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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글 안 쓰세요? 1권 (1)

2017.08.03 조회 1,160 추천 12


 #최고의 편집자
 
 
 
 타다다닥.
 고요한 사무실 속에서 직원들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려 퍼졌다.
 서현우도 그 직원들 중 하나였다.
 “후우.”
 퇴근 시간을 넘긴 저녁 7시임에도 사무실에는 인적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퇴근한 사람이라곤 고작해야 사원 몇 명뿐.
 ‘진짜 끝이 없네······.’
 자그마치 3시간 가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우의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현우가 교정 교열을 할당받은 작품들의 수는 자그마치 일곱 작품.
 각 잡고 정독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짧은 시간이다.
 ‘조금만 쉬자······.’
 숨이라도 돌릴 겸 현우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사무실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밤거리의 화려한 불빛이 현우의 눈을 어지럽혔다.
 현우는 네온사인 아래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부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저 중에는 일을 마치고 술로 하루의 노곤함을 풀려는 사람들도 있을 터.
 하지만 수많은 작업량에 파묻힌 현우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더럽게 할 맛 안 나네······.’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지긋지긋한 회의감이 현우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대형 출판사 ‘블루하우스’에 소속된 말단 편집자. 그것이 현재 서현우의 직업이었다.
 인터넷에 연재되는 수많은 소설을 읽고, 그중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작품들을 골라내어 출판하는 일을 한다. 또한 저자를 섭외하고, 작가와 상의하며 원고를 보충하고, 교정, 교열을 하고, 마지막으로 출판을 하는 일.
 그것이 바로 편집자의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소설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현우는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그런 편집자의 일을 동경했다.
 최고의 편집자가 된다.
 그것이 바로 현우가 가진 꿈이었다.
 더욱 재미있는 글들을 자신의 손으로 발굴해 내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현우에게는 그것이 정말 매력적인 직업으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대학 졸업과 함께 망설이지 않고 이 바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최고의 편집자는 개뿔.’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자신을 비웃기나 하는 처지.
 현재 현우의 사정은 과거 꿈꿔 왔던 편집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교정과 교열의 반복 작업.
 오로지 그것만이 현재 현우에게 맡겨진 일감이었다.
 물론 자신이 맡은 작업이 소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현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우가 맡은 작품들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심지어 비소설인 경우도 허다했다.
 발품을 뛰며 저자를 섭외하고 상의하면서 책을 출판하는 과정, 그 모든 것들을 다양하게 겪어 보고 싶은 현우에게 현재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하는 일은 단순노동에 불과했다.
 하물며 자신이 읽는 것이 소설이 아닌 상황이라면?
 오로지 소설 하나만 보고 이 바닥에 뛰어든 현우로서는 의욕이 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사표를 써야 하나?’
 아무리 꿈 하나만으로 달려왔다고는 해도. 현우는 이 상황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1년 전에는 그러려니 했다.
 어느 곳이든 가장 힘든 일은 막내가 맡는 게 보통이니까.
 실제로 현우가 맡은 2차, 3차 작업들은 대부분의 편집자들도 꺼리는 일감 중 하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주임을 단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임을 달고 나서도 현우는 사무실에 틀어박혀야 했다.
 결국 참다못한 현우는 편집장에게 직접 부탁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를 붙여 달라고.
 예상과 달리 편집장은 현우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띠링.
 핸드폰으로 연동해 둔 메일 알람 음이 울렸다.
 현우는 잡념을 떨쳐 내고 서둘러 컴퓨터로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의 내용을 본 현우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그렇지.’
 메일을 보낸 사람은 서현우의 처음이자 현재 유일한 담당 작가인 김수민.
 전작을 합치면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중견 작가였다.
 처음에 김수민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현우는 자신의 첫 담당으로 맡기에는 조금 과분한 작가가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다.
 다른 편집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우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편집자님, 이번에도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요즘 글이 정말로 안 써지네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수민. 그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미치겠네. 또 지연하면 벌써 두 달째인데.’
 남은 시간은 1주일. 편집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지연 통보라니.
 ‘진짜 글 쓸 생각이 있는 거야?’
 일반적으로 판타지, 혹은 무협 소설을 종이 책으로 출간할 경우 한 권에 한 달, 길어도 두 달을 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독자가 떨어져 나가고 판매 부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벌써 두 달이 지나가는 시점에서도 수민은 3권 초고조차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메일로 하는 거야?’
 굳이 전화로 연락하지 않고 메일로 연락을 한 것도 예의 있는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나름대로 중견 작가라 불리는 사람이 이런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었다.
 ‘······설마 첫 담당이라고 얕보이는 건가?’
 지연 통보 아래로 주욱 늘어져 있는 변명들.
 어떤 내용일지는 읽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현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현우는 수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 주임님.
 현우의 예상과 달리 수민의 목소리는 꽤나 밝았다.
 쾌활한 느낌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질 정도였다.
 ‘지금 글 쓰고 있는 거 맞아?’
 슬럼프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투에 현우의 기분이 더욱 착잡해졌다.
 “작가님. 메일 보내 주신 거 받았습니다.”
 -아, 네.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현우는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지금 어디까지 쓰셨는데요? 10만 자는 쓰셨어요?”
 -10만 자까지는 아니고요. 7만 자 조금 안되거든요.
 한 권 분량은 13만 자에서 15만 자 정도다.
 그런데 7만 자도 못 썼다면 도저히 책 한 권 분량으로는 낼 수 없었다.
 “적어도 사흘 내로는 보내 주셔야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아직 반 권도 못 쓰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해요. 그래도 퀄리티는 제가 보장합니다. 진짜 대박 각 잡혔다니까요.
 “하, 미치겠네······. 작가님, 진짜 어쩌시려고 이러는 겁니까?”
 상황이 이쯤 되니 현우의 입에서도 짜증이 튀어나왔다.
 종이 책 시장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
 그것은 바로 출간 타이밍을 잘 잡는 것이다.
 모든 작가들이 글만 쓰는 기계처럼 글을 술술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권’이라는 규칙은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의 불문율이었다.
 정말로 재밌는 책이라면 두 달까지는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면 작품은 금세 외면당한다.
 웬만큼 재미있는 글이라고 해도 두 달, 세 달을 넘어가는 순간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작품 하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판타지와 무협을 쓰는 작가는 넘치지는 않아도 충분할 만큼 있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글이 안 나온다면 다른 글을 찾아 읽으면 그만인 것이다.
 빠르게 읽고 빠르게 잊히는 것.
 슬프지만 그것이 현재 장르 시장의 상황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김수민의 글은 그런 시장의 틀에 벗어나지 못한 작품에 불과했다. 적어도 현우가 보기에는 그랬다.
 “후······.”
 짧은 침묵. 현우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님.”
 -네?
 대박 각은커녕 이대로는 묻힐 게 뻔하다.
 그렇게 말하려던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이야기는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냥 직접 만나서 얘기하죠. 지금 시간 되세요?”
 -네? 지금요?
 “네. 작품이 막히는 부분에 대해서 제가 바로 보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지금 초고라도 주지 않으시면 출간이 힘들지도 몰라요. 최대한 빨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아, 저, 지금은 좀······.
 밝은 목소리의 수민이 처음으로 말을 흐렸다.
 “글 쓰시고 계신 거 아니세요? 뭣하면 제가 집으로 가도 되는데.”
 -아뇨, 그건 좀 불편해서······.
 -야, 김수민! 술 마시다 말고 뭐 하냐?
 -야······! 멍청아, 조용히 해!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삼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우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뒤이어 당황함이 역력한 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주임님. 지금 좀 잠시 나와 있는지라 편집자님 보기에는 좀······.
 “······알겠습니다. 나중에 연락 주세요. 메일 말고 전화로요.”
 현우는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야기를 이어 갈 의욕이 나지 않았다.
 도리어 수민이 오버하며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1주일 내로는 꼭 보내 드릴 테니까요! 이번엔 정말 잘될 겁니다!
 “뭐, 열심히 하시니까요. 좋은 결과 나올 겁니다.”
 -하하······.
 짜증이 난 나머지 반사적으로 현우의 입에서 비꼬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현우는 적당히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젠장.’
 현우는 웃옷을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일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편집장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고생했어.”
 현우는 편집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가볍게만 느껴졌던 퇴근길의 발걸음.
 그러나 현우는 유독 지금의 발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처음에는 수민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
 무엇보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전화도 받지 않는 싱황에서 만날 수는 없었으니까.
 “후······.”
 연결되지 않는 핸드폰을 든 채 현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휘이이잉.
 봄이었지만 제법 밤공기가 쌀쌀했다.
 귓가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현우는 목을 움츠렸다.
 ‘더럽네······. 진짜 사표라도 쓸까?’
 출판사에서는 교정, 교열만 하는데다가 작가에게는 무시당하는 신세.
 지금의 현우에게는 찬바람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젊은 사람이 뭔 한숨을 그렇게 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장 차림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었다.
 책을 한 손에 든 채 노인은 현우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현우는 노인을 보면서 억지로 쓴웃음을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리다 보니······.”
 “허허, 편집자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젊은 사람이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쓰나. 나 때는 그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네.”
 “제가 편집자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기 저 건물이 출판사 건물 아닌가.”
 노인이 현우가 나온 건물을 가리켰다.
 노인도 젊은 시절에는 편집 일을 해 본 모양이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혹시 영감님께서도······?”
 “그렇다네. 나도 예전에는 그쪽 분야에서 일을 했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이쪽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우는 짜증을 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욱해서 화를 냈다가는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끼리 괜히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으니까.
 “너무 답답해할 필요 없어. 책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닌가, 허허.”
 “보람이라······.”
 일을 하면서 ‘보람’이라는 걸 느껴 본 게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이제는 그런 감각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책을 만들고 기뻐했던 게 대체 언제였더라?
 “후우······. 잘 모르겠네요.”
 현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루 종일 똑같은 작업만 반복하고, 담당 작가는 글도 안 쓰고······. 이래서 제대로 된 책이나 한 권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편집 일을 하는 사람이라 마음이 놓였던 것일까.
 참고 참았던 현우의 넋두리가 시작되었다.
 노인은 생각보다 좋은 말 상대였다. 대화하기 편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경청해 주었다.
 현우가 힘든 부분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노인은 저런, 힘들겠구먼, 등의 추임새를 적절하게 넣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현우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우의 이야기가 끝나자 노인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생이 많구먼.”
 “아닙니다. 제가 별 얘기를 다 했네요.”
 “허허, 아닐세.”
 ‘처음 본 사람에게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현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살폈다. 어느새 30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밤길 위험하니 살펴 들어가세요.”
 “잠깐만, 가기 전에 이것 좀 받게나.”
 노인이 들고 있던 책을 건네주었다.
 가죽으로 된 양장본 책에서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표지에는 ‘노블 메이커’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목이 특이하네요.”
 “내가 젊었을 적에 많은 도움을 받은 서적일세. 자네도 읽어 보면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걸세.”
 “고맙습니다.”
 현우는 사양하지 않았다. 양장본이라면 꽤나 비싼 책일 터였다.
 ‘처음 만났는데 이런 책까지 주시다니.’
 현우는 선뜻 선물을 하는 노인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마웠다.
 “그럼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현우는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떴다.
 그때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책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걸 명심한다면 그 일을 더 오래 할 수 있을 걸세!”
 현우는 멀리서 소리치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래, 글은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현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현우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문득 잊고 지냈던 꿈이 떠올랐다.
 최고의 편집자가 되겠다고 한 자신은 지금 어디로 간 것일까?
 고작 이 정도 일로, 나는 벌써 그때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최고의 편집자라······.’
 이제는 서른을 바라보는 처지지만, 그런 꿈 하나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만둘 수 없겠구나.’
 매일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편집자 타령을 하는 걸 보면, 결국 이게 내 적성이긴 한 모양이다.
 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만 더 힘내 보자.”
 노인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현우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혔다.
 
 
 
 #능력이 보인다
 
 
 
 “하아아암······.”
 다음 날, 막 출근을 마친 시간.
 자리에 앉은 현우의 입에서 연신 하품이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제는 하루 종일 노인이 건네준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몇 장만 넘기고 잘 생각이었으나, 노인이 건네준 책은 쉽사리 덮을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결국 현우가 책을 다 읽었을 즈음에는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으, 피곤해······.”
 그 탓에 아침도 거른 채 샤워만 재빨리 끝내고 출근해야 했다.
 현우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연신 하품을 내뱉었다.
 “오, 일찍 왔네.”
 직장 동기이자 대학교 친구인 이수한이 현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실실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현우의 안색을 본 순간 입꼬리가 절로 내려갔다.
 “야, 너 왜 그래?”
 “뭐가?”
 “너 다크 서클 장난 아니야. 어제 잠 못 잤냐?”
 “어, 그럴 일이 있어서······.”
 동기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갔다.
 단순히 잠만 자지 못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 건네준 책을 읽고 나니 마치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피로했다. 단순히 책만 읽었을 뿐인데도.
 ‘그 정도로 몰입했다는 걸까.’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깊이도 있는 책이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는 현우를 수한이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야, 쉬엄쉬엄 해라. 한 까치 태우러 갈래?”
 “됐어. 담배 피러 가기도 귀찮다. 난 패스.”
 “쯧쯧, 그러다 훅 간다. 이따 회의 때 졸지 말고.”
 “너나 잘해, 인마.”
 현우가 손을 휘휘 내젓자 수한은 별말 없이 휴게실로 떠났다.
 현우는 느물거리며 떠나가는 수환을 바라보다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담배 피울 시간이 어디 있냐······.”
 아직 가장 중요한 작업이 하나 남아 있었다.
 현우는 메일을 열어 다른 메시지가 왔나 확인했다. 혹시라도 김수민 작가의 원고가 들어왔나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오, 씨······.”
 현우의 입에서 절로 짜증이 튀어나왔다.
 아직까지도 김수민 작가의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제본을 위해 인쇄본을 넘겨주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엿새.
 지금 당장 글이 들어온다고 해도 교정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다른 교정 작업들까지 해야 하는 상황.
 ‘안 되겠다.’
 이대로 넋 놓은 채 원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현우는 3부를 총괄하는 최인호 편집장의 자리로 향했다.
 “편집장님.”
 “잠깐만.”
 곧 회의 시간이라 그런지 인호도 여유가 없어 보였다.
 고개도 들지 않고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인호를 보며 현우는 선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 현우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호는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작업을 부여하고 있었다.
 “민지 씨. 저번 회의 때 얘기했던 작품은? 이번에 원고 보냈대?”
 “방금 통화했어요. 1시간 내로 원고 보내 드린답니다.”
 “오케이. 원고 오는 대로 제본 작업 들어가자.”
 “네? 교정도 안 하고요?”
 “어차피 결말부 말고는 다 교정 끝냈잖아. 그냥 결말부만 첨부해서 나한테 보고서만 올려.”
 회의 전 출판사의 모습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런 상황에서 회의를 빠지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괜찮을까?’
 바쁜 와중에 말단인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맡은 작품인 만큼 제대로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휴우.”
 10분가량 지났을까.
 그제야 인호가 옆에 있는 현우를 돌아보았다.
 “어, 서 주임, 왜?”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곧 회의 시간인데 그때 말하지? 지금 좀 바쁜데.”
 “그것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회의는 빠질 수 있을까요?”
 현우의 말에 인호의 눈매가 좁혀졌다.
 “왜?”
 “마지막 마왕 3권 원고 있잖습니까.”
 “김수민 작가였나, 그거?”
 “예. 그게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초고도? 하나도 안 썼어?”
 “썼다고는 말하는데 보낸 적이 없습니다.”
 “허, 참.”
 인호가 탄식을 내뱉었다.
 “제본까지 코앞인데.”
 “이 이상 기다리면 저도 교정 작업까지 끝내기 빠듯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집까지 직접 찾아간다고?”
 인호가 슬쩍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시간은 오전 9시 30분.
 참고로 회의 시간은 10시다.
 “자네, 보고서는?”
 “회의시간 전까지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인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편집장 입장에서는 겨우 주임이 회의를 빠진다고 하는데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회의까지 빠지는데 겨우 하루 찾아가는 걸로 원고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적어도 앞에 있으면 대놓고 농땡이 치진 않겠죠.”
 “흠, 글쎄······.”
 인호가 손을 이마에 댄 채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고민할 때마다 그가 보이는 버릇이었다.
 잠시 동안 생각하던 인호는 시원스레 말했다.
 “뭐, 알았어. 처음 맡은 담당이니까.”
 “괜찮습니까?”
 설마 이렇게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인호가 얼떨떨한 표정의 현우를 보더니 좁혀진 미간을 풀었다.
 “주임 한 명 빠진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놀래?”
 “아니,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주임이라고 해 봤자 3부에는 편집자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사원은 고작 두 명.
 즉, 현우의 밑에 있는 편집자는 겨우 두 명이라는 얘기다.
 말만 주임이지 현우도 말단에 가까운 만큼 눈치를 안 볼 수는 없는 처지였다.
 평소에 맡은 일은 제대로 해내니 크게 눈치 볼 일이 없던 현우였지만 이번에는 양해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인호는 그런 현우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직이 많은 출판 업계에서 현우는 1년이 넘도록 묵묵히 교정 작업을 해 주는 현우는 3부에서 꽤나 유능한 직원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가 있기에 인호는 쉽게 허락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상사인 만큼 겉으로는 불편한 기색을 보여 주어야 했지만.
  “됐어. 그래도 서 주임만 담당이 있는 건 아니니까 주의해. 다들 바쁜 건 똑같은 거 알지?”
 인호의 허락에 현우가 고개를 숙였다.
 “예, 압니다. 고맙습니다.”
 “첫 담당이라고 편의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보고서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빨리 가 봐. 나도 회의해야 돼.”
 인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현우는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런 현우를 보며 인호가 홀로 중얼거렸다.
 “평소에 잘해 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 * *
 
 자리로 돌아온 현우는 편집장에게 교정을 끝낸 PDF 문서들을 정리한 뒤, 사내 메일을 이용해 편집장의 메일 주소로 보냈다.
 파일을 보내는 동안 현우는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생각에 빠졌다.
 ‘교정 작업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이야.’
 출근한 지 고작 3시간.
 평소라면 하루가 꼬박 걸릴 양을 현우는 이미 완벽하게 끝내둔 상태였다.
 파일을 보내면서도 현우는 지금 이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을 검토해 보았지만 완벽하게 교정이 끝나 있었다.
 자신이 직접 한 작업이지만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 정도면 거의 신기록 아닌가?’
 아마 자신이 보낸 작업 파일들을 보면 편집장도 깜짝 놀랄 것이다.
 고작 하루, 그것도 반나절을 투자해서 소화해 낼 만한 양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양을 그 자리에서 모두 소화해 낸 것이다.
 작업을 펼친 그 순간부터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이번에 교정, 교열을 맡은 작업들은 죄다 비소설뿐이었다.
 흥미가 동하지 않는 작업이라면 으레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인 반면, 현우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고등학생 때도 이렇게 빠르게 읽지는 못했는데······. 허참. 이런 날도 있는 건가.’
 편집자로 일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속도가 붙었다면 아무튼 편집자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서려 순간, 현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현우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현민 씨가 여긴 왜 오셨습니까?”
 “편집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현우 씨는 그대로 퇴근하는 겁니까?”
 “그러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현민의 말에 현우는 피식 웃었다.
 “담당 작가가 아직도 작품을 안 보내서 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김수민 작가라고 했나? 설마 아직도 3권 초고 안 보냈나요?”
 “네. 그것 때문에 얼굴 한번 봐야 될 거 같네요.”
 “거참,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이랄 것까지야 있나요.”
 “제본까지 코앞인데 어떡하려고 그러지?”
 현민의 말에 현우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일단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얼굴 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잘됐으면 좋겠네요. 수고하세요.”
 “예, 고생하세요.”
 현민이 현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편집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같은 부서도 아닌데 이렇게 말로나마 격려를 해 주는 현민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보다 저 사람이 왜 1부까지 온 거지?’
 말단에 가까운 현우나 현민이 다른 부서로 왕래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편집장의 자리로 향하는 현민의 모습을 보여 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물어볼까.’
 일단은 내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지.
 김수민 작가의 작품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현민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루고 현우는 출판사를 나섰다.
 
  * *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될 시에는 통화료가 부과되오니······.
 벌써 몇 번이나 들었던 부재중 음성.
 절로 현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인간은 핸드폰을 왜 들고 다니는 거야.’
 현우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에 작가에게 주소를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우는 이전에 그와 나눈 문자에서 그가 남긴 주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소를 확인한 현우는 버스를 타고 김수민 작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방문한다고 얘기는 해 뒀으니 괜찮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현우는 이전에 수민이 말했던 주소를 길 찾기 앱에 찍고 목적지로 향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앱의 알림이 울렸다.
 발걸음을 멈춘 현우는 아담한 크기의 연립주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소지로 보면 여긴데.’
 수민이 살고 있을 301호 앞.
 문 앞에서 현우는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수민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현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벨을 눌렀다.
 “작가님! 김수민 작가님!”
 몇 번 벨을 누르니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벨소리는 들었는지 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우는 가만히 난간에 기대어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수민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어? 서 주임님?”
 현우의 얼굴을 확인한 수민이 문을 활짝 열었다.
 딱 봐도 김수민 작가의 몰골은 보기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부스스한 머릿결, 방금 일어나 씻지 않은 듯 눈곱이 낀 눈, 급하게 갈아입은 듯 헤진 티셔츠와 얼룩이 진 검은 트레이닝복 하의.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현우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뭐 하세요?”
 “네, 네?”
 “뭐 하고 계시냐고요.”
 냉기가 묻어나오는 현우의 말투.
 순간 흐리멍덩했던 수민의 눈이 확 뜨였다.
 “어제 온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저, 그게, 죄송합니다. 제가 낮잠을 잤는데 알람이 안 울려서······.”
 “그런 몰골로 나타나서는 그걸 변명이라고 하십니까?”
 “······.”
 “전화는 왜 안 받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여기서 화를 내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
 짜증을 내는 것조차 귀찮아진 현우는 빨리 일을 끝낼 생각으로 말했다.
 “일단 대충 씻고 나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아, 예. 그럼 안에서 좀 기다리시겠습니까?”
 극존칭으로 변한 수민의 말을 들으며 현우가 차갑게 웃었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보아하니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아, 그, 그렇죠······. 그럼 안에서 기다리시죠.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수민이 집안으로 후다닥 들어가는 것을 보며 현우도 그 뒤를 따랐다.
 수민의 집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다.
 다섯 평은 될까 싶은 방 구조는 둘째 치더라도 정리되지 않은 신발이나 옷가지, 원룸 이곳저곳에 놓인 잡다한 생활용품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보고 있으니 방이 더 좁아 보이는 듯했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현우를 보며 수민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
 “그, 그럼 차라도 좀······.”
 “됐으니까 빨리 준비합시다.”
 “아, 예······.”
 허둥지둥하는 수민을 보고 있으니 현우의 기분이 절로 가라앉았다.
 옷가지를 대충 치우면서 수민이 말했다.
 “그, 거기 아무 데나 편하게 계셔 주세요. 옷은 그냥 아무 데나 치우시면 됩니다.”
 적당히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수민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 수민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현우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에휴······.”
 엉망진창이 된 원룸을 둘러보고 있자니 예전 대학 생활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생활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는 듯싶었다.
 ‘하긴, 스물다섯에 글을 쓰고 있으니 쉽지는 않겠지.’
 그의 처지를 생각하니 조금 동정심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현우는 화장실의 물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방을 둘러보았다.
 그런 현우의 눈에 띈 것은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엄청 많네. 아, 저건 내가 본 거다.’
 현우는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중에는 현우가 본 소설들도 꽤 있었다.
 ‘판타지가 많네.’
 가장 아래,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는 김수민 작가가 출간한 ‘마지막 마왕’ 1권과 2권이 꽂혀 있었다.
 현우는 별생각 없이 그 책을 뽑아들었다.
 책을 넘기는 순간, 현우의 머릿속으로 이상한 알람 음이 들려왔다.
 띠링.
 “응?”
 소리에 반응할 새도 없이 현우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상태 창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왕]
 -第 1권-
 상태 : 미완
 작가 : 김수민(Lv.26)
 장르 : 판타지
 주제 : 4/10
 구성 : 6/10
 문체 : 6/10
 소재 : 4/10
 Rank : C-
 
 “뭐야, 이건······?”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알 수 없는 문구가 적힌 반투명한 창.
 현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환각?”
 현우가 무의식중에 손을 휘휘 저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손은 정체불명의 창을 그대로 통과했다.
 눈을 감았다 떠도 창은 그대로 현우의 눈앞에 둥둥 떠 있었다.
 “허.”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하더니 머리가 맛이 간 건가?
 머리라도 식힐 겸 현우는 손에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눈앞에서 일렁거리던 창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설마 책을 보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건가?’
 현우는 내려 둔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표지를 응시하기 무섭게 예의 창이 다시 떠올랐다.
 ‘에이, 설마.’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현우는 ‘마지막 마왕’ 2권을 집어 들었다.
 현우가 2권을 살피자 창이 떠오른 그대로 수치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왕]
 -第 2권-
 상태 : 미완
 작가 : 김수민(Lv.26)
 장르 : 판타지
 주제 : 4/10
 구성 : 4/10
 문체 : 6/10
 소재 : 4/10
 Rank : D
 
 문체와 소재는 변화가 없는 반면 주제와 구성에서 점수가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책의 랭크도 한 단계 내려간 듯했다.
 그러나 현우는 김수민 작가의 소설 상태보다 현재 이런 스텟이 보이는 상황에만 신경 쓰느라 랭크니 점수니 하는 부분까지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뭐야? 아까 작업할 땐 이런 게 안 보였는데?’
 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달래며 현우는 눈앞의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종이 책으로만 이런 상태가 보이는 건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나?’
 말이 되지 않는 현 상황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현우는 조금씩 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분명 오늘 오전에 작업할 때는 이런 창이 안 보였어. 다 비소설이긴 했지만······ 잠깐, 설마?’
 그 순간, 현우의 머릿속으로 뭔가 번뜩였다.
 현우는 다른 책들도 하나씩 꺼내 살펴보았다.
 현우가 책을 살피는 순간 다른 책들도 하나씩 상태 창을 드러내면서 점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현우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탁자 위에 얹힌 김수민 작가의 노트북을 켰다.
 남의 노트북으로 이런 행동이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지금 당장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우웅.
 1분도 채 되지 않는 부팅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컴퓨터를 켠 현우는 인터넷에 연재되는 웹 소설 사이트 한 군데에 들어갔다.
 메인 페이지에 있는 작품 하나를 골라 창을 띄웠다.
 띠링.
 그 순간 알람 음과 함께 다시 한 번 소설의 상태 창이 눈앞에 나열됐다.
 ‘틀림없어.’
 그 모습을 보며 현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소설이라면 뭐든지 보이는 거야.’
 “후우, 시원하다. 기다리셨죠?”
 현우가 상념에 빠질 틈도 없었다. 어느새 다 씻은 수민이 머리를 털면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우는 고개를 돌린 채 수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현우를 수민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임님? 왜 그러세요?”
 수민의 말에 현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잠시 생각 좀 한다고.”
 “응? 노트북 켜셨네요?”
 “예.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허락도 받지 않고 써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야동이라도 찾거나 하진 않으셨을 텐데요, 뭐.”
 예의 바른 현우의 말에 수민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저 그럼 옷 좀 갈아입을게요.”
 그렇게 말하더니 현우의 눈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 재꼈다.
 아무리 남자끼리라고 해도 고작 한두 번 만난 사람 앞에서 저렇게 거리낌 없는 행동이라니.
 현우는 저런 가벼움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이상한 창은······. 나중에 생각하자.’
 소설을 보고 있지 않은 지금은 창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니터를 슬쩍 응시할 때마다 다시 예의 창이 떠올랐다.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수민과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였다.
 현우는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을 테니 준비하시고 나오세요.”
 “아, 네.”
 “아 참, 노트북은 들고 나오시고요.”
 “네? 노트북은 왜······?”
 의아한 모습의 수민을 보며 현우는 빙긋 웃었다.
 “글 써야죠, 글.”
 
  * * *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현우는 땅거미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머릿속에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로 가득했다.
 인과관계를 차분히 생각하던 현우는 어제 만난 노인과 그에게 받은 책을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린 결과, 현우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잖아?’
 분명 현우는 밤을 꼬박 새서 책을 읽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몰입한 상태로.
 그럼에도 현우는 책의 구절은 물론이고 내용 자체를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분명 그 책에 뭔가 있는 거야.’
 책과 이상한 창의 연관성을 떠올리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집에 가서 살펴봐야겠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 태운 담배를 튕겼다.
 “서 주임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 무섭게 수민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꼬질꼬질한 트레이닝복을 입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다.
 헐레벌떡 나오는 수민을 보며 현우가 손짓했다.
 “그럼 가실까요.”
 “그,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거죠?”
 “일단 밥이나 먹읍시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밥이요?”
 한 손에 노트북을 든 채 수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노트북을 들고 오라는 말에 당연히 어디 카페에서 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밥이라니?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은 먹고 해야죠.”
 현우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현우도 아직 저녁을 먹진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현우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오늘부터 종일 굴릴 텐데 밥은 든든히 먹어야지.’
 현우는 마지막 마왕 3권 작업이 절대 오늘 내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남은 닷새 동안은 정신없이 그를 굴릴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초고가 정말 없다면 닷새도 모자랄 터였다.
 “그럼······.”
 조금 머뭇거리던 수민이 근처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수민도 뭔가 속을 채우고 싶은 눈치였다.
 ‘어제 먹은 술 때문이겠지.’
 중간 중간 머리를 부여잡는 수민의 행동을 보며 숙취가 남아 있으리라 짐작한 현우였다.
 거절하기에는 수민도 빈속을 서둘러 채우고 싶을 터.
 현우는 굳이 어제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저기 있는 국밥집은 어떠세요?”
 “국밥이요?”
 “네. 별론가요?”
 “그럴 리가요. 저는 좋습니다만······.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작업 관련으로 잡은 약속이니만큼 현우는 편집장에게 받은 회사 법인 카드로 작가에게 접대를 할 생각이었다.
 나름 작가 밥을 먹은 수민이라면 법인 카드로 결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민은 값싼 국밥집을 고수했다.
 “빨리 먹고 작업 이야기 해야죠.”
 수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우가 넌지시 말했다.
 “혹시 죄송해서 그러시는 거 아니시죠? 사양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국밥이 땡겨서 그래요.”
 현우와 수민은 멀지 않은 국밥집에 들어갔다. 조금 허름하지만 청결한 느낌을 주는 국밥집이었다.
 수민이 빈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순대 국밥이 진짜 맛있습니다.”
 “집 앞이라서 오자고 하신 거 아니고요?”
 “하하, 들켰네요.”
 “농담입니다. 빨리 먹고 작업하면 저야 좋죠.”
 수민은 가볍게, 하지만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 현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담당 편집자인 현우에게 수민은 좋지 못한 모습을 만회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특히나 무표정한 현우가 그렇게 화를 냈으니 간담이 서늘해졌을 만도 했다.
 적당한 잡담이 끝나자 수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임님, 방금 전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작가님. 앞으로 열심히 쓰시면 되죠.”
 현우도 여기까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애를 쓰는 수민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많이 풀린 상태였다.
 여기에 직접 이렇게 사과까지 받으면 아무리 현우라고 해도 뻣뻣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수민은 만류하는 현우의 손짓에도 침통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뇨, 오늘뿐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제가 실수한 것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혹시 왜 그러셨던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후우, 저도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도저히 다음 내용이 안 떠올라서요.”
 수민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현우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김수민은 지금 지독한 슬럼프를 앓고 있었다.
 갑작스레 이유도 없이 글이 막히는 경우는 흔하다.
 이런 경우는 보통 휴식 겸 짧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닷새에 불과한 상황.
 고작 닷새 만에 이 젊은 중견 작가의 슬럼프를 자신이 풀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첫 담당인데?
 오히려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은 현우였다.
 “날짜는 얼마 안 남았는데 주임님한테 말하려니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고······. 답답한 마음에 어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가 약속 시간에 늦어 버리고······.”
 “혹시 지금 마지막 마왕 몇 자까지 쓰셨나요? 어제 7만 자까지 썼다고 하셨죠?”
 점점 길어지려는 수민의 넋두리를 끊으며 현우가 말했다.
 진지해진 표정의 현우를 보며 수민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8만 자까지 쓰긴 했습니다만······. 내용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다 갈아엎어야 될 판입니다.”
 권당 13만 자라고 치면 하루 1만 자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출판을 하려면 단순히 소설만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교정과 교열은 물론이고 제본 및 홍보, 서평, 그 외에 기타 등등의 사전 작업들이 상당량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소설의 원고.
 그것을 하루에 1만 자씩, 그것도 출간이 가능한 퀄리티로 뽑아낼 수 있을까.
 거기에 작가 스스로도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결국 미뤄야 하는 건가······?’
 회의적인 상황에 답답해진 현우의 앞으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식탁에 올려진 국밥을 보며 현우가 수민에게 손짓했다.
 “일단 드세요. 작품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합시다.”
 “네.”
 현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국밥을 먹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에 절로 현우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빨리 먹고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런 현우를 바라보던 수민도 서둘러 국밥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현우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창에 대한 부분은 사라지고, 앞으로 보아야 할 마지막 마왕 3권 초고의 내용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둘러 밥을 해치운 현우와 수민은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자리로 가져오는 동안 수민이 노트북을 켜고 한글 창을 띄웠다.
 자리에 앉으며 현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쓰셨다는 초고 좀 먼저 보여 주시겠어요?”
 “네.”
 현우는 수민이 건네준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 번 이전의 창이 떠올랐다.
 
 [마지막 마왕]
 -第 3권(草稿)-
 상태 : 미완
 작가 : 김수민(Lv.26)
 장르 : 판타지
 주제 : 3/10
 구성 : 4/10
 문체 : 6/10
 소재 : 4/10
 Rank : D-
 
 
 
 #작가 김수민
 
 
 
 ‘자꾸 눈에 밟힌단 말이지······.’
 소설을 볼 때마다 자꾸 눈앞에 창이 나타났다.
 이쯤 되면 현우도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현우는 3권 초고를 보는 한편, 중간 중간 시야 한구석에 보이는 상태 창을 힐끔거렸다.
 맞은편의 수민이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빨대를 문 채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흐음······.”
 짧은 한숨과 함께 현우는 눈을 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현우를 수민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습니까?”
 “······글쎄요.”
 상태 창에서 나온 D-라는 랭크 점수.
 하지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점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만약 현우도 점수를 매긴다고 한다면 이 정체불명의 상태 창과 같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썩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다.’
 3권의 초고에 대한 감상. 그것이 현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바로 말할 수는 없고······.’
 소설가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김수민은 마지막 마왕 이전에도 몇 질의 작품을 출간한 적이 있는 중견 작가였다.
 그런 사람에게 편집자라고 해서 대놓고 ‘이건 별로예요.’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입에 발린 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우는 수민에게 건네줄 말을 신중히 골랐다.
 ‘2권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점수도 고작 1점 떨어졌을 뿐이고.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솔직히 2권 자체가 그다지 재밌는 것도 아니었잖아. 무엇보다 주인공이 심정이나 행동이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이 모양이니 흐름도 애매해질 수밖에······.’
 시끌벅적한 카페 안.
 그러나 김수민과 서현우를 둘러싼 공기는 무척이나 진중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빠진 현우와 그런 그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수민의 모습은 제3자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것은 현우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현우의 무거운 말투에 수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이번에 쓴 게 별로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제가 말하려는 건 3권 이전의 문제입니다.”
 “네? 그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우의 말에 수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번에 쓴 3권 초고에 대한 이야기일 줄 알았던 것이다.
 수민이 뭐라 묻기도 전에 현우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분명 이 작품의 시작은 주인공 로인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마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권 프롤로그에서부터 로인은 자신이 마왕이 됐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결말부에서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왕의 길을 걸어갈 것을 보여 줬습니다.”
 “네, 네에······. 그렇죠.”
 “그런데 2권에서부터 문제가 생겨요. 마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로인이 2권 시작부터 상황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요. 마족들의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동료도 아닌, 과거 인간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인간들의 말에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간에는 자신이 밀어붙였던 정벌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죠. 그 덕분에 결말부는 또 다시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2권 편집 때 하셨던 말씀이셨죠.”
 “뭐, 그때는 조금 불안해 보인다, 하는 정도로만 말했던 거지만요.”
 쓴웃음을 짓는 현우 앞에서 수민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민은 얼마 남지 않은 커피 잔의 얼음을 빨대로 빙글빙글 돌렸다.
 “작가님이 주인공의 어떤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현우는 수민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적어도 지금 이런 방향을 유지한다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없어요. 차라리 주인공이 아무 힘도 없는 평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3권의 흐름도 중심이 될 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아요.”
 “······.”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작가님이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주인공의 행동을 스스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인 거 아닙니까?”
 뼈가 들어 있는, 하지만 정확하게 지적한 현우의 말에 수민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의 말은 하나같이 틀린 게 없었으므로.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혼내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기죽지 마세요.”
 “하하, 네······.”
 현우의 말에 수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얼굴이 굳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수민이 화장실로 향하는 그 순간 현우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걷는 길은 이제 피로 가득할 것이다.”
 “네?”
 현우의 말에 수민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거기에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그저 오롯이 내 갈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것이 내 선택이다.”
 그것은 마지막 마왕 1권의 결말 부분이었다.
 타의로 마왕이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으면서도 마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주인공의 의지가 드러나는 독백이다.
 설마 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줄 줄은 수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멋진 결말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네. 작가님이 쓰시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가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으니까요. 속은 착한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 하는 식의 변명이 아니었어요. 진정한 마왕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
 “그래서 2권에서 그만큼 아쉬운 느낌이 들었던 겁니다. 분명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쓰신 걸까 하고요.”
 “그건······.”
 “꿈꾸는 자들의 왕에서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습니다만······.”
 꿈꾸는 자들의 왕.
 그것은 수민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집필한 작품이자 그의 데뷔작이었다.
 현우의 말에 수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 제 데뷔작까지 보신 겁니까?”
 “네? 아, 네.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그거 지금은 절판됐을 텐데······!”
 “그래서 정말 아쉽습니다. 적어도 이북 정도로는 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거든요.”
 현우가 그렇게 말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수민은 억지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자신의 데뷔작이었던 꿈꾸는 자들의 왕.
 수민 스스로는 그 작품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자부심도 있는 작품이었다.
 그때는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썼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들의 시선은 냉혹했다.
 시장의 수요에 맞지 않는 소재와 이야기로 인해 자신의 데뷔작은 금세 잊혀졌다.
 심지어 출판사에서는 조기 완결을 내라고 독촉까지 했다.
 결국 수민은 초기에 기획했던 10권 분량의 작품을 4권에서 완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4권을 쓰는 동안 팔린 총 권수는 약 3천 부.
 4개월간 써서 받은 금액은 총 180만 원가량.
 작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쓰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절대 크다고 볼 수는 없는 금액이었다.
 차라리 알바를 하면서 버는 게 나을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작품을 본 독자들의 감상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북 관련 계약 조항조차 정확히 없었을 때였다.
 고생한 값에 비해 들어온 수익은 터무니없이 작았던, 수민으로서는 애증의 작품이 되어 버렸던 데뷔작이다.
 그 일을 겪은 뒤로 수민은 절필을 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현우는 그런 자신의 작품을 봐 주었다고 했다.
 지금껏 자신의 데뷔작이 뭔지도 몰랐던 다른 편집자들과는 달랐다.
 “혹시······.”
 수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제가 지금까지 낸 작품들을 다 보신 건가요······?”
 “네.”
 망설임 없는 현우의 대답.
 순간 수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민은 자신이 썼던 흔적이 남아 있는 한글 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내 글을 하나하나 콕콕 집어내고 봐 준 사람이 있었나?’
 물론 작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분명 쓴 소리를 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의 글을 똑바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현우는 마지막 마왕이라는 작품의 맥락을 아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작가 자신보다도 더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심지어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다 봐준 가장 소중한 독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즉, 자신의 작품 성향이 어떤지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편집자가 되기 전부터 재밌게 본 작가님 중 한 명이었거든요. 작가님은 충분히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이번에도 그런 글을 쓰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
 현우의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다.
 수민이 감격한 나머지 제대로 현우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수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는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생각한 플롯이 몇 개 있습니다만, 한번 들어 보실래요?”
 “플롯이요?”
 “네. 이거 초고를 조금 보니까 작가님이 생각하고 있을 진행과는 맞지 않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장의 수요에도 충족할 수 있으면서 작가님도 만족할 만한 이야기 진행을 들어 보시는 건······.”
 “알겠습니다.”
 이어지려는 현우의 설명을 끊고 수민이 말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수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주임님이라면 기대해도 될 것 같아요.”
 “그, 그런가요?”
 “네. 부디 꼭 들어 보고 싶습니다.”
 갑작스레 바뀐 태도에 도리어 당황한 건 현우였다.
 현우는 황급히 수민에게 자신이 구상한 흐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네. 그럼 우선······.”
 
  * * *
 
 현우는 수민에게 몇 가지의 이야기를 제시했다. 물론 글을 쓰는 작가의 뜻을 무시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충분히 시장의 수요와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수민이 만족할 수 있을 법한 부분에 대한 설명과 조기 완결을 제시했다.
 수민의 작품을 모두 읽어 본 현우로서는 그가 어떤 성격으로 작품을 집필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현우가 가졌던 수민에 대한 아주 작은 관심.
 그 덕분에 두 명의 논의는 큰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나.’
 사실 현우가 지적한 부분들은 희미하게 보였던 점수 창에 기인하고 크게 있었다.
 마지막 마왕의 점수가 크게 떨어진 부분은 주제 부분.
 그렇다면 그 주제를 풀어 나가는 중심인물에게 초점을 맞춰야 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편집자로서 첫 담당임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매끄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상태 창의 덕이 컸다.
 “그럼 이런 식으로 수정하는 걸로 하죠.”
 “네.”
 수민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현우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제의 그 태도를 생각하면 제대로 글을 써 줄지조차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카페에서 이야기를 몇 번 나눈 뒤로는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주고 있었다.
 ‘그새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나 본데······.’
 현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열심히 수정안을 훑어보는 수민을 쳐다보았다.
 이미 수민의 마음속에서는 현우에 대한 이미지가 올라 이제는 존경의 시점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현우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일단 쓸 수 있는 데까지 써 보죠.”
 “아, 그럼 그동안 주임님은 어떡하시려고요?”
 “일단 한 번 수정할 때까지는 기다리죠 뭐. 오늘 작가님 덕분에 회의도 젖혔거든요.”
 반농담조로 내뱉는 현우의 말에 수민이 가볍게 웃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보다 작가님, 여기서 쓰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시끌벅적한 카페 안에서 집필에 얼마나 집중을 할 수 있을까.
 현우는 이런 분위기에서 수민이 글을 제대로 써 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닥······.
 하지만 그런 현우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이, 이미 수민은 모니터를 노려본 채 이미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본 현우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타이핑 속도가······.’
 방금 전까지 슬럼프를 겪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속도였다.
 심지어 너무도 집중한 나머지 방금 한 현우의 말조차 듣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그 속도에 가장 놀란 것은 현우가 아닌, 바로 김수민 본인이었다.
 
 수민이 글에 열중하는 동안 현우는 바깥에서 담배를 한 대 태웠다.
 “후우······.”
 시간은 밤 10시. 이미 해는 져 버린 지 오래다.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고 있으니 방금 전까지 수민과 함께 느꼈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현우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사실 1권 점수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어.’
 1권의 최종 랭크는 C-.
 단순히 랭크 점수로만 본다면 평균 이하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연재 사이트에 들어가 다른 작품들의 점수를 꾸준히 확인한 결과, 김수민 작가의 점수는 그다지 나쁜 점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랭크 점수가 떨어져도 수입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상업적 성공과 작품의 전반적인 점수는 별개인 거야.’
 현우는 그렇게 결정지었다.
 얼마나 팔리느냐에 따라 작품의 랭크가 결정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현우로서는 랭크가 단순히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그래도 수익은 내야 되겠지만.’
 편집자의 역할은 물론 좋은 책을 내는 것에 있다.
 좋은 글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은 당연히 현우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책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많이 팔린다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이 본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순문학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상업소설을 쓰는 이상 수익에 대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전업 작가인 김수민의 경우는 수익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어.’
 좋은 작품을 내도록 편집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작품에 최소한 손해를 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이 편집자인 자신의 역할이었다.
 ‘아무튼 잘됐어.’
 사실 제본 날짜까지 닷새도 채 남지 않은 현 상황에서, 현우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설에 대한 상태 창이 보이는 능력을 얻은 것이다.
 ‘적어도 어떤 식으로 써야 흥행을 할 수 있는지는 알아야 해.’
 상태 창을 어떻게 이용해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지금 현우가 포인트를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잠깐만······.’
 상태 창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던 현우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현우는 서둘러 스마트폰으로 판타지 소설을 전문으로 다루는 연재 사이트에 접속했다.
 메인 화면에 현재 연재 중인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이 보였다.
 현우가 작품을 클릭하자 상태 창이 나열되었다.
 
 [죽음의 좌]
 -第 124화-
 상태 : 미완
 작가 : 이태양(Lv.58)
 장르 : 퓨전, 판타지
 주제 : 3/10
 구성 : 5/10
 문체 : 4/10
 소재 : 9/10
 Rank : C-
 
 ‘이게 현재 여기서 가장 잘나가는 작품이었지.’
 하지만 랭크는 C-.
 김수민 작가가 쓴 마지막 마왕의 1권과 같은 랭크였다.
 하지만 분명 죽음의 좌는 현재 연재 중인 사이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품이었다.
 김수민 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얻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현우는 또 다른 작품을 눌러 상태 창을 확인했다.
 
 [전쟁의 신]
 -第 89화-
 상태 : 미완
 작가 : 양세진(Lv.44)
 장르 : 판타지
 주제 : 2/10
 구성 : 3/10
 문체 : 4/10
 소재 : 10/10
 Rank : D+
 
 죽음의 좌보다는 조회 수나 선작수 면에서 약간 밀리는 작품이다.
 랭크 점수도 높다고는 볼 수 없는 작품.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의 신은 베스트 순위 10위권 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들이 김수민 작가와 다른 점들은 총 세 가지였다.
 작가의 레벨.
 그리고 종이 책과 연재 사이트의 차이.
 하지만 현우는 마지막 차이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소재 점수가 높아······!’
 현우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역시 소재에 따라 작품의 수익이 갈리는 거야!’
 작가 레벨은 지금껏 소설가로 활동한 시기로 쌓은 경험, 혹은 재능의 유무에 따라 갈리는 것일 터.
 만약 소재 점수를 좀 더 높여서 이런 연재 사이트에 글을 올린다면 분명 김수민 작가의 글도 흥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민은 필력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현우는 서둘러 담배를 다 태우고 카페로 들어갔다.
 ‘이거라면 할 수 있어······!’
 드디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우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으음······.”
 현우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수민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써 내려갔던 수민의 의욕은 그새 한풀 꺾여 있었다.
 ‘또 안 써지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구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현우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거짓말처럼 손이 멈춰버린 것이다.
 수민은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헉! 10시?’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잠시라도 쉰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말도 안 돼······.’
 폰을 쥐고 있는 수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뮤즈의 신이라도 온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 이렇게 끝이 난 것이 도리어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민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자신은 최대한 쉬엄쉬엄 일하자는 주의가 아닌가.
 ‘뭐, 일단 3권 분량은 다 썼으니······.’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담배를 다 핀 현우가 자리로 다가왔다.
 “주임님.”
 “다 쓰셨어요?”
 초고가 있다고는 해도 고작 8만 자.
 지금껏 쓴 초고의 수정 작업을 비롯해 퇴고를 제외해도 5만 자는 더 써야 하는 상황이다.
 그걸 알고 있는 현우였기에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예. 다 썼습니다.”
 그러나 수민의 대답은 현우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네? 이제 겨우 4시간 정도 지났는데요?”
 “저도 이렇게 집중해서 쓴 건 작가 인생 처음입니다.”
 “그래요? 그래도 4시간 만에 다 쓰시다니······.”
 “희한하게 주임님이 오시면 손에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글이 술술 써지더라고요. 이게 다 서 주임님 덕분입니다.”
 수민은 말끝마다 연신 현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글들을 꼼꼼히 봐 주고 진심으로 상담해 주는 편집자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서 자신의 글들을 실시간으로 검토해 주려는 것이다.
 당연히 수민으로서는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한번 봅시다.”
 “예.”
 현우는 수민이 건네준 노트북의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현우의 눈이 글줄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현우가 글을 검토하는 동안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마지막 마왕]
 -第 3권-
 상태 : 미완
 작가 : 김수민(Lv.29)
 장르 : 판타지
 주제 : 7/10
 구성 : 4/10
 문체 : 6/10
 소재 : 4/10
 Rank : C
 
 ‘······대단해.’
 현우가 지적한 부분이 완벽하게 고쳐져 있었다.
 자신이 교정할 필요도 없이 기타 비문이 거의 눈에 띄지도 않았던 건 물론, 2권의 우유부단했던 로인의 성격까지 어색함 없이 시원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소재 점수는 오히려 더 떨어진 게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글의 질이 향상된 건 확실해.’
 방금 전까지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작가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이거라면 된다.’
 지금 당장 마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퀄리티였다.
 흥분된 기분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현우는 한글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후우······.”
 현우의 한숨 소리에 수민이 눈을 떴다.
 “어, 어떤가요?”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속에는 희미하게 기대의 눈빛도 띄고 있었다.
 현우가 빙긋 웃었다.
 “괜찮은데요?”
 “네?”
 어리둥절한 수민을 보며 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전개 자체가 엄청나게 속도감이 붙었어요. 그렇다고 개연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문체만 아니었으면 같은 작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졌네요. 물론 좋은 의미로요.”
 “저, 정말입니까? 괜히 저 기운 없을까봐 하는 말씀 아니죠?”
 “저 글 가지고 빈말 안 하는 성격입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엄청 좋아졌어요. 퇴고 한 번으로 이렇게 나아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현우의 말에 수민의 표정이 확 펴졌다.
 “그, 그럼······!”
 “네, 이건 제가 손댈 것도 없네요. 일단 내일 다시 작업하게 될 테지만······. 일단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앗싸!”
 현우의 말에 수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수민의 모습을 보며 현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작가님도 오늘은 푹 쉬세요.”
 “예.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다음엔 늦으시면 안 됩니다.”
 “작품이요? 아니면 약속이요?”
 “둘 다요.”
 여전히 농담 섞인 수민의 말투에 현우와 수민이 마주 보며 웃었다.
 현우와 수민은 가볍게 악수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집이 근처인 수민과 달리 현우는 슬슬 버스가 끊길 시간이었다.
 서둘러 돌아가는 현우를 수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무시고 가셔도 되는데······.”
 “저도 내일 출근해야죠. 차라도 가져왔으면 모르겠지만요.”
 “아쉽네요. 그래도 바쁘실 테니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는 수민의 어조에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어느새 수민은 현우에게 상당한 친근감을 표하고 있었다.
 살짝 어두워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현우가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야, 우리 작가님께서 버스 끊기지 않게 딱 다 써 주셨네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하, 주임님도 농담을 다 하시네요.”
 현우의 말에 수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정말 가 보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릴게요.”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 등 뒤에서 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 주임님!”
 무언가 결심한 듯한 수민의 목소리에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길가 한가운데에서 수민이 현우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현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 거 같네.’
 철딱서니 동생이 철이 들면 이런 기분일까.
 현우가 버스에 올라타는 동안에도 수민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현우는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작가로 만들어 주겠어.’
 좋지 않았던 첫인상. 하지만 현우는 그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첫 담당인 만큼 자신의 모든 능력을 펼쳐 그를 빛나게 만들리라.
 현우는 수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가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후, 피곤해······.”
 털썩.
 “아이고, 좋다!”
 집에 도착한 현우는 입었던 양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재끼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씻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의 피곤함이 현우의 몸을 엄습했다.
 하지만 이대로 잠에 빠질 수 없는 노릇.
 현우는 침대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손을 더듬었다.
 ‘책, 책이 어디 있더라······. 여기쯤에 두고 간 거 같은데······. 아, 이건가.’
 책을 집어 든 뒤 현우는 고개를 들어 책을 펼쳤다.
 “응?”
 어느새 책은 제목이 없는 텅 빈 책자로 변해 있었다.
 아침과는 달라진 책의 모습에 현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책장을 넘겼다.
 “헉······!”
 현우가 책을 펼친 그 순간, 현우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드디어 빛을 보는가
 
 
 
 띠링!
 머릿속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들으며 현우는 책 표지를 넘겼다.
 [노블 메이커의 세계로 오신 플레이어를 환영합니다!]
 [이전의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 초기화됩니다.]
 [새로운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자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
 분명 소설이었을 터였던 책의 문구가 완전하게 바뀌어 있었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자 책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이 반짝이는 큰 문구로 쓰여 있었다.
 ‘게임 접속이라도 한 것 같군.’
 기묘한 느낌을 받으며 현우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player name - 서현우][lv.1]
 [passive skill]
 1. 속독(★★☆☆☆)
 2. 속필(★☆☆☆☆)
 [active skill]
 1. 편집자의 눈(★☆☆☆☆)
 2. 독촉(★☆☆☆☆)
 3. 뮤즈(★☆☆☆☆)
 
 페이지에 나열된 능력치의 향연.
 각각의 항목에는 스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현우는 그중에서 ‘편집자의 눈’ 항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레벨 1. 편집 능력을 대폭 향상시킵니다. 작품의 질이 소폭 상승합니다······.”
 그 아래로는 스킬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자세한 스킬 활용법이라든지 주의 사항 같은 것들.
 아래의 주의 사항들을 보기 전에 현우는 소제목에 적힌 간단한 설명부터 살펴보았다.
 “그다음은 ‘독촉’ 스킬인가. ‘······한 명의 작가와 근접한 상태에서 작가가 글을 쓸 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최대 6시간까지 발동 가능합니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실제로 이런 능력들이 현실에서 쓰이게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쫙 돋았다.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현우의 경우에는 사실상 현실에서 치트 키를 쓰고 있는 셈이었다.
 “어디 보자, 그럼 마지막은······.”
 평소 혼잣말을 잘하지 않는 현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일부로 의식해서 소리 내어 글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이 현실이라는 게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뮤즈. ‘작가의 영감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킵니다.’ ······뭐야, 이건 쿨 타임도 있네? 1주일?”
 능력 사용법은 세 가지 모두 비슷했다.
 설명이 길게 이어져 있긴 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사람에게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
 책장을 더 넘기니 스킬 설명에 대한 세부 사항들과 퀘스트 진행 상황 등이 자세하게 쓰여져 있었다.
 “하아.”
 한참 동안 책을 살피던 현우는 침대에 몸을 맡긴 채 대 자로 누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머릿속에서 온갖 의문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건지, 그리고 이런 책을 건네준 그 노인은 누구인지. 말단 편집자에 불과한 자신이 이런 능력들을 사용해도 괜찮은 것인지 등등.
 마치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볼이라도 꼬집어봐야 하나.’
 하지만 굳이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이불의 촉감과 벌게져 있을 얼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김수민 작가와 만나면서 보였던 소설의 상태 창들.
 그 모든 것들이 다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생생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일단······ 그 영감님부터 찾아봐야겠다.’
 책을 살피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든 간에 자신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몸이다.
 현우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여러모로 많은 일들로 심신이 지쳤기 때문일까. 현우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현우의 머리맡에서 책이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 * *
 
 늦게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난 현우는 출근 준비를 평소보다 훨씬 서둘렀다.
 현우는 출근용 가방에 책을 넣고 1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제발 계셨으면 좋겠는데······.’
 이전에 노인과 만난 장소를 다시 한 번 들르기 위해 빠른 시간에 집을 나온 것이다.
 노인과 만난 장소에 도착한 한우는 한동안 그 부분을 서성였다.
 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서 몇 번 마주쳤던 익숙한 얼굴의 샐러리맨들이 그런 현우를 간혹 쳐다보았다.
 ‘역시 안 오시는 건가······.’
 오늘이 아니라도 분명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우는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서현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동기인 수한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수한이 현우의 등을 툭 쳤다.
 “야, 네가 웬일로 걸어서 출근을 다 하냐? 나야 가까우니까 그렇다 쳐도.”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 뭐.”
 “가서 담배나 한 대 피자.”
 “너는 맨날 담배 얘기밖에 안 하냐. 그러다 폐 썩는다.”
 현우는 피식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수한과 발을 맞췄다.
 수한과 잡담을 하는 와중에도 현우는 앞으로 이 능력을 어떻게 써야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능력에 대한 고민은 수민과 헤어진 이후로 실컷 했다.
 ‘어차피 나 보라고 건네준 책에서 이런 능력이 생긴 거잖아. 그럼 이 능력을 쓴다고 해서 그 영감님이 뭐라고 하진 않겠지.’
 책에서는 분명 ‘이전의 플레이어’라는 말이 나왔었다.
 그렇다면 이 능력을 쓴 사람이 있었다는 터.
 아마 그 영감님이 크게 혜택을 받았을 확률이 컸다.
 ‘나도 굳이 안 쓸 이유는 없지.’
 무엇보다 누군가한테 해를 끼치는 능력도 아니다.
 오히려 작가에게 도움을 주는 능력이 아닌가.
 편집자인 현우에게 ‘노블 메이커’라는 책의 능력은 축복 그 자체였다.
 이런 능력을 가만히 썩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일단은 어디 쓸 수 있는 데까지 써 보자.’
 고민거리를 질질 끌지 않는 것. 그것이 현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한과 잡담을 나누면서 출근길로 향했다.
 그 모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현우는 주변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회의 시간은 8시부터 9시까지 총 1시간.
 이번에 작가를 맡은 현우도 제대로 된 보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
 현우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자료를 정리했다.
 ‘비소설 교정, 교열은 대충 끝냈고······.’
 현우는 마지막 작업으로 한글 파일을 열었다.
 어제 김수민 작가와 함께 둘이서 고생했던 마지막 마왕의 3권이었다.
 현우는 제본 작업에 맞는 문서로 변환한 뒤 소제목과 페이지를 정리해 나갔다.
 어제 한 번 확인했던 작품임에도 한우는 다시 한 번 글을 보았다.
 ‘역시 잘 쓰긴 잘 썼어.’
 현우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작품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제 겨우 두 번의 교정 작업을 거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게 작업이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품의 재미 자체가 올라갔는지라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교정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고.’
 사실 고작 두 번만으로 교정을 끝낼 수는 없다.
 책 한 권을 만드는 것 자체가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었으니까.
 맞춤법 등을 교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차, 소제목, 내용을 검토 및 첨부하고 출판 형식에 맞게 정리를 하다 보면 하루나 그 이상의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하지만 교정을 하는 현우의 속도도 능력으로 인해 엄청나게 빨라졌기 때문에 이런 벼락치기 같은 작업이 가능해졌다.
 물론 빠르게 출간해야 되는 장르 소설의 특성, 그리고 워낙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겹쳤기에 이런 식의 작업이 불가피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고작 두 번, 총 3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원고 편집을 완성한다는 것은 노련한 편집자라고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타다다다닥!
 빠르게 진행되는 작업 속도를 직접 느끼면서 현우는 경쾌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거 일할 맛 나는데?’
 속독이 되지 않는 것이 현우의 단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블 메이커를 읽은 뒤 생기게 된 ‘속독’ 능력으로 인해, 현우는 훨씬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엔터를 탁 치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걸로 끝.’
 이후로는 사내 메일로 편집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면 끝.
 간단한 작업 보고서를 프린터로 뽑은 뒤 현우는 잠시 자리에서 휴식을 취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할까?”
 얼마 안 있어 편집장 인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오늘 보고서 제출해야 되는 사람들 회의실로 모여요.”
 그것이 신호였다.
 인호의 목소리에 현우를 비롯한 직원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들어간 순간 편집장을 제외한 직원들의 낯빛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대부분 대리급 이상의 직원들.
 항상 비소설의 2차 교정 작업만 하던 현우는 그다지 회의에 참여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이 담당했던 소설로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마지막 마왕의 1권과 2권을 합쳐 이제 겨우 세 번.
 하지만 현우의 낯빛은 전혀 긴장된 모습이 없었다.
 “자, 그럼······.”
 편집장이 자리에 앉아 각 직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었다.
 시작은 3부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김현세 팀장이었다.
 “김 팀장, 에이스 오브 포춘 3권은 어때?”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대여점에서도 반품율이 낮아요.”
 “좋아. 그럼 그대로 가고. 작가한테 슬슬 이북 얘기 해 놔. 아, 그리고 그 작가는 그냥 인터넷 연재 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우리 쪽에서도 그 쪽이 부담이 덜하잖아. 슬슬 그 쪽으로도 얘기를 꺼내 봐.”
 “알겠습니다.”
 “아, 이 대리. 이번에 비소설 몇 권 맡은 건 어때?”
 “썩 좋지는 않습니다. 요즘 시장에 유행 중인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정보는 이미 편집장의 메일로 전달이 된다.
 회의에서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수정이나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쪽으로 진행이 되었다.
 현우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서 주임.”
 “예.”
 드디어 현우의 차례였다.
 현우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인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회의실에 비치된 모니터와 미리 배치해 둔 보고서를 응시하던 인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업한 것들 메일로 받았는데, 깔끔하더군. 양도 상당했는데 말이야. 어제 회의 빠질 만하구먼.”
 인호의 너스레에 사원 몇 명이 웃었다.
 현우도 그들을 따라 작게 웃었다.
 “아무튼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 마왕 말인데. 아직 안 끝났지?”
 현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인호를 바라보았다.
 “다 끝났습니다.”
 “뭐?”
 “30분 전에 메일로 보냈습니다. 급하게 끝낸 거라 회의 때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교정 작업도 다 끝내 두었습니다.”
 현우의 말에 인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늦장 작가의 원고를 기어코 받아 낸 것도 모자라 교정까지 다 끝내 두었다고?
 인호는 서둘러 자신의 메일을 확인했다.
 “자, 잠깐만.”
 말까지 더듬는 인호의 반응에도 현우는 덤덤할 뿐이었다.
 현우는 차분한 마음으로 인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직원들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호를 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았다.
 약 10분간의 불편한 침묵.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인호였다.
 “······서 주임.”
 “네.”
 인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 자네가 맡은 거 맞나? 어떻게 이 많은 분량을 하루 만에 끝낼 수가 있어? 아니, 그보다 대체 글은 어떻게 받아 낸 거야? 통조림이라도 시켰나?”
 믿기지 않는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인호.
 하지만 그 앞에서 현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색하게 웃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편집 능력이 눈에 스텟 창으로 보여서요······ 하고 말할 수도 없고.’
 곤란한 현우의 마음도 모른 채 인호가 닦달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어제는 초고도 안 보냈다고 했잖아?”
 “전혀 안 쓴 건 아니었습니다. 작가님이 미처 보내지 못했던 것뿐이라. 어젯밤에는 제가 좀 재촉을 해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다 작가님이 열심히 써 준 덕분이죠.”
 “이거 진짜 물건일세······. 첫 담당에서 일을 내는군.”
 “하하······.”
 “진작에 담당 작가를 붙일 걸 그랬어.”
 연신 놀랍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는 인호를 보며 현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작가 늦장부리는 거 다른 편집자들도 못 고쳤던 거 알아?”
 거기까지 말한 인호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고 과장. 자네한테 말하는 거야.”
 편집 3부의 과장, 고진섭이 그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죄송합니다.”
 “주임도 이 정도인데 대체 고 과장은 뭘 한다고 글 하나 제대로 못 받아 낸 거야? 으이구, 쯧쯧.”
 인호의 타박에 진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진섭은 과거 김수민 작가의 편집을 맡은 경력이 있던 편집자 중 한 명이었다.
 인호의 입장에서는 진섭의 일 처리 능력이 못마땅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이제 2년을 일한 현우와 달리 진섭은 10년 가까이 출판사에 몸을 담은 경력이 있었으니까.
 편집장인 인호로서는 다시금 한마디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섭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진섭을 타박하던 인호가 현우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고생했어, 서 주임.”
 “아, 네. 감사합니다.”
 인호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실 첫 담당으로 김수민 작가를 붙이는 데는 인호도 조금 불안한 감이 있었다.
 인호로서는 열정 가득한 신참 편집자와 나태함에 빠진 중견 작가 사이에서 아주 약간의 시너지를 기대했을 뿐이었다.
 사실 인호도 현우가 정말 수민의 태도를 완전히 고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우는 다른 편집자들도 해내지 못한 작가의 나태함을 하룻밤 새에 완전히 고쳐 버린 것이다.
 ‘그에 반해 저 녀석은 과장이나 달고······.’
 그리고 그런 현우의 능력을 생각할수록 인호의 마음속에서 진섭의 평가는 낮아져만 갔다.
 “저, 편집장님······.”
 다시 한 번 못마땅하게 진섭을 바라보자, 눈치 빠른 직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런. 이야기가 너무 샜군.”
 인호는 흥분을 가라앉힌 뒤 현우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오늘 내로 인쇄소 들어갈 거야. 닷새쯤 있다가 책 줄 테니까 작가님한테도 몇 권 드려.”
 “네.”
 “이번에 느낌이 좋더라. 후속권도 딱 그 정도 질로 나오게 하도록 서 주임이 신경 좀 써.”
 “예. 알겠습니다.”
 현우와의 대화를 마친 뒤 인호는 다른 직원들과의 회의를 끝냈다.
 회의를 마친 인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 그럼 대충 끝났군. 추가로 보고할 사람 있어?”
 인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호는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그럼 다들 가서 볼일 봐.”
 “수고하셨습니다.”
 인호의 말과 동시에 회의실에 감돌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진섭을 비롯한 직원들과 인호가 회의실을 먼저 나갔다.
 현우도 그 움직임을 따라 나서려는 찰나였다.
 “서 주임, 서 주임.”
 “팀장님?”
 앞자리에 있었던 3부의 에이스, 김현세 팀장이 현우를 불렀다.
 현세는 현우가 신입이던 시절 자신의 사수였던 사람이었는데, 사람이 좋은지라 현우도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세가 현우를 보며 손짓했다.
 “담배 한 대 피러 갈래요?”
 “아, 네.”
 현우는 현세를 따라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건물 내에도 흡연실이 있긴 했지만 현세는 항상 옥상에서 담배를 피웠다.
 현세는 올라오기 전 뽑은 자판기 커피를 건네주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현우는 현세에게 받은 커피를 후릅 마셨다.
 아직 식지 않은 달달한 맛을 음미하면서 현우는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현세도 담배를 빼어 물더니 입을 열었다.
 “현우 씨, 이번에 한 건 하신 모양이네요.”
 “다 팀장님 덕분이죠.”
 현우의 말에 현세가 가볍게 웃었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2권 작업할 때 교정 작업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그때는 정말 손이 네 개라도 모자랐습니다.”
 마지막 마왕의 1권과 2권도 당연히 현우가 맡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때는 김수민 작가의 늦장 때문에 바쁜 건 아니었다.
 아무리 김수민이라고 하더라도 2권 만에 페이스를 늦추지는 않았다.
 다만 수민의 담당이 되기 전부터 평소에 하던 작업들이 무리하게 쌓여 있던 데다, 처음으로 담당 작가가 생긴 상황이 겹친지라 쉴 새 없이 일을 해도 작업량이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고생하는 현우를 보면서 유일하게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로 눈앞의 현세였다.
 현우는 진심을 담아 현세에게 말했다.
 “팀장님이 진짜 도움 많이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현우의 말에 현세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밥 한번 사세요.”
 “하하, 제가 제대로 된 곳으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현우는 웃으면서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현우가 맞은편의 빌딩을 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 동안 현세가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거든요.”
 “그런가요?”
 “그야 그 작가분을 담당으로 맡았으니까요. 그것도 첫 담당인데.”
 “그 정도로 유명한가요, 김수민 작가가?”
 “유명하죠. 악명이 높다고 해야 되나.”
 “······그 정도에요?”
 김수민 작가의 나태함은 이미 ‘블루하우스’의 편집자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했다.
 하지만 첫 담당을 맡았던 현우는 그저 소설가를 직접 만나 편집을 한다는 사실만이 기뻤을 뿐, 그런 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현우도 처음에는 김수민이 나태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슬럼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뭐, 슬럼프가 아니었던 건 아니지만······. 그 게으름도 한몫하긴 했지.’
 현우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현우가 수민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동안 현세는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했죠. 편집자를 괴롭히는 작가 탑 쓰리에 들었을 정도니까요. 그 정도로 악명이 대단한 작가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작가 담당만은 해 주지 말라고 하는 편집자도 있었다니까요.”
 “그런 작가를 저한테 담당하게 한 거군요.”
 현우는 무자비한 인사 배치를 해 준 인호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악명이 자자한 작가를 담당으로 붙일 줄은 현우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첫 담당 작가를 말이다.
 “뭐, 편집장님도 생각이 있었겠죠.”
 현세가 아무렇지 않은 듯 현우의 불만을 넘겼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네?”
 “그 작가라면 글 늦게 쓰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 작가한테서 대체 어떻게 하루만에 1권 분량을 뚝딱 만들어 낸 거예요?”
 현세가 궁금하다는 듯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담뱃재를 털고 있던 현우는 현세의 눈빛에 움찔했다.
 ‘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실상은 책을 손에 넣은 현우의 강제 통조림(?)능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현우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실은······ 원래 초고도 있었고······. 굳이 제가 한 걸로 따지자면 집으로 찾아간 정도?”
 “그거야 미팅 일로 자주 있는 일 아닙니까?”
 “아예 통조림을 했거든요. 밤새 카페에서 글만 쓰게 했죠.”
 “아무리 밤을 새웠다고 해도 말이죠, 흐음······.”
 “······.”
 “그래서 하루 만에 다 썼다고요?”
 “네, 뭐······.”
 현세가 미심스러운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현우는 그 표정에 뻣뻣하게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말해도 너무 안일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세가 어이없다는 듯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쓴다고 무조건 쓰면 편집자들은 다 능력자게요?”
 “······.”
 네, 능력자 맞습니다, 팀장님.
 “어, 아무튼 좀 쪼다 보니까 어떻게 결과물이 나왔을 뿐입니다. 정말로 제가 한 건 없어요.”
 “그래요?”
 “아마 이번 작품에 제대로 쓰려고 작정한 모양이겠죠.”
 “하긴, 전작 성적이 워낙 안 좋았으니까······.”
 현우의 마지막 말에 현세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중견 작가답지 않게 전작은 2천 부도 나가지 못했다.
 전업 작가인 만큼 이번 작품에 온 힘을 다해 쓴 것이리라. 현세는 그렇게 홀로 납득한 듯했다.
 “아무튼 축하해요. 첫 담당인데 꽤 잘 풀리는 걸 보니 제가 다 맘이 놓이네요.”
 “이게 다 김 팀장님 덕분입니다.”
 “그런 소리 마시고 나중에 밥이나 한번 제대로 사요.”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대화에 현우가 웃었다.
 “네, 꼭이요.”
 
  * * *
 
 닷새 뒤, 점심시간.
 이미 사무실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현우는 평소처럼 교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맡은 교정 분량은 능력 덕분에 엄청난 속도가 붙었다.
 ‘거의 다 끝났네.’
 끝이 없는 작업 분량은 이제 현우에게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미 현우의 머릿속에는 수환과 먹을 점심거리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서 주임.”
 그때 현우의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편집장님?”
 인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점심 드시러 안 가셨네요.”
 “자네 기다렸지.”
 “네?”
 “오늘 점심 같이하겠나? 할 얘기도 있고.”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럼 작업 끝나면 자리로 오게.”
 인호는 그렇게만 말하고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인호의 태도에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평소 수한과 둘이서 점심을 먹던 현우로서는 인호의 제안이 갑작스러웠다.
 현우는 켜 놓은 컴퓨터를 이용해 수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오늘은 밥 같이 못 먹겠다. 쏘리.
 -왜?
 -편집장님이 보자고 하셔서
 -헐 진짜? 그럼 안 되는데. 왜 하필 오늘이야?
 ‘얘는 또 왜 이래?’
 -왜? 너도 할 말 있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잠깐의 뜸을 들인 뒤에야 수한의 메시지가 왔다.
 -아니다. 나중에 얘기할게.
 괜히 이렇게 나오니 더 궁금해졌다.
 현우가 무슨 일이냐고 문자를 보내도 수한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해 주겠지 뭐.’
 현우는 사라지지 않는 1 표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지막 작업을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는 인호의 자리로 향했다.
 “그럼 갈까?”
 기다렸다는 듯이 인호도 현우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는 인호와 함께 출판사를 나섰다.
 “자네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편집장님이 좋아하는 거면 됩니다.”
 “싫으면 싫다고 할 테니까 그냥 말해. 괜히 아랫사람 눈치주기 싫으니까.”
 솔직한 인호의 말투에 현우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인호의 솔직하고 투박한 말투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현우는 인호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나이는 이제 겨우 마흔을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럼 두 골목 지나서 있는 회전 초밥집 어떻습니까? 회전초밥집인데도 싸고 맛도 좋습니다.”
 “초밥 좋지. 앞장서게.”
 현우와 인호는 출판사를 나와 회전 초밥집으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한 둘은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요즘 출판되는 소설이나 시장의 동향 등 크게 무겁지 않은 주제로 잡담을 나누었다.
 그중에는 현재 담당한 김수민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김수민 작가 작품 있잖아. 마지막 마왕. 이번에 제대로 입소문을 탄 모양이야.”
 “어제 출간한 거 아닙니까? 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입소문을 탑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이번에 대여점 업주들도 난리야. 왜 이렇게 재고가 없냐면서.”
 “그럼 설마······?”
 “그래. 곧 증쇄할 거 같아. 일단은 한 1천 부 정도로.”
 “그게 벌써······. 대단하네요.”
 “그래. 나중에 작가한테 얘기해 놔.”
 한동안 인호와 현우는 일과 관련된 잡담을 적당히 나누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인호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뭔가 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군.’
 현우는 초밥을 먹으며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서 주임.”
 초밥을 깨작거리던 인호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현우는 씹던 초밥을 서둘러 삼키고 인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 혹시 다른 부서로 갈 생각 있나?”
 
 
 
 #블루하우스 내부에서는
 
 
 
 “저보고······ 1부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에 현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제야 현우는 며칠 전 현민이 3부로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메꿔 달라는 얘기하려고 한 거였구나.’
 1부의 사원들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하는 경우가 다른 부서에 비해 특히나 많았다.
 그렇기에 1부는 언제나 사람이 부족했다. 그 점은 현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땜빵이 자신이 될 줄은 현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 편집장 성격 더럽기로 소문났는데.’
 ‘블루하우스’의 에이스들이 모인다는 1부.
 그러나 그런 평과는 달리 내부 사원들의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블루하우스 내부에서 1부 편집장이 제일 성격이 더럽다.’
 라는 말이 직원들 내부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곳의 신입 사원들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도 1부에 있는 편집장이 폭언에 가까운 처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현우도 1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아니, 오해하지 말고 계속 듣게.”
 현우의 심정을 눈치챈 인호가 손사래를 쳤다.
 “나도 자네를 1부 쪽으로 보내 주긴 싫어.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러면······?”
 “그래도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거든. 1부 편집장한테 도움 받은 것도 있고. 그런데 그쪽 부서로 이동시킬 만한 적절할 만한 인사가 없어서 그래. 최 대리는 아직 출장해서 오려면 멀었잖아.”
 과장급 이상으로 보내기엔 애매하다 이 말이었다.
 인호의 말에 현우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남은 게 저로군요.”
 “그래. 한두 달 정도만 가서 도와주라고.”
 고작 한 달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현우도 다른 부서가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얘기해 두지.”
 현우의 대답에 인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연어 초밥 하나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아직 현우로서는 불안한 부분이 많았다.
 “다만 저도 1부 쪽은 아는 게 없는데요. 괜찮을까요?”
 “괜찮아. 어차피 거기나 여기나 하는 일은 비슷해. 그리고 그쪽에서 불렀으니 교육은 할 거고. 자네는 하던 작업들 인수인계하고 가면 돼.”
 3부에서의 작업은 확실히 힘든 점이 많았다.
 같은 편집 팀인 1부와 달리 교정, 교열에 대한 작업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하물며 말단에 가까운 현우의 위치라면 더욱이 그랬다.
 ‘하지만······.’
 부서를 변경하게 된다면 담당 편집자도 변경이 될 터.
 인수인계를 하게 된다면 김수민의 담당자도 바뀌게 것 터이다.
 ‘그건 좀 싫은데······.’
 처음으로 맡은 담당 작가인 만큼, 현우는 자신의 손으로 작품의 끝을 보고 싶었다.
 “아, 그리고 김수민 작가 말인데.”
 하지만 현우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인호가 먼저 말했다.
 “원칙상으로는 담당 편집자가 맡은 작품도 인수인계하는 게 맞지만······ 아마 그건 자네도 싫겠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김수민 작가 건은 내가 손을 써 두지. 자네는 지금껏 하던 대로 계속 마지막 마왕 완결까지 담당해.”
 “감사합니다.”
 그대로 작가를 담당할 수만 있다면 현우로서도 불만은 없었다.
 현우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새우 초밥을 집었다.
 “마침 김 작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호가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현우는 들었던 새우 초밥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4권 상황은 어때?”
 현우가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굳이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현우가 시원하게 인호에게 마지막 마왕의 원고 상황을 짤막하게 전했다.
 “실은 이미 초고를 다 썼습니다.”
 “뭐?”
 현우의 대답에 인호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3권을 쓴 지 얼마나 됐는데 벌써 4권 초고를 썼다니, 1주일도 안 됐는데?
 젓가락조차 내려놓은 채 인호는 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그거 진짜야?”
 “이번에 제대로 삘 받으신 모양입니다.”
 “허, 참······.”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인호는 이마에 손을 갔다 댔다.
 현우는 그런 인호 앞에서도 묵묵히 초밥 접시를 들더니 인호 앞에 내려놓았다.
 “편집장님, 이거 드세요. 연어가 맛있습니다.”
 ‘이 녀석······. 대체 뭐지?’
 김수민이 누구인가.
 나름대로 작지 않은 출판사인 ‘블루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은 편집자들조차 포기 선언을 하게 만든 작가가 아닌가?
 ‘블루하우스’ 내에서는 그 이상으로 악명이 높은 작가가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작가를 이제 2년 된 신입이 완벽하게 살려 낸 것이다.
 편집자 생활만 해도 거의 20년.
 하지만 인호도 지금껏 이 정도의 신인 편집자는 본 적이 없었다.
 ‘1부에 보낸 건 실수였나?’
 고작 한 달.
 하지만 인호는 그 한 달조차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참에 1부로 말뚝 박는 건 아니겠지?’
 인호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떨쳐 냈다.
 “일단 이거 받게.”
 화제를 바꿀 겸 인호는 준비했던 것을 꺼냈다.
 저번에 현우에게 쥐어준 회사 법인 카드였다.
 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드를 받았다.
 “이건 또 왜······?”
 “저번에 보니까 어디 허름한 국밥집에서 대충 챙겨 먹은 모양인데, 그러지 말고 어디 거하게 맛있는 거 먹으라고. 너 잘 먹으라고 주는 거 아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현우의 웃음에도 인호의 진지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인호는 재기한 수민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당부했다.
 “괜찮으니까 비싼 걸로 먹어. 그리고 마지막 마왕 최대한 완결까지 권수 늘릴 수 있도록 유도해 봐. 곧 전자책도 나갈 거야.”
 “벌써요? 아직 3권밖에 안 됐는데요?”
 반드시, 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자책은 완결된 작품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년에 가까운 편집 작업을 한 인호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 적기라는 것을.
 “흐름 탔을 때 제대로 해 놔야지. 종이 책으로 벌어 봤자 얼마나 벌겠어? 아마 4권 나올 때쯤일 거야. 그 부분도 이야기하고.”
 “알겠습니다.”
 이미 인호의 머릿속에서 수민에 대한 이미지는 달라지고 있었다.
 ‘다음 차기작도 생각해 본다면 전혀 과한 게 아니지······.‘
 게을러터진 2류 작가에서 재기에 성공하기 직전인 노련한 중견 작가.
 이미 인호는 수민의 가치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잘 붙들어 놔야겠어.’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눈앞에 있는 편집자, 서현우의 공이 컸다.
 식사를 마친 현우와 인호가 나란히 가게를 나왔다.
 현우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편집장님.”
 “서 주임 덕분에 내가 잘 먹었지 뭐. 여기 자주 와야겠어.”
 “하하하.”
 “아, 먼저 가게. 나는 볼일이 있거든.”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현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인호는 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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