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1권
예지력을 얻다
프롤로그(Prologue)
1990년 7월 20일, 부산 해운대에 있는 바다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파도가 백사장으로 밀려오듯 그렇게 마구 쏟아져 나왔다.
하교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친한 친구들과 같이 걸어 나오지만 유독 한 학생이 혼자서 교문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 학생의 교복 상의에 붙은 노란 이름표에는 박현빈이라 새겨져 있었다.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로 또래 고등학생과 비교하면 평균 신장이라 할 수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박현빈은 바다고등학교 2학년으로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잘생긴 얼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 기가 죽어서인지 어깨를 움츠리면서 걷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방학에 들어가는 날로 현빈의 바다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현빈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어, 클로버가 피었네?”
현빈의 집 조금 못 미치는 길가에 이웃 할머니의 상추와 풋고추를 심은 텃밭이 있었다.
텃밭 한쪽 경사진 면에 클로버가 조금 피어 있었다.
현빈은 클로버를 보고는 텃밭 안으로 들어갔다.
“네 잎 클로버가 있을까? 한번 찾아봐야지!”
조심조심하면서 클로버를 뒤졌지만 행운을 뜻하는 네 잎 클로버를 그리 쉽게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참을 살피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와··· 찾았다, 찾았어!”
환희에 찬 현빈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네 잎 클로버를 조심히 뜯어 손에 들고는 한참을 바라보던 현빈은 갑자기 그걸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꿀꺽 삼켜버렸다.
“우히히··· 이럼 행운을 내가 먹은 거지?”
단순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현빈은 모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뛰어갔다.
1장 예지능력이 생기다
현빈은 40평 정도 되는 단층 단독주택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석 달 전 봄, 부모님이 여행길에서 관광버스와 덤프트럭이 서로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날 이후 현빈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현빈의 아버지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1명씩 있는데,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 사고 전에도 자주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반면 엄마는 일가친척이나 형제가 전혀 없는 고아셨다.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 생활도 어렵고 힘드셨지만, 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첫눈에 반해 2년간이나 뒤를 따라 다니다가 결혼하셨다고 한다.
현빈의 삼촌은 작년에 대한은행 여의도 지점의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가셨기 때문에 현재는 서울에서 살고 계신다.
며칠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하는데 집이 서울이라 부산까지 자주 내려오기 힘들었다.
그래서 명절 때와 여름휴가 때만 부산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일 년에 세 번 정도 볼 수 있다.
8월 초에 여름휴가라니까 아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빈의 고모는 같은 해운대에 살고 계신다.
고모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현빈과 같은 고등학생이지만 여고에 다니기 때문에 얼굴은 몇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본다.
고모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계시기에 집안이 부유하다 할 수 있었다.
몇 달 전에 일어났던 부모님의 교통사고 뒷수습을 고모가 나서서 모두 해결해주었고 사고 보상금도 수령해주었다.
아직 고등학생으로 미성년자인 현빈이지만 대한은행 통장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고모가 그곳에 보상금을 입금해주었고 지금은 그 통장을 현빈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
부모님의 통장에 들어 있던 돈도 모두 현빈의 통장으로 이체했기에 통장에는 6억 원이 넘는 큰돈이 들어 있다.
현빈의 삼촌과 고모는 좋은 분들이라 그 돈에 전혀 욕심을 부리시지 않았다.
욕심을 부리기는커녕, 오히려 현빈의 삼촌은 보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매월 50만 원씩 통장에 송금해주었다.
그 돈은 고등학생의 용돈으로는 많은 돈이라 남는 돈은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
현빈의 고모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현빈의 집에 들러 밀린 빨래와 밑반찬을 해주고는 용돈도 주고 간다.
아주 고마운 분들이기에 현빈도 삼촌과 고모를 부모님같이 생각하고 있다.
며칠 후.
우르르··· 콰쾅!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내리치고 있다.
3일째 호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엘니뇨 영향으로 북태평양에 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 양쯔강 부근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동진해 오면서 우리나라 서해상에 유입되는 따뜻하고 습한 대기와 만나 강한 비구름대를 형성하였다.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연강수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9백 밀리미터가 넘는 집중호우가 내리고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피해액은 무려 수천억 원이나 된다고 연일 뉴스에서 떠들고 있기 때문에 현빈이 이젠 아예 외울 정도가 되었다.
현빈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뉴스에서 방송한 것처럼 호우가 심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어어··· 이게 왜 이래?”
거실 소파에 앉아 방송을 보고 있던 현빈은 갑자기 방송 화면이 나오지 않자 당황했다.
아마도 호우와 바람의 영향인가 보다.
“에이, 이거 왜 이래? 옥상에 있는 안테나에 이상이 생겼나?”
비가 내려 그냥 나가면 옷이 전부 젖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5일이 넘도록 입었던 옷이라 이참에 아예 빨자는 생각에 그냥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비가 많이 온 상태인 데다가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어 옥상에는 물이 제법 많이 고여 있었다.
물웅덩이를 가로질러 안테나를 살펴보았다.
평소 튼튼하게 잘 묶여져 있었기 때문인가, 안테나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현빈의 집 옥상으로는 전선이 가로질러 있었다.
그 양쪽에 전봇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한곳에 있는 변압기에서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다.
퍼엉!
굉음이 터지면서 변압기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그때 이어져 있던 전선이 끊어졌다.
전선은 현빈의 집 옥상에 걸쳐졌고 웅덩이에 전기가 흘렀다.
파지지직.
현빈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물에 젖어 있는 상황에 전기까지 흐르자 현빈은 감전이 되고 말았다.
“아아악··· 끄으으!”
모르긴 몰라도 전기는 수만 볼트는 될 것이므로 현빈은 감전사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 번개까지 내리쳤다.
우르르··· 콰쾅, 파지지직!
전기와 번개가 한꺼번에 현빈에게 작렬되었다.
현빈의 몸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끄으으으······!”
현빈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버렸다.
그 일대는 정전이 되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르르 몸을 떨던 현빈의 머리 쪽에는 보라색 빛이 몇 초 정도 일어나다가 사라졌다.
그때 마침 건너편의 집 옥상에서도 사람이 올라와 있었다.
그 사람은 현빈이 사고를 당한 것을 목격했고 즉시 119에 신고해주었다.
삐뽀··· 삐뽀.
119 구급대가 도착해 현빈을 실었다.
현빈은 해운대 병원으로 후송했다.
응급실에 도착한 현빈을 살펴보던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응급상황이라 즉시 정밀 진단을 실시했다.
현빈은 무사했다.
의사들은 얼마 후 결과를 보고 기적이라고 했다.
보통 전기에 감전되거나 번개를 맞은 사람은 즉사하는 게 대부분이다.
천운으로 살아나더라도 심한 화상의 후유증으로 병상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된다.
그러나 현빈은 놀랍게도 전신에 가벼운 1도 화상일 입었을 뿐이었다.
허리 쪽에는 일부 2도 화상을 입는 것으로 그쳤기에 정말이지 천운이었다.
다만 현빈은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일주일간 입원해 회복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현빈아, 현빈아!”
현빈의 사고 소식을 들은 현빈의 고모는 즉시 해운대 병원 응급실로 달려와 의사에게 상태를 알아보았다.
의사는 현빈의 고모에게 천운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상태가 양호하니 일주일 정도 입원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자 현빈의 고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빈은 하루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는데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호우가 계속됐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일주일간 병실에 있던 현빈은 드디어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가 현빈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고모가 청소를 해놓았는지 집은 깨끗했다.
“당분간은 집에서 쉬고, 옥상에 올라가고 하는 그런 위험한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예, 알았어요, 고모.”
“그럼 나는 가보마.”
“예, 안녕히 가세요, 고모.”
“그래,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예. 열심히 할게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예, 알았어요. 내가 어린아이인가요, 뭐!”
고모는 혼자 있는 현빈이 걱정되어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현빈이 환하게 웃어주자 안심하고 돌아갔다.
현빈은 그 후로 며칠간 집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방학 숙제나 하면서 지냈다.
그토록 지겹게 내리던 비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쳤다.
자외선을 많이 함유한 햇볕이 강렬하게 비추자 피서객들이 해운대 해수욕장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호우로 인한 재해로 예전보다는 피서객들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파가 몰렸다.
사고를 당한 이후 현빈은 이상한 환영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느낌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상한 느낌이 머릿속에서 일어났고 간혹 두통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사고를 당한 후유증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증상이 계속되자 이제는 은근히 불안하기까지 했다.
집 안에만 있다 보니 갑갑함을 느낀 현빈은 집 앞에 있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서 먹고 싶었다.
집 앞 슈퍼에 들어간 현빈이 아이스크림 냉동고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아이스크림이 가득했다.
그래서 500원짜리 딸기맛바 하나와 3천 원짜리 바닐라맛 최고급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날이 더워서 딸기맛바는 먼저 먹으면서 슈퍼를 나섰다.
8월의 한낮이라서 그런지 길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걸어오는 게 보일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던 현빈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대학생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대학생 형은 잘 걸어가다가 길가에 조금 패인 곳에 신발 앞쪽이 약간 걸리면서 휘청거리더니 넘어졌다.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대학생은 창피했던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에 다행이라는 듯 그 형은 바로 일어나 바지에 약간 묻어 있는 흙을 털고 다시 걸어 현빈을 지나쳤다.
그냥 일상의 한 장면이었지만 현빈에게는 아주 남다르게 다가왔다.
믿을 수 없게도 현빈은 그 대학생 형이 걸어오다가 넘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허억··· 저··· 정말 저 형이 넘어졌어.’
현빈은 일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대학생 형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더니 집으로 뛰어왔다.
현빈은 처음에는 그냥 우연이겠지 생각하면서 넘겼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길거리에서 마음속으로 예견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어떤 사십대 아주머니가 길을 걸어가다가 차에 치일 뻔했던 것이다.
그쯤 되자 현빈은 두려움에 떨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자신의 예견은 그냥 느낌에 가까운 것이라 누구에게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사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는가?
오히려 미친놈으로 볼 것이다.
그러니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던 현빈은 백과사전을 뒤져 예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지(豫知, precognition)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비범한 인식. 정신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사건을 예언하는 데 중점을 둔다.
정신감응이나 투시력과 마찬가지로 예지는 정상적인 감각에 의존하기보다는 초감각 지각(extrasensory perception/ESP)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꿈속에서 미래를 예견하거나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제물이 된 동물의 내장을 검사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를 예견한 일화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피험자에게 뒤섞기 전에 카드의 순서를 미리 예언하라고 한다든가, 주사위를 던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견해보라고 함으로써 예지능력을 검사할 수 있지만 그 통계적 결과는 정신감응이나 투시력 실험보다 신빙성이 낮다.
“으음··· 그럼 혹시 내가 그 사고로 인해서 예언가가 된 건가?”
현빈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맞지만 사전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강렬했다.
그래서 현빈은 예지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실험해보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해운대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도넛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현빈은 몇 개의 도넛과 얼음을 넣은 오렌지 주스를 가지고 이층 창가로 가 앉았다.
거리에는 아직도 해수욕을 하러 온 피서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해수욕장 입구 쪽에서 현빈 쪽으로 건너오려고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선글라스를 끼고 검정색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을 멋지게 입은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 2명이 있었다.
그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가씨의 가슴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가슴도 크고 몸매와 얼굴이 확연하게 뛰어났기에 많은 남자들이 호감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평소 남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들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당당한 것이 더욱 그녀들을 돋보이게 했다.
아가씨들은 부산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유난히 창백할 정도로 희고 수영복도 세련된 것이, 서울에서 아마 모르긴 몰라도 패션모델이나 그와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넘어질까? 정말로 그러면 어쩌지?”
현빈은 두 아가씨 중 우측에 서 있는 아가씨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 오는 아줌마와 어깨를 부딪쳐 휘청거리다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허억··· 저··· 정말로 그렇게 되었잖아! 아··· 아냐, 이건 우연일 거야. 맞아, 우연이야.”
현빈은 자신의 예지력을 똑똑히 확인하고서도 그것을 극구 부인하면서 몇 번을 더 실험해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우··· 이럴 수가, 이런 일이 나에게······.”
갑자기 목이 마른 현빈은 얼음이 들어 있는 오렌지 주스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나 한번 흥분된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으음···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현빈은 자신의 예지력이 두렵기까지 했다.
현빈은 집으로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예지력 때문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온몸에서도 식은땀이 솟아나 옷이 젖어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낮잠을 잘 수도 없는 상황이다.
콸콸콸.
욕조에 물을 채우고는 옷을 벗고 들어가 누웠다.
8월이라 냉수도 그다지 차갑지 않고 미지근했다.
그래서 냉장고에 들어 있는 얼음을 전부 욕조에 넣었다.
그리고 현빈은 욕조에 다시 들어가 보았는데, 그제야 제법 물이 시원했다.
현빈은 욕조에 앉아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이런 능력이 생긴 것은 역시 그 사건 때문인 것 같았다.
고압 전기와 번개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지력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현빈의 예지력은 3초 정도 집중하면 환영처럼 미래의 어떤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치 하나의 모니터에 두 화면이 나오는 것 같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텔레비전 화면에 두 개의 영상이 나오는데, 하나는 현재 것이고 또 하나는 미래의 영상인 것이다.
또한 미래의 영상에 좀 더 정신을 집중해서 바라보면 마치 필름이 흘러가듯 하루, 이틀, 사흘 뒤로 시간이 흘러 점점 먼 미래의 영상이 나왔다.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현빈은 예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려고 대형 서점에 들어가 책을 찾아보았다.
초능력에 대해서 나와 있는 것은 제법 보였지만 예지에 대해서는 거의 없었다.
초능력에 관한 책에 한 장 정도로 예지에 대해 설명한 것이 전부였다.
“음··· 하긴 염력이나 다른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예지능력은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가만 했던 것이다 보니 그럴 거야.”
사고가 일어난 지 어느덧 2주가 넘어갔다.
1도 화상이었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그러나 현빈의 허리 일부에는 2도 화상은 상처 흔적이 조금 남았다.
다행히도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아니었기에 충분하게 옷으로 가릴 수 있었다.
예지능력이 생긴 이후 가장 특별해진 것은 현빈의 머리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 사고 전까지만 해도 현빈이 생각하기에 암기력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예를 들어 시 한 편을 외운다고 하면 한참을 외워도 잘 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외운다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번만 쓰윽 읽기만 해도 완벽하게 외워졌고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현빈은 갑자기 공부에 부쩍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 공부에 흠뻑 취해버린 현빈은 신나게 방학 숙제를 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2학기 때 배울 진도를 예습까지 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어?”
놀랍게도 한번 읽은 것이 완벽하게 외워지곤 했다.
공부에 재미를 느낀 현빈은 일단 이해가 안 되더라도 외우기부터 했다.
그리고 현빈은 평상시에 자신이 공부의 기초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기초 공부도 해두기로 했다.
책꽂이 한쪽에 꽂아두었던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를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현빈은 그렇게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2장 학교 시험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일이 되었다.
방학기간 동안 현빈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같은 반 학우들은 특별한 일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방학을 보내고 개학일을 맞았다.
교단에는 검정 재킷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은 이십대 후반의 미모의 여선생이 서 있었다.
그분이 바로 현빈의 담임선생님인 한미란이었다.
올해 28살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바다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지 5년 되었다.
“자, 여러분. 드디어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일이네요. 2주 후에 9월 고사가 있으니까 공부들 열심히 하세요. 반장.”
“차렷, 경례.”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 교실의 이곳저곳에서 친한 학우들끼리 모여 잡담을 시작했다.
방학 동안 오래 만나지 못하다가 만났으니 좀 할 말들이 많을까?
웅성웅성.
교실 안이 아이들이 잡담하는 소리로 제법 시끄러웠다.
그러나 10위권 안에 드는 상위 학생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 책을 꺼내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위권인 현빈도 책을 꺼내 조용히 보기 시작했다.
학우들은 현빈의 그런 모습이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 현빈을 바라보았는데, 순식간에 모든 학우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교실은 조용해졌다.
“어머, 현빈이가 공부해!”
“호호··· 너무 웃긴다.”
“그치, 그치. 방학 동안 머리가 이상해졌나?”
“에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렇게 책을 본다고 하위권이던 현빈이가 상위권이 되겠어.”
“음··· 하긴 닭이 날개 있다고 하늘을 날 수 있겠어?”
너무나 신기한 현상에 상위권 학생들까지 한 번씩 현빈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옆으로 몇 번 흔들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펼쳐 놓은 책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현빈의 이런 행동에 개그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빈은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용한 학생이었기에 학우들의 관심 밖 인물이었다.
그런데 개학 첫날에 이렇게 학우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현빈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책만 읽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하교 시간이 되었다.
집으로 곧장 돌아온 현빈은 방학 동안의 생활과 다름없이 먼저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현빈은 시원한 우유를 꺼낸 뒤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식빵을 먹었다.
식빵과 우유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빈은 벽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6시 40분이었다.
현빈은 읽던 책을 그대로 놓고 집을 나섰다.
현빈은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 건물로 들어갔다.
<해운대 단전호흡>
벽면에 그런 간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간 현빈은 도복 비슷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고무 매트리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곳은 단전호흡 수련장이다.
현빈은 3일 전 이곳에 등록해 단전호흡을 하루에 두 시간씩 배우고 있다.
해운대 단전호흡 수련장은 단전호흡과 요가, 이렇게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었다.
현빈은 각각 1시간씩 그것을 배우게 되었다.
단전호흡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배우는 것이고 요가는 굳어 있는 몸을 풀어보자는 취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단전호흡과 요가를 배우고 그곳을 나서자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집으로 들어온 현빈은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 될 때까지 책을 읽었다.
“벌써 새벽 3시야?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구나. 이젠 자야겠어.”
자명종을 켜놓고 현빈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빰빠라··· 빰빰.
요란한 자명종 소리가 울리자 현빈은 눈을 뜨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침 6시 정각이었다.
“아··· 음··· 벌써 아침이야?”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않았지만 머리가 무겁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현빈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개운하게 일어난 현빈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현빈은 아침에는 밥을 먹는 게 좋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현빈은 전기밥통에 들어 있는 밥과 고모가 냉장고에 넣어 놓은 밑반찬을 꺼냈다.
그리고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설거지까지 끝마친 현빈은 오늘 배울 책과 노트를 꺼내 챙겼다.
책과 노트를 책가방에 넣었지만 아직 시간은 7시도 되지 않았다.
학교까지는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으니 8시에 집을 나서도 충분했다.
시간이 남는다 생각한 현빈은 책꽂이에 있는 국어대사전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아침에 국어대사전을 읽는 그런 행동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머리가 너무 좋아졌기에 국어대사전을 통째로 외우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학교 갈 시간이 되었다.
현빈은 읽고 있던 국어대사전과 책꽂이에 있는 옥편과 영어사전을 모두 책가방에 넣었다.
시간 나면 틈틈이 이것들도 읽어 보려는 것이다.
학교에 도착한 현빈은 자신의 책상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과목별 선생님들의 열성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현빈은 놀랄 만큼의 집중력을 보였다.
그리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선생님의 열강에 심취했다.
‘아··· 이런 것이 진정한 공부의 재미였구나.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너무 좋다.’
학교 수업이 모두 끝이 났다.
현빈은 오늘도 어제처럼 그렇게 성실하고 규칙적인 하루를 마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었다.
9월말에는 시험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험 당일이 되면 상위권 학생들은 느긋한 반면에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책을 꺼내 보느라 정신없다.
일부는 커닝 페이퍼를 만든다고 요란법석이다.
그러나 현빈의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가지고 오신 시험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문제지를 받아든 현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출제된 문제를 보니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쉬운 문제가?’
사실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현빈이 머리가 좋아져 열심히 공부한 탓에, 현빈에게는 너무나 쉬운 문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험문제를 다 푼 현빈은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학생들이 하나 둘씩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먼저 나온 현빈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4일간의 모든 시험이 끝났다.
현빈은 이번처럼 시험이 즐거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아는 문제만 나온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좋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현빈은 시험이 끝나자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교문을 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시내버스를 타고는 일명 책방골목이라 불리는 보수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헌책방이 몰려 있어 현빈에게 필요한 책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든 것이다.
보수동에서 내린 현빈은 한 헌책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중학교 교과서 있어요?”
“그럼 있지. 어떤 과목을 원하는데?”
“한 과목이 아니라 전 과목을 구입하려고 하거든요.”
“알았다. 몇 학년 거?”
“음···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 과정의 전 과목 교과서요.”
“호오, 제법 많을 텐데 괜찮겠어?”
“예, 있으면 주시구요. 아참, 혹시 고등학교 교과서도 있어요?”
“그럼, 다 있지. 줄까?”
“예. 그럼 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 전 과목 교과서 주세요.”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잠시 후 60권이 넘는 교과서를 주인이 가져왔다.
“우와, 제법 많네요.”
“그럼, 중학교와 고등학교 전 과목 교과서인데 많지. 묶어줄 테니 기다려라.”
잠시 후 아저씨는 학년별로 분류한 교과서를 현빈에게 내밀었다.
현빈은 빈 택시를 잡았다.
혼자서 들기엔 너무 많은 책이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책방 주인이 택시에 책을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현빈은 책을 금방 싣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기초실력이 부족한 걸 느껴온 현빈이었다.
그렇기에 큰마음 먹고 헌책을 대량 구입한 것이다.
현빈은 책꽂이에 구입한 책을 학년별로 잘 분류해서 꽂았다.
그런 뒤 일단 밥부터 먹고 중학교 1학년 과정의 교과서부터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젠 탄력이 붙어서 책 한 권을 읽는 데 2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드디어 9월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학우들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빈을 쳐다보았다.
“말, 말도 안 돼!”
“저놈, 커닝한 걸 거야. 틀림없어!”
사실 그전까지 현빈의 성적은 바닥이었다.
평소 시험을 보면 현빈은 49명 중 40~45등 정도의 하위권 성적이었던 것이었다.
운동부 학생 몇 명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바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월 시험에서는 현빈이 당당하게 전교 1등을 한 것이다.
2학년은 10개 학급으로 전교 478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현빈이 학급에서도 1등인 동시에 전교에서도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깜짝 놀랄 수밖에.
특히 반에서 10등 안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죽어라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었다.
현빈이 그런 학생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하게 반에서 1등을 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동시에 전교 1등이니 학생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담임과 교무실의 선생들, 교감과 교장을 비롯해 2학년 전교생이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일부 상위권 학생들은 현빈이 시험지를 몰래 훔쳐 시험을 봤을 것이라고까지 떠들고 다녔다.
학생들 중 일부는 현빈이 커닝을 했을 거라는 말도 했다.
그냥 유언비어라고 말하기에는 현빈의 평소 성적이 바닥이라 그들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렸다.
학교 측은 고민했다.
사상 유래 없는 일이 일어났기에 현빈만 따로 재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일부 선생들은 재시험을 반대했지만 대다수 선생들이 현빈에게 의혹이 있다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재시험을 시행했다.
반신반의하던 학생들도 현빈의 재시험 소식을 듣고 굉장히 좋아했다.
재시험을 치르게 되면 현빈의 부정행위가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넓은 학교 강당에서 현빈의 재시험이 치러졌다.
강당 가운데 놓인 책상과 의자에 현빈이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선생님 세 분이 현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강당 밖에서도 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현빈은 시험지만 바라보며 답을 적어나갔다.
그런 모습을 선생님들도 왔다 갔다 하면서 지켜보았다.
‘후후후··· 9월 시험에서는 일부러 몇 문제를 틀리게 적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 비록 재시험이라고 하지만 문제가 너무 쉬워.’
현빈은 소변보러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시험문제를 푸는 일에 전념했다.
결국 현빈은 오후가 되어서야 모든 시험을 마쳤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는 각 과목의 선생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현빈이 먼저 제출한 문제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현빈 혼자 보는 재시험이었기에 답안 대조가 바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결과도 시험이 끝나는 동시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시험 결과는 학생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전 과목 만점이라는 놀라운 결과였다.
이 소식은 다음 날 조회 시간에 2학년 학생들에게 알려졌다.
소식을 접한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9월 시험보다 재시험의 결과가 더 좋게 나왔기에 학생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하위권 학생들은 부러움을 표시했고, 상위권 학생들은 ‘네가 어떻게’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일부 상위권 아이들은 현빈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곁눈질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현빈이 화장실 가고 없을 때 무슨 책을 보나 살펴보곤 했다.
하지만 특별한 책은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전 과목 교과서와 영어사전 그리고 옥편을 확인할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네?”
“그러게 말이야. 혹시 집에 숨겨둔 게 아닐까?”
“불가사의하긴 해, 그치?”
학생들은 쑥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빈은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했다.
현빈의 반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학생이 1명 있었다.
바다고등학교에서 가장 예쁘면서도 머리까지 좋은 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현재 반장이며 간간이 텔레비전 광고에도 나온다.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 김소현이라는 아이다.
키가 173센티미터에 48킬로그램의 몸무게.
그러나 그렇게 날씬함에도 불구하고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환상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매는 많이 성숙했지만 얼굴은 아직 미소녀의 모습이다.
내년에는 미스코리아 대회에도 나갈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느 날 한참 책을 읽던 현빈이 책상에 그늘이 지자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김소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당황한 현빈은 고개를 다시 숙였지만 김소현은 그대로 현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현빈이지?”
“맞아, 그··· 그런데 그건 왜?”
“내일이 내 생일인데, 초대할게.”
“나를?”
“응, 꼭 참석해주면 좋겠어.”
“그럴게. 하지만 난 너희 집 모르는데?”
“숙희가 알고 있으니까 같이 우리 집에 와.”
“그··· 그럴게.”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김소현이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는데 현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흰 교복 상의는 그녀에게 섹시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소현은 다른 여학생들에 비해 가슴이 큰 편이었다.
교복이 가슴에 딱 붙어 있었기에 남학생이라면 대부분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스커트도 다른 여학생들은 무릎 정도까지 내려오는데 비해 김소현은 키가 커서 허벅지 절반 정도까지 올라와 한층 더 몸매가 부각되었다.
키 크고 몸매 날씬하고 얼굴까지 예쁘다 보니 같은 여자라고 해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머리까지 좋으니 아예 경쟁 상대자가 이 학교 내에는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약간 콧대가 높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주 예쁘다 보니 그런 것도 용서가 되는 모양이다.
김소현이 직접 현빈에게 다가가 하는 말을 모두 들었기에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최근 바다고등학교에서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빈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믿기 힘든 소식이 순식간에 전교생에게 퍼져 나갔다.
소현은 평소 하이틴잡지의 모델과 학생, 이렇게 두 가지의 일을 하고 있기에 학교를 빠지는 경우가 제법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현빈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현빈이라는 아이가 같은 반에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현빈이 전교 1등을 하면서 소현은 현빈에게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호호···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는데 전교 1등에 얼굴도 잘생겼어.’
다음 날 학교를 마친 현빈은 바로 집으로 달려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캐주얼 복으로 갈아입고 어젯밤에 준비해두었던 선물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빈 택시를 탄 현빈은 요트경기장 앞에 있는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아파트 앞에는 같은 반 여학생인 숙희가 서 있었다.
숙희도 170센티미터의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까지 예뻤다.
비록 김소현에게는 조금 밀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어디에 가서든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여학생이었다.
숙희는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현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는 관심 밖이었기에 몰랐었다.
그러나 사복을 입은 당당해 보이는 현빈의 모습에 숙희는 조금 놀란 듯했다.
여름방학 때만 해도 현빈의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예지능력이 생기고 머리가 좋아진 데다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선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졌고 키도 178센티미터로 급격하게 자랐다.
게다가 몸속에 있던 불순물까지 말끔하게 빠져나가버렸기에 피부에 광택이 났다.
사건 전에도 잘생긴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멋있지는 않았었다.
현빈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확 바뀌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전교 1등을 한 이후로는 현빈에 대해 더 좋은 이미지가 생겨났기 때문에 숙희가 현빈을 다시 보며 반하는 데에 단단히 한몫했다.
‘우와··· 멋있는데? 이런 멋진 남학생을 왜 내가 모르고 있었을까?’
숙희는 현빈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들어가자.”
“그래, 알았어.”
숙희와 현빈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렸다.
그곳이 김소현의 집 앞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소현아, 나 숙희.”
“그래, 어서 와.”
문을 연 소현도 숙희와 함께 서 있는 현빈을 보고 눈이 커졌다.
현빈의 멋진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호호··· 나도 현빈이를 보고 놀랐는데 소현이 너라고 별수 있니?’
“소현아.”
“아··· 미안, 어서 들어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거실이 보였다.
소현이의 아파트는 63평 정도 되는 모양이다.
거실에 장식되어 있는 각종 물건들이 비싸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예전에 현빈이 듣기로는 소현의 아버지는 사업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거실에는 생일상이 잘 차려져 있었는데 흔히 볼 수 없는 요리들이 즐비했다.
“어서 앉아.”
“응··· 그럴게.”
소현의 같은 반 학생은 현빈과 숙희뿐이었다.
그 외에도 처음 보는 여학생이 3명이나 더 있었다.
남자는 현빈 혼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여학생이었다.
여학생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예뻤다.
여학생들은 그들도 모르게 현빈을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5명의 시선이 현빈에게만 집중되자 현빈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되었다.
“자, 소현아. 생일 케이크다.”
“고마워요, 엄마.”
소현의 어머니께서 생일 케이크를 상에 올려놓자 여학생들은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초에 불을 붙이자 소현이 불을 끄기 위해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짝짝짝!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소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와아!”
짝짝짝짝!
여학생들과 현빈이 박수를 치며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자 소현은 행복한 듯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러졌다.
‘아··· 너무 예쁘다.’
현빈은 순간 소현이 너무 예쁘게 보였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소현을 보며 백일몽에 빠져 있던 현빈은 한 여학생의 목소리 때문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현아, 생일 축하해. 자, 선물이야.”
“나도.”
“나도.”
각자 준비해온 생일 선물을 내밀자 소현은 고맙게 받아 포장을 뜯어보았다.
대체로 비싸면서도 좋은 물건들이었다.
이윽고 현빈도 자신이 준비해온 선물을 소현이에게 내밀었다.
“소현아, 생일 축하해. 이건 내 선물이야.”
“현빈아, 고마워.”
소현은 현빈의 선물을 뜯어보았다.
선물 상자에는 오르골이 들어 있었다.
소현은 태엽을 돌린 후 오르골을 내려놓았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유리로 된 막 안의 발레리나가 춤추듯 회전했고 반짝이가 눈처럼 휘날렸다.
“아··· 너무 예뻐!”
소현은 현빈이 선물로 준 오르골을 너무 좋아했다.
사실 그 오르골은 소현이 얼마 전 쇼핑하다가 보고는 갖고 싶어 했던 것이다.
소현은 생일이 지난 후 언젠가 그것을 꼭 사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소현의 친구들은 소현이 너무 좋아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르골이 비록 예쁘기는 하지만 다른 생일 선물도 오르골만큼이나 비싸고 예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소현이 그것만 유독 더 좋아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소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겠는가?
현빈이 오르골을 선물함으로서 소현은 현빈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 어떻게 내가 원하던 발레리나 오르골을 사왔을까? 예전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나랑도 잘 통할 것 같아.’
맛있는 요리를 먹고 나자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소현의 친구들은 먼저 전축을 틀어 놓고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로 노래를 부르다가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소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소현은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과 ‘희망사항’을 연이어 불렀다.
짝짝짝······.
소현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노래까지도 잘 불러 역시 만능 재주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현빈이가 부를 차례야.”
소현이 마이크를 현빈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현빈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준비해두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는 떨리지 않았다.
“저기 있는 통기타, 내가 한번 쳐봐도 돼?”
“응, 아버지 거야. 그런데 너 기타 칠 줄 알아?”
“조금 칠 줄 알아.”
“호호··· 대단하다, 너. 어디 한번 쳐봐. 들어보게.”
“좋아, 그··· 그럼 불러줄게.”
띠띠딩··· 띵띵.
“그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 많이 미워했죠. 사춘기 철없던 방황 때문에 눈물 참 많이 흘렸어. 모두 끝날 것 같던 그 시절, 어린 날로 추억을 타고 내 노래에 하얀 마차를 달아 그곳에 가면 소중했던 모든 게 있죠. 내 어릴 적 동네 우리 친구들과 따뜻했던 기억을 담아 난 노래하죠. 아름다운 내일을 다 줘도 아깝지 않던, 착하기만 하던 사람. 너와의 비밀로 가득 채우던, 밤새워 쓰던 일기. 오늘처럼, 밤이 예뻐 혼자 있기 싫을 땐 너를 부를게. 영원히 내 노래와 추억이 아름답게.”
“와아아!”
짝짝짝짝!
현빈이 잔잔한 기타 소리에 맞추어 달콤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자, 여학생들은 눈을 감고 음악에 젖어 들었다.
소현도 풀린 눈동자로 현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예지력으로 소현이와 여자들의 마음을 미리 읽어두길 잘했어.’
“이야··· 현빈이 노래 너무 잘 부른다, 멋져.”
“아··· 너무 노래가 좋았어. 최고야, 현빈아.”
“현빈아, 한 곡만 더 불러줘.”
“그··· 그럴까? 알았어. 불러줄게.”
현빈은 기타를 치면서 이번에는 ‘나의 길(My way)’이라는 노래를 해석해 불렀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네. 드디어 내 마지막 커튼이 내려지는 순간을 맞게 되었네. 친구여, 내가 명확히 말해두겠네. 내가 확신하는 인생의 방식에 대해 말이네. 나는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왔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을 다 가보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것일세. 후회, 조금 있었지. 그러나 후회에 대해 말할 것은 거의 없다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힘든 고난의 일들을 편법을 쓰지 않고 다 했다네. 나는 내가 세운 인생 계획도를 차근차근 열어갔네. 차근차근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것일세. 그래, 당신도 알다시피 자네도 알다시피 삼키지 못할 것을 물어뜯은 적도 있었네. 그러나 의심스러울 때는 그것을 다 먹고 씨알만 내뱉었지. 모든 것을 다 직면하고 기꺼이 맞서 내 방식대로 했네. 사랑도 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 난 만족감도 얻었고, 좌절도 겪었지. 그러나 이제 눈물을 거두니 모든 것이 우습기만 하군. 내가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지 않아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니요, 난 달라요. 난 내 방식대로 살았소. 인간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해. 비굴한 말을 하면 안 되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내 길을 걸었다고 기록돼 있어. 그래,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네.”
현빈은 뛰어난 가창력으로 소녀들의 마음에 치명적인 감동을 안겨주었다.
소현의 어머니까지 현빈의 노래에 심취해 몽롱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짝짝짝짝!
“꺄아악! 너무 좋아, 멋져.”
“최··· 최고야, 현빈아!”
“아··· 현빈이는 너무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아.”
두 곡의 노래로 현빈은 그날 최고 인기인이 되어버렸다.
여학생들뿐 아니라 생일을 맞은 소현도 그런 현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부에 얼굴에 이젠 노래까지? 너무 멋져!’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나게 노래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들은 이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현빈과 숙희, 소현의 친구들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소현의 모습도 보였다.
배웅해준다고 하면서 굳이 친구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던 것이다.
아파트 앞에서 빈 택시를 잡아서 보내주었는데 현빈은 나중에 탈 수밖에 없었다.
소현이 친구들 몰래 은근하게 현빈의 손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빈은 나중에 타고 가기로 하고는 다른 친구들 먼저 태워 보냈다.
숙희와 현빈을 제외한 소현의 친구들이 모두 택시를 타고 떠난 후 이번에는 숙희가 택시를 타려고 하면서 말했다.
“현빈아, 넌 안 갈 거야?”
“어··· 나도 가야지. 너 먼저 타고 가.”
“그래.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봐.”
“그래, 잘 가라.”
부우웅.
숙희를 태운 택시까지 떠나자 소현이 현빈 옆에 섰다.
“현빈아, 조금 있다가 가면 안 돼?”
“뭐··· 특별한 일 없으니까 조금 있다가 가도 돼.”
“그래? 그럼 아파트 주위에서 산책이라도 할까?”
“나야 상관없지만··· 넌 괜찮겠어?”
“집 앞인데 어때.”
“그래. 그럼 뭐.”
현빈과 소현은 서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현이 현빈의 곁으로 바짝 붙더니 팔짱을 꼈다.
두근두근.
현빈과 소현 두 사람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지만 행복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고 행복하다 느꼈다.
아파트 주위라고는 하지만 넝쿨식물과 나무들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었는데 의자가 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소현과 현빈은 나란히 한 의자에 앉았고, 살며시 소현이 현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현빈아,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우리 사귈래?”
“······.”
“나··· 싫어?”
“아··· 아냐, 그런 거··· 나도 너 좋아해.”
“정말? 고··· 고마워.”
여자가 먼저 사귀자고 말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걸 알고는 잇었지만 소현이 용기를 내어 먼저 사귀자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현빈이 거절하지 않고 허락하자 소현이는 너무 행복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현의 얼굴이 조용히 현빈에게로 다가오더니 서로 입술이 부딪쳤다.
소현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현빈은 눈을 크게 뜨며 그 기분에 취해버렸다.
소현의 입술은 사과처럼 향기롭고 달콤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첫 키스가 이렇게 이루어졌다.
‘아··· 현빈이에 대해서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었는데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너무 빠른 것 아닐까?’
너무 빠르게 가까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마음이 되었기에 첫 키스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만족스럽게 제법 긴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서로의 따스한 체온과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요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꿈만 같은 행복한 시간이 지나갔다.
둘은 서로 몸을 떨어트렸다.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그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지만 손은 꼭 잡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
“응. 잘 가, 현빈아.”
“너도 잘 자.”
현빈이 소현의 집 앞에까지 바래다주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택시!”
끼이익.
택시가 멈추자 그걸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현빈은 소현과의 첫 키스를 떠올렸다.
아무 일 없이 그저 생각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없이 그냥 웃음이 났다.
“후후··· 너무 좋았어!”
약간 쑥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한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만큼 소현과의 첫 키스는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부는 해야 했기에, 현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루어두었던 책을 다시 펴고는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 소현도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현빈과의 첫 키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소현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호호··· 현빈은 너무 귀여우면서도 멋져. 노래도 잘 부르고··· 키스도 너무 좋았어.”
소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행복한 기분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소현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었다.
짹짹짹.
소현의 아파트 베란다에 이름 모를 작은 새 2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곧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새소리에 잠을 깬 소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아침밥을 먹고는 등교했다.
현빈도 등교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섰다.
반에서 만난 소현과 현빈은 조금 어색했다.
친구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서로 대화를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벨은 소현에게 눈빛을 보냈다.
소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만의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토요일 저녁에 번화가인 남포동에서 다시 만났다.
“저 집으로 가자!”
“그래, 맛있겠어.”
둘은 예쁜 돈가스 집에서 맛있는 돈가스를 먹으며 둘만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둘은 손을 잡았다.
서로의 손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 했다.
현빈은 택시를 타고 소현의 집으로 향했다.
소현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현빈은 소현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주위를 살피던 소현이 현빈의 손을 끌어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소현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쪼오옥.
현빈은 소현의 촉촉한 입술에 입 맞추고 소현을 잠시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헤어져야만 했다.
소현은 아쉬운 듯 다시 한 번 더 현빈을 껴안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빈이 소현의 이마에다 뽀뽀를 해주었다.
“너무 늦기 전에 들어가야지.”
“응, 알았어. 그럴게.”
다시 소현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현빈은 아파트 앞으로 나와 7층 창문을 쳐다보았다.
7층에서 내린 소현이 계단 창문으로 현빈을 내려다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현빈도 소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빈은 하루 일과가 늘 일정했지만 학교에서 소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모든 일이 행복하다 느꼈고 공부를 하는 것도 한없이 즐거웠다.
현빈과 소현은 수시로 만나 둘만의 시간을 가졌는데 혹시 친구들을 만날까봐 조심했다.
그래서 현빈은 학교를 하교하면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현빈의 집에서 소현과 만났다.
두 사람은 현빈의 집에서 만나 라면도 끓여먹고 공부도 같이 했다.
그런 사소한 일상이 두 사람에게는 보석처럼 너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현빈은 상관없었지만 소현은 요즘 현빈과 사귀느라 성적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빈은, 이런 일에는 쓰지 않기로 스스로 생각해왔었지만, 오랜만에 예지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예지력을 일으켜 살펴보았더니 반에서 1등, 전교 2등 하던 소현의 실력이 10월 시험에서는 반에서는 3등, 전교에서는 5등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현빈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예지력으로 10월에 나올 문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한 뒤에 소현과 함께 공부했다.
원래 머리가 좋았던 소현은 현빈이 제시해주는 예상 문제들에 대해서 금방 파악했다.
최근 현빈과 연애하느라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있었지만 현빈이 예상 문제를 들고 나와 같이 공부하자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소현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시험을 칠 때는 알게 될 것이다.
현빈은 이런 일에 예지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현빈은 그 사고 이후 머리가 총명해지면서 공부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그런 일에 예지력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예지력을 거의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별로 쓸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최근에 한 번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소현의 생일을 앞두고 소현이 좋아할 선물과 노래를 준비해 간 것이다.
그래서 그날 소현과 첫 키스를 했고 이렇게 사귀기까지 한 것이다.
“현빈아, 무슨 생각해?”
“아··· 아냐, 아무것도··· 공부하자.”
“현빈아, 출출한데 우리 라면 끓여먹고 하자.”
“내가 끓여줄까?”
“응··· 현빈이가 끓여주는 라면이 제일 맛있어.”
“알았어. 맛있게 끓여줄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라면을 식탁에 내려놓자 소현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아··· 맛있겠다. 현빈이도 먹어.”
후루룩.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은 두 개 끓인 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아··· 정말 맛있었어. 배부르다.”
“그렇게 맛있었어?”
“응, 현빈의 라면 끓이는 솜씨는 제일이야··· 제일!”
“라면도 먹었으니 이젠 녹차 끓여줄게.”
“고마워.”
쪼옥.
소현은 현빈의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현빈이 만들어준 맛있는 라면과 녹차에 대한 소현만의 보답인 모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녹차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늦기 전에 집에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고마워, 현빈아.”
집에서 나온 현빈과 소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중년의 신사를 만났다.
“아··· 아빠, 이제 퇴근하신 거예요?”
“어, 그래. 귀여운 내 딸 소현이구나.”
“호호··· 아빠는··· 참, 우리 반 친구인 박현빈이야.”
소현의 아빠는 소현의 발랄한 말에 의외라는 듯 눈이 약간 커졌다.
그리고 현빈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안녕하세요? 박현빈이라 합니다.”
“그래? 난 소현이 애비 되는데, 아참, 소현아. 너 어디 갔다가 오는 것이냐?”
“응, 현빈이 집에서 공부하고 와요.”
“우리 딸이 집에서 공부하지 않고 친구 집에서 공부를 다 하네?”
“아빠는 잘 몰라서 그렇지 현빈이가 나보다 더 공부를 잘한다고요.”
“뭐? 우리딸보다 더 공부를 잘해?”
“예, 아빠. 전교에서 1등이라니까요.”
신사는 소현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 다시 한 번 현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호오··· 그것 참··· 이럴 게 아니라 집에 들어가 놀다가 가지?”
“아··· 아닙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그래? 그럼 자주 놀러 와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거라.”
“현빈아, 잘 가. 내일 학교에서 봐.”
“그래, 내일 보자.”
현빈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현빈이 떠나가는 것을 7층 계단 창문에서 내려다보던 소현이 아쉬워했다.
“허허··· 우리 딸이 그 아이를 좋아하는가 보구나.”
“아, 아니에요.”
“아니긴, 척 보니 알겠는데?”
“그, 그렇게 보여요?”
“그래, 인상이 좋은 아이더구나. 잘 사귀어봐.”
“고마워요, 아빠.”
“허허허··· 우리 공주님, 그만 집으로 들어갈까요?”
“예, 아빠.”
아버지와 딸은 그렇게 집 안으로 사라졌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10월.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시험이 있는 달이었다.
현빈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시험을 보았다.
며칠 뒤에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도 현빈이 반에서 1등이자 전교 1등이었고 소현은 반에서 2등과 전교에서 4등을 했다.
일요일이 되자 현빈과 소현은 피크닉 바구니를 가지고 공원으로 나왔다.
공원 곳곳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현빈과 소현은 그런 단풍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작은 개울이 있는 곳에 야외용 돗자리를 깔고는 앉았다.
소현은 가지고 온 예쁜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 샌드위치를 꺼냈다.
“현빈아, 내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야. 먹어봐.”
“응, 고마워. 맛있겠다.”
“그럼, 내가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들었다구. 안의 소스도 내가 직접 만든 거다? 먹어봐.”
쩝쩝쩝.
“음··· 이걸 진짜 소현이가 직접 만들었단 말이야? 정말 맛있는데?”
“그렇지? 내가 샌드위치 하나는 제대로 만든다니까··· 호호.”
두 사람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면서 간간이 콜라도 함께 마셨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에 주변 경치가 너무 좋았기에 마음까지 다 시원했다.
“현빈아, 이번 10월 고사에서 네가 가르쳐준 문제가 많이 나와 다행이었어. 고마워.”
“뭘··· 소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아, 아냐. 사실··· 나 최근에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어.”
“소현아, 내가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해. 공부도 제대로 못하게 해서······.”
“아냐··· 난 그래도 너를 만나서 행복한걸.”
“나도 너를 만나서 너무 좋아.”
“현빈아, 우리 사진 찍자.”
“나 사진기 없는데······.”
“내가 가져왔어.”
“정말이야?”
“응.”
소현이 먼저 현빈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현빈이 카메라를 들고 소현의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주었다.
“아저씨, 우리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래요?”
“뭐 그러지. 줘봐라.”
“감사합니다, 아저씨.”
찰칵찰칵.
지나가던 아저씨는 소현과 현빈이 다정스럽게 있는 모습을 여러 장이나 찍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래, 두 사람이 다정한 게 보기 좋구나.”
소현은 현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해했다.
그런데 현빈의 머릿속에 갑자기 영상들이 떠올랐다.
현빈은 갑자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빈아, 왜 그래?”
“소현아, 그만 여기서 나가자. 어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말해줄게.”
“아, 알았어.”
두 사람은 서둘러 앉아있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그곳을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10분도 채 안 되어서 그곳에 불량스러운 삼십대의 남자 3명이 어슬렁거렸다.
“어··· 여기에 있던 계집애 어디 갔어?”
“햐··· 멀리서 봐도 가슴도 큰 게 죽이던데··· 쩝.”
“아이고, 아까워라. 정말이지 얼굴도 되게 예쁘더라고.”
“쩝··· 정말 아깝군.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에이.”
이런 모습을 소현이가 보지 못했기에 다행이었다.
만약 이런 자들이 행패를 부렸더라면 큰 사고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다행히 현빈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느꼈다.
불안해진 현빈은 즉시 예지능력을 일으켰고 이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현을 데리고 급히 자리를 피한 것이다.
3장 무술을 배우다
현빈은 자신의 예지능력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현에게도 비밀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얼버무리면서 그곳을 벗어났던 것이었다.
그 자리를 피한 그들은 버스를 타고 현빈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직 오후 4시 정도밖에 안 된 시간이라 현빈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온 현빈은 소현이 너무 예뻐보여 갑자기 소현을 힘껏 껴안았다.
소현은 왜 이러나 하면서도 그런 현빈이 좋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자 이번에는 현빈이 소현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는 키스했다.
한참동안 그렇게 키스를 나누던 그들의 입술이 떨어졌다.
“후아··· 숨이 막혔어, 현빈아.”
“나도 그랬어, 소현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틈만 생기면 키스했다.
행복한 얼굴이 된 소현은 현빈을 꽉 껴안았다.
소현의 풍만하고 뭉클한 가슴이 느껴지자 현빈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현빈은 소현을 껴안은 상태에서 몸을 들어 올려 천천히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소현은 그런 현빈의 양쪽 귀 부분에 손바닥을 붙이고는 머리를 앞으로 당겨 다시 키스했다.
그러자 빙글빙글 돌던 몸이 멈췄다.
소현과 현빈은 눈동자가 흔들거렸는데 그 순간 소현이 현빈을 와락 끌어당겨 안아버렸다.
그렇게 되자 자제력을 잃은 두 사람은 서로 키스를 하면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미··· 미안해, 소현아.”
“아··· 아냐, 현빈이 네가 왜 미안해?”
“그··· 그래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날 사랑하는 걸 후회하는 거야?”
“그··· 그건 아니야, 소현아.”
“현빈아, 날 사랑해?”
“그래, 널 너무 사랑해.”
“그럼 됐어. 나도 현빈이를 사랑하니까 이런 거잖아. 내가 먼저 씻을게.”
“그래, 알았어.”
소현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더니 옷을 입었고 이번에는 현빈이 샤워를 하고 나왔다.
현빈이 침대에 눕자 소현이 현빈의 팔베개를 하고는 옆에 누웠다.
“아··· 편안해. 좋아.”
“소현아, 나도 너무 좋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서로 이렇게 껴안고 누워 1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났다.
“소현아, 더 늦기 전에 가자.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 줄게.”
“좀 더 있고 싶어.”
“지금 저녁 7시30분이야. 더 늦으면 부모님들 걱정해. 가자.”
“응··· 알았어. 현빈, 나 키스 한 번 더 해줘.”
“그럼 집에 가는 거다.”
“응··· 알았어. 그럴게.”
키스를 하고 난 두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소현의 짐을 든 현빈이 소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현빈은 소현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으음··· 나와 소현이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인데,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이왕 이렇게 됐으니 소현이를 이제부터는 좀 더 잘 보살펴줘야겠어. 대학생이 되면 결혼해야지.’
택시에서 내린 현빈은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낮에 공원에서 깡패들과 마주칠 뻔했던 일부터 말이다.
만약 자신이 예지능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니 정말 아찔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은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현빈은 내 여자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호신술을 배워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명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무술 또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오후.
현빈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해운대 유도 도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십대 중반의 전형적인 아저씨 타입의 관장이 사무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학생, 어떻게 왔어?”
“예··· 유도를 좀 배워볼까 해서 왔습니다.”
“그래? 그럼 안으로 들어와.”
현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흰 도복 입은 관장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배가 좀 많이 나온 이웃집 아저씨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유도해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입니다.”
“그래? 배우려면 일단 회원 가입부터 하고 나서 배워야 돼.”
“그건 알고 있습니다.”
“좋아, 월 회비는 10만 원이고 첫 달에는 가입하면서 도복비도 내야 하니까 5만 원 더해서 15만 원이야.”
“그렇습니까? 여기 15만 원 있습니다.”
“음··· 시원시원하게 결정해서 마음에 드는군. 좋아, 여기 회원 가입신청서 작성해서 줘.”
“예, 알겠습니다.”
다음 날.
현빈은 수업을 마치고는 바로 도장으로 달려갔고 관장에게서 도복을 받아서는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같은 학교의 1학년에 다니고 현빈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현수가 어느새 도복을 입고 서 있었다.
“어, 넌 현수?”
“형? 여긴 어떻게?”
“나 오늘부터 유도 배우게 됐거든.”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형.”
“넌 배운 지 얼마나 됐는데?”
“저는 이제 3달째예요.”
“그럼 나보다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겠구나.”
“그건 그렇지만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해요, 형.”
“그래, 어쨌든 같이 배우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보자.”
“예, 형도 열심히 하세요.”
“그래, 고맙다.”
“험··· 둘 다 도복으로 갈아입었으니 이쪽으로 와.”
두 사람은 관장에게 다가갔고 오늘부터 관장에게 유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정식으로 유도에 입문하게 되었다.
“잘 들어라. 우선 유도의 기술로는 메치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유도의 핵심을 이루는 독특한 기술인데 상대를 어깨 너머로 메어치는 것을 말한다. 몸의 자세에 따라 서서 하는 기술, 누우면서 하는 기술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허리를 중심으로 온몸이 조화롭게 잘 움직여야 한다.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흠··· 좋아. 다음으로는 굳히기라는 기술이 있는데 이것은 상대를 누르거나 목을 조르거나 관절을 꺾거나 비틀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을 말한다. 상대를 쓰러뜨리고 위에서 눌러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누르기라고 하며, 손이나 팔뚝으로 상대의 목을 제압하는 것을 조르기라고 한다. 또 상대의 관절을 젖히거나 비트는 것을 꺾기라고 한다. 잘은 몰라도 일단은 설명을 먼저 들어두면 기술을 익힐 때 도움이 된다.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현수는 유도 도장에 다닌 지 3달째이고 연습도 몇 번 해보았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고 현빈은 오늘 처음 듣는 거지만 똑똑하기에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연습과 실전을 해보지는 못했기에 일단 이론이라도 알아두려는 것이다.
“자··· 마지막으로 급소지르기 기술이 있다. 사람의 몸에는 구조상으로 약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위에 어떤 충격을 받으면 생명에 영향을 미치거나 또는 고통이 심해 일시적으로 신체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 이 생리적인 약점이 급소다. 급소지르기는 상대의 급소를 치거나 지르거나 차서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성질상 근본적인 원칙만 인정하고, 익히기(일반연습)는 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허공을 지르거나 차거나 치다가 모래주머니 등을 이용하여 연습한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관장님.”
“좋아, 이로써 유도의 기본적인 기술에 대한 설명은 끝났고 이제부터는 세부적인 기술의 구분 동작을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 너희가 그것을 본 뒤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완벽하게 몸으로 익히면 유도는 완성된다.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관장님.”
“좋아, 그럼 시범을 보여주겠다.”
이렇게 해서 관장의 시범을 세부적으로 살핀 현빈은 유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게 아주 능숙하게 유도 기술을 구사했다.
“허허··· 정말 타고났다, 타고났어.”
“현빈 형, 정말 오늘 처음 배우는 것 맞아요?”
“왜, 아닌 것 같아?”
“예, 한 1년은 다닌 것 같아 보여요, 형.”
“음··· 그럼 내가 유도 기술을 제대로 펼친다는 말이구나.”
“예,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요.”
관장이 한 번 시범을 보였을 뿐인데도 현빈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그렇게 유도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버렸다.
한 시간 만에 현빈은 3달째 다니던 현수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유도 기술을 구사했기에 관장의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날 이후 현빈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 가서 공부하고 하교하면 유도를 배우고 소현도 만나면서 다시 단전호흡과 요가도 배우고 하더니 밤늦게 집에 들어가 다시 공부하고 자고 일어나 다시 학교 가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12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드디어 겨울 방학식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현빈은 9월부터 12월까지 계속 반 1등에 전교 1등을 독차지했다.
그런 현빈의 영향 때문인지 옆에서 같이 공부하던 소현도 반에서 2등과 전교에서 5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소현이 현빈을 만나면서 조금씩이지만 공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다 보니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 시험이 다가올 때마다 예상 문제를 꺼내 같이 풀면서 도와주었기에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자 현빈과 소현은 실내 아이스 스케이트장으로 놀러갔다.
서울과 수도권에는 시설도 좋고 놀 만한 곳이 많지만 부산이다 보니 실내 아이스 스케이트장은 두 곳 정도밖에 없었다.
소현은 이곳에 몇 번 와보았고 타보기도 했기에 제법 스케이트를 잘 타는 편이었지만 현빈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에는 머리도 보통이었고 운동 능력도 보통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는데, 그 사고 이후에는 머리가 천재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졌고 몸도 어떤 운동을 해도 적응을 잘할 정도로 좋아진 것이다.
그래서 스케이트를 처음 타보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 비틀거리더니 금방 적응해서 1년 넘게 타본 사람처럼 아주 능숙하게 잘 탔다.
“어? 현빈아, 오늘 처음 타본다고 하더니 너무 잘 타는데?”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뭐든 잘하잖아.”
“너무 자기 자랑하는 거 아냐?”
“쩝··· 그런가? 미안.”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즐겼는데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한참을 타서인지 가장자리로 나가서 긴 의자에 앉았다.
현빈이 캔 음료를 사와 소현에게 내밀었다.
“소현아, 덥지? 마셔.”
“고마워.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스케이트장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소현을 쳐다보고 있었고 여자는 모두 현빈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두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었기에 이젠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곤란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잘생긴 것이 죄였다.
현빈과 소현은 스케이트장에서 나와 분식집에 들어가 김밥과 라면을 시켜먹었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현빈과 소현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시고는 덤으로 떡볶이도 담아주셨다.
떡볶이를 먹다 보니까 아예 어묵까지 시켜서 소현과 나누어 먹고는 현빈의 집으로 향했다.
“현빈아, 땀을 많이 흘려서 몸이 끈적거리니까 내가 먼저 좀 씻을게.”
“그래.”
현빈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서인지 몸에 적당한 근육이 붙었으며 키도 좀 더 커졌기에 지금은 184센티미터나 되었다.
그 사건 이후에 몸의 세포가 잘 활성화가 된 것인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점점 남자다운 모습으로 변했다.
어른들은 아직 고등학생이 사랑을 나눈다니, 잘못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사랑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해주길 원했다.
겨울방학이라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은 주로 소현과 보내거나 아님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3일 뒤.
소현이 화보 촬영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일주일간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현은 예전에는 화보 촬영 같은 일을 좋아했기에 서울 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현빈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일보다는 현빈과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했기에 떨어지기 싫어했다.
그렇지만 이미 계약이 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었다.
현빈은 매일 소현을 보다가 갑자기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허전하면서도 쓸쓸했는데, 일주일만 참으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공부에 빠졌다.
사고 이후 현빈은 지난 5개월 동안 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끝마쳤고, 이제는 어려운 전문 서적을 빌려보고 있었다.
국어대사전과 영어사전 그리고 한문과 옥편까지 전부 통째로 외운 후라 학교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다른 전문 서적을 이해하기도 쉬웠다.
비록 겨울방학 중이지만 현빈은 전교 1등을 하는 학생이기에 당직하는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아 도서관에 보관 중인 책을 마음껏 빌려 볼 수가 있었다.
3일에 한 번씩 학교에 들러 백 권 정도의 책을 빌려다 보았다.
어느 정도의 기초가 탄탄하게 쌓이고 많은 책을 본 상태였기에 이제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마치 기자가 속기로 기록하듯이 빨랐다.
그러다 보니 사실 백 권의 책을 빌려와도 하루 정도면 다 읽어버릴 수 있지만, 유도 도장에도 다니고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하고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하기 때문에 밤에만 책을 볼 시간이 나서 넉넉하게 3일로 잡은 것이다.
일주일이 흐른 후 소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화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온 것인데 일주일 만에 만나서인지 무척 반가웠다.
검정 드레스를 입고 바로 현빈의 집으로 달려온 모습이 무척 성숙해 보였다.
“현빈아,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소현아.”
소현은 화장을 안 해도 예뻤지만 화장을 하니까 더 성숙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현빈이는 소현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고 환하게 웃는 소현은 양손으로 현빈의 목을 감았다.
“현빈아, 나 키스하고 싶어.”
“응··· 나도 그래.”
일주일 동안 못한 키스를 한꺼번에 다 하려는지 한동안 키스만 했다.
만족스럽게 키스를 하고 난후 두 사람은 떨어졌는데 걱정스러운 듯 현빈이 한마디 했다.
“소현아, 집에도 안 가고 여기 바로 왔지?”
“응··· 너무 현빈이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서 먼저 왔어.”
“그건 고맙지만 집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어쩌지?”
“음··· 집에는 나중에 들어가면 안 돼?”
“어머니가 걱정해서 안 돼. 오늘은 지금 바로 들어가고 내일 오전에 다시 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루만 참자. 그래서 내일 보면 되잖아.”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현빈은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지만 소현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되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10시도 되기 전에 소현이 현빈의 집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두 사람은 찰떡같이 붙어서 지냈는데 이런 두 사람을 누가 본다면 신혼부부로 생각할 정도였다.
현빈은 그렇게 겨울방학 동안에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가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현빈은 이제 요가와 단전호흡을 그만두고 다른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도도 이제는 상당한 실력을 보유했기에 한 달만 더 다니고 그만두기로 했고 이번에 새로 배우게 된 것이 바로 권투였다.
한 가지를 배우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는다고 생각했기에 검도 도장에 등록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 건물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도 들러 등록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태권도 도장에서 합기도까지 가르치기 때문에 아예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배웠다.
그러면서도 소현과 매일 만나서 같이 공부도 하면서 책을 틈틈이 읽었다.
철인이 따로 없었다.
한 사람이 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배운다면 몸살이 날 것인데, 현빈은 가면 갈수록 체력이 좋아지고 운동 신경까지 뛰어나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전부 하면서도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덩달아 소현도 현빈과 함께 공부했기에 항상 반에서 2등이며 전교에서도 3~4등의 성적을 늘 유지했다.
3월 초가 되면서 현빈과 소현이는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운 좋게도 현빈은 소현과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성적으로 보면 현빈이 반장이 되어야 하지만 배우는 것들이 많아 시간이 없기에 반장은 소현이 하기로 하고 출마했는데 워낙 인기가 많은 소현이었기에 반장 선거에 출마하자 다른 후보자가 아무도 안 나왔다.
그래서 투표 없이 바로 반장으로 결정되었고 부반장에는 현빈이 추천되었고 별다른 반대 의견이 없었기에 현빈도 바로 부반장으로 결정되었다.
“소현아, 반장 된 것 축하해.”
“고마워, 현빈아. 너도 부반장 된 거 축하해.”
“고마워. 우리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
“그래, 화이팅!”
현빈은 공부도 전교 1등이었고 키도 188센티미터에 얼굴도 잘생겼기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급격하게 높아져 무난하게 부반장이 된 것이다.
매월 시험을 보면 언제나 전교 1등은 현빈이었고, 소현이도 항상 반에서 2등에 전교 3~5등을 항상 유지했다.
6월 중순이 되자 현빈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싶다고 건의했다.
학교에서는 그 일로 교무회의를 열었는데, 현빈의 실력이 워낙 월등하고 좋았기에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교무회의에서 결정하기로, 일단 현빈이 등교는 하되 수업시간 동안에만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다음 날부터 현빈은 학교에 등교해서 출석 체크를 하고 도서관으로 이동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여름방학이 되어서도 현빈은 도서관에 매일같이 출석해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더 이상 도서관에는 현빈이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래서 바다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인 최고재단의 최고대학교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교장의 요청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현빈은 아침에 학교에 출석 체크를 하고 최고대학교의 도서관으로 다시 이동해 책을 읽었다.
현빈은 제대로 정규 수업을 받지 않고서도 시험에는 항상 전교 1등이었다.
그런 결과가 나왔기에 교장도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바다고등학교 역사상 대입학력고사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였다.
이건 교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담임을 포함해 모든 선생님들의 기대였다.
1991년 11월 하순, 드디어 대입 학력고사 날이 밝았다.
340점 만점에 체력장 20점을 포함한 점수였는데 현빈이 당당하게 역사상 처음으로 340점 만점을 받았다.
찰칵찰칵.
“박현빈 학생 여기 좀 봐주세요.”
“대입 학력고사 역사상 처음으로 340점 만점을 받게 되었는데,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열심히 공부한 것뿐인데 만점을 받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하··· 그럼 어떤 공부를 위주로 했습니까?”
“먼저 교과서를 공부했고 시간이 나면 틈틈이 다른 책들도 읽었던 게 시험에 좋은 결과로 나온 것 같습니다.”
“혹시 여자 친구는 있나요?”
“예,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여기에서 여자 친구를 밝힐 의향은 있습니까?”
“언론이나 방송에 노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앞으로 어느 대학의 어떤 과로 들어갈 예정입니까?”
“음··· 아무래도 저도 그렇고, 선생님들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서울대 법대로 갈 예정입니다.”
“당연히 전국 수석이니 법대로 갈 것이라 예상은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신문 기자나 방송 기자들이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현빈의 인터뷰가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서울이나 부산에도 많은 명문 고등학교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현빈이 다니는, 주위 학교들보다 성적이 떨어진다고 알려진 바다고등학교에서 당당하게 340점 만점을 받아 전체 수석이 되었다.
이 점수로 대한민국에서 가지 못하는 대학교와 학과는 없는데 한동안 이 일로 현빈은 곳곳에 불려가 인터뷰를 당하느라 피곤했다.
현빈의 성적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소현이었다.
소현도 현빈의 도움으로 332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고 현빈과 같은 서울대학교 법대에 함께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기에 기뻐했다.
현빈과 소현은 같은 바다고등학교에서 한 사람은 역사상 처음으로 340점 만점을 받은 남학생이었고 한 사람은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겸비하고서도 머리까지 좋아서 당당하게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하게 될 것이기에 방송사에서 눈독을 들이면서 취재한다고 난리였다.
이미 화보 촬영 같은 것을 틈틈이 해오던 소현이었기에 더욱 열띤 취재를 했고 인기스타로 급부상해버렸다.
현빈과 소현 두 사람으로 인해 바다고등학교는 명문 고등학교로 거듭나버렸다.
그러다 보니 학부형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집중적인 관심은 신입생 모집에서 확연하게 나타났다.
학우들과 교장, 교감을 비롯해 선생님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면서 현빈과 소현은 그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92년 3월 초.
현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전체 수석으로 당당하게 입학했고 소현이도 같은 법대에 입학했다.
3월에는 신입생 환영회다 뭐다 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보냈다.
“아··· 정신없어!”
“소현아, 나도 그래.”
“언제까지 바쁠까?”
“음··· 3월 말까지는 바쁘지 않을까?”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
“난 바빠도 소현이가 옆에 있어서 좋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현빈아?”
“그럼, 소현이가 옆에만 있어도 얼마나 나에게는 힘이 되는데······.”
“호호··· 나도 현빈이가 옆에 있어서 좋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소현아.”
일단 서울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서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삼촌이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삼촌 집에서 생활하라고 했지만 소현과 단둘이서 만나려면 아무래도 오피스텔을 하나 얻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삼촌께 잘 말씀 드려서 허락을 얻었다.
소현은 이모 집이 서울에 있기에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현빈과 소현은 같이 쇼핑을 다니면서 오피스텔에서 사용할 가구며 식기를 포함해 이것저것 각종 물건을 구입했다.
아무래도 이런 건 남자보다는 여자가 좀 더 잘 볼 거라 생각하고 맡겼는데, 역시 소현은 무척 즐거워하며 예쁜 물건들을 구입해 집을 꾸몄다.
4월로 접어들자 어느 정도는 대학 생활에도 적응되었고 오피스텔의 살림도 전부 마련되어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현빈과 소현은 캠퍼스 커플로서 찰떡처럼 늘 붙어 다녔다.
현빈은 부산에서 배우던 것들을 전부 중단하고는 서울로 왔는데 이제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기에 태껸과 국술 등 우리나라 고유의 무술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면서 전공과목과 부전공과목도 무섭게 점령해갔다.
현빈은 고등학교 생활과 마찬가지로 하루가 늘 바쁘게 돌아갔다.
소현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현빈 옆에서 찰싹 달라붙어서는 같이 공부했는데 현빈이 늘 소현의 수준에 맞는 것을 딱 집어 알려주었기에 공부하기가 훨씬 용이했다.
늦은 가을인 11월초가 되자 그날도 어김없이 현빈과 소현은 같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려고 먼저 롯데백화점에 들렀다가 소현의 엄마를 만났다.
소현의 엄마는 모처럼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 오게 되어 선물을 사러왔다가 마주친 것이다.
“엄마!”
“공부한다고 바쁘다더니··· 누구니?”
“응, 애인.”
“뭐, 뭐라고, 애인?”
현빈이는 소현의 아빠와는 집 앞에서 만나 친구로 사귀는 걸 허락 받았지만 엄마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었다.
“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엄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생각이 안 나네? 소현아, 뭐 하는 사람이니?”
“응··· 나와 같은 법대에 다녀.”
“그래? 그럼 공부는 잘하는 모양이네?”
“엄마, 현빈이는 나와 같이 부산 바다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전국 수석으로 입학했어.”
“아··· 그러고 보니 어디에서 본 얼굴이다 했어. 호호호··· 반가워요.”
“예, 어머님.”
“우리 소현이 앞으로도 많이 도와줘요.”
“예,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현빈 학생만 믿겠어요.”
“예,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좀 당황하더니 이미 언론을 통해 현빈에 대해 보았던 데다가 소현이 옆에서 현빈에 대해서 유능한 인재라고 설명하자 소현의 엄마도 이제는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하긴 똑똑하고 잘생긴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부모로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빈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는 하지만 현빈의 삼촌은 대한은행 지점장이고 고모부는 부산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기에 집안도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다.
여러모로 그 정도면 신랑감으로서 만족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빈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좋아졌다.
그날 이후로 현빈은 수시로 소현의 집에 들러 사위 같은 대접을 받았는데, 삼계탕과 갈비찜 같은 것도 해주는 등 대접이 극진했다.
현빈은 지난 12월에 사법 시험에 응시했는데 제1차 시험은 원칙적으로 선택형으로 실시되어 필수과목인 헌법, 민법, 형법과 법률 선택 과목인 형사정책, 법철학, 국제법, 노동법, 국제거래법, 조세법, 지적재산권법, 경제법 중 한 과목을 선택하고 어학 선택으로 영어시험이 있었는데 응시자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 당당하게 1차 시험을 합격했다.
제2차 시험은 논술형으로 실시되며 헌법, 행정법, 상법,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도 응시해 여기에서도 1등으로 합격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현빈을 주시하게 되었다.
유례없이 뛰어난 응시자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1차와 2차 시험을 가볍게 1등으로 당당하게 합격하고 마지막 3차 시험만 남았는데 3차 시험은 1월 중순에 있었다.
그렇게 연말이 되어 12월 31일 자정,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울리는데 그곳에서 현빈은 소현과 함께 있었다.
댕댕댕.
제야의 종소리는 33번이나 쳤는데 그건 조선시대에 이른 새벽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33번 친 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해시계가 보급된 후엔 조금 나아졌지만 밤중에 시간을 몰라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정부가 맡은 큰 일 중 하나였다.
자시, 축시, 인시 등으로 불렀던 하루 12시간 중 밤에 해당하는 5시간, 즉 술시에서 인시까지는 이를 초경, 이경, 오경으로 나누어 각 경마다 북을 쳤다.
또 각 경은 다시 5점(오점)으로 나누어 각 점마다 징이나 꽹과리를 쳤다.
한 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 한 점은 24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소리를 모든 주민이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대문이 닫히고 주민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밤 10시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새벽 4시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렸다.
이경에는 대종을 28번 쳤는데 이를 인정이라 했고, 오경에는 33번 쳐 이를 파루라 했다.
인정에는 28번을 친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이십팔수(28별자리)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고, 파루에 33번을 친 것은 제석천(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었다.
“현빈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소현.”
주위의 연인들과 같이 두 사람은 그렇게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1993년의 새해가 밝아왔으며 어느덧 1월 중순이 되어 제3차 사법 시험일이 되었다.
소현과 소현의 엄마와 아버지는 당사자인 현빈보다도 더 긴장했다.
“현빈아, 꼭 합격해야 해.”
“응··· 고마워, 소현아. 꼭 합격할게.”
“현빈 군, 꼭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겠어요.”
“예,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허··· 나도 현빈 군을 지켜보겠네.”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현빈아, 이제 들어가야 할 시간이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끝나는 대로 나올게.”
“내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알았어. 갔다 올게.”
현빈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는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제3차 시험은 면접시험으로 실시되고, 제2차 시험에 합격하거나 제2차 시험을 면제받은 자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제3차 시험 평정 사항은 법조인으로서의 국가관, 사명감 등 윤리의식, 전문지식과 응용능력, 의사발표의 정확성과 논리성, 예의, 품행 및 성실성, 창의력, 의지력 그 밖의 발전가능성 5가지였다.
제3차 시험의 합격자 결정은 평정사항마다 상(3점), 중(2점), 하(1점)로 구분하여 시험위원이 채점한 평점의 평균이 중(10점) 이상인 자를 합격자로 하되, 시험위원의 과반수가 어느 하나의 평정요소에 대하여 ‘하’로 평정한 경우에는 불합격되는데 워낙 특출한 현빈이었기에 역시나 최고 점수를 받게 되었다.
결과를 현빈이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예지 능력을 펼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결과를 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주위의 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알아보게 되었는데, 확실하게 이번 사법고시에서 1등으로 합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고 역시나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해 합격 증서를 교부받았다.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날 두 사람은 만나 즐겁게 데이트를 했다.
“현빈아, 합격 축하해!”
“고마워, 소현아.”
“자기가 너무 자랑스러워.”
“사랑해, 소현아.”
“나도 자길 너무 사랑해.”
소현은 즉시 아빠와 엄마에게 현빈의 사법고시 합격을 알렸고 전화를 건네받은 현빈은 축하를 받으면서 고개를 연신 숙이면서 대답했는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또한 현빈은 삼촌과 고모에게도 합격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었다. 두 분 다 현빈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현빈의 대학교에서도 법대 1학년생이 사법 시험에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하자 놀라워했다.
현빈은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법대에서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어져버렸지만, 계속 학교는 다녔고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2학년 과정이 그렇게 흘러가고 3학년이 되자 현빈은 논문을 제출해 그 논문이 아주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학교에서도 인정하여 조기 졸업이 되었으며 바로 사법연수 과정을 신청했다.
사법연수 과정은 특별한 것이 없었는데 그곳의 규칙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이 흘러갔고 틈틈이 소현을 만나서 데이트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현빈의 사법연수원 시절 소현도 4학년이 되어 사법 시험에 응시해 단번에 3차까지 합격해 주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들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라며 칭찬 일색이었다.
특히 언론이나 방송에서도 관심이 집중되어 방송 출연이 잦아졌다.
현빈의 사법연수원 2년의 소정 과정을 몇 달 앞두고서 이렇게 소현이 큰일을 했던 것이다.
소현이 졸업해서 사법연수원에 들어올 때에는 현빈은 그곳을 졸업하게 되었고 군법무관을 지원해 3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고는 군검찰관으로 복무를 해야만 했다.
현빈은 군검찰관으로 장교이기 때문에 출퇴근이 가능하고, 관사 및 사택에서 생활이 가능하기에 사택을 하나 얻어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저녁에는 소현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미 소현의 부모님들도 현빈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빈이 군검찰관을 제대하면 두 사람을 결혼시킬 예정이었다. 소현과 현빈도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현빈이 군검찰관 생활을 하는 것에는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기에 소현을 만나지 않는 저녁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으면서 보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현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래서 명상을 통하여 예지력을 펼쳐보았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뭔가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무엇인지 나오지 않아 처음으로 당황했다.
현빈이 예지력을 일으키면 일반인들 것은 한 달 정도는 쉽게 미래가 보이지만, 자신의 미래와 일반인의 한 달 후의 일은 명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6개월 정도의 미래를 넘어서면 머릿속이 아파왔기에 더 이상은 펼치지 않았다. 또한 정신을 집중해서 예지를 살피게 되면 며칠간은 기운이 없었다.
“으음··· 왜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걸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단순하고 간단한 일 같으면 바로 처리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그게 아니었다.
점점 목을 조여 오듯이 그렇게 어둠이 보였다.
“으음··· 아무리 내가 예지 능력이 탁월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데.”
불길한 예감에 현빈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군검찰관 신분이기에 소임을 안 할 수도 없었는데 운명적인 그날이 닥쳤다.
법원으로 향하는 길에 차들이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밀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현빈은 서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빨리 걸었다.
“아··· 이렇게 되면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아닐 거야!”
애써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인도를 뛰었으며 현빈의 20미터 앞에 있는 인도의 오른쪽으로 꺾인 길이 점점 다가왔다.
지금 인도를 뛰어가는 사람은 현빈이 유일했다.
우우웅··· 파츠츠츠!
갑자기 공명음이 터지면서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순식간에 지상에서 1미터 정도 뜬 허공에 속을 알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구멍이 생겨났다.
마치 블랙홀을 보는 듯했다.
둘레가 약 3미터 정도로 넓어진 구멍은 주위에 있는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마침 꺾인 인도에 현빈이 나타났다.
“어엇, 이··· 이건?”
빠르게 뛰어가던 현빈은 바로 멈출 수 없었는데 갑자기 앞에 검은 구멍이 떡하니 나타나 있는 상황이다 보니 너무 놀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아, 안 돼!”
현빈의 상체는 순식간에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내 두 다리마저 삼켜지듯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와중에 손에 들고 있었던 서류 가방은 그만 놓쳐버렸다.
츠파파파팟!
믿을 수 없게도 검은 구멍은 순식간에 현빈을 집어삼키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져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도 눈만 깜빡거리다가 ‘잘못 봤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4장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의 레어
거대한 몸체를 가진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은 8천2백 살의 고룡 급으로 자신의 황금 바닥에 엎드려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심심해!”
칼리드란은 하품을 연신 해대면서 입을 쩝쩝거렸다.
그는 다른 드래곤들보다 호기심과 욕심이 더 많아서 무엇이든지 지고는 못 사는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아기를 지나 당당한 드래곤의 성체가 되면서 다른 드래곤들보다 더 열심히 마법 수련을 했기에 같은 나이 때의 드래곤보다 몇백 년은 빠른 성취를 이루면서 드래곤 사회에서 나름대로 수재라고 인정도 받았다.
또한 다른 드래곤보다 유희도 배나 많이 해보았으며 대륙에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었다.
성격 자체가 다른 드래곤보다 강해서인지 드워프의 마을에 자주 나타나 겁을 주고 공포심을 자극해 드워프들에게서 각종 보석들과 진귀한 물건들도 많이 수집했다.
때문에 그의 레어 창고는 각종 보석들과 무구들로 가득 찼다.
칼리드란은 무료함에 좀이 쑤실 것 같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영감이 생겨났다.
“그···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으하하하.”
흐리멍덩했던 칼리드란의 눈이 갑자기 안광이 번뜩이고 환희에 차오르더니 벌떡 일어나 인간으로 폴리모프했다.
그리고선 자신의 실험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때부터였다.
미친 듯이 마법서를 뒤지더니 실험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도 수없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칼리드란은 자신의 레어에서 두문불출하길 150년 만의 결실이었다.
“우하하하! 드, 드디어 준비가 끝났구나.”
레어가 떠나갈 정도로 떠들던 칼리드란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지난 150년간의 세월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어 있었다.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감히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노력하길 150년이었다.
드래곤 사회에서 수재라 평가되는 칼리드란이 지식을 총동원해 연구한 것이 오늘에야 모든 준비가 끝이 났고 마지막으로 그 실험이 실행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칼리드란이 사상 최초로 시행할 실험을 위해 마련해둔 곳은 별실로 사방이 온통 두꺼운 화강암으로 된 곳이었는데 허공에 약 3미터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진 그림이 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세로로 그려져 있었는데 3미터 정도 크기의 원 안에 다시 별모양의 거대한 도형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위에 온통 룬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다른 마법진과 조금 다른 점은, 이 마법진은 드래곤의 귀한 피로 그려졌기에 온통 황금빛이 돈다는 것이다.
스윽.
칼리드란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지름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은빛 구였다.
역시 은빛이 나는 구의 겉면에도 룬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후후후··· 차원이동 마법진도 대단하지만 이 은빛 구도 중요한 것이지.”
은빛 구의 재료는 미스릴이고 구의 속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 하트 조각이 들어 있었다.
“자, 준비는 모두 끝이 났으니 이제 시작해볼까. 차원이동 마법진이여, 나의 의지로 말하노니 이루어져라!”
우우웅!
차원이동 마법진에서 황금빛이 ‘확’ 하고 번지면서 공명음이 터졌고 별관 안의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이제는 작은 스파크까지 튀기 시작했는데 칼리드란의 눈빛은 아직 고요하기만 했다.
공간이 더욱 심하게 요동치면서 막대한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공간에 심한 떨림 현상이 느껴지면서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마치 폭풍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압력이 상상을 초월했는데 칼리드란은 그제야 은빛 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펼쳤다.
은빛의 미스릴 구는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 차원이동 마법진의 가운데에 박히더니 스르르 빨려 들어가 버렸다.
번쩍!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환한 빛이 일어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별관은 다시 고요해졌고 차원이동 마법진은 소멸되어버렸다.
“우하하하! 내, 내가 최초로 이걸 성공시켰어.”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은 혼자서 희희낙락했다.
이제 차원이동 마법진이 성공했다는 결과물만 도착하면 이번 연구는 완벽하게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열흘이 지나자 ‘조금 늦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위로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결과물이 도착하지 않아 당황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어느덧 세월은 흘러 1백 년이 지나가자 결과물을 기다리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신의 연구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이동 마법을 실행한 지 2백 년이 지나자 흥미를 완전히 잃어 이제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고 그는 기나긴 수면기에 들어갔다.
5백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 칼리드란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을 보냈다.
세월은 흘러 흘러 9824살이 되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기에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디언들도 모두 정신계 마법에서 해제하여 종족에게로 돌려보냈으며 골렘들까지도 해체했다.
레어에 설치되어 있는 기본적인 마법들까지 모두 해제해 이제는 그냥 평범하지만 좀 큰 동굴이 되어버렸지만 레어 입구 결계만은 남겨두었다.
“허허허··· 이제 모든 것들을 정리했군.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즐거운 생이었다. 이제는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인가?”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은 평소 인간으로 폴리모프하던 것을 풀고 본체로 돌아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법진을 손수 그리기 시작했다.
고룡 급이면 보통은 용언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작업이기에 이렇게 세심하면서도 성스러운 의식이라 생각되어 마지막 작업을 손수 하는 것이다.
마법진이 완성되어 그것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마법진이 바닥에서 스르르 떠올라 2미터 정도의 허공에 머물렀다.
잠시 마법진을 바라보던 그는 허공을 가로질러 마법진 위에 앉았다.
우우우웅!
마법진에서 공명음이 일어나면서 빛도 함께 일어났다.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의 몸은 그 빛에 휩싸이더니 서서히 부서지면서 가루가 휘날렸다.
마치 황금 가루가 휘날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때 별관에서 대기가 요동치면서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응, 별관 쪽에서 무슨 일이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던 그는 예상하지 못한 일을 접하자 궁금증이 일어났다.
“아, 오래전에 내가 시도했던 차원이동 마법진의 결과물이 돌아오는 모양이구나. 허허허··· 하필 이럴 때에··· 시간이 너무 아쉽구나, 아쉬워!”
그랬다. 자신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자신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허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가?”
칼리드란의 손가락 끝에는 선홍빛의 살점 한 조각이 있었고 그것은 투명한 보호막으로 싸여 있었다.
스르르!
보호막에 싸여 있는 조각은 바로 골드 드래곤 칼리드란의 드래곤 하트 일부분으로 막대한 마나가 들어 있는 그것이 지금 허공을 가로질러 별관으로 날아갔다.
점점 몸이 가루로 부서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완전하게 소멸되었다.
막대한 그의 마나도 그렇게 자연으로 모두 흡수되어버렸다.
한편 별관에서는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심하게 바람이 불었고 공간이 요동치면서 이지러지고 있었다.
번쩍!
빛이 ‘확’ 하고 일어나면서 이지러진 공간 속에서 ‘툭’ 하고 은빛 구가 튀어나오자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이지러져 있던 공간도 모두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평온을 되찾은 별관에는 오직 은빛 구만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때 카리드란이 남긴 드래곤 하트가 담긴 보호막이 별관으로 날아와 은빛 구와 충돌했다.
아니, 흡수가 되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쩌어억!
허공에 떠 있던 은빛 구의 표면에 금이 가면서 벌어졌는데 마치 계란이 쪼개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걸쭉한 액체가 은빛 구에서 빠져나와 주욱 늘어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츠츠츳!
바닥에 고여 있던 액체가 이번에도 빛이 일어나면서 변하기 시작하더니 몇 초 후 그 빛은 사라졌고 바닥에 있는 것은 나체의 인간이었다.
우두둑··· 우둑!
뼈가 서로 어긋나는 듯한 소음이 일어나면서 나체의 인간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검은색이던 머리카락도 금발로 변했다.
또한 허공에 쪼개져 있던 은빛 구는 스르르 변형을 시작했는데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은색 액체 상태가 되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와 바닥에 누워 있는 인간의 왼손에 닿자 흡수되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은색 액체는 기절해 있는 인간의 왼손에 완전히 흡수되었으며 잠시 은빛으로 빛나더니 마술같이 스르르 그렇게 원래의 살색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도 기절해 있는 인간은 깨어나지 않았다.
“으으으··· 으으!”
그리고 이틀이 지났을 때 기절해 있던 인간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면서 서서히 눈을 떴다.
방금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여러 번 눈을 깜빡거리자 그제야 흐릿하지만 눈에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으으··· 여, 여기는 어디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그는 박현빈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사방은 온통 돌로 된 석실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자신만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자신이 나체라는 것을 알았다.
“내, 내가 옷도 안 입고 벌거벗고 있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잠시 생각에 빠진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제야 무엇인가 떠오른 모양이다.
“내가 길에서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고 기절했지! 깨어나 보니 나체에 석실이라니······.”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곳으로 걸어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지금 서 있는 곳이 출입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스윽··· 그그긍!
양손을 석벽에 붙이고 앞으로 밀자 서서히 석문이 벌어졌고 그의 몸이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안 계세요?”
현빈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울렸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석벽에 부딪쳐 되울려 오는 메아리뿐이었다.
그런데 통로의 끝에서 빛이 보이자 그곳으로 뛰어갔고 드디어 현빈의 앞에 거대한 원형 홀이 나왔다.
사방이 약 3백 미터 정도는 되는 넓은 원형 홀은 천장의 높이도 백 미터는 되는 듯 보였다.
홀의 천장에서부터 매달려 있는 초대형 크리스털 샹들리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 저것을 보니 여기 주인은 보통 부자가 아닌 모양이구나.”
원형 홀의 석벽에는 처음 보는 각종 조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성스러워 보이는 걸로 봐서 어떤 신전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연상될 정도였다.
또한 원형 홀의 중앙에는 온통 황금빛이 났는데 가까이 걸어가서 확인해보았더니 온통 황금바닥이었다.
“우··· 바닥이 온통 황금이라니 이정도로 바닥을 황금으로 깔려면 어느 정도의 황금이 필요할까?”
현빈의 생각으로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여기 바닥에 깔려 있는 황금만 해도 계산이 안 될 정도였는데 아마 여기 주인은 이 정도는 그의 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거라 짐작되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전 재산을 투자해 이렇게 사치스럽게 치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와···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기가 질린 현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홀의 가장자리에 6개의 통로가 있었다.
현빈은 잠시 통로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통로는 어디로 통하는 걸까?”
호기심에 현빈은 가장 좌측에 있는 통로부터 들어가 보았다.
통로의 길이는 약 20미터 정도로 그리 길기는 않았는데 문도 없었다.
통로 끝에는 중앙 홀보다는 작았지만 3분의 1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진 홀이었는데 현빈은 홀로 들어서며 너무 놀라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면서 눈도 커졌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보물의 홀이었던 것이다.
은화, 금화를 비롯해 각종 잘 커팅된 보석류와 역시 그런 최상급의 보석으로 장식된 각종 주얼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역시 이 홀의 천장에도 거대한 크기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달려 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현빈은 잠시 꿈을 꾸는 것인가 눈을 껌뻑거리다가 앞으로 걸어가 금화를 집어 들어 살펴보고는 이번에는 보석을 다음에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를 살펴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우··· 꿈이 아니었어. 이것들은 모두 진짜야.”
이 정도의 보물이라면 동화 속에 나오는 왕국의 보물창고와 다름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다시 나온 현빈은 이번에는 두 번째 통로로 들어가 보았더니 이번에는 각종 무기들이 홀 바닥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일부는 석벽에 마련된 선반에 잘 진열되어 있었다.
현빈은 홀 바닥에 쌓여 있는 롱소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스르릉!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에서 나온 롱소드는 칼날이 날카롭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주 손질이 잘되어 있었으며 예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명검이었다.
“중세의 기사들이 쓰는 듯한 검이네?”
칼에 대해서 잘 모르는 현빈이 보기에도 예사 검이 아니었다.
스르르··· 타악!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내려놓은 현빈은 이번에는 석벽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 검도 검집이 온통 다이아몬드로 치장되어 있어서 먼저 롱소드보다 더 사치스럽게 보였다.
스르릉!
현빈이 처음 집어 들었던 롱소드와 같은 모양의 롱소드였지만, 이것이 좀 더 좋아 보였다.
우우우웅!
롱소드를 살펴보던 현빈은 갑자기 검이 울리는 듯한 잔 떨림에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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