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두목 1권
프롤로그
“어이! 뭐야, 이 새끼는?”
사내가 죽일 듯이 태혁을 쳐다봤다. 향숙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손님 몇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 구경하고 있었다.
“돈 내고 가시죠.”
태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 씨발놈이 죽을라고. 너 죽어 볼래?”
사내가 태혁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태혁이 손을 확 뿌리치자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이 새끼 봐야!”
전라도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덤비는데 태혁이 순식간에 다리를 뻗어 전라도 남자의 가슴팍을 내리찍었다. 전라도 남자가 덤벼들 새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돈 내고 가시죠.”
태혁이 다시 한 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패거리들이 나가떨어져 가슴팍을 싸쥐고 뒹굴고 있는 동료를 쳐다보더니 태혁에게 몰려들어 에워쌌다.
“이 개새끼!”
눈썹에 흉터가 있는 놈이 태혁의 머리를 잡아채려는 듯 팔을 뻗는데 태혁이 그보다 먼저 팔을 움직여 남자의 팔목을 잡아 꺾었고, 놈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찰나 주먹이 힘껏 면상을 갈겼다. 남자의 코에서 피가 툭 터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태혁은 다리와 팔을 뻗어 나머지 놈들의 급소에 일격을 가했다. 한 놈이 일어나서 발악을 하듯 태혁에게 덤벼들었지만 태혁이 놈의 목을 꺾어 젖히며 무릎으로 옆구리를 찍어 버리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나뒹굴었다.
태혁은 누군가 또 일어나 덤비는 놈이 없는지 재빨리 쓰러진 놈들을 훑어봤다. 한 놈이 비실거리며 일어나서 태혁에게 주춤거리며 다가오는데 태혁이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입술이 쭉 찢어지며 피가 퍼졌다.
그때서야 태혁의 귀에 사람들의 목소리며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에서 다시 원래대로의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1
태혁이 산호다방으로 들어선 시간은 6시가 2분 모자란 시각이었다. 주위에 공장 서너 개와 사무실이 밀집해 있어 다방이 지하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손님은 항상 많은 편이었다. 태혁이 다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마흔 평의 꽤 큰 다방 안에는 손님들이 제법 많아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태혁이 다방 안을 주욱 둘러보고 있는데 손님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던 마담이 얼른 일어나 태혁에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왔어? 오늘은 낮부터 붐비더니 종일 쉬지도 못하게 만드네. 자기, 커피 한 잔 줄까?”
마담이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태혁을 쳐다봤다.
“됐어요. 진수는요?”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오늘 일찍 갔어. 오늘 같은 날 일이 생길 게 뭐야, 손님도 많은데.”
“알았어요.”
태혁이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DJ BOX로 들어가려는데 마담이 재빨리 다가와 태혁의 팔에 팔짱을 끼며 끈적끈적하게 말을 붙였다.
“나중에 일 끝나면 나하고 한잔하구 가. 좋지?”
태혁은 대꾸도 없이 마담의 팔을 가볍게 치우고 BOX로 들어갔다. 점퍼를 벗어 못에 걸고 자리에 앉은 태혁은 진수가 노래를 틀다가 그냥 갔는지 턴테이블에 걸려 있는 판을 빼내 먼지가 묻었나 훑어본 후 재킷에 넣어 제자리에 꽂았다.
앨범을 훑어보던 태혁은 비틀즈를 꺼내 끼우고 바늘을 조심스럽게 줄에 맞춘 다음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고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산호 DJ 최혁 인사드립니다.”
태혁의 은근한 목소리가 다방 안으로 번져 나갔다.
태혁은 다방에서 최혁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마담과 종업원들은 태혁의 이름이 가명이 아니라 정말로 최혁인 줄 알고 있었다. 태혁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산호다방에서 면접을 볼 때 본명을 말하고 싶지가 않아 얼떨결에 최혁이라고 말했던 것인데, 아무도 가명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고 지금껏 주욱 최혁인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태혁도 굳이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라고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태혁이 아니라 최혁으로 불리다 보니 이젠 최혁이란 자신의 가명이 전혀 낯설지 않고 친근했다.
태혁이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멘트를 시작하자 홀에 앉아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태혁에게 쏠렸다. 마담을 흘낏 쳐다보자 마스카라에 뒤덮인 새까만 눈을 깜빡거리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외로움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그분들을 위한 노래가 준비됐습니다. 외로운 밤, 비틀즈와 함께하십시오. HEY JUDE 보내드립니다.”
태혁이 멘트를 끝내는 순간 노래가 시작됐다. 비틀즈의 정제되지 않은 듯 다소 거칠면서도 담백하게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산호 안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다음 곡을 준비하기 위해 판을 뒤적거리던 태혁은 아직 끈적끈적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담의 표정에 입맛이 싹 달아나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친년, 늙은 년이······.”
태혁은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다방에 처음 들어온 그날부터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내던 마담이 요즘은 아예 드러내 놓고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차를 같이 마시자고 우겨서 할 수 없이 마셔 주면 손이 참 우악스럽게 생겼다며 슬쩍 만지기도 했고 커피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에 기대 오기도 했다.
태혁은 마담이 자기라는 호칭을 쓰는 게 역겨웠다. 자기라고 부를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늘상 그렇게 불렀지만 그렇게 다 늙은 여자에게 ‘자기’라고 불려질 때마다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더더욱 재수 없게 느껴지는 건 눈 주위가 시커멓게 보이도록 겹겹이 칠한 마스카라와 쥐라도 잡아먹은 것처럼 새빨갛게 칠해 놓은 입술이었다. 마담은 자신의 망측한 모습이 예쁜 줄 착각하고 있었고 태혁이나 다른 사람이 예쁘게 봐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는데 전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물론 눈가의 주름을 가리고 처지기 시작한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듯이 착시를 일으키도록 딴에는 부단한 노력과 연구로 발견한 방법이겠지만 주름이 가려지지도 처진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듯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천해 보일 뿐이었다.
태혁은 몸서리쳐지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진수를 떠올렸다. 낮 시간에 DJ를 보는 진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노래에 미쳐 떠돌아다니다가 다방에 흘러들어온 녀석이었다. 가수가 되고 싶어서 좀 유명하다는 사람의 뒤꽁무니를 발에 땀이 나도록 따라다녔던 녀석이었는데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박살나기 일보 직전의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이라서 그러나 노래도 썩 잘 불렀다. 집에서는 완전히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도망 나오기를 밥 먹듯이 해 집에는 아예 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수가 하고 다니는 꼴은 마치 갑부집 외아들 같았다. 뒷머리를 길러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몸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아주 값비싸고 세련된 옷을 걸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태혁이 진수를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엄청나게 구두쇠라는 점이었다. 월급은 고스란히 저축을 했고 다방에서 손님들이 가끔씩 건네주는 팁으로 생활을 하는 모양이었다. 팁으로 먹고살다 보니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는 법은 없었는데 진수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버틸 줄 아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저기 뒹굴어 다니고 빌붙어 살다가 습득한 나름대로의 삶의 기술인 듯했다. 그런 이유로 진수는 여자 손님들이 주는 선물보다는 술 먹은 남자 손님들이 술기운에 정신없이 내주는 팁을 더 좋아했다.
한번은 친구의 자취방에 꼽사리끼어 살면서 어지간히 돈을 쓰지 않아 친구놈이 아주 지긋지긋해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친구의 자취방이 꽤 먼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도 항상 걸어다녔고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해도 그냥 앓고 누워 있을망정 약은 절대 사먹지 않았다. 미련퉁이인지 진정한 구두쇠인지는 몰라도 진수는 아끼고 안 쓰는 데는 도가 튼 녀석이었다. 태혁이 언젠가 한번 아파도 약을 안 사먹는다는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왜 그렇게 궁상맞게 구느냐 묻자 빨리 돈을 벌어서 집에서 훔친 돈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갚아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때 태혁은 진수가 좋아졌다.
사실 진수는 태혁보다 두 살이 위였지만 태혁이 나이를 속였기 때문에 동갑인 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교대시간이 돼서 태혁이 BOX 안으로 들어가자 진수가 싱글싱글 웃으며 무작정 태혁을 끌고 화장실로 간 적이 있었다. 진수는 화장실에 가서도 오줌은 눌 생각도 하지 않고 실성한 놈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 태혁이 무슨 일이냐 다그쳐도 진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킬킬거리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진수의 성격이었는데, 진수는 재미있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며 애간장을 태워 감질나게 만드는 놈이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의 애간장이 바짝 타서 무슨 말인지 당장 하지 않으면 죽일 태세로 윽박질렀을 때야 슬슬 풀어 놓는데, 나중에 듣고 보면 궁금해서 애간장을 태운 게 멍청할 만큼 퍽 흥미로울 것도 없는 시시한 잡담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왜 그래? 빨리 말해, 새끼야.”
소변이 별로 마렵지는 않았지만 태혁은 화장실에 그냥 서 있기가 뭐해서 오줌을 찔끔거리며 물었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지.”
진수가 좀 야비해 보이게 웃으며 말했다.
“죽통 한 대 갈기기 전에 빨리빨리 말해, 새끼야.”
태혁이 일부러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진수가 태혁의 어깨를 툭 쳤다.
“나 어제 마담 쓱싹했다.”
진수가 그렇게 얘기해 놓고는 또 키득거렸다.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었다.
“쓱싹하다니, 뭘?”
“새끼, 더럽게 눈치 없네. 마담 따먹었다구, 임마.”
진수가 잔뜩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태혁이 놀란 얼굴로 묻자 진수가 웃겨 죽겠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야, 혁아. 마담, 그 나이치고는 괜찮드라. 아주 쓸 만해.”
“미친놈.”
태혁은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탱글탱글하드라구. 난 처음에 축축 처진 거 어떻게 주무르나 했거든. 근데 그게 아니야. 이건 이십대 저리 가라야. 완전히 이십대 쌍 뺨을 치겠더라. 어이구, 밤새도록 놔주질 않아서 허리가 아파 죽겠다. 쌍코피 터지는 줄 알았어.”
진수 놈의 밉지 않은 과장이 또 시작되고 있었다. 태혁은 진수 놈의 말 중에 믿을 만한 말은 삼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라까지 마, 새끼야.”
“구라 아니야. 아주 몇십 년 굶은 백여우처럼 덤벼들더라니깐.”
진수가 정색을 하며 반박하자 태혁은 그 새끼 또 진짜처럼 보이려고 쇼하네, 하며 웃었다.
“미친놈, 아무리 그렇다고 늙은 여자가 뭐 좋아서 따라갔냐?”
“따라가다니, 임마. 어제 낮에 한잔하자고 날 살살 꼬드기더라구. 그래서 밤에 만나서 한잔하는데 추파를 팍팍 던지는 거야. 나 좀 잡아드슈 하구. 내가 한번 잡아끌어 보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오드라고. 그래서 한번에 잡아먹었지. 사실은 따먹을 생각까지는 없었거든. 그래도 우리 다방 마담 아니냐. 그런데 그게 아니야. 완전히 내 의지가 아니라 마담 의지였어.”
진수가 침까지 튀겨 가며 말했다. 진수는 마담과 하룻밤 살을 부빈 게 퍽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자랑이 아니라 재미난 게임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임마. 완전히 스트립쇼에 포르노 한판 찍었지. 야, 정말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기술 하나는 끝내주드라. 내가 갔다, 갔어. 완전히 녹다운이다.”
이럴 때 보면 진수는 정말 얄밉고 정떨어지게 별볼일없는 놈이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단지 하룻밤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천박하게 잠자리 얘길 까발리다니. 더구나 상대는 바로 자신이 일하는 다방의 마담인데 말이다. 이 얘길 다방 레지들이 듣는다면 그 즉시 재수 없는 새끼라 욕을 할 것이다.
“미친놈. 그래, 좋기도 했겠다.”
태혁도 다소 재수가 없는 듯한 눈초리로 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긴 뭐가 좋아. 난 어디까지나 봉사한 거다. 환장을 하는데 어쩌냐. 그래서 난 내 연장이 얼마나 쓸 만한가 시험도 해볼 겸 찢어발겨서 나중엔 뭐가 나오는지도 볼 겸 겸사겸사 용쓴 거지.”
진수라는 놈은 눈치도 없어서 태혁이 입맛 없어 하는 것도 모르고 계속 신나게 떠들었다.
“돌았다, 돌았어. 할 짓이 없어 아까운 총각막을 거기서 터뜨리냐?”
“총각막? 난 그런 거 옛날에 박살냈다, 임마. 어어, 너 아직 생판 총각이냐?”
진수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이 새끼 이거, 별 볼일 없는 놈이네. 너 지금까지 여자도 하나 못 따먹었냐?”
“난 임마, 아무한테나 안 굴려. 아까운 내 몸을 왜 아무한테 굴려? 새끼, 지저분하게 마담이 뭐냐?”
“웃기지 마, 임마. 다른 여자는 뭐 별수 있는지 아냐?”
“돌았다. 넌 돌았어, 임마. 그래서 뭐가 남냐?”
“용돈도 집어주드라. 수입 짭짤하든데.”
진수가 주머니에서 삼천 원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태혁은 할말을 잃어 웃기만 했다.
“언제 한번 더 고놈의 몰랑몰랑한 젖가슴을 터지도록 주물러 줘야지. 나처럼 깔끔하고 말 잘하는 남자가 좋다나 어쨌다나.”
진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삼천 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좋기두 하겠다.”
태혁이 한심하다는 듯이 진수의 뒤통수를 쳤다.
태혁은 그날 화장실에서 있었던 진수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구역질이 치미는 듯했다.
“미친년.”
태혁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다방 문이 방울 소리를 울리며 열렸다. 아주 건장한, 아니 마치 씨름이나 유도를 하는 선수들처럼 덩치가 떡 벌어진 사내들 대여섯 명이 다방으로 들어왔다.
또 한 사람 있었다. 그다지 작은 체격은 아니었지만 워낙에 큰 덩치들에 가려져 왜소하게까지 보이는 남자가 그들과 섞여 들어와 제일 덩치가 큰 남자가 안내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혁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태혁뿐만이 아니라 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나 마담, 종업원 할 것 없이 모조리 그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방 안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내들의 엄청난 덩치도 희한해 보였지만 작은 사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동시에 그 큰 덩치의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도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 덩치들은 인사를 하고 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리지어 앉았다.
작은 남자는 고급 양복에 고급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반짝 반짝거리는, 유난히 광택이 잘 나게끔 정성들여 손질한 것 같은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 기름칠을 해 잘 빗어 넘긴 머리에는 윤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태혁은 남자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눈길을 보냈다. 버릇처럼 눈썹 주위를 매만지고 있어서 반지가 얼른 눈에 들어왔다. 까만 콩처럼 생긴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가 남자의 모습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도록 치장해 주었다.
태혁은 작은 남자에서부터 큰 덩치의 사내들까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유심히 살폈다. 덩치들의 옷차림도 보통 사람들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하나같이 고급 양복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한 사람만 푸른빛이 도는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나머지는 눈처럼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작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잘 닦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들의 덩치만 아니면 패션쇼를 하려는 모델들 같았다. 다방 안의 분위기가 그들의 옷차림으로 밝아져야 할 텐데도 일시에 살벌해지는 느낌이었다.
태혁은 그들이 건달세계에 있는 사내들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태혁이 생각하기엔 이 작은 남자가 최고 보스는 아닐 것 같았다. 최고 보스라면 이런 변두리 다방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간 보스 정도는 돼 보였다.
작은 남자가 손짓으로 마담을 불렀다. 주문을 하려는 것 같았다. 마담이 조금 망설이다가 작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얼굴엔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주문하시겠어요?”
마담이 처지기 시작한 눈 주위의 주름을 마지막까지 잡아당겨 웃으며 물었다.
“커피.”
“네, 저분들은요?”
마담이 주위에 앉아 있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됐어.”
마담이 남자의 짧은 대답에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하고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마담을 다시 불러 세웠다.
“종이하고 볼펜 좀 주게.”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네? 아, 네.”
마담은 다시 한 번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이고 카운터로 돌아와 종업원에게 커피 한 잔이라고 말한 뒤 볼펜과 메모지를 챙겼다. 미스 박이 쟁반에 커피를 올려놓자 마담이 공손하게 받쳐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습니다.”
마담이 조심스럽게 커피와 메모지, 볼펜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내려놓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저, 사장님······ 저 한 잔 안 사주세요?”
마담이 딴에는 매혹적인 미소라 생각하는 웃음을 지으며 용기를 내서 물었다. 물론 전혀, 조금도 매혹적이지 않았다. 추했을 뿐.
“다방 하는 여자가 커피도 못 먹나?”
남자가 싸늘하게 잘라 말하고 종이에다 휘갈겨 쓴 것을 마담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이 노래 부탁해.”
마담은 몹시 민망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들고 BOX로 다가갔다.
“신청곡이야.”
마담이 BOX 안으로 메모지를 밀어넣어 주었다. 태연한 척 애는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분명 날이 서 있었다. 태혁은 마담이 작은 남자에게 망신당한 걸 알아차리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마담은 태혁을 흘겨보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메모지에는 <THE END OF THE WORLD>라고 씌어져 있었다. 태혁은 유리창 너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어디라고 꼭 꼬집을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를 보고 있는 것도 같았고 그 밑에 자리잡은 어항 속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금붕어를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의 눈에서 순간 무엇인가가 번득였다.
태혁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태혁은 재빨리 판을 찾아서 갈아끼우고 마이크를 켠 후 다른 때보다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멘트를 했다.
“THE END OF THE WORLD 들려드립니다.”
아주 짤막하고 군더더기를 끼우지 않은 멘트였다. 그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창 너머의 남자와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예전처럼 유들유들하게 여자들 시선을 끌어 모으려는 식의 멘트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창 밖의 작은 남자에게 왠지 약해 보이는 듯한 인상을 심어 주기가 싫었다. 알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끈끈한 무엇인가로 남자를 자신이 끌어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남자의 행동은 정갈했다. 아주 정갈했다. 주위의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큰소리로 떠들거나 하다못해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거구의 사내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이 작은 남자의 모습처럼 너무나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거구의 사내들은 자주자주 작은 남자의 동정을 살폈다.
태혁은 작은 남자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태혁은 그의 칙칙한 무표정에서 어떤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태혁은 그래서 갑갑증을 느꼈다. 혹시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을까 해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지만 남자는 눈을 고정시킨 채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스 박이 다른 손님의 신청곡 메모지를 BOX 안으로 밀어넣고는 서둘러 카운터로 돌아갔다. 태혁은 남자가 신청한 노래가 끝나길 기다려 신청곡을 준비하는 틈틈이 남자를 살폈지만 남자의 시선은 언제나 한자리였다.
‘THE END OF THE WORLD’ 노래가 끝나고 다른 노래를 틀면서 멘트를 짧게 끝내는데 남자가 일어섰다. 남자가 몸을 움직이자 앉아 있던 거구들도 기계처럼 모두 일어섰다. 거구 중 한 명이 서둘러 계산을 끝내고 나서 작은 남자에게 돌아서자 그 작고 단단해 보이는 남자는 거구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입구로 다가갔다.
태혁은 남자가 일어서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왜 서운한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섭섭하고 서운한 느낌이었다. 태혁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입구가 열리고 거구 네 명이 먼저 빠져 나가자 작은 남자가 나가려다가 말고 아주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태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돌아봤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그리고는 빨려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환풍기에 담배연기가 빨려나가듯 남자는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나가자 다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커졌고 말소리도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태혁은 사람들의 행동이 간사하게 보였다. 거구들과 작은 남자가 있을 때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죽은 듯 움츠리고 있다가 그들이 사라지자 다시 저희들 세상을 만난 것처럼 떠들어대는 꼴이 야비하고 간사하게 보였다. 저마다 남자들이 사라진 문 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태혁은 그런 꼴들이 보기 싫었다.
마담이 종종걸음으로 BOX 안으로 들어왔다.
“우르르 떼지어 와선 커피 한 잔이 뭐야.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어. 겉은 멀쩡하게 돈 잘 쓰게도 생겼드니······ 아유, 조잡스러워서. 커피 한 잔이 뭐냐구. 소금이라도 뿌려야 할까 봐.”
마담이 툴툴거리며 태혁의 곁에 앉았다.
“건달인 것 같지? 나 술집 다닐 때 저런 인간들한테 많이 시달렸지. 옆에 있던 덩치들은 쫄따구인 모양인데 저 애들은 별볼일없어. 큰형님쯤 되는 모양이든데 돈을 그거 쓰려고 애들 달고 다니나? 참 웃기지? 작달막한 사람이 어떻게 곰 같은 애들을 끌고 다닐 수 있는지 몰라.”
마담은 태혁의 얼굴을 쳐다보며 쉴새없이 떠들었다.
“쬐그만 사람이 눈빛은 더럽게 사납드라구. 자기도 봤어?”
“멀어서 제대로 못 봤어요.”
태혁은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싱겁기두, 노래 한 곡 들으려고 여기 왔나. 치사하게 커피 한 잔 사달랬드니 그걸 뺀찌놓을 게 뭐야. 아유, 참! 자존심 상해서.”
마담은 출입구를 보면서 계속 말했다.
“아까 그 남자, 자기 쳐다보고 나갔지?”
“날 본 거 맞아요?”
태혁이 귀가 솔깃해져서 물었다.
“자기 보는 것 같든데? 같은 남자 눈에도 자기가 멋있게 보이나 봐. 그치?”
마담이 태혁의 곁에 더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태혁은 끈적하게 달라붙는 마담이 짜증스러웠다. 역겹게 풍기는 화장품 냄새도 싫었고 싸구려 향수 냄새에 머리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태혁은 상체를 뒤로 젖혀 될 수 있으면 마담과 떨어지려고 애를 썼다. 마담은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마지못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0시가 가까워지자 손님들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여종업원들이 바닥을 쓸거나 탁자와 의자를 가지런히 놓으며 정리를 했다. 태혁도 꺼내 놓았던 판을 재킷에다 끼워 넣고 기지개를 켰다. 마담이 기지개를 켜는 태혁을 쳐다보다가 BOX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 오늘 나 좀 보구 가.”
“왜요?”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마담이 말할 수 없이 끈적거리는 미소를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태혁은 마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태혁이 듣기로는 마담은 유부녀였다. 딸도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술집에서 일하다 한밑천 잡아 다방을 차렸다고 마담이 떠들던 기억도 났다. 태혁은 마담처럼 헤프게 구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술을 마시기만 하면 질질 짜대곤 했고 소리를 빽빽 질러 히스테리 증상이 농후한 환자처럼 굴었다. 그런 건 마담의 술버릇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간 척하며 일부러 태혁에게 엉겨붙는 짓을 하는 것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마담의 이런 태도 때문에 마담이 태혁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다방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진수가 다음은 니 차례다, 너 피할 수 없을걸? 했을까.
태혁은 마담이 불쌍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난잡하게 술주정을 할 때면 불쌍하다는 생각은 싹 달아나고 짜증스럽고 귀찮기만 했다. 태혁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저렇게 집요한 여자는 정말 처음이었다.
종업원들이 태혁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 다방을 빠져 나가자 마담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태혁은 마담이 하는 행동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담이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맥주와 안주를 가지고 나와 테이블에 올려놓고 언제 준비했는지 초에 불을 붙이고 나서 다방 안을 휙 둘러봤다. BOX 안의 붉은빛이 홀 안으로 번져들고 있었다.
마담이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태혁은 일찍 들어오라고 했던 태순의 말이 떠올라 내키지가 않았다. 태혁이 생각에 잠긴 듯 우두커니 앉아 있자 마담이 BOX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자기? 빨리 나와 나랑 한잔해.”
마담이 태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태혁은 찜찜한 표정으로 못 이기는 척 일어나 팔을 잡은 마담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태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술과 촛불을 내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마담은 싱긋 웃은 뒤 태혁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자기처럼 무뚝뚝한 남자가 좋드라.”
태혁은 마담의 말에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겨우 참았다. 진수처럼 말 잘하는 남자가 좋다고 할 땐 언제고 또다시 무뚝뚝한 남자가 좋다고 하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자기, 한 잔 마셔.”
마담이 태혁의 술잔에 맥주를 부었다. 태혁은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자기. 빨리 취하면 어쩌려고 그래.”
마담이 태혁의 턱에 흐른 맥주를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마담의 손이 태혁의 목덜미에 닿았다. 손가락 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마담의 손이 꼬물거리며 태혁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태혁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나 한 잔 안 줄 거야?”
마담이 태혁의 귀에 입을 바짝 붙여 소곤거리자 입김이 살갗에 닿았다. 둘밖에 없는 곳에서 소곤거리는 마담이 추하게 보였다. 마치 밤새도록 골목을 쑤시고 다니는 발정 난 수캐처럼 보였다. 마담이 여자였는데 왜 수캐처럼 보이는지 태혁도 알 수가 없었다.
태혁은 말없이 마담의 잔에 맥주를 부어 주었다. 마담은 입에 대는 시늉만 하고 도로 내려놓았다.
“자기, 우리 다방에 오고 나서 손님이 부쩍 더 는 것 알고 있지?”
마담의 손가락이 태혁의 손등을 간질였고 태혁은 하지 말아요,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참 추하고 보기 싫고 거북하지만 어쨌거나 이 여자는 다름 아닌 태혁이 다니는 직장의 주인장이니까.
“난 자기가 우리 다방에 DJ 자리 알아보러 왔을 때부터 한눈에 반해 버렸다니깐.”
저런, 그럼 그날부터 찍어 놓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태혁은 자신의 손등을 여태도 간질이고 있는 마담의 손가락이 바퀴벌레의 다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동업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동업요?”
“자기 덕분에 우리 다방 매상도 올라가고 있고 자긴 돈이 없으니 다방을 차릴 수 없고, 그러니까 우리가 동업을 하는 거야. 자기가 우리 다방에 계속 있어 주면서 지금처럼 손님을 끌어 준다면 월급이 아니라 수입을 나누는 거지.”
동업을 하자는 말, 상당히 솔깃한 제의이긴 했다. 월급이 아니라 수입을 나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늙은 여우의 말을 믿어도 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태혁의 손등을 간질이던 마담의 손이 과감하게 태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담의 손끝에서 묻어 나오는 찬 기운에 소름이 쫙 돋았다. 태혁은 마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낯을 일그러뜨리며 병을 들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머,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천천히 마셔. 시간 많잖아.”
마담이 애교를 떨며 태혁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가 봐야죠, 통금에 걸리기 전에.”
“자고 가면 되지.”
마담이 별걸 다 걱정한다는 투로 말하며 콧소리를 섞어 웃었다.
“집에 가서 잘 거예요.”
태혁은 맥주를 마저 비워 버렸고 병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은 후 가슴을 쓰다듬는 마담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서둘지 마. 왜 이렇게 서두르고 그래. 천천히 해.”
태혁이 마담의 손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끔찍해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아니 원래부터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여자인지 마담이 태혁의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흐느적거리며 태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더는, 더 이상 받아주다간 뭔가 일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멈춰야 했고 여기서 확실하게 해둬야 할 것 같았다.
태혁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마담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비켜요.”
순간, 마담이 고개를 홱 들고 태혁을 쳐다봤다.
“뭐?”
태혁의 비키라는 말이 생뚱맞아서 그런지 얼른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담이 되물었다.
“나가게 비키라구요.”
태혁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는 벌떡 일어섰다. 마담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태혁을 올려다봤다. 먹통이 된 듯한 표정이었다.
“비켜요, 나가게.”
“어딜 간다는 거야?”
마담이 발끈하여 벌떡 일어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가요.”
태혁은 마담을 건드리지 않고 나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테이블을 앞으로 밀며 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마담이 앙칼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태혁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다시 마담이 소리를 질렀다.
“그냥 나가면 넌 해고야.”
태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해고당하기 싫으면 다시 와서 앉아야 할걸?”
마담이 기세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뭣 때문에 해고예요?”
“넌 고용인이야. 주인이 오라면 와야 할 것 아니야.”
마담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주인이 하는 말을 무시할 거야? 무시하겠다면 해고시킬 거야.”
“날 해고시키면 좀 시끄러울 텐데요.”
“뭐라구?”
“마담이 DJ들 잡아먹고 뼈다구는 버렸다고 소문낼 겁니다.”
“뭐, 뭐라구?”
태혁의 말에 마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거렸다.
태혁은 비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마담의 마수에서 박차고 나온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태혁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가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2
태혁이 집으로 돌아온 때는 아침 7시가 다된 시각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태혁을 붙잡고 태순이 어디서 자고 왔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 집에서.”
태혁이 태순의 가슴을 슬쩍 만지며 말했다.
“이 녀석이!”
태순이 장난스럽게 태혁의 등을 때렸다.
“나 잘 거야, 누나. 술 마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나 잘게.”
“밥 먹고 자야지, 그냥 자면 어떻게 해?”
“됐어. 그냥 잘 거야.”
태혁은 태순을 한번 껴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향숙의 집에서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아서 그런지 피곤이 세차게 몰려들었다. 태혁은 잠자리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불현듯 어제 낮에 다방에 들렀던 작은 남자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저히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던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다방을 나가기 전 남자가 던졌던 보일 듯 말 듯했던 시선도 태혁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향숙의 집에서 향숙에게 정신을 빼앗겨 있느라 그 작은 남자를 잊고 있었는데 남자가 떠오르는 순간 태혁의 가슴에서 걷잡을 수 없는 거센 욕망이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예상치 못했던 욕망덩어리였다. 회오리치듯 타고 올라오는 욕망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욕망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혁의 눈에 작은 남자의 모습이, 떡대 같은 덩치들에 둘러싸여 들어오던 작달막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작고 볼품없던 남자에게 허리를 꺾어 가며 인사하던 덩치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토끼 앞에 사나운 곰들이 절을 하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하고 만화 같은 풍경이었다.
태혁은 그 만화 같은 광경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작고 말이 없던 그 남자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고 싶었다. 만화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림처럼 움직여지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서 그 남자가 그랬듯이 THE END OF THE WORLD를 신청하고 정해 놓지 않은 듯한 곳에 시선을 두고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싶었다. 다른 천체에서 훌쩍 뛰어든 사람처럼 그렇게 하고 싶었다.
태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틀어쥐고 있었다.
태혁이 어슬렁거리며 다방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손님은 한 사람도 없고 종업원들도 카운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태혁이 나타나자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마담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카운터 뒤에서 훌쩍거리고 우는 미스 장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태혁이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서는 미스 박에게 물었다.
“동네 건달들이 몇 명 왔었어요. 돈 내놓으라고 지랄을 하는데 마담이 없다고 하니까 이것들이 안 가고 계속 시비를 붙이잖아요. 경찰에 신고도 못하게 카운터에 딱 버티고 서서 행패를 부리구, 손님두 몇 명 있었는데 무서워서 다 도망가 버리구.”
미스 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요?”
“숙자 월급날인데 그걸 가지고 갔어요. 더러운 놈들.”
미스 박이 팔짱을 낀 채 말하더니 화장실에 간다며 나가 버렸다.
태혁은 미스 장을 쳐다봤다. 숙자라는 사람은 바로 미스 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미스 장이 고개를 들어 태혁을 쳐다봤다. 마스카라가 눈 주위에 번져 우스꽝스러운 피에로처럼 보였다. 미스 장은 한 달 전에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네 살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동생 하나와 함께 살다가 다방으로 흘러들어온 아가씨였다.
미스 장이 푸석푸석한 얼굴을 문지르고 일어나 카운터에 앉았다.
“저번에 왔다던 그 깡패들 말이에요?”
태혁이 미스 장에게 휴지를 건네며 묻자 미스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달 언제쯤인가 미스 장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동네에서 껄렁껄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깡패들이 나타나서 전날 벌어들인 매상을 모조리 슈킹(빼앗아)해 간 적이 있었다. 태혁이 없을 때라 그냥 빼앗긴 모양이었는데 오늘도 태혁이 없어서 그냥 털린 것이었다.
“진수는요?”
“그놈들한테 얻어맞아서 병원 갔어요.”
미스 장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나 오늘 월급날이거든요. 저녁에 받아도 되는데 한가할 때 엄마 약 좀 사려구 일찍 달라고 했는데 그 씨발놈들이 그걸 홀랑 뺏어갔어요.”
미스 장이 슬픔에 복받친 듯 흐느꼈다. 미스 장의 어머니가 이년 째 중풍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태혁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여동생은 고등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어디 공장에 취직했고 자신은 다방에 나온다고 말해 주며 울던 기억이 났다.
“마담은요?”
“경찰서에 갔어요. 미스 김 언니랑 같이요. 붙잡으면 그 돈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그걸 어떻게 찾겠어요. 벌써 다 썼을 텐데.”
태혁이 그렇게 말해 놓고 울고 있는 미스 장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모두 사천백 원이었다. 다방에 나오기 전 누나가 용돈 하라며 쥐여 준 돈이었다. 태혁은 몽땅 털어서 미스 장에게 내밀었다. 미스 장이 태혁이 내민 돈을 쳐다보다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태혁을 올려다봤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예요. 이것 가지곤 택도 없겠지만 우선 어떻게 해봐요.”
태혁이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카운터에 돈을 올려놓고 DJ BOX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장이 돈과 태혁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돈을 움켜쥐고 BOX로 쫓아 들어왔다.
“저, 미스터 최······ 이 돈······.”
“적어서 그래요? 나도 그것밖에 없어요.”
태혁이 레코드판을 만지작거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런 거 받아도 되는지······ 다음달에나 갚을 수 있는데······.”
미스 장이 아직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돈 넉넉해졌을 때 그때 생각이 나면 갚고 잊어먹으면 갚지 말아요.”
태혁이 씩 웃어 보인 후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레코드판을 전축에 끼우고 음악을 틀었다.
미스 장이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다시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려요?”
“돈 줬다고 커피까지 타 준다는 거예요?”
태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미스 장의 얼굴에 무안한 빛이 떠올랐다.
“농담이에요.”
태혁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미스 장이 조금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미스 장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들고 들어와 태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미스터 최.”
“예?”
“고마워요, 정말.”
태혁이 미스 장을 쳐다보자 미스 장이 우물거리다가 수줍은 듯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태혁의 코에 감미로운 커피 향이 비집고 들어왔다. 태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채 음미하며 미스 장을 쳐다봤다.
미스 장은 스물네 살짜리 처녀였다. 작은 키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고 마담이 빌려주는 어울리지 않는 옷에 화장 솜씨가 서툴러 촌닭 같은 얼굴로 다방 안을 돌아다녔다. 웃음이 헤픈 여자가 아니어서 좀체 잘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골난 여자처럼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잔뜩 찌푸리고 다니는 여자도 아닌,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게 생긴 여자였다. 태혁은 촌스런 미스 장이 그렇게 밉지가 않았다.
그때 마담이 들어와 씩씩거리며 웃옷을 벗어 걸고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얘, 숙자야. 문 걸어라. 지금 장사할 기분 아니야.”
숙자가 얼른 문을 걸고 마담에게 다가갔다.
“언니, 어떻게 됐어요? 잡을 수 있대요?”
“잡아 본다고는 하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
마담이 신경질적으로 담배연기를 빨아댔다.
“이봐, 미스터 최! 음악 좀 꺼. 음악도 신경질 나.”
마담이 짜증스럽게 말을 뱉었다.
“얘, 숙자야. 물 한 잔 줘. 정말 더러워서 이 장사도 못해 먹겠다. 미친놈들. 거지 똥구멍에서 장아찌를 빼먹어라. 개새끼들.”
미스 장이 떠온 물을 마담이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혁은 BOX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담배만 피웠다.
“숙자야, 너 어쩔래? 니 월급 다 날렸잖아.”
마담이 미스 장을 흘겨보며 물었다.
“그 깡패들, 신고했다고 우리한테 보복하는 건 아니겠죠?”
미스 장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저 방정맞은 소리하고는. 야, 이년아!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넌 눈치가 왜 그렇게 없니? 재수 없는 소리만 골라서 해라, 골라서 해.”
마담이 미스 장을 찢을 듯이 흘겨봤다.
“넌 어디 갔다오니? 정신없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미스 박에게 마담이 짜증을 부렸다.
“화장실에 갔다왔어요.”
미스 박이 무안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으이그, 정말 신경질 나서 미치겠네.”
마담이 담배를 눌러 끄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자야, 문 열어. 장사를 해야 오늘 털린 돈을 도로 찾지.”
미스 장이 마담의 눈치를 보다가 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늘 장사 잘되면 숙자 너 돈 좀 줄 테니까 오늘 돈 많은 놈 골라서 알랑방구 좀 뀌고 비비고 해봐. 알았어?”
“네.”
“미스터 최, 음악 틀어.”
마담이 카운터로 다가가며 말하고 나서 화장을 고치기 위해 분첩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신경질 나니까 화장도 안 먹네.”
미스 장이 잠근 문을 열쇠로 따고 문을 열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일이야?”
마담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문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산처럼 거대한 시커먼 남자들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아니에요. 누가 있을 줄은 생각도 안 하고 문을 열다가 놀란 거예요.”
미스 장이 더듬거리며 말하고 얼른 비켜섰다.
“어이구, 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구도 놀란다드니 그짝이다.”
“죄송해요.”
“호들갑은 정말, 애 떨어지겠네.”
마담이 찜찜한 얼굴로 미스 장을 쳐다보다가 이내 표정을 웃는 낯으로 바꾸며 남자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갑소?”
전라도 말씨를 쓰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온 사람이 물었다.
“동네 깡패들한테 몽땅 털렸어요. 그놈들이 십 원 한 장 안 남기고 다 털어 가서 또 그놈들이 온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거예요.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마담이 한숨을 쉬며 얘기한 후 테이블로 안내했다.
태혁이 BOX 안에서 들어오는 사내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전날 온 사람들이 분명했다. 전날처럼 대여섯 명이 먼저 들어오고 난 후에 작고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고 두 명이 더 따라 들어왔다. 전날보다 많은 숫자였다.
태혁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남자를 쳐다봤다. 태혁은 빠른 손놀림으로 THE END OF THE WORLD 판을 찾아 갈아 끼웠다. 태혁은 남자에게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데 남자는 이미 다른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태혁은 조금 머쓱해져서 버릇처럼 코를 만지작거렸다.
마담이 작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자 전라도 말씨를 쓰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온 그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서 남자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다 털렸다구?”
남자가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마담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네.”
“얼마나?”
“어제 매상 올린 거하구 오늘 아가씨 월급 줄 거하구 몽땅요.”
“그래?”
남자는 다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저기 애들한테도 한 잔씩 돌리고······.”
남자가 근처에 있는 덩치 큰 사내들을 가리킨 후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분들두요?”
“음, 그리고 여기 종업원들하고 마담도 한 잔 하지.”
“어머, 고마우셔라. 사장님, 정말 멋있어요.”
마담이 예의 얍삽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쓸어 내렸다.
“얘, 미스 장아. 여기 있는 손님들한테 전부 한 잔 돌리구 너희들도 한 잔씩 해. 알았지?”
마담이 눈짓을 하며 미스 장에게 말하자 미스 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기, 저 청년 말이야.”
“DJ요?”
“음, 저 친구한테도 한 잔 줘.”
“알았어요.”
마담이 다시 미스 장에게 고개를 돌려 태혁에게도 한 잔 가져다주라며 눈짓을 했다.
“너희들 뭐 하니? 사장님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지 않구.”
마담이 미스 박에게 눈을 깜빡거리자 미스 박이 재빨리 커피 두 잔을 가지고 다가와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남자의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미스 장은 취소라도 할까 봐 조바심치며 나머지 남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저 친구 커피는 여기로 가져와.”
“누구요?”
“저기 박스 안에 있는 친구. 이리 오라고 해.”
“알았어요.”
마담이 남자의 눈치를 보다가 태혁이 있는 BOX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저분이 좀 보자고 그러네. 나와 봐.”
“예? 왜요?”
태혁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되물었다.
“놀라긴. 보자는데 잡아먹힐까 봐 그래? 여자면 몰라도 남자를 잡아먹기야 하겠어?”
“알았어요.”
태혁은 묻는 말에 빠르게 대답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슴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휙 하고 불었다가 다시 용광로처럼 뜨거운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왔다. 태혁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한참 동안 참았다가 후욱 하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다물어 봤다. 그렇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리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태혁은 남자의 시선이 다른 데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걸이에 신경을 썼다. 태혁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앉게.”
태혁은 남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마담은 가서 일봐.”
남자는 마담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태혁을 향하고 있었다. 마담은 미스 박에게 눈짓을 하고 조용히 일어났다.
“말씀 나누세요.”
마담은 미스 박과 카운터로 돌아가며 태혁을 힐끗 쳐다봤지만 태혁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음악 틀어 줘서 고맙네.”
남자가 다 태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하고는 태혁에게 조금 웃어 보였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틀어드려야 옳습니다.”
태혁은 남자의 시선을 주의하며 대답했다.
“들지.”
남자가 태혁의 자리에 놓인 커피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자신도 한 모금 들이켰다. 태혁도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는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 커피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몇 살인가?”
“스무 살입니다.”
“음.”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일 나오나?”
“다방이 쉬는 날 빼고는 매일 나옵니다.”
“문 닫는 날이 언젠가?”
“한 달에 두 번, 둘째 넷째 월요일에 쉽니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문을 여는 편입니다.”
“쉬는 날 전날 내게 미리 알려 주게. 왔다가 헛걸음할 수는 없으니까.”
“예, 그러겠습니다.”
태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자네 이름은 뭔가?”
“최태혁입니다.”
“최태혁.”
“네.”
“음, 좋은 이름이군.”
남자는 태혁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전라도 남자가 라이터를 손에 들고 불을 붙이려는 듯 몸을 움직이는데 태혁이 재빨리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남자는 태혁이 켜 들고 있는 라이터에 담배를 갖다 댄 후 쭉 빨아당겼다.
“형제가 어떻게 되나?”
“육 남매인데 저 혼자 아들입니다.”
“외아들이라······.”
무슨 이유인지 남자가 길게 말을 늘어뜨렸다.
“아버지는 계신가?”
“안 계십니다.”
태혁이 안 계시다고 말했고 남자는 아마도 돌아가신 것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태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관심도 없었다. 가족을 다 내팽개치고 혼자 편하겠다고 훌쩍 떠나 버린 사람이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던 남자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가십니까?”
“음.”
태혁이 벌떡 일어나며 묻자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위의 남자들도 모두 일어나 남자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남자는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태혁도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급한 듯이 물었다.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태혁을 쳐다봤다.
“알고 싶나?”
남자가 태혁을 보며 조금 웃었다. 웃을 때 눈 주위에 잔주름이 잘게 잘게 접혔다. 남자의 이름은 타이거 강이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손님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혁이 요즈음 다방에서 일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까닭은 타이거 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알고 난 후부터 타이거 강은 매일같이 자신이 신청한 곡을 들으며 태혁에게 커피를 사주었고 한 시간 정도 태혁을 붙들어 놓고 태혁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타이거 강 주위에는 언제나 거구의 사내들이 붙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태혁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타이거 강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적인지는 태혁도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누가 보더라도 친한 사이처럼 보였고 그렇게 보일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타이거 강이 늘어놓는 얘기 거의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의 얘기였고 막연하기만 했던 그들의 세계가 파헤쳐지면서 태혁에게는 굉장하고 멋들어진 상상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타이거 강은 조직의 불투명한 얘기에서부터 여간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민감한 얘기도 스스럼없이 해댔다. 그 민감한 얘기라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다루었던 서동파 조직 대부 살해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경찰은 혐의자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타이거 강은 김석이라는 칼잡이가 한 짓이라고 얘기하며 잠적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찾지도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는 이유는 외국으로 빼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태혁이 어느 조직에 속해 있냐고 물었을 때 타이거 강은 그냥 잠시 웃을 뿐 대답이 없었고 그때 태혁은 그 김석이라는 놈이 타이거 강 밑에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외에도 정치계와 연관되어 세상이 들썩거렸던 사건들에 자신의 조직 말고도 여러 조직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태혁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쳐다봤었는데 태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아 씩 웃어 보이자 타이거 강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태혁은 다방 안으로 들어선 타이거 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혁이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마담이 먼저 손짓을 하며 나오라는 시늉을 했고 타이거 강은 언제나 그랬듯이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날과 다른 점은 이상하게도 거구의 사내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혁은 재빨리 판을 갈아 끼우고 타이거 강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태혁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타이거 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날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태혁은 타이거 강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다시 한 번 문 쪽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운전하는 애만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저녁은 드셨습니까?”
“음, 자네는?”
“예, 먹었습니다.”
마담이 커피를 받쳐들고 다가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서 타이거 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장님, 저는 한 잔 안 사주세요?”
마담이 코맹맹이 소리로 투정부리듯이 말하자 타이거 강이 싱긋 웃었다.
“한 잔 사주지. 차 한 잔 가지고 이리 와.”
“어머머, 고마워라.”
마담이 어린애처럼 손을 맞잡고는 타이거 강 옆자리에 바짝 다가앉았다.
“미스 장아, 여기 커피 한 잔 가지고 와라.”
마담이 징그러울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후 타이거 강을 쳐다보며 웃었다.
“이제야 사주실 게 뭐예요. 너무하셨어요.”
마담이 나이에 맞지 않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그랬나?”
타이거 강은 밋밋한 목소리로 말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사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사주시면 어디가 덧나나? 사장님은 미스터 최만 찾으시구 전 보이지도 않나 봐요.”
“그럴 리가 있나.”
“아니면 왜 여태 한번 불러 주시지도 않으셨어요?”
마담이 눈을 흘겼다.
“이거,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군.”
타이거 강이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태혁도 억지로 따라 웃긴 했지만 찰거머리처럼 타이거 강 옆에 붙어 있는 마담이 밉살스럽게 보였다. 미스 장이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은 뒤 태혁에게 조금 웃어 보이고 갔다.
“사장님은 무슨 사업 하세요?”
마담이 타이거 강의 옷깃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
“최 군이 말하지 않던가?”
타이거 강이 태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스터 최는 뭐가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인지 입도 뻥긋 안 해요. 혼자만 알구 있구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도 한마디도 토해내지 않는다구요.”
“그래?”
타이거 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히 만족스러울 때 짓는 미소였다.
“무슨 일 하세요? 그리구 같이 오는 남자들은 대체 누구예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몸이 좋아질 수 있나 몰라. 누구예요?”
“눈치챘을 텐데 뭘 묻고 그래?”
“전 그런 눈치 없어요.”
마담이 더욱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했다.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어떻게 장사를 해먹어?”
“아이, 너무하시네. 그냥 말해 주시지.”
마담이 떼를 쓰다시피 하며 타이거 강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타이거 강은 태혁을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자네 말이야······.”
타이거 강이 태혁에게 뭔가 말을 할 참이었다.
그때였다. 다방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사내가 시끄럽게 떠들며 들어섰다. 마담이 무심코 어서 오세요, 라고 말하다가 금세 낯을 찡그렸다. 미스 장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진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내들은 미스 장에게 윙크를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툭툭 던지고 나서 제일 넓은 자리에 몰려 앉았다.
“또 왔네.”
마담이 입을 조그맣게 씰룩거리며 말했다.
“누구예요?”
태혁이 남자들을 힐끗 쳐다본 후 물었다.
“그놈들이야. 저번에 돈 뜯어 간 놈들 말이야.”
마담이 빠르게 중얼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혁도 따라 일어났다.
“앉아 있어. 다방 시끄럽게 만들지 말자구. 얼러서 보내든지 아니면 경찰을 부르든지.”
마담이 태혁의 어깨를 툭 치고는 카운터로 갔다가 미스 장에게 귓속말로 말하고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마담이 팔짱을 끼고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묻나? 차 마시러 왔수다.”
손등에 담뱃불로 지진 상처가 있는 사내가 건방지게 말한 후 침을 바닥에 퉤 하고 뱉었다.
“어디다 함부로 침을 뱉어요?”
마담이 침이 떨어져 있는 자리를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쳐다보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다 뱉긴, 바닥에 뱉었지.”
“여기다 침을 뱉으면 어쩌냐고요, 더럽게.”
“더럽게? 어!”
사내가 이게 어디다 대고 더럽게라는 말을 내뱉느냐는 듯이 마담을 노려봤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거참, 진짜 드럽게 잔소리 많네. 손님한테 막 이래도 되나?”
“손님이면 점잖게 해야지 그러면 돼?”
마담이 지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차나 가지고 오랑께. 길게 그라면 냅다 뒤집어엎는 수가 있응께.”
금속성의 목소리로 전라도 남자가 지껄였다. 마담은 기막힌 듯이 쳐다보고 있다가 카운터로 돌아왔다.
“별 더러운 놈들 다 보겠네, 씨발. 얘, 숙자야. 대충 끓여서 빨리 가지고 가.”
마담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제가요?”
“그럼? 내가 가?”
마담이 미스 장에게 눈을 흘겼다.
태혁은 남자들의 모습을 훑어봤다. 하나같이 못생긴 상판대기였다. 눈썹에 길게 흉터가 있는 남자의 눈이 특히 고약스럽게 보였다. 태혁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타이거 강은 아무 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어항 안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붕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마담? 여그 음악은 워째 요 모양인가? 뽕짝 웂는가?”
전라도 말투의 남자가 큰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마담이 도끼눈으로 사내들을 쳐다보다가 태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태혁은 천천히 일어나 BOX로 들어가 좀 빠른 템포의 팝송을 골라서 틀고 나와 타이거 강의 앞자리에 다시 앉았다.
“웜마, 양키가 솔라솔라 뭣이라고 지끼는 것이여? 노래치고 참 별 지랄이구마는.”
전라도 남자가 또다시 시비조로 말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웅변대회에 나온 연사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태혁은 기분이 상했지만 못 들은 척하고 타이거 강이 쳐다보고 있는 물고기에 시선을 던졌다. 미스 장이 커피를 들고 가서 남자들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따, 고거 방뎅이 하나는 물건이구만.”
전라도 놈이 미스 장의 엉덩이를 쓰다듬자 미스 장이 발끈하며 물러섰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긴 뭘 왜 이래? 앉아 봐.”
“싫어요.”
미스 장이 커피를 마저 내려놓고 돌아서려 하자 남자 하나가 미스 장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차 한 잔 사줄 테니까 앉아 봐. 빼긴 뭘 빼고 지랄이야?”
남자가 미스 장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싫다니까요.”
미스 장이 사내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기 위해 흔들어댔다.
“거그 앉아 봐요. 뭣 땀시 빼고 지랄이여? 누가 지금 당장 잡아묵기라도 한댜? 낭중에 살살 먹어 줄팅께 거그 앉아 봐.”
“싫다구요. 일해야 해요.”
미스 장이 계속 사나운 표정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너 오줌 매렵냐? 와 인상을 쓰고 지랄이야!”
미스 장이 남자를 흘겨봤다.
“놔요!”
미스 장이 팔을 빼내지 못하자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여? 못생긴 년이 더럽게 빼고 있네. 썅!”
눈썹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일어나면서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태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마담이 눈짓으로 저지하고 미스 장에게 다가가 미스 장을 잡고 있는 사내의 손을 잡아 풀었다.
“그만하고 차 들어요.”
“미친년이 왜 빼고 지랄이야?”
일어선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욕을 해댔다.
“다른 손님도 있으니까 그만해요. 우리도 장사를 해야 하잖아.”
마담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홀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손님이 있는데 어쩌란 말이야? 건 니년 사정이고. 씨발, 별 웃기는 년을 다 보겠네.”
놈들이 마담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는데도 마담은 쉽게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무슨 사나운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미스 장은 얼른 주방에 들어가.”
마담이 미스 장에게 작게 속삭이며 등을 떠밀자 미스 장이 훌쩍거리고 울며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태혁이 주방으로 뛰어들어가는 미스 장을 쳐다보다가 일어나 사내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까 그만하시고 화 푸세요.”
“넌 뭐야!”
금속성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힐끗 태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 종업원입니다. 그만들 하시고 차 드세요.”
태혁이 공손했지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니 일이나 해, 상관하지 말고. 마담, 이거 이래도 돼? 이거 정말 재미없어지는데······ 다방에서 일하는 년이 뭘 빼고 지랄병이야. 안 그래, 그래?”
“그만들 하고 차 들어요. 다른 손님들도 있잖아요. 우리 생각도 해주어야지, 안 그래요?”
마담이 화를 참으며 말하고는 카운터로 돌아가며 태혁의 등을 떠밀었다. 사내들이 계속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태혁은 못 들은 척하고 타이거 강에게 돌아갔다.
“형님, 죄송합니다.”
태혁이 타이거 강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어디를 가든지 저런 놈들은 꼭 있으니까.”
타이거 강이 의연하게 대꾸했다.
“화를 참을 줄도 알아야 해. 단 터뜨릴 땐 끝장을 봐야 하구.”
“예, 형님.”
사내들도 조용해진 것 같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향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태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혁이 고개를 조금 끄덕여 주자 향숙도 눈인사를 했다.
태혁은 일단 조용해졌기 때문에 사내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타이거 강은 음악에 열중해서 흥얼거리고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각자의 화제에 열중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눈엣가시 같던 사내들이 찻값을 떼먹으려는 작정으로 어슬렁거리며 그냥 나가려다가 마담과 다시 시비가 붙은 것이다. 마담은 기세당당하게 그들을 막아서서 찻값을 요구했지만 한 남자가 툭 밀치자 금방 기가 꺾여 울상인 얼굴로 태혁을 쳐다봤다.
“아니, 번번이 이러면 어떻게 해. 사람들이 그러면 못써. 찻값을 줘야 우리도 먹고살 것 아니야. 찻값이 얼마나 한다고 그래.”
마담이 매달리다시피 그들을 붙잡았다.
“달아 놓으라구. 다음에 또 올 텐데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다음에 와서 주면 될 거 아니야!”
“지금 주고 가. 찻값을 외상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지난번에 우리 아가씨 월급 가져간 것도 있잖아. 치사하게 남자들이······.”
마담이 지난번 일을 생각하면 멱살을 잡아 흔들어도 시원치 않은지 몹시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치사해? 우리가 치사하다 그거지? 그거 참 말 웃기게 하네? 그래? 그러면 난 더 못 줘. 치사해?”
사내들이 마담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그냥 나가려고 했다.
“못 가. 돈 내놔. 찻값 달라구.”
마담이 한 남자의 소매를 잡아끄는데 우두둑 소리가 나며 소매가 뜯어졌다.
“아니, 이년이 누구 옷을 찢는 거야? 물어내. 이거 물어내, 이년아!”
남자가 마담의 손을 세차게 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태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 그때였다.
“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태혁이 말하자 타이거 강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이년이 죽을라고 환장했나!”
사내가 마담을 때릴 듯이 팔을 흔들었다.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먼저 나갔던 사내 두 명이 다시 들어왔다.
“뭐여? 여즉 안 나오고 뭐 혀는 겨?”
“이년이 죽을라고 환장했나? 이년이 남의 옷을 찢고 지랄이야.”
남자가 찢어진 소매를 과장되게 흔들어대며 신경질을 부리자 눈썹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마담에게 덤빌 듯이 다가왔다.
“쌍년이 미쳤나 씨발년아, 죽고 잡냐?”
“뭐? 썅년? 씨발년? 너 지금 말 다했어?”
마담도 더는 못 참겠는 모양이었다. 이모나 고모뻘은 충분히 되는 사람에게 쌍욕을 해대다니, 아무리 물장사를 해먹고 산다지만 저런 놈들에게 쌍욕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야, 니가 뭔데 욕을 하고 지랄이야, 이 새끼야!”
마담이 악에 받친 듯이 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씨발년이!”
사내가 팔을 들어 마담을 내리치려는데 태혁이 어느새 다가와 사내의 팔을 낚아채 잡았다.
“어이! 뭐야, 이 새끼는?”
사내가 죽일 듯이 태혁을 쳐다봤다. 향숙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손님 몇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 구경하고 있었다.
“돈 내고 가시죠.”
태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 씨발놈이 죽을라고. 너 죽어 볼래?”
사내가 태혁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태혁이 손을 확 뿌리치자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이 새끼 봐야!”
전라도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덤비는데 태혁이 순식간에 다리를 뻗어 전라도 남자의 가슴팍을 내리찍었다. 전라도 남자가 덤벼들 새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돈 내고 가시죠.”
태혁이 다시 한 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패거리들이 나가떨어져 가슴팍을 싸쥐고 뒹굴고 있는 동료를 쳐다보더니 태혁에게 몰려들어 에워쌌다.
“이 개새끼!”
눈썹에 흉터가 있는 놈이 태혁의 머리를 잡아채려는 듯 팔을 뻗는데 태혁이 그보다 먼저 팔을 움직여 남자의 팔목을 잡아 꺾었고, 놈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찰나 주먹이 힘껏 면상을 갈겼다. 남자의 코에서 피가 툭 터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태혁은 다리와 팔을 뻗어 나머지 놈들의 급소에 일격을 가했다. 한 놈이 일어나서 발악을 하듯 태혁에게 덤벼들었지만 태혁이 놈의 목을 꺾어 젖히며 무릎으로 옆구리를 찍어 버리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며 나뒹굴었다.
태혁은 누군가 또 일어나 덤비는 놈이 없는지 재빨리 쓰러진 놈들을 훑어봤다. 한 놈이 비실거리며 일어나서 태혁에게 주춤거리며 다가오는데 태혁이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입술이 쭉 찢어지며 피가 퍼졌다.
그때서야 태혁의 귀에 사람들의 목소리며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에서 다시 원래대로의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낮은 비명과 중얼거림, 마담이 쌕쌕 몰아쉬는 숨소리도 똑똑하게 들렸다.
“다시는 오지 마. 분명히 말하는데 또다시 나타나면 그땐 내가 죽인다.”
태혁이 씹듯이 말하고는 돌아섰다.
“신고해야지?”
마담이 숨찬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말하는데 태혁은 대답 없이 타이거 강이 있는 자리로 발길을 옮겼다. 쓰러진 놈들이 신고한다는 소리에 악착같이 일어나 기다시피 하며 달아나 버렸다.
“미친놈들, 똥줄이 빠지게 도망가네.”
마담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얘! 숙자야, 소금 뿌려. 재수 없다.”
“알았어요, 언니.”
“미스터 최 아니었으면 큰 봉변당할 뻔했네.”
“그러게요, 언니.”
“손님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마담이 홀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하자 손님들이 괜찮다는 식의 말과 다행이라는 말을 하면서 도망간 놈들에게 욕을 해댔다.
“불구경 하듯 구경만 하구선 이제 와서 무슨 욕이야?”
마담이 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방으로 타이거 강의 운전사인 철진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됐다.”
주위를 둘러보던 철진은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형님.”
철진이 인사를 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형님,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타이거 강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태혁에게 내밀었다.
“땀 닦아라.”
“아닙니다, 형님. 손수건 버립니다.”
“내가 주는 거다. 이걸로 닦아라.”
태혁이 손수건을 받고 타이거 강을 쳐다보며 다시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태혁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타이거 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십니까?”
“음.”
타이거 강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문 쪽으로 우적우적 걸어갔다. 태혁도 타이거 강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철진이 얼른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태혁이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는데 차를 타려던 타이거 강이 지갑에서 하얀 명함을 꺼내 태혁에게 내밀었다.
“내일 두 시에 전화해.”
타이거 강은 그렇게만 말하고 차에 올랐다. 철진이 문을 닫고는 태혁에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 운전석에 올랐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태혁은 타이거 강이 보든 안 보든 다시 한 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태혁은 명함을 손에 꽉 쥐고 멀어지는 차를 끝까지 쳐다봤다.
집으로 들어간 태혁은 싸우고 난 후였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히죽거리며 들어서는 태혁을 보고 태순이 덩달아 기분이 좋은 듯 웃자 태혁이 태순을 끌어안았다.
“누나, 나 기분 좋다.”
“왜?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우리 혁이가 웃을까?”
태순이 태혁의 등을 다독거리며 묻자 태혁은 대답도 없이 싱글거렸다.
“애들은 자?”
“벌써 자지 그럼.”
“오빠가 왔는데 요놈의 꼬맹이들이 다 잔단 말이야?”
태혁이 마루로 올라서며 말하자 태순이 태혁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옆집 사람들도 다 잔다.”
그때 방에서 자던 막내 태영이가 나왔다.
“태영이 왜 일어났어?”
“오줌 마려워서.”
이제 열두 살이 된 태영이가 눈을 끔벅거리며 태혁을 쳐다봤다.
“태영이 오빠한테 와. 오빠가 우리 태영이 좀 안아 보자.”
태혁이 팔을 벌려 태영을 불러도 태영은 멀뚱멀뚱 쳐다볼 뿐 금방 안겨 오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모르고 자라났고 어머니도 가끔씩 밖에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태영도 태혁만큼이나 부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
태영은 아기일 때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 몸이 약한 아이였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겨 다른 식구들도 태영이 아프면 혹시 잘못될 것 같은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는 했다. 태순이건 누구건 간에 잘 안겨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식구도 항상 낯선 사람 보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곤 했고 밥도 혼자 먹는 걸 좋아했고 언니들과 어울려 떠들거나 또래 친구들과도 노는 법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
태혁은 그래서 동생들 중에 태영에게 가장 애착을 느끼고 있었는데 언젠가 태혁이 고등학생일 때 국민학교에 다니던 태영이 백 점을 맞은 시험지를 혼자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다가와 태혁에게 내밀고는 지금처럼 멀뚱멀뚱 태혁을 쳐다본 적이 있었다. 태혁이 백 점 맞은 시험지를 보고 태영을 안아 엉덩이를 두들겨 주자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웃는 얼굴로 태혁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었다.
태혁은 가끔씩 그때를 떠올렸다. 아니, 떠올린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각이 났다. 백지장처럼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던 하얀 얼굴과 작대기 같은 팔로 태혁의 목을 감고 쌔액쌕 숨을 내쉬던 그때 태영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열두 살인데도 아직도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작은 키에 여전히 몸이 바짝 말라 있는 태영이 태혁은 가엾고 안타까워서 특별히 사랑했다.
“오빠가 안아 준다니까. 태영아, 이리 와.”
태혁이 재촉하자 태순의 얼굴을 보던 태영이 쭈뼛거리며 태혁에게 다가가서 가슴에 안겨들었다. 긴장한 듯 몸이 굳어 있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어?”
“매일 보는데 뭐.”
태영이 실처럼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영이 너 잘 때 꼭 들여다보고 학교 가.”
태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랬어?”
태혁이 태영을 더욱 꼭 껴안았다.
“나······ 오줌 마려.”
“어, 그래. 오줌눠야지.”
태혁이 태영을 놔주자 태영이 다시 멀건 얼굴로 쳐다봤다.
“너 화장실 같이 가 줘라. 무서워서 밤엔 혼자 못 가.”
태순이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태혁이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 오빠가 화장실 데리고 가지.”
태혁이 태영의 손을 잡자 태영이 따라나섰다. 화장실에 간 태혁이 문을 열고 서 있자 태영이 태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돌아서 있어, 오빠. 보지 마.”
태영이 안으로 들어가며 다시 확인하듯 쳐다보자 태혁이 싱긋 웃었다.
“태영이 잠지 볼까 봐 그러냐?”
“씨······ 보지 마.”
“알았어.”
태혁이 돌아서자 태영이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봤다.
“오빠 돌아본다.”
“안 돼.”
태영이 울 듯한 목소리로 징징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안 볼게.”
태혁이 기분 좋게 웃자 태영은 씨 하고 중얼거린 후 바지를 올리고 나왔다. 태혁이 태영을 안고 마루로 다시 올라갔다.
“다 큰 애를 왜 안고 다니니?”
태순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태혁이 태영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막내의 특권이지 뭐.”
태혁이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자 태영은 태혁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후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말했다.
“오빠, 잘 자.”
“그래.”
태영은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뭐가 그렇게 좋으니?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나 내일 타이거 강 만나러 가.”
“조직이라는······ 그 건달이라는 사람 말이니?”
태순이 갑자기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물었다.
“응. 내일 전화하고 오랬어.”
“왜?”
“내가 좋은 모양이야, 그분.”
“혁아.”
태순이 태혁에게 다가앉았다. 태순도 타이거 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제쳐두고서라도 자신에게만큼은 모든 걸 다 얘기하는 태혁이 타이거 강에 대한 얘기를 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했기 때문에 태순은 그 사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태순은 그런 타이거 강을 속으로 좀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태혁이 타이거 강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왜 갑자기 오래?”
“오늘 다방에서 동네 양아치 놈들을 박살내 버렸거든. 그런데 그때 타이거 강이 보고 계셨거든. 가시다가 명함을 주시더라구, 내일 전화하라고.”
태혁이 양말을 벗어 걸레통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가지 마.”
태순이 양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태혁이 태순을 홱 쳐다봤다. 태순의 일그러진 얼굴에 태혁이 좀 당황한 듯이 입을 열었다.
“누나, 난 그저······.”
“가지 마. 한 번 가면 두 번 가게 되고 그러면 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까 아예 가지 마. 누나가 니 기질을 알아. 그래서 항상 걱정했잖아. 너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운동하는 거 그때 누나 안 말렸어. 남자가 어디 나가서 두들겨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 때려 주는 게 더 낫다 싶어서······ 그런데 너 많이 싸우고 했잖아. 싸운 게 아니라, 그래 너 누가 못된 짓 하는 거 그거 봐주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혼도 많이 내주고 그런 것도 알아······.”
“누나, 내 말 좀 들어 봐.”
태혁이 태순의 말을 잘랐다.
“아니야, 누나 말 들어. 누난 다른 거 가지고는 너 걱정 안 해. 너 남자답구 입도 무겁구 그리구 뭐라 그럴까······ 그래, 정의롭구 그런 거 좋아. 누나도 그런 거 참 좋아해. 그런데 너 과격하잖아. 너두 알잖아. 네가 얼마나 과격하고······ 타이거 강이라는 사람을 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좋아한다는 거 잘 알아. 네 성격하고도 맞을 거야. 하지만 태혁아, 네가 말했듯이 그 사람 너무나 무시무시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 곳으로 너를 가게 내버려둬야 되겠니? 아는데 어떻게 내버려두겠니?”
“놀러 가는 거야, 인사드리러.”
“다방에서 매일 본다며, 그런데 뭘 또 인사를 드리러 간단 말이니?”
태혁은 태순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 보았지만 태순은 강경했다.
“태혁아, 누난 네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했으면 좋겠어.”
태순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저 인사하러 가는 거야. 나한테 잘해 주시니까.”
“아니, 전부터 얘기하고 싶었어. 나 그런 쪽에 있는 사람들을 네가 만나는 거 싫다. 네가 내 동생이 아니면 왜 이런 말을 하겠니. 누나 말 들을 거지?”
태순이 애처로울 정도로 슬픈 눈으로 태혁을 바라봤다.
“저어······.”
태혁은 머뭇거리며 태순의 눈치를 살폈다.
“태혁아.”
태순이 재촉하듯 좀더 다가앉았다.
“알았어.”
태혁은 대답은 했지만 죄책감이 느껴졌다. 내일 전화해서 타이거 강을 만나러 갈 것이 분명했지만 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슬펐다.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그래, 혁인 누나한테 거짓말한 적 없었으니까.”
태순이 안심이 된 듯이 웃었다. 태혁은 가슴 한구석이 좀 찔린 듯 움찔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말을 믿어 버리는 것이 가슴 아팠다.
“태혁아?”
“왜?”
“그 다방······ 그만두면 안 되겠니?”
“뭐?”
태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순을 쳐다봤다.
“왜 그만둬······ 재밌는데······.”
태혁은 말꼬리를 흐렸다.
“거기 계속 나가면 그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보게 되잖아. 난 네가 그 사람이랑 계속 부딪히는 거 싫다.”
태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 그분 안 만나면 되지 왜 잘 다니는 직장까지 그만둬. 난 그러고 싶지 않아. 걱정 마,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태혁이 태순의 팔을 쓰다듬으며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일도 당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사람이 너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위험한 건 확실하잖아. 안 그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쉽게 쉽게 생각해.”
태혁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가슴이 더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사람 그렇게 잘 나간다면서 왜 그런 변두리 다방엘 다 왔다니?”
태순이 불쑥 물었다.
“다방 근처 회사에 누굴 만나러 왔다가 들렀대.”
“누굴 만나러?”
“그야 나도 모르지. 내가 그것까지 알겠어?”
태혁은 타이거 강이 태순에게 더 불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
“나 잘래, 누나.”
태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 출출하진 않니?”
“괜찮아.”
“그래.”
“잘 자, 누나.”
태혁은 얼른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불이 펴져 있는 자리에 누우며 태혁은 타이거 강과 태순의 말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머리가 헝클어져 터질 것 같았다. 태순에게 괜히 말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되기도 했다.
‘입이 더 무거워야겠군······.’
태혁은 자신을 책망했다. 태혁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타이거 강이 쥐여 준 명함을 끄집어내 들여다봤다. 태혁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혈관 깊숙이 빽빽하게 차오르는 혈기를 눌러 버릴 수가 없었다.
반드시 조직이라는 세계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막연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좀더 이색적인 삶을 원했을 뿐이었다. 어떤 세계라고 딱 꼬집어 놓은 곳이 없었던 터라 정말 막연하게 기회를 기다리고 열망하고 있었을 때 타이거 강이 나타났고 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직이라는 세계는 태혁의 심장을 달궈 놓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태혁은 어릴 때 어른들이 주고받던 얘기들이 떠올랐다. 김두한의 주먹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며 그래서 일본 놈들조차도 김또깡이라는 이름 석 자만 들으면 바들바들 떨었다는 얘기를 얼핏 지나가는 말로 듣고 태혁은 김두한이라는 사람을, 아니 김두한이라는 건달을 연모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었고 김두한이라는 건달처럼 억세고 쇳덩이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센 주먹을 가지고 싶어서 벽에다 주먹을 내지르곤 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태혁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도저히 놓칠 수가 없는 기회였다. 가슴에서 참을 수 없는 조바심이 차오르자 태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어찌어찌 살다가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밑에 딸린 식솔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별별 직장을 전전하고 쥐꼬리만한 돈을 그것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몇십 년 뒤에 집 장만하고 별볼일없이 늙어 시들어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순 없다. 안 돼! 그건 안 돼!’
태혁은 답답함과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3
태혁이 멈춰선 곳은 명동에서도 제일 번화한 중심지였다. 오른쪽에는 샤데이호텔이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위로 멀지 않은 곳에 옐로하우스나 실버벨, 아마존과 같은 쟁쟁한 클럽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샤데이호텔은 간판만 쳐다봐도 기가 질리는 곳이었고 아마존이나 옐로하우스 같은 곳에서 언젠가는 꼭 한번 퍼지게 술을 마시며 쇼를 구경하고 여자를 만지는 것이 꿈인 사람들도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고급스럽게 보였고 똑같은 사람인데도 그들의 표정은 어쩐지 넉넉해 보이고 부유해 보였으며 부티 나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듯했다. 친구들과 자주 얼쩡거리는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느낌이 특이하고 다른 것 같았다. 따지고 들면 그다지 비싼 옷들도 아닐 텐데 이 명동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걸친 옷은 괜히 비싸 보이고 걸어다닐 때마다 쩔렁거리며 돈 소리가 나는 듯했다.
태혁은 위축되는 느낌에 일부러 과장되게 어깨에 힘을 주면서 주위를 휙 둘러봤다. 사람들의 활기찬 발걸음에 맞춰 자신도 한걸음 한걸음을 기운차게 내디뎠다. 태혁은 자신이 명동 한복판에서 이토록 활기찬 발걸음으로 타이거 강을 만나러 간다는 것에 조금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명동에 몸을 떨어뜨린 태혁은 타이거 강이 건네준 명함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돌리며 왼쪽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비서라고 생각되는 여자가 타이거 강에게 전화를 돌려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태혁은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긴장감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태혁의 곤두선 신경을 감지라도 한 듯 타이거 강은 너무나 친숙한 억양으로 약속장소를 알려 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가늘게 떨리던 손가락 끝을 비비며 태혁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담배를 한자리에서 다섯 개피나 피워댔다.
타이거 강의 사무실이 들어앉아 있는 빌딩 주위를 열세 번이나 돌며 약속시간이 되길 기다렸지만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흐르는지 애가 탈 정도였다. 꽤 흘렀다 싶어서 시계를 들여다보면 겨우 5분이나 6분이 지났을 정도로 시간은 비둘기호를 탄 것처럼 1분이 지나는 데 온종일이 걸리는 것 같았다.
‘긴장하지 마, 최태혁. 흥분도 하지 말자. 난 최태혁이다, 최태혁.’
태혁은 자기 자신에게 무수한 주문을 걸었다.
‘난 최태혁이다. 최태혁은 잘할 수 있다. 잘해 낼 수 있다.’
태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태혁은 긴장하고 조바심치는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태혁은 어깨를 쫙 펴면서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내 몫이다, 최태혁. 똑똑히 기억해라.’
태혁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싱긋 미소를 띠었다. 태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린 후 빌딩으로 빨려들어가듯 들어갔다.
태혁이 여자에게 안내되어진 곳은 복도 끝에 자리잡은 방이었다. 한 층에 고작 방이 세 개밖에 없었지만 태혁이 맨 먼저 문에 붙여진 간판을 보고 들어간 사무실은 굉장할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건달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태혁이 상상했던 곳과는 너무도 달랐다. 보통 회사의 평범한 월급쟁이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자리에 앉아 뭔가 열심히 계산을 하거나 서류를 작성하는 등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구석진 자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두 명이 주판을 퉁기고 있었다. 조직의 대부가 있을 만한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방에서처럼 떡대 같은 덩치들이 병풍처럼 막아 서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직의 냄새가 강렬하게 풍기는 인상 사나운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거나 하는 종류의 분위기를 상상했었는데 상상은 완전히 망상이었고 그와는 달리 너무도 평범한 사무실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건달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없었다. 조직이라는 검고 매캐한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다.
태혁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것 같고 그 때문에 조금 당황하고 의아했지만 여기 건달은 없느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태혁을 안내하는 여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태혁을 안내한 여자가 복도 끝에 달린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문을 열어 주며 들어가라고 했다. 태혁이 들어가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여자는 부드럽게 말하고 나서 문을 닫았다.
태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가죽으로 된 소파여서 그런지 앉을 때 방귀 소리 같은 가죽 특유의 접히는 소리가 났다. 방이 큰데다 아무도 없어서 가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가죽으로 된 소파도 놀라웠지만 다른 가구들도 모두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너무나 화려해서 태혁은 입이 벌어질 것 같았다. 손질이 잘돼 번들번들거리는 책상이며 생전처음 보는 큰 책상의자며 한쪽 벽을 다 차지한 책장과 그 속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이며 모두가 인상적이었다. 비싸게 생각되는 도자기들이 진열장에 잘 진열되어 있었고 벽에 붙은 그림이나 무슨 공사현장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낯이 많이 익다 싶어 들여다보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고 달려가는 말의 다리도 부러뜨린다는 청와대의 막강한 세력가와 함께 찍은 타이거 강의 사진이 여러 장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었다.
태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랏일을 보는 사람과 함께 사진까지 찍을 정도로 타이거 강의 힘이 거대한지 태혁은 단순한 생각에 조금 위축되는 것 같았다. 태혁이 이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꼼꼼하게 방안을 훑어보는데 문이 열리며 좀전에 태혁을 안내했던 여자가 커피를 공손하게 받쳐들고 들어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때 출입문 맞은편에 있는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태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맨 마지막에 나오던 타이거 강이 태혁을 보더니 손을 들어 보였다. 태혁도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이 타이거 강에게 인사를 한 후 방에서 모두 나가자 타이거 강이 태혁이 서 있는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앉지.”
“예, 형님.”
태혁은 커피잔이 놓인 앞자리에 앉았다.
“점심은?”
“먹었습니다, 형님.”
태혁이 조금 웃으며 대답하자 타이거 강도 웃으며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타이거 강이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누르자 곧바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예, 사장님?”
“1시간 동안 시간 비워.”
“예, 사장님.”
타이거 강이 인터폰에서 손을 떼고 태혁을 바라봤다. 태혁은 처음 보는 인터폰이 신기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타이거 강을 쳐다봤다.
“자네, 외아들이라 했나?”
“예, 형님.”
타이거 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 탁자 위에 있는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태혁이 얼른 불을 붙여 주자 타이거 강이 깊이 빨아들이고는 태혁에게도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아닙니다, 형님. 저도 그런 예의는 압니다.”
태혁이 유순한 목소리로 말하자 타이거 강이 싱긋 웃으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동안 많이 배웠군.”
타이거 강은 천천히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우리 세계에선 말이야, 형님에게 대한 예의는 목숨 같은 거야. 그건 조직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거든. 밑거름 같은 거지. 형님을 우습게보면 그때부터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야. 아니면 처형당하는 거다.”
타이거 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위에서 하는 얘기는 무조건 복종해야 해. 그게 조직을 버티게 하는 첫번째지. 형님의 명령을 거부하면 살아 남을 수 없어.”
타이거 강이 설명조로 말했고 태혁은 상당히 거창하고 의미가 깊은 말처럼 들려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우두머리가 쉬워 보이나?”
타이거 강이 갑자기 불쑥 물었다.
“아닙니다, 형님.”
태혁의 목소리에 어느덧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이 어긋났을 때 형님 대신 밑에 있는 애들이 대신 감방에 들어가거나 교수대에 목을 맬 때도 있어. 아직 목을 매단 적은 없지만.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야. 어떤 생명체건 심장이 뛰고 몸에 피가 돌고 있는 것들은 모가지가 달아나면 끝이거든. 조직도 마찬가지야. 우두머리의 모가지가 잘리면 끝인 거야. 조직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면 돼.”
타이거 강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태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람은 피의 무게를 느끼지 못해. 몸 어느 구석이건 조금 긁히기만 해도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사람은 피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살지. 피의 무게를 느낄 땐 딱 한 번이야. 바로 죽기 직전이지. 숨이 넘어가기 바로 직전 말이야. 그런데 죽을 때가 아니라도 피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 있어. 바로 우두머리지.”
태혁은 타이거 강의 말에 갑자기 소름이 돋는 듯했다.
“칼보다도 더 냉정해야 할 때가 있어. 아니, 거의 생애를 그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기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말아야 해. 가벼워서는 안 되니까. 애들이 다치거나 죽어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돼. 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지. 애들의 팔다리가 잘리거나 하면 내 팔이나 다리가 절단되는 통증을 느껴. 이해하겠나?”
“예, 형님.”
태혁은 지금까지 타이거 강의 성격을 거의 다 알았다 생각했던 것을 완전히 뭉개야 한다고 느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하고 있었지만 타이거 강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고뇌와 복잡한 슬픔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내가 잘못 내린 판단으로 애들을 다치게 하는 수도 있지. 그리고 무모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어린애들을 죽게 하는 수도 있어. 하지만 우두머리는 그런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밀어 놓을 줄 알아야 해. 틀리더라도 애들의 입을 다물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우두머리가 되는 거야.”
태혁은 타이거 강이 왜 저렇게 깊은 내용까지 뱉어내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불러 놓고 무슨 사설이 저토록 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의 생리야.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내가 뒤집히는 거다. 저놈의 이빨에 내 목줄이 물리는 거지.”
타이거 강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태혁은 타이거 강의 그런 번득이고 날카로운 눈빛이 좋았다.
“자네······ 내 밑에 들어오겠나?”
타이거 강이 태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태혁은 애가 타게 기다리던 제의였는데 순간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태순의 얼굴과 향숙의 얼굴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품고 있는 애착을, 그러니까 가족이나 다른 무엇이건 간에 그런 것들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버리고 시작해야 해.”
태혁은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태혁은 타이거 강이 다방에 나타났던 그때를 얼른 떠올렸다. 무슨 이유인지 뚜렷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타이거 강이 태혁의 앞에 나타났고 거대한 조직의 대부가 보는 눈앞에서 동네 양아치 몇을 때려눕히게 된 것이, 어쩌면 그런 유치한 우연의 연속이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혁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으로 타이거 강을 쳐다봤다. 타이거 강이 신청한 노래를 재빨리 틀어 준 것과 그 다음부터 타이거 강이 나타나면 서둘러 그 노래로 갈아 끼워 준 것밖에는 없었다. 타이거 강에게 접근하고 싶었던 열망은 순전히 태혁 자신의 몫이었기 때문에 타이거 강이 왜 이토록 태혁에게 호의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호의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볼 수가 없었다.
태혁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태혁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타이거 강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표정 없는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최태혁, 자신 있나?’
태혁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 수 있겠나? 그래, 난 최태혁이다.’
태혁은 어금니를 꽉 틀어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완전히 결심이 선 것은 아니었지만 이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가 없었다. 타이거 강이 태혁을 올려다봤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태혁이 허리를 깊숙이 꺾어 그 자세대로 가만히 있었다.
“무서운 곳이다.”
“예, 형님.”
“다스릴 수 있을 거야.”
타이거 강의 알 수 없는 말에 또다시 혼란이 일었지만 태혁은 허리를 꺾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됐다.”
태혁은 허리를 펴고 타이거 강을 쳐다봤다.
조직에 들어온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태혁은 벌써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타이거 강은 태혁보다 서너 살이나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시켜 주며 친구로 어울리게 만들었다. 조직에 들어온 지 2, 3년은 되어 형님들로 모셔야 할 사람들과 짝을 지어 주며 그들에게 말투나 몸짓 같은 것을 배우도록 태혁에게 주문하기도 했고 타이거 강의 차에 태워 자신이 관할하는 구역을 돌아다니며 태혁이 사람들을 익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조직원들은 태혁에 대한 타이거 강의 각별함에 술렁거리는 기색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결코 거역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타이거 강의 그러한 각별함에 태혁은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타이거 강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도 했다. 짝이 지어진 어깨들의 직책은 서울 전역에 흩어져 조직의 일을 수행하는 각조의 조장인 행동대장들이었다.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조가 분산되어 있었고 그 조의 우두머리는 수십 명이었으며 그 밑에 딸려 있는 막둥이(조직 사람)들은 스무 명에서 많게는 쉰 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조직의 식구들을 한자리에 다 모아 놓으면 천 명이 훨씬 넘는 머릿수였고 그 머릿수들은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이 조직의 일을 처리하며 지탱하고 있었다.
조직의 자금은 거의가 유흥가를 돌며 슈킹(돈을 뜯어내는 것)을 하거나 다른 조직의 클럽을 접수(빼앗는 것)해서 직접 운영하여 얻은 이익금으로 만들어졌다. 조직의 본거지가 명동인 만큼 명동을 둘러치고 있는 대원의 수가 특히나 많았다. 타이거 강은 자신이 관여하거나 운영하는 곳은 빼놓지 않고 태혁에게 둘러보도록 명령했는데 그 때문에 태혁은 하루에 서너 군데를 한꺼번에 돌아다녀야 했다. 태혁에게는 생소한 세계였고 그 때문에 조직이라는 곳에서 나는 매력적인 냄새에 순식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타이거 강은 태혁의 밑으로 서른 명의 대원을 밀어넣어 주며 더 필요하면 직접 구해 보라는 말을 했다. 타이거 강의 눈 주위에 파인 주름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태혁이 타이거 강과 함께 클럽에 들어섰을 때는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대부가 행차한다는 연락을 미리 받아서인지 클럽 입구에는 수십 명의 어깨들이 줄을 지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서 타이거 강과 함께 내린 태혁은 다시 한 번 우쭐함을 느꼈다. 대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는 것도 우월감에 빠지게 했고 줄을 지어 선 수십 명의 어깨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할 때는 타이거 강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주인공 같아 끓어오르는 흥분을 누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들어와.”
타이거 강이 클럽 앞에 멈춰 서서 인사를 하는데 태혁에게 나지막하게 말하고 앞장서서 들어갔다. 타이거 강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간 태혁은 사무실에 우르르 따라 들어온 조직의 대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후 타이거 강 뒤편에 조용히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먼저 인사를 나누었던 선배도 있었고 낯선 사람도 있었다. 태혁은 목뼈를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떤 놈이냐?”
대부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억양이 없었다. 화가 났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슬픈지 어떤 느낌도 받을 수 없는 잔뜩 메마르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조적수라는 놈입니다. 전라도에서 타고 올라온 놈인데 기세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클럽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석이 대답을 했다.
“어쩌다가 맥없이 당한 거야? 불러모을 애들이 없었나?”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당했답니다.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여서 더 이상 불러모을 수도 없었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김기석이 고개를 숙였다.
“책임자가 누구냐?”
“성탭니다.”
“얼마나 다쳤냐?”
“성태는 지금 좀 위험한 상태입니다. 열네 명은 중상이고 나머진 견딜 만합니다.”
“잃은 애들은?”
“어제 두 명 장사 치렀습니다.”
어금니를 꽉 다물었는지 타이거 강의 턱 근육이 무섭게 실룩거렸다.
“부모님에게는 잘 설명했나?”
“한 애는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한 애는 어머님만 계십니다.”
“어머님께 부족하지 않게 해드려라.”
“예.”
타이거 강은 다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태혁이 앉아라.”
타이거 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예, 형님.”
태혁은 사람들이 비켜 주는 자리에 공손하게 앉았다.
“열흘 전에 클럽 두 개를 잃었다. 조적수라는 놈이야. 해결해.”
타이거 강의 말은 단호했고 섬뜩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예, 형님.”
태혁은 자신이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서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작정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놈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 클럽 위치도 상세하게 사전조사하고 나머진 혼자 해결해. 애들이 모자라면 더 끌어 모으고. 빠를수록 좋다. 단단히 혼을 내놔. 조적수는 내 앞에 살려서 데려다 놔.”
타이거 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들 따라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타이거 강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했다.
“실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예, 형님.”
타이거 강은 빠르게 나가 버렸다. 태혁의 대답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타이거 강을 뒤따라 나간 태혁과 조직원들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제 막 조직생활을 하는 애송이에겐 분명 벅찬 명령인데 누구도 형님이 한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태혁은 가슴을 가르며 올라오는 알 수 없는 짜릿함에 으드득 이빨을 갈았다. 타이거 강을 배웅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태혁에게 김기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못하겠으면 지금 말해라.”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형님.”
태혁이 허리를 숙여 대답하자 잠시 태혁을 노려보던 김기석이 고개를 끄덕거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태혁은 어금니를 꽉 다물고 숙소로 돌아왔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서른 명의 대원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왼팔로 지목한 개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고중철이 노크를 한 후 방으로 들어섰다. 다리 사이가 유난히 벌어져 별명이 개다리였다.
“부르셨습니꺼, 행님.”
밖에서 일을 보다가 태혁의 호출에 급하게 숙소로 돌아온 중철이 먼저 도착해 인사를 했다. 태혁은 경상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중철을 마음에 들어했다.
“한수는?”
“바로 올 깁니더. 만나서 같이 오다 보매는 늦을까 봐예 먼저 왔습니더, 행님.”
태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이를 숨기기 위해 기른 수염이 제법 까칠까칠하게 자라나 있었다.
“애들을 더 모아야겠다.”
“예? 얼마나예?”
“많을수록 좋다. 전쟁 땐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막강한 군사가 첫째니까.”
“전쟁 났습니꺼, 행님?”
“그렇지. 전쟁은 오래 끌다 보면 누가 먼저 지치냐가 돼 버니까 그러면 재미없어지지.”
“맞아예, 그라면 배리 삐는 기라예. 후딱 끝내고 통일 해야지예. 관운장도 뜨거분 술이 식기 전에 목을 쳐 죽이고 와서 후후 불어 가면서 묵었다 안 합니꺼. 얼매나 뜨거분 술이었는가 와 그리 식지도 않았는지 모르겠어예, 행님.”
중철이 실실 웃으며 말하는데 한수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한수가 인사를 했다. 회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한수의 눈빛은 정말 싸늘하고 섬뜩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한수를 처음 만났을 때 한수의 눈빛에 태혁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앉아라.”
“예, 형님.”
한수가 중철의 옆자리에 앉았다. 넉살이 좋은 중철에 비해 한수는 여간해서는 가까워지지 않을 것처럼 쌀쌀맞은 구석이 있었다. 말수도 극히 적은 편이었고 건달답지 않게 술은 일체 입에 대지 않았으며 조직 안에서 소문이 났을 정도로 잠이 적은 사내였다. 잠을 너무 자지 않아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좀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이제 스물세 살이었고 짧은 머리에 중철처럼 눈빛이 사납게 살아 있었다.
“중철이한테도 말했지만 애들을 더 모아야겠다. 나도 직접 나서서 찾겠지만 너희 두 사람이 좀 뛰어 줘야겠다. 어떤 애들이어야 하는지는 두 사람이 더 잘 알겠지만 어중간하면 곤란하다.”
“특별히 더 주문하실 게 있으십니까?”
한수가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를 욱신거리며 물었다.
“독한 놈으로 구해라.”
“예, 형님.”
한수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고서는 대답했다.
“빠를수록 좋다.”
“예, 형님.”
한수가 대답하고 나자 중철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수를 쳐다봤다.
“회칼, 니가 전라도 갔다올래? 그쪽 아들이 쪼매 독하다 아이가? 내는 경상도 놈이라서 그쪽 아들하고 잘 안 맞거든. 우짤래?”
“그래, 그러지.”
한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들 운동 좀 시키야겠제? 기집 질도 못하그로 잡아 놓고. 일 눈앞에 놔 놓고 기집질해 뿌면 다리가 해들거리가 나가리돼 뿐다. 안 그랍니까, 행님.”
중철의 말에 태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 묵고 가시나 붙잡고 자빠지는 놈들은 칵 조지 삔다 하고 일 끝내 놓고 술 좀 믹이면 되겠지예, 행님.”
“그래야지.”
태혁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 지금 간다 캤나?”
“그래. 형님,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이틀이면 됩니다.”
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중철도 얼른 일어났다.
“피곤할 텐데 수고해라.”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한수가 태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방에서 나갔다.
“저 자슥이 원래 저리 빠릿빠릿하거든예. 뭐라 입을 몬 여는 기라예. 우째나 빠른지 오죽하믄 토까이 그 짓 하는 거만 빠르다 하겠어예. 생전에 가시나 한번 안 데불고 자고 신기한 놈이라예, 행님.”
중철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자 태혁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180cm가 넘는 키에 100kg이 넘는 거구의 중철에 비해 한수는 중철과 거의 같은 키면서도 호리호리했다.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서 반병신을 만들어 놓는 중철과 지능적으로 급소를 골라 내리찍어 상처를 남기지 않고 쓰러뜨리는 한수의 이력을 조직으로부터 전해 듣고 나서 두 사람을 만났을 때 태혁은 묘한 기분으로 두 사람에게 끌렸었다.
중철의 힘은 골리앗에 비교할 만큼 소문이 나 있었다. 혼자서 대여섯 명 정도는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장사였다. 그에 비해 한수의 스타일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허점이 눈에 들어오는 대로 순식간에 이곳저곳을 습격했고 급소를 찾아 찌를 줄 아는 머리가 있었으며 동작이 아주 빨랐다. 이렇게 상반된 두 사람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징그러울 정도로 겁이 없다는 것이다. 건달이 겁이 많다면 그건 쓸모 없는 기구에 불과했다.
건달은 무엇보다도 담력이 커야 했다. 담력이라면 아마도 중철과 한수를 따라올 자는 없을 듯했다. 전에 두 사람을 데리고 있던 조장이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내줬을 정도로 두 사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고 태혁에게 내준 뒤에도 조장이 다시 되찾길 희망하는 의사를 타이거 강에게 전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열 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혁에게는 행운 같은 동생들이었다.
“나가보겠습니다, 행님.”
중철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중철이 나간 후 자리에 누운 태혁은 태순을 떠올렸다. 잘 있다는 편지를 한수를 시켜 보낸 것이 이틀 전이었다. 중철보다는 한수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아 한수를 보내 놓고 태혁은 좀 초조해했었다. 공장에 취직했다는 거짓말을 태순이 그대로 믿어 줄지가 의문이었다. 한수가 도착해서 내민 것은 몇 가지의 반찬이 담겨진 보따리였다.
“믿더냐?”
태혁이 좀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 보따리하고 편지만 주셨습니다.”
한수가 편지를 건네주었다. 태혁은 편지를 펼쳐보았다. 편지에는 단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태혁아, 집으로 돌아와라.>
태혁은 잠자코 편지를 접어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담배를 입에 가져다 물었다. 한수가 재빨리 불을 붙여 주었다.
“나가보겠습니다, 형님.”
태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한수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태혁은 한수가 가지고 온 보따리를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누나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도 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태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길은 정해졌다. 흔들리지 말자.’
태혁은 자신의 머리에 계속해서 세뇌시켰다. 이제 와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도망가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태혁은 누나건 향숙이건 모든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일단 냉정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한수와 중철은 태혁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각자가 맡은 구역에서 불러 모은 아이들의 눈빛은 며칠을 굶은 살쾡이 새끼처럼 사납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숙소인 여관 옆에 붙은 건물을 빌려 사무실로 쓰고 있던 태혁은 자신의 사무실 밖에서 성난 짐승처럼 눈을 번득이고 서 있는 아이들을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철과 한수가 태혁의 뒤편에 서서 태혁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몇 명이냐?”
“스물 둘입니다.”
“뭐 하던 애들이냐?”
“거의가 뒷골목에서 놀던 애들입니다. 운동하던 애들도 있고 쓸 만합니다, 형님.”
“음.”
태혁이 다시 한 번 아이들을 쳐다봤다.
“마음에 드십니까?”
한수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태혁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운동은 누가 시킬 건지 정하고 연장 다루는 법을 빨리 가르치도록 해라. 시간이 없다.”
“예, 행님.”
중철이 힘차게 대답한 후 스물두 명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갔다.
“인자 바로 큰행님이 나오실 낀데 느그들 비리비리하이 빙신처럼 하면 아가리 찢어질 줄 알아라이. 나오시면 딱 서 가꼬 허리 90도로 팍 꺾어 가꼬 인사해야 된다이. 아까 내가 한 말 안 잊아 뿌째?”
“예, 형님.”
중철이 딱 버티고 서서 억센 경상도 말로 소리치듯 말하자 스물두 명이 고함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 한수가 먼저 나와 문을 열자 태혁이 뒤따라 나왔다.
“인사드리라, 큰행님이시다.”
중철이 사내들에게 눈짓을 하자 모두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사내들이 발악에 가까운 소리로 인사를 했다.
“음.”
태혁이 한명 한명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리 들었겠지만 곧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 시간이 없다. 다들 단단히 무장하도록. 대충할 생각을 가지고 온 놈들은 지금 나가도 상관없다.”
태혁의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 온 이상 대충은 있을 수 없다. 알아들었나?”
“예, 형님!”
“오늘은 이쯤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 중철아.”
“예, 형님.”
“새로 들어온 애들 다른 애들한테도 인사시키고 잘 지내도록 단도리해라.”
“예, 행님.”
“운동 철저히 해라. 실수가 용납 안 되는 전쟁이니까.”
태혁이 사내들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야, 씨발놈들아. 대답 안 하나?”
태혁의 말에 사내들이 대답이 없자 중철이 사내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예, 형님. 잘 알겠습니다!”
사내들이 다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중철이는 애들 데리고 가서 시작하고 한수는 따라 들어오너라.”
“예, 형님.”
태혁이 한수와 함께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뒤에 있던 사내들이 다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사무실로 들어온 태혁이 담배를 물자 한수가 불을 붙여 주었다.
“세 개 조로 나눠야겠다. 한 조는 놈들의 숙소로 가고 한 조는 사무실로 가고 한 조는 대기해 있다가 조적수가 들어가는 곳에 쳐들어가야겠어. 애들 적당히 섞어라. 일 잘하는 애들이 너무 한쪽으로 몰리지 않도록.”
“예, 형님.”
“중철이는 숙소로 보내. 사무실에 보낼 만한 애가 있나?”
“덕배가 좋겠습니다. 힘이 장삽니다.”
“중철이말고 덩치 큰 놈은 못 본 것 같은데.”
“중철이만큼 몸도 좋고 키가 더 큽니다. 뒤쪽에 있어서 잘 못 보신 모양입니다, 형님.”
“일일이 보진 못했으니까. 그래, 좋다. 그렇게 하고 조적수가 움직이는 곳으로는 한수가 나와 가자.”
“형님이 가십니까?”
한수가 좀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형님은 계십시오.”
“아니, 내가 직접 하겠다.”
“예, 형님.”
한수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조적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적수를 덮치는 시간에 한꺼번에 세 개 조가 움직이도록 하고 조적수 애들 중에 원한다면 쓸 만한 애들은 흡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라.”
“예, 형님. 덕배 올려보내겠습니다.”
“그래.”
한수가 나가자 태혁은 담배를 비벼 끄며 달력을 봤다. 열흘 후가 크리스마스였다. 태혁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작업날로 잡으며 언뜻 향숙을 떠올렸다가 지워 버렸다. 여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혁이 새 담배를 입에 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박덕뱁니다, 형님.”
“들어와라.”
덕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한 후 문을 닫았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그래, 덕배냐?”
“예, 형님.”
태혁은 덕배를 잠시 동안 쳐다보며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키는 백구십이 넘어 보였고 덩치도 중철과 거의 맞먹었다. 얼굴 전체를 여드름이 덮어 새빨갛게 익어 있었고 여드름을 뜯어서 그런지 푹푹 파인 자국이 많았다. 눈매가 아주 고약해서 보통 사람들이 보면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인정머리 없이 보이는 아무렇게나 생긴 사내였다. 이마가 얼마나 좁은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고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하게 선 머리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 맞게 생긴 얼굴이었다.
“무슨 운동 했나?”
“유도 했습니다, 형님.”
“고향은 어디냐?”
“충청돕니다, 형님.”
“몸이 아주 좋구나.”
태혁이 미소를 띠며 말하자 덕배가 씩 웃었다.
“자슥들이 만날 놀려유, 형님. 덩치는 곰만한디 이마는 귓구녕만큼 좁아서 소갈머리가 젬병이만할 거라구유, 형님.”
어눌한 덕배의 말씨가 태혁을 웃게 만들었다.
“그래, 한수한테 얘기 들었냐?”
“예, 형님. 맽겨만 주셔유. 깨끗허게 청소허겄습니다, 형님.”
“사투리가 심하구나.”
태혁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덕배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죄송헙니다, 형님. 안즉 사투리를 못 고쳤습니다.”
“괜찮다, 편하게 말해라. 난 상관없다.”
“감사헙니다, 형님.”
덕배가 울퉁불퉁한 얼굴로 실룩거리며 웃자 천진난만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뜩이나 작은 눈이 더 작게 찢어지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여유가 없다. 애들 운동시키는 거 도와 줘라. 네가 맡은 조는 철저히 해라. 실수는 있을 수 없다.”
“예, 형님.”
“됐다.”
덕배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태혁은 다시 달력으로 시선을 돌리며 12월 24일을 노려보다가 뿌드득 소리가 나게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조적수 언저리에 심어 놓은 제비가 중철에게 알려 온 시간은 저녁 아홉 시 정각이었다. 조적수가 막 일송정이라는 요정으로 들어갔다는 제비의 음성은 떨리기까지 했다.
“야, 이 새끼야. 와 바들바들 떨고 있노? 이 새끼 오줌 찌리겠네.”
중철이 한마디 툭 내뱉고 수화기를 소리 나게 쾅 하고 내려놓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태혁을 쳐다봤다.
“행님, 가입시더. 요정으로 기들어갔는가 베예.”
“어디라냐?”
“요 근처 일송정이랍니다. 얼매 안 멀어예. 이 새끼가 죽여 달라고 알아서 착착 골라 달라붙네예.”
중철이 말을 마치고는 손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고 나서 몽둥이를 손에 꽉 끼게 틀어잡았다.
“요 씨발놈을 작살을 내 삐야지. 그라지예, 행님.”
태혁이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송정? 주제에 요정에서 술을 처마시는갑다.”
덕배가 아주 가소롭고 아니꼬운 듯이 말했다.
“덕배는 애들 데리고 사무실로 곧장 가라. 거기서 일을 마치면 바로 요정으로 오도록 해.”
“예, 형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예, 형님.”
덕배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형님.”
한수가 태혁에게 다가섰다.
“일송정 마담이 큰형님하고 아주 잘 압니다.”
태혁이 한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큰형님이라면 타이거 강을 가리키는 말일 테고 잘 아는 사이라면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일 것이었다.
“그래.”
태혁은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중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잘됐군. 중철이는 숙소로 가고······ 가자, 한수야.”
태혁이 몸을 움직이자 중철이 재빨리 문을 열어 주었다.
사무실 밖에 대기해 있던 대원들은 몇 갈래로 뚜렷하게 무리가 지어져 있었다. 태혁이 나타나자 덕배가 다가왔고 대원들은 자세를 고치며 일제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태혁은 대원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말했다.
“겁먹지 마라. 겁먹을 만큼 큰일이 아니다. 간단한 일이니까 빠르게 끝내라.”
태혁의 말에 모두들 큰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태혁은 뒤에 서 있는 중철과 한수, 덕배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치는 애들은 바로 병원으로 실어라.”
“예, 형님.”
“가자.”
덕배가 먼저 인사를 한 후 대원들과 차에 올랐다. 덕배가 차에 오르자 태혁과 중철도 각자 차에 올랐다. 중철이 차를 출발시키고 나자 한수가 태혁의 앞자리에 앉았다. 태혁은 흩어지는 차들을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몇 시냐?”
“아홉 시 십오 분입니다, 형님.”
시간을 묻는 태혁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진 한수가 백미러로 태혁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태혁의 얼굴에는 무서우리 만치 싸늘한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가자.”
태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사무실 근처에 차를 세운 덕배는 차에서 내리는 대원들에게 신속하게 움직이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작은 조직이라 그런지 조직의 사무실이 들어 있는 건물치고는 엉망진창이었다.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덕배는 단숨에 뛰어내려갔다. 사무실 문 앞을 지키고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조적수의 패거리 두 명이 덕배를 보고 주춤하는 사이 덕배는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놈들의 머리통을 정확하게 조준해 세차게 휘둘렀다. 비명도 지를 사이 없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두 놈이 기절해 버렸다. 마치 돌에 맞은 개구리가 배를 드러내며 뒤집히는 것 같았다. 기절한 두 놈을 다리로 밀어 구석으로 물건 치우듯 치우고 난 덕배는 대원 중 한 명이 문에 귀를 대고 무슨 소리가 나나 듣는 듯한 시늉을 하자 대원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아따, 이놈이 신참이라 안 헐까 봐 별 지랄을 다 허네. 뭣 들을 게 있다고 도둑놈 망보는 것같이 기고 지랄이냐!”
덕배가 눈을 부라리자 뒤에 씩씩거리며 서 있던 대원 몇 명이 발로 문을 쾅 하고 세차게 걷어찼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대원들이 물탱크가 터진 것처럼 쏜살같이 밀려들어가 보이는 대로 두들기고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에는 고작 여섯 명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고 고스톱을 치느라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각목과 쇠파이프로 떡을 치듯 두들겨 패는 태혁의 대원들에게 상대해 볼 겨를도 없이 얻어터지며 뒤로 나자빠졌다.
몸을 재빨리 피해 의자나 전화기 같은 것을 집어던지며 대항하던 조적수 패거리 중의 한 명을 덕배가 쫓아가서 무대포로 쇠파이프를 이마에 대고 휘두르자 놈의 이마가 칼로 자른 듯이 찢어지며 분수처럼 피가 넘쳐 나왔다. 사정없이 휘두르는 각목과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옥수수알 같은 이빨을 핏덩이와 함께 쏟아내는 놈도 있었고 눈알이 빠진 눈을 싸쥐고 엎어지는 놈도 있었다.
태혁의 대원들은 피를 보고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놈에 두세 명씩 달라붙어 집단으로 두들기자 피하고 막는 것에 지친 조적수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송장처럼 쭉쭉 뻗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만!”
조적수의 사무실에 쳐들어와 백정들처럼 짐승 잡듯 두들긴 것이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대원들은 덕배의 우렁찬 고함에 그제서야 우뚝 동작을 멈추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헐떡거리는 대원들의 눈은 피를 본 흡혈귀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되았어. 그만들 혀. 자빠진 놈들허고 밖에 졸도헌 놈들허고 요리로 몽땅 끌고 와서 앉혀 봐. 상판때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귀경 좀 허게.”
덕배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얘기하자 두들겨 맞아 흉측하게 찌그러진 여섯 명과 아직도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두 명이 질질 끌려 덕배 앞에 던져졌다.
“무릎꿇어, 이 씨발놈들아!”
대원 중 한 명이 빽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로 등허리를 한 대씩 후려갈기자 모두 옆으로 고꾸라지며 강아지 감기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기절한 놈들은 더 자게 냅둬 부러.”
덕배가 기절한 두 놈을 발로 차는 대원에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느그덜이 조적수 패냐? 조적수라는 놈 워디서 뭐 허면서 굴러먹던 양아치냐?”
덕배가 여섯 명의 얼굴을 장난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워디서 뭐 허던 놈인디 그 개뼉다구 같은 놈이 여그가 워디라고 지랄을 싸질러대고 다닌댜? 느그덜이 죽을라고 넘의 밥통을 훔쳐야? 씨발, 넘의 밥통 냄새만 맡아도 죽어 마땅헌디 밥을 뺏어묵어? 요런 싸가지에 똥독 오른 놈들허고는.”
덕배가 여섯 명의 머리통을 쇠파이프로 퉁퉁 퉁겼다. 쇠파이프로 머리를 얻어맞은 여섯 명은 머리가 아플 텐데도 모두 이를 악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느그덜은 시방 죽을 일만 남었다. 느그도 건달이랍시고 깝쭉거리고 댕겼응께 죽는 것이 겁나지는 않을 것이고. 암, 죽는 걸 겁내면 건달도 아니지. 동네 양아치나 해묵어야지. 씨발, 쌈질도 더럽게 못허는 놈덜이 자빠져 뒤지고 싶어 안달 나서 건달이라는갑다.”
덕배가 맨 끝에 앉은 놈의 머리를 발로 후려 차며 소리를 질렀다.
“안 그려, 그려?”
옆으로 픽 쓰러진 놈이 신음 소리를 내다가 겨우 몸을 움직여 바로 앉았다.
“한 번도 못 때리고 죽싸발 나게 두들겨 맞기만 혔잖냐. 죽싸발 나게 두들겨 맞고 눈알 튀어나올라고 건달 허냐? 나 같으면 그냥 저그 한탄강에 가서 머리 팍 박고 죽을란다. 쌈질도 못허는 놈덜이 뭣 빨아먹을 게 있다고 남의 구역을 넘본댜? 싸가지 없는 놈덜허고는. 느그덜 팍 쥑여도 속이 시원찮여.”
덕배가 다시 한 번 후려칠 기세로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느그덜 암만 두들겨 패 봤자 소용도 없고, 느그도 조적순지 나발나부랭인지 그놈 땜시 이 꼴이 된 거니께. 야들아, 이놈덜 피나 좀 닦아주고 우리 사무실에다 잡아 놔라. 난 또 형님한테로 언능 가 봐야 되겠응께 느그덜이 좀 알아서 혀라. 혹시나 도망갈 기미를 보이는 놈덜이 있으면 콱 쥑여 놔라.”
덕배가 근처에 서 있는 대원들에게 일러놓고 돌아섰다.
“꽁꽁 묶어 놔라. 형님께서 상판대기 보자고 허셨으니께.”
덕배는 뭐가 우스운지 킥킥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중철이 들이닥친 곳은 조적수 패거리들이 묵고 있는 소라여인숙이었다.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여인숙이어서 그런지 간판도 다 떨어져 구질구질하게 보였다. 조적수가 얼마나 형편없이 대원들을 관리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덕배와 마찬가지로 쇠파이프를 손에 움켜잡은 중철은 여인숙 입구에서부터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숙소 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던 놈들과 맞붙은 중철은 언제나 그랬듯이 몸을 사리지 않고 치고 들어갔다. 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있기는 했지만 중철의 오른 주먹에 걸리는 놈들은 모두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주먹의 힘이 자타가 공인할 만큼 대단하기도 했지만 주먹 자체가 워낙에 커서 한쪽 얼굴 전체를 덮어 버릴 정도였다. 중철은 걸리는 놈이 있으면 그 주먹으로 사정없이 턱뼈를 돌려 버렸다. 뒷문도 없는 여인숙이라 도망갈 수도 없었고 담을 뛰어넘은 놈들은 담을 둘러싸고 있던 태혁의 대원들에게 죽이 되게 얻어터지고 다시 끌려들어와야 했다. 도망갈 수도 없어 안으로 몰리기만 하자 조적수 패들은 발악을 하듯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휘둘러댔다.
조적수의 대원들도 쇠파이프나 각목을 휘둘렀고 하다못해 이불까지 집어던지며 태혁의 대원들과 맞붙었지만 수적으로나 힘에서나 역부족이었다.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얻어맞은 놈이 머리가 깨져 피를 튀기며 쓰러지면 서너 명이 붙어 사정없이 내려치는 몽둥이찜질에 사지를 벌벌 떨었다.
숙소라고 했지만 조적수 패는 열 명 남짓이었다. 중철이 쇳덩이 같은 주먹을 휘두르며 한 명씩 쓰러뜨리면 청소를 하듯 서너 명이 달라붙어 정신을 빼 버릴 정도로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두들겨 팼고 나머지 대원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승냥이들 같았다. 새로 모집해 온 대원들은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싸움에 뛰어들었기에 적당히 고르고 기술적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였다. 대원들은 비릿한 피 냄새에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툭툭 떨어지는 선지 같은 피에 비위도 상해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 자들을 맹렬하게 두들겼다.
중철이 휙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는데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대원들을 한번에 고꾸라뜨리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놈의 동작은 워낙 빨랐으며 얼핏 봐도 급소만 골라서 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대원들은 앞도 보지 않고 몽둥이만 휘두르다 주먹과 발길질 한 방에 픽픽 쓰러졌다. 중철은 놈에게 재빨리 뛰어가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놈은 어느새 중철의 주먹을 피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놈의 눈은 늑대처럼 빨랐다. 중철은 놈의 얼굴을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놈이 바람처럼 중철에게 다가서는 걸 놓치지 않고 중철은 사납게 덤벼드는 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매번 놈의 동작은 비수처럼 빨라서 중철의 주먹을 어렵지 않게 피하며 몽둥이로 중철의 어깨를 내려쳤다. 중철은 어깨가 아픈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약이 바짝 올라 눈에서 이글거리며 불이 타올랐다. 중철은 자신도 어지간히 눈이 빠른 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쪽이다 싶어 내리지르면 어느새 왼쪽에서 치고 들어왔고 왼쪽이다 싶어 휘두르면 어느새 아래쪽에서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싸웠지만 이놈처럼 빠른 놈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놈의 얼굴에서도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기세나 몸짓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상대편으로 싸우기엔 너무나 아까운 싸움꾼이었다. 아까운 상대여도 쓰러뜨려야 했기 때문에 중철은 눈빛을 번들거리며 기회를 엿봤지만 좀처럼 사이를 주지 않았다. 중철이 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대원 중 한 명이 달려들어 놈의 허벅지에다 각목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중철은 오랫동안 놈과 맞붙어 진땀을 빼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허벅지를 얻어맞고 한쪽 다리가 구겨지듯 접히는데 중철이 옆구리에 주먹을 가했다. 중철은 자신의 주먹이 놈의 옆구리에 정확하게 박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래서 완전히 쓰러지거나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것이라 계산했는데 그렇게 큰 타격에도 놈은 이빨을 틀어 물고 부르르 떨며 움찔할 뿐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중철이 놈의 얼굴을 무섭게 노려봤지만 놈의 서슬 퍼런 눈빛에 오히려 기가 질려 무서울 지경이었다. 놈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핏빛처럼 붉은빛이 번득거렸다. 옆구리의 타격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은 악을 쓰는 듯 입을 꼭 다문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중철이 놈의 정수리를 향해 쇠파이프를 휘두르자 놈이 몽둥이로 막아냈다. 놈의 뜨거운 입김과 거친 숨소리가 중철의 얼굴에 확 와 닿는 것을 느낄 때 놈의 몽둥이가 중철의 어깻죽지에 날아들었다. 또다시 어깨를 얻어맞은 중철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놈을 노려봤다.
“이 새끼!”
중철이 폭발할 듯한 표정으로 쇠파이프를 치켜드는데 대원들이 놈에게 달려들며 허벅지와 온몸에 사정없이 각목을 휘둘렀다. 놈도 일곱의 숫자에는 어쩔 수가 없는지 악착같이 버티다가 결국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만!”
각목을 휘두르는 대원들의 동작을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중지시킨 중철은 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주위를 돌아봤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중철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눈에 조적수의 패거리들을 다 쓰러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이, 야들아. 조적수 새끼들 다 모아 봐라.”
중철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놈을 다시 쳐다봤다. 무릎을 꿇은 놈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조적수의 패거리가 한쪽으로 모아졌다.
“여기 여인숙 주인은 우쨌노?”
중철이 옆에 서 있는 대원에게 물었다.
“방안에 잡아 놨습니다. 한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중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놈의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
“야, 니 이름 뭐고?”
중철이 놈에게 이름을 물었지만 놈은 흰자위에 비해 유난스레 눈동자가 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려볼 뿐 대답이 없었다.
“야, 이 씹새끼야. 이름 말하라 안 캤나?”
중철이 주먹으로 놈의 얼굴을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말 못하는 빙신새끼가? 씨발놈이 말이 없노.”
중철이 다시 주먹을 휘두르자 놈이 옆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며 중철을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 씨발놈이, 눈까리를 팍!”
중철이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휘두르려는데 조적수의 패거리 중 한 명이 얼른 소리를 질렀다.
“걔는 말을 못합니다. 벙어립니다.”
중철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봤다.
“니 벙어리가?”
중철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자 놈이 찌를 듯한 눈으로 쏘아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씨발놈이 성질 더럽게 나오네. 팍 쥑이 뿔라. 야들아, 여기 몇 명이고.”
“열하납니다.”
“그래, 몇 명 되지도 않는 놈들이 까불락거리기는. 이 씨발새끼들, 다 쥑이 삐까 마. 느그 쪽팔리게 숙소라고 하는 데가 여인숙이가? 야들아, 야들아, 답답다. 하다못해 콧구멍만해도 여관은 돼야지 여인숙이 뭐고? 내 같으면 그냥 죽을란다. 미칬다고 여인숙에 살면서 건달을 하나. 미친 새끼들, 팍 불알을 다 까 뿔라. 진짜 마 불알을 다 까 뿌까. 사내 망신 다 시키는데 불알 까 가지고 내시나 시키까.”
중철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했다.
“조적순지 씨발놈인지 가도 참 답답다. 좆같은 새끼, 이 지랄 할라고 건달 두목 하고 댕기나. 아들을 뭐 이런 드르분 데다 델다 놓고 지는 쌔가 빠지게 가시나나 끼고 노나. 이 씹새끼, 잡으마 내한테 죽었다.”
중철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야, 니 봐라. 봐라, 니.”
중철이 한곳에 몰려 있는 조적수 패 중에 한 명을 파이프로 가리켰다. 한 명이 좀 겁먹은 얼굴로 중철을 쳐다보았다.
“야, 이 드르분 놈아. 대답 안 하나. 니는 교육도 못 받았나. 이 쌍놈의 새끼야, 부르믄 행님한테 대답을 해야 할 거 아이가. 팍 쥑이 뿔라, 새끼. 니도 벙어리가?”
“아닙니다.”
한 놈이 악을 쓰듯 대답했다.
“근데 와 대답 안 하노. 죽을래? 저 새끼부터 불알을 팍 까 삐야겠네. 어? 니 불알 까이고 싶나? 야들아, 이 새끼 바지 벳기 봐라. 불알 함 보자.”
중철이 대원들에게 명령하고 대원들이 놈에게 달려드는데 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다시 악을 쓰듯 대답을 하자 중철이 좀 누그러진 듯 물었다.
“야 이름이 뭐고?”
중철이 벙어리를 가리켰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삼룡이라 부릅니다. 벙어리 삼룡이.”
“벙어리 삼룡이?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네.”
“형님두 참. 소설에 나오는 벙어리 삼룡이 말이에요. 그것도 모르슈.”
대원 중의 한 명이 킥킥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맞네. 맞다, 맞다. 그 삼룡이네. 삼룡이······.”
중철이 벙어리 삼룡이를 잠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벙어리 삼룡이······ 알았다. 나는 바로 행님한테 가야 되니까 느그 자들 사무실에 델다 놔라. 여기 주인한테 경찰에 신고하거나 입을 열면 주딩이를 팍 찢아 뿐다 하고.”
중철이 대원들에게 이르고 나서 뒤돌아서서 나오려다가 삼룡이를 다시 쳐다봤다. 삼룡의 눈빛은 그때까지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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