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프롤로그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판타지 세계 아르아브 대륙.
그리고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중원.
그곳에서 나는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두 세계를 파멸로 이끌거나, 그 세계에 군림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드래곤마저 경배하던 마법실력과 현경에 이른 경지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건 그저 공허함 뿐.
아르아브에서의 20년.
그리고 중원에서의 30년.
전 대륙을 공포로 내몬 마왕.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무림을 찍어 누르던 황제에게 발가락을 핥게 했던 초월천마.
50년 간 두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나는 그러한 이름들로 공포와 경외를 샀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나의 진정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해준 적도, 누군가가 말해준 적도 없는 나의 이름. 나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에 사는 스무 살 청년. 어느 날 갑자기 이름 모를 세계로 빨려 들어간 불쌍한 성현철이다.
당연하지만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은 그 두 세계의 어느 곳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행보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스으으으으으으읏.
찢어진 공간 너머로 건물들이 보였다.
아르아브 대륙의 것도, 중원의 것도 아닌 생소한 건물양식.
지구의 건물양식이었다.
“성공했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그것만으로도 잊고 있던 감정들이 휘몰아치며 공허한 가슴 속을 채우는 느낌이 든다.
손을 뻗었다.
몸에는 고농축 된 마나와 그것을 정제하여 발산하는 초월경의 묘리가 가득 담겨 있다.
이것이 차원문을 만들어 낸 창이며, 그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언제일지, 어디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파치치칙!
손끝이 차원문의 표면에 닿으며 스파크를 튀긴다.
모든 것을 압축하여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압박감에 이가 악물어졌다.
“나는 돌아간다. 비록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없을 지라도. 모두가 날 괴물 취급 할지라도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눈을 감았다.
어느새 몸이 차원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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