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마도서생(魔道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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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조회 4,253 추천 39


 열두 살이 되던 해였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뚜렷한 원인도 모른 채 괴질을 앓았다.
 한 시진씩 번갈아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괴현상이 사흘 동안 반복되었고, 부모님마저 반쯤은 포기하셨을 때,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다음 날 일찌감치 동네 어귀의 사학(社學)으로 향했다.
 사 년 동안 다녔건만, 사서(四書)조차 떼지 못할 만큼 둔재였던지라, 스승의 회초리질에 종아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하나 그날은 달랐다.
 또래들과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쳤는데, 평소처럼 머리가 무거워지고 졸음이 쏟아지기는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책의 내용들이 쏙쏙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오전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대학(大學)의 구절과 주석을 줄줄 외우자, 지켜보던 스승과 학동들이 입을 딱 벌렸다.
 절로 어깨가 으쓱해져 오후 수업 시간엔 논어, 맹자, 중용까지 일사천리로 내달았다. 다들 놀라 자빠지는 모양을 보자 십 년 묵은 체증이 일시에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통쾌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사학을 나서자마자, 시기심에 눈이 뒤집힌 놈들에게서 뭇매질을 당하여 한 가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면 명을 재촉한다!
 그날 이후 난 다시 예전의 평범함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모두의 뇌리에서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슬그머니 사학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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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서방(萬書房).
 경사(京師) 신목창대가(神木廠大街)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서점인데, 외관도 허름하고 실제 장서량도 이름과 달리 오백여 권이 채 되지 않았다.
 끼익.
 만서방의 출입문이 열렸다.
 안으로 한 발 성큼 내딛는 소년은 열댓 살쯤 먹어 보였는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특히 한일자로 쭉 뻗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계산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노인이 화들짝 놀라며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이 왔구나.”
 졸음기가 덜 가신 말투에선 친근함이 물씬 풍겨 났다.
 “네, 어르신. 그나저나 흑도영웅전 하편 나왔어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소식이 없구나.”
 “중편 나오고 벌써 석 달이나 지났잖아요. 나올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요?”
 “아마 나오지 않을 것 같구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소년이 급히 물었다.
 “네?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요?”
 노인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쯧, 정파의 협객이 나오는 소설이 아니면 팔리지 않으니까 그렇지. 딴에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한 모양인데, 안 팔리면 접어야지.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땅 파서 글 쓰는 것이 아닌 이상,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삽시간에 시무룩해진 소년의 얼굴을 살피던 노인이 계산대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며 넌지시 말했다.
 “이것 한번 보려무나.”
 강호협객행.
 책 제목을 흘끗 한번 살펴본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어요.”
 “그러지 말고 한번 보려무나. 다들 구하지 못해 아우성인 소설이야. 내 특별히 그냥 빌려 주마. 내일까지 반납해라.”
 소년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말라붙은 입술을 비집고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쯧쯧,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나. 다들 백안시하는 흑도 소설에 목을 매다니.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잘 팔리지도 않건만.”
 “취향 차이죠.”
 “그렇게 치부하기엔 정도가 좀 심한 것 아니냐?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뒷머리를 긁적인 소년이 더듬더듬 대꾸했다.
 “글쎄요······ 뭐랄까요······ 피가 부글부글 끓는다고나 할까요? 마치 제가 흑도의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아요.”
 “흠, 그건 감정 이입이란 건데······ 정파의 협객들을 보면 어떠냐?”
 “무덤덤하죠. 간혹 정파의 위선자들을 보면 죽여 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단추 구멍만 한 노인의 눈이 졸지에 휘둥그레졌다.
 “죽이고 싶어?”
 “아하하······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허허, 이거 증세가 꽤 심각하구나. 그간 너무 편식을 해서 그렇다. 음식도 그렇지만 지식도 마찬가지야. 뭐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지.”
 입술을 삐죽 내민 소년이 항변했다.
 “하지만 강호협객행 따위의 백도 소설은 영 당기지가 않는걸요? 단 몇 장을 읽는 것도 완전히 고문이에요.”
 “쯧쯧, 할 수 없구나. 흑도영웅전 하편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수밖에.”
 소년이 고개를 돌려 서가를 쓱 훑어보며 반쯤은 건성으로 물었다.
 “혹 제가 아직 못 읽은 책도 있을까요?”
 “그야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느냐.”
 “그렇긴 하죠.”
 소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서점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신간이 있는지 물었다.
 있으면 신간부터 살피고, 없으면 곧장 서가로 직행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보석 같은 흑도영웅소설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혹 마음에 드는 책이라도 눈에 띄면 종류를 불문하고 빌려다 읽었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얼추 일 년이다.
 그 덕분에 장서의 내용과 위치 등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파악하게 되었고, 최근 들어 기억력이 급속히 감퇴 중인 노인 대신 종종 책을 찾아 주기도 했다.
 “이것 좀 빌려 갈게요.”
 서가를 한 바퀴 돈 소년이 계산대 위에 내려놓은 책은 모두 두 권이었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
 전자는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었다.
 우주와 인륜의 근본을 밝힌 짧은 글이지만, 후일 주자가 이를 자세히 해석하여 철학의 바탕으로 삼은 까닭에, 유학자들 사이에선 성전(聖典)으로 통하며, 과거 시험 문제로도 종종 출제된다.
 후자는 중국 동한의 위백양이 지었다.
 역경의 괘사를 이용해 연단이론을 전개하였는데, 후일 도학자들 사이에서 만고단경지왕(萬古丹經之王), 즉 모든 단경들 중 으뜸이라 불릴 만큼 내단학을 대표하는 경전이다.
 어떤 책인지 살핀 노인이 한 차례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냥 가져가라.”
 “아니에요.”
 “벼룩도 낯짝이 있지. 보지도 않을 책을 빌려 주며 번번이 돈을 받자니 염치가 없구나.”
 지금껏 소년은 어김없이 다음 날 반납했고, 같은 책을 두 번 빌리는 법이 없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소설이라면 몰라도 방금 소년이 고른 두 권의 책처럼 글깨나 읽은 선비들도 혀를 내두르는 난해한 책을 하룻밤에 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정히 대답해 주지 않을 작정이더냐? 읽지도 않을 책을 대체 왜 빌려 가는 것이더냐?”
 그간 몇 번이나 물었지만, 소년은 그냥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정말 궁금하세요?”
 “궁금하다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일 년이 다 된 일이 아니더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돈을 받으마.”
 소년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잠잘 때 베개 대신 사용해요.”
 순간 노인의 얼굴이 멍해졌다.
 “허허, 이거야 원······ 책을 베고 잔단 말이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어디선가 들었는데요······.”
 소년이 목소리를 낮추며 얼굴을 앞으로 드밀자, 노인도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귀를 기울였다.
 “들었는데?”
 “책을 베고 자면 꿈에 누가 나타나 책의 내용을 알려 준다고 했어요.”
 노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소년의 입가엔 짓궂은 장난기가 잔뜩 매달렸다.
 “예끼, 이놈!”
 “하하하, 하하하하.”
 격의 없이 친근함이 가득 묻어나는 웃음소리에 노인도 피식 따라 웃으며 말했다.
 “여하튼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베개로 사용한다고 하니, 소설이 아니면 돈을 받지 않아야겠구나. 그러니 오늘은 공짜다.”
 짤랑.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전 두 개를 계산대 위에 얼른 내려놓은 소년이 출입문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이놈아, 그냥 가져가래도!”
 “내일 또 올게요.”
 오른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은 소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재주는 원래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거든요.’
 
 
 
 웅성웅성, 와글와글.
 한 떼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저들끼리 설왕설래하는 곳은 크고 번듯한 서점 앞이었다.
 붉은 휘장에 둘러싸인 금액현판에 적힌 글자는 오거서점(五車書店).
 서점 거리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책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대여는 하지 않으므로, 방금 두 권의 책을 빌려 만서방을 나선 소년에겐 한마디로 그림의 떡인 곳이었다.
 “무슨 일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년이 인파를 헤치며 발돋움을 했다.
 큼직한 방문 한 장이 서점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턱.
 하얀 손이 소년의 어깨를 잡아챘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야?”
 고개를 뒤로 돌린 소년이 하얀 손의 주인공을 확인하곤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소년을 내려다보는 자는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청포 사내였다.
 “왜요?”
 “왜라니? 그걸 몰라서 물어? 어라, 그러고 보니 네놈이 겨드랑이에 낀 건 또 무엇이냐? 설마 책이더냐?”
 두 권의 책을 빼앗듯 낚아챈 사내가 얼른 겉표지를 훑었다.
 “태극도설과 주역참동계? 이건 뭐 하게? 차 달일 때 불쏘시개로 쓰려는 것이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욱 치민 소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남이야 뭘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어서 돌려줘요!”
 소리가 제법 컸던지 주변의 이목이 둘에게로 우르르 쏠렸다. 눈썹이 꿈틀한 청포 사내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턱.
 이번엔 또 다른 손이 청포 사내의 손을 낚아챘다.
 “뭐야?”
 노성을 뱉어 낸 청년이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날세.”
 유유상종이라.
 백포를 입은 사내 역시 청포 사내 못지않게 오만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난 또 누구라고. 어서 이 손 놓게.”
 “아서라, 이 친구야. 이목이 이처럼 번다한데, 찻집 심부름꾼 따위를 패 봐야 자네 위신만 깎이지. 부디 체통을 지키게.”
 다들 들으라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소년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쳇, 개나 소나 다 꼬이네.”
 “다박사(茶博士) 따위가 글이나 읽을 줄 아려나?”
 “꼴에 책을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아주 까막눈은 아닌 모양이지.”
 “후후, 누구 말처럼 차 달일 때 불쏘시개로 쓰려는 건지도 모르잖아.”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올해로 열여섯이 된 소년의 이름은 담지명(潭智明).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중양절을 막 지났을 때였다. 사내는 응당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향인 산동 곡부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
 가진 돈은 고작 닷새 만에 모두 떨어졌고, 이틀을 내리 굶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배회하던 중 운 좋게 소흥다관의 종업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처음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잡부에 불과했다.
 의식주나 간신히 해결하는 나날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소년은 쉬는 날을 이용해 만서방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책을 한 권 골랐다.
 다도(茶道)의 고전인 육우의 다경(茶經)이었다.
 차의 기원과 제조법, 다기의 종류, 차를 끓이는 법과 마시는 법, 생산지와 참고 문헌까지, 가히 차에 관한 모든 내용이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찻집은 오시(午時) 초에 문을 열었다가, 술시(亥時) 말에 닫았다.
 따라서 영업이 종료되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등잔불을 밝히고 독서에 몰두했다. 해가 뜨고 아침을 먹은 후에도 영업 준비를 하기 전까지 짬을 내어 책을 파고들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낮 시간은 실전이었다.
 어깨너머로 흘끔흘끔 살피며 책을 통해 익힌 이론을 확인해 보았다. 때때로 주방 한 귀퉁이에 앉아 남몰래 연습도 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을 때, 만서방을 또 찾았다.
 이번에 고른 책은 두 권이었다.
 당나라 말기 모문석이 쓴 다보(茶譜)와 송나라의 송자안이 지은 동계시다록(東溪試茶錄)이었다.
 각각의 책은 성격이 조금 달랐다.
 다경과 다보는 지역과는 상관없이 차의 전반에 관한 내용들을 두루 담았지만, 동계시다록은 복건의 차 문화와 특색 등을 다예(茶藝)와 함께 전개했다.
 또다시 이론과 실전을 번갈아 가며 익히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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