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녹림마존 [E]

녹림마존 1

2017.08.14 조회 634 추천 6


 녹림마존 1권
 
 
 서장 一
 
 
 강호의 호사가들은 병장기의 최고를 검이라 일컫는다.
 허나, 나 철혈패도(鐵血覇刀)의 이름으로 감히 묻노라!
 남자의, 사나이의 패기를 가장 잘 이해하는 병장기는 과연 무엇인가?
 그대들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칭송하는 검인가?
 그것도 아니면 창인가?
 단언컨대, 남자다운 절대의 패력은 오직 도(刀)만이 담을 수 있다.
 광오하다 여기는가?
 그렇다면 내 도를 받고서 이야기하라!
 그러고도 당신들이 패를 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논해도 좋다!
 
 - 강호천무록(江湖天武錄), 철혈패도 어록
 
 
 서장 二
 
 
 얼마 전까지는 나도 사부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림왕이 되어 녹림을 일통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씨벌, 모조리 다 개뻥이었어!
 
 - 제육대 녹림왕(綠林王) 서주혁의 일기에서 발췌
 
 
 1장 남자, 일을 벌이다
 
 
 쾅!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왁자지껄했던 주루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주루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동석하고 있던 반백의 중년인이 나지막하게 타일렀다.
 “어허! 어서 앉게.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 않는가!”
 그 말에 말없이 중년인을 노려보는 약관의 청년.
 그는 바로 서주혁이었다.
 황도 북경의 최연소 부천호(副千戶)!
 서주혁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자에게 묻는다면 모두 입을 모아 말하곤 한다.
 독종!
 근골이 쇄할까 싶어 술은 절대 일정량 이상은 마시지 않고 무부인 주제에 계집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치 도사를 연상케 하는 그의 평소 행동에 비해 성격은 정반대였다.
 불과 같은 성격에 무부치고 머리도 뛰어나다 보니, 뒷배 없이도 최연소 부천호 자리에 오른 그는 황도의 유명인이었다.
 성질만은 개망나니라는 그 서주혁이 중년인의 말에 묵묵히 앉는 광경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에 다시 시끌벅적해지는 주루.
 서주혁이 중년인의 말을 순순히 따른 것은 그가 바로 자신의 상관인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였기 때문이리라.
 서주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성난 표정으로 도지휘첨사에게 물었다.
 “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만두라고 하십니까! 왜요!”
 분명히 사고 친 것들은 다 공훈으로 해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날벼락 같은 말을 들었으니 화가 안날 수 없었다.
 “부천호!”
 서주혁의 목소리가 또 다시 커지자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도지휘첨사.
 그 말에 서주혁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필시 이 일이 도지휘첨사의 뜻은 아닐 게다.
 저 양반은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양반이 아니던가?
 답답한 마음에 서주혁이 술을 연거푸 들이키자, 그때서야 도지휘첨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자네, 상황이 좋지 않네. 진짜 좆 됐다니까.”
 “······잘렸으니까 인생 끝난 거 맞네요.”
 서주혁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도지휘첨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아, 단순히 관부에서 잘린 게 아니라 황도를 뜨라 이 말이야.”
 “예?”
 관직을 빼앗고 내쫓는 걸로 모자라서 황도에서 튀라니!
 서주혁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묻자 도지휘첨사가 더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자네가 며칠 전에 요 앞에서 한 놈 손봐줬다고 했나?”
 “아, 그 왈패? 사내새끼가 자꾸 여인네한테 껄떡거려서······ 제가 그걸 두고 볼 성격입니까?”
 서주혁이 기억을 더듬다가 도지휘첨사에게 말하자 도지휘첨사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것 때문에 좆 됐다 그 말이야.”
 여자 건드리는 망나니를 좀 혼내 줬기로서니, 관직을 그만두고 황도를 뜨라니!
 무슨 이런 법이 있다는 말인가!
 서주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왜요? 그놈이 우포정사(右布政使) 장자라도 됩니까?”
 “쯧쯧쯧.”
 그 모습에 도지휘첨사가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전혀 다르네. 그거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
 “거 보십시······ 네?”
 서주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 가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자네가 손봐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 황자 저하일세.”
 “억······.”
 서주혁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위장하고 민생 감찰을 나가셨다가 그렇게 되어서 돌아왔으니······.”
 “민생은 얼어 죽을······ 가운데 다리 놀리는 게 민생인가.”
 서주혁이 중얼거리자 도지휘첨사가 덧붙였다.
 “서류상으로 그렇단 말일세.”
 술을 한 잔 들이켜고 난 도지휘첨사가 다시 목소리를 낮춘 후 말했다.
 “한 짝 다 터졌으면 자네는 벌써 요거였어.”
 말을 하면서 손으로 목을 슥 긋는 도지휘첨사.
 “한 짝이라니요?”
 서주혁이 의문스럽게 묻자 도지휘첨사가 아랫도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요거. 두 개 중에 하나 남았다고 인마.”
 “아······.”
 서주혁의 표정이 굳었다.
 기억하기론 별로 세게 찬 것 같지는 않은데······.
 서주혁이 울상을 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빼도 박도 못한다.
 “씨벌······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주혁의 물음에 도지휘첨사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물건 챙겨서 뜨게. 그리고 이거······.”
 도지휘첨사가 탁자 위로 무언가를 던지자, 금속성이 흘러나왔다.
 “······뭡니까 이건.”
 “퇴직금.”
 
 서주혁은 퇴직금을 품 안에 넣고 도지휘첨사를 뒤로한 채 주루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서주혁이 중얼거렸다.
 “······하필 그게 터질게 뭐야?”
 
 ***
 
 “씨벌······ 빌어먹을 퇴직금이 다 뭐라냐.”
 서주혁은 애꿎은 땅을 차며 중얼거렸다.
 터덜터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서주혁은 떠날 채비를 했다.
 사 놓고도 흙먼지가 잘 묻어 아껴 둔다고 한 번도 입지 못하던 비단 옷을 입었지만,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도통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의 일다경이 다 되어서야 물건을 추린 서주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췄다.
 뭔가 생각난 듯 자신의 탁자로 성큼성큼 되돌아가 탁자를 열고 탁자 깊숙이 손을 넣는 서주혁.
 그의 손에 잡혀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호두 알갱이 크기의 검은 구(球)였다.
 “맞아, 여기에 놔뒀었지.”
 그 물건마저 자신의 앞섶에 갈무리한 서주혁은 힘없이 몸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서주혁이 전각을 빠져나오자 전각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의 관군이 절도 있게 소리쳤다.
 “충!”
 “쉬어.”
 힘없이 손을 들어 대꾸해 준 서주혁은 입맛을 다시며 황도의 한복판을 걸었다.
 “진짜 이제 뭐 하지?”
 힘없이 걷는 서주혁의 주변엔 신이 나서 떠들거나 목소리를 키워 이야기하며 걷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인상을 쓰며 그런 사람들을 힐끗 쳐다본 서주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술, 술이라도 먹어야겠다.’
 술을 먹지 않고 이런 개 같은 상황을 어찌 이겨 내겠는가?
 서주혁은 주막으로 들어가 소리쳤다.
 “여기 분주(汾酒) 한 병만 가져다주시오! 독한 놈으로!”
 “예예!”
 서주혁이 대답을 듣고 뚱한 표정으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분주 한 병과 고기 몇 점을 내왔다.
 “음?”
 서주혁이 고개를 들어 주인 얼굴을 올려다보니 주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고기가 좀 남아서 그럽니다. 술만 마시면 속 버리니, 안주 삼아서 하십쇼.”
 “고맙수.”
 서주혁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주인이 웃으며 걸어갔다.
 분주의 마개를 열자 알싸한 향이 서주혁의 코에 흘러들어 왔다.
 당장 막막함을 한 잔 술로 잊겠다는 듯 병을 기울여 한 잔을 가득 채운 서주혁이 잔을 잡아서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음······.”
 분주가 입에 들어가자 목이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에 느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꽉 찬 향.
 서주혁은 곧바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집어넣고 묵묵하게 씹으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지······ 하루 정도는 더 있어도 되겠지?’
 앉은 지 두 시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병을 비운 서주혁은 탁자 위에 철전을 얹어 놓고는 말했다.
 “수고하시오.”
 “예, 고맙습니다! 또 오십쇼!”
 주인이 나와 인사를 하는 것을 뒤로하며 주막을 나오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당장 황도를 뜨자니 이제 점점 날이 저물어 가고 있고······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자니 너무 아쉬웠다.
 “에이, 좀 걷다가 들어가지, 뭐.”
 그렇게 터벅터벅 걸으며 한숨을 포옥 내쉬던 서주혁은 어느새 눈앞의 광경이 밝아지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황도의 뒷길까지 걸어온 것이다.
 한편에 즐비한 술집 맞은편엔 벌써부터 불을 환하게 켠 홍루들이 서 있었다.
 ‘평소에 동료들과 술을 먹을 땐 여기서 먹었으니······.’
 동료들은 술을 한 뒤에 항상 홍루로 향했다.
 관군이 무슨 마누라를 두냐는 핑계를 대고 홍루에 가 정욕을 풀었던 것이다.
 “할 것도 없는데,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슬쩍 홍루를 바라보던 서주혁은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분주를 마시느라고 이번 달 마지막 녹봉을 써 버린 탓이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던 서주혁은 문뜩 도지휘첨사가 쥐여 줬던 주머니를 떠올리며 앞섶에 손을 집어넣었다.
 벌써부터 무게감이 있는 주머니에 기대를 한 서주혁이 주머니를 열었다.
 “어디 보자······.”
 그리고 주머니를 연 서주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전 한 냥과 은전 열 냥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와······ 이 양반 손 크네.”
 감탄을 하며 중얼거리던 서주혁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니지! 씨벌, 부천호가 그만둔다는데, 이 정도는 쥐여 줘야지.”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것을 느끼던 서주혁은 은자 몇 냥을 소매로 옮겨 집어넣은 후 천천히 걸었다.
 
 ***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던가?
 처음엔 구경만 한다고 들어갔었던 서주혁이지만 결국 돈을 내고 말았다.
 밖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네들이야 이제 한물이 간 퇴물 기녀들이라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던 탓이다.
 덕분에 홍루에서 이틀 동안 먹고 자며 기녀와 놀던 서주혁은 은전 여섯 닢이나 써 버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홍루를 나오며 예쁜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보이는 월향이의 마중을 받고 손을 흔들어 준 서주혁이 발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허리야······.”
 게다가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홍루에서 나왔으니.
 강한 햇빛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서주혁은 한숨을 쉬었다.
 막상 홍루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이틀이 지나기까지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질펀하게 놀았는데, 또 다시 홍루 밖으로 나오자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일단 집으로 가서 한숨 자고 황도를 떠나자······.’
 몸이 노곤하면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던가?
 일반 무부로 시작해 부천호에 오르기까지 착실히 모아 놨던 돈을 모두 털어 구한 자그마한 집.
 그나마 서주혁이 군관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황도의 땅값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반년 전에야 겨우 집을 구하고, 집에서 군부로 출퇴근을 하며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얼마나 샀던가?
 서주혁은 서둘러 황도 외각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등 따시고 배부른 곳이 있어도 집만 못하다는 말이 있던가?
 서주혁은 심란한 마음이 집 앞에 도착하자 조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하하. 이놈아, 주인님 오셨다.”
 가족 없는 홀몸이었기에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뼈 빠지게 돈을 벌어 어렵사리 얻은 집이다.
 비록 이곳에서 자주 쉬지는 못했지만 이제 하루 후면 헤어져야 할 곳이니 씁쓸하기도 한 마당.
 당장 내일 황도를 떠야 하니 지금부터 값어치 나가는 물건들은 모두 처분하고 가야 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루한 나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집 안에서 풍겨져 나오는 익숙한 내음에 슬쩍 미소를 베어 물며 방 안으로 들어간 서주혁.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씨벌······ 뭐야 이게?”
 급속도로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서주혁.
 은자 두 냥을 주고 어렵사리 구했던 청자. 그리고 목공소에서 들고 오느라 사뭇 피곤하게 했던 침상과 탁자. 꼴에 여유 좀 느껴 보겠다고 구입하고 몇 번 사용하지 않은 다기들.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서주혁을 당황케 한 것은 그 물건에 붙어 있는 낯선 종이였다.
 빨간 사각형의 작은 종이들.
 서주혁은 급히 도자기 앞으로 뛰어가 고개를 들이밀고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차압(差押).
 
 서주혁은 허탈한 표정으로 집 안 곳곳을 다니며 살폈다.
 차압, 차압, 차압!
 점점 일그러지던 서주혁이 은자 닷 냥을 주고 구입한 뒤에 이가 나갈까 봐 벽에만 걸어 뒀던 도의 도갑 위에 붙어 있는 빨간 딱지를 보고 나서 결국 고함을 질렀다.
 “야 이 개 같은 놈들아!”
 한바탕 소리를 지르던 서주혁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아껴 왔던 집기들을 잡아 엎으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사 황자 불알 한 쪽이 금덩이보다 비싸다는 말이냐!”
 
 ***
 
 황도를 떠난 지 어언 한 달.
 서주혁은 방립을 쓴 채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중경(重慶)의 남녕성.
 황도에서 멀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은 곳.
 단지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발을 놀린 것이 서주혁을 중경까지 이끈 것이다.
 “자, 자! 골라요, 골라!”
 “엄마······ 나 저거 사 줘!”
 “안 돼. 어서 가자!”
 평화로운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남녕성의 시장 한복판을 걷던 서주혁은 분위기에 한숨을 쉬었다.
 ‘젠장, 난 망해 나자빠졌는데 여긴 한산하구나.’
 앞으로 어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좀 관부의 세력이 크지 않은 지역 중 하나이니 막상 남녕성으로 오긴 했지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시장 통을 걸으며 허기짐에 산 사과를 베어 물던 서주혁은 저쪽 한편에 모여 있는 인파를 보곤 눈매를 좁혔다.
 ‘뭐지 저건?’
 서주혁이 가까이 다가가 인파들 사이에 꼈다.
 그 인파의 선두에선 관병들이 벽에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방문(榜文)?’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에 글 읽을 수 있는 사람 없는감?”
 몇몇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사이 서주혁도 새로 붙은 방에 눈길을 줬다.
 근데 누군가가 서주혁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말했다.
 “자네 혹시 글 읽을 수 있나?”
 서주혁이 방립 밑의 눈을 굴려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찔끔한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다.
 서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읽을 수 있소.”
 “좀······ 읽어 주겠나?”
 움츠려든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하자 서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황도에서 잠적한······ 이런 씨벌!”
 “아이구!”
 서주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십수 명의 사람들은 서주혁이 돌연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듣곤 깜짝 놀랐다.
 서주혁의 옆에 서 있던 사내는 자라목을 하고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서주혁은 욕설을 내뱉기 무섭게 인파들 사이에서 홀로 빠져나왔다.
 서주혁이 떠나고 남겨진 글씨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앞에 붙은 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현상수배.
 얼마 전 황도에서 잠적한 대역 죄인을 찾는다.
 
 이자는 감찰을 나온 황자를 모욕하고 폭력을 휘둘러 황자의 옥체에 해를 입힌 죄, 여인을 강제로 겁탈한 죄가 있으며, 군부의 공금을 횡령하여 한 달여 전에 황도에서 잠적했다.
 이에 위의 사내를 수배하는 바이다.
 
 사내를 사로잡아오는 자 - 금전 오십 냥.
 사내의 목을 들고 오는 자 - 금전 이십오 냥.
 
 그리고 그 중간엔 엉성하게 그려진 서주혁의 용모파기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방립을 더욱 눌러쓰고 빠른 걸음으로 시장 통을 벗어나는 서주혁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단지 황자의 불알 하나를 깨뜨렸을 뿐인데, 천인공노할 강간범에 공금 횡령을 한 놈으로 변모했다.
 현상금이 한두 푼이라면 야 촌구석에서라도 어떻게 살아갈 텐데, 사 황자라서 그런지 통이 컸다.
 그래도 그렇지 불알 한 쪽에 금전 오십 냥이라니!
 울상을 지은 서주혁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씨벌! 진짜 좆 됐다······!’
 
 ***
 
 옥화산(玉化山)의 중턱.
 서주혁은 그 곳의 바위 위에 가만히 앉은 술병으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이미 서주혁이 앉아 있는 바위 주변은 싸구려 분주의 빈병이 네 병이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뭐야! 씨벌, 이게 다야?”
 그동안 숨어 다니며 한편으론 흥청망청 돈을 쓰다 보니,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았던 돈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마지막 돈을 싹싹 긁어 산 것이 분주 다섯 병인데, 결국 마지막 한 병마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황도에서도 무부치고 제법 머리가 명석하기로 소문났던 서주혁도 닥쳐온 상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렵게 구입했던 집은 이미 모든 게 다 물거품으로 변했고, 전국엔 자신의 용모파기가 붙어 자칫 잘못하면 칼을 쓴 채 황도로 끌려가 오체분시당할지 몰랐다.
 얼큰히 취한 채로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으며 닥쳐온 난제에 고민하던 서주혁.
 휘이이잉-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다 봤나!”
 서주혁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느끼며 욕을 뇌까렸다.
 눈을 뜨니 마치 천하가 한 줌으로 잡힐 것같이 작게 내려다보였다.
 사내라면 그 광경을 보고 응당 호연지기가 솟구쳐야 하겠지만, 서주혁은 도리어 어깨가 축 처졌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해 버린 서주혁은 결국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
 하지만 술은 이미 서주혁의 머리를 마비시킨 뒤였다.
 “씨벌! 그래, 기왕 이렇게 된 일. 끝은 내 손으로 내자.”
 세찬 산바람에 서주혁이 쓰고 있던 방립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제야 보이는 서주혁의 준수한 얼굴은 예전과 달라 보였다.
 얼굴엔 피곤과 수심이 가득했고, 눈은 이미 생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러워서라도 내가 남들 손에 붙들려 죽을 수는 없지.”
 홀로 중얼거리던 서주혁은 바위에서 내려와 바로 옆의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 목을 축였다.
 “그래, 씨벌. 인생 별거 아니야.”
 이내 음주 후에 타는 듯한 갈증이 해소되자 비틀거리며 자리에 서서 앞섶에 손을 넣어 뒤척거리다가 무언가를 꺼냈다.
 서주혁의 손에서 나온 것은 예전 서주혁이 집무실에서 챙겼던 호두 알갱이만 한 구체였다.
 서주혁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 구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면 그래도 고통 없이 갈 수 있겠지.”
 서주혁의 손바닥 위에 있는 묵색의 구체.
 그것은 악명 높은 물건 중에 하나였다.
 진천뢰(震天雷)!
 무림에서 사용이 금지된 폭약.
 그중에서도 휴대가 가장 손쉬우면서 파괴력은 하늘을 가르는 벼락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는 바로 그 물건이었다.
 일 년 반 전, 황도를 경악케 했던 흑도방파의 무기밀매를 단속하며 구했던 물건이었다.
 서주혁이 이것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필시 상부에서 제제를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주혁은 이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급전이 필요할 때가 생기면 무림이란 세계의 어두운 일면인 암시(暗市)에 팔아넘길 요량이었다.
 그런데 일이 요상하게 꼬여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자, 빌어처먹을 세상아, 나는 간다······.”
 서주혁이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 진천뢰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도화선이 단박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씨벌. 평소엔 촛불도 더럽게 안 붙더니.’
 막상 목숨을 끊기 위해 불을 붙이려니 순식간에 타들어 간다.
 서주혁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면서 비틀비틀거리며 바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거나하게 취해 도화선이 두 개로 보일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도화선이 점점 타들어 갈 때마다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오른손으로 진천뢰를 꾹 쥐고 있었다.
 “음······ ?”
 눈을 얼마나 감고 있었을까?
 서주혁은 눈 한쪽을 슬쩍 뜨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화선이 모두 타 버린 진천뢰는 소량의 연기를 내고 있었지만 그뿐.
 “뭐야?”
 서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천뢰를 막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천뢰가 터지지 않자, 이번엔 땅에다 집어던졌다.
 “씨, 씨벌! 불발이야?”
 서주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발로 진천뢰를 마구 밟았다.
 비틀거리며 자그마한 진천뢰를 짓이기는 서주혁의 모습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서주혁은 꼬이는 혀로 마구 소리치며 진천뢰를 밟기도 하고 애원을 하기도 했다.
 “터져라, 이 자식아! 터지라고!”
 빌어먹을 놈의 사 황자 불알은 쥐도 새도 모르게 터지더니, 터지라고 만들어 놓은 진천뢰는 발악을 해도 안 터지는 이 경우는 뭐란 말인가?
 서주혁은 오만상을 쓰며 진천뢰를 들어 연못에 집어 던졌다.
 “에이, 씨벌!”
 퐁.
 작은 포말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지는 진천뢰를 보던 서주혁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 왜 되는 게 하나도 없······.”
 그때, 돌연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연못의 물이 오 장이나 솟구쳤다.
 쿠웅.
 푸확!
 그리고 고함을 치던 서주혁의 몸은 터져 나오는 물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귓전을 치는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몸이 날아가며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을 하기도 전에 서주혁의 머리가 아까 앉아 있던 바위에 부딪쳤다.
 뻑!
 그리고 서주혁은 그대로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본래의 의도대로 죽으면 다행이지만······ 아쉽게도 상황은 그보다 안 좋았다.
 
 
 2장 남자, 묘하게 꼬이다
 
 
 선풍도골의 노인은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구덩이 속을 내려다보았다.
 “크흐흐.”
 그 안에는 자그마한 단지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무려 이 년 전에 묻어 둔 모과주였다.
 그동안 그 좋아하는 술을 꾹 참을 수 있었던 이유라면 바로 이 모과주 덕이 아닌가!
 떨리는 손을 뻗어 단지를 들어 올린 노인이 재차 싱긋 웃었다.
 손에 흙이 묻는 것도 마다하며 단지를 몇 번 쓸어내린 노인은 그제야 자신이 술잔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아가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단지를 향해 중얼거린 노인이 주변에 있는 바위에 단지를 올려놓았다.
 이내 넓은 보폭으로 자신의 거처로 급하게 걸어간 노인은 부엌을 둘러보다 화색을 지었다.
 “옳지! 여기 있구나!”
 노인이 손을 뻗어서 잡은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잔이었다.
 이내 부엌을 나가려던 노인은 돌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쿠콰앙!
 아니, 이건 소리가 아니라 굉음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굉음이 들려오며 그가 들어 있던 부엌의 집기들이 사정없이 흔들렸으니!
 노인의 흰 검미가 꿈틀거렸다.
 필시 이 정도의 굉음과 징후라면 폭약의 일종이 분명하리라.
 ‘어떤 미친놈이 산에서 불장난을······.’
 잠시 조용한 산을 수선스럽게 만드는 놈들을 괘씸하다 여기던 노인은 이내 표정을 녹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무슨······ 가장 중요한 게 눈앞에 있거늘.’
 지금 중요한 건 산이 시끄럽고 조용하고가 아니라 바로 모과주가 아니던가!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게 당장 봉을 뜯고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흐흐흐.”
 이내 잔을 들고 부엌을 나선 노인이 웃으며 단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단지를 향해 걷던 노인은 점차 표정이 변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마침내 일그러진 것이다.
 “왜,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야!”
 분노가 섞인 외침이리라.
 분명 바위 위에 올려 두었던 단지가······ 어째서 바위 아래에 깨져 있단 말인가!
 노인의 눈이 곱절은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조악한 나무 잔이 퍼석하며 산산조각 났다.
 아까의 그 진동······ 필시 폭약이 터지면서 일어난 진동에 바위가 흔들린 것이리라.
 선풍도골의 노인이 떨리는 눈으로 깨진 단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 이놈들!”
 고개를 천천히 돌리던 노인의 신형이 돌연 픽 하고 사라졌다.
 
 파라라락.
 옷자락이 바람결에 날리는 소리가 거칠게 나더니, 이내 노인이 허공을 가르며 거목의 우람한 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크음······.”
 산을 울렸던 굉음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 지 오래.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노인은 가볍게 가지를 박찼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몸이 허공으로 쭉 솟구치더니, 이내 노인의 팔목에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 얇은 가지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
 거의 나무의 꼭대기에 자란 나약한 가지 위에 사람이 서다니!
 게다가 노인의 풍채가 상상 이상으로 딱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노인은 그제야 한쪽 수염을 꿈틀거렸다.
 필시 그것은 미소를 지은 것이리라.
 “저쪽이었구나.”
 거목의 꼭대기에 올라서니 저쪽에 검은 연기가 풀풀 올라오는 것이 단박에 보였다.
 생각보다 자신의 거처와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챈 노인이 콧방귀를 끼며 중얼거렸다.
 “감히 이 철혈패도(鐵血覇刀)의 수염을 건들다니.”
 이내 노인이 몸을 살짝 구부리자 얇은 가지가 서서히 구부러졌다.
 마침내 가지가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노인의 몸이 다시 픽 하며 사라졌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가지를 뒤로하고 순식간에 폭발의 흔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노인이 거칠게 땅으로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감히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이 누구냐!”
 스으으, 훙!
 말을 마침과 동시에 노인은 오른손을 등 뒤로 가져가 등에 걸려 있던 도집에서 거대한 도를 꺼내 휘둘렀다.
 그리고 광포한 눈빛으로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으흠.”
 ‘대체 소란을 피운 놈들은 어디로 가고······.’
 사방으로 비산한 흙과 물벼락의 흔적만 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할 정도였다.
 혹시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알아챈 놈들이 경고를 하러 온 것이란 말인가?
 여전히 산새 지저귀는 소리만이 간혹 들리는 장내를 둘러보던 노인이 거칠게 대도를 집어넣고는 버럭 소리쳤다.
 “흥, 누군지 몰라도 내 손에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게다! 숨어 있다면 꼭꼭 숨거라!”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실린 내력이 실로 엄청나서, 온 숲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 한 수만 보아도 노인의 실력이 심상찮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을 정도였으니!
 “건방진 놈!”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발밑에 무언가가 걸렸다.
 “음?”
 노인이 고개를 내리자, 청년 한 명이 기척 하나 없이 물 범벅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다름 아닌 서주혁이었다.
 ‘내가 고작 이런 아이의 기척을 놓쳤다고?’
 노인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주혁의 숨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미약했기 때문이다.
 서주혁의 몸을 가볍게 살피던 노인은 서주혁의 긴 머리칼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물을 보고 혀를 차며 품에 손을 넣었다.
 “쯧. 이 아까운 것을.”
 품에서 단환 하나를 꺼내 서주혁의 입에 쑤셔 넣고 턱 부근을 누른 뒤에 다시 다른 단환 하나를 꺼내 손으로 으깨 물에 적신 후에 머리에 조심스럽게 처발랐다.
 “젠장할. 내 금쪽같은 술도 날아가고 녹청단(綠靑丹)까지 썼으니······.”
 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게다가 까딱하면 병자까지 수발하게 생긴 셈이 아닌가?
 “안 되지. 그렇게는 안 돼.”
 고개를 젓던 노인이 이내 얼굴을 펴며 중얼거렸다.
 “아! 옳거니, 그 방법이 있었구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더니, 손을 뻗어 서주혁의 뒷덜미를 잡은 채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노인은 자신의 거처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놀랍게도 노인의 한쪽 손에는 서주혁이 들려 있었다.
 노인의 풍채가 대단하다지만 서주혁의 몸이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몸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리해 보이지만 매일같이 연병장에서 몸을 굴리던 서주혁이다 보니, 큰 근육은 아니지만 잔근육들이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가벼운 행낭을 들고 온듯 서주혁을 들고 오던 노인은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인상을 찌푸렸다.
 서주혁의 몸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집 안을 물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흠.”
 잠시 손에 든 서주혁을 내려다본 노인이 이내 그를 바닥에 철퍽 하고 내려놓았다.
 이내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은 짐짝처럼 던져 놓은 서주혁을 노려보았다.
 ‘군관이구나.’
 몸에 메고 있는 군장.
 그리고 옆구리에 차고 있는 군도만 보아도 상대가 군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겉모습은 병사나 하면 딱 맞을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직책이 높은 듯 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런 모습을 확인한 노인은 더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노인이 싫어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군관이었으니까!
 콧방귀를 끼며 서주혁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밖으로 나가 장작을 더 태우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한참 뒤에야 서주혁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슬며시 떴다.
 ‘크으······.’
 체온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머리가 깨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것들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먹은 것이라곤 물밖에 없다 보니 올릴 수 있는 것조차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눈만 깜빡거리던 서주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주변을 살폈다.
 ‘근데······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서주혁은 무심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서주혁이 의아한 기색으로 묻자, 노인은 서주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자신을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서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말을 듣지 못하시는지요?”
 그 말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흥, 아직 귀는 잘 들린다. 내가 누군지 물었느냐?”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저 애송이 군관에게 겁을 좀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예, 노인장.”
 “아이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다······ 혹시 녹림이라는 곳에 대해서 들어 봤느냐?”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주혁을 향해 묻는 노인.
 진정한 사내들의 성지!
 그야말로 열혈과 자유분방함을 지니고 있는, 산적들의 성지가 바로 녹림이다.
 게다가 일개 산적들의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고수가 계속 나오니, 강호무림 어느 곳에서도 녹림을 무시하는 곳이 없다.
 하물며 관에서는 녹림을 더더욱 두려워하니······.
 노인은 이 정도로 운만 띄워도 저 애송이는 쫄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서주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주혁이 사뭇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설마······ 산도적놈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야 인마.”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앉아서 고개를 쳐든 채 자신을 향해 묻는 서주혁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컥······.”
 가뜩이나 두통이 심했던 서주혁은 노인의 솥뚜껑 같은 손이 뒤통수를 치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다시 뻗어버렸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시 서주혁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고개를 숙인 서주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야, 야!”
 하지만 서주혁은 계속된 노인의 부름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뻗은 서주혁의 머리에서 다시 붉은 피가 마루를 적시며 흘러나왔다.
 그 광경을 보던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할! 고새 그걸 까먹다니!”
 다시 단환 하나를 으깨어 머리에 붙여 준 뒤에 한참을 기다려도 서주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결국 노인은 한숨을 쉬며 서주혁을 자세히 살폈다.
 흰 검미 밑으로 심유한 깊이를 지닌 눈이 서주혁의 몸을 뚫을 기세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흐음······.”
 자세히 보니 가쁜 숨,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정상인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노인은 재빨리 손바닥을 서주혁의 등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서주혁의 맥이 마치 자신의 맥인 양 파악을 한 노인은 혀를 찼다.
 ‘머리만 다친 게 아니었구나. 머리에 피가 고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늘, 기혈 자체가 흔들렸어.’
 무림인들처럼 내력이 없다고 해서 기(氣)라는 존재가 몸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모든 사람들은 기가 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기란 생명의 원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기는 세상 어느 곳에나 있기 때문에 땅에서 자란 채소를 먹으면서도 얻을 수 있고, 숨을 쉬어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기혈이 흔들림으로 해서 이러한 체내의 기가 제대로 움직이질 못하는 것이다.
 잠시 서주혁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던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옳거니! 아까 그 폭약이 터지면서 충격을 받은 게로구나.”
 그렇단 말은 폭약을 터트린 놈이 다름 아닌 요놈이라는 말일 게다.
 노인의 눈에 잠시 괘씸함이 깃들었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제아무리 술이 삶의 낙이라고는 하지만 술이 사람을 앞설 수는 없었다.
 노인도 폭약의 규모를 봤으니 알지만 그 정도 위력의 폭약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폭약의 범위권 내에서 폭약의 여파를 받았다면, 내가중수법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과 비슷한 셈일 게다.
 혀를 끌끌 차던 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고운 놈은 아니라 해도 흔들린 기혈은 바로잡아 줘야 했다.
 그래야 모과주 값을 치르지 않겠는가!
 서주혁의 명문혈에 손을 올린 노인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어 갔다.
 그 순간 노인의 어깨에서 검은색 기운이 뭉클뭉클 오르기 시작했다.
 
 “으그그!”
 반시진에 걸쳐 서주혁의 기혈을 제대로 다독이고 안정시킨 노인이 마침내 서주혁의 등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쭉 폈다.
 ‘간만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이더냐. 에잉.’
 퍼져있는 서주혁을 흘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벽 한쪽에 기대어 있는 대도를 쥐고 어슬렁어슬렁 집 밖으로 나갔다.
 서주혁 덕분에 시간이 늦긴 했지만 오늘 안에 장작을 다 패 놓아야 했다.
 내일은 사냥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뒷마당으로 걸어가서 심호흡을 몇 번 하던 노인이 힘차게 대도를 도갑에서 뽑더니 땅에 쿡 박았다.
 놀랍게도 흙모래로 퍽퍽해 보이는 땅에 대도가 아무런 저항 없이 쿡 박혔다.
 이내 상의를 천천히 풀곤 벗어서 한쪽에 걸어놓더니, 장작을 놓고 천천히 대도를 움켜쥐었다.
 “흐읍!”
 살짝 호흡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대도를 훅 치켜들자 무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노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마어마한 근육들이 마치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대도를 잡은 팔에 힘줄이 솟구쳤다.
 노인은 그 거대한 대도를 한 손으로 잡아 거세게 내려쳤다.
 자그마치 오십 근!
 범인이라면 양손으로 들어도 턱도 없는 무게이리라.
 더 놀라운 것은, 힘껏 내려치던 도를 마치 나뭇가지를 멈추듯 장작의 바로 위에서 멈추는 게 아닌가!
 “크흐······.”
 노인이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대도를 다시 들어 어깨에 걸치자, 장작이 그제야 쩍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그럼에도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돌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뭘 보고 있느냐.”
 그곳에는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온 서주혁이 멍하니 서 있었다.
 서주혁은 노인이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목격한 뒤였다.
 서주혁은 노인을 보고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 체 어르신의 정체가 뭡니까?”
 노인은 서주혁의 물음에 천천히 몸을 돌리곤 어깨에 걸쳤던 대도를 다시 땅에 박아 넣으며 말했다.
 “허허······ 노부의 정체라. 나는 오대 녹림왕이자, 강호에서 철혈패도라 불리었던 마초남(麻礎濫)이다.”
 “마초······ 남.”
 노인의 말에 서주혁은 노인의 엄청난 근육들이 맥동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
 “······.”
 이내 두 노소는 말이 없어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초남은 자신의 별호만 들어도 서주혁이 놀라 나자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서주혁 역시도 할 말이 없었다.
 일어나 보니 머리가 깨져 있었는데, 그 여파 때문인지 예전의 생각이 잘 안 났다.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현재의 녹림은 몇십 년 전의 녹림이 아니라 과거의 악명과 세력을 모두 잃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던 게다.
 놀라운 것이라곤 저 장작 패기와 마초남의 근육들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휘잉- 쩍!
 서주혁은 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아 마초남의 기예(技藝)에 가까운 장작 패기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황도의 상황이 어떤지 몰랐다.
 사실 자기 같아도 고자를 만들 뻔한 놈이 있다면 가만 놔두지 않을 판이었다.
 ‘근데 내가 불알을 쪼갠 놈이 이 황자였던가?’
 기이하게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니, 자신이 자살하려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주혁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부딪치며 예전의 명석함을 다 잃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지금 밖으로 나가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관부로 돌아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실낱같은 소망일 게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관에 투신해 악착같이 기어 올라왔거늘······ 이제 치열하게 버티면 남들과 같이 가족도 일구고, 부끄럽지 않은 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꿈이 되었다.
 “후우······.”
 한순간에 막막해졌다.
 농사를 지으려 해도 소가 있고 땅이 있어야 해먹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나라의 사정이라 하면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어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평화롭다.
 하지만 그것은 고관대작들의 이야기.
 나라가 평안하던 동안 고여 있던 윗물이 썩으며 죽어나는 것은 무고한 민초들이 아니던가?
 자신이 악착같이 살아오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정말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니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힘든 시기.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미래가 단숨에 막막한 암막에 의해 가렸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서주혁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데, 돌연 묵묵하게 장작을 패던 마초남이 나무를 올려놓고 도를 내리치며 물어왔다.
 “관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이 깊은 산은 어찌 들어온 게냐.”
 휭- 쩍!
 말이 끝나기 무섭게 쪼개지는 장작.
 서주혁은 쪼개지는 장작을 보며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뭐야?”
 마초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폭약을 터트리곤 저 혼자 휘말리더니, 이젠 왜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니!
 ‘이거 정신 나간 놈 아냐?’
 잠시 서주혁을 바라보던 마초남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쪼개진 장작을 옆으로 치우고 새 나무를 올려놓았다.
 서주혁은 그 모습을 멍하게 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나는 게······ 음. 제가 황자의 불알을 깨뜨린 것 같습니다.”
 “좆 됐구먼.”
 마초남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서주혁이 다시 눈을 뜨며 이야기했다.
 “제 생각엔 그래서 여기까지 도망친 것 같습니다.”
 타탁!
 불티가 다시 한 번 튀었다.
 마초남은 듣기만 했지만 서주혁은 연신 말을 이었다.
 서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다 푹 숙이곤 중얼거렸다.
 “씨벌······ 이렇게 살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자신이 이미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서주혁.
 그 말에 마초남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젊은 놈이 뭐가 걱정이더냐! 내가 네놈이었으면 천하재패도 노려 볼 것이야.”
 그 말에 서주혁이 살짝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것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주혁의 말에 마초남이 도를 땅에 슬쩍 박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전 황자를 고자로 만들 뻔했습니다. 어디에도 갈 데가 없어요.”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서주혁을 빤히 보던 마초남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말인즉 관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렷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마 제가 되돌아가면 황자가 제 멱을 따다 못해 오체분시할 겁니다.”
 서주혁이 푸념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초남은 근육으로 잘 끼워지지 않는 팔짱을 끼며 신음을 했다.
 ‘그 말인즉슨 저놈은 이제 관부의 개가 아니렷다?’
 마초남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나도 사부가 했던 것처럼 하면 되겠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던 마초남이 문뜩 생각나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녹림은 어떻게 되었을까?’
 속세와 연을 끊고 유유자적 살아오다가 한 가닥 감정에 이런저런 감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겼는데, 어렴풋이 서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말에 마초남은 상념 중에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야 남자답게 당당하게 살아야지.”
 서주혁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남자답게······.’
 지금까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산다는 것은 없었다.
 단지, 남부럽지 않게.
 그리고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출세하고 그로 인해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생각만 하던 서주혁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삶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다.
 어느 순간부터 남들은 자신을 독종이라고 부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자신은 목표를 향해서 걸었을 뿐인데······.
 그런데 남자답게 당당히 살라니?
 너무도 원론적이지 않은가?
 서주혁은 결국 다시 물었다.
 “남자답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겁니까?”
 그 물음에 마초남이 눈을 빛내며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양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남자라면 패기! 그리고 힘이다!”
 마초남의 팔에 힘줄이 곤두서는 것을 보며 서주혁은 다시 장고에 빠져들었다.
 
 벌써 마초남의 거처에서 묵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서주혁은 몸이 회복되자마자 당장에라도 떠날 예정이었다.
 자신의 용모파기가 전국에 붙었다는 것도 까먹은 채 일단 밖으로 나가서 밖의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마초남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홀로 유유자적 살고 싶어 은거를 한 사람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서주혁의 결정을 바꾸게 만든 것은 그날 저녁 마초남의 한 마디였다.
 “갈 곳도 없어 보이는 듯하니 이곳에서 지내라.”
 사실 서주혁은 마초남이 권유식으로 말했다면 그냥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초남의 말투가 명령식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상하게 그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고 착각을 해서인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침이 다가와 서주혁은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쯧. 몸이 편하지 않은데도 눈이 떠지는군.’
 군에서 있을 때의 생활이 몸에 배인 것일까?
 처음 군에 투신했을 때만 해도, 기상 시간이 정말 지옥 같았다.
 단 일각이라도 더 눈을 감고 쉬고 싶었고 지친 몸도 그걸 원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이 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기상 시간만 되면 눈은 번쩍 떠졌다.
 오히려 그 시간에 안 일어나면 불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 년, 십 년이 지나자 그때부턴 기상 시각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연병장에 나가 스스로 몸을 구르고 수련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몸이 배어 생활이 되어 버린 탓인지, 군문에서 나온 지금도 변함없이 눈을 뜬 것이다.
 서주혁은 고개를 돌려 코를 골며 큰대자로 자고 있는 마초남을 보고 픽 웃곤 물 지개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적시니 정신이 확 깼다
 “후우!”
 서주혁은 입으로 뿜어지는 하얀 입김과 함께 물 지개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서주혁의 뜀박질로 일다경을 뛰면 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마초남은 항상 일어나면 물을 떠오곤 했기 때문인데, 지리를 익힌 이상 마초남이 하도록 놔둘 수 없었기 때문에 서주혁이 몰래 나선 것이다.
 의외로 복잡하지 않은 숲을 달리며 뜀박질 시작한 서주혁은 금방 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날이 찬데도 불구하고 샘에 도착하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주혁이 샘의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고 양쪽에 물을 가득 담아 지개를 들려 올렸다.
 “끄응······.”
 마초남이 물을 뜨는 것을 지켜볼 때는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어깨에 걸쳐 메니 몸이 아래로 눌리는 기분에 서주혁이 신음을 흘렸다.
 ‘이래서 어르신이 나더러 물지게를 들지 말라 했던 것이구나.’
 요 며칠 동안 서주혁은 마초남이 지개를 들고 내려올 때마다 자신이 들겠다고 했었다.
 그때마다 돌아온 말은 같았다.
 “까불지 마, 인마. 비실비실한 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서주혁은 내심 억울했다.
 군에서도 내로라할 정도의 몸을 가진 자신인데, 비실비실하다니!
 한데 직접 물 지개를 들고 내려가려 하니 이게 여간 곤욕이 아니다.
 중심을 잡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웠고, 빨리빨리 걷자니 물이 흘러내리고.
 덕분에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는 시간이 곱절은 더 걸렸다.
 “후우······.”
 서주혁은 저 앞에 보이는 집을 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이곳까지 내려오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버렸다.
 물 지개를 다시 고쳐 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쪽에서 마초남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해가 뜨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마초남이 머리를 푼 채로 걸어오자 흰 머리가 바람에 날려 마치 선풍도골의 모습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할 찰나, 마초남이 입을 열었다.
 “네가 물 뜨러갔냐?”
 “예, 어르신.”
 서주혁이 크게 대답하며 이곳까지 어렵게 들고 온 물 지개를 놓고 팔을 주무르며 대답하자, 마초남이 머리를 긁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거, 아픈 놈이 하지 말라니까 왜 나서서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마초남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다 낫고 건강해져야 모과주 값만큼 놈을 써먹는데, 괜히 아픈 놈이 저러다가 골병이 들면 아까운 약값만 더 들지 않겠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마초남은 왼손을 뻗어 물 지개를 가볍게 들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고했다.”
 집 안에서 마초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주혁이 피식 웃었다.
 
 휭.
 서주혁의 발차기가 매섭게 허공을 가르자,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퍼졌다.
 매번 식사 후에는 항상 몸을 가꾸는 것이 일상이었다.
 머리카락 끝에 방울진 땀이 땅에 떨어지자 거칠게 머리를 긁은 서주혁이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후욱······.”
 앞으로 농사를 지을지, 아니면 화전을 가꿔서 살아갈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단련하는 일은 거르지 않는 것은 머리가 복잡해서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꾸 세상으로 나갈 생각만 하면 무언가 두렵고 신경이 쓰였다.
 ‘왜지? 내가 뭔 짓을 했었나?’
 잠시 앉아서 멍하게 생각을 하던 서주혁이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벌떡 일어나더니, 재차 손과 발을 뻗었다.
 “흐압!”
 서주혁은 마치 일권, 일각에 근심을 실어 날리기라도 하려는 듯 힘차게 뻗었다.
 그 위세가 매섭긴 하나 군관이라면 모두들 배우는 박투술일 뿐이었다.
 무공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고 무술이라고 하면 그나마 적당할 것이다.
 물론 능력이야 차고 넘치지만 일개 군관이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경우는 드문 탓일 게다.
 뒷배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한참 동안 손발을 휘두르는데 저 뒤에서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서주혁은 손과 발을 계속 뻗으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이십니까?”
 서주혁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초남은 대답 대신 서주혁의 몸놀림을 지켜보며 말했다.
 “움직이는 게 제법이다만, 뭘 그리 무거워하는 게냐?”
 그 말을 들은 서주혁이 뻗던 손을 멈추곤 마초남을 향해 돌아서며 의아하게 물었다.
 “무겁다니요?”
 마초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 네 손발이 무겁다는 것이 아니다. 네 머리가 무거우니 손발이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음······.”
 서주혁은 침음을 흘렸다.
 마초남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봤다는 말일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데 마초남이 서주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을 단련할 때는 그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데 어찌 몸을 단련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내려온 그가 소매를 슬쩍 걷곤 허공에 장난을 치듯 손을 몇 번 뻗으며 말했다.
 “신체는 단단하지만 그만큼 상하기도 쉽다. 어느 순간 삐끗하면 그동안 쌓았던 공은 허사가 되는 법이야.”
 “그럼 걱정이 많을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주혁이 손을 모으고 묻자 마초남이 뒷짐을 지며 말했다.
 “걱정이 널 찾아오는 게냐? 아니면 네가 걱정을 찾아가는 게냐?”
 “······.”
 그 말에 서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 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달릴 필요는 없겠지······.’
 지금 당장 불안한 마음이 들어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재수가 없다면 황자가 내 용모파기를 황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풀었을 수도 있고, 더 재수가 없으면 동창의 무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을 수도 있겠지.’
 이미 실제로 이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채 알지 못하는 서주혁은 이렇게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바위에 머리가 부딪친 다음부터 기억력이 자꾸자꾸 줄어드는 듯한 서주혁이다.
 하지만 서주혁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계속 생각을 했다.
 ‘어르신의 말씀은 무엇일까?’
 어쩌면 자신이 사서 걱정을 한다는 뜻일 수 있으리라.
 당장은 알 수 없는 먼 훗날을 지금 걱정해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날,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옳은 길일 게다.
 훗날 그것이 쓸모없다고 해도 근심과 씨름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현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당장 방금 전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주혁이 그제야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들어 마초남에게 감사를 표하려는데, 마초남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어르신······.”
 잠시 집을 바라보던 서주혁이 집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집 안에서 마초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 다 했으면 밥 차려라!”
 “예!”
 서주혁이 급히 부엌을 향해 뛰어갔다.
 
 ***
 
 슬슬 완연한 봄이 되어 사방에 녹음이 드리웠다.
 옥화산의 정경도 처음 왔을 때에 비해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아마 계절이 바뀌며 변하지 않는 것은 몇 가지 안 되리라.
 하지만 옥화산의 정경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서주혁과 마초남이었다.
 “합!”
 군도를 휘두른 서주혁은 곧바로 상단을 향해 군도를 뻗어 나갔다.
 후웅, 휭!
 그 군도에 제법 힘이 실려 있는 모양인지, 군도가 뻗어 나가자 파공성이 공터를 울렸다.
 “흡!”
 하지만 서주혁은 물 흐르듯 움직여야 할 곳에서 도리어 몸을 주춤했다.
 ‘뭐였더라? 여기서······ 이렇게 했던가?’
 근래에 와서 계속 예전의 생각들이 잘 안 났다.
 하지만 그 이유가 왜인지를 도통 모르니 정말 답답한 마당.
 서주혁은 계속 생각을 하며 도를 들고 인상을 그렸다.
 ‘씨벌, 이 나이에 치매는 아닐 테고······ 근데 내 나이가 올해 몇이더라?’
 머리를 긁적거리던 서주혁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도를 휘두르는 내내 집중이 안 됐었으니, 그냥 오늘은 이 정도만 해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집중이 안 되는 이유라면 바로 옆에서 장작을 패는 마초남 때문이리라.
 ‘씨벌, 도의 무게만 오십 근이 넘는데, 저걸 저렇게 휘둘러?’
 서주혁도 처음 군도를 들 때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 군도로 조악한 검법을 한다 치면 그 날은 팔에 근육통이 생겨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초남은 오십 근짜리 대도를 한 손으로 휘두르니······.
 자신은 새파랗게 젊은데도 불구하고 저런 것은 흉내도 낼 수 없었다.
 군도가 세 근에서 네 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니 그야말로 괴물이라 할 만하다.
 “쩝.”
 결국은 흥취가 없어진 서주혁이 입맛을 다시며 주먹을 거두고 마초남을 바라보았다.
 휘잉! 쩍!
 봉을 휘두르듯 포악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쩍쩍 쪼개졌다.
 마초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쪼개진 장작을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오늘은 빨리 끝나는구나.”
 “오늘은 좀 빨리 끝났습니다.”
 서주혁이 대답을 하며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굵디굵은 장작이 힘없이 픽픽 쪼개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겠지만 서주혁은 아니었다.
 벌써 이 놀라운 광경을 몇 달째 지켜보고 있자니 감흥이 사라진 것이리라.
 한참 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서주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에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라.”
 마초남이 무심하게 대답하며 장작 패기를 계속하자 서주혁이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반응에 마초남의 흰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대도를 땅에 꽂아 넣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말해라. 무슨 일이냐?”
 마초남의 말에 결국 서주혁이 다시 용기를 내 말했다.
 “저도 어르신처럼 힘을 갖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서주혁의 말에 마초남이 되물었다.
 하지만 서주혁은 더욱 용기를 냈다.
 서주혁의 생각이 맞는다면 마초남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누가 보아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마초남은 무림인.
 그것도 아주 대단한 무림인이 분명했다.
 무림인들은 함부로 외인에게 자신이 지닌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서주혁은 지금 마초남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도 어르신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문제가 없도록 말입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해 주셨잖습니까. 힘이 있어야 한다고요.”
 서주혁이 마초남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하자 마초남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초남은 이내 입을 열었다.
 “······장작을 패고 있어라.”
 “······.”
 서주혁이 의중을 몰라 울타리에서 내려오며 마초남을 바라보자 마초남이 말을 뱉으며 돌아섰다.
 “생각해 보겠다. 그동안 장작을 패고 있어라.”
 집 안으로 휘적휘적 들어가는 마초남을 보며 한숨을 쉰 서주혁이 이내 나무 밑동 위에 올라가 있는 장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범이 양각되어 있는 거대한 은색 대도.
 “······.”
 이내 다시 집을 한 번 본 서주혁은 박혀 있는 도의 도병을 잡고 힘주어 뽑았다.
 “흐읍!”
 양팔에 힘줄이 섬과 동시에 뽑혀 나오는 도를 제대로 잡아들자 팔목이 빠질 듯이 땅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한 손으로 휘둘렀다고?’
 새삼 마초남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내 낑낑거리며 장작 앞으로 걸어간 서주혁이 도를 치켜들었다.
 마음 같아선 머리 위로 들었다가 콱 내리꽂고 싶은데 자신이 없었다.
 “하압!”
 서주혁은 대도를 장작 위로 두 자 정도를 치켜들었다가 힘을 주어 내리찍었다.
 콰작!
 장작이 이등분되어 양옆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서주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도가 장작을 찍어 쪼개고 나서 나무의 밑동에 박혔기 때문이다.
 “······제기랄.”
 서주혁은 뜨악한 표정으로 다시 집을 한 번 바라보곤 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한편 집 안으로 들어온 마초남은 자리에 앉았다.
 “후우······.”
 지금껏 무책임하게 녹림을 떠난 것이 벌써 오십 년도 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녹림은 다른 무림 문파들이 쉽게 건들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서주혁, 저 아이의 말을 듣자면 요즘의 녹림은 그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삼류 흑도 방파 취급을 받고, 제 스스로 몸을 사리며 숨죽이고 사는 산 도적들.
 그래서 관에서도 이제 토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존재.
 바로 며칠 전 호기심에 물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녹림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제까지 녹림은 생각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지내왔다.
 자신의 변덕이 분명 녹림의 세가 기우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두목이 사라진 산채는 세가 급격히 기울듯, 녹림 역시 그러할 것이다.
 자신은 모든 녹림의 두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 이후로 녹림을 묶을 산적 역시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녹림왕의 무공은 일인전승.
 그런데 자신이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은 채로 훌쩍 녹림을 떴으니, 후인들이 녹림왕의 무공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거친 산적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녀야 할 텐데,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닌 자가 무엇을 하러 산적들 사이에 들어오겠는가?
 딴생각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이게 정말 최선의 방법일까?’
 지금 자신이 녹림으로 가기엔 너무도 늦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요 며칠 고민을 했었는데 마침 서주혁이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말을 해 온 것이다.
 ‘그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이다.’
 최고의 두목으로 남고 싶었지만, 의도치 않게 최악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제 진짜로 짊을 내려놓고 싶었다.
 “후우!”
 한숨을 쉰 마초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한쪽의 벽장을 열고 보자기를 꺼냈다.
 언제 넣어 놨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인 보자기.
 마초남은 무슨 보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헝겊을 풀어 헤치자, 마침내 낡은 고서 몇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얼마 만에 보는 건가!”
 마초남이 잠시 울컥 하는 느낌에 침을 삼키고 나서 두터운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맨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천지무극공(天地武極功).
 
 용사비등의 필체로 써진 글씨.
 그것은 다름 아닌 녹림왕의 무공 중 하나였다.
 녹림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녹림의 무공은 그렇지 않았다.
 무림의 호가사들은 하나같이 말하곤 한다.
 녹림의 최고 절기는 맹수포효도(猛獸咆哮刀)라든가 장강용승천권(長江龍昇天拳)이라고.
 그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녹림왕의 무공은 아무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마초남은 천천히 천지무극공의 첫 장을 펼쳤다.
 천지무극공의 구결은 아니지만, 일종의 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곳엔 책 겉표지의 필체와 똑같은 필체가 멋들어지게 쓰여 있었다.
 
 천하의 빼어난 어떤 절기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희대의 신공이 바로 이 천지무극공이다.
 풍운아가 이 비급을 얻는다면 용이 여의주를 얻은 격이니 감히 천하를 도모할 만하리라!
 
 그야말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희대의 비급은 다름 아닌 마공(魔功)이었다.
 일대 녹림왕이 이 비급을 얻게 된 뒤로, 줄곧 녹림왕의 무공이 되어 버린 게다.
 그리고 녹림왕은 이 비급이 어째서 마공인지 아주 약간은 깨닫게 되었다.
 이내 용사비등의 필체 밑으로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가 이어졌다.
 
 허나, 성격이 더러운 놈이 천지무극공을 본다면 더 더러워질 것이며, 무식한 놈이 이 천지무극공을 본다면 그놈은 바보 천치에 무식의 극치가 될 것이다.
 
 그 글을 마저 읽은 마초남이 굳은 안색으로 침을 삼켰다.
 이내 마초남은 천지무극공의 첫 장을 쭉 찢어서 꾸깃꾸깃 구겼다.
 “암, 무공을 익히는 데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그랬다.
 마초남은 서주혁을 제자로 들이기로 마음먹은 게다.
 처음 서주혁을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절대 그러려던 마음이 없었다.
 그저 몸이 편하도록 일꾼 부리듯 부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자신이 오대 녹림왕인 건 사실이고, 전대의 녹림왕들이나 자신의 사부처럼 녹림을 책임 없이 내버려 두고 훌쩍 떠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행한 일에 책임은 져야 하는 법.
 자신의 무책임함을 서주혁을 통해 갚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래도 이제 제자로 들일 텐데······ 이런 건 볼 필요가 없지.”
 마초남은 조용히 책을 내려놓고 벽장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지무극공의 첫 장은 아무도 모르게 불타는 아궁이 속으로 사라졌다.
 
 부엌에서 밖으로 나오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마초남은 산꼭대기에 걸린 해를 슬쩍 보곤 서주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흐읍!”
 쩍!
 마초남이 꽤나 장고(長考)를 했는데 여전히 장작을 패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 마초남의 마음이 한 시름 놓였다.
 “그놈은 어디서 찾았느냐?”
 마초남이 아무렇지 않은 듯 휘적휘적 걸으며 서주혁에게 묻자, 서주혁이 손에 쥔 도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장작을 패기가 힘들어서 주변을 샅샅이 뒤지다가 창고에서 발견했습니다.”
 “눈썰미 하나는 좋구나. 여기로 와 보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주혁에게 손짓을 하자, 서주혁이 도끼를 나무 밑동에 박아 두곤 어깨로 땀을 훔치며 걸어왔다.
 이윽고 서주혁이 마초남의 앞에 서자, 마초남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진정 네가 힘을 갖고 싶은 게냐?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전능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게다.”
 “······.”
 서주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초남은 힘을 지녔기에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예. 그래도 힘을 갖고 싶습니다.”
 서주혁이 이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마초남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가르침을 배운다면 넌 필시 네가 살고 싶은 대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나와의 약조를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이래도 마음이 변치 않겠느냐?”
 이 말에 서주혁은 한 번 더 침묵을 했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길.
 진정하게 원하는 길인지는 몰랐으나, 한 번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평생을 가도 깨닫기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였다.
 첫 질문보다 배는 더 시간을 끌었을 때쯤, 서주혁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마초남의 눈이 마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마초남이 무엇을 시킬지는 몰랐다.
 지금까지 자신이 마초남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녹림 출신이라는 것과, 지나치게 남자답다는 것.
 그리고 힘이 정말 겁나게 세다는 것뿐이리라.
 비록 마초남이 자신을 일꾼 부리듯 부리고, 부엌때기로 쓰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맨날천날 마초남이 구타를 하긴 하지만, 그것도 다 어느 정도 애정이 있어서 그러한 것.
 어떻게 보면 부모가 없이 고아였던 서주혁이기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정을 주며 느끼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주혁은 믿고 싶었다.
 마초남은 열기로 이글거리는 서주혁의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면······ 구배(九拜)를 해 보아라.”
 고작 일꾼으로 들이려던 놈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수년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인가, 마초남은 말을 하며 코끝이 찡함을 느꼈다.
 서주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천천히 절을 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이 시간만은 경건하게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어느새 검게 푸른 하늘에 별들이 수도 없이 몰린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른 장작이 소리를 내며 타오르자, 불티가 하늘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마초남은 아른거리는 주홍빛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는 나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보다 더 힘들 게다. 넌 똑똑하니 잘 알아들을 게야.”
 그 말에 서주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내가 네게 줄 것은 한 가지 내공 구결, 그리고 한 가지의 도법과 다른 세 가지의 무공이다. 그중 가장 처음 알려 줄 것은 천지무극공이라는 내공 구결이다.”
 마초남은 이내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일생으로 처음 들이는 제자이다.
 자신이 녹림의 산도적으로 태어나 무력으로는 그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문파나 명문세가의 고수들에 비하면 지식은 다소 뒤처질 것이다.
 그래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이는 제자에게까지 그런 미진함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이 세상의 이치는 무(無)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무(無)는 유(有)를 낳는다. 유가 있음으로 무(武)는 유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 무(武)가 극에 달하면······ 무극(武極)이자, 또한 무극(無極)이다.”
 그 말에 서주혁은 당황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초남이 껄껄 웃으며 서주혁의 어깨를 툭 쳤다.
 “아서라. 아직 네게는 어림도 없는 경지이니라. 가슴에만 새겨 두거라.”
 “예······.”
 서주혁은 내심 씁쓸했다.
 명석하기로는 누구에게 뒤지지는 않는다 생각했거늘, 마초남의 말이 모두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초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무공만큼 말주변이 있고 지식이 깊다면, 서주혁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더 쉽게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현재 자신이 서주혁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내 마초남은 일다경에 걸쳐 천지무극공의 구결을 전해 주며 알기 쉽도록 최대한 설명했다.
 그 일다경이 끝나자, 서주혁은 아까보다 더욱 굳은 표정이었다.
 마초남은 그 표정을 보고 혀를 차며 물었다.
 “다 못 외웠느냐?”
 그 말에 서주혁이 도리질을 하며 대답했다.
 “거의 다 외우긴 하였습니다만······ 어렵습니다.”
 “그럼 됐다. 앞으로 그 구결을 되뇌며 운기를 해라. 그리고······.”
 마초남이 장작 하나를 더 던져 넣고 말했다.
 “도법을 비롯한 무공은 엄하게 가르칠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마초남의 말에 서주혁이 침을 삼키며 대답하자 마초남이 서주혁의 등을 팡 치며 말했다.
 “쯧쯧. 벌써부터 쫄지 마라, 이것아!”
 “컥!”
 서주혁은 마초남의 손이 등을 치며 전해지는 거력에 앉아 있던 통나무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며 마른기침을 토했다.
 그걸 본 마초남이 재빨리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어이구, 미안하다······.”
 
 ***
 
 아침이 밝아오자 서주혁은 어김없이 군도를 휘둘렀다.
 벌써 마초남의 제자가 된 지 일 년이 지났다.
 무공을 빨리 배우고 싶은 서주혁의 바람을 외면한 마초남은 기본이 충실해야 한다며 체력을 기르라고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주혁은 내공심법인 천지무극공을 익히기만 할 뿐, 다른 무공은 익히지도 못한 채 군도를 휘두르고 있었던 탓이다.
 휭, 후웅!
 거칠게 도를 휘두르던 서주혁은 이내 군도를 휘두르려다가 손을 멈췄다.
 “어?”
 휭.
 “아, 아닌데······.”
 인상을 그리며 머리를 긁적이던 서주혁.
 다시 도를 들어 사방을 그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것도 아니고, 이걸로 이어지던가?”
 서주혁이 하는 것은 이곳에 와서 매일같이 갈고닦던 군문의 도법.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이 부분, 저 부분, 해서 중간 중간 몇 개를 까먹었는데, 어떻게 된 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조금씩 더 까먹는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대체 왜 이러지? 왜 생각이 갑자기 안 나냐?”
 답답하다는 듯 군도를 흙바닥에 내팽개친 서주혁이 욕설을 내뱉으며 성을 냈다.
 다시 군도를 든 채 처음부터 차근차근 하던 서주혁은 아까 했던 초식마저 생각이 안 나자 결국 소리를 질렀다.
 “으아! 이런 샹! 대체 왜 생각이 안 나는 거냐!”
 그 모습을 저 멀리서 지켜보던 마초남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주혁아. 그것이 바로 천지무극공의 부작용이란다. 너도 내 정도의 성취만 된다면 다시 머리가 좋아질 게야······.’
 하지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다.
 저놈의 성격이라면 필시 자신의 멱살을 잡으려 들지도 몰랐다.
 어찌된 것이, 천지무극공을 익히고 나서부터 성격이 더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존장에 대한 예의라도 있었지, 지금은 열 받으면 애비 애미도 못 알아볼지 몰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마초남이 돌연 눈을 빛냈다.
 갑자기 서주혁이 군도를 꼬나 쥐더니 아까완 다르게 끊임없이 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서주혁은 광소를 뱉었다.
 “으하하하! 그래, 이거였다! 이거야!”
 그 모습을 보던 마초남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 네 초식을 무한 반복하면서 기억이 났다는 듯 중얼거리다니!
 분명 처음에 왔을 때 저 도식은 삽십육 초식으로 이루어진 무공이었는데, 지금은 네 초식짜리 도식이 되고 말았다.
 “으하하하하! 그래, 난 천재야!”
 계속 광소를 터트리며 도를 휘두르는 서주혁.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마초남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식하던 내가 천지무극공을 익혀도 쟤만큼 무식하진 않았는데······ 진짜 주혁이 쟨 더럽게 돌 머리 인가보구나.”
 서주혁이 머리를 다치며 기억력이 감퇴되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 천지무극공만으로 저렇게 무식해졌다고 생각한 마초남은 딱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내가 미안하다, 주혁아!”
 하지만 서주혁은 마초남의 내심도 모르는 채 도를 휘둘렀다.
 그리고 어느새 네 초식으로 이루어졌던 도식은 세 초식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또 다시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서주혁은 더 이상 두 초식으로 무한 반복이 되는 도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마초남이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게냐? 그런 자세론 호랑이는커녕 하룻강아지만도 못하다! 호랑이는 산중왕, 일보 일보에 개세(蓋世)의 무게가 담겨야 하지 않겠느냐!”
 마초남이 웃으면서 말한 것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으아!”
 서주혁은 악을 쓰며 발을 뻗었다.
 서주혁은 하루하루 근육통이 끊일 날이 없었다.
 덕분에 근육통이 쌓이고 쌓여 발을 뻗는다 해도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멍청한 놈! 일보를 내디디라 했더니 반보를 내딛는구나!”
 마초남이 버럭 소리치며 자비 없이 서주혁의 하단을 발로 찼다.
 중심이 흔들려있던 서주혁은 마초남의 거침없는 발차기에 힘없이 흙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서주혁은 쓰러지기가 무섭게 오뚝이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세를 취했다.
 “다시 하겠습니다.”
 서주혁이 재빨리 말하며 다시 자세를 잡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마초남이 입꼬리를 올렸다.
 서주혁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만, 마초남은 내심 서주혁이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렇게 굴렸다가 서주혁이 골병이라도 들지 않을까 고심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처음 생각보다 수련의 강도를 더욱 올려 버렸으니!
 군부 출신이라고 하더니 수련을 할 때만큼은 마치 얼굴이 철면이라도 된 양 안색의 변화가 없었다.
 사실 녹림왕의 절기치고 호락호락한 무공은 하나도 없었다.
 당장 지금 엄하게 가르치고 있는 신법과 경공 역시도 그러했다.
 번호날지보(飜虎?地步)!
 번용상천행(飜龍翔天行)!
 범이 땅 위를 위풍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본떠 만든 신법과 용이 하늘을 노니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따서 만들어진 경공이었다.
 이 두 가지의 신법은 같은 듯하면서도 매우 달라, 익히기가 난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리 둔할 수 있느냐? 일보에 힘을 실어 진각을 밟지 않고선 개세의 기개가 나올 수 없느니라!”
 소리를 치며 단단한 부지깽이로 서주혁을 내리쳤다.
 가볍게 뻗은 부지깽이는 순식간에 서주혁의 어깨와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를 때렸다.
 따다닥!
 “크흑······.”
 부지깽이가 강타한 세 군데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지만 몸을 더더욱 바로잡는 것으로 아픔을 대신했다.
 보법과 경공만 끝나면 조금 편하게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주혁의 고질병이 또 다시 나타났다.
 거칠면서도 도도한 맹수의 발걸음처럼 일보를 뻗고, 다시 옆으로 반보를 미끄러지며 일보를.
 그리고 또 다시 발을 뻗던 서주혁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여기서 이렇게······ 였나?”
 “였나라니! 이런 무식한 놈!”
 마초남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부지깽이를 휘둘렀다.
 “야! 야! 야! 이놈아! 대체 가르쳐 주면 다음 날 까먹는 놈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자신이 무식하던 놈을 더 무식하게 만들었다지만, 가르치며 이런 상황이 오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마초남이 부지깽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아악! 사부님, 아프잖습니까!”
 “이놈아, 아프라고 때리는 거다! 이리 당장 오지 못해!”
 생각을 못하며 고전하던 마초남은 부지깽이를 치켜들고 호통을 치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서주혁이 번용상천행을 익숙하게 밟아 가며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저놈은 무어란 말이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마초남이 헛웃음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을 못하지만 막상 급할 때가 되니까 저도 모르게 몸으로 흘러나오는 것.
 하도 패면서 가르쳐서인지,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을 하는 모양이었다.
 반면 서주혁은 자신이 번용상천행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마초남의 부지깽이를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초남이 서주혁에게 제일 엄하게 할 때는 다름 아닌 도법을 배울 때였다.
 천지무극공의 구결에 맞게 창안된 도법인 무극뇌전도(武極雷電刀)!
 서주혁은 이것을 열 근짜리 쇠막대로 익혀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단단한 막대의 끝을 도병이라고 생각하며 쉴 새 없이 휘두를 때마다, 팔목이 끊어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쇠막대에 들어가는 힘이 현저히 줄었다.
 “멍청하구나! 그래서 어찌 사내라 하겠느냐? 겨우 열 근이다, 주혁아!”
 그와 동시에 서주혁의 군도로 서주혁을 흠신 두들겼다.
 “끄윽······.”
 인상을 쓰며 서주혁은 더욱 강하게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서주혁의 손 가죽이 벗겨지며 핏물이 쇠막대를 타고 뚝뚝 흘렀지만 마초남은 더욱 크게 호통을 치며 엄하게 다스렸다.
 마초남의 호통이 귓전에 부딪칠 때마다 서주혁은 이를 꾹 물고 더욱 세게 휘둘렀다.
 예전에 사용하던 군도와 비교하면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는 더 무거운 쇠막대였지만, 이를 악물고 휘두르고 휘둘렀다.
 하지만 여전히 마초남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초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서주혁이 그 말에 찔끔하며 조심스럽게 쇠막대를 내렸다.
 “잘 보아라.”
 마초남이 인상을 풀지 않은 채 오십 근짜리 대도를 치켜들었다.
 “천지무극공과 무극뇌전도는 서로 일맥상통한다. 강렬한 패기를 담아 휘둘러라. 지금 네 허수아비 같은 움직임으론 정전기조차 나지 않는다!”
 이내 오십 근짜리 대도를 양손에 잡은 마초남이 돌연 도를 잡아 휘둘렀다.
 그 큰 대도가 허공에 휭휭 소리를 내며 움직이다 어느새 기이한 소리가 났다.
 츠츳!
 서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손이 찢어지며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던 고통도 잊어버리고 말 정도로 놀랐기 때문이다.
 이내 마초남의 대도에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뇌전이 번쩍이다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를 수십 번 휘두르니, 허공에 뇌전 수백 개가 잔상을 남기며 눈과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서주혁이 그 기묘한 조화에 얼이 빠져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내 마초남이 도를 멈추고 땅에 박으며 말했다.
 “무극이라 해도 자연의 이치가 스며들어 있다. 이 자연은 음과 양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음과 양은 서로 부딪치면 거력도 만들어 내고, 뇌전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늘에서 우레가 치고 뇌전이 떨어지는 연유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근데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담겨져 있지 못하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서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쇠막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보조를 하는 나머지 손의 지문마저 닳다 못해 껍질이 벗겨져 진물이 흐르고 피가 나서 손에서 쇠막대가 미끄러져 날아가도, 마초남은 일체의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서주혁은 그때마다 자신을 더더욱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수개월이 지나자 서주혁의 모습도 사뭇 달라졌다.
 “하앗!”
 마치 옥화산을 절단 내려는 듯한 기합과 함께 뻗어 가는 쇠막대의 뻗음에 파직 하는 방전음이 들리더니, 몇 초식을 더 뽑아내자 종래에는 미약한 전광(電光)이 치직거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마초남도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건만!’
 천하의 돌대가리인 서주혁이 전광의 경지에 도달하다니!
 그것은 서주혁도 마찬가지였다.
 서주혁은 자신이 만들어낸 신비한 조화를 보며 마구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이것이 바로 무극뇌전도다!”
 그 모습에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던 마초남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저런 무식한 놈······.”
 전반부 사 초식, 후반부 사 초식으로 이루어진 무극뇌전도의 전반부가 어째서 두 초식으로 줄어 있단 말인가.
 “야 이 무식한 놈아! 초식 두 개는 어따 팔아먹고 두 개만 디립다 반복하고 있는 게냐!”
 마초남이 지켜보고 있던 지붕에서 표홀하게 내려서며 부지깽이를 들자, 서주혁이 기겁했다.
 “으아! 전반부 다 했단 말입니다!”
 “이놈아! 난 네게 초식 네 개를 가르쳤다!”
 마초남이 코앞까지 달려와 부지깽이를 휘두르자 서주혁이 까먹고 있던 삼 초식을 이용해 부지깽이를 막아 내고 이화접목의 묘리로 몸을 틀어 번호날지보로 마초남의 사정권 밖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던 마초남은 또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필시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항상 맞고 고통과 인내로 무공을 배우다 보니 몸이 무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신기하기 짝이 없으니, 마초남도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게다.
 “허 참! 저런 정신 나간 놈! 대체 어떻게 된 놈인지······.”
 그래도 돌에 새긴 글이 종이나 머리에 새긴 글보다 더욱 오래 그 글귀를 전한다고 하지 않던가?
 마초남은 결국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마초남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이게 자꾸 도망을 쳐?”
 마초남은 벌써 저만치 도망친 서주혁을 향해 부지깽이를 번개처럼 던졌다.
 휭!
 “꾸엑!”
 마초남이 던진 부지깽이가 서주혁의 뒤통수에 명중하자 서주혁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다.
 
 ***
 
 서주혁이 항상 내공심법과 도법, 신법만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수련은 하지 않고 마초남을 따라 산을 올라갔다.
 서주혁은 마초남의 의중이 궁금하여 산꼭대기에 올라가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 마초남에게 물었다.
 “사부님, 이곳은 어째서······.”
 “오늘은 좀 다른 것을 가르쳐 주겠다.”
 “지금까지 배워 왔던 것 말고 말입니까?”
 서주혁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는 모습에 마초남은 때리며 가르치던 평소와는 달리 쓴웃음을 입에 걸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무공은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옥화불엽수(玉化拂葉手)라는 수공이니라.”
 서주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남은 소매를 걷으며 손을 뻗곤 말했다.
 “이것은······ 산의 잎이 펴고 지는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초남의 투박한 손이 신비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배워왔던 무공과는 달리, 마초남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옥화불엽수는 유(柔)함이 느껴지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마초남의 손은 봄이 찾아와 조금씩 파란 잎이 자라나는 형상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이내 천천히 내뻗은 손은 꽃이 만개하듯 활짝 피며 사방으로 부드럽지만 단단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것도 잠시, 힘차게 기운을 뿜어내던 손은 어느새 비응의 발톱처럼 살짝 구부러지더니 이내 떨어지는 낙엽처럼 기이하고 변칙적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남자라면 병장기가 없어도 강호에서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이 옥화불엽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말을 하며 서주혁을 본 마초남이 이내 손을 회수해 뒷짐을 지며 말을 계속했다.
 “너뿐만 아니라 남도 지킬 수 있는······ 수련은 나중에 해도 좋다. 오늘은 편히 쉬자꾸나.”
 그렇게 말을 하며 산 저편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마초남의 모습에 서주혁이 의아함을 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도 지킬 수 있다라.’
 평생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남자의 패기와 힘만 외칠 것 같던 마초남이 옥화불엽수같은 유도(柔道)의 무공을 창안하다니!
 ‘어떠한 이유가 있는 건가?’
 서주혁의 머리는 그야말로 삼류무사만큼도 못 됐다.
 하지만 그의 눈치는 일류고수의 실력만큼이나 대단했다.
 이내 마초남의 옆에 선 서주혁이 산 정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부님······ 왜 옥화불엽수를 만드신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병장기가 없을 때를 대비해서 만든 수공이라고.”
 마초남이 눈썹을 꿈틀거리곤 대답하자, 서주혁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뇨. 그냥 이 수공에 어떠한 유래가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 말에 마초남이 의외라는 듯 서주혁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다시 산 저편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이로다.”
 그 말에 서주혁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묻지 말라는 것을 물었다가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맞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마초남이 바라보는 것은 산 저편이 아니라, 자신의 추억 속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3장 남자, 진짜 남자가 되어 가다
 
 
 으르렁!
 숲속에 맹수의 사나운 포효소리가 퍼졌다.
 묵랑(墨狼)!
 늑대들 중에서도 꽤나 사납고 몸집도 큰 놈들이다.
 전설의 청랑(靑狼)이나 혈랑(血狼) 같은 놈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만나면 두려운 존재들임에 틀림없었다.
 묵랑도 표정이 있을까?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듯한 착각을 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묵랑들 사이에 오롯이 선 사내는 전혀 겁먹지 않은 듯 보였다.
 상의를 탈의한 채로 하의만 걸치고 있는 사내의 몸은 정말이지 조각이 아닐 수 없었다.
 두꺼운 이두, 날렵한 삼두!
 탄탄한 가슴과 그 밑으로 연결된 복근의 사이를 보자면 약간 과장을 해서 그곳에서 살아도 될 만큼 대단했다.
 쭉 뻗은 허리를 따라 올라가는 두꺼운 근육을 보면 흡사 굵은 나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내가 양팔을 펴자 남자의 멋에 마침표를 찍는 등 근육이 맥동했다.
 마치 마초남을 연상케 하는 사내······ 그 사내는 놀랍게도 서주혁이었다.
 마초남과 사 년을 함께해서 근육까지 닮아 버린 것일까?
 서주혁의 몸이 조각같이 잘 짜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탈태환골을 했다고 해도 믿으리라.
 서주혁은 양팔을 편 채로 잔뜩 독이 올라 있는 묵랑들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하하하하, 하루살이들, 다 산산조각 내 주마!”
 크헝헝!
 서주혁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열댓 마리의 묵랑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
 거대한 묵랑이 허공을 가르며 서주혁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은 정말이지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서주혁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다가오는 흑랑을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읏차!”
 뻑!
 서주혁은 마초남이 항상 강조하던 것을 잊지 않았다.
 
 “주혁이 이놈아! 놈들이 떼로 덤빌 때는 대장을 한 방에 보내야 한다. 죽빵을 후려 갈겨서, 훅 보내는 게야. 알았느냐?”
 “사부님. 그······ 죽빵이 뭡니까?”
 “아가리.”
 “아가리요?”
 “턱주가리 말이다, 주혁아!”
 “아!”
 
 서주혁의 주먹이 어김없이 대가리에 꽂힌 묵랑은 깨갱 할 새도 없었다.
 날아오던 속도보다 곱절은 더 빨리 날라 숲 어딘가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서주혁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번째로 자신의 손을 물어뜯으려는 묵랑이 이빨이 다가오자, 손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세 번 변화하더니 이내 묵랑의 턱을 올려쳤다.
 깨갱!
 묵랑은 복날 뚜들께 맞는 개처럼 형편없는 울음소리를 흘렸지만 소용없었다.
 서주혁은 공중에 떠 있는 묵랑의 꼬리를 잡고 풍차처럼 회전했다.
 뻐버버벅!
 묵랑을 크게 휘둘러 다른 묵랑들을 쳐 낸 서주혁은 허공으로 묵랑을 휙 던지고 양팔을 펼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일다경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났을 때, 서주혁의 주변엔 꼬리를 말고 깨갱거리는 묵랑들로 가득했다.
 서주혁이 마지막 묵랑을 잡아 목을 팔로 조이자, 서주혁의 이두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하하하하, 항복할 테냐?”
 서주혁이 어느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묵랑을 보며 팔을 풀었다.
 이내 땅을 기던 묵랑들이 모두 배를 드러내고 둥그런 눈으로 서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서주혁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데, 저편에서 마초남이 걸어오다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미친놈!”
 자신이 평생 살아오면서 저렇게 무식하게 여가를 즐기는 놈은 처음 봤다.
 저번에는 신장만 일 장이 훌쩍 넘는 곰과 힘겨루기를 하며 웃더니······
 산채에 별별 놈들이 많았지만 늑대 수십 마리를 복종시키고 좋아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묵랑이라······ 산을 정복할 셈이냐?’
 사실 서주혁이 대단하긴 했다.
 정도만 찾으며 무학을 수련하는 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보니, 무공이 높아도 사람을 뛰어넘는 맹수들의 민첩함과 육감은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주혁은 그런 맹수들보다 더 맹수 같다는 것이 문제지만.
 “내가 범 새끼를 키운 게지.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이라고······.”
 게다가 무공은 어떤가?
 서주혁은 자신의 독문무공을 아주 헝겊이 물을 흡수하듯 쭉쭉 빨아들이며 성장한 서주혁은 사 년 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애가 어떻게 무공이 느는 만큼 멍청해진 거 같단 말이지······ 쯧쯧.’
 그래도 어찌하랴?
 녹림왕의 무공 특성이 이러한 것을!
 고개를 젓던 마초남은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대가리는 돌보다 더 단단해도 처음의 그 가녀린 몸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암. 그래도 남자라면 저래야지! 하하하핫!”
 
 이윽고 옥화산에 어둠이 찾아왔다.
 여름의 우거진 녹음은 어둠에 묻혔지만 마초남의 집 앞은 모닥불로 밝았다.
 타탁!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리자 마초남이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그 광경에 서주혁이 말했다.
 “사부님, 장작 좀 더 패게 도 좀 빌려 주십쇼.”
 “아서라. 야밤에 힘자랑 할 일 있느냐?”
 마초남이 손을 홰홰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내 마초남은 모닥불에 꽂아 놓았던 무언가를 돌렸다.
 서주혁이 그 광경에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게 뭡니까?”
 “꿩.”
 마초남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서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꿩은 또 언제 잡으셨답니까?”
 “주혁이 네가 늑대 새끼들이랑 씨름 할 때 잡았지.”
 서주혁은 마초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조금 다가가며 은근한 기색으로 물었다.
 “사부님······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오늘 무슨 날이지요? 할 말이 뭡니까. 불안합니다.”
 그 말에 마초남이 혀를 차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놈이 눈치만 좋아서.”
 “사부님이랑 하루 이틀 지내는 것도 아니고······ 속 시원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남자답게 말입니다.”
 서주혁의 남자답게라는 말에 마초남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좋다! 말하마. 내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네게 넘겨주려 한다.”
 그 말에 서주혁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엇을 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제가 무얼 하면 되는 겁니까.”
 “저기 귀주에 가면, 대호채라고 있다.”
 마초남이 기억을 더듬으며 서주혁을 향해 말했다.
 “가서 네가 그 산채의 채주가 되어라.”
 “예?”
 서주혁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사부인 마초남의 말이라면 다른 것은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적이 되라는 말을 받아들이기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싫습니다.”
 서주혁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자 마초남이 눈을 부릅떴다.
 “뭐야?”
 “왠지 하기가 싫습니다. 다른 거 시켜 주십쇼.”
 서주혁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과거 자신이 하던 군관이란 직업이 몸에 배어서 생긴 일종의 거부감이었다.
 마치 포졸을 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하려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듯, 군관을 하던 자가 산적을 어떻게 하냐는 말이었다.
 “시끄럽다. 이거 해.”
 “안 합니다.”
 뻑!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려던 서주혁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마초남의 손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 안 한다고 때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주혁은 마초남에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개 패듯 맞는 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무공을 배울 때보다 더욱 처참하게 얻어맞았으니!
 게다가 무공을 배울 때는 보법과 경공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막상 마초남이 작정을 하니 한 수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마초남의 구타에 못 이긴 서주혁이 양손을 들었다.
 “그, 그만! 사부님 잠깐만요!”
 “할래? 안 할래?”
 마초남이 손을 치켜들자 서주혁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로 사부님, 다른 거 하면 안 됩니까?”
 “안 된다.”
 마초남이 완강하게 나오자, 서주혁은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요.”
 마초남의 앞에서 한다고 이야기해도 내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결국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주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초남이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뭐긴, 각서지. 여기에 지장 찍어라.”
 빽빽하게 적힌 글.
 내용을 보니 자신이 하산하여 해야 할 일을 쭉 적어 둔 것이 아닌가?
 서주혁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사부님, 설마 제자를 못 믿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너랑 하루 이틀 지냈느냐? 내 손바닥 안이다. 얼른 찍지 못하느냐!”
 그 말에 서주혁이 더욱 울상을 지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서주혁은 지장을 찍으면서도 인상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런 사부님이 어디 있답니까?”
 그 말에 마초남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 사부가 이랬다.”
 “······.”
 서주혁이 할 말을 잃었는데 마초남이 지장이 찍힌 각서를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사부의 사부도 그랬고, 사부의 사부의 사부도 그랬다던데. 이게 역대 녹림왕의 관례다.”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마초남을 보던 서주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나 참······.”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제자가 생기면 똑같이 하고 마리라!’
 마음속으로 칼을 가는 서주혁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초남은 꿩고기를 들더니 말했다.
 “고기 탄다. 먹자.”
 
 고기의 힘일까?
 서주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각서에 지장을 찍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밝은 표정이 되었다.
 막상 지장을 찍고 생각해 보니 어차피 관부에서 자신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평생 동안 해 온 모든 것을 빼앗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산적은 어떠한가?
 어떻게 보면 관부와 정 반대에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유치할지 모르지만, 서주혁은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전직 관부였던 자신이 녹림을 휘어잡는 산적이 되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소소한 복수가 될 수도 있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게다.
 한참 동안 고기를 먹던 서주혁은 묵묵히 고기를 먹는 마초남을 빤히 보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사부님, 근데 아까 맞는데 힘이 예전 같지 않으시던데······ 뱀이라도 한두 마리 잡아 드릴까요?”
 “쯧쯧, 팔씨름도 못 이기는 놈이 무슨.”
 혀를 차며 핀잔을 주던 마초남이 돌연 조용히 일어나더니, 등에 매고 있던 대도의 도갑을 풀어서 서주혁에게 던졌다.
 “이건 왜······ ?”
 서주혁이 한 손으로 대도를 잡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평소에 다른 물건은 막 굴려도 저 대도만큼은 꽤나 아끼던 마초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서 자신에게 넘겨줄 줄 몰랐기에 그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주혁의 물음에 마초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 도가 바로 녹림왕의 신물인 대호도(大虎刀)다. 이제 주혁이 네가 나의 뒤를 이어 녹림왕이니, 마땅히 네 것이 아니겠느냐?”
 “아······.”
 서주혁이 그제야 감탄하며 도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범이 위풍당당하게 포효하는 듯한 형상이 양각되어 있는 은색 도.
 신물이라면 그 역사 또한 짧지 않을진대 불구하고 영롱한 은빛을 잃지 않고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녹림왕을 그저 단순한 산도적 두목 중에서도 제일 높은 두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녹림의 역사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반증일 것이다.
 지금까지 녹림을 그냥 산도적들이라고 생각했던 서주혁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천천히 대호도를 쓸어내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마초남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부님, 불초 제자 녹림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마초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주혁을 바라보았다.
 무림사에서 손에 꼽힐 절세의 명도이자 녹림의 신물인 대호도를 보고 서주혁의 태도가 또 한 번 바뀐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인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초남은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역대 녹림왕들이 절세의 패도, 그리고 절세의 힘에 대해 갈구하던 이유.
 검이나 나약한 병장기를 쓰지 않고, 우직하게 대도를 쓰는 이유.
 녹림왕의 신공인 무극뇌전도가 변초나 환식 같은 기술은 담지 않고, 오직 무거움과 힘에만 치중한 이유.
 그렇기에 절세의 명도이지만 실제로 사용하기도 힘든 대호도가 신물이 된 이유.
 그것은 간단했다.
 녹림왕의 무공인 천지무극공 때문이었다.
 천지무극공으로 머리가 더럽게 무식해지니 변초나 환식 같은 기술을 쓰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무식한 놈이 어찌 그런 복잡한 기술을 쓰겠는가?
 게다가 천지무극공에 의해 힘은 더럽게 세졌으니 무거운 도를 쓰기에 적합한 몸이 되었다.
 그렇기에 무공도 중(重)과 패(覇)의 묘리에 치중하게 되었고, 정교한 초식이 필요한 검보다 도를 쓰게 된 것이다.
 마초남은 대호도를 보며 녹림에 대해 평가절하한 스스로를 탓하는 서주혁을 보며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대호도를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마초남은 눈을 감고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주혁아.’
 
 ***
 
 “후우······.”
 마초남은 큰 덩치에 맞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서주혁이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 동안 기이하게 잠자리가 불편했다.
 “그놈이라면 잘할 게야.”
 이불을 걷어 내고 상체를 일으킨 마초남이 중얼거리곤 다시 누워 봤지만 일다경이 지나고 반시진이 지나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말똥말똥해지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이거 원······ 잠에 들기가 이리도 힘드니 어찌할꼬······.”
 눈썹을 찌푸리고 고심하던 마초남은 무릎을 치며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모과주를 담가 놓고 여섯 달 정도 후에 다시 매화주를 담지 않았던가?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술이라도 한잔하면 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난 마초남이 허전함을 느꼈다.
 분신과도 같았던 대호도가 없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에잉!”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간 마초남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별이 쏟아질듯 반짝이고 있었다.
 영롱한 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마초남은 이내 술을 묻어 놓은 바위에 다가갔다.
 “어디 보자······.”
 땅을 슬쩍 파니 이내 단단히 봉해 둔 술 단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혁이 고것과 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근 오 년만의 호사렷다?”
 주혁이를 떠나보낸 것은 언젠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걱정하며 마음조릴 수는 없는 일.
 이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봉을 걷어 내자, 진한 매화주의 향기가 풍겨 왔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