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벌레의 왕 [E]

벌레의 왕 1권 (상)

2017.09.07 조회 4,118 추천 44


 1장 카프카 ‘변신’
 
 
 
 
 
 35세의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게임개발자인 이어진. 그는 가상현실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젊고, 능력 있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다. 그는 일에 병적으로 매진하는 사람이었다. 쉬지 않고 작업을 하며 부하들을 닦달하는··· 마치 일을 위해, 혹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모든 맵과 던전, 직업과 아이템, 몬스터의 기초 디자인을 구상했고, 각종 프로그램 코드까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
 
 회사의 모든 자본이 투입된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장 추성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게임이니만큼 그가 어진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 * *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베타 테스트가 열리기 일주일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작업을 하고 있던 어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컵라면에 물을 붓던 손이 멎었다.
 
 “뭐야 이게?”
 
 놀란 눈을 부릅뜬 채 어진은 말을 뱉었다.
 어진의 눈에 보인 것은 버그였다.
 그것도 게임을 통째로 만들다시피 한 어진조차도 이제야 발견했을 만큼 은밀한 것.
 그 버그는 어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하고 정교하게 프로그램 사이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버그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물론 그 자체로는 다른 프로그램들에게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그는 앞으로 엄청 치명적이게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
 이는 다른 프로그램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이 버그는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모든 중요 프로그램을 흡수해서 용량을 불려 나갔다.
 만약 하루나 이틀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 어마어마한 악성 코드로 자라났을 것이다.
 
 ‘카프카’
 
 그것이 어진이 버그에 붙인 이름이었다.
 
 “제거해야겠군.”
 
 이런 무시무시한 버그를 이제야 알아내다니······ 자신 혼자 힘으로 될 것도 아니다. 아마 개발팀 전원이 또다시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진은 부하들에게 야근을 시키기 위해 사장의 동의를 구하러 갔다.
 
 * * *
 
 늦은 시각.
 
 사장의 집무실을 노크한 어진은 대답이 없자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워낙에 신임받는 어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
 
 사장은 안에 없었다. 다만 못 보던 금고 하나가 책상 아래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뭐야 이게?”
 
 어진은 쿡쿡 웃으며 금고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러 보았다. 사장의 생일. 호적상의 생일이 아니라 진짜 생일이다. 이건 사장과 사적으로 오래 알고 지냈던 어진만이 알고 있다.
 
 텅!
 
 금고 문은 깜짝 놀랄 정도로 쉽게 열렸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코드로 가득한 서류.
 어진이 눈을 크게 뜨고 서류를 읽었다. 복잡한 암호로 되어 있어 한 번에 알아들을 순 없지만 어진의 능력이라면 금세 해독 가능하다.
 
 “인간··· 이식?”
 
 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읽을 수는 있겠지만, 읽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아차! 컵라면!”
 
 물을 부어 놨던 컵라면 생각이 났다. 컵라면을 오래 불려 놓으면 환경 호르몬이 나와 안 좋다던데······.
 어진은 다시 서류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사장이 없으니 별수 없다. 어진은 다시 개발실로 뛰어갔다.
 
 “버그나 다시 점검해 볼까?”
 
 라면을 다 먹은 어진은 캡슐 안에 들어가 헬멧을 머리에 쓰고 침을 손가락 끝에 꽂았다.
 피가 센서에 묻자 가상 현실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진이 막 관리자의 코드로 접속해 버그 카프카를 확인하려는 순간.
 
 쾅!
 
 개발실의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이어진!! 너 왜 아직 퇴근 안 했냐?”
 
 눈이 붉게 충혈된 사장.
 손에 들린 것은 비린내가 나는 휘발유 통이다.
 당황한 어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장이 달려들었다.
 재빨리 어진이 들어가 있는 캡슐의 문을 닫은 사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유리문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금고 뒤졌지?”
 “무슨 금고요!”
 “발뺌해도 소용없어! 서류 보고 미친 듯이 뛰쳐나가는 거 CCTV로 다 봤다!”
 
 사장은 어진이 들어가 있는 캡슐의 유리문을 꾹 눌렀다.
 어진이 침착하게 사장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그건 컵라면이 불까 봐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먼저 제 이야기를······.”
 
 하지만 사장은 전혀 믿지 않는다.
 
 “미안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서류를 봤으니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가뜩이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프로젝트인데.”
 
 사장은 한 손으로 캡슐을 꾸욱 눌렀다. 그는 어진이 캡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사이 캡슐의 빈틈으로 휘발유를 들이부었다.
 
 쿨컥쿨컥-
 
 “사, 사장님! 사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살려 주세요!”
 
 어진의 외침에도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은 채 사장이 말을 했다.
 
 “미안하다 어진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사, 사장님! 저 없으면 이 게임 망해요! 아시잖아요!”
 “이제 오픈 베타도 달랑 일주일 남았다. 너 없어도 베테랑 개발자 몇십 명 모으면 어찌어찌 운영은 가능할 거야.”
 “그게 무슨······!?”
 
 쾅- 쾅- 쾅-
 
 어진은 캡슐을 발로 찼지만 소용없었다.
 사장은 필사적으로 캡슐 유리문을 밀고 있었다. 그러곤 한술 더 떠 자신의 벨트를 풀더니 안전고리에 꽁꽁 동여매 놓았다.
 
 “미안하다.”
 
 딸깍-
 
 사장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이윽고.
 
 후루룩!
 
 뚱뚱한 남자가 국수를 빨아먹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불길이 번진다.
 시야가 밝아진다.
 전신이 한꺼번에 확 뜨거워졌다.
 눈앞 유리문 밖에서 버티고 있는 사장의 검은 등을 바라보며, 어진은 천천히 시야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캡슐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진은 눈을 떴다.
 전신에서 느껴지던 끔직한 통증은 이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헉?”
 
 어진이 고개를 들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현실의 세계보다 훨씬 더 익숙한 풍경. 마른 흙 위에 통나무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곳은 바로 초보자 마을이었다.
 
 가상현실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의 세계였다.
 
 “어떻게 된 거지?”
 
 어진은 황급히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나타나지 않는다. 밖의 캡슐 안에서 잠들어 있을 육체와 아무런 연동이 되지 않는다.
 
 “으아아아아!”
 
 어진은 괴성을 지르며 수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로그아웃을 알리는 입체 버튼이나, 육체의 바이탈 사인을 알려 주는 화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순간.
 캡슐에 들어오기 전 상황을 생각하며 어진은 절망했다.
 
 “으아아아악!”
 
 약 1시간가량 방방 뛰던 어진은 이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HP가 바닥까지 닳아 있는 것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로그아웃할 방법이 없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렀다. 절망과 분노에 뇌가 타 버릴 것만 같다. 현실 세계에 있을 자신의 육체는 이미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지금 이곳 가상현실 세계에 들어와 있는가?
 
 ‘버그!’
 
 어진은 입술을 꽉 깨문다.
 
 카프카 버그!
 
 어떠한 개발자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숨어서 다른 코드들을 먹어 치우던 치명적인 버그.
 어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뇌파 중 일부가 이 버그와 융합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물을 훔친 어진은 자신의 몸을 점검해 보았다.
 자신은 확실히 버그 캐릭터가 맞았다. 채팅 기능도, 인벤토리도, 초보자에게 주어지는 목검이나 갑옷 세트도 없다. 채팅과 아이템을 이용하지 못하는 캐릭터라니······
 어진은 유일하게 하나 있는 창을 띄워 보았다.
 그것은 스킬창이었다.
 
 ‘포식(Devour)’
 -다른 몬스터의 데이터를 해킹, 능력 한 가지를 흡수합니다.
 
 ‘무명(No-name)’
 -그 어떠한 위치 파악 시스템이나 아이템, 랭킹, 채팅창 등에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게 뭐야?”
 
 어진은 황당한 얼굴로 스킬창을 바라보았다. 게임 개발자의 영혼과 버그가 융합된 결과일까? 어진은 카프카 버그의 특징을 그제야 명확히 알 것 같았다.
 
 “후······.”
 
 숨을 고르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그러나 절망 이후에 찾아온 것은 지옥불 같은 분노였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한단 말인가!
 어진은 눈을 빛냈다.
 분노가 너무 크다 보니 오히려 사람이 침착해졌다.
 스킬 숙련도를 올릴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패시브 스킬 둘.
 
 “좋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면······.”
 
 어진은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을 죽인 사장. 그가 일평생을 걸고 만든 게임이다. 어진이 기초부터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설계한 이 게임을 바탕으로 그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로 뻗어 나가겠지······.
 
 어진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 꼴은 못 본다!”
 
 어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망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야말로 곧 자신을 죽인 사장에게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직접 만든 게임이니만큼 어떻게 하면 망하게 할 수 있을지 그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월드맵은 십자가 모양이다.
 십자가 모양의 땅 중에 초보자 마을이 있는 곳은 중앙.
 북쪽엔 ‘북벽’이라고 불리는 얼음산맥, 그걸 넘으면 ‘가혹한 바다’가 존재한다.
 남쪽은 고대문명의 유적지이다.
 동쪽은 사막과 용암의 땅이다
 서쪽은 늪과 정글이다.
 그 외에는 거대한 바다와 각종 섬들이 자리한다.
 
 어진은 냉정하게 맵과 몬스터를 떠올렸다. 그러자 앞으로의 계획이 착착 세워졌다. 게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들이······.
 
 게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유저들이 플레이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고가의 캡슐 장비부터 시작해서 일정 기간 플레이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게임.
 유저들이 게임을 원활히 플레이할 수 없게 방해한다면 게임은 급속도로 망해 버릴 것이다. 만약 유저가 죽기라도 한다면 접속 불가 패널티는 일주일.
 만약, 죽음이 반복되어 패널티가 중첩된다면?
 어진이 씩 웃었다.
 오픈 베타 서비스는 이제 일주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진은 모든 유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몬스터, 맵, 던전.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눈에 선했다. 게임을 망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죽인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세계의 왕이 되어야만 한다.
 
 바로 ‘벌레(Bug)의 왕’이.
 
 
 2장 칼날 벌 사냥
 
 
 
 
 
 어진이 제일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초보자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이었다.
 이곳엔 제법 깊은 땅굴이 있다. 유저가 들어갈 수 없게 봉인되어 있었는데 던전의 봉인을 풀려면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칼날 벌의 군체> -등급: ?
 
 어진은 던전 앞을 맴돌았다. 지금 당장 던전의 봉인을 풀 수는 없다. 그래서 돌멩이를 여러 개 들고 던전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붕-
 
 듣기 싫은 날갯짓 소리와 함께. 커다란 벌 한 마리가 던전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에 커다란 장침이 돋아나 있는 벌이다. 어지간한 사람만큼이나 컸다.
 
 <칼날 벌> -등급: D / 특성: 독, 벌레, 군락
 -크기: 1m.
 -덩치는 크지만 느린 벌. 너무 느려서 날개를 움직여 높이 날 수도 없다. 하지만 품고 있는 마비독만은 무시무시하다.
 
 자신이 설계했던 칼날 벌의 기초 데이터를 떠올린 어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몬스터인 칼날 벌이다. 움직임이 매우 느리고 공격력도 낮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엄청난 마비독을 가진 침.
 어지간한 보스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마비독. 맞지 않아서 문제지 일단 한번 맞으면 사망까지 각오해야 한다.
 
 퍽! 퍽! 퍽!
 
 어진이 전력을 다해 던진 돌멩이가 칼날 벌에게 명중했다. 칼날 벌은 어진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어진은 한동안 칼날 벌을 피해 도망 다니며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근접전은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벌에 쏘여 죽으면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버그이기에 부활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될 수도 있었기에 어진은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약 1시간 정도의 사투 끝에, 어진은 칼날 벌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돌에 맞아 깨진 벌의 외골격 사이로 흰 살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휴. 아이템을 못 쓰니 힘드네.”
 
 어진은 아이템을 착용할 수 없다. 초보자에게 지급하는 가죽 갑옷과 목검이 이토록 절실했던 적이 또 없다.
 어진은 축 늘어진 칼날 벌의 시체 앞으로 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칼날 벌의 시체를 헤집었다.
 
 “이렇게 쓰는 건가?”
 
 어진이 스킬 ‘포식’을 발동했다.
 
 우득! 우득! 빠드득!
 
 단단한 뼈가 서로 맞물려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칼날 벌의 몸뚱이가 어진의 팔을 통해 흡수된다.
 
 “끄아아아악!”
 
 어진은 무시무시한 격통에 전율했다. 포식 스킬은 한 번 쓸 때마다 정신이 나갈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어진은 요란하게 울리는 안내창을 보고 황급히 스킬 창을 켰다.
 
 -<포식(Devour)>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이등병) / 랭크 D
 
 “제기랄··· 아파 죽겠네.”
 
 어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손목에 힘을 한번 꾹 주었다.
 
 뿌드득!
 
 손목의 살가죽을 뚫고 하얀 송곳이 솟구쳐 나온다.
 
 “끄악!”
 
 어진은 순간 손목에 느껴지는 또 다른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살이 찢겨지는 아픔이 생생하다! 아마 고통을 조절하는 센서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육체가 없지만 고통은 계속 느껴진다.
 
 “환지통(幻肢痛)이라는 건가······.”
 
 어진은 표정을 찡그린 채 손목에 삐죽 튀어나온 송곳을 바라본다. 흰색의 매끈한 원뿔. 길이를 조절할 수 있지만 최대치는 30cm정도. 강력한 마비독이 샘솟는 송곳이다.
 
 붕! 부웅!
 
 어진은 칼날 벌 송곳을 허공에 대고 휘둘러 보았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송곳. 칼날 벌이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를 갖고도 랭크가 D인 이유는 느린 공격속도와 찌르는 것뿐인 단조로운 공격패턴 때문이다.
 하지만 어진에게 칼날 벌의 독침이 들어간 순간, 그것은 치명적인 무기로 변했다.
 
 “랭크는 낮지만, 가성비가 좋은 것이 칼날 벌이지.”
 
 어진은 손목을 뚫고 튀어나온 송곳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타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칼날 벌 하나가 등에 독침을 맞고 축 늘어진다. 몬스터는 어진이 시야 안에 확연히 드러나기 전까지 전혀 인지를 못 했다. 아마 어진의 은신 능력 ‘무명(no-name)’ 때문인 것 같았다. 선공 몬스터에게도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어진은 꿈틀거리는 칼날 벌의 머리에 마저 송곳을 찔러 넣었다.
 
 뿍!
 
 칼날 벌의 두개골에 난 작은 구멍으로 누런 뇌수가 한 가닥 뿜어져 나온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런 혐오스러운 효과를 차단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어진에게 필터링 기능 따윈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칼날 벌의 시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른 속도로 부패했다. 낮은 랭크의 몬스터일수록 시체는 빨리 부패했고, 시체가 땅에 스며들어 사라지면 아이템이 드롭된다.
 
 -<칼날 벌의 독침>
 지독한 마비독을 품고 있다. 조심할 것!
 
 45cm 가량의 송곳.
 어진은 사냥터를 돌며 칼날 벌의 독침을 모았다. 초반의 칼날 벌은 여러모로 버릴 것이 없었다.
 어진은 칼날 벌의 독침을 대략 오백 개 정도 모았다. 아무리 열심히 사냥을 해도 레벨 따위는 오르지 않는다. 아이템도 바꿔 낄 수 없다. 그래서 어진은 그냥 죽자고 모은 오백 개의 침을 마을 어귀에 쌓아 두었다. 게다가 인벤토리가 없기에 한 번에 많은 양을 옮길 수도 없다.
 
 “휴.”
 
 어진은 마을 주점에 들어가 앉았다. HP가 간당간당하다. 채워지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어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상냥한 목소리. 어진이 뒤를 돌아보니 금발 눈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맥주잔을 내밀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엔 ‘넬’이라고 적힌 글자가 반짝거린다. 그녀는 NPC였다.
 
 “···저리 꺼져.”
 
 어진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넬은 여전히 어진의 앞에서 방긋 웃고 있다.
 
 “칼날 벌떼들 때문에 골치예요. 저희가 만든 꿀 맥주가 그리도 탐날까요?”
 “···귀찮게 굴지 말라고!”
 
 어진은 넬을 툭 밀쳐 냈다.
 넬은 어진의 테이블에서 떨어지더니 옆자리의 빈 테이블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어진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엔 오로지 자신뿐이다.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NPC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 어차피 그들이 주는 퀘스트나 업적, 아이템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니.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 뒤면 달라진다. 수없이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세계로 몰려올 것이다. 사장은 엄청난 돈방석에 앉게 되겠지.
 
 뿌드득!
 
 어진은 이를 갈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게임을 망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한두 명에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갈 일이 아니다.
 어진은 HP가 회복되자 재빨리 일어났다. 주점 안에 있으면 역시 체력 회복이 빠르다. 어떠한 부상도 주점 안에서라면 회복된다.
 
 “좋아! 가자!”
 
 어진은 주점 문을 박차고 나섰다. 저 멀리 마을 울타리 너머로 수북하게 쌓인 칼날 벌의 독침들이 보인다. 이제 저것들을 이용해서 더 상위 랭크에 위치하는 몬스터를 포획해야 했다.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는 어진의 뒤로 NPC 넬의 밝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3장 필드보스 사냥
 
 
 
 
 
 “그-오오오오오!”
 
 구덩이 속에 빠진 한 괴물이 울부짖고 있다. 전신이 녹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괴물. 눈은 살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고, 축 늘어진 주먹코 밑으로 작고 뾰족한 이빨들이 그득하다.
 어진은 구덩이 밑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트롤> -등급: C / 특성: 요정
 -크기: 3m.
 -중앙 숲에 사는 요정. 사악한 기운을 받아 타락했다. 재생력이 매우 뛰어나다.
 
 무려 C급의 몬스터다!
 칼날 벌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였다. 게다가 한 랭크 위로 올라갈수록 힘이 100배 정도씩 강해진다고 보면 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어진은 태연한 기세로 발을 내딛었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트롤의 앞에 섰다.
 
 “끄오오오오!”
 
 트롤은 울부짖는다. 그저 울부짖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다다. 구덩이 바닥과 트롤의 전신에는 백여 개의 칼날 벌 침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45cm나 되는 송곳들은 손잡이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혀 있었다. 또한 그동안 얼마나 날뛰었는지 구덩이 벽에는 온갖 흉터들이 패여 있었다.
 트롤은 어진을 향해 코를 킁킁거린다. 칼날 벌의 마비독은 상당히 강력하다. 그것이 무려 백 개나 박혔으니 제 아무리 트롤이라 할지라도 몸이 성할 리가 없는 것이다. 어진은 손목에서 칼날 벌 송곳을 뽑아 들었다.
 
 뿌득!
 
 살가죽이 찢어지며 송곳이 뽑혀 나온다. 이 통증 때문에 가능한 송곳을 쓰지 않았던 어진이다.
 
 “잘 가라.”
 
 어진은 손목의 송곳으로 트롤의 머리통을 마구 헤집었다.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윽고 축 늘어진 트롤.
 살점이 부글부글 끓으며, 부패가 진행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썩어 없어지는 칼날 벌의 시체와 달리 약 5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부패.
 어진은 트롤의 머리에 대고 포식 스킬을 발동한다. 또다시 끔찍한 고통이 밀려올 것이다. 어진은 이를 악물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포식(Devour)>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상등병) / 랭크 D
 
 어진은 두 손을 높이 들어 환호했다.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트롤의 근육을 얻었다. 팔의 외형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근력은 비교할 수도 없게끔 증가한 것이 느껴졌다.
 
 쾅!
 
 어진은 주먹을 들어 구덩이 한편을 후려갈겼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흙이 무너져 내린다. 구덩이를 팔 때 죽을 둥 살 둥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지형은 오전 열두 시면 초기화되니 딱히 지형을 변화시킨다고 걱정할 것도 없었다.
 
 “좋아. 칼날 벌과 트롤이면 됐어.”
 
 이 둘의 조합이라면 다른 C, D급 몬스터를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최단 시간 안에 최고로 강력한 적을 잡아 포식해야 했다.
 
 “바로 다음 타깃이다.”
 
 어진은 트롤의 근육을 사용해서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HP칸이 비약적으로 길어진 것을 본 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을 흡수하는 바람에 몸 전체의 방어력과 체력 또한 증가한 듯하다. 이대로라면 아이템을 딱히 장비할 필요도 없었다. 더 강한 육체로 갈아 끼면 되니까.
 어진은 중앙 숲의 늪지로 향했다.
 늪과 덤불이 가득한 이 숲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회색빛 안개와 불길하게 생긴 버섯들이 내뿜는 은은한 빛 때문에 숲은 누군가의 악몽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보인다. 어진은 이 눅눅한 숲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준비해 갈 게 있는데······. 분명 이곳에 살았던 것 같아.”
 
 어진은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채팅조차 금지되어 있다 보니(지금은 채팅할 사람도 없지만!) 하루 종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트롤의 팔로 바위를 들어 올리는 어진.
 바위가 들리자마자 그 아래에서 무언가 슉 쏘아져 나온다.
 
 퍼-억!
 
 어진은 뛰쳐나오는 몬스터를 바로 밟아 죽였다. 3미터가 넘는 길이의 붉은 색 지네였다.
 
 <붉은 지네> -등급: D / 특성: 독, 벌레
 -크기: 3m.
 -덩치는 크지만 약한 지네. 피는 마을 사람들에게 보양식으로 통한다.
 
 어진은 주점에서 가져온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지네의 피를 담기 시작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간 몬스터의 내장이나 체액은 아이템화되어 부패하지 않게끔 된다. 어진은 유리병에 찰랑이는 붉은 혈액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지네의 피>
 복용하면 1분간 근력이 20% 상승한다.
 하지만 1분이 지난 후엔 최대 체력의 10%가 사라진다.
 
 “엄밀히 따지면 보양식은 아니군.”
 
 어진은 바위를 들추며 지네 몇 마리를 더 밟아 죽였다. 굳이 흡수는 하지 않았다. 유리병 수십 개를 가득 메운 지네의 혈액. 어진은 그것들을 가죽 자루에 쏟아붓고 짊어졌다.
 붉은 지네의 시체가 부패되기 전에 어진은 그것을 집어 들고 숲의 더욱 깊은 심층부로 향했다.
 
 “분명 이쯤이었지?”
 
 어진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꾸는 악몽처럼 음침한 숲 속. 희뿌연 안개 너머로 검은 풀숲이 보인다. 어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더 눈에 힘을 줘 보았다.
 어슴푸레한 빛을 뿌리는 버섯들 너머로 무언가 뿌연 것이 보인다.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투명한 실 같은 것이 허공에 촘촘하게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어진이 주저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지네를 내던졌다.
 
 출-렁!
 
 허공이 크게 요동쳤다. 투명한 파도가 일어난다. 지네의 시체는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달라붙었다. 이윽고, 지네의 주변부터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촛농처럼 탁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이 지네의 시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덫처럼, 그것은 지네를 꼼짝달싹 못 하게 뒤덮는다. 만약 지네가 살아 있었다고 해도 이 허공의 덫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까드득- 까드득- 까드드득······.
 
 어두운 숲 어디선가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듣기 싫고 불쾌한 소음. 어진이 수풀 아래로 몸을 바싹 낮추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이 숲에서 제일 상대가 까다롭고 음흉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젖거미> -등급: C+ / 특성: 독, 벌레, 잠복
 -크기: 5m.
 -악몽숲의 잠복꾼, 숲에 들어간 이들이 돌아 나오지 못하는 것은 대개 이 녀석 때문일 것이다.
 
 어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C+급 필드보스 몬스터 ‘젖거미’가 등장했다. 일단 덩치에서부터 어진은 압도당했다. 커다란 거미의 외형에 가슴에 여섯 개의 커다란 유방이 달렸다. 그 유방에서 흰 젖이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허공에 풀어지자 투명한 실처럼 변했다.
 
 “필드보스답군.”
 
 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 화면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보니 그 위용이 대단하다. ‘+’가 붙었다는 것은 보스 급이라는 소리. 어지간한 B급 몬스터보다도 강할 것이 분명하다.
 또 젖거미는 C급에선 당할 적수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항상 자기의 아지트 안에서만 싸우기 때문이다.
 즉, 점막이 깔린 둥지 안에서 젖거미를 이길 수 있는 몬스터는 중부대륙에 거의 없다.
 
 “먹어라, 먹어라······.”
 
 어진은 젖거미를 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젖거미는 붉은 지네의 냄새를 맡더니 그냥 덤불 숲 밑으로 돌아가 버렸다.
 
 “죽은 건 안 먹나?”
 
 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젖거미의 인공지능이 생각보다 높았다. 자신이 프로그래밍한 것 이상이다. 어진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살아 움직이는 붉은 지네에게 침을 놓아 마비시킨 어진.
 이윽고, 젖거미가 다시 기어 나왔다.
 
 우적 우적 우적 우적!
 
 몬스터가 몬스터를 먹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기묘한 시스템이다. 몬스터도 허기를 느끼고 그에 따라 HP가 줄어들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젖거미도 살기 위해서, 또 숲의 보스로 계속 군림하기 위해서는 사냥을 하고 먹어야 했다.
 젖거미가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어진은 조심스럽게 거미의 뒤로 접근했다. 젖거미는 선공형 몬스터이다. 필드보스답게 감도 아주 예민했다. 하지만 젖거미는 어진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뿌욱!
 
 어진은 젖거미의 등판에 칼날 벌 송곳을 박아 넣었다.
 
 “챠라라락!”
 
 젖거미는 그제야 어진의 접근을 눈치챘다. 미친 듯이 날뛰는 젖거미. 하지만 어진은 젖거미의 공격패턴을 전부 알고 있었다.
 
 “먼저 거미줄을 뿌릴 것이고.”
 
 촤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 번지는 점액. 어진은 멀찍이 떨어져 젖거미의 동태를 살핀다. 동시에 젖거미의 겨드랑이 부분에 또 한 번.
 
 뿍!
 
 칼날 벌 송곳이 박혀 든다.
 
 “챠라라라락!”
 
 젖거미가 화났다. 젖거미의 푸른색 눈이 붉게 물들었다. 순간 어진은 멈칫했다.
 
 ‘뭔가 이상하다!’
 
 젖거미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젖거미의 공격패턴은 거미줄을 던지고 꼼짝달싹 못 하게 된 상대에게 다가가 이빨을 박아 넣는 것이다. 한데?
 
 뻐-억!
 
 젖거미는 앞다리에 연결된 거미줄을 당겼다. 그 끝에 묵직한 바윗돌이 붙어 있었기에 어진은 난데없는 돌팔매에 적중당할 수밖에 없었다.
 
 “큭!”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한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챠라라락!”
 
 거미가 열다섯 개나 되는 다리를 휘젓는다. 그 끝에서 거미줄이 휘둘러진다.
 
 “이런 공격패턴은 없었는데!?”
 
 어진은 땅을 굴러 피했다. 하지만 이미 퇴로가 막혔다. 바위와 썩은 통나무가 어진의 도주로를 완벽히 차단했다.
 
 “챠라라락!”
 
 젖거미가 다가온다. 눈이 붉게 물든 것을 보니 붉은 지네의 피 때문에 근력이 상승한 모양이다. 어진은 이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다. 어째서일까? 필드보스 몬스터의 인공지능이 이렇게 높아진 이유는?
 
 “제길!”
 
 뿌욱!
 
 어진은 손목에서 칼날 벌 송곳을 꺼내 들었다. 트롤의 근육을 얻었다고는 하나, 아직 젖거미를 상대하긴 무리다. 하지만 어진에겐 확신이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눈빛.
 
 “챠라라라락!”
 
 젖거미가 막 어진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우뚝!
 
 젖거미의 다리가 순간 둔해졌다. 그리고.
 
 쿵!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젖거미. 놈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열 개나 되는 눈을 멀뚱멀뚱 굴린다.
 
 “붉은 지네의 피와 칼날 벌의 독이 합쳐지면 제법 독해지지.”
 
 어진이 젖거미를 향해 다가갔다. 거미는 비틀비틀하면서도 몸을 똑바로 가누려 노력했다.
 순간, 젖거미와 어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진이 눈살을 조금 찌푸린다.
 
 “당장 사냥은 어렵겠군.”
 
 젖거미는 방어력이 굉장히 높다. 치명적인 장기들은 두터운 외골격과 털, 지방층 안에 꼭꼭 숨겨져 있다. 트롤의 근력과 칼날 벌의 독 송곳으로도 무리일 것이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어진은 빙긋 웃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젖거미의 배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해 온 가죽 자루에 젖거미의 젖을 쭉쭉 짜 담기 시작했다.
 젖거미는 약 5분 정도 마비되어 있었다. 어진은 그동안 준비해 온 자루 다섯 개에 젖거미의 젖을 가득 담았다.
 
 “챠라라락!”
 
 젖거미가 슬슬 다시 움직이려는 조짐을 보이자 어진은 미련 없이 뒤로 빠졌다. 젖거미를 전투불능이 될 정도로 찌르는 것보다 젖거미가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짧다. 젖거미의 외골격이나 유방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은 좀 아쉽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유방 같은 건 없는 게 나을지도.”
 
 어진은 자신의 가슴을 쓸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실 큰 유방은 여자 캐릭터에게나 어울리지 자신에겐 거추장스럽다. 거미줄을 줄줄 뿜어내는 것도 보기에 별로 안 좋고.
 어진은 스킬 창을 열어 보았다.
 
 <포식(Devour)>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대위) / 랭크 D
 
 어진은 흡족한 얼굴로 스킬창을 들여다보았다. 쓰면 쓸수록 칼날 벌 스킬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성장형 스킬이란 손에 넣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성장 다양성이 너무나도 천차만별이었기에 그 결과를 어진이라고 해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진은 몇몇 좋은 스킬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칼날 벌에 관한 스킬이다.
 
 “유저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일이지.”
 
 D급 몬스터 칼날 벌.
 이 녀석들과 관련된 떡밥은 먼 훗날 퀘스트나 이벤트로 풀릴 것이다. 어진은 이 모든 공략들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 * *
 
 주점에 들어온 어진이 기지개를 켰다. NPC인 넬이 어김없이 어진에게 다가와 맥주를 권했고 어진은 무시했다.
 
 “자 이제 준비가 끝났다!”
 
 어진은 유리병에 담긴 붉은 지네의 피와 젖거미의 젖 자루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손목엔 칼날 벌의 강력한 마비독침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운반할 근력도 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어진은 자루들을 짊어지고 또다시 사냥터로 향했다. 빈 주점 안에서 넬이 맥주를 권하는 소리만 쓸쓸하게 울리고 있었다.
 
 * * *
 
 어진은 넓은 평원으로 나섰다. 중부대륙의 거의 끝자락에 있는 평원이다. 어진이 목표로 하는 몬스터는 분명했다.
 
 <리자드맨> -등급: C / 특성: 백전노장, 파충류
 -크기: 2m 이상.
 -플레이어에게 죽기 직전까지 성장한다. HP가 깎였다가 최대치까지 회복되면 입었던 피해량만큼 최대 HP가 증가한다. 젠(generation) 이후 시간에 비례해 크기와 최대 HP가 천천히 상승한다. 최대 HP는 처음 젠 되었을 때의 10배를 넘지 못한다.
 
 리자드맨은 어진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몬스터였다. C랭크에서 가장 고른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무리 지어 다니지도 않는다. 탁 트인 곳에서 살 뿐만 아니라 영역표시까지 확실하여 찾아내기도 쉽다.
 게다가 지니고 있는 패시브 특성, ‘백전노장’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어진의 처음 생명력은 10. 트롤을 흡수한 이후 100 언저리까지 늘어났다. 만약 리자드맨을 잡아먹을 수만 있다면?
 어진은 공들여 함정을 팠다.
 리자드맨의 비늘은 단단해서 칼날 벌의 독침이 파고들긴 무리다. 그래서 함정 안에 채운 것이 바로 젖거미의 젖이었다. 거기에 붉은 지네의 피까지 붓고 젓자 함정은 걸쭉한 핏빛 웅덩이로 바뀌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세 개의 디버프가 결합된 콜라보레이션이지.”
 
 함정으로 발을 묶고 지네의 피로 광폭화한다. 그렇다면 젖거미의 젖은 더욱더 빨리 굳는다. 그 뒤에 어진은 간단히 리자드맨의 강력한 육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자 빨리 오너라.”
 
 어진은 일부러 냄새를 풍기며 걸었다. 팔 벌려 뛰기도 하고 크게 심호흡도 했다. 리자드맨은 후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바람에 실려 온 어진의 냄새를 맡자마자 달려올 것이다.
 
 쿵쿵쿵쿵!
 
 멀리서 옆은 진동이 들린다. 어진은 쾌재를 불렀다. 언덕을 날듯 뛰어내려 오는 도마뱀이 보였다. 두 다리로 맹렬히 뛰어오는 리자드맨. 어진은 함정 뒤편에 서서 리자드맨을 약 올렸다.
 
 “크워어어어억!”
 
 리자드맨은 어진을 향해 달려오다가 바닥으로 쑥 빠졌다. 어진은 그것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리자드맨의 육체를 얻는다면 젖거미와도 다시 한 번 해 볼 만했다. 어진은 리자드맨의 날카로운 손톱과 단단한 비늘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곧 내 것이 된다. 어진은 그렇게 믿었다.
 리자드맨이 구덩이를 뛰쳐나오는 것을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헉!?”
 
 어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리자드맨은 젖거미의 젖을 너무도 쉽게 찢어발겼다. 이윽고 리자드맨의 거대한 몸뚱이가 어진의 앞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을 본 어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좆됐다!’
 
 눈앞에 선 거대한 괴물은 리자드맨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엔 비슷하지만 체격이 1미터가량 더 크다. 또 일반적으로 녹색을 띠는 비늘과 손톱도 피를 머금은 것처럼 새빨갛다.
 
 <리자드 킹> -등급: C+ / 특성: 파충류, 피어, 백전노장
 -크기: 3m 이상.
 -플레이어에게 죽기 직전까지 성장한다. HP가 깎였다가 최대치까지 회복되면 입었던 피해량만큼 최대 HP가 증가한다. 젠(generation) 이후 시간에 비례해 크기와 최대 HP가 천천히 상승한다. 최대 HP는 처음 젠 되었을 때의 10배를 넘지 못한다.
 
 어진은 재빨리 리자드 킹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맵 ‘기어 다니는 평원’의 왕. 이 몬스터 역시 어진이 만들어 낸 것이다.
 
 ‘빌어먹을!’
 
 리자드 킹은 리자드맨과 비교해서 모든 능력치가 100배 이상이었다. 게다가 설정에 의하면 이 몬스터는 중부대륙을 통틀어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강하다.
 어쩐지 주변에 D급 몬스터인 ‘외눈 수리’나 ‘굶은 늑대’ 등이 안 보인다 했다. 리자드 킹은 ‘피어’스킬도 가지고 있다. 즉, 일정 수준 이하의 몬스터는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놈을 만날 확률은 엄청나게 낮은데!’
 
 평범한 플레이어가 기어 다니는 평원에서 리자드 킹과 조우할 확률은 1% 미만. 하지만 재수 없게도 어진은 여기서 놈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 상황에선 미친 듯이 도망가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어진은 온 힘을 다해 뒤돌아 뛰었다.
 리자드 킹은 젖거미와는 다르게 호전적이다. 한번 자기 영역을 침범한 적을 결코 살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놈의 비늘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비늘과 비늘 사이에서 붉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워어어어!”
 
 리자드 킹이 어진의 뒤를 쫒는다.
 엄청난 덩치,
 그리고 엄청난 속도.
 어진은 순식간에 리자드 킹에게 따라잡혔다.
 
 “제길!”
 
 어진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어진은 ‘기어다니는 평원’에서 ‘악몽숲’으로 달렸다. 악몽숲 바닥에 고인 늪지대에 리자드 킹을 빠트려 역습을 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맵을 만든 것도 어진이다. 그는 어디에 독 웅덩이가 있고 어디에 바닥없는 늪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없이 십수 년간 이 게임에만 몰두했던 그였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지만.
 
 “크-워어어어억!”
 
 리자드 킹은 무시무시했다.
 가로막는 통나무나 바위는 일격에 박살이다. 늪에 빠지면 꼬리의 힘으로 펄쩍 뛰쳐나왔다. 거기다 독 따위는 리자드 킹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어진은 어느덧 막다른 길에 몰렸다. 바위와 통나무가 어진의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곳. 어진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크르르르르르······.”
 
 리자드 킹이 시뻘건 손톱을 들이민다. 이 거대한 덩치가 막 어진의 목을 날려 버리려는 순간. 어진이 비릿하게 웃는다.
 
 “보험을 들어 놓길 잘했군.”
 
 동시에.
 턱 하고 리자드 킹의 손톱이 멎는다. 다섯 개의 붉은 칼날이 허공에 못 박힌 것처럼 정지했다. 동시에, 리자드 킹의 손톱 주변이 허옇게 물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덤불숲 저편에서 소름 끼치는 괴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드득······.
 
 “챠라라라라락!”
 
 덤불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악몽숲의 보스 젖거미였다! 놈의 등장은 천하의 리자드 킹마저 당황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젖거미는 어진을 향해 손톱을 휘두르려던 리자드 킹을 들이받아 멀리 날려 버렸다.
 
 “그렇지!”
 
 어진이 환호했다. 주머니엔 주점에서 가져온 팝콘이 들었다. 어진이 팝콘을 까먹는 동안 리자드 킹이 벌떡 일어났다.
 
 “크워어어어억!”
 
 리자드 킹은 설정상 한평생을 왕으로 살아온 존재다. 젠이 된 이후 자신에게 덤벼들던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당혹감에 앞선 분노가 리자드 킹을 감쌌다.
 
 -리자드 킹이 피어를 준비합니다!
 
 주변에 경고음이 울렸고, 어진은 재빨리 통나무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리자드 킹의 피어는 C급 이하의 모든 플레이어와 몬스터를 기절시킨다. 어진은 통나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챠라라락!”
 “크워어억!”
 
 리자드 킹이 열 개의 손톱으로 젖거미의 복부를 가차 없이 찢어발기는 것이 보였다. 젖거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모든 다리를 이용해 리자드 킹의 몸에 거미줄을 휘감고 있었다. 어진은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헉!”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진은 썩은 통나무 밑에서 눈을 떴다. 황급히 밖으로 기어 나와 보니 주변 지형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다. 잠시 기절해 있었던 것 같다.
 
 “끙··· 아직 내가 C급 몬스터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어진은 뒷머리를 긁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흡수한 거라곤 트롤과 칼날 벌의 육체뿐이니까. 어진은 땅에 패인 흔적을 뒤쫓아 갔다. 끈적한 점액과 비늘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리자드 킹의 붉은 비늘을 집어 든 어진이 휘파람을 불었다.
 
 “젖거미가 선전했나 보군.”
 
 사실 육체의 능력만 놓고 보면 젖거미는 절대 리자드 킹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은 젖거미의 아지트. 승부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진은 숲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깊은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어진이 낭떠러지 저 아래를 향해 고개를 길게 뺐다.
 
 “저런.”
 
 비참하게 죽어 있는 젖거미가 보였다. 놈은 머리 팔다리가 모조리 뜯겨 나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어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절벽 끝에 리자드 킹이 서 있었다. 놈은 전신을 단단하게 옥죈 거미줄에 걸려 꼼짝도 못 하고 있다. 아마 놈은 최후의 순간, 젖거미를 절벽 아래로 집어 내던졌을 것이다. 거미줄을 다 쓴 젖거미는 허공을 붙잡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쿠욱··· 후욱······.”
 
 리자드 킹이 뿜어내고 있는 거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어진은 조용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리자드 킹은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두 눈을 들어 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피어를 쓴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HP가 한계까지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목말라?”
 
 어진은 리자드 킹에게 물었다. 리자드 킹이 날카로운 이빨을 으득 하고 간다. 어진은 유리병 두 개를 꺼냈다. 붉은 지네의 피가 담겨 있다.
 
 “한잔해.”
 
 붉은 지네의 피가 리자드 킹의 입으로 들어간다.
 
 “크륵!”
 
 리자드 킹이 광폭화했다. 하지만 놈의 전신엔 젖거미가 사력을 다해 뿜어낸 거미줄이 수백, 수천 겹이 중첩되어 감겨 있다. 제아무리 필드보스라고 해도 동급의 필드보스가 짜낸 최후의 필살기를 쉽게 격파할 수는 없다.
 
 “끄-오오오오!”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리자드 킹의 HP가 점점 줄어들었다. 어진은 그때 비로소 붉은 지네의 피를 마셨다. 비리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간다.
 
 뿌욱!
 
 어진의 칼날 벌 송곳이 리자드 킹의 목울대를 강타했다.
 평소대로라면 비늘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젖거미의 이빨은 리자드 킹의 몸 구석구석에서 비늘을 떼어 놓았고, 어진의 송곳은 바로 그 부분을 정확히 찔렀다.
 
 “그륵······.”
 
 리자드 킹의 고개가 꺾였다.
 
 -필드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축하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업적 달성이나 퀘스트 보상 따위는 일절 주어지지 않았다. 어진은 버그다. 벌레에게 보상을 주는 시스템은 없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챙겨 가야겠지.”
 
 어진은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그리고 리자드 킹의 시체에 대고 포식 스킬을 발동했다.
 
 우드득! 빠각!
 
 리자드 킹의 시체 일부가 어진의 몸으로 흡수된다. 살덩이가 꾸물꾸물하더니, 이내 어진의 전신에 시뻘건 비늘이 돋아난다. 동시에 어진의 열 손가락 끝이 날카롭게 변했다.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소령) / 랭크 D
 
 “됐다!”
 
 어진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C+급 몬스터를 흡수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오픈 베타 초반에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다니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부족해.”
 
 기쁨도 잠시, 어진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게임을 라이트하게 즐기는 유저들이야 상대하기 쉽겠지만 플레이에 목숨 거는 인간들을 만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또한 현실에서 무술 사범이나 특수 군인 등을 만난다면 또 상황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차원이 다르게 강해져야 해. 그 누구도 덤빌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차앙!
 
 리자드 킹의 붉은 손톱이 뽑아져 나온다. 어진은 새로 얻은 스킬을 훑어보았다.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 파충류들의 왕 자격을 타고난 이의 손톱.
 자격미달인 존재는 이 손톱을 맞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피어).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 어지간한 물리, 마법 데미지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설명이 구구절절하군.”
 
 중요한 특징이 서술되어 있었지만 어진에게는 그저 잔소리일 뿐이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은 어진이 설정하고 부여한 것들이니까. 리자드 킹은 비늘보다는 손톱에 초점이 맞춰진 몬스터다. 어지간한 수준의 명검을 만들 땐 통째로 가져다 써도 될 정도로 강도와 내구성이 좋다.
 
 “그렇다면 이젠?”
 
 어진은 다시 스킬 창을 켰다. 스킬 창이 곧 상태 창이기도 하다.
 
 -이어진
 HP: 103/8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피어)
 └ 파충류들의 왕 자격을 타고난 이의 손톱. 자격이 없는 존재는 이 손톱을 맞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피어).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 어지간한 물리, 마법 데미지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소령) / 랭크 D
 
 리자드 킹의 육체를 빼앗은 기쁨에 잠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칼날 벌 송곳이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소령이라.”
 
 어진이 픽 웃었다. 원하는 계급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D급 스킬이니만큼 올리기야 쉽겠지만··· 이제 막 영관급으로 진입한 이상, 당분간 레벨업은 힘들 것이다.
 
 “다음 타깃.”
 
 이제 리자드 킹마저 흡수했으니 거칠 것이 없다. 어진은 아쉬운 얼굴로 절벽 아래의 젖거미를 등졌다. 놈의 유방마저 흡수했다면 중부대륙에서는 정말 두려울 것이 없었을 텐데······.
 지금까지 두 마리의 필드 몬스터를 상대했다. 중부대륙은 초보자들을 위한 사냥터. 초보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 마리의 필드보스 중 한 마리가 남았다. 어진은 바로 그 녀석을 잡으러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오픈 베타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젠 정말 서둘러야 했다.
 
 
 4장 던전 보스 사냥
 
 
 
 
 
 중앙대륙은 초보자들을 위한 곳이다.
 이곳만 해도 상당히 넓어 탐험하는 데 한 달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월드맵 구석구석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어진에겐 제집 안방과도 같은 곳이다
 
 “젖거미는 한 달 뒤에나 리젠될 텐데.”
 
 어진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너무 늦다. 그 시간이면 젖거미보다 훨씬 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난 뒤일 게다. 하는 수 없다. 어진은 곧바로 다음 타깃을 향해 움직였다.
 
 “그 전에 준비할 게 또 있지.”
 
 어진은 주점에 들렸다. 주점엔 단순히 술만 파는 것이 아니다. 밧줄이나 단도, 간단한 물약 정도도 구할 수 있다. 왜냐면 가게 주인 NPC들이 주점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까! 일정 시간이 되면 NPC들은 가게 문을 닫고 주점으로 모인다. 참 쓸데없이 구체적인 현실고증이다.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넬이 말을 걸어온다. 주점에서 유리병과 밧줄을 챙기던 어진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난 술을 안 마셔.”
 
 “칼날 벌떼들 때문에 골치예요. 저희가 만든 꿀 맥주가 그리도 탐날까요?”
 
 어진은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간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못했다. 어진은 가만히 넬을 쳐다보았다. 큰 눈과 오뚝한 코. 터질 듯한 몸매.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 남자 수천은 몰고 다녔을 외모.
 하지만 그녀 역시 일개 인공지능일 뿐이다.
 어진은 테이블에 다가온 넬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 대신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흔들귀(鬼)의 미궁에 들어갈 생각이야.”
 
 순간, 넬이 멈칫한다.
 어진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착각이었을까? 넬은 언제와 마찬가지로 영업 미소를 띤 채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난 이곳에 갇혔어. 탈출도 못 해.”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도 못 해. 바깥의 육체는 죽어 버렸어.”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용서 못 해. 날 이렇게 만든 놈들. 전부 망하게 할 거야.”
 “날이 덥죠? 맥주 한 잔 어떠세요?”
 “너한테는 미안하다. 언젠가 이곳은 사람들로 붐비게 되겠지. 하지만 다시 아무도 오지 않게 될 거야. 이 게임, 망할 테니까.”
 
 넬은 정해진 행동 패턴에 따라 다음 테이블로 걸어갔다. 어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뭐 하는 거람? NPC를 데리고······.
 그래도 간만에 말을 하니 좀 살 것 같았다. 누군가와 대화했다는 것이 상쾌함이 들었다. 비록 제대로 대화는 아니었지만.
 
 “가 볼까.”
 
 어진은 밧줄을 들고 일어섰다. 이제 던전에 들어갈 시간이다. 그 전에 앞서, 어진에게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이템을 쓰지 못한다면야······.”
 
 어진이 찾은 곳은 초보자 마을 근처의 한 축축한 동굴이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이 동굴엔 딱 한 가지 몬스터만이 등장한다.
 
 <슬라임> -등급: D / 특성: 재생
 -크기: ?m.
 -젤리 타입의 몬스터. 어떤 커다란 괴물의 목구멍에 낀 가래가 어느 날부터 생명력을 얻어 움직였다.
 
 동굴 벽면에 붙어 끈적끈적하게 늘어지는 몬스터, 슬라임이다.
 초보자가 목검으로 몇 번 내리치면 죽는 슬라임 HP의 최대치가 5 정도뿐인 약한 생명체이다. 거기에 슬라임 킹이라고 해봐야 무작위로 움직이던 슬라임 세 마리가 엉겨 붙어 만들어지는 것이 고작.
 하지만 어진은 이 슬라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어진은 자신이 설정했던 재생 특성을 떠올렸다.
 
 재생: 어떤 피해이든지 결국엔 끝까지 재생해 낸다.
 
 슬라임은 약하지만 특성만큼은 사기적인 몬스터였다.
 몸에 구멍이 나던 사지가 잘리던 결국엔 원형 그대로 재생한다. 어진이 알기로 재생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지닌 몬스터는 월드맵 전체를 통틀어 딱 두 종류밖에 없다.
 
 “불사조와 슬라임. 이 둘뿐이지.”
 
 놀랍게도 불사조와 슬라임의 패시브 스킬은 똑같다. 재생.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불사조가 슬라임보다 최대 HP가 훨씬 많고 다른 스킬도 다채롭다는 정도. 하지만 재생력에 대해서만큼은 동일하다. 불사조를 만들 때 슬라임의 데이터가 제일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도 어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월드맵 저 끝에 둥지를 틀고 있을 불사조를 지금 잡는 것은 무리다. 슬라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진은 슬라임을 발로 짓밟아 뭉갰다. 그리고 포식 스킬을 발동했다.
 
 -이어진
 HP: 8000/8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피어)
 └ 파충류들의 왕 자격을 타고난 이의 손톱. 자격이 없는 존재는 이 손톱을 맞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 어지간한 물리, 마법 데미지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소령) / 랭크 D
 -슬라임의 피부 / 랭크 D
 
 슬라임의 특성엔 별도의 설명이 없다. 불사조 다음가는 재생력을 보이는 몬스터인데 그 점을 어필하지 않다니······.
 어진은 혀를 끌끌 찼다.
 개발팀 직원들이 일을 아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오픈 베타가 코앞인데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저도 모르게 게임을 걱정하던 어진이 순간 머리를 저었다.
 
 “놈들의 무능함은 나에겐 희소식이지.”
 
 어진은 개발팀 직원 전체를 다 알고 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버그를 찾아내 소멸시키는지, 어느 시점을 타이밍으로 업데이트를 하는지, 어떤 퀘스트와 업적을 만들길 좋아하는지. 앞으로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부릴 GM들. 한때 부하 직원이었던 그들이 이젠 최대의 적이다.
 
 “가 볼까!”
 
 어진이 향한 곳은 흔들귀의 미궁. 중앙 대륙에 있는 초보자용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어진만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히든 퀘스트!
 
 그것이 어진이 노리는 바였다.
 
 <흔들귀(鬼)의 미궁> -등급: C
 
 어진은 어렵지 않게 흔들귀의 미궁을 발견했다. 초보자 마을 북쪽의 폐가에 들어가 장판을 뜯어내면 갈 수 있다. 아마 신규 유저들이라면 이 던전을 발견하기까지 애 좀 먹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낡고 오래된 먼지들이 부유하는 것이 보인다. 어진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시커먼 미궁은 위로, 아래로도 전부 복잡하다. 단순히 좌우로만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이나 구덩이, 발판 등을 이용해 위아래로도 움직여야 아래로 가는 길이 나온다.
 
 -제일 늙고 지혜로운 이조차도 마을 북쪽에 있는 이 오래된 구멍이 언제, 왜 생겨났는지 알지 못했다. 땅을 잡아 흔들 정도로 큰 귀신들이 그 아래에서 계속 기어 나왔다. 이에 몇몇 용감한 이들이 힘을 모아 구멍의 벽에 미궁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부터 귀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어진은 던전의 설명을 껐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궁 저편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어진은 벽에 납작 붙었다.
 
 “오오오오······.”
 
 거대한 인간형 몬스터 하나가 계단을 내려온다. 키가 최소 5미터는 넘어 보인다.
 
 <오니(鬼)> -등급: C / 특성: 거인
 -크기: 5m 이상.
 -화가 나면 지면을 움켜쥐고 흔든다. 그러면 지진이 일어난다. 던전 내부가 맨날 흔들리는 것도 다 이놈들 탓이다.
 
 “어디 한번 붙어 볼까?”
 
 C급 몬스터와 독고다이. 어진은 자신이 있었다. 다짜고짜 오니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어진은 냅다 놈의 발목을 걷어찼다.
 
 “오?”
 
 오니는 맨 처음 어진을 봤을 때만 해도 고개를 갸웃했다. 눈에는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식되지 않는 인간. 마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서 정면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오니는 발목을 감싸 쥔 채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지면에 머리를 쾅 부딪친 오니의 HP가 조금 줄어들었다.
 
 “니-이이이!”
 
 오니가 화가 난 모양이다. 어진을 잡으려 커다란 손을 뻗는 오니. 하지만 어진은 가볍게 피하며 칼날 벌 송곳을 꺼내 든다.
 
 뿍!
 
 오니의 손바닥에 마비독침이 쏘아졌다. 어진은 씩 웃었다. 슬라임의 피부를 얻었기에 이제 송곳을 꺼내도 별로 아프지 않다. 하지만 오니는 그와 반대로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쾅!
 
 오니의 발차기가 어진에게 날아든다. 집채만 한 통나무가 날아오는 것 같다.
 
 터-억!
 
 하지만 어진은 오니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리자드 킹의 비늘은 어지간한 물리 충격 따윈 무시한다. 동시에 열 개의 핏빛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쩌억!
 
 오니의 머리통이 수십 조각이 나 흩어졌다. 일격!
 
 “이거 굉장하군!”
 
 어진은 리자드 킹의 손톱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내 오니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어진. 어진은 오니의 몸을 빼앗을까 잠깐 고민했다.
 오니와 트롤은 둘 다 C급. 둘 다 근력이 메인인 몬스터다. 하지만 근력만 놓고 본다면 트롤이 좀 더 낫다.
 
 “혹시 모르니 해 볼까?”
 
 어진은 오니의 시체에 대고 흡수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어진은 스킬 창을 켜 보았다.
 
 -이어진
 HP: 7999/8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피어)
 └ 파충류들의 왕 자격을 타고난 이의 손톱. 자격이 없는 존재는 이 손톱을 맞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 어지간한 물리, 마법 데미지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소령) / 랭크 D
 -슬라임의 피부 / 랭크 D
 
 “바뀐 게 없잖아?”
 
 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쩔 수 없다. 상태창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직접 코드를 분석해야 했다. 어진은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점검해 보았다. 0과 1로 이루어져 있을 자신의 몸. 눈을 감자 육체의 데이터가 보였다.
 
 “그렇군.”
 
 어진은 그제야 오니의 육체를 빼앗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트롤의 데이터가 오니의 데이터를 먹어 버린 것이다. 빼앗은 신체 부위가 같다면 그 안에서도 먹이사슬에 의한 포식이 일어난다. 약한 세포는 강한 세포에게 먹히는 법이다.
 
 “같은 부위를 여러 몬스터의 것으로 중첩하는 것은 안 되겠군.”
 
 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일이다. 어진은 미궁을 해매는 동안 세 마리의 오니를 죽였다. 어진이 애초에 설정해 놓기로는 지하 1층의 오니 200마리를 전부 죽여야 2층으로 가는 비밀문이 열린다. 이것 역시 히든 퀘스트였다.
 
 “하지만 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으니······.”
 
 어진이 알기론 히든 던전을 클리어할 경우 제법 좋은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어진은 장비 아이템을 장착할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었다.
 
 “모아 두기라도 할까?”
 
 일단 힘닿는 대로 손 개수만큼은 들고 다닐 수 있으니 한번 시도는 해 봄 직하다.
 또 어진은 포식 말도고 사기적인 스킬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무명(no-name)’이 바로 그것이다. 흉폭하지만 둔한 오니들은 어진이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봤지만 그것을 주목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뿍!
 
 199번째의 오니가 고꾸라졌다.
 최단시간 안의 사냥이다. 아마 오픈 베타가 시작되고 게임 좀 한다하는 유저들이 대거 몰려온다 해도 이 복잡한 미궁과 흉악한 오니들을 상대로 1층 클리어를 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이제 한 마리 남았군.”
 
 어진이 오니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꼽자면 거인형 몬스터들을 상대로 하는 전투감각?
 어진은 거의 6시간 만에 1층에 있는 오니 200마리를 전부 죽였다. 미니맵도 제공되지 않는 드넓은 미궁에서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는 오니들을 하나하나 전부 죽인다는 것은 굉장한 집념이다. 만약 일반적인 유저였다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히든 퀘스트란 남들과 다른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진은 거침없이 미궁 제일 안쪽의 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 한 명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균열이 벌어져 있었다.
 
 <흔들귀(鬼)의 미궁 2층> -등급: C+
 
 던전 등급 앞에 +가 붙었다. 어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능할까?
 
 -이어진
 HP: 8000/8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 파충류들의 왕 자격을 타고난 이의 손톱. 자격이 없는 존재는 이 손톱을 맞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피어).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 어지간한 물리, 마법 데미지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트롤의 근육 / 랭크 C
 -칼날 벌의 손목 송곳(칼날 벌 소령) / 랭크 D
 -슬라임의 피부 / 랭크 D
 
 C+급 스킬 두 개와 C급 스킬 하나. D급 스킬이 다시 두 개다. 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붙어 볼 만했다.
 흔들귀 미궁의 왕을 만나기 위해, 어진은 균열로 몸을 던져 넣었다.
 
 균열 끝에 고인 어둠. 어진은 균열에 들어가자마자 미친 듯이 뜨는 경고음을 들었다.
 
 -아카오니가 지진을 준비합니다!
 -아카오니가 지진을 준비합니다!
 
 “들어가자마자 환영이 격한데?”
 
 어진이 빙긋 웃으며 돌기둥 뒤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키가 1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괴물이 으르렁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붉은 피부에 외눈. 이마엔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부러져 있다.
 
 <아카오니(赤鬼)> -등급: C+ / 특성: 거인. 자연재해, 융합
 -크기: 12m.
 -7대 악마 중 하나인 베히모스의 부하. 지상을 침공하라는 명을 받아 지옥에서 올라왔지만 머리가 나빠 여태껏 미궁에 갇혀 있다. 오래도록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괜찮다. 그에게 지령을 내렸던 베히모스도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니라서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지 오래니까.
 
 “오-니이이이익!”
 
 아카오니가 바닥을 구르며 소리 지른다. 어진은 놈의 최대 HP가 약 1만 2천가량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HP는 8,000. 여기에 몇몇 몬스터들의 특별한 기술을 추가적으로 지녔다. 능력치만 놓고 보면 대등하다.
 
 “한판 뜨자, 덩치.”
 
 어진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아카오니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움직임은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나 한 번, 한 번의 리치나 도약이 엄청나다.
 
 콰-쾅!
 
 아카오니가 주먹을 휘두르자 미궁의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어진은 날쌔게 몸을 피한 뒤 아카오니의 팔뚝에 칼날 벌 송곳을 찔러 넣었다.
 
 뿍!
 
 칼날 벌의 마비독은 강하지만 아카오니의 체구를 생각하니 약발을 바로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오니이이익!”
 
 아카오니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카오니가 지옥불을 토해 냅니다!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진은 서둘러 돌기둥 뒤로 숨었다.
 
 후루루루룩!
 
 입에서 지옥의 화염이 토해져 나온다. 어진의 예상과는 달리, 아카오니는 불을 뿜어내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콱!
 
 돌기둥 뒤에 숨어 있던 어진은 조금 당황했다. 기둥 뒤에서 커다란 주먹이 튀어나와 어진을 공격한 것이다.
 
 콰-쾅!
 
 “커헉!?”
 
 아카오니의 주먹에 맞은 어진은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황급히 고개를 드니 오른팔이 보이지 않는다. 아카오니의 주먹에 맞아 통째로 찢겨 나간 것이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어진은 겨우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진이 프로그래밍해 둔 바에 의하면 아카오니는 불을 뿜어내는 동안은 움직임을 멈춘다. 아카오니의 인공지능이 어진이 설정해 둔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어진은 황급히 왼팔의 칼날 벌 송곳으로 오른팔이 찢겨져 나간 곳을 찔렀다. 상처 부위가 빠르게 마비되었고 이내 고통이 둔해졌다.
 
 “빌어먹을! 한방 더 간다.”
 
 어진은 왼손을 들어 달려드는 아카오니의 발등에 칼날 벌 송곳을 박아 넣었다. 동시에 뽑혀져 나오는 리자드 킹의 손톱!
 
 “오니이이익!”
 
 아카오니가 소리를 질렀다. 리자드 킹의 손톱엔 붉은 지네의 피가 묻어 있다. 아카오니의 외눈이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든다. 어진은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어진
 HP: 3,021/8,000
 
 주먹 한 방에 HP가 절반이 넘게 깎였다. 오른팔도 뜯겨 나갔다. 만약 리자드 킹의 비늘이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슬라임의 초회복능력이 있어 오른팔 재생은 문제없지만 HP가 회복되는 속도 자체는 매우 느리다. 어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차피 한 방 맞으면 골로 갈 거, 광폭화 좀 걸어 줬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지.”
 
 어차피 한 대 더 맞으면 죽는다. 그렇다면 놈의 HP를 깎을 수 있는 수단을 최대한 동원하는 게 좋다. 광폭한 아카오니가 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진은 일전을 피하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콰쾅!
 
 또다시 미궁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지형이 변하고 있다. 특성 중에 하나가 왜 자연재해인지 알 것 같았다. D급 몬스터 일만 마리가 와도 상대할 수 없는 C+급 몬스터의 위엄이다.
 
 “오니이이이익!”
 
 아카오니가 지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가 지면을 향해 쾅 박아 넣는 아카오니. 놈은 그 상태에서 팔에 힘을 주었다.
 
 우둑! 우둑!
 
 붉은 팔뚝에 수도 파이프 같은 핏줄들이 불거져 나왔다. 이내, 아카오니는 온 힘을 다해 꽉 움켜쥔 지면을 흔들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쿠······!
 
 지면이 파도치듯 출렁였다. 발바닥을 통해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 하지만 어진은 몸을 웅크린 채 지진을 견뎌 냈다.
 슬라임의 피부는 충격을 받는 순간 점성이 있는 액체 형태로 변해 데미지를 줄여 준다. 마치 고무가 지진을 버티는 구조와 같다.
 
 “슬라임을 잡길 잘했군.”
 
 어진은 재빨리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이어진
 HP: 987/8,000
 
 아카오니의 필살기인 지진. 하지만 오히려 평타에 적중당했을 때보다 피해가 적다.
 
 “오니이이이익!”
 
 아카오니가 울부짖었다. 놈은 지진을 쓴 뒤엔 잠시 탈진 상태가 된다.
 
 “슬슬 약발이 들을 때가 됐는데······.”
 
 어진은 초조한 눈으로 아카오니의 주변을 맴돈다. 그때.
 
 휘청!
 
 아카오니가 한 번 중심을 잃었다.
 순간이었지만 놈이 발을 헛딛는 것을 어진은 포착했다. 붉은 지네의 피와 칼날 벌 독이 이제야 효과가 있는 모양!
 
 “쇼 타임이다!”
 
 어진은 자신도 붉은 지네의 피를 들이켰다. 트롤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동시에 칼날 벌 송곳과 리자드 킹의 손톱도 동시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광폭화.
 
 어진의 전신에 칼날 같은 붉은 비늘이 촘촘히 선다. 마치 붉은 호저를 보는 듯한 모습. 그 상태로 어진은 정면의 아카오니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뒈져라!”
 
 다섯 개의 손톱이 날아든다.
 
 쩌억!
 
 아카오니의 안면이 도려내졌다.
 
 “오니이이익!”
 
 커다란 팔을 버둥거리지만 소용없다. 어진은 날쌔게 몸을 놀리며 아카오니의 도려내진 안면에 리자드 킹의 손톱을 휘두른다.
 
 쩍! 쩌억! 쩍!
 
 갈라진 살덩이 사이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온다. 아카오니는 몇 초간 더 버둥거리다가
 
 쿵!
 
 하고 몸을 가로 뉘였다. 일대일로 중부대륙의 최강자 아카오니를 꺾었다! 대가는 팔 하나.
 어진은 바로 아카오니의 시체에 대고 포식 스킬을 시전했다. 붉은 지네의 피 효과가 끝나면 최대 체력의 10%가 사라진다. 현재 체력이 아니라 최대 체력이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뜻!
 
 우득! 우드득! 우적 우적 빠각!
 
 아카오니의 뼈와 근육이 어진에게로 흡수됐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안드로이드의 건조한 음성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어진은 재빨리 스킬 창을 열었다.
 
 -이어진
 HP: 1,116/10,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피어)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아카오니(赤鬼)의 뿔/ 랭크 C+ (관통)
 -아카오니(赤鬼)의 근육 / 랭크 C+ (자연재해)
 -칼날 벌의 손목 송곳 / 랭크 D (칼날 벌 소령)
 -슬라임의 피부 / 랭크 D
 
 어진은 트롤의 근육이 사라지고 아카오니의 근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원래 없던 뿔이라는 신체 기관이 생겼다. 이마를 더듬어 보니 30센티미터가량의 새빨간 뿔 두 개가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어진은 서둘러 포션을 삼켰다. 붉은 지네의 피 효과를 늦추기 위해 몸에 칼날 벌 송곳으로 침도 몇 방 놨다. 몸이 마비된다면 약발도 좀 늦겠지. 오른팔이 자라나고 HP가 회복되는 동안 어진은 천천히 아카오니에게서 얻은 육체를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역시!’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5장 클로즈 베타 테스트
 
 
 
 
 
 -아카오니(赤鬼)의 뿔/ 랭크 C+ (관통)
 -아카오니(赤鬼)의 근육 / 랭크 C+ (자연재해)
 
 어진은 새로 얻은 두 육체를 점검했다. 트롤의 근육은 아카오니의 근육에 의해 덮어졌다. 정확한 스텟 증가폭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냥 몸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근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아카오니의 근육은 트롤의 것보다 훨씬 밀도도 높고 단단했다. 어진의 육체가 전보다 수 센티미터는 커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외의 성과는 바로 뿔이었다.
 
 -아카오니(赤鬼)의 뿔/ 랭크 C+ (관통)
 └ 이 뿔을 가진 자에겐 모든 방어구의 틈이 보인다.
 
 “괜찮군.”
 
 의외의 수확이다. 아카오니의 뿔은 가끔 플레이어의 방어구를 무시한 관통상을 입힌다. 아카오니에게 단신으로 돌격해서 접근전을 벌이는 플레이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특성이다.
 
 “하긴, 이 녀석을 꺾으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거리에서 화살이나 마법을 날리겠지.”
 
 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미궁을 나가야 한다. 몸이 회복되길 기다려 상태창을 점검하는 어진.
 
 -이어진
 HP: 19,000/19,000
 <포식(Devour)>
 -리자드 킹의 손톱 / 랭크 C+ (피어)
 -리자드 킹의 비늘 / 랭크 C+
 -아카오니(赤鬼)의 뿔/ 랭크 C+ (관통)
 -아카오니(赤鬼)의 근육 / 랭크 C+ (자연재해)
 -칼날 벌의 손목 송곳 / 랭크 D (칼날 벌 소령)
 -슬라임의 피부 / 랭크 D
 
 최대 HP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아카오니의 육체를 흡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에 리자드 킹의 특성을 빼앗은 것도 크게 한몫했다. 잃은 만큼의 HP를 최대 HP에 더해 주는 능력. 아마 어진의 HP는 앞으로도 10만까지는 무리 없게 성장할 것이다.
 어진이 막 흔들귀의 미궁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오른쪽 하단에서 큰 소리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클로즈 베타를 시작합니다!
 
 순간 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예정 시간보다 하루 정도 이르다. 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보기엔 아직 미흡한 구석이 많은 게임이다. 베타 서비스를 미루면 미뤘지 하루 빨리 한다고?
 
 “미친 새끼들.”
 
 어진은 황급히 초보자 마을로 달렸다. 아직 준비할 것이 몇 남았는데······!
 
 * * *
 
 초보자 마을은 엄청난 수의 베타 테스터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진은 통나무집의 지붕 위에 앉아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몰라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고 시커먼 후드까지 눌러썼다. 그것은 아이템이되 아무런 옵션도 없는 것이었기에 가능한 듯싶었다.
 
 “칼날 벌 장난 아니게 세!”
 “도와줘! 벌침에 맞았어!”
 
 초보자들은 HP가 10 정도다. 그런데 칼날 벌의 HP가 15 정도니 일대일은 힘들 수도 있다. 어진도 1시간이나 걸려 잡았으니 말 다한 셈. 초보자들은 두셋이 뭉쳐 하나의 벌을 목검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어진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클로즈 베타다.’
 
 베타 테스트는 클로즈 베타 테스트와 오픈 베타 테스트로 나뉜다. 누구에게나 게임을 오픈하는 오픈 베타와는 달리 클로즈 베타는 게임 시작 전에 선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플레이할 수 있다. 렉이나 버그를 감지하기 위함이다. 이들을 파일럿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지금 나선다면 아마 게임은 오픈을 연기하고 날 잡기 위해 GM들이 대거 투입되겠지.”
 
 어진은 침을 탁 뱉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다면 100명 정도 되는 베타테스터들을 전부 학살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은 날뛸 때가 아니다.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악마처럼, 어진은 조용히 높은 건물 위에서 내려왔다.
 
 “아이템이 드랍됐다!”
 “대박! 녹슨 철검이야! 좋은 건가?”
 
 칼날 벌을 잡고 난 뒤, 아이템을 줍는 플레이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어진.
 100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은 어진의 은신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진은 그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 몇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송승우. 게임 전문 기자. 각종 온라인 게임들을 전문가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놈.’
 ‘박수한. 프로게이머. 이 게임에도 손을 댄 건가? 젊고 능력 있는 놈이지.’
 ‘신세현. 게임 전문 BJ. 프로 권유도 모두 차 버리고 게임만 하는 폐인. 한때 무슨 게임의 성주였다고 들었는데.’
 
 그 외에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는 몇몇이 있었다. 클로즈 베타는 실명으로 아이디를 만들게 되어 있어서 파악이 쉬웠다.
 
 ‘김영준. 군인인가? 군대 격투기를 쓰는군.’
 ‘홍진표. 격투기 선수거나 다른 운동을 하나 보다.’
 
 이 다섯 명 정도가 예의주시할 인물이었다. 어진은 이들만은 미리 제거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우득!
 
 칼날 벌의 목을 꺾어 죽인 김영준. 그는 건틀렛을 팡팡 털어 벌의 체액을 털어 냈다.
 
 “이정도 수준이라면 바로 좀 더 높은 레벨 몬스터를 잡아도 될 것 같군.”
 
 저 멀리 보이는 악몽숲의 입구로 들어가려던 영준은 순간 불길한 기운에 몸을 멈췄다.
 
 “뭐야?”
 
 악몽숲 입구에 한 플레이어가 서 있다. 제법 큰 체격에 얼굴은 붕대로 꽁꽁 싸맸다.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으스스해 보였다.
 
 “그 숲에서 나오는 길입니까?”
 
 영준은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후드를 뒤집어쓴 플레이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지?”
 
 영준은 수상하다는 얼굴로 플레이어를 쳐다봤다.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위에 ID나 이름이 뜨지 않는다. 아무런 방어구나 무기도 들고 있지 않다. 플레이어라기보다는 NPC에 가까운 존재랄까?
 
 “아! GM이십니까?”
 
 영준은 그제야 반갑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의 플레이어를 향해 다가가는 영준.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뿍!
 
 짧은 소리였다. 영준의 안면 정중앙에 뻥 하고 구멍이 뚫렸다. 머리가 날아간 몸이 바닥에 털썩 널브러진다.
 
 “역시나 대화가 안 통하는군.”
 
 어진은 손목을 찢고 튀어나온 칼날 벌 송곳을 반대쪽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말을 했지만 영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날부로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았던 다섯 명이 죽었다. 하나같이 칼날 벌 군락을 지나 악몽숲으로 향하는 길에서 사망했다.
 
 “이거 왜 이러지?”
 
 개발팀의 직원 권용형이 클레임이 들어온 부분을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진이 사라지고 새롭게 팀장이 된 서율이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녀는 늘씬한 체격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지닌 여성이다.
 
 “악몽숲의 난이도가 너무 높게 조정된 것 같은데?”
 “그런가요? 그렇다면 필드보스 젖거미를 제외하고 전부 스텟을 조금씩 하향 조정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단순히 몬스터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서율은 악몽숲 전체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하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다.
 
 “이상하다? 버그는 없는데?”
 “사망한 플레이어들은 모두 몬스터한테 일격에 죽었다고 하는데요?”
 “일격에? 젖거미를 빼면 그럴 수 있는 몬스터가 뭐 있지?”
 “음··· 젖거미를 제외하면 제일 강한 게 트롤? 근데 트롤은 느려서 레벨 10 정도만 되어도 여럿이 모여서 잡을 수 있는 건데?”
 
 서율은 권용형을 밀치고 자신이 메일을 읽어 보았다.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서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형의 몬스터한테 살해당했다고? 중부대륙에 그런 게 어딨어.”
 “첨부한 스크린샷 열어 볼까요?”
 
 권용형이 서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팟!
 
 이윽고. 항의메일을 보낸 유저가 첨부한 스크린샷과 동영상이 열렸다. 아프리카 BJ를 하던 유저라서 그런가 처음 계정을 만들 때부터의 동영상이 녹화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는 아무런 이상 없이 초보자 마을에서 칼날 벌 언덕을 넘어 악몽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응? 뭐야, 왜 멈춰?”
 
 서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플레이어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든다. 그러고는 같이 파티 플레이를 하자고 권유한다.
 
 “뭐야?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허공에 말하고 있는데요?”
 
 용형과 서율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동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공에 대고 뭐라 떠들던 플레이어의 시야가 갑자기 일순간 팍 하고 꺼진다. 그리고 시커먼 화면에 사망을 알리는 통보가 떠올랐다.
 
 “뭐야? 그냥 다른 데 한눈팔다가 뒤치기 당한 거네.”
 “트롤 같은 거에 당한 거겠죠?”
 “그렇겠지. 클레임 건 게 이 사람 하나야?”
 
 “네. 100명 중에 미접속자 3명 악몽숲 앞에서 죽은 사람 5명을 빼면 92명 전원이 악몽숲에 진입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젖거미를 만나 죽은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네요.”
 “젖거미야 뭐 만나기 힘드니까. 아무튼 알겠다. 그 죽었다는 5명은 어지간히도 게임 재능이 없는 사람들인가 보군.”
 “어떻게 할까요?”
 “현재 우리 사망 패널티가 뭐지?”
 “접속불가 일주일입니다. 경험치의 대폭 하락과 가지고 있던 아이템도 랜덤으로 드롭되고요.”
 
 서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면에서 눈을 뗐다.
 
 “접속불가는 이틀로 해줘. 베타 테스트 기간만.”
 “바로 살려 주는 게 아니라요?”
 “이 세계에서는 죽음조차 현실감이 있어야 해.”
 
 서율은 단호하게 말했다.
 
 
 6장 무통증 협곡의 청동골렘
 
 
 
 
 
 어진은 클로즈 베타를 시작한 유저들이 어떤 플레이를 선호하는지 어떤 직업군을 선호하는지를 쭉 조사했다.
 
 “대부분 궁수나 마법사를 선호하는군.”
 
 그도 그럴 것이 현실 세계에서는 전혀 볼 일이 없는 거대한 맹수와 맞대결해야 하는데, 칼이나 도끼 등을 들고 덤비긴 힘들다. 가상현실 게임을 처음 접해 본 이라면 으레 마법이나 활 등을 드는 경우가 많다.
 
 “마법은 골치 아픈데.”
 
 어진은 자신의 특성을 한번 확인해 보았다.
 대부분 근접형 몬스터의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몸이다. 리자드 킹의 피어가 제법 먼 거리까지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역시 근접용.
 
 “원딜 대비책을 세워야겠어.”
 
 이 게임은 어진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진은 바로 대비책을 생각해 냈다.
 
 “그래··· 몬스터 중에 그 녀석이 있었지.”
 
 어진은 개발자들 사이에서 ‘마법사 킬러’라고 불리던 몬스터를 생각해 냈다. 만나기도 상대하기도 무척 까다로운 적이지만 만약 놈의 육체를 손에 넣는다면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가 볼까.”
 
 어진은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기어다니는 평원’으로 간 어진은 바로 ‘무통증 협곡’으로 향했다. 달려드는 리자드맨 몇몇을 벌침으로 쏘아 죽인 어진은 마른 바람이 부는 암석지대에 섰다.
 
 “‘마법사 킬러’를 잡기 전에 잡을 녀석이 있지.”
 
 어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근처 암석지대를 꼼꼼하게 살폈다. 어진이 찾는 것은 특정 지역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순간.
 
 쿠구구구구!
 
 어진의 발밑이 크게 흔들렸다. 땅이 불쑥 솟아오르며 안에서 둔중한 괴성이 들려온다.
 
 “그워어어어······.”
 
 어진은 발밑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눈을 슬쩍 내리깐 어진이 중얼거렸다.
 
 “귀찮은 녀석.”
 
 <머드 골렘> -등급: C / 특성: 암석, 하수인
 -크기: ?m.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진흙 덩이. 죽여도 경험치 따위는 일절 없다. 다만 아이템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진은 팔짱을 낀 채 그냥 서 있었다.
 어진을 3미터 위의 허공으로 밀어 올린 녀석은 머드골렘. 전신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형 몬스터이다. 외눈에서 붉은빛을 뿌리는 이 몬스터는 낮은 인공지능을 가지고 무통증 협곡을 지나는 플레이어들을 공격한다.
 
 “무통증 협곡답네.”
 
 골렘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에 야금야금 데미지를 입혀서는 소용없다. 어진은 선 자리에서 발을 한 번 쿵 굴렀다. 아카오니의 발 근육이 머드골렘의 머리통에 강한 지진을 일으킨다.
 
 퍽석!
 
 골렘은 일어나자마자 흙덩이로 부서져 내렸다. 골렘은 죽여도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 다만 아이템을 떨굴 뿐이다.
 
 “호오. 황금을 품고 있었나?”
 
 어진은 머드골렘이 흩어지고 난 뒤,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주먹만 한 금괴가 떨어져 있다. 골렘은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아마 인기 많은 사냥감이 될 것이다.
 어진은 무통증 협곡을 뒤지고 다니며 몇 구의 골렘을 더 파괴했다. 골렘은 대체로 C급인 경우가 많기에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이윽고 어진은 무통증 협곡의 끝, 폐광이 즐비한 곳에서 목표로 했던 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기기기깅!”
 
 <청동골렘> -등급: C+ / 특성: 합금, 하수인
 -크기: ?m.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청동. 죽여도 경험치 따위는 일절 없다. 다만 필요한 재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진은 제일 먼저 발을 굴러 지진을 일으켰다. 청동골렘은 무거운 몸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다리를 가지고 있다. 골렘이 땅에 쓰러지는 즉시 어진은 아카오니의 붉은 뿔로 골렘을 들이받았다.
 
 쩌-엉!
 
 아카오니의 붉은 뿔은 낮은 확률로 적의 방어도를 무시한다. 청동골렘의 단단한 몸에 맞은 어진의 뿔이 튕겨난다.
 
 쩡! 쩡! 쩌-엉!
 
 세 번을 더 시도한 끝에, 어진은 청동골렘의 몸에 구멍을 낼 수 있었다. 어진은 그 구멍에 양손을 밀어 넣고 골렘을 힘으로 우악스럽게 찢어 버렸다.
 
 꾸구구구국!
 
 청동골렘은 어진의 손에 두 조각으로 찢겨 버렸다. 놈이 C+급 몬스터의 육체를 두 구나 흡수한 어진의 상대가 될 턱이 없다.
 
 “흡수는 안 되나?”
 
 어진은 혹시 몰라 포식 스킬을 발동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골렘은 무기물이라 흡수가 되지 않는 듯싶었다. 더 정확히는 몬스터의 코드라기보다는 NPC나 아이템의 코드에 더 가까운 육체를 지니고 있어서이다.
 
 “별수 없군.”
 
 어진은 청동 골렘이 드롭한 아이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현자의 반지> -등급: C+
 골렘을 만든 현자가 자신의 지혜를 담아 놓은 반지다.
 -최대 마나 +100
 -합금 속성 저항력 +3
 -합금 속성 공격력 +3
 -5% 확률로 원거리 공격 면역 (특수)
 
 나쁘진 않은 아이템이다. 하지만 어진은 옵션이 붙은 반지를 낄 수 없다. 정확히는 껴도 아무런 옵션이 부가되지 않는다. 어진은 신경질적으로 반지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하지만 실망할 것은 없다. 아직 두 개의 아이템이 남았다.
 
 -<녹슨 청동검>
 전투용으로는 쓰기 힘든 칼이다. 녹슬기 전에도 장식용으로밖에는 쓰이지 않았던 듯하다.
 -<녹슨 청동방패>
 전투용으로는 쓰기 힘든 방패다. 녹슬기 전에도 장식용으로밖에는 쓰이지 않았던 듯하다.
 
 어진은 눈을 반짝였다. 원하던 것이 제대로 나왔다. 손을 뻗어 잡으니 잡힌다. 어진은 청동칼과 방패를 등에 맸다. 이제 남대륙 깊은 곳에 잠들어 있을 ‘마법사 킬러’를 잡으러 갈 차례다.
 
 청동검과 방패가 등에서 땅땅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어진은 협곡과 암석지대를 건너 잊혀진 유적지에 도착했다.
 과거 높은 신전이 있었을 이곳은 지금 황무지로 변했다. 부서진 기둥과 널브러진 조각상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캬아악!”
 
 신전 기둥을 휘감고 있던 뱀 하나가 어진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머리카락 뱀> -등급: D / 특성: 파충류, 독
 -크기: 30cm
 -이 근방에선 독이 세기로 유명하다. 보통은 무리 짓지 않고 홀로 사냥하지만 어떤 이는 머리카락 뱀이 한 곳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어진은 칼날 벌 송곳을 꺼내 머리카락 뱀을 찔러 죽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무통증 협곡이 끝났다. 어진은 지금 잊혀진 유적지의 잊혀진 마을 ‘웨이크웍’에 도착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악몽숲을 통과한 사람이나 있을까?”
 
 어진은 피식 웃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사막 유목민족의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는 1만 년이나 살아왔다는 거대한 선인장이 있었고, 이 선인장의 몸통에 꽂힌 거대한 빨대에서는 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 대롱들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진은 가만히 마을을 거닐었다. 마른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날린다. 낙타 몇 마리가 건물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리고 NPC들은 유저 하나 없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해진 대사를 읊는다.
 그러자 문득 이 세계에 오직 나 혼자라는 외로움이 드는 어진이다.
 
 “괜한 생각 말자.”
 
 어진은 자신의 두 뺨을 때렸다. 복수를 위해서는 독해져야 한다. 감성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저들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죽이고 게임에 못 들어오게 해야 자신을 죽인 사장에게 복수가 된다.
 
 “어디 보자······.”
 
 어진은 찾고 있는 NPC가 있었다. 으레 마을에 온 유저들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물약상점이나 대장간이다. 무기를 수리하고 물약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진은 그런 건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진이 주목한 것은 마을 제일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장님 소녀였다.
 
 NPC <율>
 
 율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어진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유적지 안내원이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율이 어진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러고는 정해진 대사를 중얼거렸다.
 
 “아저씨. 이 마을 처음이죠?”
 “그래. 안내를 부탁한다.”
 “우리 마을에 처음 온 사람은 으레 길을 잃곤 해요.”
 “그래. 빨리 안내나 해.”
 “하지만! 이 척척박사인 제가! 도와준다면 아저씨는 이 맵 구석구석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답니다!”
 “하아······.”
 
 어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율은 약간의 약팔이 대사를 더 읊어 댔다. 이윽고, 어진의 눈앞에 선택지가 뜬다.
 
 -율의 안내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율의 안내를 들으실 경우 50만 골드가 차감됩니다. 율의 안내는 약 30분을 소모합니다.
  <예>/<아니오>
 
 사실 율이 해 주는 안내라고는 마을 구석구석에 위치한 대장간, 신전, 주점의 위치와 기본 사냥터 1, 2, 3이다. 그런 것은 30분은커녕 10분만 빠르게 뛰어다녀도 익힐 수 있는 것. 게임머니 환율이 현실 세계의 환율과 비슷한 것을 고려하면 50만 골드라는 것도 턱없이 바가지인 금액이다.
 하지만 어진은 율의 길 안내를 수락했다. 돈은 아까 골렘을 죽이고 나온 황금으로 지불했다. 율은 기쁜 듯 어진의 손을 잡고 낙타에 탔다.
 
 “이곳은 대장간이에요. 솜씨 좋은 샴시르를 원한다면 턱수염 난 지그 아재를 찾아가세요!”
 “이곳은 물약 상점이에요. 낙타 젖으로 만든 하얀 포션은 풀피에도 보양식이죠!”
 “이곳은 중앙 선인장이에요. 물은 무한정 공급되니 원하신다면 여기서 떠 가세요!”
 
 율이 지저귀는 마을 안내를 시큰둥한 얼굴로 듣고 있던 어진. 그는 마을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사냥터 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여기는 유적지 근처의 사냥터랍니다. 뱀이나 벌레 같은 괴물들이 많아서 무서워요.”
 
 어진은 그제야 긴장했다. 물론 유적지 근처에 돌아다니는 잡몹들이 무서울 리 없다. 어진은 사막 저 멀리 보이는 폐허를 바라보았다. 어진의 시선을 읽기라도 한 듯. 율이 입을 열었다.
 
 “저기 사막 너머에 보이는 폐허는 바로 <뱀의 자궁>이랍니다. 무서운 던전이죠.”
 “저기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진은 추임새를 넣듯 입을 연다. 어차피 들어가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율이 다음에 무슨 대사를 할지도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율이 눈을 가린 붕대를 매만지며 말한다.
 
 “두 개의 보름달이 한꺼번에 뜨는 날, 오로지 여자만 저 던전문을 열 수 있어요.”
 “성차별이로군.”
 “어쩔 수 없어요. 남자 혼자서는 저 문을 절대 열 수 없으니까요. 정 들어가고 싶다면 여자 캐릭터와 파티를 이루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예상대로다. 하지만 어진은 저 던전에 꼭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편법도 쓸 용의가 있지.”
 
 어진은 칼날 벌 송곳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타고 있던 낙타의 엉덩이에 마비독을 살짝 주입했다. 낙타는 날뛰지 않고 얌전하다. 어진은 다시 리자드 킹의 손톱을 꺼내 낙타의 엉덩이에 살짝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사막 모래 위에 뚝뚝 떨어진다. 낙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피를 흘리며 걸어갔다. 어진은 눈을 빛냈다.
 
 ‘와라, 물어라!’
 
 
 7장 사막 낚시
 
 
 
 
 
 낙타는 천천히 느려졌다. 계속해서 혈액이 빠져나가니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정말 현실성이 높은 게임이다.
 
 풀썩!
 
 어진이 탄 낙타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율이 그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낙타가 쓰러졌네요. 과로했던 걸까요?”
 
 어진은 율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대사가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던가? 하지만 뭐 어진이 일개 NPC의 대사까지 전부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아무래도 좋다.
 
 차앙!
 
 어진은 리자드 킹의 손톱을 빼 들었다. 그리고 일격에 낙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쫘-악!
 
 붉은 피가 뜨거운 모래 위에 흩뿌려졌다. 어진은 율이 타고 있던 낙타의 목도 잘라 버렸다.
 율은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장님인지라 눈에 붕대를 감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어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라 죽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 2시에 모래 구릉이 있고 7시에 던전 <뱀의 자궁>의 꼭대기가 보인다.
 
 “이곳이다.”
 
 어진은 팔짱을 낀 채 진득하게 기다렸다. 사막의 뙤약볕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이윽고, 어진이 던진 미끼가 물렸다!
 
 쿠드드드드드....
 
 묵직한 지진파가 사막 모래를 뒤흔들어 놓는다. 어진이 팔짱을 풀고 낙타의 시체를 발로 뻥 차 버렸다.
 
 “물었다!”
 
 어진이 외치는 동시에, 앞쪽의 모래가 갑자기 커다랗게 치솟았다!

댓글(6)

by*******    
ㅉㅉ..
2017.09.12 11:19
발아아재    
오 니이이이이!가 비명이라니 졸귀
2017.11.08 13:57
남색머루    
여기도 어진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 영고 어진 ㅋㅋㅋㅋ
2017.11.17 12:36
김조선    
넘무재밌다!
2019.03.20 19:49
신수지작가    
헐 사장 급발진
2021.01.12 16:46
개백금    
회사에서... 휘발유 통을 어디서 가져와....
2023.02.19 01:02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