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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야만사냥꾼이 되었다

나는 트럭이 싫다.

2021.06.30 조회 65,529 추천 1,186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세계에 와있더라.
 
 라는 식상한 내용의 판타지 소설을 자주 읽은 덕분에 윤이삭은 현재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 와버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트럭을 얼핏 보았으니 확실할 것이다. 트럭 하면 이세계, 그야말로 약속된 전개 아닌가.
 
 그런데 그 약속이 통용되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어쩌란 거지?’
 
 커다란 도마뱀이 끄는 마차와 은빛 갑주를 걸친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그 변두리에 홀로 선 윤이삭은 괜히 턱을 긁적였다.
 
 보통 여기서 뭔가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내가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는 요정이 말을 걸어오거나,
 눈앞에 게임 시스템 화면이 나타나거나,
 어디선가 선량한 조력자가 등장하여 도움을 준다거나··· 등등.
 
 그런데 어째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ӤҦ&@#Ҩ!”
 
 ······심지어는 말도 안 통한다.
 
 ‘도대체 어디 나라말이야? 러시아 방언인가?’
 
 국경만 넘어가도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법이니 이쪽 세계의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보통 이 정도는 융통성 있게 넘어가지 않나?
 
 잠시 동안 인류 공통의 언어인 보디랭귀지를 시도해볼까 고심했으나, 이미 충분히 머저리처럼 보이는 것 같으니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으리라.
 
 일단은 길을 나섰다.
 
 방향 따윈 관심도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겨갔다.
 
 목적지가 없는 관계로 생산성 낮은 활동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달리할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윤이삭은 무가치하게 칼로리를 낭비하였고.
 
 -꼬르륵.
 
 오래 지나지 않아 당장 먹을 음식이 없다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삼일을 내리 굶었다.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윤이삭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위병들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후 깜빵에 갇혔다.
 
 ‘그래도 먹고 잘 곳은 생겼으니 차라리 잘 됐지.’
 
 다시 삼일 뒤, 밧줄에 묶인 윤이삭은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로 보내졌다.
 감옥 시설이 그런대로 괜찮았기에 약간 아쉬웠지만 그래도 출소한 게 어디냐.
 
 ‘실업 청년을 위한 일자리 고용 복지센터 비슷한 곳으로 가게 되려나?’
 
 그런 윤이삭의 바람대로 새 직업이 주어졌다.
 
 아쉽게도 사무직은 아니었고, 복지가 아주 좋은 축에 속하는 직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쓰는 현장직이라 몇 개의 단어만 알면 일하는 데에 큰 지장이 없었고, 의식주는 기본 제공되어 당분간 먹고 살 걱정을 덜었다.
 
 “죽여! 죽여버려!”
 “피! 피! 피!”
 
 위 두 단어는 값진 직장 생활을 통해 성취한 어휘들이다.
 수많은 관중들이 하루 종일 저 말만 외쳐대니 그 뜻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인생 시벌··· 장발장이냐?”
 
 윤이삭은 투기장의 노예 검투사로 5년을 살았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이 있듯 인간 백정 노릇에 통달한 덕분에 윤이삭은 자기 한 몸을 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쪽 세계의 언어에 능통해져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삶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여신께서 신성한 원정을 명하셨으니, 모든 검투사들은 이 영광스러운 여정에 동참할지어다!”
 
 성지 탈환이라는 별 같잖은 명목으로 전쟁이 난 덕분에 윤이삭은 병사로 차출되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처음에는 조금 빡이 쳤지만 그래도 전쟁이 끝나면 노예에서 해방시켜준다고 하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에 치여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전 군생활을 해보기도 했고, 평상시에도 인간 백정 노릇을 하고 있으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 않을까?
 
 그런 윤이삭의 바램과 달리 전장에서의 삶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
 하늘 가득 빗발치는 화살, 걸핏하면 끊어지는 보급, 낙후된 의료 관념으로 인해 번져가는 전염병까지.
 
 그래도 곧 전쟁이 끝나리란 지휘관의 말만 믿고 윤이삭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그것도 24년이나.
 
  “째! 씨벌, 그냥 째라고!”
 
 욕지거리와 함께 부상당한 다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후퇴하던 중.
 적측 투석기에서 쏘아진 바윗돌 하나가 윤이삭을 중심으로 음침한 그늘을 드리웠고.
 
 ‘···결국 이렇게 끝났군.’
 
 죽음을 직감한 윤이삭은 두 눈을 감았다.
 
 꽝!
 
 윤이삭.
 그의 나이 향년 52세였다.

댓글(62)

양마루    
건필
2021.07.18 20:02
청늪    
꿈도 희망도 없는..
2021.07.25 14:30
일생동안    
헐~
2021.07.26 05:22
글로르핀델    
더 유명해지기 전에 와드.
2021.07.26 21:50
[탈퇴계정]    
오오.... 작가님 좋은 글 기대합니다...
2021.07.27 09:43
고냥이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네 너무 불쌍하자너 그흔한 이계 클라세인 갓태창도 없고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백작가 아들로 태어나야되는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1.07.27 09:56
사인코사인    
눈뜨자마자 상태창부터 외쳤어야지
2021.07.27 17:55
옳은말    
의료관념이라는 단어는 이상함.
2021.07.27 18:11
qaz1    
비밀글입니다.
2021.07.28 17:45
만두감금마    
오..
2021.07.28 20:03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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