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이질자 [E]

이질자 1권 (1)

2017.09.21 조회 497 추천 1


 #악몽 속에서 깨어나다
 
 
 그건 꽤나 오래전의 일이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가?”
 초라한 행색의 늙은이가 유한성을 쳐다보며 툭 던지듯 건넨 한마디.
 노인과 전혀 안면도 없고, 갈 길도 바빴던 유한성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던 질문이었다.
 턱.
 그러나 유한성은 굳이 발걸음을 멈추곤 입을 열었다.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물론입니다.”
 “호오, 어째서?”
 탁!
 노인은 유한성의 대답에 흥미가 동한 듯, 들고 있던 지팡이로 소리나게 땅을 짚으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럼 이 미친 세상도 좀 잘 살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
 분명 유한성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한성의 기억에서 잊혔다.
 지옥 같은 현실은 그런 사소한 일들이 잊힐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그아아아아아!
 바로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게 무슨······.’
 유한성은 눈을 뜨기가 무섭게 질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악몽이라도 꾸는 건 아닐까 의심하면서.
 “커헉!”
 붕!
 거대한 발에 채인 인간의 몸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가볍게 떠올랐고.
 우드득.
 허리는 기괴한 각도로 접히고, 안면은 차마 봐 줄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푸콱!
 뒤이어 먼 곳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
 소리의 발원지에선,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핏덩어리 하나가 질척한 피를 흘리며 그 안에 담긴 것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끄으으······.”
 바닥 이곳저곳에는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신음성을 내는 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아, 발 디딜 공간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콰콰쾅!
 ‘크윽······.’
 순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오는 화끈한 열기에, 유한성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아아······.
 뒤이어 들려온 것은 괴물의 신음하는 듯한 괴성과, 그 크기에 걸맞는 거대한 뒷걸음질 소리.
 쿠웅. 쿠웅.
 거대한 형체의 괴물은 머리 부분에 검은 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후우욱······.
 괴물의 목 위를 덮고 있는 연기가 조금씩 걷혀 갈수록, 그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 카불카······.’
 유한성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 미터를 넘기는 거대한 크기에, 자연스럽게 공룡을 떠올리게 만드는 코뿔소와 같은 형상의 얼굴.
 회색빛을 띠고 있는 몸 이곳저곳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달려 있고, 특히 꼬리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는 깎아지른 듯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눈.
 광기 어린 핏빛의 눈동자 사이에는, 이미 인간을 몇 명이나 꿰뚫어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회색의 뿔이 솟아나 있었다.
 비록 방금 전의 화火계 공격으로 얼굴 피부의 일부가 타버려 흉측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유한성은 녀석이 카불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카불카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말도 안 돼······.’
 유한성은 아직까지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거기까지 생각한 유한성이 누군가를 찾아 카불카의 주위를 살피려던 찰나, 유한성의 시야가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콰직! 콰직! 쿠쿵 쿠쿵 쿠쿵 쿠쿵! 콰직! 콰직! 콰지직!
 두 발로 서 있던 카불카가 엎드려 네 발로 땅을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그 진동으로 대지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끄아악!”
 “으아아악!”
 그 날렵한 돌진에, 바닥에 누워 신음하던 사람들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족족 짓이겨지고 있었다.
 ‘크윽······.’
 유한성은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가누곤 카불카가 달려가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만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이 아니라면, 그곳엔 분명 그녀가 있을 테니까.
 “흐음, 둔한 건 아니었네?”
 ‘있다.’
 자신을 향해 콧김을 뿜으며 달려오는 카불카를 보고도, 빗자루 위에 앉아 그저 새초롬한 미소를 짓는 여자.
 성화연.
 그녀의 두 눈동자는 카불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블링크(Blink).”
 팟! 쿠구궁!
 그녀의 몸이 푸른 빛 무리에 감싸여 사라지기가 무섭게,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강렬한 충돌 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으으······.
 벽면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생존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두 가지였다.
 카불카의 뿔 모양으로 거대하게 패여 들어간 동굴의 벽면과, 바닥에 누운 채로 낮게 으르렁대는 카불카의 모습.
 “괴, 괴물······.”
 “으으으······.”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경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유한성은 달랐다.
 ‘지금이 기회다.’
 카불카는 벽면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들이박아, 그 반동으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공격하기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는 소리.
 유한성은 공략대의 리더로 추정되는 덩치 큰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그러나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한성의 머리 위에서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멍청이들아, 지금 공격하란 말이야!”
 “저, 전원 공격!”
 “공격하라!”
 그 목소리를 시발점으로, 생존자들의 무수한 공격이 카불카를 향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불은 진노하며, 비로 화한다. 파이어 레인(Fire Rain)!”
 “속사포 화살(Rapid Arrow).”
 “물이여 솟아올라라. 워터 라이즈(Water Rize)!”
 그아아아!
 화살과 마법은 허공을 수놓듯이 뒤덮었고, 검을 비롯해 온갖 무기들을 쟁여 쥔 사람들은 우렁찬 기합성을 내면서 카불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카불카를 향해 달려가는 무리 사이에는 유한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한성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캉! 캉! 파창! 카가각!
 다양한 음색을 내며 카불카의 단단한 피부를 공격하는 수많은 무기들.
 하지만 그중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쇠를 두드리는 것 같은 뭉툭한 소음을 만들어 낼 뿐.
 ‘헛짓거리야.’
 유한성은 잘 알고 있었다.
 카불카의 피부가 어지간한 물리 공격은 다 무시할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주위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 이봐!”
 “저 자식 뭐 하는 거야!”
 유한성은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깔끔히 무시한 채, 카불카의 몸을 향해 뛰어올랐다.
 ‘해보자고.’
 이내 유한성은 암벽등반을 하듯 카불카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카불카의 몸 여기저기에 돋아난 돌덩이들을 움켜쥐면서.
 ‘크윽······.’
 굳은살조차 제대로 박여 있지 않은 손아귀는 쓰라림에 비명을 질렀지만, 유한성은 그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두 눈을 굴렸다.
 마치 먹잇감을 쫒듯, 다음에 손을 뻗어야 할 돌덩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기에, 유한성은 앞만 본 채로 계속해서 카불카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멀리서 빗자루를 타고 유한성을 지켜보던 성화연이 그 행동에 의문을 품을 무렵, 유한성은 마침내 카불카의 허리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타다닥!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카불카의 머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카불카는 아직까지 충돌의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 있는 상태.
 놈의 몸 위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건 오직 지금뿐이었다.
 ‘놈의 약점은 정수리 부근.’
 평상시에는 정수리는커녕, 카불카의 몸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무리였다.
 유한성은 물론이고, 웬만한 사람들은 카불카의 발길질 한 번에 목숨을 잃고 말 테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놈의 정수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까드득
 유한성은 이를 부서져라 꽉 깨물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에서 벗어날 것을 다짐하며.
 “후욱, 후욱······.”
 거대한 몸체 위를 달리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땀에 젖은 셔츠는 등에 달라붙어 찝찝하기 그지없고, 거친 움직임을 견뎌 내지 못한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숨을 내쉬느라 입이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유한성은 카불카의 어깨 부근을 향해 뛰어가며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선, 여전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공격을 퍼붓고 있는 중이였다.
 그아아아!
 그 순간, 갑작스럽게 요동치는 카불카의 몸.
 가까스로 근처에 있던 바위를 붙잡은 유한성은, 카불카의 옆구리에 곡예를 하듯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었지만.
 ‘젠장······.’
 유한성의 몸은 카불카의 몸에 쓸려 내려가며 피부 이곳저곳이 찢어졌고, 돌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한성이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역시 모자라나.’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카불카는 벌써 제 정신을 차릴 기미를 보이는 상태.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버린 카불카의 뿔은, 놈이 제정신을 차릴 경우 각성 상태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 죽고 말거야.’
 이어지는 건 지옥의 아비규환.
 생존자는 유한성과 성화연을 포함해 단 셋뿐이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카불카는 던전 밖으로 빠져나가 무수히 많은 인간을 학살한다.
 이어지는 건 생존한 삼인에 대한 비난. 증오. 원망.
 ‘그리고 자괴감.’
 유한성은 다시금 손을 뻗기 시작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얼굴과 머리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억거렸다.
 “도약(Leap).”
 -신체의 도약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푸삭!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유한성이 발을 디디고 있던 돌이 바스러져 흩날렸다.
 쐐애액!
 이내 느껴지는 강렬한 풍압.
 방금 발을 디딘 곳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은 높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번이면······.’
 유한성은 공중에 뜬 몸이 카불카의 몸체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점점 거대해지는 돌부리 하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꽈드득······.
 공중에서 떨어지는 몸의 무게를 지탱하는 양손은 비명을 지르고, 손바닥에서는 불이 붙은 것처럼 아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양손에 들어간 힘이 풀릴 것만 같은 상황.
 푸삭!
 하지만 유한성은 다시금 발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크읍······.”
 두 번째 도약으로 단숨에 카불카의 목까지 도달한 유한성은, 이내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입에서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도약의 반동으로 신체 내부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래서 안 쓰려고 했는데.’
 뒤늦은 후회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아프면 아팠지, 그 지긋지긋한 악몽을 다시금 겪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유한성은 비틀거리며 카불카의 목 위를 걷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유한성의 눈에는 카불카의 유일한 약점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
 그와 동시에 과거의 기억들이 흐릿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 너희들 때문이야! 왜 카불카를 잡겠다고 해서!’
 붉은 눈시울로 자신을 쳐다보며 욕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스르릉······.
 유한성은 싸늘한 눈초리로 왼쪽 허리께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걸음걸이처럼 느릿한 속도로.
 ‘개자식! 차라리 죽지 그랬어! 뭐하러 너만 살아 돌아온 건데?’
 부들거리는 양팔은 힘겹게 검을 감싸 쥐었고, 검의 손잡이를 감싼 천에는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붉게, 점점 더 붉게.
 ‘왜 혼자 도망친 거야! 왜! 도대체 왜!’
 캉!
 유한성은 검을 땅에 꽂을 듯이 내려쳤다.
 카캉! 카캉! 까깡!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검은 카불카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내려쳤고.
 쿠구구국······.
 이내 그곳에선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콰득!
 그리고 마침내, 검 끝에 살점을 찌르는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아아아!
 카불카는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수리에 달려 있는 핵을 보호하기 위한 최대한의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유한성은 카불카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었기에, 검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아아아! 그아아!
 카불카의 괴성은 더욱 커져 가고, 이제는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킬 것처럼 몸체가 떨려 오기 시작한다.
 유한성은 그 모든 것을 전신으로 느끼며, 박혀 있는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내질렀다.
 또다시.
 검이 파고들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콰득! 콰드득!
 유한성의 검이 노리는 것은, 부서진 피부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카불카의 핵이었다.
 사람의 심장을 빼다 박은 모양새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계속해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회색의 핵.
 그곳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간과 똑같은 붉은 색이였다.
 ‘좋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유한성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카불카의 핵에 난 상처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속도라면, 핵이 파괴될 때까지는 몇 분이나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쿠우웅······.
 마침내 카불카는 앞다리로 대지를 디디기 시작했다.
 정신을 다 차렸다는 신호였다.
 ‘이대로는······.’
 카불카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까지가 데드라인이다.
 몸을 일으키고 난 이후엔, 핵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광분 상태의 괴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비록 그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인 핵이 파괴된다면 얼마 못가 죽기야 하겠지만, 그 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죽을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비켜!”
 그때였다.
 뜨거운 열기와, 휘몰아치는 바람이 유한성의 뺨을 어루만진 것은.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화르륵!
 성화연의 지팡이 끝에서 피어난 작열하는 불길은, 커다란 새의 형상으로 화해 카불카의 핵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와 흡사한 모습으로.
 화아악!
 순간적으로 발산되는 열기에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공기.
 불새는 마치 한성의 검이 피뢰침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을 타고 내려가, 이내 푸른빛을 내면서 맹렬하게 타올랐다.
 ‘열기가 무슨······.’
 열기를 느끼자마자 검을 뺄 생각도 못 한 채 거리를 두었지만, 유한성의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야, 거기 너.”
 회색의 핵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열기에, 조그마한 저항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화륵!
 이내 핵을 감싸던 불길이 소멸하고, 까맣게 변색된 핵만이 덩그러니 남은 순간.
 유한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카불카를 쓰러트렸습니다.
 “우와아아!”
 “이겼다!”
 ‘그렇게 좋나.’
 그와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기쁨에 가득 찬 탄성이 다발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흑······.”
 “젠장······.”
 그러나 그 커다란 탄성소리 속에는 조그맣게, 동료의 시체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목소리도 섞여 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긴 건가.’
 유한성은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후련하면서도, 찝찝한 감정으로.
 “야!”
 ‘크윽······.’
 그러나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유한성은 성화연의 괴성에 양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목소리 시끄러운 건 여전하구나.’
 유한성은 새삼스럽게 피식 웃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녀가 맞다는 생각에.
 ‘웃어?’
 물론 그 모습이, 성화연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졌지만.
 “아,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이 팔려서 그만.”
 “흐음······.”
 유한성은 곧바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카불카 사냥을 한 것은 유한성이 대륙에 발을 디딘 지 1년도 안 되었을 시점.
 지금의 상황에서, 유한성이 이곳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한창 유명했던 성화연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한편, 유한성의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에 성화연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대답하는 검은 머리의 사내.
 성화연의 기억에 딱히 남아 있는 사내는 아니었다.
 딱히 특이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고, 그녀가 신경 쓸 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받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하지만 방금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그는 마치 카불카의 약점을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처음 도전한 카불카 공략전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덕분에 카불카를 사냥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이 충분히 의심스럽다.
 “너······ 뭐 하는 녀석이야?”
 “네?”
 “카불카의 약점, 핵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안 거냐고.”
 유한성은 그녀의 질문에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한 가지 추론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녀에게는 기억이 없는 건가.’
 지금 이곳에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라는 것.
 ‘어쩐다······.’
 유한성이 그녀의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는 찰나, 갑작스럽게 성화연이 점점 공중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올라가십니까?”
 “응? 무슨 소리야?”
 “지금 올라가고 있······.”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하려던 유한성은, 이내 특이한 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빗자루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몸이 점차 가속도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한다는 것.
 ‘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한성은 그것으로 또 다른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성화연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 어라! 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였다.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카불카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 거대한 몸뚱아리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뭔가 쓸 만한 기술이······.’
 두 발은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 지 오래.
 유한성은 허공을 나는 와중에 양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며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뒤졌지만, 이렇다 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비록 도약이라는 스킬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발을 디딜 곳이 있어야 사용이 가능한 스킬.
 ‘이렇게 허무하게······.’
 수십 미터의 높이에서 바닥에 처박힌다면, 아무리 아우라라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사망이 확실한 일.
 유한성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기껏 과거로 돌아왔나 싶었는데, 이런 허망한 죽음이라니.
 ‘아니, 악몽을 지운 걸로 만족해야 하나.’
 하지만 악몽을 지운 것. 그것 하나만큼은 이미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이대로 죽는다면 판테온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원수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며, 유한성이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것조차 포기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눈 떠, 멍청아!”
 성화연이 붉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유한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찔하게 멀어지는 주위의 풍경.
 동굴 벽면을 메우고 있던 무수한 문양들은 점차 뭉그러지고, 이내 날카로운 선으로, 그리고 점으로 변해 간다.
 가속도가 붙은 몸은 점차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쐐애액!
 도약을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바람 소리.
 “어서······ 잡······.”
 바람 소리에 가려져 끊겨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유한성은 성화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용케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턱!
 그녀가 유한성의 손을 맞잡는 순간 강대한 마력이 유한성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가벼워져라. 경량화(Weight)!”
 순간 유한성은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손목이 찢겨져 나갈 것 같던 무게감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헉······ 헉······.”
 “꽉 붙잡고 있으라고!”
 성화연의 도움으로 그녀의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한성이었지만, 고마움을 표현하거나 마음 편하게 숨 돌릴 시간은 없었다.
 이번엔 그들이 있는 곳으로 카불카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쐐액! 쐐애액!
 비행을 함에 따라, 이전보다 더한 바람 소리가 유한성의 귀를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풍압은 덤이었다.
 ‘빠르긴 하지만······.’
 유한성은 성화연이 제 나름대로 최대한의 속도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유한성을 구하기 위해 수직으로 쭉 내려온 상태.
 그 때문에 카불카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동안, 그녀는 카불카의 몸과 거리를 전혀 벌리지 못했다.
 굳이 카불카의 몸체를 쳐다보거나 거리를 잴 필요도 없었다.
 이미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이 향하는 방향, 그 한참 앞까지 덮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대로는······.’
 “머리 좀 굴려 봐! 뭐 좋은 방법 없어?”
 유한성이 한참 고민을 할 무렵, 빗자루 위에 올라타 있는 성화연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들은 유한성은 대롱대롱 매달린 자세로, 비어 있는 왼팔로 턱을 짚은 채 눈을 감았고.
 몇 초 뒤, 두 눈을 번쩍 뜨고 입을 열었다.
 “글쎄요.”
 성화연의 반응은, 유한성의 예상대로였다.
 “카불카의 약점도 알아냈잖아!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널 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누가 구해 달라고 했나.’
 그녀의 칭얼거림에 속으로 피식 웃은 유한성은, 장난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뭐, 뭔데!”
 “일단 절 빗자루 위로 올려 주시길.”
 성화연은 유한성의 말에 답도 하지 않은 채 오른팔에 힘을 주었고, 경량화 마법이 적용된 유한성의 몸은 손쉽게 빗자루 위로 올라왔다.
 유한성이 양팔을 벌리고 비행하는 빗자루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기가 무섭게, 성화연은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유한성은 성화연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치 비행기의 승무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충격에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무, 무슨······ 꺄아아악!”
 부웅!
 유한성은 그 짧은 말만을 남긴 채, 곧바로 도약 스킬을 사용했다.
 빗자루의 뒷부분에 발을 디디고 도약 스킬을 사용한 탓에, 성화연은 갑작스러운 속도감에 비명을 지르며 땅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좀 심했나.’
 찰나의 시간동안 성화연을 잠시 생각했지만, 유한성은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 버렸다.
 땅에 부딪히면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그녀가 알아서 잘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도약의 반동을 신체가 견디지 못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아우라가 영구적으로 소멸합니다.
 “크윽······.”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느껴지는 두통.
 이전처럼 입에서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한순간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찔한 통증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비록 성화연은 살렸지만, 카불카의 육중한 몸이 바로 코앞까지 도달한 상태.
 그리고 유한성은 카불카의 몸체에 순순히 깔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이쯤해서······.’
 유한성은 두통을 참으며 카불카의 몸 쪽에 발이 닿도록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터턱.
 두 발이 카불카의 몸을 가볍게 디디는 순간.
 “도약.”
 푸사삭!
 유한성의 몸이 바람을 가르며 대지를 향해 날아들었고.
 쿠웅! 쿠콰콰콰!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대지는 비명을 질렀다.
 이어진 건 거대한 흙먼지, 그리고 강렬한 땅의 요동침이었다.
 “콜록. 콜록.”
 “성화연 님! 괜찮으십니까?”
 “네 눈엔 괜찮아 보여?”
 “그, 그건 아닙니다만.”
 성화연의 몰골은 처참했다.
 비록 유한성의 경고를 듣긴 했지만, 그런 무식한 방법을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말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 친 그녀였기에.
 ‘끄으으, 아파 죽겠네······.’
 그나마 그녀 정도의 마법사이기에 순간적으로 실드를 비롯한 각종 마법을 전개해 살아 있는 것이지,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벌써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이었다.
 성화연은 옷 여기저기에 뭍은 흙먼지들을 대충 털어 내면서 공략대의 리더에게 소리쳤다.
 “나는 됐으니까, 그 녀석이나 찾······.”
 “찾을 필요 없습니다······. 쿨럭.”
 문득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화연은 말을 하다 말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온몸이 먼지로 뒤덮인 채, 입에서 피를 토하는 유한성이 서 있었다.
 “크흡.”
 -신체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아우라가 영구적으로 감소합니다.
 ‘고작해야 네 번의 도약에······.’
 유한성은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성화연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너야말로 괜찮아?”
 “보시다시피······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어. 힐러나 백마법사 누구 없어? 남는 인원 이쪽으로 보내!”
 “3조 힐러! 이쪽으로 빨리!”
 성화연의 말에 공략대의 리더가 다급한 목소리로 힐러들을 불렀고, 이내 몇몇 사람들이 먼 곳에서 유한성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끙······.’
 유한성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무너지듯 바닥에 넘어졌다.
 “크허억······.”
 전신에서 느껴지는 극한의 통증은 단순히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그와 더불어 점점 흐려지고, 회색빛으로 바래 버리는 시야.
 근처에 있던 공략대원들은 그런 유한성을 안타까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힐러! 빨리 이쪽으로! 지금······.”
 그 모습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쳐다보던 성화연은, 재빠르게 스커트의 주머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고 주문을 외웠다.
 “불꽃의 지배자가 명한다.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이여, 여기 죽어가는 이를 살려라.”
 화륵.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바닥 위에 얹혀 있던 구슬은 불타오르며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고.
 후욱!
 이내 유한성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한성의 몸은, 그것을 몸 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불의 정수가 몸 안에 깃듭니다. 꺼져 가던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정신을 잃은 유한성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죽어 가던 유한성의 피부에 생기가 다시금 돌기 시작했다.
 “됐어! 힐러!”
 그 뒤의 일은, 다급히 달려온 힐러들의 몫이었다.
 “생명을 나눠 주소서. 힐링(Healing)!”
 “상처는 아물고, 살은 자라나리라. 회복(Recovery)!”
 “신의 은총이 깃들리라. 블레스(Bless).”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하나하나 차례로 유한성의 몸 안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마법들.
 “크으······.”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한성의 입에선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아······.”
 그 제서야 성화연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하필 여기서 불의 정수를 쓰다니······.’
 계획에 없던 일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든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어차피 유한성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죽었을지 모르는 일이였고, 카불카를 사냥한 것 또한 유한성의 덕이었기에.
 그가 한 일을 생각하면, 불의 정수쯤은 사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빚 갚은 셈 치지, 뭐.’
 성화연이 유한성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즈음, 유한성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끄응······.”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유한성을 쳐다본 힐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다 나은 것 같군요.”
 “수고했어. 이제 다른 쪽 부상자들을 확인해.”
 “알겠습니다.”
 백마법사와 힐러들은 유한성의 치료를 마치기가 무섭게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그들의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기에.
 “정신이 좀 들어?”
 “하, 죽다 살았다는 게 이런 건가요.”
 “재밌는 비유네.”
 “재밌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뭐, 상관없겠죠.”
 유한성은 대충 몸에 묻은 먼지를 대강 털고는, 주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다른 부상자들은······ 커윽.”
 그러나 갑작스럽게 몸이 들린 까닭에, 숨 막히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최, 최진철!”
 “성화연 님은 빠져 있으시지요.”
 유한성의 멱살을 잡아챈 사람은 공략대의 리더로 추정되는 덩치 큰 사내였다.
 “······.”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유한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유한성은 차분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른 건 성화연을 대하는 태도였다.
 대륙에 발을 디딘 지 1년도 안된 애송이가 5년 차가 넘은 데다, 대륙에서 적염의 마도사로 이름 높은 성화연에게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성화연을 충견처럼 챙기던 최진철의 태도로 볼 때, 그 행동으로 그가 화를 낼 가능성은 차고 넘치는 수준.
 거기까지 생각한 유한성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들어 갔다.
 “이것 좀 놓고 말하시죠.”
 “이것 좀 놓고 말하시죠? 정신머리가 나간 애송이로구나.”
 “그러는 당신은 정신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따위로 지휘를 합니까?”
 유한성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최진철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함부로 입을 나불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제 걱정은 스스로 합니다. 자기 걱정이나 하시죠.”
 “이 자식이······.”
 그때, 성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진철, 그 손 내려놔.”
 최진철은 어느새 한쪽 손으로 허리께에 달린 무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공격이라도 할 것처럼.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녀의 말에 최진철은 유한성을 내려놓았고.
 “누가 할 소릴.”
 유한성은 멱살이 잡혀 구겨진 옷자락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최진철.”
 “뭐라고 말할지 잘 알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나마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만약 저 애송이가 이상한 부분이라도 건드렸다면 공략대가 전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이었습니다.”
 최진철은 말을 하다 말고 유한성을 한번 흘겨보더니,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괜히 공략대에 룰이 있고, 규칙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저런 개별적인 돌발 행동 하나하나가 공략대에는 큰 위협이 된단 말입니다.”
 “공격 명령을 내린 건 너랑 나야.”
 “그건 맞습니다만, 카불카의 몸을 타고 올라서 정수리에 칼을 꽂으란 말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무릇 공략대는 기본적으로 단체 행동이 기본이었고, 최소한의 규칙과 룰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개개인의 돌발 행동이 함정이나 트랩, 혹은 몬스터의 숨겨진 패턴을 발동시키는 원인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점을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을 수는.
 “불만이 많군요.”
 “공략대의 리더라는 자리는 그런 거다, 애송아.”
 최진철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부상자들이 모인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아, 미안해.”
 “아닙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닌데요. 애송이, 애송이 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유한성은 입맛을 다셨다.
 성화연에게 비아냥댄 건으로 시비를 건다면 화라도 낼 터인데, 규정과 룰을 들먹이니 별달리 할 말도 없었고, 이렇다 할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최진철······ 고지식한 성격도 여전하군.’
 유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카불카의 사냥이 끝난 이후의 동굴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형! 혀엉······ 크흑······.”
 “제시카, 제발······.”
 “오빠, 안 돼······.”
 동굴의 한구석.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한 곳에선, 흐느끼는 소리와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힐러들과 백마법사들은 그 모습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
 비록 저들의 죽음이 모두 그들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내 신성력이 조금만 강했더라면······.’
 ‘젠장······.’
 반면, 시신을 모아 둔 곳의 반대편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리더! 대박입니다! 카불카가 죽으면서 나온 아이템이 하나같이 다 좋은 것들 천지입니다!”
 “카불카의 뿔은 가공하면 장비 제작에 요긴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
 “가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공이 좀 힘들긴 해도, 방어력 하나만큼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하지만 보고를 받는 최진철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러는 당신은 정신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따위로 지휘를 합니까?’
 유한성이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기 때문에.
 ‘나는······ 잘 하고 있는 건가.’
 공략대의 목적, 카불카 사냥은 달성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죽은 사람의 수가 많았다.
 생존자의 수가 전체 공략대의 절반을 겨우 넘길 정도로.
 ‘각오하긴 했어도······.’
 사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공략대라고 볼 수 있었다.
 카불카가 보통 몬스터가 아니었고, 카불카와 비슷한 급의 몬스터를 사냥한 몇몇 공략대들은 대개 절반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으니까.
 그럼에도 최진철의 마음은 무거웠다.
 공략대의 리더라는 자리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흐음······.”
 유한성은 구석진 곳의 바위 위에 대충 걸쳐 앉은 채, 양쪽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대조적이군.’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오열하는 자들.
 기쁨에 가득 차 짜릿한 비명을 지르는 자들.
 같은 공략대원이고 같은 인간이었지만, 두 무리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넌 공략대에 아는 사람 없어?”
 성화연은 문득 유한성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빗자루를 타기도 지치는 듯, 이제는 땅에 양발을 디디고 있는 상태였다.
 “없습니다.”
 “그래? 그럼 혼자 참여했어?”
 “그렇겠죠.”
 “그러면 그런 거지. 그렇겠죠는 또 뭐야.”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유한성의 머릿속엔, 어떻게 해서 지금의 공략대에 참여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악몽’ 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었을 뿐.
 ‘이제는 그것도 안녕이군.’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드는 유한성이었다.
 적어도 이젠 과거처럼 복수와 추격에 시달릴 이유도, 원망과 저주를 들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유한성은 그 기억을 잊어버릴 목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아우라’
 이내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젓자, 유한성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우라 창]
 이름(Name) : 유한성
 칭호(Title) : -
 직업(Class) : 검사 (Sword Man / Normal)
 소속(Belong) : -
 공격 계수 : 5.6
 수비 계수  : 6.8
 마법 계수 : 0
 움직임 계수 : 6.9
 계수 총합 : 19.3
 잔여 계수 : 10
 혼(魂) : -
 영(靈) : -
 인(絪) : -
 
 ‘처참하군.’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의 네 가지 계수가 기본 20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유한성의 아우라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러한 몸으로 도약까지 사용한 까닭에 영구적인 아우라 감소 효과마저 발생한 상태.
 ‘비록 카불카 사냥으로 잔여 계수가 10이나 들어왔지만······.’
 카불카 사냥으로 얻은 잔여 계수는 10.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계수의 최대치였다.
 비록 직접적인 대미지는 얼마 주지 못했지만, 핵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분배된 계수일 터였다.
 더불어 현재 유한성의 계수 수치가 낮아, 그에 비례해서 더 많은 계수가 들어온 것도 있을 테고.
 ‘조금이라도 더 계수를 쌓기 위해선······.’
 잔여 계수는 말 그대로 잔여 계수.
 잔여 계수를 제외한 현재 계수의 총합이 올라갈수록,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계수는 줄어든다.
 이는 양날의 검.
 비록 계수가 낮으면 신체가 약한 탓에 눈먼 공격에도 죽을 테지만,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잔여 계수는 그대로 놔두자.’
 유한성은 그대로 아우라 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스킬’
 유한성이 또다시 손을 내젓자, 이번엔 허공에 다른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스킬 창]
 -도약
 -파괴의 검
 
 ‘스킬도 고작해야 두 개.’
 마음 같아선 과거의 자신에게 따지고 싶은 유한성이었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도약과 파괴의 검 모두 지금의 자신으로선 과분한 수준의 고급 스킬이라는 것이었다.
 아우라가 처참하게 된 것이 저 두 스킬을 얻기 위해서였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 슬슬 정리가 다 끝나 가나 보네.”
 “벌써 말입니까?”
 “공략대 한두 번 해 봐? 초보 티 내기는.”
 “······.”
 유한성은 성화연의 말에 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별말 없이 그녀와 함께 최진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략대원들 모두 중앙으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분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기대되는군.”
 “이 맛에 공략대를 하는 거지. 이맛공, 안 그래?”
 “크흑, 형이 죽었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시장판이 따로 없는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새들처럼 재잘재잘 떠든다.
 처컹. 척. 촤르르······.
 중앙에 하나하나 놓이기 시작하는 사냥의 전리품들.
 그중에서도 무기나 장신구들이 놓일 때면, 사람들의 시선은 탐욕에 물들기 시작했다.
 “크흠, 우선 죽은 자들을 위해 묵념하도록 하겠습니다.”
 “······.”
 “크흑······ 흡······.”
 그러나 그들도 일단은 사람인 탓에, 죽은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있었다.
 “가죽과 뿔을 판매한 대금은 우선적으로 죽은 공략대원의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한 뒤 분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십니까?”
 “······.”
 “없습니다.”
 최진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가죽과 뿔은 가공하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토를 달아 최진철의 눈총을 받는다면 배분에 있어서 불이익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에.
 어느새 울먹이던 자들도 눈물을 그치고 아이템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이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으니까.
 “사냥 공적치가 가장 높은 사람에게 먼저 배분하겠습니다. 성화연 님, 그리고······.”
 잠시 말을 멈칫한 최진철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유한성.”
 “영광이군요.”
 유한성은 씩 미소를 지었다.
 가뜩이나 아우라도 안 좋은 그에게 있어서 아이템은 많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그 아이템이 좋은 아이템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일.
 그런 유한성이 전리품들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잠깐만.”
 성화연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성화연 님?”
 “난 우선권을 유한성에게 넘기고 싶은데.”
 “너, 넘기신다고요? 순서를 뒤로 미루는 게 아니고 말입니까?”
 “응. 넘길게.”
 그녀의 말에 최진철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주위에 있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우선권을 넘기시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차라리 나를 주지······.”
 ‘흐음······.’
 그러나 잠시 멈칫한 유한성은, 딱히 뭐라고 말을 꺼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느끼곤 있었지만, 굳이 우선권을 준다는데 그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들 조용!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화연 님, 아시다시피 우선권은 대가 없이 아이템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정말 넘기시겠다는 겁······.”
 “두 번 말하게 할래?”
 “아, 아닙니다. 그럼 유한성. 이쪽으로 와서 아이템을 두 개······ 골라라.”
 최진철이 말을 마치고 조그맣게 ‘쳇’ 하는 소리를 내는 걸 들었지만, 유한성은 가벼운 애교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인연일지도 모르는 만큼, 굳이 더 적대감을 형성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보자······.”
 유한성이 최진철의 앞으로 여유롭게 걸어가 아이템을 집자, 아이템에 관한 정보가 허공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불카의 비명 펜던트]
 펜던트 내부에 귀성음(鬼聲音) 마법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귀성음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귀성음] : 귀기가 가득한 비명음을 발산해, 시전자를 제외한 근처 모든 존재에게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워 로드 부츠]
 권위를 나타내는 신발입니다. 착용한 대상의 몸이 가벼워집니다.
 
 [절삭의 칼 - 압도하는 자]
 도려 냄의 칼, 베어 냄의 칼과 함께 대장장이 벨레스타가 만든 세 개의 칼 중 하나입니다.
 -빙氷계 마법 프로즌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흐음······.’
 손에 집히는 아이템마다 하나같이 좋은 아이템뿐이었다.
 가질 수 있다면 다 가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은 한정되어 있었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군.’
 유한성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곤, 계속해서 아이템을 살피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진철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지만.
 ‘어라?’
 그러던 찰나, 계속해서 아이템을 뒤지던 유한성의 눈이 갑작스럽게 커졌다.
 
 [카불카의 진노]
 카불카가 죽으면서 남긴 원념이 깃든 보석입니다.
 -세트 아이템입니다. 이스므엘의 눈물, 타리엘의 환희를 모으면 완성됩니다.
 
 ‘이스므엘이랑 타리엘인가······.’
 세트 아이템.
 그것도 카불카급의 몬스터를 세 마리나 사냥해야 완성되는 아이템.
 유한성은 망설임 없이 카불카의 진노를 집어 들었다.
 “첫 번째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알았다. 다음 걸 고르도록.”
 ‘두 번째는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카불카의 진노를 품에 넣은 유한성은 장비에서 눈을 떼고, 한구석에 높이 쌓여 있는 책을 향해 눈을 돌렸다.
 ‘헉!’
 ‘제발······ 제발!’
 그와 동시에 마법사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유한성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쌓여 있는 책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킬? 넌 전사니까 무기가 더 좋지 않아?”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유한성은 호기심 가득한 성화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높게 쌓여 있는 책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소환에 관련된 스킬이······.”
 툭. 툭.
 유한성이 책을 한권씩 떨어트릴 때 마다 마법사들은 피가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마법사들은 신체가 허약한 탓에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 그들의 몸을 지켜 줄 존재가 필요했다.
 비록 지금이야 공략대인 덕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 주었지만, 홀로 돌아다니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
 때문에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소환 스킬을 미리 점찍어 놓은 상태였다.
 “서몬 블루 와이번이라······.”
 “하아······.”
 “이런······.”
 유한성이 책 한 권을 집어 들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한숨소리.
 그러나 유한성은 씩 웃으며 말했다.
 “버리고.”
 그와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던 마법사들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
 ‘그걸로 만족하란 말이야!’
 마법사들은 간절히 바랬다.
 유한성이 두 권의 소환 스킬 북 중, 서몬 블루 와이번이라는 스킬 북을 보고 만족하기를.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유한성은 무심하게 책을 던지곤 계속해서 스킬 북을 확인했다.
 “호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마법사들이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한 위치에 있는 책의 이름을 훑은 유한성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임모탈 길드
 
 
 “여유로운 풍경이군.”
 유한성은 멍한 표정을 한 채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략대 구합니다!”
 “아이템 처분합니다. 지금 안 오시면 후회합니다! 마지막 할인 행사라고요!”
 광장의 한구석에서는 사람들을 구하는 자와, 아이템을 팔려는 자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캉! 캉!
 분수대 앞에서는 두 검사의 결투가 한창이었다.
 “후후! 이제 네 실력을 좀 알 것 같냐?”
 붉은 망토를 걸친 검사가 연신 상대방을 압도하는 모양새였지만, 유한성이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까강! 까강!
 ‘노리고 있군.’
 검격을 연신 막아 내고 있는 가죽 갑옷 차림 전사의 얼굴에서 패배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패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엔, 작은 미소마저 띠여 있었으니까.
 카가각!
 그리고 마침내 붉은 망토의 공격이 방패의 옆면에 가로막히는 순간.
 푸칵!
 “끄으으······.”
 “······.”
 뱀은 독니를 드러냈다.
 심장 부근을 정통으로 꿰뚫린 붉은 망토는, 몇 마디 신음성도 내뱉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후에 이어질 일은 너무나도 뻔했다.
 서걱.
 “별것도 아닌 게 까불긴.”
 철렁. 철렁. 철렁.
 상대의 목을 베어 버린 전사는 곧바로 상대의 옷에서 장비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사슬 갑옷이 벗겨지면서 철렁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여간, 저놈들 하는 짓거리는 변함이 없군.’
 유한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신경을 끈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부류의 놈들이랑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보기 때문.
 ‘뭐, 상관없나.’
 유한성은 이내 시선을 돌려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도시는 평화로웠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과 멀쩡한 분수대.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도시의 입구를 굳건히 지키는 수비병들.
 그때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슬슬 움직여 볼까.”
 유한성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쳐다보며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일어났다.
 반지를 쳐다보는 유한성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이템 파······.”
 “여기 지금······.”
 광장에서 멀어질수록 시끄러운 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이쯤에서 준비할까.’
 유한성은 걸어가는 와중에 가면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척 보기에도 형편없어 보이는 가면을.
 
 [싸구려 가면]
 착용자의 얼굴을 가려 줍니다. 그 이상의 기능을 바라는 건 욕심입니다.
 
 비록 아무런 능력치도 없는 가면이었지만, 유한성은 별다른 불만 없이 가면을 얼굴에 썼다.
 지금부터 할 일을 위해선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기에.
 “정지.”
 “대낮부터 웬 놈인지 모르겠군.”
 인적 없는 골목길을 얼마나 걸어갔을까.
 갑작스레 두 사내가 유한성의 앞을 막아섰다.
 “가면까지 쓰고 말이야. 놀이라도 하는 건가?”
 “이 앞은 맺혀 있 구역이다. 돌아······.”
 사내의 지루한 훈계가 이어지려는 찰나, 유한성이 입을 열었다.
 “방문 목적은 정보 길드의 이용. 암구어는 세피리나의 눈물.”
 그 말에 두 사내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요령으로 허리에 달린 단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
 이내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한 사내가 으르렁 대듯 유한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다 들여보내 줄 정도로 우리 길드가 만만해보이나?”
 ‘확실히 오라클이군.’
 유한성은 사내의 말에 가면 아래로 씩 웃음을 지었다.
 이곳 판테온 왕국에 존재하는 정보 길드는 족히 수십 개는 넘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은, 지금 유한성이 찾아온 ‘오라클’이라는 정보 길드.
 오라클이 판테온 최고의 정보 길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격의 검증이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이었다.
 ‘두 가지였지.’
 방법은 총 두 가지.
 선별된 경비원들에게 자신의 무위를 입증하거나, 오라클 내부 길드원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
 그것은 어중이떠중이들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오라클의 의지임과 동시에, 자격이 있는 사람에겐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이기도 했다.
 실제로, 무수히 많은 정보 길드 중 신뢰도가 가장 높으며 정보료를 가장 많이 쳐주는 곳이 이곳 오라클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괜히 피 보기 싫다면 말이지.”
 유한성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을 겁을 집어먹은 것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휘릭.
 어느새 꺼내 든 단검을 손가락 하나로 빙 돌리면서.
 “들어가지 못해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제이슨이 들르라고 해서······.”
 하지만 유한성의 대답에, 사내는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제이슨 님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유한성은 가면 아래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이슨이 한번 들르라고 하더군요. 뭐, 들어가지 못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제이슨 성격을 생각해 볼 때······ 크흠.”
 제이슨이라는 말 하나에 두 사내는 몸서리치듯 떨기 시작했다.
 오라클 내부에서도 까마득한 상급자인 그는, 그들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유한성은 손쉽게 정보 길드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놈······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크흠, 실례하겠습니다.”
 끼이익······.
 유한성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두 사내는 유한성의 뒤에 바짝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유한성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정보 길드의 내부엔 아무런 안내인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드넓은 공간과 무수히 많은 문들 뿐.
 용건이 있다면 직접 그 사람의 방을 찾아가야 한다는 오라클의 방침 때문이었다.
 유한성의 경우엔 제이슨의 방을 찾아내야만 했다.
 만약 다른 방에 노크를 한다면, 뒤에 있는 두 사내가 머뭇거림 없이 유한성을 공격할 테니까.
 “내부가 꽤 넓군요.”
 “허튼 소리는 하지 마라. 어서 방이나 찾으시지.”
 “봅시다······.”
 유한성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걸음걸이로 정보 길드의 내부를 살폈다.
 건물의 내부엔 수십 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방의 주인을 나타내는 명패가 걸려 있다.
 
 물론 그 명패가 가짜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
 ‘찾았다.’
 유한성은 방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중간에 있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이슨이 있는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찾아올 방문자들을 위해 손잡이 아래에 표식을 남겨 두었으니까.
 똑똑.
 “쳇······.”
 유한성이 제이슨의 방에 노크를 함과 동시에, 유한성의 뒤에 있던 사내들은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렸다.
 혀를 차는 소리는 안타까운 듯 메아리로 남아 주위를 울렸다.
 “들어오시죠.”
 끼익.
 ‘오랜만에 보는군.’
 유한성은 내심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제이슨과 조금 안면이 있던 탓에.
 반면 제이슨은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놈이지?’
 척 보기에도 싸구려인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나타난 사내.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눈에 띄는 특징도 없다.
 정보 길드의 판테온 지부장이자, 고급 정보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그가 맞을 만한 손님이 아닌 것이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죠.”
 그러나 그 표정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지워져 버렸다.
 이쪽 업계에서 일하면서 사람은 겉보기가 다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그였기에.
 “웃차, 의자가 참 편하군요.”
 “별 말씀을. 무슨 용무로 저희 길드를 방문하셨는지요?”
 “그야 당연히 정보의 거래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말씀하시는지요?”
 “3백만 에리나짜리 정보.”
 “······.”
 3백만 에리나.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서 길드 하나를 인수할 수 있을만한 거금이었다.
 “후우······.”
 제이슨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3백만 에리나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가면 때문에 사내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알 수 있는 거라곤 목소리뿐인데,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일단 들어나 볼까. 헛소리라면······.’
 제이슨은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헛소리를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 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좋습니다. 일단 들어 보도록 하죠.”
 ‘잘 풀리는군.’
 제이슨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도 않는다면 어찌할지 내심 고민했던 유한성은,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놀라 자빠지거나 하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다.’
 아직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한성 자신은 과거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잘 들으십시오.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대륙에서······.”
 유한성이 이야기를 풀어 감에 따라서 제이슨의 표정은 점점 뒤바뀌었다.
 점차 크게 뜨이는 그의 눈 안에는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묻어났고.
 드륵······.
 의자에 파묻혀 있던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크흠······.”
 유한성의 말이 끝나자 제이슨이 신음성을 내뱉은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유한성이 제공한 정보는 그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적어도 그들, 정보 길드의 입장에선.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한 정보.
 인과 관계도 나름 타당하다.
 일어날 가능성 또한 높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솔직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근거도 충분하죠. 하지만······.”
 유한성은 제이슨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은 신뢰성의 문제였다.
 정보 제공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문제.
 “······이거면 충분할 겁니다.”
 유한성은 느릿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부러 계속 가려 두고 있던 반지가 잘 보이도록.
 “이건······.”
 제이슨의 시선은 유한성의 손에 달려 있는 반지로 향했다.
 루비를 깎아 만든 불꽃 모양 조각이 달려 있는 금빛 반지.
 단순히 눈으로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반지였지만, 이곳 판테온 왕국에서 그 반지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불꽃의 증표를 가지고 계실 줄은······.”
 “어쩌다 보니 얻은 것뿐입니다.”
 유한성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는 성화연이 준 물건이었다.
 ‘받아 내는 데에 좀 애를 먹긴 했지만.’
 에겔리라스 대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인 여성, 성화연.
 비록 과거에는 카불카 사냥 이후 도망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다르다.
 “시, 싫어! 내가 왜!”
 그런 그녀가 불꽃의 증표를 달라는 유한성의 부탁을 거절한 건 당연한 일이였다.
 그래서 유한성은 어쩔 수 없이 조건을 걸어야만 했다.
 “이 종이를 드리겠습니다.”
 “······장난해?”
 유한성이 제시한건 한 장의 종이.
 성화연은 눈을 좁히며 유한성을 쳐다봤지만, 이어지는 유한성의 설명에 그녀의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불카의 약점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제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스킬 때문입니다.”
 “무, 무슨?”
 “선구안(先驅眼). 미리 내다보는 눈이라고 하면 될까요?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술이죠.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서, 선구안이라고?”
 “네, 그러니까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이후의 대화는 완전히 유한성의 흐름대로였다.
 이미 유한성이 카불카를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에, 대화가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 종이가······ 내 미래에 도움이 될 거다?”
 “증표값 이상의 가치를 할 겁니다. 만약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면, 나중에 부탁 하나를 들어 드리도록 하지요.”
 “······증표 가지고 튀려는 건 아니고?”
 “대륙 어디로 도망간다 한들, 적염의 마도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요.”
 “뭐, 그건 그렇지만.”
 결국 성화연은 종이 한 장에 증표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 증표는 지금 유한성에게 3백만 에리나를 벌어다줄 예정이었다.
 “좋습니다. 거래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유한성은 머뭇거림 없이 제이슨이 내민 손을 잡았다.
 ‘다음에는······.’
 가면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는 유한성.
 그의 머릿속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의 생각이 다르듯, 정보 길드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의 대접이 달라진다.
 그도 그럴게, 살아서 나간다는 것 자체가 정보 길드의 중요 손님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유한성은 두 사내의 깍듯한 인사에 대충 손을 흔들어 주며 가볍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일단 한 건 해결.’
 제이슨은 우선 선금으로 150만 에리나를 지급해 주었다.
 지급 방식은 이곳 파이라이라는 도시에 있는 은행을 통해 지급하는 방식.
 그 많은 돈을 들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대부분의 거래에서 통용되는 방식이었다.
 “후우······.”
 유한성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공간까지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가면을 벗어 내었다.
 창문도 달려 있지 않아 제대로 환기조차 안 되는 정보 길드였기에, 답답함을 참는 것도 슬슬 힘들어지던 찰나였다.
 “아이템 팝니다!”
 “파티원 구합니다!”
 “목걸이 반지 가리지 않고 삽니다! 선 제시!”
 광장 이곳저곳에서는 돗자리 비슷한 것들을 깔고 앉아 목청껏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스태프 삽니다. 거래할 분은 알람 마법 건드려 주세요.
 그중에는 알람 마법을 믿고 잠들어 있는 마법사 한명과,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돗자리 위에 놓여 있는 반쯤 부서진 스태프를 향해 손을 뻗는 도둑의 모습도 보였다.
 ‘참······.’
 마치 게임의 한 장면과도 같은 풍경.
 그것이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의 풍경이었다.
 “여기, 레지나 하나.”
 유한성은 방금 본 장면을 말끔히 무시한 채, 포장마차처럼 생긴 이동식 가판대에서 음료수 한 잔을 시켰다.
 “레, 레지나요?”
 “네. 레지나 말입니다.”
 “······.”
 유한성의 주문에 여 종업원은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이내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게 움직였다.
 “하아······.”
 문득 유한성은 한숨을 쉬었다.
 이글거리는 열기 때문은 아니었다.
 ‘되돌아왔어.’
 유한성의 눈에 다시금 분수대가 들어왔다.
 예전엔 처참하게 부서져 물 대신 피가 뿜어져 나오던 분수대였다.
 성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멀쩡했지만, 유한성의 기억 속 성벽은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성문은 아예 통째로 뜯겨 나가 있었다.
 “음료수 나왔습니다. 1에리나인데······ 정말 드실 생각이죠?”
 유한성은 여종업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건넸다.
 “여기.”
 “감사합니다.”
 벌컥벌컥.
 유한성은 음료수가 나오기가 무섭게 음료수를 들이마셨다.
 차디찬 음료수가 목구멍 너머로 들어가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유한성이 있었던 곳은 지금 이 자리였다.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서 가장 큰 왕국인 판테온의 수도, 파이라이의 방어전.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다.
 대륙과 인간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이 되돌아온 이유.
 다시 말해 유한성이 회귀한 이유였다.
 기억의 문제야 그렇다 칠 수 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기억의 좌]
 의문의 노인이 당신의 대답에 만족해 준 물건입니다.
 
 “······.”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노인의 질문에 대답해 받은 물건.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 있는 물건은 이 보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후에 받게 될 물건이었으니까.
 ‘물론 아니라면 아닌 거지만.’
 아닐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니까.
 ‘······.’
 유한성은 머릿속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충 그려 보았다.
 처음 에겔리라스에 발을 디딘 순간.
 당황하던 주변의 사람들, 이어진 판테온 왕국에서의 생활.
 던전 공략. 대륙 개척. 3왕국 연합. 예언. 최후의 땅.
 ‘아!’
 그리고 그 제서야 가장 가능성 높은 가정이 떠올랐다.
 ‘역시 그 가능성이 가장 크지.’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은 지구에서 의문의 이유로 끌려온 사람들이 투쟁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다섯 개의 음영 앞에 선 지구인들에게 다섯 왕국 중 한 곳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던 의문의 존재.
 향할 왕국을 정하자 그 존재가 한 말은 간단했다.
 ‘대륙의 최서단을 향해라.’
 지구인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대륙민들과 힘을 합쳐 서쪽을 향해 진출했다.
 그리고 대륙의 최서단, 최후의 땅으로 떠난 4인의 원정대.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건 최후의 땅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문제는 왜 일어났냐는 건데.’
 최후의 땅에서 미지의 존재가 힘을 발휘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원정대원 중 한 명이 특이한 아이템을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서는 시간인데.’
 힌트는 시간이었다.
 굳이 유한성이 카불카를 사냥하던 시간대로 되돌아온 이유.
 딱히 떠오르는 사건은 없었지만, 뭔가 특이한 사건이 있었기에 지금의 시간대로 돌아온 것일 터였다.
 ‘흐음······.’
 거기까지 생각한 유한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 회귀의 이유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단은 강해지는 것이 최우선이다.
 적어도 유한성에게 있어서는 인류보다는 자신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충분히 강해진다면, 유한성은 머뭇거림 없이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유한성의 목숨을 구해 준 그의 옆에 설 수 있도록.
 “아 진짜! 진정 좀 해요, 마스터!”
 “진정하게 생겼어? 어? 내가 지금!”
 ‘요란하게도 등장하는군.’
 유한성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분수대 쪽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가 등장하는 찰나였다.
 “젠장! 그깟 돈! 그놈의 돈!”
 ‘잭슨.’
 큼지막한 대도를 등에 맨 채로 연신 날뛰고 있는 거구의 백인 사내.
 그의 이름은 잭슨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네?”
 “흠, 어렵습니다. 저희 쪽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요.”
 잭슨의 옆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연신 고개 숙이는 백인 여자는 아르테미스.
 그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젓는 남성의 이름은 백현진.
 황인과 백인이 아무런 언어적 어려움 없이 소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에겔리라스 대륙이기 때문이다.
 “최후통첩입니다. 나흘 내로 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길드 하우스와 압류 상태인 아이템들을 모두 경매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아, 물론 그러고도 금액이 모자란다면······.”
 “너 이 자식!”
 잭슨은 자신을 말리는 길드원들의 손을 뿌리치곤 곧바로 백현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그 모습을 보던 유한성은 괜히 이전의 일이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그래. 어째 처음부터 수상하다 싶었어. 솔직히 말해! 어디 길드의 스파이야! 이거 다 우리 길드 공중분해시키려는 수작 아니야, 어?”
 “······죄송하지만 저는 상부에서 시킨 일을 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돈을 빌려준 곳은 판테온 왕국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은행, 페르마입니다. 물론 돈을 빌려 달라고 한건 잭슨 당신이고요.”
 “······.”
 백현진의 막힘없는 대답에 잭슨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당장 손을 놓지 않는다면,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턱.
 백현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내려놓는 잭슨.
 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도 내려놓고 싶어서 내려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옷 여기저기에 묻은 먼지를 턴 백현진은 아르테미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흘입니다. 그 안에 갚지 못한다면 길드원 전체가 대금을 갚아야 할 겁니다. 무보수 노동으로.”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 백현진은, 이내 잭슨의 길드원이 들으라는 듯 넌지시 말했다.
 “뭐, 그 안에 길드를 탈퇴한다면 다르겠지만요.”
 “네 녀석······.”
 “마스터! 참아요, 쫌!”
 “그래요. 일단은 진정해 보라고요.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당장 돈을 모으러 다녀도 모자를 판이라고요!”
 연신 화를 내는 잭슨의 옆에서 그를 달래는 길드원은 고작 두 명이였다.
 다른 수십 명의 길드원들은 그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쉴 뿐.
 ‘하지만 속으로는 탈퇴할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유한성은 그러한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분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마스터.”
 “뭐야.”
 그러나 채 얼마 다가가지도 못했을 무렵, 잭슨의 길드원 한 명이 잭슨에게 말을 붙인 까닭에 유한성은 어중간하게 멈춰서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길드를 탈퇴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에겔리라스 대륙에 들어와서 마스터의 신세를 진 건 맞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까지 저당 잡힐 정도로 큰 빚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아르테미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한!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
 “조용히 해라, 조한솔.”
 “젠장······.”
 잭슨의 옆에 있던 로브 차림의 남성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댔지만, 잭슨의 묵직한 음성에 이내 고개를 픽 돌려 버리고 말았다.
 방금, 아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같은 길드원이었던 사내에게서.
 “나는 너희들의 길드 마스터다. 너희들의 성장을 도울 책임이 있지. 만약 이 길드에 남는 게 너희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나가라. 붙잡지 않겠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그동안 진 빚은 어떤 식으로든 갚겠습니다.”
 김도한은 잭슨을 향해 고개를 숙이곤, 이내 저 멀리 걸어가 버렸다.
 ‘그나마 예의가 바른 녀석이군.’
 그 사내에 대한 유한성의 평가는 ‘괜찮은 녀석’ 이였다.
 에겔리라스 대륙에선 아무런 말도 없이 길드를 탈퇴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저기······.”
 한편, 그들에게 다시 걸어오기 시작한 유한성을 발견한 아르테미스는 조심스럽게 잭슨의 어깨를 붙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뭐냐. 네 녀석은.”
 유한성은 자신을 노려보는 잭슨을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의 평생에 각인될 미소를.
 
 “······.”
 “이야, 음료수 맛이 참 좋네요.”
 “······.”
 판테온의 수도 파이라이에 위치한 길드 ‘임모탈’의 길드 하우스.
 이곳저곳에 붉은 압류장들이 붙어 있고 접근 금지 테이프가 쳐져 있는 그 공간에서, 유한성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신 음료수를 들이키고 있었다.
 반면 잭슨과 조한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단순히 굳어 있다기보다는, 인상을 찡그린 것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혹시 특이한 스킬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르테미스는 그들의 말에 새하얀 두 손을 허리에 얹고는 빽 소리를 내질렀다.
 ‘성화연이 생각나는군.’
 잭슨을 비롯해 두 길드원의 시선이 몰려 있는 곳은 다름이 아니라, 유한성의 손에 들려 있는 빈 유리잔이었다.
 “잘 마셨습니다. 그······ 아르테미스 씨라고 하셨나요?”
 “네. 음료수 맛은 괜찮았나요?”
 “최고입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유한성의 그러한 대답에, 조한솔은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박차고 일으켰다.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딱지가 붙어 있는 소파였다.
 “마스터! 저놈은 분명 사기꾼입니다! 돈을 벌 건수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아르테미스의 음료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신 것도 그렇고! 뻔하지 않습니까?”
 “흐음, 확실히 가능성은 있어.”
 “뭐, 뭐라는 거야! 죽고 싶어?”
 “으악! 마스터! 살려 주십시오!”
 쿵쿵쿵
 이내 아르테미스와 조한솔은 술래잡기를 하듯 테이블 주위를 빙 돌더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고.
 “으아악!”
 “모여들어라, 마법의 화살이여······.”
 이내 길드 하우스의 유리창 너머에서는 광장을 향해 도망치는 조한솔과, 그런 조한솔을 향해 푸른 머릿결을 휘날리며 활을 겨눈 채 달려가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허······.”
 잭슨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유한성과 만난 이후로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길드가 참 가족 같은 분위기군요.”
 “칭찬인지 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칭찬이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후릅, 그렇다면 다행이군.”
 잭슨은 유한성의 말에 대답하며 손에 들려 있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 커피는, 당연히 잭슨이 손수 탄 커피였다.
 ‘설마 설마 했지만······ 반응을 보니 역시나군.’
 현재 임모탈의 길드 하우스는 압류에 가까운 상태.
 돈이 없으니 음식을 준비할 종업원을 고용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한성은 아르테미스의 음식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음료수까지 맛이 없을 줄이야······ 1에리나를 투자한 게 아깝지 않았군.’
 유한성이 아르테미스의 음료수를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레지나’라는 미각을 잃게 하는 음료수를 먹은 것.
 “어찌 되었든······ 제안 자체는 고맙게 여기네. 하지만 지금 보다시피 길드 꼴이 말이 아니라네. 당장 갚아야 할 돈도 많이 남아 있고······. 의뢰라면 상황이 나아진 후에, 아니 나흘 뒤엔 길드 자체가 없겠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일 아니네.”
 “그러지 말고 말해 주십시오.”
 “싫네.”
 “······이걸 보여 드려도 말입니까?”
 “증표······.”
 성화연이 준 증표는 여기저기서 요긴하게 써먹혔다.
 새삼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유한성이었다.
 ‘뭐, 빚질 만한 거래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녀에게 뭔가를 더 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건네준 종이엔,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던전에 대한 공략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선구안에 고개를 끄덕이던 것으로 보아,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진 않을 터였다.
 “흠,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이러다가 성화연 그 여자의 귀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해서 말이야.”
 “증표가 있긴 하지만, 그녀의 세력에 속해 있는 건 아닙니다.”
 “흠······.”
 “뭐, 정 이야기하기 싫으시다면 이쯤하도록 하겠습니다.”
 유한성은 잭슨의 대답에 금방이라도 일어날 자세를 취했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는 여유로운 태도.
 마치 낚시를 하듯, 미끼를 던진 것이다.
 “알겠네.”
 그리고 몸이 달아오른 잭슨의 입장에선 먹이를 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뭐, 감사할 것까지야. 이야기가 길어질 듯싶은데, 괜찮겠나?”
 “이래 보여도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
 유한성이 이야기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자, 잭슨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유한성도 과거엔 대충 소식만 전해 듣고 자세한 사정은 몰랐기에, 가식으로 지은 표정은 아니었다.
 “얼마 전의 일이네. 당시 우리 길드는 미 발견 던전을 개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잭슨의 이야기는 꽤 길게 이어졌다.
 물론 유한성은 중간 중간 놀란 표정을 짓거나, 맞장구를 치는 걸 잊지 않았다.
 ‘대놓고 퍼 줄 수는 없다.’
 잭슨의 문제를 해결할 돈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걸 그냥 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런 큰 호의를 베푼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니까.
 하지만 잭슨의 사정에 동감하고, 그와 친밀한 관계가 된다면?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 백현진 자식이······.”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군요.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진정하게. 자네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진 않아. 애초에 페르마 은행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고······ 어찌되었든, 그래서······.”
 이야기는 점점 진행되고, 밝게 빛나는 태양은 조금씩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뭐지?’
 한편 잭슨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르테미스의 음료수를 마신 것에 놀라긴 했지만, 그게 호의로 이어질 리는 없는 일.
 하지만 어째서인지 잭슨은 유한성에게 점점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자식이 있다니! 천하에 몹쓸 놈 같으니라고!”
 사실 그렇게까지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확 갈아서 먹어 버리고 싶지만······ 젠장!”
 대개 인간이란 한 명을 같이 욕하면서 친해지곤 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된 것이네.”
 “흐음······.”
 마침내 잭슨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유한성은 고민하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조한솔이 아르테미스에게 붙잡혀 길드 하우스로 돌아온 건, 오래 전의 일이였다.
 ‘그렇게 된 건가.’
 잭슨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던전 공략을 위해 돈을 끌어서 썼지만, 던전 공략이 실패하면서 채무자 신세가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 속내는 복잡했다.
 
 -물자가 없어졌단 말이네! 단기전을 예상했던 우리 길드원이 뭘 할 수 있겠나! 더군다나 공략과 동시에 적대 길드에서 본부를 기습까지 해 오고 말이네.
 
 딱 봐도 더러운 냄새가 난다.
 던전 공략 사실을 아는 건 던전 발견을 담보로 빚을 진 잭슨과 그 길드원, 그리고 페르마 은행.
 적대 길드에 언질을 하고, 누군가를 시켜 물자를 빼돌린 게 누구일지는 명확하다.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과거에 잭슨의 사정을 들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불행자.’
 잭슨을 부르던 말이었다.
 충분히 강한 힘, 그리고 길드 마스터의 자질을 가졌지만 던전 공략의 실패로 인해 빚을 뒤집어쓴 남자.
 그의 길드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대규모 길드로 이전했고, 최후에는 아르테미스와 조한솔, 잭슨 세 명만이 남아 페르마 은행 소속의 용병이 되고 말았다.
 ‘흐음······.’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유한성의 속내는 더 복잡해졌다.
 겉보기에는 페르마 은행의 주도로 벌어진 일 같지만, 유한성의 생각은 반대였다.
 누군가가 잭슨의 길드를 공중분해시키기 위해 페르마 은행을 이용했다는 생각.
 실제로 임모탈 길드의 대부분은 ‘펜릴’이라는 신생 길드의 밑으로 들어갔으니까.
 ‘어쩐다······.’
 사실 유한성은 원래 적당히 이야기를 듣다가 그들에게 돈을 줄 생각이었다. 물론 의뢰라는 명목으로, 던전 공략 등의 이유를 들어.
 하지만 누군가 배후에 있다면 그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추격당하거나 보복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쥐 죽은 듯이 지내도 모자랄 판국에.’
 유한성의 아우라는 최저를 넘어선 최저.
 지금 상태로 암살자 하나라도 붙었다간, 비명횡사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전에도 그렇게 강했던 건 아니지만······.’
 과거에도 유한성이 그렇게 강했던 건 아니다.
 4인의 원정대에도, 이름난 강자들이 뛰어든 전장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약해, 수도 방어전에 남고 말았으니까.
 물론 그때야 아우라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성장을 계속한 탓이 컸다.
 이렇다 할 좋은 무기나 갑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지금이야 그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아직은 조심해야 할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자, 이제 자네 이야기를 꺼낼 차례네.”
 “의뢰 말입니까?”
 “그래. 일단은 들어나 보지. 간단한 거라면 얼마든지 해 주겠네.”
 잭슨은 웃음을 띈 얼굴로 유한성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같이 백현진을 욕한 탓인지, 그는 한결 나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의뢰는 어쩌면 간단할 수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수수께끼는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유한성은 잭슨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입이 열림에 따라, 미소를 짓고 있던 잭슨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들어갔다.
 “임모탈 길드에서 공략을 실패한 던전, 그곳의 공략을 원합니다.”
 
 다음 날 아침.
 유한성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임모탈의 길드 하우스를 향했다.
 등에 맨 가방에선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망할 대륙은 아이템 창이라는 걸 만들어 주지 않았으니까.
 “아, 유한성 씨!”
 “좋은 아침입니다.”
 유한성은 자신을 맞아 주는 아르테미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여기 한성 씨를 위해 음료······.”
 “죄송하지만 제가 바빠서 먼저 마스터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물론 그 얼굴은 금세 다급하고, 중대사를 앞둔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어서 오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다행이군요.”
 “어제 일은 사과하지.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보네.”
 “아닙니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죠.”
 유한성은 씩 웃곤 소파 위에 앉았다.
 비록 어제 잭슨에게 던전 공략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잭슨이 노발대발하며 커피 잔을 집어던지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잭슨이었더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 점이, 잭슨 당신의 장점이고.’
 잭슨이 그렇게 분노를 터트린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주요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시는 그 던전엔 발도 안 붙일 것이다! 우리 길드원을 수 십 명이나 앗아간 그 던전엔!’
 물자가 고갈되었다.
 잭슨을 필두로 한 임모탈 길드는 탈출을 감행했겠지만, 던전의 몬스터들이 그냥 멍하니 그들을 보내 줄 리 없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길드원들은 잭슨에게 있어서 상처였고, 후회였다.
 “마스터께서는 어제의 제안을 수락하셨어요.”
 “정말입니까?”
 유한성은 아르테미스의 말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하아, 인생이라는 게 정말 알 수가 없군.”
 잭슨은 한숨을 쉬었다.
 “죽은 길드원들도 어쩌면······ 당신이 던전을 공략해 주길 원하고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반드시 그럴 겁니다. 어제 하루밖에 보지 않은 사이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안다라······.”
 유한성의 말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잭슨.
 그가 마주하고 있는 사내의 말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죽은 길드원들이 억지로 죽었습니까?”
 “······.”
 “분명 자발적으로 희생했을 테지요. 임모탈 길드를 위해, 아니, 정확히는 잭슨 당신을 위해.”
 에겔리라스 대륙에 떨어진 지구인들에게 ‘길드’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없어지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고, 아무리 좋은 길드라도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보다는 덜 중요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모탈의 길드원들이 몸을 던진것은 분명 잭슨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을 이끌어 주고,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게 해 준 잭슨을 위해.
 “제가 잭슨의 길드원이였더라도 분명······.”
 “거기까지만 하지.”
 “······.”
 유한성은 입을 닫았다.
 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잭슨과 같은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유한성이었기에.
 ‘한서진······.’
 문득 그 사람을 떠올린 유한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상으로 여기는 사람을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유한성은 더 강해져야만 했다.
 4인의 원정대. 그 일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데, 누구의 의뢰를 받은 건가?”
 “의뢰인의 비밀입니다. 다만, 이 증표를 제게 줄 정도로 저를 신임하고, 믿고 계시는 분입니다.”
 ‘성화연인가.’
 잭슨은 대충 유한성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지 짐작했다.
 ‘이러면 대충 대륙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여기겠지.’
 화염의 증표는 단순히 성화연의 길드원에게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큰 빚을 진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증표로서 지급되기도 했다.
 그녀에게 큰 빚을 지울 만한 사람이라면, 대륙의 권력자 정도는 되어야 할 터.
 그 점을 노린 유한성이었지만, 잭슨의 짐작은 유한성의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어찌되었건, 의뢰는 수락하겠네. 다만······.”
 “시간이 문제가 되겠군요.”
 “그렇네. 얼마나 알아보고 온 건지는 몰라도······.”
 의뢰를 수락하기로 했음에도 잭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으니 돈을 갚기까지 남은 기한은 사흘이다.
 그러나 이전의 공략에서 던전의 중간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이틀.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압류당한 물건도 문제군.”
 게다가 새삼스럽지만, 현재 임모탈 길드 소속의 아이템들은 페르마 은행에 압류당해 있는 상태.
 당연히 그중에는 던전 공략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도 한가득이었다.
 “싼 물건들은 자비로 구입한다고 쳐도······ 상태 이상 회복약이나 포션이 문제네. 우리 길드엔 마법사가 많지 않아서 말이야. 힐러도 그렇고.”
 “무슨 소리입니까! 판테온 최강 마법사가 될 조한솔이 있지 않습니까!”
 ‘될’ 부분의 목소리를 거의 모기 소리만큼 작게 내서 어거지로 대륙 최강의 마법사가 된 조한솔이었지만, 유한성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휴.”
 신경을 쓰지 않는 건 아르테미스도 마찬가지였다.
 잭슨이야 길드 마스터이니, 길드원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중이였고.
 “현재 길드원 현황이 어떻게 됩니까?”
 “총 여든 명이네. 일단 소집령은 내려 둔 상태지만······ 안 올 녀석들도 있을 테지.”
 “구성비는요?”
 “근접 계열 쉰 명에 원거리 공격수 스무 명, 전문 힐러 넷에 마법사 여섯이네.”
 ‘확실히 힐러가 적긴 하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임모탈 길드 자체가 공격수 직업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네 명의 전문 힐러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인원수였다.
 평상시라면 문제될 건 없었다.
 힐러들이야 왕국 여기저기에 있는 교단에서 고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만한 자금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면······.”
 삐비빅! 삐비빅!
 유한성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그의 호주머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그건?”
 “핸드폰?”
 “물론 아닙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유한성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나?”
 “슬슬 움직이시죠.”
 “하, 하지만.”
 아르테미스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지만, 유한성은 제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소집령은 떨어졌고, 길드원들은 마스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던전 공략은 이미 시작되었단 말입니다.”
 “······맞는 말이네.”
 잠자코 유한성의 말을 듣고 있던 잭슨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조한솔, 아르테미스, 일단 이 돈을 가지고 가서 필수적인 물건······.”
 “필요 없습니다.”
 쿠웅!
 잭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한성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책가방만 한 크기의 가방에서 났다고 믿기 힘든 큰 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가방은······.”
 “압축 가방입니다. 아마 이 길드 하우스 창고보다는 클 테지요.”
 유한성은 가방의 입을 벌려 잭슨에게 보였다.
 그 안에는 포션과 마법 시약들을 비롯해, 던전 공략을 위한 기본적인 장비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제 의뢰인의 선물입니다. 던전 공략이 성공하길 바라는 의미의.”
 “······꼭 성공시켜야 하겠군.”
 “물론입니다. 제 의뢰인은 무섭거든요.”
 유한성은 씩 웃고는, 가방을 동여매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잭슨과 조한솔, 아르테미스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곤 유한성의 뒤를 쫒아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결 펴져 있었다.
 “날이 좋군요.”
 길드 하우스 바깥엔 햇살이 따사롭게 비춰 내리고 있었다.
 “신도 우리를 축복해 주는 건가.”
 “신이 우리를 축복해 준다면, 신관들이라도 보내 주시면 감사할 텐데요.”
 잭슨의 말에 아르테미스는 투덜대듯 말했다.
 평소에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그녀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절로 투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집 장소는 어디입니까?”
 “분수대 근처네.”
 “역시 약속의 장소는 분수대죠.”
 유한성은 픽 웃었다.
 약속의 장소가 분수대인 것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기에.
 “뭐, 뭐야 저건?”
 “개척이라도 떠나는 건가?”
 “······.”
 분수대에 다다른 잭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수대 주변에 몰려 있는 자신의 길드원들이,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려 길드 마스터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모탈 길드!”
 “마, 마스터를 뵙습니다!”
 “마스터를 뵙습니다!”
 그러나 잭슨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잭슨의 앞으로 몰려왔다.
 ‘훈련이 꽤 잘되어 있군.’
 임모탈 길드원들은 하나하나 눈빛이 살아 있었다.
 게다가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선 보기 드물게 길드 마스터를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
 지금 이곳에 모인 길드원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총 정원 일흔일곱 명! 불참자 없습니다!”
 “······.”
 분수대에 모인 임모탈 길드원들의 수는 일흔일곱 명.
 잭슨과 조한솔, 아르테미스까지 포함하면 정확히 여든 명.
 예상과 달리 임모탈 길드원 중에선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너희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잭슨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임모탈 길드원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때의 던전 공략이라면 도망칠 이유가 없습니다!”
 뒤이어 다른 길드원들도 목소리를 냈다.
 “이대로 길드가 해체되느니, 차라리 던전에 들어가겠습니다!”
 “죽은 녀석들도 저희가 던전을 공략하길 바랄 겁니다! 어차피 해산될 바에야, 차라리 그 녀석들 원한이나 갚겠습니다!”
 “마스터!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척, 척, 척, 척.
 이내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든 채 잭슨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빛은, 갈구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잘못 생각했군.’
 유한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사실 임모탈 길드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은, 잭슨이 길드 해산 하루 전에 강제로 그들을 탈퇴시켰기 때문이었다.
 조한솔과 아르테미스는 잭슨의 반대에도 불구, 억지로 남았기 때문에 페르마의 용병이 된 것이었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던 유한성이기에 잘못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서, 임모탈이란 길드는 자신의 목숨 이상이었다.
 ‘기대가 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유한성은 기대가 되었다.
 임모탈 길드가 만약 존속할 수 있다면.
 잭슨과 그 길드원들이 에겔리라스 대륙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로 뭉친다면, 어떠한 돌풍을 몰고 올 수 있을지.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짜식들······ 괜히 감동시키긴······.”
 잭슨은 코를 훌쩍이며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길드원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크흑······.”
 “흡······.”
 아르테미스와 조한솔도 그 옆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들어라!”
 이내 광장에 잭슨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벨카인의 폐허로 다시 향할 것이다!”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잭슨의 주먹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척, 척, 척, 척.
 잭슨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임모탈 길드원들은 제각기 손에 쥔 무기들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잭슨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그들의 의지가 신에게 닿길 바라듯.
 이 하늘 아래에, 그들을 막을 자가 없다는 걸 알리듯.
 “뭐, 뭐야······.”
 “쩐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마음에 드는데?’
 그리고 그건 유한성 또한 마찬가지.
 “일흔아홉 명의 임모탈 길드원, 이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다. 그럼 바로······.”
 “잠깐만요.”
 인원 점검을 마친 잭슨이 호기롭게 진군을 하려던 찰나, 유한성이 갑작스럽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 무슨 일인가?”
 “감히 마스터의 앞을 가로막다니!”
 창!
 그 모습에 한 길드원이 검을 뽑아들자, 이내 다른 길드원들도 이어서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창! 챙챙! 까르릉! 스콱!
 “······.”
 그 소름끼치는 소리에, 유한성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아르테미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그러셨죠?”
 “네?”
 “신이 우리를 돕는다면, 신관이라도 보내 주길 바란다고.”
 두두두! 두두두!
 동시에 수십은 되어 보이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임모탈 길드의 옆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한성은 그들의 가장 선두, 말 위에 타 있는 기사 차림의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기사 에칸.”
 이내 말에서 내린 성기사는 투구를 벗고 유한성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성기사 에칸입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사제 여든 명, 성기사 스무 명 모두 도착했습니다. 연락을 드려도 나타나시지 않아 당황하던 참이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서, 설마······.”
 잭슨은 유한성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길드원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다가온 인원들 때문이었다.
 “자, 이제 신도 저희를 도와주시는군요.”
 “······.”
 잭슨은 아무런 말없이 유한성을 쳐다보았다.
 피식.
 그러나 그것도 잠시, 씩 웃곤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전군! 벨카인의 동굴을 향해 진격한다!”
 “우와아아아!”
 “임모탈! 임모탈!”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리!”
 “신의 이름으로!”
 181명의 대인원이 내지른 우렁찬 고함 소리는, 드넓은 광장에 뇌성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벨카인의 폐허
 
 
 “결국 다시 도착했군.”
 “그러게요, 마스터.”
 마을을 떠난 181명의 대인원은 오래 걸리지 않아 벨카인의 폐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가 울창한 산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그마한 굴 하나.
 그 입구만 보아서는 폐허는커녕 자그마한 동굴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유한성은 이곳이 벨카인의 폐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척 보기에는 그저 새끼 곰이 들어가서 잘 만한 작은 굴이다.
 동굴의 입구에서 그 끝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자그마한.
 하지만 그것은 시각적인 속임수일 뿐.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결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동굴의 입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정확히 어디까지 공략했던 겁니까?”
 “큰 분수대가 나왔던 곳까지네. 아마 전체 던전의 중간 정도 될 테지.”
 던전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잭슨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했다.
 벨카인의 폐허는 크게 두 곳으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 구간은 동굴의 초입부터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두 번째 구간은 지하 1층부터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는 구간까지.
 잭슨 일행이 공략한 구간인 분수대는,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조금 못 미친 위치였다.
 ‘거기까지 가는 데엔 별 문제 없겠군.’
 이미 한 번 공략한 구간.
 게다가 이번엔 벨카인의 폐허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유한성까지 공략대에 포함되어 있다.
 사정이 사정인 탓에 직접적으로 길을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선구안을 핑계 삼아서 간접적인 도움은 충분히 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잭슨 일행이 도착한 큰 분수대 앞,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중간 보스와도 같은 존재.
 ‘까다로운 녀석이었지.’
 회귀 전에 벨카인의 폐허가 공략된 것은, 임모탈 길드가 공략을 실패한 뒤로 시간이 꽤 지나서의 일이었다.
 임모탈 길드가 강제 해산되자 페르마 은행은 던전에 관련된 정보를 경매에 붙였고, 거금을 투자해 그것을 낙찰 받은 것은 판테온 왕국의 10대 길드 중 하나인 ‘제피로스’.
 그러나 제피로스의 첫 번째 던전 공략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세 차례나 더 공략을 시도한 끝에 가까스로 던전 공략을 끝마칠 수 있었다.
 ‘제피로스가 상위 길드는 아니었지만······.’
 제피로스는 10대 길드 중 상위에 랭크되어 있던 길드는 아니었다.
 오히려 10대 길드에 가까스로 발을 걸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소 길드는 절대로 아니었다.
 애초에 10대 길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 자체가 이 판테온 왕국에서 충분히 강력한 세력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제피로스가 고전했다면, 임모탈이라고 고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제피로스가 세 번이나 공략을 실패한 이유.
 ‘문지기 세로우······.’
 두궁, 두궁.
 놈을 떠올리자 유한성의 심장이 조금씩 떨려 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공략의 관건은 문지기에 달려 있었기에.
 “자,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입하도록 하지. 우리 임모탈 길드에게 있어선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 말이야.”
 “맞습니다, 마스터.”
 유한성이 떨리는 가슴을 다잡는 새에, 잭슨은 주위에 모여 있는 인원들을 점검하곤 던전 내부로 진입할 준비를 끝마쳤다.
 “선발대부터 차례로 진입하도록 한다. 이전에 던전에 돌입했을 때에도 몬스터들이 선제공격 패턴을 취했으니, 수비에 중점을 두도록.”
 “선발부대, 진입!”
 아르테미스의 신호에, 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무 명의 인원은 즉시 동굴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한솔, 마법 신호는?”
 “이상 없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통신은 원활한 것 같습니다.”
 조한솔은 손에 들고 있는 푸른 마법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투명한 색깔의 푸른 마법구 안에서는, 마치 전파처럼 일렁이는 신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팟!
 조그마한 미동도 없이 일자로 흐르던 전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한솔은 그 진폭을 보며 신호를 분석하더니, 이내 씩 웃으며 외쳤다.
 “선발대 수비진 확보, 완료입니다!”
 “좋아. 곧바로 진입한다! 임모탈 길드원들은 선두에서 진입하고, 사제와 성기사단은 뒤에서 진입하도록!”
 “진군!”
 예순 명에 가까운 임모탈 길드원이 내는 짧고 굵은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이 외친 것처럼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신호로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 빠른 속도로 차례차례 동굴 내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에칸 경, 사제들의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예? 하지만······.”
 줄 뒤편에서 앞의 대열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던 유한성은 에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에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현재는 유한성의 기부금 때문에 고용당한 입장이라곤 하지만, 그들은 판테온 왕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무력집단.
 유한성이 50만 에리나를 기부하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개인에게 고용당할 신분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에칸으로서는 그저 교주의 ‘신의 계시’라는 지엄한 명령 때문에 유한성을 돕는 것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전면에 나선다면 던전 공략이 더욱 수월할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러나 유한성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 됩니다.”
 “······.”
 “일단은 사제의 보호가 우선입니다. 교주님께서도 저를 믿고 보내 주시긴 했지만, 한편으로 내주신 인원이 무사히 생환하길 바라고 계실 겁니다.”
 기부금을 받고 함박웃음을 짓던 걸로 보아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유한성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진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일반 몬스터와의 전투는 철저히 임모탈 길드원들이 담당할겁니다. 성기사들과 사제는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에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유한성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동굴 입구를 향해 머뭇거림 없이 몸을 던졌다.
 
 [벨카인의 폐허]
 흑기사 벨카인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왕성에서 파견된 추격자들을 피해, 고대부터 마수들의 낙원으로 여겨지던 이곳에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역사가 흐르고 진실이 알려짐에 따라 그는 왕국의 영웅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미 그의 시체는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인 뒤였습니다.
 
 -던전 내부로 진입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신체에 악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던전 내부에서 피로도와 공복감이 더 빠르게 상승합니다.
 -끝을 보지 못한 던전입니다. 왕궁에 지도를 공유하면 그에 따른 포상이 주어집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창을 보지도 않은 채.
 파앗!
 어두운 동굴을 향해 몸을 던지자,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이며 눈앞의 광경이 뒤틀렸다.
 머리에서는 가벼운 현기증과도 같은 통증이 일고, 귀는 순간적으로 청력을 잃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던전에 입장할 경우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대륙에서 벌써 수백 번도 넘게 경험한 일이였지만, 그럼에도 적응되지 않는 일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행인 점은, 이 모든 일들이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고 끝난다는 것.
 카캉! 카카캉!
 귀가 원상태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소리는, 칼들이 부딪히며 연주하는 노랫소리였다.
 “끼아아악!”
 “한 번 공략했던 곳이다! 겁먹지 말고 밀어붙여!”
 임모탈 길드원들은 던전의 입구를 기점으로 삼아 원형의 방어진을 형성한 뒤, 하늘에서 공격해오는 수많은 몬스터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눈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어진 채, 양 팔에 달려 있는 날개를 펄럭이며 피로 얼룩진 이빨을 드러내는 몬스터의 이름은 블러디뱃.
 크기도 평균적인 성인 남성을 훌쩍 뛰어넘는 크기인데다, 철보다 더 날카로운 강도의 발톱을 드러낸 채 공중에서 기회를 엿보기 때문에 사냥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던전의 효과로 선제공격을 하게 되어, 오히려 상대하기 한결 수월한 상황.
 “크에엑!”
 “오라, 번개여!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파지직! 파지지직!
 ‘꽤나······.’
 여든 명에 가까운 인원이 전투에 열중하고 있는 던전 내부.
 그들 모두 10대 길드 중 하나인 임모탈에 속해 있는 만큼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조한솔이었다.
 스파크가 일렁이는 지팡이가 한 번 빛을 뿜으면, 수십에 가까운 블러디뱃이 몸을 부르르 떨며 추락하고, 뇌성은 동굴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현재 상황상 좁은 공간에 몬스터 다수가 뭉쳐 있어 뇌(雷) 계열 마법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조한솔의 마법 실력은 꽤나 좋은 편이였다.
 파바바박! 파바박!
 한편, 던전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 빠른 속도로 화살은 연사하는 아르테미스 또한 유한성의 시선을 잡아끌긴 마찬가지.
 ‘빠르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수발의 화살을 발사하고,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블러디뱃의 날개를 찢어 놓는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중간 중간 조한솔을 쳐다보는 것을 볼 때, 아직까지 제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붕! 붕!
 조한솔과 아르테미스를 포함해 다른 길드원들 또한 생각 이상의 성과를 보여 주고 있었지만, 잭슨의 무력은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다.
 푸콰악!
 잭슨의 커다란 칼이 한 번 바람을 가를 때면, 직접 칼에 가격당한 블러디뱃 들은 몸의 한가운데에서 피와 내장을 뿜으며 한 번에 두 동강 나 버린다.
 뿐만 아니라 검의 풍압에 휘말린 블러디뱃들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수비진 바깥으로 나가떨어질 정도.
 ‘이 정도라면······.’
 그 모습을 보고서야 유한성은 문지기 세로우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이정도의 수준이라면, 적어도 제피로스의 공략 때처럼 사상자가 많이 나오진 않을 테니까.
 “사제들은 부상자를 치료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제들이 던전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유한성이 큰 소리로 그들의 등장을 알리자, 아군의 분위기는 더더욱 고무되었다.
 “사제들이 왔다!”
 “더 밀어붙여!”
 사제들은 던전 내부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케아아악!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러디뱃 몇 마리가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사제들을 향해 돌진했지만.
 서걱.
 무의미한 일이였다.
 키엑?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블러디뱃의 머리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 있는 성기사는 블러디뱃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블러디뱃을 향해 쇄도하는 중이었고.
 유한성은 그런 성기사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역시 질풍의 신, 에임의 성기사답군.’
 에칸을 필두로 한 스무명의 성기사들은 잭슨처럼 패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진 않았지만, 마치 잘 벼려진 칼과 같이 날카롭고 날렵한 모습을 보였다.
 신성력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보이는 무위가 그 정도였으니, 신성력을 사용할 경우의 무위는 그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을 터.
 ‘50만 에리나쯤이야······.’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정보 길드로부터 받을 150만 에리나가 남아 있다.
 의뢰비를 제하더라도, 아직은 여유 있는 형편.
 ‘물론 계획한 일을 실행하기엔 턱도 없는 금액이지만······.’
 그러나 유한성이 생각한대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지금 가진 돈으로도 턱 없이 부족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긴 한데······.’
 “으하하핫!”
 그때 갑자기 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하고 화끈한 감각에, 유한성은 정신이 확 들었다.
 
 “잘 보게! 이게 우리 임모탈의 위력이란 말일세!”
 “저, 정말 대단하군요······.”
 유한성은 임모탈 길드원이 아니라 잭슨의 손힘을 말한 것 이였지만, 잭슨은 그 사실을 평생 모를 터였다.
 “길드원 여든 명 중 전투 불가능 인원은 0명입니다.”
 “에칸 경, 성기사와 사제들은 어떻습니까?”
 “이쪽 또한 부상은 없습니다.”
 “정말 신이 우리를 돕는군.”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몬스터들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구구구구······.
 미세하게 흔들리는 땅.
 지면을 조금씩 울리는 발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크르르······ 케아아······.
 쇠를 긁어 대는 듯 기성으로 가득한 몬스터들의 괴성도 점점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먹거나 긴장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환영 인사가 꽤나 격한데······ 뭐, 상관없겠지.”
 스릉······.
 잭슨의 어깨에 매여 있던 대검은 검집에서 풀려나와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방향을 겨누었고.
 “돌격하라!”
 뚝.
 검끝에 매달린 블러디뱃의 핏방울은, 몬스터들의 운명을 예고하듯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쾌속.
 그들의 던전 공략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었다.
 “전열 재정비! 부상자는 뒤로 빠지고 마법사는 속박 마법 위주로 실행한다!”
 “적들의 발을 묶어라! 바인딩(Binding)!”
 “발 디딜 곳을 잃을 지어라. 월 라이즈(Wall RIze).”
 “4조는 뒤로 빠지고, 5조 앞으로! 부상병은 회복되는대로 다시 전투조에 합류한다!”
 잭슨의 명령하에 임모탈 길드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우왕좌왕하거나 허둥대는 길드원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질풍의 신, 에임의 이름으로!”
 “악을 멸절하라! 신의 이름을 드높여라!”
 부상병과 사제들이 모여 있는 곳엔 성기사 스무 명의 철통같은 수비.
 사제들이 오로지 힐링 마법과 버프 마법에만 집중하니, 부상의 치료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전투 지역과 사제들이 있는 위치를 오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치료 시간보다 더 걸릴 정도로.
 그것이 던전의 쾌속 공략으로 이어진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심각하게 빠른데.’
 그 속도는 사제들 사이에서 몸을 숨긴 채 전투를 지켜보던 유한성이 당황할 정도였다.
 사실 임모탈 길드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공격을 전담하는 직업군으로 길드를 형성한 탓에 부상의 회복이 느리다는 점이였다.
 물론 포션이나 응급 치료 키트 같은 아이템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가격도 비쌀뿐더러, 사제의 신성 마법에 비해 상처가 치료되고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던전 공략 중 공백 시간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던전 공략에 타 길드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길드가 될지도 모르겠어.’
 그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건 사제나 백마법사들.
 교단이나 백마법사들의 길드 중 하나와 연계만 잘 맺는다고 한다면, 임모탈 길드는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지금같이 호흡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지금이야 사제와 성기사들이 유한성의 통제 하에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긴 했지만, 잭슨의 리더십이라면 큰 불화가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이 구역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의 생명 반응이 사라졌습니다.”
 칼 부딪히는 소리와 마법이 작렬하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조한솔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기쁜 소식을 밝혔다.
 “여기서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일전에 도달했던 분수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후에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만반의 휴식을 취하고 몸 상태와 장비를 재점검하도록! 최후의 1인까지 정비가 끝나면 그때 다시 움직이도록 한다.”
 
 잭슨은 주위 길드원들과 사제들, 성기사들을 살피더니 즉각적으로 휴식 명령을 내렸다.
 ‘판단 좋고.’
 시기적절한 판단이었다.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밀고 가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만한 상황이지만, 잭슨은 용케 아군들 사이에 누적되어 있는 피로를 눈치챈 것이다.
 “휴우······.”
 유한성은 괜히 무거운 한숨을 불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작 그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안전하게 있었지만, 잭슨의 행동을 비롯해 이것저것을 살펴본 탓에 오히려 더 피로한 기분이었다.
 유한성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로,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내 투명한 창이 눈앞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우라 창]
 이름(Name) : 유한성
 칭호(Title) : -
 직업(Class) : 검사 (Sword Man / Normal)
 소속(Belong) : -
 공격 계수 : 5.6
 수비 계수  : 6.8
 마법 계수 : 0
 움직임 계수 : 6.9
 계수 총합 : 19.3
 잔여 계수 : 11.1
 혼(魂) : -
 영(靈) : -
 인(絪) : -
 
 던전에 들어온 지 반나절에 가깝게 흘렀지만, 잔여 계수는 고작 1.1이 올랐다.
 공략 대원으로 등록이 돼 있다곤 하지만, 전투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불가피한 일이였다.
 지금의 유한성은 문지기는커녕, 일반 몬스터 하나조차 상대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좀 피곤해 보이는군?”
 “아닙니다. 한 것도 없는데요 뭐.”
 유한성이 아우라 창을 살필 무렵, 잭슨과 아르테미스, 조한솔이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마스터, 지금처럼만 되면 이틀 내로 던전 공략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참 좋을 텐데······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
 아르테미스도 잭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1층부터는 지금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정확한 판단입니다.”
 유한성 또한 아르테미스의 말을 거들었다.
 “선구안으로 살펴보니, 분수대 너머에 문지기가 있더군요.”
 “흠······ 선구안 말인가.”
 잭슨을 비롯한 일행에겐 이미 선구안에 대해 이야기한 유한성이었지만, 아직 그 효과를 확인한 적이 없기에 잭슨은 조금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의심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선구안의 효과는 기대 이상입니다. 제가 증표를 주신 분께 선택받은 이유도 선구안 덕분입니다.”
 유한성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미 그 이름 높은 성화연까지도 속이지 않았던가.
 “문지기라······.”
 잭슨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각 던전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문지기는 단순히 ‘강한 몬스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나 지금처럼 아군의 사기가 고취된 상황에서는, 문지기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그 기세가 반전이 될 수가 있다.
 게다가 지금의 임모탈 길드에겐 사흘이라는 시간 제한마저 있는 상황.
 문지기에서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면, 던전의 공략 여부도 불확실해지고 만다.
 “문지기의 능력이나 외형, 약점 같은 것은 알 수 없는 건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이에요?”
 유한성의 대답에 아르테미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까지 알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한 그녀였다.
 “뭐, 그렇게 놀라실 정도로 큰 정보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대략적인 정보일 뿐이니까요. 다만, 직접 눈앞에서 문지기를 보면서 선구안을 사용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서 그 대략적인 정보는 어떤 것인가?”
 “음······.”
 유한성은 잭슨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선구안을 사용하는 척을 하곤 입을 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크기는 잭슨보다도 더 크군요. 거의 2미터 30 센티미터 정도······ 한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커다란 낫 한 자루······ 그리고 다른 손에 들린 것은······.”
 물론 속으로는 이전의 기억을 되짚는지라 정신이 없는 유한성이었다.
 “단검······?”
 “단검이라고?”
 “단검입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건 거대한 낫, 왼손에 들린 것은 자그마한 단검입니다.”
 “아무래도 물리 공격에 특화된 문지기 같은데요, 마스터?”
 “단정 지을 수는 없지. 그래도 물리 공격을 하는 패턴이 없지는 않겠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하. 굳이 선구안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거네. 애초에 이곳 공략을 다시 하게 된 것도 자네 덕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할 다름입니다.”
 유한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찰나, 길드원의 신호를 받은 조한솔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 길드원들은 정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빠르군요.”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저희는 임모탈 길드니까요.”
 “······그렇군요.”
 유한성이 보기에 조한솔은 심하게 열정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회귀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길드가 해산되고 많은 일이 있었던 건가.’
 회귀 전, 잭슨이 불행자로 불리웠을 시절의 조한솔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조한솔을 예상하고 임모탈 길드에 접근한 유한성이었기에, 지금 보이는 조한솔의 모습은 도통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것은 회귀 전의 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건가는 조한솔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였다.
 유한성은 이미 충분히 임모탈 길드를 돕고 있었으니까.
 “에칸 경,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어떻습니까?”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당장 출발은 가능합니다.”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기초적인 축복이나 힐링 계통의 마법들은 3, 4분 정도. 고급 신성 마법은 10분입니다.”
 “10분 뒤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잭슨.”
 “그렇게 하지.”
 잭슨은 별다른 불만 없이 유한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곳 에겔리라스 대륙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대가는 마나가 아니다.
 하지만 그 대신으로 다른 페널티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
 분수대 바로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스터, 아까 상대했던 몬스터들 말입니다만······.”
 “한성 씨, 이거 제가 만든 음료수인데······.”
 “자, 잠시만요! 갑자기 선구안의 효과가······.”
 “선구안! 혹시 뭣 좀 알아낸 건가?”
 “아무래도 선구안의 페널티 때문에 두통이 치미는 것 같습니다. 잠시만 혼자 있을 시간을······.”
 “어, 어떻게 해! 이 음료수라도 드시고 힘을······.”
 10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그 시간동안 유한성은 아르테미스의 음료수를 어떻게든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고, 조한솔과 잭슨은 그 둘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성기사 및 사제들의 준비를 모두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 유한성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성기사 에칸.
 “그, 그렇습니까? 잭슨 님!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좋아.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아르테미스와 조한솔은 전방으로 가도록.”
 “알겠습니다, 마스터.”
 “네, 마스터.”
 성기사들은 각자의 검을 꽉 움켜쥐며 결연한 의지를 다잡았고, 사제들은 길드원들에게 하나하나 축복을 내리기 시작했다.
 “분수대를 지나가면 바로 문지기가 나타날 거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죽은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공략하고 말 것이다!”
 “임모탈!”
 임모탈을 부르짖는 소리는, 천천히 던전을 집어삼켰다.
 
 
 분수대에서는 이전의 던전 공략과 마찬가지로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문지기가 있다는 사실에, 임모탈 길드원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의 앞에서 길을 막고 있는 것은 거대한 철문.
 철문은 마치 거인들이나 이용할 것처럼 커다랗기 그지없었다.
 “문을 열도록 하겠네.”
 “예.”
 구우우웅······.
 철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잭슨 혼자만의 힘으로 문이 열리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계단이군.’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
 그리고 그 앞.
 하얀 가면을 쓴 거구의 괴물은 주저앉은 채로, 아래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회귀 전과 똑같아.’
 체구에 걸 맞는 큰 망토는 다 헤져서 끝이 자락자락 갈라져 있고, 가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동자에선 기이한 느낌마저 드는 연녹 빛깔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녀석의 목에 걸린 붉은 목걸이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색이였다.
 “인간이라······.”
 느릿한 속도로 고개를 치켜든 괴물은, 쇠를 긁는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말을 할 줄 아는 건가?”
 “보다시피.”
 세로우는 던전 내부에 인간이 들어왔다는 것에 약간 놀란 눈치였다.
 탈칵! 카칵!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로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낫과 단검을 쥐어들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새하얀 낫과 단검은, 보기만 해도 시릴 만큼 차가운 예기를 내뿜고 있었다.
 “계단을 지키느라 지루하던 차였는데······ 잘되었군.”
 “싸우지 않을 방법은······.”
 잭슨이 유한성을 쳐다보았지만, 유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군. 모두 전투준비.”
 ‘아쉽게 되었군.’
 잭슨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문지기가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
 대화만 잘 통한다면 문지기와 싸우지 않고도 지하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로우는 그 케이스에 속하지 않았다.
 “크크크······.”
 뚜둑. 뚜두둑.
 세로우는 임모탈 길드원들과 성기사, 사제들을 찬찬히 훑으며 몸을 풀었다.
 기이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연녹빛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면 끝없는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꿀꺽.
 임모탈 길드원들은 당장이라도 돌격할 자세를 갖춘 채, 목 너머로 어렵사리 침을 넘겼다.
 “이곳에서 모두 죽는다.”
 파파팍!
 세로우가 땅을 박차고 임모탈 길드를 향해 돌진한 순간.
 “전원 돌격!”
 잭슨의 검이 세로우의 가면을 향했고.
 “우와아아!”
 “돌격하라!”
 임모탈 길드원들은 한꺼번에 세로우가 있는 광장을 향해 돌격했다.
 그 중에서도, 마주 돌진해오는 세로우에게 가장 먼저 일격을 가한 건 조한솔이었다.
 “패럴라이즈 쇼크(Paralyze Shock)!”
 파지지직!
 지팡이 끝에서 순간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푸른빛의 뇌전.
 휘콰아악!
 스파크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창의 형상으로 화한 뇌전은,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를 내며 세로우의 가슴께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 한 번 깜빡할 만할 사이에 날아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제법인데?”
 카캉!
 “마, 막았다고?”
 그러나 세로우는 피하기는커녕, 그런 조한솔의 일격을 낫을 휘둘러 가볍게 막아 내었다.
 심지어 돌진해오는 속도마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
 ‘패럴라이즈 쇼크를 막아 냈다고?’
 당황한건 유한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로우가 들고 있는 낫에 마법을 상쇄하는 힘이 서려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패럴라이즈 쇼크는 상당히 고위급의 마법.
 조한솔이 광장에 들어오기 전에 메모라이즈를 하지 않았다면, 방금처럼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마법이었다.
 ‘패럴라이즈 쇼크라면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한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유한성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세로우는 빠르게 임모탈 길드원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흐압!”
 붕!
 선두에 있던 조한솔이 뒤로 빠짐과 동시에, 잭슨의 검은 육중한 파공음을 내며 세로우의 가면을 노렸다.
 카캉!
 세로우의 대응은 낫이 아닌 왼손에 들려 있는 작달막한 단검.
 한 손으로 내리친 단검임에도, 그 힘은 잭슨의 검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너의 목을 이곳의 입구에 걸어 두는 게 좋겠군.”
 “크윽······.”
 잭슨을 내려다보며, 세로우는 천천히 다른 한 손에 들린 낫을 들어 올렸다.
 파캉!
 하지만 낫은 잭슨을 베어 버리는 대신,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쳐 내야만 했다.
 “마스터!”
 “자, 장난이 아니군······.”
 아르테미스가 벌어 준 찰나의 시간 덕분에, 잭슨은 무사히 세로우에게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화살을 날려 준 아르테미스가 아니었다면, 세로우의 낫이 잭슨의 목숨을 거두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괜찮으십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은 것 같군.”
 카캉! 카카캉!
 한 손엔 단검, 다른 한 손엔 낫.
 두 개의 무기를 쥔 세로우는 귀신처럼 날뛰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불나방 같은 녀석들!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테지. 묘비명은 생각해 놨나?”
 수명이나 되는 인간들을 한꺼번에 상대함에도 아직 여유가 있는지, 세로우는 중간 중간 거슬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도발을 하곤 했다.
 “뭐라는 거야! 오페라의 유령은 관 짝에나 들어가 있어!”
 “계단을 지키고 있던 게 아니라 혼자 버려진 거겠지!”
 하지만 임모탈 길드원들 또한 만만치 않게 받아치는 중이었다.
 “크윽······.”
 어쨌거나 임모탈 길드원들이 달려들어 세로우를 상대하는 사이, 잭슨은 손이 아리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마법은 먹히지도 않고······ 힘과 움직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같지 않아.”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겁니다. 운이 나쁘다면······.”
 유한성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려던 찰나, 잭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한 바이네. 그보다 자네는 선구안의 사용에 집중해 주게. 조금이라도 빨리 약점을 알아내야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잭슨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세로우를 향해 달려갔다.
 길드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치카악!
 “끄아악!”
 “너희의 심장을.”
 콰직! 콰지직!
 “꺄아악!”
 “짓이겨 주지.”
 하나둘 나가떨어지는 임모탈 길드원들.
 중상을 입고 한구석에 물러나 있는 길드원들 또한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한성은 인상을 쓴 채 입을 열었다.
 “에칸 경!”
 “말씀하시길.”
 “지금부터 스무 명의 성기사들은 전부 공격에 집중해 주십시오. 사제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상자의 치료보다는 공격이 우선입니다. 중상이 아니라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에칸의 표정도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직감적으로 세로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이다.
 “적들의 발을 묶어라! 바인딩!”
 “발 디딜 곳을 잃을 지어라. 월 라이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세로우의 가공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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