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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화)

2017.09.01 조회 2,431 추천 19


 디멘션 워커 1권 (1화)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크륵······.”
 피가 끓는 가래 소리와 함께 가시 불곰의 커다란 몸이 산사태가 발생하듯 허물어졌다.
 쌍두 늑대의 몸은 무쇠도 녹여버리는 강산액을 뿜으며, 자로 잰 것 마냥 정밀하게 반쪽으로 찢어졌다.
 강철 같은 뿔을 앞세워 달려드는 거대한 순록의 목이 잘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바탕 피의 활극은 그 종말을 고했다.
 “후우······.”
 설원의 한복판, 피의 향연을 연출한 주인공. 검은 머리의 남자가 뿜은 입김이 허옇게 피어올라 한 송이 꽃을 피웠다.
 남자는 나이프를 품 안에 집어넣고는 널브러진 시체의 중심으로 다가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기원’의 주문을 읊었다.
 우우웅.
 남자를 중심으로 묘한 울림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남자가 밟고 있던 땅이 이전과는 다른 곳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보이되 보이지 않으며, 들리되 들리지 않는 모호한 차원의 경계.
 잠시 후, 남자는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이미 생명의 불꽃이 꺼졌을 터인 마물들의 시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화의 시간이다.
 “나의 뜻이 이곳에 머물지니······.”
 남자의 나지막한 기도와 동시에 마물들의 시체에서 배어 나오던 푸른빛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롱하고 눈부신 빛 무리로 변해갔다.
 “그대의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영혼들이 돌아가야 할 곳. 그곳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차원 문이 열렸다.
 “그대, 부디 편히 쉴지어다.”
 길을 잃은 가련한 영혼들은 차원 문을 통해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을 마쳤다.
 “후우······.”
 진혼가를 끝마친 검은 머리의 남자, 류 한은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마물의 시체를 분해할 준비를 시작했다.
 영혼을 돌려보낸 시체는 껍데기일 뿐. 껍데기를 자신이 취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터다. 한은 몬스터의 시체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순록의 거대한 뿔을 베어내는 한의 손놀림은 마치 기계처럼 정밀하고도 정확했다. 순식간에 순록의 뿔을 잘라낸 한은 이번엔 반으로 갈린 쌍두 늑대의 상반신에 나이프를 꽂았다.
 쌍두 늑대의 심장은 죽은 직후 부패가 시작된다. 최대한 빨리 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스럭.
 설원의 반대편에서 눈에 덮인 나뭇가지가 한차례 흔들렸다. 한은 그쪽 방향을 주시했다. 이 근방의 몬스터는 싹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놈들이 있었나?
 “이야, 이거 아주 장관이구만!”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손님은 몬스터가 아니라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감싼 중년 남자였다.
 털모자로 감싼 귀 양옆으로 삐져나온 갈색의 억센 머리카락,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짙은 수염, 그리고 털옷 너머로도 짐작이 가는 탄탄한 몸매. 키는 크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남자였다.
 중년 남자는 얼굴에 살가운 미소를 띤 채 한에게 다가왔다.
 “허허, 가시 불곰에, 쌍두 늑대에, 강철 발굽 순록까지······. 형씨, 아주 대박을 치셨소. 젊어 보이는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중년 남자는 과장된 손동작으로 한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얼굴을 가득 덮은 억센 수염과 우렁우렁한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살가운 성격의 남자인 듯했다.
 “형씨, 이 근방에서는 영 못 보던 얼굴인데? 나는 ‘푸른 수염’ 소속의 아놀드요. 형씨는 어디 소속이신가?”
 ‘푸른 수염’이라 하면 설악산 대청봉 일대를 양분하고 있는 길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은 남방한계선 너머 대청봉 한복판.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의 말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
 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아놀드라 밝힌 중년 남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한의 묵묵부답을 본인에 대한 경계라고 파악했는지, 아놀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여기, 이걸 보면 믿을 수 있겠지.”
 아놀드는 품속에서 자격증과 길드 배지를 꺼내 보였다. 한은 남자의 자격증과 배지를 면밀히 살폈다. 수호위원회에서 발급한 헌터 자격증이 확실했다. 등록 코드명은 아놀드, 등록된 랭크는 B.
 그제야 한은 나지막하고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프리랜서, 류 한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나저나 소속도 없는 양반이 솜씨가 무시무시하구먼. 허 참, 이게 다 얼마야.”
 아놀드는 한이 도륙한 마물들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연이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필요하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으,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아놀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한을 바라봤다.
 “제가 필요한 건 다 챙겼습니다. 거기 있는 것들은 저는 쓸 일이 없는 물건들이니 원한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 그럼 이 가죽이랑 발톱을 죄다 두고 간다고?”
 “네, 저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요. 그럼 이만.”
 한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눈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저기, 형씨! 잠깐만 기다려 봐. 어이, 형씨!”
 아놀드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한의 어깨를 붙들었다.
 “형씨, 보아하니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랭크가 어찌 되시우?”
 “······.”
 하지만 한은 아놀드를 조용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놀드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봐서 알겠지만, 난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랭크가 겨우 B밖에 안 된다우. 그런데 보아하니 형씨는 나이도 젊은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수다. 그래서 말인데, 내 좋은 생각이 있는데 내 제안 한 번 들어보지 않으실라우?”
 “제안이요?”
 “응, 들어보면 형씨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거요. 여기 대청봉 꼭대기 근처에 설귀가 한 마리 있거든. 놈을 잡으려고 오긴 왔는데, 도저히 멀쩡히 잡을 엄두가 안 난단 말이지.”
 “설귀요?”
 한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설귀라면 자색 구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고위급 몬스터였다. 눈처럼 하얀 가죽 역시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그렇다네. 난 잘 모르지만 상급 랭크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설귀의 심장이 아주 요긴하게 거래된다면서?”
 아놀드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형씨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형씨가 설귀를 잡는 게 어떻겠냐, 이 말일세. 물론 설귀의 심장은 형씨 몫이고. 나한테는 그냥 그 가죽이나 넘겨줬으면 하는데 말야. 어찌 생각하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몬스터들의 심장이면 전부가 귀하지만, 설귀의 심장이라면 특히 더 귀했다.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다른 찌꺼기 부산물은 충분히 양도해 줄 수 있었다. 자신은 심장만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한이 대답을 망설이자, 아놀드가 재촉하듯 말했다.
 “내가 비록 랭크는 높지 않지만, 이 대청봉 근처에서만 20년 넘게 구른 놈이라우. 직접 잡긴 힘들어도 딱 보면 알아. 이놈이 대박인지 아닌지. 장담하는데 이 설귀 놈은 대박 중에 대박일 걸세. 어떤가? 좀 구미가 당기지 않으신가?”
 한은 보통 혼자 사냥하는 것을 선호한다. 동행인이 있으면 정화의 의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함께 움직여도 좋을 법했다.
 “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군요.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좋아. 고맙수다. 그럼 난 저기 저놈들 가죽 좀 벗기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슈. 금방 끝나.”
 아놀드가 마물의 시체 쪽으로 가버리자 홀로 남은 한은 옷깃을 여미었다. 남방한계선을 돌파해 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바람은 유달리 싸늘했다.
 
 “어이구, 이놈의 눈보라. 잠깐 멈추나 했더니 또 옘병이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아놀드는 고개를 돌려 한을 바라봤다.
 “어이, 형씨. 그런데 어디서 오시는 길이우? 여기 설악산 근처에서는 통 못 보던 얼굴인데.”
 “작년까지는 킬리만자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지난달까지는 제주도 일출봉 근방에서 강철 톱니를 잡고 있었죠.”
 “이야, 킬리만자로에 일출봉이라니. 아주 빡센 구역만 골라 다니셨구만. 그나저나 강철 톱니라니, 이것 좀 만지셨겠어?”
 아놀드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원을 만들며 히죽였다.
 “제법 짭짤하기는 했죠. 그런데 사냥 중에 함께 다니던 친구가 강철 톱니의 주둥이에 물려서 한쪽 팔을 잃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니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싫더군요.”
 “씁쓸한 얘기로구만. 그놈들 이빨이 그렇게 지독하다면서?”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하긴, 원체 이 바닥이 목숨 내놓고 하는 장사기는 하다만, 그래도 적당히 사릴 줄도 알아야지. 그런데 강철 톱니를 피해서 온 친구를 설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다니, 내가 실례를 저지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수다.”
 “괜찮습니다. 얼음 계열 마물들 상대로는 제법 자신 있거든요. 지난번에는 자이언트 웜도 잡아본 적 있습니다.”
 “어이쿠, 자이언트 웜을 잡으셨어?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양반이었구만. 어마어마한 양반이야. 자네랑 동행하게 되니 내 속까지 든든해지는 기분일세.”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더 거세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흩날리는 눈발 너머로 대청봉 꼭대기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휘유, 이제야 다 왔네. 형씨, 저기 저 동굴 보이시나?”
 아놀드는 손가락을 들어 꼭대기 근방의 바위 동굴을 가리켰다.
 “저기 저 안에 그 설귀가 살고 있거든. 지금부터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설귀를 유인할 테니까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거든 젊은 친구가 확 잡아버리라고. 알겠지?”
 아놀드는 메고 온 가방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전투 장비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하는 거 잘 알지? 형씨가 타이밍 잘 맞춰서 들어와야 돼. 알겠지? 자네가 늦으면 나는 이렇게 된다고.”
 자신의 목 근처를 긋는 시늉을 하며 아놀드는 히죽 웃었다. 목숨을 건 유인 작전을 앞두고 웃음을 짓는 베테랑 헌터의 여유는 주변 사람마저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닐까요?”
 아놀드가 무장을 갖추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늦기는. 오늘 아침에도 내가 설귀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저 안에 분명히 설귀가 있다니까. 나만 팍 믿고 늦지 않게 들어오기나 하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아놀드는 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동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아놀드의 등 뒤로 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라 네가 삼 개월 늦었다는 거야. 머저리 새끼야.”
 “응······?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갑자기 돌변한 한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아놀드가 한을 돌아보았다. 정중하던 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
 “되먹지 못한 놈 밑에서 있다 보니까 귓구멍도 다 막혔나 보지?”
 얼얼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놀드를 향해 한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지금부터 삼 개월 전에 수호위원회에서 모든 헌터를 대상으로 지령이 내려왔지.”
 한은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휘어진 날은 매섭게 번뜩였다.
 “성산 일출봉 근처에 서식하던 강철 톱니가 박멸된 게 확인됐으니 경보를 해제한다고 말야. 수호위원회 공식 지령도 체크하지 못하는 놈이 B랭크 헌터라고?”
 “아니, 이봐, 형씨.”
 “헌터 입문서 2장 3절. 사막 몬스터 항목 제1항. 자이언트 웜. 사막 지역에 서식하는 길이 15m, 무게 3톤의 대형급 몬스터. 불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약점은 물과 얼음.”
 “······.”
 “강철 톱니라고 하면 보통 강철로 된 어금니를 가진 괴물을 생각하지. 하지만 말야. 강철 톱니는 이빨이 없어.”
 강철 톱니는 군집 생활을 하는 몬스터. 무리 지어서 인간을 습격하는 그 모습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이 정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자이언트 웜도, 강철 톱니도 헌터 입문 과정을 정식으로 수료한 자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기초 몬스터였다.
 뿌드득.
 아놀드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기본적인 헌터 네트워킹 정보도 확인 안 하고, 자이언트 웜이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가 설귀를 잡겠다고?”
 잔잔하던 한의 검은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에드문드는 저열하기는 해도 멍청이는 아니었지. 그런데 부하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해 빠진 놈들뿐인 걸 보니 에드문드도 죽을 때가 됐나.”
 “···닥쳐라, 반역자 새끼야.”
 잠잠하던 아놀드가 돌연 고함을 내질렀다.
 “그 더러운 입으로 에드문드 장군님의 존함을 담지 마라, 반역자 새끼야!”
 사람 좋던 아놀드의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며 빛을 발했다.
 “반역자라고?”
 한은 씹어 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더 이상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한의 손에 들린 유선형의 나이프가 긴 호를 그리며 핑그르르 회전했다.
 “덤벼, 심장을 찢어발겨 주지.”
 한이 막 달려드려는 순간, 아놀드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뿜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한은 잠시 멈칫했다.
 “제법 눈치는 빠른 것 같다만··· 이건 몰랐을 거다.”
 아놀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네놈을 잡으러 간다고 하니, 요제프 경이 이걸 주더군.”
 아놀드의 손바닥 위로 붉은 구슬이 하나 떠올랐다.
 “영성의 비약.”
 아놀드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도약을 실현시켜 줄 전사들을 위한 영광의 증거.”
 아놀드의 입가가 히죽 하고 벌어지더니 구슬을 꿀꺽 삼켰다. 아놀드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놀드의 몸에서 믿기지 않으리만큼 위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아놀드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기운이 점차 광기어린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놀드가 자신의 털옷을 부욱 잡아 뜯었다. 그러자 털옷 아래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판금갑옷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판금 갑옷 좌상단에 새겨진 황금색 뱀의 휘장. 에드문드의 소속임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였다.
 “이봐, 한. 원래대로라면 네놈은 산산이 조각나 차원의 틈새에 뿌려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에드문드 장군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 출발하기 전에 그분이 나를 불러 명하셨다.”
 아놀드가 한을 향해 오른쪽 손가락을 뻗었다.
 “네놈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도약에 협조한다면 네놈과 네 애비가 지은 죄를 묻지 않고, 앞으로의 공적에 따라 후하게 대접하겠다고 말이지.”
 에드문드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아놀드의 표정은 한껏 격앙되었다.
 “자, 마지막 기회다, 류 한.”
 아놀드가 두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 자기 딴에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건지 아놀드의 표정에는 강자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한이 대답했다.
 “영성의 비약이라고 했나? 그런 거 함부로 먹으면 몸에 안 좋을 텐데?”
 기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놀드. 하지만 그런 아놀드를 바라보는 한의 표정에는 위기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 점이 아놀드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대답해라, 류 한. 죽여 버리기 전에.”
 아놀드의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놀드라는 남자가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신념을 가진 군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을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싫다면?”
 뿌득.
 아놀드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응징이라 생각한 아놀드는 눈앞에 있는 반역자를 상대로 몸을 띄웠다.
 느껴진다. 온몸에 흐르는 맹렬한 힘이······.
 반역자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아놀드는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두 손에는 대지를 찢어발길 수 있는 힘이 맺혀 있다는 것을.
 콰아아앙!
 대지를 찢어발기는 괴력이 담긴 두 주먹이 대지에 내리꽂혔다. 대청봉 전체가 몸서리쳤다.
 “크르륵······.”
 어느새 인간이 아닌 형상을 하게 된 아놀드는 흩날리는 눈발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며 한을 찾았다.
 방금 전의 일격은 빗나갔다. 하지만 다음번 주먹은 반드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야 조금 들어줄 만하네.”
 갑자기 아놀드의 등 뒤에서 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의 대충돌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나지 않은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크르르······.”
 경계 태세를 취한 아놀드가 다시 한 번 도약의 준비를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 반역자의 심장에 손톱을 박아 넣으리라. 아놀드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짖어 대는 게 어울리지.”
 “크아아아!”
 아놀드의 눈가에 다시 한 번 강렬한 살기가 맺혔다. 아놀드는 다시 한 번 대청봉을 반으로 쪼개 놓을 기세로 한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앙!
 조금 전 그 이상의 충격음이 다시 한 번 대청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놀드의 주먹은 이번에도 빗나가고 말았다. 아놀드의 주먹이 닿은 곳엔 뿌연 눈발만 흩날릴 뿐, 한은 온데간데없었다.
 “크으윽······.”
 아놀드의 입이 벌어지며 입가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그 순간, 한은 또다시 아놀드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아놀드는 한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의 오른팔이······.
 “너는 아직 요제프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구나.”
 등 뒤에서 아놀드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저승 가는 선물로 하나 가르쳐 주지. 요제프는 이런 놈이야.”
 “커억!”
 아놀드의 입에서 뜨거운 피거품이 솟아올랐다.
 한이 반대쪽 손으로 아놀드의 복부에 손을 쑤셔 넣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그 손을 그대로 뽑아내었다. 들어갈 때는 빈손이던 한의 왼손에는 새카맣고 주먹만 한 구체가 들려 있었다. 그 구체를 목격한 아놀드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사냥을 떠나는 부하의 심장에 폭탄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쑤셔 박을 수 있는 놈.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몰랐던 모양인데?”
 “크르륵··· 크악!”
 아놀드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한 층 더 진해졌다.
 “듣기 거북한 소리는 그만.”
 한은 복부에서 뽑아낸 폭탄을 아놀드의 입에 쑤셔 박았다.
 아놀드와 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푸른빛을 내며 타오르는 한의 눈동자를 보며, 아놀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한은 아놀드의 터진 복부 사이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흠뻑 찍었다. 그러고는 아놀드의 가슴팍에 어떤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문양이 뭔지 알고 있었다.
 강제 송환 마법.
 째깍째깍.
 폭탄의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폭발까지는 앞으로 30초.
 강제 송환 마법은 차원 이동이 일어났던 그 장소로 차원 이동자를 다시 돌려보내는 마법. 그 얘기인즉, 자신은 자신이 차원 이동을 했던 에드문드군 막사로 강제 송환된다는 뜻이고, 막사 한가운데서 이 폭탄이 터진다는 뜻이었다.
 “돌아가거든 에드문드에게 전해. 이 세상을 가지려면······.”
 “읍읍, 읍!”
 입에 폭탄이 쑤셔 박힌 아놀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망에 물든 아놀드의 눈동자가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부터 쓰러뜨려야 할 거라고.”
 한의 말을 끝으로 아놀드의 몸이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췄다. 마치 허공의 작은 바늘구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놀드가 있던 허공은 금세 거센 눈보라로 가득 채워졌다.
 “후우······.”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차원 이동으로 인해 뒤틀렸던 영혼도, 그 육신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영혼이 뒤틀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 또한 피해자일 뿐.
 하지만 한은 그런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생각도, 슬퍼할 마음도 없었다. 놈들에게 칼을 겨누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비는 무의미한 선택지였다.
 뒤틀린 영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들을 구원해줄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도살자라면, 그 이름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외면할 마음은 없다.더불어 뒤틀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척을 하는 위선자가 될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에드문드······.”
 한이 내뱉은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은 곧 설원의 눈발에 휩쓸려 흩어졌다.
 한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오늘밤에도 뜨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뒤틀린 영혼을 아무리 많이 베어 내봤자 별은 뜨지 않는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서글픔에 한은 옷깃을 여몄다.
 잠시 잠잠하던 눈보라가 다시 거세게 몰아쳤다. 대청봉의 밤바람은 눈물이 날 정도로 시렸다.
 
 ***
 
 “거기, 거기 잠깐.”
 대청봉을 내려오는 한을 털외투로 몸을 감싼 두 명의 남자가 멈춰 세웠다.
 “거기 젊은이, 어디서 오시는 길이요?”
 두 남자 중 상급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에게 말했다.
 “나는 제37섹터 경비대장입니다. 조금 전에 대청봉 쪽에서 들린 폭발음을 조사 중인데, 실례지만 성함과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소?”
 설산을 누비는 경비대원들을 향해 한은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추운 날씨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하긴, 그 정도로 큰 소리가 났는데 경비대원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한은 신분증 대신, 코트에서 헌터 자격증을 꺼내 경비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한의 헌터 자격증을 살폈다.
 
 코드 명 : 류 한
 등급 클래스 : SS
 
 “지금 당장 너무 가까이는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꼭대기 쪽 흐름이 굉장히 불안한 상태거든요. 섣불리 접근하지 마시고, 수호위원회에 연락하셔서 지원을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 사항 하달 받았습니다. 제37섹터 6경비초소, 인원 보고······.”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날이 추우니 몸조심하시길.”
 한의 자격증을 확인한 두 경비대원은 부동자세를 취한 채, 멀어져 가는 한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국경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End.
 
 
 사각, 사각, 사각.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펜이 종이 위를 오가는 소리뿐이었다. 약간의 소리와 진한 커피 향.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피어오르는 아릿한 담배 향기.
 격무에 지친 라무스의 심신을 달래주는 친구라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커피와 담배, 이 둘뿐이었다.
 세상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라무스였지만, 그가 가진 그 어떤 힘과 권력도 그에게 한 잔의 커피와 담배 한 개비만큼의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그가 세상의 모든 헌터를 관리하는 수호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사실은 라무스가 소박한 망중한을 만끽하는데 있어 조금의 장애도 되지 못했다.
 베어 문 담배가 절반쯤 남았을 무렵, 키보드 모양의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위원장님, 외선입니다.”
 “······음?”
 담배를 물고 있던 라무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시간에 외선이라?
 “17번 외선입니다.”
 빙긋.
 라무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했더니 류 한, 그 친구였나.
 “연결하게.”
 라무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보드 모양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검은 머리를 한 남자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랐다.
 “여어, 이게 누군가. 오랜만일세. 한 군.”
 홀로그램 건너편의 남자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믐달이 뜬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생김새의 젊은이.
 “오랜만입니다, 위원장 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직 자네에게 부고장이 가지 않은 거 보면 별일 없는 거겠지.”
 노인은 실없는 농을 던지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여전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검은 머리의 남자, 류 한은 라무스를 향해 마주 웃고는,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알고 있네.”
 “예?”
 “알고 있다고. 부탁할 일이 없는데 자네가 나한테 연락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하하······.”
 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라무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 부탁할 일이란 게 뭔가?”
 “위원장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으로부터 16시간 전에 거제도에 포탈이 열리고 흑색 탑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탑을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그럼 하시게. 언제부터 자네가 우리에게 일일이 허락 맡고 움직였다고 새삼스레 안 하던 짓을 하는가?”
 라무스는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이 가지 못하는 아우터 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한이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는 걸까.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한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며칠 전, 사냥개들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
 라무스의 눈동자가 살짝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줄곧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라무스의 표정에 처음으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사냥개라 하면··· 일전에 자네가 설명했던 이계의 습격자를 말하는 건가?”
 “예. 저를 습격한 사냥개의 주인은 에드문드. 제가 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놈이죠?”
 “아아, 기억나는군.”
 라무스의 머릿속에 한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저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놈은 에드문드입니다. ‘대도약 계획’의 가장 충실한 신도이자, 주인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물어뜯을 준비가 된 사냥개. 그게 에드문드죠.”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자신의 질문에 한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대도약 계획을 지탱하는 네 개의 큰 기둥. 그 기둥 중, 무투파를 대변하는 게 에드문드입니다. 공식 서열은 리더와 대신관의 뒤를 이어서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며, 실력으로 따지면 리더의 바로 다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열 2위의 강경 무투파라······.”
 미간을 찌푸리는 위원장을 앞에 두고 한은 말을 이어 나갔다.
 “객관적으로 봐도 완전히 미친놈입니다. 제아무리 충실한 사냥개라 해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알아야 하는데, 이놈은 그런 게 없습니다.”
 지금껏 항상 침착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한의 얼굴에 처음으로 강렬한 증오가 떠올랐다.
 “주인의 명만 있다면 자신의 살점까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물어뜯을 수 있는 미친놈이죠. 그리고······.”
 한의 눈빛에서 맹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에드문드라는 자를 벌써 수백 번은 찢어놓았을 법한 맹렬한 살기였다.
 “···저에게 있어서 언젠가는 그 심장을 씹어 삼켜야만 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노인의 회상은 한의 말에 의해 중단되었다.
 “놈들의 포위망이 점점 더 좁혀지고, 태엽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수호석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것 참, 예삿일이 아니로군.”
 다급해 보이는 어조와 달리, 라무스의 행동에는 여전히 여유가 느껴졌다.
 누가 뭐래도 라무스는 지난 백 년간 지구를 마물들의 손으로부터 지켜온 수호위원회의 위원장. 기다리고 있는 위험이 아무리 크다 해도 두려움에 떨어서는 안 되는 위치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네한테 뭘 해주면 되나?”
 “A랭크 헌터가 이끄는 원정대를 조직해서 거제도로 보내주십시오.”
 라무스의 질문에 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A랭크 헌터? 그거 가지고 되겠나?”
 라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의 짐작이 맞는다면, 거제도에 솟아오른 흑색 탑엔 수호석을 완성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가 봉인되어 있을 터.
 그렇다면 A랭크 헌터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건 눈속임이니까요.”
 “눈속임?”
 “예, 고대 유물에 저 혼자만 덩그러니 접근하는 건 놈들의 시선을 끌 수가 있으니까요. 제 예상이 맞다면 유물이 숨겨져 있는 건 지하입니다.”
 “진짜는 지하에 있다라······. 그렇다는 말은?”
 “네, 지상에서 꼭대기 층 까지를 조사할 원정대는 눈속임입니다. 어차피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지상 층은 큰 위험도 없을 겁니다. A랭크 정도면 충분하죠.”
 진짜 알맹이가 숨겨져 있는 건 탑의 지하. 그리고 그 알맹이를 찾아 취합할 수 있는 건 한뿐이었다. 그렇다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한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라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최대한 빨리 원정대를 파견하도록 하지. 그래서 자네는 어디에서 원정대와 합류할 계획인가?”
 “속초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속초··· 알겠네. 그쪽에서 도킹할 수 있도록 내 준비를 다 해놓겠네. 그런데 말이야, 한 군.”
 “예.”
 “자네 혼자서 위험하지 않겠나?”
 라무스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정리하자면 한은 지금부터 속초를 경유해 거제도로 가서 원정대를 따돌리고,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는 흑색 탑의 지하를 탐사해야 했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한의 실력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라무스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 참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위원장님.”
 한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니까요.”
 “하핫!”
 노인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이렇게 크게 웃어보는 게 얼마만인가.
 “자네는 말이야,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
 조금 전까지의 걱정은 완전히 사라진 표정으로 라무스는 한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예의 바른 친구가 이쪽 일에 관해서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해지거든.”
 라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쾌한 기분 탓인지 커피 맛이 유달리 달콤했다.
 “내 앞에서 그런 건방진 말을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이 지구를 통틀어 자네밖에 없을 걸세.”
 “과찬의 말씀입니다.”
 한은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다.
 “이보게, 한 군. 앞으로는 말야. 용건이 없더라도 자주 연락도 좀 하고 그러게나. 자네가 아니면 무료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이 늙은이를 재미있게 해줄 사람이 아무래도 없을 것 같으니 말야.”
 고개를 숙였던 한은 단호한 표정으로 노인의 말을 부정했다.
 “세계 최강의 헌터가 심심해서 돌아가실 만큼 이 세상이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허허, 이 친구야. 무슨 옛날얘기를 하고 있는 겐가.”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 최강이 아니라 세계 최강이었던 게지. 이보게, 3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시간이라네. 그 증거로 봐봐. 30년 전에는 자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지 않은가.”
 라무스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붙을 붙였다.
 하지만 한은 알고 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은 노인에게 끊임없는 진화의 시간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법칙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고, 라무스는 지구가 생긴 이래로 가장 큰 예외 중 하나였다.
 30년이 아니라 그 배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한의 짐작이 맞는다면, 노인이 수호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30년 전의 그 날 이후, 라무스는 지상 최강의 인간을 논할 때 그에 가장 근접한 인물 중에 하나였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신 분을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미안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 앞으로 연락도 자주 좀 하고 그러라니까.”
 한은 다시 한 번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노력하도록 하죠.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이 말을 끝으로 한과의 통화는 끝이 났다. 한의 홀로그램이 떠 있던 허공엔 뿌연 담배연기만이 가득했다.
 라무스는 3분의 2정도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른 후, 라무스에게 세상은 늘 지겹고 따분했다. 그런데 저 기특하고 유능한 젊은 청년을 보는 것만으로 이리도 즐거울 수 있다니.
 라무스는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하지만 지금의 자각은 서글픔이나 안타까움과는 거리가 먼, 뿌듯함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라무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처리해야 할 격무의 가장 위쪽에 ‘류 한, 거제도 원정대’를 적어 넣었다.
 ‘가만 있자, 속초로 파견할 A랭크 헌터라······. 누가 적당할까?’
 
 위원장과 통화를 끝낸 한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와 벨트를 하고, 재킷을 잠그는 걸로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한은 걸어둔 검은색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프런트를 연결해 교통편 조회 서비스를 부탁했다.
 목적지는 대한민국 지부의 속초. 포탈과 비행기, 대륙 횡단 열차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기차를 누르고 좌석을 예약했다.
 이제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 한은 가방을 들고 호텔 지하로 연결된 대륙 횡단 열차 탑승구로 향했다.
 지하층에 다다르자, 역무원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 허리를 숙여 한을 맞이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서비스를 예약하셨는지요?”
 “류 한이라는 이름으로 속초행 특급열차를 예약했습니다. 지금 탑승 가능한가요?”
 “확인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성은 단말기를 두드려 탑승인 명부를 확인하면서 연신 한을 흘끔거렸다.
 속초는 남방한계선 근방에 위치한, 인류가 활동 가능한 최남단의 도시.
 그 말인즉, 속초행 특급열차를 탑승한다는 것은 헌터이거나, 혹은 헌터 관련 기관에 종사하는 연방 정부 산하의 고위 관리일 확률이 아주 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한은 연방 정부 산하 관리로 보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헌터로 간주하기에는······.
 “······.”
 한의 복장이 너무 말쑥했다.
 세간의 말로는 헌터들을 가리켜 패션 센스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 괴짜 중의 괴짜들이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 한의 복장은 말끔한 검은색 투피스 정장.
 한쪽 눈에 안대를 하거나, 한쪽 팔에 의수를 단 헌터를 본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정장 차림의 단정한 헌터를 봤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리라.
 그래서인지, 탑승인 명부를 살피는 역무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 네. 조금 전, 그러니까 10시 18분경에 트윈 리버 호텔을 통해 예약하신 류 한님이 맞으신지요? 실례지만 저희 쪽에서 보내드린······.”
 “430―JT184입니다.”
 “네. 확인 끝났습니다. 속초행 특급열차, 10분 후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플랫폼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인증 코드를 확인한 역무원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한을 안내했고, 한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복도를 지나 플랫폼으로 입장했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홀로그램이 점멸하며 한을 반겨 주었다.
 허공에 온갖 찬란한 빛을 뿌리며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홀로그램은 각각 맵시를 뽐내며 플랫폼에 입장한 사람들을 유혹했다.
 
 ― 추억은 기억보다 향기롭습니다. 내 곁에 남은 당신의 기억은 밀크 티의 향을 닮아 있는······.
 
 푸른색 코트를 입은 깔끔한 남자 모델의 홀로그램이 광고하는 자판기. 한은 원두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대기석에 앉아서 오늘 아침 ‘진’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한, 거제도에 차원 문이 열렸어요!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다고요! 고대 문명과 관련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요.”
 고대 문명. 한에게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관용구는 적어도 그 대상을 한과 고대 문명으로 한정하면 명백하게 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기 말야, 진. 명색이 수줍은 소녀를 자처하시는 분이 ‘문화인은 노크를 합니다’라는 기본적인 에티켓도 모른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자신의 머리맡에서 열리는 차원 문을 보며 기상을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의 객실에는 분명히 ‘문’이라는 게 존재한다.
 차원 문을 열 수 있다고 해서 문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문을 닫아 놓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한의 까칠한 반응에 5월의 바다를 닮은 진의 푸른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한!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설마, 이 나를 상대로?”
 하얗고 매끈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진은 고운 미소를 지었다. 허리 근처에서 찰랑이는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유려한 움직임을 그렸다.
 “상대가 꼭 진이라서가 아니야.”
 한은 벗어놓은 셔츠에 목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성인 남성으로서의 기본적인 부끄러움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야. 이 부끄러움의 절반은 네 몫이라고.”
 진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마냥,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지금 똥 기저귀 갈아줘 가며 키워 준 사람한테 부끄러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지. 그리고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진의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한은 두통을 느꼈다.
 “지혜로운 어머니라면 다 자란 아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흥, 다 컸다는 사람치고 정말 다 큰 사람 하나도 없다더라.”
 “물론 진이 보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걸친 반팔 티셔츠와 속옷 밑으로 잘 발달된 근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몸을 일으킨 한은 꽤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치고는 상당한 장신인 진이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한의 턱 끝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한은 상당한 장신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더 커버리면 사람들이 무서워할지도 몰라.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태거든.”
 한은 뺨을 긁으며 진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유달리 날카롭고 짙은 눈매였다.
 “아무튼,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어머, 맞아!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의 말에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진이 양 손바닥을 맞부딪치고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 12시간 전에 거제도에 대규모 차원 문이 열리고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어요. 그런데 이 탑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요. 어쩌면 고대인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대의 유물이라······.”
 한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사냥개들이 준동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돌아가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는 둥, 영 찝찝한 일만 생기는 터라 짜증이 솟구치는 참이었는데, 거제도에 솟아오른 탑에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다면 모처럼만에 희소식인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그냥 느낌.”
 한의 질문에 진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은 거기에 반론을 펴거나 하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진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하나의 세계를 지켜온 존재. 지금도 실질적으로 지구의 절반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근거가 느낌뿐일지라도 그 느낌의 주체가 진이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더불어 그 느낌이 가리키는 게 고대 유물이라면, 움직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한은 머릿속으로 향후 일정표를 짰다.
 일단 라무스 위원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원정대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고, 거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남방한계선을 돌파해야 할 터. 남방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가야하는 곳은······.
 “속초로 가야겠네요.”
 한의 표정만을 보고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진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단언은 얄미우리만치 정확했다.
 “후훗, 흥.”
 마치 ‘네가 하는 생각 따위는 내가 훤히 꿰뚫고 있지’ 하는 표정으로 뻐기는 진이었다.
 한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목표는 속초.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속초, 속초행 특급열차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탑승하실 승객 분들은 3번 출입구로 이동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플랫폼에 울려 퍼진 안내 방송이 한의 회상을 중단시켰다.
 한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키패드를 두드렸다. 디바이스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입체 지도를 그려냈다.
 한이 허공에 손가락을 뻗어 입체 영상을 가리키자, 입체 지도가 확대되며 선명한 회색빛을 뿜었다.
 
 ― 거제도, 아우터 존. 지역 등급 : 회색
 
 거제도의 입체 영상과 관련 정보를 숙지한 한이 키패드를 다시 한 번 두드리자, 허공에 떠오른 입체 지도가 사라졌다.
 한은 대기석에서 몸을 일으켜 개찰구를 지나, 예약한 급행열차에 올랐다.
 자신이 예약한 객실 칸에 들어서며 한은 만족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두 개의 퀸 사이즈 침대가 풍기는 향긋한 참나무 냄새가 객실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한이 굳이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기차를 선택한 이유의 절반쯤은 바로 이 뉴 월드 익스프레스가 자랑하는 침대칸에 있었다.
 객실 문을 닫고,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 안에 몸을 싣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번잡한 세상사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들고 있던 슈트케이스를 짐칸에 올려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객실에 비치된 따뜻한 커피를 잔에 옮겨 부은 후,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걸로 대륙 횡단을 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보고 싶었던 책을 펼쳐 들고 열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열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책과 커피 한 잔이면 30분은 금방이었다.
 그런데 한이 책과 커피를 즐기며 열차의 출발을 기다린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객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잠시만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한은 보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승무원 복장의 중년 남자였다.
 푸른색 벙거지 모자. 모자의 색으로 판단건대 제법 근무 경력이 오래 된 베테랑 승무원임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일단 양해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은 지금 저희 열차에 헌터 한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15분 후에 출발 예정인 이 열차를 꼭 타셔야 한다고 하시는군요.”
 “예, 계속하세요.”
 “그런데 갑작스레 하달된 공무여서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객실이 꽉 차서 탑승이 힘드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중년의 승무원은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매우 급한 공무라 꼭 이 열차를 타야 된다고 하시는군요. 복도에서 서서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탑승만 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희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입석 승차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대륙 횡단을 주력으로 하는 열차 사업체. 최소 2박 3일, 길면 일주일도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어떻게 서서 갈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정이 이러한데 혹시 손님께서 그분과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신지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물론 손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희가 억지로 부탁드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이 객실에 합승을요?”
 한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한이 일부러 이 4인용 침대칸을 전부 예약한 이유는 최소한 속초까지 가는 길만큼이라도 편하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제도에 도착하게 되면 이것저것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의 동행이라, 한으로서는 당연히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하기에는 합승의 대상이 공무 수행 중인 헌터라는 사실이 걸렸다.
 공무를 수행 중인 헌터라 함은 어딘가 헌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뜻.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지금 탑승하시는 손님께서는 속초까지 가시는 게 아니라 중간의 경유지에서 하차하신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열 시간 정도만 같이 가시면 될 겁니다.”
 한의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승무원은 더 간절한 표정을 지었고, 한은 그 표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열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아 줄 수 있는 범위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손님. 그 헌터 분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승무원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객실을 빠져나갔다.
 똑똑똑.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한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와인 빛깔의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였다.
 눌러쓴 털모자 아래로 늘어진 윤기 나는 백금발과 하얀 살결, 코트 아래로 쭉쭉 뻗은 시원시원한 팔다리. 그리고 등 뒤로 비끄러맨 무지막지하리만큼 커다란 대검까지.
 복장부터 외모, 가지고 있는 소품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그야말로 ‘나는 헌터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의 여자였다.
 꾸벅.
 여자는 한을 향해 별다른 인사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이 보여준 호의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거만해 보이는 몸동작이었지만, 그 행동이 마냥 거만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백금발의 여자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듯한 기품 때문일 것이다.
 꾸벅.
 마찬가지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례한 한은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금발의 여자 역시 한에게는 큰 흥미가 없는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백금발 여자가 짐 정리를 다 마쳤을 무렵, 대륙 횡단 열차가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초봄의 대륙을 내달리는 열차의 움직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고,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며 천태만상의 흥취를 뽐내었다. 하지만······.
 “······.”
 “······.”
 한과 백금발의 여자가 머무르고 있는 객실에서는 한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한이 커피를 찻잔에 따라 붓기 위해 고개를 들 때, 아주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무심한 태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건 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지 세 시간이 경과했을 무렵이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백금발 여자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여자치고는 나지막한 저음이었으나, 봄날의 새벽만큼이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네?”
 한은 그제야 처음으로 여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혹시 헌터이신가요?”
 목덜미 근처에서 짧게 자른 백금발과 크고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한데 어울려 봄의 요정과도 같이 화사하지만,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반듯한 이마가 요정보다는 여왕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다.
 백금발의 여인은 예의 그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한은 여자를 주시하며 되물었다.
 자신의 이마에 헌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 만난 여자가 대뜸 헌터냐고 묻는다? 얼마 전, 사냥개들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한으로서는 순순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아, 별건 아니에요. 보통 일반인이라면 제 대검을 보거나, 제가 헌터라는 걸 알게 되면 아닌 척하면서도 이것저것 궁금해 하거든요. 그런데 그쪽 분은 통 반응이 없으셔서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혹시라도 기분 상하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얼음 왕국에서 온 차가운 여왕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백금발의 여자는 무척이나 정중한 말투로 스스로를 해명했다.
 “굉장히 예리한 분을 만났군요.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혹시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계시지 않았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한은 순간적으로 읽으려던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작년 겨울에 말인가요?”
 한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는지 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답해주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바가 많았다.
 “초면에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라서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백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첫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간절함이 담긴 모습이었다.
 “뭐, 대답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기대하시는 바를 답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한은 슬쩍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백금발의 여자가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던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11월, 12월 사이에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어디에 있었는지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장소가 마추픽추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여자는 잠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무례한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한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고, 상황은 여자가 내릴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열차가 출발한 지 열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열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어요. 베풀어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중했고, 한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여인과 작별을 고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은 거대한 검을 멘 채로 객실 문을 나섰다.
 잠시간 정차를 한 열차는 다시 한 번 철로 위를 내달렸다.
 
 한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어느새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래, 마치 작년 겨울 눈 덮인 마추픽추가 그랬던 것처럼.
 한은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는 건가······.”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아무리 그래도 6개월은 너무 빠르잖아.”
 잠자코 묵혀두는 게 명백하게 좋은 일일 터. 그런데 이놈의 얄궂은 인연이란 놈은 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일을 망치려 든다.
 뭐, 그놈의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분명 나를 제대로 보진 못했을 텐데···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한은 자신이 입고 있는 다크 슈트를 찬찬히 매만졌다.
 보통 헌터들은 정장을 입지 않는다. 헌터들이 애용하는 복장은 경량화 작업을 거친 갑옷이나 마물의 가죽을 가공 처리해서 만든 전투복이다. 그 때문에 한이 애용하는 검은색 정장은 헌터들 사이에서는 유독 눈에 띈다.
 작년 겨울, 그 장소에 있었던 건 단 둘. 훗날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준거라면 역시 이 검은 정장이 문제였을 것이다.
 “후우······.”
 어쨌든, 평상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도 큰 무리가 없다는 이유로 정장을 전투복으로 애용하던 한으로서는, 이 복장이 역설적으로 눈에 띈다는 게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 번 남았으니까.”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한 번 이 더 남았다. 닥치지 않은필연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열차는 속초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본 열차는 종착역인 속초,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를 이용해 주신 고객 분들께 감사드리며······.”
 열차가 속초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플랫폼에 울려 퍼졌다. 2박 3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속초에 도착한 한은 속초의 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최남단 도시, 속초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이 맥동을 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홀로그램과 입체 영상들이 쉼 없이 점멸했다.
 거리의 양쪽에는 3, 400층은 우습게 돌파하는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고, 빌딩 사이사이로 보이는 각종 헌터 길드의 휘장들과 헌터 상점들, 거리를 누비는 각양각색의 헌터들까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속초는 참으로 이질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남방한계선을 목전에 둔, 인류 활동 가능 구역 최남단이라는 비장함과 함께, 마도 광물의 수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막대한 부가 주는 풍요로움이 동시에 풍겨 나오는 희한하고 재미있는 도시.
 속초의 거리에는 아우터 존의 수복을 향한 인간들의 선망과 인간이라는 종 특유의 무모한 도전 의식, 그리고 막대한 부에 대한 열망이 한데 어우러져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망의 틈바구니 한가운데를 돌파한 한은 목적지인 고층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건물 2층의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아포카토. 에스프레소는 진하고 뜨겁게 해주세요.”
 주문을 마친 한은 곧바로 디바이스를 꺼내 헌터넷에 접속했다. 헌터넷의 메인 페이지에는 수호위원회가 올린 ‘거제도 원정대 공고’가 점멸하고 있었다.
 헌터넷에 원정대원 모집을 위해 공고를 내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고는 조금 특별했다.
 공고를 게시한 자의 신원을 알려주는 게시자 항목에 적혀 있는 이름은 ‘수호위원회’ 단 다섯 글자.
 어찌 보면 헌터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다섯 글자이지만, 헌터넷에 올라오는 공문에서 별도의 분과나 세부 기관명이 아닌, 수호위원회라는 다섯 글자를 게시자 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 P. 라무스.
 즉, 이번 모집 공고는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이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시자명 외에도 위원장이 이번 공고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원정대장이 피어스? 하, 위원장님도 참···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피어스라 하면 한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피어스는 수호위원회 직속의 헌터였다. 현 랭크는 A랭크에 해당하지만, 조만간 S랭크로의 승급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 역시 피어스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완벽한 일처리로 그 명성이 높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수호위원회 직속의 준 S랭크 헌터를 고작 회색구역인 거제도 원정의 대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라무스가 이 계획에 큰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주문하신 아포카토 나왔습니다.”
 한이 헌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이 주문한 아포카토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한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지 카페는 제법 한산했다.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한은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크림 위에 부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녹기를 기다린 후, 스푼을 들고 한 입을 삼켰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아포카토는 참 훌륭하다. 스푼을 내려놓는 게 힘겨울 정도로······.
 삐익.
 그때, 한이 갑자기 테이블위에 놓인 호출 벨을 눌렀다.
 “네, 손님.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조금 전 아포카토를 가져다 준 검은 머리의 웨이트리스였다.
 “필요한 게 있냐구요?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이거 안 보여요?”
 한은 냉랭한 목소리로 아포카토가 담긴 잔을 가리켰다.
 “네? 저기, 손님.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면······.”
 웨이트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일로 트집을 잡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문할 때 제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그런데 이 꼬라지 좀 보세요.”
 지금 막 에스프레소를 뿌린 아이스크림은 채 녹지 않아 군데군데 덩이가 져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했으면, 붓자마자 아이스크림이 녹을 정도로 뜨겁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게 일생일대의 문제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어 대는 한을 보며, 웨이트리스는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손님, 아포카토는 커피를 부었을 때 아이스크림이 녹는 정도에 따라서 그 풍미가 다르답니다. 저희 카페에서는 손님 분들께서 그 정도에 따른 맛을 모두 느껴보셨으면 하는 생각으로······.”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당신, 지금 나 가르치는 겁니까?”
 한은 웨이트리스의 말을 끊으며 말하고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거만한 표정과 태도는 전형적인 진상 고객의 모습이었다.
 “다 필요 없고, 매니저 불러오시죠. 내가 직접 한마디 하기 전에는 그냥 못 갈 것 같으니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한을 보는 웨이트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뭐해요? 가서 매니저 데려오라니까?”
 “저기, 손님······.”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듯 웨이트리스는 안간힘을 다했지만, 한의 거만한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미영 씨, 무슨 일이야?”
 홀에서의 소란을 들은 건지, 안쪽의 문이 열리고 정장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깔끔하게 위아래로 맞춰 입은 한 벌의 정장과 뿔테 안경, 묶어 올린 포니테일이 전체적으로 깐깐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아, 매니저님.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이 손님 분께서······.”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웨이트리스는 자신이 매니저라 부른 여성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 매니저입니까?”
 한이 대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아포카토 상태며, 점원 태도가 하도 엉망이라서 내가 한마디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통 알아먹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요. 매니저 분 상대로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 좀 내주시죠?”
 오만불손한 태도며 자신이 할 말만 내뱉는 무례한 태도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한 한의 행패를 보고 매니저는 웨이트리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미영 씨, 이 분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미영 씨는 가서 잠깐 쉬고 있어.”
 “매니저님······.”
 “응,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얼른.”
 존경의 눈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웨이트리스의 엉덩이를 살짝 두드려 준 매니저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께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의견을 주신다니, 당연히 경청해야겠죠. 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진상 고객을 한두 번 다뤄본 게 아닌 듯, 매니저는 관록이 묻어나는 태도로 한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카페 내부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올라가자, 계단 정면에 사무실이 보였다. 매니저는 사무실 문을 열고 한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여기 잠깐만 앉아 계시겠어요? 음료는 녹차, 홍차, 코코아가 있는데 어떤 걸로 준비 해드릴까요?”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왔다는 이점 때문인지 매니저의 태도는 한결 여유가 넘쳐흘렀다.
 반면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던 한의 태도는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한 층 더 불안해지더니, 의자에 앉아서는 좌절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한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줘요.”
 힘없는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했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한을 보며 카페 ‘골든 선데이’ 의 매니저 수아는 쿡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럴수야 없죠. 고객님. 아무거나 드렸다가 우리 까칠한 고객님께서 이번엔 사장이라도 찾으면 저희는 큰일인걸요.”
 깐깐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수아의 목소리에는 둥글둥글한 여유가 넘쳐 흘렀다. 말투나 몸동작을 보건데 한과 수아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듯 했다.
 “수아 씨, 마스터한테 건의 좀 드리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접선하는 방법은 진짜 아니니까 다른 방법으로 바꾸라고 말입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류 한 군 전용 접선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서 저와 마스터님이 고민 끝에 만든 게 지금 방식인걸요, 저나 마스터님이나 바꿀 생각은 없답니다.”
 수아는 연신 생글거리며 코코아를 타서 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말 악취미에요. 수아 씨도, 마스터도······.”
 한은 코코아를 한 모금 넘겼다. 달디달아야 할 코코아가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지금 한이 방문한 장소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카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헌터 길드 ‘Night Walker’의 비밀 지부 였고, 카페 매니저로 위장하고 있는 수아는 길드의 고위 간부중 한 명이었다.
 여타의 길드와는 달리 ‘비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이트 워커 길드는 그 길드명과 엠블럼을 제외하고는 길드원들의 신상 및 활동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이 방금 전 벌인 진상 짓은, 단순한 영업 방해 행위가 아니라 한과 나이트 워커 사이에 약속된 접선의 암호였다. 속초에 있는 골든 선데이로 와서 아포카토를 시켜놓고 에스프레소 온도를 가지고 생트집을 잡으며 진상을 부릴 것.
 길드 마스터의 별난 취미 덕분에 한은 접선을 시도할 때마다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해야 했고, 이는 점원과 한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지금 마스터는 어디 계십니까?”
 한은 내뱉듯이 말했다. 이 치욕을 무릅쓰면서까지 접선을 시도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이트 워커의 길드 마스터인 바스티안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마스터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수아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화원 ‘영원’,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바람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법 감성적인 문구가 새겨진 명함을 보면서 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장 2m 30㎝, 체중 150㎏에 육박하는 거구가 영원의 꽃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는 어울리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범죄의 영역이었다.
 “지난번에는 빵집 아니었나요?”
 “응, 맞아. 한 군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마스터가 워낙에 다재다능한 분이잖아.”
 수아는 고개를 살짝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이 50 넘은 아저씨가 육 개월이 멀다 하고 직업을 갈아치우면 그건 그냥 철이 안 든 거죠.”
 명함을 집어든 한은 몸을 일으켰다. 화원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점심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영 씨라고 했던가요? 아까 그 점원 분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으니 잘 달래주세요.”
 몸을 일으키는 한의 어깨를 수아가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포카토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마시고 가. 응? 한 군 매번 우리 가게에 와서 제대로 마시고 간 적은 없잖아? 다시 홀로 나가기에는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로 가져다줄게.”
 “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한은 몸을 다시 주저 앉혔다. 생각해 보니 수아의 말대로 한은 골든 선데이에 와서 아포카토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상 짓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은데 앉아서 커피나 먹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번 기회를 이용해 골든 선데이의 아포카토를 제대로 맛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괴물을 만나러 갈 텐데, 달달한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흐음, 분명이 이 부근인데······.”
 한은 번화가로 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함에 쓰여 있는 주소가 맞다면 분명 화원 ‘영원’은 이 근처에 있을 텐데, 통 보이지를 않는다.
 그때, 사거리 뒤쪽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 한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자신을 가져도 됩니다.”
 “저,정말요?”
 “그럼요.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을 믿어요. 아가씨에게는 피어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가씨에게 필요한건 오직 하나,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랍니다.”
 깊은 산 속 동굴에서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중후하고 온화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
 한이 찾아 헤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자, 주문하신 장미 꽃다발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아가씨를 응원하는 제 마음.”
 그곳엔 남자 친구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참인지 곱게 차려입은 단발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꽃다발 중앙에 튤립 한 송이가 꽃혔다.
 정말이지 큼지막한 두 손이 단발머리 아가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위압감을 줄 만큼 커다란 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 때문인지 위압감보다는 따스한 애정이 묻어나는 손동작이었다.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가서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세요. 저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아저씨. 저 용기가 생겼어요. 그럼 저 다녀올게요.”
 “후훗, 다녀와요. 귀여운 아가씨. 좋은 소식 있거든 전해주고.”
 단발머리 아가씨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한참, 정말이지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화원에서 멀어져 갔다.
 
 “이야, 이거 참 감동적인 광경인데요. 귀여운 아가씨의 사랑을 응원하는 다정한 꽃집 아저씨라니, 키가 30, 아니 40㎝만 더 작고 체중이 50㎏만 덜 나갔어도 훨씬 더 보기 좋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안타깝군요.”
 소녀가 떠나간 자리를 채우고 나타난 한은 히죽거리며 꽃집 아저씨 ‘바스티안‘ 의 앞에 섰다.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 한을 알고 있는 자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불경스러운 태도였다.
 “하하, 손님. 불편을 끼쳐드린 점은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래봬도 제 몸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모처럼 화원에 오셨으니 제 신체에 대한 품평보다는 아름다운 꽃들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화원 ‘영원’의 주인, 바스티안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한을 정중하게 응대했다.
 “뭐, 저도 그렇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이 꼴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럴 수 가 없네요.”
 하지만 한은 태도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한은 고개를 올려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한도 190에 육박하는 꽤나 큰 키의 소유자 였지만, 바스티안의 신장은 2m하고 27㎝, 한이 올려다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신체 조건의 소유자였다.
 “이 앞치마, 그 덩치에 분홍색 앞치마라니, 당신에게 이게 당신에게 가당키나 한 짓입니까? 세상에. 양심이 있으면 앞치마를 상대로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앞치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한은 손을 뻗어 바스티안의 허리춤에 매달린 분홍색 앞치마를 손으로 잡고 펄럭거렸다.
 분명히 넉넉한 사이즈의 앞치마였을 텐데 워낙에 거인 같은 바스티안이 두르고 있다 보니 턱받이처럼 보이는 형국이었다.
 “하하, 그런 걸 고정관념이라고 하는 겁니다, 손님. 이 분홍색, 저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한의 무례한 언행에도 바스티안은 여전히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바스티안은 흑진주를 연상키는 자신의 검은색 피부에 분홍빛 앞치마를 가져다 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색상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사이즈의 문제입니다.”
 한은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허리를 숙여 한과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거구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그래서 손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신다? 이 눈을 보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한은 미간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그간 건강하셨나요?”
 “하하하, 나야 건강하지. 오랜만이야, 한 군. 정말 반가워. 이게 얼마만이야, 대체?”
 한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중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 미소를 본 바스티안은 그 큼지막한 손을 벌려 한을 덥석 끌어안았다.
 “작년에 찾아뵈었으니, 육 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네요.”
 “이야, 한 몇 년만에 본 것 같이 반가운데, 겨우 육 개월이라. 하하, 아무튼 반가워. 정말 잘 왔어.”
 바스티안의 솥뚜껑 같은 손이 한의 등판을 힘껏 두드렸다.
 한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자식이라도 맞이해주는 양 반겨주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바스티안 고트맨. 나이트 워커의 현 길드 마스터이자 ‘저거너트’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SS랭크의 헌터였다.
 그리고 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자,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구. 응?”
 바스티안은 한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화원 안으로 들어간 후 셔터를 내렸다.
 “문을 벌써 닫으시는 건가요?”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왔는데 그깟 장사 하루 못 하면 좀 어때.”
 미련 없이 영업을 종료한 바스티안은 향긋한 허브티를 끓여서 한에게 대접했다.
 “그래,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 여기는 또 어쩐 일이고?”
 “저야 뭐 늘 똑같죠. 정신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온 이유는 역시 이것 때문이고요.”
 한은 디바이스를 켜서 수호위원회에서 올린 거제도 원정대 공고문을 보여줬다. 공고문을 힐끗 쳐다본 바스티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제도에 검은색 탑이 솟아났다는 말을 듣고 자네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은 했네만, 짐작이 틀리지 않았군그래. 어디 보자··· 원정대 리더는 피어스 이 친구라. 헤에, 그토록 꽁꽁 숨겨두던 피어스를 꺼내놓은걸 보니 그 영감도 자네한테는 꼼짝 못하나 보구만.”
 “설마요. 위원장님은 그저 제 편의를 봐주시는 것뿐입니다.”
 “피어스 이 친구라면 제법 믿음직한 친구지. 자네의 발목을 잡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나도 안심이 되는군. 그래, 피어스는 만나고 오는 길인가?”
 “아니요. 먼저 마스터를 만나 뵙기 위해서 온 겁니다. 마스터에게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 말이죠.”
 한은 디바이스와 헌터 자격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에 찾아 뵌 이후로 킬리만자로, 대청봉 일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지도며, 정보며, 등급 조정이며 통 갱신하지를 못해서 말이죠. 마스터에게 업데이트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흠, 육 개월간 갱신을 하지 않았다라··· 그럼 아우터 존 구역 변경도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건가?”
 “위원회에서 직접 공문을 보내 준 최중요 사항 몇 가지는 직접 입력했습니만, 아마 태반이 안 돼 있을 겁니다.”
 인류가 지구의 절반을 상실한 이후 어느덧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급변하는 격변의 시간하에 인류를 수호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설립된 연방 정부와 수호위원회. 인류의 무력을 대변하는 이 두 기관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작전은 아우터 존의 수복이었다.
 지금도 수호위원회의 지도하에 수없이 많은 헌터들이 아우터 존을 수복하고 인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우터 존은 시시각각 조금씩 그 형태와 등급이 바뀌고는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정보는 헌터 네트워크를 통해 헌터들에게 공개 되는데, 갱신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수호위원회 지부를 방문해서 디바이스와 자격증을 갱신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6개월을 아우터 존에서 보낸 한은 갱신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정보의 갱신과 충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탐색용 무장 세트 하나만 맞춰서 준비해 주시구요.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도 마스터만큼 확실한 분은 통 없더군요.”
 “갱신과 충전, 그리고 무장 세트 하나라. 오케이, 내일 오전 중으로 끝내 놓을 테니 찾으러 오시게.”
 바스티안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Night Walker‘라 하면 정보 수집에 관한 한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길드. 바스티안에게 부탁을 한다면 빼놓고 반영하지 못하는 정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대가라고 하기에는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한은 테이블 위에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았다. 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은 한이 지난 육 개월간 사냥한 몬스터에게서 획득한 마도 광물이었는데, 하나같이 최고급 상품들인지라 그 양은 많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허허, 이 친구야.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생명의 은인을 상대로 대가를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바스티안은 주머니를 밀어냈다. 한은 주머니를 다시 바스티안 쪽으로 밀어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스티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스터가 받지 않으신다면 제가 억지로 권할 수는 없는 일이죠. 다만 마스터가 이걸 받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제 두 번 다시 마스터에게 이런 부탁을 하러 찾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
 바스티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럼 저는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놈에게 정비를 부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잘못된 정보 혹은 불량품 장비를 사용하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도 있을 수도 있겠군요. 뭐, 마스터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받으면 되잖아, 받으면. 자네 그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만.”
 “어라?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마스터가 받지 않으시면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스터께서 제 성의를 받아드려 주신다면 저야 기쁜 마음으로 정비를 부탁드릴 수 있겠군요.”
 한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허브티를 마저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카타나 그 놈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바스티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스티안의 입에서 카타나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스티안에게 되물었다.
 “마스터도 카타나를 신경 쓰고 계시는 건가요? 하, 그놈들 제법이네. 나이트 워커의 길드 마스터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걸 알게 된다면 기무라, 그 관심종자가 기뻐 날뛰겠군요.”
 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바스티안의 표정은 못내 진지했다.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야. 내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카타나가 은밀하게 자네에 관한 정보를 여기저기서 수집하고 있다고 하네. 자네도 알겠지만 카타나의 길드 마스터인 기무라 마사요시는 보통 집요한 놈이 아니라네. 만약 그놈들이 자네를 노리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닌 셈이지.”
 “······.”
 한은 아무 말 없이 허브티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고, 바스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타나 그놈들, 마냥 잔챙이들은 아니야. 분명히 말해서 저열한 놈들이기는 하다만 자네도 알지 않나? 그놈들 별명이 뭔지.”
 “헌터들의 무덤이었죠. 아마.”
 한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담담하지 않았다.
 카타나는 이제는 아우터 존에 삼켜진 과거 일본 출신의 헌터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헌터 길드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초승달과 바토르의 뒤를 잇는 서열 3위에 해당하는 거대 길드였다.
 카타나는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하는 치밀함,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 등으로도 유명하지만, 헌터들 사이에서 카타나는 다른 이유로 악명이 높았다.
 그 이름하야 헌터들의 무덤 카타나.
 막 헌터계에 입문한 어린 헌터들을 픽업해서 반강제로 길드에 가입시키고는 그들을 혹사시킬 대로 혹사시킨 후 폐기처분하는 카타나의 방식은 많은 헌터들의 반감을 샀고, 명망 있는 헌터들 사이에서는 카타나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한이 카타나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놈들 아무래도 수상해.’
 최근 들어 사냥개들의 습격이 잦아지고 있다. 에드문드나 요제프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들이라 해도 그들의 힘만으로 이렇게 쉽게 사냥개를 파견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구에서 그놈들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놈들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카타나는 그 끄나풀 후보로 한이 주시하고 있는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건 피차 마찬가지 였는지, 카타나 역시 한에 대해서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물론 자네 실력이야 내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는 그 사냥개들로부터도 위협을 받고 있는 신세 아닌가? 여기에 카타나 놈들까지 방해하면 자네의 행동은 더욱더 지장을 받게 될 거야. 그러니 부디 조심하도록 하게.”
 누가 ‘사람 좋은 바스티안’ 아니랄까봐 한을 걱정하는 바스티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네, 뭐 저도 나름대로 조심은 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번 원정이 끝나면 한 번 들쑤셔 볼 생각이에요. 한 번 여기저기 찔러 보면 대충 뭐하는 놈들인지 견적이 나오겠죠.”
 한은 카타나가 사실은 사냥개들의 하수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바스티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놈들,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카타나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이번 거제도 원정. 사냥개의 끄나풀로 의심되는 카타나가 이번 거제도 원정을 방해하려 든다면 그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될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한 거 같아. 아, 그리고 그놈들 말야, 지금쯤······.”
 말을 하던 바스티안이 갑자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아프리카 비룽가 산맥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있을걸. 크크, 자네의 행방을 찾아서 말이지.”
 “하하, 마스터의 솜씨군요.”
 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카타나가 비룽가 산맥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스티안이 나이트 워커의 정보망을 이용해 카타나를 교란시킨 것이다. 카타나가 아시아권에서 손가락에 드는 거대 길드라 해도, 정보에 관해서는 수호위원회 정보국과 쌍벽을 이루는 나이트 워커가 교란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당할 재주가 없을 터였다.
 “어찌 됐건 마스터 덕분에 당분간 시간은 번 거 같군요. 감사합니다. 마스터. 카타나는 조만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한은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셨습니다, 마스터. 그럼 내일 찾아뵙도록 하죠.”
 “벌써 가게? 조금 더 얘기도 하고 그렇지 그래?”
 한은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는 바스티안을 만류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피어스 씨를 아직 만나 뵙지 못해서 말이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쪽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은 다시 한 번 바스티안에게 고개를 숙여서 작별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화원 밖으로 나와 수호위원회 속초 지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호위원회 속초 지부는 화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흐음.”
 수호위원회 앞에 선 한은 건물의 외벽에 떠 있는 액정 화면을 읽었다.
 화면은 쉬지 않고 빛을 내며 최근에 있던 아우터 존의 구역 변경, 헌터 선발 및 승급 시험 일정, 헌터 모집 공고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모집 공고 최상단에는 거제도 원정대 공고가 위치해 있었다. 거제도 원정대에 참가하기 위한 인원이 지금도 몰려오는지 수호위원회는 무척이나 번잡해 보였다.
 사무처에 들어가 접수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한의 대기 번호를 호명했다.
 “헌터 자격증 제시해 주시구요. 여기 양식에 따라 신청서 작성해 주세요.”
 몰려드는 헌터들, 그리고 격무에 지칠 대로 지친 접수원 아가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을 맞이했다. 하지만 헌터 자격증을 바스티안에게 맡기고 온 한은 자격증을 제출할 수 없었고, 자격증을 대신할 만한 다른 물건을 제시하기로 했다.
 “명함 말고 자격증 제시해 주시구요. 양식서 다시 작성해 주세요.”
 한이 내민 명함을 흘깃 본 접수원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한이 내밀었던 명함의 반대편을 보여주자, 아가씨의 눈동자가 커졌다.
 “확인해 보시죠.”
 한이 내민 명함은 한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명함의 뒷면은 온통 검은 바탕에 칼과 방패가 조합된 엠블럼이 새겨져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명함 주인의 직책이 적혀 있었다.
 
 ― 수호위원회 위원장. P.라무스 ―
 
 명함의 위력은 대단했다. 명함에 새겨진 코드를 통해 수호위원회의 명함임이 확인된 순간, 한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표정이 바뀌었고, 피어스에게로 통하는 직행 통로가 개통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층으로 가셔서 가장 우측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로비를 뒤로 한 채 한은 2층으로 올라가 안내받은 방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문 안쪽에서는 중년 남성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빛이 도는 갈색머리에 콧수염을 매력적으로 기른 중후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자네가 위원장님이 말씀하셨던 그 ‘한’이라는 친구 인가? 만나서 반갑네. 난 이번 수색 작전의 지휘를 맡은 피어스라고 하네.”
 “프리랜서 류 한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자리에 앉게나.”
 S랭크로의 승급을 앞둔 헌터라고 하더니, 피어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먼발치에서 몇 번 지켜본 게 전부인 한으로서는 이 정도로 빼어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피어스가 수호위원회의 숨은 실력자라는 평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해볼까. 자네, 위원장님에게 비밀 임무를 하나 하달 받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사전에 미리 약속한 대로 한은 대답을 맞췄다.
 이번 조사 작전에서 한은 라무스의 지령을 받고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사정상 원정대와 동행해야만 하는 한의 사정을 감안한 라무스가 한의 행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해 준 것이다.
 “흐음, 위원장님이 직접 자네를 지명해서 비밀 임무를 하달할 정도면 자네 실력이야 내가 참견할 바가 아니겠지. 뭐 세부적인 사항은 어찌 됐건 당분간은 자네와 동행을 해야할 것 같군. 아무쪼록 잘 부탁하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한은 피어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원정대 선발은 오늘 중으로 다 끝날 것 같으니, 자네만 괜찮다면 내일 정오가 지나서 출발을 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피어스는 생김새만큼이나 진중한 성격의 타입인 듯, 작전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내일 오전 이후라면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출발 시간은 내일 정오로 하기로 하고, 그 이동 경로 말인데······.”
 피어스는 지도를 펼치고 자신이 구상했던 원정대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피어스가 구상한 이동 경로는 향후 일정과 원정대 인원의 수준, 개별차를 고려했을 때 거의 완벽에 가까웠고, 한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이 밖에도 대원들의 배치, 이동과 휴식의 간격 등등 의논을 할 주제는 꽤 많았지만, 피어스의 사전 계획이 워낙에 빈틈이 없었던 지라 논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필요한 얘기는 이쯤에서 끝난 것 같고. 자네는 어쩔 텐가?”
 “어떤 걸 물어보시는 건지······?”
 “내가 선발한 대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숙박할 예정이거든. 그런데 자네는 어쩔 거냐는 거지. 이곳에서 머물겠나, 아니면 숙소를 따로 잡으셨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조금 준비할 게 남아 있어서, 가능하다면 내일 정오에 이곳으로 합류하는 걸로 했으면 합니다.”
 “안 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럼 이제 할 얘기는 다 끝났으니 나가서 자네 볼 일을 보시게. 내일 정오에 만나기로 하지.”
 피어스는 시원시원한 말투로 한의 제안에 응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만나세.”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한은 수호위원회 지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 인류의 꿈, 수호위원회는 영광의 날을 기다립니다.
 
 한이 막 수호위원회 지부를 빠져나올 때 허공의 홀로그램에서 영롱한 목소리가 들리며 방패와 칼이 새겨진 수호위원회의 앰블럼이 허공에서 점멸했다.
 ‘인류의 꿈······.’
 한은 목덜미 부근이 뻐근해 오는걸 느끼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인류의 꿈을 짊어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저런 말을 듣고 있으면 어깨가 뻐근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한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다 고개를 내젓고는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오후 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오후 내내 속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정보를 수집한 한은 야심한 시각이 되서야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거제도에 솟아오른 흑색 탑의 지하에 한이 찾아 헤매던 고대 유물이 정말로 있다면 혹시나 그 파장으로 속초 근방에 악영향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를 우려했지만, 다행이도 그 여파가 이 근방까지는 미치지 않은 듯했다.
 물론 거제도까지 가는 도중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지만······.
 슈트케이스를 열고 가져갈 짐을 정리하던 한의 귓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와 놓고는 노크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어머, 그래요? 한이 다음부터는 노크를 하라고 그래서 내 딴에는 신경 좀 썼는데, 역시 별로였나?”
 “노크를 시도한 건 참 훌륭해. 문제는 이미 남의 방 안에 들어와 놓고 노크를 했다는 점이지.”
 “흐응∼ 언제부터 한 군이 내 앞에서 노크 운운하게 된 건지 모르겠네. 사춘기가 오면 방문부터 틀어 잠그는 아들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진다는데. 아,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불쑥 나타난 ‘진’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쥐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허리에 비해 잘 발달된 풍만한 상체를 가진 은발의 미녀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흥미로운 광경일 것이다.
 물론 비슷한 광경을 20년이 넘게 보고 있는 한으로서는 전혀 흥미가 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흑색 탑에 대한 정보는 어때? 아직도 느낌 정도?”
 ‘진’은 이 세계를 지키는 힘의 분신 같은 존재. 그 가진 바 능력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아우터 존 곳곳에 등장하는 고대 유물의 존재를 감지해서 그 정보를 한에게 알려주는 탐지 능력도 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은 탐지 대상과 한의 위치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현재 위치는 흑색 탑의 존재를 처음 알려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탑에 가까워진 상태. 한은 혹여나 진이 새로운 사실이라도 감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눈치도 빠르셔라. 대답은 예스.”
 진은 배시시 눈웃음을 지으며 뽐내기라도 하듯 가슴을 쭉 폈다.
 “그래, 추가 정보가 있다는 소리지? 그럼 얼른 말해 줘.”
 “너무 쉽게 말해주면 재미없잖아요.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을까요?”
 진이 생글거리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한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본인만 알고 있다는 우위가 썩 만족스러운지 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진은 눈을 부라렸다.
 “이봐요, 거기 깜장머리 아저씨. 다시 한 번 말해봐. 나이가 뭐 어쨌다고?”
 “나이라니 무슨 소리야? 나는 비밀이 많은 여자는 참 아름답다는 말을 했는데··· 아, 그렇지만 비밀이 너무 오래되어서 김이 새버린 여자는 시시해지는 법이지만 말이야.”
 “흥. 착한 내가 한 번 속아준다.”
 진이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잖아요. 흑색 탑의 지하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장담은 할 수 없다고. 그런데 이 정도 거리까지 가까이 와보니까 확신이 들어요. 그 탑 지하에 뭔가가 확실하게 있어요. 그리고 이정도 강렬한 존재감이라면 잠들어 있는 유물은 아마도······.”
 “······?”
 한은 진의 다음말을 경청했다.
 “고대 ‘신’이 남긴 유물일 가능성이 커 보여요.”
 “고대 신의··· 유물.”
 한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고대 신의 유물을 찾기 위해서 지금껏 아우터 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이 허탕, 혹은 운이 좋아도 고대인의 유물을 발견하는 정도였다.
 고대인의 유물로는 차원의 침식을 늦출 수 있을 뿐, 사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방법은 단 하나. 고대 신이 남긴 유물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고대 신의 유물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야, 이거 갑자기 의욕이 솟아오르는데.”
 한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간의 여정이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고대 신의 유물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지금껏 한이 뒤지고 다녔던 장소와는 그 격이 달라요. 고대 신을 받드는 수호자도 존재할 테고. 지금까지와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진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티격태격 하지만 진에게 있어 한은 자신이 키운 자식과도 같은 존재. 고대 신의 유적으로 뛰어들 한을 생각하면 걱정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라, 지금 진이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데.”
 한은 진의 걱정을 덜어줄 마음으로 요량으로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진.”
 한은 손을 뻗어 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니까 말야.”
 정오가 되기까지 20분여가 남았다. 피어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봤다.
 갈색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넘겨 고정시켰고, 짙은 색 고글로 표정을 숨긴다. 경량화와 방검 처리가 된 라이더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타이트한 라이더 재킷 너머로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근육질의 상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쉰을 바라보고 있는 피어스지만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어스의 근육은 탄탄했다.
 검은색 가죽 강갑을 끼고 방수, 방한 처리가 된 천을 이중, 삼중으로 덧댄 워커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와이번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쌍검을 등 뒤로 차는 걸로 무장을 끝낸다.
 무장을 하기 전의 피어스가 수호위원회에서 파견된 지휘관 피어스라면, 무장을 끝낸 피어스는 수없이 많은 마물을 해치운 A랭크 헌터 ‘음속의 피어스’로 다시 태어났다.
 “원정대장님. 한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아, 금방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게.”
 인터폰에서 들리는, 한의 도착을 알리는 직원의 음성에, 피어스는 대답을 주고는 1층으로 향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냥을 경험했지만, 아우터 존에 발을 내딛는 그 기분은 언제나 새롭다.
 ‘하긴 그렇지 않은 헌터가 누가 있겠나.’
 제아무리 숙달된 헌터라 해도, 아니 오히려 숙달된 헌터일수록 아우터 존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그에 따른 긴장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어, 잘 잤나, 한 군. 어라, 자네?”
 1층으로 내려온 피어스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한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했다. 빈틈없이 전투복을 차려입은 자신과는 달리 한의 복장은 지나치게 심플하고, 또 단정했다.
 더블 버튼 블랙 슈트와 푸른색 넥타이. 슈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상의 코트. 무장이라고는 등 뒤로 매달린 중형 나이프가 전부였다.
 구두가 아니라 전투용 부츠를 신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냥을 떠나는 헌터가 아니라 은행으로 출근하는 은행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쑥한 옷차림이었다.
 ‘저 꼴을 하고 아우터 존으로 간단 말이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장님.”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한을 보며 피어스는 역시 고글을 쓰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고글을 쓰지 않았다면 당황스러워 하는 자신의 표정을 고스란히 들켰을 테니.
 
 “원정대원의 명령을 비롯한 현장 지휘권은 모두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야. 한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거든 자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것저것 생길 걸세. 자네가 명심해야 할 건 단 하나. 그 친구가 하는 일, 그 친구의 방식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걸세. 내 말 알아듣겠나?”
 
 수호위원회를 벗어나기 전 라무스가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한마디 했겠지만, 자신이 더없이 존경하는 위원장님이 한 말이 떠올라 피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 응. 나는 잘 잤다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정오까지 10여분이 남았다. 피어스는 품속에서 자신이 선발한 대원들의 명부를 꺼내 한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할 대원들의 이름과 랭크를 기록한 문서이네. 자네는 우리랑 별도의 작전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검은 탑까지는 동행을 해야 할 테니 자네도 대원들 이름과 랭크 정도는 숙지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대장님.”
 “자, 그럼 나가 볼까.”
 피어스는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한은 뒷문을 통해 나가 대원들의 최후방에 섰다.
 “자. 제군들, 주목!”
 대원들의 최선두에 선 피어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부로 본 지휘관을 포함한 아홉 명의 대원들은 KKN―23섹터에 출몰한 흑색 탑을 탐사하는 원정을 떠난다. 지금 이 시간부터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여러분에 대한 지휘, 명령권은 본 지휘관에게 귀속되는 바이며, 혹여 본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에는 수호위원회 회칙 제2조에 근거한 엄중 처벌이 내려질 예정이니 이 점 명심하길 바란다.”
 수호위원회 본부에 속한 헌터답게 피어스는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말투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피어스가 대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하달하는 동안, 한은 피어스가 조금 전에 넘겨준 대원들의 신상명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피어스와 피어스의 부관을 맡고 있는 A랭크 헌터 피터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 헌터들의 랭크는 전원이 B랭크였다.
 목표로 하고 있는 거제도까지 가는 여정 중에 가장 위험도가 높은 지역이 회색 지역임을 감안할 때, 준 S랭크 헌터인 피어스와 A랭크 헌터 피터, 그리고 B랭크 헌터 일곱 명을 파견했다는 것 자체가 라무스가 꽤나 많은 배려를 해줬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와 동행할 헌터 한 명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목적지까지 동행은 하겠지만, 한 군에게는 별도의 임무가 있으니 우리와는 때때로 행동을 달리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군도, 우리도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같은 헌터. 제군들이 박수로 그를 맞이해 줬으면 한다. 제군들, 전부 뒤로 돌아서 류 한 군을 향해 박수!”
 지시 사항을 전부 하달한 피어스는 원정대원들에게 한을 소개했고, 피어스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뒤를 돌아 한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한은 박수에 응하고자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과 원정대원들간의 상견례를 끝으로 출정식은 모두 끝이 났다. 이윽고 피어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헌터들에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 시간부로 흑색 탑을 향한 원정의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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