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도시 1권
PROLOG
칠흑처럼 캄캄했다. 굴곡진 골목길을 따라 뛰기 시작한 지 족히 한 시간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잘 다듬어진 싸늘하고 예리한 칼날이 목줄을 가르며 파고들 것이다.
청수와 철구는 숨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기도가 끊어질 듯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이렇게 죽긴 너무 억울했다.
무슨 죄가 있다고!
조직을 위해 청춘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받쳤건만, 적도 아닌 조직의 수뇌부에서 자신을 제거하려고 칼잡이들을 보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큰형님께 달려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해명할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 기대할 순 없었다. 칼잡이들은 뒤통수에 바싹 붙어 쫓아오고 있었고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청수와 철구의 목을 베는 것이었다. 해명은 살아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든 목숨부터 부지해야했다.
“저쪽이다!”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는 구둣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과 맞서 싸우기엔 수적으로 불리했다. 제대로 된 연장도 챙겨오지 못해 손에 쥔 연장이라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사시미 칼 하나가 전부였다. 철구가 니뽄도 한 자루를 지니고 있다지만 열이나 되는 놈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열이나 되는 적들 앞에서 사시미 칼이나 니뽄도는 무용지물이었다.
“형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철구가 청수를 잡아끌며 외쳤다.
청수는 철구가 이끄는 대로 커브를 틀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골목은 야트막한 담벼락을 타고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골목이 끝나는 어디쯤엔가 탈출구가 있어야만 했다, 청수와 철구의 목숨을 살릴 탈출구가.
“헉, 헉.”
뇌가 흔들릴 정도로 거친 숨소리가 고막을 후벼 팠다.
청수는 그 거칠고 불안정한 호흡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과 철구의 숨소리일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상처에서 빠져나온 피가 옷자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가로등을 벗어나 그림자조차도 잡히지 않는 캄캄한 모퉁이에 철구가 바짝 붙어 섰다. 청수 역시 철구의 곁에 바짝 붙으며 터져 나오려는 숨소리를 막기 위해 호흡을 멈췄다. 호흡을 멈추자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배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가녀린 호흡소리마저도 적들에게 들킬까 터져 나오려는 숨을 틀어막아야 했다.
뒤따라오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청수는 그제야 헐떡 헐떡 숨을 토해냈다. 숨을 토해낼 때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뿌연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겨울은 한가운데서 똬리를 틀고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릴 듯 기세로 몰아쳐댔다. 하지만 청수, 철구 두 사람은 피부에 부딪히는 얼음장 같은 찬바람을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 죽음은 문턱까지 쫓아와 있었고 살아남기 위한 사투만이 두 사람의 위태로운 숨소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청수는 옆구리에서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옆구리뿐만 아니라 팔에서도 통증이 뜨겁게 타올랐고 허벅지에서도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
꽉 다문 잇새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청수의 신음에 철구가 청수의 일그러진 얼굴을 쳐다봤다.
“형님!”
철구의 시선이 청수의 옆구리와 허벅지로 향했다.
갑자기 나타난 칼잡이들을 피해 도망치느라 움직이기 불편한 양복저고리는 벗어던져 버렸었다. 얇은 와이셔츠는 이미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쩍 갈라진 피부가 보였다. 상처가 깊어 피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철구가 청수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형님,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이 상태로 뛰는 건 더 이상 무립니다.”
철구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청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호석, 개새끼!”
청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네놈이 날 삼키려 하다니,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청수의 눈앞에 숙소 문을 박차고 나오던 호석의 야비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호석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호석의 똘마니들과 그 곁에 저승사자처럼 서있던 조혁의 모습 역시 청수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조혁의 모습을 본 순간 청수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었다. 설마, 조혁과 호석이 자신의 목을 따려는 적이 되서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조혁이, 호석이 네놈들이!”
박호석. 조직을 위해, 조직의 강건을 위해 두 손 맞잡고 목숨을 걸어보자 약속했던 친구였다. 너는 오른팔, 나는 왼팔, 형님의 좌우에서 성심을 다하는 무사가 되자고 다짐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놈의 곁에는 아침까지도 깍듯하게 형님으로 보시며 허리를 숙이던 아우가 있었다. 눈짓 하나에도 엎드리던,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고 맹세했던 청수의 왼팔. 사랑하는 아우라고 목숨 다하는 날까지 너희들만큼은 내가 거두리라 약속하며 아끼던 반지와 목걸이를 빼주었던 아우 조혁이 한순간에 박호석의 똘마니가 되어 청수의 목을 베려는 칼잡이가 되어 서 있었다.
청수는 초인적인 대항으로 놈들을 피해 숙소를 벗어날 때에도, 니뽄도 날이 옆구리를 베었을 때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청수를 살려서 세상의 공기를 마시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청수의 오른팔 철구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칼날들 속으로 뛰어들며 청수를 살리기 위해 칼춤을 추길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철구였다. 조혁과 함께 청수의 오른팔 왼팔이었던 아우. 청수에게로 쏟아지는 칼날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철구는 온몸을 던져 청수를 보호했다.
청수와 마찬가지로 철구 역시 눈이 뒤집혀진 상태였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죽을 각오로 놈들과 맞선 그때 청수와 철구는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뛰었다. 그때부터 뛰었다.
“조혁이, 네놈이 형님을 배신해! 내가 널 살려두지 않을 거다!”
청수를 호위하며 숙소가 있는 골목을 빠져나오기 직전 철구가 조혁의 얼굴에 칼끝을 세우며 외쳤었다.
청수의 입에서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조혁이가 날 배신하다니······.”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동생이 자신에게 칼날을 세우다니, 청수의 가슴에선 슬픔과 분노의 파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조혁이 네놈이!”
청수가 울분을 토하듯 소리치는데 철구가 청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님, 옵니다!”
철구가 낮게 부르짖었다.
반대편으로 사라졌던 발자국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철구가 사방을 살피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청수를 쳐다봤다.
“형님, 안되겠습니다. 뒤로 넘어가십시오.”
“뭐라고?”
“전 저쪽으로 뛰어서 놈들을 따돌릴 테니 형님은 이 담을 넘으십시오.”
철구가 청수의 몸을 붙잡더니 담 위로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놈아!”
청수가 철구의 손을 뿌리쳤다.
“이러다 다 죽습니다.”
“내가 널 죽이고 나만 살 것 같아?”
“이럴 시간 없습니다, 형님!”
점점 더 커지는 발자국 소리에 철구가 타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살자고 널 죽일 순 없어!”
“제발 형님!”
철구가 청수의 두 손을 붙들었다.
“전 살 겁니다. 놈들한테 붙잡히지 않을 겁니다. 살아남겠습니다.”
“안 돼!”
“형님!”
“가자, 함께 가자.”
“안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우리 둘 다 죽습니다.”
“그렇다고 널 혼자 보낼 수는 없어!”
“형님!”
철구가 청수의 두 손을 더욱 억세게 틀어잡았다.
“우리 경구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경구요.”
“무슨 소리야 이 자식아!”
“저쪽으로 가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놈들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철구가 결연한 표정으로 청수를 노려봤다.
“용서하십시오, 형님.”
철구가 낮은 음성으로 용서를 구하는가 싶더니 청수가 미처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청수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철구의 주먹에 가격당한 청수가 아찔함을 느끼며 비틀거리는 순간, 몸이 하늘 위로 붕 뜨는가 싶더니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청수가 정신을 추스르려고 애를 쓰는데 아득하게 몰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철구야, 철구야, 이놈아······.”
청수가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두 다리를 지탱하고 일어섰을 때 담벼락 너머로 저만치 도망치는 철구의 뒷모습과 철구를 쫓는 한 무리의 칼잡이 그림자가 보였다.
“철구야······.”
청수는 주먹을 틀어쥐고 부들부들 떨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경구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경구요.’
두 손을 부여잡고 간절하게 부탁하던 철구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철구야······.”
청수가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철구의 이름을 불렀다.
철구는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더는 도망칠 곳도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을 보고 무작정 뛰고 있었지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저만치 몇 미터 남지 않은 골목 끝엔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여기가 너의 무덤이라는 듯이.
철구는 멈춰 섰다. 갑자기 초인이 되지 않는 이상 저 높은 담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 주지 않는 이상 몸을 숨길 곳도 탈출할 곳도 없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며 허무함이 몰려왔다. 살아남겠다고 청수와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놈들과 맞서는 것,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목숨을 구걸하진 않을 것이다.
높은 담 앞에 멈춰선 철구는 심장이 터져나갈 듯 뛰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 당차게 놈들과 마주섰다. 철구를 쫓아 달리던 놈들이 천천히 철구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청수는 어딨나?”
박호석이 정작 잡으려던 놈, 청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잠시 당황한 듯 철구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하늘로 솟은 모양이지.”
철구가 칼끝을 하늘로 향하며 비웃듯 대꾸했다.
“다시 묻겠다. 청수는 어딨나?”
“흥! 천 번을 되물어라. 그건 하늘만 아실 테니!”
철구가 거칠게 대답한 후 침을 퉤 뱉었다.
호석이 어금니를 틀어 물며 철구를 노려봤다. 어금니를 악문 호석의 턱 근육이 우스꽝스럽게 실룩거렸다.
“청수가 어딨는지 불면 목숨을 붙여주지.”
“씨발 개소리 하지 마! 목숨을 붙여주겠다고? 친구를 배신하는 너 같은 놈 손에 목숨을 구걸하느니 배를 가르고 죽겠다.”
철구가 악을 썼다.
“미친놈!”
칼자루를 든 호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냐?”
“죽는 걸 두려워했다면 이따위 건달 짓도 하지 않았어!”
철구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호석은 더 애써봤자 철구와 타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리해!”
호석이 짧게 고함치자 칼잡이들 서넛이 철구를 향해 엄습해왔다. 칼잡이들 중에 조혁의 각진 얼굴도 보였다.
“조혁이, 네놈이 형님을 배신하다니. 똑똑히 알아둬. 여기서 절대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거다.”
철구가 조혁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조혁의 얼굴에 일순간 복잡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오늘 아침까지 같은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함께 아침을 지어먹었던 친구였다. 청수의 부하가 되면서 처음 만나 5년을 친형제처럼 부대끼던 친구였다. 그런 철구의 목에 칼날을 겨누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철구가 조혁의 편에 서 주었다면, 철구가 기어이 청수를 섬기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악연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호석이 형님, 어떠냐?”
어젯밤 조혁이 철구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호석에게 불려가 큰형님으로부터 하청수의 제거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조혁은 마치 자신에게 사형이라는 천벌이 내려진 듯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네가 청수의 편에 선다면 너 역시 제거당할 것이다.”
호석이 말했고 조혁은 두려운 얼굴로 호석을 쳐다봤다.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 편에 선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것은 곧 하청수를 배신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조혁은 결국 하청수를 배신하고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조직에서 하청수를 제거하겠다고 했다면 아무리 하청수가 솜씨 좋은 건달이라 해도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하청수의 곁에 남아 있다가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멍청한 짓이었다. 의리로 뭉치고 의리로 죽고 산다지만 그건 편할 때의 얘기지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의리를 지킬 놈이 몇이나 있겠는가. 조혁은 목숨을 건지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결정을 하고보니 하청수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직에서 당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도 없고 알리지 않고 숨기자니 가슴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몰래 빼돌릴 생각도 했지만 만에 하나 박호석에게 들키면 그날은 세상 그만 사는 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청수도 청수지만 철구도 마음에 걸렸다. 정말로 좋아하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속 깊은 얘기까지 모두 나누었던 친구이기에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민 끝에 철구가 호석에 대해 요만큼이라도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철구만이라도 살려보자 싶었다. 그래서 운을 뗐는데 철구의 반응은 조혁이 생각했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
“난 그 형님 싫다.”
“왜?”
“사람이 진심이 없는 것 같아. 난 그런 사람 싫다.”
“그렇게 나쁠 것도 없어.”
“아니, 그 형님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제일 친한 친구도 죽일 사람이야.”
철구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정확하게 박호석이라는 사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조혁은 어쩔 수 없이 철구에게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철구를 제 손으로 제거해야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미안하다.”
조혁의 들릴 듯 말 듯한 사과의 외마디가 목구멍 뒤로 삼켜졌다.
이젠,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적이 되어버렸고 되돌리고 싶다고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혁은 박호석을 택했고 철구는 청수를 지켰다. 그렇다면, 이제 적이었다.
조혁을 비롯한 칼잡이들이 칼끝을 철구를 향해 겨누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청수가 어딨는지 말하면 목숨을 붙여주겠다.”
박호석이 최후통첩처럼 내뱉었다.
“씨발, 죽는 맛이 어떤지 한번 보자고!”
철구의 외침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려 칼잡이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골목 끝은 별안간 바람 가르는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맑고 싸늘한 칼 빛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철구는 광대뼈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니뽄도를 피해내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놓치지 않고 가르는 니뽄도 날이 스치는 맛을 느끼자 온몸을 순환하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죽음의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온몸이, 온 피부가 알아차렸다는 뜻일 게다.
그래, 죽자, 죽어보자, 하지만!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검은 갓, 검은 의복 차려입고 푸르스름한 낯을 말갛게 내보이며 대기하고 있는 저승사자를 따라 떠나는 길, 외롭고 무섭고 원통한 그 길에 동무 하나를 잡아 묶어 가리라.
철구는 조혁을 향해 니뽄도를 뻗었다.
먼 길 떠나면서 동무하기엔 오래 알고 지낸 편한 사람이 좋을 것이다. 그의 흠도 내 흠도 모두 알고 덮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 합당할 것이다.
철구는 다시 한 번 조혁의 목줄을 향해 칼끝을 세웠다. 조혁이 철구의 칼날을 피해 오른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철구의 등에 차갑고 날카로운 날이 파고들었다.
“악!”
철구의 몸이 활처럼 휘는가 싶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니뽄도를 든 철구의 손도 무릎을 꿇은 다리도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솜씨 하나로 청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철구지만 철구 혼자 열이나 되는 칼잡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 높은 담벼락 끝에 다다르면서 예감하고 있었다.
“죽어!”
칼끝은 한 치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철구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고 날카롭던 날은 어느새 불처럼 뜨거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며 철구의 몸뚱이를 태우기 시작했다.
“허억!”
철구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뿜어져 나오는 순간 등에 꽂혔던 칼끝이 시계방향으로 획 돌아갔다.
“아악!”
철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휘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핏덩이가 다시 한 번 목구멍에서 울컥 뿜어져 나왔다.
등에 꽂혔던 칼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칼잡이들의 칼끝이 일제히 철구의 목줄기에 뻗치며 겨누어졌다.
철구의 눈에서 붉은 피눈물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철구는 피로 물든 눈을 치켜뜨며 무섭게 조혁을 노려봤다.
“같이 가자.”
그르릉 가래 끓는 소리처럼 철구가 조혁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도 같이 가자.”
철구가 다시 소리쳤다.
“하청수는 어딨나?”
박호석이 물었고 철구의 시선이 박호석에게로 향했다.
철구는 두 눈에 선명하게 각인시키겠다는 듯, 무섭게 박호석을 노려봤다.
“여기 있다.”
철구가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울컥, 철구가 또다시 핏덩이를 토해냈다.
“망할 놈!”
박호석이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내뱉었다.
“끝내.”
박호석의 명령이 떨어졌다.
박호석의 대원들이 일제히 칼을 치켜들었다.
“기다려!!”
철구가 마지막 포효처럼 소리쳤다.
박호석과 박호석의 수하들 그리고 철구의 가장 친했던 동무 조혁이 동작을 멈추고 철구를 쳐다봤다.
“죽음의 순간만이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게 자비를 베풀라고.”
철구가 쿨럭 쿨럭 피를 쏟아내며 말했다.
“그 정도는 해줘야 한솥밥 먹은 동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철구가 미소 띤 얼굴로 읊조리듯 말하고는 자신의 칼끝을 심장에 겨누었다.
“네놈들 손에 죽기엔 억울하지. 억울해.”
철구가 이젠 들리지도 않을 만큼 속삭인 후 박호석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반드시!”
철구의 저주 같은 유언이 끝나는 순간, 철구의 손에 들린 니뽄도의 칼끝이 철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울컥 시커먼 선지가 철구의 입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철구는 차갑게 얼어붙은 땅바닥에 얼굴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조혁이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획 돌리고 나머지 벅호석의 수하들도 시선을 피했다.
철구는 저만치 물러서 있던 저승사자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검은 갓, 검은 도포, 파르스름한 얼굴.
철구가 눈동자를 돌려 조혁을 쳐다봤다. 조혁의 괴로움 가득한 두 눈이 보였다.
“동무를 데려가지 못해 쓸쓸하겠군.”
철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잔인한 놈······.”
박호석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가서 청수를 찾아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철구의 주검 위로 호석의 외침이 쏟아졌다.
갑자기 방안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뛰어들자 자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쉿! 조용히 해!”
청수가 피 묻은 손으로 비명을 지르려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목에 칼날을 들이대며 위협하자 방안은 일순간 침묵에 휩싸였다. 청수에게 붙들린 사람의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청수는 자신이 인질로 잡은 사람이 여자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밖에서는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쉿!”
청수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테니, 아내를 놓아주십시오.”
겁에 질린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청수는 그제야 자신이 인질로 잡은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겁니다. 제발 아내를 놓아주십시오.”
남자가 다시 한 번 애원했고 청수에게 붙잡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는 천천히 여자를 놓아주었고 청수에게 풀려나는 즉시 여자가 남자의 품으로 도망쳤다.
“조용히 해!”
청수가 낮게 부르짖자 여자가 뭔가를 끌어안으며 한쪽으로 도망쳤고 아내를 놓아달라고 애원하던 남자는 아내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우며 돌아앉았다.
“이 근처일 거다! 반드시 찾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청수는 온몸의 세포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고 주먹을 틀어쥐었다.
청수를 살리기 위해 놈들의 미끼가 됐던 철구가 어떻게 됐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놈들은 청수 자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발각돼 잡히는 순간 자신의 숨이 멎을 것이다.
청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방문 고리를 부여잡고 바짝 엎드려 있었다.
“씨발, 어디로 간 거야?”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 앞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골목은 조용해졌다.
청수는 그제야 숨을 후욱 토해내며 부여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으으······.”
긴장된 순간이 지나가자 또 다시 무시무시한 통증들이 온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청수의 신음소리를 들었는지 그림자 하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움직이지 마!”
청수가 칼끝을 세우며 엄포를 놓자 그림자가 움찔 멈췄다.
“내가 내다보겠습니다.”
“···움직이지 마!”
“다른 짓 안합니다. 내가 내다보겠습니다.”
남자가 말했고 청수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청수가 칼을 내리자 남자가 천천히 움직여 방문께로 오더니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바깥공기를 살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멀리 간 것 같습니다.”
남자가 다시 방문을 닫으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면··· 내 칼이 네 목을 딸 거야.”
청수는 헐떡거리며 중얼거리다 푹 고꾸라졌다.
Chapter 1
작고 여린, 놀랄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 얼굴을 더듬는 느낌에 눈을 뜬 청수는 똘망하고 맑은 눈빛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는 아기의 모습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누워버렸다.
어디 한곳 아프지 않은 곳 없이 쑤시고 괴로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을 정도로 청수는 완전하게 체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오죽 아프고 괴로우면 땀구멍 하나하나에 바늘을 쑤셔 박아 놓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딜까?
누르스름하고 케케묵은 때가 낀 낡고 더러운 벽지가 보였다. 당장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몇 년은 묵은 듯한 곰팡이 냄새도 맡아졌다. 그리고 자랑삼아 내놓을 형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 몇 가지가 보였다. 벽에 대충 못을 박아 걸어놓은 옷가지도 보였다. 살림살이가 있고 옷가지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산다는 증거일 텐데 대체 이런 구질거리는 집에서 누가 산다는 걸까.
문득 청수의 눈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맑은 눈의 아기가 들어왔다. 아기라··· 아기가 있다면 아기를 낳고 키우는 사람도 있다는 뜻일 텐데 눈알을 굴려보았지만 아기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고 이 아이는 누굴까. 그리고 어떻게 하다 내가 이곳에 누워 있을까.
청수는 옆구리를 진동시키며 끼쳐오는 통증에 생각해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룸살롱으로 박차고 들어오던 호석이 떠올랐고 호석이 곁에 서 있던 조혁이 떠올랐다.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뛰어들던 철구도 떠올랐다.
철구가······.
그냥은 놓아줄 것 같지 않아, 목숨처럼 모시던 형님을 살리기 위해 면상까지 후려치고 담벼락 너머로 청수를 숨겼던 철구가··· 놈들의 주의를 청수에게서 돌리기 위해 칼잡이 밥이 되길 차정했던 아우. 검은 어둠속으로 사라져가던 철구의 마지막 모습이 되새김질됐다.
‘철구는 어떻게 됐을까?’
“전 살 겁니다, 살아남을 겁니다!”
철구가 그렇게 약속했었다. 살아남을 거라고.
철구는 살아남았을까? 호석의 칼에, 조혁의 칼에서 살아남았을까?
정신이 돌아온 이상 계속해서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서 어떤 오해로 잘못됐는지 몰라도 호석이가 자신을 죽이려 한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그래, 큰형님을 뵈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큰형님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청수는 큰형님이 호석이보다도 자신을 더 아끼고 믿어주었으니 큰형님께 자초지종을 묻고 대답을 듣자 싶었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일어서려던 청수는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옆으로 돌아눕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몸 상태라는 것을 알고 쓰러지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청수의 곁에서 퍽 깨끗해 보이지 않는 수건을 붙잡고 놀던 아기가 다시 청수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청수의 얼굴을 만졌다. 청수는 맥이 풀린 기분으로 약간 성가신 듯 아기를 마주 바라봤다. 아기가 싱긋 웃었다. 청수는 아기의 미소가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다. 하지만 몹시도 고단한데 아기는 계속해서 청수의 얼굴을 만지자 청수는 아기가 성가셨다.
“그만해라.”
기운 없는 목소리로 청수가 억지로 팔을 들어 아기의 손을 치우려는데 찬바람이 끼쳐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머!”
여자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듯한 여자의 목소리. 이내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다시 찬바람을 끌고 들어오며 문이 열렸다. 청수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젊은 남자와 처로 보이는 여자가 청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여자가 아기를 번쩍 안아들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워낙은 좁은 방이라 물러날 자리도 없었지만 아이 엄마는 아기가 청수의 곁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언제 깼어?”
여자가 속삭이듯 아기에게 말하는데 젊은 남자가 청수에게 조금 다가앉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청수가 눈동자를 들어 젊은 남자를 쳐다봤다.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저희 집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수는 가물가물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청수는 생각했다. 철구가 담벼락 밑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정신을 잃을 뻔하다가 자신을 찾으러 되돌아온 칼잡이들의 소리에 앞뒤 가리지 않고 어느 방문을 열고 뛰어들었었다. 누군가를 인질로 삼았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그러다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다치셨던데.”
청수는 젊은 남자의 태도에서 어떤 안도 같은 것을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피 칠갑을 한 사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어 칼을 들고 위협하다가 쓰러졌다면 겁을 집어먹고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아니면 집밖으로 내다버렸거나. 이 젊은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거나 문밖으로 내다버리기 보다는 구해주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 덕에 청수는 위태롭던 목숨을 구했다.
“···고맙습니다.”
청수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상처가 몹시 깊던데 어떠십니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다리와 옆구리에 난 상처가 몹시 깊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집에 약도 제대로 없고 약국에서 마이신 가루와 소독약을 사와서 대충 치료하고 싸매긴 했는데 병원에 급히 가셔야 할 겁니다.”
젊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27일입니다.”
“27일이요?”
“저희 집에서 나흘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나흘이나?
그럼 이 젊은 부부가 나흘이나 나를 돌봤단 말인가?
청수는 아득함과 함께 고마움을 느꼈다.
“힘드시면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물, 물 좀 주십시오.”
청수는 목젖이 들러붙는 것을 느끼며 부탁하자 남자가 방안에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청수에게 먹여주었다. 청수는 남자가 먹여주는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물 한 그릇을 다 들이키고 나자 정신이 조금 더 드는 것 같았다. 청수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잠이 들었으면 싶었다. 잠이 들면 통증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보, 뭘 좀 드셔야 할 테니 죽이라도 좀 쒀봐.”
젊은 남자가 말했다.
“예, 그런데······.”
청수가 살며시 눈을 뜨자 아기 엄마가 남편을 손짓으로 부엌으로 불러내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 남자는 아기 엄마를 따라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으로 나갔고 문이 닫혔다.
“쌀이 거의 없어요.”
아기 엄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아있는 것 가지고라도 좀 쒀. 죽지 않고 살았는데 산 사람 죽이라도 좀 먹여야 하잖아. 이제야 정신 든 사람한테 수제비를 어떻게 먹여?”
“그건 아는데··· 알았어요.”
아기 엄마가 마지못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먹을 끼니도 제대로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건달이랍시고, 힘 꽤나 쓰는 어깨랍시고 지금껏 배고프고 없는 사람들 우습게 보고 멸시했지 사람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와 눈을 맞추냐는 듯 부라리고 목에 힘주고 기죽이기에 재미를 붙였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세상은 참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흘 전까지 서울 명동을 호령하던 자신이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 집구석에 몸을 누인 채 쌀독 바닥 긁어 끓여내는 죽 한 그릇에 목말라 하다니.
“하청수··· 우습게 됐구나.”
청수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우습게 됐다, 하청수.”
청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수는 세 식구가 사는 낡고 추레한 달동네 구석진 집에서 닷새를 더 머문 후에 몸을 일으켰다.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날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에서 더는 낯 두껍게 비빌 수가 없었다. 단칸방, 환자인 청수를 위해 한쪽 구석에서 어린 아기를 껴안고 구부리고 불편하게 잠을 청하는 집주인을 더 힘들게 할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야 했고 걸음을 뗄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 했다.
청수가 머무는 동안에 젊은 부부는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지 결코 묻지 않았다. 물을 만도 하건만, 방안으로 뛰어들어 칼까지 휘두르며 설쳤건만 부부는 아무것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집에서 시체 치우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려움에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은 청수에게 은인이었고 은인들에게 폐를 더 끼칠 수 없었다.
청수는 통증으로 낯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켜 방안을 둘러봤다.
아기는 한쪽에서 자고 있었고 아기의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청수는 못에 걸린 옷가지들을 쳐다봤다. 이대로는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뭔가 챙겨 입긴 해야겠는데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하다지만 없어도 너무 없는 집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만큼 가난에 찌든 집이었다.
칼잡이들을 피해 달아날 때 청수가 입고 있던 옷은 고작 얇은 와이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한겨울, 살갗을 태울 듯이 덤벼드는 찬바람이 두려운 줄도 모르고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달리고 달렸었다. 그땐 추운지도 몰랐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나마도 여기저기 칼에 베어 옷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나, 이런 행색을 하고 대낮 거리를 돌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청수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서보기 위해 일어나려다 욱신거리는 옆구리와 허벅지 통증에 움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몸은 아직도 엉망진창이었다. 상처가 몹시 깊은데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아직도 피와 진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현기증까지 느껴졌다. 치료도 받지 못했고 변변하게 식사다운 식사도 못해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푸념하기엔 주제넘었다. 가난한 부부는 수제비를 끓여먹으면서도 자신에겐 흰 쌀죽을 끓여 주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오감했다.
회복이 되지 않은 몸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철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또 어째서 조직이 자신을 제거하려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떨치고 일어서야 했다.
그리고 경구, 경구도 찾아봐야 했다. 철구가 그토록 간절하게 부탁하던 경구.
청수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며 일어서는데 아기 아빠가 방으로 들어왔다.
“왜 일어나십니까?”
아기 아빠가 깜짝 놀라 청수를 부축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십니까?”
“일어나야죠.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그 몸으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가아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입을 만한 옷이 있으면 아무 거라도 좋으니 좀 주시겠습니까?”
청수의 말에 젊은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흠집으로 가득한 서랍장을 열어 여기저기 기운 자리 투성이인 낡은 내복과 두툼한 셔츠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드리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이걸 입으세요.”
청수는 남자가 건네는 옷을 두말 않고 받아 껴입었다. 여기저기 기웠으면 어떻고 낡은 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벗은 몸만 가릴 수 있다면 바람만 막을 수 있다면 누더기라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수는 낡은 내복을 껴입고 셔츠를 받쳐 입었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남자는 벽에 걸린 옷을 쳐다보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건넸다.
“낡았지만 제법 따뜻합니다. 우선 입고 가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몹시 춥습니다. 그 몸을 하고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으시면 큰일 납니다.”
“이 옷을 절 주시면 뭘 입으시게요?”
“전 잠바가 또 있으니 괜찮습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입으세요.”
청수는 망설이다가 아기 아빠의 오래 묵은 외투를 받아들었다.
“신세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청수가 아기 아빠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신세라니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습니다. 가진 게 없어 병원으로 모시지 못한 게 죄송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두 분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은혜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기 아빠가 민망하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청수는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아기 아빠에게 인사한 후 방을 나서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다 한쪽에서 잠들어 있는 아기를 뒤돌아봤다.
“아기 이름이 뭡니까?”
“아기요? 한상입니다. 유한상.”
아기 아빠가 잠든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유한상··· 한상이 꼭 기억하겠습니다.”
청수는 다시 한 번 아기 아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힘들게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차고 매서운 바람이 청수의 아픈 몸을 휘감았다. 순간 휘청거렸던 청수는 이를 악물며 다리를 지탱했다. 그새 이렇게 약해졌다니, 청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기 엄마가 부엌 문턱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청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예쁠 것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젊고 하얀 피부에 얼굴 구석구석 찌든 가난이 묻어 있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아기 엄마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수는 아기 엄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젊은 부부의 집을 나섰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얼어붙어 골목은 빙판이었다. 황망한 시선으로 굽은 골목길을 바라보던 청수는 절뚝거리며 빙판에 발을 내디뎠다.
어디부터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 가야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청수는 구렁이처럼 감겨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절뚝절뚝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통금 사이렌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철구의 집 근처 장사를 접고 주인이 떠난 포장마차 안에 숨어있던 청수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포장마차 안에서 조심스레 기어 나왔다. 밤거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청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철구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청수는 자신이 지금 누굴 두려워하는지 몰랐다. 통금시간에 돌아다니는 행인을 잡으러 다니는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독거미처럼 몸을 움츠리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박호석의 부하들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몰랐다. 아니 둘 다 두려웠다. 경찰에 붙잡혀서도 안 되고 박호석의 부하들에게 붙잡혀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청수는 철구의 하숙집으로 다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청수는 필사적으로 하숙집 담을 뛰어넘어 숨어들었다. 철구의 하숙방은 중간 방이었고 철구의 하숙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청수는 소리 없이 철구의 하숙방으로 가 문에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놈들이 경구를 어떻게 한 걸까?’
청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어린 경구에게마저 몹쓸 짓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싶으면서도 바로 어제까지 한 식구였던 가족을 가차 없이 해치는 놈들이라면 어리건 어쩌건 경구에게도 얼마든지 몹쓸 짓을 할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구가 그토록 간절하게 부탁했던 일인데, 경구는 청수가 지켜야만 했다.
청수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누구세요?”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청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경구야, 경구야.”
청수가 경구의 이름을 부르자 안에서 걸쇠가 끌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솜털이 가시지 않은 경구의 맑은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
경구가 반가운 듯 불렀다.
“그래, 나다.”
청수는 주위를 살핀 후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철구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우리 경구는 잘돼야 합니다. 저는 비록 이런 생활로 먹고 살지만 우리 경구만은 뒷바라지 열심히 해서 지가 하고 싶다는 거 하게 해줄 겁니다’였다.
철구가 어찌나 하나 있는 동생 놈을 살뜰하게도 챙기는지 그 마음이 예뻐서 몇 번 경구를 불러다 밥을 사 먹인 적도 있었다.
“아저씨.”
경구가 이 밤에 어쩐 일이냐는 듯 놀란 얼굴로 청수를 쳐다봤다.
“무사했구나.”
무사했구나 하는 청수의 말에 경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저씨, 우리 형이요······.”
경구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구가 언제 왔었니?”
“우리 형, 죽었대요.”
경구가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청수는 맥이 탁 풀리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며 경구를 쳐다봤다.
철구가··· 죽었다.
“철구가 죽었다고?”
“예··· 그저께, 경찰이 와서 형이 죽었다고 했어요.”
“경찰이?”
“병원 시체실에 있는데 어른들 안 계시냐구요. 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어려서 안 된다고 어른 데리고 오래요. 무서워요, 아저씨.”
경구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또 누가 왔었니?”
“어떤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여기 아저씨 오지 않았냐고······.”
“나를? 나를 찾아?”
“예. 안 왔었다고 하니까 그냥 갔는데, 며칠이나 계속 왔었어요. 그 아저씨들이 먼저 왔었어요. 그리고 경찰아저씨가 와서 형 죽었다고······.”
청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형, 길바닥에서 죽었대요. 얼어서······.”
경구의 흐느낌에 청수는 불길 같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나쁜 놈들, 철구를 죽여 놓고 길바닥에 그냥 유기한 모양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견했을 테고 신고했을 것이다. 경찰이 일단 병원 시체실로 옮기고 나서 연고자를 찾아 나섰던 모양이다. 차마 어린 경구에게 칼 맞아 죽었다는 말은 못하고 얼어 죽었다 한 모양이었다.
“나쁜 놈들!”
청수는 당장 달려가서 호석의 목줄을 틀어쥐고만 싶었다.
“아저씨, 우리 형 왜 얼어 죽었어요? 집에 오면 되는데 집에 안 오고 왜 얼어 죽은 거예요?”
경구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물었다.
청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린 경구에게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칼 맞아 죽었다 할 수도 없고, 그래 얼어 죽었다 하자니 젊디젊은 놈이 집 놔두고 길바닥에 얼어 죽다니 그것도 말이 안됐다.
“철구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아니?”
“서울병원이래요.”
“서울병원 영안실?”
“예······.”
“그놈들한테 널 찾아왔던 놈들한테 철구가 죽었다는 거 말했니?”
“예. 오늘도 왔었어요. 조혁이 형이요. 저거 사가지고.”
경구가 방 한켠을 가리켰다. 경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과자 몇 가지와 라면 그리고 쌀 한 포대가 놓여 있었다.
“조혁이가?”
“예, 아저씨 오지 않았냐고. 안 왔다고 하니까 먹을 거 떨어지면 연락하라고 해서, 형이 죽었다고 경찰이 왔었다고 말해줬어요. 우리 형이 죽은 거 조혁이 형도 알고 있다고 했어요.”
알고말고, 그놈이 죽였는데, 당연히 알고말고!
“내일 조혁이 형이 병원에 가본다고 했어요.”
“내일?”
“예. 조혁이 형이 가서 확인하고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했어요.”
조혁이가 철구의 장례를 치러준다고? 미친놈!
“내일 나하고 병원에 가자.”
“예.”
“울지 않을 수 있지?”
울지 않을 수 있지 라고 물었는데 경구는 굵은 눈물방울을 방울방울 뿜어내고 있었다.
“경구야, 그만 울어라. 이제 울지 않을 수 있지?”
“···예.”
경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제 내가 널 지켜줄 거다. 그러니 울지 마라.”
“···예.”
경구의 눈에서 대추씨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청수는 경구를 끌어당겨 안았다.
“울지 마라. 이제 울지 마.”
“······.”
경구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널 지켜줄 거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널 지킬 테니.”
청수는 경구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약속했다.
경구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청수는 통금이 풀리는 즉시 집을 나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밤을 새워 고민한 것이 과연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안전한가였다. 조직원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왼팔이라고, 수족처럼 부리던 조혁이에게 배신당하고 보니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해를 풀기 위해 섣불리 큰형님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도움을 청하고 대체 갑자기 일이 왜 이렇게 진창이 되어 버렸는지 조금이라도 정보를 알려줄만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철구가 싸늘한 시체가 되서 잠들어 있는 병원에도 가야 했고 또 서울을 벗어나려면 얼마 정도의 자금도 필요했다.
청수는 밤을 새워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생각했고 고심 끝에 결심했다. 그 사람도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의 의리를 믿어봐야 했다.
청수는 동전을 집어넣고 번호를 누르기 직전까지도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어렵게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연결된 후 딸깍 누군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초애.”
“아, 선생님이셔요? 이른 아침에 웬일이셔요?”
초애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초애, 나요.”
“예. 선생님, 평안하시죠?”
선생님? 누가 옆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옆에 누가 있소?”
“서방님을 뫼시고 있습니다.”
“서방님?”
청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셔요?”
“서방님이라니?”
청수가 고함치듯 물었다.
그새, 만나지 못한 며칠 사이 다른 남자를 떠받들었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청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야?”
누구야? 라고 묻는 목소리가 끼어드는 순간, 청수는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틀림없이 호석이었다. 박호석. 호석이, 이놈이 초애까지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초애는 청수가 사라진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곁에는 호석이 도사리고 있고 난데없이 새벽녘에 청수가 전화를 걸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애는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었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명물기생이었다.
“소리 선생님이셔요. 잠깐만 소리를 낮춰주셔요.”
초애가 말했고 호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호석이 놈이!”
청수가 분함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셔요?”
초애는 청수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하며 몹시도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안 그래도 오늘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차가 필요해. 철구가 죽었어. 병원에 가봐야 해. 차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해. 옷도 필요하고.”
“예, 제가 준비해 갈게요 선생님. 건강은 좀 어떠셔요?”
“9시까지, 아침 9시까지 서울 병원 영안실 쪽에 차를 대기시켜줘.”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 괜찮아.”
“이따 찾아뵐게요.”
초애의 목소리에서 아련함이 묻어나왔다.
“나 서울을 뜰 거야.”
서울을 뜬다는 청수의 말에 초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앞에 없지만 초애가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거야.”
“···그분은, 제가 더 이상 모시지 못해요, 선생님. 다른 분을 서방님으로 모셨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초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청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이른 새벽에 오로지 청수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초애의 방에 호석이 있다면, 그건 초애가 호석의 여자가 됐다는 뜻이었다. 초애가 어떤 여자인데, 초애가 어떤 기생인데, 순순히 호석의 여자가 되었을 리 없다. 대체 호석이 초애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따 봬요 선생님.”
딸깍 초애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청수는 빈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호석이 철구를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초애까지 강제로 쓰러뜨렸다고 생각하자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놈, 박호석, 두고 보자!”
청수의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겨울 허공을 갈랐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초애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리와.”
호석이 초애를 쳐다보며 말했고 초애는 다소곳한 몸짓으로 호석이 알몸으로 누워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초애가 곁에 눕자 호석의 손이 대번에 초애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이건 왜 입고 있어?”
호석이 초애의 속치마가 귀찮다는 듯 훌훌 벗겨 이불 밖으로 내던졌다.
“이 새벽에 소리 선생이 왜 전화한 거야?”
호석이 초애의 발가벗은 몸뚱이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한동안 찾아뵙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 드렸더니 서운하셨던 모양이에요.”
“소리 선생이 남자야?”
“네.”
“몇 살이나 처먹었어?”
박호석의 막말에 초애의 낯이 일그러졌다.
“일흔이 넘으셨어요. 선생님께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저에겐 아버님과 같은 분이세요.”
초애가 냉정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하자 호석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당신의 이런 표정이 내 애간장을 태웠지.”
호석이 초애의 몸 위로 올라왔다.
초애는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시선으로 호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호석의 거친 손이 초애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진짜 사내가 어떤 맛인지 알게 해주지. 진짜 사내의 맛.”
호석이 초애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초애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호석의 목에 팔을 감으며 끌어당겨 안았다.
“어제처럼, 어제처럼 해주세요.”
초애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좋아, 어제처럼.”
호석이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초애의 혀가 호석의 귓불을 핥자 호석의 목구멍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어제처럼······.”
초애가 호석의 목을 더욱 바짝 끌어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초애의 눈 속에선 호석을 불 싸지를 듯한 분노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정사가 끝난 후, 초애는 호석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옷을 갖춰 입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진짜 사내의 맛이라고?’
초애는 당장 들어가 박호석의 목을 조르고만 싶었다.
꽃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 초애는 펌프가로 와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차디찬 물에 입을 헹궈내며 초애는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호석의 손길이 닿았던 몸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짬이 없었다.
초애는 바쁜 걸음으로 태열이의 거처로 옮겨가 낮은 목소리로 태열을 불렀다.
“태열아.”
곧 문이 열리며 태열이가 마루 밑으로 내려섰다.
“따라오너라.”
초애는 태열이를 데리고 바깥채 빈 손님방으로 갔다.
“마 사장님께 가서 차를 빌리거라. 내가 차를 빌려오라 했다하면 내어주실 거다.”
“예, 아씨.”
“마 사장님이 차를 내주시면 곧장 서울병원으로 가서 서방님을 기다려라.”
초애의 말에 태열이가 긴장한 얼굴로 초애를 바라봤다.
“서울병원 후문이다. 대기하고 있다가 서방님이 보이면 모시거라.”
“예, 아씨.”
“박호석의 졸개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조용히 가거라.”
“예, 아씨.”
“순이를 시켜 뒷문가에 짐을 내어놓을 테니 가지고 가서 서방님께 전해드려라.”
“알겠습니다, 아씨.”
“서둘러라. 아홉시 전에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아씨.”
태열이가 돌아서는데 초애가 다급하게 태열이를 불러 세웠다.
“꼭, 서방님을 모셔야 한다.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초애가 다짐을 받듯 말하자 태열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청수에게 전해줄 짐을 꾸려 순이의 손에 넘겨주고 호석이 잠든 방으로 돌아온 초애는 소리 없이 몸단장을 한 후 잠든 호석의 얼굴을 노려봤다.
며칠 전, 동이 트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할 칠흑처럼 검은 밤에 문짝을 부수며 난입한 호석의 모습에 속치마 차림으로 잠들었던 초애는 놀라지 않으려고 애쓰며 호석을 노려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초애는 강한 어조로 꾸짖듯 물었지만 호석은 초애의 말을 무시하며 한쪽 벽에 아름답게 둘러쳐져 있던 병풍을 쓰러뜨리고 구석구석을 뒤지며 누군가를 찾는 듯 방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초애가 다시 한 번 소리쳤을 때 호석이 초애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으며 거칠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청수는 어딨나?”
호석이 소리쳤다.
“놓아주십시오.”
“청수는 어딨나!”
호석이 초애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윽박질렀고 초애의 단정하고 부드럽던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말해, 청수를 어디다 숨겼어!”
호석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당장이라고 숨통을 끊어놓을 듯한 살기였다.
초애는 잘못 행동했다간 이 자리에서 박호석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청수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서방님은 오늘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초애가 침착해지려 애쓰며 대답했다.
“거짓말 하지 마! 그놈이 널 찾지 않았을 리가 없어! 말해, 말해!”
호석은 더욱 거칠게 초애의 머리채를 뒤흔들었다.
“기방을 뒤져 서방님을 찾아내십시오. 거짓말인지.”
초애가 어금니를 악물며 대답하자 호석이 험악한 눈으로 초애를 노려보다가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가서 찾아!”
대기 중이던 부하들에게 소리친 호석이 다시 초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석의 시선이 얇은 속치마 차림의 초애의 몸을 샅샅이 훑어 내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청수는, 조직을 배신했다.”
호석의 입에서 엄청난 말이 터져 나왔다.
초애가 고개를 번쩍 들고 호석을 쳐다봤다.
호석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감히 형님의 목에 칼을 겨눈 놈이 바로 청수다.”
초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호석을 쳐다봤다.
“형님이 청수의 제거를 명령하셨어. 난 놈을 죽일 거다. 형님의 명령을 받들어.”
초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청수가 그럴 리가 없었다. 조직의 큰형님의 명이라면 초애와 사랑을 나누던 중에도 멈추고 뛰어나가던 사내가 청수였다. 큰형님의 안전을 위협하는 놈이라면 누구든 목숨 걸고 막겠다던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큰형님의 자리를 탐내 배신의 칼을 겨누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누군가의 음해였다. 청수가 조직에 있는 한 영원히 3인자일 수밖에 없는 놈의 계획된 음해. 청수로 인해 영원한 3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놈이라면, 바로 호석이었다.
“반드시 청수를 찾아 제거할 거다. 반드시 찾아낼 거야. 놈을 찾아서 내 손으로 처치할 거다. 결코 놈을 살려둘 수 없어. 청수를 숨겨두다가 들키는 날엔 네년의 그 고운 얼굴도 더 이상 들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
호석이 사납게 위협하고 획 뒤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초애가 입을 열었다.
“··· 난 기생입니다.”
“뭐라고?”
호석이 초애를 뒤돌아봤다.
“뭐라고 했나?”
“오로지 한 서방님만 모실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그저 이불속에서 모시는 서방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초애의 말에 호석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 서방만 모실 이유가 없다?”
호석이 초애의 곁으로 다가와 우뚝 멈춰 섰다.
“정말 청수가 오지 않았나?”
“오지 않았습니다.”
“이 기방에서 찾아내면?”
“형님! 기방엔 없습니다!”
초애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호석을 올려다보는데 밖에서 상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오지 않았군. 하지만 이리로 올 것이 틀림없어. 놈이 숨을 만한 곳은 초애 당신의 품밖에 없거든.”
“설마, 이곳으로 오실 만큼 둔하시겠습니까.”
초애의 말에 호석의 입술이 살며시 비틀어졌다.
“흥! 놈이 어디에 있건! 또 놈이 이리로 온다면 내 손으로 직접 목줄을 끊어주겠어.”
호석이 이를 갈 듯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가서 놈을 찾아! 반드시 잡아와!”
호석이 마당을 향해 소리치자 호석의 부하들이 부산스럽게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호석이 초애를 남겨두고 떠나려고 몸을 돌리는데 초애가 살며시 호석의 소매를 잡았다.
“지금 꼭 가셔야겠습니까?”
초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슨 뜻이지?”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습니다. 겨울밤이 깁니다.”
“그래서?”
“오늘밤 제가 뫼시게 해주십시오.”
초애의 말에 호석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씨 태열입니다. 괜찮으십니까?”
헐레벌떡 초애의 방 앞으로 뛰어든 태열이 걱정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괜찮다. 뒤채 사랑방에 잠자리를 준비하거라.”
초애의 말에 태열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올려다봤다.
“금침으로 준비하거라. 서방님께서 묵으실 거다.”
초애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잠자리가 준비되면 서방님을 모시거라. 순이를 깨워 술상을 준비하라고 이르고.”
태열이가 복잡한 시선으로 초애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러갔다.
“제가 뫼시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초애가 살짝 열린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손으로 살며시 가리며 말했다.
보드라운 감촉이 상상되는 젖가슴이 옷깃 사이로 보이자 호석의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초애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별별 짓을 다했건만 엉뚱한 청수 놈에게 뺏기고 몇날 며칠을 이를 갈았었다. 그렇게도 도도하던 초애가 청수의 여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당장에 달려와 두 연놈의 목을 따고 싶었었다.
청수의 여자가 되기 전에도 그랬지만 청수의 여자가 되고 난 후 호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초애 년이 스스로 모시겠다고 나서자 호석은 어떤 승리감을 맛보았다.
역시 영리한 년이었다. 청수가 조직에서 퇴출되자 바라볼 게 없어진 쓸모없는 놈을 버리고 권력을 쥔 놈을 붙잡겠다는 뜻이었다. 청수와 먼저 몸을 섞은 년이라 찝찝한 감은 있었지만 품고 싶어 안달했던 년이 스스로 몸을 던지니 물리칠 이유가 없었다.
“아씨, 사랑방에 잠자리와 술상이 준비되었습니다.”
밖에서 태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방님을 뫼시거라.”
초애가 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석이 씩 미소를 지으며 초애의 손을 잡았다.
“몸단장을 하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몸단장? 그런 거 필요 없어.”
호석은 초애의 팔목을 움켜잡고 방을 나갔다.
속치마 바람으로 호석의 손에 끌려나오는 초애의 모습을 본 태열이가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랑방 근처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거라.”
“예 아씨······.”
“물러가거라.”
태열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조용히 물러갔다.
초애는 호석에게 손목을 잡힌 채 질질 끌리듯 뒤채 사랑방으로 갔다.
사랑방에는 일러둔 대로 화려한 금침이 깔려 있었고 그 곁에 급하게 준비한 듯한 술상이 놓여 있었다.
호석은 사랑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초애를 이불 위에 쓰러뜨린 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밤 모시게 해달라는 초애의 말을 듣는 순간, 부풀기 시작한 아랫도리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 간절하게 초애의 몸속으로 들어가길 고대하고 있었다.
“약주 한 잔도 안하시겠습니까?”
“필요 없어. 술은 나중에 하자고.”
호석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으며 초애는 옷을 벗기 위해 속 윗저고리 앞섶을 풀었다.
“내가 벗길 거야. 가만히 있어.”
호석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고 초애는 앞섶을 풀던 손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알몸이 된 호석이 초애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호석의 몸 중앙에서 무섭게 부푼 남성이 초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애는 알몸의 호석이 들고 서 있는 칼을 쳐다봤다.
“칼을 든 채로 절 사랑해주실 겁니까?”
“칼이 무섭나?”
“무섭습니다.”
“내려놓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호석은 몸을 굽히더니 초애의 속 윗저고리를 붙잡고 찢어버렸다. 젖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며 여며져 있는 속치마 위로 봉긋하게 가슴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초애의 젖가슴을 노려보던 호석이 천천히 칼날을 초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초애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젖가슴에 와 닿는 싸늘한 칼날을 느끼고 있었다. 칼날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초애의 젖가슴에 여며져 있던 속치마 끈을 잘라놓았다. 야무지게 감겨 젖가슴을 억누르던 것이 편해진다 싶더니 젖가슴 아래로 속치마가 흘러내렸다.
호석의 이글거리는 두 눈에 초애의 젖가슴이 보였고 곧 젖꼭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호석은 그제야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초애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이제 넌 내 여자다!”
호석이 승리에 찬 어조로 소리치더니 초애의 젖꼭지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호석은 입안으로 빨려 들어온 초애의 곤두선 젖꼭지를 핥아대며 남은 젖가슴 한쪽을 움켜잡았다.
“아······.”
초애의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호석의 입술이 잠깐 떨어지더니 반대쪽 젖꼭지를 빨아 당겼다.
초애는 눕혀졌고 몸 위로 호석의 체중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방님······.”
초애가 호석의 탄탄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불렀다.
호석은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더욱 흥분하며 초애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작고 앙증맞고 도톰한 초애의 입술. 초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맛보고 싶어 안달하던 입술이었다. 초애의 입속으로 침범한 호석의 혓바닥은 초애의 입안을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두 사람의 끈끈한 타액이 서로 섞이고 혀가 엉켜들며 호석의 손길은 더욱 거칠고 다급해졌다. 초애의 얇은 속치마를 치쳐 올린 호석의 손은 초애의 둔덕은 어루만지며 초애의 희고 부드러운 목덜미를 핥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해.”
“서방님을 원해요. 참을 수가 없어요.”
초애가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호석의 손길이 기다렸다는 듯이 초애의 속옷 속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고 약간은 까칠한 숲이 만져졌다. 호석은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다시 초애의 입술을 삼켰다. 호석은 입술로는 초애의 혀를 빨아 당기며 초애의 숲속을 헤치고 뜨겁고 촉촉한 그곳을 손에 넣었다.
“빨리.”
초애가 숨이 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애원하자 호석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초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초애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고 들어왔다. 호석은 초애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고는 몸을 숙여 살짝 초애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호석의 무섭게 일어선 남성이 초애의 숲을 가로지르며 침범했다.
“아아······.”
초애가 끊어질 듯한 신음을 토해냈다. 초애는 그렇게 호석의 여자가 되었다.
호석은 청수를 찾기 위해,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초애는 어떻게 하든 호석을 붙잡아 청수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청수에게 몸을 주기 전, 이미 마음을 열었던 초애는 청수가 버리지 않는 한 그의 여자로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청수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주며 자신의 인생에 다른 사내는 없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호석을 붙잡아야 했다. 호석을 붙잡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붙잡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청수를 찾아내 죽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애는 살은 섞었을지언정 결코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잠든 호석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철구의 집으로 돌아온 호석은 경구를 흔들어 깨워 옷을 입혔다. 서둘러야 했다. 놈들의 눈을 피해 철구를 만나려면 일찌감치 나서야 했다.
“어디가요?”
잠이 덜 깬 얼굴로 경구가 물었다.
“철구 만나러 가자.”
“형이요?”
경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가서 철구가 확실한지 확인도 하고. 그리고 경구야,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라.”
청수를 바라보는 경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우린 서울을 떠날 거다.”
“어디로 가요?”
“글쎄,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건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거다.”
“아저씨하고 저하구요?”
“그래, 이제 내가 널 책임질 거야. 날 믿으면 돼.”
“형은요?”
경구가 슬픈 얼굴로 물었다. 경구는 형인 철구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죽은 사람임에도 서울에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슬픈 모양이었다.
“철구는··· 나중에, 나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올 거다. 그때 만나자.”
“······.”
“알았지?”
“···예.”
경구가 풀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자.”
청수는 일어나려다 옆구리의 통증으로 움찔 주저앉았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괜찮아. 가자.”
청수는 경구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초애와 통화를 끝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내지른 주먹이 공중전화를 박살내버렸고 그 바람에 공중전화 속에 들어있던 동전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딴 잔돈푼에 눈길도 주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비참한 처지는 청수로 하여금 바닥에 쏟아진 동전을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게 만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쩔렁거리는 동전소리를 들으며 청수는 비애감에 다시 한 번 어금니를 틀어 물었다. 이대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청수, 이대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병원으로 내달린 청수는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동전을 꺼내 뜨악해하는 기사의 손에 쥐어주고 택시에서 내려섰다.
혹 잠복해 있을지도 모를 호석의 칼잡이들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병원 주위를 살핀 청수는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구의 손을 잡고 병원을 가리켰다.
“잘 봐둬라. 저기가 후문이다. 응급실 보이지? 저기가 후문이다.”
“예 아저씨.”
“들어가자.”
청수는 경구를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시간 전인지 접수창구에는 사람이 없었다.
“젠장.”
시계를 쳐다보자 아침 여덟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안되겠다.”
청수는 경구의 손을 꼭 잡고 직접 영안실을 찾아 나섰다. 병원이 영업을 하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조혁이가 경구를 찾아왔었다고 했다. 바로 어제. 경구는 조혁이더러 형이 병원 영안실에 있다는 것을 경찰이 알려줬고 조혁이가 철구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조혁이가, 아니 호석의 똘마니들이 철구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철구를 찾아내야 했다. 놈들이 철구의 시체에 손을 대게 할 수는 없었다. 형님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철구였다. 철구를 지켜주지 못한 못난 형이니 장례라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치러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병원 안을 이 잡듯 뒤진 청수는 지하층 복도 맨 끝에 있는 시체보관소를 찾아냈다. 시체보관소 앞 역시 아무도 없었다. 청수는 사방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시체보관소의 문을 열었다. 그저 차갑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닌 싸늘하고 불쾌한 서늘함이 온몸을 감싸며 끼쳐왔다.
경구가 움찍거리며 청수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경구 녀석도 청수와 같은 불쾌하고 무서운 뒷맛을 느낀 모양이었다.
시체보관소 안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청수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내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무시무시한 분위기로 버티고 서있는 냉동고들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을 받아 괴기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에요?”
경구가 약간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 내가 있으니.”
청수는 경구를 달랜 후 시체보관소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시체를 보관하는 냉동고는 한두 개가 아니어서 철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청수는 냉동고를 하나씩 더듬으며 이름표에서 철구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진철구라는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보자 청수는 울컥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철구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철구야······.’
청수는 쓸쓸하고 울컥거리는 심정으로 철구의 이름표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다잡고 냉동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린 냉동고 안에서는 또 다른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불쾌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맡아졌다. 죽은 사람의 냄새일 것이다. 죽은 사람의, 생명을 잃은 동물의 그것. 시취.
청수는 들것에 손을 대고 앞으로 쑥 잡아당겼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덮인 흰 시트 밑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느껴지는 실루엣이 잡혔다. 철구가 잠들어 있었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경구는 겁먹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
“무서워요, 아저씨.”
경구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청수는 천천히 흰 시트를 걷어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청수가 알고 있던 철구처럼 느껴지지 않는 낯선 철구가 꽁꽁 얼어붙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철구야······.”
청수는 철구의 가슴에 손을 댔다. 섬뜩한 차가움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청수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큰형님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내 자리를 너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동생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죽자고 맹세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형님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고 청수는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못난 형이었다.
“철구야, 미안하다. 하지만 약속한다. 내가 반드시 복수할 거다. 네 억울한 죽음을 내가 복수해주겠다.”
청수는 철구의 피로 얼룩진 옷깃을 부여잡고 맹세했다.
“경구야, 가까이 와라.”
“형이에요?”
“가까이 와서 형한테 인사해라.”
“싫어요, 무서워요. 우리 형 아니에요.”
경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러섰다.
“봐야 한다. 네 형이야.”
청수가 경구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경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청수를 바라보다가 조금 다가섰다.
경구는 몹시도 복잡한 시선으로 형, 철구의 죽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경구가 대답 없는 철구를 불렀다.
“형이다. 형이 이렇게 죽었다. 내가 네 형의 원수를 갚아줄 거다. 오늘 형의 모습을 잊지 마라. 알았냐?”
청수는 결연한 음성으로 확인시키듯 말했다.
“···예.
“절대 잊지 마라, 절대!”
청수가 경구가 아닌 자신의 뇌리에 각인시키듯 힘주어 말했다.
“뭐하는 겁니까? 누구요?”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어 고개를 돌리자 경비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을 데리러 왔소. 내 동생이요.”
“접수를 하고 절차를 밟아야지, 병원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맘대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 거요? 당장 나가요, 당장!”
경비가 달려들더니 드러난 철구의 시체에 흰 시트를 다시 덮은 후 냉동고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멈춰!”
청수가 고함을 지르며 경비의 손을 쳐냈다.
“이봐요, 절차를 밟으란 말이에요!”
경비가 청수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는 순간, 경비의 목줄에 서슬 퍼런 청수의 칼이 와 닿았다.
“왜, 왜 이러십니까? 살, 살려주십시오.”
경비가 놀란 만큼이나 경구도 놀란 듯 뒷걸음질쳤다. 어린 경구에게 이런 무서운 상황을 보여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경구야.”
“예, 아저씨.”
경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가서 병원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후문이요?”
“아까 봤지? 후문이다. 곧 가마. 어서 가!”
“예, 예.”
경구가 마른 침을 삼키며 목에 칼이 겨누어져 새파랗게 질린 경비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싸늘한 표정의 청수를 쳐다본 후 시체보관소를 나갔다.
“이 사람은 내가 데려갈 거야. 알았나?”
청수가 철구의 시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럴 수 없습니다. 접수를 하고, 그리고······.”
“내가 데려간다, 소리를 지르는 날엔, 허튼 수작을 하는 날엔, 저기가 네놈 자리가 될 거다.”
청수가 철구가 잠들어 있는 냉동고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낮게 윽박질렀다.
경비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이자 청수가 천천히 경비의 목에서 칼을 치웠다.
청수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초애와 병원 후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9시에서 15분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잠깐, 아주 잠깐 죽은 동생과 재회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끔찍할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청수는 조용히 시체보관소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인기척은 없었다. 복도 중간쯤 환자이동용 침대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있는 밀것을 가져와. 내 동생을 옮겨야 하니.”
“밀, 밀 것요?”
경비가 환자이동용 침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는 경비의 뒤에 바짝 붙어서 복도를 나가 침대를 밀고 시체보관소로 돌아왔다.
“옮겨.”
경비와 함께 철구를 침대에 옮겨 실은 청수는 한쪽에 곱게 챙겨져 있던 시트를 펼쳐 철구를 꽁꽁 싸기 시작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다가 실수로 시트가 벗겨지면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트 몇 장으로 철구를 꽁꽁 싸맨 청수가 마지막으로 시트 한 장을 덮어주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비와 청수가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자국은 분명히 시체보관소를 향해 오고 있었다.
“무조건 침대를 밀고 병원 후문으로 가. 알았나?”
청수가 경비에게 윽박지른 후 철구를 꺼낸 냉동고의 문을 닫고 이름표를 잡아떼 주머니에 쑤셔놓고는 침대 아래쪽으로 기어들어가 침대에 매달렸다. 경비가 시트를 내려 침대 아래쪽을 가리려는 순간 시체보관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진철구 사체를 수습하러 왔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철구씨요?”
“어딨소?”
“난 여기 담당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담당자가 곧 올 테니 그때 물어보세요.”
“담당자는 언제 오나?”
조혁의 목소리였다.
“곧 올 겁니다.”
경비는 천천히 청수가 매달려 있는 침대를 밀기 시작했다.
문턱을 넘느라 덜컥거리자 청수는 필사적으로 침대에 매달려야 했다.
“그 시체는 어디로 가는 건가?”
경비를 향해 날카롭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상각이의 목소리였다. 박호석의 오른팔.
“이건, 이건··· 장례식장으로 갑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멈춰섰던 경비가 더듬거리며 대꾸하고는 다시 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상각이의 다리가 침대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청수는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경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데 다리가 침대 앞에서 멈춰 섰다.
“벗겨봐.”
“예?”
“벗겨보라고!”
상각이 위협적으로 말하자 경비가 망설이다가 시트를 걷었다.
“뭐야? 꽁꽁 싸맸잖아? 들춰봐.”
“안됩니다. 이분은 지금 장례식장으로······.”
“닥치고 열어!”
상각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씨발······.’
청수는 이대로 매달려있다간 죽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철구를 데려가야 하는데 놈이 철구를 확인하게 된다면 그냥 보내줄 리가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경비가 꽁꽁 싸매두었던 시트를 풀어헤치고 막 걷어 젖히려는 찰나 청수의 날카로운 사시미가 상각이 놈의 허벅지 깊은 곳을 향해 쑤셔 박혔다. 상각이 놈의 허벅지 깊숙이 박힌 칼끝에 뼈가 부딪히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청수는 지체하지 않고 칼자루를 잡고 한 바퀴 돌려버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상각이 놈의 목구멍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아악!”
상각이 허벅지를 싸매고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청수는 침대 밑에서 뛰어내려 뛰기 시작했다.
“뭐야? 뭐냐?!”
시체실에 있던 호석의 부하들이 달려 나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형님!”
“하청수다! 잡아라!”
상각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청수는 뒤돌아다봤다. 놈들이 아니라 끝내 두고 떠나야 하는 철구 때문이었다. 철구의 시체는 침대에 눕혀진 채 멀어지고 있었다.
‘철구야, 미안하다. 형을 용서해라······.’
청수는 옆구리의 통증도 허벅지의 통증도 잊은 채 병원 후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놈들이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고 있었다. 청수는 살아야 했다. 철구를 위해서라도, 경구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살 수 있으리라, 지옥 같은 이 고비만 넘기면!
계단을 뛰어 1층으로 올라온 청수는 응급실을 향해 뛰었다. 응급실을 통과하면 후문이 나올 것이다. 제발, 초애가 약속을 지켜주어야 할 텐데.
영업시간이 다되어서인지 1층 로비에는 사람이 제법 모여들어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청수는 사력을 다해 뛰었다.
“거기 서! 잡아!”
놈들의 고함소리가 청수를 따라붙고 있었다.
응급실로 뛰어든 청수는 저기 앞에 보이는 후문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청수가 뛰어들고 청수를 뒤쫓는 놈들이 칼을 앞세우며 뛰어들자 응급실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응급실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피하는 사이 청수는 코앞까지 다다른 후문의 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저씨!”
경구의 외침이 들렸다.
뒤돌아보자 경구가 후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경구야, 뛰어!”
청수가 경구의 팔을 낚아채고 뛰는데 후문이 열리며 놈들이 달려 나왔다.
“저기 있다. 잡아라!”
놈들이 고함을 지르는 찰나 굉음을 일으키며 돌진해오는 검은 지프차가 보였다. 청수를 향해 곧장 달려오던 지프차는 청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놈들을 향해 질주했다.
“피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차를 보고 놀란 놈들이 차를 피해 몸을 날리자 지프는 급하게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청수를 향해 돌진해왔다.
“타세요!”
청수의 옆에서 지프차가 멈추는가 싶더니 누군가 소리를 내질렀다.
“어서 타세요!”
태열이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고 청수는 지프 문을 열어 경구를 집어던지듯 태운 후 자신도 올라탔다. 청수가 올라타자 지프는 다시 한 번 굉음을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냐!”
“초애 아씨가 보내셨습니다.”
“초애가?”
초애가 약속을 지켜준 것이다.
“초애는 어딨나?”
“아씨는 못 오셨습니다.”
“··· 호석이가 초애를 붙잡고 있나?”
“······.”
태열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병원을 빠져 나갔다.
청수가 뒤를 돌아다보자 미친개처럼 헐떡이며 쫓아오던 놈들이 포기한 듯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태열이가 모는 지프는 병원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더 달리는 동안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놈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되었을 즈음 태열이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의자 밑에 아씨께서 챙겨주신 가방이 있습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셨으니 갈아입으십시오.”
태열의 말에 청수는 밑에 놓여 있던 커다란 가방을 끌어올려 열어 보았다. 청수가 갈아입을 옷가지와 돈뭉치가 들어 있었다. 혹 초애가 편지라도 한 장 써 보냈을까 싶어 가방 안을 뒤졌지만 편지는 없었다.
“초애가 다른 말은 없었나?”
“··· 사장님을 안전하게 모시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은? 갑자기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나도 모르고 있다. 혹, 초애가 알려주지 않았나?”
“박호석이가 하 부장님이 조직을 배신했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내가 조직을?”
청수는 너무나 어이없어 말을 잇지 못한 채 태열이의 뒤통수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조직의 우두머리 자리를 탐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청수가 격분해서 주먹으로 창문을 후려쳤다.
“내가, 조직을 배신했다고? 형님의 자리를 탐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호석이가 그렇게 말했나? 박호석이 그놈이?”
“예.”
“미친놈, 망할 놈!”
청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부수고만 싶었다.
“초애는? 초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씨는 하 사장님께서 조직을 배신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다.”
태열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흘 전 쯤 박호석이 야밤에 갑자기 들이닥쳤고 기방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씨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하 부장님을 내놓으라 위협했습니다. 박호석을 붙잡지 않으면 하 부장님을 해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태열이가 말끝을 흐렸고 청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초애는 무사하겠지?”
“무사하십니다.”
청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열아.”
“예.”
“초애를 잘 보살펴줘라.”
“예······.”
“그리고······.”
청수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해라.”
“예.”
“내가 반드시, 복수한다고.”
“예.”
초애······.
청수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초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도한 아름다움으로 기방을 찾는 손님들의 속을 달궈놓던 명물기생 초애. 청수의 몸 아래서 끊어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녹아내리던 여자.
초애는 청수의 여자였다. 2년 전 초애의 기생집에서 처음 만났었다. 여느 기생과는 다르게 교양이 넘치고 단아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도도한 모습에 반했었다. 초애에게 반한 사람은 청수뿐이 아니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신 호석이도 초애에게 반해 뻔질나게 초애가 있는 기생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초애는 청수와 호석보다도 일곱 살이나 많은 여자였음에도 그 아름다움은 열여덟 숫처녀처럼 깨끗해서 초애의 기생집을 찾는 모든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애가 소리를 할 때나 가야금을 퉁길 때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고 수다스럽지 않고 경망스럽지 않은 자태는 남자들의 애간장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초애의 마음을 얻기 위해 더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호석이었는데도 정작 초애가 마음을 열어준 사내는 청수였다.
“오늘밤엔 제가 모시겠습니다.”
큰형님의 신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임무가 주어졌고 임무를 성공리에 마쳤던 날 밤이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초애의 기생집을 찾은 청수는 초애의 시중을 받으며 취하지 않을 정도로 약주를 했었다. 초애가 취해 개차반이 되는 남자를 가장 싫어한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 청수는 단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날도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마셨고 초애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신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모시겠다고 말한 것이다.
청수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초애는 시중들을 시켜 상을 치우게 한 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자신의 거처로 청수를 이끌었다. 그날 초애와 사랑을 나누었고 초애는 청수에게 속했다.
박호석은 조직에서의 청수 자리를 빼앗고 철구를 죽인 것도 모자라 초애까지 강탈해갔다. 진작부터 호석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놈의 눈빛이 갈수록 음흉해진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뱀 같은 놈!
“자네라면 어쩌겠나?”
그때, 호석의 질문에서 뭔가 미심쩍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청수가 호석을 만난 것은 5년 전이었다. 청수와 호석이 한 보스를 모시는 가족이긴 했지만 서로 책임지고 있는 구역이 다르다보니 어쩌다 한 번씩 인사만 나누고 얼굴만 익힌 정도에 불과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조직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청수는 호석을 지원해주기 위해 호석이 담당한 구역으로 달려갔었다. 호석은 적들의 수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청수는 시기적절하게 호석을 도우러 나타난 것이다.
그때 청수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호석은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호석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오는 칼날을 막아 세운 사람이 하청수였다. 청수는 호석의 목숨을 노린 놈의 등을 갈라놓고 제법 깊은 상처를 입은 호석을 보호했었다.
“괜찮나?”
“누군가?”
“같은 식구도 못 알아보나? 나야, 하청수.”
“하청수 종로식구군!”
그날 호석의 목숨을 청수가 구하면서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만나 술을 마시고 같이 당구도 즐겼다.
“우린 의리로 뭉쳤어.”“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둘은 절대 변하지 말자고. 약속할 수 있지?”
이런 말도 했었고,
“자넨 내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는 것을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을 거야.”
호석이 그렇게 이젠 개죽으로나 쓸 맹세도 했었다.
호석이 자네라면 어쩌겠나 하는 묘한 질문을 했던 때도 호석과 내기 당구를 치고 있었다. 청수가 보스의 오른팔로 올라서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보스의 오른팔에 대한 예우로 부장이라는 직급을 부여받고 호석이와 비로소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됐다.
청수가 호석의 목숨을 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서 말을 트고 지냈지만 사실 서열상으로 호석이는 한참 위에 있었다. 청수가 보스의 오른팔로 올라서면서 서열 높던 친구 호석이와 같은 눈높이가 된 것이다.
호석이는 청수가 높은 서열로 올라선 것을 축하해주었었다. 물론 순전히 겉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보스 말이야, 제일 친한 친구도 발라버렸다면서?”
청수가 내리 세 판을 이겨서 호석의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을 때, 호석이 뜬금없이 보스의 얘기를 꺼냈었다.
“정말 가까운 친구였다 하더군.”
“왜 그랬대?”
“보스와 친구는 아마 보스 자리를 서로 노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형님이 보스 자리를 물려받고 친구는 형님의 참모가 됐다고 하더군. 그런데 보스 자리를 놓친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상해 있었던 모양이야. 보스를 제거하고 조직을 손에 넣기 위해 다른 조직에 정보를 팔다가 발각됐다 하더군. 살려둘 수 없었겠지.”
“그래서 친구를 제거한다··· 정말 냉정한 사람이군.”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청수는 보스의 편을 들었다. 자신이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친구를 제거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듯.
“자네라면 어쩌겠나?”
그때 호석이 그렇게 물었었다.
“뭘 말이야?”
“자네가 보스가 되고 싶은데 보스가 자네 친구한테 자리를 물려준다면?”
호석이 물었고 청수는 픽 웃었다.
“보스가 나한테 자리를 물려준다면 당연히 받을 테고 내가 아니라 내 친구, 바로 자네에게 물려준다면 깨끗하게 승복하고 자넬 형님으로 모실 거야. 그런 경우라면 친구를 제거할 일은 없겠지.”
“정말 깨끗하게 승복할 텐가?”
“물론이야. 형님의 결정이니까.”
“하지만 보스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건 분명하지?”
“당연하지.”
“그런데 내가 승복하지 못한다면?”
호석이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솔직한 대답.”
“당연히··· 제거해야겠지. 배신엔 칼로 대답하는 수밖에.”
청수가 낮지만 확고한 어조로 대꾸했고 잠깐 동안 어색한 분위기에서 말이 없던 두 사람은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을 청수는 그동안 잊고 있었다. 호석이놈이나 자신이나 보스가 되고 싶은 욕망의 크기는 똑같았기에 굳이 호석의 말을 마음에 끼지 않았었다.
그런데 놈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괜스리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날, 같은 서열의 둘도 없던 친구 호석이가 저승사자가 됐던 그날, 청수는 부하들과 회식자리를 갖느라 제법 거하게 술에 취해 철구와 함께 숙소로 돌아오고 있었다.
큰형님이 형님을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형님이 다음에 보스가 되시면 형님의 오른쪽 자리는 꼭 저를 주셔야 합니다 하는 철구의 추켜세우는 말을 들으며 은근히 우쭐해하고 있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맡아졌다. 숙소 주위가 오늘 따라 유달리 칠흑처럼 어둡다고 생각하는데 발밑에서 우둑하고 뭔가 밟혔다. 청수는 감으로 무엇이 발에 밟혔는지 알 수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이었다. 청수는 조용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숙소 근처를 환하게 밝히던 가로등이 깨져 있었다.
“철구야.”
청수가 낮게 철구를 불렀다.
“예, 형님.”
“숙소에 누가 오기로 했냐?”
“아뇨, 애들 모두 회 식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숙소 주위에 그림자가 쫙 깔렸다.”
청수가 낮게 경고하자 철구가 재빨리 코트자락 안에 숨겨두었던 니뽄도를 꺼내 움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검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석의 부하들이 달려 나왔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태열이의 물음에 청수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을 아프게 휘저어 놓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뭐라고?”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태열이가 다시 물었다.
“서울을 떠날까 한다.”
“······.”
“서울을 벗어난 곳에 내려다오.”
“예.”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던 청수는 문득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깐 들를 데가 있다.”
“말씀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 한상이 아빠가 정오가 가까워지는 데도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아침도 거르고 나가 몹시도 춥고 배고플 텐데 여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한상이 엄마는 걱정스러워 벌써 수십 번째 방문을 열어보고 있었다.
“한상아, 아빠가 늦으시네?”
한상의 엄마 입에서 팔자처럼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름이 막 지났을 때 일자리를 잃은 남편은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의 배를 곯게 하지 않으려고 매일 새벽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일만 시켜준다면 공사장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책상 앞에서 책만 들여다보던 사람이라 별다른 기술이 없으니 공사장에서도 번번이 쫓겨나고 말았다.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고 해서 근근이 수제비라도 끓여먹으며 끼니를 채웠지만 연탄은 떨어진 지 오래라 사방 돌아다니며 땔감을 구해와 가까스로 방에 불을 올렸다. 제대로 먹는 게 없으니 젖도 말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한상이가 부족한 젖으로 부쩍 보채고 있었다. 쌀 살 돈이 없으니 우유를 살 돈도 당연히 없었고 그렇다고 어린 것에게 수제비를 먹일 순 없고 어른은 굶어도 새끼는 먹여야겠다는 맘으로 또다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공사장 일거리라도 찾아 나섰는데 잘된 것인지, 잘못 돼 집에 돌아올 낯이 없어 오늘도 쓸쓸하게 거리만 헤매고 다니는지 한상 아빠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배 고프니?”
한상이가 엄마의 젖가슴에 코를 비벼대며 칭얼거렸다.
한상이 엄마는 젖을 내어 아가의 입에 물려주며 또다시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아빠가 일자리를 구해야할 텐데······.”
한상이 엄마가 소망을 담아 중얼거리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당신이에요?”
밖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곧 인기척도 사라졌다.
“누구지?”
한상이 엄마는 아기에게서 젖을 빼내고 방문을 열었다.
“당신이에요?”
다시 한 번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은 듯 대답소리가 없었다.
“잘못 들었나?”
도로 방문을 닫으려던 한상엄마는 신발이 놓여 있는 디딤돌에 무엇인가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안고 있던 한상이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디딤돌 옆에 신문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뭐지?”
한상 엄마는 조심스럽게 신문지 뭉치를 펼쳐보았다.
신문지뭉치 안에는 금방 잡아떼 온 듯한 신선한 쇠고기 덩어리와 돈뭉치가 들어 있었다.
“어머나!”
한상 엄마는 너무 놀라 얼른 신문지를 도로 뭉쳤다.
“한상 아빠? 한상 아빠 왔어요?”
어쩌면 남편이 일자리를 구해 고기와 돈을 가져왔을지도 모fms다는 생각에 남편을 외쳐 부르던 한상 엄마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일자리를 구했다지만 첫날부터 고기를 끊어주고 돈을 주는 일자리 주인이 어디 있겠나 싶어서였다.
신문지 뭉치를 보고 망설이던 한상 엄마는 얼른 품안에 껴안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뭉치를 푼 한상 엄마는 뭉치 안에 들어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펼쳤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상이 부모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앞으로도 두고 두고 갚겠습니다. 하청수.’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호석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책상 앞에 일렬로 도열한 부하들이 고개를 숙인 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호석의 주먹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수가 틀림없었나?”
“예, 형님.”
상각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수가 틀림없는데 놓쳤단 말이야!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아니나 다를까 호석이 책상 너머로 몸을 날리더니 상각을 비롯해 부하들의 면상을 돌아가며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섯 놈이 청수 한 놈을 못 잡고 놓쳤단 말이야?”
호석의 주먹이 부하들의 얼굴을 매섭게 후려쳤다. 호석의 주먹에 자세가 흐트러지고 고개가 저만치 돌아갔던 부하들이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부하들을 대표해 상각이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죽여주십시오.”
“닥쳐!”
호석이 고함을 내질렀다.
“쓸모없는 새끼들!”
호석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쳤다.
“누군가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청수를 태우고 사라졌습니다.”
상각의 말에 호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기다리고 있다가 청수를 태우고 사라졌다니? 누가?”
“지프였습니다.”
“청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나를 배신하고 청수를 도운 새끼가 누구야!”
호석의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사무실을 울렸다.
호석은 청수의 부하로 있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편이 된 놈들을 우선 의심했다. 살기 위해 자신을 선택했다지만 놈들은 청수를 제거하기 전날까지도 청수의 수발을 들던 놈이었다. 청수가 아니라 박호석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했다지만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청수에 대한 연민까지 삽시간에 지웠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겉으론 청수를 배신했을지언정 뒤로 몰래 청수를 도왔을 수도 있었다.
호석의 찢어진 눈초리가 조혁에게 꽂혔다.
조혁이, 청수의 왼팔. 호석이 제거한 철구의 둘도 없던 친구 놈. 청수를 제거하는데 앞장서고 철구의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까지 갔다. 그러나 아주 믿을만한 놈은 아니었다. 청수를 제거하기 위해 청수의 숙소로 떠나던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밝은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놈은 분명, 어떤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조혁이.”
호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조혁이의 이름을 불렀다.
“예, 형님.”
“병원에서 청수를 놓친 것에 대해 내가 널 믿어도 되겠나?”
호석의 물음에 조혁이 긴장한 얼굴을 들어 호석을 쳐다봤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수는 네가 모시던 놈이다.”
“전 형님을 모시기로 결심했고 하청수는 이미 지나간 인연입니다.”
조혁의 말에 호석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만에 하나 조혁이 죄책감의 발로로 청수가 도주하도록 도왔다고 치더라도 꼭 조혁을 탓할 수는 없었다. 죄책감이라면 호석 역시 못지않게 앓고 있었다. 청수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친구였다. 목숨 구해준 값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적도 있었다.
청수를 제거하리라 결심했을 때 호석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결심을 실천에 옮기는 그 순간까지도 호석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바로 청수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그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조직에 대가리가 둘일 수는 없었다. 또한 청수에게 대가리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청수를 제거하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청수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형님의 신임을 얻고 치고 올라올 줄은 몰랐었다. 청수의 솜씨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늘 변방에서만 떠돌았기에 조직의 중심부로 진출하는 것을 먼 훗날의 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청수는 호석이 미처 준비도 못할 사이에 조직의 깊숙한 곳까지 치고 올라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보스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간 호석이 꿈꾸던 보스의 자리를 놓칠 것만 같았다. 청수에 대한 보스의 사랑과 믿음은 대단해서 누가 봐도 다음 우두머리의 주인은 청수였다.
나이가 들고 지병이 깊어지다 보니 보스의 명확하던 사리판단은 점점 더 무뎌지고 있었고 여전히 한결 같은 마음으로 모시는데도 불구하고 저놈이 언제 날 배신할지 몰라 하며 나날이 의심만 늘어갔다. 청수가 없을 때에는 오로지 호석이만 믿던 양반이 어느 날부턴가 청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보스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청수는 어느새 호석의 자리마저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호석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청수보다도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보스의 안위와 조직의 강건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보스는 호석의 몫을 청수에게로 빼돌리려고 한 것이다. 차마 보스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반란이었고 몸통을 제거한답시고 보스를 건드렸다간 호석의 팔을 들어주는 조직원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수는 달랐다. 적절한 이유만 가져다붙인다면 훨씬 더 손쉽게 제거할 뿐 아니라 퇴색됐던 보스의 사랑과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호석은 드디어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상각아.”
“예, 형님.”
“하청수를 제거해라.”
호석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상각을 비롯한 조혁과 수하들이 청수를 잡기 위해 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청수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호석은 얼어붙은 얼굴로 서 있는 조혁이를 쳐다봤다.
청수를 배신하고 자신의 편에 선 부하였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놈이 조혁이었다.
“조혁이.”
“예, 형님.”
“넌 누구보다도 발이 빠른 놈인데 하청수를 놓쳤다.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하지?”
“그, 그건······.”
조혁의 이마에서 진땀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형님께 목숨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절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맹세는 하청수에게도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형님! 전 형님을 모시기로 이미 결심했습니다.”
조혁이 제발 믿어달라는 듯이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듯 말했다.
“제가 반드시 하청수를 찾아내서 제거하겠습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약속할 수 있나?”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아, 며칠만 시간을 주지.”
호석이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조혁을 바라보는데 상각이 호석에게 다가섰다.
“형님.”
조혁의 곁에 있던 상각이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호석을 조심스레 불렀다.
“왜?”
“형님, 하청수를 기다리던 놈이 아무래도 그놈 같습니다.”
상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석이 고개를 획 돌리며 상각을 쳐다봤다.
“그놈이라니?”
“초애의 기방에서 수발을 들던 그 태열이란 놈 같았습니다.”
“뭐야?”
호석은 탁 하고 기가 막히는 것 같았다.
태열이라니, 그럼 초애가 청수를 빼돌렸다는 말은 아닌가.
“틀림없나?”
“놈이 갑자기 지프를 몰고 나타나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얼핏 보았지만 그놈 같습니다.”
“똑바로 말해, 태열이가 틀림없다면··· 이년을!”
호석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자 상각이 날 듯이 달려가 차를 대기했다.
호석이 차에 오르자마자 상각은 자화각으로 차를 몰았다.
“태열이가 틀림없단 말이지.”
“그놈 같습니다, 형님.”
“이년이, 감히 날 속이다니!”
호석은 초애 년에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았다니, 앞에선 갖은 깜찍한 짓으로 안심시켜 놓고 청수를 빼돌린 것이다.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초애 년의 속살이 아무리 감질나게 부드럽다 하더라도, 살포시 돌아다보는 자태가 품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하더라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널린 것이 계집년이니 초애에게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
“개 같은 년!”
호석의 입에서 끝없이 욕설이 토해져 나왔다.
호석이 자화각에 들이닥쳤을 때에는 태열이 초애의 발치에 엎드려 제발 몸을 피하시라 애원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래도 놈들에게 얼굴이 노출된 것 같으니, 놈들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면 아씨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제발 몸을 피하라 빌고 또 빌고 있었다.
“피하셔야 합니다. 아씨, 제발 피하십시오, 아씨.”
“서방님은 어디로 모셨느냐?”
“천안까지 모셨습니다. 아씨, 이러시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몸을 피하십시오.”
“내 걱정은 말고 엇 피하거라.”
“아씨!”
“뒷방 병풍을 치우면 작은 문이 하나 나올 게다. 그곳으로 들어가 이어진 길로 따라 들어가면 곡물창고와 이어져 있다. 순이와 재주껏 피하거라. 다신! 이리로 돌아오면 안 된다.”
“아씨는 어쩌려고 하십니까?”
“나는 박호석이를 맞아야 한다.”
“아씨!”
태열이 초애를 외쳐 부르는데 우당탕 기방을 뒤집으며 몰려오는 무리의 소리가 들렸다.
“아씨, 어서 피하십시오!”
태열이가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어서 가거라. 네가 성한 몸으로 있어야 내 목줄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 나를 거둘 것이 아니냐. 어서 가거라!”
초애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무리들의 발자국 소리는 초애의 방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어서 가거라!”
초애가 태열이를 밀쳤고 태열이는 부들부들 떨며 초애를 바라보다가 곁문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방을 빠져나간 태열이가 뒷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을 그때, 벌컥 초애의 방문이 열렸다. 초애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도 않고 구두를 신은 채로 방안으로 들어서는 호석을 올려다봤다.
“태열이라는 놈을 찾아라.”
“예, 형님.”
호석이 무서운 눈으로 초애를 노려봤다.
“내가 왜 온 줄 알겠지?”
“······.”
초애는 아무런 대답 없이 구ent발로 방바닥을 디딘 호석의 다리만 노려보고 있었다.
“네년이 감히 날 갖고 놀아?”
호석이 초애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머리채를 붙잡고 획 뒤로 젖혔다.
“청수를 어디다 숨겼나, 어디다 숨겼는지 말해!”
“모릅니다.”
“이년이!”
호석의 손바닥이 초애의 뺨에 감겼다 풀어졌다.
“나쁜 년, 나쁜 년!”
호석의 손이 계속해서 초애의 얼굴을 후려쳤고 초애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가 싶더니 입술마저 툭 터지고 말았다.
“말해, 어디다 숨겼어, 말해!”
“모릅니다.”
초애가 어금니를 악물고 대답했다.
“독한 년, 네가 칼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호석이 품속에서 칼을 꺼내들더니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초애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어떻게 해줄까? 코를 잘라줄까, 귀를 잘라줄까, 그렇게도 도도하던 네년을 지나가는 거지새끼도 거들떠보지 않을 추물로 만들어주지. 어떻게 해줄까?”
초애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섭게 호석의 눈만 노려볼 뿐이었다.
“살려달라고 말해봐, 살려달라고 하면, 고운 얼굴은 남겨두지. 어디 살려달라고 해봐.”
“천만에!”
초애가 퉤 하고 호석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년이!”
호석이 초애를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쌍년, 씨발 년이!”
호석은 초애를 짓밟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후려쳤다. 초애의 아름답던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호석에게 밟히고 짓이겨지면서도 초애는 끝내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다. 호석의 구둣발에 관자놀이를 걷어차이며 깜빡 정신을 놓아버린 초애는 호석에게 머리채를 잡혀 펌프가로 끌려가는 것도 몰랐다. 호석이 물 한바가지를 초애의 처참한 얼굴에 퍼부었을 때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흥, 내가 이대로 널 놔줄 줄 알고? 천만에!”
호석이 초애의 얼굴에 칼을 댔다.
“네가 살려달라는 말만 했더라도,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넌 계속 기생 짓을 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늦었어.”
호석이 초애의 얼굴에 침을 튀기며 지껄이고 나더니 칼끝을 세워 초애의 이마에서부터 왼쪽 얼굴 가로질러 턱까지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곱고 연약하고 희던 피부가 쩍 갈라지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네년도 이제 끝이다.”
호석이 초애의 머리채를 놓고 일어섰다.
“형님, 태열이란 놈은 기방에 없습니다.”
상각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없어?”
“달아난 것 같습니다.”
“개 같은 것들!”
박호석은 턱 근육을 실룩거리며 쓰러져 있는 초애를 노려봤다.
“어디 두고 보자. 가자!”
호석은 펌프가에 쓰러져 있는 초애의 피범벅이 된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는 획 돌아서서 기방을 나가버렸다.
초애는 가물가물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호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놈, 이놈, 언젠가는 내가 널 갈아 마실 거다. 언젠가는 내가 널 파멸시킬 거다. 박호석, 이놈!’
초애가 이를 갈며 맹세했다.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박호석의 파멸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끔찍한 통증을 느끼던 초애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
Chapter 2
10년 후.
초인종을 누른지 5초 만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구세요?”
카랑카랑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안주인이었다.
“박진만 씨 소개로 온 유상벽입니다.”
“들어와요.”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돼지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한상의 아버지는 농장주인인 진만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처음엔 약간 불쾌감을 느꼈었다.
배운 짓이 꽃을 가꾸고 나무를 가꾸는 일이었으니 정원사 자리가 나왔다는 말에 활짝 웃어야겠지만 요구사항이 한쪽 가슴을 쑤시게 했다.
“이왕이면 부부가 함께 들어와서 정원도 가꾸고 집안일도 해달라고 하거든.”
“집안일요?”
집안일이라면 가정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지금 있는 아줌마가 나이도 많고 그래서 좀 지저분한 모양이야. 우리 형수님이 나이도 어리고 여간 깐깐한 게 아니거든. 음식마다 머리카락 한 올씩 끼어들었다고 질색 팔색이야. 자네 안사람 손이 맵잖아.”
“글쎄요······.”
“따로 별채도 내준다고 하네. 얼마나 좋은 기회야. 힘들게 돼지 똥 치우고 평생 살 건 아니잖아. 배운 거 써먹고 또 별채도 내주고 월급도 주니 부부가 부지런히 벌면 집 한 칸 마련하는 거 시간문제잖아.”
배운 짓 써먹지 못하고 돼지 농장에서 돼지 똥이나 치우고 살아야 하는 신세도 서러운데 아내에게 가정부 노릇까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상 아빠는 잠자리에 들어서야 겨우 농장 주인의 제안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정말이에요?”
아내가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로 별채도 내주고 월급도 준다고 해요?”
“그렇대.”
“그럼 당장 가야죠.”
“당신, 남의 집살이 할 수 있겠어?”
“왜 못해요? 할 수 있어요. 함바에서 온종일 설거지도 하는데 그 일에 비하면 일도 아닐 거예요.”
아내는 집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도로공사 함바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루 온종일 몇 백 개의 식판을 닦고 또 닦다보니 손톱은 들려서 닳아버렸고 갈라진 피부에 습진이 심해져 짓무르는 바람에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여자의 손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별채를 따로 준다면··· 여기보다는 훨씬 깨끗할 것 아니에요?”
“그렇겠지.”
“한상이 학교도 가까운 곳으로 보낼 수 있을 거고.”
“그럴 거야.”
“여보, 간다고 해요. 당장 간다고 해요.”
3년 전, 전에 살던 달동네가 개발되면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헐 갑에 집을 팔고 나와야 했다. 손에 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서울 시내에 세 식구의 잠자리를 구하기엔 어림도 없었고, 결국 싼 곳을 찾아 헤매다 서울 근교 돼지 농장이 있는 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 살게 됐다.
워낙 가진 돈이 없다보니 집을 수리할 형편도 안 돼 비가 새는 구멍만 대충 막고 싸구려 벽지를 사다 바르고 3년째 살고 있던 중이었다. 원체 낡고 허름했던 집이라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화장실도 집 밖으로 나가 열 걸음은 걸어야 되는 곳에 있었고 시골 뒷간처럼 아래가 뻥 뚫려 오물이 고스란히 다 보이는 재래식인 터라 어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 한상이한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또 아내가 말한 대로 한상이는 논밭이 둘러쳐진 시골길을 지나고도 큰 길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말 위험한 길이었지만 아내는 첫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함바로 향해야 했고 한상 아버지 역시 학교까지 데려다 줄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한상이 혼자 학교 보낼 때마다 마음 한 구속이 늘 걱정으로 묵직했었다.
아내가 쌍수 들고 환영했지만 그렇다고 덥석 좋다고 하기엔 미안한 구석도 있어 며칠을 고민하던 한상 아빠는 결국 아내와 한상이를 위해서라도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철컥 하고 열린 철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한상의 가족은 몇 계단을 오르다 현관문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안주인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열흘 전에 미리 인사차 들렀을 때도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저렇게 팔짱을 끼고 서서 내려다보더니 오늘도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꼽다 할 것 없었다. 어차피 집주인이고 집주인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 하니 말이다.
“어서 와요.”
“안녕하셨어요?”
한상의 엄마와 아빠가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한상아, 인사해.”
한상이 엄마가 한상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 강제로 인사를 시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가 한상이구나?”
“예.”
“그래, 별채에 도배랑 장판 새로 깔았어요. 다른 덴 손 볼 것 없어서 그냥 두고.”
“고맙습니다.”
“짐 먼저 풀고 건너와요. 집안일 하나도 못했어요.”
“예, 사모님.”
“사장님께선 안 계십니까?”
막 들어가려는 사모님에게 한상 아빠가 물었다.
“지금 손님이 와 있어요. 나중에 부르면 와서 인사해요.”
“예, 사모님.”
사모님이라는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난 후 한상이네 식구는 별채로 옮겨왔다.
말이 별채지 한상이네 가족에겐 이보다 더 좋은 집은 없었다. 방도 두 개였고 꽤 널찍한 마루에 싱크대만 붙어 있지만 끼니 해결하기엔 전혀 문제없는 주방에 집안에 있는 깨끗한 화장실, 한상이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싱글벙글 웃었다.
“어머! 여보, 이것 좀 봐요.”
안방으로 들어갔던 뭘 봤는지 소리쳐 불렀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제법 좋아 보이는 장롱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장롱도 넣어 주셨네요. 도배랑 장판도 좋은 걸로 해주셨어요. 싸구려 비닐장판이 아니에요. 세상에 장롱을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일주일 전에 먼저 들렀을 때 짐이 많냐고 묻는 사모님에게 가지고 올만한 집은 거의 없어서 옷가지와 이불만 가져오겠다고 했었다. 장롱도 없냐고 묻는 말에 갖고 올 만큼 좋은 것이 못된다고 했었는데 그냥 흘려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쌀쌀맞고 깐깐해서 인정머리라곤 없을 줄 알았더니 생긴 것 하고는 다르게 이런 잔정도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좋은 장롱을 넣어주셨네요.”
한상 엄마는 장롱을 연신 쓰다듬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그러지, 뭐.”
“한상아, 너도 좋지?”
“응. 좋아, 엄마.”
한상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상 엄마가 가지고 왔던 짐 꾸러미 속에서 수건 두 장을 찾아내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물에 적셔 나왔다.
“깨끗하게 걸레질 한 번 해야겠어요.”
이렇게 좋은 잠자리가 생기고 보니 쓰던 수건 순식간에 걸레 만드는 거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한상 엄마가 신나게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삑삑 소리가 들려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린가 두리번거리던 한상 아빠가 벽에 붙어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자 삑삑 소리가 멎었다.
“안채로 건너오세요.”
“예, 예, 사모님.”
한상 아빠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신통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전화에요?”
“전화는 아닌 것 같은데? 안채랑 연결이 되어 있나 보네.”
“뭐라고 하세요?”
“건너오라고.”
“그럼 어서 가야죠.”
한상 엄마는 걸레를 화장실 안에 던져놓고 서둘러 신발을 발에 꿰었다.
“한상이도 가자. 가서 인사드려야지.”
한상이는 냉큼 일어나 부모님을 따라 안채로 건너갔다.
막 안채의 현관문을 열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새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덩치 좋은 사내들이 줄을 이어 집밖으로 나왔다.
한상이는 험악한 사내들의 표정에 겁을 집어먹고 엄마 뒤로 숨었는데 숨고 싶기는 한상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은 한상이네를 본체만체 하고는 줄을 이어 계단을 내려가 나가버렸다.
“어머나, 뭐하는 사람들인지 무섭게 생겼네요.”
“궁금해 하지 말자고.”
한상 아빠는 아내와 한상이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이리 들어오세요.”
사모님이 손짓해 거실로 불렀다.
“채원이 아빠, 서방님이 소개했다던 그 사람들이에요. 오늘 들어온다고 했잖아요.”
“어, 그래?”
소파 상석에 앉은 남자가 한상의 식구를 쳐다봤다.
“우리 채원이 아빠에요.”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안녕하세요.”
한상이 아빠와 엄마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하자 머쓱하게 서 있던 한상이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쟤가 한상이라고 채원이보다 세살 많다는 아이에요.”
“채원이 오빠 생겨서 좋겠네.”
“그러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뭐든 시켜만 주세요, 사모님.”
한상 아빠보다도 한상 엄마가 더 싹싹하게 인사했다.
“저기 창고에 가면 우리 채원이 쓰던 책상이랑 침대가 있어요. 이번에 채원이 가구 바꿔 주면서 버리려다 아까워서 놔뒀거든요. 가서 보고 쓸 만하면 한상이 줘요.”
“그래도 될까요?”
한상 엄마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쓸 만할 거예요.”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장롱도 새로 들여놔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채원이 가구 바꾸다가 생각나서 하나 들여놨어요. 마음에 들어요?”
“들다 뿐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육개장 끓일 줄 알죠?”
“그럼요.”
“사장님 저녁으로 육개장 드시고 싶다고 하시네요. 식탁 위에 장볼 돈 올려놨으니 장 봐서 준비해주세요.”
“예, 사모님.”
“창고는 뒤뜰에 있어요. 그만 가보세요.”
“네.”
한상 엄마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돈을 집어 들고 나와 몇 번이나 굽실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창고에 가 봐요, 여보.”
“장은?”
“가서 보고 다녀오면 되죠. 아직 시간 많은데 뭘.”
“그렇게 해.”
“아빠, 나 잔디밭에서 놀면 안 돼?”
“조용히 놀아야 해. 알았지?”
“예.”
부모님이 뒤뜰 창고로 가고 난 후 한상은 넓고 넓은 정원 잔디밭에 내려서며 싱긋 웃었다.
정원을 둘러보던 한상이의 눈에 반가운 것이 들어왔다. 정원 저 끝에는 시커먼 털을 곤두세운 두 마리의 개였다. 어떤 종류의 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사나워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상이는 작은 꼬챙이 하나를 집어 들고 천천히 개 우리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한상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던 개들이 한상이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획 돌리더니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한상이는 움찔 공포를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개들은 깃털을 곤두세우고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살 거야.”
한상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짖지 마.”
한상이는 시골에 살 때 농장에 있던 누렁이 놀부를 생각하며 저놈들도 친해지기만 하면 짖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누렁이 놀부 놈도 처음 한상이를 만났을 때 사나운 심술꾸러기였지만 친해지고 나자 저 멀리 한상이 그림자만 보여도 달려 나오고 한상이의 애무를 간절히 원하는 듯 배를 까고 드러누웠었다.
처음 정든 시골을 떠나 서울로 와야 한다는 얘길 엄마에게 들었을 때, 한상이를 제일 서운하게 했던 것도 바로 누렁이 놀부와 더 이상 놀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마에 점이 있는 녀석은 탱크고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장군이야.”
어디선가 작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상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지만 어디서 나는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여기, 여기, 2층이야.”
다시 목소리가 들렸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쳐들자 팔락거리며 손을 여자아이가 보였다.
한상이는 꼬챙이를 든 채로 여자아이가 있는 2층 창 밑으로 걸어갔다.
“별채에 이사 왔지?”
“응.”
“몇 살이야?”
“나 열 살.”
“그럼 학교 다니겠네?”
“응. 넌 몇 살인데?”
“난 일곱 살이야.”
“그럼 동생이네?”
“그럼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음··· 맞아.”
한상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가 치 하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나보다 키 커?”
“내가 훨씬 커.”
“거짓말. 내가 더 커.”
“아니야. 넌 일곱 살이잖아. 내가 더 커.”
“쟤 볼래?”
여자아이가 꽤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래.”
“올라와.”
“거기 가도 돼?”
“와도 돼.”
“사모님한테 혼나면?”
“사모님? 우리 엄마 말이야?”
“응.”
“왜 혼나? 혼 안 나. 어서 올라와. 나랑 그림 그리자.”
“그림?”
“안 올 거야?”
한상이는 쭈뼛거리며 안채의 현관문을 쳐다봤다.
들어가도 되는지, 엄마에게 아니 사모님에게 허락받지 않고 그냥 들어가도 될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싫음 오지 마.”
“아니야, 갈게.”
한상이는 용기를 내서 현관문으로 걸어가 손잡이에 손을 댔다. 고개를 돌려 2층을 바라보자 여자아이가 꽤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골에 살 땐 누구의 눈치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 오자마자 부모님이 이집 주인들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어서인지 한상이마저 주눅이 들어 모든 것들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한상이는 용기를 내서 슬그머니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을 텐데 하여간 거실엔 사모님도 사장님도 없었다. 한상이는 얼른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와.”
여자아이가 2층 끝에 서서 손짓 했다.
한상이는 부리나케 2층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림 그릴 줄 알아?”
자신의 방문을 열며 여자아이가 물었다.
“응, 그런데 잘 그리진 못해.”
“난 잘 그려.”
여자아이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들어와.”
여자아이가 말했고 한상이는 온통 핑크색으로 치장이 된 여자아이의 방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방이야.”
“예쁘다.”
“예쁘지?”
“응.”
한상이는 핑크색 커튼 핑크색 침대 핑크색 책상 방에 있는 모든 것이 핑크색인 것에 놀라워하며 이런 방을 어디서 봤더라 생각했다.
“난 공주기 때문에 우리 아빠가 이렇게 해주셨어.”
아 공주!
그래 동화책에서 본 것 같았다.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의 방은 모두 다 이렇게 핑크빛의 예쁜 방을 갖고 있었다. 이 여자아이도 공주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나라의 어떤 공주일까.
“여기 앉아봐.”
여자아이가 책상에 앉더니 자리 옆자리의 의자를 툭툭 쳤다.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게.”
한상이는 여자아이가 시키는 대로 곁에 앉으며 퍽 건방진 동작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쳐다봤다.
“이건 뭐야?”
“공주님이야.”
아주 괴상하게 기고 머리통이 엄청나게 큰 여자가 요란한 색이 칠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아이는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한상이는 별 괴상한 공주도 다 있다 싶었다.
“비행기 그릴 줄 알아?”
“비행기?”
“나중에 아빠가 나 외국에 유학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그때 비행기 타고 가야 한댔어.”
“그렇구나. 그런데 유학이 뭐야?”
“넌 유학이 뭔지도 몰라?”
“응.”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거야.”
“그렇구나······.”
“비행기 그려줘.”
“비행기? 알았어.”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지만 한상이는 비행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비행기 그림이나 사진을 숱하게 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그릴 자신은 없었다.
여자아이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건네주었다.
“분홍색으로 색칠할 거야.”
한상이는 까만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고 비행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먹은 만큼 잘 그려지진 않았지만 얼추 비행기와 비슷한 모양새의 비행기가 그려졌다.
“이상한 비행기야.”
여자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말했다.
“아니야, 멋진 비행기야.”
“휴, 이게 멋지다고? 흥!”
여자아이는 잔뜩 불만스러운 듯이 스케치북을 당겨 가더니 분홍색으로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넌 이름이 뭐야?”
“나? 유한상. 넌?”
“난 박하원.”
“하원이?”
“응.”
“넌 왜 오빠라고 안 불러?”
“오빠라고 해야 해?”
“내가 세 살이나 많잖아.”
“그럼··· 오빠라고 할게.”
하원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원이가 오빠라고 부르겠다고 하자 한상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여동생이건 남동생이건 늘 같이 놀 수 있는 동생이 있었으면 했는데 소원하던 동생이 생기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오빠가 뭐 그려줄까?”
“꽃 그려줘.”
“꽃? 알았어.”
그림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면서도 하원이가 그려달라고 하자 한상이는 크레파스를 들고 쓱쓱 꽃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칠은 내가 할 거야.”
“알았어.”
한상이가 밑그림을 그리고 넘겨주자 하원이가 색을 칠하기 시작했는데 그림에 소질이 없기는 하원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워낙은 많은 색으로 칠하다보니 괴상한 꽃이 되어 버렸다.
“이상한 꽃이야.”
한상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하원이가 눈을 흘겼다.
“예뻐.”
“안 예뻐.”
“예쁘다구.”
하원이가 안 예쁘다는 한상이에게 씩씩거리며 눈을 흘겼다.
새초롬해진 하원이가 놀기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금세 생글거리더니 다른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고 한상이는 소질 없는 솜씨로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스케치북 한 묶음을 온통 괴상한 그림으로 도배하고 나자 슬슬 싫증이 났고 졸음도 몰려왔다. 졸리기는 하원이도 마찬가지인지 하품을 했다.
“졸려.”
“나도.”
가라앉는 눈꺼풀을 치켜뜨려고 애쓰며 공주님 옷을 그려달라는 하원이에게 공주님 옷이 어떤 옷인지 잘 모른다며 투덜거리는데 하원이는 벌써 졸고 있었다.
“자냐?”
한상이가 팔꿈치로 툭 치며 묻자 하원이가 반쯤은 감긴 눈으로 일어나더니 침대로 가서 누워버렸다.
“치 공주님 옷 그려달라더니.”
한상이는 투덜거리며 슬그머니 방바닥에 내려앉아 드러누웠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천근만근으로 내려앉는 눈까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를 중얼거리던 한상이는 언제 잠든 지도 모른 채 잠이 들어버렸다.
한상이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을 때였다.
“이 녀석이 언제 여기 온 거야?”
엄마가 몹시도 난처한 얼굴로 한상이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어서 일어나.”
엄마가 한상이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엄마, 내가 놀자고 했어.”실랑이 소리를 들었는지 하원이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그랬니?”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아. 그래서 오빠야.”
“그래, 세살 많으면 오빠야.”
“오빠가 그림 그려줬어.”
“그랬어?”
“한상이 너 이제 여기 와서 놀면 안 돼.”
“왜?”
한상이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묻자 엄마가 왜긴 뭐가 왜야 하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놔두세요. 하원이도 형제가 없어서 심심해했는데 잘됐네요.”
“아니에요, 사모님. 철이 없어서 여길 올라왔네요.”
“둘이 놀게 놔두세요. 한상이 네가 오빠니까 싸우지 말고 놀아야 해, 알았니?”
“네.”
“어서 나와.”
한상 엄마가 한상이를 끌어당겼다.
“하원아, 내일 놀자.”
“알았어.”
하원의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한상이는 세 번이나 더 머리통을 쥐어 박혔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서 잠을 자?”
“하원이가 놀자고 했단 말이야.”
“하원이가 놀자고 했어도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왜?”
“왜긴 뭐가 왜야, 안된다면 안 되는 거지.”
엄마가 또 머리통을 쥐어박자 한상이가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울지 마, 여기서 울면 너 집에 가서 혼 날 줄 알아!”
엄마의 으름장에 한상이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우겨넣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의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서 아빠랑 밥 먹어. 여긴 얼씬도 하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엄마는 문을 탁 하고 닫고는 하원이네 집으로 사라졌다.
한상이는 원망스럽게 안채 하원이네 집 현관문을 쳐다보다가 삐질 삐질 눈물을 훔치며 별채로 건너왔다.
“어디 있었어?”한상이가 없어져서 엄마도 아빠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하원이하고 놀다가 잤어요.”
“하원이라니? 주인집 딸 말이냐?”
“응.”
“주인집 딸이랑 놀았어?”
“하원이가 놀자고 했단 말이야.”
“그래도 거긴 가면 안 돼.”
“왜?”
“왜나면··· 주인집이니까.”
아빠가 조금 부끄러워하는 낯으로 말했다.
“주인집엔 가면 안 돼?”
“안 되는 거야.”
“왜?”
“주인집이어서 안 된다고 했잖아.”
주인집에서 놀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한상이가 캐묻자 아빠가 버럭 화를 냈다.
“이제 거기 가지 마. 알았어?”
“하원이랑 놀면 안 돼?”
“마당에서 놀아. 집엔 가지 마.”
“···알았어요.”
“어서 밥 먹어.”
“네.”
시무룩해진 한상이는 엄마가 차려놓은 상 앞으로 가서 수저를 들었다.
“여기선 시끄럽게 떠들어서도 안 돼.”
“······.”
“조용하게 놀아야 해. 알았지 한상이?”
“예······.”
예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겨우 열 살인 한상이는 왜 주인집에 들어가서 놀면 안 되고 왜 조용하게 놀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하원이네 집에서 식모 일을 하고 정원사로 일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다음 날, 학교에 가기 위해 한상이가 별채에서 나왔을 때 하원이는 공주처럼 예쁜 원피스를 입고 앙증맞은 머리띠를 한 모습으로 마당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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