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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투왕 1

2017.08.04 조회 845 추천 5


 무적투왕 1권
 
 
 서
 
 
 투 씨(鬪氏) 일족은 무림시대 초기에 투가보(鬪家堡)라는 현판을 걸고 처음 가문을 열었다.
 구성원은 고작 서른 명의 혈족과 인척뿐. 당시는 신흥 무림세가들이 속속 세워지던 시기였기에 투가보는 많은 무림세가 중 하나에 불과했다.
 투가보 창건 백 년 후.
 가문의 식솔이 백 명을 넘기면서 투가보는 가문의 현판을 바꿔 달고 본격적으로 무림세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투천세가(鬪天世家)!
 그것이 투가보의 새로운 현판이었다.
 투천세가 일족은 사내와 계집을 구분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투사로 키워진다. 혹독한 수련을 걸친 그들은 나이 열여섯이면 당당히 투사로서 인정된다.
 투천세가의 일족은 창건 조사가 정해놓은 가법(家法)만을 절대적으로 숭상한다. 가법 중에 이런 조항이 있다.
 죽을지언정 절대 퇴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가살불퇴(可殺不退).
 가문에서 정한 율법에 따라 투천세가 일족은 상대가 죽거나 자신이 죽어야만 싸움을 끝낸다.
 불행히도 일족이 죽게 되면 투천세가에서는 새로이 투사를 파견해 도전한다. 그 끝없는 도전 속에 최후의 승자는 투천세가일 수밖에 없었다.
 투천세가의 가법에는 또 이런 조항이 있다.
 천하의 의(義)를 해치는 자는 무조건 악인으로 상대의 신분과 사문을 무시하라!
 불의필살(不義必殺).
 그들은 명문 정파의 제자라 해도 극악한 죄를 지으면 가차없이 죽인다. 이런 냉혹함 때문에 한때 하북의 명문 세가인 하북팽가와 대판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불사하는 투사 가문과의 대결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일족의 절반이 전사하자 하북팽가는 가주를 비롯한 원로들이 투천세가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바람에 결국 멸문을 면할 수 있었다.
 철저한 가법 준수와 무서운 투혼.
 투천세가는 특유의 전투력을 통해 창건 이백 년 만에 무림십대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마교(魔敎).
 이들은 세상의 어둠을 먹고사는 사악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광명의 그림자이기에 세상이 존재하는 한 절대 소멸되지 않는다.
 마교의 목적은 단 하나, 마도천하(魔道天下)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방해되는 훼방꾼은 철저하게 말살한다. 이렇듯 세상의 어둠을 목표로 하는 마교의 무리에게 있어 광명을 추구하는 투천세가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대집결.
 마교에 소속된 칠백여 마인들이 등천봉 아래 집결했다.
 당시 투천세가의 식솔들은 젖먹이 아이까지 합쳐 모두 백사십칠 명.
 외견상 투천세가의 멸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퇴각한 쪽은 오히려 마교의 마인들이었다. 등천봉에 오르는 동안 마교의 마인이 무려 오백 명이나 희생되었다.
 잔혹한 손속과 악독함에 있어 남에게 비교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마인들이었지만, 투천세가의 투혼과 불굴의 의기 앞에서는 그들의 마력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천하 제패를 노리는 숱한 문파들이 창건돼 투천세가 타도를 외쳤지만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투천세가였다.
 근 천 년의 세월 동안 강호 정기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싸워온 투천세가.
 그들은 네 번씩이나 멸문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가문을 유지해 왔다. 그런 와중에도 투천세가에서는 경이로운 무림 영웅들을 속속 탄생시켰다.
 새황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최초의 중원맹주.
 세 명의 백도맹주와 스물일곱 명의 무림 열사.
 이렇듯 위대한 영웅들을 탄생시킨 가문은 무림사 이래 오직 투천세가가 있을 뿐이다.
 삼십 년 전, 마도 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대마왕성(大魔王城)이 창건되었다.
 대마왕성의 성주 전륜대마왕(轉輪大魔王).
 전륜대마왕은 마교의 후신임을 자처하며 마도천하를 부르짖었다. 대마왕성은 순식간에 서른여섯 개의 방파와 무림세가를 무너뜨리며 천하를 피로 물들였다.
 이에 백도 일백 개 문파가 규합해 백도연맹을 결성했다.
 백도연맹의 맹주에는 투천세가의 삼십대 가주인 투공후(鬪攻候).
 투공후는 백도연맹을 이끌고 대마왕성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선발대는 물론 투천세가의 투사들이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의 투혼과 의기는 대마성의 잔혹한 마인들을 압도했다.
 양측의 전력이 대등했음에도 불구하고 백도연맹은 큰 피해 없이 대마왕성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대신 투천세가의 희생은 엄청났다.
 선발대로 나선 투사 절반이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절반도 심한 부상을 당했다. 무엇보다 지극한 슬픔은 전륜대마왕과 단독 대결을 펼친 투공후의 장렬한 최후였다.
 투공후는 전륜대마왕과 단독 대결을 벌여 마왕의 한 팔을 끊고 한쪽 눈을 베어 패퇴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무수한 마공 절기에 적중된 투공후는 투천세가로 귀환하는 도중에 눈을 감고 말았다.
 위대한 죽음.
 백도 일백 개 문파의 종주들은 투천세가의 의기와 투공후의 비장한 전사에 감동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투천세가의 빛나는 업적을 추앙하고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종주들 모두의 서명이 담긴 거대한 현판을 헌정한 것이다.
 千年第一世家.
 천년제일세가!
 그 어떤 가문도 지닐 수 없었던 절대적 광영.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한 가문은 그렇게 탄생했고, 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콰르릉―!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섬전이 번득이더니 요란한 우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어 한바탕 비가 쏟아진다.
 쏴아아아······!
 봄 가뭄으로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단비였지만 봄철의 비치고는 드문 광풍폭우였다.
 세찬 비바람은 천년제일세가가 위치한 등천봉(騰天峰) 위에도 몰아치고 있었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천년제일세가는 모든 건물이 견고한 돌로 지어져 있기에 폭풍이 불어 닥쳐도 끄떡없다.
 등잔이 밝혀진 회의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연유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오.”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연 사람은 천년제일세가 삼십일대 가주 투사민(鬪射旻)이었다.
 그는 삼십 년 전의 정마대전 때 불과 열여덟의 나이로 참전해 대마왕성의 적염당주를 참살한 공을 세웠다. 당시 정마대전에서 부친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그는 투천세가의 삼십일대 가주에 올랐다.
 이후 투천세가는 천년제일세가로 불리게 되었으니 그는 역대 가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칭호를 받게 된 셈이다.
 회의실에는 그의 아들 투일준(鬪日晙)을 비롯해 천년제일세가의 일곱 원로들이 참석해 있었다. 일곱 원로들은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노장들로, 모두가 몸은 성치 못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투사민은 아들 투일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환(桓)아를 내려놓았다.”
 “예, 아버님.”
 투일준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원탁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백일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 아기였다. 아기는 자신의 운명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빨며 옹알이를 해대고 있었다.
 투사민은 강보를 헤쳐 아기의 몸을 드러냈다.
 “원로들도 아시다시피 환아는 내일 백일을 맞이하오. 그러나 우리 가문의 가법상 투사로 키울 수 없는 아이는 수용할 수 없소. 유감스럽게도 환아가 바로 그 대상이 되고 말았소.”
 제일원로가 독목을 번득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가주? 환아는 보기 드문 신골의 소유자라 하지 않았는가? 내 듣기에도 삼태성(三太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하였네.”
 제일원로는 아기의 심장 부근에 나란히 찍혀 있는 세 개의 점을 가리켰다.
 “이 세 개의 점은 삼태성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
 투일준이 비통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일원로, 환아가 삼태성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걸출한 신골의 소유자임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삼칠일이 지나면서 갑자기 심각한 이상 증후를 보였습니다.”
 “이상 증후······?”
 제일원로는 아기의 눈과 몸을 상세하게 살폈다.
 과연 아기의 좌우 눈은 확실히 균형이 맞지 않았고 왼쪽 눈은 사팔눈에 가까웠다. 왼팔은 제대로 발육되지 않았으며 오른쪽 다리는 현저하게 짧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분명한 기형아였다.
 제일원로가 장탄식을 지었다.
 “허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우리 가문에 어떻게 이런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투사민이 아기의 맥문을 쥐었다.
 “환아는 기경팔맥 중 양유맥과 음교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소. 게다가 십이경락 중 세 개의 경락이 훼손되었기에 오래 살기도 어려운 몸이오.”
 원로들은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투사민이 아기의 몸을 강보로 감쌌다.
 “가법을 아무리 후하게 적용하려 해도 환아는 더 이상 가문에서 키울 수 없소. 다리와 팔의 불구는 수련을 거쳐 개선한다 해도 미흡한 두뇌와 짧은 수명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섰소. 그래서··· 환아를 충절애(忠節崖)로 보낼 생각이오.”
 아기를 건네받은 투일준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천년제일세가의 가법은 엄격해 절대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부모가 죽고 처자식이 죽어도 엄숙한 애도를 표할 뿐 울음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그런 철혈의 기질은 천 년 동안 가문을 지탱해 온 원천이었다.
 투사민은 일곱 원로들을 둘러보며 견해를 물었다.
 “원로들의 현명한 추인을 바라겠소.”
 원로들은 머리를 맞대고 잠시 숙의했다.
 가주는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지만 혈족의 생사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원로회의 추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원로회가 가주의 결정을 부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숙의를 마친 제일원로가 원로회의 입장을 밝혔다.
 “가법에 따라 천년제일세가의 삼십삼대손 투무환(鬪武桓)을 축출하겠다는 가주의 용단을 수용하겠네.”
 소가주 투일준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아내 손예지(孫藝芝)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환아야!”
 그녀는 엄격한 가법을 무시한 채 비통한 눈물을 뿌렸다.
 “흑흑, 이럴 수는 없어요! 백일도 안 된 아이입니다! 어찌 치료할 방도는 생각지 않고··· 충절애로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투일준이 나직이 꾸짖었다.
 “부인, 눈물을 그치시오. 어찌 가문 내에서 울음을 터뜨린단 말이오?”
 “으흑흑, 내 자식이 죽게 되었는데 어찌 울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가법이 아니오? 당신도 이미 혼례 전에 서약을 하지 않았소? 가법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만 하오.”
 “싫어요!”
 손예지가 벌떡 일어섰다.
 “내 아들을 구할 겁니다. 차라리··· 환아를 데리고 등천봉을 떠나겠어요. 흑흑, 혈족을 버리려는 잔혹한 가문의 가법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가 문을 나서려 하자 투일준이 막아섰다.
 “예지, 가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잊었단 말이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을 임하면 절대 퇴각하지 않고,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지만··· 어찌 살아 있는 자식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단 말입니까?”
 “나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소. 하지만 투사로 성장할 수 없는 자식이라면··· 포기할 수밖에 없소. 가문의 천 년 가법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오.”
 “안 돼요! 난 환아를 구할 겁니다!”
 손예지는 득달같이 일격을 내질렀다.
 마혈이 찍힌 투일준은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사이 손예지는 석옥을 벗어났다.
 투일준은 혈도가 찍힌 몸이기에 더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아내의 기습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방어를 하지 않았다.
 자식을 잃는 아픔과 슬픔은 자신보다 아내가 더할 것이기에 일부러 길을 내준 것이다. 물론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문의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지, 먼발치에서나마··· 환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시구려.’
 부슬부슬······!
 한바탕의 광풍폭우가 지나간 하늘에서 보슬비를 뿌리고 있었다.
 먹장구름은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둥지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새들이 바쁜 날갯짓으로 회색 하늘을 가로지른다.
 천년제일세가의 성지 충절애.
 이곳에는 천년제일세가의 통한과 집념이 서려 있다.
 천 년 이래로 투 씨 일족은 회생할 수 없는 부상을 당하거나 치료할 수 없는 중병을 앓게 되면 충절애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가문의 강성함을 고수하려는 투 씨 일족의 의기는 그만큼 소름 끼칠 정도였다.
 자욱한 운무가 깔려 있는 깎아지른 천길 벼랑 가에는 낡은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오랜 비바람에 깎이고 귀퉁이가 부서진 제단은 유구한 세월을 짐작케 해준다.
 가주 투사민은 제단 앞에서 향을 사르고 지전을 태우며 선조들에게 고했다.
 “후손 사민이 선조들께 고합니다. 가법에 따라 후손 무환을 충절애로 보내오니 선조들께서는 어린 영혼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투사민은 제단을 향해 아홉 번 절을 올리고는 몸을 돌렸다.
 제일원로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그에게 건넸다. 제일원로는 아기를 안고 도주하려는 손예지에게서 아이를 탈취해 왔다. 손예지의 간절한 호소와 눈물도 제일원로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투사민은 아기를 받쳐 들고는 아스라한 벼랑으로 향했다.
 이때 손예지가 가문의 법도를 무시하고 충절애로 뛰어들었다.
 “안 됩니다, 아버님! 차라리 죄 많은 저를 죽이십시오!”
 두 명의 원로가 내려서며 손예지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종부, 이 무슨 불경한 짓인가?”
 “당장 돌아가지 못할까?”
 손예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악을 써댔다.
 “환아를 돌려주세요! 흑흑, 내 아들··· 내 아들을 돌려달단 말입니다!”
 벼랑 끝에 선 투사민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높이 쳐들었다.
 “불쌍한 영혼은 구천에 올라 용맹한 투사로 환생할지어다!”
 순간 아기도 자신의 위험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는지 갑자기 울어대기 시작했다.
 “으앙! 으앙······!”
 발버둥 치던 아기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조부의 엄지손가락을 힘껏 쥐었다. 그 힘이 얼마나 드셌는지 투사민은 엄지손가락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이럴 수가! 기경팔맥 두 곳과 십이경락 세 곳이 손상된 아이가 이렇듯 신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투사민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전설의 성약이라도 구해 손자를 회생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막연한 바람에 젖어 가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아기의 혼혈을 짚었다. 혼혈이 짚인 아기가 축 늘어졌다.
 손예지는 털썩 꿇어앉으며 가주에게 애원했다.
 “흑흑, 아버님, 가법을 따르겠습니다. 하오니···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환아를 안아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투사민은 끝내 며느리의 애절한 간청을 무시했다.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우리 투천세가의 가법이다.”
 투사민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높이 쳐들었다.
 “후손 투무환을 선조들의 영령에 바칩니다!”
 그의 손을 떠난 아기는 운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아가!”
 손예지는 처절하게 부르짖고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눈앞에서 자신의 자식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으니 그 참담함에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는 투사민의 눈에도 고통의 빛이 가득했다.
 ‘환아야, 이 할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제1장 천 년 전설의 종말
 
 
 휘이이잉······!
 절기상 하늘과 땅이 푸르고 맑다는 청명(淸明)이건만 봄철치고는 드문 강풍이 밀어닥쳤다.
 두터운 구름 때문인지 어두운 하늘에서는 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무리가 보인다.
 얼굴에 회칠을 한 듯 창백한 면모의 사람들.
 간편한 경장을 걸친 그들은 온몸을 병기로 무장했다.
 허리춤에는 비수, 등에는 칼, 허리춤에는 검을 찼다. 또한 한쪽 팔뚝에는 폭이 좁은 방패가 부착돼 있었으며 드러나지 않았지만 가죽 신발 안쪽에도 병기를 숨기고 있었다.
 등천봉 아래 집결한 검은 복장의 무사들은 대략 오백여 명.
 그들은 강력한 마공을 수련했기에 하나같이 눈빛이 붉고 예리했다. 또한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무서운 전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후 네 명의 가마꾼이 사인교를 메고 장내에 이르렀다. 사인교가 당도하자 오백여 마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배례를 올렸다.
 “총상(總相)을 뵈옵니다!”
 교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갸름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곧은 콧날과 얄팍한 입술은 여인을 방불케 했지만 가는 눈매가 여우처럼 교활해 보였다.
 그가 바로 대마왕성의 총상 천통마뇌(千通魔腦)였다.
 교자가 내려지자 천통마뇌는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밖으로 나섰다.
 “시작해라!”
 짤막한 지시가 떨어지자 마인들은 오십 명씩 한 대를 이루어 등천봉 위로 달려갔다.
 천년제일세가가 위치한 등천봉은 주변이 가파른 벼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직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나선형 계단을 통해서만 진출입이 가능하다.
 기나긴 나선형 계단 다섯 곳에는 견고한 관문이 형성돼 있는데 각 관문은 한 명의 용사가 능히 천 명의 적군을 막아낼 천연의 요새였다.
 이런 험지 덕분에 천년제일세가는 창건 이래 단 한 번도 본당이 점거되는 굴욕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퍼엉······!
 외부의 침입을 고하는 폭죽이 첫 번째 관문에서 솟아올라 밤하늘을 밝혔다.
 통상 외부의 침입이 발발하면 천년제일세가의 투사들은 신속하게 이동해 각 관문으로 배치된다. 하나의 관문마다 대략 십여 명이 배치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관문에서 침입자를 격퇴한다.
 천년제일세가 창건 이래 오직 마교만이 다섯 번째 관문에 이르렀지만 그들 역시 본당을 점거하지는 못했다.
 한데 첫 번째 관문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폭죽이 솟아올랐지만 천년제일세가의 움직임은 지극히 조용했다.
 계단식 장원 상부의 의절각(義絶閣).
 가주 투사민은 맹독을 억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만일 그의 내공이 심후하지 않았다면 벌써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맹독에 중독된 그의 안색은 검푸르게 변색돼 있었다.
 “상황은··· 어떠하냐?”
 소가주 투일준이 침중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침입자는 대마왕성의 잔당들로 보입니다. 최소 오백 명 이상입니다.”
 “그만한 숫자라면 잔당이 아니다. 대마왕성이··· 다시 부활한 것 같구나.”
 “원통합니다, 아버님. 가문의 투사들이 건재했다면 전륜대마왕이 직접 쳐들어왔다 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하오나··· 지금은 대부분이 중독돼 관문조차 사수할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그러했다. 천년제일세가는 지금 최악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난 밤사이 우물에 맹독이 투여된 바람에 아흔 명의 일족 중에서 삼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절반도 독 기운 때문에 운신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삼십 년 전 정마대전 때 상당수 일족이 전사했기 때문에 천년제일세가의 투사들은 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독공까지 당했으니 건재한 투사들은 스무 명 남짓에 불과했다.
 특히 백전노장인 칠대원로 중 네 명이 타계한 것은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다.
 “어쨌거나 가문의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투사민은 잠시 고심하다가 내공으로 독기를 몰아 왼팔로 밀어 넣었다.
 “베거라.”
 “아버님······?”
 “어서!”
 부친의 준엄한 지시에 투일준은 이를 악물고 검을 내려쳤다. 왼팔이 잘려 나가며 검은 독혈이 쏟아졌다.
 푸시식······!
 얼마나 강렬한 독인지 독혈이 뿌려진 대리석 바닥에서 새파란 독연기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냉혹한 응급처치였다. 몸의 일부를 베어 독기의 확산을 막는 시술은 대다수 무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식에게 팔을 베도록 지시할 수 있는 철혈의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투일준은 부친의 어깨 부위 혈도를 찍어 출혈을 막아주었다.
 “송구합니다, 아버님.”
 “아니다. 이로써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다.”
 투일준은 부친의 베어진 팔을 천으로 감아주었다.
 “아버님께서는 본당을 지키십시오. 다행히 소자의 중독 상태가 심하지 않으니 관문으로 내려가 지키겠습니다.”
 “며늘아기는 어떠하냐?”
 “운신이 어렵습니다. 하오나 우리 가문의 일족답게 전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본당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안됐구나. 우리 가문에 시집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건만··· 얼마 전에는 아들을 잃고 이제는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어.”
 투사민은 어깨 위로 바람막이를 걸쳐 팔의 부상을 가렸다.
 “일준아, 장원 내의 우물에 맹독이 살포되었다는 것은 가문 내에 대마왕성의 첩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넌 그자를 색출하는 데 주력해라.”
 “아버님, 모두가 일족인데 과연 누구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밤 악적이 침투해 우물에 독을 살포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유령이라면 모를까 인간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다섯 개 관문을 뚫고 침투할 수 있겠느냐?”
 투사민의 얼굴에 짙은 회한이 피어올랐다.
 “아비가 너무 방심했다. 우리 가문은 천년제일세가란 현판을 받지 않았어야 했다. 가문으로서는 더없는 광영이지만 그 바람에 우리 가문은 천하인 모두의 질시를 받게 되었다. 일족들 또한 지나친 자부심에 빠진 것도 사실이다.”
 “아버님······.”
 “모두 아비의 실책이다. 우리 일족은 데릴사위와 며느리를 들이는 데 있어 보다 신중해야 했다. 만일 첩자가 숨어 있었다면 그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오랜 세월 가문의 일족으로 살아오다가 마침내 독을 살포한 게 틀림없다.”
 투사민은 벽에 걸친 벽혈신검(碧血神劍)을 끌어내렸다. 이백 년 이래 가주들에게 계승되어 온 가전보검이다.
 “이미 숨을 거둔 일족은 의심할 수 없으니 생존자들 중에서 찾아봐라. 하지만 첩자의 교활함을 감안한다면 건재한 사람들 중에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중독을 가장한 자들 중에서 색출하는 게 더 유력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아버님.”
 투일준은 정중히 배례를 올렸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부친을 향한 마지막 하직 인사일 수 있기에 투일준은 오래도록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투사민이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아들의 눈에 서린 눈물을 보며 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네가··· 우는 게냐?”
 “아, 아닙니다, 아버님.”
 투사민은 아들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네가 모진 성격이 못 됨을 아비는 잘 알고 있다. 너는 배신자를 찾아내도 일족의 정분 때문에 차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는 차라리 제오관을 지키거라. 그것이 우리 가문의 제삼십이대 가주가 되어야 할 너의 마지막 소임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가문의 명예와 전통을 반드시 사수하겠습니다!”
 투일준은 비장하게 외치고는 의절각을 나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선 투사민은 가문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으로 향했다.
 이천 개의 위패가 사당의 삼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여느 가문이 천 년 동안 존속했다면 그 일족이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투 씨 일족은 네 번씩이나 멸문의 위기를 겪은 데다 수많은 투사들이 천하 대의를 위해 전사하는 바람에 그 자손이 많지 않았다.
 투사민은 향을 사르고 지전을 태우고는 선조들께 고했다.
 “후손 사민이 선조들께 미리 죄를 청합니다. 부디 저를 벌하시고 한 점 혈육이라도 살리어 가문의 맥을 잇도록 지켜주소서.”
 그는 아홉 번 절을 올리고는 사당을 나섰다.
 천년제일세가의 제사관이 돌파당했다.
 투천세가 제삼원로는 중독된 상태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혈투를 벌여 대마왕성의 마령과 마사 등 중간 수뇌 일곱 명을 참살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번 전투에서 오십 명에 달하는 마인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대마왕성의 손실은 이백 명을 넘어섰다.
 천통마뇌는 사망한 투 씨 일족의 숫자를 서첩에 기록하면서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실로 무서운 놈들이군. 잔화(殘花)가 절명마독(絶命魔毒)을 살포하지 않았다면 삼관도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아버님께서 우려하실 만큼 독한 자들이다.’
 그의 부친은 과거 대마왕성의 총상이었던 뇌마(腦魔)였다.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천통마뇌는 부친의 품에 안겨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천통마뇌는 부친의 마도백계를 이어받아 대마왕성의 총상에 오른 후 줄곧 복수를 다짐했었다.
 그가 난공불락이라는 천년제일세가의 네 번째 관문까지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이십 년에 걸친 철저한 준비와 사악한 계책 덕분이었던 것이다.
 제오관의 책임자는 소가주 투일준.
 그는 네 번째 관문까지 돌파됐다는 보고를 듣고 비장한 각오를 품었다.
 제오관에는 경미하게 중독된 투사들이 모두 집결돼 있었다. 투사들은 모두 합쳐 열아홉 명. 이것이 동원될 수 있는 천년제일세가의 전력이기에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일족들을 대동해 관문 앞에 진형을 이루었다.
 이때 대마왕성의 마인들이 대오를 이루어 관문을 향해 진격해 왔다. 삼백여 명의 마인들로 인해 좁은 진입로가 새까맣게 뒤덮였다. 앞선 마인들에게 퇴각을 허용치 않겠다는 지독한 인해전술이었다.
 투일준은 마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투사들이 뒤를 이어 몸을 날렸다.
 “사악한 마도 놈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무시무시한 혈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투천세가의 투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중독된 상태에서 대마왕성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마침내 천년제일세가의 보루라 할 수 있는 다섯 번째 관문이 돌파되었다.
 관문으로 들어선 천통마뇌는 전황을 보고받으며 죽은 투사들의 숫자를 서첩에 기재했다.
 그에게 있어 대마왕성 마인들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년제일세가를 말살할 수 있다면 오백여 마인 모두가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그였다.
 그는 투일준의 시체를 찾아내 수급을 베도록 지시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놈은 소가주의 신분이다. 전리품으로 가져가야 한다.”
 잠시 후 다섯 번째 관문을 돌파한 대마왕성 마인들은 천년제일세가 내당으로 들어섰다.
 지형적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보니 넓은 평지가 존재할 수 없다. 좁은 평지에는 몇 개의 망루와 창고가 세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가파르게 경사진 계단이 놓여 있었다.
 천통마뇌는 척후를 보내 계단 위의 상황을 확인한 후 계단 위로 올라섰다.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평평한 돌판이 깔려 있는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다.
 천통마뇌는 묘한 흥분에 젖었다.
 비록 본당 건물은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겠지만 연무장을 밟게 되자 그는 자신이 천년제일세가를 점거한 최초의 정복자임을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성주님과 아버님도 이루지 못한 정벌을 내가 이루었다!’
 한편 가주 투사민은 운신할 수 있는 일족들을 모두 대동해 본당 계단 앞에 진을 쳤다.
 총 인원 열세 명.
 중독이 심한 투사들은 그사이 목숨을 잃었고, 겨우 숨만 붙어 있던 투사들은 가주의 명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투사민은 병기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투사들을 쓸어보았다.
 만일 대마왕성의 첩자가 있다면 이들 중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같이 맹독에 중독돼 고통스런 모습을 짓고 있기에 누구 하나 의심할 수가 없었다.
 투사민은 첩자가 숨어 있었다는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그래, 가문 내에 첩자가 숨겨져 있었던 게 아니라 침투를 당한 것이다. 유령 같은 자에 의해 우물에 독이 살포된 것이 확실해.’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투사들의 손을 한 명씩 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투사들은 비장한 미소로 가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투사민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사람은 가문의 종부인 손예지였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턱 선이 곱다. 한 아이를 출산했지만 아직 청초한 모습은 생을 마감하기에 너무나 안타깝다.
 “아가, 네게 너무 미안하구나.”
 “아버님.”
 손예지는 정중히 배례를 올렸다.
 “더 이상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내 대에 이르러 가문의 천 년 전통이 무너졌으니 내 어찌 구천에서 선조들을 뵐 수 있겠느냐? 그것이 부끄럽구나.”
 “아버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문의 운명이라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십시오.”
 “······.”
 투사민은 물끄러미 며느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아가, 넌 아직도 환아를 충절애로 보낸 이 시아비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닙니다. 환아에게는 지금의 참화보다 오히려··· 행복한 최후가 되었을 겁니다.”
 “오냐, 네 말대로 비극적인 참화를 피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 가문의 마지막 후손을 내 손으로 거두는 바람에 환아에게는 할아비의 못난 꼴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구나.”
 투사민은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연무장 가운데로 나서자 천통마뇌가 두 명의 마장을 대동해 앞으로 나섰다.
 천통마뇌는 섭선을 쥐며 형식적으로 예를 표했다.
 “투사민 가주, 이제 천 년의 전통을 접어야 할 상황이오.”
 “넌 누구냐?”
 “난 대마왕성의 총상인 천통마뇌요.”
 “뇌마와는 어찌 되는 사이냐?”
 “내 선친이시오. 선친께서 구천에 마왕전을 세워놓고 계시니 속히 배알토록 하시오.”
 “네가 이런 사악한 독계를 꾸민 것이냐?”
 천통마뇌는 섭선을 펼치며 여유있게 저었다.
 “그렇소. 천년제일세가를 철저하게 멸문시키기 위해 참으로 오랜 세월 고심했소, 하하하!”
 투사민은 벽혈신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벽혈신검이 건재하다. 네놈의 목부터 베겠다.”
 “하하! 섬뜩하외다, 가주. 이미 절명마독이 골수까지 스며들었을 텐데 아직도 버티고 있으니 말이오.”
 “독 따위에 죽을 내가 아니다.”
 투사민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벽천섬!”
 번―쩍!
 천년제일세가의 독창적인 절기인 벽천섬쾌식이었다.
 천통마뇌는 급히 뒤로 미끄러졌다.
 “막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두 마장이 병기를 휘둘렀다.
 차―차차창!
 연이은 금속성이 터지며 두 마장이 튕겨졌다. 그들의 목에 선명한 혈흔이 그어졌다. 그들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목이 베어졌을 위험한 순간이었다.
 천통마뇌는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음색으로 외쳤다.
 “죽여라―! 모조리 죽여!”
 이백여 마인들이 괴성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연무장 곳곳에서 혈전이 전개되었다. 천년제일세가의 투사들은 사력을 다해 분전했지만 워낙 중독이 심해 마음과 달리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인들의 칼질에 투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투사민은 두 마장을 상대로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다. 체내의 독기를 뽑아내기 위해 한 팔을 자른 그였지만 출수는 여전히 강력했다.
 “크아악!”
 제이마장이 벽혈신검에 의해 상반신이 비스듬히 쪼개졌다.
 제일마장은 동료가 희생된 틈을 노려 투사민을 향해 마공을 발출했다.
 “현명마강!”
 강력한 마공에 적중된 투사민은 울컥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졌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경이적인 비검 절기를 전개했다.
 “비검출해!”
 쐐애액―!
 그의 손을 떠나간 벽혈신검은 한줄기 섬광으로 화해 제일마장의 심장을 관통했다.
 천통마뇌는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으으, 정말 무섭구나. 그런 몸으로도 초절정급에 이른 두 명의 마장을 죽일 줄이야.’
 그는 자신이 직접 투사민을 상대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자신의 무공 수위가 비록 마장을 능가한다 해도 투사민과 격돌했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임을 깊이 인정해야 했다.
 투사민은 독기로 인해 검게 변색된 피를 쏟고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생명 의지가 아무리 굳세도 체력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통마뇌를 직시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가문의 천 년 전통을 말살한 사악한 두뇌를 마저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정신마저 혼미했다. 게다가 제일마장을 죽이느라 벽혈신검을 날렸기에 병기조차 쥐고 있지 않았다.
 이때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투사가 그에게 다가섰다.
 “가주님!”
 투사민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거··· 검을 다오.”
 “예, 가주님.”
 투사는 투사민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한데 참으로 예상치 못한 변고가 발생했다. 투사는 투사민에게 검을 건네지 않고 곧바로 검을 뻗어 투사민의 심장에 검을 꽂은 것이다.
 퍼억!
 심장이 관통된 투사민은 고통보다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 자신을 찌른 마인을 일족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상대를 직시했다. 그러나 상대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를 출산했지만 아직도 청초함을 간직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천년제일세가의 일족이었다.
 마지막 종부 손예지.
 투사민은 비로소 가문의 우물에 독을 살포한 흉수를 알게 되었다.
 “아··· 아가! 네, 네가······?”
 손예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투 가주, 용서하십시오.”
 “이··· 이럴 수가! 네가··· 마도의 첩자라니······.”
 “제 이름은 금잔화(琴殘花). 비록 임무를 완수했지만 한동안 가주를 시아버님으로 모셨기에··· 정말 송구합니다.”
 투사민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했다.
 “가문의 선조들이시여, 이 불민한 후손을··· 벌하소서!”
 스스로 검을 뽑은 그는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심장에서 뿜어지는 피가 독기로 인해 시커멓다.
 천년제일세가의 제삼십일대 가주 투사민.
 마도의 사악한 계략에 의해 가문의 천 년 전통을 잃게 되었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핫!”
 천통마뇌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금잔화 옆으로 섰다.
 “대단하구나, 잔화! 마교의 천 년 숙원이 너에 의해 이루어졌다.”
 “······.”
 “뭐 하느냐? 어서 투사민의 목을 베어라! 성주님께서 아마 네게 문상(文相)의 직위를 하사하실 것이다!”
 “제 소임은 다했습니다.”
 금잔화는 간단히 예를 표하고는 돌아섰다.
 천통마뇌의 눈가 근육이 씰룩거렸다.
 “못난 계집, 잠시 천년제일세가의 며느리가 되었다고 네가 투 씨 일족인 줄 아느냐?”
 그는 투사민의 목을 향해 섭선을 날렸다.
 휘리리링!
 투사민의 수급이 핏물 속으로 구른다.
 투사민의 수급을 확보한 천통마뇌가 악독한 명을 내렸다.
 “투 씨 일족을 죄다 찾아내 머릿수를 확인해라! 금잔화를 제외하면 정확히 아흔한 명이어야 한다! 그리고 천년제일세가를 철저히 파괴하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도록 소금을 뿌려라! 놈들이 궤멸된 현장을 향후 천 년 동안 보존할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천 년 전통의 위대한 가문이 멸문을 당했다.
 이 엄청난 사건은 다음날부터 폭풍처럼 천하를 진동시켰지만 자세한 내막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도 등천봉에 올라 그 현장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등천봉 계단 입구에 세워진 석비에 새겨진 끔찍한 경고문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가문인 투천세가는 궤멸됐다.
 놈들은 땅에 묻힐 자격이 없으니 비바람과 찬 서리가 놈들의 해골마저 갈아버릴 것이다.
 누구도 등천봉에 올라서는 안 된다.
 만일 이 경고를 무시하면 당사자는 물론이며 구족까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대마왕성 성주 전륜대마왕.
 천 년의 전설과 투혼이 무너졌으니 누가 감히 대마왕성에 대항하겠는가.
 백도의 구심점을 잃은 백도인들은 대마왕성의 무시무시한 엄포에 겁을 집어먹고 누가 하나 등천봉에 올라 투 씨 일족의 시신을 수습해 주지 못했다.
 이는 천 년 동안 대의와 무림 정기를 수호해 온 천년제일세가에 대한 배신이다.
 그러나 누구도 배신으로 생각지 않았고 또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천년제일세가는 더할 수 없는 존경과 더불어 질시를 받아왔던 것이다.
 이로써 위대한 가문의 천 년 전설은 막을 내렸다.
 백도인들은 삼십 년 만에 또다시 전개된 대마왕성의 혈겁에 전전긍긍하며 가슴을 졸였다.
 한데 금세라도 피바람을 일으킬 것 같은 마도의 기운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적!
 그러나 폭풍전야라 하기에는 그 정적이 너무도 길었다.
 한 해 두 해가 흐르면서 백도인들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오 년 십 년이 흐르면서 천년제일세가의 대한 기억도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팔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제2장 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얼마냐?”
 “은자 열 냥이오.”
 “너무 비싸군.”
 “그럼 열닷 냥을 내시오.”
 “뭐야? 네가 지금 나를 희롱하는 것이냐?”
 “스무 냥이오. 한 푼도 깎을 수 없소.”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러고도 네가 장원진에서 약초 한 망태 팔 수 있을 것 같으냐?”
 장원진 시장으로 약초를 사러 온 약재상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악을 써댔다.
 좌판에서 약초를 팔고 있는 사람은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었다. 청년은 제법 사내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오른쪽 동공이 사팔눈처럼 기울어져 있어 그 면모가 크게 퇴색되었다.
 그는 오른팔에 비해 현저하게 빈약한 왼팔을 매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굳이 날 위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되오. 내가 캐온 약초를 사줄 상인은 많소.”
 “에이, 고약한 놈!”
 약재상은 가래침을 뱉고는 시종들과 함께 다른 좌판으로 이동했다.
 이때 의원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좌판의 약초를 집어 들고는 세심하게 살폈다.
 “흐음, 뿌리까지 잘 캐냈군. 얼마면 되겠는가?”
 청년은 중년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의 정상적인 왼쪽 눈은 산골의 약초꾼답지 않게 맑고 차분했다.
 “값을 불러보시오.”
 “은자 스무 냥이면 어떤가?”
 “열 냥이오.”
 “그럴 수는 없네. 최소 열닷 냥은 받아야 하네.”
 “열 냥 이상이라면 팔지 않겠소.”
 흥정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거래였다.
 앞서 값을 깎으려는 상인에게는 오히려 올려 받고, 더 주겠다는 사람에게는 내려 받으니 확실히 정상적인 상거래는 아니었다.
 청년의 고집에 의원은 어쩔 수 없이 열 냥을 지불하고 한 바구니의 약초를 구입했다.
 다른 좌판에서 약초꾼과 값을 흥정하던 약재상이 청년의 괴이한 거래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몸만 성치 않은 게 아니라 정신도 성치 않은 녀석이로군. 스무 냥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열 냥을 고집하는 거야?”
 그러자 약재상과 흥정을 하던 늙은 약초꾼이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
 “대인, 나중에 약옹에게 처방전이라도 한 장 받으려면 말씀을 삼가시구려.”
 “약옹? 혹시 무릉산 신의를 말하는 겐가?”
 “그렇소이다. 응비가 바로 무릉산 신의인 약옹의 손자외다. 조금 엉뚱한 데가 있어 약초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팔지요.”
 “하면 내가 약초의 가치도 모른다는 말인가?”
 약재상이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자 약초꾼이 좋은 말로 위로했다.
 “대인, 응비는 약초를 사람을 구하는 데 쓰이는 구명초로 생각하고 있소. 한데 대인께서 일반 상품처럼 대뜸 깎으려 하니 심기가 틀어졌나 봅니다. 응비가 다소 엉뚱하기는 해도 심성은 곧은 아이니 달리 생각지 마시오.”
 약재상은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에잉, 약옹의 손자라면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장원진은 무릉산에서 채집된 약초가 널리 팔리는 시장이기에 대부분의 약초는 오전에 거래가 끝난다.
 제멋대로 약초 값을 결정한 청년은 약초가 모두 팔리자 좌판을 걷고 일어섰다.
 청년의 이름은 태응비(太鷹飛).
 그는 반년 전쯤 조부와 함께 무릉산 기슭에 초옥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의 조부는 약옹(藥翁)으로 불리는 의원으로 무릉산에서는 신의로서 명성이 높다. 하지만 약옹은 병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좀처럼 왕진에 나서지 않는 매정함 때문에 평판은 썩 좋은 편이 못 된다.
 태응비는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주점에 들러 술을 한 단지 주문했다.
 반대머리 주인이 소흥주 한 단지를 탁자에 올렸다.
 “잘 왔네, 응비.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어.”
 “얼마입니까?”
 “닷 냥일세. 이번에는 한 푼도 깎아줄 수 없으니 그리 알게.”
 “그마한 가치가 있는 술이라면 당연히 닷 냥을 드리죠.”
 태응비는 작은 잔으로 술을 떠서 냄새를 맡았다.
 반대머리 주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술맛은 마셔야 아는 법일세. 한잔 쭉 들이켜 보게.”
 태응비는 신중하게 냄새를 맡고는 잔을 내렸다.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 몰래 술을 훔쳐 마셨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 절증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술을 마실 수 없대요.”
 그는 탁자에 은자 한 조각을 내려놓았다.
 “세 냥입니다.”
 “안 돼!”
 반대머리 주인이 술 단지를 감싸 안았다.
 “이번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네. 꼭 닷 냥을 받아야겠어.”
 “그렇다면 물을 타지 않은 술을 내주세요.”
 “물··· 이라니?”
 “소흥주에 물이 섞였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럴 리가 있나?”
 반대머리 주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태응비의 후각이 남달리 발달한 것은 의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의원은 냄새만으로 탕약을 구분하고 약초와 독초를 분류하며 병자들의 입 냄새와 고름 냄새 등으로 병을 진단해야 하기에 후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주방을 나선 빈대머리 주인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허엄, 미안하네. 아들놈이 술을 빼먹는 바람에 마누라가 나 모르게 물을 조금 섞었다고 실토했네. 많이 섞은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자넨 코는 정말 귀신일세. 제발 소문만 내지 말아주게나.”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도 세 냥 이상을 받으면 안 됩니다.”
 약점을 잡힌 주인은 태응비의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에고, 우리 사람 망했다 해.”
 태응비는 지게에 술과 양곡을 지고 산길을 올랐다.
 그는 눈과 팔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장애가 있었다. 어릴 적에는 심하게 다리를 절어 또래 아이들의 놀림이 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절름발이 소리는 면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오른쪽 다리가 상대적으로 빈약해 그의 걸음걸이는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산자락 초옥에 이르렀을 때는 옷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와 조부가 사는 초옥은 허름했다.
 초옥은 겨우 비바람을 피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초옥 뒤꼍에 세워진 약재 보관 창고가 주거지처럼 견고해 보였다.
 사각사각······!
 깡마른 노인이 평상에 걸터앉아 작두로 약재를 썰고 있었다.
 노인은 나이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주름이 깊었고 이마에 새끼줄을 둘러 허연 백발을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그래도 두 눈만큼은 노인답지 않게 맑고 강렬했으며, 다소 고집스런 모습은 꼬장꼬장해 보였다.
 노인이 바로 무릉산 신의로 불리는 약옹이었다.
 “에고, 힘들어.”
 마당으로 들어선 태응비가 술 단지를 평상에 내려놓았다.
 노인은 손자의 힘들어하는 모습은 전혀 개의치 않고 술만 반겼다.
 “오냐, 한잔 마셔보자.”
 술을 한 모금 마신 노인은 술을 내뿜었다.
 “푸하! 인석아, 술맛이 왜 이 모양이냐?”
 태응비는 우물을 길어 땀을 씻었다.
 “물 탄 술이더군요. 대신 술값은 쌉니다.”
 “못난 놈, 약은 제값을 주고 지어야 하듯이 술도 제값을 주고 마셔야 한다. 물 탄 술이 어디 술이냐?”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해 맛을 모르겠습니다.”
 “맛은 못 느껴도 냄새로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술값을 깎을 수 있었습니다. 주인아저씨 아들 녀석이 술을 빼 먹었대요. 아들이 혼날까 봐 아줌마가 양을 맞추느라고 물을 섞었답니다. 주인아저씨가 물 탄 술을 다 팔 때까지는 참으셔야 합니다.”
 약옹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술을 한 대접 따랐다.
 “고약한 여편네, 약에다 물을 탈지언정 술에다 물을 타면 안 되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할아버지도 참. 물 탄 술은 맛이 없을 뿐이지만 물 탄 약은 병자가 상할 수 있잖아요. 명색이 의원께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인석아, 물 탄 약 마시고 죽었다는 병자는 아직 못 봤다.”
 약옹은 냉담하게 일축하고는 맛없는 술을 들이켰다.
 “염병, 이게 물이지 술이냐?”
 그는 연신 불평을 토하고는 다시 약재를 썰었다. 그러다 평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손자를 힐끗 보고는 작두질을 멈추었다.
 약옹이 표정을 굳히며 나무랐다.
 “요즘 온천욕을 소홀히 한 것이냐? 최소한 사흘에 한 번씩은 온천욕을 해야 한다고 이르지 않았더냐?”
 “온천욕을 하면 좋기는 하지만 오행천까지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어서 다녀와라.”
 태응비는 중천을 넘어선 해를 올려보았다.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 다녀올게요.”
 “이 녀석이 이제 대가리가 컸다고 꼬박꼬박 말대꾸냐?”
 “거 참, 되게 볶아대시는군.”
 태응비는 다소 부은 얼굴로 평상에서 일어섰다. 마당을 나서는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해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약옹의 눈빛에 침중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약옹은 손에 쥔 약재를 내려놓으며 나직이 뇌까렸다.
 “이제 음양선과(陰陽仙果)만 구하면 되거늘······.”
 무릉산에는 여러 곳에 온천이 있지만 태응비는 자신이 찾아낸 오행천을 주로 이용했다. 오행천은 물이 아주 뜨겁고 하루에 물 빛깔이 다섯 번이나 변색돼 오행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태응비는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자신의 왼팔과 오른 다리의 경락을 지압했다.
 그의 온천욕은 자신의 절증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 중 하나였다.
 그는 열 살 때까지 장백산 일대에서 지냈는데 그때도 집 근처의 온천에서 수시로 온천욕을 했다. 이후 중원의 커다란 호수를 전전했는데 그때도 조부는 항상 온천을 끼고 거처를 정했다.
 태응비는 자신이 절증 때문에 눈과 팔, 다리에 장애가 있다고 들었을 뿐 절증의 이름도 모른다.
 심한 장애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사팔뜨기에 절름발이, 팔 병신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강한 정신을 지녀 동무들의 놀림과 조롱에도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정상적인 왼쪽 눈, 오른팔, 왼쪽 다리를 지녔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할 만큼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
 태응비는 온천수에 머리까지 담그고 있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후우, 오늘은 이쯤 하면 되겠군.”
 온천을 나선 그는 바위 위에 벌렁 누워 바람으로 몸의 물기를 말렸다.
 그의 왼팔과 오른 다리는 확실히 빈약했지만 정상인 오른팔과 왼 다리는 근육질로 단단해 보였다.
 몸이 뽀송뽀송하게 마르자 그는 옷을 걸쳐 입었다.
 한데 이때, 산비탈에서 짐승의 가녀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끅끅······!
 사슴 한 마리가 비탈을 내려오다가 힘에 부쳐 데굴데굴 굴렀다. 가까스로 온천에 이른 사슴은 온천수를 몇 모금 마시고는 옆으로 쓰러져 심하게 헐떡거렸다.
 태응비는 사슴의 목덜미 가죽이 벗겨져 벌건 속살이 드러난 것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다.
 “이런, 사냥꾼의 올무에 걸렸나 보군.”
 그는 엎드려 있는 사슴에게 다가갔다. 사슴은 달아날 힘도 없는 듯 슬픔이 가득 어린 눈망울로 그를 멀건이 바라보기만 했다.
 태응비는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지금은 널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친 사람을 노리는 행위는 비겁한 짓이지.”
 그는 사슴의 목덜미 부위를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짐작대로 사슴의 목에는 가는 올무가 박혀 있었다. 사슴은 사력을 다해 올무를 끊고 도주했지만 살 속까지 파고든 올무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대로는 위험하겠어.”
 태응비는 올무의 매듭을 풀어 벗겨주었다.
 “이런, 피가 너무 많이 흐르는군.”
 그는 곧 주변에서 지혈에 효과가 좋은 약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슴도 태응비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사람으로 알았는지 처치가 끝날 때까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태응비는 돌로 약초를 찧어 사슴의 목에 발라주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동여매 주었다.
 “일단 지혈은 됐고.”
 그는 사슴의 발을 쥐고는 경락을 따라 지압해 주었다. 그는 침술은 배우지 못했지만 지압에는 제법 뛰어났다.
 지압은 침술이나 뜸보다는 효과가 약하지만 대신 환자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아무런 처방 도구가 없을 때를 감안한다면 지압은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손길이라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지압을 받은 사슴은 기력을 회복했는지 몸을 일으키고는 후닥닥 달아났다.
 태응비는 왠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훗, 내가 누군가를 치유했군.”
 그가 남에게 의술을 베풀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만 그래도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가슴을 쭉 펴며 공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또 다친 짐승 없나?”
 초옥으로 돌아온 태응비가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사슴을 살려냈습니다. 올무에 걸린 사슴인데 경락을 지압해 주었더니 이내 기력을 회복해 달아났습니다. 뭐, 생각만큼 어렵지 않더군요.”
 그는 내심 조부의 칭찬을 기대했지만 들려온 것은 약옹의 매서운 호통이었다.
 “허어, 네 주제에 누군가를 치료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네가 사슴을 죽일 뻔했구나!”
 “할아버지, 제가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사슴은 죽었을 겁니다. 어차피 죽을 사슴인데 제가 치료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그건 억지입니다.”
 태응비가 반발하자 약옹이 엄중하게 타일렀다.
 “응비야, 네 경락 치료법은 아직 미숙하다. 만일 사슴이 치료 도중 죽었다면 어쩔 뻔했더냐? 네가 요행히 사슴을 구했지만 그것은 네 치료가 통해서가 아니라 사슴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해야 한다.”
 “할아버지, 저를 너무 무시하십니다.”
 “당연하지. 의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정확한 증상을 알아야 하는데 넌 아직 진맥이 부족하다. 진맥이 부실하면 처방이 잘못되고, 처방이 잘못되면 병자는 고통받게 된다.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어.”
 당대의 신의답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태응비는 비로소 자신의 오만을 깨닫게 되었다.
 ‘맞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난 사슴을 치료해 준 게 아니다. 그저 올무를 벗겨주었을 뿐이며 사슴은 스스로 기력을 회복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짐승들이 다쳐도 모른 척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죠?”
 “그래도 지혈 정도는 해줘라. 어린 녀석이 왜 그렇게 매정한 것이냐?”
 “제 매정함이야 할아버지를 닮아서죠. 먼저 자겠습니다.”
 태응비는 툴툴거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느 사람보다 피곤함을 빨리 느끼기에 비교적 잠이 많았다.
 “하암, 오늘은 아침 일찍 약초를 팔아서인지 더 피곤하군.”
 그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눈을 감았다. 몇 번 호흡을 하는 사이 그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드르릉··· 쿨쿨······!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약옹이 들어섰다.
 그는 태응비를 진맥하고는 금침으로 태응비의 경혈에 침법(鍼法)을 시술했다.
 그가 시술하는 침법은 일반적인 금침술이 아니라 경락의 기운을 보해주고 덜어주는 독특한 침술이었다. 다시 말해, 아픈 곳을 찔러 병을 낫게 하는 침술이 아니라 몸의 기운을 조화롭게 만들어 병증을 낫게 하는 시술법인 것이다.
 이러한 침법은 워낙 난해하고 오운육기에 통달해야 하기에 태응비는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태응비는 이해력이 떨어져 어려운 학문을 습득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금침 대신 지압으로 침법을 대신하는 정도만 배우게 되었다.
 침법을 마친 약옹은 태응비를 다시 진맥하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당으로 나선 약옹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의 달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에는 여인의 눈썹처럼 고운 상현달이 걸려 있었다.
 그는 달과 별의 흐름을 살피며 손끝으로 천기를 짚었다.
 칠대성약은 하늘의 뜻을 받아야만 손에 넣을 수 있다. 하기에 무엇보다 천시(天時)가 중요했다.
 잠시 천기의 흐름을 살핀 약옹은 길한 괘를 짚게 되자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오, 길운이 도래했다! 이번 여정에 귀한 약을 얻을 괘다! 응비의 양맥삼경을 완치시킬 수 있겠구나!”
 2
 다각다각―!
 무릉산 자락으로 세 필의 말이 아침 일찍 당도했다.
 산자락에 말을 세워두고 단숨에 산길을 올라온 듯 두 명의 무사는 초옥의 마당에 들어서자 겨우 멈춰 서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태응비는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두 무사를 보고는 물을 한 사발 떠서 다가섰다.
 “아무리 급해도 숨부터 돌리시오.”
 텁석부리 무사가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동료에게 사발을 건넸다. 텁석부리 무사는 건성으로 포권을 취했다.
 “고맙네, 소형제. 한데 안에 약옹은 계시는가?”
 “내 할아버지 말씀이시오?”
 “아, 그럼 자네가 약옹의 손자인가?”
 “그렇소. 난 태응비라 하오.”
 “난 호풍장(湖楓莊)의 총관 강평이라 하네. 우리 아가씨께서 위중한 병에 걸려 화급을 다투는 상황일세. 풍문에 들으니 약옹께서 무릉산 신의라 하기에 장주께서 우리를 파견한 것일세. 약옹께 어서 왕진을 서둘러 달라고 말씀드리게.”
 태응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왕진을 가시지 않소. 병자를 데려오시오.”
 “그럴 상황이 못 되네. 어서 약옹을 뵙게 해주게나.”
 “할아버지는 뒤꼍에서 약재를 덖고 계시오.”
 “그럼 안내해 주게나.”
 “아마 소용없을 거요.”
 태응비는 강평과 수행 무사를 대동해 뒤꼍으로 돌아갔다.
 약옹은 커다란 가마솥에서 약재를 덖고 있었다. 산에서 캐온 약초는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솥에서 덖는 과정을 거쳐야 약재로 사용할 수 있다.
 강평이 정중히 예를 올리며 방문 연유를 고했다.
 “약옹, 호풍장주님의 따님께서 환우가 아주 위중하십니다. 거마비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 왕진을 서둘러 주십시오. 말도 한 필 가져왔소이다.”
 강평의 다급한 모습과 달리 약재를 덖는 약옹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떤 증상인가?”
 “얼마 전 체하신 후로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있소이다. 용하다는 의원들이 탕약을 처방했지만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시고, 침과 뜸으로 처치를 했지만 차도가 없으십니다.”
 “뭐, 갑자기 죽을병은 아니로군.”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벌써 수일째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탈진 상태에 계십니다. 이삼 일 내로 체증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가씨께서 운명하실지도 모른다는 것이 의원들의 진단이외다.”
 약옹은 덖은 약재를 대나무 채반에 옮겨 담았다.
 “호풍장은 어디에 있는가?”
 “상덕이외다. 동정호 서쪽 끝자락이지요. 이곳 무릉산에서 사백여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니 서두르면 오늘 밤 안으로 당도할 수 있을 것이외다.”
 약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말게.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인데 사백여 리를 어떻게 말을 타고 가란 말인가? 혹시 교자라면 모를까.”
 “야··· 약옹! 교자를 이용해 사백여 리를 달려가려면 사흘은 족히 걸립니다. 수고스럽지만 잠시만 고생해 주십시오.”
 “이보게, 이 늙은 몸이 보이지 않는가? 무리하게 길을 서두르다 노부가 먼저 병이 들어 죽는다면 어찌할 참인가?”
 약옹의 단호한 거부에 강평은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약옹, 호풍장의 장주님은 전 병부상서이시외다. 만일 아가씨께 불상사가 생기면 약옹은 무사하기 어렵소이다.”
 “이제 협박까지? 퇴직한 병부상서가 그렇게 대단한 신분인가?”
 강경책이 전혀 먹히지 않자 강평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감정에 호소했다.
 “약옹, 제발 왕진을 서둘러 주십시오. 만일 아가씨께 불상사가 생기면 그동안 아가씨께 처방을 내렸던 의원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주님께서는 돌팔이 의원들을 모두 옥에 가둬놓고 있습니다. 제발 같은 의원의 입장에서 왕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약옹은 약초 건조대에 채반을 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노부는 몸이 쇠약해 그처럼 먼 길을 갈 수 없네. 대신 내 손자를 보내 치료토록 하겠네.”
 “예에······?”
 강평은 힐끗 태응비를 훑어보았다.
 얼굴은 사내다운 풍모를 지녔지만 꾸부정한 어깨며 한쪽 눈이 사팔눈에 가까운 것이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강평은 태응비의 신체적인 장애를 문제 삼을 수 없어 나이를 거론했다.
 “아직···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네 아가씨의 체증 정도는 다스릴 수 있을 것이네. 정 원치 않다면 다른 의원을 찾아보게나.”
 “······.”
 몸을 일으킨 강평은 난감한 모습으로 수행 무사를 돌아보았다.
 “장소팔, 다른 의원에 대한 정보는 없느냐?”
 “총관, 약옹의 신술은 무릉산 일대뿐 아니라 호남성 서부 지역까지 자자합니다. 손자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약옹의 신술을 익혔다면 한번 맡겨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다 만일 병세가 악화되면······.”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의원을 모셔가지 못하면 총관이나 소인 또한 죽은 목숨입니다.”
 강평은 잠시 고심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알겠소이다. 그럼 손자 분의 신술을 믿고 데려가겠소이다. 하나 만일 불상사가 생기면··· 약옹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약옹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채비를 갖춰 보낼 테니 자네들은 먼 길을 떠날 말들에게 물이나 먹이고 있게나.”
 “알겠소이다. 서둘러 주십시오.”
 강평은 장소팔을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약옹은 가마솥에 다시 약초를 넣고 덖기 시작했다.
 “응비야, 할아비 대신 네가 가서 호풍장의 귀공녀를 치료해 주거라.”
 태응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조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호풍장의 귀공녀가 사슴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사슴이 귀공녀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그릇된 편견이다.”
 “명색이 사람이 아닙니까?”
 “체증은 올무에 걸려 목이 찢긴 상처보다 가볍다.”
 “할아버지, 호북성의 명의들도 못 고친 병입니다. 차라리 제가 가서 귀공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다 귀공녀가 죽으면 너와 할아비 모두 무사할 수 없다.”
 태응비는 비로소 조부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환자를 맡기려는 것임을 인식하고는 바싹 긴장했다.
 “정말··· 저를 보내시려는 겁니까?”
 “오냐. 승덕이라면 좋은 술도 많을 테니 한 단지 사오려무나. 돈은 호풍장에서 넉넉히 줄 것이다.”
 “하지만 저는 사람을 한 번도 치료한 적이 없습니다.”
 “두려우냐?”
 “조금은 그렇습니다.”
 “의원이 병자의 증세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면 불치의 병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귀공녀의 증세는 의외로 간단하다. 증세가 파악되었으니 사슴을 치료한 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을 것이다.”
 “······.”
 태응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우회적으로 말했다.
 “승덕에는 볼 만한 구경거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유람을 다녀오는 셈치죠.”
 약옹은 덖은 약재를 채반에 옮겨 담으며 치료법을 설명해 주었다.
 “귀공녀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은 기가 극도로 허했기 때문이다. 한데 독한 탕약과 침으로 치료하려 했으니 쇠약한 몸이 버틸 수 있겠느냐? 먼저 태음비경을 보(補)해 비장을 달랜 후 궐음심포경을 사(瀉)하면 체증이 해소될 것이다.”
 “저는 아직 침법을 모릅니다. 설마 지금 배우라는 얘기는 아니죠?”
 “지금 귀공녀의 몸 상태를 감안한다면 지압이 더 효과적이다. 지압은 네가 할아비보다 낫지 않더냐?”
 “지압술이야 확실히 제가 낫지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수 있으니 할아버지는 멀리 피신해 계십시오.”
 약옹은 손자의 농을 무시했다.
 “할아비가 사흘 후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그 안에 돌아와라. 참, 체증을 다스린 후의 처방은 호풍장에 연금돼 있는 의원들에게 맡겨라.”
 “왜요?”
 “그게 순리다. 그럼 떠나거라.”
 3
 승덕 외곽에 위치한 호풍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장원을 둘러싼 담장은 성채처럼 견고했고 담장 곳곳에 세워진 망루가 열두 개나 되었다.
 대문 좌우에는 관청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지켜서 있어 전 병부상서의 위엄을 한껏 높여주었다.
 이히힝―!
 세 필의 말이 장원 대문 앞에 이르렀다.
 강평이 내려서자 병사들을 비롯한 경비무사들이 급히 달려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총관.”
 “그래, 아가씨의 병세는 어떠하냐?”
 “극도의 탈진으로 간혹 혼절까지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이런 변이 있나!”
 강평은 태응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세나.”
 장원 내부는 인공 가산과 연못이 조화를 이뤄 실로 화려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진입로마다 등잔이 밝혀져 있어 길을 잃은 우려는 없어 보였다.
 태응비가 내당으로 들어서자 앞서 보고를 받은 장주 사도광(司徒匡)이 호위들을 대동해 다가섰다.
 “약옹이 오신 것이냐?”
 강평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송구합니다, 장주님. 약옹은 너무 연로하셔 왕진이 불가한 상태였습니다. 대신 약옹의 손자를 데려왔습니다.”
 태응비가 가볍게 목례만 취했다.
 “태응비입니다.”
 사도광은 태응비를 훑어보고는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가 아니더냐?”
 “할아버지부터 이미 처방을 받았으니 제 할아버지가 치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태응비라 했더냐? 잘 들어라. 내 딸 연연(娟娟)은 내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존재다. 만일 연연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너는 물론이고 네 할아비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장주님, 벌써부터 그렇게 겁을 주시면 제가 손이 떨려서 아가씨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조금도 겁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사도광은 태응비의 대담함에 조금은 우려를 덜었다.
 “알겠다. 신의의 손자라니 너를 믿어보겠다.”
 그는 시비에게 안내를 지시했다.
 태응비는 시비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그의 부자연스런 걸음걸이를 본 사도광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쯧쯧, 명색이 약옹의 손자라는 놈이 왜 저 모양이냐? 한쪽 눈은 사팔눈에 다리마저 저는 것 같구나. 게다가 한쪽 팔마저 기형으로 보였다. 약옹이 정말 신의라는 게 확실한 정보냐?”
 강평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사안이기에 힘써 약옹을 변론했다.
 “물론입니다, 장주님. 무릉산 일대의 풍문이 사실이라면 약옹은 분명 신의입니다. 풍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사람도 사흘 동안 침을 맞고 한 재의 탕약만으로 완쾌됐다고 했습니다. 몸소 병자들을 찾아 나서는 인의(仁醫)는 아니지만 놀라운 의술을 지닌 신의임에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오냐, 총관이 보증한다니 믿겠다.”
 사도광은 표정을 굳히며 서늘한 눈빛을 발했다.
 “행여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하면··· 놈을 다른 돌팔이와 함께 참수할 것이다.”
 이때 태응비를 안내했던 시비가 달려왔다.
 “장주님, 어서 안채로 가보십시오.”
 “무슨 일이냐?”
 “의원이 젊은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아가씨께서 치료를 거부하셨습니다. 마님께서 설득하셨지만 규방의 도리를 어기면서까지 치료받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광은 딸의 고고한 자존심을 잘 알기에 아주 난감해졌다.
 “허어, 이런 낭패가 있나!”
 그는 호위들을 이끌고 안채로 향했다.
 “어서 안내해라!”
 안채의 경계는 오직 여인 무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도광은 호위들을 중문 바깥에 대기시켜 두고 안채로 들어섰다.
 태응비는 여인 무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멀건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자가 의원을 거부하는 상황이기에 그는 병자의 침소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부인, 연연을 설득시켜야지 대체 어쩔 셈이오?”
 호풍장의 안주인 호훼부인(好卉婦人)은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고 있었다.
 “흑··· 연연의 고집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차라리 죽을지언정 젊은 사내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고, 연연아!”
 사도광은 딸의 침소 앞에서 손을 비비며 왔다 갔다 했다.
 “허어,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렵사리 신의의 손자를 초빙해 왔건만 진맥 한번 받아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정말 답답해 미치겠구나.”
 그는 호훼부인 앞으로 다가섰다.
 “부인, 한 번만 더 설득해 보시오. 이번만 치료를 받아보라고 하시오. 다음에는 반드시 호호백발 의원들만 들이겠다고 말이오.”
 “흑흑, 소용없습니다. 이미 몇 번을 설득했지만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호훼부인은 사도광의 옷자락을 쥐었다.
 “여보, 이러다 연연을··· 영영 잃는 것은 아닙니까? 제발 연연이를 살려주세요.”
 “진정하시오, 부인. 차분하게 방도를 생각해 봅시다.”
 “의원을 마다하는데··· 무슨 방도가 있겠어요. 흑흑.”
 호훼부인은 상심이 지나쳐 실신할 지경이었다.
 사도광은 시비들에게 호훼부인을 모시도록 명하고는 태응비에게 다가섰다.
 “곤란하게 됐군. 혹시··· 다른 방도는 없겠느냐?”
 “의원이 병자를 대하지 않고서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제 할아버지도 불가한 일입니다.”
 “하, 하기는······.”
 사도광은 부질없는 물음을 자책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공연히 먼 길을 달려왔군. 여비는 넉넉히 줄 테니 돌아가거라.”
 “장주님, 제가 사내인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네가 젊다는 게 문제다. 규방의 숙녀가 어떻게 젊은 사내에게 함부로 몸을 맡기겠느냐? 내 딸이 워낙 정숙하다 보니 여인의 도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한 게 흠이다.”
 “그럼 다른 의원들은 모두 노인이었습니까?”
 “그렇다. 가장 젊은 의원도 쉰을 넘었다.”
 태응비는 잠시 고심하다가 한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그럼 제가 눈을 가리면 되겠습니까?”
 “뭐야? 눈을 가리고 내 딸을 치료하겠다고?”
 “또한 아가씨의 팔과 다리를 얇은 비단으로 가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가씨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고 옥체에도 직접 손을 대지도 않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 상태로··· 내 딸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알았다.”
 사도광은 태응비의 제안을 호훼부인에게 전하고 딸을 다시 설득토록 청했다.
 호훼부인은 절망 속에서 한줄기 빛을 대한 듯 결연한 표정을 띠었다.
 “알았어요. 의원이 그렇듯 배려해 준다면 연연도 허락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허락하도록 만들겠어요.”
 호훼부인은 시비들의 부축을 받고 딸의 침소로 들어갔다.
 사도광은 잠깐을 참지 못하고 연신 가슴을 두드리며 몸달아했다.
 잠시 후 호훼부인이 밝은 표정으로 침소를 나섰다.
 “됐어요. 연연이가 허락했어요.”
 사도광도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 다행이군.”
 그는 태응비의 손을 굳게 쥐었다.
 “내 딸만 살려라. 네가 원하는 만큼의 재물을 안겨주겠다. 벼슬을 원한다면 너를 황궁으로 보내줄 수도 있다.”
 “장주님, 아직 진맥도 못했습니다.”
 “아, 그렇지. 어서 들어가 보아라.”
 태응비는 사도광의 등에 떠밀리다시피 사도연연의 침소로 들어섰다.
 규방은 아늑하고 호사스러웠다.
 태응비는 난생처음 대하는 화려한 장식품과 진귀한 진열품에 눈이 휭휭 돌 정도였다.
 시비가 검은 천을 손에 쥐고 다가섰다.
 “잠시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의원님.”
 “그러시오.”
 태응비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시비는 태응비의 눈을 검은 천으로 동여매고는 손을 쥐었다.
 “아가씨께 안내하겠습니다.”
 “고맙소.”
 태응비는 시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휘장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며 여인 특유의 향기와 함께 음습한 한기가 느껴졌다.
 태응비는 음습한 기운을 통해 이미 사도연연의 병증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시비가 이끄는 대로 손을 뻗었다.
 얇은 비단으로 덮여 있는 여인의 손목이 손끝에 닿았다.
 “소저, 그럼 잠시 진맥을 하겠소.”
 곧 사도연연의 맥문에 손끝을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
 그는 조부를 통해 일정 수준의 의술을 배웠기에 얇은 비단은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사도연연을 진맥한 태응비는 조부의 진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신의시다. 강 총관이 밝힌 증상만으로 이 아가씨의 병증을 정확히 파악하셨다. 아가씨의 체증은 비장이 너무 약해져서 생긴 병이다. 따라서 비장을 보한 후에야 미음과 탕약을 처방했어야 돼.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지.’
 비장의 쇠퇴한 기운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비장과 연결돼 있는 다리의 경락에 침법을 시술해야 한다. 다리의 경락이 바로 태음비경(太陰脾經)으로, 이는 엄지발가락 안쪽서부터 비롯된다.
 태응비는 공손하게 양해를 구했다.
 “소저, 발과 종아리의 경혈을 지압해 태음비경의 기운을 보하겠소. 약간의 통증이 있을 것이오.”
 사도연연 대신 시비가 대신 답변했다.
 “아가씨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의원님.”
 태응비는 시비의 손에 이끌려 침상 발치에 걸터앉았다.
 그는 비단버선이 덧씌워져 있는 사도연연의 발을 쥐었다. 전족을 해서인지 아기의 발처럼 작았으며 엄지발가락이 안쪽으로 상당히 굽어져 있었다.
 ‘이런, 태음비경이 이렇듯 휘어져 있으니 비장에 무리가 갈 수밖에.’
 오장육부 중 오장에 해당되는 비장이 쇠하면 비위가 약해 음식을 가리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구토가 반복돼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체증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비장을 보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태응비는 오른손만 이용해 사도연연의 태음비경을 천천히 지압했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해 두 발의 태음비경을 지압한다면 훨씬 효과적이겠지만, 그의 왼손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기에 오직 오른손으로 지압을 펼쳐야 했다.
 그는 대둔과 은백에 이어 태충혈을 지압하면서 점차 종아리까지 올라갔다.
 보다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허벅지까지 이어진 경락을 지압해야겠지만, 그는 사도연연의 자존심을 감안해 무릎 아래인 음곡혈까지만 지압했다.
 “으음······!”
 사도연연의 것으로 짐작되는 신음 소리가 가냘프게 울렸다.
 태응비는 손을 옮겨 사도연연의 오른발을 쥐었다.
 “소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으면 편히 숨을 쉬시오. 나는 소저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사도연연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지압을 계속했다.
 태음비경의 기운이 회복되어서인지 사도연연의 굽어졌던 엄지발가락이 서서히 펴졌다. 그러면서 사도연연의 것으로 짐작되는 트림 소리가 들려왔다.
 트림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체증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한다.
 태응비는 자신의 처치가 효과를 보았다는 생각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됐어. 이제 연연 소저도 더는 구토를 일으키지 않을 거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의혹에 젖었다.
 ‘체증 치료는 태음비경만으로 충분해. 한데 할아버지는 왜 굳이 궐음심포경을 사(瀉)하라고 했을까?’
 가운뎃손가락에서 시작되는 궐음경락은 심장을 감싸는 심포와 연결돼 있다. 이를 궐음심포경이라 하는데 체증과는 전혀 무관한 경락이다. 하지만 그의 조부가 지침을 내린 이상 반드시 따라야 했다.
 태응비는 자리를 옮겨 사도연연의 손을 쥐었다.
 얇은 비단에 싸여 있지만 살 한 점 붙어 있지 않은 앙상한 손이 안쓰럽게만 생각되었다.
 태응비는 사도연연의 가운뎃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까지만 지압해 주었다. 그 위쪽까지 손을 대는 것은 불경일 수 있기에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처치를 하는 데 노력했다.
 이윽고 치료를 마친 태응비가 몸을 일으켰다.
 “소저, 내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끝냈소. 부디 쾌차하기를 바라겠소.”
 한데 앙상한 손이 그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사도연연이 비단을 벗고 맨손으로 그의 손을 쥔 것이다.
 “고마워요. 의원께서는··· 소녀의 체증뿐 아니라 심화까지 안정시켜 주셨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어요.”
 기력이 없어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음색은 맑고 고왔다.
 태응비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오. 나는 그저 할아버지가 지시한 대로 따랐을 뿐이오.”
 이어 그는 시비의 안내를 받아 침소를 나섰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도광이 손수 태응비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주었다.
 “어찌 되었느냐? 내 딸이 차도는 좀 있더냐?”
 “제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모두 마쳤습니다. 일단은 아가씨께서 뭐라도 드셔야 기력을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침소의 문이 열리며 시비가 뛰쳐나왔다.
 “장주님, 마님, 아가씨께서 몹시 시장하다며 미음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광과 호훼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오, 체증이 가라앉았구나!”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하옵니다. 이제 연연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광은 태응비의 손을 덥석 쥐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네가 내 딸을 살렸구나!”
 “저는 그저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네 정성이 아니었다면 어찌 내 딸이 진맥을 허락했겠느냐? 참, 이제 완전히 회복이 된 것이냐?”
 “저는 체증을 치료할 뿐 탕약에 대한 처방은 호풍장 의원들에게 맡기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시였습니다.”
 사도광은 약옹의 의도를 대번에 간파했다.
 “허어, 약옹은 정녕 신의로구나. 내가 딸에 대한 집착 때문에 죄 없는 의원을 해칠 뻔했는데 약옹이 그것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야심한 시각에 어디를 가? 당분간 본 장에 머물면서 내 딸의 상세를 돌보도록 해라. 너라면 나도 믿을 수 있다.”
 태응비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장주님, 제가 없으면 할아버지께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하룻밤만 신세를 지고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사도광은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음을 알고는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알겠다. 대신 뭐라도 보답해야 내가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말해보아라.”
 태응비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밝혔다.
 “그렇다면 좋은 술 한 단지만 주십시오.”
 
 
 제3장 건곤팔기, 첫 번째 만남
 
 
 이틀 후, 태응비는 무릉산 자락의 초옥으로 돌아왔다.
 그들 조손에게는 말이 필요치 않기에 말은 마장에 매각했다. 태응비는 지게에 두 단지의 술과 양곡, 몇 가지 생필품을 짊어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약옹은 평상에 앉아 약재를 분류하고 있었다.
 술 단지를 개봉한 약옹은 예민한 후각으로 대번에 술을 감별했다.
 “흐음, 훌륭한 술이다. 소흥주 중에서도 최상품이 확실해.”
 약옹은 술을 한 사발 마시고는 탄성을 그치지 않았다.
 “좋아. 아주 좋구나.”
 태응비는 우물을 길어 한 사발 들이켜고는 평상에 걸터앉았다.
 “상덕의 오리가 실하더군요. 오늘 저녁에는 오향장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호풍장의 귀공녀는 회복된 것이냐?”
 “물론입니다.”
 태응비는 호풍장에서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고는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왜 체증과는 무관한 궐음심포경을 지압하라고 명하셨습니까?”
 “쯧쯧, 네가 귀공녀를 치료해 놓고서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귀공녀도 심화를 치료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약옹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안주 삼아 대추를 우물거렸다.
 “귀공녀가 극심한 체증으로 목숨까지 잃을 뻔한 연유는 단지 비장이 약해서가 아니다. 만일 비장이 극도로 쇠약했다면 여태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게다. 한데 총관의 말을 들어보면 갑작스런 체증이지 오랜 지병은 아니었다.”
 “제가 진맥하기에도 비장이 아주 쇠약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귀공녀는 아주 자존심이 센 아가씨였을 것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외간 사내에게 치료를 맡기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자존심과 고집이 정말 대단했어요. 얼굴을 못 본 게 조금 아쉽습니다.”
 약옹은 술을 맛있게 마시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오냐, 그런 귀공녀였기에 사소한 반응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할아비가 판단컨대 귀공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심사가 틀어져 있었다. 그래서 체증이 악화된 것이다. 네가 태음비경을 지압해 일시적으로 체증을 내려줄 수는 있겠지만, 심화를 해소하지 못하면 체증은 다시 재발된다. 그래서 궐음심포경의 화기를 덜어내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다.”
 태응비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그랬었구나!’
 병자를 진맥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지 증상만 듣고 그 증세와 원인까지 정확히 헤아렸으니 약옹의 의술은 가히 신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응비는 속내와는 달리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어쨌거나 눈을 가리고 귀공녀를 치유한 사람은 접니다. 저도 이제는 사람을 치료해 보았으니 무시하지 마십시오.”
 약옹은 가소롭다는 듯 냉랭하게 일축했다.
 “그래 봤자 너는 할아비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그는 호리병을 가져와 술을 담았다.
 “일전에 말한 대로 할아비가 한동안 다녀올 데가 있다.”
 “가시는 데가 어디인데요?”
 “대설산이다. 서역에 위치한 아주 먼 곳이지.”
 “혼자 가시려면 심심하겠군요?”
 “네 걸음이 늦어 동행할 수가 없구나.”
 약옹은 길을 떠나는 와중에도 태응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혹시 병자들이 찾아와도 함부로 치료해서는 안 된다. 네가 배운 십이경락의 치료법은 겨우 기초에 불과하다. 귀공녀를 치료했다고 함부로 시술하려 들다가는 오히려 남을 해칠 수가 있다.”
 태응비가 볼멘소리로 응수했다.
 “알겠어요. 다친 사슴이 찾아와도 치료하지 않겠습니다.”
 “오냐, 약초를 캐면서 온천욕이나 즐겨라. 그게 너를 위해서도 이롭다.”
 약옹은 이미 꾸려놓은 행장을 어깨에 걸치고는 휘적휘적 산을 내려갔다.
 보기에는 그다지 빠른 걸음이 아니었는데 태응비가 몇 번 눈까풀을 깜빡이는 사이 약옹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문득 혼자 남게 된 태응비는 난생처음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조부가 자신을 치료할 약을 구하기 위해 대설산으로 떠난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연로한 조부의 몸을 감안하면 의당 말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부의 결정은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만류한다고 떠나지 않을 조부가 아님을 알기에 말리는 행위가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었다.
 태응비는 서쪽 하늘을 바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동안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으니 정말 심심하겠군.”
 2
 부우··· 부우······!
 부엉이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주변으로 민가 한 채 없는 고적한 초옥이지만 그 안에서 잠들어 있는 태응비는 천하태평이었다. 사나운 들짐승이나 도적 떼의 습격을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여느 사람에 비해 잠이 많은 그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난다. 또한 한번 잠들면 누가 코를 베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기에 중간에 잠이 깨는 일도 없다.
 그의 조부가 대설산으로 떠난 지도 어느덧 열흘째.
 태응비는 침상에 반쯤 걸친 상태로 코를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둔탁한 폭음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쿵··· 쿵··· 쿵······!
 한 번 폭음이 울릴 때마다 초옥이 진동했다. 폭음은 초옥 마당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쿠우웅―!
 둔탁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초옥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한번 잠에 빠지면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태응비였지만 천장에서 흙먼지가 얼굴로 뿌려지면서 재채기를 참을 수 없었다.
 “엣취―!”
 심한 재채기와 함께 벌떡 깨어났다.
 그는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지진이라도 일어난 걸까? 땅이 울리는 폭음을 들은 것 같은데······?”
 그는 입맛을 쩍 다시며 밖으로 나섰다. 물이라도 한 사발 들이킬 생각이었다. 그러다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물체에 깜짝 놀라 문설주 뒤로 몸을 숨겼다.
 “뭐, 뭐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를 훑어보았다.
 부서지는 달빛 아래 보이는 물체는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여느 사람이라면 크게 놀라지 않았겠지만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덩치가 워낙 거대해 순간 커다란 짐승으로 착각한 것이다.
 “대체··· 누굴까?”
 마당으로 내려선 태응비가 거한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언뜻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다쳤나?”
 상대가 병자이거나 부상을 당했다면 경계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의원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상대가 의원을 필요로 하는 병자이거나 부상자인지만 가릴 뿐이다.
 태응비는 우물에서 한 양동이 물을 긷고 천을 준비했다. 연후 횃불을 밝혀 들고 거한 옆에 쪼그려 앉았다.
 거한은 앞으로 엎어져 있는데, 구 척도 넘는 장신인데다 우람한 근골은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한 자루 도끼를 꽉 움켜쥐고 있는데 도끼날에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피의 응고 상태를 감안한다면 도끼에 피를 묻힌 지 다소 시간이 경과된 것으로 짐작되었다.
 태응비는 거한의 얼굴 쪽으로 횃불을 비춰보았다.
 뜻밖에도 청년이 아니라 노인이었다. 풍성한 사자수염을 길렀으며 얼굴 전체에서 우직함과 과격함이 뿜어졌다.
 “노인이로군. 한데 우리 할아버지와 달리 주름도 별로 없고 근육도 탱탱해.”
 거구 노인의 피부는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데 아주 견고해 보였다. 몸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지만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는 없어 보였다.
 “노인의 골격을 보면 상당한 괴력의 소유자로 보이는데, 누구와 싸우다 다쳤을까?”
 태응비는 거구노인의 손목을 쥐고 진맥해 보았다. 손목이 얼마나 굵은지 두 손을 맞대도 한 번에 쥘 수 없을 정도였다.
 진맥을 하던 태응비가 짙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가만, 내상뿐 아니라 독에도 중독된 것 같군.”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사람이 병자가 아니라 부상자이기에 태응비는 아주 난감해졌다.
 외상이라면 지혈초를 붙여 출혈을 막은 후 금창약을 발라주면 되겠지만 내상은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부상자가 독상까지 당했다면 그의 한계를 훨씬 벗어난다.
 ‘할아버지도 환자를 함부로 치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러나 거구노인의 부상 상태를 감안한다면, 이대로는 하룻밤을 넘기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심하던 그가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일단은 사람의 목숨부터 살리는 게 우선이다. 이 노인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게 분명해. 할아버지가 명색이 약옹인데 이곳에서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지. 모두가 할아버지를 돌팔이로 여길 테니까.”
 그들 조손은 서로에게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 진심이 아니다.
 절대적인 신뢰.
 약옹이 호풍장 귀공녀를 치료하기 위해 태응비를 보낸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했기 때문이며, 태응비가 조부의 지침대로 귀공녀를 치료한 것도 조부의 의술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조부의 의술을 존중하는 태응비이기에 조부의 의술에 대한 명성이 훼손되는 것은 좌시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이 노인을 치료해야 한다.”
 그는 수건을 물에 적셔 거구노인의 몸과 얼굴을 닦아주었다. 도끼를 움켜쥔 손은 워낙 굳어져 있어 손의 혈도 열세 곳을 눌러서야 겨우 손가락을 펼 수 있었다.
 태응비는 보다 자세하게 부상을 살피기 위해 거구노인을 바로 눕히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거구노인은 엎어진 상태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이 상태로 치료를 해야겠군.”
 그는 노인의 새끼손가락을 매만지며 태양소장경을 찾아냈다. 새끼손가락에는 태음심경도 함께 흐르기에 경락을 정확히 찾아내려면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태양소장경을 찾아낸 태응비는 경락을 따라 경혈을 지압해 주었다. 태양소장경은 피를 주관하는 경락이기에 경혈을 다스리면 내상에 의한 출혈을 막아내는 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태응비가 양손의 태양소장경을 번갈아 지압해 주자 거구노인의 입과 코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됐어. 이제 정신을 차리게 만들자.”
 태응비는 거구노인의 신발을 벗겼다.
 체격에 걸맞게 발도 엄청 컸다. 태응비는 대충 발을 씻겨주고는 소음신경을 찾아가 지압해 주었다. 한데 피부가 워낙 견고해서인지 지압의 효과가 없었다.
 “지압이 안 되면 침법을 구사해야 하는데, 난 아직 금침술을 모른다. 경혈은 알고 있지만 침법은 아주 정확하지 않으면 오히려 병자를 상하게 만든다고 했어.”
 태응비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다가 문득 뜸을 떠올렸다.
 “그래, 이 노인한테는 뜨거운 뜸이 오히려 효과적일 거야. 침보다는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는 조부의 방에서 말린 약쑥을 한 상자 가져와 거구노인의 발에 뜸을 놓았다. 발바닥 용천혈에서부터 무릎의 태음교까지 모두 일곱 곳이었다.
 약쑥이 타면서 독특한 향기를 발했다. 약쑥이 타 들어가면서 경혈을 자극하자 거구노인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됐어.”
 태응비는 급히 뜸을 털어내고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보통 뜸 놓은 자리는 벌겋게 달아오르기 마련인데 거구노인의 피부는 철갑처럼 단단해 뜸을 맞은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태응비는 경락에 의한 처치를 마치고 추궁과혈 수법으로 거구노인의 머리를 눌러주었다.
 그렇게 한 식경이 흐르자 거구노인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륵······!”
 태응비는 거구노인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노인장, 노인장!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거구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황소 눈알처럼 커다란 눈에서 은은한 금빛 기운이 뿜어진다.
 워낙 강렬한 눈빛에 태응비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으와, 무시무시한 눈빛이다.’
 거구노인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몸을 굴려 바로 누웠다.
 태응비는 비로소 노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독상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의 금색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돼 있었다.
 ‘아, 이런 독상을 당하고도 용케 목숨이 붙어 있었구나.’
 태응비는 거구노인의 강인한 생명력에 내심 놀라며 가까이 다가앉았다.
 “노인장은 부상이 심합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
 거구노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태응비를 직시하다가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도끼가 손에 잡히자 않자 종이 깨지는 듯한 음색으로 호통을 쳤다.
 “붕천금부(崩天金斧)! 노부의··· 도끼는··· 어디 있느냐?”
 “아, 노인장의 도끼 말입니까?”
 태응비는 노인이 엎어져 있던 자리에 놓인 도끼를 쥐었다.
 한데 얼마나 무거운지 도끼 자루만 들릴 뿐 도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휴, 뭐가 이렇게 무거워?”
 태응비는 있는 힘을 다해 도끼를 끌어다가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도끼를 손에 쥔 거구노인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태응비의 머리에 도끼를 갖다 댔다.
 “네놈은 누구냐?”
 태응비는 서슬 퍼런 도끼날에서 뿜어지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지만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태응비입니다.”
 “이곳은 어디냐?”
 “무릉산 기슭입니다.”
 거구노인은 허름한 초옥을 힐끗 보고는 도끼를 내렸다.
 “노부는 초은야의(草隱野醫)를 찾아왔다. 한데··· 그 늙은이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잘못 찾아온 것 같구나.”
 “초은야의요?”
 “그렇다. 아, 그 늙은이가 신분을 숨기기 위해 다름 이름으로 행세한다고 들었다. 혹시 약옹이라고 들어봤느냐?”
 태응비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물론 들어보았습니다. 바로 제 할아버지십니다.”
 “뭐, 뭐야? 하면 이곳이··· 초은야의의 거처란 말이냐?”
 “제 할아버지는 초은야의가 아니라 약옹이십니다.”
 “알겠다. 한데 네 할아비 약옹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태응비는 다소 경계하는 눈빛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제 할아버지와는 어떤 사이십니까?”
 “친구··· 아니, 비교적 잘 아는 사이다.”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나쁜 관계는 아닙니까?”
 거구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그만 녀석이 왜 그리 꼬치꼬치 묻는 것이냐? 어서 네 할아비나 불러와라. 네 할아비만이 노부를 치료해 줄 수 있다.”
 “할아버지는 열흘 전 대설산으로 떠나셨습니다. 겨울은 되어야 돌아오실 겁니다.”
 “이런 염병!”
 거구노인은 낙담한 모습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퍼억!
 그의 커다란 주먹이 땅바닥을 뚫고 땅속으로 손목까지 파고들었다.
 태응비는 거구노인의 괴력에 혀를 내둘렀다.
 ‘와아, 정말 엄청나군. 웬만한 사람은 슬쩍 건드리는 것만으로 머리가 으스러지겠어.’
 그는 조부와의 친분을 감안해 거구노인을 위로해 주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노인장을 치료해 보겠습니다.”
 “네놈이?”
 거구노인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태응비를 쏘아보다가 다소 표정을 풀었다.
 “그래, 네가 초은야의의 손자라면 조금은 믿어보겠다.”
 “한데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허엄, 노부는 오악패군(五岳覇君)이다.”
 “아, 그러세요. 그럼 패군 노옹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인석 보게? 노부의 명호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구나?”
 “당연하죠. 오악패군이란 명호는 처음 들었습니다.”
 일순 오악패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놈아, 감히 건곤팔기(乾坤八奇)의 일원인 노부를 무시해? 당장 네놈을 때려죽이겠다!”
 “노옹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강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할아버지를 모를 수밖에. 그것도 죄가 됩니까?”
 “이놈아, 모르는 것도 죄다. 다른 놈은 몰라도 노부에 대해서는 알아야 했다!”
 오악패군의 끝도 없는 자부심에 태응비는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왜 부상을 당해 쓰러진 거요?’
 그는 그렇게 내뱉고 싶었지만 조부의 친인이기에 마음속으로만 삭였다.
 “패군 노옹, 부상이 심하니 역정을 내지 마십시오. 겨우 안정된 기혈이 다시 엉킬 수가 있습니다.”
 오악패군은 비로소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새파란 애송이 앞에서 자신을 과시했음을 깨닫고는 주먹을 내렸다.
 “오냐, 강호에 대해 모르다면 죄가 될 수 없지.”
 말은 그리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위엄이 손상되었다는 생각에 몹시 속상해 있었다.
 건곤팔기가 누구이던가.
 정마대전 이후 천하를 진동시킨 수많은 고수들이 출현했지만 그중 으뜸이 바로 건곤팔기로 불리는 여덟 명의 절세고수이다.
 건곤팔기는 주역 육십팔괘 중 으뜸인 팔괘를 이름하며, 여덟 명의 기인은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으로 구분된다.
 오악패군은 산악과 같은 체구로 산을 의미하는 간위산(艮爲山)에 해당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신력을 지녔으며, 금종조 외문기공마저 터득했기에 웬만한 도검에는 상처를 입지 않는 신체를 지녔다.
 그의 병기는 하늘과 땅을 한 번에 쪼갠다는 붕천금부.
 근래 들어 건곤팔기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무릉산에 오악패군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더불어 그의 심각한 부상은 커다란 의혹이기도 했다.
 오악패군은 진기를 일주천시켜 스스로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는 내상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응비라고 했지? 네가 노부의 내상을 치료한 것이냐?”
 “치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경락을 조금 지압해 드렸을 뿐입니다.”
 “으음, 어쨌거나 놀라운 의술이다.”
 “한데 패군 노옹께서는 독상을 입은 것 같은데 알고 계십니까?”
 오악패군이 잔뜩 격앙된 모습으로 말을 받았다.
 “물론이다. 노부가 암산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수치스런 부상을 당했겠느냐?”
 “독상이면 곤란합니다. 저는 해독법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해독은 좋은 약재만 있으면 된다. 초은야의라면 분명 희귀한 약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희귀한 약재요?”
 태응비는 조부의 거처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생각한 듯 손뼉을 쳤다.
 “아, 할아버지가 아주 소중하게 보관해 둔 약재가 있는 곳을 제가 압니다.”
 조부의 처소로 들어선 그는 벽 한쪽을 채우고 있는 약장 서랍을 뒤졌다. 약장 서랍은 백 개도 넘기에 그는 한참을 뒤져야 했다. 한데 그가 찾고자 하는 약재는 발견되지 않았다.
 태응비는 별반 넓지 않은 방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약장에는 없는데··· 은밀한 곳에 숨겨두신 걸까?”
 그는 문득 나무 침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맞아. 이곳에 이주해 초옥을 세우면서 대부분의 집기는 내가 만들어 들여놓았는데 이 나무 침상만은 할아버지가 직접 짜셨다. 당시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당신의 침상은 직접 짜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지.”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태응비는 침상 아래쪽을 두드리다가 막아놓은 판자를 뜯어냈다. 한 자 남짓한 빈 공간이 드러났다.
 태응비는 손을 넣어 빈 공간을 더듬었지만 수북한 먼지만 손에 잡혔다.
 “이상하군.”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혹시나 싶어 바닥의 흙을 긁어보았다. 문득 침상 머리맡 밑 부분의 바닥에서 매끄러운 돌판의 감촉이 감지됐다.
 “이게 뭐지?”
 태응비는 등잔을 들이밀어 어둠을 밝히면서 돌판 주변의 흙을 긁어냈다. 이내 두 자 크기의 돌판이 드러났다.
 돌판은 돌 상자를 덮은 뚜껑으로 보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돌 상자 안엔 기다란 나무 상자와 하얀 호리병이 들어 있었다.
 “훗, 역시 있었군.”
 태응비는 나무 상자와 호리병을 꺼내 들고 방을 나왔다.
 “찾았습니다, 패군 노옹.”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오악패군은 눈을 번쩍 떴다.
 “오, 그러냐?”
 그는 서둘러 기다란 나무 상자를 열어보았다. 마른 이끼 사이로 반 뿌리의 마른 산삼이 드러났다.
 오악패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훌륭하다. 이만한 크기면 족히 수백 년 묵은 산삼이겠구나!”
 “아마 천년삼왕일 겁니다.”
 “뭐야, 천년삼왕?”
 “전 열 살 때까지 장백산 일대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삼왕을 구한 이후 태호로 거처를 옮겼지요. 당시는 어려서 삼왕이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천 년 넘는 산삼을 삼왕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삼왕이 확실하구나. 한데 왜 반 뿌리뿐이냐?”
 “제게 복용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열 살 때까지는 비실비실했는데 산삼탕을 마신 이후 건강해졌습니다.”
 오악패군은 천년삼왕과 태응비를 번갈아 보다가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으음, 천년삼왕이라면 마독(魔毒)를 충분히 해독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귀한 영약이라 함부로 사용하기가 두렵구나.”
 “괜찮습니다. 약이 아무리 귀해도 사람 목숨보다 귀하겠습니까?”
 오악패군은 가슴 뭉클한 감동에 젖었다.
 “허어, 어린 녀석이 참으로 대견하구나. 하지만 내 목숨 구하자고 천고의 영약을 함부로 허비할 수는 없다.”
 그는 반 뿌리의 천년삼왕을 나무 상자에 다시 담았다.
 삼왕을 마다하는 그의 의연한 태도에 이번에는 태응비가 그를 다시 보았다.
 “패군 노옹은 정말 의인이시군요. 솔직히 우악스런 모습이 조금은 두려웠는데 이제 안심이 됩니다.”
 그는 하얀 호리병을 건넸다.
 “이건 천년화리의 내단입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천년화리의 내단?”
 “예. 할아버지와 저는 장백산을 떠나온 이후 태호와 동호 등 주로 커다란 호숫가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동정호에서 할아버지가 천년화리를 낚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악패군은 혀를 내둘렀다.
 “허헛, 과연 초은야의답구나. 천하칠대성약 중 두 가지나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악패군은 호리병을 흔들어보았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내 듣기로 천년화리의 내단은 화리의 배를 갈라 꺼내는 즉시 녹는다고 들었다. 이 호리병이 아주 차가운 것으로 미루어 한옥(寒玉)으로 제작된 것 같구나. 약효를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단단히 밀봉된 호리병 마개를 보고는 잠시 주저했다.
 “천년화리의 내단 역시 희대의 성약이라 걱정이 되는구나. 네가 이 귀한 성약을 함부로 내주었다고 네 할아비한테 혼나지 않겠느냐?”
 태응비는 그가 부담을 덜 수 있도록 편하게 응수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나중에 천년화리의 내단 이상 가는 성약을 구해주면 됩니다.”
 “오냐,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오악패군은 비로소 봉인을 뜯고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상큼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오악패군은 호리병을 기울여 반 정도 마시고는 얼른 마개를 닫았다.
 “다 마셨다가는 초은야의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제 본래대도 갖다 놓아라.”
 “그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음, 화리의 내단은 극양의 성약이다. 화기는 만독을 태울 수 있으니 해독이 가능하다. 한데··· 운공조식을 취할 만한 곳은 없느냐?”
 태응비는 초옥을 둘러보다가 뒤꼍을 가리켰다.
 “뒤꼍의 약재 창고가 그나마 넓으니 한동안 지낼 만합니다.”
 “알겠다. 그럼 잠시 신세를 지겠다.”
 오악패군은 붕천금부를 걸머메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작은 동산이 움직이듯 지반이 흔들렸다.
 약재 창고가 제법 크기는 했지만 문이 좁아 오악패군은 벽을 일부 뜯어낸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릎 위에 붕천금부를 올려놓았다.
 “혈황마독(血荒魔毒)만 해소하면 누구도 노부를 이길 수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넌 이제 쉬어도 좋다.”
 그는 깊이 진기를 들이켠 후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태응비는 마당으로 돌아와 평상에 걸터앉았다.
 하늘색으로 미루어 아직 한밤중이라 날이 밝으려면 한참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다소 긴장이 풀리면서 그는 졸음이 밀려왔다.
 “하암, 내가 더 이상 도와드릴 일도 없으니 잠이나 마저 자야겠다.”
 그는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세상이 어찌 되건 그는 자신의 수면 시간을 채워야 했다.
 3
 다음날 아침.
 태응비는 식사를 챙겨 약재 창고로 들어섰다.
 오악패군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자세로 운공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느 무림인과 달리 그의 숨소리는 풀무질 소리처럼 요란했다.
 푸후··· 푸후······!
 그의 커다란 콧구멍을 통해 뿜어지는 숨결에는 은은한 금빛이 서려 있었다.
 태응비는 오악패군의 콧구멍을 통해 들어갔다 나오는 금빛 기운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악패군의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더니 들숨과 날숨에 따라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던 금빛의 숨결이 모두 흡수되었다.
 그가 눈을 뜨자 눈부신 금빛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엇?”
 태응비는 강렬한 안광에 놀라 얼른 두 눈을 가렸다.
 오악패군이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형형한 눈빛이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상승 내공인 반박귀진에 이른 현상이었다.
 “응비가 왔구나.”
 독 기운을 모두 해소했는지 오악패군의 다소 험상궂은 얼굴에 부드러운 화기가 감돌았다. 그러다 태응비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경이로운 탄성을 토했다.
 “오, 네가 이런 신골이었단 말이냐?”
 오악패군은 두 손으로 태응비의 어깨를 감싸 쥐고는 인형을 다루듯 가볍게 치켜들었다.
 “놀랍구나. 이렇듯 뛰어난 근골을 지닌 천하기재가 존재할 줄이야!”
 “노, 노옹, 살살 쥐십시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습니다.”
 “허헛, 그러하냐?”
 오악패군은 태응비를 내려놓고는 백회혈에 장심을 올렸다.
 “이런 근골이라면 남다른 신맥(神脈)을 지녔을 것이다.”
 그의 장심에서 뿜어진 진기가 백회혈로 스며들면서 기경팔맥과 경락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태응비는 몸의 일부와 팔다리가 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으윽, 그··· 그만 하십시오!”
 깜짝 놀란 오악패군이 얼른 진기를 회수했다.
 “이런 변이 있나? 네게 노부의 오악진기를 조금 주입시켜 주려 했건만 전혀 주입이 되지 않는구나.”
 그는 신중한 눈빛으로 태응비의 오른쪽 눈을 살피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왼팔과 오른 다리를 만져 보았다. 이어 맥을 짚어보고는 땅이 꺼져라 탄식을 지었다.
 “허어, 애석하구나! 천고의 기재가 경맥과 경락이 손상되었다니! 하늘이 어찌 네게 이런 불우한 운명을 내렸단 말이냐?”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온천욕만 꾸준히 하고 경락만 잘 주물러 주면 됩니다.”
 “인석아, 목숨만 연명하는 게 어디 삶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늘로 날아오를 용이 이무기가 되었는데 어찌 통탄하지 않겠느냐?”
 태응비는 오악패군의 지나친 찬사에 머쓱해졌다.
 “훗, 제가 용이라면 토룡(土龍:지렁이)쯤 되겠군요?”
 “응비야, 네 할아비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신의 중 한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제 내가 복용한 천년화리의 내단은 너를 위해 보관해 둔 약으로 생각되는구나. 초은야의가 머나먼 대설산으로 여행을 떠난 것도 특별한 성약을 구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노부는 엄청난 실수를 범한 것이다. 너를 치료할 약을 노부가 복용했으니 말이다.”
 오악패군이 잔뜩 우려의 모습을 보이자 태응비가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노옹은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천년화리의 내단은 아직 절반이 남았습니다. 반 뿌리의 삼왕도 그대로 있고요. 그리고 설사 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가면 되는 일입니다.”
 태응비가 워낙 초연한 모습을 보이자 오악패군은 어느 정도 자책감에서 벗어났다. 그는 워낙 호쾌한 성격이기에 고민을 오래 하지 않는다.
 “알겠다. 내 반드시 또 다른 성약으로 보답하겠다. 노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그 얘기는 그만 하세요. 시장하실 텐데 뭐라도 드십시오.”
 “오냐, 그러고 보니 몹시 배가 고프구나.”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찐빵과 콩죽을 먹었다.
 태응비는 오악패군의 가슴에 감긴 천을 힐끗 보았다.
 “한데 대체 누구와 싸우다가 다치신 겁니까?”
 오악패군은 쓴 입맛을 다시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대마왕성 놈들이다.”
 “대마왕성이오? 대체 그들이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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