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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수, 계약하다.

2017.09.18 조회 30,068 추천 390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의 빛. 눈이 부시다.
 
 ‘역시, 잠이 부족해.’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덮으려는 순간.
 
 “안 일어나!”
 “10, 10분만.”
 
 벗기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사투는 허무하게도 벗기려는 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퍽!
 어깨로 전해지는 강력한 충격과 날카로운 목소리.
 
 “내가요. 당신 같은 놈을 낳고도 미역국을 처먹은 년이거든요. 신경 돋우지 말고 좋은 말할 때 일어나라.”
 “아이 참. 엄마!”
 “밥이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빨리 기어 나와!”
 
 이름 이민수.
 나이 27세.
 직업은···, 좋은 말로는 취준생, 그냥 하는 말로는 백수. 고만고만한 지방 4년제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 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해병대에 동반지원해서 개고생. 대학 졸업 후, 다단계와 보험판매 한 달씩이 유일한 사회생활.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은 만사태평이라는 긍정적 마인드. 그래서 언젠간 되겠지, 이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엄마, 만원 만.”
 “없어.”
 “그럼 오천 원은?”
 “죽을래? 나가서 알바라도 해.”
 
 찬바람을 날리고 방으로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정년이 2년 후로 다가오니 걱정이 많으신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수야. 일루 와봐.”
 “어.”
 
 민수에겐 믿을 사람이 아직 한 명 남았다.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쪼르르 달려갔다.
 
 “누나 왜?”
 “교통카드 충전하고, 남은 건 용돈으로 써.”
 
 5만 원짜리 두 장이 손에 쥐어졌다. 역시 일류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통이 컸다.
 
 “누나 쌩유. 나중에 백배로 갚을게.”
 “기죽지 말고.”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 난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남들이 기다리는 주말은 민수에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엄마와의 신경전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아무 말씀도 없으신 아버지, 천사 같은 누나를 보기 솔직히 미안했다. 그래서 주말은 항상 밖에서 보낸다.
 
 ‘이젠 정말 알바라도 찾아야 하나?’
 
 자신감이 죽은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엄마와 누나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눈에는 온통 알바생 고용 광고만 어른거렸다. 그동안 알바를 하지 않은 이유. 자신감을 잃고 그 생활에 안주하지는 않을까, 이게 전부였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또한 민수 자신이었다.
 
 ‘뭐야. 저 인간.’
 
 횡단보도 맞은 편. 찌는 더위에도 파란색 양복과 구두, 파란 넥타이, 파란 모자로 온통 도배한 사내가 싱긋 웃는다. 신호가 바뀌고 횡당보도를 건너는 동안에도 파란색으로 처바른 사내는 건널 생각이 없는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끼이익!
 찢어질 것 같은 타이어 마찰음. 신호를 무시하고 빠르게 돌진하는 승용차 한 대.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면서 흰 연기가 솟구친 승용차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몸을 급히 날려봤지만, 승용차는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젠장!”
 
 너무 늦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직 죽긴 싫은데. 민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민수 씨.”
 
 나지막한 음악만 들릴 뿐, 주위는 조용했다. 차와 부딪히고도 남을 시간, 그러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죽었을지도.
 
 “이민수 씨.”
 
 죽으면 저승사자가 찾아온다지? 한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여긴?”
 
 분명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이곳은 횡단보도가 아니다. 탁자에 놓인 커피 한잔, 그리고 파란색으로 떡칠했던 사내가 앞에서 흐뭇하게 웃는다.
 
 “하, 죽은 게 분명하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명 이 커피는 기억을 잃게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저 입구가 저승으로 가는 문이고. 그래. 부모님과 누나에겐 미안했지만, 이번 생은 어차피 가혹할 뿐이었어.
 
 “전 이 커피를 마시겠습니다.”
 
 심호흡을 내쉬고 식은 커피를 단순에 비웠다. 이번 생, 미련은 없었다.
 
 “이제 저 문으로 나가면 되는 건가요?”
 “지금 뭐하세요?”
 “기억을 잃게 하는 커피, 마셨다고요.”
 “좌우지간 드라마가 문제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파란색 사내는 A4지 종이 한 장을 탁자에 올렸다.
 
 “사인할지 말지 결정하세요.”
 “고용계약서?”
 
 민수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리고 곧 실망이 밀려들었다. 고용계약서란 제목을 빼곤 흰 공백인 종이. 조건도 기간도 갑과 을도 없는 백지.
 
 “이게 뭡니까?”
 “고용계약서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손님들과 종업원들도 보이는 것을 봐선 커피숍이 틀림없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이곳으로 어떻게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엔 사인을 할 수 없었다.
 
 “장난합니까?”
 “그럼 사인을 안 하겠다는 거죠?”
 “하하하, 어떤 미친놈이 이런 계약서에···.”
 
 으악!
 민수의 입에선 고함이 터졌다. 바로 횡단보도. 차를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던졌지만, 차와의 거리는 30cm도 되지 않았다. 운전자의 놀란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민수 씨의 몸은 10m가량 날아간 뒤에 떨어집니다. 안타깝게도 머리부터 떨어져서 즉사하고요. 고통은 크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이, 이게 뭡니까?”
 “잠시 묶은 시간이 곧 풀립니다. 그것은 곧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저 그냥 갈까요?”
 
 민수의 입이 심하게 떨렸다. 이 자의 말처럼 사람들과 차의 움직임은 모두 멎어있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았다.
 
 “한다고! 사인하면 되잖아!”
 
 
 
 “그럼 사인 먼저?”
 
 뛰는 가슴이 영 진정되지 않았다. 언제 커피숍으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민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제목만 달랑 적힌 고용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이 적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민수 씨와의 고용계약은 성사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장소를 마음대로 이동하고 시간까지 멈추는 사내. 지금도 어안이 벙벙했다. 친구 놈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미친놈 취급받기 안성맞춤. 혼이 빠진 얼굴을 한 민수는 입만 벌린 채로 맞은편 사내만 바라봤다.
 
 “자, 이젠 한식구가 됐네요.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제가···, 뭘···. 어떤···, 월급···.”
 
 입이 심하게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많이 놀랐군요. 처음엔 다들 그럽니다. 그럼 제가 설명하죠.”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민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귀신 잡는 해병 출신도 이런 상황에선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민수 씨는 앞으로 죽어서는 안 될 자를 원상회복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임무를 맡게 되면 민수 씨는 타인의 삶을 살게 될 거고, 임무를 완수해야만 본인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월급은 당연히 없습니다.”
 “손···가락···.”
 “손가락만 빠느냐고 묻는 건가요?”
 
 일반적인 회사가 아니란 건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을 부리면 돈은 주는 게 당연지사. 민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임무가 한 번씩 끝날 때마다 기억과 경험이 남을 겁니다. 그게 돈보단 남는 장사일지도 모릅니다.”
 
 민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억과 경험보단 돈이 필요했다.
 
 “아참.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임무를 거부하면 아까 그 횡단보도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펑! 우린 계약위반을 중범죄로 보거든요. 그럼 파이팅!”
 
 그리고 사내는 사라졌다. 커피숍에 홀로 남은 민수는 고개를 떨궜다.
 
 
 
 “어디를 쏘다니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그리고 등으로 전달되는 엄마의 강력한 손바닥 타격. 아무런 고통도 전달되지 않는다.
 
 “나 들어가 쉴게.”
 
 평소와 다른 모습에 민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민수 너 어디 아파?”
 “괜찮아.”
 “저녁은?”
 “생각 없어.”
 
 지구가 망해도 밥을 거른 적은 없었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방문을 닫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이건 절대 현실일 수가 없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타인의 삶, 본인의 삶.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잠시 개꿈을 꾼 거야.”
 
 손으로 뺨을 후려치고는 심호흡을 깊게 내셨다. 앞으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려는 순간.
 띠링.
 한 통의 메시지. 민수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입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무운건투를 빕니다.>
 
 “사실이었어?”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났던 것도, 파란색으로 도배한 녀석을 만난 것도, 황당한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책상에 앉은 민수는 망부석이 되었다.
 띠링.
 발신처가 적히지 않은 또 한 통의 메시지. 민수는 무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눌렀다.
 
 <첫 임무 축하합니다.
 이상혁 16세, 역삼동 진달래 아파트 102동 17층. 22시 38분.>
 
 “그래서 나보러 뭐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삭제버튼을 눌렀다.
 으악!
 단발의 비명과 함께 민수의 몸은 다시 시간이 멈춘 횡단보도로 옮겨져 있었다. 계약위반을 중범죄로 취급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가려고 했다고요. 막 옷 입으려고 했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
 띠링.
 메시지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다시 돌아온 방.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메시지를 눌렀다.
 
 <다음엔 시간이 움직입니다. 주의하세요.>
 
 “에이 씨···.”
 
 민수는 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욕이라고요.”
 
 될 대로 되란 생각에 민수는 급히 집을 나섰다. 10시 38분까진 1시간도 남지 않았다.
 
 
 
 “엄마.”
 
 2개 층을 더 올라왔다. 계단과 연결된 창문을 열고 벽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한 번 더 보고 싶지만, 그럼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신발을 벗어 가방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쉬고 싶다.
 편안하게 쉬고 싶다.
 그래서 죽고 싶다.
 스스로 주문을 외워 본다.
 그리고 체념하게 된다.
 
 떨리는 손으로 창문 난간을 잡고는 한쪽 발을 끌어올리기 위해 힘을 줬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과 눈물을 식혀준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밑을 내려 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속으로 하나 둘을 외치고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 자식이!”
 “어어.”
 
 누군가에게 끌어내려지는 느낌을 받고는 정신을 잃었다.
 
 “아이 씨, 대가리 아파.”
 
 끌어내린 녀석이 몸을 덮치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잠깐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녀석부터 찾았다.
 
 “이 자식, 이거 어디로 튄 거야?”
 
 가방과 신발은 그대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문으로 밑을 바라봤지만, 녀석은 없었다. 그래도 첫 임무는 완벽히 성공했다.
 
 “쉽네.”
 
 미리 시간도 알려주고, 죽지만 못 하게 하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것은 없었다.
 
 “상혁아!”
 
 계단 밑에서 들리는 목소리. 메시지의 이름이 이상혁이었지. 자식을 구했다는 것을 알면 사례비라도 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심이 생겼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40대 중반의 여인은 그 녀석의 엄마일 게 분명했다. 민수는 정중한 자세로 그 여인을 맞았다.
 
 “저, 아드님은···.”
 “상혁이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리고는 민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 아주머니.”
 “정신 좀 차려. 이 녀석아!”
 
 이게 뭐지? 내가 왜 신발도 안 신고 있지? 그리고 이 교복은 뭐야?
 여인은 계속 민수를 붙들고 울었고 민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굴렸다.
 
 “내가 고딩이 된 거야?!”
 
 현실은 가혹했다. 민수는 여인을 붙들고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댓글(22)

n7************    
꿀잼입니다
2017.09.18 16:35
뢰명    
건필 하세요!! 꾸준한 연재 부탁 드려요!! 좋은글 부탁 드려요!!
2017.09.19 03:53
금은동상    
오 개꿀잼 마지막 장면은 뭐지
2017.09.19 17:00
청은이    
잘 봤어요
2017.09.25 13:13
9월29일    
도깨비 저승사자 찻집ㅋㅋㅋ 꿀잼
2017.10.02 01:37
떵바람    
21% 찌든 더위 - x 찌는 더위
2017.10.07 13:35
n3*************    
호불호가 되게 많은 전개네요 타인의 삶을 살면서 신파로 치닫고 본인의 삶의 비중이 낮아져 연독률이 떨어지는
2017.10.16 19:01
욥기맨    
새롭네요
2017.10.19 22:50
이반    
벗기려는자??
2017.10.25 05:31
구울    
이차원용병???????
2017.10.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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