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수2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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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7 조회 3,590 추천 53


 Prologue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서진은 불길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빠르게 고개를 돌렸기에 어설프게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들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끊임없이 영어 듣기가 흘러나오던 이어폰이었다.
 그러나 서진은 이어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오토바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퍼억!
 순식간에 서진의 몸이 하늘로 날았다. 미칠 듯한 공포심과 우중충한 하늘빛이 서진을 반겼다.
 ‘씨발. 수능이 코앞인데―’
 서진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이 부서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죽은 게 아니니까.
 ‘이제 와서 죽으면 억울하지.’
 지금 죽으면 고1, 2 때 노는 것에 정신 팔려 못 따라갔던 진도를 따라잡느라 미친 듯이 공부했던 9개월이 억울했다.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를 돌려서 자신을 받은 오토바이를 보았다. 그런 서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속도가 붙어서 미끄러지고 있는 오토바이였다.
 F=ma이니까, 가속도도 충분하고 오토바이도 무거우니 충격이 크겠지?
 콰직!
 서진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Chapter 1. 입학
 
 
 두근, 두근.
 그는 무의식과 동조하는 심장 고동 소리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는 어딜까?’
 인간이 자각을 가질 때 가장 처음 느끼는 의문을 품으며 그는 뇌를 자극했다. 그러나 어떠한 정보도 의식 위로 솟구치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한 심장 소리에 다시 한 번 의식이 꺼져 가려 했다.
 ‘나는 누굴까?’
 ‘나’를 인식시키는 마지막 보루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두근, 두근.
 다시 한 번 심장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는 뇌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지워 갔다. 서서히 ‘나’라는 자각이 꺼져갔다.
 그때,
 ‘공부해야 되는데!’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서진의 꺼져 가던 의식이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에 대한 자각이 솟구쳤다.
 고등학생, 수능, 수리 가형, 유서진. 여러 가지 정보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응애, 응애.”
 유서진은, 다시 태어났다.
 ***
 서진은 고개를 들어서 보호자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막연히 엄마라고 추정하고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외국인이었으니.
 서진은 움직일 수 없어서 답답한 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환생이라니.
 고2까지 열심히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만약 9개월 전에 벌어졌다면, 부모님이 그립고 한국이 아쉬워도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만 해서 간신히 성적을 끌어올렸던 9개월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괜히 공부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진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 아빠가 보고 싶다.
 열심히 공부하는 자신을 위해서 보약을 지어 주던 엄마가 그리웠고, 성적이 오를 때마다 정말로 좋아하시던 아빠가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집에 오면 30분 정도 잠깐 보던 부모님의 얼굴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밥 먹어야지.”
 이 세계의 어머니가 말을 건넸다.
 아직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7개월 가까이 듣기만 하다 보니 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서진은 영 입맛이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부득불 다가와서 부드러운 수프를 떠 줬다. 서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벌렸다.
 차라리 환생 후에 기억을 잃어버려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3이라는 생각과 공부를 해야 된다는, 지난 9개월간 자신을 이끌던 목표 덕분에 자아를 되찾은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고3은, 위대했다.’
 서진이 그렇게 회상하는 사이, 부지런히 들어오던 수저가 멈췄다.
 다 먹은 것이었다. 서진은 쿠션이 심하게 부족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식기를 들고 방에서 나가셨다.
 서진은 요새 아무런 기운이 없었다. 현생의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미안하기도 했지만, 미안함보다는 무기력감이 훨씬 컸다.
 날이 흐를수록 한국이 미칠 듯이 그리웠고 몸도 까닥하기 싫어서 매일같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더 이상 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정신은 성숙한데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지독한 무기력증으로 변해 서진을 휘감았다.
 “차라리 정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서진은 어느 정도 유창하게 나오는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쓰이는 언어는 정확히 들을 수는 있었지만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한국어에 찌들었기 때문이었다.
 꿀꺽, 꿀꺽.
 서진은 옆에 놓여 있는 물 컵을 간신히 들어 물을 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정말로 깨끗한 물이었다.
 “후―”
 가슴속이 시원해지도록 물을 마신 서진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침대 모서리에 물기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엄마······ 아빠······ 고3······ 정석.
 서진은 마인드맵을 이어 가듯 의미 없는 글자를 나열했다.
 잠시 뒤면 식기를 다 씻은 어머니가 들어와서 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었다. 서진은 어머니가 귀찮게 하기 전에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 침대는 쿠션이 부족했다. 서진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방문이 열리는 것이 느껴졌고, 곧이어 들어온 어머니가 일부러 잠든 척을 하는 서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서진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진짜 잠이 들었다.
 ***
 “나는 남자입니다.”
 서진은 어머니가 불러 주는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가 요새 배우는 것은 글자였다.
 글자는 다행히 한문같이 일일이 외워야 하는 문자가 아니라 몇 개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글자였기에 이미 머리가 트인 서진으로서는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잘했어요. 오늘은 숫자를 배워 보자.”
 어머니는 종이에 처음 보는 글자들을 채워 나갔다.
 처음 보기는 했지만 느낌상 숫자의 나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개의 글자를 적은 어머니는 천천히 글자를 읽어 주었다. 역시 0부터 9까지의 나열이었다. 숫자 역시 한국과 비슷하게 0부터 9까지를 이용한 조합이었다.
 ‘왜 아라비아 숫자는 안 알려 주지?’
 서진은 어머니가 설명하는 것을 이미 전부 이해했지만 적절히 모르는 척을 하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어머니는 아라비아 숫자를 알려 주지 않았다.
 뭐, 한글도 일, 이, 삼이 있고 하나, 둘, 셋이 있고, 1, 2, 3이 있으니 나중에 알려 주겠지.
 서진은 그렇게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어머니가 알려 준 글자들을 외웠다.
 다섯 살이 된 그는 이제 향수병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반년이 넘게 서진을 휘감았던 무기력증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거의 극복해 있었다.
 더구나,
 물건들을 보니 중세 유럽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지식과 미래를 이용해서 역사에 한 획을 그어 버릴 생각에 오히려 들뜨기까지 했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절대 영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일어 정도를 제외하고는 어떤 언어도 알지 못했으니 그것이야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자, 그럼 하나씩 따라 읽어 볼까?”
 서진이 연습장 한 페이지에 모든 글을 채우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살짝 어린 말투를 내면서 글자를 한 자씩 읽었다.
 “안녕하세요.”
 루딘은 지금 어머니가 불러 주는 말을 듣고 종이에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모르는 척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루딘 커스버트입니다.”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자 서진은 고민하는 척하면서 펜을 굴렸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루딘 커스버트. 처음에는 어딘지 어감이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주 듣다 보니 이제는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터였다.
 그는 고민하는 척을 관두고 문장을 써 내려갔다.
 “잘했어요. 자, 그럼 이번에는······ 나는 5살입니다.”
 그는 ‘나는 5살입니다.’라고 썼다.
 “이건 뭐니?”
 어머니가 그가 쓴 문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틀린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는 어머니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5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있었다.
 “오, 잖아요?”
 “이게? 오는 이렇게 쓰는데?”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쓴 글자는 저번에 알려 준 숫자들이었다. 그는 잠시 머리가 혼란해졌다.
 “이렇게 쓰는 것도 맞지 않아요?”
 “글쎄? 엄마는 처음 보는 글자인걸?”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황급히 0부터 9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를 나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두 처음 보는 글자라고 답했다. 순간 루딘은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알기에 아라비아 숫자는 중세 유럽에 쓰이던 글자였다.
 그런데 이곳의 식기만 해도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 있었고, 의복이나 건물 양식 따윌 보면 중세쯤 된 것은 확실했다.
 그는 이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
 루딘은 집으로 초청된 마법사가 행하는 일을 바라보았다.
 “잘 보십시오.”
 마법사는 손가락에 끼웠던 반지를 없앴다가 입에서 꺼내고, 뒤이어 반지를 동전으로 바꿨다.
 어머니는 루딘의 뒤에서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지만 정작 루딘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게 다인가요?”
 “도련님이 성미가 급하시군요. 자, 그럼 제 손을 잘 보십시오.”
 마법사는 손에 동전 4개를 쥐었다. 그러고는 루딘에게 손목을 꽉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루딘은 마법사의 손목을 쥐었다. 마법사는 하앗 하는 퍼포먼스용 기합을 지르더니 손바닥을 폈다. 20개가 넘는 동전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딘은 한숨을 쉬며 떨어진 동전을 주웠다. 그러고는 마법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런 것은 저도 할 줄 압니다.”
 루딘은 손등에 동전을 올려놓고 반대 손으로 손등을 덮었다. 그러고는 슬슬 문지르다가 덮고 있는 손을 들었다. 손등의 동전이 어느새 주먹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루딘의 옆에 서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박수를 쳤다. 루딘은 이어서 손가락에 동전을 끼운 뒤 손을 흔들다가 순식간에 없애 버렸다.
 마법사는 멍한 눈으로 루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제가 보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에요.”
 루딘이 차분히 말했다. 마법을 보고 싶다고 징징댔더니 어머니가 마법사를 초빙해 주셨다. 그런데 정작 마법사란 사람이 한국에서도 많이 보았고, 한때 취미를 가져서 익혔었던 마술사였다.
 “그럼 어떤 게 보고 싶니?”
 “음―”
 그는 왠지 모르게 우스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 손에서 불을 뿜고, 얼음 기둥을 만들고, 전기를 내뿜는―”
 “아하, 우리 아들 동화책에서 읽었던 마법사가 보고 싶은 거구나!”
 “맞아요.”
 루딘은 어머니가 이해했다는 생각에 다음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어쩌지, 그런 마법사 할아버지들은 이곳에는 없고, 요정 세계에 사시는데?”
 뽀뽀뽀 유치원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로 어머니가 말했다.
 “······.”
 루딘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마술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방금 그 마술을 제게 알려 주십시오!”
 마술사가 루딘의 손을 붙잡았다. 루딘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루딘의 집안은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이었다. 루딘의 아버지는 루딘이 태어난 아엔루라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가의 여식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은 정략결혼의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본가에 첩을 놓지 않았고, 상업을 위해 외국으로 나갈 때 머무는 저택에 두 명의 첩이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는 돈이 넘치는 상인치고는 매우 가정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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