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만통문 [E]

만통문 1

2017.10.02 조회 511 추천 3


 만통문 1권
 도둑과 미녀(마녀?)
 
 
 1장 방문객
 
 
 1
 
 
 “흠흠···”
 “······.”
 죽립을 깊게 눌러쓴 중년인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탁자 위에 놓인 용정차는 김과 함께 은은한 향기를 모옥 가득히 뿜어내고 있었다.
 그와 마주앉은 악비천(岳飛天)은 입을 있는대로 벌리며 제 딴에는 있는 호의를 다 보여준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슴지 말고 말씀해 보십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만통문은 신속, 정확한 일 처리에 고객의 기밀 절대 엄수가 생명입니다. 그러니 귀하께서는 행여나 이 일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이 알려질까 두려워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악비천은 자신과 마주 앉은 고객의 등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설문영(薛雯影)의 담담한 시선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대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을 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수에 대한 경고겸, 응징을 결코 잊지 않는 설문영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천진한 표정에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주(門主)님께서 실수 하셨네요. 고객이라뇨. 우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라 엄연한 정도무림(正道武林)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문파인걸요. 그런데 어찌 우리 만통문의 도움을 요청하러 오시는 분을 고객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건 천부당 만부당 한일이죠. 그렇죠?”
 그녀가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묻자 악비천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젠장, 일전에도 저런 표정을 지은 뒤에 방앗간에 뛰어든 참새주둥이 마냥 나한테 대고 쫑알거려댔지. 그때 내가 도통 뭔 소린지 못 알아 듣겠다고 툴툴거리니까 복날 가마솥에 들어가기 직전의 개새끼처럼 날 두들겨 팼었지. 세상에 저렇게 겉 다르고 속다른 여잔 없을거다.’
 악비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러나 어쨌건 그녀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악비천은 별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지으며 마주앉은 의뢰인(사실은 고객)을 향해 말했다.
 “하핫, 이거 제가 잠시 말 실수를 했군요. 맞습니다, 맞구 말구요. 우리 설문영 부문주가 말한대로 우리 만통문은 위풍당당한 정도무림의 문판데 어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처럼 고객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잠시 말이 헛나왔군요. 하하하하. 그래 귀하께서는 어째서 우리 만통문을 찾으셨는지요?”
 악비천의 변명에 마주 앉은 의뢰인이자 고객인, 죽립쓴 중년인은 고객을 갸우뚱했다.
 “이곳 만통문이 정도 무림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문파란 말이요?”
 “네, 그렇죠. 그렇구 말굽쇼.”
 “그럼 문주는 누구십니까?”
 “바로 이 내가 만통문의 문주올습니다.”
 악비천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으나 중년인은 슬쩍 뒤에 서있는 설문영에게 시선을 던진뒤 물었다.
 “하지만 일문파라면 문주와 부문주 그리고 문도(門徒)가 있어야 할게 아니요? 하지만 이곳에는···”
 “물론 그 세 가지 요소가 다 구비되어 있습죠.”
 중년인의 질문에 악비천은 어색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도무지 무슨 말이요? 내가 이 모옥에서 본 사람이라곤 바로 저 마당에서 장작패고 있는 장한(壯漢)과 지금 이 안에서 뵙고 있는 두 분 뿐인데요? 그런데 일 문파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가 다 구비되어 있다니?”
 “바로 그겁니다!”
 콰당!
 중년인의 질문에 악비천은 있는 힘을 다해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우리 만통문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저 악비천이 문주올습니다. 그리고 부문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 계신가요?”
 “바로 대인의 등뒤에 서 있습죠.”
 악비천의 말에 중년인은 입을 쩍 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설문영은 날아갈 듯이 우아한 자태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이 만통문의 부문주 설문영이랍니다.”
 중년인은 기가 막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악비천의 나이는 기껏 이십대 초반, 설문영은 십대 후반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잘 봐주서 그랬다.
 한데 그들이 일개 무림 문파의 문주, 부문주라니?
 “으음, 신기하군요. 내가 지금까지 무림에서 본 중, 가장 어린 연세의 문주와 부문주이신 것 같구려.”
 “하하하, 놀라실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 이유가 있습죠. 사람이 살다보면 별 이상한 꼴을 다 겪을 수 있는 법이죠. 그러니까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소똥을 밟은 경우랄까요? 아니 그건 너무 비유를 점잖게 했군요. 좌우지간 별 더럽고 천하에 재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이 만통문의 문주가 된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가···”
 악비천은 거기까지 말하다 다시 소태 씹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설문영이 그를 향해 좀 전의 표정,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이미 겪어본 자신은 뼈저리게 아는 공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눈꼬리가 가볍게 위로 치켜 올라간 것으로 봐서 상황이 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설문영의 표정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다.
 
 - 비오는 날, 사방 천지에 먼지 휘날리게 매를 벌고 싶거든 더 계속 떠들어봐!
 
 그때 중년인은 자신의 호기심을 계속 충족시켜야겠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문주와 부문주는 확실히 계시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그래, 그럼 도대체 이 만통문의 문도들은 어디 있는 거요?”
 “하하, 대인께서는 정말이지 궁금한 것도 많으시군요.”
 “아니, 하도 신기해서 묻는 것이요. 또 내가 일을 의뢰하러 왔을 땐 이곳이 과연 확실히 믿을만한 곳인지 어떤지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소이까? 악 문주.”
 중년인의 말에 악비천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별 볼일 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문주란 직함으로 불리워질 때만큼은 자신이 처한 이 처참한(?) 상황의 암담함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대인께서는 우리 만통문의 문도를 이미 보셨습니다.”
 “언제요? 난 통 본 기억이 없는데?”
 “좀 전에 이 모옥의 밖에서 장작 패는 사람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호오, 그 사람이 만통문의 문도(門徒)로군요. 그럼 그 밖에 다른 문도들은 어디 있소이까?”
 “우리 만통문의 문도는 딱 그 한 사람입죠. 네.”
 악비천의 자신 있는 말에 중년인은 잠시 입을 쩍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입에 먼지 들어갈까봐 겁이라도 났던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휘휘 저은 다음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그러니까 이 만통문은 여기 악문주와 뒤에 서 계신 설 부문주, 그리고 밖의···”
 “마주겸(馬珠鎌)이라고 한답니다.”
 “그 마주겸이라는 문도 한사람. 그러니까 총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말씀이요?”
 “그렇죠. 그러니까 일 문파의 구성요소인 문주와 부문주 그리고 문도를 모두 갖춘 엄연한 문파가 아니겠습니까?”
 악비천이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도 크게 끄덕이며 말하자 설문영은 이번에는 정말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런 설문영을 바라보는 악비천의 기분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젠장, 내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이런 헛소리를 하는 줄 아느냐. 너의 매가 무서워서 이러는 거지··· 사실 문주와 부문주 그리고 달랑 문도 한 명, 총 세 명으로 이루어진 문파가 정, 사파를 막론하고 어디에 있냐? 저잣거리를 쏘다니는 똥개가 들어도 기가 막혀 졸도할 소리지. 어이구, 이 한심한 내 신세야.’
 그러나 이 만통문의 문주와 부문주가 내심 그렇게 상반되는 생각을 하건 말건 간에 아랑곳없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인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청부한 일만 제대로 해주면 그만이니 다른 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헤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긴 이 만통문이란 곳이 참 희안한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드시기도 할겁니다. 어떤 땐 문주인 나조차도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더 없이 한심하고 기가 찬 노릇이긴 하지만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 아닙니까? 그저 다 먹고살자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헉!”
 악비천은 거기까지 말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설문영의 표정이 다시 위험신호를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으나 눈빛은 좀 더 가라앉았고 입가의 살벌한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젠장, 아무래도 오늘밤 무사히 넘어가기는 틀렸구나.’
 그러나 조금이라도 무마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악비천은 헛기침을 하며 너스레를 털었다.
 “험험, 방금 말씀은 모두 농담입니다. 어찌 우리 만통문의 문주인 내가 먹고 살자고 이 문주 자리에 앉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이 만통문을 이끄는 중차대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가, 부문주?”
 악비천이 있는대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설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쟁반에 옥구슬이 씽씽 달리는듯한 청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문주님.”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는 동의한다는 흐뭇한 미소는 보여주지 않았다.
 내심 단단히 악비천을 벼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제 이 고객이 가고 난 다음에 악비천은 단단히 경을 치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악비천은 내심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젠장, 내가 어쩌다 실수했기로서니 한번쯤 용서해주면 덧나냐? 못된 년, 독한 년···’
 그러나 그 두 사람의 신경전은 눈치 못 챈 듯, 중년인은 한숨을 쉬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만통문을 찾은 것인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소생은 만엽산장(萬葉山莊)의 총관(總管) 고용소(高龍召)라 하외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산장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는 의뢰를 하고자 온 것이요.”
 “잠깐!”
 자신을 만엽산장의 총관이라 밝힌 중년인의 말을 막은 악비천은 고용소라는 그 중년인이 이 모옥안에 들어온 이후 가장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우리 만통문은 어디까지나 영리(營利)를 하는 단체···”
 순간 설문영의 표정이 다시 미묘하게 변했다. 악비천은 황급히 말꼬리를 틀었다.
 “는 물론 아니지만, 그러나 대인께서도 보시다시피 이렇게 문파의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의뢰를 맡을 때마다 소정의 사례비를 받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먼저 의뢰하실 일의 성격에 따라서 일정액의 보수가 필요할 거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악비천의 구구한 설명에 고용소는 뜻밖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드리지요.”
 “흠흠, 좋습니다. 그럼 일단 어떤 일을 의뢰하실 것인지를 들어볼까요?”
 “그런데 그 전에 악 문주께 꼭 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
 “부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외부에는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아 글쎄 그건 걱정 마시라니깐요. 기밀엄수는 우리 만통문의 철저한 영업방침··· 헉!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만통문의 첫째가는 문훈(門訓)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말씀하시죠.”
 “문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고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러니까 우리 만엽산장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고 하니···”
 만엽산장의 총관 고용소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쉰 다음 자신의 의뢰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악비천과 설문영의 표정은 점차로 변하기 시작했다.
 
 
 2
 
 
 반각(半刻)정도의 시간이 걸려 의뢰인의 말이 모두 끝났을 즈음, 탁자에 놓여있던 용정차의 훈김은 완전히 사라졌고 은은한 향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마친 만엽산장의 총관 고용소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악비천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하핫! 그것 참 놀라운 이야기군요.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깁니다.”
 “어떻소? 악 문주, 이 청부를 맡아주시겠소?”
 “그, 그것이 우리 만통문이 맡기에는 좀 곤란한 청부군요. 너무 어렵고 힘든 의뢰라서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다만 제가 지금은 좀 바쁜 관계로···”
 악비천이 그렇게 거부의 뜻을 표하려 할 순간, 다시 설문영이 눈꼬리가 상큼 치겨 올라갔다.
 그러자 악비천은 황급히 말꼬리를 틀었다.
 “의뢰를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만통문은 곤경에 처한 고객, 아니 의뢰인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영업방침에, 아니 문훈에 따라서 그 의뢰를 맡기로 하죠. 암요, 맡구 말구요.”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악비천이 맡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있는대로 지어보이면서도 고용소의 의뢰를 수락하자 그는 악비천의 두 손을 잡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은혜를 정말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사실 비밀리에 중원천지에서 내노라 하는 표국이나 청부업자들도 수배해보았소이다만 번번히 거절당했었소. 그런데 이 만통문은 곤경에 처한 우리 만엽산장을 외면하지 않다니 정말 감동했소.”
 고용소는 정말 고마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대며 악비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악비천은 기가 막혀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은 절대로 이 의뢰를 맡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의뢰를 거절했다가는 설문영한테 어떤 꼴을 당할지는 뻔한데 무슨 수로 의뢰를 거절하겠는가.
 그러나 이왕 의뢰를 맡기로 한 것, 물릴 수도 없는 바에야 그 다음 문제를 안 따질 수가 없었다.
 악비천은 설문영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흠흠··· 고 총관 그리고 말이죠.”
 “네?”
 “그게 그러니깐···”
 “뭐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그러면 서슴지 말고 말해보십시오.”
 “그게 저···”
 “······.”
 악비천이 헛기침을 하면서 눈치를 줘도 고용소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악비천은 별 수 없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거 참! 고 총관께선 눈치깨나 없으시군 그래. 그래가지고서 어찌 만엽산장같은 큰 산장의 총관을 하시고 있소!”
 “아하!”
 악비천의 말에 고총관은 이마를 탁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의뢰금 말씀이시군요. 아 물론 드려야죠.”
 “글쎄 물론 주시겠지만 그러니까 일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비가 드는 법이 아니겠소. 험험···”
 악비천의 말에 고총관은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렴요. 선수금(先手金)을 일부 드려야겠습죠.”
 “뭐, 일부 말고 선불로 몽땅 다 준다고 해도 뭐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흠흠···”
 “네?”
 악비천의 말에 고총관은 약간 황당해 하면서도 조심스레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금 오십 냥입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실런지요?”
 “오, 오십 냥!”
 악비천은 입을 쩍 벌렸다. 황금 오십 냥! 황금 오십냥이면 만통문의 세 식구인 자신과 설문영, 그리고 밖의 문도인 마주겸이 십년은 잘 먹고 지낼 수 있는 막대한 액수가 아닌가?
 물로 고용소가 의뢰한 일이 워낙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거액을 선수금 일부로 선뜻 내놓다니 악비천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악비천의 놀람을 고용소는 엉뚱하게 해석했던지 고개를 갸웃하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음··· 선수금이 좀 적은가요? 하긴 우리 만엽산장이 의뢰한 일이 세 분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험한 일이긴 하니, 그럼 두 배를 드리죠. 금화 오십 냥을 더 채워서 백 냥을 드리겠습니다.”
 “······”
 악비천은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다 쓰러져가는 허울만 정도의 문파인 만통문에 이런 엄청난 고객이 찾아오다니.
 금화 백냥이면 이십년을 모든 일을 전폐하고 이 일에 매달려도 먹고 살일은 걱정없는 액수가 아닌가?
 그것도 선수금으로 주는 돈이었다. 보통 선수금은 총 사례금의 이할을 주는 것이 관례니 그렇게 따진다면 나머지 사백냥을 일이 끝난 뒤에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돈이라면 어쩌면 만통문은 지금같이 명색뿐인 상태가 아니라 옛날의 위세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비천 뿐 아니라 설문영의 눈빛도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은 상태가 된 악비천을 바라보는 고용소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황금 백냥을 선수금으로 주겠다는데도 싫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악문주. 미안한 말씀이오나 선수금으로 더 이상 드리기는 곤란합니다. 물론 이 정도 액수라도 우리가 의뢰한 일의 성격에 비하면 적다는 것은 충분히 압니다만 대신 일이 끝난 뒤에 나머지 잔금 사백 냥을 받으시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시고···”
 “그만!”
 “네?”
 “선수금은 그 정도면 됐소이다. 뭐 좀 아쉽기는 하지만 황금 백 냥으로 만족하기로 하지 뭐. 더 받았으면 좋긴 하겠으나 어쩌겠소. 우리는 어디까지나 문파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니 말이지. 안그런가, 부문주?”
 “물론이죠. 그렇고 말고요.”
 설문영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 뜻하지 않은 횡재에 내심 적잖이 만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설문영을 바라보는 악비천의 내심에 떠오르는 생각은 한가지였다.
 ‘백년 묵은 여우같으니.’
 “뭐 어쨌거나 일단 선수금을 접수하겠소이다. 그리고 일주야 이내로 일에 착수할테니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네 그럼 소인은 문주님만 믿고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만엽산장주께 전해주시구려. 우리 만통문이 이 일을 맡은 이상 오늘 부로 두 발 쭈욱 뻗고 펀히 주무셔도 될 거라고 말씀이요.”
 “이거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고용소는 연신 허리를 숙여 사의를 표하고 모옥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악비천은 탁자 위에 놓여진 백 냥의 황금에 눈을 돌렸다.
 “흐흐흐, 이 황홀한 촉감!”
 악비천은 그 황금을 어루만지며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뒤통수에 와닿는 서늘한 시선을 의식하고는 슬며시 황금에서 손을 뗐다.
 “흠흠, 이런 의뢰만 계속 들어온다면 우리 만통문도 살만하겠는데 말야. 안 그런가 부문주?”
 “······”
 악비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으나 설문영은 냉랭한 표정으로 악비천을 노려보았다.
 그때 모옥의 문이 열리며 이른바 만통문의 유일한 문도인 마주겸이 들어왔다.
 상당한 장작을 패고 있었던지 온몸이 땀 투성이였다.
 그는 이마의 땀을 씻으며 말했다.
 “이봐, 악가야. 방금 온 사람은 누구냐?”
 순간 설문영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녀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마주겸은 질겁을 하며 변명하듯 말을 바꿨다.
 “헉! 그러고보니 부문주께서도 계셨군요.”
 “지금 가가께선 이 만통문의 문주를 무엇이라고 호칭하셨죠?”
 “저 그게···”
 “내가 그렇게도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만통문의 유일한 문도로서 문주를 문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감히 악가라고 호칭하시다니 그러고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만통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설문영은 말과 함께 품에서 한 자루의 부채를 꺼냈다.
 “허억!”
 순간 악비천과 마주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설문영의 독문병기(獨門兵器) 파천선(破天扇)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부채는 이른바 만통문의 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부채가 설문영의 품에서 꺼내지는 경우는 딱 두 가지 경우였다.
 즉 그들의 목숨을 걸고 싸울 때, 그리고 악비천과 마주겸이 만통문의 문주이자 문도의 위치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 이 순간은 그 두 번째 경우였다.
 그 부채를 빼든 설문영은 짐짓 몹시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서글프다 못해 애처로와 동정심이 뭉클뭉클 샘솟을 것만 같았다.
 악비천이 보기에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이래서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어쩌겠어요. 아직 두 분께서는 만통문의 문주와 문도로서의 자각이 부족하시고, 우리 만통문의 기강을 잡아나갈 중차대한 책임은 이 미천한 몸에 있으니 말예요. 가슴아프지만, 정말 너무도 가슴아프지만 이제부터 돌아가신 선대 문주이신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서, 지금부터 두 분의 삐딱한 의식구조를 개혁하고 우리 만통문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교육을 실시하겠어요. 두 분 다 별 불만은 없겠죠?”
 ‘젠장, 기강 잡는거 좋아하네. 부문주가 문주를 복날 개잡듯 두들겨 잡는게 기강세우는 거냐? 더군다나 불만 있다고 하면 조용히 입다물고 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패는 주제에 묻긴 뭐하러 물어보냐?’
 악비천과 마주겸은 내심 불평을 터뜨렸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고 할 수가 있겠지···”
 “그, 그렇죠. 뭐···”
 그러자 설문영은 화사하게 마치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하얀 치아가 붉디 붉은 두 입술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나 그런 설문영의 미소는 악비천과 마주겸에게는 등골이 오싹하도록 공포스런 것이었다.
 “제 말을 그렇게 잘 이해하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거듭 드리는 말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공 수련도 겸하는 것이니 행여나 제가 협감이나 사감(私憾)을 가지고 행하는 일이 아닌가하는 추측은 하시면 안되어요. 그럼···”
 말과 함께 설문영은 파천선을 번개같이 두 사람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파천선에서는 푸른 강기가 사정없이 두 사람을 향해 쏘아져 갔다.
 “으악!”
 “큭!”
 쿠쾅!
 
 그리고 그로부터 반시진가량 모옥에서는 악비천과 마주겸 두 사람의 애절한(?) 비명과 모옥의 벽과 천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 인근을 진동했다.
 그리고 조용히 모옥의 문이 열리더니 두 팔을 걷어부친 채 설문영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두 볼이 발그레해진 채, 우아한 모습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필경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양가집에서 흙 한번 안 만진 청초한 요조숙녀가 힘들게 가사 일을 한 뒤라고 알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 이 땀 좀 봐! 애써 화장한 게 다 지워지겠네. 그냥 가만있었으면 편했을 것을. 난 어째서 편한 길을 마다하고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아아, 난 정말이지 사명감이 너무 투철해서 탈이야.”
 그렇게 있는대로 내숭을 떨어 보이며 자신이 무슨 대단한 희생이라도 했다는 듯 말하고 설문영이 사라지자, 온몸에 멍투성이가 된 채 모옥의 바닥에 널부러진 마주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악가야. 이건 항상 물어보는 거다만 넌 도대체 어쩌다 설 소저를 만났냐?”
 “그건 뭐하러 물어?”
 “너란 놈이 설 소저를 안 만났더라면 나도 허구헌날 이 꼴을 안 당할 거 아냐?”
 “웃기고 자빠졌네. 제 놈이 스스로 털고 우릴 따라 나섰던 주제에··· 그리고 내가 좋아서 저 마귀할멈 같은 아낙을 쫓아간 건 줄 알아! 말 안들으면 복날 개 두들겨 잡듯, 날 때려잡을게 틀림없으니 울면서 따라간 거지. 으으, 아이고 옆구리 허리 팔다리야.”
 “······.”
 악비천 역시 온몸이 쑤시는지라 힘없이 말하자 마주겸도 입을 다물었다.
 악비천은 그가 설문영을 만났던 그 잊지 못할 운명의 날을 돌이켜 보았다.
 그것은 불과 육개월 전의 일이었다.
 
 
 2장 운명의 만남
 
 
 “그러니까 진대인 집 안방 장롱속이라는 거냐?”
 악비천은 조심스레 마주 앉은 진롱추(陳瀧追)에게 물었다. 진롱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이건 진대인집의 하녀를 구워삶아 알아낸 뜨끈뜨끈한 정보라니깐.”
 진롱추는 가슴을 탕탕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악비천은 퉁명스레 내뱉었다.
 “젠장, 뜨끈뜨끈한거 좋아하네. 네놈이 너무 따끈따끈한 정보만 주는지라 일전엔 내가 아주 데여 죽일 뻔 했잖냔 말이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아, 몰라서 물어! 은자 오십 냥짜리 전표가 수북히 쌓여있다는 정보를 알려줘서 들어가보니 그놈의 집이 바로 진 포교의 집이 아니었냔 말이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체포당해 주리를 틀릴뻔 했지 않않냐구!”
 “아 글쎄 이번엔 틀림없다니깐. 이번에도 만약 내 정보가 틀리다면 그때부턴 단 한푼의 정보료도 안줘도 좋다구.”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특별히 한번 믿어보지.”
 악비천은 선심쓰는척 했다.
 그는 이 인근에서도 가장 솜씨 좋은 도둑이었고 진롱추는 악비천에게 제법 값나가는 것들이 있는 곳을 그에게 알려주고 푼돈이나 얻어쓰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악비천은 진롱추에게 슬쩍 은자 열냥을 슬쩍 건네주면서 객점(客店)안을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지금 자신들이 들어와 있는 객점 안에는 별반 손님이 없었으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매사 조심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입구쪽에 앉아서 음식도 시키지 않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네와 안쪽에서 술 한잔씩을 들이키고 있는 장한들 몇 명이 보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악비천과 진롱추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저희들끼리 노닥거리고 있었다.
 악비천은 다시 시선을 진롱추에게 돌리며 낮게 말했다.
 “어쨌건 이번엔 너한테는 미리 돈을 줄 순 없어. 직접 털어보고 네놈 말이 사실이면 그때가서 돈을 받게 될 줄 알라구.”
 “아니 그런 법이···”
 진롱추가 뭔가 항의를 하려 할 때였다.
 입구쪽에서 누군가 객점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악비천과 진롱추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눈부신 미녀였다.
 청색경장을 했으며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고 오똑한 콧날에 크고 둥근 두 눈은 맑기가 그지 없었다.
 더군다나 투명하고 맑은 피부에 붉디 붉은 입술은 청순하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악비천과 진롱추는 넋을 잃고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들뿐 아니라 한쪽 켠에 앉아있던 장한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우아하고 날씬한 몸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인은 객점안을 두리번 거리더니 입구쪽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의 앞에서 꾸벅 절을 한다음 조신한 동작으로 앉았다.
 그러나 악비천들이나 장한들과는 달리 노인은 졸린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여인을 힐끗 쳐다볼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소면 한 그릇을 시킨 다음에 생긋 미소를 지으며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면에 실롄 줄 알지만 이곳에 처음와서 그러는데 어르신께 한가지 여쭈어봐도 될지 모르겠군요.”
 “응? 나한테 뭘 물어본다구? 그렇게 하게나. 물어본다구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말야.”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게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는데 좀 도와주세요.”
 “사람을 찾는다고? 누굴 찾는데?”
 “여기 이 사람인데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여인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서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필시 용모파기가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그 종이는 악비천 쪽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 종이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네. 이젠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눈이 영 침침해서 말이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소저는 이 사람을 왜 찾는 겐가? 이 사람이 일가친척이라도 되는 건가?”
 그러나 여인은 말없이 처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빚이라도 떼먹고서 도망 친겐가?”
 그녀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젓자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재차 물었다.
 “오호라, 그러면 정혼자라도 되는 게로군?”
 “아니랍니다.”
 “그러면··· 오라 알겠다! 소저하고 무슨 원한을 진 자인 게로군 그래. 뭐 부모의 원수쯤이라도 되나?”
 “아닙니다.”
 “오호라 그러면 사부를 살해한 자쯤 되는 건가? 이를테면 사문의 철천지 원수 말일세.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여인은 고개를 설레설래 저을 뿐이었다.
 좌우지간 노인네도 쓸데없는 호기심 하난 왕성했지만 여인의 행동 또한 이상야릇했다.
 그냥 무엇 때문에 찾는다고 말을 하면 그만이련만 굳게 입을 다물고 고개만 좌우 운동을 계속 해대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악비천의 표정은 점차로 굳어져갔다.
 용모파기라는게 사람의 인상착의를 그린 종이인데 이건 당연히 그 용도가 관에서 죄인 수배할 때 쓰는 것이었던 때문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 정말 절실하게 찾는 사람이 있을 경우도 가지고 다닐 수는 있었지만 일단 용모파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관에서 나온 자가 아닌가 의심해 볼만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악비천 자신처럼 떳떳치 못한 일에 종사하는 자는 당연히 머리끝을 쭈빗 세우고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회를 보아서 잽싸게 이 객점을 빠져나가리라고 악비천이 결심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한쪽 켠에 앉아 있던 장한 중 하나가 여인을 향해 말했다.
 “눈도 어두운 노인네한테 사람얼굴을 그린 것을 보여줘 봤자 신통한 대답이 나오기 힘들지. 우리한테 가져와 보겠나? 한번 봐줄 테니까.”
 그러자 여인은 반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장한들한테로 낼름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장한들은 여인이 보여주는 용모파기는 보는둥 마는둥 하더니 엉뚱한 수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봐, 아가씨 올해 나이가 몇인가?”
 “제 나이는 왜요?”
 “흐흐··· 아니 뭐 딴 뜻이 있는 게 아니고 피차 이렇게 한자리에 앉은 처지니까 그 정도는 알려줘도 좋지 않겠어?”
 “열아홉이랍니다.”
 여인은 눈처럼 흰 치아가 드러나 보이도록 환하게 미소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눈부셨던지 어두컴컴하던 객점 안이 빛으로 가득찬 것처럼 사람들에게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와 마주한 장한들 역시 입을 짝 벌리고 황홀하다 못해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그리고 자신들처럼 시시껄렁한 놈들 앞에 이런 청순하고 우아한 미녀가 나타나다니 그들 스스로 생각해도 꿈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녀석이 시커먼 얼굴에 입에는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다시 물었다.
 “열아홉! 흐흐, 거 참 먹음직스런 나이··· 아니 거 참 좋은 나이로군 그래. 그런데 이름이 뭔지는 물어봐도 되겠나?”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여전히 그 환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교태가 넘치는 투로 답했다.
 “설문영이라고 한답니다.”
 “호오, 설소저시로군. 그래 이런 촌구석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겐가?”
 “······”
 잠시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분명히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설문영이 밝혔건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다니?
 이 장한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한없이 청순하다 못해 순진해 보이기만 하는 설문영을 어찌어찌 해 볼 속셈에 눈이 뒤집혀 그녀와의 대화를 어떤 순서로 풀어가야 할지를 망각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문영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 밝고 화사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을 찾으러 왔답니다.”
 “그래?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군데?”
 “······”
 좀 전에 노인한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 설문영은 짜증도 내지 않고 용모파기를 그들을 향해 내어 보이며 말했다.
 “그건 좀 말씀드리기 곤란하구요. 이 사람이 누군지를 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그 은혜는 잊지 않을 테니까요, 네?”
 “흐흠, 그 놈 잘 생겼네?”
 “누군진 몰라도 한 인물 하는군 그래.”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장한들은 그들 앞에 제시된 용모파기를 보고 한마디씩 던졌으나 이내 그들의 시선은 용모파기에서 설문영의 얼굴로 원위치를 해버렸다.
 그들 자신의 말 마따나 방년 열아홉의 청순하다 못해 먹음직스럽기가 더 할 나위 없는 꽃같은 처녀가 눈앞에 있는데, 그것도 그들 같은 촌구석의 무지렁이들은 평생 볼까말까한 미인인데 용모파기나 보고 있게 되었는가?
 사실 그것은 결코 그들만을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문영은 좀 전부터 짓고 있던 화사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조가 얼굴의 미소와는 달리 차츰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장한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아신다는 건가요, 아님 모르시겠다는 건가요?”
 “이보게나, 소저!”
 아까부터 게걸스레 침을 질질 흘리며 설문영의 옥으로 깎아놓은 듯한 얼굴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장한 하나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뜻하지 않은 돌발 사태에 그들을 옆눈으로 바라보던 객점의 주인과 점소이, 그리고 악비천과 진롱추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들뿐 아니라 그의 동료 장한들도 적지 않이 황당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들의 내심을 스치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으음, 나도 노리고 있었는데 이 자식이 선수를 치다니.’
 ‘똥 묻은 돼지 발이 비단금침에 싸인 진주를 건드리는구나.’
 ‘젠장, 하필 우리 중 제일 못생긴 놈이 나서기는 제일 먼저 나서는군.’
 그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설문영이 ‘어머머머, 난 몰라!’라거나 ‘이러시면 안돼욧! 어서 이 손 놓으세욧!’라거나 또는 ‘어쩜 좋아. 손 안 놓으면 우리 아버지한테 이를 거예욧.’라면서 수줍게 볼을 붉히고, 교태어린 태도로 몸을 비틀며 손을 빼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추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한의 때묻은 손에 자신의 여린 손목을 잡힌 설문영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돼지발이 무색한 장한의 손아귀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얼굴의 밝고 화사한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침착하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돼지발의 주인공은 그녀의 미소에 자신을 얻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응, 나한테 뭐하냐고 물었나? 별거 아니지. 그러니까 난 지금 소저하고 개인적으로 친목을 돈독히 하고 싶다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엄청나게 절실한 의사표시를 매우 점잖게 하고 있는 거라네.”
 “어머, 그런가요?”
 “암,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나한테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 내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거네요. 내가 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진지하게 들은 게 아니고 말이죠. 모두들 그런가요?”
 설문영이 생긋생긋 미소띤 얼굴로 장한들을 죽 둘러보며 묻자 그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런 촌구석에서 치마 두른 젊은 처자 한번 구경하기도 힘든 판에 소저 같은 미인이 나타났는데 딴 거 신경 쓰게 됐나.”
 “맞아, 사실 이 친구 나무랄 것도 없어. 나도 소저 손목 한번 잡아보려고 은근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거든.”
 “흐흐흐흐, 나는 소저의 손목이 아니고 좀더 위쪽 부분을 노리고 있었노라고는 차마 부끄러워 말못하겠군 그래.”
 “난 좀 더 아래쪽을 노리고 있었지! 으헤헤헤.”
 설문영이 장한의 도발에도 화사한 미소를 풀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응대하자, 그들은 아예 대놓고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설문영을 노골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설문영은 고개를 객점 주인한테로 돌리더니 싱긋 미소지어보이며 말했다.
 “이 객점의 문을 지금 당장 닫아 주실래요?”
 “네, 뭐라굽쇼?”
 “그러니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지금 당장 이곳의 출입문을 봉쇄해 달라는 말씀이예요.”
 그러자 객점 주인은 입을 쩍 벌리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문을 닫기 시작했다.
 마치 꽃인냥 밝게 웃고 있었지만 설문영의 어조와 눈빛에 심상찮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설문영을 희롱하는 장한들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아직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로서는 일생일대의 재앙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이 눈썹이 휘날리게 몸을 움직여서 문을 봉쇄하자 설문영은 확인하듯 물었다.
 “잠그셨는가요?”
 “틀림없이 잠궜소이다.”
 “고마워요, 정말이지 수고하셨어요.”
 “뭐 별말씀을···”
 방긋 웃어보이며 치하하는 설문영에게 객점주인은 어색하게 응대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어본 객점주인에게 설문영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대충 감히 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하는 불쌍한 무리가 있었으니, 설문영은 다시 코앞에서 자신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는 장한들한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들은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설문영을 지분거리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장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설문영의 손이 번개같이 뒤집어졌다.
 “허억!”
 돼지발, 아니 때묻은 손의 주인공은 기겁을 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설문영의 손이 번개처럼 뒤집어지더니 자신의 완맥을 제압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상당한 조예에 이른 금나수(擒拿手)의 수법이었다.
 “이, 이거···”
 돼지발의 주인공은 기겁을 하며 손을 빼내려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요지부동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요지부동을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삽시간에 그는 자신이 희롱하던 설문영에게 제압 당한 것이었다.
 “아니 소저, 분위기 좋게 잘 나가다가 이거 무슨 장난인가?”
 장한 중 체격이 건장한 한 명이 슬쩍 그런 그녀를 만류하려는 듯 설문영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동작이었으나 단번에 설문영을 움켜쥐려는 듯 힘을 실은 손길이었다.
 그러나 설문영은 슬쩍 어깨를 흔들어 그의 손길을 흘려보내더니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오른발을 들어 번개같이 사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퍽!
 “어구구···”
 발길질에 얼굴을 강타당한 사내는 사정없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러나 설문영은 그 자세에서 상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사내를 내려친 다리를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그것을 보던 장한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들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은 한가지였다.
 ‘무림인이로구나!’
 간혹 강호행(江湖行)을 하는 여자 무림인들이야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물론 그런 여자들에게 간 크게 집적거리다가 경을 치기를 자청하는 용감한 인간들은 그들 중에는 없었다.
 그러나 무림인이라면 얼굴에 칼자국이나 다친 상처가 있다든가 팔다리나 하다 못해 손가락 한 개쯤 절단 나고 없다든가, 체격이 단단하다든가, 어떤 식으로든 표가 나는 법인데 설문영이라는 이 여자는 희고 고운 피부에 빼어난 미모하며 나긋나긋한 말투 등, 어느 면으로 봐도 무림인으로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설문영은 사내의 손목을 내리눌러 그가 손바닥을 탁자에 쭉 펴게 했다.
 그리고는 화사한 미소를 장한들에게 지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불행히도 이 미모 덕에 어릴 때부터 지분거리는 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그럴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그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셨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같네요.”
 장한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설문영이란 이 여인의 밝은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즉 설문영이 미소를 지을 때는 극도로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일 때 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젠장, 이거 잘못 건드렸구나.’
 그러나 이미 일은 저질러진 것, 설문영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헉! 저것은!”
 장한들은 기겁을 했다.
 그녀의 품에서 꺼내어진 것은 약 칠촌에 달하는 날이 시퍼런 비수였던 것이다.
 보고 있기만 해도 그 비수의 날카로운 예기에 눈알이 상처를 입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소, 소저 제법 목숨만···”
 손바닥을 탁자에 쫙 붙힌 상태로 장한은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러나 설문영은 배시시 웃더니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작은 장작 한 개만 갖다 주실래요?”
 날이 시퍼런 비수를 손에 쥐고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점소이는 순식간에 객점 한구석에 놓여있던 장작을 허리를 조아리며 갖다바쳤다.
 “고마워요.”
 설문영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비수를 눕힌 채로 세운 다음 그 위에서 장작을 비수의 날을 향해 떨어뜨렸다.
 “헉!”
 일동은 탄성을 질렀다.
 뭉툭하니 다듬어지지 않은 장작이 마치 얇은 종이가 잘려나가듯 비수의 날에 닿자마자 매끈하게 쪼개져서 땅에 떨어진 것이다.
 필시 엄청나게 좋은 재질로 만든 비수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저 비수에 사람의 팔, 다리나 머리를 갖다댄다면 어찌 될 것인가?
 설문영을 제외한 객점 안의 사람들은 그런 상상을 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비수는 아버님이 저에게 물려주신 만통비(萬通匕)라고 한답니다. 보시는대로 이 비수에 닿으면 만년한철(萬年寒鐵) 정도의 성분으로 만들어진 병장기라면 모를까, 그 외는 무엇이든 간에 종이처럼 쉽게 잘려나가죠.”
 “도, 도대체 그, 그 비수로 무, 무엇을 하려는 거요?”
 손을 제압 당한 장한이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설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랑하고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저는 어릴때부터 치근거리는 사내들이 많았답니다. 물론 아버님 눈에 뜨인 그 사내들은 치도곤을 당했죠. 하지만 제가 나이가 들고 무공을 익힌 다음부턴 제 힘으로 그런 사내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죠.”
 “······.”
 장한들은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설문영이 처리했다는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최소한 죽기 직전까지 손봐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설문영은 장한들의 겁먹은 얼굴을 죽 둘러보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그런데 웬만큼 혼을 내줘도, 간혹 가다 다시 저에게 지분거리는 사내들이 있지 뭐예요. 그래서 저는 좀 더 확실한 징계를 사내들에게 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지 뭐예요. 이 방법은 바로 그 확실한 징계의 방법으로 생각해 낸 거랍니다.”
 설문영이 방긋 미소지으며 이른바 만통비라는 살벌한 이름의 비수를 장난감처럼 흔들어 보이며 쾌활하게 말하자 장한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리고 말았다.
 그들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한가지였던 것이다.
 ‘저걸로 목을 치진 못할 테고 귀나 코를 자르겠다는 것인가? 설마 눈을 도려내거나 혀를?’
 자신들 눈앞의 이 청순하고 아리따운 여인이 그런 살벌한 일을 할까 싶기는 했지만, 그러나 설문영이 달리 무엇 때문에 만통비를 꺼냈겠는가?
 손을 제압 당한 장한은 급기야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흐흐흑, 소저. 제발 좀 봐주시구려. 이래뵈도 난 토끼같은 자식새끼가 줄줄이 딸려있고 부양해야 할 노모도 있단 말요. 제발 너그러이 봐서 은혜를 좀 베풀어주시구려.”
 그러나 설문영은 화사하게 다시 미소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 그렇게 겁을 먹을 필욘 없답니다. 금방 끝나니 말이죠. 거기 주인장께선 눈을 가릴만한 검은 천을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
 갑자기 검은 천이라니? 장한들과 객점주인, 그리고 악비천등 모두가 의아했지만 그러나 손에 칼쥔 놈, 아니 년이 하는 말인데 안들을 수도 없는 일, 주인은 다시 사람의 눈을 가릴만한 크기의 검은 색 천을 설문영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정도 크기로 될까 몰라?”
 설문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 개를 마주 앉은 장한한테 건넸다.
 “이걸로 눈을 가리시겠어요?”
 “···”
 장한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주위의 동료들을 힐끔거렸다.
 그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지만 누가 이 상황에서 그를 돕자고 목숨을 걸겠는가.
 별 수 없이 장한이 눈을 동여매자 설문영도 자신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렸다.
 그런 다음 설문영은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무얼 하려는 건지 아시겠어요?”
 “······.”
 “이건 제가 치근거리는 사내들을 징계할 때 쓰는 방법이랍니다. 전 문제의 인물들의 손을 탁자에 펴게 하고 다섯 손가락 사이를 이 비수로 딱 백 번만 찍는 방법을 썼죠.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말예요.”
 “뭐, 뭐라고?”
 마주 앉은 장한이 기겁을 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설문영은 아랑곳없이 말을 계속했다.
 “백 번을 찍어서 손이 무사하면 그만이고 만약 손가락을 찍힌다 해도 그건 그 사람의 운이니 할 수 없는 거죠. 그렇죠, 여러분?”
 장한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를 백 번을 찍는다니··· 눈을 가리고 찍는다면 분명히 사람 손가락을 찍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더구나 저 날카로운 비수에 찍히면 손가락이 여지없이 절단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장한들 중 한 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설문영에게 물었다.
 “혹시 그 징계를 받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 중, 징계 자체를 거부한 인물은 없었소?”
 “물론 있었죠. 아예 손을 내놓기를 거부하지 뭐예요. 그래서 어깨위에 있는 물건을 떼 주겠다면 징계를 거둘 수도 있다고 했더니 그때가서야 응했답니다.”
 방실방실 웃으며 설문영이 말하자 장한들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어깨 위에 있는 물건이라면 목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한마디로, 시키는대로 안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장한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한들의 표정은 다시 한번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한가지였다.
 ‘젠장, 생긴거 하고 말씨는 하늘에서 하강한 선년데, 하는 짓은 완전히 무림의 대마녀(大魔女)로구만.’
 “가만있자 모두 다섯 분이시로군요. 뭐 오래 걸릴까 걱정할건 없어요. 모두 다 합쳐도 일다경(一茶頃), 아니지 반다경도 걸리지 않으니까요.”
 장한들은 기가 막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반 다경도 안걸려서 그들 다섯 명의 다섯 손가락 사이를 백 번 찍는 작업을 그들 모두에게 하겠다니··· 그것도 눈을 가리고 말이다. 과연 그들의 손가락은 이제 몇 개나 남아날 것인가?
 그들 중 그래도 제법 담이 큰 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소저가 이 징계를 행할 때, 보통 징계를 받는 사람의 손가락이 온전할 확률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 수 있겠소?”
 “음··· 그건 뚜렷하진 않군요. 제가 이 징계를 열 다섯살부터 행해왔는데 그때는 아홉 명의 사내한테 징계를 했는데 손가락이 한 개도 남아나질 않았거든요.”
 “······.”
 장한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설문영은 다시 방실 웃어보였다.
 “그런데 차츰 나아졌어요. 제 무공수위가 높아지면서는 상당히 좋아졌죠. 눈감고서도 칼을 내려찍는 게 꽤 정확해졌거든요. 열일곱 먹었을 때는 여덟 명의 사내 중 두 명이 손가락 세 개가 남아있었고 여섯 명은 네 개가 남아있었답니다.”
 “그, 그럼 열 아홉이신 지금은 과연 어떨 것 같습니까?”
 장한들이 마치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식의 치유가능성을 묻는 것 같은, 조심스럽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설문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설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르겠네요. 그때부터 지금까진 집 울타리를 벗어나가지 못하고 무공수련만 했으니까요. 당연히 그 동안은 지분거리는 사내들을 접해보지 못했답니다.”
 “그러니까 소저가 열 일곱일 때 이후론 우리가 재수 없게 소저에 걸린 최초의 사내들이군 그래.”
 장한들이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설문영은 다시 배시시 웃으며 비수를 치켜들었다.
 “맞아요. 자 어서 시작하죠.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피차 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러자 장한들은 마치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인냥,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이 눈빛으로 서로 주고받는 말은 ‘그냥 당할까? 아니면 죽기를 무릅쓰고 한번 반항이라도 해볼까?’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그들이 합세해서 설문영에게 덤벼든다면 행여라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는 하나 여자가 아닌가? 설마하니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힘을 합쳐도 그녀 하나를 못 당해내겠는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문영은 그들이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배시시 웃더니 젓가락 통에서 나무젓가락 다섯 개를 슬며시 끄집어내었다.
 “어머머, 무슨 객점에 파리가 이렇게 많다죠. 징그러워라··· 난 벌레라면 정말이지 몸서리가 쳐져요.”
 그녀는 말과 함께 벽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들을 향해 다섯 개의 나무젓가락을 홱뿌렸다.
 퍼퍼퍼퍼퍽!
 장한들은 입을 쩍 벌렸다.
 설문영이 뿌린 다섯 개의 나무젓가락은 벽에 달라붙어 있던 다섯 마리의 파리의 몸을 정확하게 꿰뚫은 채 벽에 박힌 것이 아닌가?
 그 정확성도 놀랍거니와 나무젓가락을 돌로 만든 벽에 깊이 박히게 하는 솜씨라니, 그녀의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것인지는 말하나 마나였다.
 설문영이 내숭을 떨며 살벌한 무력시위를 벌이자 장한들은 다시 우거지상을 지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는데, 이번에 그들이 눈빛으로 주고받는 대화는 ‘반항하다가 맞아 죽지 말고 손가락 몇 개 절단 나더라도 시키는대로 하세’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설문영이 젓가락을 뿌리는 서슬에, 탁자 위에 놓여있던 용모파기가 미끄러져 악비천이 있는 자리로 날아왔다.
 악비천은 반사적으로 그 용모파기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용모파기를 본 악비천은 경악으로 입을 쩍 벌렸다.
 
 
 3장 백 번 내려찍기
 
 
 “······.”
 설문영의 손목 한번 잡은 죄로 신체의 일부가 처참하게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운명이 된 장한은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채, 두 손을 활짝 편 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비수로 손가락 사이를 내려찍는 설문영 뿐 아니라 당하는 그 또한 눈을 가리워야 하는 이유는, 비수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손가락 사이를 내려찍을 때, 공포로 손을 움직이다가 아예 손목이 잘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설문영의 친절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이 아니라 열 손가락을 모두 다 펼쳐야 하는 이유는 감히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았으므로, 말로만 자신을 희롱한 다른 사내들보다 그 죄가 무겁기 때문이라는 게 설문영의 친절하고도 자상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들을 때 장한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오직 한가지였다.
 ‘젠장, 어차피 열 손가락이 다 잘릴지 모를 운명이 될 바에야 손목이 아니라 아예 젖가슴을 움켜잡아 보는 건데 그랬네···’
 그러나 이미 후회한들 늦었고 장한은 눈을 가리고 열 개의 손가락을 찢어져라 벌려서 손가락 사이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며 탁자 위에 손을 펼쳤다.
 설문영 또한 눈을 가린 채, 비수를 높이 치켜들고 심호흡을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장한들과 객점 주인과 점소이 또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 또한 거친 세상을 살아오면서 별의별 희한한 구경을 다했지만 이런 경우도 절대로 놓치기 아까운 광경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손가락이 사정없이 잘려서 탁자 위에 뒹구는 상당히 처참한 광경이 연출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 정도의 가슴 졸임이 없다면야 구경거리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시작할 테니 제가 백 번을 다 셀 때까지는 절대로 손을 움직이시면 안되어요.”
 “알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겁이 난다고 손을 움직여서 손목이나 팔목이 날아가더라도 절 탓하시면 안된다는 거··· 미리 말씀 드릴께요. 아시겠죠?”
 설문영이 마치 서당에 가는 아들에게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말하는 어머니 같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말하자 장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 빨리 시작 하시구려.”
 “그럼 시작하겠어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설문영의 비수가 허공에서 번개같이 떨어졌다.
 퍽, 퍽, 퍽, 퍽!
 “하나, 둘, 셋, 넷, 다섯···”
 설문영은 마치 신들린 여인처럼 비수를 탁자 위에 놓인 장한의 손가락 사이로 내려찍으며 동시에 입으로 소리내어 숫자를 세었다.
 설문영이 칼을 내려찍는 속도는 정말 너무도 빨라서 비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비수의 날이 번쩍번쩍거리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장한들은 동료의 손가락사이에서 춤추는 설문영의 비수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동료들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이봐 자네는 저 친구의 손가락이 몇 개나 날아갈 것 같은가?”
 “글쎄 저렇게 빠른 속도라면··· 아무래도 세 개 정도는 절단나지 않겠나?”
 “자네는?”
 “으음, 저 소저가 제법 고수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법. 한 개 정도는 잘린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내 의견은 좀 달라. 저 정도 솜씨면 난 한 개도 안 잘린다고 생각하네.”
 “나는 두 개 정도는 잘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됐군 그래. 우리 의견이 모두 다르니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나? 난 은화 한냥 걸겠네.”
 “나는 반냥.”
 “나도.”
 삽시간에 동료의 손가락을 놓고 내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한 개도 안 잘린다는데 돈을 건 자를 제외하고는, 열 개의 손가락을 흉악한 산도적 같은 여인의 칼날에 맡긴 불쌍한 동료의 손가락이, 자신이 내기를 건 개수만큼 잘려주기를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곧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거라는 사실도 잠시 잊고서 말이다.
 그리고 설문영의 비수는 숨가쁘게 마지막 횟수를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아흔, 아흔 하나, 아흔 둘, 아흔 셋, 아흔 넷··· 아흔 아홉, 어머 이를 어째!”
 “허억!”
 “백!”
 “으윽!”
 사람들은 일제히 탁자 위의 손가락을 주시했다.
 아흔 아홉 번째에서 설문영이 이를 어째하고 가벼운 비명을 지르자 그 서슬에 놀란 장한이 미세하게 손을 움직였고 백 번째 칼이 장한의 왼쪽 새끼 손가락을 반쯤 베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설문영은 눈가리개를 풀면서 배시시 미소지어 보였다.
 “어머, 그러게 손을 움직이지 마시라니까요.”
 “도대체 왜 아흔아홉번째에서 갑자기 ‘이를 어째’라고 비명을 지른거요? 내 손가락을 내려 찍은 줄알고 놀래서 움직이고 말았지 않소!”
 장한은 피가나는 새끼 손가락을 움켜잡고 불만스레 말했다.
 물론 단 한 개의 손가락도 잘린 것은 아닌니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왼쪽 새끼 손가락이 가볍지 않은 상처가 생겨서 짜증이 났던 것이다.
 설문영은 변명하듯 말했다.
 “이년만에 하는 일이라 백번을 채우게 되니 나도 모르게 감격스런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이를 어째라고 비명지른데 대해서 뭐 불만이라도 있어요?”
 다시 화사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설문영이 묻자, 그녀가 어떤 인물인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장한은 기겁을 하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 천만에. 불만이라니 가당치 않소. 암 없구말구. 불만이 있으면 맹세컨대 내가 사람의 자식이 아니지.”
 약간의 상처는 생겼을망정, 열 개의 손가락이 다 신체에 달라붙어 있게 된 장한은 그렇게, 자신의 행운 아닌 행운을 기쁘게 생각하려 했다.
 물론 그의 손가락이 각기 한 개, 두 개, 그리고 세 개가 잘려질 거라고 내기를 걸었던 동료들은, 그의 행운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지갑에서 내기 돈을 꺼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저, 소저···”
 그런데 갑자기 점소이가 자신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할 눈치를 보이자 설문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객점의 주인이 눈짓으로 점소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고 있지 않은가?
 설문영은 빙긋 미소지으며 점소이를 향해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
 점소이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자 설문영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려던 말을 안 하시면 두 분도 이 탁자에 손을 올려야 할거예요.”
 “그게 다른 게 아니구요.”
 점소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용모파기를 들어보였다.
 “이 사람 말입니다.”
 “보신 적이 있는가요?”
 설문영이 두 눈을 빛내며 다그치듯 물었다.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설문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방금 보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방금 보았다니?”
 “그게··· 바로 조금 전까지 이 객점에 앉아있던 손님중 한분이 이 용모파기의 주인공임에 틀림없습니다. 나갈 때 얼핏보니 바로 이 용모파기의 인물하고 똑같이 생겼더라구요.”
 “방금 나갔다고요?”
 “네. 소저께서 눈을 가리고 비수를 마구 내려찍고 계실 때, 서둘러 나가더라구요.”
 점소이의 말에 설문영은 두 눈을 파르르 떨더니 객점주인을 째려보았다.
 물론 그 이유는 명백했다.
 설문영은 분명히 문을 닫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객점주인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변명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도둑고양이처럼 출입구가 아니라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구요. 그러니 낸들 어쩝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찾는 사람인줄 알았으면 어째서 알려주지 않았죠.”
 “알려줄 틈이 있어야죠. 소저께서 저 양반들 속에 앉고부터 순식간에 손가락사이로 칼을 찍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느 틈에 끼어든답니까? 그리고 눈을 가리고 손가락사이를 내려찍고 있는데 끼어들어서 그 소리를 합니까? 그 서슬에 저 양반의 아까운 손가락이 마구 잘려지면 어쩌라구요?”
 하긴 객점 주인의 항변은 일리가 있었다.
 객점주인도 용모파기를 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고 설문영과 장한들 사이의 사건이 워낙 빠르게 전개되었으니 그로서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문영은 객점 주인의 항변이 말대꾸처럼 느껴져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나요?”
 “대충은···”
 “대충이 아니라 확실히 알아야 할걸요, 안 그래요?”
 설문영이 배시시 웃음지으며 묻자 객점 주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도 저 끔찍한 만통비라는게 마구 드나들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군요.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암 알구 말구요.”
 “좋아요. 그럼 나를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준비를 해요!”
 설문영의 말에 아직 손가락사이로 비수 내려찍기를 당하지 않은 장한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 마녀같은 아낙이 원하던 사람을 찾아서 이곳을 나갈테니 자신들은 잊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문영은 그런 그들의 일방적인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지금부터 네 개의 탁자를 연결해 붙이고 네 분이 나란히 앉으세요. 그리고 네 분 다 오른 손을 탁자에 펼치세요!”
 “아니 도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그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으나 설문영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랍니다. 급한 일이 생기긴 했지만 한번 시작한 징계를 중간에 멈추는 태만함이 있어서는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시간을 절약하고 징계도 완결지을 겸, 네 분을 따로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징계하는 절차를 밟으려고요. 나뿐 아니고 여러분들도 시간이 절약되니 좋을 거예요.”
 네 명 장한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졌고 이미 그놈의 징계를 당한 사내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도 땀을 쥐게 했는데 자그마치 네 명이 한번에 다섯 손가락씩 도합, 스무 개의 손가락사이를 백 번씩 한꺼번에 내려찍겠다니, 아무리 설문영이 절정고수라 해도 그들 모두의 손가락이 한 개도 잘려지지 않고 온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설문영은 자신이 한 말을 거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뒤 네 명은 도살장에 끌려간 소의 심정이 이랬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며 일제히 탁자 위에 오른손을 펼쳤다.
 이번에는 설문영도 몸을 고정시킨 채 내려찍기를 할 수 없고 네 개의 탁자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네개의 탁자를 연결해 놓으니 그 길이는 대략 이장에 달했다.) 설문영이 쉴 새 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비수를 내려찍어야 할 판이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위험성, 즉 장한들의 손가락에 비수가 내려 찍힐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었다.
 다시 검은 천으로 눈을 동여맨 설문영은 심호흡을 한 뒤 필살의 ‘백 번 내려찍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설문영은 마치 신들린 것처럼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채로, 탁자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번개같이 뛰어다니면서 장한들의 손가락 사이로 맹렬히 비수를 내려 찍어댔다.
 장한들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고, 객점 주인과 점소이, 그리고 자신의 차례를 끝낸 장한은 손에 땀을 쥐며 그 광경을 주시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난 뒤, 네 사내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객잔에서 요란스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내 손가락!”
 “어그그···”
 몰론 그들은 몰래 객점을 빠져나가 자신들을 이렇게 위험한 지경에 빠뜨린 악비천을 죽도록 원망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4장 불청객
 
 
 “아니 너는···”
 행여 설문영에게 들킬세라 헐레벌떡 객점을 빠져 나와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악비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 있었던 것이다.
 악비천의 침상에 그 커다란 엉덩이를 앉히고 있던 마주겸은 담담한 표정으로 악비천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젠장, 네놈이 갑자기 무슨 빌어먹을 놈의 바람이 불어 날 찾아온 거냐?”
 “짜식,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말투가 뭐가 그래?”
 “친구? 네 놈이 내 친구냐. 이 능지처참(陵遲處斬)에 부관참시(剖棺參試)를 할 인간아!”
 악비천이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거렸으나 마주겸은 그 커다란 덩치에다 느긋해 보이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거 참,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너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인 내가 왜 너한테 능지처참에 부관참시를 당해야 하지?”
 “뭐, 왜 능지처참에 부관참시를 당해야 하냐고? 그걸 몰라서 묻냐. 이 죽일 놈아!”
 마주겸이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졸립다는 표정까지 지어가며 말하자 악비천은 울화통이 하늘 끝에 다다를 것 같았다.
 “이 베라먹을 짜식아! 세상에 하늘아래 둘도 없는 죽마고우라는 나를 네놈은 무려 다섯 번이나 관아로 끌고가서 차디찬 감옥에 처넣었잖아!”
 “그래? 물론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포교고 네놈은 좀도둑인데 포교가 도둑을 잡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이 세상은 모두 각자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던 건 바로 네놈이잖아?”
 마주겸이 히죽 미소지으며 말하자 악비천은 할말이 없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마주겸은 인근 관아에서 포교로 일하는 그의 불알친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악비천은 이 인근에서는 제법 명성(?)을 날리는 좀도둑이었다.
 그것도 주로 평판이 안좋은 지역의 유지들이나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치부한 관리들을 털어서, 일부는 끼니도 못잇는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하는지라 도둑치고는 평판이 괜찮았고, 그 덕에 자신의 직업을 평탄하게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강직하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친구 마주겸은 악비천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영업(?)을 완수해낸 그 다음날에 어김없이 그를 체포해 관아로 끌고 가고 했던 것이었다.
 물론 악비천이 장물을 처리하는 솜씨가 워낙 빨라서 번번히 증거불충분으로 금방 석방되기는 했지만.
 ‘젠장, 죽일 놈같으니. 한번쯤은 눈감아줄 만도 한데 번번히 내가 일을 치른 직후에는 나를 오랏줄로 묶어 끌고가다니··· 의리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는 나쁜 놈!’
 그것이 마주겸에 대한 악비천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마주겸이 이뻐 보일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마주겸은 입가에 지은 미묘한 미소를 거두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악비천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나 악비천의 미간은 다시 찌푸러졌다.
 “뭐하는 짓이야?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냐!”
 “······”
 “짜샤! 징그럽게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냔 말이다.”
 그러나 마주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악비천의 두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악비천은 기겁을 하며 그 손을 빼려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놈 새꺄! 내가 네놈 애인이라도 되냐! 징그러우니 당장 이 손 못 치워!”
 “친구로서 너에게 부탁하나 하자.”
 “부탁, 무슨 부탁?”
 “제발 이제는 이 생활 청산해라. 네가 이렇게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다.”
 “뭐가 어째?”
 악비천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마주겸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필경 적지 않은 시간을, 자신의 친구인 악비천이 좀도둑으로 살아가는 데 대해 안타까워 했음에 틀림없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다만 너를 다섯 번 옥에 집어넣었을 때, 없는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장기간 구금(拘禁)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
 “오호라, 그러니까 네놈은 지금 나한테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로구나. 너한테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봐주어 왔으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알아서 기라 그 말이군 그래.”
 악비천이 비아냥에 마주겸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이 이 녀석은 왜 이다지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일까?
 “돌아가신 네 아버님을 생각해봐!
 “뭐가 어째?”
 “나 역시 네 아버님이 임종하시면서 내게 신신당부하던 것을 잊을 수가 없어. 하나뿐인 외아들이 빗나가지 않도록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봐달라고 하시던 그 말씀을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집어쳐, 이 개새꺄!”
 악비천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구석에 놓여있는 박달나무 몽둥이를 집어들더니 사정없이 마주겸을 두들겨 팼다.
 퍽, 퍽!
 둔탁한 몽둥이가 마주겸의 몸에 사정없이 내리 떨어졌으나 마주겸은 피하지 않고 악비천의 몽둥이 세례를 모두 다 맞았다.
 급기야 때리다가 지친 악비천은 몽둥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주저 앉고 말았다.
 “나쁜 놈의 새끼. 그러게 돌아가신 울 아버지는 왜 들먹여, 들먹이길.”
 그의 아버지는 고아나 다름없는 마주겸을 자신의 아들처럼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마주겸이 악비천이 좀도둑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이제는 죽고 없는 악비천의 아버지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주겸은 맞아서 째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네 아버님께 맹세한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네가 밝은 곳에서 살도록 만들 테다. 명심해!”
 “웃기고 자빠졌네, 미친놈. 나를 밝은 곳에서 살게 하겠다고? 그렇게 나를 볕 잘 드는 곳에 거주하게 해주고 싶냐? 밝은 곳이라면 삼월이네 맞은 편에 있는 모옥이라도 사다우. 그 집이 햇볕은 무진장 잘 들더라.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악비천은 정신이 번쩍 난 듯,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황급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주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하는 거야? 갑자기 짐은 왜 싸는 거냐?”
 “그럴 일이 있어!”
 “설마 이곳을 떠나겠다는 거냐?”
 “아, 말시키지 말라니깐. 어떤 멀쩡하게 생긴 계집이 나를 뒤쫓고 있단 말이다. 아예 내 얼굴을 그린 용모파기까지 가지고서 나를 수배하고 있더라니깐. 하마터면 객점에서 정통으로 걸릴뻔 했단 말이다.”
 “무엇이?”
 마주겸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악비천은 짐을 싸면서 말을 계속했다.
 “분명히 대도(大盜)로서의 내 명성이 중원 천지에 알려져 조정에서 직접 날 체포하려고 사람을 보낸 게 틀림없어. 젠장, 그러게 조금만 일을 덜 열심히 하는 건데··· 이게 다 내가 너무 성실한 탓이야.”
 악비천의 횡설수설에 마주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시도 아니고 이런 외진 곳에서 활동하는 악비천같은 좀도적을 잡으러 조정에서 사람을 보낸다는 건 농담이라고 해도 어울리지가 않는 소리가 아닌가?
 어쨌거나 악비천이 저렇게 허겁지겁 짐을 싸는 것으로 봐서 누가 용모파기를 가지고 그를 수배하고 다닌다는 게 거짓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내심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놈이 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그때는 누가 저놈을 돌봐주고 보살펴 준단 말인가?’
 정작 자신의 죽마고우 악비천은 그의 보살핌을 눈꼽만큼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이, 마주겸은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만약 네가 이곳을 떠난다고 치자. 그러면 어디로 갈 거냐? 갈곳은 정해 놓았느냐?”
 “미쳤냐, 임마! 야반도주나 다름없는데 딱히 정해놓은 거처가 어딨어. 일단 이곳에서 튀고 보는 거지.”
 “도대체 널 찾는다는 여자가 그렇게 무섭냐? 어느 정도길래 네 놈이 이렇게까지 호들갑스럽게 난리를 떠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래.”
 “······.”
 마주겸이 사뭇 의아하다는 투로 묻자 악비천은 짐을 싸다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문영이 객점에서 눈을 가린 채, 비수를 들고 자신이 제압한 사내의 손가락 사이를 마치 신들린 것처럼 찍던 것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정말이지 무림에는 벼라별 독부, 마녀가 다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오늘 내가 본 것 같은 그런 지독한 여잔 없을 거야. 어이구 내가 그녀한테 걸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원,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다 쳐지는군 그래.”
 악비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온 집이 다 울리도록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기겁을 할 정도면 정말 엄청난 흉물인가 보구만. 아마 생긴 것은 꿈에 볼까 겁나는 추녀에다가 흉악한 몰골인가 보군. 어쩌면 입을 열고 말할 때마다 독기(毒氣)를 뿜어내는 괴물은 아닌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악비천을 이렇게 황급히 떠나보낼 일을 생각하니 마주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해서 그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봐, 그런데 너 한가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데? 잊고 있는 거라니? 너 나한테 돈 꿔가서 아직 안갚은 거 있느냐? 그럼 빨리 돌려달라구. 내가 이 집 문을 나서기 전에 말이다.”
 “빚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네놈이 나한테 금화 닷냥을 꿔가지 않았느냐?”
 “그, 그렇던가? 젠장, 하지만 그런 돈은 지금은 없으니 나중에 받든가 아니면 아예 깨끗이 포기하든가 하라구. 난 지금 당장 이곳을 튈거니 말이다.”
 “난 지금 꿔준 돈을 말하는 게 아냐. 네가 돈을 돌려준다면 안받겠다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 뭘 말하려는 거야?”
 “넌 보호관찰대상으로 관에서 지정되어 있는 인물이고 널 감시할 인물은 바로 나란 말이다. 알아들어? 네가 이대로 튀어버리면 난 결국 직무를 태만히 한 불성실한 포교가 된단 말이다. 그리고 문책을 받게 될 거라고.”
 마주겸이 약간 심각한 투로 말했으나 악비천은 그런 마주겸의 말도 안중에 없었다.
 “오호, 그런가? 내가 이대로 튀어버리면 네놈이 직무태만으로 문책을 당하게 된다구? 그거 참 잘됐구만. 그 동안 나를 네놈의 그 알량한 지위와 권력을 남용해서 괴롭혀 왔으니 이제 네놈도 한번 직무태만으로 상관한테 찍혀 보라구. 그래야 피차 공평하잖아, 안 그래?”
 “뭐, 뭐가 어째? 짜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꺼려? 이게 정말 누가 도둑놈 아니라고 할까봐 하는 말하고는.”
 “뭐, 직무태만을 저지르기 싫거든 다른 방법도 있잫아? 네놈이 걸핏하면 꺼내드는 그놈의 오랏줄로 날 꽁꽁 묶어서 감옥에 처넣든가!”
 악비천이 코웃음을 치며 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자 마주겸은 기가 막히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넌 정말이지 나를 그렇게까지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 정말 그런 거야?”
 “젠장, 현실이 그렇잖아? 나는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좀도독이고, 너는 나 같은 좀도둑을 족쳐서 정의를 구현하는 빛깔 좋은 관청의 포교! 알아들어? 네놈과 나 사이는 불과 물, 원숭이와 개, 또는 개와 고양이, 혹은 무림의 대마두와 정파의 절정고수, 이를테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선 철천지 원수란 말이다.”
 악비천이 두 손은 정신없이 짐을 싸면서도, 입은 마주겸을 향해 속사포처럼 쏘아부치자 마주겸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나한테 꼬여있었던가?’
 자신이 처한 상대적으로 어두운 입장을 이용해 죽마고우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랄하게 비아냥대는 악비천이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가 측은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내뱉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네 가고 싶은대로 어디든 꺼져버려. 직무태만이든 파면이든 그런 건 내가 감수할 일이니 네놈은 신경 쓰지 말고 훌쩍 날아가 버리라구!”
 그러자 악비천은 짐을 싸다 말고 마주겸을 진지한 눈길로 보더니 그의 두 손을 덥썩 잡았다.
 “뭐, 뭐얏? 징그럽게 왜 이러냐구. 내가 네놈의 애인이라도 되냐? 이 손 못놔!”
 “이봐, 마가야. 그건 좀 전에 내가 한 대사라구. 그리고 내가 말은 그렇게 했다만 어떻게 불알 친구인 네 놈이 직무태만으로 문책을 당하게 할 수가 있겠느냐? 안 그래? 넌 나를 그렇게 나쁜 놈으로 봤느냐?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네놈이 직무태만으로 문책 당하지 않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알겠지?”
 악비천이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마주겸은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짐을 도로 풀고 주저앉을 모양이로군. 짜식, 그래도 친구라고 나를 생각해 주는군 그래.’
 그렇게 생각한 마주겸은 입이 째져라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놈은 우정이란 게 전혀 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나 때문에 이곳을 떠나길 포기하고 주저앉겠다니 정말 고맙다.”
 그러나 마주겸의 말에 악비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무슨 소리냐? 이곳을 떠나길 포기하고 주저앉다니? 그게 뭔 소리야? 내가 왜 이곳을 떠나길 포기한단 말야?”
 “하지만 방금 네 입으로 내가 직무태만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거? 물론 그렇게 말했지.”
 악비천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무언가가 적힌 문서 한 장을 꺼내서 마주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냐?”
 “이곳 일대에서 정열적이고 헌신적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영업에 종사하는 내 동업자들 명단이야.”
 “뭣, 동업자라면···”
 “그래, 나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인간들이라니깐. 인상착의하고 그 동안 어디를 어떻게 털어먹었는가 하는 것과 사는 곳까지 적혀 있다구. 장물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도 모조리 다 적어놓았으니까 모조리 다 감옥에 집어넣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다.”
 “너···”
 “같은 직종 종사자들이 이렇게 많으니 내 영업에 방해가 되는 면이 적지 않았다구.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 명단을 너한테 넘겨서 내가 일하기 수월한 환경을 조성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직업 윤리상 도저히 할 짓이 아닌 것 같더라구, 안 그래?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곳에서 영업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인 널 돕기 위해서니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지.”
 “······.”
 “또 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셈도 되고 말야. 그러니 넌 이 명단으로 이 도적에다가 강도녀석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 해서 공을 세우라고. 그럼 나 하나 감시 못해서 딴 곳으로 이주시켰다고 널 문책을 하겠다는 소리는 누구도 하지 못할 거야!”
 악비천이 거기까지 말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마주겸은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친구한테 호의를 베푸는 방법이라니···
 그러나 악비천은 그런 마주겸의 경악을 자신의 호의에 대한 감격으로 해석했는지 씨익 미소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다고. 구태여 감사의 말 같은 건 안해도 괜찮아. 암 괜찮고 말고. 우리 사이에 공치사는 무슨 놈의 공치사냐. 자, 그럼 난 이제 그 소름끼치는 독사같은 아낙한테 들키기 전에 이만 떠나야겠네.”
 
 바로 그 순간 악비천의 등뒤에서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독사 같다는 거죠?”
 “······”
 악비천은 잠시 그 상태로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과 마주보고 선 마주겸을 향해 눈짓으로 물었다.
 자신은 차마 등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악비천이 눈으로 물은 것은 ‘지금 이 방에 들어선 여인이 날 쫓아온 그 독사냐?’라는 것이었지만 마주겸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악비천은 분명 자신에게 독사같은 여자랬는데 지금 자신들이 있는 방에 들어선 이 여인은 독사는커녕,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탄식이 절로 나오는 기막힌 미인이 아닌가?
 더군다나 뭇 사내들의 한숨을 자아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청순가련한 자태며 간드러진 말씨, 그 무엇을 보아도 과격하다거나 독하다거나, 인간성이 상당히 더러울 거라는 인상은 눈꼽만큼도 안풍기지 않는가?
 아마, 이 여자는 용모파기를 가지고 악비천을 쫓아다닌다는 그 독사가 아니라 이 근처에 새로 신장 개업한 유곽(遊廓)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녀(妓女)를 보내 자주 왕림해 주십사하고 인사라도 하러 왔나보다고 생각한 마주겸은 그녀를 향해 꾸벅 절을 한 다음에 악비천의 어깨를 툭쳤다.
 “손님이 오셨는데 등짝만 보이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그러자 악비천은 조심스런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문제의 인물을 확인했다.
 “!”
 그리고 객점에서 난리굿을 피우던 그 설문영이 자신을 쫓아왔음을 확인한 악비천은 처참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
 그러나 설문영은 악비천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고 마주겸은 완전히 대조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연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앉으라는 말도 안하실 건가요?”
 “이거 실례를 했군요. 자 여기 앉으시죠. 그리고 너도 앉아. 뉘신진 모르지만 손님이 오셨는데 집주인이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설문영이 생긋 미소지으며 말하자 마주겸은 의자를 내주었고 악비천은 여전히 처참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설문영과 마주 앉았다.
 마주겸이 용설차를 끓여서 탁자에 내놓자 마시는둥 마는둥 한 설문영은 이내 품에서 한 장의 용모파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소협께서는 바로 이 용모파기의 주인공이시죠?”
 “······”
 악비천은 변함없이 인상을 찡그린 채, 삐딱한 시선으로 슬며시 용모파기를 내려다 보았다.
 마주겸은 그제서야 이 여인이 악비천이 말한 바로 그 독사내지는 독부, 또는 마녀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긴장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아름답고 앳되고, 순진해 보일뿐더러 청순가련한 여인을 어째서 악비천이 독사 대하듯 하는지 여전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주겸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너는 독사다라고 말하는 것같은 눈빛을 설문영에게 던지며 악비천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이 용모파기가 누굴 그린 건지는 몰라도 나하고 조금은 닮았군요.”
 “어머 닮았다뇨, 무슨 말씀을. 이건 바로 소협의 얼굴이잖아요?”
 “흥, 내 얼굴이 왜 거기 그려져있단 말이요?”
 “그럼 소협께서는 지금 여기 그려진 것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
 설문영이 배시시 미소지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묻자 악비천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객점의 장한들도 설문영의 미소가 좀 더 부드러워짐과 동시에 어조가 낮아지면서 뜻하지 않은 날벼락을 맞았던 것이다.
 그것을 상기하는 순간 악비천의 마음속에 서늘한 한기(寒氣)가 스쳐갔다.
 “흠흠, 하긴 뭐 나같이 잘 생긴 놈은 누가 몰래 얼굴을 그려가지고 다닐 수도 있을 테지. 어쩌면 나를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래.”
 낯 간지로운 자화자찬이었으나 악비천으로선 그런 식으로라도 삐딱한 자신의 태도를 궤도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설문영도 배시시 미소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소협께서는 정말이지 미남이세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소협을 쉽게 찾았지 뭐예요.”
 “······”
 악비천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찾았느냐고 목구멍까지 말이 나오려 했다.
 십중팔구는 좋은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을리는 없고 좀도둑이라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되서 자신을 찾았을 테니, 이후의 사태전개가 심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좀도둑을 찾아올 사람이라면야 자신이나 친지의 물건을 털린 사람일, 아니면 돈이나 귀중품을 도난 당한 사람의 의뢰를 받은 해결사일게 아니겠는가?
 ‘젠장··· 자세히 보니 관에서 나온 인물 같지는 않은데, 개인적으로 찾아온 건가? 그렇다면 내가 훔친 걸 팔다리 하나 자르는 걸로 상쇄하자거나 열 배내지 스무 배로 금전적 보상을 하라면 어쩌지.’
 악비천이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을 하자 설문영은 그런 악비천의 내심을 안다는 듯 방긋 미소지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론 악 소협께선 손이 무척 빠르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손이 빠르다니 거 무슨 소리요?”
 “아이, 다 아시면서···”
 설문영은 한눈을 찡긋해 보이면서 코먹은 소리로 애교스레 말하는게 아닌가?
 마주겸은 그런 설문영의 귀여운 몸짓과 말 짓에 반쯤 넋을 잃고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아마 설문영이 그 애교의 농도를 좀 더 높이면 그 커다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지 않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악비천에게는 설문영의 그런 자태가 눈꼽만큼도 귀엽지 않았다.
 “젠장, 내가 객점에서 본 바로는 저런 몸짓과 말씨는 분명 저 여자가 헤까닥 돌아버리기 직전의 예비동작 내지는 신호였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설문영의 성격과 몸짓과 말투에서 파생되는 행동양식을 파악한 악비천은 그런 생각으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해서 그는 설문영이 좀 더 교태를 부리거나 애교스레 말을 하기 직전에, 어느 정도는 자진납세를 해서 그녀가 좀 더 사무적이거나 무뚝뚝한 어조로 자신을 상대하게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흐흠, 맞는 말씀이요. 나는 분명히 이 근방에서는 상당히 손이 빠른 자요. 적어도 이 일대의 내 동업자들 중 나의 솜씨를 능가할 자는 없으니까. 그리고 명성도 제법 날리고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이 인근지역에 한해서긴 하지만. 험험···”
 “그럼 그렇죠. 우리 아버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다니까.”
 “아버지? 소저의 아버님이 누구신대 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단 말요?”
 악비천은 어리둥절했다.
 정말이지 이 여자의 아비가 누군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인가?
 자신이 제법 솜씨 좋은 도둑이긴 했어도 이런 도심에서 떨어진 시골에서의 일일뿐일텐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자기 부친의 말을 듣고 자신을 찾아왔다니?
 악비천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자, 설문영은 잠시 사무적으로 돌아갔던 얼굴에 다시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년 전이었죠. 우리 아버지 만통문의 문주 일검관천(一劍貫天) 설능운(薛陵雲) 대협께서는 이곳을 거쳐가는 여행을 하시던 중이었죠.”
 “······”
 “아버님께선 중원 제일의 표국인 장안표국의 의뢰를 받아 열두개의 묘안석(猫眼石)과 황금 오백냥짜리 전표 백 여장을 운반하던 중이셨어요.”
 설문영이 쾌활하게 말을 이어갔으나 악비천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악비천의 옆에 앉아있던 마주겸도 극도로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쳤다.
 설문영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악비천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계속했다.
 “아버님은 이곳을 지나시던 중, 객잔에 투숙을 하시게 되었어요. 물론 몸에 지니신 보석과 돈이 워낙 거액이긴 했고, 아버님은 그것을 의뢰받은 곳으로 안전하게 전해줄 책임을 지니시긴 했죠. 그러나 아버님은 걱정을 하지 않으셨어요. 왜냐고요? 우리 아버님은 명호 일검관천에 걸맞게 검에 관한한 중원 삼대 고수의 반열에 드는 분이셨거든요. 그런 아버님을 누가 감히 투도(偸盜)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설문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꽃이 활짝 만개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미소를 입가에 담뿍 지어보였다.
 악비천은 공포에 질려 아예 호흡을 멈추었다.
 설문영이 헤까닥 맛이 가기 직전의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문영은 용설차를 한모금 들이키더니 악비천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아버님은 객잔에 투숙하신 그날, 몸에 지니고 계시던 묘안석과 황금 오백냥짜리 전표 백여장을 모두 도둑맞으셨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림의 초절정 고수, 검에 관한 검성(劍聖)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인 우리 아버님이 말예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죠. 우리 아버님 같은 분이 이런 시골구석에서 지니고 계신 것들을 모두 털리다니···”
 “······”
 “······”
 마주겸과 악비천이 창백한 얼굴로 돌부처 마냥 말이 없자, 설문영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결국 우리 아버님은 그 일로 무림에서 평판이 급전직하 추락해서 우리 만통문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버렸지 뭐예요. 황금 오백냥짜리 전표 백장이면 도합 황금 오만냥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엄청난 액수의 돈을 변상하려니 그 꼴이 된 거죠. 뭐 아직까지도 빚이 남아 있고 말예요.”
 “빚이 남아 있다뇨?”
 마주겸이 물었으나 설문영은 여전히 웃는 눈으로 악비천을 바로보며 말했다.
 “오백냥짜리 전표 백장이야 우리 만통문의 모든 재산을 털어 변상했지만 그 묘안석은 한 개만 해도 성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진 보석인데, 황제도 아닌 우리 아버님이 그걸 무슨 수로 변상하겠어요?”
 “호오, 그게 그렇게 진귀한 보석이었단 말이요?”
 마주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지극히 걱정스런 눈초리로 악비천을 힐끗 쳐다보았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년전 만통문주이자, 이 설문영이란 공포스런 아낙의 부친인 일검관천 설능운이 이곳을 지나갈 때 그의 보석과 금품을 털어간 인물은 악비천이었다.
 그러나 악비천은 툴툴거리면서 전표를 모조리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전표의 액수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황금 오백냥짜리 전표를 함부로 쓰다가는 재수 없게 추적을 당해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악비천은 어디까지나 좀도둑이었으니 그런 큰 액수의 돈을 감당할 정도의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악비천은 그 전표를 없애버리고 전표와 함께 있던 은자 스무냥만 챙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주겸이 언젠가 악비천을 찾아갔을 때, 그는 탁자 위에 이상한 구슬을 열 두개를 늘어놓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 거 참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겠네? 보석치고는 모양이 이상야릇하고, 장신구라기에는 좀 크고···,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없애버려야겠다. 장물은 당장 처분하지 못할 거면 그저 서둘러 없애서, 증거인멸을 하는 게 상책이니까.
 
 그리고 그 이후로 마주겸이 이곳 악비천의 처소에서 그 구슬들을 다시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구슬이 바로 설능운한테서 강탈한 묘안석이 틀림없었다.
 마주겸은 내심 기가 막혔다.
 ‘이거 정말 이 자식처럼 황당한 인간도 없을 거야. 묘안석 같은 엄청난 보석을 다 떨어진 짚신 버리듯 없애버리다니.’
 그 돈이라면 한 가족이 십대에 걸쳐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호의호식을 하고서도 남을 액수일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마주겸은 슬쩍 악비천의 눈치를 살폈다.
 “······”
 악비천 역시 마주겸과 비슷한 생각이 들었던지 착잡함과, 아쉬움, 자신의 무지로 놓친 그 막대한 액수의 돈에 대한 회한 같은 게 얼굴에 변화무쌍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자 설문영은 다시 방긋 웃으며 악비천에게 물었다.
 “자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네요. 우선 첫 번째, 우리 아버님이 오 년 전 이곳을 지날 당시 아버님의 금품을 강탈한 분은 바로 악 소협이시죠?”
 설문영의 물음에 악비천은 잠시 갈등을 일으켰다.
 ‘젠장, 이거 어쩐다? 내가 안 훔쳤다고 하면, 아예 나를 이 자리에서 포를 뜨겠다고 할 테고, 그렇다고 순순히 내가 훔쳤다고 시인하면 그 전표하고 묘안석 당장 안 내놓으면 회를 치겠다고 할텐데···’
 그러나 설문영은 그런 악비천에게 다시 미소를 점 더 화사하게 지어보이며 물었다.
 “악소협이 맞죠?”
 악비천은 점점 짙어지는 설문영의 미소에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바로 내가 오 년 전에 소저의 부친께서 지니고 계시던 금품을 실례 했었소이다. 생각이 떠오를 듯, 말 듯 하더니 곰곰 돌이켜보니 기억이 나는군 그래.”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자, 그럼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드릴께요. 자세히 듣고 기억을 착실하게 더듬어, 분명하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설문영이 방실방실 웃으며 갓난아기를 어르는 어머니 같은 자태로 말했다.
 악비천은 등골에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능한대로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소이다.”
 “정말이지 악 소협께선 친절한 분이세요.”
 ‘젠장, 친절한 거 좋아하네. 순순히 안 말했다가 무슨 꼴이 될려고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단 말야.’
 악비천은 내심 툴툴거렸으나 설문영은 자신의 심문아닌 심문을 계속했다.
 
 
 5장 당신이 문주예요!
 
 
 “자 그럼 두 번째 질문, 우리 아버님한테서 강탈했던 묘안석과 전표···”
 “잠깐!”
 악비천이 갑자기 말을 가로막자 설문영은 두 눈을 상큼하게 치켜떴다.
 입가엔 여전히 살벌한 미소를 지은 채로.
 “왜 말을 가로막는 거죠?”
 “분명히 말 해 둘게 있는데 난 소저 부친의 금품을 강탈한 적은 없소. 소저의 부친이 의식을 잃은 틈에 스리슬쩍 한 것이니 강제로 빼앗은 적은 절대로 없다 그 말씀이오. 그러니까 그 강탈이란 단어는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래.”
 “······.”
 “······.”
 잠시 방안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강탈한 게 아니라고? 짜식, 말은 잘한다.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가는 단칼에 맞아죽었을 테니 강탈 못하고, 정신이 나간 틈에 훔친 거겠지.’라고 마주겸은 생각했고, 설문영은 살짝 아미를 찌푸렸으나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 점에 관해서도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아버님은 자는 순간에도 긴장을 풀지 않는 분이세요. 하긴 그 정도의 절정고수는 누구나 다 그렇지만 말이죠. 그런데 무슨 수로 아버님의 품에서 금품을 훔쳐낼 수 있었죠?”
 설문영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악비천은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궁금하단 말씀이요?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정말 힘든 일이었소. 세상에, 난 댁의 부친이 그 정도의 고수인줄은 몰랐지만 겉으로도 살을 베일 것 같은 예기(銳氣)가 풍기는데, 정말이지 처음엔 감히 내 사냥감으로 삼을 엄두가 도저히 안 나더라고. 그 정도로 소저의 부친은 겉보기에도 대단한 분이셨소.”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을 털기로 결심을 했던 거죠?”
 “무척 겁나는 일이긴 했으나 소저의 부친은 어쩐지 돈 냄새가 풀풀 풍기더군 그래. 대개 평소에 돈과 별로 관계없는 사람이 거액의 금품을 지니고 다니면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게 마련이거든. 소저의 부친께서 바로 그랬었소. 나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노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계셨단 말이요. 그러니 도둑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내가 그 어찌 도둑으로서의 직업정신을 망각하고, 어려운 대상이라고 지레 포기해버리는 안이하고 나약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었겠소? 그건 말도 안되지. 암 말도 안되고 말고.”
 악비천이 옷깃까지 여며가며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말하자 마주겸과 설문영은 황당하다 못해 졸도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자신의 숭고하고도 뜨거운 직업정신에 대한 감탄이라고 생각한 악비천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소저의 부친으로부터 금품을 털리라 결심했소. 일단 처음 시도한 방법은 그 양반이 객점에서 식사를 할 때 점소이를 매수해서 음식에 몽혼(夢魂)약, 내지는 독분(毒粉)을 타는 거였소.”
 “독분까지 타려고 했단 말인가요?”
 설문영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악비천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 독분이라고는 해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는 못하는 거요. 고작해야 일주야 정도 비몽사몽(非夢似夢)을 헤메는 정도지. 어쨌거나 간에 그 시도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소. 도대체 어떻게 눈치를 채는지는 몰라도 부친께서는 냄새만 맡고서도 내가 약을 탄 음식은 뭔가 이상하다며 모조리 물리치시는 것이었소.”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셨나요?”
 “그래서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도둑으로서의 사명감과, 한 번 찍은 표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심히 상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고민 끝에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었소.”
 “어떤 방법이죠?”
 “으음, 그걸 다 말해주는 건 내 영업기밀을 누설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악비천은 짐짓 능청을 떨었으나 설문영의 살벌한 미소가 좀 더 짙어질 기미가 보이자 서둘러 말을 계속했다.
 “좌우지간 내가 무림 절정 고수인 소저의 부친을 정면으로 털 수는 없는 일이었소. 내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엔 말이오. 해서 기만전술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소.”
 “······”
 “하지만 절정고수인 소저의 부친께서도 거금을 몸에 지니고 계셔서 그런지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으니 여간해선 틈이 안 날 것이 틀림없어 보였소. 그래서 나는 그 양반이 긴장을 푸는 곳에 있을 때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던 거요.”
 “긴장을 푸는 곳이라니?”
 마주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악비천은 그는 본체도 하지 않고 설문영을 향해 말을 계속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소저는 사람이 어떤 장소에 있을 때 가장 긴장이 풀어진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설문영을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살짝 볼을 붉히더니 입을 다물었다.
 “?”
 마주겸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으나 악비천은 설문영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안다든 듯, 징그러운 미소를 씨익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람이 측간에서 볼일 볼 때 만큼 긴장이 풀릴 때가 어디 있겠소.”
 마주겸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너 설마 그 측간 속에서···”
 “암, 그 양반이 볼일 볼 때, 난 그 측간의 똥덩이 속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그 속에서 가지고 간 물과 음식으로 끼니까지 때워가면서 말이요. 뭐 당연히 챙겨간 음식에 똥과 오줌이 적지 않게 묻긴 했지만 그렇다고 굶을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
 마주겸과 설문영은 동시에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똥과 오줌 구덩이 속에 몸을 푹 담그고 식사를 하는 악비천을 상상하기만 해도 속이 메슥메슥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비천은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었다.
 “흠, 흠··· 사실 좀 지저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무릇 남자라면 그 정도의 직업의식과 투철한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오.”
 “존경스럽네요···”
 설문영이 소름끼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마주겸은 생각만 해도 똥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지 코까지 틀어막고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투철한 직업정신에 대한 존경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한 악비천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계속했다.
 “어쨌거나 측간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이틀째 되는 날, 드디어 소저의 부친께서는 볼일을 보러 오셨소. 그 양반 뜻밖으로 변을 보지 않으시더군 그래. 그분은 측간에 들어서자 우선 아랫도리를 내리고 주저앉아서 희멀건 궁둥이를···”
 “잠깐!”
 “?”
 악비천이 왜 말을 막느냐는 듯, 의아해하자 설문영은 한숨을 쉬었다.
 “자식된 입장에서 듣기가 좀 민망하네요. 그런 것까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어떻게 아버님을 제압하신 건가만 말씀하시면 돼요.”
 “흠. 하긴 그렇군. 뭐 나도 구태여 소저의 부친께서 아랫도리를 내리고 앉아서 희멀건 궁둥이에 있는대로 힘을 주니, 천둥이 울리는듯한 요란한 방귀소리와 함께 똥과 오줌이 내 머리 위로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더란 이야기를 다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그럼 그 이야긴 생략하기로 합시다.”
 “······.”
 “······.”
 생략하기로 하자고 하구선 정작 생생한 그때의 상황을 모두 들은 설문영은 다시 한번 더 몸을 부르르 떨며 악비천을 죽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했다.
 “어쨌거나 나는 소저 부친의 똥, 오줌을 마구 맞으면서도 미리 준비해 두었던 최면연(催眠煙)을 피어 올렸소. 그 최면연이 코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골아 떨어지고 말거든. 사실 최면연을 다른 장소에서 피웠다면 난 금방 소저의 부친한테 발각되었을 거요. 그러나 좀 전에도 말한 것처럼 측간에서 볼일 볼 때만큼 사람의 긴장이 풀어질 때는 없는 법이지. 그 누가 설마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자신의 똥오줌이 마구 떨어지는 측간 밑바닥에 몸을 담그고 있다고 생각하겠냔 말이요, 안 그렇소? 더군다나 똥오줌 냄새 때문에 최면연의 독특한 냄새가 묻혀졌으니 소저의 부친께선 더더군다나 눈치를 못채셨다오. 내가 일하기엔 더 할 나위 없이 유리했지. 크하하하핫!”
 악비천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통쾌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그러나 별로 위생적이지 못한 이야기를 듣느라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던 설문연은 다시 한번 혐오의 빛을 지어 보였다.
 “말씀을 계속해 보세요. 가급적 똥, 오줌 이야기는 제외하시고 말예요.”
 “그렇게 합시다. 그럼 소저의 부친께서 최면연의 냄새를 맡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측간 밑의 똥, 오줌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단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
 “그래서 난 우선 소저의 부친을 그 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 정말이지 내 꼴도 엉망이었지만 의식을 잃은 채, 그 안에 떨어져 온몸이 똥, 오줌 투성이가 된 소저 부친의 모습도 아주 가관이었소. 크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재미가 깨소금처럼 넘친다는 듯, 폭소를 터뜨리던 악비천은 설문영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신을 째려보자 웃음을 거두었다.
 “흠흠··· 물론 자식 입장에서는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은 이해가 갑니다. 좌우간 난 우선 그분의 품속을 뒤졌소. 묘안석인지 뭔지 그 때는 몰랐지만, 기묘하게 생긴 검은 색의 구슬이 열두 개가 있었소. 그리고 무슨 종이쪽지 같은 것을 수북히 갖고 계시더군. 좀 전에 소저의 말을 듣고 생각한 건데 그게 바로 오백냥짜리 전표 다발들이 아니었나 싶소.”
 “바로 그거예요. 소협께서는 그 묘안석과 전표 다발을 어떻게 하셨죠?”
 설문영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기대에 찬 눈으로 악비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악비천은 지금까지의 의기양양한 태도가 사라지고 쭈빗거렸다.
 “그게···”
 “지금까지 가지고 계신가요?”
 “사실은 그때 그 종이쪽지들은 똥오줌이 가득 묻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었소. 그게 전푠지 무슨 술집 영수증인지 전혀 분간이 안가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 속에다가 버려버렸소.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 액수의 전표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
 설문영은 악비천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더니 호흡을 골랐다.
 분명히, 하도 기가 막혀서 심장이 멎을려고 하는 것을 초인적인 인내력을 동원해서 참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긴 황금 오백냥짜리 전표 백장, 도합 오만냥이나 되는 황금이 날아가버린 셈인데, 졸도하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전표란 것은 종이로 된 것이니 분뇨 속에서 썩지 않고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 아닌가?
 하물며 세월이 5 년이나 지났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황금 오만냥이 너무도 허무하게 분뇨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생각하면 팔딱 뛰고 돌아버릴 일이었으나 이미 오 년 전에 벌어졌던 일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묘안석은 설마 분뇨속이라도 썩을 일은 없으니까 설문영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악비천에게 물었다.
 “그럼 전표는 그렇다치고 묘안석도 그 속에다가 버리신 건가요?”
 “그게···”
 악비천이 계속 쭈빗거리자 설문영의 마음 한구석에 스멀스멀 불안이 솟구쳐 올랐다.
 “어떻게 한 거죠?”
 “전표는 버렸고 부친의 품에서 나온 은화 스무냥은 챙겼소. 그런데 그 묘안석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잠시 망설였소. 얼핏 봐서 여자들 장신구처럼 보이기도 해서 내가 자주 다니는 유곽의 기녀에게 주려고 가지고 나왔더랬소.”
 “그래서 그 기녀에게 주신 건가요? 그렇다면 아직도 그 묘안석은 그 기녀가 가지고 있겠군요.”
 “주기는 주었는데 그만 똥오줌 묻은 것을 깨끗이 닦고 주는걸 잊었지 뭐요. 뭔지는 몰라도 똥 냄새나는 더러운 걸 어디다 들이미냐고 욕만 잔뜩 하길래 홧김에 물가에 가서 냅다 던져버렸소. 아마 지금쯤 어느 물고기 위장 속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거요.”
 “······”
 “······”
 악비천이 말을 마치자 설문영은 돌부처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았다.
 황금 오만냥짜리 전표는 물론, 무려 열두 개나 되는 묘안석도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셈이 아닌가?
 자신이 그 막대한 돈과 보석을 회수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자신은 그 돈과 보석을 되찾으면, 그것으로 무너진 만통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 그 영광을 온 무림에 빛나게 하려고 부푼 기대를 가졌었건만.
 꼭 감은 설문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마주겸은 그런 설문영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악비천은 엄청난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젠장, 아무래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겠구나.’
 무려 삼다경을 그렇게 두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리던 설문영은 이윽고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겸이 내주는 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다음, 악비천의 예상과는 달리 뜻밖의 말을 했다.
 “하긴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니 이렇게 울 일이 아닐지도 모르죠.”
 “······”
 “이미 드린 말씀이지만 소협께서 아버님이 운반하시던 그 금품을 모두 터는 바람에 우리 만통문은 문주이신 아버님이 빚에 허덕이다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문도들도 모두 떠나버렸어요. 일문파로서의 명맥이 끊어진 거나 다를 바가 없죠.”
 “으음, 나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그런 일까지 야기할 줄이야 정말 몰랐군. 정말 뭐라고 사과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뭐, 의도하신 바가 아닐 테니 큰 상관은 없어요. 사실 소협을 찾아서 만약 그 돈과 보석을 아직까지 가지고 계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아서 우리 만통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
 “이미 소협께서 그 돈과 보석을 깨끗이 없애버리셨으니 별 수 없군요. 단념할 수밖에···”
 설문영의 말에 악비천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단념하겠다니, 그렇다면 그 물건들을 훔친 자신의 도둑질도 깨끗이 잊고 자신을 용서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악비천은 설문영이 자신이 애초에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독부가 아니라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악비천이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급격하게 바꾸려 하는 줄을 모르는 채, 설문영은 다시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과 보석은 깨끗이 잊어버리겠지만, 그 대신 아버님의 유언(遺言)은 반드시 이행해야겠네요.”
 “유언? 아니 소저의 아버님께서 뭐라고 유언을 남기셨는데?”
 악비천의 마음 속에서는 다 꺼져가던 불안이란 이름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는 이런 유언을 남기셨어요.”
 설문영은 그들에게 자신의 아버지 만통문주, 일검관천 설능운이 남긴 유언을 들려주었다.
 
 ***
 
 “문영아, 이 아비는 이대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하도록 해라.”
 “아버님···”
 만통문주 일검관천 설능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 무남독녀 설문영에게 유언을 했다.
 자신이 악비천에게 도둑맞은 그 막대한 액수의 금품 때문에 이미 만통문은 모든 문도들이 떠나가고 남은 거라고 유일한 혈육인 설문영뿐이었던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나와 우리 만통문을 이꼴로 만든 그 도적놈, 내가 의뢰를 받고 운송하던 전표와 묘안석을 훔쳐간, 그리고 날 똥통에 빠뜨려서 개망신을 시킨 그 잔학무도하고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잔인한 그 도적놈을 찾아내서 단단히 손을 봐주고 금품을 모두 되찾아 우리 만통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거라.”
 다 죽어가는 이 마당에서 생각해도, 똥통에 빠져서 온통 똥과 오줌을 뒤집어쓴 처참한 몰골로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개망신을 당한 그때 일을 생각하니 이가 갈리던지, 설능운은 잔학무도란 단어에 특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흑흑, 아버님 걱정 마세요. 제가 평생 시집 못 가고 처녀귀신으로 늙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못된 도적놈을 잡아 절단을 내고 말겠어요. 그리고 아버님께서 잃어버린 금품도 모두 되찾아 기필코 우리 만통문을 보란 듯이 일으켜 세우겠어요.”
 설문영이 눈물까지 흘리며 비장한 태도로 말하자 설능운은 다소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지 말만 들어도 믿음직하구나. 그러나 문영아···”
 “네?”
 “만약, 만약에 말이다. 그 금품을 되찾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금품을 되찾지 못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그 도적놈이 그 돈을 모두 썼거나 어쩌면 잃어버렸거나 했을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혹시 또 아느냐? 그 도적놈은 도둑을 맞지 않는다는 법도 없지 않으냐. 이래저래 그 돈이 그놈 수중에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