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패왕전설 [E]

패왕전설 1

2017.07.27 조회 521 추천 7


 패왕전설 1권
 죽음의 수련장, 한해(旱海)
 
 
 작가서문
 
 
 패왕의 노래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건만
 때를 잘못 만나 말이 가지 않는구나.
 말이 나서지 않음을 어쩔 수 없지만
 우 미인여, 우 미인이여, 당신을 어쩌란 말인가.초패왕 항우(項羽)의 비장한 노래이다.
 항우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패왕으로 불리었던 군왕이다.
 그가 한고조 유방과의 초한대전에 패배하는 바람에 포악하고 무지한 군왕으로 평가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패자에 대해서는 평가가 아주 가혹하기 때문이다.
 
 항우는 천부적인 신력과 무적의 용맹으로 백전백승을 거둔 전신(戰神)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대장군 한신의 계략에 빠져 해하전투에서 패하면서 평생의 여인 우 미인과 함께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항우는 통한의 노래를 외치고는 장렬한 최후를 선택한다.
 본 작품은 초패왕 항우의 비극적 운명과는 전혀 무관하다.
 필자는 전설적 패왕으로 존재했던 항우의 기개와 호쾌함을 작품 속에 그려 넣기 위해 잠시 패왕의 생애를 거론한 것이다.
 탄생부터가 운명적인 주인공 용군휘.
 그는 소림에서 자랐지만 전대의 마왕을 따라 한해로 건너가면서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해(旱海).이곳은 죽음의 땅이자 전사들의 무덤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세상이 바로 한해다. 처절한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 적용되며 황법이 미치지 않은 무법지대가 또한 한해이다.
 과연 그는 척박한 한해에서 패도(覇道)를 달성할 수 있을까.
 중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상 최강의 마단 마중천(魔重天).
 마정(魔正)의 기운을 동시에 타고난 용군휘는 마왕도, 영웅도 될 수 없는 몸이기에 운명적으로 패왕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전설의 패왕(覇王)!
 그의 행보는 곧 폭풍이다.<용병불패>와 <중원정벌>를 애독해 주신 독자 제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두려운 마음으로 세 번째 작품 <패왕전설>을 바칩니다.
 끝으로 작품 진행과 제작에 항상 정성을 기울여주신 두레미디어 가족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월정사(閒月精舍)에서
 천기성 배상
 
 
 서 장 용문(龍門)의 용 울음소리
 
 
 1.
 
 
 “앙······ 앙······!”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새벽의 공기를 뚫고 울려 퍼진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안고 질주하는 여인은 황하의 지류에 이르자 가쁜 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 제발 울지 마라. 이 죄 많은 엄마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너를 마귀들 손에 넘겨 줄 수는 없구나.”
 여인은 앞섶을 열어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려주었다.
 생후 백일도 안 돼 보이는 아기는 본능적으로 젖을 빨았다. 뽀얀 피부와 갓난아이답지 않게 곧은 콧날과 선명한 입술선이 인상적이다.
 여인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잠시 숨을 돌렸다.
 스물을 갓 넘어 보이는 젊은 미부. 비록 먼 길을 달려오느라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심한 내상으로 안색이 해쓱했지만 실로 절세적 용모의 소유자였다.
 한번 눈짓으로 세상을 굴복시킬 미모와 더불어 신비로움이 간직된 기품. 가히 인세에 다시없는 경국지색이었다.
 절색의 미부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연신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의 추격에 대비했다. 한데 이때였다.
 삐이이-익-!
 멀리서 들려온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여명의 하늘을 진동시켰다.
 “아아······ 어느새!”
 절색의 미부는 얼른 앞섶을 여미고는 아기를 강보로 감싸 안았다.
 “앙앙······!”
 미처 배를 채우지 못한 아기가 울어대자 미부는 아기의 볼에 뺨을 비비며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라, 아가. 조금만 참아 다오.”
 엄마의 간곡한 요청 때문일까.
 아기는 아직 초점이 형성되지 않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며 옹알이를 해댔다.
 미부는 아기를 가슴에 꼭 안고는 절정의 신법을 전개했다.
 삐-삐이-익-!
 호각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온다.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한 호각소리. 금세라도 지표를 헤집고 귀신들이 치솟을 것만 같다.
 “헉헉······!”
 미부의 숨소리가 가쁘다.
 그녀는 본래 세상에 드문 절세고수였지만 지옥과도 같은 마굴을 탈출하면서 심한 내외상을 입었다. 게다가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삼일 동안 꼬박 달려오느라 심신이 크게 지쳐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미련이 없었다.
 아니, 너무도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기에 백번을 죽는다 해도 자신의 죄를 씻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처지였다. 만일 품에 안긴 아기만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펑-펑-!
 하늘에서 붉은 폭죽이 폭발했다. 그것은 추격자들이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음을 의미한다.
 “아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절색의 미부는 강보의 아기를 바싹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가, 죄 많은 어미를 용서해다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음을 다지고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단단한 옥도 파괴한다는 파옥지(破玉脂).
 그녀는 아기의 백회혈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아, 이 무슨 천인공노할 만행인가. 어떻게 자신의 아기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범죄다.
 절색의 미부는 턱을 덜덜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용서해라, 아가. 네 아비는 이 엄마와 천하를 속인 악마다. 널 죽일지언정 차마 악마의 자식으로 키울 수는 없어.”
 그녀는 아기의 백회혈에 손가락을 대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절정급 마두들도 일지를 날려 죽일 수 있는 그녀였기에 갓난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너무도 간단하다.
 한데 이때였다.
 “아앙-!”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아기가 천둥소리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미부는 자신이 저지르려 했던 끔찍한 만행에 스스로 놀라워했다.
 “마······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이르렀다 해도 자신의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어미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극도의 상심과 좌절에서 깨어난 그녀는 급박한 와중에도 정신을 안정시키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녀는 본래 남다른 총명으로 어린 나이에 절세적 무공을 터득해 중원지화(中原之花)로 불리었던 여인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그녀의 눈망울에 희뿌연 물안개를 피워내는 하천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낸 그녀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래, 이 아기를 악의 소굴로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 손으로 죽일 수도 없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
 다행히 개울 주변으로 대나무 숲이 형성돼 있었다.
 남방의 대나무와 달리 굵기가 엄지손가락에 불과한 가는 대나무 숲.
 미부는 두툼한 가죽 허리띠로 손을 가져갔다.
 차앙······!
 맑은 음향과 함께 한 자루 연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은 지극히 예리하며 현란한 검초를 연출할 수 있지만, 검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공력이 요구되기에 하수들은 감히 지닐 수도 없다.
 미부가 연검을 가볍게 휘젓자 대나무 십여 그루가 대번에 베어져 쓰러졌다.
 미부는 잠시 강보를 내려놓고 대나무로 바구니를 엮었다. 시간이 촉박해 대오리로 촘촘하게 짤 수가 없지만 그녀는 최대한 튼튼하게 바구니를 만들고 잎사귀를 깔았다.
 연후 그녀는 강보 안에서 아기를 꺼내 대바구니 안에 넣었다.
 “흑, 아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물결에 어린 핏덩이를 맡겨야 한다는 현실에 미부는 가슴 깊이 통곡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비록 사악의 핏줄을 타고 난 아이이지만 악의 소굴에서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던 것이다.
 펑-펑-!
 폭죽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바람을 타고 사악한 비린내마저 풍겨지는 것 같았다.
 손수건을 꺼내든 미부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자신의 아기가 누군가에 의해 무사히 구해질지, 아니면 불행히도 물에 가라앉아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내력은 밝혀야 했다.
 쓰기를 마친 그녀는 목에 차고 있던 작은 옥 목걸이를 풀었다. 그녀는 목걸이를 손수건으로 싸서 아기의 배내옷 사이에 넣어 주었다.
 이로써 아기를 띄워 보낼 준비는 마쳤다.
 대바구니를 안아든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기에게 입을 맞추었다.
 “흑, 아가. 부디······ 밝은 세상에서 잘 자라다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아기가 담긴 대바구니를 개울 위에 띄웠다.
 대바구니는 급한 물살을 타고 떠내려갔다. 보기에도 위태로운 광경이라 미부는 대바구니가 물안개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아야 했다.
 이윽고 대바구니가 희뿌연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미부는 대오리로 작은 틀을 만들어 강보로 둘렀다. 마치 자신이 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한 손으로 가짜 강보를 안아들고 다른 한 손에 연검을 쥔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여한이 없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굴로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허공으로 치솟은 그녀는 추적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맑은 기합성을 발했다.
 그녀는 절정의 경공술을 전개해 산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기의 안전을 위해 추적자들을 한 발짝이라도 먼 곳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순간 주변으로 무수한 인영이 연이어 내려섰다.
 사사삭-!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과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눈. 전신 가득 음울한 마기가 피어오르는 흑의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누런 상문봉(喪門棒)이 쥐어져 있었다.
 절색의 미부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추적자들의 행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렇게 빠를 줄이야!’
 그녀는 가짜 강보를 바싹 끌어안았다.
 지옥마객(地獄魔客)들 역시 자신의 추적보다는 아기를 찾는 것이 목적이기에 자신에게 아기가 없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비켜라!”
 절색의 미부는 지옥마객들을 향해 달려들며 연검을 휘둘렀다.
 츄리리-!
 검극에서 상승검기가 발출되자 지옥마객들은 상문봉을 교차해 그녀의 돌파를 저지했다. 상문봉이 베어지며 지옥마객들 넷이 목숨을 잃었다.
 한데 죽는 자들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고 이를 바라보는 자들의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절색의 미부는 재차 검기를 발출하며 탈출로를 확보하기에 애썼다.
 “비켜라, 마물들!”
 지옥마객들은 상문봉을 교차해 포위망을 좁혀올 뿐 선공은 물론이고 반격조차 하지 않았다.
 절색의 미부는 그들의 적이 아니라 상전이기에 감히 맞서 싸울 수 없다. 만일 그녀의 몸에 한 점 혈흔이라도 새겨진다면 출동한 그들 모두 심한 문책을 받는다.
 그들에게 병기가 아니라 상문봉이 주어진 것도 절색의 미부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의도였던 것이다.
 덕분에 절색의 미부는 포위망을 뚫고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추적자들은 지옥마객 뿐만이 아니었다.
 스스슥-!
 다시 절색의 미부를 에워싼 자들은 마대자루와 같은 장포를 걸친 장년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낯빛이 지극히 창백했지만 눈에서 핏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령혈객(幽靈血客).
 이들은 지옥마객보다 상급의 추적자들이다. 이들의 손에 붉은 쇠사슬이 쥐어져 있다는 것은 절색의 미부라도 포박할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철그렁철그렁······!
 유령혈객들이 쇳소리를 발하며 포위망을 좁혀오자 절색의 미부는 연검을 몸에 바싹 붙였다.
 “감히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미부는 내상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공력을 운집해 연검에 집중시켰다. 순간 눈부신 광채가 발출되며 사위를 환하게 밝혔다.
 번-쩍-!
 곧이어 엄청난 섬광이 유령혈객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한 자루 거대한 검형만 보인다.
 상승검법의 하나인 신검합일!
 콰아앙!
 요란한 폭음이 터지며 유령혈객 십여 명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분시를 당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죽어도 신음을 토하지 않기에 처절한 비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으로 극심한 내상을 입은 절색의 미부가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흐윽!”
 바닥으로 내려선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자 유령혈객들이 쇠사슬을 날렸다.
 츄리리릭!
 주변으로 쇠사슬이 거미줄처럼 교차되면서 점차 절색의 미부를 압박했다. 유령혈객의 쇠사슬은 만년정강으로 제작되었기에 그녀가 쥔 연검으로도 베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이내 조롱 속에 든 새처럼 갇히게 될 처지였다.
 ‘안 돼!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
 미부는 이를 악물고는 품에 안은 강보를 유령혈객들에게 내던졌다.
 “받아랏!”
 느닷없이 강보가 날아들자 유령혈객들은 급히 쇠사슬을 회수했다. 그들로서는 강보에 싸인 어린 주인이 터럭이라도 다치는 날에는 도륙을 면치 못한다.
 유령혈객 중 한 명이 급히 강보를 받아 안았다. 하지만 강보에 싸인 존재는 아기가 아니라 대나무 틀이었다.
 “가짜다!”
 비로소 속았음을 깨달은 유령혈객들은 절색의 미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부는 그 사이 계곡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유령혈객들은 굳이 서둘러 뒤쫓지 않았다. 미부가 달아난 구역에는 또 다른 지옥마객과 유령혈객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 강보를 안고 있는 동료를 중심으로 둘러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곤혹스럽다.
 그들의 임무는 어린 주인의 확보였다. 주모(主母)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소주(小主)는 반드시 되찾아오라는 것이 상전의 지엄한 명이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한데 소주의 행방을 놓쳤으니 그들은 살아 있어도 이제 산 목숨이 아니었다.
 이때 하늘을 진동시키는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
 위압감보다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외침이니 백도의 사자후가 아니라 흑도의 마후(魔吼)였다.
 붉은 광채가 마치 내리꽂히듯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천주(小天主)를 뵈옵니다!”
 유령혈객들은 일제히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붉은 후광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은 마치 조각상처럼 수려한 용모의 미공자였다. 준수한 용모와 더불어 건강한 체격까지 갖추고 있어 위엄이 돋보였다.
 “어찌 되었느냐?”
 짤막한 물음.
 드세지도 않은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유령혈객들 모두는 전신의 피가 모두 말라버리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빈 강보를 안아든 유령혈객이 머리 위로 쳐들었다.
 “강보를 찾았지만······ 소주는 아니 계셨습니다.”
 빈 강보를 손에 쥔 미공자는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휘아(輝兒)의 강보가 분명하군.”
 그는 강보를 바친 유령혈객을 걷어찼다. 발길질에 머리가 으스러진 유령혈객은 허연 뇌수를 드러내며 즉사했다.
 미공자는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의 입에서 다소 짜증스런 음성이 터져 나왔다.
 “휘아를 찾아와라. 내 아들을 찾아오란 말이다!”
 유령혈객들은 재차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존명!”
 그들은 쇠사슬을 몸에 감고 신속하게 흩어졌다.
 미공자는 빈 강보를 움켜쥐고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폭사시켰다.
 “매군향(梅君香)! 만일 휘아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넌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콰류류류······!
 대륙의 젖줄인 황하는 장안 북쪽으로 흐르다가 말발굽처럼 휘어져 다시 남쪽으로 흐른다.
 섬서의 황토고원을 거쳐 누렇게 변한 강물은 하진이라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폭류로 변하는데 그 물살이 얼마나 드센지 배도 지날 수 없다.
 하진은 달리 용문(龍門)으로 불린다.
 회류성 물고기들도 용문에 이르러서는 폭류를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데 폭류를 뚫고 상류로 올라가는 몇 마리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등용문(登龍門)이란 말이 생겨났다.
 황하의 물줄기가 용문에 이르자 갑자기 용울음소리와 같은 굉음을 발하며 폭류로 변했다.
 한데 요란한 물소리를 뚫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앙······ 앙······!
 하나의 대바구니가 넘실대는 황톳물을 타고 흘러내려오고 있는데 울음소리는 대바구니 안에서 들려왔다.
 드센 물살에 본능적인 위기를 느꼈는지 아기는 필사적으로 울어댔다.
 바로 절색의 미부가 띄워 보낸 아기였다.
 물살이 더욱 사나워지면서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형성되었고 통나무며 배의 잔해 등 황하의 부유물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폭포와도 같은 용문의 물살은 한번 빨려들면 통나무도 으스러지고 만다.
 “아앙······ 앙······!”
 위기가 고조되면서 아기의 울음소리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용문은 배 한 척 지날 수 없는 험한 수역이기에 어부들의 구원도 바랄 수 없는 곳이다. 소용돌이에 휘감긴 대바구니는 몇 번씩 물에 잠기면서 폭류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아기를 밝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미부의 간절한 바람도 부질없는 행위였던가. 이제 아기는 채 세상의 빛을 느끼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
 한데 이 순간 용문의 폭류 아래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흰 눈썹과 흰 수염의 노승.
 수많은 천 조각을 이어붙인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은 경이적인 신법으로 폭류를 밟고 거슬러 올라왔다.
 “아미타불······ 세상이 온통 물소리로 가득한데 어떻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수 있단 말인가?”
 백미노승은 빠르게 황하의 수면을 살피다 하나의 대바구니를 찾아냈다. 순식간에 백 장을 미끄러진 노승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드는 대바구니를 건져 올렸다.
 노승은 대바구니에 든 아기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어, 아이가 들어있다니? 어찌 아기의 울음소리가 용문의 물소리를 능가한단 말인가?”
 노승은 나뭇가지를 밟고는 수면을 가로질러 강변으로 미끄러져 갔다. 절묘한 일위도강(一葦渡江) 수법이었다.
 황하 변으로 올라선 노승은 대바구니 안에서 아기를 꺼내 안았다. 배내옷만 걸친 아기는 위기를 벗어났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옹알이를 해댔다.
 “허허, 고놈 참.”
 노승은 아기의 볼을 어루만지며 잠시 관상을 살폈다.
 일순 노승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굳어졌다. 백 년 수양을 쌓은 노승으로서도 감당키 힘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럴 수가! 어찌 한 몸에 마정(魔正)의 기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단 말인가?”
 세상의 이치에 밝은 노승이었지만 천리에 어긋나는 현상 앞에서는 혼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 노승은 아기의 배내옷 안에 들어있는 손수건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피로 씌어진 혈서와 옥 목걸이.
 혈서는 길지 않았지만 아기의 신분을 밝혀줄 내력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기의 신분을 알게 된 노승은 고개를 저으며 길게 탄식을 지었다.
 “대자대비하신 불존이시여, 곧 열반에 들 이 늙은이가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아이가 천품(天品)의 자질을 지녔다 해도 마정의 기운을 지녔으니 불문의 제자로 거둘 수도 없나이다.”
 깊이 고심하던 노승은 손끝으로 육갑을 짚고는 고개를 들어 천기의 흐름을 헤아렸다. 그는 앞날을 헤아릴 수 있는 신통력의 소유자이기에 아기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이윽고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임을 납득한 노승은 아기를 품에 안아 다독였다.
 “아미타불! 가자꾸나, 아기야.”
 연기처럼 솟아오른 노승은 한 줄기 회색 연기로 화해 하늘을 가로질렀다. 초상승 경공비기인 육지비행술이었다.
 
 하루 반나절 동안 무려 천 리를 주파한 노승이 이른 곳은 숭산 소실봉이었다. 산기슭에는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으로 떠받쳐진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었다.
 산문에 걸린 현판은 이러했다.
 
 嵩山少林寺
 
 그러했다. 노승은 바로 구파일방의 으뜸인 숭산 소림사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십삼 년이 흘렀다.
 
 
 제 1 장 소림의 골칫덩이
 
 
 1.
 
 
 “일어나! 당장 일어나지 못해, 이 게으른 중생들아!”
 상좌승들의 드센 고함에 곤히 잠들어 있던 행자들이 기겁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 대다수는 밤늦도록 주방을 청소하고 불경을 외우느라 고작 두 시진을 잤을 뿐이다. 행자들이 무거운 눈까풀을 채 뜨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찾아 바닥을 더듬거리자 상좌승이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이런 한심한 중생들! 아직도 사바세계에서 단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어서 정신들 차려라. 이곳은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한 도량이란 말이다!”
 방으로 들어선 상좌승들은 죽비를 휘둘러 행자들의 등짝과 어깨를 마구 후려쳤다.
 짝-짜악-!
 죽비의 요란한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행자들이 급히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섰다. 일부는 옷도 채 걸치지 못한 채 옷과 버선을 싸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데 한 명의 어린 행자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곧은 콧날과 또렷한 입술선.
 비록 머리를 빡빡 밀었지만 타고난 영준함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흑백이 또렷한 맑은 눈망울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신비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때 어린 행자의 등 뒤로 사정없이 죽비가 날아들었다.
 “군휘(君輝)! 어서 움직이지 못해!”
 짜악-!
 죽비는 본래 선방에서 사용되는 법구로 대나무 가운데 부위를 쪼개서 제작했기에 가벼운 충격만으로 큰 소리를 낸다. 하지만 요란한 소리에 비해 그다지 아프지는 않다.
 행자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이런 생활에 이골이 난 듯 죽비로 얻어맞고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스님, 전 반야심경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잖아요? 되지도 않는 천수경을 암송시키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요. 그리고 저는 잠을 못 자면 하루 종일 피곤해요.”
 다소 드세 보이는 상좌승 현강(玄岡)이 눈을 부라리며 죽비를 번쩍 쳐들었다.
 “멍청한 것은 네 탓이야! 남들은 천수경은 물론이고 이미 금강경까지 줄줄 암송하지 않더냐? 하여간 어서 나가 아침을 준비해!”
 이때 누군가 현강의 손목을 쥐며 타일렀다.
 “현강 누구보다 행자들의 고된 생활을 잘 아는 네가 왜 이렇게 변한 것인가?”
 현강이 돌아보니 얼굴이 네모지고 기골이 장대한 승려였다. 같은 현(玄)자 배분의 동문인 현사(玄嗣)였다.
 현강은 현사의 완력을 잘 알기에 감히 맞서지 못하고 자신의 손목을 쥔 손만 뿌리쳤다.
 “군휘는 주방 소속일세.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네.”
 “군휘가 주방 소속인 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삼십육방에서 무술을 배우니 내 소관이기도 하지. 군휘는 정원(正元) 대사백께서 각별히 보살피라는 행자가 아닌가. 소림에서 지낸 기간을 따지면 자네보다 훨씬 선배이니 다소 굼뜨더라도 너무 닦달하지 말게나.”
 현사가 정원대사를 거명하자 현강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돌아섰다.
 “다른 행자들과의 형평에 어긋나니 자꾸 두둔하지 말게.”
 겨우 옷을 갖춰 입은 어린 행자가 현사에게 합장을 취했다.
 “고맙습니다, 현사 스님.”
 현사는 어린 행자의 옷고름을 바로 잡아주고는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늦었다. 어서 서둘러라.”
 “네, 스님.”
 방을 나선 행자는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여명 무렵이라 날씨가 쌀쌀했다. 행자는 허름한 승복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에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옷깃을 여몄다.
 “에고, 여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추워지네? 세월은 정말 빨라.”
 행자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용군휘(龍君輝).
 이것이 행자의 이름이다.
 행자(行者)란 불문이나 도문에 입문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계를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속세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사미십계를 받은 후 정식으로 법명이 주어진다.
 행자들은 삼년 동안의 고된 잡일을 거친 후 계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수행 기간 동안 계를 범하거나 사문을 욕 되게 하는 행위를 저지르면 자격이 박탈되고 쫓겨난다.
 한데 용군휘는 갓난아이 때부터 소림에서 자라 벌써 열세 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행자의 신분이었다.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 행자 생활을 한 예가 소림에는 없었다.
 사실 행자 생활은 워낙 고되고 힘겹기에 삼년을 버티기도 쉽지 않아 삼년이 지나도 소림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스스로 소림을 떠나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왜 용군휘는 계를 받지 못하는가.
 이것은 소림의 승려와 행자들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의혹이었다. 하지만 소림 본사에 삼백 명을 넘는 승려가 상주해 있지만 그 내막을 정확히 아는 승려는 열 명도 되지 않는다.
 
 천하제일의 대사찰 소림의 새벽은 부산하다.
 경내 순찰을 담당하는 승려가 여명 무렵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돌기 시작하면 소림은 깨어나야 한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은 행자들과 갓 수계를 받은 사미승들이다. 그들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장작을 패고 물을 끓이고 쌀을 씻어야 한다.
 용군휘가 터벅터벅 주방에 당도하자 주방 담당인 현강이 사납게 몰아붙였다.
 “이 게으름뱅이야! 어서 물이나 길어 와!”
 “예, 스님.”
 용군휘는 물지게를 지고는 개울로 향했다.
 개울은 요사채 바로 아래에 있기에 돌계단을 이용하면 금세 이를 수 있다. 요사채는 승려들의 숙소와 주방이 함께 배치된 일반 건물을 말하며 불당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
 용군휘는 개울에 물동이를 담아 물을 긷다가 문득 들려오는 물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개울 아래쪽에서 누군가 몸을 씻고 있었다.
 여인처럼 단아한 용모의 청년 승려였다.
 가을이라 해도 새벽의 개울물은 얼음장처럼 차기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질 일이다. 한데도 승려는 온몸을 물 속에 담근 채 정성껏 몸을 씻었다.
 용군휘가 먼저 합장을 올리며 아는 체를 했다.
 “정윤(正倫) 스님, 매일처럼 씻어 때도 나오지 않을 텐데 왜 매번 수욕을 하세요?”
 정(正)자 항렬은 각 전각의 당주급에 해당되는 높은 배분으로 대부분 사십 대 이상의 나이다.
 정윤은 열 살 나이로 나한전 주지의 직계 제자가 되었기에 정자 항렬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래도 배분이 높기에 현자 항렬의 제자들에게는 사숙의 신분이며, 동자승들인 명(明)자 항렬의 제자들에게는 사숙조가 된다.
 그러나 정윤은 결코 자신의 배분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가장 낮은 제자들인 명자 항렬의 동자승과도 대등하게 지내는 겸손함을 보였다.
 이런 품성을 인정받아 그는 이십 대 나이로는 파격적인 십계승(十戒僧)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십계(十戒)는 승려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정윤은 치계승(痴戒僧)이 되었다.
 정윤은 용군휘를 향해 마주 합장을 취했다.
 “군휘 행자, 늘 해오던 답변이지만 나는 몸의 때를 씻는 게 아니라 마음의 더러움을 씻는 것일세.”
 “마음의 때는 어떤 색이죠?”
 “아주 다양하다고 할 수 있네. 만일 살의를 느꼈지만 붉은 색이 될 것이고 탐욕을 느꼈다면 누런색이 될 것이며, 거짓말을 했다면 회색이 될 것이네.”
 용군휘는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가 다소 치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헤, 알겠어요. 물은 색깔이 없으니 물빛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더러움을 알 수 있는 거로군요?”
 수욕을 마친 정윤이 개울가로 나서며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하하, 군휘 행자는 이미 불법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군. 아직 계를 받지 않았지만 사미십계며 비구 이백오십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군휘 행자처럼 맑은 심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계율이 필요 없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어리석고 부족함이 많아 매일같이 혼나는 걸요? 잠자리에서 늦게 일어난다고 혼나고 물 길러 보내면······ 아이쿠!”
 용군휘는 비로소 자신이 물을 길러 왔음을 깨닫고는 급히 물지게를 졌다.
 “아침 공양 준비 때문에 어서 가봐야 해요.”
 그는 부리나케 돌계단을 밟고 달려갔다.
 정윤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삭도를 꺼내 머리를 밀었다.
 굳이 손질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매끄러운 민머리이지만 최대한 정갈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치계승의 본분이다.
 
 “잘 한다. 아예 밥을 떡으로 만들려는 거냐?”
 현강은 뒤늦게 물을 길어온 용군휘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스님.”
 “물은 됐으니 장작이나 가져와.”
 “예, 스님.”
 용군휘는 물지게를 내려놓고는 주방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그는 어제 패놓은 장작을 한 아름 안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소림사와 같은 대사찰에서 밥을 짓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여 명의 행자가 부지런히 쌀과 잡곡을 씻고 조리질로 돌을 골라낸 후 불을 지피는데 가마솥의 크기가 엄청나다. 그 커다란 가마솥으로 눋지 않게 밥을 지으려면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과정은 언제 장작불을 줄여 뜸을 들이냐인데 이는 전적으로 현강의 몫이다. 현강은 밥물이 끓는 냄새만으로도 뜸을 들일 상황임을 정확하게 알아낸다.
 밥을 짓는 동안에는 탕과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주방에서 한참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와중에 북소리가 들려왔다. 고루에서 북소리가 들려오면 모든 승려들이 대웅전으로 집결해야 한다.
 이어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가 울리는 동안 아침 예불을 올리기 위한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때는 주방 일을 거들던 사미승들도 예불에 참가하기 위해 주방을 나선다.
 행자들은 예불에 참가할 자격이 없기에 채소를 다듬고 요리를 하면서 불경을 외운다.
 이들에게는 별도로 불경을 공부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에 대부분 일을 하면서 틈틈이 경전을 꺼내 암송해야 한다. 하기에 주방 안은 도마질 소리와 웅얼거리는 독경 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다.
 모든 행자들이 열심히 불경을 암기하는 동안에도 용군휘만은 한가했다.
 그는 주방 구석에 기대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현강이 아침 예불에 참여하는 이 시각이 그에게는 가장 자유로운 한때였다.
 그는 여섯 살 때 정식으로 행자에 입문한 이후 칠 년 동안 오로지 반야심경 하나만 암송할 뿐 다른 경전은 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노력을 했지만 암기력이 워낙 신통치 않아 천수경 앞부분을 독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료 행자들은 용군휘가 경전을 암송하지 못해 여태 사미계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미계를 받기 위해서는 일곱 개 이상의 경전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동료 행자가 용군휘를 흔들어 깨웠다.
 “삵 스님이 온다. 어서 일어나, 군휘.”
 삵은 살쾡이의 줄인 말로 현강의 별칭이다. 현강은 행자들을 워낙 매섭게 몰아붙이기에 다분히 악감정이 실린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강은 주방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행자들을 닦달했다.
 “어서 방장실과 전, 원, 각으로 아침 공양을 배달해라. 날이 추워졌으니 식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소림사는 사전(四殿) 칠원(七院) 오각(五閣) 삼실(三室)로 이루어진 대사찰이다. 물론 이는 소림사 본사에 해당되며 소실봉과 태실봉에 흩어져 있는 말사(末寺)와 암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엄청나다.
 승려들은 행자서부터 방장까지 같은 음식을 먹는다.
 속세에서 음식은 입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수행자들에게 있어 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먹거리일 뿐이다. 하기에 음식이 거칠고 맛이 없어도 이를 문제 삼을 수 없다. 맛난 음식을 탐하는 것도 식탐(食貪)이라 하여 이 또한 계율에 어긋난다.
 아침 예불 후 금강경 독경을 마치면 대부분의 승려들은 요사채로 돌아와 수십 명씩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하지만 방장실을 비롯해, 각 전과 원 등의 주지승과 선방의 선승들에게는 식사를 배달해야 한다.
 용군휘는 탕과 반찬, 밥이 담긴 광주리를 지게에 지고는 장경각으로 식사 배달을 갔다.
 장경각(藏經閣).
 큰 사찰마다 경전을 보관해 두는 장경각이 하나씩 있지만 소림의 장경각은 특별하다.
 불문 무공의 집대성.
 소림의 장경각 내에는 천년 동안 창안된 무수한 불문 무공이 보관돼 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절기를 칠십 이종 절예라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구분이 아니다.
 소림의 절기 중 최강이라는 반야바라밀다심공, 대력금강권, 백보신권, 달마삼검 등은 아예 칠십 이종 절예에 속해 있지 않다. 사실 소림의 절기는 워낙 많아 숫자로 헤아리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최고의 절기를 선정하기도 쉽지 않다.
 장경각은 무림의 보고이기에 예로부터 무수한 도적들의 표적이 되어 왔다.
 소림의 절기를 터득해 복수를 하려는 자, 패업의 야망을 꿈꾸는 자, 그리고 단지 자신의 투도술을 시험해 보려는 도둑 등이 장경각 침투를 노려왔다.
 무림계에 소림의 장경각에서 비급을 훔쳐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역사상 소림의 장경각 경비가 뚫린 적은 단 두 번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였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소림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어 두 건의 도난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단 두 번을 제외하고 천년 동안 지켜져 온 무림의 금역!
 그런 장경각을 용군휘는 석 달 전부터 끼니때마다 드나들 수 있었다.
 장경각은 방장실 다음으로 중요한 장소라 현자 항렬 이상의 무승(武僧)들로만 배치돼 있다.
 무승들의 숫자는 서른 명 정도.
 장경각 소속 무승들은 밤낮으로 교대를 하며 장경각 안팎을 지키기에 식사 때도 전각을 떠날 수 없다. 하기에 매끼 식사를 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용군휘는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장경각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공양입니다!”
 장경각은 출입이 철저하게 제한돼 있어 소림의 제자라 해도 함부로 들어섰다가는 곤욕을 치르고 계율원으로 끌려가 벌을 받게 된다. 장문인의 심부름이든 식사 배달이든 사전 검색을 거친 후 들어갈 수 있다.
 가벼운 옷자락 소리와 함께 삼십 대 무승 둘이 내려섰다.
 두 무승 모두 체격이 건장했고 눈빛이 형형했다.
 “고생이 많군, 군휘 행자.”
 “우리가 수고를 덜어 주겠다.”
 두 무승은 지게 양끝에 걸려 있는 음식 광주리를 안아 들었다.
 용군휘는 빈 지게 자루만 멘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스님들, 이제는 몸수색을 하지 않나요?”
 “그래, 이제는 네 발걸음과 표정만 봐도 이상 징후가 있으면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만큼 선한 네가 설마 나쁜 마음을 품었겠느냐?”
 “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좋은 물건을 보게 되면 절로 욕심이 생긴대요.”
 “하하, 이제 보니 군휘 행자가 세상의 진리를 터득했구나.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마저 비운다면 탐욕조차 느끼지 못할 게다.”
 장경각 가까이 마련된 숙소는 단청을 입히지 않았고 기둥도 대패질을 가하지 않아 자연목 그대로였다. 주변 경관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숙소 안은 냉골이었다.
 장경각은 경전 보호를 위해 절대 불을 가까이 하면 안 되기에, 장경각 소속 무승들은 한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숙소에서 지내야 한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자다가 얼어 죽을 상황이지만 장경각 소속 무승들은 하나같이 내외공이 뛰어나기에 어지간한 추위도 이겨낼 수 있다. 이들은 소림의 명예를 지킨다는 자부심 때문에 어떤 고초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음식이 각자 발우에 배분되자 장경각 주지를 맡고 있는 만공(卍空)대사가 죽비를 두 번 두드렸다.
 착, 착!
 합장을 올린 승려들은 발우에 담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용군휘까지 모두 스물일곱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음식 씹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용군휘는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만공대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예순을 넘긴 나이이지만 꼿꼿한 허리, 철골을 연상케 할 만큼 깡마른 체구, 한쪽 볼에 새겨진 깊은 흉터······.
 공(空)자 항렬은 현 소림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배분이다. 웬만한 전각과 원의 주지는 모두 대부분 공자 항렬의 노승들이 담당하고 있다.
 만공대사는 공자 항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이기에 장경각 주지로 발탁되었다.
 본래 장경각 주지는 워낙 고달픈 직책이기에 이년마다 교체되는 게 관례인데, 만공대사는 십년 째 장경각 주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는 그 스스로 원한 일이기에 장문인도 윤허할 수밖에 없었다.
 만공대사는 지난 십년 동안 장경각을 벗어나지 않았다.
 풍문에 의하면 만공대사의 이런 고행이 소림의 명예를 훼손한 중대한 과오 때문이라 하지만 용군휘는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신의 수양에도 매진하는 만공대사가 그렇듯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군휘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공대사의 뺨에 새겨진 흉터였다.
 ‘언뜻 듣기에 누군가와 대결을 하다 입은 부상이라 하던데······ 만공대사님 같은 분이 과연 누구와 비무를 하다가 상처를 입은 것일까.’
 이때 만공대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용군휘는 뜨악한 심정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공자 항렬의 배분은 가장 낮은 명자 항렬보다 세 배분이나 높기에 사존에 해당된다. 행자 신분으로는 사존과 식사를 하는 것조차 감격스러운 일이기에 빤히 쳐다보는 것은 지극한 불경이다.
 만공대사는 아주 조금만 먹기에 일찍 식사를 마칠 수 있었지만 제자들이 충분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수행에 매진해야 하는 승려들은 음식조차 가려야 하지만 장경각에 배속되면 밤낮으로 주변을 경계하기에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승려들은 간식을 먹을 수 없는 계율 때문에 하루 세끼 식사가 유일한 체력 보충 시간이다.
 만공대사는 이를 감안해 마지막 제자까지 식사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죽비를 쳐서 공양이 완료되었음을 고한다.
 
 
 2.
 
 
 소림의 대문에서 산문까지의 거리는 대략 십리 정도.
 소림의 승려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입로 바닥에 평평한 자갈을 깔고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 기나긴 진입로를 관리하는 것도 행자들의 몫이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행자들 일부는 주방에 남아 설거지를 하고 다른 행자들은 일부 승려들과 함께 싸리비를 들고 산문까지 낙엽을 쓸어야 한다.
 겨울에는 눈을 치우고 봄과 여름에는 비에 쓸린 길을 보수한다.
 매일같이 낙엽이 수북하게 쌓이는 가을은 행자들에게 가장 힘겨운 계절이다. 중원오악 중 중악인 숭산은 울창한 수림으로 유명하기에 하루만 치우지 않으면 낙엽이 진입로를 뒤덮어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하기에 가을날 산문까지 비질을 하고 돌아오면 대다수 행자들은 녹초가 되고 만다. 그래도 그들은 쉴 겨를이 없다. 곧바로 점심 공양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무렵이 되어서야 행자들은 겨우 개별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용군휘는 행자들과 함께 사찰 밖에 마련된 제 삼십육방으로 향했다.
 삼십육방은 속가제자들의 무술 수련을 위해 별도로 세워진 무술교습소다. 이는 소림의 정식 제자가 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 고승 삼덕의 제안으로 마련되었다.
 수계식을 치르지 못한 행자들은 아직 소림의 제자가 아니기에 역시 삼십육 방에서 무술을 배워야 한다.
 물론 소림의 제자들 모두가 뛰어난 무술을 터득한 무승은 아니다.
 소림의 무술은 나한전과 달마원에서 대부분 가르치며, 수련 과정을 마친 무승들만 장경각과 호법원, 관음전 등으로 배치된다.
 
 “백룡회수-용기횡강!”
 무술 사범격인 상좌승들의 구령에 맞춰 십여 명이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소림오권(少林五拳) 중 하나인 용권연신(龍拳練神)이었다.
 소림오권은 용, 뱀, 학, 표범, 호랑이 등 다섯 마리 짐승의 습성과 동작을 본떠 창안된 권법으로, 본래는 정기와 근력 단련을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다보니 민간에도 널리 보급돼 웬만한 건달들도 소림오권을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무술이 되었다.
 “반룡탐조-유룡퇴보!”
 현자 항렬의 무승들은 제자들 사이를 다니며 잘못된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용군휘는 여덟 살 때부터 소림오권을 수련했으니 벌써 오년 째 소림오권을 배우는 중이었다. 사실 소림오권은 지극히 단조로운 무술이라 오년이 아니라 닷새면 터득할 수 있고, 다섯 달이면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
 삼십육방 제자들에게 있어 소림오권은 그저 몸 풀기 동작에 불과해 이 과정이 끝나면 배산장이나 금강권 등으로 넘어간다.
 한데 용군휘는 여전히 신입 제자들과 함께 소림오권만 수련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복잡한 권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오로지 소림오권만 익힐 뿐 다른 무공은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삼십육방 무승들로서는 그의 더딘 진보가 짜증스러웠지만 나한전 당주인 정원대사의 지시 때문에 혼낼 수도 없었다.
 
 “소림의 제자로서 반야심경과 소림오권만 알고 있다는 것은 흉이 될 수 없다. 반야심경 한 줄만 진심으로 깨우쳐도 성불할 수 있으며, 소림오권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면 그 또한 절기가 될 수 있다. 용군휘 행자의 진보가 더딘 것은 그의 오성과 자질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욕심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문제 삼지 마라.”
 
 정원대사는 나한전 주지의 직계 제자이기에 웬만한 전각의 주지와 버금갈 정도로 상당한 신분이다.
 그가 이렇듯 용군휘를 비호하는 연유는 그가 갓난아이 때 소림으로 입문한 용군휘를 직접 키웠기 때문이다. 속세의 인연으로 본다면 양아버지와 다를 바 없으니 그가 용군휘를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칠년에 걸친 행자 생활 동안 고작 반야심경 한 편만 암송할 수 있고, 무술은 소림오권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소림의 제자로서 명백한 수치다.
 한번은 계율원 승려들이 용군휘의 우매함을 질타하는 탄원서를 방장에게 올린 적이 있었다. 그동안의 관례를 들어 용군휘의 행자 자격을 박탈하고 소림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탄원서였다.
 한데 소림 방장은 결정을 유보한다는 답변으로 탄원서를 반려했다.
 이 사건은 소림 내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용군휘에 대한 지나친 배려로 인해 행자들을 가르치는데 있어 형평성을 잃었다는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여러 전각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소림 방장은 선문답(禪問答)을 내걸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 흐린 별빛을 밝히겠느냐?”
 
 이날 이후 용군휘에 대한 탄원은 사라졌다. 다만 소림의 골칫덩이로 무시될 뿐이었다.
 “다음은 호권연골이다.”
 현사 스님이 용군휘를 앞으로 불러냈다.
 “시범은 군휘 행자가 보이겠다. 나오너라.”
 “제가요······?”
 용군휘가 쭈뼛거리자 현사가 용군휘를 앞으로 끌어냈다.
 “네 호권은 완벽하다. 자신 있게 펼쳐 보여라.”
 “예, 스님.”
 용군휘는 신입 제자들을 힐끗 쓸어보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흑호시존-호장파풍-아호심양!”
 그는 또렷하게 구결을 외치며 동작을 취해 보였다.
 비록 열세 살짜리 아이라 해도 수년을 수련한 권법이기에 보기에도 역동적이었다. 더군다나 용군휘는 또래에 비해 건장한 체격이라 일권 일권을 내지를 때마다 바람소리가 쉭쉭 일어났다.
 “흑호좌동-맹호신요-백호추산!”
 소림오권은 각 권법마다 육절의 짧은 구결로 이루어져 있기에 몇 동작에 불과하다.
 용군휘가 시원스럽게 시범을 마치자 신입 제자들은 감탄사를 발하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
 “대단해!”
 “와앙, 정말이지 호랑이가 날아올라 일격을 가하듯 위력적이군.”
 “소림오권이 이렇듯 멋진 권법인 줄 몰랐어.”
 한데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켜보던 기존 제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물론 대단하지.”
 “무려 오년 동안 터득한 무술인데.”
 “게다가 소림오권 중에서 호권연골은 군휘가 그나마 잘 구사하는 권법이지. 사권연기나 학권연정은 아직도 위태로워.”
 킬킬거리는 비아냥거림에 신입제자들이 현사에게 물었다.
 “사범님, 정말 저 권법이 오년을 수련한 권법입니까?”
 “소림오권은 닷새 만에 배울 수 있다고 하던데 우리도 오년 동안 배워야 하는 겁니까?”
 현사는 안색을 굳히며 신입제자들을 나무랐다.
 “소림오권은 모든 무술의 기초다. 이를 경시하는 자는 결코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다. 소림오권을 감히 닷새 만에 터득할 수 있다는 말은 소림 무공에 대한 불경이다. 이를 명심해라.”
 그는 신입제자들에게 호권연골 수련을 지시하고는 용군휘를 따로 불렀다. 그로서는 용군휘의 입지를 높여주려다 오히려 조롱만 받게 했기에 미안했던 것이다.
 “군휘는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라.”
 “괜찮습니다, 스님. 선배님들 지적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이제는 학권과 사권을 더 연마해야겠어요. 제가 유연성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소림오권은 확실하게 배우고 싶어요.”
 “오냐, 중요한 것은 높은 절기나 다양한 무공이 아니다. 너의 열성이라면 반드시 대성할 것이다.”
 현사는 용군휘의 대견함을 칭찬해주고는 먼저 보내주었다. 기존 제자들 쪽으로 다가선 현사가 다소 감정적으로 훈시를 내렸다.
 “오늘부터 소림의 절기 철사장을 교습하겠다. 뜨거운 모래에 살가죽이 열 번은 벗겨져야 철사장의 기초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고통을 못 이겨 포기하는 자는 삼십육방에서 축출한다. 다시는 소림 경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3.
 
 
 열흘 후.
 용군휘는 여느 때처럼 점심 공양을 광주리에 담아 장경각으로 가져갔다. 그는 평소처럼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챙겨 광주리에 넣었다.
 한데 장경각 주지인 만공대사가 그를 지나치며 짤막하게 지시했다.
 “따라오너라.”
 “예에······? 예, 사존님.”
 용군휘는 서둘러 만공대사의 뒤를 따랐다. 그는 감히 만공대사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기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만공대사가 이른 곳은 장경각 앞이었다.
 장경각 입구 좌우에는 정자 항렬의 중년 무승들 넷이 지켜서고 있었다. 이들은 만공대사의 직계제자들로 하나같이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중히 합장 배례를 취하고는 다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장경각 문에는 봉인이 부착돼 있었다. 사사로운 출입조차 막겠다는 만공대사의 조치였다.
 “들어가자.”
 만공대사가 봉인을 떼고 문을 열자 용군휘는 깜짝 놀랐다.
 “사······ 사존님. 저······ 저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경각 출입은 정자 항렬 이상의 승려들만 가능하며 그것도 각 전각 주지의 승인을 받아야만 출입이 허락된다. 한데 한갓 행자에 불과한 용군휘가 장경각에 들어간다는 것은 계율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만공대사는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백일 동안 네가 장경각 소속 제자들을 위해 끼니때마다 공양을 가져다주지 않았더냐? 보답으로 네게 잠시 장경각을 구경시켜 주려는 것이다.”
 “사존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노납이 장경각의 주지이며 책임자다.”
 “하오나 방장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괜찮다. 장경각 청소를 위해 잠시 행자를 대동했기로 무슨 꾸지람을 내리시겠느냐?”
 만공대사가 잡아끌자 용군휘는 어쩔 수 없이 장경각 내로 발을 들어놓아야 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육중한 나무문이 뒤에서 닫혔다.
 “아······!”
 용군휘는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수백 개의 서가에 빼곡한 수만 권의 경전과 무공비급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아마 이 중 일부만 세상 밖으로 유출돼도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다.
 용군휘는 코 속으로 파고드는 먹물 냄새와 짙은 나무 냄새에 절로 숙연함에 젖었다. 소림 역대 조사들의 정신을 마음으로 느낀 것이다.
 만공대사는 서가 사이의 좁은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통로가 비좁다. 행여 서가를 쓰러뜨리면 안 되니 조심해서 따라오너라.”
 “예, 예, 사존님.”
 용군휘는 행여 소맷자락에 경전이 손상될 것이 우려되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자락도 바싹 조였다.
 만공대사는 서가를 지나면서 설명해 주었다.
 “장경각은 본사 창건 이후 여러 번 확장을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사실 한번 더 확장을 해야 하지만 작업이 쉽지 않고 관리에 어려움이 많아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예, 사존님.”
 “불타께서는 대오각성하신 이후 화엄경으로 그 뜻을 전했지만 누구도 그 위대한 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타께서는 평생토록 설법을 통해 중생을 이끌게 되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탄생된 법문이 바로 팔만사천경전이다.”
 “아, 그렇군요. 저는 그 많은 경전 중에서 고작 반야심경 한편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뭐, 천수경도 중간까지는······.”
 “불타의 설법 중에 어찌 한 구절이라도 미흡한 것이 있겠느냐? 반야심경 한편에도 억겁의 진리가 담겨 있느니, 평생 반야심경만 암송해도 부족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존님.”
 용군휘는 하늘과도 같은 사존의 금언에 가슴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주변에서 그의 무지함을 조롱해도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존님도 역시 정윤 스님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반야심경에 매진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러다 보면 천수경도 모두 암송할 수 있을 거야.’
 만공대사는 미로와 같은 서가를 지나 중앙 서가에 이르렀다.
 중앙 서가는 여느 서가와 다른 형태의 서책과 문서로 가득했다. 고대의 죽간은 흔했으며 심지어는 철에 글씨를 새긴 철권(鐵券)과 돌을 얇게 쪼개 만든 석편(石篇)도 있었다.
 “사바의 중생들이 소림의 장경각을 노리는 이유는 여래의 법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문의 절기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마의 무공과 달리 불문의 무공은 십 년을 수련해야 그 기본을 알 수 있고, 최하 삼십 년을 정진해야 정심함을 얻을 수 있다. 한데도 이를 모르고 마치 비급만 손에 쥐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공대사는 한 권의 비급을 꺼내 훑어보고는 먼지를 닦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이곳 장경각은 본사의 제자들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기에 대부분 마음 한 구석으로 욕심을 품고 있다. 한데 막상 들어와 보니 네 감상은 어떠하더냐?”
 “신비롭고 무섭습니다.”
 “무섭다고? 왜?”
 “조사님들의 무궁한 불력이 느껴집니다.”
 용군휘의 솔직한 고백에 만공대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선재선재로다. 네 기특한 심성의 대가로 하나의 절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예에?”
 “듣기에 네가 칠년에 걸친 행자 생활 동안 배운 무술이 소림오권 뿐이라 하더구나.”
 “사실입니다.”
 “소림오권은 무술이라기보다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하기 위한 체조에 불과하다. 네가 소림의 제자로서 행세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무공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
 용군휘는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에 급히 합장을 취했다.
 “사존님, 저는 행자의 신분일 뿐 아직 소림의 정식 제자가 못 되었습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소림의 절기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군휘야, 계를 받는 수계식은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네게 사미십계조차 수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름대로 깊은 연유가 있기 때문이니 크게 개의치 마라. 수계와 관계없이 넌 분명 소림의 속가제자이다.”
 “사존님······.”
 “네가 성년이 되면 모든 내력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방장님을 비롯한 사존들의 지시를 따르거라.”
 만공대사의 준엄한 표정에 용군휘는 잠시 고심하다가 다시 합장을 올렸다.
 “사존님, 저는 머리가 아둔해 어려운 절기는 터득하지 못합니다. 소림오권처럼 단순한 무술만 배울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절기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흐음, 어려운 주문이로구나.”
 만공대사는 서가의 비급들을 두루 살피면서 나직이 뇌까렸다.
 “반야바라밀다심공은 최고의 불문 절기이지만 워낙 심오하고, 나한십팔수는 초식이 현란해 혼자 배우기가 어렵다. 어린 나이에 달마삼검은 너무 벅차며 탄지신통은 높은 내공이 요구되기에 배워도 쓸모가 없구나.”
 그러다 그는 서가 아래쪽에서 한 권의 비급을 끄집어냈다.
 “그래, 이 무공이라면 네게 적합하겠다.”
 용군휘는 몇 쪽 되지 않는 얄팍한 책자를 받아들었다.
 
 <百步神拳>
 
 익히 들어본 무공에 용군휘는 감격에 젖었다.
 “아, 백보신권 절기로군요?”
 “그래, 네가 소림오권을 완벽히 터득했다면 무난히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시피 구결이 삼십삼 절에 불과해 반야심경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외울 수 있겠지?”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백보신권을 배우도록 해라.”
 “지금······ 말입니까?”
 “물론이다. 방장님의 허락 없이 장경각 밖으로 비급을 내가는 것은 금지돼 있다. 노납의 권한은 장경각 내부에만 있으니 이곳에서 읽고 외워야 한다.”
 용군휘는 책장을 넘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 제가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저녁 공양 전까지 외워야 한다. 다시는 들어올 수 없으니 네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만공대사의 단호한 어조에 용군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비급을 암기하는 것만이 자신을 위해 파격적으로 배려를 해준 사존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존님.”
 “그럼 두 시진 후에 오겠다.”
 만공대사는 그를 혼자 남겨둔 채 장경각을 나갔다.
 “후우, 고작 두 시진이라니.”
 바닥에 앉은 용군휘는 백보신권 비급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반야심경 한편을 암송하는 데만도 열흘이나 걸린 것을 감안한다면 삼십삼 절의 구결을 짧은 시간에 암기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모르는 글자까지 있어 머리에 담아두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아는 글자 위주로 기억한 후 모르는 글자는 그 형상을 통째로 뇌리에 새겨두었다.
 장경각 내에서 두 시진.
 그것은 그가 십삼 성상(星霜)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겹고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 외웠느냐?”
 만공대사의 마른 음성에 용군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소 울상이 되었다.
 “사존님, 벌써······ 두 시진이 지났습니까?”
 “그래.”
 “죄송합니다. 아직······ 다 외우지 못했습니다.”
 “글귀에 너무 연연할 것 없다.”
 만공대사는 백보신권 비급을 받아들고 본래의 자리에 꽂았다.
 “이제 나가 보아라.”
 “예, 사존님.”
 용군휘는 만공대사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
 “부족한 제자에게 이런 불연을 내려주셔서 감격할 따름입니다, 사존님.”
 “주방에는 네가 장경각 숙소를 청소하느라 늦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용군휘는 다시 합장을 올리고는 장경각 입구로 향했다. 한데 그의 등 뒤로 만공대사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의 일은 너만 알고 있어라, 군휘. 늙은 사형으로서 막내 사제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이니까.”
 용군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만공대사의 몇 마디가 그의 고막에 천둥처럼 울려 퍼진 것이다.
 ‘사제······? 사존님께서 날 보고 사제라고?’
 
 
 제 2 장 묘회(廟會)에서 만난 소녀
 
 
 1.
 
 
 두둥······ 두두둥······!
 야밤에 들려오는 북소리에 요사채의 일반 승려들뿐 아니라 각 전각의 대다수 승려들이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때는 자시를 조금 넘겼기에 용맹정진을 하는 선방의 선승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각이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고루에서 북이 울렸다는 것은 긴급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다행히 비상사태는 아니다.
 극히 드물지만 야밤에 종각에서 대종이 울려 퍼지면 그것은 외부의 침입을 의미한다. 그런 비상사태는 소림의 천년 역사상 다섯 번에 불과하다.
 행자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쳐 입었다.
 “아함,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시각에 북이 울릴 때도 있었나?”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신경이 다소 무딘 용군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열 살짜리 어린 행자가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군휘 행자님은 벼락이 옆에 떨어져도 주무실 분이야.”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며 세찬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행자들을 전문적으로 들볶는 현강 스님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높았다.
 “당장 일어나라! 긴급 사태다!”
 열린 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행자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절기상 소설이 지났으니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당연한 자연 현상이다. 한데 단순한 눈이 아니었다.
 폭설(暴雪)!
 세찬 눈보라와 함께 쏟아지는 눈은 벌써 섬돌 계단 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으아, 큰일 났네!”
 “맙소사! 언제 저렇게 눈이 쌓였지?”
 “어서들 나가자고!”
 행자들은 서둘러 자리를 개고 방을 나섰다.
 현강이 경험자답게 지시를 내렸다.
 “먼저 창고까지 길을 내라. 당주급 이하 모든 스님들이 나서 눈을 치울 것이다. 도구를 최대한 갖춰 각 전각으로 배달해라. 어서 움직여!”
 행자들은 급한 대로 방과 마당을 쓰는 빗자루와 삽을 찾아들고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암, 무슨 일이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 용군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잔뜩 부아가 치민 현강이 그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이 게으른 중생아! 이런 야단법석에도 잠이 오냐?”
 “무슨 일이죠, 스님?”
 “폭설이다! 당장 치우지 않으면 도량 전체가 눈에 묻히게 된다! 네게는 산문까지 눈을 치울 기회를 주겠다! 어서 움직여!”
 “아, 눈이 왔군요?”
 용군휘는 해맑은 웃음을 짓고는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그는 어렵사리 구한 누비옷을 덧대 입고는 방을 나섰다.
 건곤일색(乾坤一色).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에 지금이 야심한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지붕 위로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얀색 일색이었다.
 앞서 나선 행자들이 부지런히 눈을 치우며 길을 내고 있었다. 얼마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눈 속에 형성된 통로는 한길이나 깊어 보였다.
 한데도 폭설은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긴급 상황이었다.
 섬돌 위에 선 용군휘는 엄청난 폭설을 보며 감탄에 젖었다.
 “와아, 장하게도 내리시네.”
 그의 기억에도 육칠 년 전 이런 폭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는 아침 무렵이라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기에 이렇듯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 자식, 한가하게 눈이나 감상하고 있어!”
 현강이 뒤에서 걷어차는 바람에 용군휘는 마당에 수북하게 쌓인 눈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이를 본 행자들 몇이 용군휘를 구하기 위해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이 참, 현강 스님은 너무 하셔.”
 “군휘 행자가 다소 굼뜨기는 해도 착실하잖아?”
 “이번은 너무 심했다.”
 눈 속에 처박힌 용군휘는 겨우 자세를 돌려 바닥을 딛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데 두 발이 눈 속으로 파고들어 얼굴만 겨우 눈 위로 내밀 수 있었다.
 “와아, 정말 많이 쌓였구나?”
 용군휘는 두 손으로 눈을 헤집으면서 눈을 뭉쳐 허공으로 던지기도 했다. 눈을 즐기는 어린아이다운 장난기가 역력했다.
 이때 눈보라를 뚫고 누군가 날아들었다.
 청년 승려는 수북한 눈을 밟고 뛰면서도 전혀 빠지지 않았다. 그저 얕은 흔적만 남길 뿐이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는 상승 경공술이었다.
 승려는 머리에 삿갓을 쓰고 짚으로 만든 눈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바로 십계승 중 한 명인 정윤대사였다.
 그는 눈에 빠져 있는 용군휘를 발견하고는 끄집어내 주었다.
 용군휘는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쾌감에 탄성을 토했다.
 “와아!”
 정윤은 용군휘를 섬돌 위에 내려주었다.
 “눈을 우습게보지 말게, 군휘 행자. 함께 눈을 치워야지, 혼자 치우려 했다가는 눈 속에 묻히고 말아.”
 “알겠습니다, 스님.”
 “이걸 걸치게나.”
 정윤은 자신이 입고 있던 눈옷을 용군휘의 어깨에 걸쳐 주고는 삿갓까지 벗어 머리에 씌워 주었다.
 “오셨습니까, 사숙.”
 현강은 합장을 올리며 힐끗 용군휘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 용군휘가 정윤에게 눈 속에 처박힌 과정을 고자질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윤은 마주 합장을 취하고는 차분하게 요구했다.
 “눈을 치울 도구와 바닥에 깔 가마니를 나한전으로 가져가야겠소.”
 “송구합니다, 사숙. 행자들을 시켜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니오. 행자들이 무거운 도구를 들고 눈을 헤쳐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오. 이런 폭설은 행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요사채 부근만 치우도록 조치하시오.”
 “알겠습니다, 사숙.”
 “수고하시오.”
 정윤은 훌쩍 몸을 날려 창고 쪽으로 날아갔다. 한번에 오륙 장을 건너뛰는 그의 모습은 비호처럼 날렵했다. 행자들은 그의 상승 경공을 지켜보느라 잠시 눈을 치우는 일도 잊었다.
 현강은 삿갓과 눈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한 용군휘를 보고는 고깝다는 눈빛을 지었다.
 “너 같은 골칫덩이를 비호하는 스님들이 정말 많구나. 대체 네 녀석의 어디가 그렇듯 예쁜지 모르겠다.”
 “······.”
 “제대로 갖춰 입었으니 너는 지붕으로 올라가 눈을 치워라. 당장 올라가!”
 “예, 스님.”
 용군휘는 사다리를 타고 숙소 지붕 위로 올라갔다.
 휘이이잉······!
 세찬 바람은 중심을 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는 최대한 자세를 낮춰 균형을 잡고는 밀대로 지붕에 쌓인 눈을 처마 끝으로 밀어냈다.
 삿갓과 눈옷을 갖춰 입었지만 세찬 눈보라 때문에 그는 이내 눈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손끝은 저리고 몸은 고되고 누비옷 틈새로 차디찬 한기가 스며든다. 한데도 그는 괴롭고 힘든 줄을 몰랐다.
 사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행자 생활은 경이적인 인고의 세월이라 할 수 있었다. 건장한 사람도 삼년을 버티기 힘들다는 행자 시절을 무려 칠 년씩이나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의 몸이 비교적 튼튼하기도 했지만 근심과 고뇌가 없는 그의 유유한 성격 때문일 수 있었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괴로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호된 꾸지람을 받아도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불가에서 금하는 오욕칠정의 경지를 넘어선 고승처럼 그는 현실의 삶에 언제나 만족할 수 있었다.
 불타의 미소처럼 평온한 심성이 그를 유지시켜 준 가장 큰 힘이었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눈보라가 다소 잦아들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용군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용마루에 걸터앉았다.
 한 눈으로 다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드넓은 소림의 경내가 눈 속에 파묻혀 어느 곳이 불당이고 어느 곳이 수림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수백의 승려들이 불당 지붕 위에 쌓인 눈을 밀어내고 마당을 치우고 있지만 폭설을 깔끔하게 치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불당마다 겨우 지날 수 있는 통로를 미로처럼 만들어 낼 뿐이었다.
 용군휘는 시선을 돌려 사찰 밖을 살펴보았다.
 세상이 온통 희었다.
 소실봉을 비롯한 숭산 전체가 두터운 눈에 묻혀 능선과 계곡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뚝-뚝-와지끈-!
 설경 속에 울려 퍼지는 나무들의 비명소리에 용군휘는 처음으로 가슴 저리는 슬픔을 느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왠지 슬펐다.
 슬픔······.
 그것은 그가 소림에서 지내오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릴까?’
 슬픔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가슴 속에 피어오른 감정이 슬픔인지 모른다.
 용군휘는 항상 즐겁고 편안한 기분으로 살아왔기에 가슴이 저리고 아픈 감정이 싫었다.
 슬픔은 고통이었다. 천수경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밤새 무릎을 꿇은 채 벌을 받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용군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싫다. 이런 기분은 싫어.”
 그는 다시 눈을 밀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밀려드는 서글픈 감정을 씻기 위해 그는 밀대로 힘차게 눈을 밀어내면서 백보신권의 구결을 뇌까렸다.
 “마음은 산을 가르고 주먹은 벼락을 치듯 움직인다. 발끝은 기러기가 내려앉듯 사뿐하고 한번 내디디면 무지개를 밟고 오르듯 가뿐하며······.”
 장경각 주지 만공대사의 배려로 그는 소림의 대표적 절기 중 백보신권 비급을 볼 수 있는 불연을 입게 되었다.
 백보신권은 상당한 내공이 있어야만 위력을 발휘하는 상승절기이지만 내공이 없어도 일반 권법처럼 펼칠 수 있다.
 대신 백보 밖의 적도 쓰러뜨린다는 백보신권 본연의 위력은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백보신권은 소림오권을 훨씬 능가하는 위력적인 무공임은 분명하다.
 백보신권의 구결을 외우자 용군휘는 아련한 슬픔을 씻어내고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헤, 역시 이래야 나다워. 슬퍼지는 것은 싫어. 슬프면 화가 나니까.”
 한껏 기분이 풀린 용군휘는 본래의 그가 되어 열심히 눈을 밀어냈다. 한데 너무 흥에 겨워서일까. 기와를 딛고 선 발이 미끈하면서 지붕을 타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이쿠!”
 그는 주변을 마구 더듬었지만 온통 살얼음이 덮인 기와뿐이라 미끄러지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재수가 좋아 수북한 눈 위로 떨어진다면 약간의 타박상을 입을 뿐이겠지만 행여 돌계단 위로 떨어지면 큰 부상을 면치 못한다.
 용군휘는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은 상관없었다. 다만 부상 때문에 쌀을 씻지도 못하고 물을 길어오지도 못하는 몸이 될 것을 우려하였다.
 처마 끝에서 미끄러진 용군휘는 하필 돌계단 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비명소리에 지켜보던 몇몇 행자들이 놀라 외쳤지만 그들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이고, 이를 어째!”
 “저것 봐! 군휘 행자가 떨어진다!”
 행자들을 관리하던 현강 역시 안색이 해쓱해졌다. 만일 행자가 크게 다치면 관리 소홀로 계율원에서 심한 문책을 받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용군휘는 돌계단 위로 곤두박질치며 허우적거렸다.
 “으아아!”
 한데 이때였다.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날아들며 용군휘를 받아 안았다.
 노승은 용군휘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눈을 상큼 치켜떴다.
 “아니, 넌 군휘가 아니더냐?”
 노승을 대한 용군휘는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에 얼른 배례를 올렸다.
 “사······ 사존님을 뵈옵니다.”
 노승은 구레나룻과 풍성한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마치 사자와 같은 용모는 승려로서는 다소 험상궂었지만 오랜 수도 생활 덕분에 그 우악스러움이 위엄으로 바뀌어 있었다.
 법공(法空)대사.
 바로 소림 승려들의 행실과 마음가짐을 관리 감독하는 계율원(戒律院) 주지였다.
 그는 공자 항렬의 막내로서 다소 다혈질이었지만 판결은 엄정했다. 그가 계율원 주지를 맡은 이후 계율을 어긴 승려가 절반으로 줄어들 만큼 그는 소림 제자들을 철저하게 감독했다.
 법공대사는 용군휘를 덥석 안아 일으키고는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다친 데는 없느냐? 어디 상한 데는 없어?”
 “괜찮습니다. 사조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미타불······.”
 “오냐, 다치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다.”
 뒤미처 다가선 현강이 법공대사에게 합장을 올렸다.
 “오셨습니까, 사숙조님.”
 현강을 쏘아보는 법공대사의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이 한심한 중놈아! 네가 어쩌자고 어린 군휘에게 위험한 지붕 청소를 시킨 것이더냐?”
 법공대사는 현강의 멱살을 와락 쥐고는 마당으로 내던졌다.
 퍼억!
 그나마 통로를 내기 위해 눈을 수북하게 쌓아둔 곳으로 처박혀 다행이었다. 급히 눈을 헤치고 나온 현강은 법공대사 앞에 부복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요······ 용서하십시오, 사숙조님.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 듣기로 네놈이 사사로이 행자들을 괴롭힌다고 하더구나. 네놈이 행자 시절 당했던 고된 생활을 분풀이라도 할 생각이더냐?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을 품었다면 네놈은 소림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사숙조님, 제자는 그저 행자들이 사념에 빠지지 않도록 근면한 생활을 시켰을 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한데 왜 군휘 행자는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냐? 내가 계율원 제자들을 통해 확실히 들어 알고 있으니 감히 허튼소리를 할 생각은 마라”
 “아닙니다, 사숙조님. 군휘가 다른 행자에 비해 게으르고 행동이 굼떠 몇 번 주의를 주었을 뿐,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께 맹세합니다, 사숙조님.”
 현강이 눈물까지 흘리며 고하자 법공대사는 근엄한 표정을 다소 풀었다.
 “내가 군휘를 특별히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가 행자들을 너무 들볶아 원성이 높다기에 너를 꾸짖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님을 모시는 제자들이니 동문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알겠느냐?”
 “예, 사숙조님.”
 “한번 더 불미스런 얘기가 내 귀에 들리면 네놈을 계율원 토굴에 가둬 한 달 동안 금식 참회를 시킬 것이다. 깊이 명심하렷다!”
 법공대사는 단단히 주지시키고는 용군휘를 데리고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주변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자 법공대사는 용군휘를 가슴에 안고는 다독였다.
 “아미타불! 가련하구나, 군휘야. 네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다니 정말 안타깝다.”
 “사존님······?”
 “오, 오냐.”
 법공대사는 얼른 용군휘를 놓아주고는 표정을 관리했다.
 “확실히 다친 데는 없으렷다?”
 “네, 사존님.”
 “어려움이 있으면 정원을 찾아가 고할 것이지,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느냐?”
 “전 아무런 어려움도 없습니다. 현강 스님도 잘 대해 주십니다.”
 “현강 그놈이 그마나 주방 관리를 잘 하기에 봐주는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계율원 토굴에 처넣었을 것이다.”
 용군휘는 만공대사도 그렇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법공대사까지 자신을 비호해 준다는 사실에 자부심보다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존님, 한갓 행자인 저를 너무 후하게 대해 주시면 제 생활이 더 어렵습니다. 다들 저를 불편하게 생각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참고 지켜보려 했는데 네가 지붕에서 눈을 치우다 떨어지는 것을 보니 부아가 치밀지 않았겠냐?”
 “한데 만일 다른 행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저처럼 대해 주실 건가요?”
 “그야 아니지······.”
 법공대사는 고개를 내젓다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 똑같이 대해줄 것이다. 네가 특별한 행자는 아니지 않느냐?”
 “정말 제가 특별하지 않은 거죠?”
 “물론이다. 넌 절대 특별하지 않아.”
 법공대사는 재삼 강조했지만 왠지 어색함이 느껴졌다.
 용군휘는 공손하게 합장을 올렸다.
 “제가 특별한 행자가 아니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을 치워야 하거든요.”
 “암, 그래야지.”
 법공대사는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젓다가 얼른 용군휘를 막아섰다.
 “군휘야, 혹시 내게 부탁하고 싶은 일은 없느냐? 필요한 물품이라든가 주방 일이 힘들면 다른 전각으로 배치해 달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없습니다, 사존님.”
 “잘 생각해 봐라. 사실 칠 년 동안 행자 생활을 겪은 네가 너무 가여워서 하는 말이다.”
 법공대사의 진지한 모습에 용군휘는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가 물었다.
 “정말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어요?”
 “허헛, 물론이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만 빼고는 뭐든 들어 주겠다.”
 “그럼······ 이번 춘절 때 묘회를 구경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묘회 구경을?”
 “예, 제가 가끔 소향촌까지 내려가 보기는 했지만 묘회는 한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어요. 스님들 말씀에 볼거리가 많대요.”
 법공대사는 사자수염을 어루만지고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삼십 년 면벽 수행을 한 선승도 토굴에서 나오면 세상 소식을 궁금해 하는데, 어린 네가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 소향촌 출입은 계율원 소관이니 어렵지 않다.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게다.”
 “고맙습니다, 사존님.”
 용군휘는 환한 표정으로 합장을 올리고는 눈을 치우기 위해 달려갔다.
 법공대사는 그와 좀더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 연신 입맛을 다셨다.
 “허허, 고놈 참. 언제 저렇게 컸어. 옹알거리며 내 수염을 움켜쥐었던 갓난아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야.”
 
 
 2.
 
 
 춘절(春節)
 새해 첫날을 일컫는 춘절은 민간에서 사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춘절서부터 최고의 명절이라는 정월 보름인 원소절까지 민간은 어디를 가도 명절 분위기에 들떠 있다. 대륙 북방에서도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시기이기에 사람들의 왕래와 물자의 교류가 빈번해진다.
 묘회는 명절 즈음에 사찰이나 공묘(孔廟: 공자를 모신 사당), 관제묘 부근에서 개최되는 민간 공연을 말한다.
 묘회에서는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된다.
 춤꾼, 가인, 악사들이 자신들의 재주를 뽐내고 희사금을 받는가하면 유랑극단의 공연도 전개된다.
 볼거리가 풍부하니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자연히 먹거리 장터도 생겨난다. 또한 공예품과 각 지역의 토산품이 전시되면서 묘회는 신명나는 축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천하제일의 대사찰 소림사 근경에서 묘회가 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소림사는 무림계에서도 유명하지만 불심이 깊은 신도들에게는 영험함으로 더 유명한 사찰이다. 매일 같이 소림사를 찾는 방문객만 수백 명이며 각 전각에서 치러지는 불공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향촌(少香村).
 소림사 산문과 인접한 마을은 불제자들이 부처님께 올릴 홍초와 향을 주로 판매하기에 소향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 소향촌에서 벌어지는 묘회는 하남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소문날 만큼 유명했다. 하기에 춘절 전부터 상인들이며 유랑극단들의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그러나 소향촌에서는 함부로 주먹다짐을 벌일 수 없다.
 묘회의 질서를 감독하고 쾌적한 공연 문화를 관리하기 위해 소림사의 무승들이 묘회 기간 내내 파견되기 때문이다.
 만일 소림 무승의 권고를 무시하면 다시는 소향촌 묘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기에 대부분의 공연과 상거래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와아, 정말 사람이 많네?”
 난생 처음 소향촌 묘회를 구경하게 된 용군휘는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가 바뀌어 그도 이제 열네 살이 되었지만 아직 치기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소림사 경내에서 지냈기에 오히려 민간의 아이들보다 보고 듣는 게 부족했다. 하기에 그는 묘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채고교에도 감탄을 토했다.
 채고교(?高?)란 높은 나무다리에 두 발을 묶고 올라서서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공연을 말한다.
 채고교를 연출하는 춤꾼이며 노래꾼들은 높은 나무다리 덕분에 키가 일장에 달해 모든 구경꾼들이 멀리서도 즐겨 볼 수가 있었다.
 용군휘가 포함된 소림사 승려 일행은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공연을 구경하면서 장터에 이르렀다.
 인솔자는 현어(玄語).
 그는 주방에서 쓰이는 부식 조달 담당이었다.
 소림사에서는 대부분 산에서 나물을 캐고 밭을 갈아 채소를 키워 웬만큼 충당하지만 부족분은 시장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다.
 특히 산나물을 캘 수 없는 겨울에는 대부분 소향촌에서 구입해 소림사까지 지어 날라야 한다.
 용군휘는 부식 조달을 위해 사미승들을 따라 소향촌까지 몇 번 내려온 적이 있었지만 묘회 기간에 소향촌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행자들은 아직 수행하는 신분이기에 떠들썩한 묘회를 구경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는데, 이번 춘절부터 규정이 조금 바뀌었다.
 계율원 주지인 법공대사가 삼년 차 이상의 행자라면 묘회 기간 때라도 소향촌 출입을 허가한다고 공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용군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특별 배려다. 하지만 행여 용군휘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치를 내린 셈이다.
 덕분에 용군휘는 행자들 중에서 세 번째로 부식 구입 행렬에 포함돼 소향촌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인솔자 현어는 소림사의 여느 승려와 달리 입담이 뛰어나고 농담을 잘 했다. 상인들과 거래를 하려면 나름대로 흥정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의 부식 구매 담당 직책은 아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가들아, 국수 한 그릇씩 사줄까?”
 현어는 나이 어린 사미승과 행자들을 아예 애들 취급했다.
 사미승 하나가 합장을 취하며 아주 좋아했다.
 “예, 사숙. 일전에 한번 국수 파는 집을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먹고 싶어서 혼났어요.”
 “허어, 명파(明波). 사미십계 중에서 끼니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는 계율을 잊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사숙.”
 명파가 주눅이 들어 목을 움츠리자 현어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계율은 계율일 뿐 너무 구애받지 마라. 사람이란 금할수록 더욱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국수 한 그릇 먹고 나면 다시는 국수 생각 때문에 참선을 그르치는 법이 없을 게다.”
 현어는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였지만 득도한 고승처럼 융통성이 많았고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현어는 용군휘와 세 명의 사미승들을 이끌고 노천 반점으로 들어갔다.
 반점 주인은 현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이고, 스님. 모처럼 우리 집을 찾아주셨구려?”
 “아미타불, 보시를 하시겠다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사미들과 함께 국수를 먹고 싶습니다.”
 “잘 오셨소. 어서 앉으시오.”
 주인은 용군휘와 사미승들에게 합장을 취하며 호의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린 부처님들이 찾아주셨으니 이제 우리 가게는 번성할 것이오.”
 사미승들은 반점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게 처음이라 아주 신기한 듯 젓가락 통을 만져보고 차를 마시며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명파가 용군휘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군휘, 너도 묘회 구경을 하기는 처음이지?”
 “예, 스님.”
 “그냥 명파라고 불러도 돼. 우리는 동기잖아? 사실 행자 생활은 네가 훨씬 선배인데 말이야.”
 명파는 삼년 전 행자로 들어와 지난 해 사미계를 받아 정식 제자가 되었다. 계를 받은 승려와 행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에 행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승려에게 공손해야 한다.
 용군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명파 스님, 규칙은 규칙입니다. 스님은 계를 받은 정식 제자이고 전 아직 행자잖아요?”
 현어가 둘의 대화를 듣고는 중재를 서주었다.
 “명파도 군휘를 군휘 행자로 칭하고 존칭을 해라.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이니까.”
 이때 점소이가 국수를 내왔다.
 승려들을 위한 배려로 국수에는 파와 계란이 전혀 첨가되지 않았다. 그래도 용군휘와 사미승들은 아주 맛있게 국수를 먹었다.
 현어는 느긋하게 국수를 즐기며 농을 늘어놓았다.
 “일전에 이곳에서 국수를 먹은 적이 있었다. 한데 주인이 국수에도 고기가 들어가야 제 맛인데 고기는 어찌할까 묻지 뭐겠니?”
 명파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당연히 고기는 빼라고 말씀하셨겠죠?”
 “아니다.”
 “예에? 그럼 고기를······.”
 현어는 사미승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내가 주인한테 말했지. 고기는 남들 안 보게 밑에 깔아 주시오!”
 현어의 짓궂은 농담에 용군휘와 사미승들은 입에 물고 있던 국수를 일제히 뿜어내야 했다.
 “푸하!”
 “아유, 사숙도 참!”
 
 채소 장터에 이르자 현어는 용군휘와 사미승들을 돌아보았다.
 “흥정을 하고 짐을 꾸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게다. 멀리는 가지 말고 공연이나 구경하고 있어라. 행여 사기꾼들에게 속아 도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 스님!”
 현어의 배려 덕분에 용군휘와 사미승들은 잠시나마 자유롭게 묘회를 두루 구경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미승이 짝이 되고 용군휘는 명파를 짝으로 삼았다.
 털모자를 쓰고 누비옷을 걸친 둘은 곳곳에서 전개되는 공연을 기웃거리며 가벼운 웃음거리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순간만큼 그들은 소림의 제자며 행자가 아니라 세상 구경을 나온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때 사람들 대다수가 유랑극단 쪽으로 몰려갔다.
 “예극이 시작됐다!”
 “어서 가세나. 요즘은 패왕극(覇王劇)이 유행이라면서?”
 “사실 패왕보다는 우(虞)미인의 마지막 춤이 더 애절해.”
 극단 주변으로 관객들이 둘러서자 명파는 용군휘와 함께 예극을 보러 갔다.
 예극(豫劇)은 하남 지역에서 성행하는 지방희를 말한다.
 노래와 춤, 연주로 이루어진 예극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보는 연극으로 한편의 예극에는 웃음과 감동이 한데 녹아 있다.
 용군휘는 명파와 함께 패왕극을 보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그러다보니 각자 보기 편한 자리를 찾기 위해 헤어지게 되었다.
 ‘괜찮겠지? 뭐, 오래 구경할 상황도 아니니까.’
 용군휘는 투실투실한 두 뚱보 사이의 공간을 통해 겨우 예극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데 누군가 그와 머리를 맞댔다.
 “······?”
 용군휘가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먼저 두 개의 까만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숨소리를 느낄 만큼 그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사람은 또래의 소녀였다. 그가 보석으로 생각한 것은 소녀의 반짝이는 눈망울이었다.
 소녀의 긴 머리는 부스스했고 이마에 새끼줄을 둘렀다.
 두 눈은 놀랄 만큼 예뻤지만 조금은 부족함이 느껴져 정상적인 소녀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옷차림도 몹시 허름해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면 영락없는 거지소녀.
 한데도 소녀의 미소는 티 없이 맑았고 사르르 눈웃음을 짓는 눈매에도 전혀 그늘이 없어 보였다.
 용군휘는 여인과 이렇듯 가까이 접하기도 처음이라 깜짝 놀라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거지소녀는 재미있어 하는 눈빛으로 용군휘의 털모자와 누비옷을 훑어보고는 합장을 흉내 냈다.
 “아미······ 아미······ 타불, 맞아?”
 용군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정색을 했다.
 “여시주, 출가인을 놀리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거지소녀는 그가 물러선 만큼 바싹 다가섰다.
 “호호, 시주래. 난 시주가 아니라······ 치치(癡癡)야, 치치.”
 소녀의 눈빛은 나른했고 눈썹이 가끔씩 절로 움직였다. 정서적으로 결함이 있는 장애아인 듯싶었다.
 용군휘는 그녀가 너무 가까이 달라붙자 조금 더 물러섰다.
 “나······ 난 소림사의 행자 용군휘요. 누가 시주의 이름을 치치라고 지었는지 몰라도 크게 잘못됐소. 차라리 치치(稚稚)가 시주에게 더 어울리오. 어리고 귀엽다는 뜻이오.”
 “어쨌든 난 치치야.”
 치치는 용군휘의 누비옷을 매만지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따뜻하겠다······ 난 너무 추워.”
 용군휘는 홑겹 옷만 입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누비옷을 벗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누비옷도 한 벌 뿐이라 홑겹 승복만으로는 산중의 추위를 견딜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누비옷도 소림의 재산이기에 함부로 내줄 처지가 못 되었다.
 “미안하오. 도움을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한데 이때였다. 사내의 우악스런 손이 거지소녀의 머리채를 와락 쥐었다.
 “이 도둑년! 여기 있었구나!”
 “아악!”
 “내 돈 어디 있어? 쬐그만 게 벌써부터 도둑질이냐?”
 우락부락한 체구의 털보가 거지소녀를 질질 끌고 갔다. 동료로 보이는 두 청년이 거지소녀를 걷어찼다.
 “나쁜 계집! 불쌍한 거지라 재워주고 먹여 주었더니 재물을 훔쳐 달아나?”
 “그래서 이런 거지한테 인정을 베풀면 안 된다니까!”
 거지소녀는 끌려가면서 주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난 죄 없어요! 살려 줘! 난 몰라요!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아요!”
 몇몇 사람들이 나서려 하자 털보의 동료가 그들을 제지했다.
 “허어, 도둑년을 잡아갈 뿐이니 나서지 마슈.”
 “공연히 끼어들었다가는 공범으로 몰릴 수 있수다.”
 두 청년이 허리춤의 칼까지 움켜쥐며 위협을 가하자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그······ 그런 거요?”
 “도둑년을 잡아가는 거라면 잘하는 일이지.”
 털보는 거지소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 두 청년을 대동하고는 인파를 뚫고 사라졌다.
 용군휘는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치치가 도둑이었단 말인가?’
 그로서는 왠지 믿기지 않았지만 치치의 결백을 입증할 길이 없기에 치치를 옹호할 수가 없었다.
 만일 치치가 진짜 도둑일 경우 그마저 도둑으로 몰릴 것이며, 이 사건이 크게 불거지면 그는 소림의 명예를 훼손한 벌로 계율원에서 징계를 면치 못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배려해준 법공대사를 생각해서도 불필요한 소란은 피해야 했다.
 한데 늙수그레한 음성이 그의 고막으로 흘러들어갔다.
 “허어, 못된 놈들! 불쌍한 거지 계집을 또 끌고 갔군 그래?”
 깜짝 놀란 용군휘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털모자를 쓴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아직 어린 계집인데, 노예로 팔려가거나 재수 없으면 매음굴로 팔려가겠어.”
 용군휘가 합장을 취하고는 물었다.
 “할아버지, 거지소녀를 잡아간 사람들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근경에서 악명 높은 불한당이지. 떠돌이 거지나 연고 없는 아이를 유괴해 노예로 파는 인간 백정들이다.”
 “한데 왜 보고만 계셨습니까?”
 용군휘가 따져 묻자 노인은 용군휘를 훑어보고는 점잖게 타일렀다.
 “동자승은 그나마 승복을 입고 있어 다행이군. 만일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면 거지소녀 대신 저놈들에게 끌려갔을 테니까. 놈들은 서로 짜고 유괴를 계획한 불한당이라 함부로 나섰다가는 봉변을 면치 못해. 게다가 만에 하나 놈들 말대로 거지소녀가 도둑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용군휘는 노인의 변명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거지소녀의 결백을 믿었다.
 부족함이 느껴질 만큼 순순한 소녀의 눈빛에는 사악한 욕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남의 돈을 훔친 진짜 도둑이라면 홑겹 옷만 입고 추위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중대한 고민.
 용군휘는 난생 처음 갈등과 혼란에 휩싸였다.
 양심과 도리로 판단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거지소녀를 구해주어야 옳다. 하지만 행자 신분인 그는 사소한 일에도 허락을 구하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가 단순히 정의감에 사로잡혀 불한당과 충돌할 경우 모든 책임은 그를 인솔한 현어 스님과 그를 내보내 준 계율원 주지 법공대사에게 돌아간다.
 ‘어떻게 하지? 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왜 내가 하필 그 거지소녀를 만났단 말인가?’
 머리를 감싸 쥐고 고뇌하던 그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분노!
 십사 년 동안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 속에 치솟아 올랐다. 얼마 전 눈을 치우면서 느꼈던 슬픔에 이은 또 다른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이다.
 ‘이건 불의(不義)야! 불의를 방관하는 것 또한 불의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유괴범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 3 장 태실봉의 절지, 금마암(禁魔庵)
 
 
 1.
 
 
 좌아악-!
 거지소녀 치치의 홑겹 옷이 털보의 우악스런 손길에 찢겨져 나갔다.
 “아악!”
 치치는 몸부림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털보의 수하로 보이는 두 청년에 의해 팔다리가 제압된 상태라 소리를 치는 것 외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털보는 치치의 볼을 세차게 때려 비명소리를 다소 잠재우고는 벌거숭이로 변한 치치의 알몸을 쓰다듬었다.
 “크흐,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다 컸군그래?”
 치치의 팔다리를 찍어 누르고 있던 두 청년도 탐욕스런 눈빛으로 치치의 알몸을 훑어 내렸다.
 “헤헤, 타고난 색녀입니다요, 두령.”
 “살살 눈웃음 칠 때부터 알아보았지요. 청루에 내다팔면 큰 돈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털보는 치치의 젖가슴을 덥석 쥐었다.
 “크흣, 그 전에 확실히 길을 놓아야지.”
 그가 허리춤을 끌어내리자 두 청년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히힛, 물건이 상할 수 있으니 살살 다루십시오, 두령.”
 치치는 정서적으로 약간의 장애가 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안돼-안돼!”
 치치가 몸부림을 치며 악을 써대자 털보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년아,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어. 너 같은 계집 하나 죽이는 일은 버러지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털보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고는 아랫도리를 밀착시켰다.
 한데 치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털보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런, 젠장!”
 털보는 무자비하게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입안이 헤진 거지소녀는 붉은 피를 흘렸다.
 털보는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흣, 네가 이 어르신만 잘 모시면 청루로 넘기지 않고 몸종으로 삼아줄 수도 있다. 너 같은 비렁뱅이 계집한테는 엄청난 호강이지.”
 그가 몸을 밀착해오자 치치는 혼몽 중에서도 도리질을 해댔다.
 “안돼······ 안돼!”
 한데 이때였다. 허름한 헛간의 문이 부서질 듯 젖혀졌다.
 콰직!
 깜짝 놀란 털보 일행이 돌아보니 털모자에 누비옷을 걸친 어린 승려였다. 소향촌은 소림사의 관할 경내이기에 그들은 승려를 대하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용군휘는 막 치치를 범하려던 털보를 홱 밀쳤다.
 치치가 황급히 몸을 웅크리자 용군휘는 차마 그녀의 알몸을 볼 수가 없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그는 자신의 누비옷을 벗어 치치에게 건넸다. 누비옷을 걸쳐 입은 치치가 용군휘에게 매달렸다.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알았어. 걱정 마.”
 용군휘는 그녀를 안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굽어보시는데 어떻게 이런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허리춤을 끌어올린 털보는 상대가 혼자인데도 나이 어린 사미승임을 파악하고는 흉심을 드러냈다.
 “어린 스님은 소림의 제자이신가?”
 용군휘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행자의 신분이지만 소림의 제자인 것은 맞습니다.”
 행자라는 말에 털보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두 졸개에게 눈짓을 보냈다.
 “크흣, 사미계도 받지 못한 행자시라고? 그렇다면 아직 소림사의 제자라고 행세할 수가 없지. 뭐 소림의 땡추라고 해도 우리 일을 방해한다면 곤란하지만 말이야.”
 두 졸개 중 한 명이 냅다 용군휘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다른 한 명이 치치를 떼어냈다.
 졸개 하나가 용군휘를 일으켜 세우고는 주먹질을 가했다.
 “이 새끼, 고작 행자 주제에 감히 두령의 즐거움을 방해해?”
 퍼퍼퍽-!
 용군휘는 몇 번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채여 바닥을 굴렀다.
 이를 본 치치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흑흑, 군휘. 군휘, 어서 피해.”
 털보는 치치가 용군휘의 이름을 거론하자 한 통속으로 옭아맸다.
 “크흣, 알고 보니 도둑년과 한 패였군. 소림사의 행자가 아니라 가짜 중 노릇을 하는 사기꾼이었어.”
 그는 치치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두 졸개에게 명했다.
 “죽여도 상관없다. 확실히 밟아줘라.”
 “예, 두령.”
 두 졸개는 용군휘가 소림의 정식 제자가 아닌 것을 확신했기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가했다.
 퍽-퍼퍽!
 용군휘는 두 졸개에게 뭇매를 당하면서 처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 동안 넘어져 다치거나 잘못으로 매를 맞았을 때는 그저 아픔만 느꼈을 뿐이다. 순간의 아픔이라 금세 잊을 수 있기에 고통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데 두 졸개의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지독한 고통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고통과 분노!
 그동안 단조롭게만 살아온 그의 감정이 복잡해지면서 그의 가슴에서 난생 처음 살의(殺意)마저 치솟아 올랐다.
 “이야아!”
 용군휘는 가슴의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퍼퍼퍽!
 소림오권 중 호권이 전개되면서 두 졸개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 명은 코가 깨져 코피가 흘렀다.
 “어라, 이 새끼 봐라?”
 “감히 우리를 쳤어?”
 용군휘는 호권연골의 자세를 취했다.
 “당장 치치를 풀어주고 물러가세요!”
 털보는 용군휘의 자세를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크흣, 소림오권 중 호랑이 권법이로군? 소림오권이 어디 무술인가? 우리 애들도 알고 있는 몸 풀이 체조일 뿐이지. 얘들아, 저 새끼 죽여 버려.”
 “예, 두령.”
 두 졸개는 용군휘의 좌우로 흩어지며 각기 권법 자세를 취했다. 소림오권 중 학권과 사권이었다.
 “헤헷, 호권을 제압하는 데는 학권과 사권이면 충분하지.”
 “어린 땡추, 이제 넌 죽었다.”
 두 졸개는 기합을 지르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주먹을 교환했다.
 체격적으로 왜소하다 해도 용군휘는 정식으로 수년 동안 소림오권을 수련해 온 숙련자였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흉내만 내는 두 졸개와는 확실히 비교가 되었다.
 “호장파풍-맹호신요!”
 용군휘는 구결을 외치면서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빠-빠악!
 한 명은 관자놀이를 맞고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전중혈을 강타당해 엎어졌다. 내공이 깃들이 않은 주먹이라도 숙련된 호권은 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졸개들이 감당하기에 상당히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두 졸개가 쓰러지자 털보의 눈자위가 심하게 씰룩거렸다.
 “크흣, 소림사의 행자는 확실하군. 소림오권을 제대로 배웠어.”
 그는 치치를 홱 밀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오냐, 내가 상대해 주겠다.”
 그가 윗도리를 벗어던지자 상처로 얼룩진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다. 일견해도 상당한 외공의 소유자로 보였다.
 털보는 두 손을 교차하다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뒈져!”
 그의 주먹질은 단조로우면서도 빨랐다.
 사파의 권법 중 하나인 귀랑권(鬼狼拳)이었다. 귀랑권은 굶주린 늑대가 토끼를 사냥하듯 신속했으며 상대의 사혈만 노리는 악독한 권법이기도 했다.
 퍼-퍼퍽-!
 몇 초를 겨루는 사이 용군휘는 입술이 깨지고 가슴 자락이 찢기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상대가 삼류에 불과한 악당이라 해도 대전 경험이며 완력에서 앞섰기에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치치는 자신의 울음소리에 행여 용군휘가 신경을 분산시킬 것을 우려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용군휘는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살아오면서 모두가 그녀를 괴롭히려 했지 이렇듯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에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용군휘의 존재에 그녀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군휘는 소림오권을 번갈아 구사했지만 자신의 권법을 맞고도 끄떡없는 털보의 외공에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헉헉, 도저히······ 상대가 안 돼.’
 그러다 치치를 힐끗 본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치고 쓰러지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쓰러지면 한 소녀의 삶이 망가진다.’
 치치가 그와 전혀 무관한 소녀이지만 대자대비는 석가여래의 가르침 중 으뜸이다. 아니, 그가 소림사의 제자가 아니라도 이런 불의는 방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털보는 피로 물든 용군휘를 보고는 오만을 떨었다.
 “이 어르신은 엽동(葉銅)이다. 등봉 일대에서는 흑산랑(黑山狼)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네놈은 내 손에 맞아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용군휘는 현저한 역부족을 절감하면서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수하들을 데리고 떠나세요.”
 “크흣, 어린 새끼가 정말 골통이로군.”
 엽동은 괴소를 터뜨리고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바람소리가 예리하다. 일권은 어찌 피할 수 있겠지만 다음 변화가 문제다.
 일순 용군휘의 뇌리 속으로 하나의 구결이 피어올랐다.
 백보신권!
 그가 백보신권의 구결을 모두 해독한지는 얼마 되지 않아 수련이 아직 미흡했다.
 무엇보다 공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백보신권으로 과연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백보신권이 그가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두 발을 넓게 벌리고 선 그는 크게 원을 그리다가 힘차게 주먹을 뻗어냈다.
 “차아앗!”
 엽동의 귀랑권은 벌써 용군휘의 면전에 이른 상태였다. 팔의 길이가 훨씬 짧은 용군휘로서는 같이 주먹을 뻗었다 해도 엽동을 가격할 상황이 못 된다.
 한데 참으로 예기치 못한 결과가 벌어졌다.
 “아악!”
 용군휘의 주먹이 채 닿기도 전에 안면이 으스러진 엽동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동그라졌다. 커다란 덩치가 이 장 밖으로 날아갔으니 주먹을 내지른 용군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 내 주먹에 맞지도 않았는데······?”
 어쨌거나 악당을 쓰러뜨려 치치를 구했다는 사실에 그는 행복할 수 있었다.
 “군휘!”
 달려온 치치가 용군휘의 목을 부여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흑흑,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용군휘는 순간적으로 본 그녀의 알몸을 떠올리며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생각만으로 음계(淫戒)에 해당된다.’
 그는 그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떼어놓았다.
 “이제 안심해도 돼.”
 “아, 많이 다쳤구나.”
 치치는 소매로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한데 이때였다. 한 떼의 승려가 헛간 마당으로 달려왔다. 곤봉을 쥔 두 명의 무승과 현어, 사미승들이었다.
 두 무승은 묘회의 질서와 안전을 위해 파견된 나한전 소속 승려답게 체격이 건장했고 눈빛이 강렬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엽동과 두 졸개를 훑어보고는 다시 용군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군휘 행자, 네가 이들을 쓰러뜨린 것이냐?”
 “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현어와 사미승들은 어린 용군휘가 건장한 무뢰배를 셋씩이나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와아, 행자 생활 칠년이 헛것이 아니로구나!”
 “대단해!”
 치치는 소림의 승려들이 대거 등장하자 갑자기 겁을 집어먹고는 후다닥 달아났다. 그녀는 정서적으로 다소 부족함은 있지만 자신 때문에 벌어진 사단임은 똑바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승 중 한 명이 곤봉으로 용군휘의 어깨를 짚었다.
 “행자의 신분으로 다툼을 벌이는 것은 계율에 어긋난다. 널 계율원으로 압송하겠다.”
 현어는 상황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얼른 용군휘를 두둔했다.
 “사형들, 군휘 행자가 잘못한 게 없지 않소? 납치된 소녀를 구해주었으면 오히려 상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승 중 현무(玄武)가 냉담하게 응수했다.
 “소향촌 곳곳에 소림의 제자들이 파견돼 있었지 않았던가? 마땅히 우리에게 고했어야 할 일일세.”
 “현무 사형, 군휘 행자가 심문을 받게 되면 나도 조사를 받아야 하오. 주방에 부식거리가 모두 떨어졌는데 내가 부식을 조달하지 않으면 당분간 스님들 모두 맨 밥만 먹게 될 것이오. 그리되면 방장님을 비롯한 원로들께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오. 사실 군휘가 나서기 전에 사형들이 앞서 이런 분란을 해소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소? 소향촌에 파견된 사형들에게도 책임이 전혀 없지 않으니 심한 꾸지람을 들을 수 있소. 사태를 꼭 그렇게 확대시켜야겠습니까?”
 역시 현어의 말재간은 뛰어났다.
 책임의 소재를 물고 늘어지자 두 무승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묘회에서 납치극이 벌어진 것을 사전에 막지 못했으니 그들의 책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무승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곤봉을 내렸다.
 “현어는 제자들을 인솔해 속히 귀환하게.”
 두 무승은 엽동과 두 졸개를 이끌고 헛간을 나섰다.
 현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짓고는 용군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군휘, 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가 문책을 당할 뻔 했다.”
 “죄송합니다, 스님.”
 “가만, 한데 네 누비옷이······.”
 “거지 소녀의 옷이 모두 찢겨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쯧쯧, 어쩔 수 없군. 그 옛날 지장(地藏)보살께서는 헐벗은 중생을 위해 모든 옷을 내주는 바람에 땅에 몸을 숨기실 수밖에 없었지. 네 자비가 바로 지장보살이로다.”
 현어는 용군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행자로서 소동을 일으켰으니 다시는 널 데리고 묘회를 구경할 수 없겠구나.”
 
 
 2.
 
 
 묘회의 소동은 다행히 조용하게 지나갔다.
 용군휘는 옷이 찢기고 얼굴이 다친 것을 산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이라도 둘러댔다. 본래 그가 조심성이 없는 것을 잘 알기에 의심이 많은 현강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한데 이틀 후, 그는 나한전으로 호출을 받아야 했다.
 나한전 수석당주는 정원(正元)대사였다.
 그는 정자 항렬의 대사형이며 소림 방장의 직계 사손이기에 그 신분이 남달랐다. 그는 사내에서 가장 유력한 차차기 장문인 후보이기에 공자 항렬의 원로들도 예를 갖춘다.
 “부르셨습니까, 스님.”
 나한전 집무실로 들어선 용군휘는 오체복지를 하며 합장배례를 올렸다.
 슥슥······!
 중년의 승려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경전을 필사하는 데만 몰두했다.
 승려는 용모가 부처상으로 오관이 수려했고 체격이 건장했다. 일문의 지존이 된다 해도 부족하지 않을 외모와 차분한 심성의 소유자.
 그가 바로 소림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정원대사였다. 정자 항렬 중에서 대사로 불릴 수 있는 승려는 그가 유일하다.
 용군휘는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부복해 있다가 힐끗 정원대사를 보았다.
 정원대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필사를 계속했다.
 용군휘에게 있어 정원대사는 양아버지와 다름없다. 갓난아이로 입문한 용군휘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매일같이 미음을 쑤어 키워준 사람이 바로 정원대사였기 때문이다.
 용군휘가 어린 나이에 감정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원대사의 영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정원대사는 노송처럼 차분했고 희로애락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정원대사를 보며 자라온 용군휘였기에 그와 유사한 심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필사를 마친 정원대사가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법공사숙께 여쭤보니 너 때문에 행자들도 묘회를 구경할 수 있도록 지침을 바꾸었다고 하시더구나. 맞느냐?”
 “대사님, 저는······.”
 “더군다나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제자가 소향촌에서 싸움을 벌였다. 한데도 현강한테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고했다. 맞느냐?”
 용군휘는 합장을 취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대사님.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묘회 구경은 허영과 사치이며 거짓을 고한 것은 가장 기초적인 십계에도 어긋난다. 이는 파문에도 해당되는 죄다.”
 파문!
 용군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갓난아이 때부터 소림에서 자라온 그로서는 소림이 집이며 세상의 전부였다. 아직 수계식을 치르지 못했지만 그도 때가 되면 계를 받고 소림의 정식 제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한데 파문이 거론되었으니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정원대사는 새로 필사한 경전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정황을 자세히 들으니 네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주먹다짐을 했다고 하더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했음이니 네가 저지른 과오를 덮어두기로 했다.”
 “송구합니다, 대사님. 추후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과오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하여 네 행실에 약간의 제재를 가하는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매듭짓기로 하였다.”
 “토굴에 들어 단식 참선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행자 주제에 무슨 참선이냐?”
 정원대사는 엄하게 일축하고는 지시를 내렸다.
 “널 내일부터 해강암 행자로 배속하겠다. 그곳에서 보다 심성을 갈고 닦도록 해라.”
 “예, 대사님.”
 용군휘는 안도의 심정이 되어 일곱 번 절을 올렸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정원대사가 물었다.
 “요즘 들어 네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구나. 갑자기 묘회 구경을 나가고 싶은 호기심이나 불한당들과의 싸움은 사실 너답지 않다. 어디 얘기해 보아라.”
 용군휘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 변화를 털어놓았다.
 “대사님 말씀대로 요즘 들어 제가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예전에는 낙엽을 보아도 그저 계절의 흐름만 느꼈을 뿐인데 지난 가을에는 왠지 외로움에 젖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폭설 때는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고 슬퍼졌습니다.”
 “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슬펐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 소향촌에서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사실 분노 때문에 불한당을 쫓아가게 되었고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
 정원대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용군휘는 가을 호수와 같은 그의 깊은 눈빛을 접하자 마음 속 비밀까지 고백했다.
 “사실 불한당과 싸울 때······ 부처님의 제자로서는 절대 지녀서는 안 되는······ 살의마저 품었습니다. 아미타불······.”
 정원대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가보아라.”
 “예, 대사님.”
 한데 합장을 올리고 집무실을 나가려는 용군휘의 등 뒤로 정원대사의 새로운 명이 들려왔다.
 “군휘, 해강암 배속은 보류한다. 새로운 지침을 내릴 때까지 지금처럼 지내라.”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선 용군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정원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실내를 조용히 걸었다.
 그는 용군휘가 고백한 심경 변화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중이었다. 용군휘가 느낀 감정은 사춘기적 아이들이 흔히 지니는 심경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소림의 운명을 바꿀 만큼 중대한 변화였던 것이다.
 정원대사는 손목에 찬 염주를 감싸 쥐고는 조용히 합장을 올렸다.
 ‘이는 태사존께서 소사숙에게 주입해 주셨던 불력(佛力)이 한계에 이르렀음이다. 이제 새로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겠구나.’
 
 
 3.
 
 
 “방장님께서 드십니다.”
 정원의 차분한 음성에 자리에 좌정해 있던 노승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관음전(觀音殿) 회의실은 창문이 작아 비교적 어두웠다. 낮에도 촛불을 밝혀야 하기에 실내 곳곳에 황촉이 밝혀져 있었다.
 정원이 한 명의 노승을 수행해 회의실로 들어섰다.
 수백 번의 바느질로 기워 입은 백결 승인에 누런 가사를 걸친 노승.
 그가 바로 소림의 현 방장인 경허선사(敬虛禪師)였다.
 세수 여든을 넘겼지만 오랜 세월 소식을 하며 수행한 몸이라 움직임이 가벼웠다. 눈썹이며 수염까지 눈처럼 희어 마치 학과 같은 고고함을 연상케 한다.
 현 소림사 제자들의 항렬은 허(虛), 공(空), 정(正), 현(玄), 명(明)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허선사는 허자 항렬 중 수제자였기에 삼십 년 전부터 소림사 방장에 올라 장문인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의 동문인 허자 항렬의 노승들은 모두 장생원으로 물러앉아 소림사의 원로로서 방장을 보좌하는 중이었다.
 “방장님을 뵈옵니다.”
 회의실에 먼저 들어서 있던 승려들이 예를 올리자 경허선사도 한 손을 가슴에 대는 예로써 응대했다.
 “좌정들 하시게.”
 그가 자리에 앉아 네 명의 노승들이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정원대사는 항렬이 낮은 관계로 경허선사 뒤에 시립했다.
 경호선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수석원로가 서둘러 물었다.
 “장문 사형, 이번 긴급회의가 군휘에 관한 건으로 들었는데 사실이오니까?”
 수석원로 운허선사(雲虛禪師).
 그는 현 방장의 직계 사제로서 원로회를 총괄하는 신분이다.
 본래 나한전이나 달마원과 같은 요직의 주지는 방장의 사제들이 담당해왔는데, 운허선사는 방장의 위엄과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허자 항렬의 동기들 모두에게 용퇴를 권한 후 원로로 물러앉았다.
 그런 연유로 현 소림의 전각과 원, 당의 주지들은 공자 항렬 제자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경허선사는 사제와 세 사질을 둘러보고는 말을 받았다.
 “그러하네. 정원으로부터 군휘의 심성 변화에 대한 보고를 들었네. 사람의 심성은 본래 아침 안개와 같아 종잡을 수가 없지. 이에 사제, 사질들과 함께 논의를 하기 위해 이 회의를 소집할 것일세.”
 경허선사가 언급한 세 사질은 장경각 주지 만공대사, 계율원 주지 법공대사, 그리고 나한전 주지 천공(天空)대사를 말한다.
 천공대사는 경허선사의 의발전인으로 이미 소림사의 차기 장문인으로 추대된 신분이다.
 그는 젊었을 적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기 위해 스스로 한쪽 눈을 뽑고 왼팔을 자를 만큼 불심이 깊고 정신력이 강한 수도승이었다.
 천공대사가 사제들을 대표해 입을 열었다.
 “방장님, 군휘 사제에 대한 입장을 이제 분명히 공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막내 사제가 칠년 넘게 행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소림의 전통과 관례에도 없는 일입니다.”
 경허선사는 눈처럼 하얀 수염을 천천히 내리쓸었다.
 “나로서는 혜각(慧覺) 사숙의 유시를 지킬 수밖에 없다. 사숙께서 정하신 기한이 아직 이년 정도 남았다. 연후 군휘에 대한 수계식을 지시할 것이며 공자 항렬의 제자가 되었음을 천명할 것이다.”
 사자수염의 법공대사가 당당히 말했다.
 “방장님, 제자가 살펴보건대 군휘 사제는 순박할 만큼 맑고 착한 심성을 타고 났습니다. 당장 수계식을 치른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경허선사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꾸짖었다.
 “법공, 너의 부족한 안목은 가히 자부할 것이 못 된다.”
 “송구하옵니다, 방장님.”
 법공대사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만공대사가 아뢰었다.
 “방장님, 제가 시험 삼아 사제를 장경각에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한데 사제는 절기에 대한 욕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욕(無慾)의 심성은 갖춘 듯합니다.”
 “사람의 탐욕은 가장 경계해야 할 악업이다. 장경각의 절기를 마다했다는 것으로 군휘가 무욕에 이르렀다는 것은 속단이다.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미타불······ 제자의 무지함을 밝혀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방장님.”
 이때 정원이 좌중의 원로들을 향해 합장을 올리고는 공손하게 아뢰었다.
 “제가 소사숙과 대화를 나눠본 결과 슬픔과 외로움, 고통과 분노에 젖어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혜각 태사존님의 우려를 깊이 숙지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운허선사가 잔뜩 미간을 좁히다가 불만을 토로했다.
 “혜각 사숙께서 왜 이렇듯 골치 아픈 문제를 남겨두셨는지 모르겠소. 장문 사형, 차라리 군휘를 소림에서 내보내 스스로의 운명에 맡기는 것이 어떻겠소?”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