.
 
 동시에 눈앞에 커다란 사진과 이름 세 글자가 떴다.
 
 [장효진]
 
 화장기 없는 얼굴. 무표정.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예쁘다.
 
 여우처럼 긴 눈초리에 오똑한 코, 앙증맞은 입술에 뽀얀 피부. 단정한 헤어스타일까지.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귀엽다.
 
 조용한 성격에 항상 자기 자리에서 책을 읽는다. 대인관계는 좋은 편인지 마찬가지로 조용한 아이들이 쉬는 시간이면 종종 장효진의 자리를 찾아와 재잘거리곤 한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햇살이 한 줄기 들어와 얼굴을 비추는데 잔잔히 떠다니는 먼지와 그녀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따스해진다.
 
 “음··· 어떤 대화를 찾아야 하지?”
 
 어딘가 죄책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레벨 업을 하려면 계속 봐야지 뭐.
 근데 왜 잿밥에 더 관심이 끌리는 걸까?
 
 “걔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새벽 3시.
 나는 장효진의 SNS 목록에 들어갔다.
 
 
 [장효진]
 
 카카오톡 -79
 라인 -0
 문자 -0
 페이스북 -86
 트위터 -0
 인스타그램 -0
 메일 -9999+
 .
 .
 
 
 좀 뒤적거리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장효진은 카톡과 페이스북만 하고 나머지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페이스북이야 내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으니 나는 우선 카톡을 엿보기로 했다.
 
 
 - 2017년 ㅇ월 ㅇ일, 장효진 카카오톡
 
 
 문학동아리‘글터’(12명): 이번 모임도 기대되네요ㅎㅎ -오전 02:18 (안 읽음) +45
 
 조인지: 효찌니 낼 새로생긴 분식집가쟈ㅎㅎ -오전 01:49 (읽음)
 
 김인희: 기집애 개웃겨ㅋㅋㅋㅋ -오전 01:38 (안 읽음) +1
 
 정은지: 효찌니 보구시포ㅠㅠㅠ -오전 01:35 (안 읽음) +1
 
 강희윤: 얔ㅋㅋㅋ역앞에 쩌는 분식집 생김ㅋㅋㅋ 날잡아 -오전 01:23 (읽음)
 
 얘쁜이팸(6명):효찌니잔다ㅎㅎㅎ-오전 01:23 (안읽음) +12
 
 김상훈: 굿 끼니는 제때 먹어야지 -오전 01:11(읽음)
 
 박희태: 제가 왜요;; -오전 01:00 (읽음)
 
 오태석: 보도뛰어요 -오후 04:10 (읽음)
 .
 .
 
 
 별다른 새 글이 없는 걸 보니 지금은 자는 모양이다.
 
 위에 있는 단톡방은 문학 동아리인가? 그러고 보니 무슨 문학 동아리 같은 교외 활동을 하는 것 같긴 했다. 옆자리라서 가끔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밑으로는··· 음··· 그저 그런 친한 여자들의 대화로군.
 응? 근데 저 밑에 있는 카톡방들은 뭐지?
 전부 남자들이 보낸 카톡이다.
 
 뭔가 갑자기 바짝 긴장감이 든다.
 
 하긴 장효진 정도로 예쁜 애를 남자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나 모르는 곳에서 엄청 대쉬 받고 있었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실제로 보니 조금 충격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래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장효진에게 온 남자들의 카톡을 모두 확인하고 말았다.
 
 
 -김상훈
 
 
 김상훈: 혹시 점심 먹었니? -오전 09:12
 
 장효진: 네 ㅋㅋ –오전 10:01
 
 김상훈: 아;;되게 일찍먹네 –오전 10:01
 
 김상훈: 혹시 저녁 먹었니? -오후 04:58
 
 장효진: 네 ㅋㅋ –오후 11:52
 
 (익일)
 
 김상훈: 굿 끼니는 제때 먹어야지 -오전 01:00
 
 
 -박희태
 
 
 박희태: 야, 나랑 영화볼래? -오후 09:00
 
 박희태: 불금인데 영화나 보러가자. 내가삼 –오후 09:22
 
 박희태: 예매했다ㅋㅋ팝콘 머조아해?ㅋ –오후 09:37
 
 장효진: 읭??오빠 카톡잘못날리셨어요ㅋㅋㅋ –오후 10:02
 
 박희태: 너한테보낸거맞아ㅋ –오후 10:07
 
 장효진: 아ㅋㅋ전 또 잘못 보내신 줄 알고ㅋㅋ –오후 10:42
 
 박희태: 영화 재밌는거 많이 개봉했다더라, 마스터 봤어? –오후 10:43
 
 장효진: 네 -오후 10:47
 
 박희태: 아그래? 그럼 스타워즈 8은? -오후 10:47
 
 장효진: 봤어요 -오후 10:53
 
 박희태: ..아직 개봉 안 했는데..;; -오후 10:53
 
 박희태: 그럼 영화머조아해? -오후 10:53
 
 장효진: 아 저 사실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 –오후 10:56
 
 박희태: 그래? ㅠㅠ그럼 딴거 뭐할까? -오후 10:56
 
 장효진: 제가 그날 너무 바빠서 ㅠㅠ죄송해요 오빠 ㅠ퓨 –오후 10:58
 
 박희태: ㅠㅠ그럼 시간 좀 내봐 –오후 10:58
 
 (익일)
 
 장효진: 제가왜요ㅠㅠ -오전 01:00
 
 
 -오태석
 
 
 오태석: 안녕하세여ㅎㅎ -오후 04:03
 
 장효진: 누구세요? -오후 04:07
 
 오태석: 아ㅎㅎ인천고 다니시져? 너무 예쁘셔서ㅎㅎ번호받았어여 -오후 04:07
 
 장효진: ??? 번호 드린 적 없는데요 -오후 04:07
 
 오태석: 아ㅎㅎ 아까 버정에서~ㅎㅎ 핸드폰 잠깐 빌릴수있냐고ㅎㅎ사실 제폰에 건거였어용~~ㅎㅎ -오후 04:07
 
 장효진: ;; -오후 04:08
 
 오태석: 초면에 좀 그런데ㅎ너무 예쁘세여ㅎ진짜 제이상형ㅋ -오후 04:08
 
 오태석: 혹시지금 머하세여?? -오후 04:32
 
 장효진: 보도뛰어요 -오후 04:35
 
 
 나는 카톡방을 닫았다.
 
 “처···철벽녀네.”
 
 철벽도 저 정도면 거의 아크원자로 달린 아이언 우먼 급이다. 세 남자가 불쌍해질 정도. 얼굴을 확인하니 나름 괜찮게 생긴 녀석들도 있었는데······.
 어쩐지 나도 기운이 빠졌다.
 
 “어디 페이스북엔 뭘 올렸나 볼까?”
 
 장효진의 페이스북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 내 핸드폰으로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아··· ‘나만 보기’ 설정을 뚫을 수 있구나!”
 
 나는 장효진이 자기만 보기 위해 공유한 비밀 게시물들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들은······.
 
 
 <생리통 꿀팁!>
 <S라인 만들기>
 <3주만에 가슴 커지는법!>
 <대한민국 여고생 평균 가슴 사이즈>
 <가슴 크면 불편한 점 8가지>
 <이것만 알면 나도 글래머!>
 <가슴 키우는 방법!>
 .
 .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서 페이스북을 닫았다.
 
 “효진이··· 가슴에 콤플렉스 있구나.”
 
 얼굴이 화다닥 달아오른다.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뭐, 엄청나게 나쁜 짓 맞기 때문이겠지?
 
 경험치 칸을 보니 제법 올라 있었다.
 장효진에 대해 검색한 것만으로 꽤나 올랐다.
 하지만 아직 꽉 채우려면 갈 길이 멀었다.
 
 “흠··· 그럼 얘는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나는 우측 상단의 돋보기 버튼을 눌렀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그 많은 카톡들을 죄다 뒤져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상형 #남자친구 #소개팅 #스타일>
 
 나는 여러 가지 태그들을 전부 입력한 뒤 검색을 눌렀다.
 
 -띠링!
 
 수 초 만에 결과가 나왔다.
 
 
 -<검색 결과 5개(오타포함)>
 
 
 -2016년 0월 0일
 
 이미진: 효찌니 소개팅 해볼랭?
 
 장효진: 누군데?
 
 이미진: 니 스타일 말해보셈ㅋ
 
 장효진: 음...잘 웃고...책 많이 읽는 남자?
 
 이미진: 책 읽는 애는 없음ㅠ
 
 
 -2017년 0월 0일
 
 권희연: 딸램은 남자친구 없어? 어떤 남자가 좋아?
 
 장효진: 별로 생각 없는데? 그냥 나랑 취미 비슷하고...
 
 권희연: 독서 말하는거야? 암튼 우리 딸램은 책벌레라니까~
 
 장효진: ㅎㅎㅎ~
 
 
 -2017년 0월 0일-
 
 차은희: 효찌니 레고작가 신작 떴다. ‘낯선 배우’
 
 장효진: 레고밟았어 작가님? 그거 이미 봤징ㅎㅎ딱 내 스타일~그걸로 일본 진출하신다며ㅎㅎ
 
 
 -2017년 0월 0일-
 
 -문학동아리 ‘글터’(12명)
 
 최민식: 아 레고밟았어 작가님 진짜 글 잘 쓰지 않냐?
 
 장효진: 그런 분이 내 이상형이야. 최소한 레고밟았어 작가님 소설 같이 읽으면서 토론할 수 있는 남자친구라도 있으면 좋겠다 ㅜㅠ
 
 최민식: 난 어때?ㅋ나도 꼬박꼬박 봄. 이번에 ‘너의 SNS가 보여’ 재밌던데?
 
 장효진: 그래? 그럼 거기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뭔데?
 
 최민식: 야;;너무 어렵다;;
 
 장효진: ㅋㅋ너~그럴줄알았다 으이구!
 
 최민식: 여자 중에 레고밟았어 작가 좋아하는 사람 드문데;;닌 진짜 별종
 
 
 “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얼추 장효진의 이상형을 알 것도 같다. 자기가 덕질하는 작가 작품을 같이 읽고, 그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거구나. 참 뜨거운 피를 가진 문학소녀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책하고는 별로 안 친하다는 것.
 그보다 레고밟았어? 이 새끼는 대체 누구야? 작가인가? 근데 필명은 왜 이 모양이람.
 
 스멜에서부터 별로 잘 나가지 않는 비주류 작가인 티가 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장효진에게 접근하려면 이 작가에 대해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내일 장효진에게 말을 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완벽한 계획을.
 
 * * *
 
 밤새 그녀의 SNS를 뒤진 결과. 내가 알아낸 사실은 상당히 많았다.
 
 1. 아버지, 어머니, 언니로 구성된 4인 가족이라는 것.
 2. 소설 쓰는 것과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
 3. 자취에 대한 로망이 있으며 빨리 독립하길 원한다는 것.
 4. 가슴에 콤플렉스가 있으며 레고밟았어 라는 이상한 필명의 작가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것 정도······.
 
 그 외에도 그녀의 친한 친구가 누가 있으며 누구와 언제 싸웠고, 누구랑은 어색한 사이이고, 누구에게 고백을 받았고 하는 것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여자들끼리는 생각보다 야한 말도 많이 나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 외에 더 은밀한 사생활도 얼마든지 엿볼 수 있었지만 난 거기까지만 딱 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뭔가 점점 변태가 되어가는 듯해서 무섭기도 했고,
 
 * * *
 
 아침 등굣길.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 난 자리에 딱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정문에서 권재웅과 마주친 것이다.
 얼굴이 엄청나게 상해 있었다.
 눈두덩이엔 시퍼런 멍이 들었다. 다리엔 웬 깁스?
 
 “······.”
 
 권재웅은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연다.
 
 “요즘 살 만하냐?”
 
 괴롭힘이 없으니 살만하냐고 묻는 것이겠지? 언제나 기세등등했던 것치곤 힘없는 목소리.
 그러면 지가 뭐 동정이라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권재웅은 마치 반성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학교로 절뚝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이재민을 마주쳤지만, 서로 인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게 아마 싸운 모양이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다 벗고 권재웅과 이재민의 카톡 대화를 엿보았다.
 
 
 이재민: 이제 연락하지 마라 –오전 01:12
 
 권재웅: 그래 –오후: 1:00
 
 
 아무리 뒤져 봐도 그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이게 마지막이었다. 둘 사이에 뭔 헤프닝이 있었는지는 결국 알 수 없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동정은 쌀알만큼도 들지 않는다.
 지 죗값을 치른 것일 뿐이다.
 그마저도 훨씬 덜 치렀을 가능성이 크지. 저런 놈들이 커서 사회 나가면 얼마나 더 망할 놈이 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지금 꺾여서 다행이다. 아 물론 다리.
 그건 그렇다 쳐도.
 권재웅과 이재민이 전화 통화로 얘기했거나 오프라인에서 말한 것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이 초능력이 만능은 아니구나 싶어 약간 풀이 죽었다.
 혹시 레벨이 오른다면 나눴던 전화도 도청할 수 있게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와서 앉았다.
 
 곧 장효진이 등교할 시간이다.
 그녀는 마트 캐셔로 일하시는 엄마가 출근하는 시간대에 맞춰 집을 나선다.
 지금은 7시 반. 아마 곧 올 것이다.
 
 드륵-
 
 교실 문이 열리고 장효진이 들어온다.
 미쳤다. 진짜 예쁘다.
 저 눈웃음. 앙증맞은 콧날.
 내 초능력으로 봤던 쌩얼과 비교해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저절로 흔들어지는 손을 보고 화들짝 놀라 열중쉬엇 자세를 취했다.
 
 큰일 날 뻔했다.
 오프라인에서의 그녀는 나와 전혀 친하지 않다.
 일주일에 한 마디 하면 많이 하는 것일까?
 
 “이상해··· 뭔가 엄청 친해진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간혹 예능 프로그램 골수팬들 중에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의 절친인 듯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장효진의 사생활을 하도 훔쳐보다 보니 친해졌다고 나 혼자 착각해 버렸다.
 
 “조심해야지······.”
 
 나는 속으로 다짐 또 다짐했다. 나대지 말기로.
 그녀가 자리에 앉았을 때쯤 해서, 나는 책상 귀퉁이에 있던 책들을 우르르 바닥에 쏟아 버렸다.
 
 “어! 이런! 내 책들이 떨어졌네!”
 
 난 죽어도 배우는 못할 것 같다.
 얼굴 때문이 아니라 연기력 때문에. 연기력. 얼굴이 아니라.
 
 국어책 읽듯 소리쳤더니 장효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와 진짜 예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냐.
 장효진은 떨어진 내 책을 주워 주었다.
 그때.
 난 보았다. 그녀의 손이 잠깐 허공에 멈칫하는 것을.
 요시! 들어갔다!
 
 “···너 이 책 읽어?”
 
 장효진은 날 향해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A4용지를 제본해서 책처럼 만든 것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레고밟았어-
 
 책의 이름이다.
 
 “응? 아아. 너도 그 책 알아?”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거든. 어서 줘.”
 “······.”
 
 내 말에 장효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분명하다. 내가 봤어.
 
 “너도 이 작가 소설 좋아해?”
 
 장효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날 보셨어!
 내게 말을 걸어 주셨어!
 발할라!
 도비는 이제 자유예요!
 
 나는 온 힘을 다해 침착했다. 그리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말했다.
 
 “응.”
 
 이런 병신새끼! 응이 뭐냐 응이! 뒤에 뭔 말이라도 덧붙여! 제발! 한 글자라도! 아! 라고 감탄이라도 해!
 응아! 아, 그럼 안 되겠구나.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장효진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이 좋아?”
 
 모의고사 4점짜리 문제보다도 중요하다. 대답을 잘 해야 했다.
 나는 침 한 덩이를 반씩 나눠 삼키며 속사포처럼 대답했다.
 
 “아무래도 독특한 주연들과 양판소 판타지와는 다른 독창적인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매혹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들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작가의 탄탄한 필력과 매력적인 스토리. 그리고 개성 있는 조연들과 정상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주인공의 의외성. 그리고 깨알 같은 정치 풍자와 작가의 개그센스들이 좋달까? 톨킨이나 롤랑 등의 외국 판타지 배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문체가 거칠고, 등장인물들의 원근, 과장된 웃음과 강력함이 희극적이기도 하지. 거친 문장에선 피카레스크의 길들일 수 없는 악의가 느껴지고 우스꽝스런 웃음은 광기를 느끼게 하는 데다가 원근을 무시한 힘의 표현은 환상적이야. 요컨대 남자다운 시원함이 있는 글이랄까?”
 
 쇼 미 더 어머니나 나가 볼까?
 나의 대답에 장효진의 눈은 퉁방울마냥 커졌다.
 
 놀랄 만도 하다.
 전부 그녀의 감상평에서 Ctrl C + Ctrl V한 거니까.
 심지어 어디 인터넷에 올린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 언니랑 대화한 내용이니 더욱 놀랐을 것이다.
 
 “그··· 그럼 그 작가의 다음 작품도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말고. <히어로 킬러>말이지? 그것도 제본해놓고 다녀. 여기 봐.”
 
 그러고는 다른 책을 보여 주었다.
 장효진은 너무 놀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건 어디가 좋아?”
 “잔인한 장면들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해서 무서웠지만 작품의 세계관과 스토리의 구성이 탄탄한 것에다가 작가님의 필력이 더해지니 몰입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판타지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작품 안에서 신랄하게 사회비판을 하는 판타지는 더 좋아하는 편이야. 앞으로도 다시 못 볼 유쾌하면서도 특이하고 가슴 어딘가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어. 어느 화를 딱 집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 재미있었고 읽으며 눈물도 살짝 맺히는 소설이었지. 아, 정말 그동안 이런 판타지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이 소설이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하다니까 정말.”
 
 애국가를 2초 만에 부른다는 래퍼도 지금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뜻밖의 재능 발견?
 거의 기계다 기계.
 
 아무튼 장효진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까지 커졌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하지만 장효진이 한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러니?”
 
 엥? 이게 끝?
 잠깐. 이게 끝이라고? 반응이 그게 다야?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그게 다였다. 장효진은 다시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고 수업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옆자리, 앞자리 친구들과 호호깔깔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 이게 아닌데?’
 
 어떻게 된 걸까.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다 벗고 그녀의 SNS를 뒤졌지만 새 글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뭐야, 뭔가 반응을 보여, 왜 아무 말이 없지?’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장효진은 SNS에 뭔가를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날 매 수업시간이 끝날 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아무런 소득도 건질 수 없었다.
 
 * * *
 
 친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네준 장염약을 받아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
 화가 울컥 치민다.
 
 “에이! 뭔 고생이야 이게! 괜히 재미도 없는 삼류작가 소설 보느라 눈 빠지는 줄 알았네!”
 
 나는 제본 뜬 소설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밤새 그것들 읽느라 고생한 거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얼마나 인기 없는 작가였는지 변변찮은 종이책 하나 못 내서 일일이 텍본 찾아 제본 뜨느라 고생만 했다. 게다가 노잼 개그에 쓸데없는 풍자는 왜 그리 많은지.
 
 작가 얼굴이 궁금해서 SNS를 뒤져 보려 했지만 텍본은 누구의 손을 한번 탄 것이라 그런지 작가를 추적할 수는 없었다.
 
 “직접 쓴 SNS 글만 엿볼 수 있는 거구나.”
 
 좋은 정보를 하나 또 얻었다.
 누군가의 손을 탄 텍스트로는 원래 주인을 찾을 수 없다. 레고밟았어 작가가 직접 쓴 한글 파일 원고를 보지 않는 한 그를 찾을 수 없겠지.
 그 작가는 딱히 SNS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신상을 터는 것도 무리다.
 
 자기 소설에 자기가 단 댓글 등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유료 결제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돈을 주고 소설을 구독하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었다.
 
 “어휴. 뭔 소설 한 화에 백 원씩이나 하냐. 순 도둑놈들.”
 
 고작 한 화에 꼴랑 오천 자 때려 박고 백 원이라니.
 날강도들이 따로 없다. 참 세상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작자들 많다.
 
 “뭐 레고밟았어란 놈도 보나마나 음침하게 못생긴 돈 독 오른 놈이겠지 뭐.”
 
 온라인 너머, 아무리 애꿎은 사람에게 욕을 퍼부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난 추적을 관두고 씁쓸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어진아 밥 먹어라.”
 “생각 없어요······.”
 
 할머니에게 손사래를 친 뒤 방에 들어가 이불 위에 누우니 힘이 쪽 빠진다.
 
 “아···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잠들기 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효진의 SNS를 다시 엿보았다.
 바로 그때!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뛴다. 흥분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다.
 
 장효진의 카톡이 빠르게 울리고 있었다.
 
 
 장효진: 너 우리 반에 이어진이랑 친해? -오후 11:12
 
 
 같은 반 친구인 이혜미에게 보내는 카톡이었다.
 나는 이불을 두 발로 걷어차며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올 게 왔구나!
 
 -2017년 0월 0일. 장효진의 카카오톡
 
 
 -장효진: 너 우리 반에 이어진이랑 친해? -오후 11:12
 
 -이혜미: ? 이어진? -오후 11:12
 
 -장효진: 응 -오후 11:12
 
 -이혜미: 걔 그냥 존재감 없는 애 아님? ㅋ -오후 11:12
 
 -장효진: 안친해? -오후 11:12
 
 -이혜미: 우리 반 여자애 중에 걔랑 친한 애 없을걸ㅋㅋ –오후 11:13
 
 -장효진: 아...걔 그럼 주로 누구랑 놀아??? –오후 11:13
 
 -이혜미: 글쎄...? 관심이 없어서. 왜? –오후 11:13
 
 -장효진: 아니...내가 좋아하는 작가 팬이길래. 궁금해서. –오후 11:14
 
 -이혜미: 오? 뭐야? 관심있음? 그 ‘퍼즐맞췄어’인가 하는 작가 말하는 거지? –오후 11:14
 
 -장효진: ‘레고밟았어’거든요?ㅋㅋㅋ –오후 11:14
 
 -이혜미: ㅋㅋㅋ엌ㅋㅋㅋ필명 핵구림ㅋㅋㅋㅋㅋ –오후 11:14
 
 -장효진: 암튼. 그 작가 좋아하는 사람 오프에서 만난 건 처음이야 –오후 11:14
 
 -이혜미: ㅋㅋㅋㅋㅋㅋㅋ꼬셔봐 –오후 11:14
 
 -장효진: ㅋㅋㅋㅋㅋㅋ뭔솔 –오후 11:15
 
 
 이후 둘의 대화는 전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했다.
 
 장효진은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이혜미 외에도 이곳저곳 열심히 물었지만 딱히 원하는 건 얻지 못한 듯싶었다.
 
 당연한 말이다. 장효진과 친한 친구들 중엔 나와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친구 좀 만들 걸 그랬네······.”
 
 이럴 때 나에 대해 좋은 말 좀 팍팍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삼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자괴감이 든다.
 장효진은 이내 다른 방에도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문학동아리 ‘글터’(12명)
 
 
 -장효진: 저 오늘 완전 대박인 일 겪었어요! –오후 11:17
 
 -박민지: 효땡이! 무슨 일인데? –오후 11:17
 
 -송승우: ㅋㅋㅋ훈남이라도 찾았냐? –오후 11:17
 
 -김지윤: 효땡이 연애 좀 해~ –오후 11:17
 
 -장효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같은 반 애 중에 레고밟았어 작가님 팬을 찾았어요!! –오후 11:18
 
 -박수한: 오 그 작가 팬 진짜 드문데? –오후 11:18
 
 -장효진: 저랑 생각이 완전 똑같았어요! 진짜 데에에박! –오후 11:18
 
 -김영준: ㅋㅋㅋㅋ너 꼬실라고 공부하고 온 거 아냐? –오후 11:18
 
 -홍진표: ㅋㅋㅋㅋㅋㅋ오 그거 충분히 가능성 있다 –오후 11:18
 
 -장효진: 아니거든요!!! 진짜 세밀하게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까지 다 알고있더라구요. 제본도 떠서 다니던데요? 역시 우리 작가님은 대중적이셔! –오후 11:19
 
 -송승우: 아냐, 단언컨대 안 대중적이야 그 작가... –오후 11:19
 
 -박수한: 텍본 그거 불법 아냐? 작가한테 찔러~ –오후 11:19
 
 -김영준: 완전 골수팬인가본데? 신기하다. 친해지면 되겠네. –오후 11:19
 
 -김지윤: 오? 효땡이의 앞날에도 봄이 오는 건가? –오후 11:19
 
 -박민지: 잘생겼어? –오후 11:20
 
 -장효진: 음...나름 잘생긴 것 같아요! –오후 11:20
 
 
 장효진이 하는 말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잘생겼다고?
 음. 뭐 나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진 않지. 그렇다고 잘생겼다는 말을 들을 정도인가?
 
 
 -김영준: 효진이 솔탈하겠네ㅋㅋㅋ –오후 11:20
 
 -박수한: 부럽다 야. 다들 연애하는구나... –오후 11:20
 
 -홍진표: 그래서 국수 언제 먹을 수 있어? –오후 11:20
 
 
 다들 나와 장효진을 몰아주는 분위기다. 어째 지켜보던 내가 쑥쓰러워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예식장은 어디로 잡지?
 애는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야겠다.
 요즘 애 하나 키우는 데 드는 돈이 얼마더라?
 노후자금 벌려면 열심히 살아야지.
 
 바로 그때.
 
 
 -장효진: 무슨 헛소리들이에요ㅋㅋㅋ저 남자친구 있어요 –오후 11:21
 
 
 !?
 
 이게 무슨 소리요? 효진 양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남자친구가 있다니! 남자친구가 있다니!?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떠 버렸다.
 
 “크악!”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두통!
 
 또 하나의 꿀팁을 배웠다.
 남의 대화를 엿보던 중에 성급하게 눈을 떠 버리면 끔찍한 두통이 뒤따른다.
 진짜. 진짜 무지 아프다.
 
 “흐억! 이거 진짜 아프네.”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가급적이면 천천히 눈을 떠야겠다.
 
 “그나저나 남자친구가 있다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 그대로다. 그럴 리가 없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장효진은 남자친구를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남자친구 언제 사귀냐고 물었을 때도 언제나 생각 없다고 대답했었다.
 
 “설마··· 다른 남자들에게 철벽 쳤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남자친구와 카톡 한번 주고받은 게 없다고?
 
 심지어 페북을 뒤져도 ‘연애중’ 따위는 없었다.
 
 남자친구 있는 애가 이럴 수 있나?
 설마 모니터 속 가상 남친?
 그러면 좀 곤란한데.
 아니면 손편지만을 고집하는 청학동 훈장남이라도 되나?
 
 그럴 리가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 요즘 SNS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는 장효진의 모든 SNS를 처음부터 다시, 샅샅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던 와중, 그녀의 SNS 목록 가장 밑부분에, 눈에 띄는 것 하나가 있었다.
 
 
 -데일리톡 랜덤채팅 –57,219
 
 
 이럴 수가! 이런 것을 지금까지 못 보고 있었다니.
 온갖 듣도 보도 못한 SNS 목록들에 파묻혀 있던 비인기 SNS라서 간과했다.
 
 “랜덤채팅?”
 
 나는 장효진의 랜덤채팅 대화 목록을 켜 보았다.
 몇 개의 방이 떴다.
 지금 이 순간도 메시지는 오고 있었다. 장효진은 읽는 것 같진 않았지만.
 
 
 -외로운늑대: 안녕하세요 프로필 사진이 맘에 들어 연락했어요^^ (안 읽음)
 
 -불타는쏘쥬: ㅎㅇㅎㅇ 몇살? 고딩? 난 23~ (안 읽음)
 
 -직업구닌: 안녕하세요ㅋㅋㅋ부천에 복무중인 직군이에요~부담없이 만나요 (안 읽음)
 
 -핫한새끼: 프로필 봤어요! 저도 소설이랑 노래 좋아해요ㅎㅎ어디살아요? (안 읽음)
 
 -한번만딱한번만: @@이렇게,,예쁘신,,분이,,저랑,,말,,섞어주실,,리가,,있겠냐만@@,,그래도~~딱,,,한번,,,용기내~,,,봅니다요~~~ (안 읽음)
 
 -안2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원남입니다ㅋㅋㅋ전 복잡한 거 딱 싫어해서 바로 돌직구 들어갑니다 싫으시면 차단ㄱㄱ 저랑 조건만남 하실래요? 시간당 10만 쳐드릴게요! (안 읽음)
 
 -인천사는남자: 어디살아요? ㅋ (안 읽음)
 
 -슬슬닉네임짓기귀찮다: 지금바로 만날래요~난 신촌~ (안 읽음)
 
 
 정말 온갖 메시지가 다 온다.
 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체모를 끈적끈적함에 진저리를 쳤다.
 마음만 먹으면 이들의 얼굴과 실명,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도 아니었다.
 장효진이 지금 접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장효진: 오빠! 오늘은 안 들어와요? -오전 01:28
 
 
 그녀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자 곧 답장이 왔다.
 
 
 -백마탄왕자: 달링 들어왔어요? -오전 01:29
 
 -장효진: 오빠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오전 01:29
 
 -백마탄왕자: 미안해요. 집엔 잘 들어갔어요? -오전 01:29
 
 -장효진: 오빠가 데려다줬는데 당연하죠! -오전 01:29
 
 
 충격이다.
 장효진, 오늘 야자를 빼고 급히 가기에 학원에 가는 줄 알았는데······.
 나는 그들의 지난 대화를 모두 추적했다.
 
 
 -백마탄왕자: 오늘 좋았어요 -오전 01:30
 
 -장효진: 저두요 오빠ㅎㅎㅎ -오전 01:30
 
 -백마탄왕자: 아깐 근데 조금 당황했어요 -오전 01:30
 
 -장효진: 아아 호텔 입구에서요? -오전 01:31
 
 -백마탄왕자: 네 달링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가끔 깜빡해요 -오전 01:31
 
 -장효진: ㅋㅋㅋ전생에 나라 구한 줄 아세요 오빠 -오전 01:31
 
 -백마탄왕자: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친구가 그러는데 산삼보다 좋은 게 고삼이래요. -오전 01:31
 
 -장효진: 어휴 진짜 변태 아재개그ㅋㅋㅋㅋ -오전 01:32
 
 -백마탄왕자: ^^ -오전 01:32
 
 -장효진: 오빠 이제 뭐 할 거예요? -오전 01:32
 
 -백마탄왕자: 내일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 해요. 달링도 얼른 자요. 내일 학교가야죠^^ -오전 01:32
 
 -장효진: 아아, 오빠랑 더 놀고 싶은데. -오전 01:32
 
 -백마탄왕자: 나중에 주말 되면 하루 종일 볼 수 있어요 -오전 01:32
 
 -장효진: 진짜 좋다. 아예 같이 살았음 좋겠다. -오전 01:32
 
 -백마탄왕자: 언젠가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오전 01:32
 
 -장효진: 저 이제 그럼 이만 잘게요. 오빠 ㅎㅎㅎ -오전 01:32
 
 -백마탄왕자: 알겠어요. 잘 자요 달링. 자기 전에 방 나가는 거 잊지 말고요. -오전 01:33
 
 -장효진: 아! 오빠오빠오빠! -오전 01:33
 
 -백마탄왕자: ? -오전 01:35
 
 -장효진: 내꿈꿔요! -오전 01:35
 
 -백마탄왕자: ㅎㅎ달링도요~ -오전 01:36
 
 -장효진: 쪽♥ -오전 01:36 (읽음)
 
 
 충격이다. 이번 건 세컨드임펙트 오브 아마겟돈.
 이중극점에 당한 기분이다.
 
 백마탄왕자와 장효진은 랜덤채팅을 통해 만났고 수시로 방을 팠다가 지웠다가 하며 만나는 모양이다.
 
 “아니 대체 이 백마탄왕자라는 새끼가 누구야?”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방방 뛰었다.
 십 대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투.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아재인데··· 이렇게 빈정 상하는 댄디함이라니.
 
 “설마 대학생인가? 복학생?”
 
 군대 다녀온 복학생 이미지를 떠올린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을 수 없다.
 나는 아이디 백마탄왕자를 검색했다.
 너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 주마!
 
 나는 백마탄왕자의 SNS 기록을 클릭해서 놈의 신상 정보를 눈앞에 띄웠다.
 이윽고··· 커다란 사진과 이름 석 자가 뜬다.
 
 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백마탄왕자의 정체는 곽춘배라는 이름의 50대 아재였다.
 잠깐 50대?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많게 봐도 30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충격적이다. 곽춘배의 SNS를 검색했다.
 그는 의외로 카톡과 페이스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7년 0월 0일, 곽춘배의 카카오톡
 
 
 -장서웅 편집장: 대표님 잘 들어가셨습니까.
 
 -김진태 편집자: 교열 맡겼습니다.
 
 -오수영 작가: 크랭크 인이 얼마 안 남았네요!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
 .
 
 
 그 외의 SNS를 뒤져 보니 그가 중견 출판사의 대표, 그리고 상당히 권위있는 영화감독이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인터넷에 쳐 보니 인물 검색에도 뜬다.
 
 “허··· 이런 사람이 원조교제를 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근원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짝사랑녀를 가진 연적이 또래도 아니고 저 먼 윗세대의 사회인이라니. 그것도 이미 명성도, 재력도 모두 갖춘.
 
 장효진.
 
 나만의 청순가련한 문학소녀인 줄 알았는데··· 결국 아닌 체 하면서도 돈 많은 남자를 찾는, 그리고 그렇게 보이기 싫어 지적 허영까지 부리는 여자인 것인가.
 아니면 그냥 나의 열등감일 뿐일까?
 
 “대체 왜 그런 늙은이를 만나는 거야!”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분노와 열등감, 그리고 거대한 의문을 품고 집을 나섰다.
 
 * * *
 
 [여보세요. 곽춘배 대표님 되십니까?]
 “···누구세요?”
 
 새벽.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에 곽춘배는 인상을 찌푸렸다.
 막 스튜디오에서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가족들 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소리를 껐다. 그리고 조금은 불쾌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한데,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변조된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긴 말 하지 않았다.
 
 [장효진 아시죠?]
 
 쿵!
 
 그 말에 곽춘배, 아니 백마탄왕자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부엌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 핸드폰에 볼을 바짝 눌러 붙였다.
 
 “당신 뭐야?”
 [······.]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곽춘배는 황급히 번호를 확인했다.
 
 공중전화의 번호다. 맨 처음엔 군대 가 있는 늦둥이가 건 전화라고도 생각했지만······.
 
 “전화 잘못 거셨네요. 누군진 몰라도.”
 [잘못은 당신이 하는 게 잘못이고.]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이제 말도 짧아졌다.
 
 [장효진 알지?]
 “···당신 누구냐니까?”
 
 곽춘배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조금 높이며 말했다.
 
 [전화 잘못 건 사람.]
 
 상대방이 아군이 아님은 명확하다.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진 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곽춘배는 불안했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온 말은 곽춘배에게 이게 장난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곽춘배. 65년생. ‘창작과비난’를 통해 등단한 시인. 지금은 하야람 출판사의 대표이자 영화감독. 대기업 다니는 부인 있고 소설가 아들과 가정주부 딸, 그리고 지금은 군대에 있는 늦둥이. 취미는 랜덤채팅으로 여고생 꼬시기. 맞지?]
 “헉!”
 
 헉 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가 안 나온다. 뒤통수에 말벌 침이라도 한 대 쏘인 느낌.
 
 
 
 “워, 원하는 게 뭡니까?”
 
 결국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물어 버릴 수밖에 없다.
 잃을 게 많은 자가 아쉬운 법이다.
 
 [대답이나 해. 맞냐고.]
 
 곽춘배는 목이 떨어지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
 “······?”
 
 한데 이후 핸드폰 너머에서는 별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뭘까? 속이 탔다.
 곽춘배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응?]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
 
 그러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럼 00동의 성은빌딩 카페로 와라.]
 “네. 몇 시에 뵐까요?”
 [지금.]
 
 지금이라?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걸까? 빨리 누군가에게 연락해야 한다. 가능한 입 무겁고, 배고프고, 힘 센 녀석들. 누가 있을까?
 곽춘배는 재빨리 핸드폰을 켰다.
 
 
 ‘지금 자냐?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그가 막 아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보낸 순간!
 
 [지금 카톡 켰지?]
 “······!”
 
 이번에는 놀랄 수도 없었다.
 
 [카톡 목록에 박덕배, 남궁춘수에게 연락을 하려 하는군. 힘깨나 쓰는 동생들인가?]
 “아,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업무 차···”
 [박덕배, 남궁춘수 지금 둘 다 바쁘다. 하나는 아들 생일잔치 끝나고 뻗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 가 있어. 시차가 달라서 지금 한창 깨어 있긴 한데··· 원하는 만큼 빨리는 못 올걸?]
 
 경악스럽다. 곽춘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 지금 가겠습니다. 선생님.”
 [빨리 와.]
 
 * * *
 
 나는 공중전화를 내려놓았다.
 빨리 튀어야 한다.
 공중전화도 위치추적 당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먼 곳에 있는 공중전화로 왔다.
 복장도 완전 까만 옷에 까만 모자로 챙겼다.
 
 문제는 남의 SNS를 보려면 알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곽춘배가 혹시나 다른 데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빨리 옷부터 입자.”
 
 나는 재빨리 바지에 다리를 넣었다.
 그때.
 
 벌컥-
 공중전화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꺄악! 뭐야!?”
 
 난데없이 문을 연 여자가 날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오! 왜 하필 지금!
 난 치한이라고 외치는 여자를 등지고 냅다 뛰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을 달려 성은 빌딩으로 향했다. 이 근방에선 제법 유명한 빌딩이다.
 폐가 터질 듯 달리자 머리가 어지럽다.
 
 한참을 달리니 성은빌딩 1층에 카페가 보인다. 아직도 문을 열어 두었다.
 
 나는 검은 옷 위에 내가 중학교 때 입던 교복을 덧입었다. 그리고 가장 천진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자. 텅 빈 공간 맨 끝 구석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아저씨가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가 백마탄왕자에요?”
 
 내 말에 그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상황이지? 라고.
 나는 준비했던 멘트들을 풀기 시작했다.
 
 “아, 저 앞에서 어떤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심부름 시켰어요. 뭐 할 말이 있을 거라고. 녹음해 오라던데.”
 
 나는 그 말을 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곽춘배.
 그는 내 앳된 얼굴을 쳐다보며 어마어마하게 초조해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기껏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웬 지나가던 중학생이 나와서 당황했겠지.
 
 “너 그 아저씨 얼굴 봤니?”
 “네. 완전 험상궂고, 얼굴에 막 칼자국도 있고. 일행도 많았어요. 제 지갑 뺏어간 담에 협박해서··· 녹음해서 가져오면 돌려준다고 했어요. 아, 여자친구한테 백일 선물로 받은건데······.”
 
 나는 짐짓 울먹이며 곽춘배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가령 새벽 4시가 다 되어서 중학생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는 사실이라거나, 뭐 기타 등등에 대해서는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하긴.
 자신을 위협하는 익명의 세력은 항상 실제보다 거대하게 생각되는 법이지. 그 정체가 한낱 보잘것없는 중고딩 하나일지라도.
 
 “너도 고생이 많구나······.”
 “빨리 뭐라도 말씀하세요, 저도 바빠요.”
 “커흠!”
 
 곽춘배는 복잡한 얼굴로 나와 내 핸드폰의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제가······.”
 
 곽춘배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건조함과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
 
 “제가 그녀를 바라봤던 시선엔··· 개인적 탐욕과 음란함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내 자신에게··· 사라져 버린, 어떤 생기 넘치는 젊음. 그것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라고나 할까요······.”
 “······.”
 “노인은 사랑을 주기엔 너무 늙었고, 소녀는 사랑을 알기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슬픈 사실입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래서 모텔 가서 둘이 뒹굴었냐? 응?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늙은 게 죄입니까? 사랑조차 알려질까 두려워 쉬쉬해야 합니까? 포기해야 합니까? 왜!”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카페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예술영화 찍냐?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잉? 근데 아저씨 가족 있지 않아요?”
 “······!”
 
 내 말에 곽춘배는 난데없는 카운터를 맞았다는 표정이다. 그는 빽 소리쳤다.
 
 “그, 그런 건··· 애들은 몰라도 돼!”
 
 장효진한테는 애들은 몰라도 되는 걸 사정없이 알려 준 주제에.
 님이 찍는 건 예술영화가 아니라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란이라구요. 그걸 아셔야죠.
 
 “이제 할 말 없어요?”
 “······.”
 “난 늙었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억울하다! 요컨대 이거죠? 그럼 전 갈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허탈한 심정이다.
 늙은 시인과 젊은 여고생의 만남이라.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관여할 문제일까?
 
 난 일단 이 사실을 곽춘배의 가족들에게 말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가정이 파탄 나고도 둘이 잘 만난다면 정말 사랑인 거겠지, 뭐.
 쓸쓸하게 돌아서려는 나에게, 곽춘배가 말했다.
 
 “저기! 얘야!”
 “······?”
 “아직 말 다 안 끝났단다.”
 
 곽춘배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나에게 가방 하나를 건넸다.
 
 “이거 그 아저씨들에게 꼭 전해 주렴. 절대 안에 열어 보지 말고!”
 “넹.”
 
 나는 가방을 멘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와 버렸다.
 
 * * *
 
 거리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으로 가득하다.
 
 나는 빈 상가건물 화장실로 들어가 가방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았다.
 
 “이게 뭐지?”
 
 지퍼를 끌렀다. 안이 살짝 묵직하다. 뭐 책 같은 게 들은 것 같은데? 자기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인가?
 
 “헉!”
 
 내 입에서 저절로 헛바람 소리가 튀어나온다.
 돈다발.
 오만 원 권이 빽빽하다.
 다발 하나에 20장씩 묶인 오만 원 권. 그게 열 개나 들었다.
 
 천만 원.
 
 나는 황급히 가방 지퍼를 잠갔다.
 새벽, 상가 화장실 안. 차가운 타일을 엉덩이로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아, 돈이 이렇게도 벌리는구나.
 
 * * *
 
 나는 돈을 일단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둬야지.
 덤으로 짝사랑이자 첫사랑도 함께. 행복해라 효진아.
 
 
 “돈에는 일련번호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곽춘배가 돈에 무슨 수작을 부려놨다면? 그게 겁이 나서 손을 못 대겠다.
 위조지폐가 아닌가 몇 번을 확인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학교 가면 장효진 얼굴 어떻게 보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그녀의 사랑을 박살 낸 것 같아서 마음이 찜찜하다. 노년의 사랑이라.
 
 “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나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피부에 와 닿는 싸늘한 공기.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다.
 
 재빨리 뛰어가 할머니의 방문을 여니 할머니가 방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어가 할머니의 어깨와 손을 잡았다.
 
 * * *
 
 다행스럽게도 구급차는 곧 왔고 할머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날 학교를 빠졌다. 장효진을 보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잠시, 할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눈앞이 캄캄하다.
 
 “학생이 보호자신가요?”
 
 의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사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알고 계셨어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할머니께서 꽤 오래 입원하실 수도 있어요.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수술도 필요할지도 모르고······.”
 
 의사는 말끝을 흐렸다.
 
 “혹시···병원비가 천만 원보다 많이 드나요?”
 
 내 말에 의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보다 더 많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돈? 그까짓 거 번다.
 벌 수 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