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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1권 (1화)

2017.09.21 조회 436 추천 1


 종횡무진 1권 (1화)
 
 별스런 길(別道)을 가는 작가...
 
 
 ‘별도(別道)’가 사무실 문을 처음 두드린 것은 따사로운 춘광(春光)이 한낮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던 어느 봄 날이었다.
 훤칠한 키에 나름대로 수려한 용모, 그리고 소탈한 미소를 지닌 별도의 첫인상은 산뜻함, 그 자체였다. 하나 그가 첫인상과는 달리 얼마나 질기고 악착같은 인물인지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일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서울 양재동 사무실을 오픈한 후에야 ‘별도’가 겉보기와는 딴판으로 가슴 속에 괴상하고 별스런 생각을 가득 지닌 괴인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별도’가 그리는 무협의 세계는 철저한 흥미와 허무맹랑의 별천지이다. 강호의 도의(道義)라던지 무림대의(武林大義)라는 복잡한 말은 접어두고, 통쾌하고 흥미진진하며 박진감 넘치는 요절복통의 한 마당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그야말로 만화같은 요지경세상을 한 바탕 신나게 휘젓고 다니는 괴인들의 대잔치인 셈이다.
 이런 식의 무협에 대해 다소 경박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으나, 무협이란 세계가 때로는 이처럼 통렬한 맛도 줄 수 있는 법이며, 그러한 맛을 첫 작품에서 유감없이 나타냈다는 것에 ‘별도’의 작가로서의 재질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나도 한 때는 이런 무협의 맛을 선보이기 위해 <권왕(拳王)>이나 <강호무뢰한(江湖無賴漢)>같은 작품을 쓴 적이 있는 만큼, ‘별도’의 이런 기획이 나름대로 소신에 찬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작품, <종횡무진(縱橫無盡)>은 말 그대로 한 사나이가 풍진천하를 미친 듯이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는 한바탕 활극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다만 여도획걸괴(如盜獲乞怪)라는 괴상망칙한 별호와 채가(蔡家)라는 성만으로 강호를 온통 휘젓고 다니는 주인공의 통쾌무비한 활약을 뒤쫒다 보면 한 겨울의 추위쯤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별난 사내 ‘별도’의 별난 이야기, <종횡무진>을 독자들 앞에 자신있게 선보이며, ‘별도’가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기쁘게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심정이다.
 ‘별도’의 장도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용(龍)의 해’ 첫 아침, 용화소축에서 용대운(龍大雲) 배상(拜上).
 
 
 
 서문. 생각건대, 난 참 건방졌었다.
 
 
 무협소설을 읽었다. 그것도 십 년 가까이 읽었다. 참 많이 읽었다.
 읽을 때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불만이 있었다.
 나라면 이보다 낫게 쓸 수 있을텐데......
 그래서 직접 손을 들어보았다.
 지금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 난 참 건방졌었다.
 난 이제 고개를 숙인다.(아직도 목이 뻗뻗하긴 하다.)
 참 글쓰기 힘들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픽션이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던가? 그리고 무협은 작가의 훌륭한 상상에 영향을 받는 허구이다.
 쓰면서 느꼈다.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하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냥 허구만은 안 된다. 그 속에 인과관계가 딱 맞아야 한다.
 또 쓰면서 느꼈다. 내가 이렇게 추리력이 없구나... 하고 말이다.
 
 쓰고 또 썼다. 물론 나보다 두어 달 먼저 온 도현(噵玄)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고민을 했다고 자신한다. 두들기지는 않았어도 생각은 많이 했고, 끊임없이 궁리를 했다.
 
 용대운(龍大雲)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셨다.
 “생각을 해 보라구. 주인공이 왜 이런 행동을 해야만 하는지를 말이야.”
 난 그 때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난요, 영화 ‘육감(사람들은 식스센스라고 하던가?)’처럼 에피소드에서 오로지 에피소드만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로 엮여 있는 그런 무협을 쓰고 싶다고요!”
 재미. 재미, 잼... 잼병할... 왜 이리 재미없을까, 왜 재미가 안 담기지!
 여하튼 <종횡무진(縱橫無盡)>이 끝났다.
 출산의 산고는 아랫입술을 이마까지 끌어올리는 것보다 더 하다던가!
 첫 작품을 그런 기분으로 다 썼다.
 용대운 선생님께 들고 가서 혼날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다.
 
 감사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몇 있다.
 우선 한수오(漢水午)선배와 하성민(河成珉)선배에게 감사드린다. 내 작품을 도와준다고 해서 담배라는 뇌물을 바쳤는데, 담배는 받아가 놓고서 모니터링을 그만 둔 덕분에 난 용대운 선생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감사드린다.
 옆에서 같이 있던 금와(金蛙), 도현, 류진(柳鎭)에게 또 고마움을 느낀다.. 나와 비슷하게 시작해서 먼저 끝낸 후 ‘언제 탈고해서 술 살 거냐’고 졸라대서 부지런히 두들길 수 있었다.
 또 진심으로 격려를 해 주던 정진인(鄭眞人)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는 아마 내가 세상사람들과 친해지기 힘든 타입이라 생각했나 보다. 나에게 먼저 와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주고, 이런 저런 용화소축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더불어 <종횡무진>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해준 냉죽생(冷竹生)에게도 지면을 통해 마음을 표시한다. 그마저 뭐라 했다면 스트레스 받아서 그냥 나갔을 지도 모른다.
 또 가끔씩 물어보면 대답해 주던 좌백(左栢)선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용화소축의 차장(次長)격인 운중행(雲中行)선배에게도 인사해야겠다. 그가 용화소축 안에서의 일을 간섭을 안 하는 통에 잔소리하는 내 입지가 넓어졌다.
 무엇보다도 용대운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그 분이 없었다면 <종횡무진>은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고, ‘별도(別道)’라는 사람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담배 하나 물고서 한숨을 내쉬며 용화소축 한쪽 구석에서 별도(別道) 배상(拜上)
 
 
 
 제1장 삼중룡영 (森中龍影)
 - 숲 속에서 용의 그림자를 보다.
 
 
 1. 선붕지회로부터 한 달하고도 칠일 전날 밤.
 
 
 혈묘요화(血猫妖花)는 뛰고 또 뛰었다.
 열흘 전에 새로 장만한 비단 화의(華衣)는 이미 남아있는 소맷자락이 없었고, 팔 다리 어디 성한 데도 하나 없었다. 그녀는 벌써 열흘 이상을 쫓기고만 있었다.
 물론 그녀를 노리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처럼 천라지망(天羅之網)까지 펼치면서 쫓지는 않았었다. 그런 적을 만들 정도로 녹녹한 혈묘요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를 쫓는 자들은 놀랍도록 치밀했고, 지겹도록 끈질겼다. 이처럼 그녀를 압박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작은 방파일 수 없었다.
 그들은 바로 종남파(終南派)였다.
 섬서(陝西)에 있어야할 종남파가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는 그녀가 종남파 장문인의 적자 주문진(朱汶眞)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혈묘요화가 그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애송이, 주문진을 만난 것은 채 십 개월도 되지 않던 지난 봄이었다.
 
 새 봄을 맞아 모든 만물이 한창 물이 오르는 시절, 혈묘요화도 당연히 물이 올랐다.
 주안술(駐顔術)과 채양비법(採陽秘法)을 통해 다져진 그녀의 미모는 벌써 오십을 향하고 있는 그녀를 아직도 이십대 초반의 처녀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혈묘요화가 어느 화창한 날, 야한 옷차림을 하고 객잔에 들어가 꽃을 팔았다.
 당연히 그녀의 화려한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녀가 팔던 꽃보다 그녀 자신의 몸을 노리는 치한이 셋이나 나타났다.
 일은 그녀가 의도하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강호에 소문난 채양적(採陽賊)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희망대로 나타난 치한들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척 하며 으슥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일이 그녀의 생각대로 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 순간, 열다섯 살 짜리 소년이 그 숲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주문진이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도 않은 그였지만, 그녀의 위기(?)를 알고, 세 치한들과 일전을 불사했다.
 주문진과 건달간의 싸움은 결코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순간, 그녀는 모든 계획을 수정했다.
 놀랍게도 이 나이 어린 소년이 그 세 치한을 이긴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건 꿩 대신 봉(鳳)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무공실력과 정순한 내공, 아직 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까지, 주문진은 뭐 하나 나무랄 게 없었다.
 그리고 주문진은 과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순한 내공으로 그녀의 공력에 큰 보탬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세 치한이 사라진 후, 그냥 가려는 주문진을 잡아먹는 데에는 적잖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 건달들에게는 전혀 쓸 필요가 없었던 춘약(春藥)을 남모르게 써야 했고, 새 봄에 장만한 비단 화의도 춘약에 중독된 주문진의 손길에 찢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깝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주문진은 정순한 내공과 물이 끓듯이 뜨거운 동정(童貞)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공이 정순할수록, 그리고 경험이 적을수록, 채정(採精)하기에도 수월하고 보정(補精)하는 데에도 좋았다.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동정이기에 한꺼번에 먹기가 아까워 조금씩 먹었다. 맛있는 음식은 아껴 먹는 것이 미식가의 도리라고 항상 주장하던 그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장사(長沙)에서 파구(巴丘)까지 장장 반년이나 주문진과 함께 돌아다녔다. 마침내 주문진이 내공과 원양정기까지 모두 잃고 해골이 되어버리자 그녀는 추호의 미련도 없이 그를 상음(湘陰)의 어느 숲 속에 내다 버렸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것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걸 기억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채정하고 내팽개친 남자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돌연 강호의 고수들이 무서운 살기를 품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법게 생각했지만, 추적이 닷새를 넘어 열흘이 다 되어가자 그녀도 이전과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종남파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결국 종남이 그를 막는 이유가 밝혀졌다. 어이없게도 이미 그녀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주문진이 종남파 장문인의 독자(獨子)였던 것이다.
 구대문파에 속하는 명문정파의 소공자가 요녀와 함께 강호를 활보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문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소공자가 요녀에게 채양당해 죽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으니 종남파가 가만히 있을 리 있겠는가?
 당연히 종남파는 그녀를 쫓아 섬서(陝西)에서 호남(湖南)으로 내려와 이 곳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을 온통 둘러쌓고 있는 것이었다.
 
 카가각. 파삭.
 혈묘요화는 앞으로 내딛던 다리를 뒤로 튕기며 몸을 날려 피했다. 비도(飛刀)가 바로 그녀가 발을 디딜 자리에 날아와 박혔다. 그녀는 그 속도 그대로 몸을 날려 비도가 날아온 방향으로 손을 휘둘렀다.
 푸욱.
 “크흡.”
 짧은 신음소리가 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몸을 숨긴 채 비도를 날린 자는 그녀의 손끝에 목젖을 뜯겨 버둥대고 있었다.
 “후우... 후우.”
 혈묘요화는 한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퍼엉!
 땅바닥에 쓰러진 채 버둥대던 자가 마지막 숨을 넘기며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그녀가 너무 피로한 나머지 마지막 살수(殺手)를 뒤로 미룬 게 실수였다.
 팍!
 혈묘요화는 신경질적으로 죽은 자의 머리를 밟아 터뜨리며 화풀이를 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손속에 사정을 둔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벌써 그녀 주변으로 종남의 고수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혈묘요화는 망설임 없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요대(腰帶)로 전면을 가로막는 사내를 휘감았다. 협봉검을 잡고 있는 손목이 요대에 감겨 끌려왔다. 그녀는 몸을 날리며 어깨로 상대의 턱을 받았다.
 “큭.”
 포위진에 조그만 구멍이 벌어졌다.
 그 구멍 사이로 그녀는 재차 허리를 돌렸다.
 하나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녀의 코 앞으로 다시 협봉검이 날아왔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뒤집어야만 했다.
 차차착!
 옷자락이 날렸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어진 것은 치맛자락이 아니라 그녀의 다리였는지도 몰랐다.
 잠시 소강상태가 벌어졌다. 그 틈을 이용하여 그녀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부 세 명의 인영이 그녀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정면에 하나. 좌우로 다시 하나씩.
 하나 그녀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뒤늦게나마 멀리 나무 등걸에 기대선 작달막한 노인 하나가 곰방대를 물고 있는 광경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이번 싸움의 열쇠는 그 늙은이임이 분명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서 그저 남들 싸움이나 구경하는 늙은이가 있을 리 만무하니 말이다.
 넷.
 그녀에게 있어 넷이란 결코 많은 수가 아니었다. 십여 명도 상대한 적이 있는 그녀였다. 문제는 수가 아니라 실력이었다.
 한 번 손을 나누어 본 결과, 좌우의 둘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빠져나가는 그녀의 퇴로로 협봉검을 들이민 작자와 저 쪽에서 곰방대에 불을 붙이는 늙은이가 문제였다.
 혈묘요화는 잠시 망설였지만,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강공(强攻)이었다. 그 늙은이와의 거리가 그런 결정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녀는 정면의 셋 중 협봉검을 들고 있는 작자에게 손에 들고 있던 유엽비도(柳葉飛刀)를 던지면서, 가장 약해 보이는 왼쪽 놈을 향해 튀어 올랐다. 그 방향으로 움직이면 늙은이로부터 일 장여 더 거리를 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그 자의 목으로 발끝을 내 질렀다.
 “큭!”
 당화(糖化)속에 감추어진 비수가 튀어나오며 왼 쪽 놈의 목젖을 뚫었다. 그녀의 시야가 다시 확 트여졌다.
 ‘이제 됐다.’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혈묘요화는 자신은 가만있는데, 세상이 한바퀴 도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하늘이 보이던 그녀의 시야 가득히 땅만 보였다. 무언가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아 끌어올린 것이다. 이어 그녀의 등이 땅에 닿는 느낌이 와 닿았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팡!
 사람이 땅바닥에 굴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맑은 소리가 울렸다. 분명 땅에 패대기를 당한 것은 그녀였건만, 들리는 소리는 물에 젖은 옷자락을 허공에 대고 터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아프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발목을 걸고 있는 무엇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쪽에서 나무에 기대고 있던 늙은이의 곰방대였다.
 예상대로 문제는 곰방대를 빨던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모두가 있던 공지를 한바퀴 돌아서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자신의 발을 잡은 것이다. 그것도 손이 아니라 곰방대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휘감은 것이다. 이어 늙은이는 날아가던 그녀를 거꾸로, 그것도 아프지 않게 살짝 패대기 쳐버렸다.
 처음부터 그 늙은이가 흔한 노인은 아니리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이 정도 고수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무릇, 사람을 집어던질 때 아프지 않게 던진다는 것이 더욱 힘든 법이다. 쌀가마를 그냥 집어던질 수는 있어도 터지지 않게 가법게 던지기는 힘든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단순한 일류 고수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놀라셨나? 괄창풍뇌번(适蒼風雷飜)이라고 하지.”
 늙은이의 괄창풍뇌번이라는 한 마디는 그녀을 혼백이 달아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괄창풍뇌번이라면 종남을 지킨다는 그 늙은이?’
 혈묘요화의 얼굴에 아득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사지에서 힘이 다 빠져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맑은 밤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아직도 부슬부슬 겨울비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끝이려나!’
 이를 악다문 혈묘요화는 늙은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할 사람은 늙은이 하나로만 국한 시켜야 했다.
 벌써 늙은이는 몸을 돌려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뜻이 분명했다.
 멀어지고 있는 늙은이 등 뒤로 그녀가 물었다.
 “혹시 풍뇌옹(風雷翁) 사마열(司馬列)대협이 아니신가요?”
 다시 곰방대를 입으로 가져가던 늙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 노부를 알고 있는가?”
 늙은이의 되물음에 놀람이 담겨 있었다.
 역시 그녀의 생각대로 늙은이는 풍뇌옹 사마열이 맞았다.
 ‘종남산의 바람이 되어야 하는 늙은이’라 불리우는 전대(前代) 고수를 여기서 만났으니 혈묘요화로서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진정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실감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 풍뇌옹이라니....’
 그녀는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기운을 냈다.
 ‘혈묘요화야, 혈묘요화. 아직 죽은 것도 아니잖아.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밑져야 본전이니!’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장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신술(輕身術), 이건 나중에 일이었다.
 그냥 사람의 목젖을 손쉽게 딸 수 있는 조공(爪功), 이건 저 늙은이에게는 해당이 될 수가 없었다.
 미모! 그녀의 생각이 자신의 미모와 요안공(妖眼功)에 이르자 자신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녀의 상대가 바로 풍뇌옹 사마열이기 때문이었다.
 종남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자락만 맴도는 바람으로 머물다가 늙어버린 풍뇌옹이었다.
 풍뇌옹이 처음부터 종남산에만 틀어박혔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숱한 강호여인과 염문을 뿌리던 그였다. 이를 보다 못한 종남의 전대 장문인이 ‘삼십 년 면벽(面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그 덕분에 평생 종남산을 빠져 나오지 못한 바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혈묘요화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몸가짐과 옷매무새를 훑어보았다. 남자 꼬시는 데에는 노소(老少)를 가릴 것 없이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혈묘요화는 일어나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지쳤다는 듯이 도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약간 옷가지를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렸다.
 이어 단순히 지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요안술을 운공하며 풍뇌옹을 유혹했다.
 혈묘요화를 내려다보던 풍뇌옹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풍뇌옹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마치 요조숙녀가 낭패를 당했다는 듯한 몸짓으로 계속 옷가지를 추스리는 척 하며 찢어진 옷가지를 당겼다. 그럼으로 해서 더욱 속살이 내보여졌다.
 슬쩍 가슴을 열리도록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앞섶이 살짝 벌어졌다. 그것도 아주 살짝 벌어졌다. 누군가가 허리를 숙여서 신경 써서 보려 해야만 가슴의 끝까지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열어졌다.
 ‘됐어. 옷은 이만하면 됐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풍뇌옹을 보았다. 몸은 돌려 있건만, 그의 신경은 지금 그녀를 보고 싶어 안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발걸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으흐흑.... 으흑...”
 혈묘요화는 작게, 하지만 또렷하게 신음성을 발했다. 풍뇌옹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였다.
 “무슨 일인가?”
 역시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풍뇌옹이 매우 점잖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표했다는 것이었다. 아직 그녀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다.
 혈묘요화는 앞섶이 열려 있는 것을 모른다는 듯 서러운 몸짓을 보였다.
 ‘이제부터 침착해야 한다. 상대는 늙은 생강이야.’
 그러는 사이, 다시 그 들 주위로 다섯의 인영이 더 늘었다. 이전에 따돌린 자들이 쫓아 온 것이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잡았다. 풍뇌옹 사마대협께서 직접 도망치던 요녀를 잡아 패대기를 치셨다.”
 뒤쫓아온 놈들 중 하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더 늘어난 후기지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풍뇌옹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위소녕(魏霄寧) 사질(師姪). 이제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내 일은 끝난 것 같네그려.”
 가운데에서 협봉겁을 내지르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내를 쳐다보는 혈묘요화는 더욱 낭패감을 느꼈다.
 ‘위소녕? 제길!’
 위소녕.
 종남사걸(終南四傑) 중 셋째, 종남파 장문인이 자신의 제자로 유일하게 받아들인 자, 종남의 신진고수 중 으뜸에 속하는 자, 쇄검식(碎劍式)으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등의 갖가지 소문을 달고 다니는 고수가 바로 그였다.
 혈묘요화에게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위소녕이라는 자가 말했다.
 “우린 솔직히 놀랐다.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을 못했지. 여기가 우리의 천라지망의 끝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풍뇌옹 사마사숙을 모시고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위소녕의 말에 혈묘요화는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위소녕과 풍뇌옹이 막고 있는 여기가 포위망의 끝이라니, 그 말은 곧 이곳만 뚫고 나간다면 이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종남의 천라지망을 홀홀 단신으로 뚫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더 이상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들이 그처럼 호락호락 달려들지도 못할 것이다.
 역시 위기는 뒤집으면 기회라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자극하여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뇌옹을 다시 끌어들여야만 했다. 가장 고수이고 가장 배분이 높은 그를 넘어서야만 이 곳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글픈 듯한 눈빛에 아련한 눈망울까지 지었다. 거기다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사마대협, 제가 이제 그만 이렇게 끝나야 하나요?”
 “험. 험. 이를 어쩌겠나! 자네가 한 일이 너무 심했으니 말일세. 비록 나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문진이는 너무 귀여운 아이였지.”
 풍뇌옹이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혈묘요화의 반쯤 드러난 가슴을 슬쩍 훔쳐보는 짓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주변에 다른 종남 고수들이 있지 않다면 벌써 그녀에게 달려들었을 지도 몰랐다.
 경직된 분위기에 위소녕이 나섰다.
 “자, 여기서 목을 내 놓을 것이냐? 아니면 종남산으로 함께 갈 것이냐?”
 위소녕의 호통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종남파의 한 고수가 칼을 뽑으며 혈묘요화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그런 종남의 제자들을 보는 풍뇌옹의 눈가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혈묘요화였다. 그녀는 풍뇌옹을 이용하려던 계획이 남들 때문에 생각대로 잘 되질 않으니 더욱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원래가 무모한 계획이었다. 풍뇌옹으로서도 이처럼 많은 종남파 제자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리라.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절망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몰아쳤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토록 그녀가 듣고자 했던 말이 들렸다.
 “왜 저렇게 예쁜 여자를 죽이려 하지? 몸짓 좀 봐. 얼마나 요염해? 난 벌써 군침 도는군. 어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그래. 살려만 준다면 뭐든 다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고개를 숙인 혈묘요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는 결코 풍뇌옹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혈묘요화의 고개가 번쩍 쳐 들려졌다. 너무 놀라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녀의 눈에 육 척도 훨씬 넘을 것 같은, 아니 칠 척은 족히 될 것 같은 장신의 건장한 풍채가 들어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엄청난 체구를 지닌 장한이 히죽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옷도 아니고, 그냥 표범 가죽을 상체에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게 그을린 살갗은 한 겨울에도 눈 속을 돌아다니는 사냥꾼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탄력있는 피부였다. 덥수룩하게 자라서 얼굴도 잘 안 보이는 수염은 한데 모아서 묶는 다면 솔 하나가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한 번도 빗어 본 적 없는 것처럼 헝클어져 있는 머리, 떡 벌어진 어깨, 자신의 허벅지보다 굵어 보이는 구리빛 팔뚝...
 태양혈(太陽穴)은 솟아있지 않지만 팔뚝이나 허리만 보아도 흔한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풍뇌옹과 위소녕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 보았다.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 언제부터 그들 속에 있었는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혈묘요화는 잽싸게 그 사내를 훑으며 머리속으로 열심히 주판알을 퉁기기 시작했다.
 ‘고, 고수! 종남파의 인물이 아닐지도?’
 그녀의 망막 안으로 도끼자루가 투시되었다.
 그것도 능히 백 근 가까이 되어 보이는 도끼날에 손잡이 길이만도 자신의 키와 거의 같은 육 척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도끼였다. 도끼머리까지 합치면 칠 척은 되어 보이는 대월(大鉞)이었다.
 도끼라면 종남이 아니었다. 검법을 주로 하는 종남에서 도끼를 무기로 사용하는 고수는 아직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 희망이 비쳐졌다.
 하나, 판단과 반응은 그녀보다 위소녕이 빨랐다.
 “누구냐?”
 위소녕의 말소리를 신호로 종남파 사람들이 모두 칼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저 사냥꾼에게 매달리면 어떻게 무슨 수를 강구해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대협!”
 다짜고짜 그녀는 처음 보는 장한에게 아는 체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를 지금의 상황 속으로 끌어 들여야 했다.
 이 한마디는 사냥꾼에게 쏠리던 시선들이 의심을 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꺼벙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사냥꾼 같은 장한이 입을 벌렸다.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소리지?”
 장한의 질문에 순간 모두가 멍해 졌다.
 그 꺼벙해 보이는 사냥꾼 같은 장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든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자, 이내 혈묘요화의 이야기가 자기를 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하핫, 어이, 아줌마! 잔머리 좀 굴릴 줄 아는데! 하지만 틀렸어. 난 대협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그냥 채(蔡)가라고 불러줘.”
 나타난 장한은 역시 녹녹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번에 혈묘요화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물러날 혈묘요화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더욱 잘 되었다는 눈치였다.
 “채대협. 저만 도와주신다면 뭐든지......”
 그 말에 장한의 눈에 기묘한 빛이 번쩍거렸다.
 “정말?”
 풍뇌옹이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종남파와 풍뇌옹 자신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바로 앞에서는 토끼가 스스로 가죽까지 다 벗어서 ‘드시지요’하고 있는 데 그냥 넘어갈 늙은 너구리가 더더욱 아니었다.
 “보시게. 남의 은원(恩怨)에 함부로 끼어 드는 것은 아니란 것도 모르시나? 게다가 이 요녀는 이미 많은 소년들과 젊은 고수들의 목숨을 앗아간 마녀라네. 그러니 그냥 지나가시게.”
 역시 풍뇌옹의 호통은 날카로웠다. 지나가던 객이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축객령(逐客令)을 내린 것이다.
 순간 사냥꾼 같은 장한의 눈이 치켜 떠졌다.
 “어이, 늙은이. 나 알아?”
 풍뇌옹은 처음에는 장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어처구니가 없는지 더듬거렸다.
 “늙, 늙은이?”
 “그래, 너말야. 여기 늙은이가 너밖에 더 있어?”
 “너, 너어?”
 “그래, 늙은이. 자꾸 저 여자보고 마녀, 마녀 하는데, 내가 본 것은 대명 천지에 늑대 같은 남정네들이 칼을 뽑아서 여자 한 명을 쓰러뜨리고 그녀를 둘러쌌다는 것 뿐이야. 아, 하나 더 있군. 늙은이가 계속 입맛을 다시면서 저 여자를 흘겨보더군. 하긴 저 위치라면 아마 벌어진 옷 사이로 젖가슴이 다 보일 거야. 젖꼭지까지! 나도 저리 한 번 가볼까?”
 풍뇌옹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마도 그가 강호에 나와서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일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 하던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그 꺼벙한 사냥꾼 같은 장한은 아예 풍뇌옹을 늙은 퇴물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종남 문중의 후기지수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깊은 속뜻(?)마저 완전히 까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풍뇌옹은 너무도 화가 나서 말을 제대로 잇지를 못했다.
 “이이.....”
 “봐, 봐. 저 늙은이. 얼굴만 시뻘개져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 하잖아!”
 퐁뇌옹의 옷자락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네 놈이 쓰러지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
 풍뇌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채가라는 사냥꾼 같은 장한의 소매를 잡아채 갔다.
 그의 작은 몸이 사냥꾼 같은 장한의 가슴속으로 기묘하게 파고들었다.
 중인들은 다시 한번 풍뇌옹의 절기인 괄창풍뇌번이 나타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곧 저 허우대만 우람한 거인은 땅에 쓰러져 있고, 풍뇌옹은 그를 밟고 서서 그 오만한 웃음을 터트리리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거인의 도끼를 들지 않은 오른 팔의 팔꿈치 안쪽이 완전히 풍뇌옹의 어깨에 걸쳐지고 그 팔 위에 풍뇌옹의 양 팔이 얹어졌다. 이어서 풍뇌옹은 등을 돌려 거인의 가슴을 완전히 파고 들어가며 거인의 전신을 등뒤로 짊어졌다.
 “나왔다. 풍뇌번!”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치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거인의 발이 들썩하는 것 같았다. 종남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를 보지 않아도 빤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거기까지였다. 거인의 발은 잠깐 들썩거렸을 뿐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드디어 풍뇌옹의 입에서 기합이 터졌다. 기운을 짜내는 것이 분명했다.
 “이야압!”
 풍뇌옹의 허리가 다시 한 번 들썩였다.
 사냥꾼 같은 장한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드디어 칠척에 달하는 거구를 키 작은 노인이 자신의 등뒤로 짊어지는 데 성공했다. 이제 허리만 앞으로 숙이면 칠척의 동체는 허공을 날아 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거기까지였다. 사냥꾼 같은 장한의 발이 땅에 닿았다.
 또 다시 풍뇌옹의 기합이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풍뇌옹의 등에 업혀 있던 사냥꾼 같은 장한이 입을 벌렸다.
 “늙은이, 지금 뭐해?”
 이 말은 끓는 기름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드디어 악에 바친 괴성이 풍뇌옹의 입을 거쳐 터졌다.
 “끼이이이......”
 “거 되게 시끄럽군. 던지는 게 뭐 그리 힘들어?”
 팡!
 사냥꾼 같은 장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죽 북 치는 소리가 들리고, 회색 빛 물체가 중인들의 시야를 가로질러서 날아갔다.
 콰당!
 날아가던 물체가 땅에 굴렀다. 그 물체가 꿈틀거렸다. 풍뇌옹이었다.
 채가라는 사냥꾼 같은 장한은 가볍게 내치는 동작 하나만으로 전대 고수인 풍뇌옹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크윽.”
 모두가 놀라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 들리는 구령 한 마디가 얼이 빠져있던 모두를 깨웠다. 위소녕이었다.
 “쳐라.”
 촤자장!
 병장기가 뽑히는 소리가 났다.
 장한도 도끼를 움켜쥐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찢어진 비단 화의가 포위망을 재빨리 빠져나가고 있는 사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 선붕지회로부터 한 달 하고도 엿새 전 새벽.
 
 
 우거진 숲을 헤치며 혈묘요화는 다시 뛰고 있었다. 그것도 일부러 길이 아닌 곳만을 골라 지나갔다. 녹지 않은 눈이 자꾸만 발길을 미끄러뜨렸고, 마른 나뭇가지가 피부를 스쳤다. 결국 그녀는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뛰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이었다. 더 이상 그녀를 뒤쫓는 그림자가 안 보였다.
 그녀는 한 줌의 여유가 생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며칠 째 제대로 잠자기는커녕 졸지도 못하고 쫓긴 후 처음으로 맞는 여유였다.
 그녀의 입에서 한 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어디선가 나타난 채가라는 사냥꾼 같은 장한이 종남파 고수들과 시비를 벌이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녀는 종남산까지 끌려갔으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내 달린 게 두어 시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봄을 재촉하며 내리던 겨울비도 그치고 이제는 밤하늘에 별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 바람에 구름도 다 흩어져 버렸다.
 쏴아아...
 찬바람이 지나가자 땀이 흐른 그녀의 등 언저리로 소름이 끼쳤다.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그녀 기억에 제대로 잠을 자 본지도 어언 열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기운이 더 났다. 드디어 포위망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그녀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제 강호에는 종남파를 유린한 혈묘요화라는 소문이 널리 퍼질 것이 분명했다.
 지난 열흘 간의 고생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호호. 아하핫!”
 처음에는 작게 미소지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쫓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그녀의 미소를 대소로 바꾸었다.
 “그 채가 꺼벙이는 잘 있을까?”
 그렇게 자문하는 그녀였지만, 스스로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위소녕을 포함한 종남의 고수 아홉 명에 풍뇌옹까지 합세한 세력을 한꺼번에 뿌리칠만한 실력자는 강호를 통털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그런 정도의 고수라면 강호에 이름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뿌듯했다. 이제는 아까와는 달리 별들이 자신을 축복하려는 듯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는 저런 하늘을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미소가 절로 그녀의 입가에 어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꿀꺽.”
 그녀의 귀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혈묘요화는 환청(幻聽)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침을 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괴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와, 아줌마, 웃으니깐, 정말 예쁜데! 아까 그 늙은이가 탐 낼만 해. 정말이야.”
 바로 뒤통수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바로 코앞에 찢겨진 표범 가죽을 대충 두른 털 난 가슴이 보였다. 그녀의 콧속으로 거친 땀내가 흘러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수염 난 턱, 호랑이 눈, 산적 같은 얼굴.
 바로 그 채가라는 괴물이었다.
 혈묘요화는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흡!’
 “어이, 아줌마. 그렇게 도망가는 게 어디 있어?”
 거인 사냥꾼이 그녀의 어깨위로 다정스레 손을 얹었다.
 “남은 도와주겠다고 한창 싸우는데, 같이 도와야 살 거 아냐? 잘못 하면 아줌마 대신에 내가 죽을 뻔했잖아.”
 혈묘요화는 아직도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거기서 여기까지?”
 “응. 도와주면 아줌마가 뭐든지 다 해준다고 했으니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쓰윽.
 채씨 거인은 팔뚝으로 자신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
 
 쩍, 쩍, 쩍, 쩍......
 떡메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며 새벽 공기를 찢어 갔다.
 그녀는 한 시진 째 나무 등걸을 붙잡고 기대고 있어야 했다. 아직도 그 거인은 생긴 모습답게 지치지도 않고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서슴없는 행동에 처음에는 그녀도 당황했다.
 우선 그 거인은 전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등 돌려서 세웠다. 이어 치마를 벗기지도 않고 바로 그냥 뒤집어 버렸다. 그녀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아차릴 시간도 없이 그녀는 나무등걸을 붙잡고 허리를 숙여야 했다. 이어 바로 그 거인이 허리를 쓰기 시작했다.
 허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한 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앞섶을 벌려서 젖가슴을 움켜쥐고 뜯었다.
 처음 가슴을 움켜쥐었을 때는 그녀도 아팠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가 굵은 손가락을 놀려 유두를 굴리며 비틀 때에는 다리 사이에서부터 대뇌 중추까지 전해지는 쾌감이 통증을 쾌감으로 전환시켰다. 이미 많은 남자를 접해 본 그녀로서도 참을 수 없는 강렬한 쾌감....
 ‘정말 오랜만이야.’
 그의 거친 몸놀림이 한동안 잊었던 감각을 불러왔다. 금방 그녀도 능숙하게 그의 허리 놀림에 맞추어 자신의 율동도 같이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거친 몸놀림.
 그의 몸놀림을 표현할 말은 이 한 마디밖에 없었다. 거칠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이 거칠었다. 전위나 애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구 그냥 밀고 들어왔다. 그것도 마치 산짐승처럼 야성적으로 자신을 찢어 들어 왔다.
 다른 자세도 없었다. 단 한 가지 동작만이 한 시진 째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커다란 육봉(肉棒)이 이리 뛰고 저리 놀며 움직이는 것이 그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동안 익힌 현녀공(玄女功)과 방중술(房中術)에 익숙해져서인지 이런 거친 몸놀림을 잊은 지는 꽤 오래 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 속을 왕복하는 물건의 느낌은 뜨거웠다. 따듯한 정도가 아니라 끓을 것만 같았다. 좀 전까지 느껴지던 추위도 이제는 그 열기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 사실로 보건대 이 거인도 체구만 크고 공력만 높을 뿐 동정임이 분명했다. 이 뜨거움과 열기는 분명 동정이었다.
 ‘동정이야! 동정!’
 그녀는 자신의 신뢰에 확신이 갔다.
 ‘난 복 받은 년이야. 주문진에 이어 이런 곰 같은 놈까지!’
 그녀는 서서히 현녀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다시 월척을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다. 풍뇌옹을 일수(一手)에 날릴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내공도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서서히 회음혈로 자신의 내공을 모으기 시작했다.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혈묘요화는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 다시 출발하는 거야. 혈묘요화.’
 밤하늘도, 날씨도, 이 사냥꾼 같은 장한도 자신의 새 출발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으로 뜨거운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희열과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용암 같은 기운이 그녀의 회음혈을 지나 단전(丹田)으로 흘러들어왔다.
 혈묘요화는 본격적으로 현녀공을 운공했다.
 먼저 그녀는 비어있는 종지그릇을 생각했다. 금방 그 그릇이 끓는 듯한 양강지기(陽强之氣)로 가득 차 버렸다. 이 정도는 미리 짐작했던 그녀는 재빨리 녹주발을 연상했다. 녹주발도 잠시, 다시 양강지기가 녹주발을 넘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는 비어 있는 오지 항아리를 생각했다. 또다시 항아리가 공력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다시 ......
 
 ***
 
 털썩.
 혈묘요화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서 있을 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오십 평생이 너무나 허무하기 때문이었다.
 “아줌마. 왜 그랬어?”
 하의(下衣)를 끌어올리면서 중얼거리는 채가라는 사냥꾼 같은 장한의 말소리가 그녀의 한 쪽 귀로 들어와서 한 쪽 귀로 흘러만 갔다.
 그녀의 망막에 투시되는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채정술은 공력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공력을 끌어들이는 술법인데, 당연히 아줌마가 나보다 딸리지. 안 그래?”
 그랬다. 그 채씨 괴물의 말이 맞았다.
 그가 풍뇌옹을 가볍게 던질 때 알아 봤어야 했다. 최소한 그의 공력이 자기보다 높다는 것을 간파했어야 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보통 무공 실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었다.
 그 정도 고수라면 내공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이미 채정비법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다고 짐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채정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진원지기까지 몽땅 그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흐음.... 한 갑자가 넘는 공력인가? 아줌마도 대단한 여자였었군. 하지만 이미 내게 온 것, 다시 돌려 줄 방법도 난 모르고... 하하핫, 그 보다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게 정답이겠군! 그냥 목숨 살려준 값이라고 생각하자고. 하여튼 난 일 다 끝났으니 갈 테니까. 셈은 끝난 것으로 하지 뭐.”
 휘적휘적 산을 내려가는 표범 가죽 장한의 등뒤로 천으로 감싼 긴 장대가 그녀의 각막 안에 투시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떠올랐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들어보았다. 탄력 잃은 손등이 보였다.
 망연자실 앉아 있는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는 이미 하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그 백발 너머로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제2장. 어옹감신(漁翁感信)
 - 고기 잡는 늙은이가 고기가 왔음을 알다.
 
 
 1. 선붕지회로부터 한 달 전.
 
 
 동정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악양(岳陽)은 호남(湖南)에서 가장 번화한 성시로, 육상 교통뿐만 아니라 동정호를 이용한 수상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악양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특히 동정호를 둘러싼 봉우리 중 최고봉이라는 군산과 동정호의 경승을 보기에 가장 좋다는 악양루(岳陽樓)가 있어서 더욱 유명했다. 때문에 악양에는 시인묵객(詩人墨客)과 고관대작, 강호무인들의 왕래가 항상 끊이질 않았다.
 찾는 사람이 많으면 또한 그들을 뒤따르는 사람도 많은 법이다. 그래서 온갖 장사치가 들끓고, 기원, 도박장, 전장(錢莊)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겨울의 추위가 다 가시지도 않았지만, 악양의 성문이 열리자마자 저자 거리로 향한 대로에 인파들이 몰렸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좋은 자리를 잡아서 빨리 장을 벌리려는 상인과 좋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모두 대로를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 악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전과는 달랐다. 어떤 때보다도 악양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무림인 같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파무림의 최고 세력인 백도맹(白道盟)의 총단 완공을 기념하며, 백도맹을 대표할 최고의 고수인 일붕(一鵬)을 뽑는 선붕지회(選鵬之會)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백도맹이 창립된 지는 십 년전이었다.
 당시 천하는 마도사상(魔道史上) 최강의 방파인 혈련(血聯)이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혈련에 대항하기 위해 백도 무림이 만든 연합체가 바로 백도맹이었다.
 흑도 무림 쪽에서도 혈련천하(血聯天下)를 막기 위해 흑림(黑林)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금새 백도맹에 필적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났다.
 결국 백도맹과 흑림은 서로 힘을 모아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혈련을 멸망시키고 천하무림을 양분하였던 것이다.
 오 년전, 백도맹에서는 혈련을 멸문시킨 오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룡지회(五龍之會)를 개최했었다. 하나 지금의 선붕지회는 당시의 오룡지회와는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예전의 오룡지회가 단순히 청년고수 다섯 명을 뽑는 자리였다면, 이번의 선붕지회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의 진정한 고수만을 선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선붕지회가 치루어 질 악양은 많은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번잡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모른 긴장감도 감돌고 있었다.
 선붕지회를 시작으로 백도맹이 흑림과 충돌하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백도맹의 총단이 악양 점장대(點將臺)에 만들어지고 있으나, 흑림도 악양의 코 앞인 임상(臨湘)까지 들어와 있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사실 혈련이 멸망한 이후 강호무림은 백도맹과 흑림의 양대세력이 은연중에 서로를 견제하고 세력을 키우는 일대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두 세력 중 최후에 누가 승리할 지는 아무도 점칠 수 없었으나, 십 년의 지리한 줄다리기가 조만간 끝날 것이라는 소문이 무림을 온통 술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악양의 성문에도 위사(衛士)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강호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위사들의 검문은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관(官)과 강호와는 서로간에 간섭을 안 하는 묵계가 성립된 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멍하니 서서 한담이나 나누는 위사 곁으로 세 명의 거지들이 쭈그리고 앉아 악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침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니 일을 나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거지임이 분명하건만 들어오는 사람들만 유심히 살펴볼 뿐 구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분명 무언가 다른 일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때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머리 위로 덥수룩한 얼굴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큰 키이기에, 멀리서보면 머리만 우뚝 솟은 것 같아 보였다.
 “어때, 저놈 말야?”
 들어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세 쌍의 눈동자 중 한 쌍의 주인이 우뚝 솟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세 거지 중 나이가 중간쯤 되어 보이는 거지였다. 아침부터 얼굴이 시뻘게서 마치 밤새 마신 술이 아직도 안 깬 듯한 모습이었다.
 그 손가락 끝을 쫓은 또 다른 눈동자의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나이 어린 거지였다. 가만있어도 눈웃음 치는 듯한 얼굴이었다.
 “가죽 두르고 멍청해 보이는 놈?”
 “응.”
 얼굴이 시뻘건 거지의 확신에 찬 대답이 들렸지만, 나이 어린 거지는 무언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좀 세 보이지 않아? 체격이 적어도 육 척은 넘을 것 같은데 말야....”
 웃는 얼굴의 거지가 자신이 없는 듯한 목소리로 되묻자, 얼굴이 시뻘건 거지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덩치만 컸지 멍청해 보이잖아. 게다가 옷 입은 걸 보라고. 아마 큰 성시로는 내려 온 적도 없는 것 같지 않아? 저 보퉁이에 삐죽 나온 건 호피(虎皮) 같은데, 저것만해도 우리 한 달 몫은 될 거 같다고. 한 탕 하자. 야, 막내. 너는 빨리 가서 전부 이리로 모이라고 해.”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가장 덩치가 크고 나이 많아 보이던 거지가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그가 막내였던가 보다.
 이어 나머지 두 거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의 거지가 어기적거리며 인파를 헤치면서, 머리 하나만큼 커다란 사냥꾼 같은 장한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인파에 가려 잘 몰랐었지만, 다가서니 그의 용모는 정말 가관이었다.
 빗질 한 번 안 한 것 같은 까치 머리에 생전 면도 한 번 해 본적 없는 것 같은 수염이 얼굴을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부리부리한 눈망울과 커다란 코가 전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보통 사람은 머리보다 목이 가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사냥꾼 같은 장한은 목이 가늘어지기는커녕 마치 목을 뽑다가 대충 머리를 만든 것처럼 머리 굵기와 목의 굵기가 같아 보였다.
 상체에 대충 두른 표범 가죽은 그가 사냥꾼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그런 용모와 체격이었기에, 그에게 다가가던 웃는 얼굴의 거지는 보고만 있어도 주눅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세째형.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웃는 얼굴의 거지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한 발 떨어져 따라오는 얼굴 시뻘건 거지에게 물었다. 얼굴이 시뻘건 거지가 역시 같이 얼굴이 굳어진 채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이미 형제들을 불렀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형이 있는 이상 잘 해결될 거야.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거야.”
 
 ***
 
 “나으리. 한 푼만 적선해 줍쇼......”
 나이 어린 거지 하나가 사냥꾼 같은 장한에게 다가와 구걸을 했다. 가만있어도 눈웃음 치는 얼굴이었다.
 악양을 처음 밟는 사냥꾼 같은 장한은 거지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 새삼 신기하기만 했다. 특히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도 구걸을 바란다는 것이 더욱 흥미있었다.
 “오호.... 나으리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다시 한 번 불러 볼래?”
 “그럼요, 나으리. 나으리... 한 푼만 적선합쇼.”
 “으흐음. 다시 들어도 좋군. 유감이네만, 없어.”
 사냥꾼 같은 장한의 대답은 간단하고 또 분명했다.
 그 대답에 어서 시비를 걸어주길 기다리던 어린 거지는 옳다구나 싶었다.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무언가 일이 잘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좀 있으면 자신의 형제들이 몰려 올 것이니, 그 때까지 이 멍청해 보이는 놈을 붙잡고 있다가 저 보랑 속에 있는 호피만 챙기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붙잡고 드잡이질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삼사형이 언제 나갈까 기회만 보고 있으니, 용기가 났다.
 “엥? 아니 그럼 왜 돈도 없으면서 불러 달랬소?”
 “그럼 넌 왜 불렀냐?”
 장한의 되물음은 누가 들어도 명백한 시비조의 반말이었다.
 멍청한 물고기가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는 확신에 시비 걸던 웃는 얼굴의 거지는 절로 흥이 났다.
 “그럼 부르지도 않는데 누가 일부러 찾아와 엽전이라도 준다고 합디까? 에이 나으리, 그러지 말고 한 푼만 줍쇼. 집에 들어가면 어린 동생들이 주린 배를 붙잡고 이 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으리, 한푼만 적선하시면 세 동생들이 시래기 국이라도 끓여 먹습니다.”
 “그렇지. 돈이 있는 사람도 불러야 돈을 줄 수 있지. 하지만 난 돈 없어.”
 미끼를 문다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사냥꾼 같아 보이는 장한의 대답에 오히려 웃는 얼굴의 거지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웃는 얼굴의 거지가 화를 낼 새도 없었다. 그가 믿고 있던 삼사형이라는 거지가 어느 새 골목에서 튀어 나온 것이다.
 “뭐야? 이 거 순 날거지 아냐? 돈 없으면 거기 등에 짊어지고 있는 거라도 내놔야지.”
 삼사형의 시뻘건 얼굴은 어찌 보면 열꽃이 피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역할을 하기에는 딱 제격인 얼굴이었다.
 한데 덩치 큰 사냥꾼 같은 장한도 그리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거지 놈 보게. 돈 달라는 네가 거지지, 내가 거지냐? 난 어디 가서 돈 달래 본 적 없어, 임마. 어린 놈이 어디서!”
 허리에 새끼줄을 걸친 거지 둘과 육 척이 넘는 사냥꾼 같은 장한이 거리에서 시비가 붙자, 가뜩이나 복잡한 저자거리가 완전히 장터로 바뀌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 셋의 시비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두 거지들이 허리에 두른 매듭진 새끼줄은 이들이 개방(丐幇) 방도라는 표시였다. 중원 천지에 문하제자가 십만(十萬)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는 방파가 바로 개방이었다. 그 제자들을 동원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력으로 규모 면에서 강호 최대를 자랑했다.
 두 거지 중 좀 더 나이 많아 보이고 말라 보이는 거지 하나가 장한의 상체에 대충 두른 표피(豹皮)를 붙잡았다. 이어 완벽한 연기를 자랑하며 혼자 뒤로 자빠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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