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
“다 됐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가인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빈티가 팍팍 풍기는 어두침침한 지하 월세방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캡슐. 타원형의 생김새 때문에 에그(Egg)라는 애칭이 붙은 이 캡슐은 바로 이데아라는 가상현실 게임의 전용 접속 단말기였다.
‘이번이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다!’
가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 이게 최후의 선택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지난번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면······.’
그다음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 아니, 상상해서는 안 된다.
가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에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 처해 버린 걸까?’
저 단말기를 통해 들어갈 이데아에서의 생활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
아무리 실제와 같은 세계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게임.
고작 게임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한심하고 어이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현실이었고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너는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문득 머릿속에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대기업의 직원이었다. 비록 만년 과장에 머물고 계셨지만 명색이 대기업 직원이라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다. 또한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탓에 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라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절약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외동아들인 가인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어린 시절 당신들께서 누리지 못한 게 한이 되셨던지, 가인에게만큼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다. 덕분에 가인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크게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메이커 옷을 입고, 최신형 핸드폰을 들고 학원에 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어머니가 암이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암······ 게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지병이 있었다.
그게 불행을 더욱 부풀리는 원인이 되었다. 몸이 안 좋은 이유를 지병 탓으로 돌려 병을 발견하는 시기가 늦어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발견이 너무 늦어 가망이 없다고 했다.
“괜찮다. 괜찮아질 거야. 너는 걱정할 필요 없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마.”
밤새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를 두 갑이나 피운 아버지가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좋다는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 찾아가고, 용하다는 한의원, 좋은 약이 있다면 천 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다녔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돈이 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집안 형편은 갈수록 안 좋아졌고, 결국 1년 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는 집까지 팔아야 했다.
가인이 대학 입시를 치른 게 그 무렵이었다.
“저 진학은 포기할까 봐요.”
입시 결과를 통보받은 가인은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말했다. 가인은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서울에 있는 대학은 힘들어도 지방의 괜찮은 대학에 붙을 수 있었다.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치레로 집안 형편이 힘들어졌다.
미친 듯이 뛰어올라 1년에 1,500만 원이나 되는 대학 등록금만도 부담스러우리라. 하물며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따로 방을 구해 자취까지 해야 한다. 아무리 철없는 가인이라도 지금 형편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에 붙은 학과는 적성에 맞지도 않아요. 그리고 요즘은 대학 나오지 않고도 성공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소리 마라.”
아버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런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미처 말하지 못해 쓸데없는 맘고생을 시켰구나. 그래, 네 엄마 때문에 형편이 안 좋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네 엄마 앞으로 들어 두었던 보험이 몇 개 있다. 다시 집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할 돈은 충분하단다.”
아버지는 가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이 뭔지 아니? 네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보살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너도 많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할 생각만 해라. 네가 대학을 졸업하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던 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알겠냐?”
“······네.”
아버지의 설득에 가인은 결국 진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가인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애써 주셨다. 덕분에 가인은 대학 근처의 제법 괜찮은 원룸에서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아물어 가고 대학 생활에도 익숙해졌을 무렵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니 아버지 회사 직원이 찾아와 있었다. 그리고 가인은 그들의 입에서 상상도 못 했던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김 과장님이 얼마 전에 실종됐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네? 그, 그게 무슨? 실종이라니요?”
“말하기 좀 그렇지만······.”
일전에 몇 번 봤던 아버지의 부하 직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함께 찾아온 직원이 말을 이었다.
“회사의 내사반이 과장님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과장님은 공금횡령 혐의를 받고 있었어.”
“대략 2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열흘 전에 심리를 받고 귀가하신 이후로 실종되었다. 혹시 아버지에게 무슨 연락이 없었냐?”
가인은 대체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요령이 없어 비록 만년 과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오셨다.
그건 가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금횡령이라니?
“말도 안 돼요! 아버지가 공금횡령이라니요?”
“과장님이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다.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갑자기 실종되어 버리셨으니······ 당혹스러우셔서 그런 거겠지. 어쨌든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문제가 커지기 전에 과장님과 연락을 해야 해. 혹시 나중이라도 연락이 되면 꼭 우리에게 연락해 다오.”
직원들이 명함을 밀어 주고 방을 나갔다.
가인은 그때까지도 제대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건 오해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아버지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야!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왜 그런 오해가 생긴 거야? 왜 아버지가 사라지신 건데?’
멍하니 명함을 바라보던 가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직원들을 따라 문밖으로 나가자 계단 아래쪽에서 방금 전의 직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니까. 설마 과장님이 그런 짓을 하실 줄은······.”
“사모님 병원비로 집안이 거덜 났는데 아들놈 학비까지 대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던 거겠지.”
“네? 사모님 보험비 나오지 않았어요?”
“사모님이 원래 지병이 많았잖아. 그 때문에 보험 심사에 걸려 계속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나 봐.”
“그랬군요. 그래서······.”
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앞으로 된 보험이 없었다니?
그럼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
그제야 가인은 뒤늦게 상황을 알아챘다.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했다. 어머니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면 애초에 병원비와 약값으로 힘들게 마련한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집을 팔았다는 건 달리 돈을 구할 데가 없었다는 뜻이다.
거기에 적지 않은 가인의 학비와 생활비.
직원들은 오해가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본심은 아버지의 공금횡령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의 짐작이 맞을 확률이 높았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아버지가······.’
가인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성실과 정직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온 아버지에게 공금횡령을 하게 만든 게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단 아버지를 만나 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뒤로 가인은 정신이 없었다. 친척이란 친척은 모두 연락해서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고, 회사를 찾아가 아버지 동료 직원들을 만나 보았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탁탁 털어 사람을 찾아 주는 업체에 의뢰를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설마······?’
가인은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공금횡령 사건이 발각된 회사원이 자살했다는 불길한 뉴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인의 집에 발신인이 없는 편지가 전달된 건 그때였다.
사정이 있어 당분간 연락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줄 수가 없구나.
어쨌든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다오. 미안하다.
“아버지 글씨다!”
아버지의 필체를 확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 그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까지 기쁠 줄은 몰랐다. 그렇다. 누가 뭐라든, 무슨 짓을 하셨든 아버지는 가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가인은 편지를 통해 새삼 그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공금까지 횡령하셨어. 나도 뭔가 해야 해! 이대로 아버지가 전과자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가인은 어떻게든 아버지가 전과자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렇게 열흘, 가인이 알아낸 건 아버지가 2년에 걸쳐 3억가량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회사에서 아직 아버지를 정식으로 고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까지 알아낸 가인은 억지를 써서 회사 고문 변호사를 만나 보았다.
“회사 입장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이라 가능하면 고소를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하네. 자네 아버지가 돌아와 횡령한 돈을 갚는다면 퇴직 조치만으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사자가 잠적했으니 마냥 기다릴 수도 없지. 아마 곧 정식으로 고소 절차를 밟게 될 거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가인은 단단히 마음먹고 아버지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이틀을 기다린 끝에 결국 회사로 들어가는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가인은 생각할 것도 없이 사장 앞에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사장님, 사람 하나 살려 주십시오!”
“뭐? 자넨 누군가?”
“김명훈 과장님의 아들입니다.”
“김명훈 과장?”
사장이 살짝 미간을 좁히자 비서가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돌려 버렸다.
“뭐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는 대강 알 만하네. 하지만 소용없으니 그냥 돌아가게.”
“못 돌아갑니다!”
다급해진 가인은 사장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가인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대로에서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일 따위는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과자가 되느냐 마느냐가 걸린 일이다. 그것도 자신 때문에!
못 할 일이 어디 있고,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알몸으로 춤을 추라고 해도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건 모두 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횡령했다는 돈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습니다. 제발 고소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버지를 전과자로 만들지만 말아 주십시오!”
“어허, 정말 안 되겠군.”
사장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경호원들이 가인을 뜯어냈다. 그 뒤로 가인은 회사 앞에서 살다시피 하며 사장이 보일 때마다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떠밀려 바닥에 쓸리고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가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오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인은 믿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언제가 됐든 틀림없이 돌아오리라. 그리고 회사에서 공금횡령으로 정식 고소가 된 상태라면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해 공금횡령까지 하게 된 아버지가 전과자로 낙인찍히는 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사장님, 제발 사람 하나 살려 주십시오!”
“저 자식이 또······.”
또다시 가인이 달려들자 경호원들이 눈매를 치켜올리며 앞을 막아섰다.
그때 사장이 경호원들을 제지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김 과장과는 완전 딴판이군.”
가인은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옷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길바닥에서 숙식을 한 탓에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사장은 가인을 훑어보다가 한숨을 불어 내며 물었다.
“김 과장이 횡령한 돈을 갚을 테니 고소하지 말아 달라? 그게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말인가?”
“······3억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네. 그 돈을 자네가 갚을 능력이 있나?”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갚겠다는 건가?”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습니다.”
“10년이나 100년까지 기다려 달라는 건가?”
사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다. 어처구니없는 부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가인이 뭐라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깨물자 사장이 눈앞에 손가락 4개를 펼쳐 보였다.
“좋아, 4년을 주지. 4년 동안 1년에 1억씩 가져와 보게. 먼저 앞으로 1년 안에 1억. 자네가 돈을 마련해 온다면 또 1년을 기다려 주지. 사채를 빌리든 몸을 팔든 상관없어.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그리고 다시 1억을 구해 오면 1년씩. 그렇게 4년이면 4억이지. 회사에서 3년 동안 3억을 묻어 두는 대가로 1억쯤은 이자를 붙여야 하니까.”
“사, 사장님!”
사장의 제안에 옆에 있던 반대머리의 중년 사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건 횡령 사건입니다. 고소를 늦추는 것조차 위법입니다. 하물며 사채놀이를 하듯이 이자를 붙이며 거래를 하다니요?”
“박 이사, 공금횡령 사건이 외부에 알려져서 회사에 좋을 게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래서 지금까지 정식 고소를 미루고 있던 거고 말이야. 게다가 이 친구는 아무래도 포기할 것 같지 않잖아. 이대로 두면 가장 안 좋은 형태로 매스컴에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네.”
“하, 하지만······.”
“하지만 뭔가? 혹시 내가 모르는, 김 과장을 꼭 고발해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사장이 눈매를 좁히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찌르듯 물었다.
박 이사라고 불린 중년 사내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치 염탐하는 듯한 눈길로 사장의 얼굴을 더듬었다.
사장 역시 그런 박 이사의 변화를 염탐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장과 박 이사 사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건 거의 찰나에 불과했다.
사장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김 과장이 횡령한 돈을 회수할 수 있다면 그걸로 끝내는 편이 좋아.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말이야. 그렇지 않나?”
“중역들이 알게 되면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지.”
박 이사라고 불린 중년 사내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사장은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가인에게 물었다.
“어때? 할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좋아, 1년을 기다려 주지. 돈을 구해 와라.”
사장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회사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가인은 사장의 등에 몇 번이나 절을 한 뒤에 돌아왔다.
일단 아버지가 전과자가 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았다.
물론 공금횡령 사건이다. 고소를 1년이나 미루려면 회사 안팎으로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가 많으리라. 그러나 일단 사장이 약속했다. 진심이라면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 따위는 사장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가인으로서는 일단 그 약속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1년 안에 1억······.’
막상 돌이켜 생각해 보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이제 나이 스물하나, 평범한 대학생인 가인이 무슨 수로 1년에 1억을 만든단 말인가?
가인의 아르바이트 시급은 고작 5,000원.
24시간 내내 일하며 한 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아도 4,000만 원이 조금 넘을 뿐이다.
“하지만 하는 수밖에 없어. 아버지를 전과자로 만들 수는 없어. 시급이 센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정 안 되면 사채를 빌리든, 신장을 팔든, 어떻게든 1년 안에 1억을 만들어야 해.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도 꼭 돌아올 거야.”
그렇게 믿고 버텨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퇴하는 수밖에 없나······.’
밤새 고민하던 가인은 결국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학교 따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가인이 자퇴서를 작성해서 교무과로 향할 때였다.
“장난 아닌데?”
“네 달 만에 7,000만 원을 벌었대.”
“요즘은 일류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들어가도 연봉이 고작 4,000만 원인데······.”
“이제 시작이라는데? 앞으로 더 벌릴 거래.”
휴게실에서 학생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TV에서는 한창 게임 관련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소개하는 방송인데, 오늘은 온라인 게임을 직업으로 삼은 유저가 출연했다.
요즘은 게임을 직업으로 삼거나, 아예 기업화시키는 게 드물지 않은 세상. 이번에 출연한 유저도 그처럼 게임을 직업으로 삼아 혼자 힘으로 네 달 만에 7,000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교무실로 향하던 가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만약 나도 게임을 해서 그만큼 벌 수 있다면······?’
네 달에 7,000만 원이면 1년이면 2억 1천만 원!
그게 가능하다면 불과 2년이면 아버지가 횡령한 돈을 다 갚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그리 만만할 리가 없었다.
만만하다면 개나 소나 게임으로 돈을 벌겠다고 뛰어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한 가인은 왠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에 나온 사람의 절반만 벌어도 1년에 1억을 벌 수 있지 않은가?
하필 이럴 때 그런 방송이 나온 게 마치 어떤 계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자퇴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이 1년에 1억을 모으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한번 죽을 각오로 게임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절대 불가능한 방법과 약간이나마 희망이 있는 방법.
뭘 선택해야 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해 보는 수밖에 없어!’
결심을 굳힌 가인은 일단 2년 휴학을 신청한 뒤에 돌아왔다. 정말 TV에 출연한 게이머처럼 대박이 난다면 2년 만에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게임을 하려면 먼저 가상현실 게임 전용 단말기를 구입해야 한다.’
일단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가인의 행동은 막힘이 없었다.
가인은 원룸을 빼고 창고처럼 허름한 지하 방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모으던 적금도 깼다. 그렇게 돈을 구해 보니 2,500만 원가량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어떤 게임을 시작하느냐.
이 부분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데아! 역시 이데아밖에 없어!’
이데아는 출시되자마자 수백만 유저가 몰려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만에 동시 접속자 베스트 5위 안에 진입한 게임이었다.
비싼 전용 단말기를 구입해야 하고, 게임 내에서의 금품이 현실에서도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특성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좀처럼 다른 게임으로 옮겨 가기 힘들다는 가상현실 게임 시장에서 이렇게 빠른 성장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신규 유저가 늘어나는 속도를 생각하면 2~3년 뒤에는 게임 차트 1위의 게임이 되리라.
하루가 다르게 신규 유저가 늘어난다.
이는 곧 시장성을 뜻하는 말이다. 이데아는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아이템이나 정보의 거래도 활발했고, 가격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투자라면 뜨고 있는 게임을 선택하는 건 당연지사!
또한 출시된 지 한참 된 게임들은 이미 기존의 유저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이렇다 할 기반도 없는 신규 유저가 돈을 벌 기회를 잡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데아는 아직 출시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신작 게임. 게다가 제작사는 신비주의 마케팅 방식을 사용해 거의 모든 게임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신규 유저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게임인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이데아에 걸겠다!’
최신 게임이라 단말기 가격이 2,000만 원이나 됐지만 가인은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솔직히 가인 역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과감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마도 평상시였다면 그런 목돈이 들어갈 일은 며칠을 두고 고민했으리라. 그러나 막상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닥치자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의 행동력으로 일을 추진했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에그에 올라 게임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과감한 결단은 독이 되었다.
이데아는 제작사의 신비주의 마케팅 전략 탓에 거의 모든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가인은 그래 봐야 지금까지 해 봤던 온라인 게임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명 시스템 자체는 다른 게임과 비슷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의 선택이 훗날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덕분에 이렇다 할 정보가 없이 시작했던 가인은 한 달 넘게 헤매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가 돼 버렸다.
물론 그런 캐릭터로도 게임을 즐기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가인의 목적은 즐기는 게 아니라 1년 안에 1억을 버는 것!
“이 캐릭터 가지고 돈을 벌기는 글렀어. 젠장, 망했다!”
그때 가인의 머릿속에 에그를 처음 샀을 때 읽었던 설명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데아는 높은 자유도를 가진 게임인 반면, 그 정보를 제작사에서 일절 공개하지 않는 방침으로 운영되어 수많은 유저들이 혼란스러워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제작사는 시작한 지 3개월 미만의 신규 유저에 한해 단 한 번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단, 캡슐에 유저의 개인 정보와 캐릭터 데이터가 들어 있는 하드디스크는 각종 해킹에서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서는 절대 접속할 수 없는 방식으로 특수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신규 캐릭터를 만들려면 새로운 하드디스크로 교체할 수밖에 없어 10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빌어먹을, 별의별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는군.”
뒷부분의 내용에 가인은 울컥했지만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지금 형편으로는 100만 원도 엄청 큰돈이다. 그러나 그 돈이 아깝다고 잘못 키운 캐릭터에 무턱대고 시간과 돈을 퍼붓느니 할 수 있을 때 교체하는 편이 낫다.
괜히 망설이다가 두 달이 더 지나 버리면 캐릭터를 바꿀 기회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한 번 실수로 100만 원이라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분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이번의 실수 덕분에 가인은 배운 점도 있었다.
이데아는 다른 온라인 게임처럼 무턱대고 덤벼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이데아로 돈을 벌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부터 생각을 바꾼 가인은 이데아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몽땅 긁어모았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데아는 제작사에서 게임 정보를 비밀로 하는 바람에 각종 유용한 정보가 유저들 사이에서 돈으로 거래되는 기현상까지 발생한 게임이다.
그러나 이거밖에 없다고 판단한 가인은 포기하지 않고 이데아 관련 정보지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자료란 자료는 빠짐없이 찾아 가며 공부했다.
아마도 수능을 준비할 때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결국 가인은 상당한 노력을 투자한 끝에 찾아내고 말았다.
“내가 원하는 캐릭터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요금을 지불하고 방금 전 에그의 데이터도 초기화시켰다. 남은 건 비록 한 달이지만 지난 실수를 거울삼아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드는 일뿐!
“이제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이제 남은 돈은 이전 캐릭터의 장비품을 팔아 마련한 170만 원. 방세와 공과금, 계정 요금을 생각하면 두 달 버티기도 빠듯했다. 그 전에 새 캐릭터로 돈을 벌지 못하면 1년은커녕 당장 두 달 안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리라.
아버지는 전과자가 되고 말이다.
에그를 노려보던 가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실패란 있을 수 없어. 실패하면 희망은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해야 한다!”
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에그에 올라탔다.
에그에 올라타자 자동으로 문이 닫히며 투명한 유리가 검게 변했다. 뒤이어 눈앞에서 작은 붉은 반점이 반짝거렸다.
일종의 최면처럼 의식을 가수면 상태로 만들어 가상현실 세계와의 싱크로율을 높이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몇 번 숨을 불어 내며 붉은 반점에 집중하기를 잠시, 이내 시야가 밝아지며 터널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이데아에서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ACT 1 튜토리얼
-이데아를 시작합니다.
-초기 가동 중입니다.
필요한 개인 정보를 스캔합니다.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새로운 계정을 등록해 주십시오.
빛의 터널을 날아가는 와중에 귓가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미 한번 겪어 본 과정이다.
가인은 익숙하게 대답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캐릭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캐릭터는 이데아에서 생활하는 유저 자신입니다. 성별을 제외한 캐릭터의 외형과 종족은 유저가 임의대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스캔 방식으로.”
이 역시 가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실 이전에 사용했던 캐릭터는 몇 시간이나 공을 들여 성형을 했었다. 기왕이면 멋진 캐릭터가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이데아에 들어가 보니 대부분 실제 유저와 다름없는 외형의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대세인 모양.
그리고 이번 캐릭터에는 가인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캐릭터가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면 가인의 미래는 밝지만 실패하면 절망! 그야말로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과 똑같은 외형이 몰입감도 더 들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가인은 종족도 인간으로 설정했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카인.”
가인이 그 이름을 택한 건 자기 이름과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카인은 창세기에서 하와와 아담의 맏아들 이름으로, 야훼에게 사랑받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는 찜찜한 사람이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극복하려면 그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떠올린 이름이었다.
가인이 이름 등록까지 마치자 길게 이어지던 빛의 터널이 확 사라졌다. 동시에 가인의 눈앞에 거대한 대륙이 나타났다.
마치 유체이탈을 해서 수십 킬로미터 상공에 뜬 상태로 대륙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정보창이 떠올랐다.
이곳이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지역은 세 군데입니다.
――――――――
【뉴브란트 제국】
카스트로 대제가 건국한 제국. 대륙 중심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무능한 황제와 탐관오리의 폭정에 세력이 많이 쇠했습니다. 아직 제국은 대륙의 중심지로서 가장 체계적이고 안정된 질서가 유지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시작하면 초반 진행을 안정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엘리어스 연방】
뉴브란트 제국 변방에 위치한 이종족의 땅. 이곳은 제국에 소속되기를 거부한 이종족들이 살아가는 땅입니다. 이곳은 척박한 환경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육체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종족들은 보다 특별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습니다.
――――――――
【클람 지역】
이곳은 뉴브란트 제국의 폭정에 반기를 든 여러 세력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체제가 확립된 뉴브란트 제국이나 엘리어스 연합과 달리 클람 지역은 각 영지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고, 아직도 법이 미치지 않는 미개 지역도 많아 무법 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기회가 많은 땅이기도 합니다.
“뉴브란트 제국.”
이번에는 나름대로 목표를 세워 둔 가인은 뉴브란트 제국을 선택했다.
-튜토리얼 미션을 진행하시겠습니까?
튜토리얼 미션을 진행하면 안전하게 이데아의 기본 시스템을 익힐 수 있습니다. 단, 튜토리얼 미션에서는 적을 무찔러도 경험치가 축적되지 않습니다.
튜토리얼, 게임의 기본적인 진행 방식을 가르쳐 주는 모드다. 그러나 어차피 RPG 온라인 게임의 진행 방식은 다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게임을 시작할 때 최소한의 정보조차 미리 알아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험치도 먹을 수 없는 튜토리얼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빨리 본 게임에 들어가 쥐라도 1마리 더 때려잡는 편이 낫다. 이게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가인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수락!”
가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뒤이어 가인은 엄청난 속도로 대륙의 중심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가인이 도착한 곳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두운 숲이었다.
@
-당신은 머나먼 이국에서 이데아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데아는 수백 년간 대륙을 지배하던 뉴브란트 제국이 흔들리면서 도처에 몬스터와 도적이 들끓는 위험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혼란이 때로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폐쇄적이던 이데아에서는 범람하는 몬스터와 도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이데아의 주민들과 동등하게 부와 명예를 얻을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당신은 뉴브란트 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요?
뉴브란트 제국으로 향하던 당신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여기가 튜토리얼 모드가 진행되는 곳이군.’
카인은 안내 메시지를 한 귀로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메시지에서 설명한 대로 주변은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이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아름드리나무가 주변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고, 무성한 가지가 하늘을 뒤덮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몇 가닥의 빛으로 겨우 밤낮을 구분할 수 있었다.
“일단, 캐릭터 정보창.”
캐릭터 이름 : 카인(인간) 레벨 : 1 페이탈 : 무 직업 : 이방인
국가 : 뉴브란트 제국 명성 : 무
생명력 : 100 마나 : 100
힘 10 민첩 10 체력 10
지혜 10 지능 10 행운 10
재능 : 【집념I】
《착용 장비품》
단검 : 공격력 1~3
면 옷 : 방어력 3
‘씁쓸하군.’
카인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전 캐릭터는 레벨이 25였다. 그런데 지금은 1레벨.
그것도 100만 원이나 들인 결과였다.
물론 수십 번이나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막상 정보창을 확인하니 심히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미 결정했고, 이전 캐릭터는 사라져 버렸다. 우울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또한 우울해지고 싶어서 정보창을 연 것도 아니었다.
‘이번 캐릭터의 기본 재능은 뭐지?’
처음 게임을 할 때의 스텟은 어차피 다 똑같다.
그럼에도 굳이 정보창을 확인한 이유는 재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데아는 게임을 시작할 때 스텟 외에 랜덤으로 재능을 하나씩 가지고 시작한다.
재능은 이데아의 독특한 시스템 가운데 하나로, 캐릭터의 성장 방식이나 새로운 스킬을 배워 나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반면 새로운 재능을 얻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라 어떤 재능을 가지고 시작하느냐가 초반에는 상당히 중요했다.
‘집념이라······.’
처음 보는 재능이다.
카인은 집념에 상세 설명창을 추가시켰다.
【집념I】 : 전투를 할 때 설사 불리한 상황이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빈사 상태에 빠질 경우, 단 한 번 체력이 1분간 10초에 0.5%씩 회복됩니다.》
‘미묘한데?’
이전에 시작할 때 받았던 재능은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은 새로운 스킬을 배울 때 습득 속도가 2% 빠르고, 새로운 던전이나 특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확률이 1% 높아진다. 가산되는 보너스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스킬을 많이 배우고 새로운 던전이나 정보 수집이 중요한 초반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재능이었다.
물론 ‘집념’도 허접한 방어력을 가진 초반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래도 ‘호기심’보다는 좀 못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작할 때 부여되는 재능은 다 거기서 거기야. 그리고 어차피 초반에는 스킬을 많이 배워 봐야 별 도움이 안 돼.’
이전에 캐릭터의 실패 원인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의욕이 앞서 초반부터 너무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바람에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괜한 ‘호기심’보다 ‘집념’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데아에서 재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정말 중요한 건 그 재능을 어떻게 살려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느냐.
100만 원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점이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카인은 정보창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튜토리얼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숲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 걸으니 작은 부락이 나왔다.
뭐, 부락이라 봐야 나뭇가지로 만든 울타리 안에 천막이 몇 개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부락의 분위기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민은 고작 열댓 명이었는데, 모두가 퀭한 안색으로 드러누워 끙끙대고 있었다.
‘뭐야? 몽땅 끙끙 앓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혹시 이방인이십니까?”
카인이 천막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갈색 로브를 걸친 청년이 다가왔다.
숲만큼이나 암울한 안색의 청년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카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쿠란이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이국에서 제국으로 가다가 길을 잃으신 모양이군요. 많지는 않지만 종종 그런 분들이 이곳에 들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뭐, 튜토리얼을 선택했으니 일부러 길을 잃은 셈이지만.
카인은 짐짓 정말 난감하다는 듯이 한숨을 불어 냈다.
NPC를 대할 때 이런 태도는 굉장히 중요했다.
이데아에서 NPC는 다른 게임처럼 주어진 대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진짜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기에 도움을 원할 때는 불쌍한 표정과 말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때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어느 정도 연기력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오지지만 제가 제국의 도시까지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여행 중이시니 지도는 가지고 계시겠죠? 원하신다면 지도에 지름길을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쿠란이 잠시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길을 알려 드리는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을요?”
“사실 저는 여기처럼 변경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병자를 치료하는 의술사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이 부락의 주민들이 정체불명의 열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아직 열병의 치료법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연구 자료가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정확히 뭘 구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무래도 주민들이 걸린 열병은 숲에서 서식하는 들개들에게 옮은 것 같습니다. 카인 님께서 열병에 걸린 들개의 신체를 부위별로 구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직접 구하면 좋겠지만 병자들에게 눈을 뗄 수 없는 상황이라. 다행히 열병에 걸린 들개는 매우 약해져 경험이 없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쿠란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쿵쿵, 하는 효과음과 함께 퀘스트 정보창이 떠올랐다.
의술사 쿠란의 부탁
화전민 부락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의술사 쿠란이 열병에 대해 연구할 재료 수집을 부탁했습니다. 열병 연구에 필요한 재료는 열병에 걸린 들개의 간이나 폐, 내장 등 신체 부위입니다. 열병에 걸린 들개는 매우 약해져 있어 초보자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신체 부위를 5개 모아 오면 쿠란은 제국의 도시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 줄 것입니다.
《난이도 : -》
튜토리얼이라 퀘스트가 뜨자 곧바로 퀘스트를 받는 방법, 종류, 기타 등등의 시시콜콜한 설명이 붙어 있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카인은 그걸 몰라서 튜토리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카인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자 쿠란이 배낭에서 작은 약병 2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그동안 연구해서 만든 일종의 면역제입니다. 마셔 두면 한동안은 열병에 걸린 들개에게 물려도 전염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면역제는 충분하니 도중에 떨어지면 돌아오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숲에는 가끔 열병에 걸리지 않은 들개도 있습니다. 놈들은 이제 막 이국에서 넘어오신 카인 님이 상대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열병에 걸렸는지 아닌지는 보면 금세 알 수 있을 테니 만약 발견되면 도망치십시오.”
“명심하죠.”
카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부락을 나섰다.
부락을 나서자 어두운 숲 속을 어슬렁거리는 들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쿠란의 말대로 열병에 걸렸는지 아닌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근처의 들개들은 바짝 마른 몸에 퀭한 눈으로 혀를 늘어뜨리고 헥헥대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비틀비틀 갈지之자.
레벨 1에 병까지 걸린 들개였다.
그냥 툭 치면 픽 하고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 그런 수준이었다.
“으라차차차!”
그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유저가 열병에 걸려 헐떡이는 들개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튜토리얼에 들어온 유저니 당연히 레벨 1에 단검은 공격력 3짜리. 그럼에도 들개는 엄청난 공격에 맞은 것처럼 벌러덩 넘어졌다. 그리고 비틀비틀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바들바들 떨리는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반격인 모양이다.
크르, 크르, 헥헥······.
정말 애처로워서 못 봐 줄 지경이다.
그러나 유저는 인정사정없었다. 유저는 힘없이 흔들리는 들개의 앞발을 무시하며 무지막지하게 단검을 휘둘러 댔다. 그리고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들개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유저의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또 폐가 나왔잖아? 내가 미쳤지. 어쩌다가 이런 튜토리얼에 들어와서 삽질을 해 대는 건지.”
구시렁거리던 유저가 뒤늦게 카인을 발견하고 웃었다.
“어? 안녕하세요? 게임 시작하고 20분 만에 처음 유저를 만나네요.”
“여기에 그렇게 사람이 없어요?”
“그렇죠 뭐. 요즘 누가 가상현실 게임 하면서 튜토리얼을 하겠어요?”
유저가 한숨을 푹 불어 내며 하소연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저도 들어올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게임 시작할 때 잠시 넋 놓고 있다가 튜토리얼을 뉴브란트 제국에서 시작한다는 메시지로 착각해서 수락해 버렸어요. 혹시 님도?”
“아, 네. 뭐 그렇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카인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유저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키키, 게임을 하다 보면 꼭 저 같은 사람이 한둘은 있더라고요. 그나저나 정말 짜증 나 죽겠네요. 시작 마을로 친구를 불러 놨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열병 걸린 늑대 신체 구해 오는 퀘스트 받으셨죠? 그게 퀘템이 절라 안 나와요. 같은 부위가 겹치는 경우가 많고. 덕분에 20분째 이러고 있어요. 친구 놈은 왜 안 오냐고 전화질이고.”
유저는 튜토리얼에 사람이 없어 꽤나 심심했는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들개의 폐를 카인에게 내밀었다.
“지금 방금 시작하셨죠? 폐 없으면 가지실래요?”
“저 주셔도 돼요?”
“저는 이미 폐가 있어요. 모두 다른 부위로 5개를 구해 가야 하는 거라 같은 건 여러 개 있어 봐야 필요 없어요.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뇌도 3개가 겹쳐 있으니 하나 드릴까요?”
“이거 죄송해서······ 막 시작했는데 드릴 것도 없고.”
“괜찮아요. 다 처음인데 돕고 살아야죠. 대신 들개 사냥하다가 혹시 겹치는 부위가 생기면 저 주세요. 지금 저는 간 하나만 더 구하면 되거든요.”
주는 건 또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다.
카인은 일단 피가 흥건한 뇌와 폐를 받아 챙겨 두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님도 뉴브란트 제국에서 시작하시죠? 시작 마을이 어디예요? 저는 브리든인데.”
“저는 라미드예요.”
“같은 곳에서 시작하지는 못하네요. 하지만 뉴브란트 제국에서 시작하면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죠. 그때는 서로 알은척하고 지내요. 저는 카이제예요.”
“저는 카인입니다.”
“우와, 동성동본이네요.”
카이제가 입을 벙긋거리며 실없는 농담을 할 때였다.
크르르르.
근처 수풀이 들썩거리며 낮은 짐승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카이제가 단검을 뽑아 들고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감히 형님들 얘기하시는데 어디서 건방진 들개 자식이 겁도 없이, 간을 떼어······.”
호기롭게 중얼거리던 카이제는 뒤이어 나타난 들개를 확인하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수풀 속에서 나온 들개는 방금 전에 카이제가 묵사발을 만들어 놓은 들개와는 전혀 달랐다. 윤기가 흐르는 털,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단단하게 몸을 지탱하는 근육질의 다리!
“헉! 이, 이 자식, 그냥 들개잖아?”
카이제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이내 와락 몸을 돌려 부락을 향해 냅다 도망쳤다.
“튀, 튀어요! 저놈은 레벨 5예요! 여기서는 절대 못 이겨요! 우왁!”
들개가 펄쩍 뛰어오르자 카이제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곧바로 일어나 다시 도망치려고 했지만 들개는 이미 아가리를 쩍 벌리고 카이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 카인이 단검을 뽑아 들고 들개의 옆구리를 쑤셨다.
컹, 크르르르!
들개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빌어먹을, 대체 왜 튜토리얼 지역에 저런 몬스터가 있는 거야? 카이제 님, 도망가세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먼저 도망갈게요!”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에 카이제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부락을 향해 도망쳤다. 들개가 쫓으려는 듯 움찔했지만 카인이 앞을 막아섰다.
“네놈 상대는 나다!”
들개가 낮은 울음을 흘리며 카인을 노려보았다.
적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
무리도 아니었다. 들개의 레벨은 5. 평균적으로 몬스터의 수준이 높은 이데아에서는 유저들이 동 렙의 몬스터를 상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각종 장비와 스킬을 갖춘 뒤에야 겨우 2~3레벨 높은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카인의 레벨은 1. 장비도 방어력 3의 면 옷과 공격력 3의 단검이 전부다. 스킬은 아직 구경도 못해 본 상태. 어느 모로 보나 카인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크어어어엉!
들개가 성난 울음을 토하며 와락 달려들었다.
실제 들개처럼 날렵한 움직임!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놈의 송곳니가 옆구리를 스쳤다. 동시에 눈앞에 붉은빛이 번뜩이며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들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습니다!
들개에게 물려 ‘출혈’이 생겼습니다.
《1분간 10초에 3의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크윽, 이런 젠장!”
카인은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레벨 1에 들개 사냥이 쉽지 않은 줄을 알았지만 막상 실제로 겪어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치명타 한 방에 생명력이 30이나 깎여 나간 것이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방어력이 1밖에 되지 않는 면 옷. 초반에 구할 수 있는 방어력 5짜리 가죽옷만 돼도 들개의 이빨에 출혈이 생기지 않지만 허접한 면 옷이라 일격에 출혈까지 걸려 버렸다.
1분간 10초에 3의 생명력이 감소한다면 총 18의 데미지!
들개의 일격에 생명력이 50% 가까이 깎였다는 뜻이다.
‘들개가 이렇게 강한 놈이었나?’
쭉쭉 빨리는 생명력을 보니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 카인이 들개를 사냥한 건 레벨을 8이나 올려놓은 뒤부터였다. 게다가 그 캐릭터에 올인하려는 생각에 초반부터 희귀 장비품을 갖춰 입고 전투할 때는 힘 증가 따위의 효과를 발휘하는 주문서까지 남발했다.
때문에 2마리가 달라붙어도 크게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레벨 1에 허접한 장비로 붙어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들개와 맞짱을 떠 버린 상황!
이제 와서 도망쳐 봐야 들개에게 따라잡혀 개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니, 애초에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이놈이 내가 첫 번째로 넘어야 할 벽이다!’
“자, 와라!”
카인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들개와 대치했다.
순간 들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대체 뭘 믿고 버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들개의 머리로 카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카인이 겁도 없이 먼저 들개에게 달려든 것이다.
“받아랏!”
크어어어엉!
@
-당신은 들개와의 혈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곧바로 구조되어 화전민 부락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술사 쿠란의 헌신적인 치료로 아무런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딱히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 잃은 건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휴······.”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불어 냈다.
들개와의 대결은 예상대로 카인이 개밥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카인이 들개에게 입힌 부상은 고작 생명력의 20% 남짓. 게임조차 안 되는 상대였던 것이다.
“열병에 걸리지 않은 들개를 만나신 모양이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국에서 이제 막 오신 분이 건강한 들개와 싸우는 건 무리입니다.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쿠란이 심히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다시 주의를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카이제가 다가왔다.
“저······ 괜찮으세요?”
“네, 여기저기 좀 쑤시지만 괜찮아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에요. 어차피 그냥 들개하고도 한번 싸워 보고 싶었어요.”
카인의 대답에 쿠란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들개하고? 처음 시작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들개는 원래 레벨 5 이상은 돼야 잡을 수 있는 놈이에요. 넉넉하게 잡으려면 6 이상은 돼야 하고요. 여기 있는 들개는 잡으라고 풀어놓은 게 아니라 적을 경계하는 요령이나, 전투할 때 다른 몬스터를 애드시키지 않는 요령을 배우라고 풀어놓은 거예요. 못 이기는 상대니까. 뭐, 3~4명이 파티를 맺으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튜토리얼이라 경험치나 아이템은 전혀 안 나와요. 걸리면 무조건 튀는 게 상책이에요.”
“어차피 도망가도 따라잡힐 거 같아서요.”
카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자 카이제가 약간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죄송해요. 그리고 카인 님이 죽은 사이에 부락 앞에서 열병에 걸린 들개 간을 구했거든요. 들개 부위 구하는 것 좀 도와 드려야 하는데 아까부터 계속 친구 놈이 난리를 쳐 대서······.”
“저는 괜찮아요. 먼저 가 보세요.”
“죄송해요. 대신 어차피 저는 친구에게 도움 좀 받을 생각이니까, 나중에 만나게 되면 뭐라도 하나 드릴게요. 브리든에 올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럴게요.”
카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제는 쿠란에게 연구 재료를 넘겨주고 퀘스트를 완료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지름길을 따라 한발 먼저 뉴브란트 제국으로 넘어갔다.
가면서도 몇 번이나 나중에 뭔가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온라인 게임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그런 약속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만 지나도 카이제는 카인의 이름 따위 까맣게 잊어버리리라.
‘게다가 내가 튜토리얼을 끝낼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도 장담할 수 없지.’
카인은 한숨을 불어 내며 다시 부락 밖으로 나갔다.
부락 밖으로 나가자 여기저기 들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퀭한 눈에 혀를 축 늘어뜨린, 열병에 걸린 들개들이다. 여기에서 레벨 1로는 그런 놈들밖에 잡을 수 없었고, 퀘스트의 목표인 연구 재료도 놈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튜토리얼이니만큼 해야 할 일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카인은 열병에 걸린 들개 따위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숲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카인은 자신이 찾던 목표물을 발견했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열병 걸린 들개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건강한 레벨 5의 들개! 카이제가 그림자만 봐도 도망가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던 놈이다. 그러나 발견한 카인은 망설임 없이 단검을 뽑아 들고 들개에게 달려들었다.
“덤벼라!”
단검에 엉덩이를 찔린 들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가 황당한 눈빛이 되었다.
비록 제국에서는 레벨이 높은 유저들이 많아 샌드백 취급을 받지만 이곳은 튜토리얼! 레벨 1의 허접한 유저들만 올 수 있는 이곳에서 건강한 들개는 무적의 몬스터다.
당연히 유저들은 자신이 나타나면 도망가기 바쁜 것이다. 그런데 도망은커녕 먼저 와서 엉덩이에 칼침을 놓다니? 제정신인가?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나 역시 들개답게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음 순간, 들개가 성난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몸을 측면으로 회전시키며 들개의 공격을 피했지만 발톱이 스치며 데미지가 들어왔다. 바로 반격을 펼쳤지만 들개는 공중제비를 돌듯 몸을 회전시키며 가볍게 피해 냈다. 그리고 히죽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슬렁어슬렁 주위를 돌았다.
어떠냐, 건방진 인간! 수준 차이를 알겠냐?
그런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빌어먹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인마. 나도 알아. 얼마나 황당한 짓을 하는지.”
울컥해서 쏘아붙인 카인은 곧 입술을 씹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이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이데아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는 다른 게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이데아만의 독특한 시스템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시스템은 레벨이 높아진 이후에나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튜토리얼에서 설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카인이 튜토리얼에 들어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굳이 튜토리얼에 들어온 이유!
그건 바로 들개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들개를 상대하는 이유는······.
‘여기가 아니면 익숙해진 전투 스타일을 바꿀 수 없어!’
그렇다. 전투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서다.
카인은 그게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새삼스럽지만 카인은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 시작부터 현질로 200골드를 사서 레벨에 따라 항상 장비를 바꿔 줬고, 전투할 때마다 각종 주문서나 포션을 물 쓰듯 남발했다.
돈을 벌려면 일단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인의 생각과 달리 레벨이 올라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레벨이 올라가면 더 강한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때문에 점점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강력하고 많은 주문서나 포션을 써 대야 했고, 그만큼 돈이 많이 들었다.
비싼 주문서나 포션 값을 저레벨 몬스터가 떨구는 잡템만으로 충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인은 레벨 20도 되기 전에 200골드를 몽땅 날려 먹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다른 게임을 할 때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카인은 한 유저를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울프!’
울프는 카인이 골렘을 사냥할 때 파티를 맺었던 유저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카인이 가지고 있던 게임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울프는 같은 레벨의 유저 2~3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던 골렘을 철검 한 자루만으로 상대했다. 주문서나 포션조차 거의 쓰지 않고 말이다. 덕분에 그때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유저들은 주문서와 포션을 남발해 오히려 손해를 봤지만 울프는 짭짤하게 벌었다.
카인은 나중에야 울프도 전업 게이머 지망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쓸 거 다 쓰면서 돈을 어떻게 모아요? 남들이 못하는 걸 해야 돈을 벌죠.”
카인도 전업 게이머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하자 울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강한 스킬을 익혀도 결국 캐릭터를 움직이는 건 유저 본인이에요. 가상현실 게임에서 스킬만 좋은 걸 얻는다고 잘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건 알죠? 이데아도 마찬가지예요. 초반에 확실하게 틀을 잡아 놓지 못하면 어떤 스킬을 배워도 결국 다를 게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이데아는 재능이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한번 잘못 키우면 나중에 바꾸기가 다른 게임보다 몇 배는 더 힘들어요.”
울프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카인은 전투 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무턱대고 들이대는 방식으로 레벨을 올리는 바람에 습득한 재능이나 스킬도 몽땅 그런 쪽으로 치중돼 버린 것이다. 그 상태에서 갑자기 전투 스타일을 바꾸면 그때까지 배웠던 재능과 스킬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스킬은 그렇다 쳐도 재능은 한번 배워 버리면 바꿀 수 없어. 그리고 재능이 없으면 필요한 스킬을 잘 배울 수도 없고, 배워도 성장이 느려. 결국 전투 스타일은 처음부터 방향을 정해 놓고 만들지 못하면 나중에는 바꿀 수 없다는 뜻이야! 문제는 그뿐이 아니야.’
재능과 기술을 버리고 새로운 전투 기법을 몸에 익히려면 수많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이데아의 무지막지한 사망 페널티였다.
이데아에서 죽으면 50%의 경험치가 날아가고, 24시간 동안 재접속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추가로 장비품의 내구도가 50%나 깎이고, 재수 없으면 ‘기억상실’이라는 상태 이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죽음의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미 배워 뒀던 스킬의 숙련도가 떨어지거나, 아예 며칠 동안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스킬의 숙련도가 중요한 이데아에서는 치명적인 상태 이상이었다. 그러나 딱 한 곳, 사망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 있었다.
바로 튜토리얼 모드!
‘튜토리얼 모드에서는 몇 번을 죽어도 사망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초기 장비는 허접하지만 내구도가 무한대! 지금까지의 전투 스타일을 바꾸려면 죽어도 상관없는 튜토리얼 모드에서 해야 해. 어차피 레벨 1이라 죽어도 잃을 건 없지만 24시간 접속 못 하는 건 치명적이야. 아무리 힘들고 귀찮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튜토리얼 모드에 들어온 이유!
오직 맨몸에 단검 한 자루만으로 들개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 그게 카인이 원하는 수준이고, 결과적으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전투 스타일이었다.
그런 전투 스타일을 다 죽어 가는 병 걸린 들개를 상대로 배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들개를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면 나가지 않겠다!’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울프와 만난 덕분에 이제 그게 불가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돈이 바닥난 카인에게 살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투 스타일은 사망 페널티가 없는 튜토리얼에서만 수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렵지만 이 정도 시련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1년에 1억을 모으는 건 꿈속의 꿈!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는다!’
“자, 멍멍아. 붙어 보자고!”
카인이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ACT 2 튜토리얼 연계 퀘스트?
“휴, 아무래도 제가 부탁을 잘못한 것 같군요.”
눈을 뜨자 쿠란이 한숨을 불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오신 분이 건강한 들개를 상대하는 건 무리라고. 그리고 제가 필요한 것도 열병에 걸린 들개의 신체 부위입니다. 그런데 왜 부락을 나서면 들개하고만 싸워 대는 겁니까? 구별이 안 됩니까? 눈이 삐었어요? 남들은 다 잘 찾아서 가져오는데 왜 카인 님만 못 찾는 건데요?”
쿠란의 목소리가 슬슬 신경질적으로 변해 간다.
무리도 아니다.
벌써 카인이 튜토리얼 모드를 시작한 지 이틀째.
그사이에 카이제처럼 실수를 하거나, 정말 태어나서 가상현실 게임을 처음 해 본 사람 등, 몇 명이 튜토리얼 모드에 들어왔다. 그리고 빠르면 30분에서 늦어도 1시간 안에 쿠란의 퀘스트를 완료하고 속속 뉴브란트 제국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틀 전에 들어온 카인은 아직도 튜토리얼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동안 들개에게 물려 죽은 횟수는 무려 100여 번!
덕분에 이틀 동안 100여 번이나 카인을 치료해 준 쿠란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먼저 부탁을 드리고 이런 말을 하기는 죄송하지만 이제 연구 재료는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지름길을 표시해 드릴 테니 그냥 가십시오.”
오죽하면 NPC가 이런 말까지 하겠는가?
그러나 카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번 받은 부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결하는 게 저의 철칙입니다. 게다가 고통 받는 병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면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겁니다. 물론 제국으로 가는 길이 급하기는 하지만 기필코 연구 재료를 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마음은 갸륵합니다만 매번 치료하느라 죽어나는 제 생각도 좀······.”
이대로 들어주다가는 강제로 등 떠밀려 튜토리얼에서 쫓겨날 분위기다.
“다녀오겠습니다.”
카인은 쿠란의 말을 씹으며 도망치듯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걸어 나오자 몸 여기저기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캐릭터에게서 전해지는 통증이 아니다.
실제 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이었다.
‘젠장, 나도 그렇게 속 편하지만은 않다고.’
카인은 욱신거리는 몸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불어 냈다.
튜토리얼에서 죽으면 사망 페널티가 없다.
그러나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데아는 다른 가상현실 게임과 달리 현실감을 높인다는 이유로 적에게 맞으면 유저에게 실제로 고통이 전해졌다. 어차피 사망 페널티도 없는 튜토리얼에서 카이제가 들개에게 겁을 집어먹고 도망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과 동등한 수준의 고통은 아니다.
비율로 말한다면 대략 5분의 1 정도.
그러나 그 정도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카인은 요 이틀 사이에 100여 번이나 들개에게 물려 죽었다.
덕분에 전투를 할 때마다 상당한 통증을 느꼈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실제 가인의 몸에도 여기저기 피멍이 들었다. 최면과 비슷한 상태에서 이틀 내내 고통을 받으니 몸에도 어느 정도 부담이 작용한 듯했다. 덕분에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피했다. 울긋불긋한 몸을 보고 동네 건달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때문에 유저들은 고통을 없애 주는 노페인 포션을 사용한다. 노페인 포션은 10쿠퍼면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포션이라 초보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튜토리얼 모드에서 열병에 걸린 들개를 상대할 때는 굳이 노페인 포션이 필요 없었다. 빌빌거리는 들개에게 맞아 봐야 실제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튜토리얼에서는 노페인 포션을 팔지도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카인은 어금니를 사려 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통 없이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게다가 지금 카인은 수년간 일반 온라인 게임과 가상현실 게임을 해 오며 몸에 익어 버린 전투 스타일을 완전히 뜯어고치려는 중이다.
아픔을 느껴야 아프지 않기 위해 더 집중하고 더 노력할 게 아닌가? 게다가 노페인 포션은 고통을 없애 주는 대신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새로운 전투 스타일을 익히려는 카인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에서도 앞으로 노페인 포션 따위는 먹지 않겠어!’
뭣보다 이제는 10쿠퍼도 아깝다.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 몇 쿠퍼를 우습게 알다가 200골드를 순식간에 날려 먹은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1쿠퍼가 모여 1실버가 되고 1실버가 모여 1골드가 된다는 당연한 이치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고작 들개에게 물린 정도에 우는소리를 하면 전업 게이머는 못 해!’
모두가 레벨 1에 스킬조차 없이 들개를 잡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카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카인은 울프를 보고 말았다.
힘들지만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 힘든 일을 해내야 전업 게이머로서 최소한의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하물며 1년 안에 1억을 모아야 하는 카인이라면 그보다 더한 거라도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그 기틀을 만들고 있는 거야!’
돈을 벌기 위해서!
아버지를 전과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못 참을 게 없었고, 못 버틸 게 없었다. 그리고 100여 번을 죽는 동안 카인은 점점 자신이 익혀야 할 전투 스타일이 어떤 건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약간이지만 실력도 붙었다. 처음 들개와 붙었을 때는 제대로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불과 2분도 버티지 못한 채 개밥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들개만 상대하다 보니 공격을 피하는 데 나름 약간의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요령이 생긴 것은 ‘공포심’ 덕분이었다.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는 무턱대고 들이대며 검을 휘둘러 대는 방식으로 싸웠다.
무기나 방어구가 좋으니 그래도 웬만한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생명력이 떨어지면 포션으로 회복했고, 노페인 포션 덕에 아파해 본 적도 없다.
몬스터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니 들개와 대치하면 먼저 겁부터 났다. 노페인 포션조차 먹지 않고 이틀이나 놈들에게 씹혀 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던 감정!
덕분에 카인은 들개와 마주 서면 반사적으로 들개의 숨결, 움직임 하나에 모든 촉각이 바짝 곤두섰다. 어떻게든 맞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들개에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는 게 있었다.
‘이데아의 몬스터들은 단순히 그래픽의 수준이 아니야. 거의 실제와 다름없어. 그냥 서 있다가 갑자기 공격하는 게 아니야. 몸을 날리기 위해 먼저 움츠리고 뒷다리에 힘을 집중시켜 뛰어오른다. 모든 동작이 실제 들개와 똑같아!’
그때부터 카인은 모든 신경을 들개에게 집중해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들개가 조금만 움직여도 이제 어떤 타이밍에 어디로 공격할지 대강 예측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예측 가능한 것과 피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이데아는 어디까지나 게임. 유저가 잘 피한다고 데미지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다.
이데아에서 데미지를 받을 때 적용되는 효과는 크게 치명타, 정타, 반타, 회피, 이렇게 네 가지가 있었다.
치명타는 상대의 공격력보다 많은 데미지를 받는 것, 그리고 정타는 공격력이 그대로 적용되는 데미지, 반타는 공격력의 반만 받는 데미지, 회피는 데미지를 받지 않는 것.
이 중 어떤 효과가 적용될지는 캐릭터의 민첩과 회피율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고정된 수치 외에도 실제로 유저의 회피 동작에 따라 민첩이나 회피율에 가산점이 붙었다.
민첩이나 회피율이 아무리 높아도 실제 유저가 회피 동작을 취하지 않으면 정타나 치명타를 맞을 확률이 높아지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회피 동작을 취하면 반타나 회피가 뜰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울프가 주문서나 포션도 쓰지 않고 강한 몬스터와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이야!’
동시에 전업 게이머로 살아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할 기술이었다. 그러나 회피 동작을 몸에 익히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데아는 실제 유저의 반응속도가 그대로 적용되는 게임. 유저의 운동 능력도 전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평소 운동을 즐겨 하는 유저는 여러모로 유리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울프도 어려서부터 격투기를 익힌 게 도움이 됐다고 했었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가 체육관 좀 다니라고 할 때 격투기라도 배워 두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운동을 전혀 안 해 본 건 아니야. 비록 춤이지만.’
그렇다. 카인도 운동과 완전히 담을 쌓은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TV에서 ‘댄싱 킹’이라는 영화에서 비보이들이 활약하는 장면을 보고 필이 팍 꽂혀 덜컥 댄스 동호회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입원하시기 전까지 그럭저럭 1년을 다녔다.
그러나 교습을 받는 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게다가 카인은 딱히 운동에 재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몸치에 가까워서 몸을 움직이는 쪽은 남들보다 느린 편이었다.
그런 주제에 상당한 신체 능력을 요하는 비보이를 배우겠다고 설쳤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문 댄서를 목표로 삼았던 것도 아닌 단순한 취미 활동. 때문에 1년을 빠짐없이 나갔지만 실력은 간신히 기본적인 웨이브나 몇 가지 기술을 흉내 내는 정도였다.
‘격투기도 아닌 그냥 춤이 몬스터와의 전투에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기술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게다가 일단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적의 공격을 피하는 요령. 그 정도는 댄스 동호회에 다닐 때 연습했던 풋워크나 스텝을 응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이제 와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때부터 카인은 들개가 공격할 때 발에 땀이 나도록 연습했던 풋워크나 스텝을 응용해 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효과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어색한 발놀림 때문에 이전보다 더 피하기 힘들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가끔이라도 일단 들개의 공격이 풋워크나 스텝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맞아떨어지면 높은 확률로 반타나 회피가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풋워크나 스텝이 전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니 조금씩 캐릭터를 움직이는 요령도 이전보다 더 숙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풋워크나 스텝도 잘만 사용하면 어느 정도 회피 동작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도망 다니는 것보다 일정한 규칙을 만들 수 있는 풋워크나 스텝을 사용하는 편이 나아.’
일단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카인은 본격적으로 풋워크와 스텝을 전투에 도입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생각한 대로 몸이 제대로 따라 주지 않아 200번을 죽었을 무렵에도 반타로 공격을 피하는 확률이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대체 난 왜 이렇게 둔한 거야?”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몸 때문에 울컥울컥 화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습을 안 한 지도 2년이 넘었으니 그리 쉽게 이전처럼 될 리가 없었다.
“어쨌든 치명타와 정타만 두들겨 맞았던 이전에 비하면 이것도 꽤나 나아진 거야. 그리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지금 아니면 전투 스타일을 바꿀 기회는 없다. 앞으로 며칠이 더 걸리든 레벨 1로 들개를 잡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어!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조금이나마 되찾은 이전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카인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튜토리얼이라 초보자에게 위협이 되는 들개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병에 걸린 들개를 무시하며 돌아다니자 곧 수풀 사이에서 어슬렁대는 들개가 나타났다.
‘좋아, 아직 놈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카인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들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1미터 안팎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컹, 컹, 컹, 컹!
갑자기 옆의 수풀이 들썩이더니 들개 1마리가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의 공격에 카인이 기겁하며 몸을 굴렸다.
“헉! 뭐, 뭐야?”
-들개에게 약한 일격을 받았습니다!
옆구리가 욱신거리며 생명력이 쭉 빨려 나갔다.
다행히 즉각적으로 반응해 반타로 흘렸지만 그 뒤에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른 들개와 전투가 벌어지자 근처에 있던 들개까지 애드된 것이다.
“젠장, 엿 됐다!”
2마리의 들개!
그러나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설프게 등을 보였다가는 몇 걸음도 떼기 전에 개밥이 되리라.
“빌어먹을, 할 수 없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그냥 피하는 연습이나 하다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카인은 미친 듯이 풋워크와 스텝을 밟아 가며 회피 동작에만 집중해 들개의 공격을 피하는 데 집중했다.
카인이 기묘한 느낌을 받은 건 그 뒤였다.
지금까지 카인은 1마리를 상대로도 제때 공격에 반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반면 지금 상대는 2마리.
순식간에 죽었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오히려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움직임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건 그만큼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
실제로 2마리에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반타로 공격을 흘리는 확률은 50%에 육박하는 게 아닌가?
카인은 한참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렇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검조차 뽑지 못한 게 바로 회피율 상승의 원인이었다.
검을 들고 있을 때와 빈손일 때, 움직임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카인은 아직 ‘단검술’ 관련 스킬조차 없어 검을 들었을 때 움직임이나 이동속도에 페널티가 가해진다. 반대로 검을 뽑지 않으면 페널티도 적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검을 뽑지 않으면 스텝이나 풋워크를 더욱 편하게 펼칠 수 있다는 뜻! 쉬지 않고 전투만 하다 보니 이런 단순한 부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건 적의 공격을 피하는 기술. 그리고 어차피 지금 실력으로는 들개를 이길 수 없다. 당장 한두 대 때리는 건 무의미해. 그렇다면 일단 회피 감각이 몸에 익을 때까지 아예 검을 뽑지 않고 풋워크와 스텝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다!’
죽어도 상관없는 튜토리얼에서만 가능한 수련 방식!
그리고 댄스 동호회 은퇴 2년 차인 카인이 최대한 빨리 이전의 감각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좋아, 해 보자!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맞으면서라도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
그때부터 카인은 들개와 전투가 벌어져도 죽을 때까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렇게 오직 모든 신경을 풋워크와 스텝에만 집중하자 확실히 이전보다 피하는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50여 번을 더 죽을 무렵에는 반타 확률이 60%까지 올라갔다.
“이거다! 이거였어!”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자 의욕이 넘쳤다.
그때부터 카인은 잠자는 시간도 줄여 가며 수련에 매달렸다. 그렇게 다시 이틀이 지나 사망 횟수가 200여 번에 도달했을 때쯤에는 반타 확률이 70%에 육박했다.
전혀 데미지를 받지 않는 회피도 5~10% 정도!
그러나 그 뒤로 수십 번을 더 죽었지만 반타나 회피 확률은 더 높아지지 않았다.
“스텝과 풋워크를 아무리 연습해도 게임 속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아무리 완벽하게 피해도 게임인 이상 그게 모두 적용되지는 않는다. 유저의 몸놀림만으로 회피가 결정되면 민첩이나 회피율 스텟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레벨 1의 유저가 레벨 5의 들개 공격을 70% 확률로 반타로 흘리는 건 거의 한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이제 회피 동작에 대한 감은 잡았다. 하지만 잘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내 피해는 줄이면서 상대에게는 더 많은 피해를 주는 것. 그게 중요하다!”
적에게 보다 많은 데미지를 입히는 방법은 단순하다.
회피 동작으로 적의 공격 데미지를 줄일 수 있다면, 미처 회피 동작을 취하지 못하는 타이밍을 잡아 공격하면 더 많은 데미지를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즉, 상대의 공격은 반타나 회피로 흘리며, 자신의 공격은 정타나 치명타가 터질 수 있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
그게 카인이 튜토리얼에서 완성시키려는 이상적인 전투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을 잡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막상 공격 기술을 익히기 위해 검을 들고 있으니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고 무기를 들었을 때의 페널티가 적용되어 반타로 피하는 확률도 떨어졌다.
몸에 익힌 감각 덕분에 이전과 같은 수준까지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70%에서 50~60%까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격 기술을 익힌다고 해도 반타나 회피 확률이 떨어지면 들개를 쓰러뜨리는 건 무리야. 회피는 몰라도 반타 확률을 최소한 70% 이상 유지하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검을 뽑아야 하고, 검을 뽑으면 풋워크나 스텝의 효과가 제대로 나오질 않으니······.”
몇 번이나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죽은 카인이 답답한 한숨을 불어 냈다.
“뭔가 방법이······ 가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때 고민하던 카인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반타 확률을 유지하며 들개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사실 그 방법이 정말 통용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곳은 죽어도 상관없는 튜토리얼, 일단 해 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카인은 곧바로 들개를 찾아 검을 뽑지 않은 상태로 전투를 걸었다.
컹, 컹, 컹, 컹!
그리고 들개가 뛰어드는 타이밍에 맞춰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이동했다. 역시나 검을 뽑지 않으니 이전처럼 움직임이 매끈하게 펼쳐져 회피로 흘려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카인의 목표는 단순히 피하는 게 아니었다. 들개가 허공을 물어뜯으며 스쳐 지나는 순간, 카인은 눈빛을 번뜩이며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며 검을 뽑아 드는 동작 그대로 들개를 후려쳤다.
컹, 하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 검을 맞은 들개가 펄쩍 뛰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다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카인은 풋워크를 발휘해 회피 동작을 취했지만 역시 검을 뽑아 든 상태라 정타가 터져 나왔다.
“크윽, 역시 검을 뽑아 든 상태에선 풋워크를 사용해도 피하는 데 한계가 있어.”
카인은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들개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시 단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카인이 갑자기 검을 거두자 들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무방비 상태로 보이는 카인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순간 카인은 다시 풋워크로 피하며 득달같이 검을 뽑아 들개를 후려쳤다.
-들개에게 약한 일격을 받았습니다!
-들개에게 정확한 일격을 주었습니다!
“됐어! 통한다!”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에 카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다. 이게 바로 카인이 생각해 낸 새로운 전투 스타일이었다.
검을 뽑지 않으면 반타나 회피 확률이 확실하게 상승된다. 그러나 공격을 위해 검을 뽑으면 확실하게 하락한다.
때문에 한동안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의외로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피할 때는 검을 집어넣고, 공격할 때만 검을 뽑는 방법이다.
검을 뽑는 동작의 연장선으로 공격을 하고 곧바로 검을 집어넣으면 빈손이 되는 것이다! 그게 시스템적으로 가능한지 확신이 없었지만 막상 해 보니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빈손 상태의 회피율을 유지하며 반격할 수 있다!’
사고의 전환으로 얻어진 카인만의 전투 스타일!
그때부터 카인은 ‘검을 넣은 채로 피하다가 뽑으며 공격하는 기법’을 몸에 익히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에 아무런 제약도 없는 건 아니었다.
먼저 검을 뽑을 때는 곧바로 공격과 연결되니 큰 무리가 없었지만,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회피 동작을 유지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시스템상으로 검을 뽑아 든 ‘전투 상태’가 되면 20초간은 다시 검을 집어넣은 ‘비전투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일단 검을 뽑으면 20초 동안은 검을 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검을 집어넣는 동작도 반복하다 보면 곧 손에 익을 거야. 그리고 20초 동안은 검을 든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지만 20초마다 한 번씩은 반타나 회피 확률이 높은 상태로 적의 공격을 피하며 공격할 수 있어. 확실하게 도움이 된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그렇게 다시 수십 번의 죽음을 반복하며 전투하기를 이틀!
“지금이다!”
카인은 신물 나게 보아 온 들개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리와 허리, 어깨의 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들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주었습니다!
“이거다. 이런 느낌이야!”
카인은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눈을 반짝였다.
카인은 이 새로운 전투 기법을 연습하는 동안 뜻하지 않았던 장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검이 검집에 들어 있는 상태라 검을 뽑기 전까지는 상대가 공격 방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곳에 공격을 가하면 그만큼 치명타가 터질 확률이 높아지는 게 이데아의 전투 시스템!
그렇다. 검을 뽑으면서 공격하는 기법은 이데아의 시스템 구조상 치명타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는 한 달 동안 쉴 새 없이 전투를 해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밖에 터지지 않았던 치명타!
그러나 수없는 죽음을 겪으며 타이밍에 전념하자 이제 검을 뽑으며 공격할 때는 세 번에 한 번은 치명타가 터졌다. 그리고 몇 번 연속으로 치명타를 터뜨렸을 때였다.
돌연 칼날이 스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정보창이 떠올랐다.
【집념I】의 재능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발도술(일반, 액티브, 하급) :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공격 기법은 오직 전투에 모든 집념을 불태우는 전사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발도술을 발동시켜 「대기」 상태로 들어간 뒤에 공격을 성공시키면 적에게 30~50%의 추가 데미지와 관통력이 증가합니다. 또한 치명타 성공률이 상승하며 10% 확률로 출혈에 걸리게 할 수 있습니다. 단, 대기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20%의 추가 데미지를 받습니다. 또한 발도술을 사용하면 검에 부담을 주어 내구력이 3%씩 감소하게 됩니다.
《30~50% 추가 데미지, 관통력 +10, 치명타와 출혈 확률 +10%, 내구력 손상 -3%》
*마나 소모 : 20
“헉! 이, 이게 뭐야? 스킬?”
생각지도 못했던 스킬에 카인의 눈이 이따만 해졌다.
레벨 1에 튜토리얼 모드에서 공격 스킬!
게다가 ‘일반 스킬’이다.
새삼스럽지만 이데아에서는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언제든지 몇 번이라도 직업을 바꿀 수가 있었다.
문제는 직업을 바꿀 때 가해지는 페널티!
같은 계열의 상위 직업으로 전직할 때 이외에는 직업 전용 스킬을 세 가지 이상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직업 전용 스킬을 100개 배워 둬도 전직을 하려면 무조건 97개는 버려야 한다는 뜻! 결국 전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 기술은 몇 번을 전직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반 스킬은 대부분 재능을 통해 배우고 숙련도도 관련 재능에 따라 올라가는 속도가 달라진다. 관련 재능이 없다면 스킬을 배우지 못하거나, 배워도 숙련도를 올리는 게 몇 배나 힘이 드는 것이다.
그게 이데아에서 재능이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다고 재능이 있다고 자동으로 스킬이 생기는 건 아니다. 재능은 어디까지나 재능, 잠재 능력이다.
그걸 개발하는 건 온전히 유저의 몫.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그에 관련된 능력을 개발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스킬은 절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발도술’은 순전히 카인의 노력으로 얻어 낸 결실이라는 뜻이었다.
레벨 1에 레벨 5의 들개를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반복해 얻어 낸 결실!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튜토리얼에서 공격 스킬을 익히게 될 줄이야.’
비록 튜토리얼이라 경험치는 1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동안 수없이 죽으면서 창안해 낸 새로운 전투 기법을 이데아에서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웬 떡이냐?’
레벨 1에 얻은 스킬치고는 효과가 장난이 아니었다.
‘발도술’을 사용해 적을 공격하면 30~50%의 추가 데미지! 결국 ‘발도술’을 사용하면 그것만으로도 치명타가 터지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적용된다는 말이었다.
뭐, 대기 상태에서 공격받으면 추가 데미지를 받고 검의 내구력이 3%씩 닳는다는 페널티가 있었지만, 어차피 카인은 지금까지 ‘발도술’은 적의 공격을 피한 뒤에 발동시켜 왔다. 대기 상태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장비는 내구력이 무한대니 내구력 페널티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좋아. 뭔가 풀리는 느낌이다!”
카인은 더욱 의욕이 샘솟는 표정으로 들개에게 달려들었다. 적절하게 ‘발도술’을 사용하니 치명타가 터지며 들개의 생명력이 펑펑 날아갔다.
그러나 역시 들개의 벽은 높았다.
‘발도술’은 검을 검집에 넣었을 때만 발동시킬 수 있는 스킬. 한 번 검을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기까지 20초는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검을 든 상태로도 어느 정도 회피와 공격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결국 카인은 그 뒤로 다시 꼬박 하루를 개밥이 되었다.
“크윽! 빌어먹을, 이러다가 정말 죽겠군.”
부활한 카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인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도 부활하면 말짱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카인처럼 편리한 몸이 아니었다.
피멍이 빠지기도 전에 다시 멍이 생기기를 반복해 아예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쯤 되자 하루 종일 욱신거려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카인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고통 없이 배울 수 있는 건 없어! 여기서 포기하면 결국 이전과 다를 바가 없잖아! 사망 페널티가 없는 지금이 아니면 이런 연습은 돈 주고도 못 해! 여기다. 여기에서 완벽하게 전투 기법을 뜯어고치지 못한다면 전업 게이머로 살아가기는 힘들어! 하물며 1년에 1억은 꿈속의 꿈이다!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신장을 떼 파는 것만 하겠냐?’
“우아아아, 들개 자식아. 덤벼라!”
“지름길 가르쳐 준다니까요! 병자는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제발 그냥 가세요!”
쿠란은 이제 아예 대놓고 나가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하긴 들개들조차 카인이 나타나면 지겹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카인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게임이라도 카인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제 250여 번 이상 자신의 몸을 개밥으로 던져 주었다.
이쯤 되면 이제 반쯤은 오기다.
카인의 눈에는 독기까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유저는 물론 NPC마저 외면했을 무렵, 카인에게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카인이 죽을 때 들개에게 남은 생명력은 80% 이상이었다. 그런 상대와 싸웠으니 죽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카인이 점점 ‘발도술’과 검을 든 상태에서의 풋워크와 스텝을 응용한 회피 동작, 공격 동작의 연결이 매끄러워지자 70%, 60%, 50%로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나 일주일을 꽉 채웠을 무렵.
-들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주었습니다!
컹-!
카인을 스쳐 지나가다가 ‘발도술’에 맞은 들개가 비명을 터뜨리며 벌러덩 넘어졌다. 그리고 하늘로 향한 네 다리를 바들바들 떨다가 혓바닥을 축 늘어뜨리며 눈을 까뒤집었다.
“해, 해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들개를 바라보던 카인이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카인 역시 생명력이 5%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드디어 레벨 1로 레벨 5의 들개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때 경쾌한 리듬과 함께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집념I】이 【집념II】로 승격됐습니다!
【집념II】 : 죽음조차 무서워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집념을 불태우며 싸울 수 있습니다.
《빈사 상태에 빠질 경우, 단 한 번 체력이 1분간 10초에 0.75%씩 회복됩니다.》
‘오오, 이게 뭐야? 스킬에 이어 재능까지 승격?’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데아에서 기술보다 중요한 재능은 새로 배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배운 재능을 승격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카인 역시 이전에는 이것저것 많은 기술을 찝쩍댄 덕분에 호기심을 ‘호기심II’로 승격시켰지만, 그 외의 재능은 캐릭터를 삭제시킬 때까지 하나도 승격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레벨 1에 그것도 튜토리얼에서 재능이 승격됐다!
‘집념’은 위기 상황에서 발휘되는 재능!
닷새 동안 250여 번 이상 죽은 덕분에 승격된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빠른 감이 있는데? 이전에 ‘호기심II’는 한 달이 넘어서야 승격됐는데. 혹시 재능을 올리려면 뭐든 한 방에 몰아서 해야 빨리 승격되는 건가?’
카인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헉! 뭐, 뭐야?”
“저 사람, 혼자서 들개를 죽인 거야?”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레벨 1에 들개를 잡아?”
“포션을 마시면서 잡아도 못 잡는 걸 대체 무슨 수로?”
마침 튜토리얼에 들어와 열병 걸린 들개를 잡던 신입 유저 몇몇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튜토리얼에서 들개를 잡았다는 얘기는 인터넷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불가능한 일!
그렇다. 카인은 250여 번을 죽으며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전투 스타일을 터득한 것이다!
‘······자리를 옮겨야겠군.’
카인은 얼굴을 찔러 대는 유저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옮겼다.
새삼스럽지만 이데아는 제작사의 신비주의 마케팅 때문에 아직 공개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물론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만큼 밝혀진 정보가 상당히 많았지만, 유저들도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절대 공개하지 않았다.
수많은 기회와 위험이 도사리는 이데아에서 정보는 곧 힘!
힘들게 알아낸 정보를 굳이 다른 유저와 공유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이데아는 온라인 게임 최초로 게임 정보를 사고파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이데아에서는 그게 상식이고 법도였다.
‘내가 몸으로 체득한 전투 스타일도 여기서는 정보다!’
레벨 1에는 사망 페널티가 없으니 수백 번을 죽더라도 이 기회에 전투 기법을 완벽하게 숙달시킨다. 이건 카인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키워 보고자 수많은 자료를 뒤지며 스스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백 번을 죽으며 원하던 전투 스타일을 체득했다.
만약 이 방법이 카인의 기대처럼 앞으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면 따라 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는 튜토리얼. 다른 사람이 못 따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카인처럼 목숨을 걸고 매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어쨌든 득 될 정보는 최대한 숨기는 게 좋다.
전업 게이머에게는 NPC도 유저도 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전투 스타일을 완벽하게 숙달시키는 일만 남았다!”
인적이 드문 숲으로 자리를 옮긴 카인이 주변의 들개들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
카인은 단검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추며 들개를 노려보았다.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 헐렁한 면 옷이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들개의 상태도 만만치 않았다. 카인의 검이 만들어 낸 상처에 회색 털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제 들개의 남은 생명력은 고작 7% 남짓.
카인의 남은 생명력은 15% 남짓.
‘한 방에 끝내지 못하면 내가 위험해진다!’
카인은 호흡을 정돈하며 들개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들개도 이번 공격으로 결판이 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인내심의 싸움.
그때 카인이 움찔하며 살짝 한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들개가 펄쩍 아가리를 쩍 벌리며 뛰어올랐다.
‘지금이다!’
카인은 마치 눕듯이 상체를 뒤로 뺐다.
댄스 동호회에서 배웠던 스트레칭 방법 중 하나인 브릿지를 응용한 동작이었다.
풋워크나 스텝으로 짭짤한 재미를 본 카인은 그 뒤로 다른 동작들도 간간이 전투에 응용해 보았다.
통용되는 걸 알았으니 더욱 성장시키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몸이 굳어서인지, 아니면 이데아의 시스템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복잡한 동작은 뭔가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며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반복하다 보니 지금처럼 간단한 브릿지 동작이나 회전 동작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브릿지 자세를 취하자 들개의 송곳니가 어깨를 스치며 피가 튀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자 소름 끼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카인이 검 자루를 꽉 움켜쥔 건 그때였다.
“발도술!”
그리고 튕기듯 상체를 들어 올리며 들개의 목덜미를 향해 벼락처럼 검을 뽑았다.
카르르릉, 칼날이 검집과 마찰하며 쇳소리를 울려 냈다. 뒤이어 검집에서 섬광처럼 뿜어진 칼날이 가죽을 찢고 살을 가르는 감각이 전해진다!
순간 눈앞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들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주었습니다!
카인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치명타가 터지자 들개는 튕기듯 날아가 사지를 버둥대다가 축 늘어졌다.
“휴. 사, 살았다!”
그제야 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불어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레벨 하나 차이도 장난이 아니군.”
게임을 시작하고 벌써 일주일, 카인은 아직도 튜토리얼에 남아 있었다. 새로 익힌 ‘비보이 동작을 응용한 전투 스타일’을 완전히 숙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들개 3~4마리를 잡은 뒤에는 더 높은 레벨의 들개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자 이제 확실히 전투 스타일이 자리가 잡힌 느낌이 들었다.
튜토리얼에 있는 들개의 레벨은 5~6.
이제 레벨 5짜리 들개는 열 번 싸워 열 번을 이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도전해 결국 레벨 6짜리 들개까지 쓰러뜨렸다.
‘발도술의 영향이 크지만 어쨌든 레벨 1에 레벨 6짜리 들개를 사냥할 정도면 이제 전투 스타일은 완전히 숙달됐다고 봐도 좋아. 이제야 튜토리얼을 끝낼 때가 된 건가?’
원래 처음부터 카인의 목표는 레벨 6의 들개였다.
레벨 6의 들개를 한 번이라도 쓰러뜨리고 튜토리얼을 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역시 레벨 6의 들개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카인을 불안하게 만든 건 들개의 벽이 아니라 튜토리얼을 거쳐 간 수십 명의 유저들이었다. 그들이 퀘스트를 해결하고 제국으로 넘어갈 때마다 괜히 차이가 벌어지는 기분이 들어 조급해졌다.
레벨 5의 들개를 잡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카인은 참았다.
어차피 전투 스타일을 완벽하게 숙달시키면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다. 동 렙 몬스터도 다른 유저보다 빨리 사냥할 수 있다.
그러니 며칠 늦게 시작하는 페널티 정도는 금세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자위하며 조급함을 억눌러 왔다.
그런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확연하게 벌어지리라. 그리고 레벨 6의 들개를 쓰러뜨린 지금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역시 참길 잘했어. 레벨 6 들개를 상대하면서 새로운 것도 배웠고 자신감도 붙었다.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는 걸 배운 셈이야. 하지만 튜토리얼에서 가장 강한 레벨 6의 들개까지 잡았으니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어. 이제 훈련은 끝났다. 드디어 본 게임이다!’
마음을 굳힌 카인은 곧바로 부락으로 돌아왔다.
카인은 아직 열병에 걸린 들개는 1마리도 잡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가방에는 들개의 뇌, 심장, 간, 소장, 내장이 모두 들어 있었다. 열병 걸린 들개 따위는 어차피 수련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죽을 때마다 부락에서 튜토리얼을 빠져나가는 유저에게 말을 걸어 퀘스트를 완료하고 남은 연구 재료를 받아 놓은 것이다.
카인이 부락에 들어서자 쿠란이 얼른 달려왔다.
“아, 카인 님!”
“연구 재료를 모두 모아 왔습니다.”
카인은 빙긋 웃으며 들개의 내장들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쿠란의 반응이 어째 기대했던 것보다 미지근했다.
그동안 입이 닳도록 그냥 가라고 외쳤던 쿠란이다. 전투 스타일을 익힌 뒤로는 거의 죽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주일 만에 연구 재료를 구해 온 것이다. 때문에 카인은 당연히 쿠란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카인의 등을 떠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란은 연구 재료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카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분명 종류별로 5개 맞는데요?”
“아니, 그게, 음······.”
쿠란은 몇 번 머뭇대다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실은 며칠 전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믿지 못할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근처에서 계속 들개에게 죽던 사람이 결국 들개를 쓰러뜨렸다고 말입니다. 혹시 그게 카인 님이십니까?”
부락 앞에서 봤던 유저가 떠들어 댄 모양이다.
카인은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지만 상대는 NPC. 카인의 수련 방법을 따라 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괄시했던 NPC에게 잘난 척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접니다.”
“저, 정말 건강한 들개를 쓰러뜨렸다는 말입니까?”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습니다.”
카인의 대답에 역시나 쿠란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하긴 튜토리얼 역사에 처음―아마도―있는 사건이니 놀랄 만도 하리라. 쿠란은 멍청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와락 카인의 손을 잡았다.
“카인 님! 제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네? 부탁이라니요? 들개의 내장을 또 구해 오란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부탁입니다.”
쿠란은 천막 안에서 신음을 흘리는 병자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실은 열병에 효과적인 약초가 있습니다. 이 숲에서만 자생하는 누드란이라는 약초죠. 제가 오래전에 이 숲에 왔을 때 숲 깊은 곳에 있는 동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그곳을 찾아가 봤는데 동굴 주변에 들개들이 진을 치고 있어 감히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죠. 나중에 경험이 많은 이방인이 오면 도움을 요청해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경험 많은 이방인이라면 레벨이 높은 유저.
그런 유저가 튜토리얼에 들어올 리도, 들어올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설마 이제 막 도착하신 이방인이 들개를 처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동굴에서 누드란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당장 치료제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확실하게 병세를 호전시킬 약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오랫동안 고통 받아 온 병자들을 위해서 힘을 빌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쿵쿵, 소리와 함께 퀘스트 정보창이 떠올랐다.
-퀘스트가 갱신됐습니다.
의술사 쿠란의 부탁=동굴 속의 약초 채취
화전민 부락에서 병자를 돌보는 의술사 쿠란은 당신에게 열병에 효과가 좋은 누드란이라는 약초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누드란은 숲의 안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동굴 안에서만 자생합니다. 그리고 동굴과 주변에는 많은 들개들이 서성이고 있다고 합니다. 들개를 쓰러뜨릴 수 없다면 동굴 근처에는 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난이도 : G》
‘연계 퀘스트?’
카인은 미간을 좁히며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두 번째 캐릭터를 만들기 전에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정보를 긁어모았다. 그러나 튜토리얼의 《의술사 쿠란의 부탁》에 연계 퀘스트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들개가 많다니 여기서 들개를 쓰러뜨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연계 퀘스트인가? 그리고 나처럼 여기서 수백 번이나 죽으면서까지 들개를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혹시 내가 처음 발견한 퀘스트인가?’
처음 발견한 연계 퀘스트!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은 듯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카인은 선뜻 퀘스트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연계 퀘스트란 2개 이상의 퀘스트가 하나로 연결되는 걸 말한다. 게다가 보통 난이도가 높은 편이라 단일 퀘스트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완료하면 보상이 좋은 게 상식이었다. 다른 곳에서 연계 퀘스트를 받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여기는 튜토리얼.
경험치도 아이템도 얻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미 해야 할 일을 다 끝냈는데 굳이 남아서 보상도 없는 퀘스트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냥 포기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그리고 어쨌든 250여 번이나 치료해 준 쿠란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좀 그렇다.
‘하긴 벌써 오늘만 게임을 20시간이나 했잖아. 어차피 오늘은 제국에 데려다 놓고 로그아웃하려고 했으니 그냥 여기서 배운 걸 총정리하는 셈 치고 이것만 하고 가자. 던전이라 봐야 튜토리얼이니 넉넉잡고 1시간이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동굴의 위치는 제가 지도에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없는 사람이 누드란처럼 희귀한 약초를 채취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니 이걸로 약 성분만 추출해 주십시오. 제가 개발한 성분 추출기인데 아직 미완성이라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고 여분도 없으니 신중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누드란은 반짝이는 꽃이 열리는 약초라 구별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쿠란이 보온병처럼 생긴 추출기를 건네주었다.
의술사 쿠란의 성분 추출기(1회용)
《약초 위에 덮어 놓으면 자동으로 약 성분을 추출해 주는 기구입니다.》
동시에 지도창이 열리며 숲 한쪽에 붉은 점이 표시되었다.
“혹시라도 부상을 당하시면 몇 번이라도 치료해 드릴 테니 꼭 부탁드립니다!”
카인은 격려인지 염장인지 알 수 없는 쿠란의 말을 뒤로하고 부락을 나왔다.
ACT 3 1레벨 용자
숲에 들어서나 주변에 열병 걸린 들개와 그냥 들개가 돌아다닌다. 그러나 어차피 경험치도 안 주는 몬스터들.
카인은 들개들을 무시하며 쿠란이 표시해 준 동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불과 5분 만에 우거진 수풀 사이에 자리 잡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주변에 들개가 많기는 하군.’
동굴 주변에는 20여 마리의 들개들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대부분은 열병에 걸린 늑대였지만 건강한 들개도 7~8마리 섞여 있었다.
‘열병에 걸린 늑대라면 한 번에 5~6마리도 넉넉하게 상대할 수 있지만 건강한 들개가 2마리 이상 덤비면 당할 수 없어. 놈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하나?’
그러나 동굴 앞에 진을 친 들개들은 좀처럼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일.
‘젠장, 몇 마리만 유인할 방법이 없을까? 가만? 혹시?’
잠시 고민하던 카인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들개를 때려잡으면서 몇 번인가 목격했던 장면!
그 장면을 떠올린 카인은 슬그머니 동굴에서 물러 나왔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들개 1마리를 때려잡은 뒤에 시체를 들어다가 동굴 근처의 수풀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우거진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은폐 엄폐 수준이 70%로 올라갔습니다.
은폐 엄폐는 이데아만의 독특한 시스템 중 하나였다.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는 도적 계열의 직업만이 ‘은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아에서는 ‘은신’과 별도로 모든 직업이 사용할 수 있는 은폐 엄폐라는 게 존재한다.
‘은폐 엄폐’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추는 은신과 달리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주의력보다 은폐 엄폐 수치가 높으면 들키지 않는 방식이었다.
사실 후각이 발달한 몬스터는 주의력이 상당히 높아서 은폐 엄폐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은 숲에 열병이 돌아 썩은 냄새가 진동해 들개들의 ‘주의력’이 내려간 상태였다.
어쨌든 카인은 수풀에 숨어 들개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잠시, 문득 들개 3마리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무리에서 떨어져 수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들개 시체를 발견하자 몰려들어 씹어 먹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카인이 들개 사냥을 하면서 본 장면이 바로 이것이었다.
들개들은 역병에 걸린 들개의 시체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건강한 들개는 카인이 쓰러뜨리면 다른 들개들이 몰려들어 먹어 치웠다.
일단 죽으면 동료도 그냥 고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달리 들개겠는가?
어쨌든 들개의 시체로 유인하는 카인의 작전은 성공했다.
‘1마리는 건강한 들개, 2마리는 열병에 걸린 들개다. 이 정도라면······!’
들개들이 오붓한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카인이 벌떡 일어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발도술!”
커컹-!
방심하고 있던 들개가 치명타를 맞고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자 예정된 수순대로 나머지 들개 2마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1마리씩 확실하게 처리해 나가야 한다!’
카인은 쓰러진 들개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직접 상대하는 들개를 방패 삼아 나머지 들개들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들개들은 앞을 막은 동료 때문에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 카인은 놈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다시 단검을 검집에 넣을 수 있게 되면 발도술을 발동시켜 반격하는 방식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열병에 걸린 들개는 순식간에 생명력이 바닥났다.
‘좋아, 다음이다!’
1마리를 쓰러뜨린 카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도망쳤다. 들개 2마리가 멍멍거리며 뒤쫓았다.
그러나 1마리는 열병에 걸린 들개.
불과 몇 미터도 쫓아오지 못하고 기진맥진하며 헐떡거렸다. 당연히 건강한 들개와 거리 차이가 생겼다.
‘지금이다!’
10여 미터를 도망치던 카인은 측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뒤에서 뛰어든 들개의 송곳니가 옆을 스치며 지나쳤다.
-들개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오호!’
뒤이어 떠오른 메시지에 카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상대해 본 덕분에 들개들의 공격 타이밍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타이밍이 정확해질수록 그 움직임에 풋워크와 스텝의 박자 감각을 맞추는 것도 쉬워졌다. 그러니 회피 확률도 상승하는 건 당연지사. 더구나 도망치며 20초가 지나 단검을 검집에 넣은 상태라 회피율도 상승된 상태!
“후후후, 이제 레벨 5짜리 들개는 우습지. 일주일간의 특훈 성과를 보여 주마!”
카인이 벌떡 일어나 들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발톱과 송곳니를 휘둘러 대는 들개!
그러나 이제 들개의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공격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는 카인은 재빨리 풋워크를 사용해 대부분의 공격을 반타나 회피로 흘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반격은 대부분 정타!
“발도술!”
거기에 간간이 뿜어져 나오는 ‘발도술’!
레벨 1이라 마나 양이 많지 않아서 검을 검집에 넣을 수 있는 20초마다 스킬을 발동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검을 뽑으며 공격하는 기법은 스킬을 발동시키지 않아도 제법 치명타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발도술’을 사용할 때 치명타가 터지면 효과가 중첩되는 것이다.
중간 중간 ‘발도술’을 펼치자 들개의 생명력이 쭉쭉 빨려 나갔다. 그렇게 들개의 생명력을 40% 정도 깎았을 무렵, 그제야 열병에 걸린 들개가 다가왔다.
그러나 카인은 다시 숲으로 도망쳐 2마리의 거리를 벌려 놓고 들개를 두들겨 댔다. 그렇게 히트 앤 런(hit and run) 작전을 세 번 정도 구사한 뒤에야 들개를 처리할 수 있었다.
“아직 생명력이 30이나 남았군.”
꽤 남은 생명력을 보니 새삼 강해졌다는 실감이 들었다.
헥헥헥, 헥헥헥.
열병에 걸린 들개는 그제야 헥헥거리며 근처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뒤늦게 죽어 있는 동료를 발견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 했다.
얌전히 놔줄 카인이 아니다. 카인은 열 추적 미사일처럼 따라붙으며 수차례 단검을 휘둘렀고,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가던 들개는 엉덩이가 팅팅 부어올라 죽어 버렸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카인은 건강한 늑대 시체를 질질 끌고 다시 동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시체를 놔두고 들개를 유인해 처리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때때로 건강한 들개 2~3마리가 뭉쳐 몰려올 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다시 멀리서 다른 들개를 잡아 유인 작전을 펼쳐야 했다.
“휴, 이러다가는 들개보다 먼저 졸려서 죽겠네.”
카인은 충혈된 눈을 비비며 한숨을 불어 냈다.
유인 작전 덕에 결국 동굴 앞의 들개를 모조리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다른 곳에서 개고기(?)를 구해 와야 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30분이나 더 걸렸다.
게임에 접속한 지 21시간 30분이 지난 것이다.
덕분에 카인은 잠시 정신을 놨다가 치명타를 얻어맞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동굴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카인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동굴은 길지 않았다. 축축한 습기가 감도는 동굴을 몇 미터 걸어 들어가자 곧 넓은 방 같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동굴 한쪽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이었다.
마치 방울처럼 생긴 꽃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빛을 뿜어내는 꽃, 누드란이다!’
카인은 얼른 추출기를 꺼내 누드란 위에 덮어씌우듯 올려놓았다.
-성분 추출기로 누드란의 약 성분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진행율 10%)
추출기가 빛을 빨아들이자 누드란은 빠른 속도로 시들시들해졌다. 누드란의 성분을 추출기가 흡수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렇게 잠시, 추출이 거의 완료되어 갈 때였다.
투툭, 투투투툭.
문득 귓가에 동굴 한쪽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시퍼런 불빛이 떠올랐다.
뒤이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비릿한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시퍼런 안광이 성큼 다가오자 누드란 꽃의 불빛에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뭐, 뭐야, 이놈은?”
카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타원형의 몸체, 두껍고 기다란 뒷다리, 좌우로 쫙 찢어진 입!
“······개구리?”
그렇다. 개구리!
어둠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놈은 바로 개구리였다.
그것도 들개의 3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한 개구리. 놈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앞에 붉은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스 몬스터 : 검은 숲 최강의 포식자 ‘왈라키’가 나타났습니다!
쿠에에에엑!
순간 왈라키의 입이 쩍 벌어지며 뭔가가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왔다. 혓바닥이었다.
카인의 정신은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지만, 다행히 몸은 검은 숲에서 250여 번을 싸우며 익힌 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저절로 몸이 회전하며 뒤로 물러났다.
왈라키의 입에서 뿜어진 기다란 혓바닥이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누드란의 성분을 빨아들인 추출기가 혓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왈라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먹는 듯한 장면이었다.
‘맙소사!’
그 장면에 카인은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돌도 씹어 삼켜 버리는 개구리.
혓바닥에 감겨 버리면 카인도 파리처럼 삼켜져 버리리라!
그때 또다시 왈라키의 입에서 혓바닥이 쏘아져 날아왔다.
카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혓바닥이 허공을 휘젓다가 다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카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하, 그렇군. 놈의 혓바닥에도 사정거리가 있어. 방금 전의 공격을 보면 놈의 사정거리는 대략 2미터 전후. 일단 2미터 이상의 거리만 유지하면 혓바닥은 닿지 않는다!’
카인의 판단은 정확했다.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려 놓자 왈라키의 혓바닥은 번번이 허공을 휘젓거나 바닥을 후려칠 뿐, 카인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2미터 이상의 거리만 유지하면 일단 개구리밥이 될 걱정은 없다. 그러나 그게 왈라키를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거리를 유지하면 공격은 받지 않지만 동시에 나도 공격할 수 없어.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가가면 놈에게 공격을 해 보기도 전에 혓바닥에 잡아 먹혀 버리게 된다.’
카인은 거리를 유지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때 다시 왈라키의 혓바닥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혓바닥은 허공을 휘젓다가 돌아갔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카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지금이다!’
카인은 왈라키가 혓바닥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튕기듯 몸을 날렸다. 왈라키의 공격을 몇 차례 관찰하며 생각해 낸 방법이 이것이었다.
왈라키는 한 번 혓바닥을 날렸다가 회수하면 다시 날리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불과 1~2초 사이의 시간이지만,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뛰어 들어가면 다시 혓바닥을 날리기 전까지 한 방 먹이고 2미터 밖으로 물러날 수 있으리라.
카인은 곧바로 왈라키의 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호회를 다니던 시절에 배웠던, 바닥을 쓸듯이 미끄러지는 비보이 기술! 물론 카인의 움직임은 비보이라기보다는 슬라이딩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 기술을 응용한 동작이었다.
“받아랏, 개구리 자식!”
어쨌든 카인은 왈라키의 몸 아래로 들어가며 발도술을 발동시켰다. 아니, 발동시키려는 찰나였다. 동굴 속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건······ 발톱?’
왈라키의 앞발에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발톱을 보자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발달한 위기 감지 능력이 쉴 새 없이 경고음을 울려 댔다.
순간 카인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돌부리를 발로 지탱해 슬라이딩(?)을 멈췄다. 거의 동시에 왈라키가 카인이 미끄러져 들어가려던 자리를 발로 내리찍었다.
예정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면 일격에 박살이 났으리라!
그러나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혓바닥!’
카인은 그대로 몸을 굴려서 혓바닥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와락 고개를 돌렸을 때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왈라키가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확 밀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카인이 반사적으로 반대쪽을 향해 몸을 날리자 뭔가가 옆구리를 스치며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쿵, 쿠에에에엑!
육중한 울림과 함께 바닥에 내려선 왈라키가 볼을 부풀리며 괴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왈라키는 수미터를 점프하여 달려들며 발톱을 휘두른 것이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물러난 카인의 입에서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혓바닥 공격도 모자라 발톱에 점프까지 하다니?
개구리 주제에 원거리에 근거리 공격력까지 갖추고 있단 말이 아닌가? 게다가 공격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력을 다해 회피 동작을 펼친 덕에 반타만 맞았다. 그럼에도 일격에 생명력이 30%나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반타임에도 건강한 늑대에게 치명타를 맞았을 때와 같은 수준의 데미지였다.
‘못 이겨! 레벨 1에 스킬도 없이 이런 괴물을 무슨 수로 이겨?’
누드란의 성분을 흡수한 추출기는 왈라키가 삼켜 버렸다.
이제 퀘스트를 깨려면 왈라키를 쓰러뜨리고 추출기를 회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왈라키의 레벨은 무려 15!
뭐, 유저들이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제국이라면 그 정도 몬스터는 심심풀이로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곳은 레벨을 올릴 수 없는 튜토리얼. 결국 카인은 레벨 1로 레벨 15의 몬스터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가능할 리가 없는 퀘스트!
이제 카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도망가거나, 아니면 무모하게 싸우다 죽는 것뿐이었다.
‘퀘스트를 못 깬다면 굳이 죽을 이유가 없지.’
결국 카인은 도망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조차 쉽지는 않겠지만 혓바닥과 점프를 조심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동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정말 못 깨는 퀘스트일까?’
문득 카인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는 튜토리얼. 이곳에 있는 유저들은 아무리 사냥을 많이 해도 레벨 1을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유저들은 검은 숲에 돌아다니는 건강한 들개는 처음부터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작사에서 전투할 때 애드를 시키지 않는 방법이나, 강한 적을 피하는 방법을 연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몬스터라고 단정 지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진짜 의도는 하기에 따라서 레벨 1에도 레벨 5~6의 늑대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늑대를 잡은 유저를 위해 연계 퀘스트를 만들어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만약 이 연계 퀘스트가 제작사의 의도대로 튜토리얼에서 들개를 잡은 유저에게 마지막 테스트의 의미라면?
‘이기지 못하도록 설정해 뒀을 리가 없어. 그리고 내 예상과 달리 정말 이 개구리까지 해치우고 퀘스트를 완료하면 의외로 좋은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완료할 수 없는 퀘스트를 일부러 만들어 뒀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레벨 1에 이길 수 없는 레벨 15의 몬스터를 이길 방법이 있다. 그리고 이번 퀘스트는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게 바로 핵심!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카인은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키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반타만으로 들개의 치명타와 같은 데미지를 입히고, 혓바닥으로 바위까지 단숨에 삼켜 버리는 놈을 상대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카인이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혓바닥을 피해 물러나며 입술을 씹어 댔다.
“젠장, 놈에게 추출기만 뺏기지 않았어도······.”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혓바닥? 그렇다면 혹시? 맞아, 그 방법이라면!’
동시에 카인은 와락 몸을 돌려 동굴 입구로 뛰어갔다.
도망간다고 판단했는지 왈라키가 괴성을 질러 대며 펄쩍펄쩍 뛰어 쫓아왔다. 그사이에 동굴 입구까지 도망간 카인이 와락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망할 개구리 자식! 어디, 잡아먹어 봐라!”
쿠에에에엑!
카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왈라키의 입에서 혓바닥이 쏘아져 날아왔다. 순간 카인은 재빨리 상체를 낮춰 뒤에서 뭔가를 들어 올려 혓바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왈라키는 부지불식간에 그 물체를 휘감아 당겨 꿀꺽 삼켜 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그게 뭐였는지를 깨달았는지 당혹스러운 빛을 띠며 뱉어 내려는 듯 컥컥거렸다.
“흥, 개구리 주제에 음식 투정이냐? 그냥 처먹어! 발도술!”
카인이 단숨에 왈라키에게 달려들어 부풀어 오른 목에 발도술을 펼쳤다. 그러자 놈의 목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식도에 걸려 있던 물체가 배 속으로 쑥 밀려 들어갔다.
카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왈라키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왈라키의 모든 능력치가 50% 하락했습니다.》
“성공이다!”
메시지를 확인한 카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다. 이게 카인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카인이 왈라키에게 강제로 처먹인 것은 바로 동굴 입구에서 죽인 열병 걸린 들개의 시체! 일전에도 말했지만 들개들도 열병 걸린 늑대의 시체는 먹지 않는다. 열병에 걸린 들개의 시체를 먹으면 열병에 걸리기 때문.
거기까지 생각한 카인은 닥치는 대로 혓바닥을 휘둘러 대는 왈라키의 습성을 이용해 열병에 걸린 들개의 시체를 먹인 것이다. 결과는 보는 대로. 왈라키는 순식간에 눈가가 퀭해지고 혓바닥은 탄력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다.
움직임도 비틀비틀.
하긴 갑자기 모든 능력치가 50%나 하락했으니 당연하다.
“자! 이제 입장이 좀 바뀐 것 같지 않냐, 개구리? 어디 붙어 보자고.”
쿠에에······ 쿠에에······.
카인이 달려들자 왈라키가 발톱을 휘둘렀다.
열병에 걸려 모든 능력치가 50%로 하락했음에도 역시 레벨 15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벨 15의 50%라면 레벨 7가량. 여전히 검은 숲 최강 몬스터였다.
‘하지만 움직임이나 공격력은 확실하게 저하됐다. 게다가 혓바닥을 날리지도 못하고, 점프를 하지도 못해. 좀 전에 받았던 데미지도 어느 정도 회복됐으니 정신을 집중해 발톱 공격만 반타 이하로 피하며 정타나 치명타로 반격하면 가망이 있다!’
쾅, 쾅, 쾅, 쾅!
뒤이어 인간과 개구리의 처절한 사투가 펼쳐졌다.
왈라키와 붙은 이후로 카인은 모든 생각을 멈춰 버렸다.
오직 감각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왈라키의 다음 공격과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어떤 방향으로 이동해야 왈라키가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가. 그런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감각으로 판단하며 미친 듯이 풋워크와 스텝을 밟아 나갔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여 버리는 기이한 감각!
처음에는 왈라키의 공격을 피하면 반타가 60%, 회피가 10% 정도 떴다. 그러나 점점 전투에 익숙해지며 회피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카인은 왈라키의 생명력을 4%까지 빼놓을 수 있었다.
‘이제 치명타를 먹이면 한 방에도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내 생명력도 3%밖에 되지 않아. 자칫 놈에게 한 방 먹어 버리면 내가 먼저 당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왈라키의 생명력을 내려놓은 카인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는 왈라키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점점 카인과 왈라키의 남은 생명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카인의 재능인 ‘집념II’ 덕에 생명력이 회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분간 10초에 0.75%. 모두 회복되어도 4.5%.
빈사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1분만 버티면 4.5%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뜻! 사실 처음 ‘집념’을 봤을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전 캐릭터를 키울 때는 포션을 물처럼 마셔 댔으니 고작 4.5%의 생명력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그러나 막상 들개와 싸우며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겨 보니 그게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분 뒤!
‘됐다. 이제 내 생명력은 7% 남짓! 정타만 피하면 한 방은 버틸 수 있다!’
“받아라!”
카인이 화살처럼 왈라키에게 달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왈라키가 발톱을 휘둘렀다. 전력으로 회피 동작을 펼치면 높은 확률로 회피할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동작을 취하며 짧은 단검으로 ‘발도술’을 사용해서는 놈에게 치명타를 먹이기 힘들다.
들개를 상대하며 카인이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기회가 있을 때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놔야 한다는 것!
카인은 상체만을 흔들어 왈라키의 공격을 흘렸다.
‘발도술’의 대기 상태라 반타가 터졌음에도 생명력이 4%가 빨려 나갔다.
“발도술!”
순간 카인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며 발도술을 펼쳤다. 검집에서 뿜어진 칼날이 왈라키의 목을 꿰뚫자 붉은빛이 터지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왈라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주었습니다!
쿠에에에에엑!
왈라키가 벌러덩 넘어졌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듯 뒷다리를 떨어 대다가 축 늘어졌다.
“해, 해냈다! 레벨 15의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순간 카인은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거의 동시에 경쾌한 리듬과 함께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집념II】의 재능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육참골단(일반, 액티브, 하급) : 문자 그대로 살을 내주고 뼈를 끊어 내는 필살의 기술입니다. 이런 섬뜩한 전투 기법은 오직 강한 집념을 가진 전사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받는 데미지의 50%를 감소시키고 주는 데미지를 50% 상승시킵니다.
《데미지 감소 50%, 추가 데미지 50% 상승》
*마나 소모 : 30
받는 데미지 50%를 감소하고 주는 데미지가 50% 상승!
결과적으로 100%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오오, 튜토리얼에서 공격 스킬이 2개나 생겼다!’
카인은 이제야 ‘집념’ 재능의 속성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집념’은 재능 설명창에 쓰였던 것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재능. 다시 말해 처절한 전투를 많이 겪을수록 스킬이 생성될 확률이 높아지고, 전투에서 역전의 발판을 만들 만한 방법을 찾아냈을 때, 그 유저의 깨달음을 스킬의 형태로 생성시켜 주는 재능이었다.
물론 그 역시 재능의 활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데아에서 재능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했다.
카인이 초반부터 전투에 매진했기에 ‘집념’ 재능이 전투 스킬을 생성해 냈지만, 만약 대장장이나 연금술사처럼 제작에 매진했다면 ‘집념’으로 ‘제작품 성공 확률 증가’ 같은 스킬이 생성됐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어진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 어떤 스킬을 만들어 내느냐는 유저의 몫인 것이다.
어쨌든 검은 숲 최강이 포식자인 왈라키를 쓰러뜨렸다!
이제 남은 건 추출기를 가지고 돌아가는 일뿐이다.
“어라? 이건?”
시체를 뒤지던 카인의 눈이 커졌다.
왈라키의 배 속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준비된 자의 장검(이벤트)
무기 타입 : 한 손 검
공격력 : 10~12 내구력 : 40/40
무게 : 10 사용 제한 : 레벨 1, 왈라키를 쓰러뜨린 유저에게 귀속
이데아의 튜토리얼에서 검은 숲 최강의 포식자 왈라키를 쓰러뜨린 자에게 주어지는 검.
《강화로 3단계까지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아, 아이템?”
카인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검을 바라보았다.
어떤 정보에서도 튜토리얼에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어느 누가 튜토리얼에서 수백 번이나 죽으며 경험치도 안 주는 들개를 잡겠는가? 그리고 설사 카인 같은 퀘스트를 했다 해도 정보가 생명인 이데아에서 굳이 남에게 이런 정보를 공개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다른 유저들은 튜토리얼을 완료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제국으로 갈 수 있는 퀘스트만 하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튜토리얼의 진짜 목적은 시스템의 설명이 아닌 본 게임을 하기 전에 유저들의 능력을 올리기 위한 훈련소.
그 훈련소의 모든 과정을 졸업하려면 혼자 왈라키를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된 자의 장검’은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표!
‘그렇구나. 그래서 이데아의 전투가 그렇게 난이도가 높게 설정되어 있었단 거야!’
‘준비된 자의 장검’은 보통 레벨 15 이상의 장검과 공격력이 거의 같았다.
레벨 15에나 사용할 수 있는 장검을 레벨 1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3단계까지 업그레이드를 시킬 수 있다면 레벨 50~60까지도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완전 대박이다! 수십 골드는 절약할 수 있겠어!’
그러나 그게 보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해내셨군요!”
추출기를 가져가자 쿠란이 존경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제가 부탁하기는 했지만 이제 막 이국에서 오신 카인 님이 정말 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많은 들개들을 뚫고 누드란을 추출해 오시다니! 덕분에 이제 이 부락의 병자들도 열병을 치료할 희망이 생겼습니다. 카인 님은 이 부락을 위해 하늘이 내린 용자가 틀림없습니다!”
쿠란이 침을 튀겨 가며 소리쳤을 때였다.
-《동굴 속의 약초 채취》 퀘스트가 완료됐습니다.
의술사 쿠란이 당신의 업적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새로운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칭호 : 레벨 1의 용자
당신은 비록 초보자지만 검은 숲에서는 더 이상 당할 자가 없는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리고 검은 숲 최강의 포식자 왈라키를 처치하고 누드란 성분을 추출해 열병에 신음하는 화전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