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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중협(惡中俠) 1

2017.08.02 조회 605 추천 4


 악중협(惡中俠) 1권
 
 
 서문
 
 
 사람은 과연 착하게 태어나는가.
 사람은 과연 맹자의 성선설처럼 착하게 태어날까? 아니면 순자의 성악설처럼 악하게 태어날까?
 수천 년 이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했지만 그것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무협 소설처럼 선악(善惡)의 극명한 대결을 전개하는 소설도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때로는 냉혹하고 무심해도 극악의 한계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협이란 용어가 시사하듯 무(武)로써 협(俠)을 추구하는 세상이 바로 강호무림이기 때문입니다.
 본 작품의 주인공은 본성이 분명치 않습니다.
 무불악(無不惡)!
 악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괴이한 이름에서 보여주듯 결코 의협은 아닙니다. 그런 기질이 어린 시절 악인의 손에 의해 키워졌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본래 악하게 태어났는지는 단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선악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칫 흑과 백이 분명하지 않은 회색인으로 취급될 수 있지만 사실 세상은 의외로 흑과 백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불악은 악인이 아니라 강호의 주류를 이루는 회색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금이 백 년 만의 위기라고 떠들어댈 만큼 경제 상황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의해 빚어졌기에 씁쓸하기만 합니다.
 대다수 언론에서 우울한 뉴스만 보도되기에 요즘은 세상사에 대해 잠시 잊고 좋아하는 책에 흠뻑 빠지고 싶습니다.
 필자는 다소 엉뚱한 기질의 주인공인 무불악의 좌충우돌을 통해 조금이나마 웃음과 즐거움을 강호제현께 선사하고 싶습니다.
 <검신>으로 시작해서 지난 작품 <무적투왕>에 이어 이번이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청산 배상.
 
 
 序章―악인들의 최후
 
 
 칠악지회(七惡之會).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악인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합을 주최한 사람은 칠악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옥면잔사(玉面殘邪)였다. 이름에서 보여주듯 옥면잔사는 수려한 외모를 지녀 귀공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의 외모였다.
 옥면잔사는 능란한 말솜씨를 지녔기에 상대를 죽이기에 앞서 친분을 쌓아 돈독한 사이를 만든다. 연후 그 사람의 친인척을 파악하고 일족을 몰살한다.
 옥면잔사의 나이 고작 스물여덟.
 십팔 세에 출도해 불과 칠 년 만에 강호칠대악인으로 선정되었으니 그의 잔악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하, 형님들! 모처럼 한자리에서 뵙게 되어 정말 반갑소.”
 칠대악인은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칠대악인 중 첫째는 귀곡심악(鬼哭心惡).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이며 특이하게도 손톱이 새까맸다. 귀신도 울고 가게 만들 정도로 그의 사악한 두뇌는 당대제일이다.
 그에 의해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살인은 계략과 음모, 술수에 의한 간접 살인이었다. 하기에 그의 무공 수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귀곡심악은 술을 한 모금 음미하고는 감탄을 토했다.
 “흐음, 정말 좋구나! 역시 막내의 풍류는 남달라!”
 옥면잔사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하하, 술뿐만 아니라 진귀한 요리도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드시오.”
 다른 다섯 악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술잔에 입술을 대고 은젓가락으로 요리를 뒤적거렸다.
 칠대악인은 서로 서열을 정해 의형제가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믿음이 부족했다. 그들 악인들은 웃는 와중에도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자들이기에 술이나 음식에 행여 독이 있을까 신중을 기했다.
 검사를 마친 혈전인도가 화리 찜을 먹으며 물었다.
 “막내가 무슨 연유로 우리에게 이 귀한 술과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냐?”
 “넷째 형님, 소제가 머지않아 장가를 갈 것 같소.”
 “장가? 세상의 계집을 한갓 창녀처럼 보는 자네가 장가를 간다고? 대체 어떤 계집이 자네를 유혹한 것인가?”
 “대단치는 않소. 그저 어린 계집이 딸린 과부일 뿐이오.”
 “거참, 자네의 잘난 용모로 처녀도 아니고 애까지 딸린 과부한테 장가를 든다니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군.”
 혈전인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의 병기는 가위다. 그는 상대에게 독형을 가해 끔찍한 고통을 안긴 후 사지를 가위로 썰어 죽이는 잔악함으로 악명을 떨친 자였다.
 혈전인도는 칠대악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기에 흑, 백도 모두가 두려워한다.
 귀곡심악과 혈전인도가 술과 요리를 먹고 아무런 중독 증상도 보이지 않자 네 명의 악인도 비로소 마음 놓고 먹고 마셨다.
 좌중의 분위기가 다소 화기애애해지자 음악색귀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막내야, 네가 장가들려는 여인의 딸년이 몇 살이냐?”
 “하하, 셋째 형님도 장가를 들려는 거요?”
 “히히, 장가는 무슨. 혹시 네 수양딸이 내가 귀여워해 줄 나이는 아닌가 싶어 물었다.”
 “이제 다섯 살이오.”
 계집이라면 비구니에서부터 노파까지 가리지 않는 지독한 색마가 음악색귀였다. 그는 옥면잔사의 수양딸이 될 아이가 고작 다섯 살이라는 말에 입맛을 쩍 다셨다.
 “젠장, 최소 오 년은 더 기다려야겠군.”
 그러자 독목투살(獨目鬪殺)이 차갑게 내뱉었다.
 “색귀, 만일 네놈이 막내의 수양딸을 겁탈한다면 네놈의 아랫도리를 끊어버리겠다.”
 음악색귀는 얼른 우호적인 표정을 띠었다.
 “히히, 농담이외다, 둘째 형님. 우리가 아무리 칠악으로 불린다 해도 최소한 서로는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소?”
 말은 그리했지만 그의 이마 한쪽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독목투살은 칠악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났다. 또한 당금 천하에서 손꼽히는 자객답게 다양한 살인 수법에 능했다.
 본래 그는 전문 자객이었는데, 백도의 협사와 명망 높은 원로를 여럿 죽이면서 당대의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런 그를 회유해 칠대악인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귀곡심악이었다.
 술 단지가 동이 나자 옥면잔사는 새로 술 단지를 가져와 모두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형님들, 소제가 장가를 가도 여섯 형님들은 잊지 않겠소. 만일 다른 자를 영입해 칠악으로 삼는다면 소제는 정말 섭섭할 것이오. 자, 건배합시다.”
 여섯 악인은 옥면잔사가 술잔을 비울 때까지 지켜보다가 비로소 술을 마셨다. 새로운 술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발동된 것으로 아직도 서로 간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단적인 예였다.
 귀곡심악이 다섯 악인을 쓸어보았다.
 “막내가 장가를 간다 하니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각자 내놓을 선물을 말해봐라.”
 서열 오위인 금적야복이 열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 중에서 하나를 뽑아 들었다.
 “헤헤, 난 금강석 반지를 당장 선물하겠소.”
 금적야복은 뛰어난 투도술을 지닌 도적으로 칠악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 그는 도적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명문 정파의 비급까지 훔쳤기에 무림공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고맙소, 다섯째 형님.”
 옥면잔사는 기꺼이 금강석 반지를 받았다.
 서열 육위인 천면수라가 계집처럼 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막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봐. 무엇이든 구해줄 테니까.”
 천면수라의 특기는 변장술이었다.
 그는 워낙 두텁게 화장을 하고 다니기에 그의 본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남녀조차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세간의 정평이었다.
 그는 다양한 인물로 변장해 도둑질, 살인, 겁탈, 유괴 등 숱한 악행을 일삼아왔다. 많은 열협들이 그를 죽이려 했지만 본모습을 아는 자가 없기에 천면수라는 칠대악인 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옥면잔사는 싱긋 미소를 띠며 천면수라의 손을 쥐었다.
 “선물보다는 형님의 진면목을 한번 보고 싶소.”
 “호홍! 왜 이래, 막내? 그렇게 내 진면목이 궁금하면 둘만이 있는 자리에서 요구해야지.”
 천면수라가 교태롭게 웃음을 흘리자 음악색귀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부여잡았다.
 “크흐, 여섯째야. 난 네 낯짝보다 네 아랫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아무리 봐도 사내가 아니라 계집 같아.”
 혈전인도와 금적야복이 손뼉을 치며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솔직히 나도 여섯째가 계집인 것 같아.”
 “헤헤, 이참에 한번 여섯째를 벗겨볼까?”
 악인들은 질펀한 농을 늘어놓으며 연신 술잔을 비웠다.
 술 단지가 바닥을 드러내자 옥면잔사가 다시 한 동이의 술을 내왔다.
 “울금향은 얼마든지 있소. 마음껏 드시오, 형님들.”
 이미 얼근하게 취해서인지 세 명의 악인은 더 이상 술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곧바로 술을 따라 마셨다.
 비교적 신중한 귀곡심악과 독목투살, 천면수라는 옥면잔사가 먼저 술을 마신 이후에야 술잔을 들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술 한 단지는 이내 동이 났다.
 네 번째 술 단지를 내왔을 때는 오로지 귀곡심악만이 술의 안전을 점검했다.
 한껏 취기가 오른 혈전인도가 커다란 가위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헤헤, 여섯째야! 우리 춤이나 춰볼까?”
 “호홍, 좋소! 넷째 형님은 특기인 망나니춤을 추시오!”
 천면수라는 혈전인도와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띵땅··· 띵······!
 옥면잔사가 비파를 뜯고 귀곡심악이 피리를 불어 흥을 돋자 음악색귀와 금적야복도 합류해 춤을 추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독목투살도 탁자를 치면서 장단을 맞추었다.
 악인들의 잔치.
 이때만큼은 칠대악인 모두가 친형제들처럼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즐겁게 어울렸다.
 “케헤헤, 좋구나!”
 “이히히, 여섯째야. 우리 아랫도리를 비벼보자.”
 “둘째 형님, 뭐 하슈? 같이 어울립시다!”
 옥면잔사는 새로이 술 단지를 가져와 모두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하하, 건배합시다! 우리 칠대악인의 영원한 악명을 위하여!”
 건배를 외치는 축원도 역시 악인다웠다.
 옥면잔사가 술잔을 높이 쳐들자 여섯 악인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옥면잔사는 곧바로 술을 마시지 않고 여섯 악인 모두가 술잔을 비울 때까지 지켜보았다. 연후 그는 술을 바닥에 부었다.
 쪼르륵······!
 천면수라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섰다.
 “막내, 왜 아까운 술을 버리는 거야?”
 옥면수라는 아주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여섯째 형님. 짐독을 탄 술을 어찌 마실 수 있겠소?”
 짐독이란 짐새의 날개를 적셔 만들어진 극독을 말한다. 짐독은 냄새도 맛도 색깔도 없으며, 해독제도 없어 한 번 중독되면 회생이 불가하다.
 천면수라는 게슴츠레한 눈빛을 발하며 옥면잔사를 툭 쳤다.
 “호홍,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 난 독을 아주 싫어해.”
 한데 이때였다. 귀곡심악이 손에 쥔 술잔을 떨어뜨리며 검은 피를 토했다.
 “우욱!”
 짐독에 의해 피까지 이미 독혈로 변했는지 피가 뿜어진 탁자와 바닥에서 시퍼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로 예상치 못한 급변.
 독목투살은 자객답게 반응이 빨랐다.
 “배신자!”
 탁자를 건너뛴 독목투살이 옥면잔사를 향해 쾌검을 발출했다.
 번― 쩍!
 옥면잔사는 급히 검을 뽑아 방어했다.
 차앙······!
 서로 검을 맞댄 상태로 옥면잔사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둘째 형님, 공력을 끌어올리면 발작이 더욱 빨라지오.”
 독목투살의 입에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크으으, 네놈이 감히······.”
 옥면잔사는 빙글 회전하며 독목투살의 목을 날려 버렸다.
 사색이 된 음악색귀와 천면수라는 밖으로 달아났고, 헐전인도와 금적야복이 옥면잔사를 공격했다.
 “이런 악독한 새끼!”
 “뒈져라!”
 그러나 짐독에 중독된 그들의 공세는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옥면잔사는 검을 내려쳐 혈전인도를 반으로 쪼개는 동시에 좌수를 뻗어 금적야복의 가슴을 박살 냈다.
 “후훗, 어리석은 것들. 오늘이 죽음의 잔칫날임을 몰랐단 말이냐?”
 세 명의 악인을 연이어 죽인 옥면잔사가 나무집을 나섰다.
 작은 도랑 앞에 음악색귀가 엎어져 있었다. 그는 검은 피를 토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마, 막내야, 제발··· 살려줘······.”
 옥면잔사는 담담한 미소를 띠며 다가섰다.
 “셋째 형님, 내 특기가 뭐요? 죽일 때는 확실하게, 또한 모조리 죽이는 것이 옥면잔사의 방식 아니겠소?”
 그가 검을 내려치자 음악색귀는 허리가 동강나는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도랑을 넘어선 천면수라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오 장을 기어가는 데 불과했다.
 옥면잔사가 앞을 막아서자 천면수라는 애처롭게 눈물을 뿌렸다.
 “마, 막내야, 살려줘. 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도··· 목숨만 살려주면 네 종복이 되어 무엇이든 하겠어. 흑흑, 제발······.”
 옥면잔사는 천면수라의 머리에 발을 얹었다.
 “천면수라,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확실하게 죽어주는 거야.”
 퍼억―!
 천면수라의 머리가 으스러지며 허연 뇌수가 드러났다.
 옥면잔사는 두 악인의 시체를 질질 끌고 나무집으로 들어섰다. 짐독에 의한 독혈이 흥건했기에 악취가 진동했다.
 옥면잔사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귀곡심악에게로 다가섰다.
 다섯 악인은 그가 직접 죽였지만 귀곡심악은 짐독에 의해 죽었기에 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푸욱―!
 검이 귀곡심악의 등판 깊숙이 꽂혔다. 이미 절명했는지 귀곡심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옥면잔사는 비로소 검을 회수했다.
 육대악인 몰살.
 이로써 그가 계획한 위험한 작업이 완료되었다. 이제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름만 바꾸면 세상 누구도 그가 옥면잔사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후훗, 칠대악인 모두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세상이 한바탕 요동치겠군.”
 나무집을 나선 그는 협곡 벼랑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콰아앙―!
 요란한 폭음이 터지며 벼랑이 심하게 요동쳤다. 옥면잔사가 재차 강기를 발출하자 협곡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와르르― 콰쾅―!
 거대한 바윗덩이가 떨어져 내리면서 칠대악인의 비밀 회합 장소인 악인곡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옥면잔사는 악인곡이 완전히 메워지는 광경을 지켜본 후 몸을 돌렸다.
 “하하핫!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까악― 까악―!
 죽음의 냄새를 맡고 날아든 까마귀 떼가 악인곡 위를 배회하다가 시체 한 조각 발견할 수 없자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때 작은 바위 하나가 들썩거렸다. 주변의 돌멩이가 흘러내리더니 바위가 튕겨졌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괴변.
 육대악인은 짐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옥면잔사에 의해 모두 죽은 게 확실했다.
 설마 육대악인의 원혼이라도 빠져나온 것일까?
 “크으으······!”
 바위가 밀쳐진 좁은 틈새 속에서 사람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두 손이 틈새 속에서 튀어나왔다.
 여느 사람과 달리 손톱이 새까맸다.
 칠대악인의 실종!
 강호무림은 세상을 어지럽혀 온 일곱 악인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만세를 불렀다. 악인들의 실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들의 악행을 하늘이 심판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칠대악인이 사라졌다 해서 강호에 악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세상의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칠대악인의 동시 실종은 분명 강호를 진동시킨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십오 년이 흘렀다.
 
 
 제 1장. 벗거나 혹은 죽거나
 
 
 1
 ―불악아, 네가 찾아내야 할 원수는 극악(極惡)이다.
 ―무엇이 극악이오?
 ―사악함이 극에 이른 자는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심장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 심장이 뜨겁기만 한 자는 광마(狂魔)가 될 것이고, 차갑기만 한 자는 살마(殺魔)가 될 것이기에 절대 악마(惡魔)가 될 수 없다. 네가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두 개의 심장을 지닌 악마다. 그것이 극악이다.
 ―그건 궤변이오. 사람이 어떻게 심장을 두 개씩이나 지닐 수 있단 말이오?
 ―못난 놈, 십수 년을 가르쳤지만 네놈의 심장은 아직 뜨겁다. 그런 상태로는 절대 놈의 적수가 될 수 없어.
 ―그럼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지 왜 나를 선택한 것이오?
 ―너만큼 뜨거운 심장을 가진 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광마란 말이오?
 ―그러기에는 네놈의 머리가 너무 차갑다. 그것이 너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너만 한 놈도 없기에 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학학······!”
 가쁜 숨소리를 발하며 한 여인이 수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바탕 싸움을 벌였는지 머리카락은 풀어헤쳐졌고 찢겨진 옷자락 몇 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여인은 쫓기는 처지인 듯 달아나는 와중에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을 추적하는 사람은 세 명의 청년이었다.
 세 명 모두가 용모가 단정했으며 장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수실로 ‘검(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나무 기둥을 걷어차며 빠르게 여인을 추격했다.
 여인은 부상을 당해서인지 추격자들과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위기를 느낀 여인은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빙글 회전하며 암기를 내던졌다.
 “화우추혼!”
 피피핑―!
 수십 개의 다양한 암기가 꽃비가 쏟아지듯 사위로 비산되었다.
 세 명의 청년은 신속하게 흩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산영무탄!”
 태― 태탱―!
 쏟아지던 암기는 현란한 검법에 의해 맥없이 떨어졌다.
 세 명의 검수 중 한 명의 검은 은검(銀劍)이었고 다른 두 명의 검은 철검(鐵劍)이었다.
 은검을 쥔 청년이 여인의 정면을 봉쇄하며 외쳤다.
 “요녀를 제압하라!”
 상황을 헤아린 여인은 은검수에 비해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는 측면 철검수를 향해 암기를 내던졌다.
 “받아랏!”
 철검수는 암기를 쳐내느라 잠시 주춤했다. 여인은 겨우 철검수들을 따돌리고 수림을 벗어났다.
 여인은 좁은 산길을 따라 오르며 검수들을 떨쳐 낼 방법을 모색했다.
 ‘아, 이대로는 잡히고 말겠다.’
 이때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마의를 걸친 청년.
 청년은 허리띠 대신 새끼줄을 둘렀고 머리는 낡은 문사건으로 질끈 동여맸으며 손에는 죽장을 쥐었다. 행색만 본다면 영락없이 산골의 가난한 촌부(村夫)였다.
 그나마 봐줄 만한 부분은 흑백이 또렷한 두 눈으로, 촌부답지 않게 유현한 깊이가 느껴졌다.
 은검수가 바싹 추격해 오며 검기를 발출했다.
 “달아나도 소용없다, 요녀!”
 쐐애액―!
 섬전 같은 검기가 날아들자 여인은 급히 몸을 날렸다. 촌부의 머리를 넘어선 그녀는 촌부의 등판을 향해 냅다 일장을 가했다.
 “미안해요!”
 퍼엉―!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촌부는 난데없이 장력을 얻어맞고 앞으로 튕겨져야만 했다.
 두 명의 철검수 중 한 명이 촌부를 발로 걷어찼다.
 “이 새끼는 뭐야?”
 퍼억―!
 졸지에 밀쳐지고 걷어차인 촌부는 길옆 낙엽더미 속으로 처박혔다. 두 번씩이나 얻어맞았지만 신음 소리 한 번 흘리지 않은 것이 조금은 의문이었다.
 세 명의 검수는 여인을 추격해 가파른 비탈을 내려갔다.
 막다른 벼랑.
 여인은 불행하게도 길을 잘못 들어 병풍 같은 바위 벼랑으로 둘러진 협곡 끝에 이르고 말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벼랑을 올라갈 길이 없음을 확인한 여인은 절망하고 말았다.
 “아아······!”
 이때 세 명의 검수가 여인의 등 뒤로 내려섰다.
 은검수가 여인을 향해 은검을 겨누었다.
 “추상화(秋霜花), 순순히 굴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추상화로 불린 여인은 허리춤에서 한 자루 비수를 뽑아 들었다.
 “흥, 네놈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한데 이때였다. 누군가 협곡으로 뛰어들며 그녀의 자결을 제지했다.
 “멈춰! 누구 마음대로 죽겠다는 거냐?”
 검수들이 돌아보니 잠시 전 추상화에 의해 집어 던져진 촌부였다. 분명 철검수의 발길질에 걷어차였는데 너무도 멀쩡한 것이 의외였다.
 철검수가 촌부를 가로막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촌부가 죽장을 어깨에 걸치며 물었다.
 “너희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우리는 독보검궁(獨步劍宮)의 검수들이다. 방해하지 말고 물러가라!”
 “독보검궁이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묻겠다. 너, 나를 아냐?”
 “뭐야?”
 “너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죽으라고 걷어찬 것이냐? 독보검궁이 생면부지의 사람을 마구 죽이는 곳이냔 말이다.”
 촌부가 날카롭게 따지고 들자 철검수는 다소 황당해졌다. 무엇보다 상대가 독보검궁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은검수는 촌부의 추레한 행색을 훑어보고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뭐 하는 거냐, 철검 칠호? 본 궁의 임무에 방해가 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없애 버려!”
 “알겠소, 은검 향주.”
 철검 칠호는 촌부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독보검궁의 절기 중 하나인 검환칠식이었다.
 “분자결!”
 쐐애액―!
 쾌속한 검기가 촌부의 머리로 내리꽂혔다.
 촌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새끼, 한 번 더 죽이겠다는 거냐?”
 슬쩍 몸을 돌린 촌부는 철검 칠호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으악!”
 갈비뼈가 으스러진 철검 칠호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나가동그라졌다.
 촌부는 철검 칠호를 쫓아가 한 번 더 걷어찼다.
 “방금 것은 본전이고 이번 것은 이자다.”
 퍼억!
 턱을 걷어차인 철검 칠호는 피를 뿜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를 본 칠검 사호가 촌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끼, 촌놈 주제에 감히 검궁과 맞서겠다는 것이냐?”
 촌부는 몸을 틀며 죽장을 내려쳤다.
 “넌 또 뭐냐?”
 퍼억!
 죽장에 맞아 팔뼈가 으스러진 철검 사호는 철검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촌부는 두 번의 발길질에 거의 초주검이 된 칠검 칠호를 다시 걷어찼다.
 “사람을 죽이려면 확실하게 죽여야지.”
 가슴이 걷어차인 철검 칠호는 벼랑에 부딪치며 허연 뇌수를 쏟아냈다. 즉사였다.
 이를 본 은검 향주가 나섰다.
 “내가 실수를 했군. 숨은 고수였을 줄이야.”
 은검 향주는 촌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보복이 두렵지 않다면 신분을 밝혀라.”
 “내가 두렵다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거냐?”
 “소용없다. 본 궁의 검수를 죽인 이상 이름을 숨긴다 해도 평생 본 궁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다.”
 “젠장, 귀찮게 됐군.”
 촌부는 툴툴거리며 죽장을 어깨에 걸쳤다.
 “난 무불악이다.”
 무불악(無不惡).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악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하는 이름에 은검 향주는 비웃음을 흘렸다.
 “크흣, 알고 보니 미친놈이로구나! 세상 어떤 악인도 마빡에 자신이 악인임을 광고하며 다니지 않는데 네놈은 얼마나 사악하기에 악당임을 자처하는 것이냐?”
 무불악은 오히려 그를 빈정댔다.
 “네놈들은 더하지 않느냐? 꼴같이 않은 검법이나 휘두르면서 무슨 독보검궁이라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퇴보검궁(退步劍宮)이 적절하겠다.”
 “이놈!”
 사문을 모욕당한 은검 향주가 검환칠식을 전개했다.
 “기자결―!”
 츄리릭―!
 화려한 검기가 동시에 발출되며 무불악의 전신을 노렸다.
 독보검궁의 은검수라면 강호에서 일류검객 수준이다. 더군다나 향주의 신분이기에 그의 검법은 정순했다.
 무불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아주 형편없지는 않군.”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보법으로 은검 향주의 공격을 피하면서 죽장을 쭉 뻗었다. 아주 단순한 수법이었지만 자신의 허점을 간파당한 은검 향주는 깜짝 놀라 검으로 후려쳤다.
 무불악은 빙글 회전하며 죽장을 휘둘렀다.
 “큭, 역시 퇴보검법이었어.”
 진초와 허초를 가늠하기 힘든 현란한 수법에 은검 향주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퍼억―!
 손목을 강타당한 은검 향주는 검을 떨어뜨렸다.
 무불악은 검을 잃은 은검 향주의 안면을 향해 죽장을 쭉 뻗었다.
 “상대를 못 알아본 눈깔은 필요없다.”
 “아악―!”
 한쪽 눈알이 터진 은검 향주는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무불악은 은검 향주의 한쪽 어깨를 내려쳤다.
 “함부로 손을 놀린 벌이다.”
 퍼억!
 한쪽 눈에 이어 팔까지 잃은 은검 향주는 충격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추상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믿을 수가 없군. 독보검궁의 은검수를 가지고 놀 정도면 저 사람은 절정급 고수다!’
 무불악은 간단히 은검 향주를 쓰러뜨리고는 죽장을 어깨에 걸쳤다.
 “오늘은 내가 출도 기념으로 한 놈만 죽이겠다고 결정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네놈들 모두 죽었어. 어서 꺼져라.”
 철검 사호가 은검 향주를 들쳐 업고 협곡 입구로 향하자 무불악이 거칠게 꾸짖었다.
 “인마, 죽은 놈도 데려가! 냄새나니까!”
 철검 사호는 다시 돌아와 철검 칠호를 옆구리에 끼었다.
 “무불악! 어디 두고 보자!”
 독보검궁의 검수들은 이내 협곡에서 사라졌다.
 비로소 안도한 추상화가 무불악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대협.”
 한데 무불악이 냅다 추상화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예상치 못한 고통과 충격에 추상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무불악은 죽장으로 추상화의 가슴을 쿡 찍었다.
 “너, 나를 아냐?”
 “모, 모릅니다, 대협.”
 “네 눈에는 내가 대협으로 보이냐?”
 “아, 아닙니다, 공자.”
 “너, 이름이 뭐냐?”
 “추상화입니다.”
 “소속은 어디냐?”
 “화훼문입니다.”
 “화훼문은 뭐 하는 곳이냐?”
 추상화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자께서는··· 강호가 초행이십니까?”
 무불악은 심연처럼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두 번 묻지 않을 테니 잘 들어.”
 “무엇을······?”
 “너, 죽을래, 벗을래?”
 “예에······?”
 추상화의 눈망울이 더할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무불악을 올려보았다.
 무불악의 눈은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무시무시한 협박을 가하면서도 살기나 색정이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기에 추상화는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아, 이··· 이자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추상화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위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구해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옷을 벗었다. 사실 생명부지의 사람을 내던져 검수들의 추적을 조금이나마 저지하려 했으니 그녀의 중대한 과오였다.
 오히려 무불악이 자신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강제로 겁탈하려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추상화는 반강제적으로 교접을 맺는 와중에 무불악의 사혈을 찍어 죽일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불악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심연처럼 깊은 눈빛.
 자신의 심중을 환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앞에 추상화는 최면에 걸린 듯 고분고분 무불악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서는 무불악과 같은 사내를 만났다는 것이 불행이었던 것이다.
 휘이잉······!
 스산한 가을바람에 추상화는 퍼뜩 혼몽 속에서 깨어났다.
 악마 같은 사내는 진작 교접을 끝내고 떠났지만 추상화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악몽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사실 화훼문의 제자들은 사문에 대한 자긍심이 높기에 치욕적인 삶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 그들이었다.
 추상화 자신도 독보검궁의 검수들에게 제압될 바에야 자진을 결단하지 않았던가.
 한데 무불악이라는 괴상한 사내를 대면한 상태에서 그녀는 너무도 무기력해졌다.
 “너, 죽을래, 벗을래?”
 그런 치욕적인 협박 속에서 당연히 죽음을 선택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홀린 듯이 옷을 벗었고, 악마와 같은 사내를 받아들여야 했다.
 왜 당시에 당당하게 죽이라고 외치지 못했는지 그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흑······!”
 추상화는 옷자락을 끌어당겨 알몸을 가렸다. 후회와 자책감 때문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같이··· 왜 죽지 못한 거냐? 왜······?”
 3
 산을 내려서던 무불악은 산길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건 또 뭐야? 출도 첫날부터 시체가 여럿 밟히는군.”
 네 구의 시체는 하나같이 참혹했다. 목과 허리가 동강나면서 세 토막이 났다. 베인 부위가 말끔한 것이 빼어난 쾌식에 의해 당한 것으로 보였다.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한 검법 하는데?”
 죽은 자들은 복장으로 미루어 도문(道門)의 제자로 생각되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무당이나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이런 참살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한 가닥 신음 소리를 감지한 무불악이 억새 숲을 헤치고 수림으로 들어섰다.
 “아직 살아 있는 놈이 있나 보군.”
 이곳에도 한 구의 시체가 있었다. 아니,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시체는 아니었다.
 앞서 죽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도사 복장을 하고 있어 같은 도문의 제자로 추정되었다.
 젊은 도사는 허리가 동강나지 않았지만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 나왔고, 베인 목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즉사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고통일 만큼 상처가 깊었다.
 “끄윽··· 끅······.”
 젊은 도사는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도··· 도와주시오······.”
 무불악은 젊은 도사를 쓸어보고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뭘 도와달라는 거냐?”
 “비··· 빈도는 화산의 제자 청림······.”
 “대충 그럴 줄 알았어.”
 “흉수는··· 흑치살군··· 사문에··· 이 사실을······.”
 “너, 나를 알아?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소식을 전해야 한단 말이냐?”
 “대협······.”
 “사람 잘못 봤다. 난 대협이 아니라 무불악이라는 사람이다. 곧 죽을 테니 굳이 죽여줄 필요도 없겠네.”
 무불악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순간 두 줄기 섬광이 동시에 목과 허리로 날아들었다.
 쐐애액―!
 “엇?”
 무불악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죽장으로 몸을 보호했다.
 파팟―!
 옷자락이 옆구리서부터 배까지 길게 베였다. 무불악은 목 부위를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피가 조금 묻어 나왔지만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자신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무불악은 분통이 터졌다.
 “어떤 새끼냐? 당장 나서지 못해?”
 사사삭······!
 사람 키 높이의 억새가 좌우로 갈라지며 한 사람이 무불악 앞에 내려섰다.
 괴인은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눈두덩 주변이 시커멓다. 몸에 걸친 마의가 피로 물들어 검붉게 변색돼 있었다.
 “제법이구나. 감히 전광삼분참(電光三分斬)을 막아낼 놈이 있을 줄 몰랐다.”
 “네가 화산파 도사들을 죽인 놈이냐?”
 “그렇다. 화산칠검이라는 놈들이 감히 내게 도전해 왔다.”
 “도사 말로는 흑치살군 어쩌고 하던데 바로 네놈이었냐?”
 “크흣, 오냐. 내가 바로 흑치살군이다.”
 괴인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무불악을 훑어보았다.
 무불악은 상대의 시커먼 이에 속이 매스꺼웠다.
 “추잡한 놈, 이 좀 닦고 다녀라. 악취가 진동하는구나.”
 “이 무식한 놈아, 내 이는 본래 검다. 그래서 흑치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했다. 괴인은 바로 잔악한 살인 수법으로 악명 높은 혈하육살(血河六殺) 중 일인이었다.
 본래 그는 사람의 허리를 끊어 죽이는 끔찍한 살법으로 악명을 떨쳐 강호 열협들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당시 부상을 입고 잠적했기에 모두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듯 다시 세상에 나선 것이다.
 무불악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가 검은 덕분에 닦고 다니지 않아서 좋겠구나. 그럼 가서 일봐라.”
 “크흣, 이 새끼 완전 골통일세? 내가 하는 일이 사람 죽이는 일인데 네놈을 살려주란 뜻이냐?”
 “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냥 내 검에 죽으면 된다.”
 흑치살군은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크흣, 사실 내가 기연을 얻어 강력한 살인 초식을 배우게 돼 시험 대상이 많이 필요하다. 한데 잠시 전 네놈은 전광삼분참을 막아내더구나. 이번에는 제대로 펼쳐 낼 테니 다시 한 번 막아봐라.”
 “잠깐, 전광삼분참이라면 상대의 목과 허리를 동시에 동강내는 수법이란 뜻이냐?”
 “그렇다. 단숨에 세 토막을 내는 수법이라 한번 걸려들면 누구라도 살아날 수 없다.”
 무불악은 엄지로 뒤편의 도사를 가리켰다.
 “한데 저놈은 토막 내질 못했지 않느냐?”
 “아직 완벽하게 수련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너 같은 놈들을 여럿 죽여야 한다.”
 무불악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발했다.
 “흐음, 나도 살인 수법이라면 여러 가지 알고 있는데 그런 강력한 살인 절기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대체 어떻게 구사하는 것이냐?”
 흑치살군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살인 수법까지 가르쳐 달라고 요구를 해오니 이런 상대는 평생 처음이었다.
 “크흣, 완전 골통이로군. 네놈을 토막 낸 후 대가리를 쪼개보겠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이봐, 내가 무공을 깨우치는 능력이 제법 빠르다. 만일 네가 전광삼분참의 구결을 말해준다면 네 결점을 알려줄 수도 있다.”
 “미친 새끼, 내가 왜 살인비기를 일러준단 말이냐?”
 “잘 생각해 봐. 네가 내 해석을 듣고 전광삼분참의 결점을 보안한다면 그 살인 수법은 정말 당대 최고의 살인비기가 될 수 있다.”
 “······?”
 흑치살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훑어보자 무불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마 내가 구결을 듣고 너보다 더 강력한 살인비기를 구사할까 두려운 것이냐?”
 은근한 격장지계에 흑치살군은 바로 넘어갔다.
 “케헤헤, 네놈이 무슨 천등성현이라도 된단 말이냐? 오냐, 전광산분참의 구결을 일러줄 테니 잘 들어라.”
 흑치살군은 모두 이십사절의 구결을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무불악은 단 한 번 듣는 정도로 구결을 모두 뇌리에 새기고는 죽검을 들고 연습해 보았다.
 “그래, 이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발출하는 거로군.”
 흑치살군은 상대가 구결을 단 한 번 듣고 전광삼분참의 기수식을 구사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는 눈을 부라리며 험악하게 다그쳤다.
 “이 녀석아, 내가 도사 놈을 대번에 토막 내지 못한 이유를 알겠느냐?”
 무불악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
 “구결은 전혀 문제가 없다. 네놈의 자질이 부족하고 멍청해서 절기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을 뿐이다.”
 비로소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흑치살군은 득달같이 달려들며 전광삼분참을 전개했다.
 “뒈져라!”
 작심을 하고 펼쳐 냈는지 잠시 전의 쾌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력한 살인비기가 구사되었다.
 무불악은 상대의 살인비기에 대해 이미 모두 파악한 상태이기에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차차앙······!
 다시 한 번 전광삼분참이 무산되자 흑치살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다면서?”
 “오냐, 곧 죽을 놈 이름은 알 필요도 없지.”
 흑치살군은 억새를 밟고 솟구치며 허공에서 재차 전광삼분참을 발출했다. 최고조의 집중력이 발휘됐는지 아찔한 섬광만 가득했다.
 무불악은 급히 뒤로 쓰러지며 억새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퍼― 펑―!
 두 줄기 검기가 내리꽂히며 바닥이 두 자나 깊이 파였다.
 순간적으로 무불악의 행적을 놓친 흑치살군은 바싹 긴장했다.
 ‘이놈··· 은신술까지 구사할 줄이야.’
 일순 억새 숲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흑치살군은 지체없이 쾌검식을 전개했다.
 퍼― 퍽―!
 검은 그림자는 대번에 세 동강이 났다. 한데 동강난 것은 무불악의 몸뚱이가 아니라 한 아름의 억새더미였다.
 무불악은 흑치살군의 측면에서 소리없이 솟아올랐다.
 “나 여기 있다!”
 흑치살군이 깜짝 놀라 몸을 트는 순간 두 가닥 섬광이 날아들었다. 목과 허리를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쾌검식. 그것은 그가 구사했던 살인비기 전광삼분참이었다.
 퍼― 퍽―!
 허공에서 피보라가 일며 목과 허리가 동강난 흑치살군의 시체가 억새 속에 처박혔다. 그가 자부하던 전광삼분참에 세 토막이 난 것이다.
 무불악은 전광삼분참을 두세 번 구사해 보고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아주 좋아. 뜻하지 않게 훌륭한 살인비기를 배우게 되었군.”
 죽검을 회수한 무불악은 눈을 부릅뜬 채 죽은 흑치살군의 수급을 집어 들었다.
 “이런 놈 대가리면 은자 몇 푼은 받으려나?”
 4
 함양(咸陽).
 장안에 인접한 고도 곳곳에는 아득한 옛날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의 자취가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함양은 오랜 세월 장안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 잊혀져 있었는데 황금문(黃金門)이 함양에 섬서지부를 세우면서 단숨에 향락 도시로 발전되었다.
 황금문은 막대한 금전을 뿌려 함양 열 곳에 도박장을 개설하고 주루를 세워 장안의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높은 배당금과 저렴한 술값.
 장안에서 거래를 마친 상인들이 함양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황금문 무사들의 철저한 순찰로 치안 또한 확실해 향락을 즐기려는 자들에게 있어 함양은 그야말로 천당이었다.
 “황금문은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 산다면서?”
 “그렇소.”
 “사람 대가리도 매입하는 거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소.”
 무불악은 흑치살군의 수급을 경비무사에게 건넸다.
 “여기 있소. 죽은 놈이 자신을 흑치살군이라 하더군.”
 “뭐, 뭐요?”
 깜짝 놀란 경비무사가 무불악과 흑치살군의 수급을 번갈아보았다.
 “저··· 정말 흑치살군의 수급이란 말이오?”
 “그렇소.”
 무불악의 태연한 모습에 경비무사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훑어보다가 그들 중 한 명이 무불악을 안으로 안내했다.
 “접견실로 안내하겠소.”
 황금문 섬서지부장 황미랑(黃眉琅).
 황미랑은 사십을 넘어선 나이이지만 워낙 뛰어난 화장술을 지녀 아직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손톱에 꽃잎을 물들이고 있다가 놀라운 보고를 듣게 되었다.
 “뭐라고? 흑치살군의 수급을 가져온 놈이 있다고?”
 섬서지부의 총관은 장특이었다.
 “예, 지부장. 곧 가져올 것이오.”
 이때 경비무사가 수급이 얹어진 소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장특이 소반을 받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미랑은 긴 옷자락을 이끌고 탁자로 다가섰다.
 눈을 부릅뜬 흑치살군의 수급은 워낙 끔찍한 형상이었지만 황미랑은 마치 상품을 감상하듯 살폈다.
 “피의 응고 상태로 봐서 목이 잘린 지 하루도 되지 않았군. 확인해 봐.”
 “예, 지부장.”
 장특은 수급의 치아와 잘린 부위를 세심하게 검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치살군이 확실하오. 그 살인마는 검은 치아가 특징이지요. 한데 잘린 부위를 보니 대단한 쾌검에 의해 목이 잘린 것 같소.”
 “누구인지 몰라도 정당한 대결로 흑치살군을 죽였다면 굉장한 고수다. 내가 직접 만나겠다.”
 “접견실로 안내하겠소.”
 무불악은 접견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황미랑과 장특을 맞게 되었다. 장특이 황미랑의 신분을 밝혔지만 무불악은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불악이 대뜸 물었다.
 “대가리 값으로 얼마 줄 거요?”
 황미랑은 무불악을 힐끗 보고는 마주 앉았다.
 “대협의 높은 이름을······.”
 “난 협사가 아니오.”
 “아, 그렇군요. 공자의 대명을 알고 싶어요.”
 “난 무불악이오.”
 황미랑의 표정이 다소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무 공자셨군요. 한데 어떻게 흑치살군과 같은 살인마의 목을 벨 수 있었지요?”
 “그냥 검으로 벴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요?”
 무불악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접한 황미랑은 얼른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아닙니다. 믿겠어요.”
 그녀는 장특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 총관, 얼마나 지불하면 되는 거지?”
 “흑치살군은 무수한 살인을 저지른 살인귀라 많은 유족들이 놈의 목에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소. 그중 가장 높은 현상금은 항주의 부호 양 대인이 내건 은자 천오백 냥이오.”
 무불악이 잔뜩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날 보고 항주까지 가서 현상금을 받으란 말이오?”
 “호호,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 황금문이 바로 그런 번거로운 일을 대신하지요. 무 공자께 즉시 결재를 해드리지만 소정의 수수료는 공제됩니다.”
 “인정하겠소.”
 황미랑은 장특에게 손짓을 보냈다.
 “내드려.”
 장특은 금과 은이 섞인 두둑한 주머니를 무불악에게 건넸다.
 “삼 할의 수수료를 공제한 일천오십 냥이오. 사실 항주까지는 아주 먼 거리이기에 수수료를 더 공제해야 하지만 흉악한 살인마를 제거해 주셨기에 후하게 드리는 거외다.”
 무불악은 돈주머니를 허리춤에 꿰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수수료가 너무 저렴하군, 칼만 안 든 날강도들아.”
 그가 접견실을 나가자 황미랑이 눈짓을 보냈다.
 “놈을 홀랑 벗겨서라도 신분 내력을 알아내.”
 “알겠소, 지부장.”
 장특이 무불악을 따라나서며 두 손을 비볐다.
 “무 공자, 거액을 챙기셨는데 금도각에서 도박이나 한판 즐기시지요?”
 “도박? 이곳에 도박장이 있소?”
 “함양에서는 돈만 있으면 먹고 마시며 즐기는 모든 향락을 누릴 수도 있소.”
 무불악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니까 내 수중에 몇 푼 있으니 빨아보겠다?”
 “하하, 은자 천 냥이 삼천 냥으로 불어날지 어찌 알겠소?”
 “좋아, 갑시다.”
 도박장에도 등급이 있어 손님들의 출입을 제한했다.
 금도각(金賭閣)은 함양 최고의 도박장답게 기둥과 벽, 기와 등 전체가 금빛으로 치장돼 있으며 최하 은자 오백 냥 이상을 소지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최고급 요리와 술이 무제한 제공되기에 한번 들어가면 도박을 끝낼 때까지 나올 일이 없었다. 그러나 도박장의 습성상 돈을 따서 나오는 사람은 열 중 한둘에 불과했다.
 금도각 내에는 일곱 개의 도박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네 곳의 도박판에서 도박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한가했기에 하급 도박장처럼 소란스럽지 않아 좋았다.
 도박사들을 상대로 도박을 벌이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부호들이었기에 한 판에 수백 냥의 거금을 잃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장 총관을 따라 금도각으로 들어선 무불악은 골패 도박을 벌일 수 있는 도박판 의자에 앉았다. 그는 시비들이 가져온 차도 마다했다.
 “시작하자.”
 단정한 용모의 여도박사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규칙을 읊어봐.”
 “예, 손님. 서른여섯 개의 골패 중에 여섯 개가 금패(金牌)입니다.”
 여도박사가 골패를 어루만지며 서른여섯 개의 골패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서른 개의 골패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고 여섯 개의 골패에만 금(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님께서는 세 개의 골패를 고르시면 됩니다. 금패 하나를 뒤집으면 거신 금액을 지급하며, 두 개를 뒤집으며 네 배를 드립니다. 만일 세 개의 패가 모두 금패이면 열 배를 지급하겠습니다.”
 여도박사가 소매를 한 번 젓자 골패는 거짓말처럼 모두 뒤집어졌다. 여도박사가 현란한 솜씨로 골패를 고루 섞었다.
 무불악은 손에 쥔 은표를 모두 걸었다.
 “전부.”
 여도박사가 다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에? 한 판에··· 전부 거신 겁니까?”
 “그래. 세 개 모두 금패를 고르면 열 배라고 했지?”
 무불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골패 세 개를 뒤집었다.
 놀랍게도 세 개 모두 금패였다.
 여도박사는 자신이 패를 제대로 섞지 못했나 싶어 하얗게 질렸다.
 “아······!”
 단 한 판에 은자 일만 냥의 손실.
 금도각의 판돈이 엄청나다 해도 은자 일만 냥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여도박사는 문책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장특은 이를 지켜보다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결코 행운이 아니다. 이놈은 분명 도귀(賭鬼)다.’
 그가 눈짓을 보내자 여도박사가 넌지시 제안했다.
 “공자, 골패를 하나 더 뒤집어 금패가 나오면 스무 배를 드리겠습니다.”
 맞히면 이만 냥이 넘는 거금.
 그것도 골패 하나만 제대로 고르면 되기에 귀가 솔깃해질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무불악은 여도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응수했다.
 “서른 배.”
 “예에······?”
 “서른 배를 지급하겠다면 뒤집어보겠다.”
 “그건··· 지나치신 요구입니다.”
 “그럼 그만두자고. 내가 만 냥 더 벌자고 모험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자 장특이 나서며 호승심을 자극했다.
 “좋소, 무 공자. 놀라운 행운으로 나머지 세 개의 금패를 모두 골라내면 거신 금액의 백 배를 지급하겠소.”
 백 배의 도박.
 만일 행운이 따른다면 은자 십만 냥이라는 상상도 못할 거액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다.
 한데 무불악은 가소롭다는 듯 장특을 조롱했다.
 “이봐, 누구를 바보천지로 아는 거요? 만일 천 배로 지급하겠다면 한번 도전해 보겠어. 아니면 당신이 내 대신 세 개의 금패를 모두 찾아내 봐. 내가 딴 돈을 모두 돌려줄 테니까.”
 장 총관은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천 배라··· 하셨소?”
 “당연하지. 네 번째 금패를 고르면 서른 배, 다섯 번째 금패를 고르면 백 배, 그리고 여섯 번째 금패를 고르면 천 배. 이것이 정당한 도박이야. 내 말이 틀렸나, 사기꾼 총관?”
 무불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돈이나 챙겨주슈.”
 장특은 무불악이 거금을 챙겨 도박장을 나서려 하자 급히 따라나섰다.
 “무 공자, 이 사람이 술을 한잔 대접하겠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허허, 당치 않소. 그저 무 공자의 뛰어난 도박술과 엄청난 행운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대접하려는 것이오.”
 “입에 침이나 바르시지.”
 “허허! 자, 가십시다.”
 장특이 안내한 곳은 함양 최고의 기루인 금낙원(金樂園)이었다.
 기녀를 끼고 미주가효를 즐기려면 최하 은자 오백 냥의 거금이 필요하기에 웬만한 부호가 아니면 감히 문턱도 넘을 수 없는 곳이다.
 금낙원의 기녀들은 무불악의 추레한 몰골을 비웃다가 장특의 기색을 보고는 얼른 예를 올렸다.
 장특은 무불악을 가장 비싼 누각으로 안내하고는 금낙원주를 불러 단단히 일러주었다.
 “놈은 금도각에서 일만 냥이 넘는 거금을 챙겼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을 홀딱 벗겨라. 연후 내가 해결하겠다.”
 금낙원주가 회심의 웃음을 흘리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호호, 염려 놓으십시오, 총관. 아영과 소취라면 놈의 간담을 녹이고도 남습니다. 놈을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로 만들겠습니다.”
 띵··· 땅··· 띵땅······!
 아영이 비파를 뜯었고, 소취가 춤을 추웠다. 금낙원 최고의 기녀답게 아영과 소취는 자색만 고운 게 아니라 노래와 춤, 음률에도 능했다.
 무불악은 두 기녀의 시중을 받으며 마음껏 먹고 마셨다.
 아영과 소취 중 하나를 방으로 들이려면 은자 오백 냥이 요구되기에 무불악은 무려 천 냥짜리 향락을 즐기는 셈이었다.
 무불악은 두 기녀를 거의 알몸으로 만들고는 마음껏 희롱했다. 함께 술을 마셨지만 오히려 그를 유혹해야 하는 기녀들이 더 취했다.
 무불악은 두 기녀를 침상에 눕히며 물었다.
 “하나만 묻자. 너희들과 잠자리를 하는 것도 공짜냐?”
 아영이 그의 아랫도리를 더듬으며 대답했다.
 “호호, 공자님도 참. 거액을 따셨는데 너무 공짜를 바라시네요? 저희에게 천 냥씩만 주신다면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소취가 뒤에서 무불악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 공자님. 어서 안아주세요.”
 한데 무불악은 소취를 떼어내고는 아영에게 안겨주었다.
 “니들끼리 실컷 즐겨, 이 교활한 암컷들아! 천 냥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새벽 무렵.
 한참 잠들어 있던 황미랑은 장특의 다급한 보고에 번쩍 깨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놈이 아영과 소취를 거부했다고?”
 “예, 지부장. 대신 놈은 매음굴을 찾아가 싸구려 매춘부를 오십 명이나 불러들였다 하오.”
 황미랑은 묘한 흥분에 젖어 물었다.
 “오십 명? 정말 계집 오십 명을 상대할 만큼 놈의 정력이 그렇듯 절륜하단 말이냐?”
 “처음에는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잠자리를 가진 계집은 한 명뿐이라 합디다.”
 “하면 다른 계집들은 왜 불러들인 거냐?”
 “놈의 잠자리 시중들던 계집을 포주가 불러내려 하자 한바탕 다툼이 벌어졌소. 그래서 놈은 매음굴의 매춘부를 죄다 불러 몸값을 갚아주고는 내쫓았다 하오. 포주들은 일만 냥의 거금을 챙겼지만 거의 반병신이 되었다고 들었소.”
 황미랑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놈이 곱디고운 아영과 소취를 마다하고 냄새나는 매음굴 계집을 품었다. 게다가 만 냥도 넘는 거금을 아무런 대가 없이 매춘부들을 위해 모두 썼다는 것이냐?”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이오.”
 “믿을 수가 없군. 놈은 절대 의협이 아닌데······?”
 황미랑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당장 총단에 보고를 올려 조치를 취해야겠다. 자칫 그런 미친놈 때문에 본 문이 막대한 피해를 보겠구나.”
 
 
 제 2장. 처먹거나 혹은 짓밟히거나
 
 
 1
 ―악마를 찾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만일 네 신분이 먼저 탄로 나면 넌 무조건 죽는다.
 ―웬일로 내 걱정을 다 해주는 거요?
 ―네 녀석 죽는 거야 안타까울 게 뭐 있겠냐만 너를 키우느라 십오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한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서 하는 소리다.
 ―큭,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어서 하는 소리인데, 차라리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 어떻소? 나도 편하게 살고 싶소.
 ―이놈아, 만일 네가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도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렇듯 원한이 사무친다면 차라리 원귀(寃鬼)가 되어 악마를 죽이면 되겠네? 하지만 마음 놓으시오. 내가 약조를 한 이상 반드시 복수를 해주겠소.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오.
 2
 다각다각······!
 함양을 떠나온 무불악은 향후 행보를 생각해 보았다.
 ‘악마가 신분과 이름을 바꾸었을 테니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놈을 찾아내야 하기에 더욱 어려운 과제다. 일단 세상 정보에 해박한 자를 먼저 찾아야겠군.’
 그를 키워준 심로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분명 당대의 현자였다. 하지만 운신이 불편해 근래의 정보를 거의 모른다는 점에서 무불악은 정보력에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에 이틀 전 겨룬 적이 있는 흑치살군에 대해서도 그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뭐든 해결해 준다는 천해문부터 찾아가 보자.”
 무불악은 장안을 우회해 하남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넓은 관도 좌우에는 노천 반점과 주루, 객잔이 늘어서 있었다. 솔솔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시장기를 느낀 무불악은 객잔 앞에 말을 멈춰 세웠다.
 어린 점소이 하나가 뛰쳐나와 말고삐를 받아 쥐었다.
 “헤헤, 어서 오세요, 공자님.”
 무불악은 어린 점소이에게 은자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다.
 “잘 먹이고 씻겨.”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어린 점소이는 객잔에 딸린 마구간으로 말을 끌고 갔다.
 무불악은 문을 밀치고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객잔의 분위기가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염병, 이런 것을 음식이라고 내온 거냐?”
 요리 접시가 바닥에 엎어지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한데 공교롭게도 요리 한 접시가 무불악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무불악은 황당하게도 요리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요리가 흘러내리며 얼굴에서부터 옷이 온통 기름과 고깃덩이로 얼룩졌다.
 주인이 급히 다가서며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손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요.”
 “그럴 수도 있지, 뭐.”
 무불악은 별반 화를 내지 않고 주인이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객잔 안을 쓸어보았다.
 무복 차림의 무사들이 중앙 탁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에 음식 접시를 쥐고 있는 청년은 값진 비단옷을 걸치고 담비 가죽신을 신었다.
 말끔하게 생긴 화복청년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무불악을 깔아보았다.
 “크흣, 왜 하필 네가 맞은 거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무불악은 옷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며 주인에게 물었다.
 “이 요리가 뭐요?”
 “향소육입니다요.”
 “같은 것으로 세 접시 내와. 당장!”
 “예예, 손님.”
 주인은 지은 죄가 있기에 주방에다 얼른 주문을 넣었다.
 무불악은 빈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점소이 하나가 급히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 점소이는 고개를 조아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잘 참으셨어요, 공자님.”
 계속해서 행패를 부리던 화복청년은 접시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입구로 향했다.
 “주인장, 장사를 하려면 본 보에 확실하게 성의를 상납해라! 오늘은 이쯤 해두지! 어디 두고 보겠다!”
 한데 무불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인마,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
 흠칫하며 걸음을 멈춘 화복청년이 무불악을 돌아보았다.
 “너···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그래. 너를 위해 요리를 시켜놨으니 잠시만 기다려라.”
 “크흣, 새끼.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화복청년이 다가서자 호위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객잔 내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손님들 일부는 달아났고 일부는 구석으로 피신했다.
 화복청년은 무불악을 쓸어보며 히죽거렸다.
 “너,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냐?”
 “너, 나 알아?”
 “당연히 모르지. 그런 네놈은 나를 아냐?”
 “모른다.”
 화복청년은 무불악의 볼을 가볍게 다독였다.
 “인마, 나는 너 같은 놈을 몰라도 돼. 하지만 너는 나를 알아야 된다. 적어도 이곳 섬서 일대에서는 말이다.”
 “네가 누구냐?”
 “큭, 정말 무지한 놈이로군.”
 화복청년이 턱짓을 해 보이자 호위무사가 호통을 쳤다.
 “이놈, 상관보(上官堡)의 작은 주인님이신 상관청(上官淸) 공자님이시다! 당장 예를 갖춰라!”
 무불악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상관보가 뭐 하는 집안이냐?”
 상관청이 무불악의 턱을 받쳐 들었다.
 “이 새끼, 완전히 골통이네? 정말 상관보를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모른 체하는 것이냐?”
 이때 요리를 받쳐 든 점소이가 다가섰다.
 무불악은 점소이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내가 주문한 요리냐? 여기 내려놔라.”
 점소이는 연신 상관보 무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향소육 세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무불악은 접시 하나를 받쳐 들었다.
 “내가 말이야, 성격이 깔끔하다 보니 빚지고는 못살아.”
 그는 요리 접시로 상관청의 면상에 후려쳤다.
 퍼억―!
 무불악은 두 번째 요리 접시를 재차 처박았다.
 “아까 것은 본전이고 이번 것은 이자다. 한 접시 더 처먹어라.”
 빠악―!
 “악!”
 상관청은 코뼈가 으스러지는 충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사금파리가 박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향소육을 두 접시나 뒤집어썼기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무불악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
 “공자께 무슨 짓이냐?”
 무불악은 쳐다보지도 않고 소매를 내저었다.
 “꺼져!”
 호위무사들은 철퇴에 맞은 듯 얼굴이 으깨지고 갈비뼈가 분질러졌다. 비로소 무불악의 엄청난 무공을 인식한 상관청은 턱을 덜덜 떨었다.
 무불악은 세 번째 향소육을 바닥에 쏟고는 상관청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딱 한 번만 물을 테니 잘 들어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너, 처먹을래, 짓밟힐래?”
 “······!”
 상관청의 얼굴은 피와 음식 오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극심한 공포에 질려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무불악은 인간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버러지처럼 짓밟을 악귀였다. 아예 타협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상관청은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었다.
 “머··· 먹겠습니다.”
 그는 마치 굶주린 개처럼 바닥에 쏟아진 향소육을 꾸역꾸역 입에 처넣었다. 스스로 장안제일공자로 자부하던 상관청으로서는 차라리 죽느니보다 못한 굴욕이며 수치였다.
 상관청이 한 접시의 향소육을 모두 집어먹자 무불악은 그의 볼을 다독여 주었다.
 “자식, 잘 먹네. 향소육 세 접시 값은 네가 내라.”
 “예··· 예······.”
 “이제 꺼져. 밥맛 떨어지니까.”
 무불악이 자리에 앉자 상관청은 호위무사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참, 내 이름은 무불악이다. 누구한테 혼났는지 알아야 그래도 덜 쪽팔리지 않겠느냐?”
 상관청은 원독에 찬 눈빛으로 무불악을 쏘아보고는 객잔을 나갔다.
 무불막은 주인을 손짓해 불렀다.
 “주인장, 향소육은 별로야. 요리는 오향장육으로 내오고 죽엽청도 한 병 가져오슈.”
 주인은 울상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고··· 공자, 어서 피하십시오.”
 “왜?”
 “상관보는 장안 최고의 무림세가외다. 또한 상관보주의 여동생이 무적궁주의 측실이 된 이후 상관보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한데 상관 공자를 초주검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상관보주가 직접 나설 것이외다. 속히 피신하셔야 합니다.”
 무불악은 주인장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큭, 상관보의 계집이 무적궁주의 첩년이 된 게 뭐 대단한 광영이겠어? 어서 술과 안주를 내오시오.”
 상관보와 무적궁을 싸잡아 무시하는 태도에 주인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무적궁(無敵宮)이 어떤 방파인가.
 당금 천하를 호령하는 일성쌍궁 중 하나가 바로 무적궁으로, 소속 무사만 칠백여 명에 달한다. 또한 무적궁과 우호적인 문파가 백 개도 넘기에 무적궁과 적이 되어 강호를 종횡하기란 불가능했다.
 한데 이런 무적궁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있으니 무불악의 오만함은 도를 넘어선 광기라 할 수 있었다.
 무불악은 느긋하게 술과 요리로 배를 채우고는 객잔을 나섰다.
 주인은 술값을 전혀 받지 않았고, 오히려 무불악에게 새 옷까지 장만해 주었다. 호의라기보다는 마치 황천길을 떠나는 사람을 위한 배려로 생각되었다.
 다각다각······!
 준마는 허연 콧김을 발하며 관도를 따라 달려갔다.
 무불악은 바람막이를 목까지 둘러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았다.
 “염병, 되게 춥군.”
 그는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두 사람을 떠올렸다.
 ‘천맹상인과 천사혈뇌 둘 중 한 명만 찾아내면 악당에 대한 단서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천맹상인(天盲上人).
 천사혈뇌(天邪血腦).
 그들은 정(正)과 사(邪)로 대표되는 당대의 현자들로서 세상사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을 찾아가도 과연 순순히 자신의 고민을 해소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문득 전면의 수림에서 살기를 감지한 무불악이 고삐를 당겨 준마의 속도를 늦추었다.
 ‘웬 버러지들이지?’
 살기는 길이 좁아지는 관도 좌우 수림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그가 대번에 감지할 수 있었으니 위협적인 상대는 못 되었다.
 무불악은 말안장에 꽂혀 있는 죽장을 뽑아 들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넌 좀 비켜서 있어.”
 그는 준마의 엉덩이를 쳐서 뒤쪽으로 보내고는 수림을 향해 외쳤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나와라!”
 그러자 서른 명도 넘는 무사들이 우르르 수림 속에서 뛰쳐나왔다. 복장으로 미루어 상관보 무사들로 보였다.
 무사들이 무불악을 겹겹이 에워싸자 팔자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측근을 대동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이 무도하기 짝이 없는 무불악이라는 망나니냐?”
 무불악은 팔자수염의 중년인을 훑어보았다.
 “당신은 누구야?”
 “난 상관보의 주인인 상관휘(上官煇)다. 강호에서는 나를 섬서위군(陝西威君)이라 부른다.”
 “아, 그러셔? 여동생을 무적궁주의 첩실로 바쳐 그 후광으로 설쳐 댄다는 졸장부가 당신이로군?”
 무불악의 빈정대는 독설에 측근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새끼, 주둥이부터 찢어주겠다!”
 “죽여 버려!”
 상관보가 장안 최고의 무림세가로 추앙된 것은 단지 무적궁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관보 무사들은 나름대로 뛰어난 가전 절기를 지녔으며, 특히 도법과 권법에 능했다.
 쐐애액―!
 네 자루 칼이 좌우에서 동시에 뻗어오자 무불악은 뒤로 물러서며 죽장을 휘둘렀다.
 땅― 따땅―!
 측근들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무불악은 죽장을 비틀어 숨겨진 검을 뽑아 들었다.
 “사뢰전(死雷電)!”
 번― 쩍!
 검광이 번득이는 순간 두 측근의 목이 날아갔다. 실로 위력적인 쾌검이었다.
 “물러서라!”
 일류고수인 두 측근이 대번에 목숨을 잃자 상관휘가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보주가 직접 나서자 상관보 무사들은 넓게 둘러서며 무불악의 퇴로를 봉쇄했다.
 상관휘는 번쩍이는 철도를 뽑아 무불악을 겨누었다.
 “악독한 놈! 감히 본 보의 일족을 해치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그럼 내가 너희들 손에 죽어야겠냐? 남을 죽이려는 놈들이라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닥쳐라! 내 아들의 얼굴을 훼손하고 일족을 해쳤으니 네놈을 죽여 복수하겠다! 너 같은 악적을 제거하는 것이 강호의 정의다!”
 “그런 명분 따위는 내세우지 않아도 돼. 돼먹지 못한 자식의 망동에 관계없이 나를 죽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 테니까 말이다.”
 “허어, 상종할 가치가 없는 놈이로다!”
 상관휘는 힘찬 기합을 발하며 철도를 휘둘렀다.
 무림세가의 종주답게 도기를 뿜어내는 도법이 강맹했다. 지표가 연이어 갈라지면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차― 차창!
 도기를 쳐낸 무불악은 죽검을 통해 전해지는 반탄력에 상대의 무공을 인정했다.
 ‘제법이군. 여동생을 무적궁에 첩실로 바쳐 얻은 명성이 아니다. 일문의 종사답게 공력이 심후하군.’
 무불악이 수비에 치중하자 상관휘의 공세가 더욱 드세졌다.
 “형편없는 놈! 이제 보니 주둥이만 나불댔구나!”
 그는 무불악의 소극적인 대응을 자신의 무공에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라 지레짐작했다. 한껏 사기가 솟은 그는 자신의 최고 절기를 유감없이 구사했다.
 “무섬탄―!”
 츄리릭―!
 세 줄기 금빛 도기가 지표를 가르며 무불악의 전신을 쪼갤 듯이 날아들었다.
 순간 허공으로 치솟은 무불악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반격을 전개했다. 상관휘의 도기를 무산시킨 그는 몸을 거꾸로 세우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차앗!”
 강력한 살인비기 중 하나인 낙천파벽(落天破劈)이었다.
 “허억?”
 상관휘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한기를 느꼈다. 비로소 무불악을 경시한 자신의 오판을 깨달은 그는 철도를 최대한 몸에 붙이며 가문의 구명 절초를 전개했다.
 “철류섬영!”
 소용돌이를 일으킨 도기가 그의 몸을 휘감으며 두터운 방어벽을 형성했다.
 차차창―!
 잇단 금속성에 이어 답답한 신음이 뒤를 이었다.
 “크으윽!”
 상관휘의 얼굴과 상반신에 무수한 혈흔이 새겨졌다. 온몸이 피로 물든 상관휘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상관보의 주인으로서 참담한 패배였다.
 두 측근이 급히 상관휘를 경호하며 외쳤다.
 “쳐라! 모두 놈을 죽여라!”
 상관보 무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무불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불악은 자신의 살인비기가 무산되자 쓴 입맛을 다셨다.
 ‘내 살인비기를 막아낼 줄이야. 흑치살군이란 놈이 구사했던 전광삼분참을 전개해 볼 걸 그랬나?’
 그가 상관휘를 대번에 죽이지 못한 것은 절기의 문제가 아니라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봐야 했다. 사실 그는 대다수의 무공을 구결만 듣고 혼자서 수련했던 것이다.
 무불악은 자신을 향해 아귀처럼 달려드는 상관보 무사들을 쓸어보았다.
 “이거 여러 놈 죽여야겠군.”
 쐐애액―!
 쾌검이 전개되자 전면에서부터 뒤쪽까지 다섯 명의 무사가 대번에 쪼개졌다. 혼전이 전개되면서 장내는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혈전으로 화했다.
 한데 이때였다. 섬뜩한 광소성이 수림 저편서부터 울려 퍼졌다.
 “카카카, 죽일 놈들이 아주 많구나!”
 수림 속에서 두 자루 동발이 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동발이 상관보 무사들 사이를 관통하자 칠팔 명이 대번에 동강났다.
 “아아악!”
 “크악!”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며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난데없는 기습에 놀란 상관보 무사들이 바싹 긴장하며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붉은 인영이 장내로 내려서며 두 자루 동발을 받아 쥐었다.
 붉은 모발에 붉은 눈.
 피부가 불그레한 노인은 적포를 걸치고 있어 온통 붉었다. 그가 대지를 딛고 서자 지독한 마기에 주변이 검붉게 타 들어갔다.
 적포노인의 등장에 무불악조차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이 늙은이는 대체 뭐야? 마기가 엄청나군.’
 반면 적포노인을 대면한 상관휘는 하얗게 질려 이를 딱딱 마주쳤다.
 “허억! 혀··· 혈마?”
 혈마라는 말에 상관보 무사들은 와들와들 떨었고, 일부는 오금이 저려 풀썩풀썩 주저앉았다.
 적포노인은 상관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카카, 네놈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
 그가 손을 튕기자 동발이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휘리리링―!
 동발이 날아들자 상관휘는 사력을 다해 도주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일신의 명예나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모두 피해라!”
 한데 동발은 눈이라도 달린 듯 등판으로 바싹 접근해 왔다.
 상관휘는 이를 악물며 일권을 내질렀다.
 “벽파권!”
 퍼억―!
 동발은 대번에 상관휘의 한쪽 팔을 동강냈다. 팔 하나를 희생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상관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적포노인은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상관보 무사들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카카카, 몇 놈이나 도주하는지 보겠다!”
 그는 두 자루 동발을 연이어 내던져 멀리 도주하는 무사들의 목을 벴고, 뒤처진 무사들은 직접 발로 걷어차 머리를 부숴 버렸다.
 좁은 관도는 삽시간에 참혹한 형장으로 변했다.
 무불악은 적포노인의 무자비한 살인에 혀를 내둘렀다.
 “후유, 달래 살인마왕이 아니로군. 한데 금마곡의 구대천마가 언제 풀려났단 말인가?”
 혈마 난살천참(亂殺千魔).
 구대천마 중 가장 무자비한 살인마왕이다.
 혈마는 무림사 이래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로 악명을 떨쳐 구대천마의 일인이 되었다. 이들 구대천마는 의천오절(義天五絶)의 장렬한 희생과 천등성현의 지략에 의해 금마곡에 갇히고 말았다.
 이미 삼십 년이나 지난 일이기에 구대천마 모두가 죽은 것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한데 혈마가 이렇듯 살아서 천하를 종횡하고 있으니 실로 공포적인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무불악은 휘파람으로 준마를 호출해 잔등에 올라앉았다.
 “더 싸울 일도 없으니 우리는 가자.”
 한데 측면에서 동발이 날아들었다. 무불악은 급히 몸을 솟구쳐 피했지만 준마는 애꿎게 동강나고 말았다.
 이히힝―!
 바닥으로 내려선 무불악이 난살천참을 돌아보았다.
 “늙은 마두! 왜 남의 말을 함부로 죽인 것이냐?”
 동발을 받아 든 난살천참은 어처구니가 없는 눈빛으로 무불악을 훑어보았다.
 “이 새끼 보게? 노부를 대하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네?”
 “내가 왜 당신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냐?”
 “이놈아,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상관보 놈들이 잘못 보지 않았다면 혈마가 틀림없겠지. 구대천마 중 일인인 난살천참! 아니던가?”
 난살천참은 바닥의 시체를 밟으며 다가섰다.
 “어린놈, 쌀을 반쪽씩만 처먹었냐? 왜 계속 반말이냐?”
 “당연하지. 내가 공손하게 대한다고 나를 곱게 보내주겠어?”
 “카카카! 그건 사실이다!”
 난살천참은 동발 하나를 내던졌다.
 휘리리링―!
 피를 흡수해 붉게 물든 동발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불악의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무불악은 급히 죽검을 뽑아 동발을 후려쳤다.
 차아앙!
 동발은 날카로운 금속성을 발하며 높이 튕겨져 올랐다.
 난살천참은 섭물진기로 동발을 조종해 계속 공세를 전개했다.
 “카카카, 내 동발을 받아낸 것으로 보아 형편없는 버러지는 아니로구나! 어디 또 받아봐라!”
 무불악은 뒤로 미끄러지면서 동발을 쳐냈다.
 “혈마, 왜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이놈아,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오랜 세월 가슴에 맺힌 살기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휘리리링―!
 동발의 파고드는 위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무불악은 동발의 예리한 회전 날에 옆구리가 베이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윽!’
 무불악은 옆구리를 감싸 쥐며 주춤 물러섰다.
 동발을 회수한 난살천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무불악을 재차 훑어보았다.
 “크흣, 어린놈치고는 제법 무공이 고강해. 이름이 뭐냐?”
 “난 무불악이다.”
 “무불악? 카카,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는 이름이다!”
 “뭐가 재미있다는 거냐?”
 “네놈이 악당임을 스스로 자처하는 이름이 아니더냐? 아주 가소롭다. 그런 의미에서 네놈은 특별히 가슴을 갈라 죽이겠다. 얼마나 악한 놈인지 심장을 통해 확인해 보겠다.”
 “하하, 정작 가슴을 갈라 심장을 확인해 볼 사람은 나다.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면 이왕지사 죽을 때가 지난 노마가 죽어야 하지 않겠냐?”
 무불악의 오만한 반응에 난살천참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뿜어졌다.
 “빠드득! 찢어 죽이겠다!”
 난살천참의 몸에서 붉은 마기가 물씬 풍겨졌다.
 무불악은 바싹 경계하는 와중에도 상대를 놀려댔다.
 “혈마, 그렇게 핏대만 올리다가는 코피 터진다.”
 “뒈져라!”
 난살천참은 두 개의 동발을 동시에 내던졌다.
 휘리링―!
 무불악은 최고조의 신법으로 이동하면서 검기를 발출해 동발을 쳐냈다. 그러나 난살천참의 분노에 찬 공세를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차차창―!
 동발과 연이어 충돌하면서 검을 통해 전달된 충격에 무불악은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게다가 바위 벼랑이 등에 닿으면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젠장, 늙은 마두가 왜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거야?’
 사실 그는 난살천참을 격동시켜 접근전을 꾀한 것인데 상황은 그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몇 가지 살인 수법을 지닌 데다 얼마 전에는 강력한 살인 절기인 전광삼분참을 우연치 않게 배우는 행운까지 얻었다. 하지만 난살천참처럼 거리를 두고 공격을 펼치는 상대에게는 살인비기가 무용지물이었다.
 동발을 회수한 난살천참이 냅다 일권을 내질렀다.
 “받아라, 쥐새끼!”
 권공이 작렬하기도 전에 드센 바람 소리가 들이닥쳤다.
 퍼엉······!
 일격을 당한 무불악은 울컥 피를 토하며 비틀비틀 뒤로 밀렸다.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무불악의 고육지책이었다.
 “카카, 별것도 아닌 놈이 감히!”
 난살천참이 재차 권공을 구사하며 접근해 오자 무불악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오냐, 기다렸다!’
 그는 살인비기를 구사하기 위해 죽검에 혼신의 진기를 주입시켰다.
 한데 이때였다. 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눈부신 섬광이 허공 저편에서 날아들었다.
 쐐애액―!
 하늘을 온통 뒤덮으며 지상을 향해 내리꽂히는 섬광의 정체는 검형(劍形)이었다. 최상승 검법 절기인 검강이 전개된 것이다.
 갑작스레 공격을 받은 난살천참은 크게 당황했다.
 “어엇, 검강?”
 난살천참은 동발을 양손에 쥐고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의 몸 주위로 강력한 호신강기가 형성되면서 검강을 튕겨냈다.
 차차차창―!
 쏟아지던 검강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위로 비산되었다.
 주변 십 장 이내가 폐허로 변했지만 난살천참은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과연 전대의 마왕답게 검강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던 것이다.
 한데 언제 다가섰는지 무불악이 난살천참의 등판을 향해 일검을 내질렀다.
 퍼억―!
 예리한 죽검은 난살천참의 등을 관통해 가슴까지 뚫고 나왔다.
 “크어억!”
 난살천참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졌다.
 무불악은 깊숙이 검을 꽂은 채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훗, 엄살이 심하군.”
 “크으··· 이 비열한 새끼!”
 “비열하다고? 노마답지 않게 뭐 그런 감상적인 얘기를 하는 거냐? 약한 놈이 죽는 거다. 그게 원칙 아니던가?”
 검을 뽑아 든 무불악은 난살천참의 목을 겨냥해 쾌검을 전개했다. 그러나 심장이 뚫리지 않는 한 쉽게 쓰러질 난살천참이 아니었다.
 “이놈―!”
 난살천참은 무불악을 냅다 걷어찼다.
 “억!”
 무불악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나가동그라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난살천참은 무불악을 향해 동발을 날렸다.
 “쥐새끼, 숨통을 끊어주겠다!”
 휘리링―!
 동발을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불악을 향해 뻗어 나갔다.
 무불악은 이를 악물며 죽검을 세워 들었다.
 ‘젠장, 너무 방심했군.’
 이 순간 화려한 섬광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불악은 눈을 번쩍 떴다.
 ‘신검합일?’
 콰아앙!
 날아들던 동발이 섬광과 충돌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병기가 박살나자 당황한 난살천참은 황급히 수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찰거머리 같은 계집!”
 화려한 섬광은 난살천참을 쫓아 곧바로 수림을 가로질렀다.
 와지끈― 콰쾅―!
 아름드리 거목들이 연이어 쪼개지거나 허리를 꺾었다.
 “윽, 어서 치료해야겠군.”
 겨우 안도한 무불악은 옆구리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내, 외상이 심했지만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잠시 전 벌어진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그이 목숨을 구해준 화려한 섬광은 기이하게도 사향과 같은 향기를 남겼다. 코끝에 자극하는 감미로운 향기는 분명 여인의 체향이었다.
 신검합일을 전개한 여인은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 그의 안력으로도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흰 무복에 푸른 바람막이, 그리고 사향과 같은 은은한 향기뿐.
 무불악은 옆구리를 매만지며 쓴 입맛을 다셨다.
 “할망구 몸에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날 리 만무하니 할망구는 확실히 아니다. 늘씬한 몸매로 보아 아줌마도 아닌 것 같은데······. 하면 새파랗게 젊은 계집이 신검합일을 전개했단 말인가?”
 그는 부러움보다 질투심에 젖고 말았다. 정황으로 판단하면 앞서 검강을 발출해 난살천참을 제지한 절세고수 역시 동일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검강과 신검합일.
 가히 최상승 절기이기에 천하를 통틀어도 이런 경지에 이른 절세검객은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불악은 황급히 도주한 난살천참을 떠올렸다.
 “혈마가 비록 부상을 입었다 해도 웬만한 자는 일격에 동강낼 수 있다. 한데 계집을 보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그렇듯 막강한 고수란 말인가?”
 이번 대결에서 그는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게 되었다. 더군다나 목숨을 구함받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치욕이기도 했다.
 그는 죽장을 짚으며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젠장, 내 깔끔한 성격상 신세를 졌으니 갚지 않을 수 없군. 일단 한번 확실하게 구해주자. 연후 죽일지 말지를 결정해야겠다.”
 이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푸른 경장을 걸친 무사들이 내려서며 무불악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사사삭······!
 일부 무사들은 참혹한 살인 현장을 빠르게 수색했다.
 잠시 후 붉은 문사건을 두른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장내에 내려섰다. 청년은 눈썹이 아주 짙었고 눈은 호안이었다. 일견해도 당찬 기운을 지닌 호걸이었다.
 금포청년은 수색을 펼치고 있는 무사들을 불러들였다.
 “혈마의 행적을 찾았느냐?”
 무사 셋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상관보 무사 십수 명이 죽었습니다. 대부분 동발에 의해 죽은 것으로 미루어 혈마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바닥에서 검강이 전개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금포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의 소행이 확실하다. 검강은 아마도 무화의 솜씨일 것이다. 서둘러 추격하면 혈마를 추적할 수 있다.”
 이때 무사들의 포위망 속에서 무불악의 거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비켜라. 행색을 보니 도적놈들은 아닌데 왜 내 앞길을 막는 거냐?”
 금포청년이 포위망으로 향하자 무사들이 좌우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무불악을 쓸어보고는 포권을 취했다.
 “귀하는 혹시 혈마를 보셨소?”
 “지금 나를 심문하는 것이냐?”
 무불악이 대뜸 반말로 응수하자 주변 무사들이 일제히 병기를 겨누었다.
 “이놈, 무례하다!”
 “불패성의 소성주(小城主)이시다! 어서 예우를 갖춰라!”
 불패성(不敗城).
 당금 천하를 호령하는 일성쌍궁 중 일성으로 불리는 당대 최강의 문파가 바로 불패성이다. 하기에 불패성의 소성주라면 일문의 지존과 버금갈 높은 신분이었다.
 무불악도 불패성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불패성이라고? 그래, 쬐금 들어본 적은 있다. 한데 정말 패한 적이 없는 게 확실하냐?”
 금포청년은 나이에 비해 수양이 깊은지 자파를 비아냥대는 조롱에도 별반 노여워하지 않았다.
 “형씨, 타 파의 명호나 다른 사람의 별호를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오. 공연히 본 성의 명호를 놓고 시비를 걸지 마시오.”
 “당신은 누구야?”
 “인사가 늦었소. 나는 백을천(白乙天)이라 하오.”
 멸사신룡(滅邪神龍) 백을천.
 그는 달리 강호제일공자로 불리는 당대 최강의 후기지수다. 무림 정기의 화신이라 할 만큼 그는 철저하게 사마 악도들을 배격하기에 백도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왔다.
 무불악은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어도 상대가 의연하게 응수하자 말투를 조금 바꾸었다.
 “나는 무불악이오.”
 백을천은 다소 놀란 눈빛으로 무불악을 주시하다가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수일 전 잔악한 살인마 흑치살군의 수급을 들고 황금문 섬서지부를 찾아간 의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또한 그 의협은 매음굴에서 은자 만 냥이라는 거금을 풀어 딱한 처지의 매춘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였소. 그 의협의 높은 이름이 무불악이었는데 혹시 귀하가 아니오?”
 무불악은 떨떠름하게 응수했다.
 “얘기는 맞는데 난 의협이 아니오.”
 “당치 않소. 협사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밑바닥을 밝히는 데는 인색하기 마련인데 무 형은 진정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높은 덕망을 보여주었소.”
 백을천은 동발에 찢긴 무불악의 옷자락을 가리켰다.
 “무 형은 혹시 혈마와도 대결하셨소?”
 “대결했다기보다··· 어쩌다 엮여 싸우게 되었소. 그 마두의 등을 찔렀는데 조금 빗나갔는지 죽이지는 못했소.”
 백을천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무 형이··· 혈마에게 부상을 입혔단 말이오?”
 “뭐, 그렇게 됐소.”
 사실 신비여인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기습이었지만 무불악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백을천은 흥분에 젖어 무불악의 손을 굳게 쥐었다.
 “하하, 천하의 홍복이오. 전대 마왕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천하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무 형과 같은 영웅이 탄생했구려. 진심으로 존경하오, 무 형.”
 백을천은 주변의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는 당장 사죄를 청하라! 혈마를 물리친 영웅임을 어찌 몰랐단 말이냐?”
 불패성 무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용서하십시오, 무 대협!”
 무불악은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사죄는 됐고, 잠시 꺼져 줄래?”
 백을천이 턱짓을 해 보이자 주변의 무사들은 흩어져 상관보 무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둘만 남게 되자 무불악이 넌지시 물었다.
 “내가 혈마를 반쯤 죽여 놓았는데 누군가 나타나자 혈마가 갑자기 줄행랑을 쳤소. 언뜻 여인인 것 같은데 제대로 보지는 못했소. 혹시 누구인지 알겠소?”
 백을천은 무불악이 혈마와 대결했음을 높이 평가해 시종 친근감 있게 대했다.
 “아마도 무 형이 한 소저를 만났나 보구려.”
 “한 소저라니······?”
 “천기무화 한운지 소저 말이오. 당금 천하에서 혈마를 도주하게 만들 여협은 한 소저뿐이오.”
 “아하!”
 무불악은 비로소 잠시 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그윽한 향기를 풍긴 그 계집이 바로 천기무화였단 말인가?’
 천기무화(天機武花) 한운지(韓雲芝).
 천등성현의 의발전인으로 중원삼화의 으뜸이다.
 그녀는 천마들과 단독으로 맞서 싸울 만큼 초절한 무공을 지녔으며, 강호 정기를 수호하려는 높은 의기로 천하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재녀로서 명성이 높았다.
 백을천은 상관보 무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수하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 역시 금마곡을 빠져나온 마왕들을 추격하고 있지만 한 소저에 비해 매번 뒤지고 있어 부끄럽기만 하오.”
 “구대천마는 금마곡에 금제돼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놈들이 모두 탈출한 거요?”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 구대천마 중 네 명은 죽었다고 들었소. 그렇다 해도 오대천마가 다시 강호로 나선 이상 혈겁은 피할 수 없소. 나는 사부님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오대천마 추살에 나섰지만 아직 마두들과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했소. 한데 무 형이 혈마에게 중상을 입혔으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오.”
 백을천은 무불악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무 형, 부디 천하창생을 위해 천마들을 제거해 주시오.”
 “백 형은 나를 잘못 보았소. 난 절대 협사가 아니오. 내 이름이 달리 무불악이겠소?”
 “이름은 중요치 않소. 매음굴의 가련한 여인들을 풀어주고 혈마와 싸운 무 형이 협사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협사일 수 있겠소? 지금은 추적이 시급하니 다음날 만나면 술 한잔 대접하리다. 그럼.”
 백을천은 정중히 예를 표하고는 둥실 떠올랐다.
 “혈마가 부상을 입었으니 멀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전원 추격에 나서라!”
 그가 행운유수와 같은 신법으로 수림 위로 넘어가자 불패성 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무불악은 고개를 좌우로 꺾어 우득우득 소리를 냈다.
 “백을천이라······. 대장부인 것은 분명한데··· 정도를 걷는 자답게 조금 순진한 것 같군.”
 그는 부상당한 옆구리를 매만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젠장, 일단 몸부터 추스려야겠다.”
 
 
 제 3장. 악녀 대 악당
 
 
 1
 난살천참에게 당한 부상은 의외로 깊었다.
 무불악은 한동안 객잔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수월치 않은 약값과 숙식비를 치르느라 마지막 남은 은표를 헐어 계산하니 수중에 남은 은자는 불과 열닷 냥.
 그 정도 돈은 사흘 여비도 되지 않는다.
 “제기, 매춘부들한테 공연히 공돈을 풀었어. 다시 몇 푼 만들어야겠군.”
 무불악은 상주의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주머니를 뒤지는 투절술(偸竊術)과 금고를 터는 도절술(盜竊術), 수백 가지의 도박 기술, 귀신도 속일 사기 수법 등을 배웠기에 재물 따위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세상의 재물이 모두 자신 것이기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쓰고 다닐 얼마간의 돈뿐이었다.
 상행도각(商幸賭閣).
 상주(商州)의 번화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박장이다.
 무불악은 골패, 은륜, 주사위판을 한 번씩 거치면서 은자 삼백 냥을 수중에 쥘 수 있었다. 도박꾼들은 눈을 벌겋게 치켜뜬 채 행운을 기대하며 돈을 걸지만 무불악은 마치 놀이 삼아 상당한 거금을 마련했다.
 간단히 여비를 마련한 무불악은 도박장을 나와 상주에서 가장 호화로운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객잔 일층은 전체가 주방이기에 손님들의 좌석은 이층에 배치돼 있다. 한 끼 식사에 최하 은자 스무 냥이나 하다 보니 손님들 대부분은 상주의 부호이거나 상단의 수뇌들이었다.
 값비싼 객잔이라 그런지 탁자마다 개별적으로 화로가 설치돼 있어 바깥이 초겨울임을 잊게 해주었다.
 무불악은 중앙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동안 부상을 치료하느라 음식을 조절하고 술도 마시지 못했기에 오늘은 모처럼 제대로 먹고 마실 요량이었다.
 “술과 요리를 최고급으로 내와라.”
 “예에, 공자님.”
 점소이는 차를 따라주고는 물러갔다.
 무불악은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급 객잔답게 무료로 제공되는 차 맛도 일품이었다.
 이때 주인이 점소이를 대동해 직접 술을 내왔다.
 “외지에서 오신 귀공자이신 것 같아 술 한 병을 증정하겠소이다.”
 좋은 술을 공짜로 제공하는 것도 상술의 하나다. 술보다는 요리가 훨씬 비싸기에 한껏 생색을 내면서 이익을 챙길 수 있으니 주인과 손님 모두가 기분 좋은 일일 수 있었다.
 무불악은 술을 한 모금 음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맛이 괜찮군. 요리나 빨리 내와.”
 “예, 공자.”
 주인은 장사꾼 특유의 미소를 띠고는 물러갔다.
 무불악은 모처럼 술을 마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비싼 술과 싸구려 술을 구분하는 미식가가 아니었기에 어떤 술에도 취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남녀의 웃음소리가 소란스럽게 교환되면서 다섯 명이 객잔 이층으로 올라섰다.
 “하하······!”
 “호호······!”
 네 명의 청년은 부유한 공자들답게 귀티가 줄줄 흘렀고 몸에는 값진 털 갖옷을 덧대 입고 있었다. 각기 병기를 착용한 것으로 미루어 무림세가의 자제들로 생각되었다.
 네 공자의 호위를 받으며 올라선 여인은 실로 염색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절로 눈웃음치는 실눈, 양 볼에 옴폭한 볼우물, 주사를 바른 듯 붉은 입술, 갸름한 턱 선······.
 미녀가 몸에 두른 여우 털 바람막이를 벗었다.
 “아, 이곳은 따뜻해서 좋군요.”
 일순 객잔 내 사람들의 피가 확 달아올랐다.
 미녀의 옷차림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상의는 아주 짧아 하얀 목덜미와 어깨, 잘록한 허리는 물론이며 여인네들이 치부처럼 여기는 배꼽까지 여실하게 드러냈다. 더욱 아찔한 광경은 희멀건 허벅지까지 내보인 짧은 치마였다.
 전체적으로 가린 곳보다 드러낸 곳이 훨씬 많았기에 모두들 그녀가 속옷만 걸친 것으로 착각했다.
 미녀를 대동한 네 공자 역시 그녀의 이런 파격적인 복장은 의외인 듯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오, 은 소저의 몸매 또한 천하일품이오.”
 “그런 기막힌 옷차림은··· 처음 보았소.”
 미녀는 여우 털 바람막이를 의자에 걸치고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워낙 짧은 치마이다 보니 차마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한 자태였다.
 미녀가 상석에 좌정하자 네 공자도 탁자에 둘러앉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점소이들이 차와 술을 내왔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황의공자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은 소저께서 기꺼이 동행을 해주셔서 고맙소. 사실 우리의 모임은 오영회(五英會)였는데 막내가 사고로 얼굴을 다쳐 이번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소. 한데 이렇듯 은 소저와 같은 재녀를 만나 시서를 담론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오.”
 오영회는 섬북오공자들의 모임이다.
 섬북이란 장안을 포함한 섬서성 북부 지역을 말하며, 상관보의 상관청을 비롯한 다섯 개 무림세가의 공자들이 바로 섬북오공자였다.
 이들은 절기별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는데, 이번 모임의 주최자는 오영회의 첫째인 상주 황무장(黃武莊)의 소장주 황인걸(黃寅傑)이었다.
 다른 세 명은 원가보, 풍권산장, 용씨세가의 자제들이었다.
 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한 모금 마시고는 매혹적인 눈웃음을 쳤다.
 “섬북은 처음인데 이렇듯 사공자께서 환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하군요. 그럼 시흥(詩興)을 계속 이어갈까요?”
 원가보의 공자 원호(袁毫)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럼 내가 먼저 한 수 읊어보겠소.”
 백마를 타고 변방을 나서니
 사막의 모래바람이 꿈처럼 피어오르네.
 가을의 쓸쓸함을 어찌 견디랴.
 변방으로 떠난 임이 그립기만 한다네.
 원호가 이백의 새하곡 중에서 한 편의 시 일부를 읊조리자 미녀가 곧바로 뒤를 이었다.
 반딧불은 창가를 비추고 달빛은 규방에 스며드는데
 오동잎은 시들고 쓸쓸한 사당나무 바람에 지네.
 임을 볼 수 없기에 절로 흐르는 눈물.
 물 흐르듯 시구가 이어지자 사공자는 박수를 치며 미녀의 시재를 칭송했다.
 “하하, 과연 은 소저의 시문은 막힘이 없구려. 천기무화에 비해 손색이 없소이다.”
 “식사를 마치면 다 같이 상향루에 올라 밤새도록 술과 시에 젖어봅시다.”
 “하하, 소저께서 이렇듯 재색을 겸비했으니 이제 중원삼화가 아니라 사화(四花)가 되어야 마땅하오.”
 “그렇소. 은월영(銀月影) 소저를 사화로 추대합시다.”
 한데 이때였다. 한 수의 시가 그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종남산에 차가운 비 내리니
 귀신의 비가 마른 풀잎을 적신다.
 장안의 가을밤 깊어가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람 앞의 목숨들.
 조롱하는 듯한 음색 때문인지 한 구절의 시가 귀곡성처럼 섬뜩하게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시흥이 깨진 사공자가 안색을 굳히며 돌아보았다.
 술잔을 쳐든 채 홀로 시를 읊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불악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시는 이하(李賀)의 시뿐이다. 이하의 시는 귀기가 가득하기에 웬만한 문사는 한 구절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 한다.
 무불악은 앞서 읊은 시를 되뇌었다.
 “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람 앞의 목숨들이 아니라 언제 뒈질지 모르는 쥐새끼 같은 목숨들이 더 어울리겠어.”
 명백히 자신들을 빗대 조롱하는 시구이기에 황인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닥쳐라! 네놈은 대체 누구이기에 대뜸 시비를 거는 것이냐?”
 무불악은 요리를 우물거리며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여기가 학당이냐, 시문 경연장이냐? 남들 즐겁게 식사하는데 왜 돼먹지 못하게 먹물 튀는 소리를 짖어대는 거냐?”
 “뭐, 뭐야? 짖어대?”
 “그래. 모처럼 기분 좋게 식사 중이니 정 짖어대고 싶으면 딴 데 가서 노닥여라.”
 “네 이놈!”
 사공자 모두가 병기를 뽑아 들고 무불악을 에워쌌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다! 사죄를 하겠다면 용서하겠지만 정 싸우겠다면 밖으로 나가자!”
 “자식들, 형님 식사하는 것 안 보이냐?”
 무불악의 철저한 무시에 원호가 칼을 내려쳤다.
 “무도한 놈!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쐐애액―!
 시퍼런 칼날이 무불악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한데 칼날의 등등한 기세는 무불악의 젓가락 두 개에 의해 저지되었다.
 무불악은 젓가락으로 원호의 칼끝을 쥐고는 은월영 쪽으로 돌렸다.
 “인마, 정작 네가 죽여야 할 상대는 저 계집이다.”
 원호의 공세가 무산되자 황인걸을 비롯한 세 명이 동시에 공격을 펼쳤다.
 “여기도 있다!”
 “내 검도 받아봐라!”
 무불악은 탁자 위의 요리 접시를 사공자의 면상에 차례로 처박았다.
 “귀찮게 구는군.”
 퍽― 퍽― 퍽―!
 접시가 박살나면서 사공자의 면상으로 파고들었다. 사공자는 음식 오물을 뒤집어쓴 된 채 나가동그라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들은 은월영 주변으로 물러섰다.
 “은, 은 소저! 어서 피하시오!”
 “저 흉악한 놈이라면 소저께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오!”
 “놈은 우리가 잠시 맡겠소.”
 한데 참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은월영이 접시를 날려 사공자의 면상에 한 번 더 짓이겨 버린 것이다.
 “으악!”
 “커억!”
 뒤로 나자빠진 사공자는 사금파리가 얼굴에 박힌 고통보다 정신적인 충격에 더욱 넋이 나갔다.
 “소··· 소저······?”
 “은 소저, 대체 왜······?”
 은월영은 도도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공자를 쓸어보았다.
 “호호, 네놈들은 정말 재수가 좋구나. 너희 멍청한 놈들을 홀딱 벗겨내려 했는데 웬 놈이 훼방을 놓는군. 식사비는 너희가 내고 가라. 그게 너희를 구해준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니까.”
 그녀는 여우 털 바람막이를 몸에 두르고는 무불악을 돌아보았다.
 “이봐, 넌 대체 누구야?”
 “몰라도 돼.”
 “호호, 내가 두려운가 보군.”
 “혓바닥이 뽑히고 싶냐?”
 “이미 술맛 버렸을 거잖아? 나가자. 내가 근사하게 주물러 줄 게.”
 “그냥 꺼져라. 모처럼 술 마시는 중이거든?”
 은월영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무불악을 놀려댔다.
 “바보, 보기보다 겁이 많구나? 죽이지는 않을게. 팔다리 한두 개만 잘라줄 생각이야.”
 무불악은 잠시 은월영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년, 찢어진 입이라고 말도 예쁘게 하는군.”
 “호호, 잘 생각했어.”
 은월영은 미끄러지듯 객잔 계단을 내려갔다.
 무불악이 뒤따라 걸음을 옮기려 하자 사공자가 급히 다가서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대, 대협!”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일깨워 주십시오.”
 무불악은 죽장으로 그들을 후려쳤다.
 “새끼들, 내가 대협으로 보이냐? 니들 패거리인 상관청을 찾아가 물어봐라. 무불악이란 사람이 과연 대협인지 말이다.”
 숲 속의 공터.
 주변의 수림이 병풍처럼 둘러졌고 바닥에는 낙엽이 수북했다. 아름드리 수목이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덕분에 겨울날의 찬 기운이 다소 덜했다.
 무불악이 내려서자 은월영이 특유의 눈웃음을 쳤다.
 “이름이 뭐야?”
 “난 무불악이다.”
 “무불악? 호호, 무슨 이름이 그래? 악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뜻이냐? 누가 악당 아니랄까 봐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하는 거냐?”
 은월영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난 은월영이야.”
 “내가 보기에 여우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러냐, 은 여우?”
 “편한 대로 불러. 한데 왜 내 영업을 방해한 거야? 보아하니 우린 같은 부류인 것 같은데 이럴 때는 서로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원칙이잖아?”
 “은여우, 네가 놈들을 상대로 벗겨먹든 삶아먹든 난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데 왜 구역질나게 고상한 체하는 거냐? 네년이 무슨 요조숙녀라고 시 나부랭이를 읊어대?”
 은월영이 무불악을 향해 다가섰다.
 “호호, 그게 내 영업 방식이거든. 한데 네가 훼방을 놓았으니 변상을 받아야겠다. 팔과 다리 하나씩만 자를게.”
 은월영은 손목에 찬 두툼한 팔찌를 매만졌다.
 “불악,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면 이 누나가 손목 하나만 자르는 선에서 용서해 줄 수 있어.”
 “미친년, 죽여 달라고 악을 쓰는구나.”
 은월영은 요요한 미소를 발하며 손을 뻗었다.
 “호호, 죽을 놈은 너다!”
 차앙······!
 팔찌가 칼로 변화되면서 그대로 무불악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아주 얇은 칼을 둥글게 말아 팔찌 형상으로 만든 칼을 환도(環刀)라고 한다. 환도는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병기로 돌변하기에 기습에 아주 효과적인 병기다.
 더군다나 은월영은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고 유혹적인 눈길을 보내는 와중에 살초를 전개했기에 기습으로는 완벽했다.
 그러나 그 정도 기습을 예상할 못할 무불악이 아니었다. 무불악은 뒤로 미끄러지면서 죽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두 사람은 병기를 맞닥뜨린 채 서로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여우야, 너 정말 껍데기 벗겨지고 싶으냐?”
 “호호, 한 검법 하는군. 하지만 너무 겁내지 마. 팔다리만 잘라줄 테니까.”
 “난 네년을 세 토막 내주겠다.”
 순간 무불악의 죽검이 번득였다. 흑치살군의 잔악한 살인 초식 전광삼분참이었다.
 번―― 쩍!
 목과 허리를 향해 동시에 날아드는 살인 초식에 은월영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여우 털 바람막이만 남긴 채 황급히 솟구쳐 올랐다. 그 바람에 여우 털 바람막이가 댕강 잘렸다.
 무불악은 동강난 바람막이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계집애, 춥겠구나.”
 목을 매만진 은월영은 손끝에 묻어 나오는 피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쁜 새끼, 넌 인간도 아니구나? 어떻게 나처럼 연약한 여인을 상대로 그렇듯 흉악한 살인 초식을 구사할 수 있는 거냐?”
 “큭, 네년이 연약하다고? 지나가던 개도 웃겠구나. 참, 네 사부가 누구냐?”
 “그건 왜?”
 “너 같은 악녀를 키운 악당이 누구인지 궁금하구나. 훗날 네 사부 되는 자를 만나면 단단히 혼내줘야겠다.”
 “너부터 밝혀. 그럼 나도 얘기해 줄 테니까.”
 “은여우, 너는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하는 거냐? 네년은 지금 심문을 받고 있는 거다.”
 무불악이 죽검을 겨누자 은월영이 바싹 긴장하며 외쳤다.
 “칠대악인!”
 “칠대악인? 네년의 사부가··· 칠대악인이라고?”
 “그래, 난 칠대악인의 공동제자야. 생각해 봐. 칠대악인이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키울 수 있겠어?”
 무불악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감돌았다.
 “칠대악인은 십오 년 전에 모두 죽은 것으로 아는데 정말 그들의 제자란 말이냐?”
 “정말이야. 당시 칠대악인은 특별한 사연 때문에 잠적했어.”
 “어떤 이유?”
 “그건 말할 수 없어. 사문의 비밀이니까.”
 은월영은 무불악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제 네 차례야. 너도 얘기해 봐.”
 “난 천사혈뇌의 제자다.”
 “어마, 그래? 어쩐지 사악하다 했어.”
 “이제 죽어라.”
 무불악은 은월영의 가슴을 향해 죽검을 뻗었다.
 “흐윽!”
 은월영은 아픈 비명을 토하며 맨손으로 검극을 움켜쥐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나쁜 놈, 정말··· 날 죽이려는 거야?”
 “물론이다. 난 계집의 눈물 따위는 믿지 않는다.”
 무불악은 검극에 힘을 가해 앞으로 뻗었다. 한데 은월영의 손에 잡힌 검은 마치 강철 집게에 잡힌 듯 요지부동이었다.
 “응······?”
 무불악이 흠칫 놀라는 순간 은월영의 오른 주먹이 무불악의 가슴을 강타했다.
 “이 사기꾼!”
 퍼억!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무불악은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 속에 나가동그라졌다. 그나마 바닥에 낙엽이 수북했기에 머리가 깨지는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다가선 은월영이 무불악의 혈도를 몇 곳 점했다.
 “호호,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고 하지? 내게는 세 개의 비밀 무기가 있어. 하나는 팔찌처럼 숨긴 환도이고 두 번째는 투영신갑(透影神匣)이다.”
 그녀는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모르겠지? 손에 끼고 있으면 구분하기 힘든 장갑이야. 투영신갑을 끼고 주먹을 내지르면 바위도 박살 낼 수 있고 웬만한 도검도 막아낼 수 있지.”
 방심했다가 된통 당한 무불악은 은월영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이년, 보통 영악한 계집이 아니로구나.’
 그는 은월영의 늘씬한 허벅지로 눈길을 돌렸다.
 “여우야, 혹시 네 세 번째 비밀 무기는 아랫도리에 숨겨져 있는 것 아니냐?”
 “어마, 눈치 빠르네?”
 은월영은 순순히 시인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워낙 걸친 게 없다 보니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은월영은 장난스럽게 무불악을 툭툭 걷어찼다.
 “무불악, 넌 내 상대가 안 돼. 왜 그런 줄 아냐? 넌 절대 천사혈뇌의 제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네년이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
 “호호, 당연하지. 내가 바로 진짜 천사혈뇌의 제자이니까.”
 무불악은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직시했다.
 “네가··· 천사혈뇌의 제자라고?”
 “그래. 사부님은 수개월 전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사부님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원수를 꼭 찾아내 죽이라는 유명을 내게 남기셨지. 이러니 네가 어떻게 천사혈뇌의 제자일 수 있단 말이냐?”
 “그렇군. 내가 정말 엄청난 실수를 했다. 진짜 천사혈뇌 제자 앞에서 헛소리를 해댔으니 말이다. 한데 누가 천사혈뇌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거냐?”
 “금마곡의 흉포한 천마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물론이다.”
 은월영은 무불악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자신해서인지 술술 털어놓았다.
 “금마곡은 천등성현이 설치한 강력한 진세로 둘러싸여 있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야. 한데 기문둔갑에 능한 누군가가 진세 일부를 파훼한 바람에 천마들이 탈출하게 되었지. 천하인들은 그 누군가를 내 사부님으로 지목했어. 정말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게 된 거지.”
 “내 생각에도 누명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구나. 당금 천하에서 천등성현이 설치한 진법을 파훼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천사혈뇌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소리 마! 금마대진은 설치된 지 삼십 년이나 지났기에 저절로 와해됐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 진법을 파훼할 수 있는 사람은 사부님 외에도 여럿이 있다고. 귀곡심악이라든가, 천맹상인, 그리고 사대비전(四大秘傳)의 지존들도 용의자가 될 수 있다고.”
 무불악은 그녀의 반발을 일축했다.
 “여우야, 천마들을 세상으로 내보내 혼란을 꾀해서 이득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 재미 삼아 사악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천사혈뇌가 바로 범인이다.”
 “닥쳐!”
 은월영은 무불악의 가슴팍을 힘껏 짓밟았다.
 “밟혀서 죽고 싶으냐?”
 순간 무불악은 은월영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아서라!”
 무불악의 혈도가 타통되었음을 간파한 은월영은 하얗게 질렸다. 무불악은 은월영의 발목을 쥐고 짐짝처럼 패대기쳤다.
 “악!”
 엄청난 충격에 은월영은 울컥 피를 토했다.
 무불악은 죽장을 집어 들고 다가섰다.
 “여우야, 그러기에 기회가 있을 때 확실하게 날 죽이든가 했어야지.”
 은월영은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턱을 덜덜 떨었다.
 “흐윽, 부··· 분명 혈도가 제압되었는데······.”
 “네년은 세 가지 비밀 무기가 있다면서? 나도 몇 가지 정도는 지녀야 하지 않겠냐?”
 “아··· 알았어. 벗을게.”
 “뭘 벗겠다는 거냐?”
 “너··· 나를 겁탈하려는 거잖아?”
 무불악은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크흣, 네가 정말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네년 몸뚱이가 그렇게 대단하냐?”
 “당연하지. 아직까지 내 몸을 보고 탐내지 않은 사내는 없었으니까.”
 은월영은 몸을 돌려 상의를 벗고는 젖가슴을 가렸다.
 “날 가져도 좋아. 하지만··· 살려줘.”
 무불악은 그대로 죽검을 내려쳤다.
 “화냥년!”
 죽검이 내리꽂히는 순간 은월영은 상의를 내던졌다.
 퍼엉······!
 옷 속에 연막탄이 숨겨져 있었는지 상의가 쪼개지면서 희뿌연 연무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무불악은 한 번 은월영의 기습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기에 죽검을 몸에 붙여 암습에 대비했다.
 연무가 흩어지면서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다. 은월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무불악은 은월영이 멀리 도주하지 못했음을 알기에 한껏 비아냥댔다.
 “여우야, 이제 치마 한 조각만 달랑 걸친 거냐? 곧 얼어 죽겠구나!”
 수림 안쪽에서 은월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불악, 이 악당아! 세상에 날 죽일 사내는 없는데 네놈은 아무래도 고자인 것 같구나! 내가 확인해야겠으니 어서 바지를 내려라!”
 “훗, 미친년.”
 무불악은 굳이 은월영을 쫓아가서 죽여야 할 만큼 원한이 없기에 몸을 돌렸다.
 “재수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에 걸리면 네년을 확실하게 세 토막 내주겠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림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 후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은월영이 나뭇가지 위로 내려섰다. 그녀는 조각 난 여우 털 바람막이로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세상에 저렇듯 음흉하고 악독한 놈이 다 있을 줄이야.”
 그녀의 가는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좋아, 무불악! 네놈의 그 오만한 낯짝을 벗기는 데 내 이름을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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