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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성존전 1

2017.09.18 조회 373 추천 1


 마신성존전 1권
 
 
 서장.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면서 온 세상을 밝힌다. 지상에서 본다면 태양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눈부실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태양이 ‘온 세상’을 밝힐까?
 그 태양을 직접 보고 있는 남자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는 기이한 공간에 있었다.
 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니고 부유하고 있던 남자는 태양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이었다.
 남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검은색은 아니었고, 붉고 환하게 빛나는 태양과 짙은 회색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달, 그리고 수많은 별들과 유성이 남자의 눈에 가득 담겼다.
 남자는 다시 눈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 있었다.
 남자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지금껏 천하, 혹은 세상이라 생각했고 말했던 또 다른 별이.
 그 별은 남자가 보고 있던 그 어떤 별보다도, 심지어 달이나 태양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최소한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기한가요?”
 이 공간에는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빛으로 구성된 ‘그것’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떠나서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단 눈이나 코 등 감각기관이 없었으니까. 그저 빛으로 된 무언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놀랍게도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남자는 그 빛이 인간보다 더 고위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기하다라······. 아뇨.”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 심정은 신기하다는 걸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젠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껏 그를 지탱하던 상식이란 상식은 모조리 부서졌고, 상상도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포함해서······ 감동했다. 눈앞의 광경은 평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장엄했다. 일단은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해 알았을 뿐입니다.”
 빛은 웃었다. 미소가 보이지 않았고 웃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빛이 웃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요. 나나 당신이나 이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하죠. 이 거대한 세상을 본다면 우리의 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사소한 일들인지 실감하게 된답니다.”
 빛과 남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즈음, 빛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 드넓은 우주에서 생명이 살고 있는 별이 얼마나 될까요? 이 무한의 공간에서도 생명이 갖는 가치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에요. 네, 그렇고말고요. 그렇기에······.”
 빛은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앞으로 할 일들이 무척 중요한 거랍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멀고도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이뤄진 이 대화는 후에 세계의 운명을 바꿨다.
 
 
 제 1장. 전쟁
 
 
 천년신교의 교주인 마흉 천세기는 천하제일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근접한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천하에 기인이사들은 많았지만 어지간한 이들은 감히 천년신교의 수장인 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또한 천세기가 천년신교를 영도한 뒤부터 이십 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교의 무력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했다. 천세기의 밑으로 네 명의 마군이 있었으며, 수많은 마인들이 천년신교의 힘을 드높였다.
 천년신교는 그 강대한 무력으로 주변의 문파와 소수민족들, 그리고 마적들을 복속시켰다. 천년신교가 자리를 잡은 천산산맥은 물론이고 신강과 그 주변 일대를 모두 무릎 꿇렸다.
 그 강대한 힘을 천년신교는 이제 중원으로 돌리고자 했다.
 중원은 기름진 땅과 거대한 두 강, 황하와 장강이 있었다. 막대한 물자가 생산되었고 거래되었다. 천년신교가 비록 비단길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중원 전체에서 오고 가는 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때마침 명분도 얻었다. 천년신교의 휘하 문파 중 하나가 정파의 무인들에게 궤멸당한 것이다. 생존자들이 천년신교로 도망을 와서 복수를 빌었을 때 천년신교는 기꺼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휘하 문파를 토벌한 자들은 정파 중에서도 각각의 지역에서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구파나 오가는 아니었다. 최근 감숙성 서부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숭검문이라는 문파였다. 구파나 오가와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정파무림에서는 대문파로 인정받고 있는 문파였다.
 하지만 천년신교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문파였다.
 천년신교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무력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정파무림의 연맹체인 무림맹에 서신을 보냈다.
 
 「숭검문은 신교의 보호 아래 있는 문파를 세력 확장이라는 명목 하에 멸문시켰다.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보복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형제의 피는 곧 우리의 피. 신교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무림맹은 숭검문과 본교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
 
 무림맹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에 숭검문을 도와주고 나아가 마교(정파에서는 천년신교를 사특한 무리라 하여 마교로 칭했다)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숭검문을 버릴 수는 없으나 적절한 협상을 통해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대립했다. 그러나 결국 주전파로 여론이 기울었다.
 이때 천년신교의 무력이 사상 최강이었듯이 정파 무림의 무력 역시 나날이 발전 중이었다. 게다가 고만고만한 문파들 입장에서는 전쟁 만큼 위로 올라갈 기회가 드물기도 했다.
 결국 양측의 이해관계로 인해 전쟁이 발생했다.
 정파 무림은 강했다. 하지만 천년신교는 정파 무림이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 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었고, 몸집만 커진 무림맹과는 다르게 유기적으로 전쟁을 전개해나갔다. 그에 반해 자기 안방에서 싸우는 격이지만 정파 무림은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결정적으로 천년신교는 변방의 무림세력들을 움직였다.
 천년신교가 크다고 해도 홀로 중원을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설사 중원 무림을 쓸어버린다고 해도 중원 전체의 이권을 천년신교가 다 차지하기는 무리였다. 때문에 천년신교는 변방의 거대세력들에게 중원의 일부 지분을 약속한 뒤 끌어들였다.
 서장의 대뢰음사가 움직였다.
 남만의 독림이 진격했다.
 북해의 빙궁이 내려왔다.
 또한 천년신교는 새외의 세력만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천년신교는 어쨌든 세간으로부터 마교로 불렸다. 게다가 변방 세력까지 끌어들였으니 황궁이 나설 가능성도 있었다.
 천년신교가 전쟁에 나설 무렵 황궁은 황좌를 놓고 황자들이 권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천년신교는 그중 입맛에 맞는 황자를 골라 천년신교의 중원지배권을 인정받는 걸 조건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황자를 도와 수많은 반대파 인사들을 암살했으며, 천년신교의 일부 조직들을 떼어주었다.
 천년신교가 돕는다고 해서 그 황자가 제일 유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위한 패가 무력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히 도움은 되었다. 이로써 황위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이 격해졌다. 황궁은 무림의 일에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천년신교는 해룡방이라는 해적 세력과 수적들의 집단인 장강수로연맹, 황하십팔채 또한 포섭했다. 산적들이 모여 만든 조직인 녹림칠십이채 또한 천년신교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정파 무림은 전쟁 물자 이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옛날부터 수로와 관도는 물자 이송의 중요 수단 중 하나였다. 수로와 산길 주변의 관도는 천년신교에게는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정파 무림에게는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되었다.
 중원에는 정파 무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파라 칭하는 자들도 있었고 소수지만 마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정파의 힘에 눌려 살았고, 천년신교에 호응해 일어섰다. 살수 조직들 역시 천년신교하고만 계약을 했다.
 내우외환.
 신강 일대의 수많은 세력과의 대립 관계 속에서 천년신교는 상대를 적절하게 제어할 방법을 알고 있었고, 타 세력에 대한 배타심이 크게 없어졌다. 하지만 정파 무림은 자신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기에 천년신교는 이 틈을 파고들어 철저한 고립작전을 펼친 것이다.
 바깥에서는 천년신교와 변방 무림이 장애물을 짓밟으며 진격했다.
 안에서는 산적, 수적, 그리고 해적 같은 도적 집단과 사파, 마인세력이 날뛰었다. 날이며 날마다 중요인사가 암살당한 채 발견됐다.
 정파 무림은 삽시간에 밀렸다. 아예 무림맹에서 이탈하는 문파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자부심을 버리더라도 죽고 없는 내일보다는 살아있는 내일을 택했다. 천년신교는 관대하게도 그런 문파들을 받아들여주었다. 물론 지속적인 감시는 했지만 딴 짓만 하지 않는다면 문파 자체는 내버려두었다.
 무림맹은 순식간에 패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때 다섯 명의 영웅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때 정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다. 전쟁 초기 때 홀연하게 사라진 그들은 오 년이 지나고 무림맹이 끝자락까지 몰릴 위협에 처하자 절세의 무력을 갖추어 세상에 출도한 것이다.
 그들은 강했다.
 천년신교의 그 어떤 고수도, 변방 무림의 그 어떤 고수도 그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사파나 도적 집단은 그들을 보면 무조건 후퇴했다.
 살수들이 수없이 그들을 암살하려 했으나 오는 족족 당하기만 했다.
 어느새 다섯 영웅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렸다.
 호정오협.
 그들은 자신들이 선문에서 무공을 배웠다고 밝혔다. 사실 이는 떳떳하게 발표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각각의 문파에 소속되어 있었고, 함부로 타 문파의 무공을 배우는 것은 그들의 사문을 능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과 선문이라는 이름이 그 어떤 비난도 허용하지 않았다.
 “선문은 자격이 있는 자만 들어갈 수 있는 전설의 문파다. 선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무공은 심오하며 정의롭다. 호정오협이 선문의 무공을 배웠다는 것은 칭송하면 했지 비난할 일이 아니다.”
 무림맹주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선문이 주는 이름값은 대단했다.
 천년신교는 호정오협의 출현을 경계했다. 정확히는 선문의 천하 출도를 걱정했다. 아무리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어가고 있다지만 선문이 주는 미지수의 힘은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계산이 안 되었다.
 다행히도 선문은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호정오협의 선언 뒤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천년신교도 이쯤 되면 선문이 실존하는 문파인가 아닌가 고민했을 정도로 조용했다.
 호정오협이 위협적이긴 하지만 천하가 휘말린 전쟁이었다. 다섯 명의 절대고수가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이쪽에도 절대고수들은 있었고, 경계할 필요는 있어도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이 천년신교의 생각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정파 무림은 천년신교의 예측대로 거의 궤멸까지 갔다. 호정오협의 출현 이전에 이미 그렇게 되었다. 천년신교와 동맹세력들은 착실하게 정파 세력을 줄여갔으며, 중원 곳곳의 은거기인들이 일어섰지만 막강한 조직의 앞에 스러져갔다.
 호정오협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인간들인지 나타날 때마다 천년신교와 동맹세력들이 패배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검토한 작전과 과할 정도의 인력, 함정을 준비했다. 그들이 파악한 호정오협의 수준이라면 반드시 죽어야 했다. 하지만 호정오협은 죽기는커녕 예상 이상으로 강한 힘을 내서 위기를 모두 타파했다. 평상시에는 죽일 수 있는 정도의 고수였지만 그들이 진짜 위기에 처할 때는 몇 배에 달하는 힘을 발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측정 불가능한 선기를 내뿜었다. 인간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수차례에 달하는 전투의 보고를 받은 천년신교의 참모진은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어디에서 힘을 공급받는 듯하다.”
 말이 되는 얘기인가 싶었지만 실제 그들이 내뿜는 선기가 그들의 몸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는 보고도 있었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닌 이상 믿어야 했다.
 또한 호정오협은 선언했다.
 “선문이 있고 선계가 있는 한, 우리는 패하지 않는다. 선계는 우리에게 항상 힘을 주신다.”
 천년신교 입장에서는 개소리였다. 그렇다면 하늘이 의도적으로 정파 무림을 돕고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렇든 아니든 천년신교는 호정오협의 힘을 타파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호정오협과 무림맹, 그리고 들불처럼 다시 일어선 정파 무림의 힘에 동맹세력은 정전협정을 맺었다.
 맹이 다 떨어져나간 천년신교는 홀로 전쟁을 수행했고, 결국엔 패했다.
 
 ***
 
 마흉 천세기는 높고 큰 전각에서 바깥의 경치를 보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천년신교는 지금도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건만 자연은 덧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천세기는 자연 앞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문득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구상은 완벽했다. 강력해진 천년신교와 동맹세력들의 힘에 정파 무림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조금만 더하면 완전하게 전멸시킬 수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호정오협 때문에 동맹세력은 와해되고, 천년신교는 이제 정파 무림과 반대의 입장에 처해 패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당연히 호정오협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어그러진 것이니까. 그들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림맹에서 수하들과 축배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던 천세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이 났다.
 그가 교주의 자리까지 올라온 이유.
 
 -천년신교의 힘이 지금보다 몇 배로 강해지고, 정파 무림이 멸망 직전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정파 무림이 패할 수가 없다. 하늘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는 친형을 죽이고 권좌를 찬탈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권좌를 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형인 천세광은 능력이 있는 교주였고, 수하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천년신교의 대외확장은 천세광의 대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신강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내부 정비에도 힘썼다. 비록 그를 죽이고 이 자리에 올랐지만 천세기는 아직도 천세광을 존경했다.
 하지만 천세광은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중원에 칼을 겨누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원과 충돌하지 않으려 했다.
 천세기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힘을 지니고도 왜 양보를 한단 말인가? 이치에 맞으면 그럭저럭 이해라도 하겠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천세광은 기꺼이 정파에게 양보했다.
 천세광이 숙청된 이후의 상황이었지만 숭검문이 천년신교의 세력을 거리낌 없이 공격한 것도 천세광의 정책 탓이 컸다.
 천세광은 교를 꾸려가는 것에는 유능했지만 정파 무림에 대한 외교에서는 한없이 무능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들려왔다.
 
 -정파 무림 내에서도 선문을 의심하는 자들은 있다. 하지만 선문과 선계는 실제로 있다. 그들은 정파 무림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천년신교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중원을 지배할 수는 없다.
 
 ‘선문’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설로 치부되던 문파였다. 중원 무림이 위기에 처한 상황은 많았지만 선문이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천세기와 마인들은 천세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근거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는가?
 그 때문에 천년신교에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도 생겨났다. 천세기는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하고 여러 차례 천세광에게 진언했다. 하지만 천세광은 듣지 않았다.
 그것만이라면 천세기가 친형을 죽이진 않았을 것이다.
 천세기는 어느 날 천세광이 외부에서 여인을 들여와 모종의 주술과 의식을 거행하고 그 여인을 품어 임신시킨 사실을 알아냈다. 형의 행보가 미심쩍었던 그는 좀 더 캐보기로 했고, 경악했다.
 천세광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아이를 품은 여인을 약물에 담그고 살아있게만 했다. 여인에게 온갖 영약을 물처럼 공급했고, 사악한 주술들을 걸었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동남동녀의 피를 제물로 바쳤다.
 언젠가부터 신교의 재정이 흔들렸다. 천세기가 신교의 재정을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잘 알았다. 하지만 어디서 돈이 새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파산까지야 가진 않겠지만 좌시할 수는 없었다.
 원인을 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누군가 정보를 차단한 것이다. 교주의 동생이며 마군 중 한 명인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은 그가 곧 자기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자신만 눈이 가려진 게 아니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자들도 참모들도, 그리고 다른 마군들도 내부수사를 했지만 밝혀진 게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교주인 천세광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교주인 천세광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거니와 천세광의 성품상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게다가 천세광을 의심하는 자체가 윗사람에 대한 불경이었다. 비록 정파 무림에 대한 외교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천세광을 여전히 주군으로 모셨다.
 그랬는데······ 천세광이 범인이었다.
 아무리 천세광이라도 천년신교의 예산을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어떤 조직이라도 수장이 그렇게 함부로 조직의 돈에 손을 댔다간 뿌리부터 흔들린다. 조금씩이라면 몰라도 이렇게까지 큰 규모로 돈을 착복했다면 문제가 된다.
 천년신교의 예산에 손을 댄 것부터, 사악한 대법으로 뭔가를 탄생시키려는 천세광에게 더 이상 천세기와 마인들은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었다. 천세광이 하려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그게 신교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결국 그들은 천세광을 죽였다. 그리고 천세기가 교주의 자리에 올랐다.
 천세광의 가족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본래라면 죽여야 마땅하나 천세기에게 그들은 형수이고 조카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죽이는 게 옳았지만 천세기는 그들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대신 그들은 평생토록 감시받으며 살아야 했다.
 문제가 된 산모는 천세광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대법의 영향인지 산모도 죽고 말았다.
 천세광과 산모의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하지만 사악한 대법을 받은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는 평범했다. 대법이 실패했다고 다들 생각했다.
 친형을 죽일 정도로 독한 천세기였지만 차마 아이를 죽일 순 없었다. 그 아이를 위해 수백 명의 피가 바쳐졌어도 그 아이는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가 장차 커서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천세기는 수없이 고민했고, 결국 아이의 처우를 결정했다.
 아이는 천년신교의 금지로 보내졌다.
 그곳은 교주라도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천년신교 내에 교주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곳은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 수는 없는 곳이었다.
 후에 신교도들이 ‘불귀곡’이라 이름을 지은 곳은 결국 천년신교 내의 금지가 되었고, 위험한 죄수들을 그곳에 들여보냈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감옥, 그게 바로 불귀곡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천세기는 다시 한 번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형님의 말씀이 결국 이런 식으로 실현되었구려. 후회는 없으나 원망은 남소. 하늘은, 선계는 어찌하여 천년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오?’
 이십오 년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인 천세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죽여 놓고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새삼스레 씁쓸했다.
 “백리현.”
 천세광의 뒤에서 책사로 보이는 인물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바로 천년신교 참모진 ‘천리안(千里眼)’의 수장인 천리안주 백리현이었다. 지난날 천년신교가 중원을 그토록 압박할 수 있었던 데는 백리현의 역할이 컸다.
 “하명하십시오.”
 “지금 즉시 창룡회의를 열겠다. 각 조직의 간부들을 모두 소집하라. 그리고 포로로 잡힌 자 중에 모산파의 장문인이 있었지? 그자도 창룡회의로 끌고 와라. 물어볼 게 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무림의 대부분 문파는 고유무공을 중시한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무공에 있기 때문이었다. 문파의 힘은 문도로부터 나오며, 문도의 힘은 무공으로부터 나온다. 즉 문파의 힘이 무공인 셈이라 쳐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무공이 아니라 주술을 익히는 문파도 있었다. 새외에도 있었고 중원에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문파는 모산파였다.
 옛 선인들의 주술과 방문좌도의 사법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 모산파는 일단은 정파에 속해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림맹에 소속되지는 않은 문파였다. 정확히는 정사중간의 문파라고 해야 옳았다.
 그렇긴 해도 일단은 정파를 표방하고 있으니 모산파도 천년신교와 정파 무림의 전쟁에 참여하긴 했다. 하지만 정파 무림은 대체적으로 주술을 깔보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고, 모산파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모산파가 본래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가 아니라는 것도 일조했다.
 하지만 천년신교는 무공과 주술 양쪽에 모두 일가견이 있었고, 천년신교의 주술에 피해를 본 무림맹은 모산파에게 무림맹 가입과 지원을 조건으로 모산파에게 적극적 협력을 원했다.
 모산파에겐 좋은 기회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모산파가 중요한 작전을 펼치는 현장에 동맹세력이 들이닥쳤고, 모산파의 장문인 서산도인은 생포되는 굴욕을 겪었다.
 동맹세력은 천년신교에게 서산도인의 신병을 넘겼고, 천년신교가 전쟁에 패해가는 지금도 그는 교 내부에 있는 뇌옥 안에서 죄수로 지내야 했다.
 서산도인은 비록 죄수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에는 사천에 있는 한 방파에 억류되었다가 돌고 돌아 천산의 뇌옥까지 오고 말았다. 게다가 그 말고도 후에 들어온 죄수들이 있어서 호정오협의 존재까지도 알게 되었다.
 마교가 밀린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교는 분명 패할 것이다. 호정오협, 나아가 선문과 선계가 개입했다면 마교가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무(無)에 가까워진다.
 마교는 분명히 항복할 것이고, 그를 비롯한 죄수들은 마교와 무림맹의 협상 때 마교가 휴전을 대가로 석방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림맹이 어떻게든 포로들을 빼내려 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말고도 무림맹과 각 문파의 중요인사들이 많았다.
 서산도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뇌옥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윗대가리 중 누군가가 내려왔나 보구만.’
 그의 생각대로 마교의 윗선 중 누군가가 내려오긴 했다. 다만 그의 예상보다 훨씬 거물이었지만.
 천리안주인 백리현이 직접 뇌옥에 왔다.
 서산도인은 깜짝 놀랐다.
 뇌옥은 백리현 같은 거물이 올 곳은 못 되었다.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라 위생도 엉망이었고 불빛도 어두워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그가 아는 백리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곳에 더더욱 오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왔다? 뭣 때문에?’
 백리현이 간수장과 함께 서산도인이 있는 뇌옥까지 왔다. 서산도인을 비롯한 죄수들이 긴장했다. 단지 죽이려고 왔을 리는 없다.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들에게 좋은 일일까? 백리현은 자타 공인의 이 시대 최고의 두뇌 중 한 명이었다. 그에 비할 만한 인물은 무림맹 참모진의 수장인 뇌공주(腦公主) 사마학 정도일까? 아, 호정오협 중에서도 머리 잘 굴리는 책사형 인물이 있다고 들었으니 한 명 추가다.
 하지만 이런 거물이 대체 왜 뇌옥에 들어온 걸까?
 “그대가 모산파 장문인인가?”
 백리현이 서산도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산도인은 백리현이 자신을 지목해 놀랐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죽이러 오진 않았을 테니 상대의 말을 들어봐야겠지. 잘하면 여기서 나갈 길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렇소만?”
 반공대에 백리현의 옆에 있던 간수장과 간수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들 입장에선 백리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가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어도 그들은 내일 뜨는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모산파 장문인이라고는 하나 한낱 죄수가 천리안주에게 그따위로 대하다니?
 백리현이 간수들의 표정을 보고 진정시켰다.
 “동요하지 말도록. 교주께서 그를 보고자 하신다. 여기서 그대들이 죽이면 곤란하지.”
 그 말에 서산도인은 물론 간수들과 죄수들 모두가 놀랐다. 백리현이 오는 것만도 경악할 판인데 천년신교의 주인이 죄수를 보려고 한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창룡회의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간수장이 물었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교주가 창룡회의 소집을 명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소집에 응할 신분인 것은 아니었지만.
 백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서산도인을 보았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백리현이기에 서산도인의 꾀죄죄한 모습이 못마땅했다. 거리가 좀 있는데도 썩는 냄새가 났다. 만약 서산도인만 아니었더라도 그가 평생 이곳에 올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지금 이대로 교주님을 뵙게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당신은 좀 씻을 필요가 있겠어.”
 “핫, 말씀만이라도 고맙구려. 솔직히 마지막으로 씻은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거든.”
 서산도인의 말에 백리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쯧, 꺼내줘.”
 
 
 제2장. 역천의 대법
 
 
 창룡회의는 천년신교의 대사를 의논하는 회의를 칭했다. 이 회의에는 교주와 천리안주만이 아니라 각 예하 부대와 휘하 문파의 수장들이 모여 천년신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했다.
 천세기가 연 창룡회의는 여러 의미에서 중요했다.
 첫째는 지금의 회의로 인해 천년신교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전쟁을 지속할 것인가, 무림맹과 휴전 협정을 맺을 것인가.
 둘째는 창룡회의 사상 처음으로 정파 무림의 사람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물론 참석이 아니라 끌려왔다는 의미가 정확하겠지만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창룡회의에 참석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산도인은 죄수의 차림으로 창룡회의에 가면 안 된다. 백리현은 무인들로 하여금 그를 감시하고 시녀들을 불러 그를 씻겼다.
 서산도인은 긴장했다.
 천년신교의 교주와 각 조직의 수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서산도인이 해야 할 것이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술밖에 없었다. 무공이 지배하는 무림에서 주술은 희소성을 가졌다. 그만큼 할 줄 아는 사람이 적고 서산도인 수준의 주술사는 더더욱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교였다. 중원보다는 이곳에 주술사가 더 많다는 것을 서산도인은 알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마교의 주술사의 차이점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현 마교의 상황, 호정오협, 선문, 선계, 그리고 내 주술······. 그렇구나! 이놈들은 호정오협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나!’
 선문과 선계, 그리고 그에 관한 것은 자신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모산파 내에서도 이 정도나마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도 젊은 날에 강호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얻은 지식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 녀석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지.’
 선문에 관한 지식은 그 혼자서 찾아낸 게 아니었다. 제자와 함께 찾아냈다.
 지난날의 우연이 없었다면 그와 제자조차 영원히 몰랐을 지식이었다.
 만약 교주가 그에 관한 질문을 한다면 대답을 해줘야 하나?
 ‘모른다고 하면 죽일지도 모른다. 창룡회의 사상 최초로 정파의 인물이 참석한다. 성과가 없으면 최상의 결과가 교주가 뇌옥으로 다시 나를 보내는 것이고 최악이면 그 자리에서 죽이겠지.’
 무림맹으로부터 냉대를 받긴 했어도 그도 엄연히 정파의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호정오협을 본 적은 없지만 서산도인은 그들을 지지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의 비밀을 지켜줘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을 때 얘기.
 ‘흠, 생각해보니 얘기를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저들이 안다 한들 절망만 더할 뿐이야.’
 교주 이하 마인들이 낙담할 꼴을 상상하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죄수였던 몸이지만 씻겨놓고 좋은 옷을 입히니 서산도인도 그럭저럭 볼 만한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받고 부실한 영양 공급으로 얼굴색이 창백하고 말랐지만 그렇게까지 때깔 좋게 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보기에 괜찮아 보이면 된 것이다.
 “나름 괜찮군. 그 정도라면 교주님도 불쾌해하시진 않겠지.”
 백리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산도인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무리 광을 내고 좋은 옷을 입혀도 그는 죄수였다. 창룡회의가 끝나면 다시 뇌옥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백리현의 칭찬 아닌 칭찬에도 싱겁게 반응할 수밖에.
 게다가 좋은 옷을 입었다 한들 그의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손을 포박을 당했고 발목에는 무거운 쇠구슬을 찼다. 운신에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이래서야 싸움은커녕 경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겠지.
 게다가 그를 감시하는 무인이 네 명이나 있었다. 전후좌우 사면에서 서산도인을 감시하니 탈출은 꿈도 못 꾼다. 어차피 이들이 없어도 백리현 본인이 뛰어난 고수이니 얼마 안 가 잡히겠지만.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
 백리현은 살짝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뭐지?”
 “날 왜 데려가는 거요?”
 이들이 자신을 창룡회의에 데려가는 이유는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미리 확인해 두는 편이 좋다. 그래야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할지 밑바탕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면, 당신은 성실히 대답할 용의가 있나? 당신이 교주님께 거짓을 고하면 어떻게 될지는 굳이 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과 성실하게 진실을 모두 말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 의외로 쉽다. 여러 방면에서 대조해 보면 된다. 하지만 아홉의 진실을 말하는 것과 열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구별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산도인 입장에서 굳이 진실을 말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요. 뭣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된다면 자백제를 먹일 텐데. 그런 경험은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다면 그대가 성실한 태도를 보이길 기대하지. 또한 교주님 앞에서 불경스러운 말투는 삼가도록.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죽을 테니까.”
 
 정파 무인 중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절정의 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박당한 경험을 한 자는 아마 무림 역사상 서산도인이 최초이지 않을까?
 서산도인은 그런 생각을 해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주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건만 무림맹에서 위험인자로 지목한 마인들만 수십 명이었다. 그가 아는 자들도 있었고 모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지독한 마기를 무의식중에 흘렸다.
 저들 입장에서는 마기가 너무 자연스러울 것이다. 마기와 함께하는 것은 저들에겐 일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마기를 품어온 천년신교도들은 죽어서까지 마기와 함께할 것이다.
 서산도인의 입장에서는 공기가 오염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독한 마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개개인에게서 나오는 마기는 견딜 만했지만 백 명도 넘는 인원의 마기였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서산도인의 오감은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뇌가 욱신욱신 쑤시는 느낌이 들어서 서산도인은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내공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본적으로 뇌옥의 죄수들은 죄다 내공이 금제당해서 단 한 줌의 진기조차 일으킬 수 없었다.
 ‘도망갈 생각이야 처음부터 없긴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겠는걸.’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완전히 오락가락 할 것 같다. 서산도인은 결국 저항하는 걸 포기했다.
 “천리안주.”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인들이 풍기는 마기를 억제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서산도인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이는 천리안주밖에 없었다. 마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짜증나고 화가 났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지금 내 내공은 금제됐소.”
 “그런데?”
 “당신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속은 마기 때문에 아주 울렁거린다오. 꼭 멀미하는 것 같군. 이 자리에 모인 마인들이 조금만 기운을 조절해준다면 한결 편해질 것 같소. 제정신이라야 제대로 된 답변을 할 게 아니겠소?”
 백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압박을 느끼는군.’
 백리현은 마인들이 소집되기 전부터 마기를 완전히 갈무리하지 말고 조금씩 흘릴 것을 명했다. 그도 뇌옥의 죄수들이 내공을 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서산도인이 백여 명의 마기를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를 압박할 좋은 도구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에게 저런 요청을 한 건 조금 놀랐다. 입도 제대로 놀릴 수 없을 텐데 제법 강단이 있는 인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 서산도인은 기세에서 졌다. 교주가 묻는 말에 한 치의 거짓 없이 답변할 수 있을 거다.
 “모두 마기를 갈무리하도록. 죄인이 교주님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걸 바라는 자가 없다면 말일세.”
 뒤에 붙인 말은 서산도인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서산도인은 화가 났지만 감히 표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백리현의 호의 아닌 호의로 조금 편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교주의 호위대인 마영단의 단주 철혈검우(鐵血劍雨) 단사위가 나타났다.
 “천년신교의 위대한 주인께서 드십니다.”
 백리현을 포함한 모든 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산도인은 그 모습을 보고 천세기가 얼마나 이들을 잘 통솔하는지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마흉 천세기에게 무한한 신임과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 것이다.
 ‘대단하군, 마교주.’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맹이 패망 직전에 몰렸을 때 무림맹주에게 믿음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맹주인 뇌존 장백성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 뛰어남은 무공에 한한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상관이 없었지만 위기 상황에 몰리자 그는 조직을 통솔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다. 뇌야문의 문주였지만 그게 장백성의 한계였다. 그는 맹주라는 자리의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장백성과 천세기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저울추는 천세기 쪽으로 기울어진다. 적아를 떠나 서산도인은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천세기가 태사의에 앉고 난 후에야 마인들도 앉을 수 있었다.
 마흉 천세기는 서산도인을 내려다봤다. 마교의 수장답게 눈빛이나 얼굴색, 심지어 손짓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이 없어보였다.
 서산도인은 마교주와 눈을 맞추려 했으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백여 명의 마인이 압박하는 것보다 마교주 개인이 압박하는 정도가 더 심했다. 천세기는 단 한 올의 마기도 흘리지 않았건만 그라는 사람 자체가 서산도인에게는 커다란 압박이었다.
 ‘역시 맹주보다 큰 존재감이야.’
 그는 마흉 천세기가 이 시대의 거인 중 한 명임을 실감했다.
 천세기는 서산도인이 위축된 모습에 만족한 듯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금일 창룡회의를 주관한 이유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알 것이다.”
 무림맹, 그리고 호정오협에 대한 대처법을 찾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천리안주인 백리현조차 호정오협을 상대하기 위한 수를 모색할 수 없었다. 호정오협은 전술전략이 먹히지 않는,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방법은 없지. 천리안주도, 신교의 참모진도, 그리고 나조차도 방법을 모른다.”
 천세기야 그렇다 쳐도 백리현에게도 방법이 없다는 말에 백여 명의 마인들의 얼굴에 미세한 일그러짐이 어렸다. 천년신교 최고의 두뇌도 선문이 주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다.
 백리현에게는 특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이때까지 전술과 전략이 먹히지 않는 전쟁은 없다고 믿어온 그였기에 지금의 수모는 큰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답을 알지도 모르는 자가 있어 이 자리를 빌려 모시게 됐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서산도인에게로 모였다. 천세기도, 백리현도, 백여 명의 마인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서산도인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천세기가 서산도인을 불렀다.
 “모산파의 장문인 서산도인.”
 마교 교주가 자신을 부르자 흠칫했지만 서산도인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말, 말씀하십시오.”
 적의 수장이었지만 차마 불경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천세기 개인에게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묻지. 왜 그대가 내가 구하는 답을 알 거라 생각했을 거라 보나?”
 마교의 주술사들은 호정오협이 선계에서 어떻게 힘을 받는지 그 원리와 대처방법을 알지 못했다. 해부를 하고 그들의 무공을 연구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들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했다.
 서산도인은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확신했지?
 “모르겠습니다.”
 천세기는 소집된 마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궁금할 것이다. 왜 본인이 모산파 장문인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 거라 생각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대답에 앞서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몇몇 마인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천세기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작금의 사태와 관련해 이십오 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든 마인들의 몸이 굳었다. 백리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주가 말하는 이십오 년 전의 사건이라면 천세광이 축출된 일밖에 없었다. 필요에 의한 일이었긴 하지만 천세광을 몰아낸 일에 대해서는 후회를 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교주였던 나의 형님께서는 정파와의 충돌을 최대한 자제했다.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이해를 못했지. 지난 세월 동안 축적한 힘이 있는데 왜 우리가 정파에게 무조건 양보를 해야 하는가? 우린 강했다. 이런 힘이 있기에 중원 무림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천세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마군들이, 그리고 각 조직을 이끄는 자들과 휘하 문파의 수장들까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천세광의 소극적인 태도가 점점 그와 수하들 간의 골을 만들어 갔다.
 “하지만 그게 형님을 몰아내야만 하는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천세광이 비밀리에 교의 예산을 착복했고, 마도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천년신교로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악한 대법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에 관여한 것은 천세광 본인과 마영단, 그리고 신교 내부에서도 대하기 꺼려하는 몇몇 마인들이었다.
 때문에 천세광이 축출될 당시 마영단도 전원 몰살당했고, 지금의 마영단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 교체된 인물들이었다.
 “그때의 형님은······ 도저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지.”
 천세광은 뭔가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상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가끔은 두서없는 말까지 했다.
 반란이 일어난 날, 천세광은 천세기에게 외쳤다.
 
 -모든 것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다! 중원 무림을 발 아래로 두려면 선문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해!
 
 천세광이 말하는 ‘무기’는 바로 자신의 아이였다.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전설상의 문파를 상대하기 위해 수백이나 되는 동남동녀의 피와 원혼, 그리고 수많은 영약과 사악한 주술을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아이를 인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괴물로 만들기 위해 천세광은 사람으로선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였다.
 천세광은 자신이 하려는 일이 반대에 부딪힐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다.
 천세기나 마인들이 보기엔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수백 명의 피를 바치는 것도 그렇지만 수천 종류에 달하는 영약들을 아이 하나 때문에 쓰다니? 그 영약들은 앞으로 신교를 구성하는 무인들을 위해 쓰여야 할 귀중한 것들이었다. 아무리 교주라고 해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그날, 천세광은 천세기의 손에 죽었고 아이는 금지에 보내졌다.
 “하지만 선문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형님은, 전대 교주가 생각한 선문을 상대하기 위한 비책은 자신의 아이를 괴물로 만든 것. 하지만 형님은 어떻게 선문에 대해 알았고 그런 대법을 입수했을까? 천년신교 내에도 없는 것을?”
 그것은 당시 아무도 풀지 못한 의문이었다.
 천세기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에 들어갔고, 천세광이 모산파의 한 도사와 접촉했음을 알아냈다.
 “형님은 모산파의 한 도사와 우연하게 만났다. 잘은 모르지만 그에게서 선문과 대법에 관해 들었다고 추측했다. 알고 보니 모산파에서도 파문을 당한 놈이더군. 감히 신교를 능멸한 죄를 물어 죽이려고 했으나 이미 당시에는 죽은 뒤였다. 형님이 입막음을 위해 죽인 것이겠지.”
 그 말에 서산도인이 고개를 들었다. 모산파에서 파문된 사람은 바로 그의 첫 제자였다. 재능도 출중하고 노력도 해서 모산파 내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금지된 주술에 손을 댔다는 걸 발견했고 차마 제자를 죽일 수 없었던 서산도인은 자신의 첫 번째 제자를 파문시켰다.
 그런데 그 제자가 마교에 있었다는 것도 모자라 죽었다는 것 때문에 이성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내, 내 제자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까?”
 분노와 슬픔 때문에 서산도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제자가 또다시 죄를 저질렀고 그 결과 죽어버렸다는 것 때문에 생긴 분노와 슬픔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지난날 제자를 파문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모질게 먹었으면 수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서산도인의 눈에 핏발이 섰고 눈물이 흘렀다. 터진 핏줄 때문인지 붉은 눈물이었다.
 “그렇다. 그대의 제자는 입이 싼 편이었던 편인 것 같더군. 그러니 입막음을 당한 것이겠지만.”
 아마 자신의 지적 능력을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 모산파 도사는 죽기 전 마지막에 들른 기루에서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단다. 그리고 그가 술에 취해 발설한 내용 중에는 자기와 사부가 엄청난 대법을 발견했다고, 무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대법이라는 것도 있었고.
 서산도인은 제자에 관한 비사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마교주로부터 제자의 부고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추한 죽음이었다.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설치다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제자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것이다.
 “슬픈가? 그렇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대에게는 슬픔에 잠길 여유가 없다. 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내게서 뭘 듣고 싶은 겁니까? 내 제자가 교주의 조카에게 펼친 대법을 나더러 펼치라는 겁니까?”
 그것은 서산도인으로서는 자신이 죽어도, 아니 모산파가 멸문해도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 대법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사람이라고 자각한 이라면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천세기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제 와 그 대법을 다시 펼쳐본들 시간도 없을뿐더러 자원도 부족하다. 형님이 왜 그런 대법을 시도했는지 이해는 가지만 말이지.”
 지금의 천세기는 천세광을 이해한다. 물론 자신에게 그 짓을 하라고 한다면 못할 것이다. 수하들은 어떻게 설득한다 하더라도 신교에는 그의 수하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하들의 가족이 있었고 신교를 지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당장 민심이 이탈할 텐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최후의 최후에 몰려도 함부로 쓸 만한 방책은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대법에 관한 것이 아니다. 호정오협이 어떻게 막강한 힘을 얻는지, 해결책이 뭔지 그것에 관해 그대에게 묻고자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그러자면 서산도인의 지식이 필요했다.
 “대답해 주겠나?”
 천세기도, 백리현도, 백여명의 마인도 서산도인의 얼굴만 바라봤다. 서산도인의 대답에 따라 천년신교의 운명이 갈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적의 포로에게 답을 구해야 한다니 천년신교 역사상 초유의 수치였고 굴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서산도인이 입을 열었다.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나는 반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반의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세기는 실망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약간의 단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튼튼한지 부실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아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대가 아는 것에 대해 답을 구한다.”
 “그렇다면 대답해 드리지요. 호정오협은 선문으로부터 선공(仙功)을 배웠을 겁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천세기로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도가무공은 아닌 것 같군. 선공이 뭔가?”
 “신선 혹은 천선의 무공으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선계의 무공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선공은 모든 마공의 천적이 되며, 그것은 천년신교 교주의 무공조차 예외는 아닐 겁니다.”
 천세기는 호정오협과 겨룬 일이 있었다. 호정오협의 무명에 대해 들었던 그는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호정오협 중 한 명과 붙게 되었다.
 천세기가 상대한 자는 온몸에 불쾌한 느낌의 기운을 흘리며 천세기를 압박했다. 기교나 숙련도는 천세기가 위였지만 내공의 출력이 격이 달랐다. 천세기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천세기의 말을 들은 서산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선공을 익힌 자 특유의 선기입니다.”
 선공을 익히기 위해선 특별한 수련을 거쳐야 한다. 그 수련이 뭔지는 서산도인도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것은 선문에서 그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공은 무림에 있는 여타 무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신선의 무공답게 말도 안 되는 힘을 주지요. 정파의 무공은 속성 수련이 가능한 마공이나 사파 계열의 무공과는 달리 정순한 대신 쌓는 속도가 느리다고 흔히들 말합니다만, 선공은 그런 상식조차 무시합니다.”
 서산도인도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몰랐다. 자연 속에서 정순한 기운을 몸 안에 축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모은 기를 걸러내고 걸러내야 맑고 깨끗한 진기가 쌓이는 것이고 그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선공은 정심한 힘을 상식을 웃도는 속도로 쌓게 해준다.
 “흠, 과연.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호정오협이 젊은 나이에 어떻게 막강한 내공을 쌓았는지 알겠군.”
 “하지만 선공의 무서운 점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선공이 악랄할 정도로 무서운 점은 선계로부터 직접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공을 쌓은 무인은 단전 대신에 선단이라는 것을 생성한다. 이 선단은 내단의 일종이나 마찬가지라서 그 자체로도 강한 힘이 있지만 유사시에 선계와 선공을 익힌 무인 사이의 통로가 된다.
 그 말을 들은 천세기는 침음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제가 젊은 날에 우연하게 얻은 지식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서산도인이 선계와 선문, 그리고 선공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이었다.
 대처법? 그런 것 따위는 서산도인도 몰랐다. 누군가 그 답을 알고 있다면 서산도인이야말로 묻고 싶었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힘에 대처할 방법이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형님이 시도한 대법은 뭔가?”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대책이라곤 할 수 없겠지요.”
 과거 선공에 대해 아는 몇몇 사람들은 선공을 넘는 무공을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 서산도인이 습득한 지식이 적힌 책 역시 그런 사람이 구술한 책이었다.
 그 책에는 선공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을 가진 남녀가 결합하고 여성이 아이를 잉태해, 산모를 통해 수백 명의 동남동녀의 정순한 피와 그들의 원혼을 바쳐야 하고, 각종 영약과 수백 가지의 주술을 쓰는 방법이었다.
 저자는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체질을 ‘극마지체’라고 했다.
 극마지체는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체질이었다. 엄청난 마기를 태어날 때부터 습득하고, 천재 이상의 두뇌를 지녔다. 혈도나 골격이 무공을 익히는데 가장 이상적인 신체로 거듭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아이는 자신을 잉태한 산모와 제물이 된 아이들의 원혼이 쌓은 증오를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오직 마공을 익히기 위해, 그 한 가지만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괴물이 세상을 향한 증오를 불태울 때 누가 있어 그를 막겠습니까?”
 그렇기에 이 대법이 금지된 주술이라 불리며 경원시된 것이다.
 서산도인은 책을 즉시 불태웠지만 당시 자신과 같이 있던 제자가 그 책의 내용을 외웠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군.”
 천세기는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극마지체를 타고난 아이가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면 호정오협을 막을 수 있겠나?”
 
 ***
 
 천세기와 백리현은 교주의 집무실에 있었다.
 천세기는 창문을 열어 멀리 보이는 천산의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항상 보는 경치였지만 천세기는 자신이 보는 풍경이 질리지 않았다.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똑같은 방에서 보는 똑같은 풍경이었다.
 백리현은 그런 천세기를 보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몇 시진 전에 창룡회의에서 천세기가 서산도인에게 한 마지막 질문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리현이 예상한 최악의 답이었다.
 금지는 뇌옥에도 가두지 못할, 하지만 신교에 바친 공이 있어 죽이기에는 껄끄러운 자들을 보낸 영원의 유배지였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가 없는 곳이었기에 안의 생활이 어떤지는 백리현으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금지인 불귀곡에는 천년신교가 매번 지켜온 규칙이 있었다.
 무공서적을 포함해 세상에 신교가 입수한 모든 책을 들여보낼 것. 그리고 죄인의 공급을 일정하게 맞출 것. 그리고 죄인들의 단전을 폐쇄하거나 힘줄 등을 끊지 말 것.
 왜 그런 규칙이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불귀곡이 탄생할 때부터 생겨난 규칙이었고, 불귀곡의 역사는 천년신교의 역사만큼이나 길었다. 천년신교가 탄생한 발원지가 불귀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안에 들어간 자들은 영원히 나오지 못하기에 무공을 폐하지 않아도 안심은 되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탈출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죄인이 아닌 이상 들어갈 일도 없기에 궁금해 하는 자는 많아도 원인을 밝혀내려 시도한 자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 극소수 역시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인뿐만 아니라 정파의 인물, 변방 무림의 포로까지 쓸모가 없어지면 뇌옥으로 집어넣곤 했다. 죄수를 일정하게 공급해야 하는데 들여보낼 만한 죄를 짓는 마인이 없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천년신교 입장에서 금지는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쓰레기 배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십오 년 전 전대 교주 천세광의 갓 태어난 아이도 금지로 보내졌다.
 아이가 극마지체인지는 모르겠다. 백리현도 그 아이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천세기를 포함해서 신교의 고수들과 의원들이, 마학자(마공과 주술을 연구하는 학자. 정파에는 무학자가 있다)들이 아이의 몸을 낱낱이 조사했지만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서산도인의 말이 맞다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마기를 타고났다. 하지만 직접 본 천세광의 아이는 마기라고 터럭 한 올도 없었다.
 대법이 실패한 거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천세기는 실낱같은 희망을 믿고 아이를 금지에서 데려올 방법을 강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리현은 주군의 명령에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가 지금도 살아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살아있다 해도 문제였다.
 대법이 실패했다면, 그 아이가 살아있다 한들 호정오협을 대적할 고수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대법이 성공했다면, 아이는 돌아와서는 안 되었다.
 금지에는 원래도 위험한 마인들이 많이 감금되어 있었다. 아이가 금지로 보내진 다음에도 죄수는 계속 공급했으니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과 자신이 금지로 보내진 이유를 알 수도 있었다. 아이가 살아있어 마공을 익혔다고 했을 때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천세기일 가능성이 컸다.
 천세기는 분명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절대고수였다. 하지만 호정오협이라는 상식을 깨는 자들이 나타났다. 다시 상식이 깨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천리안주인 백리현은 교주를 무사히 보필할 책임이 있었다. 교주가 원한다고 위험인자를 방관하는 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년신교 내에서 교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천세광은 부하들의 신임을 잃어 그 명에도 힘을 잃었었지만 천세기는 아니었다.
 교주의 명령을 따른다고 해도 문제는 남았다. 불귀곡에 누구를 보낼 것이며 어떻게 돌아오게 할 것인가?
 돌아올 방법이 없는 이상 천세광의 아이를 데려오는 것은 호정오협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했다. 명령을 따를 수는 없지만 따른다 해도 명령을 이행할 방도가 없다. 이게 백리현이 번민하는 이유였다.
 천세기가 백리현의 의중을 읽었는지 웃으며 물었다.
 “고민되나?”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고 하지요. 지나간 일에 아무리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십오 년 전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어찌 됐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 반란으로 교주가 된 천세기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천세기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천년신교도는 없었다. 아무리 천리안주인 백리현이라 해도 즉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불경이었다.
 그러나 천세기는 화내지 않았다. 백리현이 한 생각을 그도 한 것이다.
 만약 이십오 년 전 반란이 일어나지 않아서 천세광이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다면 오늘날 중원을 무릎 꿇렸을까? 천세광의 자식이 호정오협을 박살내고 선문을 멸망시켰을까?
 “어쩌면 신교는 중원을 제패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과연 전대 교주의 자식이 신교를 위해 싸웠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극마지체는 증오를 안고 태어난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신교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은 지금 교주님과 우리들이 한 행동이 옳았다고밖에 결론이 안 나는군요.”
 “훗, 그런가? 위로가 되네. 이상하게 자네 말을 듣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군. 과연 천하에서 논리로 자네를 이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
 “뭐 일단 사마학이 떠오르긴 합니다만.”
 “무능한 맹주를 만난 불운한 책사지. 사마학이라는 사람의 인생에서 최고의 불행이 아닌가 싶네.”
 그 때문에 사마학은 가진 바 능력의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내는 게 힘들었다. 무림맹이라는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사내아이였지. 형님의 아이 말일세.”
 천세기의 갑작스러운 말에 백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면 지금쯤 스물여섯 살이 되었겠군. 얼추 호정오협 개개인의 나이도 그 정도 아닌가?”
 “도패라 불리는 자가 이립을 넘기긴 했습니다만 나머지는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내 결정으로 불귀곡에 넣긴 했지만, 굳이 이번 일이 아니라도 가끔씩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네.”
 “······.”
 백리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세기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평생을 무공과 신교의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절정의 무인이기 때문에 천세기는 아직 자식을 볼 수는 있었다. 때문에 주위에서는 아직도 천세기에게 일가를 이룰 것을 바랐지만 천세기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죽은 형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자식처럼 길렀으리라.
 잠깐 말이 없어진 천세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정오협은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천년신교를 멸망시킬 충분한 힘이 있었다. 이제껏 잠잠하던 선문이 호정오협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세상에 개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천년신교는 눈엣가시일 것이다.
 “이제는 하늘조차 우리의 편이 아니지. 교도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상황은 더 심각하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천하를 불태울 힘이 있는 자가 있어야 하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돼. 그래서 나는······.”
 백리현은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그가 생각한 최악의 답만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언제나 나쁜 예감은 들어맞는다.
 “내가 직접 불귀곡에 들어가려 하네.”
 “······.”
 
 
 제3장. 불귀곡
 
 
 불귀곡.
 천년신교의 금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본래 명칭은 ‘마신곡’이었다. 천년신교의 시조와 그의 추종자들이 처음 자리를 잡고 교의 기틀을 다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작금에 와서 마신곡의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신교도들조차 잘 몰랐다.
 천년신교가 이 땅에 들어설 무렵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죽간이라 하여 대나무를 이어서 지금의 종이를 대신할 판을 만들어 사용했다. 때문에 그때를 기록한 문헌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마신곡의 전설은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즉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마신곡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마신곡의 전설은 누군가가 지어낸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재밌게도 이 주장을 하는 이들 또한 신교도들이었다.
 천년신교는 기본적으로 종교단체다. 그들은 천년신교를 세웠다는 시조를 숭상한다.
 천년신교도들은 그들의 시조를 지상에 강림한 신이라고 믿었으며, 오늘날에도 매년 시조를 기리는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시조숭배사상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시조를 포함해 역대 교주들과 천년신교 구성원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신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학자들을 양성했다.
 그런 사학자(史學者)들 중 일부가 마신곡의 전설을 부정했다. 마신곡이 전설대로 천년신교의 최초 발생지라면, 그곳은 신성한 땅이었다. 불귀곡의 역사가 신교만큼이나 오래되었으니 신성한 곳이 어느 날 갑자기 최악의 뇌옥으로 바뀌었다는 건데, 도대체 무슨 일을 겪어야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에 관한 문헌도, 구전도 내려오지 않아 어떤 추측도 할 수 없었다. 무림에 워낙 비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한 문파의 성지가 갑자기 감옥으로 변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뭔가 착오가 생겨 전설이 잘못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불귀곡 혹은 마신곡. 천년신교 최후의 비밀이라 불리기도 하지. 그리고 교주들이 최후에 정복해야 할 장소라 칭해진다.”
 역대 교주들은 중원을 정복하길 원했다. 그곳의 풍부한 물산은 분명 천년신교 입장에서는 탐이 난다. 천세기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결국은 중원의 부를 차지하길 바라서였다.
 그와는 별개로 금지인 불귀곡 역시 역대 교주들이 정복해야 할 장소였다.
 그곳은 교주조차 발걸음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들어갈 리가 없다. 그래서 교주들은 이곳을 정복하길 원했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나 천년신교 내에서 교주가 갈 수 없다는 곳이 있는 게 역대 교주들에게는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불귀곡에 수하들을 보낸 교주도 있었고, 후대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들어간 교주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천세기도 불귀곡에 도전할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올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본래 그는 일부 교주들처럼 은퇴 후 이곳에 들어가 비밀을 캐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원을 제패하고 불귀곡의 비밀마저 정복한다면 그는 시조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교주로 기록될 수 있을 터였다.
 “한 가지 꿈은 저 멀리 날아갔지. 하지만 또 다른 꿈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원 제패의 꿈은 날아갔다. 호정오협이라는 학살병기가 살아있는 한, 선문이 버티고 있는 한 천년신교를 비롯해 정파 무림이 아닌 자들은 어느 누구도 중원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떠나서 지금은 천년신교의 존망도 장담할 수 없었다. 유일한 희망이 극마지체일지도 모르는 천세광의 아들이었다.
 백리현은 끝까지 천세기가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안에 무슨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데 주군을 사지로 보내는 바보는 없다. 하지만 그도 교주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천세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시시각각 호정오협과 무림맹은 다가오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조건 방어를 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협상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승기를 잡기 전까지 중원의 정파 무림은 천년신교에게 유린당할 대로 당했다. 그들의 복수심이 협상으로 사그라지진 않겠지.
 또한 그들에겐 힘이 있었다. 호정오협이라는 패를 내세우는 한 정파는 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천년신교 최강의 마인은 교주인 마흉 천세기다. 불귀곡을 정복하는 일이 무공으로만 되진 않을 것이다. 귀환하지 않은 역대 교주들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죽지 않는 데에는 무공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죽지만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결국 천세기를 위시한 최정예 마인들만이 불귀곡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이 났다.
 교주인 천세기와 마영단, 호법원의 대호법 염라장(炎羅將) 고천무, 장로원의 원로인 혼검(混劍) 위운, 사대마군 중 한 명인 혈해마군(血海魔君) 서문비가 그 구성원이었다.
 천리안주인 백리현도 참여했는데 모두가, 특히 천세기가 반대했다. 유사시 신교를 통솔해야 하는 것은 천리안주인 백리현이었다. 신교에 고수는 많아도 조직을 총괄할 역량을 가진 이는 얼마 없었고, 그중 제일 뛰어난 자가 바로 백리현이었다. 전쟁의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고 참모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백리현도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교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리 통솔을 한다 한들 한계가 명확합니다. 그리고 호정오협은 저로선 막을 방법이 없지요.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신교가 위기를 겪는다면 차라리 교주님께서 생환하실 방법을 높이는 게 낫지요.”
 뛰어난 무력에 뛰어난 지력이 함께한다면 불귀곡에서 돌아올 확률은 확실히 높아질지도 모른다. 결국 천세기는 백리현과 함께 가게 되었다.
 
 ***
 
 불귀곡이라 하면 흔히 골짜기를 연상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귀곡의 입구에 선 자는 으레 혼란스러워했다.
 불귀곡의 입구 자체는 넓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높이가 무려 사 장에 달했다. 문의 양옆에 조각된 아수라상은 낡고 부식됐지만 보는 사람이 꺼림칙함을 느끼게 했다.
 입구를 통과하면 불귀곡이 나온다.
 그 길은 무척 좁았다. 험한 산길을 거쳐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무공의 고수인 천년신교도들에게 그 정도 난이도는 별거 아니었다.
 “여기 온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저 장막은 볼 때마다 섬뜩하군요.”
 사대마군 중 한 명인 혈해마군 서문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동감했다. 그것은 교주인 천세기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불귀곡의 입구는 불귀문이라고 불렸다. 불귀문도 원래는 불귀곡의 다른 이름인 마신곡처럼 마신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불귀문이라는 명칭도 어느 순간부터 불린 것이다.
 불귀문에는 여닫는 문이 따로 없었다. 문이라고 하는 것에 문을 막는 뭔가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불귀문에는 실제로 여닫이문이나 미닫이문이 없었다. 오직 존재하는 건 장막뿐이었다.
 검은색의 장막은 안에 있는 풍경을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마기는 아니었지만 자연 상에 존재하는 어둠도 아니었다. 저렇게 실체를 가지고 있으니 마기와는 전혀 다른 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불귀곡의 하늘을 덮은 반구형의 검은 공과 비슷한 성질이라오.”
 장로인 위운이 그렇게 말하자 서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귀곡의 하늘을 검은 반구가 덮고 있었다. 어찌나 촘촘한지 지상과 연결된 부분에서도 틈새라곤 없었다. 땅을 파도 파도 여전히 검은 장막만이 가로막을 뿐이었다. 문 말고는 불귀곡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검은 구야말로 불귀곡이 천년신교의 신비로 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가도록 하지.”
 천세기의 주위를 백리현과 위운, 서문비, 고천무가 호위하듯이 섰다. 그리고 그 주위를 마영단이 지켰다. 누구든 간에 천세기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절정의 마인으로 구성된 마영단과 세 명의 절대고수를 지나야 했다. 또한 천리안주인 백리현도 강한 무인이었다.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장막을 지나 불귀곡 안에 들어선 그들은 경악했다.
 “맙소사! 이건 대체······?”
 그곳의 하늘은 어두웠다. 이건 들어오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데 안에서 바깥세상이 보일 리는 없겠지.
 지형도 그렇게 특이하진 않았다. 불귀곡이라 해서 눈이 쌓여있거나 열대우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친 암석으로 구성된 삭막한 곳이었다.
 그들을 경악시킨 것은 수십 명에 이르는 마인이었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잘 알았다. 사람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마인과는 또 달랐다. 그들의 몸은 모두 어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불귀곡을 감싼 어둠과 같은 어둠이라는 걸 천세기는 보자마자 깨달았다.
 붉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보는 마인들을 보자 싸늘함이 느껴졌다.
 ‘만만치 않아.’
 절대고수 중에서도 절대고수인 자신이 그런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압박은 더할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힘이 절대고수에 육박했다. 그런 자가 수십 명이었다. 천년신교가 보유한 절대고수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문제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마인들도 문제였지만 저 멀리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감출 생각도 없는 듯 노골적으로 이쪽을 봤다.
 은연중에 흘리는 기세가 하나하나가 교주인 천세기에 육박한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문이 없습니다.”
 백리현의 말에 천년신교도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탄식했다.
 과연 문이 없었다. 들어올 때는 멀쩡하던 문이 지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불귀곡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주변의 마인들이었다. 어느새 마인들은 천년신교도들을 원형으로 포위했다. 그들의 살기와 투기가 몸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마영단 중에서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는 무인들도 생겼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직접적인 위해는 없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절대고수가 일제히 살기와 투기를 집중한다면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정신력의 소모가 심하다.
 “힘으로 안 된다면 대화를 할 수밖에.”
 천세기는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그 행동에 그를 지키던 자들은 깜짝 놀랐다. 절대고수 수십 명이 포위했는데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다니!
 백리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교주님!”
 “모두 무기를 버려라. 암기까지 모조리. 우리가 이들과 싸우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교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모두가 망설였다. 무기를 버리면 여차할 때 대응하는 게 늦어진다. 하지만 무기가 있다고 해도 명백하게 열세였다.
 백리현을 시작으로 모두가 무기를 버렸다.
 천세기가 앞으로 나섰다. 지키고 있던 마영단이 움찔했지만 단주인 단사위가 고개를 젓자 모두 교주가 움직이기 쉽도록 비켰다.
 마인들의 시선이 천세기에게 집중됐다. 그 눈에는 흥미와 기대, 경계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본인은 천년신교의 주인인 천세기라고 한다. 당신들의 지도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마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들 중 천세광과 천세기의 집권 때 이곳으로 보내진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죽고 남은 이는 얼마 없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천세기의 얼굴을 몰랐다.
 천년신교의 사람이라는 것은 마기로 알았지만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일단 기세를 꺾기 위해서 포위한 후 살기를 내뱉은 것인데 이 정도의 거물일 줄이야.
 마인들이 시끄러워졌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천세기는 그걸로 이들 위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았다.
 ‘가령 지켜보는 놈들 중 한 명이라던가.’
 하지만 그들도 조용히 있었다. 천세기가 정체를 밝힐 때 포위한 마인들은 동요했지만 저들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천세기의 정체를 알고 있던가, 아니면 정체 따윈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를 주시하는 자들이 이 자리에 있는 마인들보다 상급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힘의 격차도 그렇지만 마인들이 힐끔힐끔 뒤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대들을 이끄는 자가 누군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나와서 본인과 대화하자.”
 “감히 그분을 부르는가?”
 멀리 있던 자 중에 한 명이 경공으로 날아왔다. 멀리서 육합전성으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달했다. 천세기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수준만 봐도 그와 견줄 만한 무인이었다.
 “귀하는 누군가?”
 천세기로선 눈앞의 이자가 궁금했다. 지난 세월 불귀곡에 보내진 자는 많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얼추 그와 비슷한 세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세기나 천세광, 혹은 그 이전 교주에 의해 이곳에 들어온 자일 게다.
 외모가 멀쩡하다면 알아볼 수도 있으련만, 그 역시 이곳에 있는 여타의 마인들과 다를 바 없이 어둠이 뭉쳐진 몸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이름은 버렸다. 다만 이곳에서는 솔귀(率鬼)라고 불린다.”
 “귀신을 이끄는 자라······.”
 천세기가 솔귀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그 이름대로라면 저자는 이곳의 마인들을 거느리는 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라면 천세광의 아들에 대해 알지도 몰랐다.
 “혹시 천세광, 나의 형님이셨던 전대 교주가 남긴 아들이 이곳에 들어왔음을 기억하나?”
 솔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에 그를 모르는 자는 없지.”
 “그를 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를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
 솔귀는 물론이고 다른 마인들까지 어이없어했다. 헛웃음을 짓는 자도 있었고 혀를 차는 자도 있었다.
 “물론 이곳이 불귀곡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린 절실하다.”
 “미안하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당신이 궁금해 하는 걸 알려줄 수는 없어. 알고는 있지만 사전에 명령을 받았거든.”
 그때 백리현이 나섰다.
 “명령? 귀하 위에 있는 자가 말이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협상으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쪽 분야라면 백리현이 자신보다 나음을 알고 있어서 천세기는 뒤로 빠졌다. 이제 상황은 백리현과 솔귀가 주도했다.
 “전대 교주의 아들에 대해 발설할 수 없다면 다른 걸 물어보겠소. 당신들이 이곳을 못 나가는 이유가 문이 없기 때문이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전혀 대답이 되지 않았단 소리다. 하지만 백리현은 그 말에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문은 없지만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마인들이 불귀곡을 못 나가는 것은 문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불귀곡의 역사만 천년 가까이 된다. 그 오랜 세월 탈출을 꿈꾸지 않은 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언어도단이다.
 분명 불귀곡의 마인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문은 없지만 이곳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듯이 들리는구려.”
 솔귀는 대답이 없었다. 백리현은 단순히 그가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귀신에 홀린 듯 시선이 하늘에 가있던 것이다.
 뭔가 있나 싶어서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눈의 초점도 풀린 듯하다. 이들의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느껴져.’
 “왜 그러시오?”
 솔귀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한참의 침묵이 대체된 상황 속에 맴돌았다.
 “······알겠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이라면.”
 중얼거리는 소리에 천세기를 비롯한 천년신교의 고수들이 표정을 굳혔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들은 중얼거림을 들었다.
 솔귀는 이곳의 주인과 모종의 수단으로 교신한 게 틀림없었다.
 백리현도 긴장한 채 솔귀를 직시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 이들을 주인께 안내하겠다.”
 
 불귀곡의 어두운 천장을 한 청년이 보고 있었다.
 불귀곡의 천장은 밤하늘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별이나 달이 보이지 않아서 불귀곡 곳곳에 설치한 야명주 외에는 빛을 밝힐 수단이 없었다. 따로 시간을 재는 도구를 만들어서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귀곡은 열두 시진 내내 밤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때문에 별다른 소란이 없으면 낮도 새벽같이 느껴졌다.
 “한 번 굴러간 수레바퀴는 때가 되기 전까지 멈추지 않지.”
 청년의 뒤에서 부복하던 불귀곡의 마인 한 명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실 생각이시군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일이니까.”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안다. 하지만 할 거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면 내가 해야겠지.”
 “주인님께서 역사에 길이 남을 마신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받아들일 것이다.”
 불귀곡의 마인, 암령(暗令)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제 그들의 주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길을 갈 것이다. 한 걸음만 잘못되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해 불귀곡의 그 누구도, 천하의 그 어떤 자라도 주인에게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때 또다른 불귀곡의 마인이 청년과 암령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청년을 보자마자 부복한 그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보고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그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되는군.”
 청년이 덧붙였다.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말이지.”
 청년의 이름은 천화운(千火運).
 그는 전대 교주 천세광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불귀곡의 주인이었다.
 
 ***
 
 무림맹은 천산산맥 바로 근처까지 들어와 있었다.
 신강 땅은 천년신교의 영역이라 현지인들은 모두 천년신교에 우호적이었고, 그런 만큼 천년신교의 적인 무림맹에게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니, 그걸 떠나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규모로 쳐들어온 병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림맹이 내건 기치는 마교를 멸하고 그 아래에서 고통을 받는 민초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이 평소 천년신교에게 박해받았다면 모를까, 그들의 삶은 정치적인 이유로나 경제적인 이유로나 천년신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장 천년신교가 없어지면 그로 인해 현지인들이 생계를 위협받을 것이다.
 무림맹 상층부도 이걸 모르지는 않았다. 악하고 말고를 떠나서 천년신교는 천산과 신강의 패자였다. 그런 세력이 갑자기 망한다면 이 지역에 미치는 여파는 상상을 초월하겠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이곳 사람들이 받는 피해는 그다지 관심 없었고, 오로지 마교를 멸망시키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민생 구제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무림맹 인원 중에서 마교가 사람들을 착취한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자들조차 민초를 구원하는 것보다는 마교 멸망에 더 열을 쏟고 있었다.
 무림맹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교 멸망을 염원했다.
 이제 무림맹이 마교를 토벌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부분의 무림맹 무인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그렇게 말한 자는 육 척이 훨씬 넘는 장신의 사내였다. 덥수룩한 머리에 뭐 하나 정리된 구석이 없었지만 인상이 사납고 몸에 크고 작은 흉터가 많아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했다. 사내가 등 뒤에 멘 도와 기도가 더 그렇게 만들었다.
 도패(刀覇) 야천람(野賤襤).
 호정오협 중 한 명인 그는 무림맹 무인들이 마교 토벌을 당연시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에게 학살당하던 자들이 승리를 확신하다니.”
 호정오협이 아니었다면 벌써 마인들에 의해 죽거나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살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하지 못했을 것들이 벌써부터 다 이긴 것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게 꼴불견이었다.
 “원한을 갚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다들 사기가 올랐다고 생각합시다. 야 형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침체된 것보다는 낫지 않소?”
 그렇게 말한 이는 전형적인 문사 차림을 한 청년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섭선이 그런 인상을 강화했다. 영락없이 백면서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단단히 균형 잡힌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약해 보이지만 실은 단단했다. 무엇보다 도패 야천람이 아무렇게나 흘리는 존재감을 쉽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는 야천람과 마찬가지로 호정오협 중 한 명인 와룡(臥龍) 제갈택(諸葛擇)이었다.
 그는 무림에서 지자의 가문으로 통하는 제갈세가에서도 천재 중 천재라 칭송받는 인재였다. 무공을 이해하는 두뇌도 뛰어났지만 뇌공주 사마학에 이은 전술전략의 천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제갈공명의 현신이라 부르길 주저치 않았고, 제갈공명의 젊은 시절 별명이 그의 별호가 되었다.
 야천람이 코웃음 쳤다.
 “저들은 안이하다. 호정오협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정파 무림은 진즉에 박살났을 거다. 타인의 힘에 의존하면서 본인들이 잘났다 착각하는 꼴이라니.”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이 힘은 우리가 쌓아올린 힘이 아니오. 아, 물론 우리도 나름 노력했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받은 힘이지. 본질적으로 우리나 저들이나 다름없다오.”
 그들은 타인의 선의에 기대 힘을 얻은 자들이었다. 선문이 원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지난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공이 아니라도 그들이 나름대로 터득한 무리(武理)가 있어 절대고수로 남겠지만, 그뿐이었다. 현재 그들과 일반적인 절대고수의 격차는 내공의 압도적인 차이에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 지금의 우리는 거지나 다름없어. 타인의 선의를 구걸하고 그렇게 힘을 얻었지만 그 선의가 끝나면 모든 게 끝나지.”
 그렇기에 야천람은 일찌감치 선공에 의지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천년신교의 주력고수들과 싸울 때에도 선공을 쓰지 않았다. 선공을 쓰지 않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는 선공이 주는 중독에서 벗어났다. 목숨이 위급할 때도 그는 오롯이 자기가 쌓은 힘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검후 그 계집은 선문을 철석같이 믿지. 하지만 난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우리가 선문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 선계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들은 답해주지 않았어. 우리가 가진 힘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도 말이야.”
 선문은 힘은 줬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준다 해도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함구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선공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적의 작전이나 인원, 보급물자의 수송 경로 같은 그냥 넘어가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호정오협 입장에서는 답답했지만 억지로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첩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첩자 몇 명이 있다고 해서 쉽게 빼내올 수 없는 정보조차 선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말 첩자가 있다면 선문의 제일 협력자인 그들에게는 말해줘야 했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무림에 진출할 생각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호정오협에게 힘과 약간의 정보만을 쥐어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무림의 평화를 수호하는 비밀세력? 그건 무슨 웃기는 자선단체냐?”
 그들이 진정으로 천하의 안녕을 걱정했다면 마교가 발호한 순간부터 직접 움직여야 했다. 호사가들은 선문에 제약이 걸려 있어서 직접 움직이지 못한다고 짐작했지만 야천람은 제약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의지였다.
 가진 힘은 미지수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목적도 불분명한 세력이 바로 선문이었다. 자신도 선문의 문도라면 문도겠지만 야천람은 비밀이 많은 세력을 신뢰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설혹 그들의 목적이 선량하다 하더라도 비밀이 많다면 신용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상대와 어떻게 함께 가겠나? 잠시라면 모를까 평생 그러고 살라면 못 살지.”
 만약 천하대란이라는 비상시만 아니었다면 야천람은 끝끝내 선문의 호의를 거절했을 것이다. 본래 명문정파 출신이 아닌 그는 전쟁을 통해 무림에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어서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사상누각 위에 있다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제갈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 형의 말이 맞소. 하다못해 사업상의 거래를 해도 거래대상이 믿을 수 있는지 조사하는 판국에 일방적으로 선의를 베풀기만 하는 비밀세력을 믿지는 못하지.”
 제갈택은 제갈세가의 가주는 아니었지만 이미 가주인 부친보다 가문 내에서 권력이 강했다. 그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세운 전공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느 정도 가문의 전력, 그중 정보조직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어느 문파나 일정 규모 이상이라면 나름대로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은 있지만 제갈세가는 전략전술을 중시하는 만큼 천하 이면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 만큼 정보조직에 투자하는 비용은 여타의 문파들보다 많았고 제갈세가의 정보조직은 투자한 비용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제갈택은 비밀리에 가문의 정보조직에게 선문의 뒷조사를 지시했다.
 생각 같아서는 무림맹의 정보기관이나 정보에 능통한 개방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무림맹의 정보기관인 영림원(影林院)은 뇌공주 사마학이 장악하고 있었고 개방은 정보로 먹고사는 단체라 자칫하면 제갈택이 선문을 조사한다는 정보를 선문 측에 팔 수도 있어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갈택의 이야기를 듣는 야천람의 표정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의 그것처럼 변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였소. 나는 평소 본가의 정보조직의 능력이라면 세상 어떤 곳의 비밀도 캐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번 건으로 본가에서도 손댈 수 없는 곳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소.”
 제갈택은 정보조직이 그가 원하는 그 어떤 정보도 건지지 못했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아무리 선문의 보안이 철저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가 있나 싶었다.
 혹시 정보조직 내에 선문의 끄나풀이 있어 이쪽의 시도가 누설되었을 가능성도 의심했지만 여러모로 확인한 결과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좀 황당무계한 추론 같이 들리지도 모르겠는데,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소.”
 “음, 어떤 거지?”
 “일단 선계에서 힘을 공급받는 것 자체부터가 옛날에는 전혀 상상도 못해봤던 현상이오. 우리 자신이 수혜자니까 의심의 여지도 없소. 즉,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미 예전에 깨진 거요. 그런 상황에서 상식이 한 번 더 깨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제갈택은 그렇게 말하곤 잠시 뜸을 들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긴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리안.”
 “뭐?”
 “마교, 그러니까 천년신교의 참모기관인 천리안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들이 천리안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앉아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본다고 하기 때문이라지.”
 “요점을 말해라.”
 “천년신교의 천리안이 비유의 의미로 그 이름을 쓰는 거라면, 선문의 천리안은 말 그대로 천리를 내다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소.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거지.”
 제갈택은 그렇게 말하곤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옆에 있던 나무를 발로 거칠게 찼다. 나뭇잎이 그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제갈택이라 야천람에게는 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기랄, 말하고 보니 다시 화가 나는군. 난 제발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소. 만약 정말이라면, 우린 감시당하고 있다는 말과 똑같소. 지금 우리의 대화까지 모조리!”
 이 추측에 도달했을 때 제갈택은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선문이 작정한다면 얼마든지 자신과 가문을 옥죌 수 있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알몸이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선문이 어떻게 마교의 정보를 꿰고 있었는지 설명되오. 가문의 정보조직이 실패한 것도 이해가 가지.”
 “하지만 근거가 부족해. 선문에 미지가 많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힘을 공급받는 것만 보고 선문이 세상 모든 걸 볼 수 있다고 하는 건 너무 앞서 나간 추측이 아닌가?”
 제갈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기에 내가 추측이라 한 거요.”
 확실한 근거 위에 추론한 것이라면 제갈택은 추측이란 표현 대신 확신이란 표현을 썼을 것이다.
 “천라지망이라는 말이 있지. 이게 무림에서는 적이 빠져나갈 수 없게 촘촘하게 짠 포위망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제아무리 인간이 용을 써도 하늘의 그물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인가? 답답하군.”
 야천람과 제갈택은 답답했다.
 필요에 의해서 선문과 손을 잡았지만 그들은 선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걱정하는 것들이 그저 기우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조차 선문과 선계의 힘에 비하면 개미나 마찬가지였다.
 
 
 제4장. 천화운
 
 
 천세기는 눈앞의 상황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현실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믿기 힘들었다.
 그와 수하들 앞에 있는 자는 그의 조카였다.
 천화운.
 그는 이곳에 있는 마인들과는 달랐다. 일단 몸이 어둠으로 되어 있지도 않았고 마기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정파나 사파의 무공을 익힌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천세기는 그게 아님을 바로 알아보았다. 설령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익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보여야 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반박귀진은 무공을 익혀도 익히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경지다. 그리고 이 경지는 세간에서 말해지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무공을 극한까지 익힌 절대고수가 범인처럼 보인다는 것은 안색이나 몸짓, 걸음걸이는 물론 호흡까지 완벽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인임을 입증하는 어떤 것도 타인이 알아보지 못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완성된 반박귀진이 아니었다.
 천세기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반박귀진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평소 때야 수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일정 이상의 존재감을 보일 필요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얼마든지 육체를 반박귀진에 들어갔다가 풀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천화운은 달랐다.
 반박귀진인가? 천세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모습은 반박귀진하고는 다른 무언가였다. 시험 삼아서 천년신교 교주로서의, 천하제일을 바라보는 무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천화운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천세기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그것만 봐도 천화운이 천세기 이상의 경지에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천화운이 천세기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예상했다. 그런 기대조차 없으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강하지 않다면 호정오협에게 대항은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다.’
 일단 새어나오는 진기도 없었다. 천세기는 무인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마인인지, 정파인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천년신교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경험을 쌓아온 그의 안목이었다.
 천화운의 눈은 그조차 읽을 수 없었다.
 은밀히 눈을 통해 상대의 근원을 꿰뚫어본다는 침투안(浸透眼)까지 시도했지만 단단한 방벽 같은 게 가로막고 있었다.
 표정부터 자세까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만약 출수한다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병장기가 없는 걸로 봐선 권법을 쓰는 게 아닐까 예상해보지만 뒷짐을 지고 있어 검을 익힌 손인지, 권을 수련한 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천화운이 말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천년신교 교주 천세기. 그리고 천리안주 백리현, 사대마군 중 한 명인 서문비, 대호법 고천무, 장로 위운. 나머지는 이번 대의 마영단이군.”
 “······!”
 천세기도, 백리현도,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놀랐다.
 어떻게 천년신교도들의 신상명세를 꿰뚫고 있는가?
 “이능인가?”
 세상에는 무인이나 술사들 말고도 인간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다루는 자들이 있었다. 선천적, 후천적으로 이능을 얻은 자들로 무인이나 술사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이능만을 갈고 닦은 자도 있었다. 천세기가 쓴 침투안도 그런 이능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근원을 볼 수 있다는 침투안도 상대방의 신상명세를 맞추는 능력은 없었다. 침투안과는 다른 이능인가? 천화운이 특이한 이능을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천화운은 부정했다.
 “그런 저급한 능력은 아니지.”
 소수의 특별한 자들만이 타고난 힘을 깎아내린다. 무슨 의도가 있어 그렇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천세기는 자신의 침투안이 저급한 능력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천화운의 말에 반박하는 것도 괜한 시간 낭비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상대방을 파악하는 게 보다 중요했다.
 “그럼 뭔가? 나야 그렇다 쳐도 여기 있는 이들은 정체를 밝히지 않았거늘, 어떻게 알았는가?”
 천세기가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그와 천화운은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지만 그것을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천년신교 교주와 불귀곡 주인 간의 대화였다.
 “글쎄?”
 천화운은 대답을 회피했다. 조소까지 내비치며 맞춰보라는 듯 조롱했다.
 그 모습에 천세기를 제외한 천년신교 무인들이 발끈했다. 그들에게 천세기란 존재는 절대의 존재였다. 마땅히 그 신분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했다.
 백리현이 나서서 말했다.
 “이분은 그대의 숙부님이시기도 하지만 천년신교의 유일한 주인이시오. 제아무리 불귀곡의 주인이라 해도 함부로 할 분이 아니시오.”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곳 마인들이 교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거슬리더구려.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천년신교를 원망하더라도 그들이 충성을 바친 곳의 주인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지. 비록 대화를 나누고 그대를 이곳에 내보내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특히 교주님께서 조롱당하실 이유가 없소.”
 백리현은 끝까지 할 말을 다했다. 천세기가 옆에서 눈치를 주었지만 백리현은 자신이 할 일을 했다. 이것은 주군의 명이라도 지킬 수 없었다.
 천년신교의 교주는 어떤 상대에게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천화운은 흥미로워졌다.
 “호오, 진심으로 주인에게 충성하는군. 하지만 모든 이가 천년신교 교주라는 자리에 똑같은 값을 매기는 건 아니지.”
 “그렇겠지. 하지만 이곳은 불귀곡이고 사연이야 어쨌든 그대들의 근원은 바로 천년신교요.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출신은 천년신교요. 그것은 불귀곡주도 예외는 아니지 않소?”
 따지고 보면 천년신교가 불귀곡의 마인들을 죄수로 만들어버린 시점에서 그들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 원인이 어찌됐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그러나 천화운도 백리현도 그런 것은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교주보다 강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내 노예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절대지경에 올랐고. 어떻게 봐도 너희가 열세인데 목숨을 걱정하지는 않나? 혹시 나와 교주 간의 혈연을 생각해서 한 말이라면 그 혈연이 가진 값어치도 참 싸구려군.”
 이곳의 마인들은 모두 절대고수였다. 천하에 나가면 한 지역을 호령할 만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천화운은 그들을 노예라 불렀고, 천화운의 뒤에 있던 마인들은 그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천세기는 노예라는 말이 신경 쓰였으나 그 문제는 잠시 접어두었다.
 “자네와 내가 혈연이긴 하나 그 연은 오래전에 내 손으로 끊었지. 이제 와서 친족 간 정에 매달릴 생각은 없네. 사실 정이랄 것도 없고.”
 “알긴 아는군. 그렇다면 무엇으로 나를 설득할 것인가? 나를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했나? 나가는 방법이야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이 나가자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하고 나갈 줄 알았나?”
 그렇다면 너무도 순진하다. 물론 천세기는 순진하지도 않았고, 그가 나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 했다.
 “본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참모인 천리안주의 특기분야이지. 난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자신은 없네. 최소한 그걸 업으로 삼는 사람 앞에서 하고 싶지도 않고. 다만 진심을 다할 뿐일세.”
 “진심?”
 천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달리 절실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 신교에게는 자네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네. 이곳 안에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천년신교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네.”
 “선계 때문에 박살이 났겠지.”
 “그렇······ 뭐라고?”
 천세기도 놀랐고, 백리현도 놀랐다.
 천년신교도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천세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만 들은 게 아님은 확실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 번만 알려주겠나?”
 “선계 때문에 박살이 났을 거라고 말해줬다.”
 “어떻게 알았나? 이곳은 세상과 단절됐을 텐데? 아까 우리의 정체를 파악한 것과 관련이 있나?”
 설마 미래나 과거를 엿보는 이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이능을 타고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본다 하더라도 일부분만 보거나 모호할 뿐이었다.
 게다가 천화운은 이능을 폄하했다. 천세기는 그가 그런 이능은 없을 거라 보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다.
 “이곳과 천하는 단절된 게 아니었나?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나?”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왜 그동안 아무도 탈출하지 못했단 말인가? 최근에 나갈 방법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았다.
 불귀곡은 그 특성상 신교의 감시를 받는다. 도망자가 죽음이 두려워 불귀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혹여 모를 탈출자가 있을지 몰라 항상 불귀문 곳곳에 감시자들이 은신해 있었다. 무슨 변고가 생기면 그들은 최우선적으로 천리안주와 교주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천세기와 백리현 모두 그러한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다. 감시자들이 배신할 이유도 없었다.
 “지난 천 년간 이곳을 나간 사람은 없다. 오고간 사람? 그런 건 없었어. 하지만 당신의 추측은 옳아.”
 그리곤 덧붙였다.
 “이곳은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 최소한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갈 수 있지. 내가 거느린 노예들 전부를 데리고.”
 
 ***
 
 노인은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 명치까지 내려왔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지만 그 나이에는 당연히 있는 검버섯도 없었고 눈이 맑았다. 또한 키가 크고 등조차 굽지 않았다. 어느 누가 봐도 참 곱게 늙었고 정정한 노인이라고 여길 것이다.
 노인은 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신선 같은 노인이 그린 그림이라면 뭔가 대단한 작품일 것 같지만 의외로 평범한 화원의 실력 정도였다. 역사의 거장이 남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장대함이나 화려함 같은 것은 없었다. 노인 자신도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런 노인과 노인이 그리는 그림을 두 사람이 지켜봤다.
 한 명은 중년의 남성으로, 얼굴 가득 정심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장포를 걸쳤지만 탄탄한 몸의 소유자였다.
 다른 한 명은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빼어난 미색의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었다. 백색 궁장의를 입은 여인은 마치 선녀처럼 보였다.
 각기 빼어난 개성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노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드러난 근심 때문에 신경이 쓰일 만도 하건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있던 일을 계속 진행했다.
 이윽고 어느 정도 그림이 만족스럽게 나왔는지, 노인이 붓을 내려놓았다.
 “만류귀종이란 말은 참 오만한 말이지.”
 뜬금없는 말에 미녀가 물었다.
 “무슨 뜻인지요?”
 “내가 오만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네만, 이래봬도 난 무공이란 분야에는 거의 정상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네.”
 그것은 무림인들이 들으면 정녕 오만하다고 생각할 말이었다. 무림인들은 무공에 끝이 없다고 여겼고, 한평생을 무도에 바쳐도 모자라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어떤 절대지경에 오른 자도 자신이 무공의 끝을 봤다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년과 미녀는 노인을 비난하지 못했다. 그들도 무공이라는 수단을 통해 정진하는 구도자였지만 노인의 말을 허황되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노인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보게.”
 노인은 그림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시장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그림이었다.
 “훌륭한 그림입니다.”
 중년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노인의 그림을 높이 샀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문주님께서 그리신 순간부터 그 그림은 어떤 명장의 그림도 따라오지 못할 가치를 지닌 겁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심이라 봐도 좋았다. 중년인에게 노인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노인이 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중년인의 칭찬이 달갑지만은 않은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부하는 겐가? 내 그림이 별로라는 것은 그린 나도 알겠는데?”
 중년인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썩 나쁘지는 않네만, 딱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그림일세. 시대의 명인이 그린 것에 비하면 그냥 낙서한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런데 만류귀종이란 뜻은 모든 만물이 끝에 가서는 통하는 게 있다는 것이니 그 말대로라면 내가 그린 그림도 명인의 그림처럼 뛰어나야 하지 않겠나?”
 노인은 이어 말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 내가 아무리 무공에 능해도 다른 분야에 있어서는 그 분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을 따라갈 수 없네. 하지만 만류귀종이란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지. 이 말을 현실에 반영한다면 어떤 분야라도 그 일에 인생을 바친 자들에게선 공통점이 보인다는 것일세.”
 “그게 무엇입니까?”
 “가히 광기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그 분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는 게지. 자신의 소중한 것들, 가족이나 목숨, 혹은 영혼을 말이야.”
 중년인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영혼··· 말씀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혼. 그들에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곧 일생을 바쳐 풀어가야 할 숙제인 게야.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그 숙제를 푸는 데 불필요하다면 가차 없이 버릴 자들이지.”
 중년인과 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봐도 그렇게 살아서 후대에까지 길이 남을 뭔가를 이룩한 사람은 많았다.
 “나는 강한 발톱과 이빨이 있는 맹수보다, 그 어떤 몸집이 큰 동물보다 약한 인간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은 그런 것에 있다고 본다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야말로 지성의 유무를 떠나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아니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중년인은 깊게 감화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백의미녀는 그런 중년인을 흘겨보고 노인에게 말했다.
 “매우 유익한 말씀이었지만 지금은 그림이나 그리실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계획한 것들이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뚜껑도 열지 않고 끓는 물에 있는 면이 불었나 괜찮나 확신하지는 못하네만 불었을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 힘으로 뚜껑을 열 수 없다면 언젠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 말씀은 그저 방관하시겠다는 뜻인지요?”
 중년인과 미녀는 답답해졌다.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그들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일어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중대한 사태였다.
 노인은 두 사람의 기색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관이 아니라 인내일세.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는 해두었네. 별거 아니라면 그 아이들이 실패하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그렇다면 자네들은 병력을 보내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그 말에 중년인과 미녀 모두 합죽이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노인 앞에서 속마음을 토로하는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 속이야 시원해질지 몰라도 노인의 질책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들은 노인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네. 자네들 말처럼 사소한 일로 치부해선 안 될 것이지. 오히려 그렇기에 성급하게 행동하면 안 되네.”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야 합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최악이 뭔가?”
 노인의 물음에 중년인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마도의 족속들이 불러서는 안 될 자들을 부르는 경우입니다.”
 노인이 미녀에게도 물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망이군. 본문의 우사와 좌사의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중년인인 우사와 백의미녀 좌사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노인의 질책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사람에 대한 노인의 평가가 하향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병력을 보내고 싶어 하는지 알겠군. 고작 그런 것을 최악이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
 두 사람이, 아니 문의 대부분이 가정한 최악을 노인은 고작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것은 노인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부정한 것들보다 더한 악몽도 있지 않은가? 백 년 전 일을 잊은 건가?”
 우사와 좌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그들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그걸 넘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경우였다.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공포였다. 만약 노인이 말한 대로 된다면 그들은 사상 최악의 실패를 맛볼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좌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세를 초월한 괴물······.”
 “만약 그런 괴물이 다시 나타난다면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런 말까지 나올 뻔했지만 우사는 노인 앞에서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다면 아이들은 포기해야 하네. 역추적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 말씀은······?”
 “통로를 닫는 것으로는 안 돼. 문까지 부수어야겠지.”
 좌사와 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왜 이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가?”
 천세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이곳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천년신교가 두려워 계속 이곳에 있는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이들은 천년신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천화운이 말했다.
 “당신이 교주에 오른 이유 중 하나가 정파와의 전쟁 때문이지. 당신과 저 천리안주의 전략은 괜찮았어. 새외, 중원 내 사파와 마도세력과 손을 잡고 정파를 고립시키는 작전은 훌륭해. 하지만 선계와 선문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자네는 선계와 선문에 대해 알고 있었군. 누가 자네에게 그걸 가르쳐 준 거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가르쳐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던 얘기를 계속 하지. 선계가 인정하지 않은 세력은 결코 천하를 제패할 수 없다.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해. 그 이유는 이제 당신도 알겠지.”
 천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문이 나선다 이 말이군.”
 “그래. 선문은 선계의 하위 세력이고, 말하자면 선계가 세상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선계가 이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그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편리한 수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
 “어째서 선계가 세속의 일에 관여하는 거지? 나는 최근에야 선계가 정말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곳이 흔히들 말하는 우화등선한 신선이 가는 곳이라면 세상일에 욕심이 없어야 하지 않나?”
 단순히 천년신교가 마교라 불리는 집단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상 정파를 제외한 어떤 세력도 중원을 온전하게, 오랫동안 차지한 적이 없었다. 한때나마 사파나 새외 무림이 중원을 거의 제압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선계(仙界)가 선(善)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우화등선, 다른 말로 해탈한 자들 개개인은 무욕(無慾)하더라도 선계의 의지가 무욕을 용납하지 않지.”
 “선계의 의지?”
 “당신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영역이다. 이해시킬 생각도 내겐 없고. 좀 일탈하긴 했는데, 좀 전의 당신 질문, 왜 나가지 않았느냐에 대해 답하겠다.”
 천세기도, 다른 신교도들도 긴장했다.
 “나는 천년신교가 패할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마냥 멸망을 기다리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끝내 해결책을 찾으려 할 것이고 결국에 천화운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다면 혀를 내두를 만한 통찰력이었다. 천세광이 축출된 이유, 자신의 출생, 선계와 선문의 존재 사실, 천세기의 그릇까지 모두 고려한 결과를 필연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천화운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끝내 생각지 못했다면?”
 “조금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계를 해제하고 밖으로 나갔겠지.”
 천화운 입장에서 천세기가 반드시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찾아오면 좋은 거고 안 와도 그만인 그런 정도였다.
 “그렇군. 그럼 나를 기다린 이유는?”
 천화운이 대답했다. 천세기뿐 아니라 천년신교도를 경악시킬 만한 대답이었다.
 “그래야 당신이 내게 교주 자리를 넘길 수 있으니까.”
 ***
 도사 한 명이 산 높은 곳에서 무림맹의 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반 범인의 눈이라면 무림맹의 깃발에 있는 글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있었지만 도사의 눈에는 무림맹 무인들의 얼굴 표정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무림맹을 보는 도사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손에는 구겨진 부적이 들려 있었는데, 부적에 푸른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서너 번 빛이 깜박이고 나서 부적은 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수습 불가 상황이 되면 꼬리를 자르고 철수하라?”
 그는 선문에서 파견된 관찰자였다. 호정오협과 무림맹을 밀착 감시하는 동시에 선문과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선문의 전언을 호정오협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반대로 호정오협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때에 따라 선문에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선문의 주술사였지만 호정오협과 그는 단순히 공적인 관계만 있지는 않았다.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었고, 호정오협 중 한 명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문의 지시사항이 거슬렸다. 그렇지만 상부의 지시사항을 어길 수는 없었다. 선문 내 그의 지위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직속상관인 좌사였다. 좌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문주의 허락도 없이 그런 명령이 내려졌을 리가 없었다.
 ‘결국 문주의 뜻이라는 거군.’
 그에겐 문주의 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거부한다고 해도 그렇게 크게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한다고 해도 결국은 문주의 뜻대로 될 테니까.
 도사는 그저 문주의 명령을 이행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
 
 이제까지 대호법 고천무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상황 판단은 천리안주인 백리현이 그보다 훨씬 나았고, 교주와 불귀곡의 주인 간 대화에 참견하는 것은 아랫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전 천화운의 말은 그로서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천년신교의 주인 자리가 그렇게 가볍게 보였는가!”
 그의 목소리에는 걷잡을 수 없는 노여움이 배어 있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위운도, 서문비도, 그리고 마영단까지 분노했다. 천년신교의 교주란 자리는 그렇게 가볍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천년신교의 명예와 신성까지 모독하는 말이었다. 꿈에서라도 저런 말을 해선 안 된다.
 백리현도 기가 막히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는 천리안주였다. 천년신교 제일의 책사인 그가 다른 이들처럼 마냥 분에 사로잡혀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아무리 화가 나고 당혹스럽더라도 침착해야 했다.
 “곡주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소. 아까는 교주의 권좌가 값어치가 없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교주가 되려는 것이오?”
 천화운은 분명히 교주의 자리가 갖는 신성, 명예, 위엄을 부정했다. 값어치가 없다는 말까지 써가며 그 자리를 폄하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교주의 자리를 넘보는가?
 천화운이 말했다.
 “아,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 하지만 필요해서 말이야.”
 “필요?”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려는 수단이라고 봐도 좋겠지.”
 천세기가 물었다.
 “자네가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인가? 마도천하인가?”
 천화운이 고개를 저었다.
 “마도천하는 관심 없다. 내가 이루려는 것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에 있다. 솔직히 나라도 내가 교주의 자리에 있는 동안은 그 결과를 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겠군.”
 “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까.”
 “아까부터 계속 그 말만 하는군. 참 편리한 변명일세. 마치 세 살배기 어린애가 사서삼경을 이해 못하니까 알려주지도 않으려는 것 같은데.”
 “적절한 비유다.”
 천세가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화운의 능력이 자신보다 나음을 알지만 어디까지나 무공에 한정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꼬마 취급이나 당하며 무시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천화운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이런 대우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오만하군. 그리고 자만심에 빠져 있어.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교주라는 막중한 자리에 오르려는 거지? 한 세력의 수장이란 마냥 떠받들려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닐세. 그만큼 구성원에게 보답을 해야 하지. 그리고 그전에 자신의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그들을 이해시켜야만 하네. 불귀곡의 주인 된 사람이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천년신교에도 일반 교도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정보가 있겠지. 당신은 구성원을 이해시킨다면서 그런 것들을 공개하나?”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비밀을 만들어서 소수의 사람들만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란 게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교도들이 알게 되면 위험해지는 정보는 당연히 공개조차 할 수 없다.
 “자네는 내가 그 정보를 알게 된다면 뒷감당을 할 수 없다 보는 거군.”
 “그렇다.”
 “나는 천년신교의 지존이다.”
 그렇게 말하는 천세기는 당당했다. 무력의 고하를 떠나서 그는 한 세력의 주인이었다. 마냥 굽히는 것은 수장 된 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말했을 터이다. 천년신교의 교주는 나한테 별거 아닌 자리라고.”
 “그 자리를 탐내는 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과 수하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다.”
 “내가 그런 것도 각오하지 않고 들어올 줄 알았나? 나는 자네에게 있어서 원수일 텐데 당연히 그 정도야 생각했지.”
 상황은 일촉즉발로 흘렀다. 천년신교도들은 무기가 없었지만 그들은 무공을 절정 이상으로 익힌 무인들이었다. 병장기가 없다고 해서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천세기는 천화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느새 불귀곡의 마인들이 나타나서 그들 주위를 에워쌌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호오, 명백하게 열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항하는가?”
 천화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무리 일신상의 무위가 자신이 있어도 이 정도로 열세라면 한 발 물러서는 게 당연했다. 교주쯤 되는 자가 시류를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도 이 정도 기개를 보인다는 것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허세를 부린다는 거였다. 어느 쪽이라도 인정해줄 만했다.
 “다들 물러나도록.”
 천화운의 말에 마인들이 모두 모습을 감췄다. 수준 이상의 은신술에 천세기는 감탄이 나왔다. 자신조차 기척을 찾는 데 애를 먹게 된다. 절대고수이면서도 특급의 살수나 마찬가지인 자들이었다.
 “죽음의 위협조차 이겨냈으니 나에 대해서 약간은 알려 주지.”
 천세기는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발밑의 감각이 사라지고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에 혼란스러워졌다.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이 불귀곡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불귀곡에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천하 어느 곳에도 이런 장소는 없었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가?”
 “당신은 처음 보겠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한 천세기가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천화운이 느긋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내 뒤로 돌아갔지?’
 아무리 힘의 격차가 있다고 해도 자신이 상대에게 뒤를 내줬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상대가 원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주위를 잘 봐라. 당신도 이것과 비슷한 것들을 본 적이 있을 테니까.”
 “뭐?”
 천세기는 자신이 있는 장소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는 이 장소, 정확히 말하면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침음이 절로 나왔다. 상상도 못 한 장관이 그의 앞에 있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압도되지. 나야 익숙해졌으니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별들의 바다였다. 지상의 인간이 밤하늘에 걸린 달과 별을 보면서 상상하기만 했던 장소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천세기는 경악했다.
 절대지경? 천년신교의 교주?
 그런 것들은 이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새삼 천화운이 왜 교주의 자리를 가치가 없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덧없는 존재란 말인가?
 “놀랍군.”
 순수하게 감탄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천화운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아무리 세상에 기인이사가 많다고 하지만 천하를 벗어나 이런 곳을 보여줄 수 있다니?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실존하는 우주는 아니다. 내 기억을 재생한 것에 불과하지. 만약 실제 우주로 왔다면 당신은 바로 죽었을 테지.”
 그렇다면 천화운은 실제의 우주를 봤다는 말이었다. 이곳이 아무리 거짓된 세계라고 해도 천세기는 압도당했다. 나아가 천화운에게 진정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는 조금 전까지 자네가 나보다 그저 강한 무인이라고 생각했네. 그것만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자네는 내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였군.”
 하지만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대단한 존재가 왜 천년신교의 교주라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려 하는가?
 “혹시 자네는 시조께서 보내신 사도인가?”
 천년신교의 시조는 신교 내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다. 그 옛날 해탈한 부처처럼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껍질을 깨고 신으로 거듭났다고 모든 신교도가 믿었다. 천세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단언하지. 한 가지를 더 알려 주지.”
 “경청하겠네.”
 “난 시조보다 강하다.”
 천년신교의 시조는 역대 교주 중 강자로 평가받은 자들도 감히 자신이 시조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시조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천세기는 천화운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그라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곳을 보여준 이유를 알려주지.”
 “······.”
 긴장이 되었다.
 “당신의 눈높이가 천산이라면, 이 별들의 바다야말로 내 눈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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