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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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유사 1

2017.08.10 조회 449 추천 2


 계림유사 1부 1권
 
 
 발단(發瑞)
 
 
 그로부터 해가 뜨고 지기를 수천 번, 십오 년이 흘렀다.
 
 
 서장(序章)
 
 
 그날, 십오 년 전.
 기봉검문(基峰劍門)의 칠대 장문인 칠검야우(七劍夜雨) 당헌기(唐憲寄)의 일곱 제자 중 수석제자인 번쾌검신(飜快劍神) 채수헌(蔡秀軒)과 이 제자 옥수관영(玉手關英) 반기(潘起)는 월성령(越城 )을 넘고 있었다.
 호남성과의 경계지역인 월성령은 호남성에서 광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 하는, 동서로 열려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월성령은 워낙 험하고 높은 산이었지만 산기슭으로 열린 하나의 관도(官道)는 명나라 시대 이후 관군의 이동로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잘 닦여져 있었다.
 채수헌과 반기는 기봉검문 당대 문주의 명을 받아 호남무림의 태두 장기검파(長旗劍派)의 장문인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월성령을 넘던 중이었다.
 기봉검문은 광서성의 계림현(桂林縣)에 위치하고 있었다.
 계림은 광서의 북쪽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위치에 자리한 까닭에 운남(雲南), 호남(湖南), 광동(廣東), 귀주(貴州)등 주변 무림의 방파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기봉검문은 자연스레 그들과 교분을 맺었고 주위의 문파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아 별다른 탈없이 칠 대째 내려오고 있었다.
 “어떤 놈들이 이런 잔인한 짓을!”
 그들이 월성령의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채수헌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은 가늘게 흔들렸으며 눈썹은 휘어졌다.
 채수헌은 분노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월성령의 정상을 넘던 채수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서진 마차였다.
 마차는 적지 않은 금은(金銀)을 사용한 듯 견고해 보이고 유려하게 치장이 되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차 주위로는 일곱 명의 무인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한결같이 절명한 상태였다. 어찌된 일인지 외상은 전혀 없이 모두 심맥(心脈)이 끊어져 있었다.
 “사형, 아무래도 음파(音波)에 당한 것 같습니다.”
 곁을 따르던 반기가 거들었다. 채수헌이 장문의 장령대제자였고 옥수관영 반기가 이 제자였다.
 “그런 것 같군.”
 채수헌과 반기는 마차를 뒤졌다.
 부서진 마차 속에서는 여인의 시체가 나왔다. 풍만하고 유려한 몸을 지닌 여인은 가슴에 검을 꽂고 죽어 있었다. 맵시가 있고 정숙해 보이는 미부였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로 가슴뿐만이 아니라 허리 아래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구나 하체의 옷은 마구 헤쳐져 있어 누가 보아도 능욕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마구 짓이겨진 모습으로 보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사내에게 윤간을 당했음이 역력했다.
 채수헌과 반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은 능욕을 당한 뒤 가슴에 검이 찔린 것이 분명했다. 여인은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 피가 완전히 응고되지 않은 상태였다.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고 쓰러진 자들의 완맥을 잡아보았으나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 주변으로 오십여 장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어디에도 살아있는 자는 없었다.
 “시체나 묻어줍시다.”
 반기의 의견을 들어 둘은 땅을 파고 시체를 묻었다.
 남의 일이기는 했지만 그들도 강호를 떠도는 사람들이라 공덕을 베풀어야 자신들에게도 공덕이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시체를 묻고 부서진 마차마저 불에 태우려 했을 때, 마차에서 하나의 철궤(鐵櫃)가 나왔다. 죽은 여인과 부서진 마차의 나무 조각들 사이에 놓여진 철궤는 흉수들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뭐지?”
 “열어봅시다.”
 그들은 철쾌를 열어보았다.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다.”
 다섯 살 정도 먹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혼절해 있었다. 작은 철궤는 공기가 모두 날아가 버려 아이가 질식사(窒息死)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혈(亞穴)을 비롯한 다른 모든 혈도들이 점혈당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여인이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반기의 말이 옳았다.
 아이는 전신혈도를 제압당해 움직이기는커녕 입을 열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사내아이였다.
 아이가 담겨있던 철궤에는 보물이 들어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물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미 보물은 마차를 습격한 자들이 모두 털어 간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인식하자면, 아마도 미부와 시종들로 보이는 무인들을 죽인 자들은 보물을 노리고 마차를 습격한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마차의 아름다운 치장만 보더라도 마차의 주인이 어느 정도의 금은보석을 지니고 있는지는 능히 예측이 가능했다.
 가슴에 검을 맞고 능욕당한 미부는 어린아이의 용모와 매우 닮아 있었다. 어렵지 않게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로부터 난세에는 늘 힘없는 초민들이나 여인들이 피해가 크지”
 채수헌은 씁쓰레하게 중얼거렸다.
 청조가 들어섰다고는 하나 아직 중원이 그들의 손에 완전히 평정이 된 것이 아니어서 중원의 변방에서는 아직도 명조와 청조의 접전이 끊임이 없었다.
 민생을 돌보지 않는 명조와 청조의 틈바구니에서 민초들을 괴롭히는 것은 녹림(綠林)이었다. 그들은 늘 초민( 民)들을 괴롭혔고 그 횡포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어, 살아 있어요.”
 아이는 죽지 않았다. 반 각만 지체했더라면 아이는 질식해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아이는 구성지게 울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혼절에서 깨어난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나이가 다섯 살이라는 것과 마차를 타고 오 일 동안을 정신없이 달렸다는 것. 자신의 이름이 위지경덕(慰遲敬德)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아이의 말로 미루어 보아 채수헌과 반기의 추측대로 미부는 소년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채수헌과 반기는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기봉검문으로 돌아왔다.
 십오 년이 지난 후 아이로 인해 생겨날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1장 인연행(因緣行)
 
 
 1
 
 
 어느 날, 채수헌은 한 괴인의 방문을 받았다.
 광서무림을 활보하는 일곱 개의 문파 중에 드는 기봉검문의 당대 문주인 채수헌은 번쾌검신(飜快劍神)이라 불리는 무웅으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세계에 몸을 담은 지 사십 년이 지났고, 당금의 나이는 오십칠 세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길게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이다. 당신의 수중에 있는 옥갑(玉匣)을 주시오.”
 “옥갑?”
 사내의 말속에는 잔잔함이 녹아 있었다.
 흐르듯 유연하고 때로는 광폭하게 들리는 말투가 마치 물엿이 녹아 있는 것처럼 살기가 말속에 끈적거린다는 것이 느껴지자 채수헌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소. 당신이 말하는 옥갑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악마의 도법이라는 월인극(月刃戟)을 모른다고 할 텐가?”
 채수헌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달 전, 광동성에서 오랜만에 붕우(朋友)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산길을 돌아오던 중 산 속에서 신음하는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노인은 이미 내장이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고 입술이 잿빛이 되어 사색이 짙었다.
 채수헌은 혼자였기에 주변에는 인적도 없었다.
 “노인장!”
 말에서 뛰어내린 채수헌은 노인을 외쳐 불러 정신을 일깨웠다. 사경을 헤매던 노인이 눈을 떴다. 그러나 이미 죽음에 다가서고 있는 눈이었다.
 “누구요?”
 “저는 기봉검문의 문주 채수헌이라 하오이다.”
 “다행이군.”
 노인은 힘이 사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노인은 채수헌을 아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말을 할 때마다 잔기침이 토해졌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채수헌은 이미 노인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은 희미한 눈으로 웃었다.
 “이것!”
 자세히 보니 노인은 하나의 옥갑을 움켜쥐고 있었다. 노인은 옥갑을 채수헌에게 내밀었다.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옥갑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본시 귀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노인이 목숨을 마감한 것도 옥갑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장!”
 “놈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요. 정기(精氣)가 내 대에서 끝나지 않도록 후인을 찾아주시오.”
 “그들이라니요!”
 “구지삼환맹(九地三環盟)······. 나는 천지회(天地會)의 봉기당주(封旗堂主)! 크크크크!”
 이어지지 않는 말을 애써 토하던 노인은 곧 숨을 거두었다.
 채수헌은 매우 놀랐다.
 노인이 이야기한 두 개의 문파 중 하나는 수십 년 전부터 급격히 성장해 이제는 중원을 둘로 나눈 대문파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각각 구지삼환맹과 천상천(天上天)이라 불렀다.
 특히 다른 하나인 천지회는 소림(少林)이 청조의 핍박을 받아 불탄 후 후신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주장하는 한족의 무인들로 이루어졌으며 채수헌 이전의 기봉검문 문주도 가입했던 무인들의 결사대였다.
 이미 천지회는 멸망하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채수헌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같은 무림을 살아가는 무인으로서 노인의 최후는 자신의 최후가 될 수 있기도 한 것이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비정(非情)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채수헌은 노인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노인을 묻고 난 채수헌은 노인이 남겨준 옥갑이 궁금해졌다. 노인이 절기라 했으니 분명 범상치 않은 무공 비급일 터였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 일어나다니······.”
 옥갑을 열어보던 채수헌은 뒤로 연신 물러서며 경악을 뿌렸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옥갑 안에는 단 두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종이는 양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강호에서는 흔히 양피지(羊皮紙)라 부르는 것이었다. 무공을 적거나 오래도록 문서를 보관할 때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문제는 양피지가 아니었다.
 양피지 위에는 핏빛으로 빛나는 세 개의 글자가 눈을 뚫어버릴 듯 들어오고 있었다.
 
 『월인극(月刃戟)』
 
 채수헌이 놀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천하를 뒤엎는 무공은 중원천하에 비일비재했고 셀 수 없으리 만치 넓게 산재해 있었다. 그 중에는 강호에 알려진 무공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고 은밀하게 사라지거나 숨겨져 있는 무공도 있었다.
 월인극은 그런 점에서는 애매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월인극이란 무공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단 한 초식의 도법(刀法)이었는데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고인들이 기억하는 하나의 도법에 불과했다.
 그러나 월인극을 기억하는 무인들은 치를 떨었다.
 월인극을 기억하는 무인들은 열에 아홉은 월인극을 지닌 무인들의 방문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월인극을 꺾지 못했다.
 월인극의 무공을 지니고 나타난 무인들은 흔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도 그리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강호에 나타나면 일이 년 동안 강호를 횡협(橫俠)하다 사라지고는 했는데, 그 동안 단 한 번도 패배를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월인극의 후예 또한 무인들과 겨루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월인극을 몸에 지니고 나타났던 무인들. 그들은 월극령(月極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들은 대련을 마치고 사라지며 꼭 한 마디를 남겼다.
 
 ― 고맙소. 당신이 본 반월(半月)은 월인극이었소.
 
 월인극은 대낮에도 검법을 펼치면 하늘에 반월의 형상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극령의 방문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월인극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월인극은 더욱 유명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월인극의 후예는 무공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오로지 월인극의 성취를 알아보고자 강호에서 난다긴다하는 고수들을 찾아 대련을 하는 것 같았다. 월인극을 지닌 무인들과 겨루었던 모든 무인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인극을 고금 사대 무공의 하나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채수헌이 월인극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미 오래 전 기봉검문의 장문인 중 한 사람도 월인극과 겨루었고 처절한 패배에 검을 꺾었던 일이 있었으므로.
 
 “한 달의 여유를 주겠다.”
 “한 달!”
 “만약 한 달 동안 결과가 없다면 기봉검문은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아마 그 전에 전조(前兆)가 있을 것이지만.”
 “기봉검문에는 월인극이 없소!”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한다. 내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와라.”
 괴인은 나지막한 음소를 뿌리고 떠났다.
 육 척의 키에 불과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괴인이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은 채수헌의 착각이었다.
 괴인의 걸음걸이가 몸을 좌우로 흔들게 한 것이 아니라 괴인의 몸 때문이었다. 괴인의 몸은 너무나 옆으로 퍼져 있어 걸을 때마다 흔들려 보이는 것이었다.
 “저자가 누구죠?”
 갑자가 나타난 괴인이 궁금했던지 유삼걸(柳三桀)이 채수헌의 곁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유삼걸은 채수헌의 둘째 제자로 근래 광서무림에서 일혼유자(一魂流子)라는 이름을 얻기 시작한 후지기수였다.
 “반혼수라(反魂修羅) 유명(柳明)!”
 “그가 누구죠?”
 유삼걸이 나직하게 되물었다.
 채수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2
 
 
 긴 밤을 꼬박 새운 풀잎이 한 떨기 영롱한 구슬처럼 돋아난 이슬이 마르기도 전.
 아침해는 이미 오래 전에 천공에 높이 솟구쳐 밝은 빛을 뿌려내고 있었지만 눈가에 스치는 칙칙함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자욱한 안개.
 시야를 가리는 안개는 사람이 이 보 앞으로 다가와야 겨우 분간이 될 지경이었다.
 계림에서 발원(發源)하여 홍수하(紅水河)로 들어가는 검강(黔江)의 면적은 넓었고 아침마다 자욱한 안개를 뿌렸다. 사람들은 검강운무(黔江雲霧)라 불렀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의 불길이 땅거죽을 뒤집는다 해도 진시(辰時) 이전에는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인지 유주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해수병(咳嗽病)에 콜록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어디에선가 안개를 뚫고 미친 듯 들리는 말발굽소리가 있었다.
 안개는 마치 빈 공간에 울림을 만들어내듯 공명성(空冥聲)을 만들어 관도의 어느 방향에서 말이 달려오는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두두두두두―!
 거친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열두 필의 말이 빠르게 관도를 헤쳤다.
 모래와 자갈, 붉은 흙이 깔린 관도에서 한줌씩이나 되는 흙이 말발굽에 놀란 듯 자지러지는 몸짓으로 흐드러지게 튀어 올랐다.
 말 등에는 현(縣)의 자사(刺史)를 호위하는 관병으로 보이는 홍의군(紅衣軍)이 허리에 각기 한 자루씩의 장도를 달고 바삐 말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다.
 말의 입에서는 흰 거품이 뿜어져 나와 달리는 허공 중에 뿌려졌고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어쩔 수가 없군. 유주자사(柳州刺史) 유극영(柳克寧)이 민초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더니 졸개들도 별 수 없는 자들이로군.”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안개 사이로 몸을 드러냈다.
 돋보이지는 않으나 그런 대로 시선을 끌 수 있을 것 같은 용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가 잘생긴 미남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청년은 유난히 덩치가 컸다. 중원에 개미처럼 많은 사람들 중 그보다 큰 사람은 흔치 않을 것 같았다. 언뜻 보아도 팔 척에 이르는 큰 키였다.
 호목(虎目)에 두툼한 입은 제쳐두고라도 오뚝 선 코가 청년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나마도 송충이 같은 눈썹으로 인해 얼굴은 오로지 눈썹과 코만 달린 듯 보였다.
 그러나 청년은 외양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눈은 겁먹은 송아지 같아 순하고 사심(邪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우!”
 청년은 입과 코로 스며드는 안개가 거북했던지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거칠게 뿜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청년은 허리에 한 자루의 병기를 달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앞뒤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제 유주(柳州)에 들어온 건가?”
 청년은 습관인 듯 허리에 달린 병기에 달린 수실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수실은 검은색과 황색이 섞여 있었는데 광서성에서 검은색과 황색이 섞인 수실은 한 검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계림에 자리잡고 있는 기봉검문의 고명제자(高名弟子)를 뜻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기봉검문의 장문제자 중 한 사람인 위지경덕으로서 사부의 명을 받아 급히 유주의 외곽에 자리한 반가장(潘家莊)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스스스스······.
 멀리 동편 산허리를 쪼개고 붉은 양광이 고개를 내밀자 사방에서 금싸라기가 밀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감아들던 칙칙한 안개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서둘러야겠다. 모두 모였을 텐데······. 나만 늦었다고 또 꾸중을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
 청년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안개가 밀려나며 모든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과 오 리 남짓 희미하게 유주의 성곽이 보였고 여기저기 사람의 그림자도 보였다.
 
 유주.
 화남(華南)의 남단에 자리잡은 번성(繁城).
 사방이 수천 척의 산맥으로 가로막힌 근동 천여 리에서는 남녕(南寧)과 함께 가장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 또한 광서성의 중앙에 위치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고도(古都)이기도 했다.
 광서성은 북으로는 귀주성(貴州省)과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호남성과 광동성이 가로막고 있다.
 서쪽으로는 운남성의 밀림이 길게 펼쳐져 있어 오래도록 중원의 외곽으로 고립이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면이 모두 산맥으로 가로막혀 왕래가 빈번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알게 모르게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광서지방이었다.
 남으로는 남만국(南蠻國)과 마주하며 그나마 바다로 나갈 길도 광동성과 해남도에 막혀 있었다.
 오래도록 중원인들은 광서지방을 경시해왔다. 광서를 이루는 남녕, 유주, 계림에는 예로부터 중원인들이 괄시를 하는 장족(莊族)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주는 광서성에서도 유난히 한족에게 무시를 당하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장족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오죽하면 유주는 장도(莊都)라고도 불렸다.
 장족들의 도시라는 뜻이 내포된 비아냥거림이었다.
 중원의 한족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광서성 전체를 무시했다.
 너무 오지(奧地)이기도 했지만 밀림과 산맥으로 둘러싸인 광서성이 장강이나 황하가 흐르는 중원의 중심부에 비해서는 미개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중원무림에서 광서에서 자랐거나 광서에 자리한 문파의 제자라 하면 저만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원의 한족들이었다.
 광서에 사는 한족들은 그런 한족들의 눈을 늘 거북살스럽게 여겼다.
 기실, 광서는 날씨가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늘 상춘(常春)의 양광을 뿌렸고, 사시사철 바다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삼면이 바다라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사람의 솜털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불기 때문에 더없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특이나 광서성은 전란(戰亂)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명말(明末)에서부터 청초(淸初)에 이르기까지 근 사십여 년에 걸친 전쟁은 중원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나 중원 최남단에 자리한 광서성은 그리 큰 피해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청조가 중원의 주도권을 잡은 지 사십 년이 넘었으나 중원 전역이 모두 청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모든 중원의 땅이 청에 귀속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말의 무신들과 명 황실의 후예들은 중원의 변방으로 이동하며 항쟁을 계속했고, 청조의 황실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뒤쫓았다.
 하늘은 청조의 손을 잡아주는 듯했다. 명의 후신들은 점차 중주(中州)에서 쫓겨났고 대신 여진민족이 세운 청조는 명의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3
 
 
 턱!
 갑자기 어깨가 부딪치는 서슬에 위지경덕은 고개를 들었다.
 “이 치한!”
 눈가에서 불이 번뜩하고 스쳐 지나간 것은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리고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지경덕은 엉겁결에 얼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볼이 얼얼했다.
 아마도 깊은 생각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위지경덕은 놀라며 외침을 토했다.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너무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언제부터인지 위지경덕의 앞에는 허리에 손을 얹은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이십 세가 되지 않아 보이는데 추수처럼 맑은 눈에 뽀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붉은 입술과 정성껏 치장한 이모저모가 귀한 집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흑발과 등에 맨 한 자루의 청강검(靑剛劍)은 어딘지 모르게 단아하고 상큼한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몸에는 날렵한 홍색경장을 입었고 푸른색이 나는 피풍(被風)을 걸치고 있었다.
 소녀가 걸친 피륙이 화려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소녀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소녀는 갈매기 꼬리 같아 보이는 눈썹을 역팔자로 꼬며 짐짓 노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이것 참! 소저는 왜 지나가는 행인을 잡고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소이다.”
 “흥!”
 소녀는 날카로운 코방귀를 뿌렸다.
 그럴수록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은 위지경덕이었다. 아무리 경우가 없기로서니 지나가는 행인에게 다짜고짜 손찌검을 하고 치한으로 몰아붙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니할 말로 볼썽 사나운 꼴이 되고 말았다.
 “내가 치한이라니, 소저는 무슨 말을 하고 있소?”
 “몰라서 묻는 거냐?”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소.”
 위지경덕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위지경덕은 매우 지쳐 있는 상태였다.
 광서성 최남단의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문주의 긴한 심부름을 갔던 그는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밤을 도와 달려오는 중이었다.
 사흘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그나마 잠을 잤다고 한 날도 길가에 지어진 관제묘(關帝廟)에서 한두 시진 눈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길을 걸으며 그는 반은 잠이 든 상태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와중에 그는 지나가는 소녀와 어깨를 부딪치거나 했을 것이다.
 당연히 잘못은 서로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다짜고짜 위지경덕을 치한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흥!”
 “그만 둡시다. 소저, 난 바쁜 몸이요.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오.”
 위지경덕의 말은 사실이었다.
 위지경덕이 서둘러 십만대산을 떠난 것은 사부의 서찰 때문이었다.
 그가 십만대산의 노가장(盧家莊)에 도착하기도 전에 서찰은 도착해 있었다.
 노가장은 기봉검문의 장령제자 조연성(趙蓮聖)이 아내를 얻은 곳으로 근래 건강이 좋지 않은 조연성은 경치가 좋은 십만대산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조연성은 채수헌의 수석제자로서 곧 장문인의 자리를 넘겨받을 재목이었으나 이년 전 운남의 첨고산(尖高山)에 다녀온 이후로 몸이 급격히 나빠졌기에 요양을 하는 중이었다.
 기봉검문의 제자들 사이에는 장문인의 자리가 조연성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가 몸을 피폐하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취가 없을 거라는 소문이었다.
 위지경덕은 조연성에게 보내는 채수헌의 서찰을 전달하기 위해 출행(出行)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제, 어서 가보게.”
 조연성은 위지경덕이 숨쉴 사이도 없이 서둘러 재촉했다.
 기봉검문의 모든 제자는 유주의 반가장으로 모이라는 서찰이 지급(至急)으로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위지경덕은 사부의 명이라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가장은 기봉검문의 현 문주인 번쾌검신 채수헌의 사제인 반기의 장원이었다.
 채수헌이 전 제자를 기봉검문으로 부르지 않고 반가장으로 부른 것이 이상하기는 했으나 어찌 되었던 위지경덕은 서둘러 반가장으로 향해야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갑자기 나타난 네 개의 그림자가 위지경덕을 에워쌌다. 떠오르는 태양의 부서지는 편린을 받아 그들의 손에 들린 병기가 날카로워 보였다.
 위지경덕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한 대의 마차가 보이고 나타난 사 인은 마차에서 몰려나온 듯했다.
 한결같이 머리카락에 백설이 내린 듯 보이는 노파들이었다. 위지경덕은 입맛이 씁쓰레했다. 갑자기 관도에서 드잡이질을 하게 된 경위도 그랬고 무엇보다 마음이 급했다.
 “왜들 이러는 것이요?”
 “흥, 몰라서 묻는 것이냐? 감히 고명하신 아가씨에게 수작을 부리다니.”
 “헛 참!”
 이마에 점이 박힌 노파의 말을 들으며 위지경덕은 참으로 어이가 없어 입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사나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여인들과 말다툼이라니.
 노파들은 거리를 좁혔다.
 “말로 하시오. 내가 소저에게 뭘 잘못했다는 말이요?”
 위지경덕의 우렁찬 음성에 노파들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노파들의 시선이 소녀에게 향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언뜻 소녀의 얼굴에 홍조가 스쳤다.
 한참동안 우물거리는 소녀는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노파들의 얼굴에 다시 노기가 어렸다. 노파들의 얼굴에 잠시 흉흉한 기운이 어렸다.
 “감히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대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로다.”
 어느새 다가들었는지 동서남북 사상(四象)의 방위를 둘러싸고 있던 노파들이 급히 병기를 쳐들었다. 한결같이 예리하게 보이는 장검이었다.
 노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 척 장검이 위지경덕의 목줄을 노렸다.
 “더 이상 핍박을 하면 나도 참지 않겠소.”
 위지경덕도 노한 음성을 터뜨렸다.
 무인들 대다수가 그렇듯이 위지경덕도 습관적으로 자신의 병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했다. 비록 여인들이기는 했지만 뿌려내는 기도가 은근히 어깨를 짓눌러 오는 느낌이 만만치 않았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연놈! 감히 아가씨에게 침을 흘려.”
 “끼끼끼! 그래도 사내라고 눈은 있는 모양이구나.”
 노파들은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키득거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무인들은 자존심이 강했고 검을 뽑으면 거두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노파들이라 해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노파들이 호승심(好勝心)이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더구나 나는 사문의 절학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처지가 아닌가?’
 위지경덕은 가슴이 복잡해졌다.
 사실 그가 장문의 제자라 하지만 기봉검문의 무공을 완전히 습득한 것은 아니었다.
 십오 년 동안 기봉검문의 밥을 먹었지만 무공에 입문한 것은 불과 오 년이 넘지 않았다.
 다섯 살에 기봉검문에 들었으나 십 년이 넘은 후에야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신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오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봉검문의 장문인은 당금의 장문인 채수헌이 아니었다.
 십오 년 전부터 오 년 전까지 기봉검문을 이끈 기봉문의 장문인 칠검야우(七劍夜雨) 당헌기(唐憲氣)는 유난히 뿌리를 밝히는 자로 태생이 불분명한 위지경덕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당연히 위지경덕의 무공 입문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채수헌이 무공을 가르칠 것을 수 차례 종용했으나 고집으로 똘똘 뭉쳐진 당헌기는 채수헌의 의견을 묵살했다.
 결국 채수헌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뒤에야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나이에 비해 위지경덕의 무공수위는 일천할 수밖에 없었다.
 “정 이런 식으로 몰아세운다면 나도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위지경덕이 눈에 불을 켜고 고함을 터뜨리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노파들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어렸다. 아마도 지나가는 행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청조가 들어서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아니, 청조가 들어서고 명조가 무너지는 사십 년 전부터였을 것이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 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아 온갖 살인이 일어나고 토비(土匪)가 날뛰어 광서지방은 전란은 피했다고 하나 다른 지방과 다를 바가 없이 흉흉했다.
 광서지방은 토비들이 일으키는 혈겁이 자주 일어나는 통에 관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노파들도 그런 사항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키키키, 어린놈이 허풍이 세구나.”
 “나는 어린놈이 아니다. 나는 기봉검문의 제자 위지경덕이라는 것을 알아두어라.”
 위지경덕은 한소리 외침을 뿌리며 자신의 허리에서 삼 척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무식한 놈이 힘 자랑 할 일만 남았구나.”
 노파 중 한 명이 뇌까렸다.
 “하하하, 비록 내가 무명소졸이기는 하나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 나를 업신여긴 대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위지경덕은 속에서 타오르는 울화를 참을 수가 없었기에 한소리 호탕한 분노의 음성을 뿜어내었다.
 사실 위지경덕이 분노의 음성을 뿌렸으나 천성적으로 마음이 유약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라 누구에게나 화를 내거나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 야단을 맞아도 대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만으로도 간혹 자신에게 질책을 하는 위지경덕이었다.
 그것은 채수헌의 오랜 감화(感化) 때문이기도 했다.
 “너를 내 제자로 거느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기봉검문은 비록 중원무림에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제자로 삼겠다. 다만 기봉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언행을 하지 말아라. 기봉검문은 그 규율이 엄격해 사부의 명이 있어 너에게 무공을 가르치지는 못하나 때가 되면 너에게 무공을 전수할 것이다.”
 채수헌은 위지경덕을 자신의 제자로 맞아들이고도 사부의 명으로 무공을 가르치지 못하자 늘 가슴 아파했다.
 차차창!
 금속의 마찰소리가 들리며 검신이 드러났다. 위지경덕은 삼척장검의 검병(劍柄)을 움켜쥐고 다가서는 노파들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노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아우들! 어서 놈의 주리를 틀고 뼈를 발라버리세.”
 아마도 노파 중 이마에 팥알만한 점이 난 노파가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오호호, 우리 정강사파(靖江四婆)가 종이호랑이로 보이느냐? 어리석은 애송이 같으니라고.”
 “이런!”
 한 노파가 오물거리는 입을 열고 호통을 내질렀다. 노파의 목소리를 들은 위지경덕의 목이 자라목처럼 심하게 움츠러들었다. 강호에 나갔던 사형들을 통해 익히 들은 바가 있는 노파들이라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위지경덕은 처음부터 노파들과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흥! 노파들의 실력이 그토록 뛰어난지 보도록 하겠소.”
 노파들의 오만과 불손, 무례함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위지경덕은 장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가슴 앞에 세웠다.
 기봉검문의 제자들이 익힌 검법의 묘용은 상대의 선공(先攻)이 있은 후에야 발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가슴 앞에 세운 것이다.
 사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면서도 마음이 심상하지는 않은 위지경덕이었다.
 ‘하필이면 정강사파였다니, 길(吉)하지 않다.’
 정강사파는 원래 정강왕부(靖江王府)를 지키는 네 명의 시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정강왕부는 이미 오래 전 명나라 창시부터 역사를 지닌 무파였다.
 중원을 일통한 주원장(朱元璋)은 광서지방이 너무 멀어 통치하기가 힘들자 조카 주수겸(朱守謙)을 번왕(藩王)으로 임명하고 계림에 정강왕부를 지었다.
 정강왕부를 세운 주수겸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십 리에 못 미치는 성곽을 두르고 두 개의 성문을 세웠다. 명이 존재하는 한 정강왕부의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명이 무너졌다. 새로운 황조, 청조(淸朝)가 들어선 것이다.
 명이 망하자 정강왕부는 무림의 세력으로 변해버렸는데 계림에서는 가장 영향력을 지닌 무파였다. 계림에서 시오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봉검문은 감히 장강부에는 비견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불길하군.’
 위지경덕은 손에 든 장검을 손아귀가 아플 정도로 힘차게 움켜잡으며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노파들의 움직임을 보며 위지경덕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토대로 네 명의 노파를 유추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노파들은 네 명의 쌍둥이로 정강부의 소부주 일지산매(一支算梅) 주계덕(朱溪德)을 보호하는 노파들이라 했다.
 당금 정강부주이며, 무림에서는 삼군(三君) 중 일군으로 불리는 임강노격( 剛瑙擊) 주강륜(朱鋼輪)에게는 단 한 명의 금지옥엽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주계덕이었다. 주계덕을 보호하는 자들이 바로 늙은 노파들인 것이다.
 네 명의 노파는 한결같이 검을 사용하며 암기와 암수에도 능하다고 알려져 있어 광서무림에서는 유명 사자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검의 검환(劍環)에 매어진 수실로써 신분을 표시하였는데 검은색을 맨 큰언니가 강적(姜籍), 청색을 맨 노파가 둘째인 강청(姜靑)이었다. 붉은색은 셋째인 강경(姜京)이었고, 막내가 흰색을 매고 강윤(姜潤)이라 불렸다.
 정강부는 중원무림에서 이름을 떨친 지 이미 사백 년이 넘은 무파로 한때는 왕부(王府)로서, 명조가 망하고 청조가 들어서는 이제는 무림의 일파로써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정강부의 정강사파, 그들이 비록 정강부의 최고 고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실력은 능히 광서무림을 흔들고도 남았다. 그들의 실력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굳이 병기를 겨누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위지경덕 정도의 무인은 그녀에게 감히 검을 겨눌 상황이 아닌 것이다.
 사실 병기를 가슴에 세우고는 있지만 위지경덕으로서는 사 인 중 단 한 명도 상대하지 못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라 마음이 심히 두려웠다.
 “이놈!”
 한소리 날카로운 음성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자루의 검이 위지경덕의 아랫배를 쓸어왔다.
 강적의 손에 들린 검이었는데 검이 이르기도 전에 찬바람이 에일 듯 다가왔다.
 위지경덕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검을 향해 사문의 검법인 월운검법(月雲劍法) 일 초식을 전개했다. 천운적월(天雲赤月)이라 부르는 초식으로 기봉검문이 지닌 두 개의 검법 중 수비를 위주로 하여 공격하는 검법이었다.
 따 ― 앙!
 경쾌한 금속성이 들리며 두 개의 병기가 부딪쳤다.
 위지경덕은 눈가에 가는 웃음을 띄었다. 생각보다 강적의 검공(劍功)이 강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
 위지경덕이 뿌린 검력에 부딪친 강적의 검이 퉁겨지며 허공으로 밀려 올라갔다. 그것도 잠시뿐, 회수되는 것으로 믿었던 검이 다시 반원을 그리며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으헛!”
 한 소리 놀람의 외침을 토한 위지경덕은 급히 몸을 좌로 틀며 월운검법의 제 이 초식 불운권월(佛雲卷月)을 뿌렸다. 위지경덕의 몸과 장검이 하나가 되어 허공에 무지개를 그렸다.
 매우 적절한 초식이었지만 위지경덕의 초식은 완전하지 못했다.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후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강적의 검예(劍藝)가 놀라웠다.
 강적의 검은 허공에 뱀의 혀처럼 보이는 검의 그림자를 무수히 만들어내는 듯 하더니 위지경덕의 왼쪽 어깨를 내려치며 몇 방울의 피를 뿌렸다.
 “어헝!”
 분노한 위지경덕이 몸을 앞으로 뻗으며 불운탐월(佛雲探月)과 운개견월(雲開甄月) 두 개의 초식을 연거푸 뿌리며 앞으로 내달았다.
 비록 화후는 부족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천력(天力)과 화가 극도로 치솟아 있는 상태라 위지경덕의 위세는 자못 위력이 있었다.
 “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죽여주마. 월몽영(月夢影)!”
 강적의 검이 여섯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위지경덕의 턱밑에서 가슴 앞에 이르는 인영혈(人迎穴)과 수돌혈(水突穴), 결분혈(缺盆穴)을 찔러왔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기사혈(氣舍穴)이 열리고, 기호혈(氣戶穴)과 유중혈(乳中穴)이 마구 요동을 일으켰다.
 검기가 다가오기도 전에 가슴 앞의 육 개 혈이 마구 요동을 치는지라 위지경덕은 산란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손발이 어지러웠다.
 ‘소문은 사실이로구나. 이 노파의 검이 이토록 신묘하니 감히 대적하기 어렵구나.’
 위지경덕은 급히 손을 좌우로 휘저으며 내공을 끌어올려 가슴에 모았다. 나름대로 반탄지기를 얻기 위해서였고 가슴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위지경덕은 정신을 바싹 차리며 자신의 검을 끌어당겨 가슴을 보호함과 동시 좌수를 흔들어 크게 반원을 그렸다.
 캉!
 둔탁한 병기의 충돌이 있자 위지경덕은 연거푸 이 보를 물러났다. 손이 은근히 저려오고 어깨가 시큰거렸다. 장강사파 중의 큰언니인 강적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다행히 병기의 덕을 보는군.’
 위지경덕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근히 어깨를 움직여 보았다. 일반적으로 철로 만드는 검이나 도와 달리 동을 섞은 묵강으로 만들어진 장검은 충격을 흡수하는 힘도 놀라웠다.
 만약 일반적인 검이나 도로 강적의 검공을 받았다면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봉검문은 일반의 철기점에서 병기를 만들지 않고 직접 제련을 했는데 강철로 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묵강과 동을 섞어 검을 제련했다.
 묵강과 동을 섞어 만든 검은 투박하고 무겁기는 했으나 공격을 막을 때는 유리했다.
 “호! 제법 한소리 칠만한 놈이로구나. 나의 비연회류검(飛燕回流劍) 일 초를 막아내다니.”
 강적이 노기를 뿌렸다.
 사실 강적은 처음에 월몽영의 검초를 뿌렸으나 위지경덕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검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는지라 검을 비연회류검으로 바꾸어 악랄한 살초를 전개했던 것이다.
 “어린놈이 만만치 않구나.”
 갑자기 네 방위를 포위한 채 구경을 하던 노파들 중 하나, 둘째인 강청이 바람같이 몸을 뒤집으며 전권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찔러왔다.
 강청의 몸은 순식간에 위지경덕의 등뒤로 다가왔다.
 “더러운 노파들 같으니라고. 암습을 하려는가?”
 위지경덕은 미처 몸의 중심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라 등뒤에서 들려오는 파공성을 듣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이기에는 용이하지 않았다.
 더구나 눈앞에는 강적이 수치를 참지 못해 검을 부들부들 떨며 다가서고 있는 중이었다. 강적은 애송이가 자신의 검을 막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심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이곳에 뼈를 묻게 된다.’
 위지경덕은 결코 심상치가 않다고 생각했다. 앞에는 강적의 검이 있고, 몸을 돌리자니 등뒤에는 어느새 파공성이 등의 견갑골(肩甲骨)로 밀려들었다.
 “이거야말로 수치를 모르는 계집들이로구나.”
 위지경덕은 한소리 분노를 터뜨리며 장검을 가늠하여 뒤로 휘둘렀다.
 깡!
 결코 가볍지 않은 금속성이 울리며 강청이 뒤로 퉁겨나갈 때 위지경덕은 손을 통해 몸으로 전해지는 반탄력에 밀려 연속으로 앞으로 세 걸음 걸어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강적이 검을 들어 가슴을 찢어발길 듯 무섭게 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막을 수가 없다.’
 위지경덕은 눈을 부릅떴다.
 
 소녀는 눈을 부릅뜨고 위지경덕을 바라보았다. 위지경덕은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뭐가 잘못되었지?’
 그녀, 정강부의 금지옥엽인 일지산매 주계덕이 바로 그녀였다. 주계덕은 너무도 빠르게 일이 전개되고 있었는지라 미처 노파들을 말릴 사이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위지경덕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위지경덕이 너무나 피곤해 앞을 보지 않고 얼굴을 떨군 채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제대로 걸었다면 부딪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주계덕 자신도 깊은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엉겁결에 부딪치고 보니 평상시 자신의 버릇처럼 욕설이 나오고 손으로 사내의 뺨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정강부에서 늘 귀엽게 자라고 온갖 시중을 받으며 자란 그녀의 입장에서 사내의 몸이 자신의 가슴에 닿았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이건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주계덕은 상황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정강사파의 화급한 성격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장강사파가 주계덕을 기른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늘 급한 성격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는 자신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정강부와 친분이 있는 기봉검문의 제자라 하니 문제는 딱하게 된 것이다.
 “아아! 어쩌면 좋아.”
 주계덕은 눈을 부릅뜨고 한참 격돌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주계덕의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떠졌다. 노파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식은 이미 가볍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정신없이 앞으로 네 걸음 걸어나가던 위지경덕은 결코 가볍지 않은 한 줄기 강맹한 경기가 가슴 밑의 단중(丹中)으로 스며듬을 느끼자 급히 몸을 비틀며 검을 회수하여 반원을 그림으로써 가슴을 보호했다.
 찌이이익―!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위지경덕의 가슴 아래 늑골에서 피가 튀었다.
 “어흐흑!”
 위지경덕의 두툼한 입술이 열리며 신음소리가 들리고 곧 몸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손에 들린 장검마저 무거워 보였다.
 “아주 뼈를 발라 죽여주마. 애송이놈!”
 강청이 검을 들고 등뒤로 달려들었다.
 눈에서는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일어났다. 자신의 검이 젊은 애송이에게 퉁겨졌다는 사실이 못내 이가 갈리는 모양이었다.
 “정말 잔인한 노파들이로군.”
 파파팟!
 어디선가 분노한 듯한 음성이 들리고 날카로운 경기가 장내로 밀려들었다.
 “누구냐? 암습을 하는 자가.”
 검을 직선으로 뻗어 위지경덕의 등으로 찔러가던 강청은 급히 몸을 비틀었다.
 계속해서 찔러 가면 위지경덕의 명문혈에 검을 박을 수 있거나 허리 또는 어깨 중 하나를 자를 수 있겠지만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위해를 완벽하게 피하기에는 무리였다.
 강청은 급히 몸을 비틀며 날아드는 경기를 향해 개산대월(開山大鉞)의 초식으로 내쳤다.
 깡!
 허공에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땅바닥으로 두 개의 물체가 떨어졌다. 급히 몸을 세운 강청은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찍으며 뒤로 이 보 물러섰다.
 신속한 진퇴(進退)를 아는 강청인지라 상대가 자신에게 무리를 주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피를 볼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팔꿈치가 저리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 울림이 왔다.
 강청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땅바닥에는 두 개의 금빛 나는 물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둘로 갈라진 나한전(羅漢錢)이었다.
 나한전은 일반 무인들이 동문(銅紋)을 암기화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극강한 내공이 실리면 가능하겠지만 혈도를 맞추기 이전에는 위력적인 암기가 될 수 없었다.
 상대가 나한전을 날렸다는 것은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기 위한 것이기 쉬웠다.
 “어떤 놈······?”
 눈을 들어 나한전을 날린 자를 찾던 강청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이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이십여 보 전방에 한 명의 청년이 빙그레 웃고있었다.
 “너무하지 않소. 상대는 하나인데 네 명이나 나서서 공격하다니, 더구나 백주(白晝) 대낮에.”
 청년은 매우 고아한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머리에는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전신에는 대나무가 그려진 백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철선(鐵扇)을 들고 서 있었는데 뒷짐을 진 상태였다. 허리에는 장식처럼 보이는 패검(佩劍)이 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사내의 얼굴이 유난히 희어 책상물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창백하기조차 한 얼굴에는 눈썹이 짙었고 눈이 컸다.
 사내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갸름하면서 높은 코를 지녔고 입술은 붉어 유약해 보였으나 허허롭게 웃는 모습이 감히 경시를 거부했다.
 이제 십칠, 십팔 세나 되었을까?
 청년의 뒤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따르고 있었는데 한 명은 오 척의 단구(短軀)였다. 자세히 보면 그의 등이 불쑥 솟아올라 곱사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중년인에서 초로인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나이는 추측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였다.
 “누구이기에 감히 정강부의 일에 간섭한단 말이냐?”
 “하하하. 내 조금 전부터 지켜보았는데 너무 불공평해서 공평한 방법으로 상대를 하고자 했소. 아무래도 저 소협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그렇구나.”
 아마도 앞의 말은 강청에게 하는 말이고 물음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중년인에게 던진 말 같았다. 당연하게도 곱사등의 중년인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드잡이질이 멈추어졌다. 그러나 이미 위지경덕은 가슴 아래 유근혈에 엄중하지는 않아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는지라 삼 척 장검을 땅에 짚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감히 어린놈이 세상 모르고 감 놔라 대추 놔라 쓸데없는 일에 개입하다니, 목숨이 열 개인 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강청이 일갈을 터뜨리고 나머지 세 명의 노파가 경각심으로 눈을 빛낼 때, 백의청년과 두 명의 중년인은 정강사파가 둘러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굳이 개입하고자 한단 말인가?”
 “아니오!”
 강적이 나타난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눈치 채고 물었다.
 어딘지 저어하는 눈빛과 의혹이 깃든 눈치였다. 사내는 느물스러울 정도로 진한 웃음을 뿌리며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갑자기 변한 강적의 말투 때문인지 정강사파는 모두 나타난 청년에 눈을 고정시켰다.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사 대 사가 되었으니 공평하지 않겠소. 항상 공평해야 하는 법이오.”
 “잘 되었다. 건방진 놈들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겠다. 쳐라.”
 강적이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정강사파가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찔러갔다.
 “숙부들, 막으세요.”
 “알았다.”
 청년은 급히 위지경덕의 몸을 잡아 앞으로 당기며 두 명의 중년인과 더불어 삼재의 방향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위지경덕은 삼재진(三才陣)의 중앙에 들게 되었다.
 위지경덕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개되는 상황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중년인은 청년에게 숙부로 불렸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명령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중년인은 비록 중년의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늙은이가 분명할 것이었다.
 그들은 각기 특이한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키가 칠 척에 달하는 자는 자신의 키에 어울리게 월아산(月牙 )을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중앙을 분리하거나 접을 수 있도록 만들어 등에 메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곱사등이는 한 쌍의 호수구(護手鉤)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차차창―!
 “커흑!”
 “우리의 합벽을 퉁겨내는 무위(武威)라는 건가?”
 이 인의 병기, 월아산과 두 자루의 호수구가 허공에 휘둘러지자 네 명의 노파가 비명을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강적의 어깨는 언제 베어졌는지 붉게 젖어 있었고, 막내 강윤은 팔뚝이 옷과 함께 뭉턱 베어져 있었다.
 “막내야!”
 강적이 강윤에게 달려갔다.
 강윤의 잘려진 팔뚝에서는 피가 울컥거리며 뿜어졌다. 호흡이 있을 때마다 심장의 박동으로 피가 주기적으로 뿜어지며 강윤의 얼굴이 심하게 탈색되었다.
 눈에 흰자위가 떠오르자 강적은 만사 제치고 강윤의 팔뚝을 잡아 지혈을 하고 가슴에 있는 두 곳의 혈도를 점혈해 피가 흐르지 않도록 했다.
 분수처럼 뿜어 나오지는 않았으나 피가 흘러 강윤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으드드득!”
 강적이 이를 갈았다. 분노에 치를 떨던 강적의 눈에 아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경은 아예 주저앉아 울컥거리는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강경이 울컥거리며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올라왔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정강사파는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강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혹시, 천지이랑(天地二郞)이 아니신지?”
 물음을 던진 사람은 뜻밖에도 멀찍이 떨어져 드잡이질을 멀끔히 쳐다보던 주계덕이었다.
 “하하하하. 아직도 강호에 눈이 멀지 않은 아이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로다.”
 곱사등이는 주계덕의 말을 자르며 자신이 먼저 앞질러버렸다. 강적을 비롯한 정강사파의 눈에 가벼운 두려움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아직 이들이 살아 있었다니. 그렇다면 저 어린놈은 그곳의 소주인이라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강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백의청년을 주시했다. 백의청년은 빙그레 웃는 낯이었으나 실상은 오래 전부터 무감각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는지 위지경덕의 눈에도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곳······.”
 “시끄럽다. 주둥아리나 닥쳐라.”
 곱사등이가 한소리 외치자 정강사파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다가온 소강상태, 서로들 말을 삼가는 것이 역력했다.
 주계덕이 다가갔다.
 “선배들께서는 누구시죠?”
 “네년이 그 잘난 주강륜이란 놈의 하나뿐인 딸년이란 말이냐?”
 “지금 주강륜이라는 분께 놈이라 하셨는가요?”
 “그렇다. 계집이 아비를 닮아 고집이 세고 편협하구나.”
 주계덕의 눈이 파랗게 빛을 뿜었다.
 짐작컨데 곱사등 노인의 무공은 매우 강할 것이다. 은근히 이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 회갑(回甲)이 된 아버지 보고 이놈 저놈 할 수 있는 무인은 거의 없었다.
 주계덕은 곱사등 노인이 싸잡아서 욕을 하자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변화를 일으켰다.
 “이런 건방진.”
 “잠깐.”
 발작하듯 달려들려는 주계덕을 만류한 자는 강적이었다.
 ‘왜?’
 주계덕의 표정은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내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강적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강적의 얼굴이 주계덕의 귀를 향해 돌려져있고 간혹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양이 틀림없이 귓속말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돌아간다.”
 주계덕은 갑작스럽게 결정을 내렸다. 곱사등이와 다른 중년인이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주계덕은 바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왠지 위지경덕의 모습이 눈앞에 서렸기 때문이다. 주계덕은 위지경덕을 바라보았다.
 “계집. 언젠가는 피의 대가를 피로 갚을 것이다.”
 위지경덕의 입에서 한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주계덕은 굳이 대답하거나 살기를 띄우지 않았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띄운 주계덕은 몸을 돌려 자신의 마차가 놓여진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마다 내상을 입은 정강사파도 달려가 마차를 몰 준비를 했다.
 주계덕은 마차 속으로 들어갔고, 정강사파 중 대체로 타격을 심하게 입은 것으로 보이는 강청과 강윤은 마차 속으로 들어갔고 강적과 강경이 어자석(御字席)에 앉았다.
 “이랴!”
 강적의 외침이 일자 네 마리의 말은 투레질을 토하고 달려갔고, 주계덕이 창가로 얼굴을 돌려 위지경덕을 보았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2장 암천퇴(暗天退)
 
 
 1
 
 
 사 인이 풀밭에 자리한 돌 위에 앉아 있었다. 돌은 원래부터 관도 옆 풀숲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마치 미리 준비했던 것 모양으로 넓은 반석이었다.
 돌 위에 앉은 네 명은 당연히 위지경덕과 백의청년, 그리고 천지이랑이라는 중년인들이었다.
 “구명지은(求命至恩)에 감사드리오. 시생은 기봉검문의 일대제자 위지경덕이라 하오.”
 한숨을 돌린 위지경덕이 손을 모아 백의청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강호는 동도라 했으니 괘념치 마시오. 시생은 유가락(柳歌樂)이라 하오. 강호동도들은 그저 철선랑(鐵扇朗)이라 부른다오.”
 유가락은 무심한 척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는 말로 자신의 가문을 숨겼다.
 ‘비밀이 있나?’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위지경덕은 굳이 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유가락에서 풍겨지는 모든 면모가 자신을 해하리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호. 본래 유공(柳公)이셨군요.”
 “공은 무슨 공입니까! 강호를 떠도는 잡인일 뿐이거늘.”
 위지경덕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견문이 넓지는 못했으나 들어본 이름도 아니었고 외호도 생소했다. 다만 외호가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두 분 선배들께도 감사를 드리오이다.”
 곱사등과 칠 척의 키를 가진 중년인들을 향해 위지경덕이 허리를 숙였다. 진중한 예의였다.
 “허허허, 다행이오. 상처가 그만하기를······. 한 이틀정도 지나면 상처가 모두 아물 것이오.”
 천지이랑은 소탈하게 웃었다.
 이미 천지이랑은 위지덕경의 상처를 돌보고 금창약(金瘡藥)과 내상약을 주어 조치를 취한 후였다. 유난히 곱사등 노인의 손이 빨랐다.
 “혹시 선배들께서는?”
 위지경덕은 조금 전 드잡이질을 할 때, 정강부의 계집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계집은 두 명의 중년인들을 향해 천지이랑이라 불렀던 것이다.
 “허허허. 그렇다네! 아마 이십 년 전쯤에는 그렇게 불렸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군.”
 “그게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위지경덕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지경덕은 천지이랑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천지이랑은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 무명만큼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팔십 년 전 처음 하남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의형제라 했다. 한 명은 준수하기가 그지없어 옥면랑(玉面郞)이라 불려졌고, 한 노인은 곱사등이라 굴절랑(屈折郞)이라 불렸다.
 천지이랑이 이름을 얻은 것은 당시 소림의 제자로 간악하게 마공을 익히던 금강동주(金剛洞主) 현불(賢佛)을 단 일수로 죽인 뒤부터였다.
 현불은 불가에서 금기로 여기는 한 가지의 음공을 익히기 위해 나이가 어린 소녀들을 잡아 피를 빨아 마셨다.
 천지이랑은 우연히 숭산 밑을 지나다 현불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현불을 백이십여 초만에 머리를 깨부수고 두 팔과 다리를 잘라 죽인 것이다.
 “천지이랑이 소림의 현불을 죽였다.”
 소림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소림 달마동주(達磨洞主) 현인대사(賢忍大師)를 비롯한 이십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 내려왔으나 천지이랑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장문인 백현대사(百顯大師)가 산을 내려왔고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현불의 만행이 드러나며 사태는 일단락 되고 말았다.
 “싸웠으면 누가 이겼을까?”
 “그야 당연히 소림장문 백현대사가 이겼겠지. 소림장문이라면 당금 무림의 최고가 아닌가?”
 사람들은 후에 수군거렸다.
 “무슨 소리야? 현인대사는 소림에서는 장문인의 무공보다 달마동주와 금강동주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잖아. 아마도 싸웠다면 천지이랑이 소림 장문방장을 이겼을 수도 있어.”
 “그럴지도 모르지.”
 그후로 천지이랑은 기이한 행각을 일삼기 시작했다.
 정의의 탈을 쓰고 마를 행하는 자들을 잡아 죽였으며 반드시 죄상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래서인지 천지이랑은 정파를 추종하는 무인이기는 했으나 정파에서는 그다지 칭송을 받지 못했다.
 다만 누구도 그들에게 드러내고 불만을 터뜨리지 못했다. 그들의 무위는 놀라운 바가 있어 누구도 그들에게 감히 병기를 겨누지는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중원인들의 추종을 받는 하나의 문파에 몸을 의탁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들은 불과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왕성한 강호 활동을 했었다. 그들이 홀연히 사라졌지만 그들이 왜 사라졌는지 모든 것은 비밀에 가려 있었다.
 경악할 일이었고 천하인들이 기절하도록 놀랐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어느 고인의 하인이 되어 무림행보를 멈추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얼굴이······.”
 “하하하!”
 위지경덕의 궁금증이 무엇인지 깨달은 곱사등이, 굴절랑 한세충(韓世沖)이 높은 음색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얼굴 말인가? 우리는 팔십이 넘어서면서부터 다시 검은머리가 나기 시작했지. 더구나 얼굴마저도 다시 젊어지기에 이르렀다네. 물론 이유는 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노 선배.”
 위지경덕은 감히 천지이랑 앞에서 경거망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공이 무서워서도 아니었고 그들이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었다. 위지경덕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위지 소협!”
 “소협이라니 당치않습니다.”
 갑자기 굴절랑이 부른 호칭에 위지경덕은 당혹스러웠다. 천지이랑이 자신을 그리 부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협사(俠士)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위지경덕은 굴절랑을 바라보았다.
 “소협은 선천적으로 좋은 몸을 타고난 것 같아 보이네. 그러나 기봉검문의 검은 자네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물론 극성으로 익히면 병기를 탓할 필요가 없겠지만 역시 어울리는 무공을 익혀야 하네.”
 툭!
 하나의 가는 두루마리가 굴절랑의 몸에서 뽑혀져 위지경덕의 무릎 앞에 떨어졌다.
 “그건 물론 검법은 아니지만 도움은 줄 걸세. 대부(大斧)로 펼치는 다섯 개의 부법(斧法)과 하나의 내공심법이 있으니 부지런히 익히면 많은 성취가 있을 것이네. 특히 부법은 선천적인 힘이 강한 무인이 펼치는 것이라 소협이 지닌 것으로 보이는 선천지력과 맥이 통하니 열심히 익히게나.”
 “그런데 이걸 왜?”
 “그건 내 마음이야. 단 누구에게도 이것을 익힌다는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되네. 설사 소협이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나도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리고 자구(字句)를 모두 외우면 반드시 없애버리게.”
 할말을 다했다는 듯 천지이랑이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가락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저에게 주시는 이유로는······?”
 굴절랑은 몸을 일으키려다 눈을 들어 위지경덕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웃음이 그의 눈가에 번졌다.
 “인연이기 때문일세.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아니 곧 만나게 될 걸세.”
 “받을 수 없습니다.”
 위지경덕은 두루마리를 도로 내밀었다. 자신의 생각에 어긋났는지 굴절랑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위지경덕의 눈을 바라보다 빙그레 웃었다.
 굴절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할 수 없지.”
 굴절랑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무공이 적힌 두루마리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옥면랑이 몸을 일으켰다.
 천지이랑이 몸을 일으키자 유가락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선배님!”
 위지경덕이 불렀으나 천지이랑은 빙긋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가락이 휘파람을 불자 세 마리의 말이 달려왔다.
 유가락과 천지이랑은 서둘러 말에 올랐다.
 “자······ 잠깐!”
 위지경덕은 갑자기 급한 생각이 들었다.
 “핫!”
 “이랴!”
 두두두두두······.
 “선배님!”
 위지경덕이 외쳐 불렀으나 세 명은 곧 말의 배를 걷어차고 바람처럼 관도를 달려 사라져갔다.
 위지경덕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진 관도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걷힌 관도에서는 먼지만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가 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군.”
 위지경덕은 마치 한바탕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튼 도움을 받았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충분히 보은을 하면 될 거야.”
 위지경덕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생각지도 않던 정강부와의 드잡이질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뜻하지 않던 자들의 도움은 자신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위지경덕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드득! 정강부, 언젠가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정강사파를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계집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지경덕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힘도 미약했지만 위지경덕의 사문인 기봉검문으로서도 정강부에게는 대들 힘이 없었다. 어차피 무림은 강한 자가 지배하는 양육강식(養育强食)의 생리 아래 놓여 있었다.
 “그나저나 정강부가 기봉검문을 건드리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위지경덕은 멀리 사라져간 말발굽 뒤에 자욱하게 가라앉는 모래먼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강호의 은원(恩怨)은 물과 같아서 언제든지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힘이 약한 무파는 힘이 강한 무파에게 늘 핍박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정강부가 크게 활동을 하지는 않는 문파였지만 그 동안 은밀하게 광서무림을 억압하는 행태로 보아서는 기봉검문에 검을 들이대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에 위지경덕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나저나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에게 왜 그토록 친절을 보이는지 모르겠군.’
 위지경덕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에서 자신의 절기는 사문의 제자 외에는 전수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라는 사실을 위지경덕도 알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문의 절기를 보여주거나 타인에게 전수하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사문을 가지고 있는 제자는 타 문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법이 아니던가? 기봉검문에도 검법은 있었다.
 더욱이 위지경덕은 천지이랑이나 유가락을 만난 적도 없었다. 처음 만난 위지경덕에게 무보(武譜)를 준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그들이 위지경덕에 특별한 목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설사 그들이 천하를 뒤덮고 평지에 바람을 일으키는 절학을 준다해도 나는 기봉검문의 제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봉검문은 비록 작은 검문이라고는 하나 나름대로 규율이 엄격했고 기봉검문의 검법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위지경덕은 한 번도 사문의 법도를 어긴 적이 없었다. 설사 그것이 아무리 작다해도.
 “어서 가야겠다. 너무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위지경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강적의 검에 상한 어깨가 불편하기는 했으나 걸음을 옮기는 데에는 그리 어려움이 없어 위지경덕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올랐고 자욱하게 깔려 있던 안개는 흩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왜 호의를 무시하는 거죠?”
 유가락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가락의 물음을 받은 천지이랑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기는 했지만 이윽고 빙그레 웃었다.
 굴절랑은 딴전을 피우려는 듯 발로 땅바닥을 벅벅 긁었다. 그것이 유가락의 눈썹을 찡그리게 했다.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거란다. 아마도 위지경덕은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 심성이 곧은 것 같아. 그는 사문에 죄가 될까 우리가 준 부법을 익히지 않는 것 같고.”
 천지이랑 중 키가 큰 노인, 물론 얼굴은 중년인이지만 그들은 백 살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옥면랑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굴절랑 한세충은 목을 벅벅 긁어 대답을 회피했다.
 유가락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이 영락없는 문사의 모습이거나 여인의 가녀림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가 분명한 건가요?”
 “물론이고 말고. 우리 천지이랑은 십오 년 동안 광서성을 뒤졌다. 실수할 리가 없다.”
 유가락은 고개를 들고 굴절랑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겠어요.”
 “그건 믿어도 좋을 것 같다. 기봉검문주 채수헌은 무공이 뛰어나지는 않아도 인면수심(人面獸心)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위지경덕을 구했다면 틀림이 없을 테니.”
 “난 믿지 못합니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그의 가슴에 표식이 있다는 것을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니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일이다.”
 유가락의 말에 옥면랑은 입맛을 다셨다. 그로서도 유가락의 말뜻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유가락의 지휘하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유가락의 결정에 콩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그들이었다. 그들은 의형제이기는 했지만 대형인 유가락의 할아버지에게서 유가락을 철저하게 보호하라는 말 외에는 달리 들은 것이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군.”
 한세충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의 눈이 한세충의 눈을 따라 돌아갔다. 그들의 눈이 모인 곳은 관도 위였다.
 과연 위지경덕이 급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팔 척에 이르는 우람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이 유가락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모두는 한참동안 멀어져 가는 위지경덕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우리도 움직여야지.”
 옥면랑 철군영이 입을 열어서야 그들은 풀숲에서 몸을 드러냈다.
 
 
 2
 
 
 너무도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위지경덕은 산길로 접어들자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나는 경공이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위지경덕은 자신이 경공에서는 누구보다도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서툰 것이 아니라 내공이 정밀하지 못해 속도를 낼 수 없다는 말이 옳았다. 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운기를 하고 토납(吐納)에 시간을 할애했지만 급격하게 내공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 열다섯이 넘어 익히기 시작한 무공인지라 대문파의 무인들이 어릴 적부터 익히는 무공과는 달랐다.
 무공은 몸이 완전하게 성숙되기 전에 익혀야 했다. 그래야만 기초가 잡혀 상승무공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무공이 턱없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꾸준한 노력이 있어 위지경덕은 자신의 몸에서 뿜어지는 신력과 더불어 나름대로 누구에게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의 고수들에게는 턱없이 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위지경덕과 같이 무도의 길에 늦게 입문하게 되면 단전이 굳고 골격이 굳어 쉽사리 무공을 익히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채수헌도 그러한 사정을 알았다.
 늦기는 했으나 자신이 구해 기른 제자였기에 늦었지만 전심으로 무공을 전수했다. 그래서 위지경덕의 성취는 제법 빠르다 할 수 있었다.
 위지경덕은 범인이 지니지 못한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뛰어난 신력이었다.
 채수헌에게는 일곱 명의 직전제자가 있었다.
 그 중 위지경덕이 가장 몸이 컸고 힘도 가장 뛰어났다. 비록 무공 입문이 늦었지만 세기(細技)만 보완하면 능히 신력으로 내공의 일부를 상쇄하리라 믿는 채수헌은 정성스레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있었다.
 
 반가장은 저물어 가는 어둠에 공룡처럼 자태를 드러냈다.
 반가장은 유주의 북단 유강(柳江)을 끼고 자리한 곳으로 유주에서는 말로 달려 반 시진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 멀리서 보면 벌판에 누각이 서 있는 듯 보이는 반가장은 무려 오천 평의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장내의 무사만도 오십 명에 이르는 반가장은 십이 대째 유주에 뿌리를 내린 터라 부근에서는 가장 큰 장원이기도 했다.
 술시(戌時) 무렵.
 어두움이 안개처럼 내리기 시작하는 해질녘이었다. 어슴푸레하게 장원이 보이자 위지경덕은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사부님께서 도착하라고 한 것보다 하루는 늦은 것 같은데. 정강부와의 말썽만 없었다면 적어도 두 시진 이상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벌판을 가로질러 달리며 위지경덕은 바싹바싹 타오르는 입술을 축였다.
 평소 같으면 사부는 반드시 어떤 이유인지 알리고 달려 오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둘러 오라 했으니 입술이 탈 수밖에 없었다.
 위지경덕은 순식간에 반가장의 높은 담에 이르렀고 곧 담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다 와 가는 것 같다!”
 한달음에 장원의 담을 따라 반을 돌았다.
 담은 길었고 둥근 원을 그리며 구렁이의 꼬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
 반가장의 장원을 둘러싼 벽에 난 하나뿐인 철대문으로 달려가던 위지경덕은 급히 몸을 뒹굴었다. 가늠할 수 없는 경력이 허리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구르며 위지경덕은 급히 주먹을 질러 달려드는 자의 열린 가슴을 가격했다. 상대는 기습을 했었는지라 가슴은 열려있었다.
 “어멋!”
 주먹이 바람처럼 밀려들어가자 암습을 가한 자의 입에서 한소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사매의 목소리가 아닌가?”
 위지경덕은 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며 몸을 다시 굴렸다. 엉겁결에 취한 행동이었기에 뻗어나가던 진력을 완벽하게 거둘 수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몸을 굴림으로써 뻗어나가던 진력의 삼분의 이가 거두어졌고 급히 진력을 거두었기에 다행하게도 내공이 흩어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검공을 주로 삼는 기봉검문이기는 하지만 위지경덕의 권격(拳擊)은 남달리 눈부신 바가 있었다. 아마도 거대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컹!
 완벽하지는 못했는지 손에 느껴지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위지경덕의 손등에 부딪친 것은 여인의 가슴이었다.
 “미······미안하다.”
 위지경덕은 급히 몸을 세우며 어설프게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소녀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을 쥐고 있었고 급히 몸을 틀은 듯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미, 미안!”
 위지경덕은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소녀가 다가왔다.
 소녀는 이제 열일곱, 열여덟을 넘지 않았는데 상큼한 아미를 지니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소녀는 긴 머리채를 흔들며 가슴의 옷깃을 털었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오뚝한 소녀의 코가 양광을 받아 유난히 돋보였다. 소녀의 손에 들려 있던 청강검은 이미 소녀의 허리에 달린 검갑으로 들어가 검의 날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손을 뻗었던 침입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소녀가 위지경덕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소녀가 다가올수록 위지경덕의 얼굴은 더욱 숙여졌다.
 소녀는 볼에 패인 볼우물을 드러내며 맑게 웃었다.
 “사형이시로군요. 깜짝 놀랐어요.”
 나타난 소녀는 위지경덕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의 나이는 당금 열일곱이며, 반가장의 금지옥엽으로 제법 이름을 얻고 있는 소녀였다. 광서무림에서는 반가수국(潘嘉水菊)이라 불리는 반운청(潘雲淸)이었다.
 그녀를 반가수국이라 부르는 것은 광서무림인들이 지어준 것으로 반 씨 집안에 아름다운 수국(水菊)이라는 뜻이었다. 반가장이 삼면이 물에 둘러싸인 벌판 속에 있기에 그런 이름이 지어졌고 그만큼 그녀는 미인이기도 했다.
 “으음! 미안하다.”
 “미안할 것 없어요. 어차피 난 사형의 여자가 될 건데요.”
 반운청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사형제지간이기도 했거니와 반기가 오래도록 그녀를 기봉검문으로 보내 검학(劍學)을 익히도록 하며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지경덕이 열두 살이 되던 해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반운청은 노골적으로 위지경덕을 자신의 남편이 될 거라고 호언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 한 명, 반가장의 장주 반기만은 예외였다.
 
 그녀가 열두 살 때, 그녀는 부친의 명을 받아 삼 년째 기봉검문에 들어와 채수헌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채수헌이 장문인이 아니었기는 하나 사부를 능가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나이가 삼십이 넘었는지라 제자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기봉검문의 후원에 있는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는 무려 이십 장이나 되었는데 물의 깊이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우물물을 길어 마시려다가 추락했고 무려 네 시진 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물 속에서 기력이 다한 그녀는 최후의 목소리로 외쳤고 다행히 위지경덕이 달려왔다. 위지경덕은 밧줄을 내리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 두 시진만에 반운청을 업고 우물을 올라왔다.
 당시 기봉검문에는 늘 상주하는 삼사십 명의 제자 중 열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계림현(桂林縣)에서 검회(劍會)가 있어 당시의 장문인 당헌기를 따라 모두 사문을 나가 있었기에 남아 있던 위지경덕이 소리를 듣고 달려가 구하게 되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전부터 반운청은 순박한 위지경덕을 따랐고 좋아했었다.
 기봉검문에 남았던 제자들은 모두 장원의 이곳저곳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순찰을 돌거나 연무장에 모여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위지경덕만이 장내의 청소를 하기 위해 비를 들고 이곳저곳의 낙엽을 쓸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하게 위지경덕이 구하게 되어 있는 일이었다.
 “사형께서 나를 구하느라 내 몸을 마구 주물렀거든요. 그날부터 나는 사형의 여자가 되리라 생각했어요.”
 당시 일곱 살밖에 먹지 않았던 반운청은 정신을 차리고 맹랑하게 중얼거렸었다.
 위지경덕은 반운청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웬일로 사매가 문 밖에 나와 있었던 거지?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갑자기 기습한 건 또 무슨 일이야?”
 “어제 우리 반가장에 습격이 있었어요.”
 “습격?”
 반운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지경덕은 궁금이 도를 넘어서자 입술을 혀로 축이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시무룩한 반운청의 말에 위지경덕이 다그쳐 물었으나 반운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위지경덕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난 자세한 건 잘 몰라요. 다만 어제 습격을 받아 아버지의 삼 제자 장유삼(張戮衫)을 비롯한 후원무사 네 명이 죽고, 장원무사는 여섯이나 죽었어요. 총 열 명이나 죽었거든요.”
 위지경덕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반운청이 그에게 말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지 반운청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 보자.”
 위지경덕은 서둘러 반가장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형!”
 “왜?”
 “그냥 가세요. 아니, 어서 검문으로 돌아가세요.”
 위지경덕은 의아한 눈으로 반운청을 바라보았다. 반운청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니다. 사부님께서 반가장으로 오라 하셨다.”
 위지경덕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반운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허둥대는 걸음걸이로 위지경덕을 따르며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말했다.
 그녀는 손을 맞잡았고 입술마저 가늘게 떨었다.
 “아니에요. 어서 가세요.”
 “이상하구나. 사부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데도······! 너는 내가 반가장에 오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요.”
 위지경덕이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반가장의 대문을 들어섰다. 말리기는 했으나 위지경덕의 발걸음을 제지하지 못한 반운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후!”
 반운청의 입에서 긴 한숨이 미어졌다.
 
 위지경덕이 반가장에 들어서자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진 표정을 지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눈에 비추인 것은 죽어야 했을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표정과 흡사했다.
 위지경덕은 장원으로 들어서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장원을 둘러싼 외벽에는 반가장의 무인들이 횃불을 밝히고 서 있어 경계가 여간 삼엄하지 않았다.
 설사 날개가 달린 야조(夜鳥)라 해도 반가장의 담을 넘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모닥불이 밝혀져 있었고 높은 담 위에도 무인들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가장의 대전 앞에는 여섯 명의 무인들이 서 있었다. 한결같이 반가장의 수뇌부들이었다.
 머리에 옥태관(玉兌冠)을 쓰고 화려한 옥색장포를 입은 오순의 초로인이 기봉검문의 장로인 반기로 반가장의 주인이었고, 그의 뒤에 검을 맨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이 반기의 아들이며 반운청의 오빠인 반가화(潘佳華)였다.
 반가화는 반기의 무공뿐만 아니라 채수헌의 무공까지 물려받은 기봉검문의 일대 제자 중 한 명으로 채수헌의 일곱 제자 중 셋째 제자이기도 했다.
 그밖에 몇 명의 무인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모두 반기의 제자들로서 항렬이 위지경덕과 같은 사형제지간이 되는 젊은 무인들이었다.
 어쩐 일인지 위지경덕을 부른 채수헌은 보이지 않았다.
 “사숙님! 경덕이 사숙을 뵈옵니다.”
 “왔느냐? 늦었구나?”
 “오는 중에 사소한 말다툼이 있어 지체되었습니다.”
 “말다툼?”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반기의 눈에 어린 것은 경악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크게 뜨다 어깨와 가슴 언저리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말다툼이 심했던 모양이로구나.”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는 위지경덕이었다. 위지경덕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급한 마음에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위지경덕은 반기가 눈을 돌려 바라보는 곳에 눈을 던졌다. 평상시 연무(鍊武)의 장소로 쓰여지는 넓은 면적의 공터에 열 명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시신은 이미 피부의 색이 변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하루 전 죽었다는 반가장의 식솔들이 분명했다.
 위지경덕은 조심스럽게 시체들 앞으로 다가갔다.
 시체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을 보는 듯 누운 자가 있는가 하면 엎어져 있는 자도 있었다. 옆구리가 보이는 자들도 있었고 상체가 벗겨진 자도 있었다.
 “그는 단 일수의 권격(拳擊)에 가슴이 박살났다.”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체를 바라보던 위지경덕은 눈을 들었다.
 반기가 말하는 시체는 발가벗겨진 시체였는데 가슴이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권격에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측의 늑골이 모두 부서져 버렸군요. 이 정도라면 부서진 늑골이 내장을 파고들어 폐나 간에 손상을 입혔을 겁니다.”
 “제대로 보았다.”
 위지경덕이 눈을 들었다. 반기의 얼굴이 이지러져 있었고 뒤를 따르는 제자들도 모두 이를 악물고 있었다.
 “모두 네놈 때문이다.”
 “예, 무슨?”
 반가화의 느닷없는 말 때문에 위지경덕은 흠칫하는 몸 떨림을 만들며 얼굴을 세웠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무인들도 눈을 빛냈다. 반가화가 주먹을 쥐고 다가왔다. 눈에 이는 살기로 보아 위지경덕을 죽이고 말리라는 의지가 짙게 스며 나오고 있었다.
 반가화의 주위에 선 세 명의 무인들은 모두 반기의 제자들로서 기봉검문의 본산제자는 아니나 엄연한 위지경덕의 사형들이었다.
 “시끄럽다.”
 반기가 호통을 지르자 반가화와 세 명의 무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살벌한 분위기는 지속되고 있었다.
 위지경덕은 마치 바람 강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경덕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찌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가 있겠느냐?”
 반기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깔려 있었다.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위지경덕이었다. 부지런히 달려왔는데 반가장의 혈사(血事)가 자신 때문이라니.
 위지경덕은 너무도 황당한 말을 들었는지라 가슴속에서 작은 분노가 피어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사형!”
 “사형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구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지 이야기나 들읍시다. 사형!”
 위지경덕은 분노의 소리를 토했다. 누구에게도 핍박받는 것을 싫어하는 무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지경덕은 십 년이 넘도록 긴 세월 동안 핍박을 받았다.
 전대 문주 당헌기가 뱉은 '근본(根本)도 모르는 놈'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사실 그 동안 위지경덕은 사형제지간에도 괄시를 당하고 지냈었다.
 십 년 동안 무공을 익히지 못했던 시절에는 사형제들 누구에게나 두드려 맞아야 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매를 맞고 싶지 않을 뿐더러 채수헌은 위지경덕에게 누구도 과거처럼 몰매를 가하려 하거나 업신여기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빌어먹을 놈!”
 “이거 해도 너무하지 않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핍박하는 거요?”
 너무도 어이없는 일에 위지경덕은 분노를 터뜨렸다.
 “시끄럽다, 이놈!”
 철썩!
 반가화의 얼굴이 돌아갔다.
 사형제 간의 언쟁을 듣다못한 반기가 반가화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반가화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위지경덕은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편협하기는 하지만 평상시의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반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반기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사숙! 제가 그만 문중의 어른이 계신 것을 깜빡한 듯합니다.”
 위지경덕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급히 손을 모았다. 동시에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채수헌은 늘 그에게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분함에 소리를 치고 일이 벌어졌지만 엄연히 반기는 사문의 어른이었고 위지경덕이 존경하는 무인이었다. 그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은 반기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반가화만 하더라도 그의 사형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사질은 일어나라. 모두들 주변경계를 강화하도록 하고 사질은 나를 따르거라.”
 반기는 휘휘 걸음을 옮겨 대전으로 들어갔다.
 “건방진 놈!”
 반가화는 한소리 씹어뱉듯 독기를 뿌린 후 대문 방향으로 향했다. 세 명의 무인들도 반가화의 뒤를 따랐다. 위지경덕은 멍한 얼굴이 되어 몰려가는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형!”
 반운청이 다가와 위지경덕의 손을 잡았다. 왠지 반운청의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매, 무슨 일이지?”
 위지경덕이 반운청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물음을 던진 위지경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운청은 얼굴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흑!”
 반운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열을 터뜨리며 어둑해지는 후원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참동안을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위지경덕은 걸음을 옮겨 대전으로 반기를 따라 들어갔다.
 
 
 3
 
 
 대전에는 반기와 위지경덕 단둘이 앉아 있었다.
 “사부님은 보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오전 계림으로 돌아가셨다.”
 “예?”
 어이없는 말에 위지경덕은 놀랐다.
 사부는 자신을 반가장으로 불렀다. 무언지 모르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자신을 부른 사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기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물론이다. 그러나 너에게 말해줄 수는 없구나.”
 위지경덕은 궁금증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물어보기에는 반기의 얼굴이 너무도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입을 열려던 반기는 때때로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고 그때마다 얼굴 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반기였다. 반기는 늘 웃는 얼굴이었고 누구에게도 사려가 깊어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간혹 가다 자신의 고집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지만 눈에 뜨일 정도 또한 아니었다.
 위지경덕은 성격이 모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반기를 좋아했다. 앞으로 혼인할 반운청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채수헌은 늘 반기가 자신과 함께 위지경덕을 구했다고 말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너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누구에게 암습을 당했느냐?”
 “암습!”
 위지경덕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향촉 아래 검붉게 말라붙은 피가 보였다. 천지이랑이 발라준 금창약으로 인해 가슴에 통증은 없었지만 옷을 갈아입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정강부의 사람들과 다투었을 뿐입니다.”
 “정강부?”
 “그렇습니다.”
 “그들까지 너를 핍박했단 말이더냐?”
 “아닙니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과히 괘념치 마십시오.”
 위지경덕은 손을 내저었다.
 평상시와 다른 호들갑스러운 위지경덕의 모습에 반기의 눈가에 알 수 없는 빛이 흐르고 지나갔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고소하다는 표정 같아 보였다.
 그러나 위지경덕은 너무나 놀라웠고 머리가 실타래처럼 엉켜드는지라 알아채지 못했다.
 막연하게 손을 내저으며 위지경덕은 새로운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까지라고······?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온 자들이 정강부란 말인가? 아니면 정강부와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인가? 반가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군.’
 위지경덕은 갑자기 머리가 깨져나갈 것 같은 전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내뱉은 반기의 음성에서 결코 적지 않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너를 내놓으라고 들이닥친 자들이 있었다.”
 반기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위지경덕이 물음을 던지자마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위지경덕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모았다. 결코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저를 내놓으라니요?”
 “누구인지 모른다. 한결같이 얼굴에 복면을 쓴 자들이었다. 우리가 거부하자 그들은 제자 열 명을 순식간에 도륙해버렸다.”
 “그런 일이······?”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 않은 사실이다. 그들은 떠나면서 말했다. 다시 오늘까지 너를 내놓지 않으면 열 명의 제자를 더 죽이겠다고 말이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무공이 한없이 강하다는 것과 너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이다. 나조차도 단 일 검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으니까.”
 “그럴 리가······.”
 위지경덕은 살이 떨리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끓는 죽처럼 솟구쳐 올랐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두려움은 본능적으로 다가왔다.
 반기는 기봉검문에서 채수헌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닌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단 일 수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너는 오늘밤 이곳을 떠나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그들은 너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곳을 떠나라고요?”
 “그렇다. 계림의 기봉검문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그것이 장문사형의 부탁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광서를 떠나도록 해라. 이건 사숙으로서의 충고다.”
 “사숙님!”
 너무도 어이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위지경덕은 한소리 외침을 뿌렸다. 그러나 반기의 얼굴은 담담했다. 이미 오래 전에 위지경덕의 반응을 예측한 듯했다.
 위지경덕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자신도 모르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모두라니요?”
 “네가 없다면 우리는 약간의 희생으로 만족할 것이다. 듣는 너로서는 비정하게 느껴질 테지만 네가 있다면 부득이 너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럴 수가?”
 “사실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라.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아니, 광서 땅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아라. 이왕이면 무림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명심하거라.”
 “안됩니다. 사부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위지경덕은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엉겁결에 반기가 몸을 일으키며 위지경덕의 팔을 잡았다.
 만류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는 표현이 적절한 동작이었다.
 “안 된다. 너를 위해 내가 최후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 놓았다. 말을 준비했으니 어서 피하도록 해라.”
 쾅!
 반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전의 왼쪽,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난 창문이 부서져 날아가며 두 개의 인영이 튀어 들어왔다. 희미한 향촉의 불빛밖에 없었지만 놀라 돌아보다 나타난 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신에 현의경장을 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이 저기에 있다.”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며 두 개의 인형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두 개의 인영이 바닥을 발로 찍어 몸을 퉁기는 순간, 대전의 오른쪽에 난 창으로 하나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위지경덕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세 사람이 보여준 한 수의 도약만으로도 지닌 무공의 정도를 가늠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신법으로 보아 위지경덕 정도는 상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헛! 당신들은 누구야?”
 몸을 움직여 날아드는 검은 그림자를 피하는 사이 반기가 손을 휘둘러 타오르는 향촉을 끄는 것이 보였다. 반기는 몸을 날려 향촉을 끄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피해야 한다.’
 취리리릭―!
 어둠 속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이는 바람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찌이익―!
 “커흑!”
 위지경덕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했다.
 오른쪽 옆구리가 시원한 느낌이 들며 날카로운 풀잎에 베어진 듯 아려왔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상처를 입은 듯했다.
 엉겁결에 옆구리에 손을 대자 끈적거리는 느낌이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이들은 어둠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내공을 지닌 듯하다. 이러다가는 정말 이곳에서 뼈를 묻고 말겠다.’
 위지경덕은 자신이 그들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상대는 빨랐다. 바람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에 느끼지 못하던 변화였다. 그러나 자신이 다가오는 바람소리를 느끼는 것이 무공을 익힌 후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촉박했고 몸을 날려 경풍을 피하기에 너무 바빴다.
 “탓!”
 위지경덕은 대전의 문이 있는 곳을 가늠하고 뛰었다.
 반가장은 한두 번 드나들었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대략 짐작으로 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삑 ― 와지지직!
 문이 열리고 위지경덕의 몸이 퉁겨져 나갔다. 그러나 곧 문이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리며 세 개의 인영이 퉁기듯 문을 부수며 뒤따라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이곳 반가장은 겁난에 휩싸이고 말 것 같다.’
 위지경덕은 미친 듯 몸을 날려 연무장 방향으로 달렸다.
 연무장 끝에는 마장(馬場)이 있었고, 반기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바람같이 달리는 말 한 마리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저자들은 사람이 아니다.’
 몸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던 위지경덕은 목을 넘어오는 비명을 삼켰다. 자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도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대단한 자들이다.”
 위지경덕을 따라 몸을 날리는 세 개의 인영은 발끝으로 땅을 찍을 때마다 삼 장씩은 몸을 날리는 것 같았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중이고 따라오는 자들도 몸을 움직이는 자들이라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형!”
 두두두두두······.
 어디선가 혼신의 힘으로 외치는 반운청의 목소리가 들리고 위지경덕의 좌측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눈에 보이는 한 마리 말은 눈보다 희었다.
 슈가가가가각······ 가각!
 세 개의 인영이 일제히 검을 휘둘러 그어왔다. 세 개의 인영과 위지경덕의 거리는 불과 이 척이 남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면 허리가 동강날 순간이었다.
 말의 꼬리가 눈앞에 있었다.
 “이판사판이다.”
 위지경덕은 말의 꼬리를 잡으며 몸을 앞으로 잡아챘다. 말의 꼬리가 심하게 움츠려들고 위지경덕은 말 등으로 올라갔다. 한바퀴 재주를 넘은 위지경덕은 말을 올라탈 수 있었다.
 위지경덕의 발이 말의 머리를 향한 모습이 되었다. 자연히 위지경덕의 얼굴이 말 엉덩이 부분에 닿게 되었다.
 “이런, 어서 달려라.”
 위지경덕은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멈추어라 이놈! 목을 놓고 가라.”
 말은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으로 덤벼드는 사람의 기척에 놀란 듯했다.
 다가오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 달라붙는 작은 금속성의 철립(鐵笠)과 얼굴에 뒤집어 쓴 복면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장검이 들려 있었다
 슈―아앙!
 검에서 이는 바람소리가 눈앞을 갈랐다. 말은 미친 듯 달렸다. 말고삐를 잡을 수가 없는지라 위지경덕은 말 등에 배와 얼굴을 붙이고 엎드렸다.
 멀리 발을 구르는 반운청의 얼굴이 들어왔다.
 “사매! 언젠가는 꼭 다시 오겠다.”
 위지경덕은 손으로 말의 엉덩이를 죽어라 내리치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반운청의 몸이 미친 듯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말은 빨랐다. 순식간에 장외문(莊外門)과 대전 사이에 놓여있는 담을 타고 넘어 미친 듯 질주했다. 세 명의 그림자는 곧 멀어지기 시작했다.
 말과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벌어졌을 때, 말은 반가장의 대문을 통과했다.
 반가장의 대문을 통과하자 몸을 버둥거려 말의 머리 쪽으로 몸을 옮긴 위지경덕은 말고삐를 잡으며 하체로 말의 배를 조였다. 말은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기마술을 배워놓지 않았다면 오늘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위지경덕은 미친 듯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3장 비가행(悲歌行)
 
 
 1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다.”
 사내의 목소리는 냉랭하여 늦가을에 일찍 얼어버린 살얼음 같았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깨어질 것 같은 냉랭함이었다.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솜털이 물구나무를 섰다.
 “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소?”
 “하기는 했지. 그러나 필요 이상이야.”
 “뭐를 말하는 것이요. 당신들이 의도한 대로 위지경덕은 도주했고 당신들의 무서움을 알았을 것 아니오?”
 반기의 음성은 심히 떨리고 있었다.
 반가장의 대전은 흔히 석전(石殿)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 광서무림에 이름을 날렸던 반가장의 설립자인 운중무객(雲中武客) 반무규(潘毋奎)가 직접 썼다고 알려진 대전의 현판 때문이었다.
 반기로 거슬러 칠대 조상인 반무규는 대전을 짓고 자신이 직접 현판을 써서 달았는데 '석전'이라고 썼다. 그 뒤로부터 대전은 석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백 년 전 광서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반가장의 조상 반무규가 대전이 반가장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대사를 결정하는 곳이므로 돌처럼 무겁게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뜻으로 석전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지는 건물이었다.
 “뭐가 실수라는 말이요?”
 “먼저 난 네놈이 향촉을 껐다는 것을 안다. 비록 빠른 솜씨였지만 내 눈을 속이지 못한다.”
 “으······!”
 반기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반기를 추궁하는 목소리는 잘 되었어야 중년으로 들렸으나 반기는 감히 반말을 사용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이 그들 복면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기는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눈가의 잔주름이 한 순간에 수십 개나 자글거리며 그려진 것 같았다.
 “놈의 몸 어느 곳에 한 군데 상처를 내놓아야 우리가 추적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그것을 방해하다니.”
 “아니오. 나는 완벽하게 나와 당신들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였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십오 년 전의 일이 모두 사라지거나 혹여 나중에 위지가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으!”
 반기는 목을 움츠렸다.
 
 “아버지가 암중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들의 목소리는 기어다니는 개미의 발자국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조심스러웠으나 어둠 속에 몸을 숙이고 있는 반운청을 속이지는 못했다.
 ‘십오 년 전의 일이라니. 아버지가 개입된 일인가?’
 대전의 창 밑 화단의 덩굴장미 틈에 몸을 숨긴 반운청의 모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반운청은 이미 반 시진 전부터 대전 창가 장미덩굴 밑에 숨어 대전에서 희미하게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십오 년 전도 당신들이 시켜서 한 일일뿐, 내가 어떤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흥, 우리에게도 시치미를 뗄 생각은 말아라. 우리가 위험해지면 너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 아······ 알았소.”
 “또 한 가지는 네놈의 딸년이다. 계획대로라면 놈은 마장까지 달려가며 적어도 두 군데 이상 심한 상처를 입었어야 옳았다. 그런데 네놈의 딸년이 말을 끌고 오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오. 내 딸이 말을 끌고 왔다는 것도 분명하지는 않소.”
 “시끄럽다. 만약 놈의 행방을 찾기 어려워진다면 네 딸년부터 죽일 것이다.”
 사내들의 음성은 성난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간간이 들리는 반기의 목소리는 이미 비굴할 대로 비굴해져 있었고 죽음이 두려워 떠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음모가 있었다니.’
 반운청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형을 죽이는 음모에 아버지도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반운청은 장미덩굴을 빠져 나오자 미친 듯 자신의 처소가 있는 후원으로 달려갔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아버지와 그들이 십오 년 전부터 한 패거리였다니.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어.’
 눈물을 뿌리며 후원으로 달려가는 반운청의 귓가에 사내들과 반기가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지경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위지경덕은 덩치가 크지만 마음이 여린 아이요. 그 아이는 반드시 계림의 기봉검문으로 가게 될 것이요. 자신의 사부를 만나려 할 테니 그때 처치해도 늦지 않을 게요.”
 “좋아. 그곳에서 처치하면 되겠군.”
 “단, 부탁이 있소.”
 “뭐냐?”
 “다른 것은 몰라도 기봉검문은 건드리지 말아주시오. 나도 기봉검문의 제자요. 단 내가 직접 장문대형을 설득해 위지경덕을 사문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겠소이다.”
 “장문인의 자리를 노리는 것은 아닌가?”
 “아······ 아니오.”
 반기는 허둥거렸다.
 “좋아.”
 바람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들리던 사내들과 반기의 목소리는 바람소리에 점차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멈추었을 때, 대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반가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몸을 뺀 위지경덕은 미친 듯 말을 몰았다.
 날이 밝자 황토(黃 )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황토에서 말을 달려 하루면 기봉검문이 있는 계림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위지경덕은 마음속에 약간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좋은 말이다.’
 말은 의외로 주력(走力)이 좋아 쉬지 않고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내심 반운청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위지경덕이었다.
 “너도 좀 쉬어야겠지.”
 위지경덕은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무리 명마라 하더라도 네 시진 가까이 달렸기 때문에 매우 지쳐 있었다.
 명대의 군문(軍門)에서도 전투마(戰鬪馬)는 두 시진 이상 달리지 않는 것이 규율로 정해져 있었다.
 말 등에서는 뿌연 안개 같은 김이 올랐고 목덜미에서는 땀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요기는 해야겠지. 마침 반점(飯店)이 보이니 허기를 달래야겠다.”
 위지경덕의 눈에 초막이 들어왔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초입, 언덕 위에 세워진 조그만 반점이었다. 바람에 따라 '반(飯)'이라 쓰여진 백색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반점은 그리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두 칸 정도로 보이는 지붕은 풀로 엮었고 반원 일 장을 넘어 보이지 않는 좁은 마당에는 서너 개의 평상(平床)이 놓여 있었다.
 가지가 살아 있는 울타리가 보였다. 대나무를 베어 세운 울타리는 비록 새로 세운 지 얼마 되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틈이 많아 내부가 모두 들여다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내부를 살피던 위지경덕은 아침이라 반점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갔다.
 이른 아침이었고 밤새 말을 달렸기 때문에 시장기가 현기증처럼 밀려왔다. 말을 내려 고삐를 끌고 대나무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가 무작정 평상에 엉덩이를 디밀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평상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음식을 먹는 자가 있었다.
 수염을 염소꼬리처럼 기른 초로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그려진 태극건을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몸에는 풍성해 보이는 문사복을 걸치고 태극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의 깃털이 세 개나 꽂혀 있었다.
 초로의 문사 앞에는 이제 갓 열다섯 살이 되지 않아 보이는 계집아이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입을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는 했으되 제법 빼어난 미모가 있어 보였다. 애티가 흘러 미래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명의 남자가 그녀로 인해 상사병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전신에 동자(童子)가 입는 옷처럼 짧은 옷을 입은지라 일견 귀엽게도 보였다.
 ‘흡!’
 초로의 노인과 갑자기 눈이 마주쳤는지라 위지경덕은 침이 넘어가도록 놀랐다. 그제야 자신의 옷이 여기저기 피가 뿌려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갑자기 초로인이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위지경덕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초로인이 앉은 방향으로 향해진 등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말은 어떻게 할까요?”
 반점의 남자 주인처럼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주인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본 위지경덕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어디로 보나 허름한 반점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사내 같았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가랑이가 그랬고 미처 다듬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그랬다.
 특히 가슴이 반이나 열어 젖혀져 있었는지라 그가 조금 전까지 마누라를 껴안고 뒹굴다 황급히 문을 열고 나섰다는 것을 알게 했다.
 “말에게 여물을 줄 수가 있겠소?”
 “물론이지요. 저의 반점 뒤꼍에 마침 소를 기르는 외양간이 이 있으니 그곳에서 두 마리의 소와 함께 여물을 먹이도록 하지요.”
 “고맙소!”
 위
 위위지경덕은 품을 뒤져 동문(銅紋) 두 냥을 꺼내 던져주었다. 허리를 숙여 보인 주인은 말을 끌고 대나무 문을 열고 나서 뒤꼍으로 사라졌다.
 머리에서 채 잠이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여주인이 다가와 목에 걸린 수건을 끌러내 평상을 닦았다. 평상을 닦으며 여주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위지경덕은 난감했다. 이토록 초라한 반점은 처음이었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등뒤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혜혜야! 그 계족난삽탕(鷄足難澁湯)은 맛이 어떠냐?”
 “아주 좋아요. 이런 곳에 이토록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참으로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적절하게 알려주는군.’
 소녀의 목소리는 위지경덕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위지경덕은 가볍게 얼굴을 들고 주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십대를 넘어 보이는 주인 여자는 묘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눈으로 위지경덕을 바라보았다.
 위지경덕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봉검문이 있는 계림과 유주는 말을 달려 불과 이틀의 거리였고 같은 광서의 마을이기에 음식은 비슷했다.
 계족난삽탕은 닭의 다리만 모아 칼등으로 마구 두들겨 부서진 벼를 빼어내고 껍질과 살점으로 죽을 끓이는 음식으로 광서지방 어디에나 흔한 음식이었다.
 음식이 익은 뒤 마지막에는 그릇에 담은 뒤 싱싱한 야채를 뿌리는 것으로 근력을 돋구고 시장기를 죽이는 데는 따라가지 못할 음식이었다.
 주인 여자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위지경덕의 몸에 묻어있는 붉은 선혈 때문인 것 같았다.
 “좋소. 계족난삽탕을 주시오.”
 “술은?”
 “술은 필요 없소.”
 “알겠습니다.”
 여인이 물러가려 하자 위지경덕은 품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 여섯 닢을 꺼내어 주인 여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음식값으로는 충분한 돈이었다.
 음식을 시킨 위지경덕은 한동안 멍한 정신으로 평상을 내려다 보았다. 대나무로 만든 평상의 조그만 틈으로 바닥을 기는 개미들이 보였다.
 어제부터 아침까지의 정신없이 진행되었던 일들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유주 근처로 다가섰던 일, 느닷없는 여인의 목소리에 이어진 정강부와의 혈투, 가슴의 기문혈과 어깨에 검을 날리던 강적의 모습과 오기가 넘치고 정강사파를 마음대로 움직이던 앙칼지지만 아름답던 미모의 소녀가 언뜻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난 삼 인의 모습에 이르러서는 위지경덕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죽어라 달려간 반가장에 나타난 괴인들의 모습. 무한가지(無限可知)로 떠오르는 상념이 위지경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위지경덕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지워나갔다.
 “퓨우우우우―.”
 비분강개한 위지경덕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숨소리는 땅이 꺼질 것 같았다.
 “옷!”
 한숨을 토하던 위지경덕은 급히 입을 오므렸다. 한숨이 완전히 뿜어지기 전이라 가슴이 답답해지기는 했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걸까?’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위지경덕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근래 계속되는 비사(泌事)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부는 강호경험이 없는 자신을 십만대산으로 보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급히 돌아오게 한 것이다.
 사부에 대한 의문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한 번도 지시한 일에 대해서는 중복된 명령을 내리거나 지시를 한 적이 없는 사부였다. 더구나 사부의 성격으로 보아 십만대산에 있는 자신을 그토록 서둘러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계림이 아니고 유주의 반가장이라니······.
 “할아버지, 그러니까 광서무림이 술렁거리는 것은 십오 년 전에 잠시 사라졌던 혈겁이 이어지는 거라고요?”
 “그렇단다.”
 갑자기 초로인과 소녀는 무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도 위지경덕이 들어서기 전에도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난데없이 나타난 위지경덕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것 같았다. 이야기를 끊었던 그들은 비록 피를 흘린 것으로 보이는 위지경덕이 나타났지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위지경덕의 귀가 이야기로 쏠렸다.
 소녀는 언뜻 보아도 열다섯 살이 넘어 보이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무림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 누가 개입되어 있나요?”
 “이제일신삼군오랑이 모두 개입되어 있단다.”
 “그렇지만 모두 드러난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어둠에 숨은 자들이 흉수겠군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느냐?”
 위지경덕이 귀를 기울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을 때, 여주인이 음식을 기지고 왔다. 초로인과 소녀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여주인으로 인해 이야기를 잠시 중단한 모양이었다.
 위지경덕은 시장기가 돌아 입술이 바싹 타는 듯 느껴졌지만 품에서 은자를 꺼내었다. 은자를 꺼낸 위지경덕은 계족난삽탕에 은자를 떨어뜨렸다.
 은자는 한참동안 계족난삽탕 속에 빠져 있었다. 만약 음식 속에 독이 들었다면 은자는 검은색으로 변할 것이다. 위지경덕은 일견 치밀한 사람이기도 했다.
 ‘만사를 조심해야 한다.’
 위지경덕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그 동안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귓등으로 흘려버린 이야기들이었다.
 무공수련을 마치고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거나 표국( 局)을 찾아 떠났다 돌아온 귀봉검문의 제자들은 항상 많은 것을 이야기했었다.
 귀봉검문의 제자들은 무공수련이 끝나면 돌아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세가(世家)나 장원을 짓고 살았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들은 표국에 들어갔는데, 기봉검문은 검이 빠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광서지방에서는 상당히 대우를 받았다.
 “아니 할아버지! 이제일신삼군오랑이라니요?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거지요?”
 “당금무림을 휘어잡는 많은 고인들로 흔히 하남무림을 한 손에 흔드는 아홉 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은 강북무림의 태두(泰斗)이기도 하지.”
 “그러면 그들이 누구죠?”
 소녀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위지경덕은 귀에 정신을 곤두세웠다.
 오랫동안 사문의 무공 외에는 신경을 쓴 적이 없었는지라 무림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지 알지 못했던 위지경덕이었다.
 “에헴!”
 노인은 나직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잠시 이야기가 끊겼는지라 위지경덕은 자신의 신분을 눈치 챌까 두려워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음식을 입 안으로 퍼 넣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미처 분간할 사이가 없었다.
 “먼저 일신(一神)을 가르쳐주마.”
 “그 사람이 가장 강한 것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당연히 아홉 사람들 중 가장 먼저 호칭이 붙었고, 다른 사람들은 세 명이나 다섯 명인데 한 사람뿐이라는 것은 의당 최고라는 이야기겠지요. 다만 이제(二帝)라는 자를 제외한 것이겠지요. 저도 이제에 대해서는 아니까요.”
 “똑똑하구나.”
 노인은 손녀딸의 등을 다독거렸다. 소녀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코를 훌쩍거리며 웃었다.
 위지경덕은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왠지 노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분명한 것은 일신이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무림은 삼군오랑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
 “물론 표면적이겠지요.”
 “당연한 이야기다. 이미 무림은 두 개의 세력, 구지삼환맹과 천상천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삼군오랑이 장악했다고 말하는 거지요?”
 “그거야 강남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구지삼환맹의 농간이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쏠리는 화살을 그들 삼군오랑에게 몰리게 하려는 것이야.”
 노소는 음식을 먹으러 왔는지 강호의 이야기를 하려고 반점에 들른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음식보다는 강호의 정세에 관심이 더욱 많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죽은 사람도 있지요.”
 “물론이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삼군 중 한 명인 철권왕(鐵拳王) 목리극(木理克)이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인 것 같다. 이미 십 년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단다.”
 “나머지는 살아 있나요?”
 “물론 네가 아는 두 사람 모두 살아 있지.”
 위지경덕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허기가 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소가 나누는 이야기가 더욱 귀를 자극했다. 위지경덕은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단다. 이미 오래되었지. 사람들 말로는 그렇게 말을 하기는 한다만 강호의 소문은 믿을 수가 없다. 이미 십 년 전부터 강호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누구죠?”
 “그는 마신(魔神)이라 불리던 무영신(無影神) 유극량이다.”
 “그가 나타나지 않은 건가요?”
 “그렇다. 이미 십 년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노소는 이미 아침을 마친 것 같은데 여전히 목소리를 죽이고 말을 이었다. 간혹 문가를 바라보기도 했고 은밀하게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으나 간간이 들려오는 말로 위지경덕은 그들의 이야기를 유추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갈 길이 바쁜 위지경덕의 음식을 먹는 속도가 자연히 늦어졌다.
 ‘이상한 노소로군. 이런 곳에서 무림의 정세를 이야기하다니. 듣는 사람도 없건만. 더구나 간혹 귓속말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유는 또 뭔가 모르겠다.’
 위지경덕은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기는 했으나 굳이 참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일신이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삼군 중 이군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렇단다. 너도 알겠지만 마도(魔道)를 표방하고 있는 일지신군(一指神君)이라 불리는 임강노격(淋鋼鷺擊) 주강륜(朱鋼輪)이 있고, 정도(正道)를 표방하고 있는 만수군(萬獸君) 화선(花仙) 우문량(宇文亮)이 있고······.”
 “일지신군 주강륜은 정강부의 부주가 아니던가요?”
 “물론 그렇다.”
 위지경덕은 새로운 사실에 매우 놀라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과 다툰 여인이 중원의 마도를 이끄는 삼군 중의 한 명인 삼군 주강륜의 여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이제 오랑 중에서도 그들 천지이랑과 귀의랑(鬼醫郞), 이렇게 셋뿐이 남아 있지 않구나.”
 “우리가 모두 아는 사람들이네요.”
 노소는 밝은 목소리가 되었다.
 ‘재수 없다. 만약 정강부의 노파들이 고자질이라도 하는 날에는 기봉검문이 온전하지 못하겠구나.’
 위지경덕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과 부딪쳤던 정강사파가 주강륜에게 보고라도 하는 날에는 여지없이 일은 벌어지고 말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파들의 곁에 서 있던 소녀가 소문에 들리는 주강륜의 딸 주계덕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지경덕은 점차 음식을 떠 넣는 속도를 빨리 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노인과 소녀의 이야기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아무래도 귀봉검문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았다.
 
 위지경덕이 허둥지둥 반점을 나간 뒤에야 노소는 얼굴을 들었다.
 “아이야. 조금 전의 그 아이가 분명 그의 아들이라고 확신하느냐?”
 “그건 모르죠!”
 소녀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끄덕임은 바삐 떠난 위지경덕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녀도 위지경덕을 말하는 것으로 안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잠시 후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위지경덕이 말을 재촉해 달렸으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아마도 노인과 소녀는 위지경덕을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른 아침부터 일신삼군과 오랑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위지경덕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노인은 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 노인의 얼굴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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