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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 마스터 1-1권

2017.08.16 조회 4,319 추천 49


 # 프롤로그
 
 조화와 균형의 상징이 되어야 할 천계에 약간의 소란이 발생했다.
 
 통찰안(洞察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통찰안’이란 신들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인간의 물건과 비교하자면 컴퓨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하는 컴퓨터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그 능력이 초월적이고 방대한 기능을 내포하고 있어 신들의 편리를 도와주는 물건이다.
 대부분의 차원우주와 함께 인류뿐만 아니라 이계 종족들의 모든 역사와 행동의 기록을 담은 초차원적인 정보 집합체 ‘아카식 레코드’도 이것을 통해 모두 정보화되고 저장된다.
 
 기존의 구시대적인 기록 장치를 대체하기 위해 통찰안이 생겨난 것도 벌써 1만 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동안 통찰안은 많은 기술 발전을 거치면서 점점 그 사용의 편리함이 더해졌다.
 그러다가 최근 인간들의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신계의 기술도 덩달아 발전한 것이다.
 
 특히나 컴퓨터의 등장을 주목하던 신들은 통찰안 역시 인간의 컴퓨터를 벤치마킹해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했으며, 그대로 신기술에 적용시켰다.
 그 덕분에 이 통찰안은 인간의 컴퓨터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최근 여러 차원이 얽힌 복잡한 문제로 신들의 업무가 급격하게 늘어났는데도 통찰안의 발전으로 인해 여유 있게 커버할 수 있었다.
 
 어떤 신은 이것은 혁명이라며 부르짖었고, 또 어떤 신은 인간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균형과 조화를 무시한 의견은 모두 묵살되었다.
 
 그리고······,
 신계의 반대 세력인 마계의 경우엔 인간의 기술을 천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한 탓에, 그들이 사용하는 마안(魔眼)은 통찰안보다 더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떤 신들은 이것을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통찰안의 업그레이드를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인간의 컴퓨터를 벤치마킹한 통찰안의 등장으로 신들의 업무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그들의 삶 또한 여유롭고 윤택해졌다.
 바야흐로 신계에도 기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술을 가져오면서 자잘한 문제도 동반되었다.
 버그, 바이러스, 혹은 해킹까지······.
 대부분은 마계의 비겁한 수작이라고 여겨지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정도의 방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런 불편을 감안하더라도 통찰안은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은 그냥 무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화면 속 마우스 포인터, 즉 커서(cursor)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통찰안, 아니 신의 컴퓨터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구인 커서의 실종으로 인해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될 정도로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차원 간의 간섭이었다.
 분명하게 분리되어 관리되던 차원들은 만능 커서의 실종으로 인해 결국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로 인해 천계에 업무엔 크나큰 차질이 생겼다. 수많은 천계의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일을 중단하고 투입되었다.
 그리고 통찰안의 정상가동을 위해 최고의 기술 요정들이 투입되었으나, 커서가 사라진 버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결국 업무용 백업파일을 분리한 후 대대적인 포맷이 실행되었다. 또한 천계용 OS라고 할 수 있는 ‘SKY XP’를 다시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통찰안을 유지 관리하는 소프트웨어 부분을 완전히 소멸시킨 후에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친 것이었지만, 인간의 컴퓨터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그냥 윈도우를 재설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요정들이 쉬지 않고 작업해서 통찰안의 기능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고야 신들도 겨우 다시 쌓여 있던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천계도 원래의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모 차원의 인간계에 조그마한 균열이 생기긴 했으나 그럭저럭 그 인간들도 차원의 균열에 적응해 가는 걸로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한 명의 원로가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그 화살표는 어디로 간 것이오?”
 
 그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모든 신들이 그 엉뚱한 발상에 크게 웃고 말았다고 한다.
 도대체 컴퓨터 속 마우스 커서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평소 통찰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그 원로의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신들은 간만에 재밌는 농담이었다며 그 원로를 치켜세웠으며 한동안 다른 신들에게도 이 엉뚱한 질문이 농담의 소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기술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요정들이 그 농담에 전혀 웃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 그냥 회귀해 버렸다
 
 뚜벅. 뚜벅.
 
 겨울밤 늦은 저녁 시간, 중년의 사내가 비틀거리며 도로변 인도를 걷고 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거친 수염이 마치 노숙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
 주변에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자 그의 추레한 외모와 함께 몸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이리저리 피해 간다.
 
 “꺼억. 좋다.”
 
 술 냄새를 사방에 풍기며 걷는 그의 근처 전자 제품 가게에선, 커다란 홀로그램 TV에서 입체 영상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던전은 이전에 비해 강력한 몬스터가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등급은······.
 
 지나치던 몇몇의 사람들은 뉴스에 관심을 보이며 창가에 서서 바라보기도 한다.
 언제나 던전 관련 뉴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중년의 사내는 그런 것 따위엔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연신 작은 소리로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사가 막혔는지 몇 번 반복을 하다 곧 짜증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쳇, 머리가 맛이 갔다더니 이런 것도 이젠 떠오르지 않네.”
 
 그리고는 곧 자조 어린 표정을 짓는 중년사내.
 그의 이름은 유정상.
 올해로 48세가 된 남자다.
 
 띠리리리.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자 주섬주섬 바지를 뒤적거린다. 반투명한 사각의 휴대폰을 꺼내자 그 위로 늙은 여자의 얼굴과 함께 ‘울 엄니’란 글씨가 홀로그램으로 떠오른다.
 그것을 확인한 유정상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곧 웃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들, 어디야?
 “어이쿠, 엄마, 어쩐 일이우?”
 ―오늘 네 생일이잖니. 그런데 빨리 안 들어오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그런데 아들,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먹었니?
 “응. 친구들이랑 한잔했지. 생일이니까.”
 ―생일엔 가족이랑 보내야지. 그런데 지금도 친구들이랑 있는 거니?
 “아니, 지금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중이지.”
 
 마치 어린 아들을 대하듯 말하는 노모와 웃으며 맞장구친다.
 사실 그의 노모는 몇 년 전 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소에서 지내고 계셨지만, 종종 이렇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20대 시절, 이렇게 늘 전화를 걸던 그 감정으로 말이다.
 노모는 치매 상태에서 용하게도 그의 생일은 잘 기억해내었고, 특히나 생일엔 잊지 않고 이렇게 전화를 거는 습관이 있었다.
 
 ―오랜만에 너 좋아하는 고기 산적 해놨으니까 어여 와.
 
 어릴 적부터 생일이면 그녀가 아들을 위해 늘 준비했던 요리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예전의 기억으로 전화를 걸고 있을 뿐이니 고기 산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것을 알고 있던 유정상이었지만, 오늘도 평소처럼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어이쿠, 맛있겠는데?”
 ―그래. 그리고 네 누나가 너 먹으라고 빵집에서 맛있는 케이크 사 왔으니까 빨리 들어와서 한 조각이라도 먹어.
 “먼저 드시지.”
 ―그래도 주인공이 없는데 그럴 수 있나?
 “역시 엄마는 의리왕.”
 ―싱겁기는······. 그리고 네 누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네네. 얼른 들어갈게요.”
 ―그래. 빨리 와.
 “네. 엄마.”
 
 예전처럼 엄마로 불러줘야 좋아하셔서 이런 나이에도 계속 엄마라고 불러드린다.
 그렇게 유정상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전화를 끊고 나서, 점퍼의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는 계속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
 
 “고기 산적인가? 어쩐지 먹고 싶네.”
 
 하지만 집에 가 봐야 고기 산적이 있을 리도 없고, 누나가 케이크를 사 왔을 리도 없다.
 당연하게도 지금 이 시간 그의 집은 비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숙식하는 조그마한 원룸.
 이미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낸 지 오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손님이 마지막으로 찾아온 게 몇 년 전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릴 정도였으니까.
 사실, 누나는 두 명의 자식을 키우기 위해 지금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이미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어버려 혼자가 된 몸이라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럴 만한 여유는 없는 것이다.
 
 오늘은 어쨌거나 그의 생일.
 그 역시도 사실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저 혼자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마셨을 뿐이다.
 그동안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살다 보니 이제는 만나는 친구도 거의 없다시피 한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큭큭 뭐, 인생이 다 그런 거지.”
 
 자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유정상.
 사실 오늘은 그의 생일임과 동시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두통에 시달려온 탓에, 그저 만성 두통으로만 여기며 별생각 없이 들렀던 병원에서 ‘뇌종양’이라는 천청벽력 같은 판정을 받은 탓이다.
 애초에 뇌종양이라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손쓰기 어려운 상태까지 진행되어버렸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생 참. 별거 없구나.”
 
 문득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자 참 한심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9급 능력자로 각성해 20여 년 동안 던전에 다니며 열심히 살아왔다. 덕분에 나름 돈도 모았고 결혼한 뒤 아들 하나를 키우며 그럭저럭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었다.
 그러나 그가 속한 팀의 무모한 던전 탐사에 그만 오른팔을 잃었고, 그와 동시에 그는 능력자로서의 힘도 모두 잃어버렸다.
 오른손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몬스터에게 공격당한 충격으로 몸속의 각성 세포가 파괴된 탓이었다.
 아무튼 그 때문에 그는 일자리를 잃어야만 했고, 더불어 가족도 잃고 말았다.
 아내는 그가 능력을 잃고 병원에 있은 지 두 달 만에 이혼을 요구해왔고, 18살의 아들은 엄마를 따라가 버렸다.
 그 기막힘에 어이가 없었지만, 집요한 요구로 결국 이혼서류에 사인을 했고 그렇게 그는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이 되지 않았는데 이젠 뇌종양 말기라니, 기가 찰뿐이었다.
 
 “이렇게 막장으로 끝나버릴 인생이었나?”
 
 비틀거리며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삐딱한 자세로 자신의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곤 사람 손을 어설프게 흉내 낸 기계 의수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게슴츠레한 눈에 밝게 사방을 비추는 보름달이 보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근처의 조그마한 다리 위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이나 나이를 먹어서도 늘 한결같은 달의 모습이 오늘따라 신비롭게 보인다.
 
 “좋구나. 좋아.”
 
 비틀거리며 다리의 난간 쪽으로 걸어간 뒤, 두 팔을 턱하니 기대며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울적함도 조금 사그라졌다.
 오늘따라 유달리 밝은 달이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뒤돌아보니 48년의 인생사가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졌다.
 
 “인생사가 허망하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구나.”
 
 푸념 섞인 음성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으려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뭔가를 느끼고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뭔가 반짝거리며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별똥별인가? 오랜만이네.”
 
 별똥별이 보일 때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생각났다.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짧은 순간이나마 마음속으로 희망했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어머니께 효도하고, 누나한테도 잘하고 싶다.’
 
 한 번도 제대로 된 효도를 해본 적이 없고, 누나에게 언제나 도움만 받았을 뿐 뭔가 해준 기억이 없는 그였기에 그것이 이 순간 가장 아쉬웠던 것이다.
 죽을 때가 되니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지독히 한심스럽지만 되돌릴 수 없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별똥별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본 후론 처음 보는 별동별인데 너무 삽시간에 사라져버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나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처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직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물고 있었던 탓에 라이터를 찾기 위함이었다.
 
 “젠장, 라이터를 어디에 둔 거지?”
 
 투덜거리며 담배를 입에서 떼던 그 순간 하늘에 사라졌던 빛이 다시 나타났다.
 
 “응? 아까 그 별똥별인가?”
 
 별똥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빛이 처음 봤던 것보다 더 강하다.
 다른 놈인가 하며 그것에 집중했는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날아가던 방향이 일순간 바뀌었다.
 그렇게 길게 꼬리를 그리며 움직이는 방향은 아래쪽.
 뭔가 심상치 않은 속도로 이동하자 어째 쎄한 기분이 든다.
 방향이 아래인 데다가 점점 빛이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방향으로 봐서는 그가 서 있는 곳 인근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빛의 꼬리는 보이지 않고 그 크기만 점점 커지자 그의 의심이 점점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전신이 경직되는 것 같은 충격이 그를 흔들었다.
 
 “어? 여, 여기로 날아오는 거 아니야?”
 
 유정상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
 
 슈아아아아아.
 
 굉음을 뿌리며 사내에게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강렬한 빛.
 
 “뭐, 뭐야?”
 
 이런 걸 경험해 본 적은 없었지만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모습이었다.
 짧은 찰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이 뒤엉켜 복잡해졌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인사불성 상태는 아니다.
 어쨌거나 현실 상황 정도야 파악할 정도의 이성 정도는 있는 것이다.
 빛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걸로 봐서는 어쨌든 그 크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 틀림없다.
 불길한 예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커다란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것이 지상에 부딪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그것으로 인해 핵폭발과도 같은 엄청난 불덩이가 사방에 퍼질 것이고, 이 도시는 온통 불바다가 될 것이다.
 어쩌면 커다란 지진도 동반되며, 인근 바다에서는 엄청난 해일이 생겨 도시들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사내의 상식으로도 저 정도 크기의 빛 덩어리라면 지금 있는 도시에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피해를 줄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누나까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다는 사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본인이야 어차피 뇌종양 말기라 그리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는 지금 그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빨리 피하라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몸이 그것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 눈앞이 번쩍거리며 시야가 확 밝아지는가 싶더니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으아아아아악!”
 
 침대에서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헉. 헉.”
 
 땀을 뻘뻘 흘리며 멍한 모습으로 잠시 있다, 곧 정신을 차렸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 사내가 침대 곁에 있던 물병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꿈이었나?”
 
 커다란 빛이 자신을 덮치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 유정상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멍한 상태로 잠시 있던 그가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강하다.
 아무래도 오후쯤인 것 같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크으.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제 마신 술이 원인인가 싶은 마음에 한참을 멍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문득 어제 병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현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휴.”
 
 뇌종양이라던 의사의 말이 꿈이었으면 했었는데, 결국 그것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의 빛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술에 취해 있던 상태여서 그런지 그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있다 곧 정신을 차리고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벽시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유정상이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오래전에 본 유명한 SF 영화 포스터였다.
 
 “예전에 내 방에도 저런 게 붙어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신이 사는 원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분명 자신의 방이 아닌 건 분명한데 어째선지 익숙한 느낌의 방이었고, 곧 그것을 기억해내고 말았다.
 
 “앗, 여긴?”
 
 결혼 전 어머니와 누나랑 살던 낡은 아파트, 그곳에 있던 자신의 방 모습이었다.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난 유정상이 서둘러 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방의 모습.
 그러나 지금 보니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그리고 작은 옷장.
 벽에 붙어 있는 여러 장의 영화 포스터들.
 한때 영화광이었던 자신을 떠올리자 황당하면서도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멋대로 납득하고 나니 마음이 풀어졌다. 그리고는 여유 있는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본다.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잠시 동안 감상에 잠겼다가 곧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이곳도 그대로네.”
 
 역시 그립던 그 모습 그대로다.
 오래된 TV에 낡은 소파, 베란다의 작은 화분들.
 부엌의 식탁엔 반찬들이 덮개에 덮여 있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조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네 생일이라고 엄마가 고기 산적 구워놨으니까 그거 데워서 먹으면 되고, 케이크도 아침에 사다놨으니 냉장고에서 꺼내 먹어. 아침에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못 깨웠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내 동생. ―누나가―]
 
 뭔가 오글거리는 글이었지만 누나는 곧잘 이런 메모를 남기곤 했었다.
 그런데 메모를 읽다 보니 뭔가 너무나도 사실 같은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생생한 느낌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정말 꿈인가?”
 
 집 안을 둘러보면 볼수록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현실적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TV를 틀어봤다.
 오래전에 나왔던 방송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촌스럽고 조잡한 화면, 거기다 방송도 오래전에 본 기억이 있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설마.”
 
 후다닥 창밖으로 다가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말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가 분명했다.
 달력을 확인해봤다.
 2017년 2월.
 정확히 26년 전이다.
 그저 꿈속의 환상 정도로만 생각하다 곧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황당한 얼굴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손을 들어보았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손과 전혀 다른 손.
 
 “멀쩡하다······.”
 
 역시나 기계 의수인 오른손도 멀쩡한 상태.
 왼손을 들어 오른손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손끝이 스쳐 지나가는 감각이 오른손에 전해져왔다.
 간단한 동작을 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끼던 의수가 본래의 손으로 돌아온 걸 보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얼굴도 만져봤다.
 피부가 매끄럽다.
 거칠던 자신의 얼굴의 피부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움이다.
 
 “과, 과거로 정말 돌아온 거야? 어떻게?”
 
 황당한 얼굴로 멍하게 서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서있다 곧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욕실로 들어갔다.
 너무 흥분한 탓에 열이 올라 찬물에 세수라도 하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욕실 안으로 들어선 후 세면기의 수도꼭지를 들어 물을 틀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
 
 젊어졌다. 확실히 오래전 기억 속의 얼굴.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나 싶었던 그런 젊음이 거울 속에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머리통 위에 낯선 뭔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거울을 바라보며 경직되어버렸다.
 잠시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
 
 “으아아악!”
 
 순간적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한 유정상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부스스한 머리위에 팔뚝만 한 뭔가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으악! 뭐, 뭐야?”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느끼고 있지 못했는데 언제 저런 것이 머리에 꽂혀 있었던 것일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거울 속에 비친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화살표 모양의 하얀색 플라스틱 패널 같아 보이는 모습.
 정수리를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상태로 절반가량이 머리 안으로 박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헉.”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모습.
 보면 볼수록 두려운 상황이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과거로 오자마자 또 왜 머리에 이런 게 박혀 있냐고. 이거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머리에 저런 걸 꽂아둔 채로 살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그보다 언제 이런 게 머리에 박힌 것일까?
 과거로 돌아온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머리에 이런 게 박혀 있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도 고통이 없는 것인가?
 일어나는 동안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고, 거울을 보지 않았다면 저런 게 머리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려움과 황당함이 교차하는 이상한 기분.
 거기다 저런 엄청난 것이 머리에 박혀 있으면 모르긴 몰라도 주변에 피가 잔뜩 흘러내려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머리 주위로 피가 흐르지도 않았고, 손을 뻗어 머리 주위를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전혀 축축한 낌새가 없다.
 
 ‘뭐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손을 들어 머리에 박혀 있는 그것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느낌의 기묘한 감각이 손에 전해져왔다.
 머리에 꽂혀 있으니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꾹 누르고 화살표를 손으로 붙들었다.
 
 ‘이거 뽑아도 괜찮은 걸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뻗어 그것을 손으로 잡은 채 힘을 주려고 하니 또 망설여졌다.
 혼란스러운 상황인건 분명하지만 이걸 뽑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머뭇거리게 되었다. 과거로 오기 전의 상황이라면 거침없이 뽑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뇌종양 말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정말 과거라면 팔팔한 젊은 나이에 어이없게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시 손을 뻗어 화살표를 한 손으로 잡아 살짝 흔들어본다.
 
 까닥. 까닥.
 
 “엇.”
 
 황당하게도 화살표는 움직이지 않고 머리가 통째로 움직일 뿐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이번에도 머리만 손의 힘에 따라 움직일 뿐 전혀 빠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처음엔 소극적으로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으니 자신도 모르게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익! 익!”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황당한 기분이었다.
 마치 머리와 일체화라도 된 것처럼 힘을 줄 때마다 머리가 딸려 가는 것 같아 목이 부러져버릴 듯했다.
 
 “헉. 헉. 도대체······.”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유정상.
 던전이 열려 예전에 비해 비상식적인 것을 많이 보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걸 언제까지나 계속 머리에 달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과다 출혈로 죽는 한이 있어도 널 뽑아버리고 말겠다! 흐앗!”
 
 그리고 30분 후.
 
 “헉. 헉. 씨발.”
 
 유정상은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숨을 헐떡이며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처음엔 뽑는 것이 두려웠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으니 도리어 오기가 생겼고, 결국 탈진해버린 것이다.
 이젠 죽는 것보다 이딴 걸 머리에 달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이 황당한 물건은 도대체 뭐냐고? 아, 진짜. 그냥 자살해버릴까?”
 
 어이가 없으니 황당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바닥에 누워 땀을 뻘뻘 흘리며 투덜거리다, 뭔가 떠오른 것이 있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피다 찾고 있던 물건을 발견했다.
 
 스마트폰.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라 반가운 느낌이다.
 버튼을 눌러 화면을 구동시키자 패턴을 요구한다.
 사실상 거의 의미도 없는 방어벽을 보며 피식 웃고는 손가락을 가져가다 멈칫했다.
 
 “뭐였지?”
 
 워낙 오래전의 일이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냥 생각 없이 크게 Z자를 그렸다.
 그런데 패턴이 쉽게 풀려버렸다.
 
 “뭐여?”
 
 허무함에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이렇게 허술한 녀석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고는 곧바로 통화 목록을 살폈다.
 의외로 많은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인간은 한 명뿐이다.
 박병석.
 초등학교 때부터 유정상의 절친이자 매형인 녀석.
 연년생인 유정상의 누나 유정인을 어릴 적부터 줄곧 따라다니더니 결국 결혼까지 골인해버린 집념의 사내였지만, 결혼식 날 유정상에게 얻어터지기도 한 녀석이었다.
 이후 누나와 알콩달콩 잘 살며 두 남매의 아빠가 되었지만, 결혼 생활 7년 차에 건설 현장 사고로 갑자기 사망해버려 누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린 놈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박병석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22살 때라면 대학생일 테고, 아마도 방학 때였을 테니 집에서 놀고 있을 공산이 컸다.
 
 ―오, 처남. 어쩐 일?
 
 역시 유정상의 전화는 칼같이 받는 녀석이었다.
 항상 유정인을 짝사랑한 탓에 유정상의 일이라면 늘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오던 그런 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박병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잠시 말문이 막혀 머뭇거렸다.
 오래전에 죽었던 놈의 목소리가 유정상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어이, 처남. 전화를 걸었으면 말해야지.
 “······.”
 ―어~이이이. 병시인아.
 “죽고 싶냐?”
 ―하하. 역시 듣고 있었구나. 처남.
 “개소리 말고 지금 집으로 올 수 있지?”
 
 오랜만에 들어 반가움이 앞섰지만 어쩐지 예전에 병석과 하던 말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리고 예전처럼 ‘처남’이라고 부르는 녀석의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녀석은 누나와 결혼했었던 터라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금?
 “바쁘냐?”
 ―아하하. 내가 원래 좀 바쁘잖냐.
 “바쁘다고? 알았다. 그럼 끊지.”
 ―잠깐!
 “바쁘다며.”
 ―에헤이, 그래도 처남이 부르면 바빠도 가야지.
 “그럼. 빨리 와.”
 ―무슨 일인데.
 “시끄럽고, 빨리 오기나 해.”
 ―알았어. 당장 갈게.
 
 그렇게 대답한 박병석이 30분 후 유정상의 집으로 찾아왔다.
 문이 열리자 박병석이 한 손을 들며 반가워한다.
 
 “여어. 처남. 생일 축하해. 급히 오느라 선물을 준비 못 했다네. 내 나중에 따로 줌세.”
 
 ‘이렇게 젊었던 시절이 있었구나. 그런데 넉살은 여전하네.’
 
 박병석을 오랜만에 본 첫 느낌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유정상의 모습을 본 박병석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거 뭐야?”
 
 유정상의 머리에 쓰인 커다란 주방장 모자 때문에 황당한 얼굴이 된 병석이었다.
 당연히 머리에 박힌 화살표를 숨기기 위해 누나가 요리 학원 다닐 때 사용하던 주방용 커다란 모자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병석에겐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너도 누님 따라 요즘 요리 배우냐?”
 “개소리 말고 들어오기나 해.”
 “엇!”
 
 그렇게 말한 유정상이 박병석의 팔을 잡아끌고는 바깥을 살핀 후 곧바로 문을 닫아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병석이 의심스런 눈으로 유정상을 보며 말했다.
 
 “왜 그래? 수상한 놈처럼.”
 “너. 이런 거 본 적 없지?”
 “뭘?”
 “이거 말이야.”
 
 그렇게 말한 유정상이 곧바로 자신의 쓰고 있던 커다란 주방장 모자를 벗었다.
 유정상이 긴장한 얼굴로 박병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박병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유정상의 머리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전혀 놀라는 반응이 없자 뭔가 이상했는지 유정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설마 이런 걸 보고도 별 감흥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안 이상해? 설마, 이런 걸 전에도 본 적이 있냐?”
 “······.”
 “빨리 말해봐.”
 
 유정상이 다그쳤지만 박병석은 이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마, 그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날 부른 거야?”
 “뭐? 설마. 정말 너 안 보이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박병석의 말에 유정상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엉망진창인 네 머리 꼴이 안 보일 리가 있냐? 으이그, 떡진 거 좀 봐. 머리 좀 감고 살아. 인간아.”
 
 박병석의 말에 유정상은 순간 멍한 상태로 있었다.
 이렇게 황당한 물건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떡하니 박혀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태연스레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나 박병석과 10년 이상 절친으로 지내온 탓에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 안 보인다는 말인가?
 
 “정말 안 보인다고? 이게?”
 “그래. 네 말대로 이제는 보인다.”
 “뭐? 정말?”
 “그렇다니까.”
 “그럼, 뭐가 보이는 지 말해봐.”
 “뭐가 보이긴, 갑자기 불러놓고 정신 나간 소리나 하는 개또라이가 보이지.”
 “뭐야? 너 자식이 죽고 싶냐?”
 
 유정상이 버럭대자, 깜짝 놀란 방벽석이 움찔하더니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 왜 그러는 건데?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도대체 그 떡진 머리 말고 뭘 또 보라는 거야?”
 “진짜지? 진짜 그거 외에는 안 보이는 거 맞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같은 질문을 계속 해대니 박병석이 짜증을 냈다.
 어쨌든 박병석의 눈에는 유정상의 머리위에 박혀 있는 화살표가 안 보이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물건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에 빠져들어 가자 박병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유정상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네.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겨우 떡진 머리나 보여주는 거냐?”
 “그렇다는 말이지?”
 “·······?”
 “흐음.”
 
 혼자 고민에 빠진 유정상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박병석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정인 씨 언제 들어와?”
 “정인 씨?”
 
 유정상이 한쪽 눈을 치켜뜨자 박병석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글맞게 히죽거렸다.
 
 “에이, 우리끼리 뭐 어때. 그건 그렇고 정인 씨 방에 한 번만 살짝 들어가 보면 안 돼?”
 “이게 죽으려고!”
 
 퍼억!
 퍼퍼퍽!
 
 
 # 그냥 던전에 끌려가 버렸다
 
 잠시 후 눈탱이가 밤탱이 된 박병석을 돌려보내고 유정상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박병석은 분명 보이지 않는다고는 말했지만, 그래도 바깥에 나가보면 자신의 머리에 박혀 있는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게 될지 어떨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주변을 살피면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더듬거렸다.
 확실히 머리에 단단히 박혀 있다. 이렇게 확실히 느껴지고 거울 속에서도 자세히 보이는데 박병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길에 나가자마자, 완전 또라이 되는 거 아닐까?’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자신의 행동이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나 엘리베이터 천장 귀퉁이에 빨간불을 번쩍이며 노려보는 감시 카메라의 눈이 부담스럽다.
 
 ‘병석이 자식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괜한 쌍또라이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슬슬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저 감시 카메라는 신경 쓰이네.’
 
 그렇게 계속 힐끔거리며 감시 카메라를 의식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꿀꺽.
 
 마치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들이는 사람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로 아파트 밖을 나섰다.
 눈알을 데굴거리며 주변을 살펴본다.
 간간히 단지 내를 돌아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부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자신이 걸어가는 방향만을 바라볼 뿐 그 누구도 유정상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경비 아저씨도 그저 뒷짐 진 채 특유의 웃음소리로 허허거리며 돌아다닐 뿐 유정상을 눈여겨보는 건 아니다.
 아직은 발견을 못 한 탓일 수도 있고, 박병석의 말대로 정말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걸어가는데 몇 명의 교복 입은 남자아이들이 맞은편에서 오버스런 행동을 하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딱 중2병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평범한 중학생 아이들로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쭈뼛거린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장한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게 마음을 먹었다.
 겨우 중학생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인데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한 녀석이 펄쩍 뛰더니 유정상 쪽을 바라보며 놀란 모습을 하고는 손가락을 가리킨다.
 그 것을 시작으로 다른 아이들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헐. 대박!”
 “오옷!”
 
 몇몇이 호들갑을 떨어대더니 빠른 동작으로 휴대폰을 들이밀며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젠장, 역시 병석이 자식 거짓말이었구나. 이 쳐 죽일 놈.’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런 주목을 받는 이상 빨리, 머리를 숨기기 위해서 가져온 누나의 주방장 모자를 다시 써야만 한다. 물론 이 모자 역시도 주목을 받을 테지만 머리에 박혀 있는 화살표만 하겠는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이들이 휭 하니 유정상을 지나쳐 가버렸다.
 
 “얼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로 몸을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것인지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 중인 푸른색 고급 스포츠카를 보며 휴대폰을 들이밀고 촬영하거나 펄쩍펄쩍 뛰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포르쉐 아니야?”
 “대박!”
 “우리 아파트보다 비싼 거 아니야?”
 “당연하지. 대충 아파트 20채 가격 정도 할 걸.”
 “정말?”
 “미국 자동차잖아.”
 “역시 천조국!”
 
 중학교 아이들이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개소리를 해대는 사이 포르쉐인지 뭔지 하는 국적 불명(?) 스포츠카의 주차가 끝나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린다.
 멋진 스포츠카에서 내린 사람은 예상과 달리 척 보기에도 기럭지가 짧디짧은, 평범한 얼굴의 포동포동한 사내였다.
 그 심한 이질감에 아이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다 들리는 목소리로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에이. 뭐야?”
 “쳇. 실망이야.”
 “돼지는 트럭이나 타라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포동이가 버럭댔다.
 
 “뭐야? 이 잡노무 시키들이! 죽을래!”
 
 그 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후다닥 도망치며 “병신 뚱땡이!”라며 놀리고 사라져 버린다.
 유정상은 어이없는 광경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에휴, 다행이네. 그래도 보인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란 생각에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다시 주방장 모자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젠 확실히 자신의 머리 위에 꽂혀 있는 괴상한 화살표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겨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는 곧바로 가까운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찌 되었건 머리에 이런 황당한 물건이 박혀 있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이니 검사라도 받아볼 작정이었다.
 
 ***
 
 “저, 정상이라고요?”
 “네. 좀 더 정밀 검사를 해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정상으로 판단됩니다.”
 
 도대체 머리에 박힌 물건이 뭘까 싶은 마음에 병원을 찾았는데 엑스레이나 단층 촬영으로도 발견되는 건 없었다.
 정상이라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계에게까지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척 보기에도 머리를 뚫고 들어간 모습을 했으니, 머릿속은 어떤 식으로든 손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뇌종양 검사까지 한꺼번에 받았지만 별달리 발견되는 건 없었다.
 방사선 검사 이후, 방사선 동위원소 검사에 뇌척수액 검사, 그리고 조직 검사까지 받았지만 역시나 뇌종양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어쨌거나 여기서도 머리에 박힌 화살표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정말 의외의 상황이었다.
 
 병원을 나서는 유정상의 표정이 모처럼 밝아졌다.
 보기엔 좀 이상하지만 이상이 없고, 사실 다른 사람에게는 애초에 보이지도 않으니 상관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병원에 들르고 나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뭔 놈의 병원비가······!”
 
 이것저것 생각 없이 검사를 했더니 병원비가 제법 많이 나왔다.
 지갑에 있던 카드로 해결했지만, 보나마나 통장에는 얼마 없을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할부로 결재했다.
 그리고 덩달아 카드 사용액을 확인해보니 미친 이놈이 제법 이것저것 많이 썼는지 결재해야 할 금액도 상당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정말 대책이 없는 망할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이런 병신 같은 놈.”
 
 그렇게 한숨을 쉬고는 조만간 당장 무슨 일이든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다시 눈알을 위로 치켜떴다.
 
 “도대체 이놈 정체가 뭐지?”
 
 아직 머리에 콱 박혀 있는 화살표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어쩌면 애초에 박힌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지는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모양만 마치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이런 게 머리에 붙어 있다는 게 정상은 아니다. 그래도 한편으로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닌 것이다.
 조금 신경 쓰이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잡 미묘한 얼굴로 길을 걷는데 어쩐지 머리가 한쪽으로 쏠리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그저 목이 약간 저려서 그런가 했는데 갈수록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유정상 본인의 의지가 아닌 머리 위 화살표가 마치 어딘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뭔가의 힘에 의해 자꾸 머리가 끌려가듯 움직이자 유정상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확실하게 머리에 박혀 있는 화살에 가해지는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그 힘이 어디론가 방향을 잡았는지 그곳을 향해 유정상을 끌어당긴다.
 
 “어. 어. 이놈이 왜이래?”
 
 처음엔 설마설마하며 그냥 무시하려 했는데 잡아당기는 힘이 점점 강해지더니 급기야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으악.”
 
 그런 모습에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힐끔거리며 바라보자 얼굴이 벌게지는 유정상.
 누가 봐도 지금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화살표의 힘에 이끌려 걸어가는 폼이 마치 엄마에게 귀를 잡힌 모습처럼 엉거주춤하게 보였다. 뭔가 꼴사납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세우며 그것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했다.
 지금으로서는 황당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비명을 지를 수도 없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소리친다고 해서 누군가 도와줄 리도 없고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최대한 목에 힘을 주고 자연스러운 표정 관리와 함께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런데 머리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강해지자 유정상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에선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긴 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화살표가 이끄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
 언덕으로 가는가 싶더니 곧 그것이 이끌고 있는 장소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산?”
 
 유정상이 살고 있는 동네의 인근 산이었다.
 지금 시기는 던전이 생겨난 지 대충 7년쯤 되던 시기.
 던전이 생기고 나서 변한 것 중의 하나가 아무 산이나 마음대로 오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던전 특유의 에너지장이 강한 곳이 가끔 존재했는데 특히나 그런 곳은 산행이 금지되어 예전부터 산을 오르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산에서 실종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면서 저절로 그 소리도 사그라졌다.
 어쨌든 이곳의 산엔 공식적으로 던전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미세하나마 던전에너지가 감지된다는 이유로 산행을 자제하라는 푯말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물론 개인이 굳이 오르겠다면 못 오를 일도 없었다.
 특별히 철조망이나 담으로 막아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두근두근.
 
 하지만 아무리 예전에 비해 젊어져 팔팔해졌다고는 해도 일반인의 몸으로 이런 곳에 오르는 건 위험한 일이다.
 던전에너지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곳은 간간히 소형 몬스터도 출몰하기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9급 각성자 생활을 한 이상 아무리 일반인의 몸이라고 해도 소형 몬스터쯤은 쳐 죽일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굳이 상대할 필요 없는 놈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기적처럼 과거로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일 따위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화살표는 막무가내로 유정상을 산 위로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에 박혀 있는 화살표를 꽉 붙들며 소리쳤다.
 
 “씨발, 날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주려는 거냐?”
 
 이제야 머리에 박혀 있는 화살표의 본래 의도를 알게 되었다고 믿은 유정상.
 그저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몬스터가 던진 미끼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물건에 대한 건 들은 바도 없었지만, 원리로 보면 낚시에 쓰이는 바늘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여기엔 미끼가 필요 없다는 것일 뿐.
 
 “과거로 돌아왔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서 좋아했는데.”
 
 지옥에서 천당을 왔는가 했는데 그렇게 다시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끌려가듯 산 위로 올랐다.
 끌려가던 와중에도 나무를 붙들며 저항를 해봤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목이 빠질 것처럼 아프니 결국 딸려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좋은 점은 끌려간 덕분에 산을 오르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가는 게 결코 좋은 기분이 들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머리통을 잡아당기는 힘이 사그라졌다.
 
 “······?”
 
 갑자기 당기는 힘이 사라지자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살표가 정말 낚싯바늘이라면 그것을 조종한 녀석이 주변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트롤 같은 거대 몬스터라면 그냥 목을 내놔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던전 밖에 그런 대형 몬스터가 있을 리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긴장을 계속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계속 사방을 둘러봐도 그런 놈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고 곧 휴,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상상도 못한 몬스터가 자신을 기다릴까 봐 걱정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최악의 예상이 틀렸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런데 곧 머리 위의 화살표가 떨어댄다.
 
 부르르르르.
 
 덕분에 유정상의 머리도 덩달아 떨었다.
 
 “으으으으으. 이, 이번에는 또 뭐냐?”
 
 황당한 일을 계속 겪으니 이것도 할 짓이 못 된다 싶은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유정상의 눈에 뭔가가 일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엇!”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현상.
 
 “더, 던전?”
 
 유정상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바로 던전의 문이 열리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던전이 열린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던전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긴 정부의 통제를 받았을 것이고, 주변엔 울타리가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던전 관리국 직원과 함께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는 건 결국 이곳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라는 뜻이 된다.
 아니면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곳이라던가.
 하지만, 그래 봐야 헌터가 아닌 이상 의미가 없는 곳이다.
 물론 신고한다면 약간의 보상이 있을 테니 차라리 그쪽이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신고하자.’
 
 그렇게 생각한 유정상이 잽싸게 휴대폰을 꺼냈지만 화면이 켜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던전 주위엔 에너지파가 강해서 전자 제품이 먹통이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젠장. 내려가야겠네.”
 
 그렇게 말한 유정상이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머리에 가해지는 힘 때문에 벗어나지 못했다.
 
 “으익!”
 
 아무리 용을 써도 그의 힘으론 도저히 머리에 가해지는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던전에서 강한 힘이 생성되며 다시 화살표에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곧이어 그곳에서 뻗어 나온 강한 힘이 유정상을 덮쳤다.
 
 “우왁!”
 
 그러자 화살표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목이 뽑혀 나갈 것만 같은 고통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던전에 질질 끌려가자 유정상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아, 안 돼. 나 일반인이라고. 사, 살려······.”
 
 그의 비명 소리와 그의 육체는 삽시간에 던전에 먹혀버리고 말았다.
 
 ***
 
 검고 어두운 암흑 속에서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어느 순간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부터 서서히 감각을 찾아간다.
 그리고 조금씩 전신으로 넓혀 가자 어느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주변을 더듬거렸다.
 
 ‘흙바닥. 그리고 공기가 따듯하다.’
 
 눈을 천천히 뜨며 눈동자에 초점을 잡아 갔다.
 
 ‘여긴 어디지?’
 
 쓰러진 장소를 떠올리려 애써본다.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왜 쓰러져 있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잠시 후 던전에 끌려 들어왔다는 사실을 퍼뜩 떠올리며 빠르게 눈을 뜨고는 몸을 벌떡 세웠다.
 
 “끄응.”
 
 머리가 깨져 나갈 것 같은 두통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잠깐 동안 가만히 있었다. 상당한 고통이라 참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통이 조금씩 사그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던전 안으로 끌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나무.
 커도 너무 지나치게 컸다.
 잔가지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크기는 어지간한 빌딩 이상으로 거대한 나무였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하늘을 다 덮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끄응.”
 
 어지러움에 잠시 비틀거렸다.
 이 현상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 유정상이다.
 
 “역시 그때 던전으로 끌려 들어와 버린 건가?”
 
 설마 했는데 일반인의 몸으로 들어와 버렸다.
 던전 안으로 일반인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특유의 던전에너지로 인해 몸에 미치는 영향이 나쁘기 때문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다.
 그보다 여기에 들어와서 살아 나갈 수는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던전이라는 환경은 설사 각성자라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가 머리 위에서 빠르게 떨어졌다.
 
 휘리릭.
 
 팅.
 
 “엇!”
 
 그런데 머리 위의 뭔가에 부딪치고는 튕겨 나갔다.
 놀란 유정상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얇게 뜨며 집중했다.
 자신이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위 가지에 붙어 있는 커다란 뭔가를 발견했다.
 거무튀튀한 생물체.
 눈이 툭 튀어나온 파충류.
 독카멜레온이었다.
 방금 머리 위를 때렸던 건 녀석의 긴 혀.
 그것에 맞으면 일순간 마비 증상에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놈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놈의 몸뚱이는 일반적인 카멜레온의 크기를 월등히 초월하는데, 대충 인간 크기 정도다.
 물론 하급 던전에 서식하는 그저 그런 몬스터이기는 해도 일반인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존재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방금 녀석의 공격을 튕겨낸 건, 다름 아닌 머리에 박혀 있던 화살표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얼떨결에 도움을 받아버렸다.
 한마디로 천운이 따랐던 것이다.
 놈은 자신의 혀를 튕겨낸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인지 고개를 몇 번 까닥거리며 갸웃거린다.
 
 “젠장.”
 
 놈의 모습을 확인한 유정상이 반응하려 하자 독카멜레온이 입을 떡 벌린다.
 
 휘리릭.
 
 팟. 팟.
 
 화들짝 놀란 유정상은 빠르게 바닥을 구르며 놈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혀 공격을 피해냈다.
 과거 오랜 기간 9급 능력자 생활을 한 것이 본능적으로 발휘된 덕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큰 도움이 된 것이다.
 
 턱.
 
 그런데 독카멜레온이 빠른 속도로 땅에 내려왔다.
 위에서의 공격이 생각만큼 먹히지 않기도 했지만 유정상이 능력자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도망칠 수는 없다.’
 
 독카멜레온은 인간보다 빠른 녀석이다.
 즉, 놈을 죽이지 않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에 몇 번 싸워본 놈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9급이긴 했지만 능력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젊어졌다고는 해도 평범한 일반인의 몸일 뿐이다.
 잽싸게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근처 바닥에 돌덩이들이 몇 개 보였다.
 빠르게 돌을 집어 들고는 놈에게 던졌다.
 
 탁.
 그러나 놈은 그것을 가볍게 혀로 튕겨내 버렸다.
 간단한 검 정도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싸워볼 테지만, 지금은 비무장 상태.
 뭔가 필요하다.
 주변에 있던 끝이 뾰족한 부러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들었다.
 찌르기용 무기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놈은 그 모습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몇 번 고개를 까닥거리다 고르륵거리는 소리는 낸다.
 
 휘익.
 
 또다시 독침이 달린 혀가 유정상에게 날아왔다.
 빠른 속도이긴 했지만 놈의 반응을 보고 미리 움직였던 탓에 격중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을 더 피하자 놈이 다시 고개를 까닥거렸다.
 조금이지만 분해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작정, 언제까지고 놈의 혀를 피하며 버틸 수는 없는 일.
 돌 한 개를 더 집어 들어 다시 던졌지만 이번에도 혀로 튕겨냈다.
 그런데 그때 뭔가를 떠올리고는 유정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바닥에 있던 돌을 잽싸게 들어 놈에게 던졌다.
 
 턱.
 
 그것을 가볍게 쳐내는 걸 보고도 또다시 돌 한 개를 들어 올려 던졌고, 놈이 다시 튕겨낸다.
 그렇게 서너 개를 더 던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헉. 헉.”
 
 숨을 헐떡이는 유정상.
 몸이 젊어졌다고는 하지만, 일반인의 몸이었으니 9급 능력자 시절에 비해 체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 유정상의 모습을 보고는 그가 많이 지쳤다는 걸 확인한 독카멜레온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습성일 뿐 아무런 뜻도 없다.
 아무튼 그렇게 갸웃거리던 놈이 곧바로 다시 유정상에게 혀를 날렸다.
 
 휘이익.
 
 곧바로 유정상이 팔을 뻗어 막으려 하자 그것을 칭칭 감아버린다.
 혀끝에 독침이 달려 있어 이렇게 팔에 감기면 곧바로 전신에 마비독이 퍼져 나갈 수밖에 없다.
 
 “키이익.”
 
 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은 소리를 냈다. 동시에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정상을 살폈다.
 유정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놈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놈은 여전히 팔을 혀로 감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먹잇감이 드디어 마비 증상을 보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푸슉!
 
 마비되었을 거라고 판단되던 유정상이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막대기를 이용해 왼손을 감고 있는 놈의 혀에 꽂아 넣었다.
 
 “끼에에엑!”
 
 혀를 쭉 내민 채 비명을 지르던 독카멜레온이 반사적으로 혀를 끌어당기자 삽시간에 끌려가는 유정상.
 그러나 그것도 이미 계산되어 있던 그는 혀에서 뽑아낸 나무 막대기로 다시 면전에서 사방을 살피며 데굴거리는 오른쪽 눈에 박아 넣었다.
 
 “끼에에에엑!”
 
 독카멜레온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친다.
 순식간에 놈에게서 풀려난 유정상이 주변에 있던 커다란 돌을 들어 정신없이 버둥거리는 놈이 머리를 찍어버렸다.
 
 퍼억!
 
 “꾸에에엑!”
 
 놈이 머리를 땅에 완전히 떨어뜨린 채로 몸을 버둥거리자 다시 두 번 세 번, 그렇게 놈의 머리를 계속 내려쳤다.
 
 퍽! 퍽!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좀 죽어버리라고!”
 
 순식간에 깨져 나가는 머리.
 얼마 동안 계속 돌로 찍어대자, 그렇게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놈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죽은 놈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유정상.
 비각성자의 몸으로 용케 몬스터를 잡은 것이다.
 물론 각성자로서 오랫동안 던전 생활을 했던 경험이 주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방금 놈의 혀에 팔이 감긴 상황에서 마비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돌을 여러 차례 던짐으로써 놈의 혀끝에 솟아 있던 독침을 제거한 탓이다.
 경험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유정상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그렇게 끌고 간 것이다.
 독카멜레온이 운이 없었던 건 유정상이 경험이 많고 노련한 각성자 출신의 일반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혀끝에 달린 독침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나긴 하지만, 그거야 나중의 일일 뿐이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털썩.
 
 지친 유정상이 죽어버린 독카멜레온 곁에 주저앉았다.
 몬스터를 상대하고 나니 전신에서 힘이 몽땅 빠져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가 윙 하며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크윽!”
 
 다시 몰려오는 두통.
 그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도 그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칫, 도대체 뭐야? 역시 일반인의 몸으로 던전에 들어온 탓인 건가.”
 
 그렇게 투덜거린 유정상이 곧 일그러진 표정을 펴고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머리를 감싸 쥘 때, 손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머리 위에 생겨난 그 거추장스러운 물건.
 다시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확실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어? 어?”
 
 머리에 계속 박혀 있던 화살표가 사라진 것이다.
 
 “얼래? 없네?”
 
 머리 이곳저곳을 아무리 더듬거려 봐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하루 온종일 신경 쓰이던 커다란 물체가 뜬금없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박혔을 때도 뜬금없긴 했지만.
 
 “아하하. 그럼 그렇지.”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이 사라지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피식 웃던 유정상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는 쓰러져 죽어 있는 독카멜레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예전 팀 생활을 할 때라면 전용 나이프를 이용해 해체해서 바깥에 가지고 나갔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입맛을 다시는 유정상.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현재로선 그런 것보다 생존이 가장 최우선이다.
 그나저나 머리에 박혀 있던 화살표는 어디로 간 걸까?
 머리에 달려 있을 땐 귀찮았지만 갑자기 사라지니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왔다.
 
 “······!”
 
 숲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유정상은 급히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나뭇잎 틈 사이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더욱 깊숙이 숨긴 그 순간.
 심한 노린내를 풍기는 뭔가가 숲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
 
 ‘고블린?’
 
 놀랍게도 몸을 드러낸 생물은 고블린이었다.
 키는 1미터를 조금 넘을 정도로 작았지만 제법 포악한 몬스터로, 보통은 무리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런 특성과 달리 한 마리뿐이다.
 녀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독카멜레온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두근두근.
 
 유정상은 숨어서 숨을 죽인 채 몰래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이 허술해 보이는 녹슨 칼을 들고 경계심 가득한 움직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땅에 쓰러져 있는 독카멜레온의 사체를 확인하고 그것을 살피며 동시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두리번거리던 놈이 다시 시선을 내려 사체를 바라본다.
 어느새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
 아무래도 독카멜레온을 보며 식욕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본능을 억제하며 다시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몬스터의 본능을 이기지 못했다.
 
 아귀아귀.
 
 놈이 사체를 정신없이 뜯기 시작했다.
 제법 굶은 탓인지 게걸스럽게 독카멜레온의 고기를 탐했다.
 그런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던 유정상의 눈이 한순간 커지고 말았다.
 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물체를 발견한 탓이다.
 
 ‘어, 어째서?’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화살표.
 
 어느새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한 화살표가 어째서 고블린 주위에 떠다니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고블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고블린의 등장에 계속 긴장 상태였지만, 공중에서 알짱거리는 모습 때문인지 어느샌가 갑자기 등장한 화살표가 더욱 신경 쓰였다.
 뭔가 모를 친밀함이랄까, 혹은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화살표에 잠시 한눈을 판 탓일까?
 머리를 처박고 정신없이 고기를 뜯던 고블린이 주춤거렸다.
 
 “케엘.”
 
 뭔가를 눈치챈 것인지 유정상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빠직.
 
 유정상이 움찔거리다 너무 긴장한 탓에 등 뒤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밟아 부러뜨리고 말았다.
 
 “캇!”
 
 고블린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낡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유정상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분명 놈에게 발견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카멜레온을 죽인 건 운이 따라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이 좋을 거라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고블린은 독카멜레온처럼 단순한 녀석이 아니다.
 9급 능력자였다면 쉽지는 않다 하더라도 맨손으로 한번 붙어보기라도 할 테지만, 그는 일반인일 뿐이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순순히 당할 수는 없는 일.
 주변으로 손을 더듬거려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고블린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유정상의 심장 소리는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입술을 꽉 깨물고는 오른손 위의 돌멩이를 콱 움켜쥐었다.
 그런데 은연중에 뭔가가 신경이 쓰인다.
 아직도 고블린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화살표.
 그 화살표의 미세한 움직임이 계속 신경 쓰인다.
 고블린과 맞닥뜨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눈치 없는 화살표는 슬금슬금 아래의 고블린이 있는 곳으로 내려온다.
 그 와중에 계속 다가오는 고블린.
 
 ‘······.’
 
 이렇게 긴박한 상황임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유정상은 계속 화살표를 신경 쓰고 있었다.
 분명 무섭고 두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순간.
 화살표가 움찔거렸다.
 
 ‘······?’
 
 분명 그 움찔거림은 분명 유정상 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화살표가 움찔거린 것처럼 보였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유정상의 시선이 고블린 위에 떠 있는 화살표 쪽으로 이동해버렸다.
 무섭고 두려운 순간임에도 이상하리만치 화살표가 신경 쓰였는데 그 화살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당한 건 화살표가 스스로 움직였다기보다 마치 유정상이 그렇게 움직이기를 원했고 그것에 반응한 것뿐인 듯 보였다.
 
 ‘어떻게······?’
 
 유정상은 당황했다.
 그러나 고블린이 코앞에 와 있는 상황이다.
 이미 독카멜레온과의 싸움으로 모든 힘을 다 소진한 상황에서 고블린과 싸울 수는 없다
 그 순간 유정상은 자신도 모르게 화살표에 의지를 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한 것인데 놀랍게도 화살표가 고블린을 향해 내려오더니 그 앞에 겹쳐진다.
 유정상은 그와 동시에 화살표에 힘을 가했다.
 
 “카악!”
 
 갑자기 고블린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캬캬캬!”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뭔가에 의해 움직임을 봉쇄당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유정상은 얼떨떨해하다 고블린의 몸에 화살표가 겹쳐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화살표의 모양이 하얀 사람 손, 그것도 주먹을 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순간적으로 이것이 화살표에 의한 현상임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돌멩이를 들고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상태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뭔가 다른 녀석들도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놈의 대갈통을 후려쳤다.
 
 빠각!
 
 “캑!”
 
 머리가 터지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그러나 돌멩이 정도로는 쉽게 죽지 않는지 다시 머리를 쳐들고는 으르렁대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유정상은 곧바로 돌을 놈이 입에 박아 넣었다.
 
 콰직!
 
 입안이 박살이 나며 놈의 입 주위에 피가 쏟아져 흘러내렸다.
 입에 박혀버린 돌을 놓아둔 채 이번에는 훨씬 큰 돌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고블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번엔 놈의 눈도 공포에 물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마음 쓰면 도리어 놈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20여 년 동안 그런 망설임 때문에 죽어 간 동료들은 수도 없이 봐왔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덩이로 고블린의 머리를 내려쳤다.
 
 퍼어억!
 
 “끼익!”
 
 입안에 돌멩이가 박혀 있던 터라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놈이 머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어느샌가 유정상에게 화살표로 통하는 연결점이 끊어진 느낌이 듦과 동시에 고블린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털푸덕.
 
 “헉. 헉.”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고블린을 내려다보는 유정상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곧 정신을 차린 후 고개를 들자 방금 고블린이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떠 있는 화살표가 눈에 들어왔다.
 고블린을 때려잡느라 정신이 없긴 했지만 분명 저 화살표와 교감이 있었다.
 어떤 교감이었냐 하면 마치······.
 
 ‘마우스의 포인터 같은 그런 느낌. 그래 그런 느낌이었어.’
 
 그러고 보니 화살표도 익숙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우스 포인터의 화살표 모양과 비슷해 보였다.
 
 ‘서, 설마. 말도 안 돼.’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고블린의 사체와 함께 공중에 떠 있는 화살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머리에 박혔을 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 화살표가 이번엔 마우스의 커서처럼 유정상의 의지에 의해 움직였다.
 
 ‘누구냐? 넌.’
 
 그런데 그때 눈앞이 다시 밝아지며 커다란 글자가 번쩍이며 눈앞에 생성되었다.
 
 [각성하셨습니다.]
 
 “헉! 뭐야! 흡.”
 
 커다란 글자에 놀란 유정상이 비명을 지르려다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각성했다는 커다란 글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좌측 상단에 ‘레벨1’이라는 글자가 생겨났다.
 마치 고글이라도 쓴 것처럼 눈앞에 새로운 투명창이 생겨 그곳에 새겨지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껌뻑거리다 연신 눈을 비벼보았지만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야.”
 
 화살표 때문에 여러 번 놀라고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충격이었다.
 마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 3차원으로 구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현실 감각까지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이름: 유정상]
 [직업: 커서 마스터]
 [레벨: 1]
 [공격력: 13]
 [방어력: 10]
 [생명력: 150/150]
 [힘: 12]
 [민첩: 13]
 [체력: 12]
 [지능: 11]
 
 “이, 이게 뭐야? 내 정보라는 거야?”
 
 갑자기 생겨난 자신의 상태정보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마치 게임 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소름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던전 속에 끌려 들어온 것부터 상식을 벗어나더니 머리에 꽂혀 있던 화살표가 허공에 떠다니지 않나, 이번엔 자신의 정보창까지 떴다.
 어디까지 놀라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숲을 뒤지고 다닌 덕에 조그마한 개울가를 발견했다.
 비록 마실 수 있는 물은 아니었지만 씻는 것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바깥은 2월의 날씨라 겨울이었지만, 여기 던전의 내부는 여름 날씨에 가깝다. 그래서 자신이 입고 있던 점퍼는 더위로 인해 더 이상 입고 있을 수가 없어 벗어버렸다.
 몸에 뭍은 피로 인해 다른 몬스터가 꼬일지 모를 일이라 얼른 땅에 파묻어 버리고 몸에 뭍은 피는 물로 씻어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수를 했지만, 역시나 눈에 나타난 화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쳐버린 걸까?”
 
 아마 갑작스럽게 던전에 들어오는 바람에 어느 순간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앞뒤 정황이 분명한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니, 그렇게 믿고 있을 수만을 없었다. 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 못 한 일이 생겼다.
 
 쿠르르르르르.
 
 땅이 흔들리자 냇가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정상이 갑작스런 상황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첨벙.
 
 “으악.”
 
 물속에 머리를 처박아버린 상황에서 빠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서둘러 커다란 바위나 나무가 없는 곳으로 이동한 정상이 몸을 숙였다.
 갑작스런 지진으로 인해 주변 숲이 소란스러워지며 소형 몬스터들이 뛰쳐나오더니 우르르 이동해 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지진에 놀란 비행 몬스터들도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쿠르르르르르.
 
 그렇게 30초 이상 크게 흔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유정상이 숲에서 머리를 들어올렸다.
 
 “젠장, 하필이면 재해가 일어나는 던전이라니.”
 
 던전에서도 자연재해는 발생한다.
 그런 건 이미 수없이 경험한 터라 특별한 건 아니다. 다만 이번엔 그 지진의 정도가 강하다는 게 문제였다.
 확신할 수는 없어도 이런 지진이 이미 수차례 발생되었다면 정말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더 다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수가 이렇게 없을 수가 있냐. 젠장.”
 
 그런데 그때 숲에서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은 언제 벌어질지도 모를 재앙을 걱정하는 것보다 목숨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서둘러 몸을 다시 풀숲에 숨기고 몸에서 나는 냄새를 지우기 시작했다.
 풀과 꽃, 그리고 흙을 이용해 최대한 인간의 냄새를 없앴다.
 물론 물에 왕창 젖은 덕분에 몸에서 풍기는 냄새도 어느 정도 가려졌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다시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상태로 소리가 나는 방향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곧 유정상의 입에서 바람 빠진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타난 녀석을 보자 허탈함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조그맣게 생긴 하얀 털북숭이 생명체.
 토끼였다.
 그런데 그 토끼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뿔이 튀어나와 있다.
 
 “뿔토끼?”
 
 숲이 무성한 던전에 주로 서식하는 걸로 알려진 뿔토끼는 일반 토끼보다도 엄청나게 재빠른 탓에 헌터들도 좀처럼 쉽게 잡기 힘든 소형 몬스터였다.
 하지만 생긴 모습처럼 일반적인 몬스터에 비해 겁이 많은 녀석이라 공격적 성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이 난리 통에 도망가지도 않다니 맹랑한 녀석이었다.
 뿔토끼는 유정상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코를 벌름거리다 주변을 뒤적거리며 풀 속에 숨어 있는 뭔가를 찾아 먹고 있었다.
 벌레와 작은 풀, 그리고 뿌리 등이 녀석의 주식이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유정상이 다시 공중에 떠 있는 화살표로 시선을 보냈다.
 그것을 바라보며 화살표를 아래로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끌어 내려 보았다.
 
 스르륵 가볍게 내려가는 화살표.
 
 ‘정말 나와 연결되어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곧바로 좌우로도 움직여 보았다.
 역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비스듬하게 내려도 보고 쭉 끌어올렸다가 갑자기 꺾어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반응이 빠르다.
 실제 컴퓨터의 마우스 포인터도 이보다 반응이 빠를까 싶을 정도로 직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다시 화살표를 아래로 내려본다.
 뿔토끼의 머리 위에까지 다가왔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로 보면 이놈에게도 보이지 않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다시 화살표, 아니 커서를 뿔토끼의 몸까지 가져가 보았다.
 커서가 몸 위에 겹쳐지자 그 주위로 하얀빛이 보인다. 마치 후광처럼.
 그런데 그때 뿔토끼의 머리 위로 뭔가가 생성되었다.
 
 ‘말풍선··· 인가?’
 
 놀랍게도 만화 속 캐릭터가 대화할 때 사용되는 말풍선 같은 게 생성되었다.
 
 ‘······!’
 
 [이름: 뿔토끼]
 [레벨: 1]
 [공격력: 3]
 [방어력: 3]
 [생명력: 50/50]
 [힘: 4]
 [민첩: 35]
 [체력: 30]
 [지능: 5]
 
 조촐한 정보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황당한 마음이 든 유정상이 잠시 동안 멍한 상태로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지정해 정보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자 이게 현실이 맞는지도 의심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방심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곧이어 고블린을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커서에 신경을 집중했다.
 순간 커서에 힘이 들어갔다.
 
 “끽!”
 
 갑자기 뿔토끼가 경직되는가 싶더니 네 개의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되, 된다.”
 
 설마설마하면서 실행한 일인데, 고블린을 잡았던 것처럼 뿔토끼도 결국 몸을 버둥거리기만 할 뿐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것으로 커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마우스 커서로 뭔가를 잡을 때처럼 화살표가 손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움켜쥐는 형태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니 수긍할 수 있었다.
 정신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컴퓨터 커서란 사실을 확실히 인식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끼이이이!”
 
 그런데 그때 갑자기 뭔가를 느낀 뿔토끼가 소리를 지르며 심하게 버둥거렸다.
 그 때문에 커서에서 전해지는 힘이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웃!”
 
 버둥거리는 뿔토끼를 바라보며 아직 숨긴 몸을 드러내지 않던 바로 그 순간.
 
 [경고. 경고. 몬스터 출현.]
 
 “······!!!”
 
 “카앙!”
 
 풀숲에서 뭔가 거대한 물체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오더니 뿔토끼를 향해 달려들었다.
 
 “끼엑!”
 
 한순간 비명을 지른 뿔토끼가 삽시간에 뭔가 사납고 날카로운 입에 콱 물리더니 우적우적 씹혀지기 시작했다.
 상위 포식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커서로 인해 움직임이 봉쇄된 탓에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아그적. 아그적.
 
 뼈가 생으로 부서지며 씹혀 나가는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생물에 압도당한 유정상이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뿔토끼를 사정없이 씹고 있는 놈은 던전 몬스터 중 하나인 ‘지옥늑대’였다. 붉은 털을 가진 놈으로 크기는 송아지만 하며 성질이 사납고, 주로 하급 몬스터를 주식으로 삼는 녀석이다.
 이놈도 하급 던전에 주로 나타나는 녀석이지만, 상대하기 위해선 최소 노련한 8급 헌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들었었다.
 물론 9급이라고 하더라도 세 명이 뭉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놈이다.
 당연하게도 검 정도의 무기는 필수다.
 
 그러나 유정상은 일반인을 갓 벗어난 상태.
 능력이라고 해봐야 금방 각성했으니 당연히 9급 능력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8급 이상을 헌터라고 부르지만 9급은 사실 단순한 각성자 이상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급 몬스터와의 싸움에서도 능숙하지 않은 탓이다.
 물론 노련한 9급이라면 고블린 정도와 싸울 능력이 되긴 하지만, 상대가 지옥늑대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큰일 났다.’
 
 이 상황에서 커서를 사용한다고 한다손 쳐도 얼마나 먹힐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도망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은 저렇게 뿔토끼를 먹느라 후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지만 다 먹고 나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다.
 거기다 귀도 밝아서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쩌면 지금 식사 중일 때가 공격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딴 조그마한 녀석 한 마리 먹어봐야 배도 차지 않을 것이고, 아마 곧바로 자신을 사냥할 것이 틀림없으니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우적우적.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는 뿔토끼는 이미 입안으로 다 들어가 버렸다.
 그 사이 조금은 능숙해진 커서를 움직여 서둘러 지옥늑대의 몸 위에 얹었다.
 뿔토끼 때처럼 놈의 머리위에 말풍선이 생겨났다.
 
 [이름: 지옥늑대]
 [레벨: 3]
 [공격력: 80]
 [방어력: 60]
 [생명력: 650/650]
 [힘: 25]
 [민첩: 28]
 [체력: 32]
 [지능: 6]
 
 ‘레벨 3? 역시 차이가 많이 난다.’
 
 유정상 자신은 이제 레벨 1로 각성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놈은 레벨 3이다.
 공격력이나 방어력이 말하는 수치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수치들을 비교 해봐도 상식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커서가 어느 정도 놈에게 먹히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어차피 이렇게 던전에 들어온 이상 귀환석을 얻지 못하면 나갈 방법이 없으니 어떡하든 싸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귀환석은 몬스터의 몸에서 나오는 것.
 운이 좋아 던전 보스 몬스터를 만나기 전에 구할 수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지옥늑대는 반드시 지금 죽여야 해. 시간이 없다.’
 
 어디에서 이런 자신감이 생겨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커서에 곧바로 힘을 가했다. 그러자 화살표가 손으로 변했고, 곧바로 움켜쥐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크엉!”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자 놈의 입안에 들어 있는 뿔토끼 고기의 일부가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지옥늑대도 놀란 것이 틀림없다.
 곧이어 놈이 몸을 움직이려 들자 그 엄청난 힘이 유정상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윽.’
 
 버둥버둥.
 고블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힘에 유정상의 몸이 휘청거렸다.
 본능적으로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유정상은 정신을 집중한 채 죽은 고블린에게서 얻은 녹슨 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지옥늑대가 눈에 살기를 피우며 난동을 부린다.
 
 “크아아아앙!”
 
 휘청.
 
 놈이 머리를 흔들며 네 다리를 버둥거리자 유정상이 그 힘에 휘청했다.
 그러나 지금 놈을 죽이지 못하면 먹히고 만다.
 어째서인지 평소의 그라면 믿기 힘들 정도의 용기와 침착함이다.
 
 “크아아아아앙!”
 
 놈의 움직임이 더 포악해졌다. 날카로운 이빨이 더욱 위협적이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미간에 더욱 힘을 줬다.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결심한 듯 빠르게 지옥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앗!”
 “크아앙!”
 
 커서의 힘이 조금 풀렸는지 놈이 머리 부분을 세차게 휘두르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유정상을 물기 위해 덮쳤다. 하지만 유정상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목을 숙이자 그 위로 놈의 숨결이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칼을 사용해 지옥늑대의 왼쪽 앞다리 윗부분을 강하게 찔렀다.
 
 푸슉.
 
 “캐엥!”
 
 놈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아랑곳없이 곧바로 박힌 칼을 뽑아냈다. 녹슨 칼이라 쉽게 뽑히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있을 리 없다.
 놈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앞 발톱으로 유정상을 향해 휘둘렀다.
 
 “크윽!”
 
 어깨에 발톱이 스치자 피가 튀었다.
 제한된 움직임이었음에도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놈을 죽여야 한다는 본능으로 유정상은 다시 놈의 다른 발에 칼을 박아 넣었다.
 
 “크에에엥!”
 
 놈이 또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목숨이 걸린 이상 그것을 봐줄 리 없다.
 
 “으아아아앗!”
 
 혼이 빠져버린 듯 전신에 지옥늑대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미친 듯 녹슨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유정상.
 피 칠갑을 한 모습이 마치 혈귀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유정상은 몬스터의 혈향에 이성을 잃어갔다.
 
 “죽어라! 개자식아!”
 “깨에에에엥! 깽!”
 
 어느새 지옥늑대가 과도한 출혈에 의해 움직임이 둔해지자 그 틈을 노린 유정상이 놈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깨에에에엥!”
 
 칼을 박아버린 상태에서 몸을 떨어뜨린 유정상이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그리고 그때 커서에 대한 집중이 사라지자 놈이 풀썩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옥늑대가 목에서 피를 쏟아내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유정상은, 이미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지옥 귀신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지옥늑대가 전신을 부르르 떨어대다 곧 축 늘어져버렸다.
 그리고는 ‘레벨업’이라는 글씨가 생겨나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래그 기능이 생성됩니다.]
 
 찌리릿.
 
 기묘한 희열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럼에도 유정상은 아직 정신이 없던 터라 멍한 모습이다.
 그리고 곧이어 눈앞의 구석에 보이던 ‘레벨1’이 ‘레벨2’가 되었다.
 유정상의 능력으로 잡기엔 과도한 몬스터였던 탓인지 단번에 레벨이 오르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한 상태로 서 있던 유정상은 어느새 털썩 주저앉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유정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몬스터를 벌써 셋이나 죽여버렸다.
 각성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갓 9급 능력자.
 경험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 괴상한 화살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그런데 방금 여자 소리가 들렸는데.”
 
 레벨업을 했다며 두 번이나 떠들고 ‘드래그 기능이 생성’되었다고 했던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드래그? 설마 그 드래그?”
 
 컴퓨터를 할 때 마우스 포인터로 뭔가를 붙잡아 옮기는 것.
 그것이 드래그라고 알고 있던 유정상이 다시 한 번 공중에 떠 있는 화살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야 자체가 무슨 액정 화면마냥 자잘한 글씨들이 이리저리 보이고 있으니, 정말 화살표가 윈도우 화면 속 마우스 포인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이리저리 커서를 옮겨보는데 지옥늑대가 쓰러져 있는 그 자리에 뭔가가 반짝인다.
 
 “어?”
 
 그곳으로 다가가니 바닥에 투명 유리병에 붉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요구르트 병 크기만 한 게 보였고, 그 곁에 금색 동전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아까 녀석의 목에 꽂았던 피 묻은 녹슨 칼과 함께 제법 번듯해 보이는 숏 소드 형태의 검이 보인다.
 
 “이, 이거 아이템?”
 
 게임 세상도 아닌데 이런 게 떨어져 있으니 조금은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어디에서도 던전사냥을 통해 잡은 몬스터에서 이런 것이 생겨난다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사체에서 생기는 가죽과 뼈, 그리고 피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정상이 죽인 몬스터들은 마치 게임처럼 이렇게 아이템을 뱉어냈다.
 지옥늑대가 죽어 있는 자리 근처로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얼래? 왜 안 잡혀?”
 
 눈에는 분명 보이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게 아닌가? 마치 홀로그램인 것 마냥 손이 그것들을 지나쳐버린다.
 그러고 보니 나타난 아이템과 금화들이 약간 투명한 것처럼 보였다.
 뭔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에 황당함을 느꼈다.
 
 “이거, 뭐야? 그림의 떡이냐?”
 
 그렇게 몇 번을 헛손질하다 문든 떠오른 말.
 
 [드래그 기능이 생성됩니다.]
 
 분명히 드래그라고 했었다. 드래그라면 정말 마우스 커서와 기능이 비슷하다.
 유정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살짝 물러서더니, 커서를 움직여 검 위에 얹어보았다.
 
 [지옥늑대의 뼈로 만든 검 : 본소드]
 [내구력: 63/63]
 [공격력: 8~12]
 [어지간한 철검의 강도를 가진 숏 소드 형태의 무기]
 [옵션: 힘을 5 올려준다.]
 
 “헐, 완전 게임이네. 게임.”
 
 나름 목숨 걸고 싸웠는데 어쩐지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 알기 쉬우니 오히려 좋은 걸지도.
 그러나 자신의 정보를 확인할 수 없으니 저 수치들에 대한 건 결국 알기 어렵다.
 다른 것들도 그렇게 커서를 올려 정보를 확인했다.
 
 [25골드]
 
 금색 동전을 골드로 칭하는 것도 게임과 비슷하다.
 
 [하급 회복 포션]
 [20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
 
 “회복 포션이라니. 정말 황당하네.”
 
 포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재를 시점으로 보자면, 희귀할 뿐만 아니라 효과도 미비할 정도.
 하지만 던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치료제임을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가격에 거래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포션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물건들.
 만약 소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팔 수 있는 물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들 위로 커서를 가져가 잡는다는 느낌으로 힘을 주었다.
 
 띠링.
 띠링.
 띠링.
 
 그러자 쥘 때마다 경쾌한 음을 내며 아이템들이 사라진다.
 곧바로 시야 오른쪽 편에 사각형의 빈 상자 모양이 생겨났고 그곳에 차곡차곡 아이템들이 자리를 차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벤토리······.’
 
 어쩐지 원리가 쉽게 이해된 유정상이 눈앞의 화면들을 살폈다.
 그러나 특별히 더 보이는 건 없다.
 하지만 아이템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다고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지옥늑대의 뼈로 만든 검인 본소드를 꺼내 눈앞으로 끌고 와 손 위에 올려보았다.
 
 “웃.”
 
 묵직한 검이 손 위에 잡혔다.
 
 “이런 원리라는 건가?”
 
 그냥 잡으려 할 땐 잡히지 않던 검이었지만 클릭 후 인벤토리에서 꺼내면 사용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처음 사용했던 녹슨 검은 아마도 고블린이 사용 중이던 검이라 곧바로 사용이 가능했지만 이렇게 몬스터를 죽인 이후에 생성된 물건들은 커서를 이용해야만 획득이 가능한 것 같았다.
 뭔가 오래전에 했던 게임과 비슷한 사용법이라 그런지 이해가 쉬웠다.
 어쩌면 사용자인 유정상의 편의에 의해 가장 손쉬운 형태로 만들어진 인터페이스일지도 모른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집중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야의 하단에 붉은색 바와 푸른색의 바가 생겨났다.
 붉은 바는 보나마나 생명력일 것이고, 푸른 바는 마법 에너지인 마나량 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헌터들이 마나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 두 개는 화면에 띄어놓는 편이 즉각적인 상태를 확인하기 좋을 것이라 판단되어 그대로 놔두었다.
 
 “완전 게임 화면이네. 그래도 생각보다는 시야를 많이 가리지는 않는구나.”
 
 눈앞에 뜬 상태가 반투명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입체적으로 약간 거리를 둔 채로 떠 있는 데다가, 실제 시야가 컴퓨터 모니터보다 훨씬 넓은 탓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명력이라 짐작되는 붉은 바가 15%가량 닳아 있다.
 아마도 몇 번의 전투가 원인인 듯 보였다.
 특히 지옥늑대에게 당한 어깨 상처가 쓰려왔다.
 포션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곧 그 생각을 지우고 셔츠 아래를 찢어 지혈하니 역시 생명력이 약간 차오른다.
 
 ‘포션은 위급할 때 써야지.’
 
 더 강한 놈과 만났을 경우를 대비해둘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유정상은 지금부터 어떻게 하든 이곳을 탈출할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뿔토끼를 먹는 동안 습격했던 지옥늑대도 겨우 죽일 수 있었는데 보스몹이 아니었는지 결국 귀환석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보스 몬스터는 더 강한 놈이라는 것.
 물론 레벨이 조금 올랐으니 강해지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지옥늑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을게 분명하다.
 이번 싸움은 놈이 뿔토끼를 먹느라 정신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운도 따랐다.
 
 ‘이 던전 등급이 도대체 뭐야? 생각 이상으로 강한 놈들이 많잖아.’
 
 일반적으로 1, 2성급 정도의 던전이라면 지옥늑대는 던전 보스가 맞다. 그보다 약한 보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지옥늑대가 일반 몬스터처럼 출현했으니 최소 3성급은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더 위급의 몬스터가 보스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커서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해주고는 있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나간다.’
 
 이제 겨우 뇌종양이 사라져 희망이 생겼는데 이런 곳에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냉정하게 지금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황당하긴 하지만 커서 또한 점점 진화하고 있다.
 역시.
 
 ‘게임 시스템······ 결국 사냥인가?’
 
 새롭게 생긴 커서의 능력을 믿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드래그’ 능력이 추가된 이상 이것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아직 육체적 능력이 미약하다는 사실.
 몬스터와 맞닥뜨린다면 순식간에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싸워야 한다.
 
 ‘연습.’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유정상이 뭔가 실험할 만한 것을 찾았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는 물건부터 시작했다.
 돌멩이를 커서로 잡고 들어보았다.
 작은 건 쉽게 들렸다.
 그다음 조금 큰 놈을 들어보았다.
 힘이 들긴 해도 가능하다.
 9급 능력자로서 일반적으로 들 수 있는 크기의 바위에 도전해보았다.
 일반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들 수 없지만 8급에 근접한 9급이라면 가능한 정도의 크기다.
 
 “크윽.”
 
 몸에 전해져오는 압박이 엄청나 짧은 거리만 들어 옮길 수 있었다.
 
 “헉. 헉.”
 
 커서도 무리해서 사용하면 지치는 것인지 호흡이 가빠왔다.
 곧바로 나무 위 열매에 커서를 가져가 보았다.
 그런데 열매가 잘 잡히지 않는다.
 
 “뭐지?”
 
 순간 당황하다 아래의 푸른색 바에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결국 커서로 뭔가를 실행할 때는 마나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잠시 바닥에 앉아 쉬자 마나가 다시 차오른다.
 곧바로 다시 나무 위로 커서를 보냈다.
 역시 머리통만한 열매를 따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이렇게 조금씩 숨죽여 이동하면서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고 나니 감각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몸을 숨긴 채 이동한지 20여 분 정도가 흐르자 커서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더니 붉은색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커서 아래에 글자가 생겨났다.
 
 [경고. 경고.]
 [몬스터 감지.]
 
 순간 깜짝 놀란 유정상이 다시 몸을 깊숙이 숨겼다. 커서가 보내오는 경고는 이미 경험한 탓에 의문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곧바로 커서가 가리킨 방향에서 경고대로 두 마리의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놈들은 녹슨 칼을 들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원래라면 유정상이 오히려 발각이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놈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뭔가 목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설마 난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켜보는데 방금까지 유정상이 있었던 자리를 살피는 게 아닌가? 킁킁 거리며 냄새까지 맡고 있는걸 보면 놈들의 타깃은 분명 유정상 자신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상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놈들은 동물적 감각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고블린에 비해 추격술에 능해 보인다.
 커서 하나를 한 녀석의 머리위에 가져갔다.
 그리고 새로운 기능에 대한 실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커서를 몸 위로 올려 덥석 붙들었다.
 
 “키엑!”
 
 놈이 갑자기 경직되며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는 놈도 덩달아 놀랐는지 펄쩍 뛴다.
 
 “쿠에에에엑!”
 
 커서에 잡힌 몸이 커서의 움직임에 의해 공중으로 떠오르자 놈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양팔과 다리를 버둥거린다.
 곧바로 커서를 빠르게 움직여 근처 바위로 놈을 끌고 가서는 그대로 박아버렸다.
 
 쿵! 콰지직!
 
 머리가 박살나며 목이 기형적으로 꺾인 채로 놈이 몸을 축 늘어뜨린다.
 다른 놈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는, 멍하게 쳐다보다 곧바로 펄쩍 뛰더니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어림없지.”
 
 이제는 커서 사용도 제법 능숙해진 유정상이 곧바로 커서를 이동시켜 나머지 한 놈을 붙들었다. 제아무리 놈이 빠르다고 해도 커서만큼 빠를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엑!”
 
 그리고는 인정사정없이 첫 번째 놈처럼 같은 바위에 끌고 가 그대로 박아버렸다.
 
 콰지직!
 
 “꾸엑!”
 
 전신이 뒤틀리며 축 늘어지자 이놈도 곧바로 아래를 향해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곧 커서에서 힘을 빼자 놈의 몸이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철푸덕.
 
 첫 번째 녀석은 어느새 금색 동전 몇 개와 조그마한 파란 물병을 떨어뜨렸고, 두 번째 사냥한 녀석도 금색 동전을 몇 개 남겼다.
 유정상은 그것들과 함께 놈들이 가지고 있던 녹슨 칼들도 인벤토리에 넣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3’이 되었다.
 레벨이 오름과 동시에 온몸에 흐르는 희열.
 유정상은 엄청난 양의 엔돌핀이 전신에 퍼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잠시 만끽한 후 땅에 떨어진 것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커서로 그것들을 지정하자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생성된 인벤토리에 파란 물병 한 개가 추가되었다. 아래 부분에 '38G'라 적혀있는 건 아마도 보유 금액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돈으로는 뭘 하는 거지?’
 
 실제 돈이 아닌 게 생성되었는데 이걸 어디서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이었다. 던전 안에 가게가 있을 리 만무할 테고, 밖에서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종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족과도 같은.
 아무튼 이번에 간단히 두 마리를 처단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지옥늑대의 뼈로 만든 검으로 준비를 했지만 별로 필요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하단의 파란색 바에 에너지가 70%정도 줄어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결국 만약 고블린이 세 마리였다면 아슬아슬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뒤늦게라도 그런 사실을 알았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식은땀이 흐르는 상황이었다.
 파란색 바를 그렇게 잠시 지켜보니 서서히 차오른다.
 그렇게 잠시 몸을 쉬었다.
 낮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 탓에 목이 마른 데다 배도 고팠다.
 보통 각성자들은 던전에 투입될 때 비상식량과 식수를 챙겨 간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으니 빨리 보스를 잡고 빠져 나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음식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유정상이 알기론 던전의 음식은 그냥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던전이라는 일반적인 환경이 아닌 곳에서 자란 동식물들을 그냥 섭취할 경우 독성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건 일종의 상식에 가깝다.
 물도 씻는 정도만 괜찮을 뿐 마시는 건 금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바닥에 앉아 쉬는데 커서의 화살표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비스듬하게 위를 향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옆으로 향해 있었고 어딘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화살표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니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스를 가리키는 건가? 아니면, 귀환석이 있는 장소?’
 
 뭐가 되었건 커서가 방향을 가리키는 이상 그곳으로 가볼 수밖에 없다.
 결국 잠시 앉아 몸을 쉬고는 곧바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어쨌거나 몸의 한계가 다가오는 이상 시간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냥 무턱대고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절대로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한동안 걸었지만 별다른 몬스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헉. 헉.’
 
 허기보다 갈증 때문에 더 빨리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쿠르르르르르.
 쿠르르르르르.
 
 “엇!”
 
 이번에도 갑자기 땅이 진동했다.
 처음 느꼈던 것보다 더 강한 울림이었다. 다시 숲이 각종 몬스터들에 의해 소란스러워졌다.
 유정상은 이런 진동이 짧은 간격으로 계속 찾아왔다는 사실에 불안함을 느꼈다.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큰 지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대변동이 생겨 사라지는 던전도 제법 있으니 재수 없으면 던전에 갇히는 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예 지진과 함께 소멸해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움직이는데 이동 중이던 방향에서 진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순간 유정상은 몸을 잔뜩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커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거칠게 생긴 잡초가 무성한 풀숲에 숨어 조심스럽게 살피자 곧 그의 숲 건너편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아아아아아!”
 
 괴물의 포효에 깜짝 놀란 유정상이 움찔거리다 곧 그곳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곳과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였는데 뭔가 중앙에 커다란 몬스터가 발버둥을 치는 게 보인다.
 크기는 대략 2미터 정도에 피부는 푸른색의 엄청난 근육질 몬스터가 쇠사슬에 묶인 채로 포효하고 있었다.
 
 ‘오크?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일반적인 오크에 비해 덩치가 월등히 큰 오크전사였다.
 그런데 오크의 주변에 고블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캘! 캘캘!”
 
 쇠사슬에 묶인 채 포효하는 오크전사를, 십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사방에서 놈의 몸과 연결된 밧줄을 당기며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 많은 고블린들이 소리를 지르며 버티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근처에 바라보는 커다란 고블린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오크전사와 엇비슷하고 일반 고블린에 비해 상당히 비대한 체형을 가진 놈으로 보통 ‘두목 고블린’으로 불리는 녀석이었다.
 그런 놈의 목에 와인색의 영롱한 빛을 뿜는 커다란 보석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몬스터가 몬스터를 잡고 있는 희한한 광경에 유정상은 호기심이 생겼다.
 던전레이드 생활을 거의 20년 가까이 했던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몬스터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두목 고블린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뭔가 날카로운 물건을 들어 올렸다.
 대형 몬스터의 송곳니로 보이는 물건이 두목 고블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고 보니 주변의 모양이 마치 제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아아아아!”
 
 오크전사가 두목 고블린을 노려보며 흉성을 터뜨렸지만 두목 고블린은 전혀 미동 없이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곧 중얼거림을 멈추자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다시 쇠사슬이 당겼다.
 
 “크아아아아!”
 “끼에엑!”
 
 오크의 힘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몇 마리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십여 마리가 돌아가며 힘을 가하니 오크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것을 확인한 두목 고블린이 오크전사에게 다가가더니 뭔가 다시 중얼거리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들고 있던 몬스터의 송곳니로 오크의 심장 쪽을 찔렀다.
 
 푸슉!
 
 “쿠오오오오!”
 
 <『커서 마스터』 1-2권에 계속>

댓글(6)

루이스CDG    
선발대 없나여?
2017.11.04 22:07
호뜨거    
당신이 선발대입니다
2017.11.07 15:08
홍길동무    
어머니 부분에서 울컥하네요... 주인공 효자인정.. ㅎㅎ
2017.11.07 19:44
루비니스트    
10분보고 못보겠음
2017.11.09 08:18
골드충전중    
그냥 킬링타임 용도는 되는거 같음 시작해볼까요~
2022.02.07 12:38
gi****    
대여로 보기 좋네요
2022.02.2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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