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김정겸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반질반질한 머리는 땀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일개 PD한테 고개를 숙이시다니. 어서 일어나세요.”
김정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킨 PD는 딱 보기에도 이제 갓 30대 후반에 접어든 젊은 PD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겸은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노동호 PD.’
PD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PD 생활을 시작해 불과 10년 만에 PD계의 신화가 된 남자.
더 대단한 것은 그 신화가 신화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란 점이었다.
“저한테 고개를 숙이시지 말고, 사장님께서 자르신 FD한테 가셔서 고개를 숙이셔야지요.”
김정겸의 두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하지만 동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차갑기까지 했다.
“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비정규직 FD 하나를 회사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해고했기로서니······.”
대단한 이슈로 인해 이곳에 온 것이면 모른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국의 사장인 김정겸 사장이 이곳까지 와 PD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는 고작 FD 하나를 해고했기 때문이었다.
촬영 중에 사고를 당해 입원한 FD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뽑고 그 FD를 해고했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고용과 해고가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김정겸이 사장으로 있는 방송국에 끼친 여파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직도 배가 부르신 모양이네요.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걸 보면.”
동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동시에 동호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BSK 드라마, 교양, 예능 PD, 외주업체, 작가 다 올스탑 시켜.”
“예.”
동호의 가장 친한 동생이라는 상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김정겸 사장의 얼굴이 새카맣게 죽었다.
“그리고 나, SBC랑 BCM 새로운 방송 들어간다. 기획안 들어온 것 중에 내가 골라 놓은 걸로. 스케줄 잡아.”
“네!”
상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동호가 PD로 방송 프로그램을 맡으면 그 프로그램은 무조건 그 날의 시청률의 절반을 넘게 잡아먹는다. 동호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일개 PD가 한 방송국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에 예전 같으면 웃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방송을 만드는 제작 인원들이 동호의 한마디면 모두 두 손을 놨다. 그러면 그 방송은 당장 그날부터 난리가 난다.
그리고 그것은 시청률 폭락과 이익으로 이어지고, 광고가 빠져나가며 사장 자리에 위태해진다. 회사의 운영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 사과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동호의 한마디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김정겸 사장은 부당하게 해고당한 FD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고 사과문을 내며 고용 보장을 해주겠다는 것을 수차례 넘게 동호에게 말한 뒤에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크히히히. 꼴 좋다.”
“30대 후반인 놈이 웃음소리가 그게 뭐야.”
상민이 씩 웃으면서 동호에게 말했다. 동호는 픽 웃었다. 상민은 이 웃음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형 방송국 사장들이 담합해서 보이콧하면 어쩌려고?”
동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송 다 펑크 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그래. 개 같은 사람을 부려먹으면 그만큼의 대우는 해줘야지.”
“하긴. FD들이 좀 고생하는 건 아니지.”
방송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처럼 부려먹는 게 FD들이다. 도제 형식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정작 그들 중 PD가 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형. TBC 랑 NBC에서도 기획안 보내왔는데. 어째?”
“일단 보고 결정하지 뭐.”
TBC랑 NBC라면 대한민국 지상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 최대의 방송사다. 그런 곳의 기획안이 쓰레기처럼 동호의 수많은 기획안 중 일부로 책상 위에 놓였다.
전설의 피디 노동호 그의 먼 훗날 모습이다.
***
“자, 위하여!!”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가 반쯤 까진 개피디의 선창에 회식에 참여한 스태프들이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뭐가 그리 기분 좋은 것인지 벌겋게 술이 오른 개피디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하하호호거리며 웃었다.
“크으······.”
동호는 쓰게만 느껴지는 소주잔을 탕하고 내려놓으면서 입가를 훔쳤다. 오늘따라 소주가 너무나도 썼다. 마치 식도를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뜨끈한 기운이 쑥하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뜨거운 소주도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개피디의 얼굴만 봐도 그냥 상사고 뭐고 소주잔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후우······.”
동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정규직 조연출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 악마의 유혹처럼 이번에는 꼭 정규직 조연출이 될 수 있게 해준다며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했던 개피디에게 아이디어를 헌납한 것이.
실력도 없는 놈이 학벌과 연줄로 버티고 있으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가 국장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면서 좋아하는 개피디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개새끼······.”
동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나도 작은 나머지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게 딱 동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속이 열불이 나도 말할 수 없고, 옳지 않은 것을 봐도 장님이라 생각해야 되며 이상한 걸 들어도 귀머거리다라며 되뇌일 수밖에 없는.
계약직 조연출.
성골과 진골인 방송국 정규직 조연출이 아닌 계약직으로 일하는 조연출.
게다가 인서울을 나왔으면 육두품이라도 됐을 테지만 동호는 고아였기에 장학금을 주는 지잡대로 대학을 갔다 왔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거의 불가촉 천민급.
여러 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동호가 가장 참기 힘든 건 바로 이런 도둑질이었다.
“야, 노똥!”
비틀거리며 개피디가 옆에 와 동호의 어깨에 척하고 손을 얹었다. 동호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겉으로 웃었다.
“예, 피디님.”
이게 현실이고 사회였다.
자신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아이디어가 좋아도 지잡대 출신의 계약직이었고, 개피디는 능력 하나 없고 아이디어도 없어도 인서울 출신의 정규직이었다.
“얌마, 걱정마. 다음에는 꼭 정규직 될 수 있게 해줄게. 그때도··· 알지?”
벌써 세 번째였다. 성질 같아서는 일어나 소주를 머리 위에 부어버리고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동호는 꾹 참았다.
동호는 꼭 피디가 되야 했다.
그래야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호는 차라리 직장에 들어가면 먹고 살기 쉬웠을 길을 굳이 이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예.”
동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겁게 대답했다. 소주잔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동호의 손끝은 하얘져 있었다.
“이번에야 네가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고··· 정규직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개피디가 능글맞게 웃으며 동호의 어깨를 팡팡쳤다.
정규직.
이 얼마나 멀고도 높은 이름이란 말인가.
계약직과 정규직의 차이는 단순히 받는 봉급에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체감으로 느끼면 거의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이었다.
“좋은 아이디어 팍팍 내란 말이야. 그럼 내가 씨피님한테 잘 말씀드릴게.”
개피디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자 두툼한 가슴살이 혐오스럽게 출렁였다.
“아직 부족해. 알지? BSK에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개피디가 동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하지만 동호는 계약직 3년 차였고 이렇게 아이디어를 개피디에게 빼앗긴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게다가 오늘은 정규직 전환 면접이 있는 날이었는데 FD로 들어와 있던 새파랗게 어린놈이 국장과 연줄이 있다고 면접장에서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걸어 나오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개피디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었다. 동호가 넘긴 아이디어를 받을 때는 간이라도 내어줄 것 같이 굴던 개피디다. 이번 면접만 바라보면서 죽자고 청춘을 바친 대가가 바로 탈락이었다. 면접장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만히 있는 것.
누구는 국장과 연줄이 있어서 면접장을 제집마냥 편하게 들락날락 하는데, 자신은 죽어라 일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바쳐 봤지만 결국 계약직이다.
정말 개 같은 사회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어?”
“네, 알겠습니다. 피디님.”
하지만 그래도 동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분을 삭히며 고개를 숙이는 일밖에 없었다. 동호의 스펙으로는 정규직 공채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렇게 계약직으로 비비면서 정규직 전환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과연 그때까지 얼마나 저 개새끼한테 아이디어를 바쳐야 할까.’
동호는 단연 발군이었던 자신의 아이디어도 스펙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쳐 번번이 고꾸라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노 조연출.”
그렇게 회식 자리가 두 시간여 지속되고, 개피디가 얼큰하게 취해 인사불성이 되자 자리가 파할 시간이 됐다.
작가 중 한 명이 동호에게 비틀거리는 개피디를 짐짝 건네주듯이 떠넘기고는 말했다.
“이 피디님 잘 모셔다드려. 알았지?”
“예? 하지만 전 댁이 어딘지도······.”
매일같이 동호는 1차만 하고 눈칫밥에 쫓겨 나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피디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 리 없었다. 지잡대와 같이 술도 마실 수 없다며 동호를 번번이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들이나 스태프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피디를 데리고 가는 것이 그들에게도 부담이었는데 오늘은 개피디가 빨리 취한 나머지 동호가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피디님이랑 좀 친해져봐 이 기회에. 알았지?”
같은 계약직인 작가가 하는 말에 동호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3년차 계약직 AD는 메인작가급 앞에서도 을 중에 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호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눌렀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감정이 쉽게 격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지난 3년간 동호가 방송계에 있으면서 배운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집에 가야 하나.”
동호는 낑낑거리며 개피디를 부축해 자신의 옥탑방으로 향했다. 없는 살림에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기에 옥탑방은 볼품없었다.
그렇게 헉헉대며 개피디를 방에 눕힌 동호는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씻기 위해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나왔지만 보일러를 틀 수 있는 시간은 저녁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고 몸을 닦았다.
“후우······.”
차가운 물로 몸을 씻자 꿈틀거리던 분노와 술기운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동호는 문을 열고 나왔는데 술에서 깬 것인지 일어난 개피디를 보고는 흠칫 놀랬다. 개피디가 일어나 스탠드 하나를 켜놓고 동호가 책상 위에 깜박 잊고 올려놓은 기획안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피··· 피디님! 이건 안 됩니다.”
동호가 개피디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러자 개피디가 게슴츠레 한 눈으로 동호를 쳐다봤다.
“내놔. 임마.”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야 이 새꺄.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후배꺼 한번 보겠다는데. 어?”
개피디가 동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동호는 매몰차게 그런 개피디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술을 취한 개피디였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개피디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어쭈? 날 쳐?”
“친 게 아니라······.”
동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개피디는 동호의 변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야. 그딴 쓰레기 같은 거. 보라고 해도 안 봐 임마. 그래도 미운 정이라고 대학도 허접한데 나왔으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불쌍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이 자식이 말이야······.”
저러면서 동호와 계약직 조연출에게 갈취해간 아이디어가 한 트럭이었다. 동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충 봤는데 그거. 정말 쓰레기다. 나니까 이렇게 말해 주는 거야 임마.”
개피디가 동호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피디한테 보여주면 욕먹어. 알아? 그딴 거 잘못 보여주면 너 바로 모가지야 임마.”
동호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이 기획안은 동호가 쓴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함께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었다.
동호가 어린 시절, 결혼 전까지 방송 피디가 꿈이어서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한 엄마와 함께 만들었던 기획안이었다.
동호의 아이디어로, 거기에 엄마가 살을 붙여서 만든 그 프로그램.
생활고로 인해 동호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호의 엄마는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아무것도 없는 병원 안에서 항생제를 맞으며 병마와 싸우던 엄마의 유일한 낙이 바로 방송이었다.
동호는 엄마가 맨날 들여다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옆에서 앉아 함께 봤고, 맨날 아파하던 엄마가 유일하게 웃음을 지을 때가 텔레비전이란 것을 알고는 결심했었다.
엄마를 위한 방송을 만들겠다고.
어린 아이의 치기였지만 엄마는 함께 어울려 줄 수 없는 아들에게 방송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옆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온 것이 바로 저 기획안이었다.
엄마의 손 글씨와 엄마의 정성이 녹아 있는 바로 그 낡은 기획안.
그런데 저 개피디는 동호의 엄마의 정성이 녹아 있는 그 기획안을 쓰레기라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하십쇼. 이 피디님. 취하셨습니다.”
동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술에 취한 개피디는 전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 새끼가 말이야. 어디서 하늘같은 상사가 말하는데 말대꾸야. 어? 너, 기분 나빠? 기분 나쁘냐고!”
개피디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동호의 이마를 밀었다. 동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딴 종이 뭉치는 찢어버려 이 새끼야!”
탁!
개피디가 동호의 손에서 기획안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찢으려고 하자 동호가 개피디를 밀쳤다.
“윽!”
우당탕탕!
문 쪽에 서 있던 개피디가 바깥으로 벌렁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지금 나 쳤어? 어? 이 새끼야!!!”
동호는 바닥에 떨어진 기획안을 주워들었다. 그런 동호의 멱살을 개피디가 달려들어 붙잡았고 동호와 개피디가 한 덩어리가 되어 옥상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너 해고야 이 새끼야! 내일 출근하지 마!”
개피디의 폭언에 동호의 눈에 번쩍하고 번갯불이 튀었다. 동호는 몸을 재빨리 돌려 일으키며 개피디를 깔고 위에 앉아 주먹을 치켜들었다.
한 손에는 기획안이 들려 있었고 동호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한 방 먹이고 정말 그만둘 생각으로.
하지만 버둥대는 개피디의 얼굴과 기획안을 보니 주먹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도저히 칠 수 없었다.
엄마의 앞에서 호기롭게 외쳤던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이었는데.
여기까지, 3년 동안 어떤 수모를 겪으면서 버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개피디가 술에 취했으니 대충 재워서 내일 멀쩡히 보내면 오늘 일을 기억을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동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순간, 어디서 힘이 솟은 것인지 동호의 밑에 깔려 있던 개피디가 배를 크게 튕겼다. 그러자 힘을 빼고 있던 동호의 몸이 휘청거렸다.
“저리 꺼져 이 새끼야!”
개피디가 손으로 허우적대다가 동호의 얼굴을 확하고 밀었다. 그러자 동호가 크게 균형을 잃으면서 비틀거렸다.
턱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비틀거리던 동호의 발이 개피디의 두툼한 허벅다리에 걸렸고, 동호의 몸이 그대로 옥상의 난간을 넘어갔다.
옥탑방 자체가 불법으로 만들어져 있던 곳이기 때문에 옥상의 난간도 간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동호는 자신의 귓가를 스치며 멀어지는 옥상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
죽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떨어질 줄 알았으면 그래서 죽일지도 모른다면 개피디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먹여주지 못한 것이 억울해진 것이다.
꾸욱
동호는 떨어지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한 손에 들린 기획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쿵!
***
동호는 스포트라이트가 환하게 비추고 있는 무대 위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얹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는 동호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호가 뒤를 쳐다보자 대한민국 연예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동호를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동호는 자신에게 향한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모습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전파를 탄다는 것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카메라 뒤에만 있어봤지 본격적으로 앞에 나선 적은 없었다.
동호는 따갑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까만 무대 위로 한 발자국 씩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따라 움직였고 도처에 자리 잡은 카메라들이 전부 동호만을 위해 움직였다.
‘풀. 바디. 클로즈.’
동호는 습관적으로 카메라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동호가 바닥 시절부터 이 업계에 구르며 남들보다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달달 외워야만 했던 것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과실을 맺어 결과물만을 눈앞에 놓고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한국PD대상 올해의 작품상에 이어 두 번째로 받는 영예로운 상이었다.
항상 카메라 뒤에만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기에 더욱 뜻깊은 상이고, 드라마와 교양을 제외하면 예능PD로서는 거의 처음 수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명예로운 상이다.
동호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오르며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생부터 시작해 분노와 슬픔, 기쁨과 즐거움까지.
동호를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호는 천천히 자신에게 가까워져오는 마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샥
“···어?”
동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서 허무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마치 발이 달린 듯 동호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거 왜 이래?”
동호가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마이크는 마치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동호의 손길을 재차 피했다.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동호는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마이크 잡는 것을 포기하고 뒷짐을 졌다.
그냥 말해도 마이크를 통해 오디오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호가 뒷짐을 진 순간 마이크 스탠드가 강풍에 휘말린 듯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하늘 높이 사라졌다. 동호가 멍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깔깔깔깔~
으하하하~
그런 동호를 보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가만히 MC를 보던 대한민국 최고의 진행자가 큐시트를 찢어버리고 동호에게 크게 소리쳤다.
“자,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으하하하!”
낄낄낄낄~
으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동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탁하고 떨궜다.
“시바. 아 시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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