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1권
프롤로그
힐러(Healer)란 마도 의학이 화려하게 꽃피운 루펠 제국에서 창세력 880년경에 생겨난 신조어로, 951년 루펠 2세 폐하의 <산 스크리샤> 칙령에 따라 국가에서 자격을 관리하도록 지정되었다.
힐러의 자격 부여 기준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계속 달라져 왔고, 가장 최신의 개정안에 따라 통상 3년의 기본 교육을 받거나 마법사 길드에 등록된 사람이 4년의 국립 아카데미 교육을 거쳐 매년 2회 치르는 국가고시에 합격해야 자격을 준다.
힐러는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뿐 아니라 고급 술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수로 요구받으며, 일상 업무에서 항상 치료 목적의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체로 숙련된 마법사이다.
마법사는 모든 국가에서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루펠 제국에서 힐러의 면허를 제국 안전 보장국에서 관리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나 이해할 수 있다.
- 올리버 데일리, “제국 공무원 필수 수험서, 제2권 제국 구성의 체계”, 내용 중 발췌
1장 슐츠 의료 센터
마나 스캔은 진단과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힐러만의 고유 기술이다. 기적의 슐츠 경이 발명한 것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주문이다.
탐색용 마나를 환자의 몸에 주입하여 체온, 맥박, 호흡, 혈압과 같은 기본 바이탈 사인(Vital sign, 활력 징후)뿐 아니라 한 번에 한 곳씩 순차적으로 이상 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
국부적인 마나 스캔을 할 수 있으면 2급 힐러라 하고 대체로 평면적인 탐색만 가능하다. 1급 힐러는 입체적인 마나 스캔을 할 수 있다.
이 차이점은 생각보다 큰 것이다.
예컨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2급 힐러에게 마나 스캔을 받으면 당신의 뼈 어디에 이상이 생겼는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추간판 탈출증, 소위 디스크라는 병이 있다면 평면적인 스캔으로는 제대로 밝혀낼 수 없다.
당신이 운이 좋다면 1급 힐러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 혹은 그녀는 단층적, 입체적 스캔이 가능하기에 제대로 진단해 낼 것이다.
왜 ‘운이 좋다면’일까?
불행히도 루펠 제국을 통틀어 현역 1급 힐러는 100명 전후에 불과하다.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도 한 명, 잘해야 두 명 정도에 고용한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알려진 슐츠 의료 센터도 1급 힐러를 2명에서 3명만 고용하고 있다.
- 도로시 힐다, “의사나 힐러가 되려는 청소년을 위한 길라잡이”, p74
오후의 한가로운 햇살과 산들바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엘프의 노래처럼 귓가에 쏟아진다. 뭉게구름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는 호수 수면도 바람의 간지러움에 너그럽게 대답하여 잔잔한 무늬를 그려 낸다.
산책로에서 벗어난 인적이 드문 호숫가에는 마치 조화의 엘프처럼 이 풍경에 완벽하게 동화된 한 청년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갈색 머릿결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평범한 외모의 한 청년이 거기에 있는지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의 평화로운 오후는 청량한 목소리에 의해 방해받고 말았다.
“힐러 샤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도대체 몇 번째인 줄 아세요? 빨리 일어나요!”
“······.”
“힐러 샤펠! 버몬 경이 격노 상태라고요!”
샤펠이라고 불린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복화술로 말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저는 샤펠 씨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입니다. 그는 모레쯤 자리에 돌아온다고 하더군요.”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의 이마에 살짝 골이 패였다.
“도플갱어 이야기는 지난주에도 써먹은 것 같은데요? 요즘 도플갱어는 모두 실업자라서 이런 데서 낮잠이나 자는가 보죠? 얼른 일어나지 않으면 밤 당직 열흘 추가래요!”
샤펠이라고 불린 청년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호숫가를 향해 모로 누운 자세에서 고개만 왼쪽으로 젖혀서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
“오! 제이나 덕분에 도플갱어의 위협에서 내 몸을 찾을 수 있었네요! 어찌 감사드려야 하지? 그런데 후유증으로 두 시간 정도는 몸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네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무슨 라스트 네임을! 친근하게 펠릭스라고 불러 줘.”
“샤펠 씨!”
“펠릭스래도.”
“······좋아요, 펠릭스. 버몬 경이 왜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길게 할까요, 짧게 할까요?”
“어차피 길게 할 거면서.”
제이나는 팔짱을 끼고 호수 반대편에서 먹이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이름 모를 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오르 공주가 복부 종양 마나 분해 시술을 받은 후 예후가 좋아지다가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어요. 진단을 내릴 수도 없는 불안정한 상태고, 비침습적인 전신 마나 스캔을 할 수 있는 일급 힐러 중에서 의료원에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요, 힐러 샤펠.”
“펠릭스.”
“오케이, 펠릭스.”
펠릭스 샤펠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훑었다.
“버몬 경은 오우거로 폴리모프해서 힐러 자격증이 자동 박탈되었나 보지? 버몬 경도 일급 힐러잖아.”
제이나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가운 아래에 입은 바짓단을 살짝 걷어 올리면서 뒤로 두 발자국쯤 가더니, 맹렬하게 뛰어가서 펠릭스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이다.
“살인미수라고, 레이디.”
제이나의 로우 킥은 위기감을 느끼고 재빨리 일어난 펠릭스의 대처 덕분에 헛발질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몸의 균형을 순간 잃었지만 뒤로 넘어지는 불상사를 겪지는 않았다.
“꺅!”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라고, 제이나.”
펠릭스는 그녀의 등을 받아 부드럽게 제대로 세워 준 다음, 만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야! 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바닥을 그녀가 바라볼 수 있게 세웠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펠릭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예상치 못하게 따귀가 성공하자 제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나도 모르게 그만······.”
펠릭스의 얼굴 왼쪽에 손바닥 자국이 희미하게 찍혔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가자고. 불한당 오우거의 인내심이 바닥나면 내 퇴근 시간을 늦추려 할지도 몰라.”
“미안해요.”
“미안할 것 없어. 증거가 있어야 사람들이 사랑싸움을 했다고 믿지. 내가 진단 부서 사람들에게 제이나랑 데이트했다고 거짓말했거든.”
“꿈도 꾸지 마세요. 나에게는······.”
또 그놈의 대단한 기사 나리 이야기겠지.
“레퍼토리 좀 바꿔 보라고. 평민을 아내로 맞이하면 그 기사 나으리가 인생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알면서 저러나. 게다가 그 기사 나부랭이는 미녀를 얻으려고 결투를 했다가 박살 나서 여기 온 거였다고.”
펠릭스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의 종알거림은 흘려보냈다.
제이나는 갑자기 걸음이 빨라진 펠릭스를 눈치채고 입술을 삐죽거린 후 가볍게 따라붙었다.
“제이나, 저 대단한 행렬은 도대체 뭐지?”
“아침에 회람 안 봤나요? 오늘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이 내원(內院)하는 날이잖아요.”
휘유우!
다소 야유가 섞인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펠릭스는 머릿속에 저장된 국내외 귀족 계보를 잠시 검색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힐러 임용 고시 때 끝까지 눈길이 가지 않아 제쳐 놓았다가 시험 직전에 사흘 밤을 새워 몽땅 외우기는 했지만, 시험장을 나서자마자 모두 잊어버렸으니까.
“회람 볼 시간이 없었어. 아침부터 버몬 경이 드워프의 마나 스캔을 시켰다니까.”
“파밀런 장군을 드워프라고 불렀다는 걸 일러바치면 당신은 그 부하들에게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에 십 실버 걸죠.”
“부하들에게 안경을 맞춰 주라고. 십오 핸드(hand, 손바닥 넓이=10㎝)밖에 안 되는 키에 그 덥수룩한 수염. 보통 인간의 두 배쯤 되는 팔뚝과 장딴지를 보면 생물학적으로 드워프와 인간의 혼혈쯤 되는 것이 분명해.”
“만약 지금 심각하게 말한 거라면, 드워프와 인간은 자손을 낳을 수 없어요. 만약 유머라면, 정말 재미없어요.”
제이나는 다소 빠르게 걷는 것이 힘든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펠릭스와 같이 ‘대단한 행렬’에 가 있었다.
“내 유머는 인세에 찾아보기 어려운 고급 유머라고. 지금 웃기지 않다고 해서 유머가 아닌 게 아냐.”
“그럼 언제 웃기나요?”
“내 유머는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삼십 년까지 유통기한이 있지. 아마 폐하를 알현하는 엄숙한 행사에서 내 유머가 생각나면 키득키득 웃게 될 거야.”
“지치네요.”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의 행렬은 정말 대단했다.
슐츠 의료 센터는 치료비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들이 오는 병원이었다. 부자, 귀족, 고위 관리 등. 그 때문에 늙은 어머니를 아들 혼자 부축하고 오는 조촐한 광경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 해도 제슈비츠 공작의 행렬은 다소 과한 구석이 있었다.
제슈비츠 공작이 탔을 것이 분명한 화려한 사두마차의 주위에는 반영구적으로 경량화 주문이 걸린 철제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기사 오십 명가량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군마를 타고 질서 정연하게 우아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말과 기수 모두 흑색 갑주로 완전무장한 기사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호위 기사단을 거의 절반은 끌고 온 것 같군. 기사단장도. 저 중늙은이는 집사쯤 되나? 시종과 하녀 수만 해도 열둘에, 뒤에 따라오는 마차는 또 뭐지?’
제이나는 평민이지만 귀족 사회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펠릭스는 새로 고위 귀족이 올 때마다 그녀에게 물어보는 것이 일상사였다.
다행히, 제이나는 자기가 아는 것들을 기꺼이 나눠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계약을 잊지는 않았겠죠?”
“물론이지.”
국립 슐츠 의료 센터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시설이 아니다. 가벼운 질환에서부터 각종 불치, 난치병에 걸린 고위 귀족들이 엄청난 비용을 지급하고 수백수천 리그(league, 도보 한 시간=4.2㎞)의 거리도 멀다 않고 찾아와 기적을 꿈꾼다.
드래곤의 앱솔루트 큐어(Absolute cure, 절대 치유) 주문으로도 고쳐지지 않은 휴밀튼 황제의 병환을 완치시켜 전설이 된 ‘기적의 슐츠 경’과 그 제자들, 그 제자의 제자들이 축적해 온 기백 년의 노하우와 양질의 인력이 모여 난치병 완치에 가끔 성공하는 곳.
다른 곳에서 치료를 포기한 귀족들이 주 고객이었다.
많은 환자가 죽지만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기적 덕분에 슐츠 의료 센터는 루펠 제국의 경제에 상당한 부분을 이바지해 왔다.
의료진은 고위급 인사를 바로 면상에서 대해야 하기 때문에 매년 두 차례 이상 소양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는 귀족을 대하는 어법과 예절뿐 아니라 잠재 고객의 병력과 현재 상황 등이 포함되었다.
물론 병원의 잠재 고객이란 환자였다. 각국에서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고위 인사들.
펠릭스는 그런 교육은 땡땡이로 일관했고, 내원이 확정된 환자의 신상 명세를 다시 확인시켜 주는 회람도 잘 읽지 않았다. 평생 읽을 서류는 힐러가 되려고 공부하던 기간에 모두 읽어 버렸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래서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물이 제이나였다.
그녀는 교육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지식의 소유자였고 평소의 수다 레벨보다 훨씬 간결하게, 알아야 하는 정보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래서 펠릭스는 그녀와 모종의 계약을 했다.
제이나는 들려주고, 펠릭스는 듣는다.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은 베일리 제국의 재상으로 칠 년 동안 재임해 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악수를 청하시는데 엉뚱한 곳에 손을 내밀고 흔든 사건 직후, 건강상의 이유로 재상 직을 사임하고 요양 중이에요. 폐하는 과로로 말미암은 현기증으로 알고 계시죠.”
“이웃 나라의 재상인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그런데 흥미롭군. 공작 가문쯤 되면 우수한 주치의가 있지 않아?”
제이나의 설명은 계속된다.
“제슈비츠 공작은 그 후로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철저히 관리된 식단으로 식이 요법을 행하면서 운동을 병행해 왔죠. 그러다 어느 날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죠. 주치의는 심장이 문제인지 머리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예요.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문제일 수도 있어요.”
“결론은 모른다는 거군.”
“그렇죠.”
“유능하고 아름다우신 로즈마리 선생의 감별 진단은 뭐지?”
“현기증은 몸의 균형 감각에 고장이 났다는 것이니, 대부분 귀나 머리 쪽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가벼운 경우에는 과로나 불면, 스트레스가 원인이기도 하고. 노령이니 고혈압일 수도 있고 불규칙한 생활이 현기증을 유발하기도 하죠.”
“이번 가을에 현기증을 주제로 논문이라도 준비한 건가?”
“의료 아카데미 일 학년 때 배우는 건데요.”
“계속해 봐. 그 다음 증상이 호흡 곤란이었지?”
“베일리 제국의 의사들은 구체적인 차트 같은 건 작성하지 않죠. 그쪽 사람들은 간단한 소화제 말고는 대부분 성직자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으니까요. 호흡 곤란에 대한 추가 정보가 없어서 뭐라 단언하기가 어려워요.”
콩콩.
펠릭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 부위를 살짝 두 번 두드린다.
“노령이니 심장 쪽 문제일 수도 있겠네.”
“기관지 천식이나 비만은 병력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어요.”
“거의 다 왔군.”
펠릭스는 본관 건물 현관에서 제이나와 헤어져 버몬 경의 사무실을 찾았다.
불한당.
버몬 경을 더 이상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펠릭스는 생각나지 않았다.
펠릭스는 그가 슐츠 의료 센터에서 유일하게 어울리는 자리는 오직 나이트 가드 대장이라고 확신했지만, 감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펠릭스는 오래 살고 싶을 뿐 아니라 평온한 일상과 퇴근 시간을 지켜 내고 싶은 위인이었다.
채용 면접관으로 버몬 경을 처음 만났고 외모로 투영된 첫인상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고귀한 습관에 따라 그를 불한당으로 낙인찍었다.
드워프―파밀런 장군―에 필적하는 털북숭이인 데다 얼굴에 그어진 두 줄의 흉터가 뒷받침해 주는 험악한 인상.
펠릭스는 불한당이라는 별명을 쓰자고 강력하게 밀어 보았지만 버몬 경에게는 이미 빅 보스라는 별명이 있어서 먹히지 않았다.
버몬 경은 딱딱하게 잘라 말하는 타입이었다.
“피오르 공주는 지난달에 복부 종양을 제거하고자 마나 절제 시술을 받았다. 근치적 외과 수술을 거부한 이유는 종양의 깊숙한 위치 때문에 위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찬 서류를 가운뎃손가락으로 펠릭스에게 밀었다. 그의 독특한 버릇은 물론 펠릭스에게는 불만 사항이었다.
‘자기보다 상관에게는 절대 하지 않더구만.’
불한당의 설명은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했다.
“일급 힐러 윌슨 경이 마나 스캔을 했고, 종양으로 말미암은 추가 증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소견이었다. 진단 부서도 같은 의견이었고, 마나 분해술은 성공적이었다. 프로토콜에 따라 시술 삼 일 후에 마나 스캔으로 종양이 모두 제거되었음을 확인했다.”
버몬 경은 펠릭스가 늦잠을 자느라 호출에 당장 응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땡땡이에 상응하는 난해한 일거리로 응징할 뿐이었다.
“피오르 공주는 예후가 좋아지다가 갑자기 극렬한 통증을 호소했고, 또 다른 종양이 급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루에 두 건의 전신 마나 스캔을 하는 것은 일급 힐러에게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하루에 마나 스캔 두 번은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지?”
“오전에 드워프, 아니, 파밀런 장군은 국부 스캔이었고 직접 접촉 스캔이라서 진단 신뢰도와 마나 순도에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피오르 공주는 젊은 미혼 여성이고, 지난번에도 접촉 스캔을 모두 거부하는 바람에 격체 스캔으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이나 흉내 내기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한 호흡에 다섯 문장을 말하는 속사 채팅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군,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펠릭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격체 마나 스캔은 접촉 스캔보다 세 배 이상의 마나를 소모합니다. 탐색 마나 순도를 보장할 수 없고, 진단 신뢰도가 삼십 퍼센트 이상 떨어지죠.”
펠릭스는 불한당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반드시 준수하는 것.
“검사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슐츠 의료 센터라고 하는 마도 의학 본산의 힐러 운용 프로토콜에도 어.긋.나.죠!”
펠릭스는 마지막 음절을 스타카토로 읊는 것으로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지만 한편에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버몬 경은 프로토콜을 위반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직접 접촉 마나 스캔이다.”
“······에?”
“그녀는 복부에 종양이 생긴 것이 아니다.”
직접 접촉 마나 스캔을 해야 하는 부위. 격체도 아니고, 옷 위로 하는 간접도 아니고, 살갗에 손을 바짝 대야 하는 부위는 슐츠 경이 남긴 의서에 의하면 3곳뿐이다.
머리, 척추, 그리고······.
“거기다.”
못을 박는구려, 허허.
카운터펀치를 맞아도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의문이 남은 채로 식물인간이 되면 신념을 잃는 것이니까.
“확실히 프로토콜대로군요. 하지만 그녀는 엘프가 아닙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성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동의는 자네가 직접 받아야 한다. 쉽진 않겠지만, 슐츠 의료 센터는 황족의 몸에 손을 댔다고 해서 황족 멸시 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펠릭스는 그로기였지만 반격을 시도했다.
“프로토콜 위반입니다. 윌슨 경은 이미 그녀의 마나 흐름을 기억하고 있죠. 두 번이나 스캔을 했으니까요.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동일 환자에 대해서 과실이나 환자 본인의 거부가 없는 한 규정상 윌슨 경이 해야죠. 게다가 윌슨 경은 중년이고, 이십 대의 처녀가 맨살을 보이기에도 저보다 훨씬 수치심이 덜하다는 사실을 굳이 설명드려야 하나요?”
“자네와 나, 둘 다 아는 프로토콜에 대해서 굳이 설명 안 해도 된다.”
데엥······ 데엥······ 데엥······.
그 순간 마도 공학의 위대한 산물, 시계가 소리를 세 번 울렸다.
마법적 요소가 가미된 정교한 기계 장치가 들어 있지만 동력원인 2차 정제 마나는 꽤 수준 높은 마법사가 한 달에 한 번 주입해 주어야 했다.
장치 자체도 고가인 데다가 마법사의 인건비는 모든 직업 중 제일 비싼 축이기 때문에 시계는 황궁이나 몇몇 고위 귀족의 저택, 대형 공공 기관 등에나 설치된다.
슐츠 의료 센터에는 3개의 시계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원장실이 아닌 버몬 경의 방에 있다는 것은 미스터리였다.
상관과 대화 중 딴생각을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윌슨 경은 휴가 중이다.”
“아, 그래서 저는 지난해 세 번의 휴가 중 두 번을 반납해야 했군요. 윌슨 경의 저택은 여기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립니다.”
“그는 올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유는 기밀이다.”
“완벽하군요.”
“동의서는 자네가 받아야 한다. 그걸로 힐러의 근무 시간 중 대기 의무를 위반한 것을 상쇄하겠다. 나가 보도록.”
펠릭스가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버몬 경은 손가락으로 방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덧붙였다.
“아울러 파밀런 장군은 드워프라는 표현을 가장 큰 모욕으로 여긴다. 자네의 싼 입을 장군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마리안 선생.”
“힐러 샤펠.”
의료 센터에서는 모두가 바쁘다. 인사는 서로 직함과 라스트 네임을 불러 주는 정도로 생략해도 아무도 타박하지 않는다.
33세의 여의사 마리안은 ‘빅 보스’ 버몬 경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로, 슐츠 의료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하자마자 슐츠 의료 센터에서 다년간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그녀는 항상 희미하게 웃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이다. 입술 끝이 아주 살짝 말려 올라가 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그 입술 오른쪽에 있는 점에 고정된다.
매력적인 여성이 독신이라는 것은 버몬 경 방의 시계에 비견되는 슐츠 의료 센터의 미스터리고.
“서류는 모두 검토했겠죠?”
“까만 건 글씨고 흰 건 종이군요.”
“파밀런 장군이 하베르강 전투에서 한 말이군요. 그를 비아냥거리면서 친해졌나 보군요. 담당의 트루퍼스 선생은 오늘 조금 늦어요. 지금은 저와 같이 가요.”
또각또각.
의료 센터에서 닥터 마리안이나 제이나처럼 펠릭스의 저질 유머를 받아 주는 여성도 흔치 않지만,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여성은 더더욱 없다.
긴급 상황도 자주 터지고 뛰어다니는 일도 잦다. 대부분 발이 편한 신발을 택하지만 도도한 마리안은 항상 무도회에서나 볼 수 있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
‘나이가 조금 많지만 미혼녀의 구두 굽 소리는 묘한 상상을 자아낸단 말이지.’
야한 상상도 간음이라는 라일교 대주교 예하의 경전 해석에도 펠릭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신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무신론자인 펠릭스가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주신의 뜻이라는 멋대로의 해석이다.
버몬 경의 사무실에서 귀빈 병실까지는 3미누(minu, 분)도 되지 않았다.
병실에는 고유의 약 냄새와 환자의 병이 풍기는 독특한 향이 섞여서 이곳이 병실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피오르 공주의 병실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의료 센터의 귀빈 병실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문양의 벽지와 바닥재로 치장되어 있고 벽에는 환자들이 사례로 보내온 각종 미술품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 고급 가구와 공기를 맑게 해 주는 식물.
펠릭스가 일전에 가 본 세도가 밀턴 후작의 침실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배치는 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건축가가 조정한 것.
제법 높은 축인 힐러의 급료로도 며칠이나 머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최고급 1인실에는 드워프가 고안해 낸 화장실과 목욕탕뿐 아니라 하녀나 시종이 머물 수 있는 방도 두 개 딸려 있었다.
이쯤 되면 병실이 아니라 휴양지 숙소급 이상이었다.
펠릭스의 눈에 비친 피오르 공주는 전형적인 공주였다.
외모와 성격 모두.
“꺼져!”
공주는 펠릭스를 보자마자 돌아누워 버렸다.
‘오늘은 놀라움의 연속이군. 제국의 꽃이라는 놀라운 미모에 걸맞은 성급하고 더러운 성격이라니. 누군가 이유를 설명해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펠릭스의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저는 공주 마마를 모시는 차석 시녀 릴리안이라고 합니다. 의료 센터에서는 공주 마마의 상태를 호전시키려면 맨살에 손을 대야 한다고 동의를 구해 왔습니다만, 공주 마마께서는 거부하고 계십니다.”
펠릭스는 공주의 반응에 약간 심기가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퉁명하게 응수했다.
“공주님께서는 천한 평민 힐러에게 꺼지라고 하시는군요. 혹시 제가 당신과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수석 시녀가 나서서 모든 결론을 뒤집게 되나요?”
공주는 그 자세 그대로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꺼져!”
릴리안은 아담한 키의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귀여운 외모였고 말할 때에는 보조개가 살짝 들어갔다.
“수석 시녀께서는 휴가 중이십니다. 아무튼 공주 마마께서는 시술을 거부하십니다.”
마리안 선생은 방관만 하고 있었다. 버몬 경이 동의서를 받는 것이 힐러 샤펠의 일이라고 미리 언질을 해 둔 것이 분명했다.
‘젠장.’
펠릭스는 무신론자들의 아멘을 되뇌며 용기를 냈다.
“시술을 거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 보아도 될까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여성 힐러를 구하세요.”
망할 황족의 권위. 젊은 여성의 수치심.
“공주님의 외모와 신분이 종족 번식과 부귀영화의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남자들의 로망이기는 하지만 의사 앞에서는 환자에 불과합니다.”
릴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펠릭스가 흘낏 쳐다본 바로는 도도한 마리안 선생의 눈도 크게 치켜떠져 있는 것 같았다. 살짝 말려 올라가 있던 입술은 열린 듯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쿵!
펠릭스는 더 신랄한 말을 할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발을 굴렀다. 동시에 돌아누워 있던 공주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일어나 앉으면서, 덮고 있던 얇은 덮개를 순식간에 둘둘 말아 던졌다.
“믿을 수 없이 무례한 자로다! 황족에게 폭언이라니!”
공주가 꺼지라는 말 이외에 다른 단어들을 말하게 하려고 일부러 속으로나 할 말을 한 것이다. 펠릭스는 덮개 공격을 성공적으로 잡아 냈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스르릉― 슉!
대낮인데도 장식용으로 탁자 위에 켜 놓은 양초가 바람도 없는데 흔들린다 싶었다. 나쁜 냄새도 제거하는 효능이 있으니 그 깐깐한 버몬 경이 예산을 쓰게 한 것이리라.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 펠릭스의 목젖 앞에 예리한 레이피어 한 자루가 등장했다.
레이피어를 든 사람은 역시 젊은 여성 검사였다.
평복을 입었지만 그녀의 기세는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의 호위 기사들 못지않아 예리한 한 자루의 검과 같았다.
“와우! 거의 공간이동 주문 수준이군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도 말끝 하나 흐리지 않는 펠릭스를 보면서 로열 가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마마, 황족 멸시 죄에 해당합니다. 평민은 즉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젊은 힐러의 목숨이 명재경각이라. 하지만 그 말은 틀린 것, 레이피어의 날카로움도 펠릭스의 혀를 베지는 못했다.
“로열 가드의 말은 틀렸군요. 선황 폐하의 칙명에 따라 슐츠 의료 센터의 의료진들은 황족과 귀족 멸시 죄에서 면책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급 힐러는 출신이 평민이라 해도 존칭을 붙이지 않을 뿐 황제 폐하께서 주재하시는 임명식에 참가해서 하급 귀족에 해당하는 권리를 받습니다. 저를 샤펠 경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만 말이죠.”
일생의 절반 이상을 검술 수련에 썼을 것이 분명하고 공주의 호위 기사로서 병원 같은 곳에 죽친 경험도 없을 것 역시 확실한 로열 가드는 칙령을 자세히 모르니 입을 다물었고, 릴리안이 말을 받았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펠릭스는 목 앞의 검날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잡아서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슐츠 의료 센터에는 많은 것이 있고, 또 많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들을 다 열거하자면 매우 지루하실 테니 줄여서 말하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매우 우수한 경비가 있어서 로열 가드가 따로 상주할 필요가 없고, 둘째로 정수리, 척추, 그리고 공주 마마의 환부 등 삼 대 부위를 마나 스캔할 경우 격체는 고사하고 옷 위로 하는 간접 스캔도 안 되며 오로지 직접 스캔만 가능하다는 프로토콜이 있습니다.”
후우.
심호흡이 필요했다. 다섯 문장 한 숨 말하기는 역시 불가해한 영역이었다.
“없는 것은 있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건데, 여성 힐러는 없습니다.”
“왜 없죠? 그리고 그 프로토콜이라는 것은 뭐죠?”
이제 대화는 릴리안이 묻고 마리안 선생이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프로토콜은 기적의 슐츠 경 이후로 정립된 의료 시술의 정해진 규약과 순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숨이 위험한 시술 전에는 환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냥 규약이라고 해도 돼요. 하지만 의사와 힐러들은 잘난 체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실은 의서와 의료 관련 마법서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외우고 쓰기를 강제한 거지만!”
펠릭스가 덧붙였다.
로열 가드는 옆으로 밀려난 레이피어를 검집에 꽂지 않고 어정쩡하게 손에 쥐고 있었다.
‘이봐, 무섭잖아.’
“여성 힐러가 없다면 다른 병원에서 모셔 오면 되지 않을까요?”
“활동 중인 여성 힐러는 제국에 백여 명이 있지만 신뢰성 있는 전신 마나 스캔을 할 수 있는 일급 여성 힐러는 단 두 명뿐입니다. 한 분은 여기에서 한 달 거리에 계시고, 한 분은 황궁 의료진 소속이죠.”
릴리안은 호기심 많은 학생 역할, 마리안은 좋은 선생 역할. 서브 앤 리시브.
편해서 좋기는 한데 펠릭스는 입이 근질거렸다.
‘왜 공주가 황궁에서 마나 스캔을 받지 않았지? 뭔가 이상한데? 물어볼까?’
그러나 로열 가드의 레이피어가 아직 검집으로 귀환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펠릭스는 다른 이야기로 돌리기로 했다.
“아무튼, 공주 마마께서 마음을 정하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마나 스캔을 계속 거부하시면 우리가 더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종양이 악성이라면 급속도로 악화할 겁니다. 다른 가능성도 확인해 봐야 합니다.”
“꺼져!”
“공주님께서는 안정이 필요하십니다.”
릴리안은 의사와 힐러를 문 밖으로 안내했다. 보통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안정이 필요한지 진단하고 진정제를 주는 것은 의사의 일이고, 마법적 방법으로 마나 흐름을 안정시키는 것은 힐러의 책임이니까.
하지만 대상이 공주다 보니 일남일녀는 곱게 물러나 왔다. 아니, 물러나 오려고 했다.
“아악!”
“공주님!”
“공주님!”
피오르 공주는 별안간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펠릭스의 시선이 마리안 선생에게 꽂힌다.
마리안 선생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내젓는다.
“꽤 강한 걸 썼는데도 진통제의 한계를 넘어섰네요.”
“제가 해 보죠.”
펠릭스는 공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는데 공주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하면서도 거부했다.
“꺼져······ 꺼지라고······.”
로열 가드가 펠릭스를 제지하려고 하자 릴리안이 그것을 막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용히 저으며 공주를 펠릭스가 원하는 대로 앉히고 침대 옆에서 잡아 주어 다시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펠릭스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얼굴이 살짝 굳어지면서 눈빛이 어둡고 강렬하게 변했다.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주의 정수리에는 왼손을 얹고 오른손으로는 허공에 글씨인지 무늬인지 모를 것을 빠른 속도로 써 내렸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손으로 하는 작업은 마법진을 그린 후 고대 룬어와 술식을 써넣는 것이다.
허공에 1차 정제 마나로 써 내려간 고대 룬어는 수많은 술식이 기하학화한 마법진에 안착되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위의 마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20세크(sec, 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펠릭스의 눈이 번쩍 떠짐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머물던 허공에서 푸른빛이 홀연히 생겨나 그의 오른손 장심(掌心)을 통해 흡수되었다.
릴리안들의 시선이 펠릭스의 투명한 눈으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분명히 검은색이건만 이 순간은 거의 투명해진 것 같은 착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약간의 광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다시 20세크 정도 후에는 왼손에서 푸른빛이 나더니 곧바로 피오르 공주의 정수리로 사라졌다.
한 점.
한 점에서 시작된 펠릭스의 푸른 마나는 공주의 정수리 근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하나의 선이 되었다. 하나의 선은 정수리 근처에서 여러 개의 선으로 늘어나고 마침내 지배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치 더운 날 땀을 씻어 주는 청량한 바람을 맞은 듯, 피오르 공주의 일그러진 얼굴이 펴진 것은 그 후로 30세크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펠릭스는 거의 3미누 동안 손을 떼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평소에 낮잠 자러 가던 호수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공주 역시 무엇인가에 감전된 듯 몸을 살짝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멈춰 버렸다.
3미누라는 시간은 꽤 긴 시간이었다. 릴리안과 로열 가드는 그 신비한 푸른빛이 사라진 것이 아쉬운 듯 정수리에 닿아 있는 펠릭스의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순간만큼은 저질 유머나 입에 담는 불량 힐러가 아니었다.
반면 마리안 선생은 조금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펠릭스 샤펠이 1급 힐러라는 것은 그의 경력과 자격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익히 아는 바였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두 가지였다.
1급 힐러의 기본 자격 요건 중 하나는 치유 주문을 쓰면서 시동어나 주문 영창이 필요 없는 ‘무독 시전’이었다.
무독 시전이 가능한 마법사는 뮤트 캐스터(Mute Caster)라 해서 매우 희귀한 재목으로 쳤고, 힐러도 마법사이다.
물론 아주 간단한 주문은 영창 없이 시동어만으로, 혹은 시동어도 없이 무독 시전이 가능했지만 얼리비에이션(Alleviation, 고통 억제) 주문은 생물의 신경계를 통제하는 고위급 주문이다.
정통 마법 이론에서는 외부 마나의 강제 재배열을 통해 원래의 배열로 돌아가려는 마나의 기본 성질을 수학적으로 이용, 간섭하여 생물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시키는 리커버리(Recovery, 회복) 주문을 써 왔는데, 그 술식의 난해함과 각 케이스별 복잡성, 예외성 때문에 수준 높은 마법사라야만 쓸 수 있었다.
또한 중급의 성직자들이 기도를 통해 신력을 얻고, 이로써 복잡한 술식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해내는 힐링(Healing, 치유) 주문보다 훨씬 어렵고 효율도 떨어졌다.
‘기적의 슐츠 경’은 동방 대륙에서 내기(內氣)를 다루는 기술을 정통 마법 이론에 접목시켜 혁명적인 얼리비에이션, 리뉴(Renew, 재생) 등의 다양한 주문을 창안해 내었다.
신화 속의 존재인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동방 대륙에 가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식 역사서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슐츠 경의 생전이었으니 벌써 수십 년도 더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동방 대륙의 존재가 있음을 당연시했다. 게다가 슐츠 경은 거기서 쓰는 마나 연공법을 배워 익히기까지 했다.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지만 슐츠 경은 이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다.
아무튼, 동방 대륙의 명상법이나 호흡법은 체내에 마나를 정제하여 몸을 강건하게 하고 병마의 침입을 막는 예방적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만 대증 요법으로 쓸 수는 없었다.
마리안 선생의 놀라움 중 하나는 고통 억제 마법진을 완성하고 구현하는 데 든 시간이 겨우 40세크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보통 숙련된 1급 힐러들도 고통 억제 마법을 무독 시전하는 데 1미누 이상이 걸렸다.
20대 후반의 펠릭스가 이를 겨우 40세크에 해낸다는 것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힐러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것은 두 번째 놀라움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고통 억제 마법을 쓰면서 국부 마나 스캔을 쓰다니.’
마리안 선생은 혀를 내둘렀다.
국부 마나 스캔은 전신 마나 스캔에 비해서 비교적 쉬운 주문이지만 고통 억제 마법과 동시에 시전하는 것은 그녀가 아는 한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특급 힐러라면 몰라도.’
힐러 국가 공인 자격증에 특급이라는 등급은 없었다.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힐러, 간호사, 치료사, 성직자들이 알게 모르게 인정하는 당대의 최고 실력자 극소수만이 특급 힐러라고 불렸다.
비공식적으로.
병실 안의 시간은 3미누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그동안 펠릭스는 시간의 지배자였지만 정확히 3미누 만에 공주에게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실력이 꽤 있군. 하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다.”
펠릭스는 공주의 정수리에서 손을 뗀 다음, 화난 제이나와 거의 똑같은 오므린 입술 모양을 하고 있는 마리안 선생의 소매 깃을 잡아끌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고개만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곁눈질로 공주를 보면서 말했다.
“표현이 달라졌군요. 공주 마마. 평민들은 보통 그럴 때 고맙다고 하죠.”
“꺼져라.”
“이미 전 직접 접촉을 했습니다. 무엇이 다르죠?”
공주는 차마 부끄러운 신체 부위를 입에 올리지 못하고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라 식식거렸다.
“네 이, 이, 네놈이!”
펠릭스는 마리안 선생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튀세요. 둘둘 만 이불 말고 다른 게 날아오면 곤란하잖습니까.”
40세크 만에 2가지 치유 주문을 무독 시전해 낸 힐러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정말로 의료 센터 복도를 쿵쿵 울리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째쨍······!
마리안 선생은 복도 천장에 새겨져 있는 규칙적이면서 불규칙적인 이상한 패턴의 무늬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 결국 동의서는 받아 내지 못했군, 힐러 샤펠.’
***
슐츠 의료 센터는 수십 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의료 센터의 진료비는 서민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지만 고위 인사들의 완치 사례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이 정설이다.
제국 최고의 건축가와 미술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의료 센터 단지는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만하다. 본관과 두 개의 별관, 장기 입원 병동 등의 주 건물과 부수적인 건물들은 동선 최적화를 포함하여 아름답게 설계되었다.
재활 치료를 위해 장기간 입원하는 환자들을 위해 고안된 다양한 산책로는 수려한 경관과 낭만적인 분위기 덕분에 밀애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 포브 레인, “제국의 현대 건축물 여행”, p122-123
제이나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펠릭스와 헤어져 다른 환자를 보고 나오는 길에 버몬 경의 호출을 받았다.
버몬 경은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녀는 누구를 말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는 꽤 고생이었다. 평소에 잘 가는 한적한 곳을 찾아봤지만 게으름뱅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길이 없는 곳을 뒤지기 시작한 지 15미누 이상이 지나서야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데 숨어 있다고 못 찾을 줄 알았나요?”
······.
“샤펠? 펠릭스?”
전혀 반응이 없다.
제이나는 아까 실패한 로우 킥을 재시도하는 대신 펠릭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맙소사, 정말 잠들어 버렸네.’
제이나의 손길이 펠릭스의 얼굴로 향한다.
눈꺼풀을 살짝 열어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 꿈을 꾸는 것이리라.
***
“샤펠 씨?”
“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안내 요원은 엘프리츠 루펠 3세 황제 폐하의 대관식장에서 무료 배포된 금배지를 검은색 제복 깃에 단 젊은 여성이었다.
펠릭스 샤펠은 그녀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면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면접실 안에는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 정신이 번쩍 날 만큼 빼어난 미모의 20대 여성, 그리고 뒷골목 건달처럼 생긴 불한당 하나.
펠릭스 샤펠은 세 사람을 간단히 노인, 미녀, 불한당으로 부르기로 했다. 물론 속으로.
불한당은 꼿꼿하게 앉아 이력서를 읽고 있었다.
펠릭스 샤펠. 창세력 970년생.
수도 미리넨 태생.
986년 : 루츠 검술 학교를 평점 4.2로 수료.
989년 : 베아스틴 마법 학교 평점 4.2로 졸업.
993년 : 국립 슐츠 의료 아카데미 평점 4.4로 졸업.
993년 : 힐러 3급 자격증 취득.
994년 : 힐러 2급 자격증 취득.
생긴 것은 불한당인데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관료였다.
“이력에 특이한 구석이 많습니다. 삼 년제 검술 학교는 쭉 수석이다가 조기 졸업 시험을 보고 수료했고, 일 년 가까이 쉬다가 삼 년제 마법 학교를 다시 들어가서 졸업한 다음 오 년제 의료 아카데미는 사 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게다가 추천장을 써 준 사람이 데이커 교수입니다.”
흰 수염의 노인이 그 말을 받았다.
“확실히 특이하군. 독설가 데이커 교수가 추천장을 쓰다니! 추천장은 어디 있나?”
불한당이 서류를 뒤적거려 추천장을 노인에게 건네주는 동안 미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펠릭스 샤펠을 훑어보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시선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따가우면서도 자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발가벗은 채 탐색 당하는 기분이군.’
노인은 추천장을 보더니 오십 년쯤 젊어진 것처럼 크게 웃었다.
“크하하!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파격적인 추천장이군!”
펠릭스는 곁눈질로 미녀를 쳐다보았다.
신상명세서는 면접관들 앞에 사본이 한 부씩 놓여 있지만 추천장 같은 서류는 복사본을 만들지 않은 모양이었고, 노인이 저쯤 말했으면 보통 호기심을 유발하게 마련인데······.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미녀는 끊임없이 펠릭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이는 데 1미누 정도 걸리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노인의 이어지는 질문에 멈춰졌다.
“자네는 이 추천장의 내용을 알고 있나?”
알 리가 없잖아. 모든 공식 추천장은 밀봉되어 있다고.
“모릅니다.”
“데이커 교수가 자네 추천장을 쓰면서 뭐라고 한 말은 없었나?”
“미친 새끼라는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군. 직접 보게나.”
노인은 테이블 위로 추천장을 밀어 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추천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붙든 것처럼 비스듬하게 날아와서 펠릭스의 손에 안착했다.
‘플라잉 오브젝트(Flying object) 주문에 뮤트 캐스팅.’
펠릭스는 추천장의 내용을 빠르게 읽어 주었다. 미녀가 눈동자 운동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기를 약간 기대하면서.
“펠릭스 샤펠은 미친놈이다. 사 년간의 두통을 오 년으로 늘리지 않으려고 본인이 직접 제의한, 전례가 드문 이 학기 조기 졸업 시험을 거뜬히 통과한 놈이니 능력은 제법 쓸 만한바, 이 녀석을 능력만 보고 뽑을 간담이 있는 자라면 능히 써도 좋다. 힐러로서의 능력을 제외하면 쓸모 있는 구석은 전혀 없을 테니. 마도 의학계의 재앙을 고용하려는 자에게 주신(主神) 라일의 축복 있으라.”
펠릭스는 거기서 잠시 뜸을 들였다.
“추신, 이 녀석이 저지른 사고들이 궁금해도 연락하지 말 것. 육 개월만 써 보면 안 보고도 짐작할 수 있게 됨.”
미녀는 여전히 눈동자 운동 중이고 노인은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최근 이 년 이내에 가장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일을 하나만 꼽아 보게.”
“면접관 중 한 분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꽤 빼어난 미녀를 애인으로 사귀었습니다.”
“인상적이군. 최근 이 년 이내에 가장 실패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일을 하나만 꼽아 보게.”
“삼 개월 만에 헤어졌습니다.”
“더 고차원적인 문제에 부딪혀 해결하거나 실패한 적은 없는 건가?”
“마도 의학에서 규정하는 생물은 의지를 갖추게 된 마나의 최종 진화형 집결체 중 하나입니다. 생물의 가장 고귀한 임무는 종족 번식이고, 우성 인자를 찾으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미녀를 사귀는 것은 후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확고하군. 노구에게는 바람둥이가 되고 싶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네만.”
“현명하십니다, 마스터.”
“올해 가을 고시에서 세 명밖에 나오지 않은 이급 힐러 합격자를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 이력은 다소 이상하지만. 자네는 합격일세. 시릴 버몬 경을 따라가게. 같은 힐러니 말도 잘 통할 걸세.”
불한당은 놀랍게도 귀족이었다. 루펠 1세의 칙명에 따라 모든 귀족의 풀 네임에서 폰, 드, 데 등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이름만 듣고는 알 수 없었지만, 귀족을 직함으로 부르지 않을 때에는 존칭을 붙이게 되어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 제국 대부분과 왕국들이 이런 형식으로 바뀌었다.
펠릭스는 불한당의 따라오라는 손짓에도 한마디 하지 않는 미녀를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 미녀의 얼굴에 도저히 걸맞지 않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인 경험은?”
펠릭스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키스해 줘요, 다알링~ 같은 달콤한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너무 의외 아닌가.
하지만 펠릭스는 받아쳤다.
“평범한 마도 의학도가 살인이라뇨.”
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재차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눈동자만 움직여 펠릭스를 훑어본 후 반대편 문으로 나가면서 로이 경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 조 내정.”
로이 경은 펠릭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가 일급 힐러로 성장한다면.”
***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버몬 경의 호출이 우선이었다.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놀이를 하던 제이나가 이제는 슬슬 깨워야겠다고 결심하던 찰나였다.
번쩍.
감겨 있던 눈이 떠질 때 펠릭스의 얼굴에서 2핸드(hand, 손바닥 넓이=10㎝)도 되지 않는 거리에 제이나의 얼굴이 있었다.
“다시 눈 감을게. 몰래 키스해도 좋아.”
“그, 그런 게 아닌데!”
대답하는 대신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뾰족하게 내민다.
“저질······!”
용수철처럼 튕겨 오른 그녀는 가운에 붙은 풀을 털어 내며 말했다.
“버몬 경 호출이에요.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 담당 팀에 배속되었어요.”
“주어를 빼먹지 말라고.”
“힐러 펠릭스, 트루퍼스 선생, 그리고 로즈마리 선생.”
“새로 나온 삼인칭 놀이인가? 그리고 난 트루퍼스 선생보다는 마리안 선생이 더 좋은데.”
“힐러 샤펠이 남색보다는 치마 두른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의료 센터 사람들이 다 알죠. 더 정확히는 여자라면 ‘다’ 좋아하죠.”
“내 성적 취향에 관심을 둬 줘서 고마워.”
“감사 인사보다는 골드로 주시면 좋겠네요.”
벌써 본관 건물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펠릭스는 어리고 귀여운 여수련의와 노닥거리며 걷는 것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책로에서 혼자 걸어오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부자가 아냐. 그래서 골드보다는 내 마음을 사랑의 형태로 전하지.”
“사시사철 발정 난 수캐가 짝을 찾는 것도 사랑인가요?”
“꽤 신랄해졌는걸? 처음 만났을 때에는 말 한마디 못하던 얌전한 수련의였는데 말이야.”
“검은 잉크에 손을 담그면 손가락 끝부터 검어지는 법이죠. 수련의 일 년 차의 백일 당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능구렁이가 된다고요.”
“그래서 제이나는 도둑 키스를 하려고 한 거야?”
“키스할 생각이 아니었다니까!”
“물론 머리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몸이 움직여 버리는 걸 어떡해?”
“미친!”
그 순간 펠릭스가 갑자기 제이나의 왼쪽 어깨너머로 휙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제이나의 고개도 왼쪽으로 따라서 돌아갔다.
말을 받아 준 사람은 다른 노인이었다.
오후의 청명한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면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
완고해 보이는 입술이 전체적인 인상을 만들어 냈고 감은 듯 뜬 듯 보이는 눈은 눈동자도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야심 찬 청년의 예기가 감돌았다.
아니, 노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유명한 인물,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이 호위 기사 하나만을 데리고 현관 앞에서 제이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쳐서 미안하네. 레이디······?”
“제이나 로즈마리 선생입니다.”
펠릭스였다.
이죽거리고 나서 다시 제이나 뒤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얄미운지.
‘죄, 죄송해요! 저, 저는 공작님께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키스하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제이나는 평소의 특기대로 ‘한 숨에 다섯 문장 말하기’를 하려고 했지만 입속에서만 말이 맴돌고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완전히 당황해 버린 것.
“로즈마리 선생은 입만 벙긋거리는데 힐러 선생이 통역해 주겠는가?”
“기적의 슐츠 경께서도 독심술에는 실패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지. 그런데 자네는 로즈마리 선생의 작은 체구 뒤에 잘도 숨는군.”
그 말을 듣고 펠릭스가 멈칫하는 새 제이나는 그의 볼을 꼬집는 데 성공했다.
“예의를 갖추어라! 감히 공작 각하 앞에서!”
제슈비츠 공작은 호위기사를 한 손으로 제지했다.
“난 여기서 환자일 뿐일세. 보기 좋기도 하고.”
“네, 각하.”
몇 가지 검사를 받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지만 공작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여느 환자와 같지 않았다. 묵직한 존재감이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치의 트루퍼스입니다. 이쪽은······.”
“이미 인사했네.”
예의 없는 힐러와 수련의 2인조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은 다물었다. 트루퍼스 선생은 차트를 보며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시는데 현기증, 통증, 피로감, 호흡 곤란이 간헐적으로 있군요. 성직자의 치유를 여러 번 받으셨지만 그때뿐이고 점점 주기가 짧아지십니다.”
“성직자들의 신력으로도 통증이 잠시 가실 뿐 곧 재발하곤 했네.”
“검사 결과들이 내일 나오는 대로 마나 스캔을 해 보고 나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2장 발작
바이안 시(市).
슐츠 의료 센터의 영향력이 백여 호가 모여 살던 촌락을 중소 도시로 발전시켰다. 이곳에서 불치병을 고쳤다는 소문이 제국을 넘어서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가자 먼저 제국 내의 고위 인사들이 슐츠 의료 센터를 찾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많은 인원을 대동했고, 대부분 센터 밖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다.
의료 센터 설립 초기에는 건물이 본관 하나뿐이었고 핵심 인력인 힐러의 숫자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진료가 밀려 있다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갈 형편도 아닌지라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이 먼저 발달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여관이었던 <엘프의 키스>의 주인이 떼돈을 벌자 그 돈을 재투자해서 몇 개의 숙박 시설을 더 늘려 가기 시작했고, 각처에서 몰려든 건축업자들은 수없이 많은 여관을 찍어 냈다.
당시 여관은 보통 2층 또는 3층의 목조 건물에 식사 공간과 객실이 따로 있고 가장 대중적 교통수단인 말들이 쉬게끔 마구간이 딸린 구조였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위해 배후 지역에 별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무리 재산이 남아도는 귀족들이라 해도 평생 한 번 갈까 말까 한 곳에 고급 별장을 지어 두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대형 상단과 연계하여 임대업을 고안해 냈다.
본인이나 지인들이 슐츠 의료 센터에 언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아픈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소유는 하되 상단에서 운영을 맡고 수익을 분배해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임대업은 상류 사회에 한때 유행이 되었다.
상주인구가 늘기 시작하자 이들이 먹고 자는 것 이외에도 편의 시설이 많이 필요해졌고 영주 유리안 백작은 분쟁 지역의 곡물 거래로 거상이 된 도르노 상단과 손잡고 이 일대를 관광 지역으로 개발하는 장기간 계획을 세워 그의 사후까지 2대에 걸쳐서 영지를 꾸준히 발전시켰다.
공격적 투자는 이전까지 대륙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숙박업소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영주의 이름을 딴 유리안 호텔은 기획 단계에서 개장까지 십오 년이 걸렸는데, 이곳은 이미 숙박업소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대번에 명소가 되었다.
본국에서 상위 계층이 즐기던 모든 것들을 호텔 안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각국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고자 가벼운 질환에도 괜히 유리안 영지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펠릭스 샤펠도 퇴근 후 날이 저물자 이곳, 유리안 호텔로 향했다.
유리안 호텔은 숙박 시설이라기보다는 만남의 장이었다.
대규모 연회장들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의 외피 색깔로 작명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3개의 연회장―레드 드래곤 홀, 실버 드래곤 홀, 골드 드래곤 홀―은 크기가 모두 같았다.
지닌바 권력의 크기에 따라 큰 연회장을 요구할 것이 빤한 귀족들의 습성을 유리안 백작이 미리 염려한 것이다.
펠릭스의 목적지는 대연회장들에 비하면 약간 작은 홀이었다.
크리스털 홀.
<환> 제37차 제국 중부 의료 협회 학술회의 <영>
멋들어진 공용어 필기체의 환영 문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뒤풀이 파티에 참석한 관계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힐러 샤펠.”
배가 고픈 펠릭스는 공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너무 유명했다.
20대 후반의 1급 힐러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의료계 종사자들에게는 꽤 놀라운 일이었던 것.
중부 의료 협회 학회장이 쭈글쭈글한 노안에 웃음을 지으며 펠릭스를 음식 진열대에서부터 강제 분리시켰다.
학회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지인들은 모두 샴페인이나 와인 잔을 한 손에 들고 있었는데 잔을 든 손을 살짝 올렸다가 내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힐러 샤펠.”
“힐러 샤펠.”
“힐러 샤펠.”
조금 더 독창적인 인사는 없는 걸까. 마도 의학 종사자들의 인사는 모두 저런 식이다.
학회장이 펠릭스를 잡아끌면서 라스트 네임을 불렀기 때문에 그들은 샤펠이란 성을 알지만 펠릭스는 모른다.
“불청객 샤펠입니다.”
학회장은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손짓을 해서 펠릭스의 손에도 와인을 쥐여 주었다.
“힐러 샤펠은 제국의 자랑, 슐츠 의료 센터의 촉망받는 신진 일급 힐러입니다. 오늘 동 병원에 입원한 브라운 제슈비츠 공작 각하도 힐러 샤펠의 팀에서 맡고 있습니다.”
학회장의 정보력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오늘 학회에 참석한 센터 직원들의 입이 가벼운 것인지.
학회장은 세 명을 소개했다.
“이쪽은 중부 의료 학회 부회장이자 소비온 병원 진료 부원장이신 에센 선생일세.”
펠릭스는 처음 본 사람들의 별명을 외모로 정했다.
주름이 많은 학회장은 쭈글이로 당첨. 에센 선생은 얼굴에 버짐이 있으니 곰보.
“이쪽은 바레스 학파의 쉐이넌 씨.”
그는 손가락 끝에서 분홍색 빛으로 된 고유 문장(紋章)을 만들어 보였다. 바레스 학파의 식별 문장.
마법사들은 논쟁하는 족속이다.
- 마나는 어디에서 생성되어 어디로 가는가.
- 마나는 의지가 있는가.
- 마법 구현 원리는 어디에 기반을 두는가.
- 원소 마법과 비원소 마법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 정령술과 마법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고대 룬어는 누가 만든 것인가.
- 유사 인종과 드래곤의 마법은 어떻게 다른가.
그러나 기초 마법학을 연구하고 논쟁하는 이들이 주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남들을 의식하지는 않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다른 마법사들을 의식한다.
누가 더 빠른 캐스팅을 할 수 있는가.
누가 더 숙련된 솜씨로 술식을 풀어내는가.
누가 미해석 상태인 고대 룬어로도 추정 술식을 만들어 내어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합쳐······ 누가 가장 강한가!
마법 실력을 객관적으로 서열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력을 계량하려면 다른 모든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하나씩 비교할 수 있어야 하는 요인이 있어야 하지만 마나도, 인간도, 단수가 아니다.
바레스 학파는 마법을 1클래스부터 9클래스까지 나누고 각 단계의 마법사를 유저(User), 엑스퍼트(Expert), 마스터(Master)로 나누는 작업을 수백 년 동안 해 왔다.
모든 마법사를 27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일렬로 쭉 세워 보려는 그들의 노력은 초기에는 각광받았었다.
바레스 학파와 유사한 생각을 지니고 있던 모레인 학파는 마법진 술식의 구동 형식으로 마법을 1서클부터 9서클까지 나누는 비슷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모든 주문이 마법사의 심장 주위에 마나의 띠를 두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경쟁 대열에서 금방 밀려 버렸다.
오히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경험적인 난이도로 세상의 수없이 많은 주문을 서열 매겨, ‘이런 주문을 쓸 수 있으면 몇 클래스다.’라고 정의해 버리는 구분법이 더 일반화되었다.
이들의 구분법은 인간의 관료 체계와 상호 모방한 것이기도 해서 현재까지 지지 기반을 완전히 잃지는 않고 있었다.
강하고 구현하기 어려운 주문의 클래스는 높이면 그만이고, 이는 대륙 각처에 퍼져 있는 바레스 학파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10년에 한 번 하는 정기 모임에서 재검토되어 책자 형태로 중앙 대륙 전체에 배포된다.
바레스 학파의 구분법은 마나의 순도와 무독 시전 마법사가 실전에서 얼마나 유리한지, 같은 파이어 볼이라도 시전자에 의해 위력이 판이한 문제 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파의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오로지 그 편리성과 다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하고자 하는 호기심에 기반을 두어 다수설로 지지받고 있을 뿐이었다.
바레스 학파의 본부는 루펠 제국에 있는 백마탑이었다.
인근의 베일리 제국은 정령사와 성직자들이 마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지부만 설립되어 있을 뿐이지만, 제도 미리넨에 있는 백마탑은 대륙에서 가장 큰 마법사들의 거처.
쉐이넌은 그 백마탑에서 마도 의학을 연구하는 마법사이자 학자였다.
물론 펠릭스에게는 첫인상으로 결정된 별명, 닭트롤로 불릴 것이다. 쉐이넌은 닭 볏을 연상시키는 머리에 트롤처럼 쭉 빠진 팔다리를 가진 못생긴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이쪽은 내무부의 머크 경일세.”
머크의 별명을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으니까.
그는 뻐드렁니였다.
“여기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지. 그는 병원들의 성과를 평가해서 보조금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치는 관리라네.”
학회장은 바쁜 사람이었다. 소개가 끝나자 건배를 한 번 유도하고 바로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가야 했다.
펠릭스도 노땅들과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던 터라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잡다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다가 음식 진열대로 바로 복귀했다.
질보다는 양이다.
신조대로 음식을 쓸어 담던 펠릭스는 말이 안 되는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절대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연회장 입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접시에 가득 담은 음식들을 아쉬운 듯이 1세크 정도 쳐다본 펠릭스는 크리스털 홀을 나와서 좌우를 두리번거렸지만 그 사람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오감을 모은다.
디텍트 마나 패턴(Detect mana pattern).
놓친 사람의 마나 패턴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힐러의 기술은 아니지만 가까운 거리라면 초급 마법사도 시전할 수 있는 주문.
서열 매기기 좋아하는 바레스 학파는 디텍트 마나 패턴 주문을 능숙하게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를 2클래스 유저로 구분한다.
‘실패군.’
실종자는 가까운 거리에도 없었고 무엇보다 연회장 근처에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펠릭스는 주문을 끊고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무부 여름 세미나 축하 파티>
레드 드래곤 홀을 그냥 지나친 발걸음은 실버 드래곤 홀에서 멈춰 섰다.
<커프 세이지 군과 이사벨 슈타인홀츠 양 약혼 기념 무도회>
아름다운 마법 조명과 촛불의 조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춤추는 남녀들.
안으로 들어가려는 펠릭스는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초청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초청장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의료 학회장에서도 불청객이었던 그.
임기응변으로 해결했다.
“앗! 로이 경!”
입구에서 선별한 자만 들여보내던 호텔 가드는 펠릭스의 반가워하는 손끝을 따라 복도 끝을 바라보았지만 누가 로이 경인지 알 수 없었다.
연회장 밖에서 다섯 명의 젊은 청년 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만 보일 뿐이다.
“아는 분이 계시더라도 입장은 불가······ 엇?”
잠깐 사이에 불청객은 사라지고 없었다. 안으로 사라졌을 터.
호텔 가드는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불청객을 놔둘 수도 없어서 갈팡질팡하다가 다른 호텔 직원을 불러 자신의 자리를 맡겼다.
“잠시만 봐 주게.”
다라라라라라라라라 쿵츠츠 쿵츠츠.
다라라라라라라라라 쿵츠츠 쿵츠츠.
실버 드래곤 홀은 천장에 달린 마법 조명을 어떻게 청소, 관리하는지 궁금할 만큼 높은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약혼 축하 파티에 어울리는 경쾌한 현악단의 연주. 그 연주를 헛되이 만들지 않는 들뜬 분위기와 젊은이들의 담소와 춤.
942년산 와인은 영애의 약혼식이 아니었다면 평소에는 절대 내놓지 않았을 비장의 명품이었다. 가까운 손님들에게 한두 잔 권하는 것이 아닌 수십 병을 내놓은 것은 두고두고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되리라.
놀라운 미모의 그녀에게 용기 있는 몇 명의 청년 귀족들이 춤을 청했지만 냉랭한 반응만 이어지자 추가 후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피오르 공주는 산해진미라면 질리도록 보아 왔지만 942년산 와인에는 마음을 뺏겨 버렸다.
잔 안에 든 와인을 아껴 가면서 음미하던 즐거움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호텔 가드를 따돌리고 연회장에 난입한 불청객이 와인 잔을 뺏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셔서는 안 됩니다. 저와 같이 센터로 돌아가시죠.”
“무례한! 내 잔을 돌려 달라.”
“그런 늙은이 같은 말투는 젊은 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후작 영애의 예비 남편이라고 했더니 그냥 들여보내 주더군요.”
“바보스러운 소리 그만두고 내 잔이나 내놔.”
“하복부에 종양이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소량의 술은 피를 잘 돌게 해 주지.”
“오! 놀랍군요. 공주 마마의 개인 교사는 여러 가지 상식을 가르쳤지만 의학도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음주는 자체로 종양을 유발할 수 있고, 종양 제거술을 받은 환자는 최소 이 년 이상 음주가 금지되어 있거든요. 차라리 독약을 드시는 게 어때요?”
공주는 눈에서 힘을 풀었다. 얼음으로 조각한 것 같은 미녀상이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인다. 술기운으로 얼굴에 화색이 감도는 공주는 신분을 제외하고 말하더라도 대단한 미녀였다.
“내 친구다.”
“네?”
“이사벨은 몇 없는 친구다.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친구의 약혼식에 병원의 프로토스인가 어쩌고 따위를 지키려고 빠질 수는 없다. 끝나면 병원으로 돌아갈 테니 입 다물고 그 잔이나 내놔.”
“프로토스가 아니라 프로토콜입니다. 이혼하면 두 번 약혼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때 건강하게 참여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질 유머는 시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공주는 황족 앞에서 이렇게 무례한 인간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내가 단지 환자로만 보이는 거군. ······그렇지, 난 환자일 뿐이지.’
피오르 공주는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마시던 좋은 술을 빼앗겨서가 아닌, 상쾌함이 사라졌을 때의 불쾌감.
후텁지근한 여름날 목욕하고 나서 몸에 남아 있던 수분이 끈적이는 땀으로 바뀔 때의 불쾌감.
실제로 그녀의 등줄기에는 약간의 땀이 배고 있었다.
그때 목적성을 뚜렷하게 띠고 있는 두 명이 공주와 펠릭스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공주 앞에까지 온 두 남자는 서로 얼굴을 잠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호텔 가드는 어색한 기침을 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언권을 먼저 얻은 것은 잘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공주께 치근대는 것이냐!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펠릭스는 공주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징후들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이 녀석이!”
휘청.
청년은 펠릭스의 뒷덜미를 낚아채려 했지만 옆으로 살짝 비켜선 회피 동작 때문에 헛손질을 하고 균형을 잃을 뻔했다.
호텔 가드가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놔!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나, 린켈 자작이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마!”
린켈 자작은 결투라도 청할 태세였다. 호텔 가드는 본래 이 불청객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자작의 분노에 휘말려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분노는 펠릭스가 손을 뻗어 공주의 목덜미를 짚자 극에 달했다.
“린켈 자작, 그는 내 주치의니 그만 물러서시오.”
공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린켈 자작과 호텔 가드는 치한 불법 침입자를 끌어낼 명분을 잃어버렸다.
공주는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돌아가시오.”
그들이 물러나자 공주는 펠릭스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조금 후면 내 친구가 단장을 마치고 나올 거야. 그때까지는 조용히 해.”
‘미녀의 뭔가 갈구하는 눈빛은 정말 부담스러워.’
“그리고 내 잔도 내놔. 내놓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 버릴 테니까.”
한숨.
미녀의 유혹을 제외하면 모든 것에 강한 것이 힐러이려니.
펠릭스의 왼손이 공주의 머리에 얹히고, 오른손의 마법진에서 하늘의 일부분을 뜯어서 홀 안에 펼쳐 놓은 듯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반나절 만에 다시 행해지는 얼리비에이션(Alleviation, 고통 억제) 주문.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린 린켈 자작과 호텔 경비뿐 아니라 근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공주와 힐러에게 쏠린다.
마나는 무심하게 흐른다.
자연과의 공명.
유리안 호텔이 자랑하는 현악 연주단의 연주도 잔잔하게 흐른다.
주변 대기와 공명한다.
워낙 큰 홀인지라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계속 춤추는 남녀들도 많았지만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벗어난 신비로운 광경에 몰입한다.
선율이 급류를 타기 시작한다.
현악단의 지휘자.
사람들은 그런 착각에 휩싸인다.
평범한 외모의 평범한 젊은이지만 마법에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펠릭스는 따가운 시선에 보답하고자 팬 서비스를 한다.
“치유하는 손의 의지로 명할지니, 마나에 순응할지어다. 얼리비에이션(Alleviation)!”
“저 사람 힐러인가 봐!”
“와!”
“호텔 직원인가 보지?”
“피오르 공주님이 희미하게 웃고 있어!”
“무독 시전이 아닌 걸 보니 이급 힐러인가 보네.”
불끈!
팬 서비스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들!
찬란한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손을 거두자 거짓말처럼 음악도 멈춘다.
손님들은 공주와 힐러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질문 꾸러미가 수십 가지였지만 하나도 풀어 놓지 못했다.
빠빠빠빰······!
연미복을 입은 사회자가 단상에 오르자 모든 촛불과 조명이 다 꺼지고 단상만 밝아졌다.
“오늘의 주인공은 정말 어울리는 미녀와 야수입니다! 이사벨 슈타인홀츠 양! 그리고 커프 세이지 군!”
짝짝짝짝짝!
사회자의 익살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약혼식이 끝나고 무도회 복장으로 재단장한 예비 신부는 청초한 한 송이 꽃과 같은 미녀, 그리고 예비 신랑은 산적의 외모.
하객들은 딸을 내놓아라! 하면서 슈타인홀츠 후작을 위협하는 신랑의 산적 변장을 상상했다.
사회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예비 신랑 신부가 단상으로 걸어오는 길에 걸음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현악단이 켜 낸 음표들이 페어리처럼 천장을 떠돌다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세상의 불행을 모두 잊은 듯한 표정의 두 사람이 단상까지 돌아왔을 때, 음악이 멈추고 모든 조명이 돌아왔다.
사회자는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한마디 할 것을 종용하는 몸짓을 했다.
음성 증폭 주문이 걸린 고가의 마법 아이템, 마나 충전식 마이크를 손에 든 커프 세이지 백작은 간단하게 사례를 했다.
“많이 드십시오!”
“하하하!”
“예비 신랑 멋지다!”
세이지 백작은 험악한 인상을 한 방에 역전시키고 나서 마이크를 이사벨에게 넘겼다. 이사벨은 한사코 말하기 부끄럽다는 몸짓을 하다가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하객 여러분 모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제 친구이자 공주님이신 피오르 루펠 마마는 아직 독신이니 꼭 좋은 짝을 찾기 바랍니다!”
“와아!”
“공주님 만세!”
공주님 만세라니.
피오르 공주는 잘 보여 주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942년산 와인이 든 잔을 입술에 살짝 갖다 댄 다음 머리 위로 들었다.
사회자는 재빨리 이사벨의 마이크를 받아 외쳤다.
“약혼을 축하하는 하객 전체 건배를 피오르 공주님께서 하자고 하십니다! 모든 하객들은 건배!”
“건배!”
“공주님 만세!”
“세이지 백작 만세!”
“이사벨 후작 영애 만세!”
“와하하하!”
하객들은 세이지 백작의 당부를 충실하게 이행하기 시작했다. 음식과 술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호텔 직원들이 바빠졌다.
어떤 웨이터는 한 손에 여러 개의 쟁반을 들고 가는 묘기를 보여 줘서 근처 귀족들의 작은 박수를 받아 내기도 했다.
사람들의 좁은 사이에서 음료 쟁반을 들고 시중들던 여급이 갑자기 몸을 튼 린켈 자작과 부딪치는 작은 소동도 있었지만 자작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지나갔다.
‘모처럼 흥에 겨운 파티군. 눈도장을 찍기 위한 늙은 귀족들보다는 훨씬 낫지. 린켈 자작도 급한 성미긴 해도 나쁜 위인은 아닌 듯하고. 아니면 나처럼 여성에게만 너그럽던가.’
펠릭스는 슬슬 돌아가기 위해 공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와인을 음미하면서 입구 쪽을 바라보던 공주의 표정에서 엷은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엷은 미소에서 무표정으로,
초점이 사그라지며,
발작이 시작되었다.
***
슐츠 의료 센터 귀빈실에 입원하는 환자는 두 명을 동행할 수 있다. 보호자 혹은 간병인 한 명과 호위 한 명이다.
보통의 병원이라면 무장한 호위가 병실에 머무른다는 비상식이 용납될 리 없지만 귀빈실에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입원해 있다. 암살, 납치의 위협이 있는 것이다.
의료 센터 설립 초창기에는 무기의 반입만이 금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하나 마나 한 조치였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 정도가 되면 약간의 준비만으로 의료 센터 전체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정령사나 소환술사가 뭐라도 불러내면 쑥대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기 반입만 금지하던 조항은 사문화되었고 호위를 허용할 것이냐 전면 금지할 것이냐에 대한 토론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전(前) 제국 안전 보장국장 마커스 프레드릭 경이었다.
실질적인 효과는 어차피 없다. 그렇다면, 보안 책임 일부를 귀빈실 입원 환자에게 돌린다.
의료 센터는 기본적인 보안 체계를 유지하고 호위는 일몰 시각 이후 귀빈실 밖을 출입할 수 없다.
의료 센터는 귀빈실 입원 환자 모두에게 서약서를 받는다.
- 샘 피츠버그, “슐츠 의료 센터 이야기”, p56-57
“동의서는 결국 받아 내지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공주의 시녀와 호위 기사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다. 공주는 친구의 약혼식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 모양이다. 완전히 믿고 있다가 수면제가 탄 물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것이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지만 퇴근 후 다시 의료 센터에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은 전혀 없었다.
버몬 경은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의 퇴근 시간은 나이트 가드들만이 안다. 그는 수련의들이 나오는 시간이 출근하고 당직을 제외한 모든 의료진들이 집에 간 후에 퇴근한다.
힐러로서도 출중한 그는 부원장과 원무과장까지 겸직하고 있음에도 부친상을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하루도 결근한 날이 없었다.
작년, 상중에도 하루에 30미누씩 병원의 대소사를 모두 보고받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기침 한 번 하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
빅 보스 버몬 경은 일 중독자들이 바글바글한 의료 센터에서도 과연 빅 보스였다.
버몬 경의 사무실에는 담당 의료진이 모두 모여 있었다.
주치의 마인 트루퍼스, 힐러 펠릭스 샤펠, 수련의 제이나 로즈마리.
트루퍼스 선생은 유능한 의사의 표본이다.
- 의료 아카데미 수석 졸업.
- 재학 중 의사 면허 취득.
- 졸업과 동시에 미리넨 제1병원에서 수련의 과정.
- 군의(軍醫)로 참전.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슐츠 의료 센터에 스카우트.
트루퍼스 선생은 수련의에게 차트 달라는 소리를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시간이 있는 사람이 아무나 가지고 오면 될 것 아니냐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음에 수련의들은 차트를 찾느라 부산을 떨기 십상이다.
“검사 결과 중 두 가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주치의가 운을 떼었다.
“하복부 종양은 악성인 것 같습니다. 힐러 샤펠의 보고에 따르면 한 잔 정도의 와인을 복용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발작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얼리비에이션(Alleviation, 고통 억제) 주문을 미리 재시전했다고 하니 통증이 유발한 실신도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혈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이나는 아직 수련의 2년 차지만 실력은 이미 3, 4년 차에 못지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녀는 펠릭스 샤펠을 깨우는 능력을 갖춘 유일한 수련의였기 때문에 의료 센터의 주요 인재 중 하나였다. 본인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제이나는 말했다.
“오전에 힐러 샤펠이 머리 근처에 직접 접촉 국부 마나 스캔을 해 본 바로 적어도 머리 쪽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종양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는 국부 스캔만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혈전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전신 스캔으로도 혈전의 위치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만약 혈전이 머리 쪽으로 향한다면······ 공주는 십 세크 이내에 사망합니다.”
트루퍼스 선생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는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혈전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공주는 의식불명이고 동의서를 받아 낼 방법도 없습니다. 그녀의 보호자는······ 황제 폐하니까요.”
버몬 경은 중요한 결정을 수도 없이 해 왔다.
“혈전이 생기는 체계를 약물로 막아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트루퍼스 선생은 제이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수련의가 제대로 아는지를 확인하는 교육 과정의 하나였다.
눈빛을 받은 제이나는 대답했다.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혈전 생성을 막아 내는 약물은 아직 제국 보건부에서 정신 승인이 나지 않은 실험적인 약물들입니다. 환자의 사망이 확실시될 때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고 쓸 수는 있지만 지금은 사망할지 여부도 확진하기 어렵고 보호자의 동의서를 얻기도 어렵습니다. 본원에 있는 혈전 용해제는 아직 임상 실험이 끝나지 않아 실제로 혈전이 있다고 해도 완전히 녹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뿐더러······.”
버몬 경이 그 뒤를 담담히 이었다.
“혈전이 없다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겠지. 예상되는 부작용은 무엇인가?”
트루퍼스 선생이 대신 대답했다.
“혈액에 직접 작용하는 약물은 마도 의학에서도 연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임상 실험뿐 아니라 임상 적용이 된 지 수년이 지나야 신뢰할 만한 통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은 모두가 다 아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선뜻 꺼내지 못하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펠릭스 샤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거죠.”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최종 결정권자는 버몬 경. 그의 입이 열렸다.
“보호자의 동의를 얻는다.”
펠릭스는 혀를 쏙 빼어 물었다.
“에······ 황제의 동의를요?”
“그렇다.”
“어떻게?”
“마법 통신을 쓴다.”
장거리 텔레포트는 바레스 학파의 구분에 따르면 8클래스 이상의 고위 마법이다. 드래곤이나 하이 엘프라면 모를까 장거리 텔레포트 주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현세에 없다.
제도 미리넨까지 달려가는 것은 공주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
유일한 연락 방법은 군사 목적으로 개발된 장거리 마법 통신뿐.
그러나 슐츠 의료 센터가 있는 유리안 백작령에서 미리넨까지 통신을 연결하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가 길어질수록 대기의 간섭을 이겨 내고자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는 것은 마법의 상식.
평범한 실력의 마법사만으로는 장거리 마법 통신을 유지할 수 없다. 고가의 마정석(魔精石)이 필요할 뿐더러 대응 마법진이 양쪽에 구축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마정석이 필요 없는 고위 마법사는 통신 마법진 앞에 죽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결국 슐츠 의료 센터에 그러한 마법진이 구축되어 있을 리는 없다.
근처에 통신 마법진이 설치된 대형 군(軍) 기지도 없다.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을 만한 곳, 운용 가능한 고위 마법사들이 있을 만한 곳.
그곳은······.
3장 퍼미션(Permission, 동의서)
마법사 길드 지부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존한다.
마나의 부름을 느껴 마법사가 된 자들.
그들의 두뇌에는 뇌척수액(CSF) 대신 호기심의 마나가 흐른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마법사의 일상은 수련과 실험이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재료로 자주 들어가는 미스릴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귀하다. 마법사들은 호기심을 먹고 사는 종족이지만 그들의 실험에는 돈이 필요하다.
몇몇 공인 마법사 길드에게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도 일반인들의 생각에는 결코 적지 않지만 길드 입장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
이 재정을 메우려고 마법사 길드에서는 유료로 마법적 의뢰를 받아 돈을 번다. 마법 물품의 제작이 가장 기본적이고 용병 길드의 영역인 몬스터 퇴치까지도 영역을 넓혔다.
결국, 마법사들 대다수가 은자(隱者)가 되어 세상을 등졌지만 돈벌이를 위해 세상과 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 러니 홉킨스, “마법사, 성직자, 용병들의 심리학”, p92-93
밤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달린 인마(人馬)는 유리안 백작령을 수십 년간 휩쓸어 온 개발 바람과는 무관해 보이는 곳에 멈추었다.
베레트산.
깎아지른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이 산의 초입에는 자연의 솜씨인지 인간의 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건물이 주위 산세와 어울려 기이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백마탑 바이세르 지부였다.
바이세르 산맥은 절반 이상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미답 상태이다. 다양한 종의 몬스터가 사는 이 지역에서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어지간한 사람들이 아니다.
바레스 학파의 구분법상 4클래스 마스터가 쓰는 파이어 볼 한 방이면 전장에서 수십 단위의 병사를 그대로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바이세르 지부는 슐츠 의료 기관에서 말로 달려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이곳까지 밤길을 재촉해 온 것은 버몬 경과 트루퍼스 선생이었다.
총책임자 버몬 경이 공주의 보호자인 황제께 직소(直訴)하는 것은 당연했고 트루퍼스 선생은 담당의로서 소견을 밝히려고 동행한 것이다.
펠릭스가 남은 이유도 당연했다.
의식불명 상태인 공주의 상세가 악화된다면 수련의보다는 주치의가 더 도움이 되겠지만, 응급 처치는 주치의보다 힐러가 더 빠를 수 있었다.
“마법 의뢰가 있소!”
늦은 시간이었기에 길드 민원실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사정이 급한지라 트루퍼스 선생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려 댔다. 거의 5미누가 지나서야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성이 문을 열어 주었다.
“마법 의뢰는 일몰 시각까지만 받습니다.”
자기 할 말만 마친 여자는 문을 다시 닫으려 했다.
“잠깐! 황족의 목숨이 걸린 문제요!”
문이 다시 3핸드 정도 열렸다.
“황족이 오늘 밤에 죽기라도 할까 봐?”
다시 닫히는 문.
“문을 열지 않으면 당신은 방조죄로 최소한 처형이다.”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일몰 시각 이후에는 대문에 사일런스(Silence, 침묵) 주문이라도 걸어 두어야겠어. 뜬금없이 무슨 방조죄로 처형이라니.”
여자는 툴툴거리면서 두 남자를 민원인 의자로 안내하고 접수대에 앉았다.
“거기 앞에 의뢰 서류를 작성하세요.”
버몬 경은 서류를 보지도 않았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황궁 마법 부서에 긴급 통신을 원한다. 물론 규칙은 알고 있으나 황족의 생명이 달린 일이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다!”
버몬 경의 일갈.
의뢰보다는 명령에 가깝다.
그럼에도 여자는 비꼬거나 반발하지 못했다. 억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항거하지 못할 힘이 깃들었던 까닭이었다.
끼이익.
문을 연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접수대 오른쪽의 나무 문이 저절로 열렸다. 접수원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였다.
“마법 의뢰가 가치 있음을 증명하시길.”
턱.
촤라라라라.
접수원은 눈앞에 놓인 가죽 자루를 통째로 책상에 쏟아 금액을 헤아렸다.
“마법 의뢰가 가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가져가시고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자는 모든 말을 ‘다’로 끝내는 딱딱한 의뢰자에게 작은 복수를 하려 했다. 책상 위의 금화들을 담지 않은 채 서류를 들여다보는 척했다.
하지만 버몬 경은 금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문 안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트루퍼스 선생도 의료 센터에서는 고상한 주치의지만 버몬 경과 함께 하니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자꾸만 하게 된다.
그는 버몬 경과 여자를 고개를 좌우로 돌려 두 번씩 쳐다봤지만 사실은 자신이 이런 것까지 뒤처리를 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 중이었다.
“험험.”
버몬 경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버몬 경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은 온통 어둠이었다.
츠팟.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공간에 아주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버몬 경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내리막길 계단. 사물을 간신히 분간할 정도라지만 그나마 보이는 곳은 중간까지일 뿐이고 무저갱의 아가리처럼 암흑만이 도사린 계단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트루퍼스 선생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안내문도 없었다.
터벅터벅.
몇 걸음을 옮기자 뒤쪽의 불이 꺼지고 앞쪽의 불이 켜지면서 계단을 밝혔다. 마법사 길드 지부에 온 것은 처음이라 그는 반쯤 즐기고 있었다.
‘이곳이 미탐사 던전이었다면 불안에 떨었겠지. 안전이 보장된 스릴은 유희 아닌가.’
계단은 몇 걸음 만에 끝났다.
아니, 계단은 아래쪽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지만 눈앞에 손잡이가 달린 나무 문이 홀연 나타났다.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는 곳이다.’
손잡이의 감촉은 진짜였다.
슈우우웅.
갑자기 밝아진 불빛에 트루퍼스 선생은 눈앞의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지부에 통신용 마정석 재고가 없었다면 통신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말은 있다는 것이다. 대가도 충분할 것이다.”
“참 재미없는 분이군요. 그렇게 모든 말을 ‘다’로 끝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궁정 마법부에 당직 마법사가 있기를 바라야겠군요.”
“앗!”
시력이 회복된 트루퍼스 선생은 체면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통신 마법진을 구동시키는 주문을 영창하는 중년의 여마법사. 그녀는 바로 접수원이었다.
접수원, 아니, 여마법사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어 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트루퍼스 선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시동어로 통신 마법을 완성했다.
“커넥트(Connect, 연결).”
통신 마법진 정중앙에 꽂은 마정석 두 개가 빛을 내며 점멸한다.
여마법사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재미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트루퍼스 선생에게 말을 걸었다.
“로라 섀런입니다. 길드 지침에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소개를 하게 되어 있지만 워낙에 급한 사안이라 실례했어요.”
“슐츠 의료 센터의 의사 마인 트루퍼스입니다. 이쪽은 부원장 시릴 버몬 경이십니다.”
마정석의 깜빡임은 규칙적이었다.
트루퍼스 선생은 의사답게 생각했다.
‘빈맥(頻脈, 빠른 맥박)이군.’
“대응 마법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어요. 미리넨에 있는 본부였다면 즉시 응답했겠지만 황궁의 마법사들이 우리 지부의 고유 식별 파장을 확인하고 연결될 때까지 이삼 미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녀는 서랍에서 종이 뭉치 같은 것을 꺼내어 한 장을 찢어 내고는 숫자들을 쓰며 말을 이었다.
“이급 마정석이 두 개 들어갔어요. 높으신 분과 연결하는 것 같으니 단방향 통신으로는 아무래도 불편하겠죠. 듣고 말하는 것을 동시에 하려면 송신용 마력과 수신용 마력용으로 한 개씩 들어가죠. 여기, 명세서.”
- 의뢰 내역 : 황궁과의 쌍방향 마법 통신
- 2급 마정석 2개 : 4골드
- 4클래스 마법사 인건비 : 50실버
- 길드 접수비, 수수료 : 50실버
- 세금 : 면세
- 합계 = 5골드
- 발행인 : 바이세르 지부 마법사 로라 섀런 (서명)
아직 마정석이 깜빡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추가 설명을 했다.
“미리넨에 가면 이급 마정석을 일 골드 오십 실버 정도에 구할 수 있지만 여기는 궁벽한 산골이니까요. 마법사 길드는 면세니 부담하실 추가 비용은 없어요. 통신 마법을 의뢰자들은 마정석이 고가니만큼 왜 두 개가 들어가는지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법 용어로 자세한 설명을 드릴까요?”
트루퍼스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자들도 상세한 설명을 원할 때가 많지만 제가 의학 용어를 늘어놓으면 공용어로 해 달라고 하곤 합니다.”
“저분은 길드 규칙과 의뢰 가격을 아주 잘 알고 계신 것 같으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네요. 자루 안에 들어 있던 금액은 정확히 오 골드였어요. 자루는 꽤 비싼 것 같으니 돌려 드리죠.”
“통신 마법 두세 번만 하면 전문의 한 달 급료는 적자 나겠군요.”
“그 정도면 잘 버시네요. 마정석을 쓰지 않고 순수 인력으로 하는 곳도 있다는데 비용은 도리어 더 비싸죠.”
우웅. 우웅.
마정석은 점멸을 멈추고 빛나고 있었다.
“연결되었어요. 마정석이 마나를 공급해 주고 있으니 대화 내용이 기밀이라면 저는 비켜 드리죠. 마법적 조언이 필요하시면 빨간색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지지직······.
우우우우웅······.
장거리 마법 통신은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여기는 궁정 마법부의 로밀로 밀러입니다. 백마탑 바이세르 지부에서 마법 통신을 연결한 분은 누구십니까?”
“슐츠 의료 센터 부원장, 시릴 버몬 백작이다. 피오르 공주 마마의 환후 때문에 황제 폐하와 즉시 연결을 원한다. 침소에 드실 시간인 것은 알고 있으나 초긴급 사안이다.”
“잠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영상은 전송되지 않았다.
조금 무료해진 트루퍼스 경은 손가락 끝으로 무릎을 두드리면서 전문의 소견을 황제 폐하께 어떻게 아뢸 것인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몬 경은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의자에 앉지도 않고 꼿꼿하게 서서 응답을 기다렸다.
지지직······.
우우우우웅······.
“황궁의 로밀로 밀러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침소에 들지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긴급한 사정을 아뢰니 소회의실로 연결하라 이르셨습니다. 곧 연결하겠습니다.”
“준비되었다.”
지이이이이잉······.
마정석이 다시 점멸하며 약간 긴 잡음이 끼어들었다. 황제와 연결이 된 것이다.
“만천하의 주인 되시며 라일의 검이신 황제 폐하께 소신(小臣) 시릴 버몬 백작이 문안드리옵니다.”
“격식은 그로 족하노라.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이곳에 주치의 마인 트로퍼스 선생이 동석해 있사옵니다.”
“고하라.”
루펠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저음의 묵직한 음성은 중앙 대륙의 사분지 일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답게 듣는 이를 절로 위축시키는 것이다.
트루퍼스 선생은 바짝 긴장하면서도 실수 없이 공주의 상세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공주 본인의 치부에 직접 손을 대야 하는 직접 접촉 마나 스캔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 진단이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어 혈전 발생 가능성을 언급하고 관련된 의료적 소견을 아뢰었다.
묵묵히 끝까지 들은 엘프리츠 루펠 3세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황자 시절부터 결단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신약(新藥) 사용을 불허한다. 진단 목적의 직접 접촉을 허락하노라. 짐이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는가.”
“없사옵니다. 라일의 검께 영광을.”
루펠 제국은 주신(主神) 라일을 국교(國敎)로 정하고 종교의 수장을 대주교(大主敎)라 칭하였다.
또한 주신 라일을 믿는 신앙을 가진 제국민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스스로 공식 석상에서 라일의 검이라 칭하여 제국민의 심리적인 지지를 무의식중에 얻으려 해 왔다.
버몬 경은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돌아서며 말했다.
“돌아간다.”
오늘 밤에는 시간이 미스릴보다 귀하다.
트루퍼스 선생은 나가는 길이 궁금했지만 버몬 경은 망설이지 않고 빨간 줄을 당겨 마법사를 불러냈다. 오늘밤에는 평소의 침착함의 대명사답지 않게 어째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푸르릉.
두 기의 준마는 다시 어둠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4장 호기심을 어쩌라고
“공주가 발작 증세를 보였을 때 그 소동을 어떻게 감당했어요?”
제이나와 펠릭스는 직원 휴게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공주의 상세는 담당 간호사가 체크하고 있고 이 시간에 응급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힐러도 마법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사일런스 주문으로 소동을 막고 호텔 직원에게 이송을 부탁했지.”
“공주도 참 대단하네요. 수면제는 어디에서 났을까요?”
“알면서 뭘 물어. 사용량만 지키면 부작용이 거의 없는 수면제 정도야 처방전 없이도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
“시녀는 보통 사람이겠지만 로열 가드쯤 되는 사람도 수면제에 그리 쉽게 당하다니.”
“남들이 줬다면 안 당했을걸. 믿는 사람이니까 당한 거지.”
“로열 가드도 별것 아닌가 봐요.”
“별게 아니긴! 로열 가드는 근위대 중에서도 초엘리트 기사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나도 한때는 로열 가드가 꿈이었어.”
“워~ 정말로요?”
“이래 뵈도 루츠 검술 학교 수료생이라고.”
“풉. 말도 안 돼.”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하네.”
“킥킥. 어, 근데 농담이 아닌 표정이네요?”
“내 별명이 진실을 말하는 손이라는 거 몰라? 트루쓰텔링 핸즈(Truth-telling hands).”
“트렘블링 핸즈(Trembling hands, 수전증)라면 그럴싸하네요, 풉!”
“고교 과정을 두 번 마쳤어. 의료 아카데미를 가기 위해 마법 학교를 다시 들어갔지.”
“이분들은 언제쯤 오시려나? 내일도 새벽부터 바쁠 텐데. 오늘은 좀 푹 쉴 줄 알았더니 응급 상황이라니······ 또 밤새고 일하게 생겼네요.”
“좀 자 둬.”
“지금 자면 못 일어나요.”
“그래도 자야 해.”
펠릭스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로열 가드는 우수한 인재지만 믿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세엣······ 두울······ 하나······ 뿅!”
제이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졸음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펠릭스는 그녀를 휴게실 의자에 눕히면서 중얼거렸다.
“푹 자야 내가 마음 놓고 사고를 치지. 이제 가 볼까?”
펠릭스는 백마탑 바이세르 지부로 향한 버몬 경들을 애초에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스스로의 의문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혈전이 있다면 공주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어디로 향하든 핏덩어리는 치명적이다.
‘난 급료 외의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피오르 공주의 병실 안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녀와 로열 가드는 공주가 직접 재웠고 공주는 담당 간호사가 재웠다. 담당 간호사는······ 펠릭스가 재웠다.
동일한 수법.
어이, 수고하는군!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걸? 긴 밤을 새우려면 따뜻한 차 한 잔이 필요할 것 같아서 하나 더 가져왔어. 맛있지? 꿈속에서 더 즐기라고.
간호사를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뉘여 놓고 보니 생물학적으로 여성만 넷. 넷 다 평균 이상의 미모를 지닌 젊은 여성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 젊은 늑대 한 마리가 홀로 놓인 꼴이었다.
“으······ 안 돼! 안 돼! 저리 가!”
공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 안 이곳저곳을 도망 다녔다. 지척에 선 펠릭스를 못 볼 리가 없었건만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쉰다.
“꺼져!”
풀린 눈동자.
식은땀.
공포에 질린 모습.
공주는 어떤 질환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보이고 있었지만 펠릭스는 조금 다른 이유로 식은땀을 흘렸다.
공주를 안정시키는 것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다만, 그 전에 해결할 일이 있었다.
펠릭스는 문을 조용히 열고 복도로 나왔다.
“힐러 샤펠, 무슨 일이 있습니까?”
펠릭스는 거짓말을 했다.
“나이트 가드 뷰렛 소위. 피오르 공주 마마가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곧 다시 잠들 것입니다.”
“잠깐 확인하겠습니다.”
나이트 가드가 문을 연다면 간호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러면 문제가 커진다.
‘두 명을 재웠는데 세 명이 대수일까.’
슐츠 의료 센터의 귀빈 병실을 담당하는 나이트 가드는 아무나 뽑지 않았다.
이는 마법사 길드에서 설치한 보안 마법진을 뚫고 온 침입자를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로 병실 내에 머무르는 환자의 호위 기사가 더 위험했다.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서로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거나 적대 국가의 고관을 암살하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지간한 사람을 고용한다 해도 귀빈 환자의 호위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진압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가령 피오르 공주의 호위만 해도 제국 최정예 기사단 로열 가드의 일원이었다.
그녀와 일대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용병을 고용하려면 제국의 용병 길드를 모두 뒤져도 열 명이 넘지 않는 특급 용병이라야 할 것이고, 그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슐츠 의료 센터는 권력의 힘을 빌었다.
그 결과 제국군에서 최정예 요원을 교대로 파견하게 되었다.
뷰렛 소위는 어려서부터 기사 수업을 받고 마나의 길에 눈을 뜬 제국군의 인재. 나이는 젊지만 전투 마법사와의 대련도 수없이 겪은 베테랑이다.
문을 열고 두 걸음 들어선 순간 그는 한눈에 정황을 파악해 냈다.
간호사가 아무리 피곤해도 두 다리 뻗고 침대에서 잠들 리가 없다. 공주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펠릭스는 뒤에서 슬립(Sleep) 주문을 무독 시전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문을 완성하기 직전에, 뷰렛 소위가 나이트 가드들에게 지급되는 유일한 무기인 곤봉을 뽑아 들고 뒤로 홱 돌아섰다.
군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의료진이었을지 몰라도, 힐러 샤펠은 이제 적으로 인식되었다. 사정은 제압해 놓고 나중에 들어도 될 일.
슈욱!
뷰렛 소위의 공격은 직선적이다. 펠릭스의 몸통을 노리고 최단거리로 찔러 온다.
‘명치!’
마법사는 움직임이 둔하다?
펠릭스 샤펠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좁은 병실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뷰렛 소위의 일격을 피한 그는 주문 하나를 빠르게 완성했다.
‘사운드프루핑(Soundproofing, 음파 차단).’
뷰렛 소위의 교과서적인 찌르기는 나이트 가드들이 앞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호각을 불어 동료를 불러오기 위한 속임수였다.
삐익! 삐익!
뷰렛 소위는 3~4미누 안에 동료가 달려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운드프루핑 주문은 마나 배리어로 3차원 공간을 통제하여, 내부는 간섭하지 않고 외부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만 막는다.
뷰렛 소위는 시간만 벌면 되는 입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방어를 굳건히 하면서 주문의 완성만 방해하는 단편적인 공격으로 일관했다.
제압을 하면 좋고, 3~4미누만 버티면 동료가 올 테니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진다 해도 동료가 들이닥치면 상황 종료. 임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뷰렛 소위의 느긋한 태도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펠릭스 샤펠을 압박하고 있었다.
‘나이트 가드의 순찰 주기는 삼십 미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잖아!’
주문을 완성하기는커녕 딴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 빠른 공격.
후웅!
곤봉이 공기를 가르며 큰 원호를 그렸다.
뷰렛 소위뿐 아니라 펠릭스도 이 소란을 오래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음파 차단을 해 두었으면 이런 추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에 펠릭스는 자책하고 있었다.
좁은 병실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주문을 사용할 수도 없었고, 이래서야 기사와 싸우면서 스스로 두 손을 묶어 버린 격이 아닌가.
‘에어 실드(Air shield), B 타입.’
텅!
곤봉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둔기처럼 후려치는 물리 공격에 특화된 방어 주문을 뚫지 못했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묘한 상황이었다. 먼저 방에 들어간 뷰렛 소위는 공주와 간호사가 잠든 침대를 몸으로 막는 위치였다. 문 쪽에 서 있는 펠릭스와 그 사이에는 1페텀(fatham, 양팔을 벌린 길이=1.8m)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뷰렛 소위는 그 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기사급의 단련된 육체는 1클래스 마법인 매직 미사일에 맞아도 대단한 손상이 없지만 공주나 간호사는 달랐다. 내상을 입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제길, 힐러 샤펠이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거지. 어린 공주에게 정적이 있을 리도 없는데.’
펠릭스는 극악무도한 테러범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피하면 공주가 맞을 주문을 쓴다는 것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 아니, 나아가 공주를 인질로 잡은 것 아닐까.
뷰렛 소위에게는 1미누가 1년 같았다.
“아슬렌 학파에서 무슨 일로 공주를 시해하려 하는 거지!”
“뭐라고?”
아무 말도 없이 공격만 퍼붓던 뷰렛이 뜬금없이 마법사 길드를 들먹이자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신체 단련으로 마나의 길을 배워 가는 아슬렌 학파에서 자객이라도 보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뷰렛 소위였다.
“아니, 상관없겠지.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물러난다면 정상을 참작할 수 있다!”
펠릭스는 냉소를 머금고 비아냥거렸다.
“착각도 유분수지, 아주 지랄을 해요.”
회합이 멈추고 말을 주고받는 데는 둘 다 꿍꿍이가 있었다.
뷰렛 소위는 동료가 달려올 시간을 버는 것이었고, 펠릭스는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마나를 움직여 주문을 완성했다.
분명히 시간은 뷰렛 소위의 편이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빨리 손을 들어 주지는 못했다. 다음 순찰은 25미누 이상 남아 있었다.
“난 공주를 치료하려 한 것뿐.”
“웃기지 마라! 간호사는 왜 제압되어 있는가! 호위도 네가 해친 것이 아닌가?”
“아주 착각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시네요.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말하면서 소리는 왜 고래고래 지르시나? 누가 듣고 달려오라고? 미안하지만 이 방의 음파는 모두 차단됐다고.”
흠칫.
뷰렛 소위는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던 것이 무위로 돌아가자 다시 곤봉을 휘두르려고 했다.
“이런 교활한!”
“이미 늦었다고 친구. 해명은 나중에 할 테니 일단 잠들어!”
‘파워 워드 슬립(Power word sleep, 절대 명령: 수면)!’
퍽! 철푸덕!
소위는 달려오던 관성으로 문짝에 부딪혀 넘어진 자세 그대로 꿈나라로 직행했다.
드래곤의 용언(龍言)은 자체로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용언의 권능이 신이 부여한 신력의 일종인지 마법의 일종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용언의 권능을 인간의 것으로 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고 마침내 대마법사 호안 그린의 시대에 이르러 권능 언령, 소위 파워 워드(Power word, 절대 명령) 계열의 주문이 개발되었다.
드래곤 고유의 것이었던 파워 워드 주문은 마법 역사에서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마나에 시전자의 의지를 담는 술식의 참신함은 그때까지의 마법학 이론에서 가능성만 언급되었을 뿐 실용화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혹자는 대마법사 호안 그린이 드래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법학 이론에 정통한 학자들도 일반 주문과 파워 워드 주문의 차이점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내지 못했다. 마법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질문하면 알아보기도 어려운 수식을 칠판 가득히 적어 놓고 그 수식들의 연관성을 증명해 내 가는 방법만 알려 주기 일쑤였다.
그러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파워 워드 주문은 시전이 훨씬 복잡하지만 같은 이름의 주문보다 위력이나 성공률이 높다.
실전에서는 복잡한 기초 이론보다 이쪽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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